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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알고싶다] - "거사 의사" 아버지와 "눈물 악수" 아들
2018년 03월 12일 22시 29분  조회:3658  추천:0  작성자: 죽림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하르빈 정거장 플래트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제거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직후부터 일제의 침략에 시달리던 조선인과 중국인들은 대부분 그를 영웅으로 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영웅호걸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살붙이를 생각하게 마련이다. 서른한 살 한창 나이의 청년 안중근도 죽음을 앞에 두고 연로하신 어머니를 생각했다. 그리고 어린 자식들과 함께 살아갈 아내를 걱정했다. 안중근의 사랑을 독차지했을 맏아들 분도를 그리워했다.

안중근의 유언

안중근은 안태훈(베드로)과 조마리아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김아려(金亞麗,아녜스)와 결혼해서 2남 1녀를 두었으니, 장녀 안현생(安賢生)과 맏아들 분도, 둘째아들 준생(俊生, 마태오)이 그들이다. 안중근의 의거 당시 그의 부친은 이미 서거했지만, 모친이 생존해 있었다. 안중근은 죽기에 앞서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자신의 사촌인 안명근(安明根) 및 여러 숙부들에게 유서를 남겼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세례를 준 빌렘(洪錫九) 신부와 당시의 조선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에게도 유서를 남겼다. 그의 친동생인 안정근(安定根)과 공근(恭根)은 여순 감옥에서 직접 만날 수 있었으니, 이들에게도 유사가 아닌 유언을 남겼을 것이다.

이때 안중근은 아무래도 눈에 밟히는 여섯 살 박이 맏아들 분도를 가장 많이 생각했고, 그에 관한 당부의 말을 특별히 남겼다. 그는 어머니에게 보낸 유서에서 장손 분도가 신부가 되어 자신의 일생을 천주님께 바치도록 교양해 달라고 부탁했다. 또한 안중근은 그의 아내에게도 다음과 같은 유서를 보내 이를 강조했다. “찬미예수. 우리들은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천주님의 안배로 배필이 되고 다시 주님의 명으로 이에 헤어지게 되었으나, 또 멀지 않아 주님의 은혜로 천당 영복의 땅에서 영원히 모이려 하오. 반듯이 육정(肉情)을 고려함이 없이 주님의 안배만을 믿고 신앙을 열심히 하고 모친에게 효도를 다하고 두 동생과 화목하여 자식의 교양에 힘쓰며 세상에 처하여 신심을 평안히 하고 후세 영원한 낙을 바랄 뿐이요. 장남 분도를 신부가 되게 하려고 나는 마음을 결정하고 믿고 있으니까 그리 알고서 반드시 잊지 말고 특히 천주님께 바치어 훗날에 신부가 되게 하시오. 허다한 말은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즐겁게 만나보고 상세히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것을 믿고 또 바랄 뿐이오.”

현재 이 유서의 원본은 남아있지 아니하다. 그러나 이 유서는 거의 틀림없이 한글로 작성되었고, 이에 기초하여 일본어로 번역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읽는 안중근의 이 귀한 유서는 이 일본어 번역본을 중역한 것이다. 그런데 한글로 다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번역자가 범한 오류가 남아있고, 일본식 표현을 직역했기 때문에 현재의 번역본에는 문제가 많다.

안중근의 가족

의거 이전에 안중근은 동료에게 자신의 가족을 국외로 불러오도록 부탁한 바 있었다. 그리하여 안중근의 처와 자식들은 하얼빈 의거 전에 조선을 떠났고, 안중근의 의거가 단행된 다음날 하얼빈에 도착했다. 하얼빈에 뒤늦게 도착한 그의 처자식들은 유승렬의 도움으로 러시아령 연해주의 꼬르지포로 옮겨가 살게 되었다. 유승렬은 그 지역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재정적으로 안중근을 지원한 바도 있었다. 그의 아들 유동하는 안중근 의거 직후 함께 체포되어 재판을 받기도 했다.

안중근이 순국한 직후 연해주에서는 ‘안중근유족 구제 공동회’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이 모임의 주선으로 1910년 10월경에 이르러 이곳에는 안중근의 어머니와 첫째 동생인 안정근 내외 및 안공근 등 안중근 일가 여덟 명이 모여 살게 되었다. 그 후 안중근 가족은 1911년 4월 경 꼬르지포에서 10여 리 떨어진 조선인 마을 목릉(穆陵) 팔면통(八面通)에 옮겨 살게 되었다. 안중근의 가족은 도산 안창호 및 이갑(李甲)의 도움으로 이곳에 이주하고 ‘열여드레 갈이’ 농장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중근 가족에 대한 일제의 추적은 이 마을에까지 이르렀다. 1911년 여름 이 마을에서 안중근의 맏아들인 분도가 일제의 밀정에 의해서 독살 당해 죽게 되었다. 분도는 안중근이 그의 부인과 어머니에게 보낸 유서에서 신부로 키워달라고 부탁했던 아이였다. 안중근 가족은 1917년 7월 니콜리스크로 다시 이주하여 벼농사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연해주는 러시아 혁명의 큰 물결에 휩쓸리고 있었다. 이 와중에서 연해주의 동지들은 안중근 가족의 보호에 특별히 유념해야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당시 동양최대의 국제도시였던 샹하이(上海)로 이주해갔다. 안중근 가족 일행이 상해에 정착한 때는 1919년 10월이었다. 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출범한지 몇 개월이 지나서였다.

