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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원보다 한반도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2017년 11월 15일 00시 06분  조회:4892  추천:0  작성자: 죽림

호머 헐버트

국보 경천사십층석탑을 지켜낸 한글학자Homer B. Hulbert
 
 
출생 1863년 01월 26일
사망 1949년 08월 05일
 

웨스트민스터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

1907년 일본 궁내부대신인 다나카는 황태자 순종 결혼식에 축하사절로 참석했다가 개성에 있는 경천사십층석탑을 일본군 85명을 보내 뜯어서 일본으로 가져가버렸습니다. 이를 안 한국의 문명화와 국권수호를 위해 온몸을 불사른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1) 박사는 즉시 현장을 답사한 뒤 《재팬 크로니클》과 《뉴욕포스트》에 기고하고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고 있는 헤이그에서도 이 사실을 폭로했지요. 이런 헐버트의 노력으로 국보 86호 경천사석탑을 되돌려 받을 수 있었습니다.

육영공원 재직 당시 교사 헐버트(맨 왼쪽)와 학생들
육영공원 재직 당시 교사 헐버트(맨 왼쪽)와 학생들

헐버트는 《사민필지》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교과서를 펴내면서 한글애용을 적극 주장한 한글학자기도 했지요. "나는 웨스트민스터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고 평소 소원한 대로 그는 서울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는 해마다 8월 5일 양화진묘지에서 헐버트 박사 추모식을 열고 있는데 2009년 8월 5일은 60주기를 맞이하는 해였습니다.

헐버트 박사는 1886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 교사로 한국에 온 이래 《독립신문》 창간에 이바지했고 1907년 고종 황제에게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파견을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이 일로 1910년 이 땅에서 추방되었지만,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3·1운동을 지지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쳤지요. 할아버지의 60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헐버트 박사의 손자인 브루스 헐버트 씨 부부는 "열 살 때까지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 할아버지는 한국의 아리랑과 전래동화를 손자 손녀들에게 매일 들려주셨는데, 일본 이야기가 나오면 매우 격해지셨다"고 전했습니다. 이국땅에서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하다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잠든 푸른 눈의 한국인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한국사랑에 대한 작은 보답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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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머 헐버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호머 헐버트

 
출생 1863년 1월 26일
미국의 기 미국 버몬트 주 뉴헤이븐
사망 1949년 8월 5일 (86세)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청량리 위생병원
사인 노환
국적 미국의 기 미국
학력 다트머스 대학교
직업 감리교 선교사, 교육자, 항일운동가
종교 감리교
배우자 메이 헐버트
자녀 3남 2녀
웹사이트 헐버트 박사 기념사업회)

호머 베잘렐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년 1월 26일 ~ 1949년 8월 5일)는 미국의 감리교회 선교사이자, 육영공원에 교사로 근무하여 영어를 가르쳤던 교육인으로 한국의 항일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의 한국어 이름은 헐벗 또는 흘법(訖法), 할보(轄甫)였다.

그는 고종 황제의 최측근 보필 역할 및 자문 역할을 하여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해왔다. 고종 황제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은 외국인이었고, 한국의 분리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하였으며, 1907년 헤이그 비밀밀사에 적극 지원하여 밀사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을 지지했다. 그는 영어뿐만 아니라 한국어도 매우 유창하게 하였으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대한제국 시대에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어니스트 배델(영국 출신)과 더불어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1위로 꼽히기도 했다. [출처 필요]

 

 

생애[편집]

초년기[편집]

헐버트는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 주 뉴헤이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미들베리대학의 총장이었던 칼빈 헐버트 목사였으며 어머니는 다트머스 대학의 창립자 엘리저 윌록의 외증손녀인 매리 우드워드다. 1884년다트머스 대학을 졸업하고, 그 해에 유니언 신학교에 들어가서 2년간 수학하였다.

