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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성인 중 한 사람으로 노나라 사람. 유교의 시조로서 중국 최초의 민간 사상가이자 교육자. 어머니는 아들을 얻기 위해 니구산(尼丘山)에 가서 신령님께 기도를 올리고 공자를 낳았다. 그런 까닭에 공자의 이름 구(丘)를 니구산의 구(丘) 자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일설에는 그가 태어날 때 이마 가운데가 니구산처럼 골이 파여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구(丘)라고 지었다고도 한다. 어렸을 때부터 예(禮)에 뛰어났으며, 천하를 주유하며 인(仁)에 기초한 정치를 펼치려 했으나 실패하여 유가 경전을 정리·편찬하는 데 전념하고, 제자 양성에 힘썼다. 그 결과 3,000여 명의 제자들을 길러냈다. 공자의 사상을 담고 있는 《논어》는 그의 제자들이 스승이 죽은 후 편찬한 것이다.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정나라에 갔을 때, 어떤 사람이 동문 성곽 위에 서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공자를 보고 자공에게 말했다.
"당신 스승의 옷차림이 아주 궁색해 보여 마치 상갓집 개와 같구려."
이 말을 들은 자공은 그에게 벌컥 화를 내고는 나중에 공자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공자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도리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는 확실히 상갓집 개와 같다. 그의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구나."
세계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인 공자는 왜 스스로를 그토록 비하했을까? 상갓집 개란 '밥을 주는 사람은 있어도 돌아갈 집이 없다'는 뜻으로 천하를 떠돌아다니며 유세하는 공자를 비유한 말이다. 사마천1) 도 자신의 저서 《사기》에서 공자를 '상갓집 개'라고 불렀다.
공자는 노나라의 산둥성 취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숙량흘은 일찍이 노나라의 여자에게 장가가서 딸만 아홉을 두었다. 부인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숙량흘은 아들을 얻기 위해 첩을 얻어 아들 맹피를 낳았다. 그러나 그 아들은 다리가 불구였고 어려서 일찍 죽었다. 그러자 숙량흘은 64세가 넘은 나이에 다시 젊디 젊은 안씨의 셋째 딸 안징재에게 구혼을 하여 정식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공자다.
숙량흘은 키가 10척이나 되고 힘이 장사인지라 공자의 외할아버지 안씨도 딸에게 결혼하기를 권유하면서 그의 늠름한 대장부의 기상이 부럽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의 무용담 가운데에는 노나라의 군대가 성안에 포위되려는 순간, 그가 위에서부터 내리 닫히는 성문을 두 손으로 떠받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공자는 아버지를 닮아 체구가 당당하고 키도 보통 사람보다 훨씬 컸다. 공자의 외모에 대한 여러 기록을 간추려보건대, 그의 외모가 뛰어났음은 사실인 것 같다.
"공자의 눈은 크고 길며 이마는 앞으로 높게 나와 황제2) 의 모습이요, 팔은 길고 등은 거북의 모양이며 키는 아홉 자 여섯 치로 크다. 몸 둘레가 아홉 아름이나 되고, 앉으면 용이 서린 것 같고 일어서면 견우성(牽牛星)을 대하는 것 같다."
3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공자는 어머니의 슬하에서 성장했다. 안징재는 남편을 시아버지가 살던 곳에 장사지내고 절기에 맞추어 집에서 정성껏 제사지냈다. 이를 항상 주의 깊게 보던 공자는 동네 아이들과 놀면서 제기(祭器, 제사지낼 때 쓰는 그릇)를 늘어놓고 제사지내는 흉내를 내곤 했다. 나이는 어렸으나 그의 태도는 늘 예(禮)를 갖춤으로써 매우 어른스럽게 보였다고 전한다.
청상과부가 된 어머니는 가난했으나 오직 아들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물론 집이 가난한 탓에 공자가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는 못한 것으로 짐작되나, 그 향학심만은 대단했던 모양이다. 공자 스스로 "십여 호 밖에 안 되는 조그만 마을에 나만큼 성실한 사람은 있겠지만, 나만큼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고 말했으니 말이다. 그는 본격적으로 학문에 뜻을 세운 15세 이전에 이미 학문에 열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공자는 생계를 위해 노나라의 3대부 가운데 하나인 계손씨3) 집안에서 양곡을 관리해주었다. 이때 충실하게 일을 해주어 얼마 후에는 목장 관리인으로 승진했는데, 역시 가축이 잘 번식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주공을 제사지내는 태묘에서 조그마한 직책을 맡아보게 되었다. 공자는 매번 제사를 지낼 때마다 이것저것 묻기에 정신이 없었고, 사소한 절차 하나라도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어떤 사람은 공자를 비웃었다.
"누가 취푸의 이 청년이 예(禮)를 안다고 말하느냐? 만일 그가 예를 안다면 왜 태묘에 들어와 이것저것 묻는단 말인가?"
공자는 19세 때 어머니의 권유로 노나라에서 사는 송나라 사람 계관씨의 딸과 결혼했다. 그러나 계씨가 남편의 까다로운 성미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쳐버렸다는 설이 있다. 《논어》에 공자가 결혼한 지 1년 만에 아들을 낳았다는 기록 이외에는 아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또 '여자는 소인배와 같다'느니 '다루기 어렵다'느니 하는 공자의 여성관으로 보아 이 설은 사실인 것 같다.
한편 노나라의 소공(昭公)이 공자의 득남 소식을 듣고 이를 축하하기 위해 다산(多産)의 상징인 잉어 두 마리를 선물로 보냈다. 공자는 감격하여 아들의 이름에 잉어의 뜻을 덧붙여 공니라고 불렀다. 그런데 말단 관리인 공자에게 왜 임금이 직접 선물을 보냈을까? 아마도 공자의 학식과 인품이 궁중에까지 알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문이 퍼지자 제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공자의 나이 24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공자는 관습에 따라 어머니의 시신을 아버지의 묘에 합장하려고 하지만, 묘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공자는 어머니의 관을 임시로 매장해놓고 아버지의 묘를 찾아 나섰다. 다행히 어떤 노파가 묘의 위치를 가르쳐주어 공자는 어머니를 아버지와 합장할 수 있었다.
공자는 자기 집을 서당으로 삼아 사방에서 몰려드는 제자들을 가르쳤다. 젊을 때부터 시작한 이 교육 활동으로 수십 년 동안 무려 3,000명이 넘는 젊은이가 그의 서당을 거쳐 갔고, 그의 명성은 멀리 퍼져 나갔다. 하지만 정작 그가 고향의 관리가 되었을 때는 이미 그의 나이 50세였다.
이듬해에 노나라의 정공이 이웃 제나라와 화해 조약을 맺기 위해 길을 떠났다. 이때 공자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무관들을 대동하라고 건의했다. 연회장에서 제나라의 내인(內人)들이 칼춤을 추며 정공의 주위로 몰려들자, 공자가 큰소리로 춤을 중지시켜 위기를 넘겼다. 이 일을 구실로 제나라에 빼앗겼던 땅을 모두 돌려받게 한 공을 세워 공자는 최고 재판관 자리인 대사구에 올랐다.
54세에 공자는 재상(宰相)의 실권을 겸하는데, 그때 난신(亂臣)인 대부 소정묘를 사형에 처해 그 시체를 3일 동안 백성들 앞에 구경시켰다. 그리하여 그가 재상의 실권을 잡은 지 3개월 만에 나라의 질서가 바로잡혔다.