그 가족의 샹하이 생활

샹하이로 이주한 안중근 가족들은 프랑스 조계 내 남영길리(南永吉里)에서 살았다. 그들이 살던 곳은 평안도 출신 서북지방 인사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했으며 흥사단의 샹하이 지부가 있던 선종로(善鍾路)나 기호지방 인사들의 거주지였던 애인리(愛仁里)와는 약간의 거리가 있었다. 안중근 가족의 샹하이 정착에는 도산 안창호가 일정한 도움을 주었다. 또한 구한말 1894년 동학농민혁명 직후부터 안중근의 부친인 안태훈과 잘 알고 지내던 백범 김구도 그들의 생활을 도왔다. 샹하이 시절 초기 어머니 조마리아와 안중근의 아내 및 자녀들을 전적으로 돌보아준 사람은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이었다. 그는 샹하이 시절 김구의 오른팔이 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1937년 일본군이 샹하이를 공격해 오자 자신의 가족들도 내버려둔 채 김구의 모친 곽낙원만을 남경으로 모시고 나왔다. 이 때문에 안공근은 백범 김구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기도 했다. 안공근의 이러한 행동은 후일 큰 후회거리를 남겼다.

안중근의 둘째아들 안준생(安俊生, 마태오)이 생장한 데는 이곳 샹하이가 되었다. 안준생은 이곳에서 수학했고, 샹하이의 가톨릭스쿨(진단대학?)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그는 정옥녀(鄭玉女)와 결혼하여 2남1녀를 두었다. 중일전쟁 시 안준생은 중경으로 가지 못하고 샹하이에 남아 있었다. 그는 처가의 권유에 따라 헤로인 장사를 시작하여 일약 치부했고, 조선총독부의 초청을 받아 고국을 방문했다 한다. 그런데 당시 서울의 장충단에는 친일파 인사들에 의해서 이등박문을 추모하는 박문사(博文祠)가 세워져 있었다.

이때 안준생은 총독부의 계획대로 서울 장충단에 있던 박문사를 찾았고 ‘이등박문의 아들과 눈물의 악수 일 장면’을 연출했다.
이렇게 그는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길을 향해 가고 있던 일제의 침략정책에 동원되었고, 안중근을 아끼던 모든 사람들은 그 아들의 행위에 가슴을 쳤다.

남은말

안중근의 가족들에게 남편이요 아버지였던 안중근은 무엇이었을까? 안준생은 아직 핏덩이에 지나지 않았던 때에 아버지를 일제에 빼앗겨서 기억할 수 없었다. 그도 모든 이가 우러르는 아버지에 대해 사무치는 그리움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한편으로 그는 평범한 아들이 되어 아버지의 무심함을 원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원망이 그를 자포자기로 내몰았고, ‘눈물의 연출’에 참여하게 했으리라.

안중근의 맏딸 안현생은 샹하이에서 황일청(黃一淸)과 결혼하여 평범한 삶을 살았다. 맏아들 분도는 독살당했다. 안중근의 아내 김아려는 1945년 이전 샹하이에서 죽었다. 해방이 되었다. 그 둘째 아들은 해방된 조국을 보고 회한의 눈물을 흘렸을 게다. 안준생은 그렇게도 그렸을 조국에 몰래 숨어서 들어왔다. 그리고 부산에서 살다가 한국전쟁 때 해군 병원선에서 별세했다. 당시 대한민국 해군에는 그와 상해시절 알고 지냈던 손원일 제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안중근과 그 피붙이들은 겨레를 위해 순국했고, 독살당했으며, 고생 끝에 이국땅에서 숨을 거두거나 죄인이 되어 숨어지내다 죽어야 했다. 그러나 안중근의 혈족 가운데에는 11명이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았다. 그의 가족사는 우리 현대사와 현대교회사의 축소판이다. /<가톨릭인터넷언론-지금여기> 2008년 7월 7일자

///조광 (고려대학교 교수, 사학)

 

 

안중근 아들과 이토 아들-

1939년 10월16일, 조선호텔에서 안중근 아들 안준생(왼쪽)이 이토 히로부미의 둘째 아들 이토 분키치(오른쪽 첫번째 앞줄)를 만나 아버지를 대신해 사죄한다고 말했다. 뒤에 선 사람은 조선총독부 외사부장 마쓰자와다쓰오(중앙)와 아이바 기요시(오른쪽) 및 통역 촉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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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마리아 여사 유해는 어디에… 한국인의 묘로 확인 또는 추정되는 14기의 묘가 있는 중국 상하이 송경령능원 내 만국공묘. 박은식 선생 등 7명의 유해가 고국으로 봉환됐다. 징안쓰 만국공묘에 있던 안중근 의사 모친 조마리아 여사, 부인 김아려 여사, 동생 안정근 여사 유해는 이장 과정에서 상하이 내 외국인묘 중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다. 정충신 기자
 