육영공원에서의 교직생활[편집]

1886년(조선 고종 23년)에 길모어, 벙커등과 함께 조선에서 육영공원에 교사를 파견해달라는 요청으로 조선에 들어와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교사직으로 영어를 가르쳤다. 그는 자비로 한글 개인교사를 고용하여 한글을 배워 3년만에 한글로 책을 저술할 정도의 실력을 갖게 되었다. 그는 육영공원에서 근무하면서 제중원 학당에서도 학생을 가르쳤는데, 1888년 3월경부터 하루 2시간씩 제중원 학당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다. 1888년 9월 미국에 일시귀국하여 메이 한나와 결혼하여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다.

 
육영공원의 교사였던 호머 헐버트가 집필한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

1891년 최초의 순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저술해 육영공원 교재로 사용하였다. 육영공원에서 교직으로 근무했을때 헐버트는 외국 서적의 번역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 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 저술했다. 1896년에는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아리랑을 처음으로 채보하였다. 그러던 중, 조선 정부에서 재정상의 이유로 육영공원을 축소 운영하게되자, 헐버트는 1891년에 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헐버트는 1891년 여름 당나귀를 타고 아펜젤러모펫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여 평양 근교의 석탄 광산의 실태를 파악하였다. 아펜젤러와 모펫은 선교 정보를 얻기 위하여 동행하였다.

선교사로 재입국[편집]

1893년에 헐버트는 미국 감리교회의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는 감리교 출판부인 삼문출판사의 책임을 맡았으며,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한성부에 오기 전 미국의 한 출판사에서 출판에 대한 교육을 받고 왔으며 신시내티에서 신식 인쇄기를 들여왔다. 삼문출판사는 그가 부임한 지 1년이 안 되어 전도지와 종교 서적 1백만여 면을 인쇄하여 경영을 자급자족할 수준에 이르렀다. 1895년 2년간 휴간했던 영문 월간지 '한국소식'을 다시 발행하였고, 최초의 영문 소설 한국어 번역판인 '텬로력뎡'(천로역정)을 출판하였다. 그해 8월에 한글 로마자 표기법을 고안하였다.[1]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는데, 당시 그는 언더우드 그리고 에비슨과 함께 고종의 침전에서 불침번을 섰다고 한다. 1897년 5월 조선정부와 고용계약을 맺고 학생수 50명이 되는 한성사범학교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관립영어학교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쳤다. 1900년부터 1905년 고종의 특사로 미국에 방문하기 전까지 현 경기고등학교의 전신 관립중학교의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일본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다양한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1901년부터 영문 월간지 'Korea Review'를 발행하였다. 헐버트 부인도 이화학당에서 음악을 가르쳤으며 외국인 자녀들을 자신의 집에서 가르쳤다. 그녀는 또한 제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현 동대문교회인 볼드윈 교회를 맡아 담임목회를 하였다. 이때 외국 서적의 번역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 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 저술했다. 한국의 역사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1908년에는 관립중학교의 제자 오성근과 함께 '대한역사'라는 한글 역사 교과서를 출판하였다. 이 책은 상,하권으로 기획되었으나 하권은 출간하지 못하고 상권만을 발행하였다. 이마저도 1909년 일제의 검열에 의하여 금서조치되어 일본 경찰에 의하여 출판사에 있던 책이 모두 몰수되어 불태워졌다.

한국독립운동 지원[편집]

1890년대 중엽에 조선은 일본제국으로부터 위협을 겪게 되는데, 헐버트는 일제의 이러한 침탈행위를 목격하면서 조선의 국내 및 국제 정치,외교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조선의 자주권회복 운동에 헌신하기 시작한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헐버트는 고종을 호위하고, 최측근 보필 역할 및 자문 역할을 하여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해왔다. 헐버트는 고종의 신뢰를 가장 많이 받은 외국인이었다.

헐버트는 1903년부터 타임스의 객원 특파원을 지냈으며, 1904년에는 AP 통신의 객원 특파원을 지냈다. 그는 러일전쟁을 깊이 있게 취재하여 송고하였다.