노나라가 나날이 융성하는 것을 질투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제나라 왕은 미녀 80여 명과 준마 120마리를 단장시켜서 정공에게 보냈다. 어리석은 정공은 여기에 빠져 날마다 춤과 노래로 세월을 보낼 뿐, 공자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공자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끝내 사임했다. 공자는 가슴 가득히 미련을 품고 노나라를 떠났다. 제자 자로가 앞장서서 성문 밖을 나가자 문지기 한 사람이 의아해서 물었다.
"선생은 어디서 오는 길이오?"
자로가 대답했다.
"공자가 있는 곳에서 오는 길이오."
그러자 문지기는 큰소리로 말했다.
"아! 세상이 이미 글러버린 줄을 알면서도 애써 행하는 그 사람 말이오?"
공자는 덕 있는 임금을 만나 어진 정치를 베풀게 함으로써 천하를 바로잡으려 했다. 그러나 끝내 그의 포부는 실현되지 못했다. 그는 56세에 모국인 노나라를 떠나 약 14년 동안 방랑했다. 그의 방랑 여정은 불행하고도 초라했을 뿐만 아니라, 몇 차례나 수난을 겪어야 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박해를 당했는가 하면,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오랜 방랑 생활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공자는 예부터 전해오는 갖가지 문헌을 수집하고 이를 편찬하는 일에 몰두했다.
공자는 현실 정치에서는 실패했지만 교육과 학문에서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공자는 스스로의 말과 몸가짐 하나하나를 통해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일종의 시범식 교육 방법을 사용했는데, 제자들과 함께 생활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무엇보다도 공자는 일하지 않는 인간, 몸으로 실천하지 않는 인간을 가장 싫어했다. 그리하여 자신이 몸소 실천하고 난 후에 제자들에게 충고했다.
"내가 하루 종일 깊이 생각만 해보았지만 얻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너희는 정 할 일이 없거든 잡담이나 하지 말고, 장기바둑이라도 두어라."
어느 날 예(禮)의 객관적 형식을 존중한 제자 자하가 물었다.
"안연4) 은 사람됨이 어떻습니까?"
"안연의 어질고 의로움은 나보다 낫지."
"자공5) 은 어떻습니까?"
"나는 자공의 말재주를 따라갈 수가 없다."
"자로6) 는 어떤가요?"
"자로의 용기에는 내가 못 따라가지."
"자장7) 은 어떤지요?"
"자장의 장중함은 나보다 나아."
자하는 다 듣고 나서 어리둥절해져 일어나면서 물었다.
"그들이 다 선생님보다 나은데, 왜 모두 선생님께 머리를 조아리고 스승으로 삼고자 하는지요?"
공자가 말했다.
"앉아 보아라. 말해줄 테니. 안연은 인의를 말할 줄은 알지만 형편과 상황에 따라서 일을 융통성 있게 처리하는 변통을 모른다. 자공은 말은 잘하지만 겸손하지 않아. 자로는 용감하지만 물러날 줄을 모르지. 자장은 장중하지만 남과 어울리지 못해. 그들은 각각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단점도 있거든. 그래서 다 나를 선생으로 삼고 배우려는 게다."
공자 나이 68세에 하나뿐인 아들이 죽었다. 2년 후에는 제자 안연이 죽었다. 가장 사랑하고 아끼던 제자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그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했다. 살고 싶은 의욕마저 잃어버렸다. 공자는 평소에 안연을 도의 계승자로 지목하고 있었으니, 그의 죽음은 곧 대도(大道)의 말로를 상징했다. 공자는 자기 아들의 죽음보다 안연의 죽음을 더 슬퍼하며 땅을 치고 통곡했다.
"하늘이 나를 죽이는구나! 하늘이 나를 죽이는구나!"
다음 해에는 재아8) 가 제나라에서 피살되었고, 그 다음 해에는 그를 가장 믿고 따르던 자로마저 전쟁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자로는 위나라에서 무참히 살해되었고, 그 시체는 젓으로 담겨져 공자에게 보내졌다. 그는 마치 양팔을 잘린 듯 몸부림쳤다.
"하늘은 내가 빨리 죽기를 재촉하는구나! 하늘은 내가 빨리 죽기를 재촉하는구나!"
죽음을 몇 달 앞둔 어느 날, 공자는 자공에게 말했다.
"나는 다시 말하고 싶지 않다."
"선생님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면 저희들은 무엇을 전하겠습니까?"
"저 하늘이 무슨 말을 하는가? 그래도 사계절이 운행하고 만물이 생장한다."
자공은 이 말을 듣고 공자의 마음이 예전 같지 않음을 알았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이 자조 섞인 말은 세상살이에 지친 그의 심중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얼마 후, 때는 화창한 봄이 오기 직전이었다. 이날도 자공은 아침 일찍이 공자에게 문안드리러 갔다. 공자는 지팡이를 들고 문 앞에서 산책 중이었는데, 탄식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태산이 무너지는구나. 대들보도 부러지는구나. 철인(哲人)마저 시들어버리는구나!"
그러고 나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자공이 급히 방으로 모시고 들어가 자리에 눕혔으나 공자는 그날부터 의식을 잃었다. 결국 7일 만에 여러 제자들의 비통 속에서 공자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73세였다.
장례식은 장엄했고, 제왕의 장례식이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고향인 산둥성 취푸에 있는 쓰수이 강가에 공자를 장사지냈는데, 이곳으로 제자들이 모여들어 3년 동안 산소 곁에 여막을 짓고 거처했다. 자공은 6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그 후 그곳에 100여 호의 가족이 모여 살아 마을 이름을 공리(孔里)라 불렀다고 전한다. 공자가 거처하던 집에는 그가 생전에 쓰던 옷, 관(冠), 거문고, 수레, 책들을 비치했으니 이것이 오늘날의 공묘다. 공자의 위패(位牌)와 신주(神主)를 모신 사당인 공묘를 문묘(文廟)라고도 하는데, 계속 넓혀나감으로써 지금은 중국 최대의 건물이 되었다.
공자는 죽은 후 성인으로 추앙되었고, 그 명예는 2,000년이나 계속 이어졌다. 그를 기념하는 사원이 곳곳에 세워졌고, 12세기 초에는 신으로까지 추대되었다. 단순한 인간이기를 원했으며 스스로 성인이 될 수 없다고 말했던 그가 결국 신격화된 것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결코 완벽한 인간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제자의 항의에 쩔쩔매며 변명하는 스승이었고, 낮잠을 잔 제자에게는 '더 이상 손댈 곳도 없는 인간'이라며 화를 내기도 했다. 제자 안연이 죽었을 때는 자기가 그토록 강조한 예법을 어기고 소리내어 통곡하던 사람이다. 때로는 자기 자랑을 늘어놓기도 했다.
상복 입는 기간을 1년으로 줄이자고 한 제자에게 '네 마음이 편하다면 그렇게 해도 되겠지'라고 해놓고, 그 제자가 나간 뒤에 다른 제자들에게 그를 비난하기도 한 사람이었다. 관청에 나가 일할 때는 윗사람에게 온순하고 아랫사람에게 엄격한, 다중인격자의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입맛은 까다로운 편이었고, 술은 아무리 마셔도 정신이 혼란해지지 않았다. 옷의 색상과 품위에도 세심한 주위를 기울였고, 작업복으로 오른쪽 소매가 짧은 옷을 직접 만들어 입었다고 한다.
