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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적십자 운동 창시자 - 앙리 뒤낭
2018년 05월 22일 21시 36분  조회:5360  추천:0  작성자: 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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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십자의 창시자 앙리 뒤낭이 1828년 5월 8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났다. 본래 사업가였던 뒤낭은 1859년 이탈리아 북부 솔페리노 지역을 여행하다가 오스트리아군과 프랑스·사르디니아 연합군 전투에서 부상병들의 비참한 상황을 보고, ‘전쟁과 재해현장에서 헌신적이고 자격 있는 국제구호단체를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1864년 12개국 대표가 제네바에 모여 ‘제네바 협약’을 채택ㆍ조인하면서 적십자운동이 시작됐다.
그는 결국 사업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파산했고, 그 뒤 1867년 제네바를 떠나 가난하게 살았으나 계속해서 전쟁 포로에 대한 대우, 노예제도 폐지, 국제적 중재, 무장해제, 유대인 국가수립을 위해 힘썼다.
뒤낭은 1901년 스웨덴 스톡홀름 개최된 제1회 노벨상 시상식에서 적십자 운동의 공로로 ‘제1호’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노벨상의 수상 시비는 첫 해부터 계속돼, 뒤낭의 노벨평화상 수상 역시 노벨의 유언 취지와 어긋난다는 비난을 받았다. 뒤낭이 한 일은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전쟁의 공포를 어루만지면서 전쟁을 기정사실화하고, 오히려 전쟁을 인간화했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국제적십자운동은 평상시 재난구호와 취약계층 지원을 주 임무로 하는 국제적십자연맹(IFRC)과 무장충돌지역의 희생자 보호지원을 하는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그리고 IFRC의 179개 회원국이 3대 축을 이뤄 사업을 펼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05년 고종황제 칙령 47호로 대한적십자사 규칙을 제정하면서 대한적십자사가 탄생했으며, 1949년 대한적십자사조직법이 공포되면서 오늘의 조직에 이르고 있다.






국제적십자운동의 창시자 앙리 뒤낭

 

 

장 앙리 뒤낭(Jean Henry Dunant 1828~1910)은 지금으로부터 170여년 전,
1828년 5월 8일 스위스 제네바의 한 건실한 가정에서 친척들과 이웃의 축복 속에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훌륭한 분들이었다.  어머니는 장 앙리 뒤낭에게 불행한 사람,
미천한 사람, 압박받는 사람,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에 대한 깊은 동정심을 심어 주었고,
아버지 장 자크 뒤낭은 실업가이며 제네바 지구 치안 판사이기도 하였는데, 장 앙리 뒤낭은
아버지에게서도 어릴때부터 선행을 실천하는 것을 배웠다.

 

두 분은 그가 교양과 품위를 지니며 세계에 관한 폭넓은 지식을 쌓도록 가르쳤고,
그의 가슴 속에 사랑을 키워 주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의 어려움에 관심이 많아서
부모님을 따라 어렸을때부터 가난한 지역, 교도소 등을 방문하며 가난과
고통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부모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장 앙리 뒤낭은 소년시절부터 틈이 날 때마다 가난한 사람과 장애인,
또는 임종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방문하여 그들을 돕고 위안을 주는데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20세가 되었을 무렵에는, 제네바에 있는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책을 읽어 주는 일을 하며 일요일 오후를 보내기도 하였다. 


학업을 마친 후, 잠시 은행에서 일을 하였고 27세 되던 해인 1855년에는 친구들과 더불어
YMCA(세계 기독교 청년회 동맹)의 창설에 기여하였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858년, 프랑스가 지배하고 있는 알제리에 기업을 일으켜,
노동자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써 보라 다짐하고 몽제밀라 근처에
커다란 농장을 개설하였다. 그러나 몽제밀라 제분회사는 모든 설비를 잘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밀을 재배할 토지를 확보하는 일에서  정부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황제를 만나야 할 상황이 되었으며,
그당시 프랑스 황제인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파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오스트리아 군대와 교전 중이었다. 


그는 황제를 만나러가는 길에 이탈리아 북부 지방을 여행하게 되었고,
이때는 이탈리아 통일을 반대하는 오스트리아군에 대항하여,
프랑스와 사르디니아 연합군이 솔페리노에서 치열한 전투(이탈리아 통일전쟁)를 벌이고
있었던 때였다.