1905년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 사건이 있은 후에 헐버트는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무효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려 했으며,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또한 을사늑약의 무효성을 알리기 위해 고종 황제로부터 친서를 받아 1905년 미국 대통령에게 밀서를 전달하고자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했으며, 미국을 비롯한 열강국가들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헤이그 특사인 이준이상설이위종. 헐버트 박사는 이들을 네덜란드 헤이그로 파견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

1907년 고종의 밀서를 받아, 비밀리에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에 비밀 특사 3명들을 파견하는 데 크게 일조하기도 했다.(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해 통감부의 감시속을 피해 사전 작업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로 인해 헐버트는 제4의 특사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일본 제국의 방해로 헤이그 특사들은 회의장에 입장조차 못했으며, 결국 실패로 끝나자 이것이 일본제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를 빌미로 일본제국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헐버트를 대한제국에서 추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헐버트는 미국에서 서재필이승만 등의 미주 독립운동가들에게 적극 지원하여 활동에 힘을 보탰으며, 한국의 분리독립을 위해 미국 각지를 돌면서 일본제국의 침략행위를 비난하였고, 한국의 분리독립성을 호소하였다.

1907년 7월 헤이그 평화 클럽에서 일본의 부당성을 질타한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1908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에 정착하여, 스프링필드 훼이스 회중교회에서 목사로 안수받았다. 그는 미국 전역과 전 세계에 각종 회의와 강좌에서 일본 제국의 침략에 규탄하였고 한국의 분리독립에 관한 글을 썼으며, 1918년에는 파리 강화회의를 위한 '독립청원서'를 여운홍과 함께 작성하였다. 그는 1919년 3·1운동 후에는 이를 지지하는 글을 서재필이 주관하는 잡지에 발표하였고, 미국상원 외교위원회에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하였다. 1942년에는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국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1944년 그는 '한국문제연구회'에서 간행하는 '한국의 소리'라는 책자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을사조약 직후 고종황제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아 동양의 역사가 바뀌었고, 미국이 친일 정책을 썼기 때문에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말년[편집]

 
양화진 헐버트의 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패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반도는 독립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된 이듬해인 1949년 42년 만에 방한하였다. 방한 이후 1주일 후에 헐버트는 병사하여 8월 11일에 최초의 외국인 사회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하였고 오늘날 양화진(楊花津)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그의 첫째 아들 쉘던은 2살 때 사망하여 이미 양화진에 묻혀 있었다. 헐버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민국으로 떠나며 언론에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다만 아쉬웠던 것은 그에게는 두가지 소원이 있었는데 이것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첫번째는 통일된 한국을 보는 것이고 두번째는 고종의 내탕금을 찾는 것이었다.

사후[편집]

1950년 3월 1일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독립장)을 추서했다. 전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지냈던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과 함께 조선 말기 '조선을 구하기 위해 활동한 대표적인 서양인'으로 손꼽히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1위로 꼽히기도 했다.

그의 저서〈The Passing of Korea(대한제국 멸망사)〉는 그리피스의 〈Hermit Kingdom(은자의 나라 조선)〉과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Corea and her neighbors(한국과 그 이웃나라들)〉과 함께 조선 말기 3대 외국인 기록으로 꼽힌다.

2014년 10월 9일에 한글 보전과 보급에 헌신한 공로로 대한민국정부에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2]

저서[편집]

그는 교육자이자 언론인이기도 하였다. 한글로 된 교과서 외에도 영문으로 된 '한국의 역사'와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등 편찬하여 미국 대중들이 한국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는 한국어와 한글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인도의 드라비다어와 한국어를 비교한 논문을 내기도 하였다.[3]

상훈[편집]195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 2014년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

같이 보기[편집]언더우드

각주[편집]

  1. 이동 공병설 기자 (2010년 10월 3일). 연합뉴스. 2010년 11월 8일에 확인함.
  2. 이동 김중배 기자 (2014년 10월 8일). “한글날 맞아 故호머 헐버트에 금관문화훈장 등 포상”. 연합뉴스.
  3. 이동 그의 외할아버지 헨리 우드워드는 인도 선교사였으며 그의 어머니 매리 우드워드는 인도에서 태어났다.참고 자료-《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 김동진 지음, 참좋은친구,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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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 박사는 1886년 7월 4일 육영공원의 영어교사로 조선에 첫발을 디뎠다. 조선의 관리들에게 영어와 선진문물을 가르치고자 고종황제의 지시로 초청된 미국인 교사 3인 중에 하나였다. 미국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에 버몬트에서 태어난 헐버트는 다트머스 대학을 졸업하고 유니언 신학교를 다니다가 24세에 조선의 엘리뜨 관리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입국한 것이다.