1919년 5·4운동9) 이후의 신문화운동에서는 유교 사상을 봉건사상의 찌꺼기로 보는 등 공자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도 했다. 아편전쟁10) 이후 식민지가 되어버린 중국의 현실을 놓고 '유교가 중화민족을 망쳤다!'는 탄식이나 '공자교를 쳐부수자!'는 외침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오랜 세월을 두고 중국뿐만 아니라 동양, 더 나아가 전 세계에 압도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공자는 유교의 기본 가치관인 인·의·예·충을 가르치며, 춘추시대의 혼란기에 봉건적인 예(禮)의 질서를 인(仁)의 기초 위에 다시 세우려고 했다. 흔히 석가모니는 자비를, 예수는 사랑을,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공자는 인을 강조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인이란 무엇인가?
첫째, 인이란 인간 중심의 사상이다. 즉, 인이란 모든 일의 주체인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다운 인간이 되게 하려는 휴머니즘이다. 둘째, 인은 진실함과 성실성에 그 바탕을 두어야 한다. 셋째, 인의 경지는 끊임없는 자기 노력으로 달성된다. 인이란 욕망에 빠지기 쉬운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예절로 돌아가는 것, 즉 극기복례(克己復禮)다. 욕정에 빠진 육신을 죽이고 인을 이루기 위해서는 즉, 살신성인(殺身成仁)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공자는 학식과 덕행을 겸비하고 극기복례와 살신성인을 이룩한 사람을 군자(君子)라 부르고, 그 자신과 제자들의 교육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인이란 한 사람의 도덕적 완성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들의 인을 모아 커다란 인, 대동인(大同仁)을 이룩하는 것이 유교의 궁극적인 목표다. 공자는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올바른 통치자의 등장을 기대했다. 공자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과정을 거친 통치자가 나와 백성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모름지기 백성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백성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한 나라에 진정으로 도덕 정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임금과 신하,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각각 자기의 맡은 바 책임을 다해야 한다.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아들은 아들답게 행동해야 한다(君君臣臣父父子子).
공자는 지식과 덕을 갖춘 엘리트(군자)가 현실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제후국의 정치 현실을 안에서부터 개혁하고 나라의 기초를 튼튼히 하며, 또한 백성들의 복리를 증진시켜주기를 바랐다. 그가 이상으로 삼은 인간은 결코 현실 도피적이거나 금욕주의적인 성인이 아니고, 세계와 사회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모든 일에 절도를 지킬 줄 아는 명석한 판단력의 소유자, 즉 현자였다. 그의 언행을 전하는 《논어》에 따르면, 그는 유덕한 군자이자 좋은 교사였다. 그러나 후세에는 국가적, 교파적인 존경의 필요성에 따라 권위적 존재로 탈바꿈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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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동아시아 전 문명권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BC 551년 주의 제후국인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6예, 즉 예·악·사(활쏘기)·어(마차술)·서(서예)·수(수학)에 능통하고 고전에 밝았기 때문에 30대에 훌륭한 스승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유교전통에서 가장 성스러운 문헌으로 존경받는 <논어>는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 제2세대가 편집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장래의 지도자들을 위한 인문과목 교육과정을 처음 실시했고, 모든 사람에게 교육의 문호를 개방했으며, 배움이란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인격의 도야까지도 포함한다고 정의했다. 수십 년 동안 정치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정치라는 통로를 통해 인본주의 이상을 실현시키려고 애썼지만 자신의 이상을 펼 수 없음을 깨닫고 노나라를 떠났다. 67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며 저술과 편집에 몰두했다.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공부자(孔夫子)라고도 한다.
본명은 공구(孔丘). 자는 중니(仲尼). 그의 철학은 동아시아 전 문명권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유교의 역사는 공자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부처는 불교의 창시자이고 예수는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이지만 공자는 엄밀히 말해 유교의 창시자가 아니다. 공자는 자기 자신을 '옛 것을 살려 새로운 것을 알게 하는'(溫故而知新) 전수자로 여겼다. 공자는 제사·천제(天祭)·장례 등의 의식들이 수세기 동안 존속해온 이유를 알아내고자 하다가 옛 것에 대한 애착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과거로의 여행은 근원에 대한 탐구로 공자는 그 근원은 소속감과 일체감에 대한 인간의 절실한 필요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문화의 축적된 힘을 믿었고, 전통적 방식이 활력을 잃었다고 해서 장래에 다시 되살아날 수 있는 잠재력마저 없어졌다고는 보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역사관은 너무나 투철해서 자기 자신을 주(周)나라 때 꽃피웠던 문화적 가치와 사회적 규범이 존속되도록 전수시켜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공자의 생애는 그가 끼친 엄청난 영향력에 비해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중국인은 그의 생애가 '평범하고 현실적인 것'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공자 생애의 평범성과 현실성은 그의 인간성이 영감이나 계시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수양과 자기 운명을 장악하려는 노력의 결과임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자기). 평범한 사람도 노력하면 위대한 성현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유교적 전통에 뿌리 깊은 것이다.
또 인간은 교화(敎化)와 발전이 가능하고 개인적·사회적 노력을 통해 완벽하게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유교의 핵심사상이다.
공자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많지 않지만 정확한 연대와 역사적 배경이 뒷받침되어 있다. 공자는 BC 551년(襄公 22) 주의 제후국인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노나라는 주의 건국공신인 주공 단(旦)의 아들이 개국한 유서깊은 나라였다.
공자가 음력 8월 27일에 태어났다는 통설은 많은 역사가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나, 양력 9월 28일은 여전히 동아시아에서 공자탄신일로 널리 봉축되고 있다. 타이완에서는 이날을 '스승의 날'로 지정하여 국정공휴일로 지키고 있다.
공자의 고향 취푸[曲阜]는 지금의 산둥 성[山東省]에 있는 마을로, 주대 문화의 전통의례와 전통음악의 보존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공자의 조상은 귀족계급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공자가 태어났을 때 그의 가문은 영락한 평민에 지나지 않았다. 공자는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처음에는 어머니 안징재(顔徵在)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10대에 벌써 지칠 줄 모르는 향학열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말년에 "나이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十有五而志于學)고 회상했다.
공자는 창고를 관장하는 위리(委吏), 나라의 가축을 기르는 승전리(乘田吏) 등의 말단관리로 근무하다가 19세에 가정환경이 비슷한 여인과 결혼했다.
공자의 스승이 누구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공자는 특히 의례와 음악을 가르쳐줄 훌륭한 스승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공자는 6예(六藝)―예(禮)·악(樂)·사(射:활쏘기)·어(御:마차술)·서(書:서예)·수(數:수학)─에 능통하고 고전(古典), 특히 역사와 시(詩)에 밝았기 때문에 30대에 훌륭한 스승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교육철학).