 

뒤낭은 4만 여명의 병사가 죽거나 부상당한 채로 버려져 있는 처참한 광경을 우연히 목격한 후,
나폴레옹 3세와의 만남을 포기한 채 인근 가스틸료네 마을 교회를 중심으로 농촌부녀자들과
소년, 소녀들의 도움을 얻어 구호활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구호활동을 하던 가스틸료네 부녀자들이 “모든 사람은 형제다”(All men are brothers)라고
외치며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지 않고, 부상병을 돌보아 줌으로써 인도주의 이념을 근간으로 하는
적십자운동이 싹트게 되었다.


제네바로 돌아온 뒤낭은 3년 후인 1862년 11월에 본인이 체험한 전장에서의
비참상을 생생하게 기록한 
“솔페리노의 회상”을 집필하였으며,
이 책에서
“모든 나라에 전쟁 부상자를 위한 구호기관을 설립하고,
평소에 사람들을 잘 훈련시킨다면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적군,
아군 가
리지 않고 부상자를 치료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전쟁 무기로부터 이들 구호요원을 보호하기 위한 조약을 만드는 것은 어떨까?”라고
제안하였다.


이 책은 유럽 각국에서 커다란 반응을 일으켰으며, 뒤낭의 뜻에 찬동한 “제네바공익협회”는
인도주의에 입각한 국제적 구호단체를 만들 것을 제안하여,

1863년 2월 훗날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의 모체가 된 “5인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 위원회는 데오도르 모노아(의사), 기윰 뒤프로(장군), 귀스타프 므와니에(법률가),
루이 아삐아(의사), 그리고 앙리 뒤낭 등 5명의 제네바 시민으로 구성되었다.
1863년 10월 29일 국제적십자조직이 정식으로 시작되었으며, 

1864년 8월 22일에는 10개 조문의 국제조약 즉 제네바협약이 체결되었다.

장 앙리 뒤낭이 이렇게 부상자들의 생명보호를 위하여 몰두하는 동안
그의 몽제밀라 제분회사는 허물어져 가고 있었고, 1867년 그가 이사로 있던
제네바 신용금고가 파산하게 되면서 그는 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그러자 5인위원회는 사임을 주장하였고, 제네바를 떠난 뒤낭은 다시는 자기가 태어난
고향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한때 길거리의 벤치 위나 철도 대합실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으며 굶주림에 허덕이기도 했다.


그럴 무렵 프랑스 유제니황후의 부름을 받아 제네바협약을 육군 뿐만 아니라
해군까지 적용하기 위한 초안(제네바 제2협약)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1870년, 프랑스와 프러시아 간의 전쟁 중 150명이 넘는 적십자 봉사원들이 적군,
아군 차별없이 부상자들을 치료했으며, 앙리 뒤낭 역시 부상병 구호를 위하여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평화가 회복되자 뒤낭은 또다시 가난한 생활 속에 몸을 숨겨 버렸다.
그가 처음 내놓은 국제도서관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으나,
이로 인해 유네스코(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의 바탕이 마련 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1866년 이래 뒤낭은 유태인들의 팔레스타인 귀환과 포로의 보호를 위한
협약의 조인 등을 위하여 힘겨운 투쟁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887년 스위스의 하이덴에 도착한 장 앙리 뒤낭은 하이덴 양로원에서
자서전을 집필하며 지내게 되었는데, 우연히 스위스 지방신문 기자에 의하여
1895년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때는 이미 온 세계 인류가 적십자를 알고 있었으며 그가 제안한
『전쟁 중에도 자비를』이라는 표어를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또 전쟁터에서 버려진 채로 죽어갔을 수많은 부상자들이 적십자 덕분에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수년간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살아온 이 노인이 실제로 적십자의 창설자라는 것을 발견한
기자는 곧 기사를 썼고, 이 기사는 세계적으로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장 앙리 뒤낭은 또다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명성을 되찾은 
장 앙리 뒤낭은 1901년 제1회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받은 많은 상금을 스위스와 노르웨이의 자선단체들에게 남긴 채
하이덴 양로 병원 12호실에 그대로 머물다가, 
1910년 10월 30일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난 후 쥬리히 시립묘지에 묻혔으며, 사망 20년이 지나서야
건립된 묘비에는
“장 앙리 뒤낭, 1828년 탄생, 1910년 서거, 적십자의 창시자”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비록 그의 육신은 사라졌지만, 지금도 그의 정신은 온 세계에 남아 사람들의 마음 속에
사명감을 심어 주고 모범이 되어 주고 있다.

장 앙리 뒤낭의 활동은 고난에 처한 인류를 돕는 모든 곳에서 적십자를 통하여
매일매일 되풀이되고 있다.