 

입국 4년차에 사민필지(최초의 한글교과서/ 세계사회지리총서)를 집필, 출간해서 가르쳤는데 당시에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듬해 1891년 미국으로 귀환했다가 1893년 10월,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해서 삼문출판사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 이후 조선에 대한 그의 봉사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897년 한성사범학교 교장을 시작으로 1900년 관립중학교(현 경기고등학교) 교관이 되었다. 1903년에는 YMCA 창립총회 의장으로 기여했고, 1905년에는 영문으로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를 상하권으로 출간했다.

 

1905년 10월 고종의 밀사로 미국을 방문해서 씨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고종의 친서전달을 시도하였으나 면담을 거절당했다. 조선이 타국의 침략을 받을 때 성실하게 돕는다는 ‘조미수호조약의 내용’을 촉구하는 것이었는데, 고종황제는 미국의 도움으로 일본의 을사늑약 강박을 저지하고자 한 것이다.

 

1904년 8월 22일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었는데 이것은 조약이 아니고 각서(Memorandum)이었다. 이것을 일본정부가 영어로 번역할 때, Agreement라고 제목을 바꿔서 외교조약으로 가장하고 번역본을 미국과 영국에게 보냈다. 원래 각서는 외교조약이 아니므로 당사자 사이에만 효력을 미치는데 이것을 일본정부가 외교적 사기행각을 벌인 것이다.

 

그러나 이 사기극의 영향으로 1905년 6월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테프트 밀약을 맺어,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하는 대신 일본의 조선 침략을 양해하는 비밀협약을 맺는다. 그러니 10월에 도착한 고종의 밀사를 미국대통령이 면담을 거절한 것이다.

 

“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이 강제된 뒤에 대한제국 정부는 미국정부에 대해 이것은 강제된 것으로 대한제국 황제가 승인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통지했다. 그때 미국정부의 답변은 ‘무슨 소리냐? 작년 8월 22일자 협약에서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외교권을 이미 넘긴 것으로 되어 있었다.’고 답변했다.” 각서를 외교조약(agreement)로 바꿔치기한 일본정부의 사기극이 성공한 것이다.

 

1904년 2월부터 1910년 8월까지 대한제국의 국권을 일본이 탈취하는 5개의 조약들은 모두 정식조약이어야 하는데 마지막 병합조약을 제외하고는 모두 약식을 취했다. 결국 4개 조약은 비준이 없는 상태로 되어 있다. 일본정부도 최종의 병합조약 때는 모든 것을 제대로 갖추려고 했으나 이에 대한 대한제국 황제의 비준서에 해당하는 것은 없다. 이러한 모든 결함들은 곧 대한제국 정부가 저항한 흔적으로 남겨진 것이다. 따라서 일제 35년은 병합이 아니고 명백히 ‘일본의 강제점령’인 것이다.

 

1906년 6월에 헐버트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3인과 함께 고종의 특사로 임명되어 평화회의에서 ‘1905년 11월의 조약은 무효’라고 선언하려고 했다. 일본은 고종황제가 그곳에 대표를 보낸 것 자체가 1905년 조약 위반이라고 하여 1907년 7월 22일자로 고종황제의 강제퇴위를 강행한다. 황제와 황태자가 응하지 않으니까 두 사람을 대역하는 환관 둘을 세워 양위식을 치렀다.