공자는 모든 사람에게 교육을 개방하기를 원했고 교직을 직업으로, 즉 하나의 생활수단으로 확립시킨 첫번째 교사로 알려져 있다(→ 교수). 공자 이전의 시대에 귀족가문에서는 가정교사를 고용하여 특정분야에서 자식들의 교육을 담당시켰고, 정부관리들은 하급관리들에게 필요한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사회를 개조시키고 향상시킬 목적으로 일평생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한 사람은 공자가 처음이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자기수양으로부터 덕을 볼 수 있다고 믿었다. 장래의 지도자들을 위한 인문과목 교육과정을 처음 실시했고, 모든 사람에게 교육의 문호를 개방했으며, 배움이란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인격의 도야까지도 포함한다고 정의했다.
공자에게 있어서 교육의 일차적 기능은 군자(君子)를 훈련시키는 적절한 방법을 제공하는 것으로 끊임없는 자기향상과 지속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을 포함하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그는 배움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 즉, 배움의 목적은 자기발전과 자기실현이라고 역설하는 한편, 공직(公職)이 참교육의 자연스런 귀결이라고 생각했다. 공자는 속세에서 벼슬하고 싶어하는 자신의 야망을 비웃는, 학식있는 은자(隱者)들과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속세에서 벗어나 '금수(禽獸)와 벗하며 살자'는 유혹을 뿌리쳤고, 세상에 속해 살면서 세상을 변모시키려고 노력했다.
수십 년 동안 정치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정치라는 통로를 통해 인본주의 이상을 실현시키려고 애썼다(→ 정치철학).
공자는 40대말과 50대초에 이르러 중도(中都)의 장관으로 발탁되었고, 이어 노나라의 재판관이며 최고위직인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노나라의 군주 정공(定公)을 수행하여 참가한 노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벌어진 평화회의에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자의 정치적 생명은 그리 길지 못했다.
그가 왕에게 충성을 바치자, 당시의 노나라 세도가인 계손자(季孫子) 가(家)에서 견제해왔고, 또 그의 도덕적 엄정성 때문에 왕에게 환락의 즐거움만을 제공하던 왕의 측근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56세에 공자는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이상을 펼 수 있는 다른 나라를 찾아보기 위해 노나라를 떠났다.
공자의 정치적 좌절에도 불구하고 많은 제자들이 거의 12년에 이르는 천하철환(天下轍環)의 망명기간에 공자를 수행했다.
고결한 이상과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는 공자의 명성은 널리 퍼져 나갔다. 국경을 관리하는 관원 하나는 "하늘은 선생님을 목탁(木鐸)으로 삼을 것이오"라고 공자에게 말했다(〈논어〉 八佾篇 24장). 실제로 공자는 자기 자신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의의 신념에 불타 꾸준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실행하려고 하는 행동적인 양심으로 널리 알려졌다. 67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며 저술과 편집에 몰두하면서 고전의 전통을 보존하는 일에 열중했다.
BC 479년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사기〉에 따르면 그의 제자 중 72명이 '6예'를 통달했고 제자로 자처하는 사람의 수가 3,000명을 넘었다고 한다.
공자가 주창한 학자적 전통은 고대의 성군(聖君)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고학에 의해 공식적으로 확인된 최초의 왕조는 은(殷:BC 18~12세기)이지만 공자는 그보다 훨씬 이전의 시대를 유교전통의 시원(始原)으로 잡고 있다. 공자가 유교의 문화적 과정을 주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공자와 그 문인(門人)들은 자기 자신들을 전통의 한 부분으로 여겼다. 나중에 중국 역사가들은 이 전통을 유가(儒家)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전통은 전설상의 두 성군인 요(堯)와 순(舜)이 도덕정치를 펴던 2,000년 전으로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공자가 숭배했던 인물은 주공(周公:?~BC 1094)으로 주공은 '봉건적' 의례제도를 확충·완성시킨 인물로 여겨진다(→ 봉건제). 이 의례제도는 혈연과 결혼으로 맺어진 인척관계, 새로 맺어진 계약 및 오래된 협약에 바탕을 둔 것으로 상호의존을 강조하는 정교한 제도였다.
국가가 문화적 가치와 사회적 규범을 통해 국내 질서뿐 아니라 제후국들과의 연합관계를 유지하려면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는 정치이상에 통치의 바탕을 두어야 한다(→ 사회통제). 그 이상이란 천명에 의해 윤리적·종교적 권한을 갖춘 보편적 왕권을 확립하는 것과 법적 구속이 아닌 예의범절에 의해서 사회적 유대를 이루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주나라는 이같은 정치이상을 실현했기 때문에 500년 이상 평화와 번영 속에서 존속할 수 있었다.
주공의 정치철학에 영향을 받은 공자는 고대의 성현들로부터 배운 정치이상을 실현시킴으로써 주공에 뒤지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는 평생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공자는 자신의 정치이상을 실현시키지는 못했지만, 정치는 곧 도덕이라는 그의 철학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주대의 우주론에서 독특한 개념이었던 '천'(天)은 은대의 '상제'(上帝)와 유사한 개념이다.
은대의 왕들이 자신들을 상제의 후예라고 주장했던 것은 그들의 왕권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신성한 것임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주대의 왕들에게 있어서 '천'은 훨씬 의인화된 신(神)을 의미했다.
주의 왕들은 '천명'(天命)은 늘 똑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왕가의 후예들이 언제나 왕이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믿었다. 그 이유는 '민심이 천심'(民心則天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왕권을 유지하려면 필수적으로 덕을 갖추어야 했다. 주대에 인자한 도덕정치를 강조했던 사실은 수많은 청동기에 새겨진 명문(銘文)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은 은나라의 붕괴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했고 도덕정치라는 뿌리깊은 세계관을 확인시켜주는 것이기도 하다.
활기넘치는 봉건적 의례제도와 주왕가의 도덕적 통치 때문에 주왕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 그들의 왕국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BC 771년 중앙아시아로부터 공격해오는 이민족을 피하기 위해 도읍을 옮겨 현재의 뤄양[洛陽]으로 동진하게 되었다. 그뒤로 실권은 봉건영주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주왕가의 후손들은 명목상으로 왕의 지위를 유지했고 부분적으로 상징적인 통치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공자의 시대에 이르러 봉건적인 의례제도는 근본적으로 붕괴되었고 정치적 위기로 인해 도덕적 타락에 대한 우려가 매우 높아졌다. 상징적 통치의 중심이었던 주의 왕들은 더이상 왕국이 완전 붕괴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한 공자의 대응책은 먼저 인간이 되기 위한 학문에 힘쓴다는 것이었다(→ 휴머니즘). 그렇게 함으로써 수세기 동안 정치안정과 사회질서에 기여해온 사회제도, 즉 가정·학교·향리·제후국·종주국 등을 활성화시키려고 했다.
공자는 금권과 권력이 최고라는 현상태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개인의 존엄성, 사회 연대, 정치질서를 위해서는 개인의 인품과 지도자적 자질의 밑바탕이 되는 도덕심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느꼈다.
유교전통에서 가장 성스러운 문헌으로 존경받는 〈논어〉는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 제2세대가 편집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구전(口傳)과 문서로 보존된 공자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여 편찬된 이 책은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공자의 정신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현대의 독자들은 〈논어〉가 서로 관련이 없는 대화들을 되는 대로 모아 놓은 책이라고 비판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이같은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은 공자가 일상생활에서 제자들에게 실제적인 충고를 해주는 상식적인 도덕가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릇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논어〉는 여러 사람의 공동 기억을 기록한 것으로, 자신을 유생(儒生)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공자에 대한 기억을 계승시키고 공자의 생활양식을 현재에도 살아 있는 전통으로 전수시켜주는 문서로서 수세기 동안 숭배해왔다. 〈논어〉 속의 대화는 생각하고 움직이는 공자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때 공자는 혼자 동떨어져 있는 개인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중심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실제로 〈논어〉 속의 말씀은 공자의 인품, 즉 야망·공포·환희·신념·자기발견을 그대로 보여준다.