 


 
적십자의 시작 / 앙리 뒤낭 일화   


 

 

 

 









▒ 적십자 운동의 아버지, 앙리 뒤낭 ▒


장 앙리 뒤낭
(Jean-Henri Dunant)
1828.5.8 ~ 1910.10.30
※ 생애

장 앙리 뒤낭은 1825년 어머니 앙트와네트와 
아버지 자크 뒤낭사이에서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제네바 시의회에서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어머니는 종교개혁자 장 깔뱅을 존경
하는 개신교신자였다. 앙리의 부모는 노블리스 
오블리주 곧 신분이 높은 자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
했다.아버지는 소년원에서 자원봉사를 했으며,
교도소 재소자들의 복지에 관심이 있었다. 부모의
영향으로 청소년기부터 환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구호하는 데 힘썼으며, 1844년 영국 복음주의자들
이 만든 기독교 사회운동 단체인 YMCA(기독교
청년연합회) 창설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힘이 아닌 아버지의 경제적인 도움을 
받아서 활동하는 한계를 발견하자, 북아프리카의 
알제리에 지역주민들의 빈곤퇴치를 위한 제분회사
(製粉會社), 즉 밀가루 공장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1858년 이탈리아 통일전쟁 때 제분회사의 수리권(水利權)을 얻고자 북이탈리아로 나폴레옹
3세를 찾아가던 길에, 솔페리노 전투에서 생긴 수천의 부상자를 만나 국적에 구애없는 구호에
참가했다. 이때의 경험은 《솔페리노의 회상》(1862년)에 실렸는데, 이 책에서 앙리 뒤낭은 
전시의 부상자 구호를 위한 중립적 민간 국제기구 창설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 제안은 
유럽 각국으로부터 큰 호응을 받아 1863년 국제적십자위원회가 창설되었고, 다음해인 1864년
정치, 종교, 이념의 중립성 유지, 국적에 구애없는 구호활동을 원칙으로 하는 제네바 협약이
체결되었다.

적십자활동을 하느라 부모가 물려준 유산을 포함한 전 재산을 모두 써버린 앙리 뒤낭은 1867년
고향인 제네바를 떠나 프랑스 파리에 이사하여 글을 옮겨적는 일을 하였다. 1871년 프랑스와 
독일간의 보불전쟁이 벌어지자 앙리는 프랑스 국방위원회의 보조를 받으면서 구호활동을 
하였다. 1892년에는 스위스출신 의사의 배려로 알프스가 보이는 양로원에서 1910년 별세할 
때까지 여생을 보냈다.1901년 박애정신과 평화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제1회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 업적

1828년 5월 8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장 자크는 부유한 사업가이자 제네바
공화국 대의원으로 제네바의 고아 수용소 자혜국장(慈惠局長)을 역임하였다. 어머니 안 앙트와
네트는 신앙이 깊은 칼뱅교도로, 그녀 역시 고아원 등에 대한 봉사에 힘썼다. 앙리 뒤낭은
부모의 영향을 받아 청소년기부터 환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힘썼는데, 그는 제네바의
빈민촌을 찾아가 봉사 활동을 했으며 친구들을 모아 빈민구호단체를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1852년 11월 30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창설된 기독교청년회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로 발전하였다. 

1853년 스위스 뤼랑에소테은행에 입사하여 아프리카 알제리로 갔으며, 그곳에서 식민지 
경영에서 막대한 이익이 창출되는 것을 목격하였다. 뒤낭은 미개지역의 개발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을 것을 꿈꾸며, 은행을 그만두었다. 그는 알제리에서 땅을 사들이고 제분회사(製粉
會社)를 설립하였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사업은 어려워지고 자금난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주변 친척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의 사업이 위험 부담이 크다는 이유로 거절
되었다. 
1859년 궁지에 몰린 뒤낭은 알제리를 식민 통치하고 있던 프랑스 황제를 찾아가 도움을 청할 
결심을 하고, 북이탈리아 전선에 머물며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지휘하고 있던 나폴레옹 3세를 
찾아갔다. 하지만 격전이 벌어지고 있던 터라 나폴레옹 3세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솔페리노의 격전에서 발생한 수만 명의 사망자와 부상자를 목격하였다. 그는 자신의 사업 
목적을 제쳐두고 부상자 구호에 참가하였으며 이때 그의 인생이 사업가에서 사회활동가로 
뒤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1862년 그 때의 경험을 《솔페리노의 회상 Un souvenir de Solferino》으로 출판하였으며 그는 전시의 부상자 구호를 위한 중립적 민간 국제기구 창설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 제안은 유럽 각국으로부터 큰 호응을 받아 1863년 국제 적십자(International committee
of the Red Cross: ICRC)가 창립되고, 다음해인 1863년 10월 26일 유럽 16개국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적십자(제네바)조약이 체결되었다. 전쟁터에서 부상자를 돌보는 것은 적군도
아군도 아니며 이들의 활동을 방해나 공격해서도 안되고 중립성을 인정한다는 내용을 명문화
하고, 흰바탕에 붉은색 십자가를 새겨넣은 상징을 표시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알제리에서 
벌여놓은 그의 사업은 점차 악화되어 감당하기가 어려워졌고, 그는 모든 재산을 잃고 엄청난
빚더미에 시달리게 되었다. 
또한 국제적십자 조직의 내분이 일어나 앙리 뒤낭은 회장의 자리에서도 물러나게 되었다. 
그는 가난하고 초라한 신세로 전락하고 최소한의 연금에 의지해서 살아가게 되었다. 
1901년 박애 정신과 평화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제1회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그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1910년 10월 30일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진채 스위스 하이덴(Heiden)에
서 죽음을 맞이했다. 적십자 운동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그의 생일인 5월 8일을 적십자의 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국제적십자위원회(International Committee of the Red Cross)의 창시자이며 최초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인도주의자 장 앙리 뒤낭(Jean-Henri Dunant, 1828년 5월 8일 ~ 1910년 10월 30일)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 본다.