 

이틀 뒤인 7월 24일 3차 한일협약으로 대한제국 정부의 내정에 대한 감독권을 통감부가 확보한다. 이토 히로부미 통감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황제의 권한 위임 없이 약식조약으로 체결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7월 30일에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이 있게 된다. 군대해산에 관한 조칙도 순종황제와 전혀 무관한 상태에서 나온 것으로 밝혀졌다. 순종황제는 고종황제가 11월 15일 종묘에 퇴위를 고한 사흘 뒤 11월18일에 종묘에 가서 황제위에 오르겠다는 신고를 한 후에 집무를 시작한다.

 

고종황제의 퇴위와 더불어 헐버트는 1907년 7월 미국으로 쫓겨나고 스프링필드에 정착한다. 1909년 8월 일시 방한하여 헐버트는 비밀리에 태황제(고종)으로부터 상하이 덕화(독일)은행에 예금한 예치금 관련서류를 받고 내탕금 인출을 위한 전권을 수임한다. 상하이 독일은행으로 달려가 고종황제의 위임장을 내놓고 예금인출을 요구했으나, 이미 인출되어 내어줄 것이 없다고 거절당했다.

 

1908년 4월22일 독일공사 크루거와 덕화(독일)은행은 고종황제가 가지고 있던 예치금 증서는 받지 않은 채 일본이 날조한 서류만으로 예치금 52만6천 마르크를 2차례에 걸쳐 지급했다. 궁내부대신 이윤용(이완용의 형)을 수취인으로 한 다이이찌은행 서울지점 수표를 크루거 독일공사가 통감부로 전달하고 통감부 나베시마 외무총장이 영수증을 써 주었다. 독일공사와 독일은행이 예금주인 고종황제 몰래 거금을 통감부에 내준 것이었다. 고종황제는 독일공사 입회하에 상하이 덕화은행에 비밀예금한 독립운동자금을 도둑맞은 것이다.

 

1919년 삼일운동 직후, 헐버트는 미국 상원 외교관계위원회에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하는 진술서(Statement)를 제출한다. 그리고 미국 주요 언론에 ‘일본 강점의 부당성과 대한의 독립’을 선전하는 기고 활동을 계속한다.

 

1906년 런던에서 출간한 영문판 ‘대한제국멸망사’ 서문에 대한제국과 한국민들에 대한 그의 생각이 나타난다.

 

<헌사>

 비방이 그 극에 이르고 정의가 사라지고 있는 이때에 /나의 지극한 존경의 표시와 흔들리지 않는 충성의 맹세로서/  대한제국의 황제 폐하에게...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역사가 그 종말을 고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지만 / 장차 이 민족의 정기가 어둠에서 깨어나면 / 잠이란 죽음의 가상이기는 하나 / 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 한민족에게... 이책을 바칩니다. / 호머 헐버트.

 

을사늑약이 대한제국을 목 조르던 시기에 헐버트는 장차 ‘한민족이 광복을 쟁취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정부수립 1주년 기념식에 독립유공자이며 귀빈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1949년 7월 29일 인천항에 도착한 헐버트 박사는 86세의 노구로 긴 여행의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8월 5일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별세한다.

 

 미국을 떠날 때,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담담히 말했다. “나는 일찍부터 (한국에 가기를) 소원해왔소.”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합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황제의 밀사 호머 헐버트, 그는 지금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에 고이 잠들어 있다.

 

 

<출처: 재외동포신문  /이형모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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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머 헐버트’ 우리가 광복절에 기억해야 할 이름

  

 

 

다수의 외국인 독립유공자가 잠들어 있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다수의 외국인 독립유공자가 잠들어 있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 중앙 로비로 들어가면 우뚝 솟은 10층 석탑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1907년, 다나카 미쓰아키가 황태자 순종 결혼식 축하사절로 왔다가 개성에 있던 경천사십층석탑을 무단으로 가져간다. 이를 알게 된 미국인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는 즉시 현장을 확인하고 관련 사실을 언론에 기고한다. 이후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고 있는 네덜란드 헤이그까지 가서 이 사실을 폭로한다. 호머 헐버트의 이러한 노력으로 1918년 경천사십층석탑(국보 86호)을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