공자를 초점으로 하는 이같은 농축된 말씀을 편찬한 목적은 논증이나 사건의 기록을 위한 것은 아니고, 독자들이 지금도 계속되는 대화에 직접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논어〉를 통해 유생들은 수세기 동안 공자와의 대화에 직접 참여하는 장엄한 의식을 재현하게 되는 것이다.
〈논어〉에 나오는 다음 문장은 공자의 정신사(精神史)에 대한 짧은 자서전적 기술로 가장 중요한 신상발언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15세가 되어서 학문에 뜻을 두었고, 30세가 되어서 학문의 기초를 확립했고, 40세가 되어서는 판단에 혼돈을 일으키지 않았고, 50세가 되어서는 천명을 알았고, 60세가 되어서 귀로 들으면 그 뜻을 알았고, 70세가 되어서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것대로 하여도 법도에 벗어나지 않았다."(爲政篇 4장)
제자로서 그리고 스승으로서 공자의 일생은 교육이 끊임없는 자기 실현의 과정이라는 그의 이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의 제자인 자로(子路)가 공자의 인물됨을 잘 표현할 수 없었을 때 공자는 자로를 이렇게 도와주었다고 한다.
"너는 왜 '그분(공자)의 사람됨이 학문에 발분하면 식사를 잊고 그러한 것을 즐거워하여 근심을 잊어, 늙음이 닥쳐오리라는 것조차 모르고 계십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느냐?"(述而篇 18장)
공자는 그가 숭상하는 문(文)이 잘 전수되지 않고 그가 주창하는 학(學)이 잘 가르쳐지지 않는 데 대해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그러나 이같은 깊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배운 것을 기억해내는 능력, 끊임없는 학문연구, 지칠 줄 모르는 가르침 등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는 그 자신에게도 매우 엄격했다.
"덕(德)이 닦아지지 아니하는 것과 학문이 익혀지지 아니하는 것과 정의임을 알고도 그곳으로 옮겨가지 못하는 것과 선하지 않은 것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 내 근심이다."(술이편 3장)
그가 제자들에게 바랐던 것은 자발적인 향학열이었다.
"알려고 답답해 하지 않으면 지도하지 않고 표현하지 못해 괴로워하지 않으면 일깨우지 않는다."(술이편 8장)
공자의 문하생들은 다른 나이, 다른 배경, 다른 나라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모두 같은 마음을 가진 학자지망생들이었다. 그들은 공자의 이상에 동참했고 점점 더 분열되는 정체(政體)에 도덕심을 회복시키겠다는 공자의 사명의식을,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공유했기 때문에 공자의 문하로 몰려들었다.
공자의 사명의식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어렵고 때로는 위험하기조차 했다. 공자 자신도 실직·향수·기아, 때로는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가 숭상하는 문화의 생명성과 그가 주창하는 학문적 태도의 실현가능성에 대한 신념은 확고했다. 그는 그 자신과 문하생들에게 하늘이 도와주리라고 확신시켰다. 광(匡)에서 자신의 생명이 위험해졌을 때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문왕(文王:주나라의 창시자)이 돌아가버리고 나서는 그가 이룩한 문화가 나한테 전하여져 있지 않으냐? 하늘이 이 문화를 없애버리려 했다면, (나같은) 뒤에 죽을 사람들이 이 문화에 관계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하늘이 이 문화를 없애버리려고 하지 않는다면, 광의 사람들이 나를 어쩌겠느냐?"(子罕篇 5장)
강렬한 사명의식에 불탄 나머지 이같은 자신감을 드러낸 것을 보고 공자의 인물됨이 교만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공자는 자신은 절대로 성현이 아니며, 자신이 남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뿐(公冶長篇 27장)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에게 있어서 학문은 지식을 넓히고 자의식을 깊게 해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도 알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타고난 지식인도 아니고 지식의 도움없이 사회를 변모시킬 수 있는 그런 부류의 사람도 아니라고 솔직히 시인했다.
자신이 귀를 활짝 열어놓고 남의 말을 귀담아 듣고 그중에서 선한 것을 애써 행하며, 눈으로 두루 살펴 자신이 본 것을 마음 속에 남겨놓는 그런 사람이라고 말했다. 공자의 학문은 '비교적 낮은 수준의 지식'(술이편 27장)으로 대부분의 사람들도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런 의미로 볼 때 공자는 신에게 호소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선지자도, 진리를 환히 꿰뚫는 철학자도 아니었다. 단지 인(仁)을 가르치는 스승으로서, 자기 실현이라는 길에 나선 여행자들 가운데 다소 앞선 지점에 있는 여행자일 뿐이었다.
인을 설파했던 공자는 인간을 위한 자신의 포부를 이렇게 말했다.
"늙은이들은 편안하게 하여 주고, 벗들은 신용있게 대하도록 하여 주고, 젊은이들은 따르게 하여 주는 것이다."(공야장편 25장) 도덕사회를 세우기 위한 공자의 이상은 인간조건에 대한 전체론적 사상에서 출발한다. 자연 속에서의 인간조건 같은 추상적 이론을 펼쳐나가기보다는 어떤 특정한 때 주어진 구체적인 상황을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그 이해를 사상전개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공자의 목표는 정부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키고 정치와 사회 내에서 인(仁)을 배양하여 사회를 도덕적 공동체로 개조시키는 것이었다.
이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학자들의 공동체, 즉 군자의 모임이 필수적이었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曾子)는 군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군자는 도량이 넓고 꿋꿋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 소임은 중대하고 갈 길은 멀다. 인자함을 이룩하는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하니 또한 중대하지 아니한가? 죽은 후에라야 끝나니 또한 갈 길이 멀지 아니한가?"(泰伯篇 7장)
군자를 사회의 도덕적 선봉으로 내세웠다고 해서 아주 다른 사회계급을 만들겠다는 의도는 아니었다(→ 사회화). 군자의 소임은 수세기 동안 사회적 유대를 유지하는 가운데 백성들이 평화와 번영 속에 살 수 있게 한 사회제도들을 재검토하여 활성화시키는 것이었다.
이같은 사회제도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가정이었다.
공자는 〈논어〉 위정편 21장에서 왜 정치에 참여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옛 경전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대답했다. "〈서경 書經〉에 '효도하라, 오직 효도하라, 그리고 형제에게 우애있게 하라'고 했거니와, 이것을 행하는 데에 정치하는 도리가 들어 있으니 이 역시 정치하는 것이라, 일부러 정치한다고 나서서 무엇 하겠소?" 이같은 격언은 자기수양이 사회질서의 바탕이며 사회질서는 정치적 안정과 국가적 평화의 기반이 된다는 유교적 확신에 바탕을 둔 것이다.