 
 
▲ 안중근 가족 옛 묘지 모습 안중근 의사 가족들의 유해가 묻혔던 상하이 징안쓰 공동묘지 옛 사진. 문화일보 자료사진
 
母親 유해 이장할 때 분실 
일제에 독살당한 큰아들도 
헤이룽장성에 묻혔단 說만 

105인사건 10년복역 사촌 
지린성 묘 있었지만 못찾아 

국가 차원 유해찾기 나서야 
충칭 등지 사료 발굴 시급
 

국내 독립운동 가문으로는 일제강점기 상하이(上海)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 선생, 위기에 처한 공동체에 책임을 다한 우당 이회영 선생, 전 재산을 팔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이시영 선생 집안이 대표적이다. 이시영 선생은 “나라가 망했는데 가문이 무슨 소용이냐”고 했었다.

안중근 의사 집안도 이에 못지않다. 대한제국 독립을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한 대표적 가문이다.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사로는 안 의사 형제들 중 친동생인 정근·공근과 사촌 동생 명근·경근,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등 숱하게 많다. 

그런데 광복 후 70년이 되도록 안 의사 집안은 조국으로부터 외면받고 있다. 올해에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기 힘들 전망이다. 안 의사 가족의 유해와 혼은 대부분 중국 대륙 등지에 흩어져 안식을 못 한 채 구천을 헤매고 있다. 유해를 분실하거나 중국의 도시개발 와중에 묘지가 사라졌다.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 중국지회장인 김월배 중국 다롄외국어대 교수는 13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안 의사 유해 발굴과 안 의사 가족 유해 찾기 사업을 국가 차원에서 병행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1927년 7월 상하이에서 별세한 안 의사 모친 조마리아 여사는 프랑스 조계 안에 있던 외국인묘지 징안쓰(靜安寺) 만국공묘에 묻혔다. 상하이 시내 중심가의 이 묘지는 도시개발로 사라졌다. 1950년 말 상하이시가 외국인 유족들에게 묘소 이장을 공고한 뒤 상하이 교민회가 항일투사들 유골을 화장해 인근 쉬자후이 만국공묘(현 송경령 능원)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조 여사 유해를 빠뜨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혁명지사 유해 몇 분도 사라졌다. 1949년 2월 27일 사망한 안 의사 부인 김아려 여사와 1949년 3월 17일 병사한 동생 안정근도 조마리아 여사와 같이 징안쓰 만국공묘에 묻혔으나 이장 이후 유해가 어디 있는지 현재 알지 못한다. 

김 교수는 “상하이, 특히 만국공묘와 충칭(重慶) 등지에서 거주할 당시 사료 발굴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상하이 징안쓰 만국공묘는 도시개발로 현재 징안쓰 뒤의 일본 구광(九光)백화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상하이 외각 지역에 중국 열사 능원 형태로 분산돼 있을 가능성도 있다. 중국 자료에 따르면 만국공묘는 문화대혁명으로 상당히 파손됐고 푸둥(浦東)공원에 외국인 묘지를 두고 있다. 1976년에 이장해 25개국 640명의 인사가 매장됐다가 이후 현재의 만국공묘로 재이장됐다. 김 교수는 “푸둥공원의 외국인 묘지에서 재이장 당시 소실 여부 확인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막냇동생 안공근은 1939년 충칭에서 갑자기 행방불명됐다. 사촌동생 안명근은 ‘105인사건’ 주모자로 10년 동안 복역했지만 유해가 없다. 김 교수는 “만주 지린(吉林)성 의란현 토룡산진 원가툰 빠후리에 묘소가 있었으나 지금은 지명이 많아 바뀌어 찾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다만 “헤이룽장(黑龍江)성 민족사무위원회를 통해 의란현 조선족 집성촌 마을의 1930년대 상황을 조사하면 유해를 찾을 희망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1954년 작고한 독립운동가인 여동생 안성녀는 부산의 한 공동묘지에 초라하게 방치돼 있다. 부산 용당동 천주교 묘지 아래 50m에 ‘안누시아 성여지묘’라는 묘지에 안장돼 있다. 맏아들 안분도는 1911년 여름 일제 밀정에 독살당했다. 조선족 집거지였던 헤이룽장성 목릉에 묻혔다고 전해질 뿐, 조국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둘째 아들 안준생은 1952년 11월 부산에서 폐결핵으로 병사해 서울 혜화동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돼 있다. 심장병 전문의인 손자 안웅호는 2013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타계해 유해가 미국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공근의 아들 안우생은 북한의 혁명열사능원 묘지에 있다. 1959년 중풍으로 별세한 안공근의 아들 안현생은 서울 수유리 아카데미 하우스에 묘지가 있다. 

///상하이=정충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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