대한민국을 사랑한 이방인, 호머 헐버트

1863년 미국 버몬트에서 출생한 그는 1886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국립학교인 육영공원에 파견되었다. 이후 YMCA를 창설하는 과정에서도 주요한 역할을 하여 초대 회장을 역임하는 등 청년 계몽운동에 앞장선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1905년 대한제국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한일협상 조약)을 체결하자, 호머 헐버트는 고종 밀서를 가지고 워싱턴으로 날아가 일제 만행을 알리며 대한제국을 도울 것을 호소한다. 또한, 일제 침략의 부당함을 세계인에게 알리고자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등 밀사 3인 파견을 후원하고, <독립신문> 창간에도 기여한다. 그는 독립을 위한 노력을 평가받아 1950년 건국훈장 독립장 수상하기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경천사십층석탑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경천사십층석탑, 호머 헐버트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 노력으로 일본에 무단반출됐던 탑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는 20여 년 동안 우리나라에 살면서 대한제국과 관련한 다양한 기록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현장에서 지켜본 대한제국 멸망과정을 서술한 책에는 당시 시대 상황이 잘 기술되어 있다. 서양인이 기술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특유의 정(情) 문화를 잘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면 아무 집에나 들어가 밥과 잠자리를 청하면 거절하는 법이 없으니, 어떻게 숙박업이 발전할 수 있겠느냐”하며 한국인의 인정까지 꿰뚫어 보았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잘 알았던 독립운동가

또한 그는 한국인보다 한글을 더 사랑한 한글 학자였다. 일찍이 한글 우수성을 깨달은 그는 한글 띄어쓰기를 고안했고, 한글 교육을 통해 대한제국을 강성하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중국인들은 세계 어떤 문자보다도 간단하고 음운을 폭넓게 표기할 수 있는 한글을 채택해야 한다고 나는 감히 주장해왔다.” 그의 저서에 나오는 한글 우수성과 관련한 대목이다.

 

가온길 주시경 공원에 서 있는 호머 헐버트 부조와 한글 조형물

가온길 주시경 공원에 서 있는 호머 헐버트 부조와 한글 조형물

 

세종문화회관 뒤쪽의 ‘가온길 주시경공원’에는 그의 공적이 새겨진 ‘호머 헐버트’의 부조가 서 있다. 이러한 공로로 호머 헐버트는 2014년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대한제국의 독립을 간절히 염원하던 호머 헐버트는 해방된 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다시 우리나라를 찾았지만 안타깝게도 일주일만인 1949년 8월 5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Westminster Abbey.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대로 그는 합정동의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서 영면에 들었다.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헌신한 파란 눈의 독립운동가 호머 헐버트에게 지금 우리가 보답할 수 있는 길은 ‘잊지 않고 그를 기억함’이 아닐까? 지금도 국립중앙박물관, 주시경공원,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는 그의 흔적이 또렷하다.

며칠 후면 제72주년 광복절이다. 태극기를 내걸고 기념식을 하는 것도 좋지만, 그간 알지 못했던 외국인 독립운동가 한 사람을 새롭게 알게 된다면, 올해 광복절 의미가 더욱 남다를 것이다.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서 영면하고 있는 호머 헐버트 묘역과 기념비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서 영면하고 있는 호머 헐버트 묘역과 기념비

 

■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 안내
○ 위치 : 마포구 양화진길 46,
지하철 2·6호선 합정역 7번 출구,
버스 602·604·706·1000·3000 등 다수
○ 개원 : 월~토요일 오전 10시 ~ 오후 5시 (일요일은 묘원 안식일)


 

조선의 개화기 때 수많은 서양인들이 조선으로 들어왔습니다. 개중에는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세계를 탐사하려는 목적을 지닌 사람도 있었고, 어떻게든 조선을 이용해 한몫 크게 잡아보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두 속성이 결합된 사람도 있었고요.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조선을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한 서양인도 분명 존재했습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호머 베잘렐 헐버트가 대표적인 인물이지요. 


헐버트는 미국의 선교사로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의 영어교사로 입국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밑에서 공부했던 대부분의 학생들은 영어에 대단한 열정을 보이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물론 열심히 배운 학생도 있었지요. 대표적인 인물이 당대 최고의 영어능력자였던 이완용..... 