가정 내의 윤리가 정치에 효력을 미친다는 주장은 정치는 곧 '바르게 하는 것'(政則正)이라는 유교철학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통치자는 먼저 자기자신의 행동을 바르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력보다는 도덕적 지도력과 모범적 가르침으로 통치하는 본보기가 된다는 것이다. 정부의 책임에는 백성들에게 식량과 신변의 안전을 제공하는 것만이 아니라 백성을 교육시키는 것까지도 포함된다. 법과 형벌은 치안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것이어야 한다. 사회의 조화라는 보다 높은 목표는 의례를 통해 나타난 덕치(德治)에 의해 성취된다.
의례란 상호간의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한 공동체 행동에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의례의 완전성을 보장하는 기본적 유교가치 가운데 하나가 효(孝)이다. 실제로 공자는 효가 도덕의 완성으로 향하는 첫걸음이라고 보았고, 최대의 덕목인 인(仁)도 효를 통해서 얻어진다고 보았다. 가문을 늘 염두에 두도록 배운다는 것은 자기중심주의를 초월하는 것이고, 현대심리학을 원용하여 말하면 폐쇄된 개인의 자아를 개방된 자아로 변모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효는 부모의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으며, 부모를 생명의 원천으로 인식하고 공경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효도의 목적은 부모와 자식을 모두 번영하게 하는 것이다. 유교에서는 효도가 인간이 되는 데 꼭 필요한 길이라고 보고 있다.
더욱이 유생들은 가정이라는 비유를 사회·국가·천하에 확대 적용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황제를 천자(天子:하늘의 아들), 왕을 부왕(父王:아버지되는 왕), 지방행정관을 친관(親官:아버지·어머니 같은 관리)으로 부르기를 좋아했다. 이같은 가정집중적인 명명법은 그 자체가 유교의 정치이상을 잘 보여준다. 공자는 '가사를 돌보는 것'(齊家)이 그 자체로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가정윤리가 단지 개인의 일일 뿐만 아니라 가정을 통해, 그리고 가정에 의해 공동의 선이 실현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나타낸 것이다.
공자는 인을 성취하는 과정이 "자기를 극복하는 예(禮)로 돌아가는 것"(顔淵篇 1장)이라고 정의했다.
공자는 자기 변모와 사회 참여라는 2가지 사항을 강조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는 충(忠:엄격)으로, 남에게는 서(恕:너그러움)로 대할 수 있었다(里仁篇 15장). 실제로 공자는 억측·장담·고집·이기심의 4가지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자한편 4장). 이렇게 볼 때 유교의 황금률이 왜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衛靈公篇 23장)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윤리학). 심원한 윤리적 교훈이 들어 있는 공자의 유업은 인(仁)을 얻기 위한 배움이 공동체적 노력이 되어야 한다는 '평범하고 실제적인' 인식에 잘 나타나 있다.
"인자한 사람은 자기가 나서고 싶으면 남을 내세워 주고 자기가 발전하고 싶으면 남을 발전시켜준다.
가까운 자기를 가지고 남의 입장에 비겨볼 수 있다면 그것이 인(仁)의 올바른 방향이라 하겠다."(옹야편 28장, 이상 〈논어〉 인용부분은 차주환역)
본명은 공구(孔丘), 춘추전국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사상가이자 정치가. 일찍 학문에 눈을 떠 많은 제자들을 길렀으며, 50세 때 잠시 관직에 있다가 그만두고 천하를 주유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고향에 돌아와 후학 양성과 고전 정리 작업에 힘썼으며 BC 479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말을 모아 제자들이 수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그중 유명한 것으로는 《논어(論語)》,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 《춘추(春秋)》 등이 있다.
중국 2,500년 역사를 일관되게 지배해온 이념이 있다면 아마도 유학(儒學)일 것이다. 진시황제 시절과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의 얼마 간을 제외하면 모든 중국인들의 정치, 교육, 사상을 지배한 이념이 바로 유교이다.
한 사람의 사상이 2,500년간 수많은 군주들과 정치가, 사상가와 교육가, 일반 민중들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이 때문에 유교를 종교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하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공자라는 인물을 석가모니나 예수와 함께 인류의 4대 성인으로 분류하는 데는 이견이 거의 없다.
유교의 역사가 공자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석가모니와 예수는 각기 한 종교의 창시자라 할 수 있지만, 유교의 창시자는 공자가 아니다. 그는 제사, 천제(天祭), 장례 등의 의식이 수 세기 동안 존속해온 이유를 알아내려 하다가 옛것에 애착을 느꼈고, 이러한 의식이 주는 소속감과 일체감이 사람들에게 안도감을 준다는 결론을 내렸다. 즉, 그는 '옛것을 살려 새로운 것을 알게 하는(溫故而知新)' 일을 자신의 의무로 삼았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 지금의 산둥 성으로 추정되는 노나라 창평에서 태어났다. 노나라는 주의 건국 공신인 주공 단(旦)의 아들이 개국한 나라였다. 공자가 음력 8월 27일에 태어났다는 통설에 대해서는 많은 역사가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양력 9월 28일은 동아시아에서 공자의 탄신일로 여겨지고, 타이완에서는 이 날을 '스승의 날'이라 하여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의 〈공자세가〉 편에는 공자의 출생에 대해 이렇게 나와 있다. "공자의 선조는 송나라 공방숙이다. 방숙은 백하를 낳고 백하는 숙량흘(叔梁紇)을 낳았다. 숙량흘은 안씨의 딸과 몰래 통정하여 공자를 낳았다. 출생하면서 머리 위가 볼록하다 하여 구(丘)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기》에 근거하여 해석하면 공자는 이른바 사생아라 할 수 있다. 공자의 집안은 송나라 왕실에서 연유된 명문가였으나 몰락하여 시골에 와서 살게 되었다. 아버지는 제나라와의 싸움에서 공을 세운 부장이었으나 공자가 세 살 때 사망하여 그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궁핍하게 자랐다. 하지만 그는 마을의 늙은 선생 아래서 열심히 공부를 했고, 어려서부터 종교의례, 제도, 관습 등에 밝았다.
17세에 공자는 창고를 관리하는 위리(委吏), 나라의 가축을 기르는 승전리(乘田吏) 등의 말단 관직에 올라 일을 보면서 노나라의 대학에서 《시경》을 배웠고, 함께 일하던 관리에게서 예법과 음악도 배웠다. 공자는 《시경》의 저자인 주공(주를 창건한 무왕의 동생으로 주의 행정조직을 확립했다)을 흠모하여 그를 마음의 스승으로 삼고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주공 시대처럼 예의가 바르고 평화로운 세상이 공자의 이상이었다.
공자의 나이 36세에 노나라 환공의 후예인 삼환씨(三桓氏), 즉 계손(季孫), 숙손(叔孫), 맹손(孟孫) 세 권세가가 난을 일으켜 노나라 왕인 소공이 쫓겨나고 나라가 세 조각으로 분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자는 소공을 따라 기원전 517년 제나라로 가서 제나라의 왕과 신하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예(禮), 악(樂), 사(射, 활쏘기), 어(御, 마차술), 서(書, 서예), 수(數, 수학)의 육례(六藝)에 능통하고 고전에도 밝았던 그는 곧 훌륭한 스승으로 주변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는 제나라에서 정명주의적 정치 이상에 대해 가르치고 예법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제나라 왕 경공은 그를 고문으로 세우려 했으나 예절의 번잡함과 비현실적인 면을 들어 대부 안영이 반대하자 뜻을 꺾고 말았다. 이에 실망한 공자는 2년 만에 귀국했고, 노나라 정공의 눈에 들어 다시금 지위가 오르게 되었다.
