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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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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 잎 하나는 수천개 잎을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2018년 04월 22일 23시 42분  조회:2520  추천:0  작성자: 죽림

<담쟁이에 관한 시 모음> 


+ 담쟁이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도종환·시인, 1954-) 


+ 담쟁이 

담쟁이는 벽을 평지로 알고 산다 
담쟁이는 벽을 넘는 것이 아니라 
평지 끝 절망의 벼랑과 만난다 
벽을 놓지 못한 채 
제 한 몸 던져 
끝끝내 매달려 있는 
담쟁이의 벽 
하늘에 목숨을 맡긴 채 
평지 끝 절망의 벼랑에서 
고공투쟁하는 
벼랑 끝 절망이 
담쟁이의 희망이다 
(강상기·시인, 1946-) 


+ 담쟁이덩굴 

비좁은 담벼락을 
촘촘히 메우고도 
줄기끼리 겹치는 법이 없다. 

몸싸움 한 번 없이 
오순도순 세상은 
얼마나 평화로운가. 

진초록 잎사귀로 
눈물을 닦아주고 
서로에게 믿음이 되어주는 
저 초록의 평화를  

무서운 태풍도 
세찬 바람도 
어쩌지 못한다. 
(공재동·시인이며 아동문학가) 


+ 담쟁이덩굴의 독법 

손끝으로 점자를 읽는 맹인이 저랬던가 
붉은 벽돌을 완독해 보겠다고 
지문이 닳도록 아픈 독법으로 기어오른다 
한번에 다 읽지는 못하고 
지난해 읽다만 곳이 어디였더라 
매번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다 보면 여러 번 손닿는 곳은 
달달 외우기도 하겠다 
세상을 등지고 읽기에 집중하는 동안 
내가 그랬듯이 등 뒤 세상은 점점 멀어져 
올려다보기에도 아찔한 거리다 
푸른 손끝에 피멍이 들고 시들어버릴 때쯤엔 
다음 구절이 궁금하여도 
그쯤에선 책을 덮어야겠지 
아픔도 씻는 듯 가시는 새봄이 오면 
지붕까지는 독파해 볼 양으로 
맨 처음부터 다시 더듬어 읽기 시작하겠지 
(나혜경·시인, 1964-) 


+ 담쟁이 넝쿨 

김과장이 담벼락에 붙어있다 
이부장도 담벼락에 붙어있다 
서상무도 권이사도 박대리도 한주임도 
모두 담벼락에 붙어있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밀리지 않으려고 
납작 엎드려 사력을 다해 
견뎌내는 저 손 
때로 바람채찍이 손등을 때려도 
무릎팍 가슴팍 깨져도 
맨손으로 암벽을 타듯이 
엉키고 밀어내고 파고들며 
올라가는 저 생존력 

모두가 그렇게 붙어 있는 것이다 
이 건물 저 건물 
이 빌딩 저 빌딩 
수많은 담벼락에 빽빽하게 붙어 
눈물나게 
발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권대웅·시인, 1962-) 


+ 담쟁이 사랑 

끝없이 타오르는 
도벽 같은 탐욕으로 

남몰래 담을 타며 
밤마다 모의한다 

하늘이 내린 형벌이다 
중독이다 전염이다 

그대 집 다 메워도 
그대 맘 곁에 못 가 

혹독한 추위에 
몸이 얼고 생각이 얼고 

기어이 
가슴 하나 남긴 채 
전설 속에 사라진다 

여느 해 그러하듯 
여름 가고 가을 오면 

움츠린 몸 뒤척이며 
피가 먼저 나선다 

그래도 
그 흔한 사랑이라 
차마 말 못한다 
(이민화·시인, 1966-) 


+ 담쟁이 덩굴 

두 손이 바들거려요 그렇다고 허공을 잡을 수 없잖아요 
누치를 끌어올리는 그물처럼 우리도 서로를 엮어 보아요 
뼈가 없는 것들은 무엇이든 잡아야 일어선다는데 
사흘 밤낮 찬바람에 찧어낸 풀실로 맨 몸을 친친 감아요 
그나마 담벼락이, 그나마 나무가, 그나마 바위가, 그나마 꽃이 
그나마 비빌 언덕이니 얼마나 좋아요 당신과 내가 맞잡은 풀실이 
나무의 움막을 짜고 벽의 이불을 짜고 꽃의 치마를 짜다 
먼저랄 것 없이 바늘 코를 놓을 수도 있겠지요 
올실 풀려나간 구멍으로 쫓아 들던 날실이 숯덩이만한 매듭을 짓거나 
이리저리 흔들리며 벌레 먹힌 이력을 서로에게 남기거나 
바람이 먼지를 엎질러 숭숭 뜯기고 얼룩지기도 하겠지만 
그래요, 혼자서는 팽팽할 수 없어 엉켜 사는 거예요 
찢긴 구멍으로 달빛이 빠져나가도 우리 신경 쓰지 말아요 
반듯하게 깎아놓은 계단도, 숨 고를 의자도 없는 
매일 한 타래씩 올을 풀어 벽을 타고 오르는 일이 
쉽지만은 않겠지요 오르다 보면 담벼락 어딘가에 
평지 하나 있을지 모르잖아요. 혹여, 허공을 붙잡고 사는 
마법이 생길지 누가 알겠어요 
따박따박 날갯짓하는 나비 한 마리 등에 앉았네요 
자, 손을 잡고 조심조심 올라가요 
한참을 휘감다 돌아설 그때도 곁에 있을 당신 
(조원·시인, 1968-) 


+ 담쟁이 

온 몸이 
발이 되어 

보이지 않게 
들뜨지 않게 

밀고 나아가는 
저 눈부신 낮은 포복 
(정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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