그는 자비로 과외선생을 따로 구할 정도로 한글 공부에도 열심이었습니다. 3년 정도 공부한 뒤에는 직접 <사민필지>라는 한글 교과서를 저술해 육영공원의 교재로 사용할 정도로 능숙하게 우리말을 사용했지요. <사민필지>는 우주 및 세계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책으로 학생들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인기가 있던 서적이었습니다. 현재의 세계지리 교과서 정도로 볼 수 있겠네요. 

사실 헐버트는 한글 발전에 상당한 공이 있는 인물입니다. 우리말에서 지금까지 자연스럽게 사용되는 띄어쓰기와 점찍기는 그의 건의로 시행된 것이지요. 이전까지 우리말에서는 띄어쓰기가 존재하지 않았거든요. 물론 문법 공부하는 사람 입장에서 죽을 맛이기는 합니다만.... 
주시경이 한글을 연구한 국문연구소도 그의 건의로 만들어진 것이지요. 



육영공원이 재정상의 문제로 축소되어 퇴직한 헐버트는 조선에 도움이 될 만한 여러 업적을 남겼습니다. 다양한 근대식 학교에서 강사로 일하고 미국으로부터 인쇄기를 들여왔으며 외국에 대한 조선 홍보 활동을 벌였지요. 

고종의 신임을 받은 헐버트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외교적 자문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을사조약 이후에는 이 사건의 불법성과 무효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려고 노력했지요. 
특히 유명한 것은 헤이그 특사와 관련된 일이겠습니다. 그는 일제의 영향력이 덜 미치는 외국인이라는 특성을 최대한 이용하여 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한 사전작업을 담당했지요. 그래서 그를 이준,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제 4의 특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잘 알다시피 헤이그 특사들은 목표를 이루지 못했고 헐버트는 일제에 의해 추방당합니다. 

이후로도 헐버트는 우리의 독립을 위해 힘썼습니다. 미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미국 전역의 각종 회의에 참여하여 일제의 침략행위를 규탄했고 한국의 독립에 대한 글을 기고하였지요. 이승만과 같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를 지원한 경력도 있습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생기고 1년 뒤인 1949년, 정부는 광복절을 맞아 헐버트를 국빈으로 초대합니다. 당시 헐버트는 기관지염으로 병약한 상태였으나 기필코 한국으로 가겠다고 말하지요. 출국하면서 언론에 한 말이 명언입니다. 

"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영미권에서 대단한 업적을 남긴 위인들만 안치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아이작 뉴턴이나 찰스 다윈, 제프리 초서 같은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 이곳에 묻혀있지요. 그가 얼마나 한국을 사랑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그가 한국에 온 또 하나의 이유는 고종이 남긴 비자금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헐버트가 일제에 의해 추방당할 때 고종은 ‘상하이 독일은행’에 맡겨놓은 비자금을 찾아 독립운동에 투자할 것을 부탁했지요. 하지만 헐버트가 은행을 방문했던 시점에는 이미 일제가 이 돈을 다 빼간 상태였습니다. 이제 독립을 했으니 고종의 마지막 명령을 지킬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한 것이지요. 

하지만 헐버트는 입국한지 일주일이 된 8월 5일에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합니다. 그가 정부에 넘겨준 비자금 관련 서류는 현재까지 국립정부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지요. 


헐버트는 어니스트 베델, 프랭크 스코필드와 같은 인물과 함께 조선을 구하기 위해 활동한 대표적인 서양인으로 꼽힙니다. 예전에는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1위로 뽑히기도 했지요. 정부는 1950년에 그의 독립운동 활동 공로로 ‘건국공로훈장’을, 2014년에 한글 보급 공로를 인정하여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습니다. 

현재 그의 무덤은 서울 합정역 근처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이곳에는 그의 유언과도 같은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라는 글귀가 묘지명으로 새겨져 있지요. 



///출처 - 5분 한국사 이야기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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