당시 여전히 혼란했던 노나라에서는 계손씨 밑에 있던 양호(陽虎)라는 자가 세력을 모아 정권을 얻기 위해 삼환씨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켰다. 삼환씨는 총력을 기울여 양호의 세력을 격파하였고, 당시 노정공의 신임을 얻고 있던 공자 역시 양호의 난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결국 양호는 거사에 실패하고 제나라로 도망치게 되었다. 양호의 난을 진압할 때 큰 역할을 했던 공자를 시기하여 권신 소정묘가 숙손첩과 함께 힘을 모아 공자에게 도전하려 했으나 공자의 서슬 퍼런 불호령을 듣고 결국 목이 잘렸다는 일화도 있다.
그 이후 노정공과 삼환씨는 공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지침을 따르게 되었다. 52세에는 노나라의 최고 직책인 대사구(大司寇)라는 지위까지 올라 노나라와 제나라의 강화회의에 참석하여 제나라가 빼앗아 간 노나라 땅을 돌려주도록 하였고, 백성들에게 예의를 가르치고 염치를 알게 하여 나라를 안정시켰다. 하지만 이미 삼환씨의 횡포로 노나라는 재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다가 노정공마저 사치와 도락에 빠져들기 시작하자 공자는 정치에 환멸을 느꼈다. 결국 자신의 큰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을 깨달은 공자는 벼슬을 사직하고 삼환씨의 압박을 피해 노나라를 떠났다.
이때부터 공자의 끝없는 유랑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는 위, 송, 조, 정, 진, 태 등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자신의 뜻을 펼 만한 이상적인 나라를 찾았으나 어느 나라에서도 공자를 반기지 않았다. 당시 각 나라의 왕들은 예의를 숭상하고 백성들을 위하기보다는 부국강병할 수 있는 빠른 방법을 찾고 있었다. 때문에 엄격한 도덕과 예를 설파하는 공자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공자는 자신의 뜻이 현재에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고 교육에 힘을 쏟게 되었다.
오랜 외유를 마치고 다시 노나라로 돌아왔을 때 공자의 나이는 이미 68세였다. 노나라에 돌아온 후 그는 후학양성에 온 힘을 기울였으며, 이전 시대의 고전을 집대성하는 저술활동에 몰두했다.
그의 말을 모아 제자들이 남긴 저서에는 《논어(論語)》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 《춘추(春秋)》 등이 있다. 《논어》는 공자의 언행을 문하생들이 모아서 엮어놓은 일종의 언행록이며, 《시경》은 고대 여러 나라의 구전가요를 제자들이 모아서 편찬한 것이다. 《서경》은 고대 중국 영웅들의 이야기를 모은 것이며, 《주역》과 《춘추》는 역사서이다.
아들인 백어가 죽고, 아끼던 제자 안회와 자로도 잇달아 세상을 떠나며 공자는 만년을 불행하게 지내다가 기원전 479년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공자의 유교 사상은 진나라 시황제 때 많은 탄압을 받았다. 법가 사상을 숭상하였던 시황제는 유학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행위에 반발하자 공자의 저서를 불태우고 유교를 논하거나 배우는 행위 일체를 금지했다. 그러나 진이 무너지고 한나라가 들어서면서 유교는 국가 이념으로 숭앙받았으며 나라의 인재를 뽑는 각종 과거시험에도 채택되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기 전까지 유교는 전 중국민을 지배하는 기본 이념이 되었고, 일본과 한국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공자의 기본 사상은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주나라 때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며, 그 방법으로는 '정명(正名)'을 들고 있다. 정명주의는 "명분이 바르면 말이 순하고, 말이 순하면 일이 이루어지며, 일이 이루어지면 예악이 흥하고, 예악이 흥하면 백성이 손발을 가지런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하면 명분이 바르게 되고 명분이 바르면 민심과 사회가 안정된다는 의미이다.
그는 전통의식인 친족윤리, 즉 효(孝)와 제(悌) 사상을 통해 모든 정치·사회규범을 도출해내고자 했으며, 법률과 형벌에 의한 통치를 반대하고 인(仁)에 바탕을 둔 덕치주의(德治主義)를 주장했다.
그가 이룬 주요한 업적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교육 개방이다. 공자 이전까지는 귀족 가문에서 가정교사를 고용하여 필요한 학문을 가르치고, 상급 관리가 하급 관리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공자는 모든 사람이 자기수양을 통해 덕을 닦을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미래의 지도자들을 위한 인문과목 교육도 처음으로 실시했다. 그는 배움이란 지식을 얻는 것뿐만 아니라 인격의 도야까지 포함한다고 정의했고, 배움의 목적은 자기발전과 자기실현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공직에 나아가 사회를 변모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이를 볼 때 현대 교육의 기틀을 세운 것이 바로 공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중국 경제발전의 낙후성을 유교에서 찾으려는 학자들도 있고, 공자의 가르침이 현실성이 없는 이상주의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중국 공산정부 수립 후 그런 움직임은 더욱 거세져 공자의 사상을 봉건 시대의 구습(舊習) 정도로 치부해 타파하려는 정치적인 움직임도 있었다. 그러나 공자의 유교 사상은 중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친 주요 사상이며, 현대에 이르러 서양에서도 주목을 받으며 아시아 전역에서 다시금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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无论你要去哪里,专心地去。
어디를 가든지 마음을 다해 가라. (공자, 도전명언)
记人之善,忘人之过。
상처는 잊어라. 은혜는 결코 잊지 말라. (공자, 용서명언)
君子耻其言而过其行。
군자는 말은 어눌해도 행동에는 민첩하다. (공자, 공부명언)
真正的知道是知道一个人的无知。
진정한 앎은 자신이 얼마나 모르는 지를 아는 것이다. (공자, 지식명언)
一颗不完整的钻石也比一颗完整的卵石强。
흠집 없는 조약돌보다는 흠집 있는 다이아몬드가 낫다. (공자, 자신감명언)
尊重自己,别人才会尊重你。
스스로를 존경하면 다른 사람도 당신을 존경할 것이다. (공자, 자신감명언)
性相似,习相远。
인간의 천성은 비슷하나, 습관의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든다. (공자, 습관명언)
生气的时候,想想后果。
화가 치밀어 오를 때, 그 결과를 생각하라. (공자, 자기관리명언)
在开始你的复仇之旅前,先挖好两个坟墓。
복수의 여정을 시작하기 전 두 개의 무덤을 파라. 너도 죽는다. (공자, 용서명언)