 

1. 어린 시절

장 앙리 뒤낭은 1828년 어머니 앙트와네트와 아버지 자크 뒤낭 사이에서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자크 뒤낭은 제네바 시의회에서 의원으로 활동했고 어머니는 종교개혁자 장 깔뱅을 존경하는 개신교 신자였다. 앙리의 부모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는데 자크 뒤낭은 소년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등 교도소 재소자들의 복지에 관심이 있었다. 앙리는 이런 부모에게 좋은 영향을 받으며 성장해 청소년기부터 환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구호하는 데 참여를 하게된다.

 

2. 사회 운동

어려서는 개신교였지만 나눔의 실천을 중시하는 개혁교회(Reformed)으로 전향했고, 1844년 영국 복음주의자들이 만든 기독교 사회운동 단체인 YMCA(기독교 청년연합회) 창설에 참가하기도 한다. 북아프리카의 알제리 지역주민들의 빈곤퇴치를 위한 제분회사(製粉會社)를 설립하기도 한다. 이 외에 많은 업적 중 아리의 가장 큰 업적은 역시나 적십자 창립이었다.

 

3. 적십자 창립

1858년 이탈리아 통일전쟁 때 제분회사의 수리권(水利權)을 얻기 위해 북이탈리아로 나폴레옹 3세를 찾아가던 길에 솔페리노 전투에서 생긴 수천의 부상자를 만나게 된다. 앙리는 국적에 구애받지 않는 구호활동에 참가하고 이때의 경험을 저서 솔페리노의 회상(1862년)에 실었다. 이 책에서 앙리 뒤낭은 전시의 부상자 구호를 위한 중립적 민간 국제기구 창설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유럽 각국으로부터 큰 호응을 받아 1863년 국제적십자위원회가 창설되었고 다음해인 1864년 정치, 종교, 이념의 중립성 유지, 국적에 구애받지 않는 구호활동을 원칙으로 하는 제네바 협약이 체결되었다. 1864년부터 뒤낭의 생일인 5월 8일을 적십자의 날로 정하여 지금도 기념하고 있다.

 

4. 말년과 최후

적십자활동을 하면서 전 재산을 모두 써버린 앙리 뒤낭은 1867년 고향인 제네바를 떠나 프랑스 파리에 이사해 글을 옮겨 적는 일을 한다. 1871년 프랑스와 독일간의 보불전쟁이 벌어지자 앙리는 프랑스 국방위원회의 보조를 받으면서 구호활동을 한다. 1892년에는 스위스출신 의사의 배려로 알프스가 보이는 양로원에서 지내다 1910년 별세한다. 오늘날 적십자의 날이 5울8일인 것은 그의 생일을 기리기 위함이다.
 

5. 평가

앙리는 전 생애에 걸쳐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주의자로 1901년 적십자 창설과 박애정신과 평화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제 1대 노벨 평화상을 받는 영광을 얻게 된다. 그의 삶은 반전과 인류애를 위한 실천의 삶이었으며, 당시 카톨릭의 유럽 대륙에서 종교를 넘어 존경을 받았다. 오늘도 적십자는 사회적 약자와 전쟁터 등 전세계에 걸쳐 박애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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