不要因错误觉得愧疚而因此让它们成罪恶。
실수를 부끄러워 말라, 실수를 부끄러워하면 실수가 죄악이 된다. (공자, 실패명언)
听而易忘,见而易记,做而易懂。
들은 것은 잊어버리고, 본 것은 기억하고 직접 해본 것은 이해한다 (공자, 공부명언)
君子先行其言,而后从之。
군자는 말하기 전에 행동하고, 그후 자신의 행동에 맞춰 말을 한다. (공자, 공부명언)
毋友不如己者。
자기보다 못한 자를 벗으로 삼지 말라. (공자, 논어, 친구명언)
过则勿惮改。
허물이 있다면, 버리기를 두려워말라. (공자, 논어, 인생명언)
忠实诚肯是第一原则。
충심과 성실을 첫 번째 원칙으로 지켜라. (공자, 논어, 믿음명언)
以直报怨,以德报德。
상처는 정의로 갚고, 은혜는 은혜로 갚아라. (공자, 논어, 정의명언)
士而怀居,不足以为士矣。
무위도식하는 선비는 선비라 일컬을 수 없다. (공자, 논어, 명예명언)
学而不思则罔,思而不学则殆。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공자, 공부명언)
坚定,忍耐,质朴,谦虚的人是接近善良的人。
강직함, 의연함, 소박함, 과묵함은 인(仁)에 가깝다. (공자, 논어, 겸손명언)
德不孤,必有邻。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나니 반드시 이웃이 있다. (공자, 논어, 고독명언)
我们最骄傲的并不是永远不跌倒,而是能够从每次失败中重新站起来。
가장 위대한 영광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음이 아니라 실패할 때마다 다시 일어서는 데에 있다. (공자, 노력명언)
智者动,仁者静,智者乐,仁者寿。
늘 행복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자주 변해야 한다. (공자, 논어, 인생명언)
任何事物都有它美丽而又不为人知的一面。
모든 것은 제각기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나 모든 이가 그것을 볼 수는 없다. (제 눈에 안경) (공자, 아름다움명언)
学如不及,犹恐失之。
능력은 그 수요를 결코 충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실제 능력은 필요한 능력보다 항상 부족하다.) (공자, 자신감명언)
花言巧语,又一副和善的脸色,这种人很少有仁德的。
교묘한 말과 간사한 외모는 진정한 미덕과는 거리가 멀다. (공자, 논어, 지혜명언)
知识的精髓是,拥有知识就要去运用它;而没有的时候,就是承认你的无知。
지식의 본질이란, 지식이 있으면 그것을 적용하는 것이고, 지식이 없으면 자신의 무식함을 자백하는 것이다. (공자, 지식명언)
见贤思齐;见恶思过。
좋은 사람을 보면 그를 본보기로 삼아 모방하려 노력하고, 나쁜 사람을 보면 내게도 그런 흠이 있나 찾아보라. (공자, 생각명언)
不知礼,无以立也。
예절의 법칙을 제대로 알지 않고서 인격을 쌓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자, 논어, 겸손명언)
君子坦荡荡,小人长戚戚。
군자는 마음이 평안하고 차분하나, 소인은 항상 근심하고 걱정한다. (공자, 논어, 행복명언)
性相近也,习相远也。
인간은 선천적으로는 거의 비슷하나 후천적으로 큰 차이가 나게 된다. (공자, 논어, 인생명언)
对于已经做过的事情,不必再去谈论,对于过 去的事情,不必去谴责。
이미 끝난 일을 말하여 무엇 하며 이미 지나간 일을 비난하여 무엇하리. (공자, 논어, 후회명언)
后生可畏,焉知来者之不如今也?
젊은이를 존중하라. 그들의 미래가 우리의 현재와 같지 않을지 어찌 아는가? (공자, 논어, 자신감명언)
君子之于天下也,无适也,无莫也,义之与比。
군자는 세상에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없이 오직 옳은 것을 따를 뿐이다. (공자, 논어, 지혜명언)
人与动物的不同只有那么一点点,然而却有很多又丢弃了这些。
인간과 동물은 미미한 차이가 있을 뿐이고, 대부분의 인간은 그 차이조차 없다. (공자, 채근담, 겸손명언)
我不是一出生就拥用知识的。我只是喜欢古老的东西并且认真地去探索的人。
나는 앎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옛 것을 좋아해 부지런히 탐구해 온 사람이다. (공자, 논어, 지혜명언)
为政以德、譬如北辰、居其所、而众星共之。
덕으로 정치를 하는 것은 북극성은 제자리에 있고 모든 별이 그 주위를 도는 것과 같다. (공자, 논어, 명예명언)
民可使由之,不可使知之。
백성들로 하여금 어떤 행동방식(도리)을 좇게 할 수는 있으나 그것을 이해시킬 수는 없다. (공자, 논어, 명예명언)
仁者先难而后获,可谓仁矣。
어진 사람은 난관의 극복을 제일 중요한 일로 생각하고, 성공 여부는 부차적인 것으로 본다. (공자, 논어, 성공명언)
见贤思齐焉,见不贤而内自省也。
어진 사람을 보면 그와 같이 되기를 생각하고, 어질지 않은 사람을 보면 속으로 스스로 반성하라. (공자, 논어, 인생명언)
已所不欲,勿施于人。
내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행하지 말라. (공자, 논어, 자기관리명언)
知之为知之,不知为不知,是知也。
알고 있을 때는 알고 있음을 밝히고 잘 모르고 있을 때는 모름을 시인하는 것이 바로 참된 지식이다. (공자, 논어, 지식명언)
君子求诸己,小人求诸人。
군자는 자신에게서 구하고, 소인은 남에게서 구한다. (일이 잘못되면 군자는 제 탓을 하고, 소인은 남을 탓한다) (공자, 논어, 성공명언)
志士仁人,无求生以害仁,有杀身以成仁。
뜻있는 선비와 덕이 있는 사람은 덕을 해하며 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삶을 희생하여 덕을 지켜낼 것이다. (공자, 논어, 명예명언)
未能事人、焉能事鬼。未知生,焉知死。
산 사람도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죽은 이의 영혼을 섬기겠는가? 삶에 대해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 알 수 있겠는가? (공자, 논어, 인생명언)
君子不可小知,而可大受也;小人不可大受,而可小知也。
군자는 작은 일에서는 진가를 알 수 없으나 큰 일은 맡을 수 있고, 소인은 큰 일은 맡을 수 없으나 작은 일은 잘 할 수도 있다. (공자, 논어, 자신감명언)
浸润之谮,肤受之愬,不行焉,可胃明也已矣。浸润之谮,肤受之愬,不行焉,可谓远也已矣。
마음에 서서히 젖어드는 비방과 살을 파고드는 상처와 같은 발언에도 흔들리지 아니하는 사람이야말로 현명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공자, 논어, 용서명언)
饭疏食饮水,曲肱而枕之,乐亦在其中矣。不义而富且贵,於我如浮云。
거친 밥 먹고 물마시고 팔베개하고 누워도 즐거움이 또한 그 가운데 있나니 의롭지 않게 얻은 부와 명예는 내게는 뜬구름과 같음이다. (공자, 논어, 인내명언)
我未見好仁者、惡不仁者、好仁者、無以尚之。
나는 아직까지 어진 것을 좋아하는 사람과 어질지 못한 것을 미워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어진 것을 좋아했던 자는 더할 나위가 없었더라. (공자, 논어, 노력명언)
知及之,仁不能守之;虽得之,必失之。
지혜가 넘치더라도 덕이 없다면 (권력을) 얻어도 반드시 잃을 것이다. (공자, 논어, 자기관리명언)
选择一份你热爱的工作,那么你一生都不觉得是在工作。
좋아하는 직업을 택하면 평생 하루도 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공자, 일명언)
[출처] 공자 명언 모음 (●디젤매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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