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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다시 만날 기약이 없기에, 오늘(22일)의 이별은 어쩌면 70여년 전 헤어지던 그 날보다 더 힘들었을지 모릅니다.
생사조차 모른 채 상봉의 날만 기다리고 있는 이산가족이 수만명인데, 한 번에 100명씩 만나는 이런 방식으로는 이 비극을 멈출 수 없습니다.
고은희 기자입니다.
[리포트]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자, 울지 말자던 오누이의 약속은 부질 없어져 버리고,
[김순옥/81/남측 오빠 상봉 : "세월이야 가보라지~"]
칠순을 넘긴 딸들은 백세를 앞둔 엄마에게 다시 만나자 합니다.
[김경영/71/남측 어머니 상봉 : "우리 또 만나자요, 어머니. 오래 사십시오 어머니. 아프지 마십시오."]
["다시 꼭 만납시다."]
내 아들 상철이, 이금섬 할머니가 이렇게 아들을 다시 부를 수 있을까요?
[이금섬/92/북측 아들 상봉 : "(아들이) 백살 살래! 백살 살면 한 번 만난대. 어떻게 백살을 살아."]
1년에 한 두번 100명씩 만나는 현 방식대로라면, 오늘 이 가족들이 앞으로 백년을 더 살아도 다시 만나는 건 불가능합니다.
현재 상봉 신청자 가운데 생존자만 5만 6천여명.
죽기 전 한번 만이라도 만나서, 이처럼 손이라도 잡아보고 싶은 이산가족들은 더 필사적입니다.
이번 상봉기간 CNN과 르몽드 등 주요 외신들은 이 기가막힌 한반도의 비극을 톱뉴스로 다뤘습니다.
[파울라 핸콕스/CNN 기자 : "북한에서 아주 가슴 찡한 장면들을 보셨을 겁니다."]
벌써 21차례 이산상봉, 모레(24일)부터는 2차 상봉단이 금강산을 찾게 되지만, 만남의 기쁨과 동시에, 오늘(22일)처럼 이별의 아픔 역시 찾아올 것입니다.
KBS 뉴스 고은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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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철이야, 상철이 맞아, 상철이 맞니?” “어머니!”
4살 아들은 70대 노인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피난길에 놓쳐버린 아들과 67년만에 상봉한 이금섬(92·여)씨. 그는 테이블에 앉아있는 아들을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온몸으로 끌어안았습니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뜻일까요. 두 사람은 맞잡은 서로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제21차 남북이산가족상봉행사는 오는 26일까지 열립니다. 남측 방문단은 총 89명입니다. 이씨처럼 부모와 자식 간 상봉은 7가족에 불과합니다. 사촌이나 조카 등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친척을 만나는 이산 가족들이 대다수죠. 3촌 이상 가족을 만나는 이들이 42명(45.2%)으로 가장 많습니다.
6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산가족 생존자 중 연간 4000명 정도가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이산가족 상봉에서 90세 이상이 37.1%(33명)이고, 80~89세는 49.4%(44명) 등으로 80세 이상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70~79세는 13.5%(12명)입니다.
현재 대면 상봉 규모는 한 회에 불과 100명. 지난 2017년 기준,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13만2603명 가운데 생존자는 5만7059명입니다. 연간 100명씩 대면 상봉을 한다면 570년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마저도 북한이 이산가족 자료 미비, 추적의 어려움을 들어 상봉 규모 확대에 난색을 표하고 있어 어려움이 예상됩니다.
또 상봉 행사가 정치적 상황에 민감하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지난 2015년 10월 20차 남북 이산가족상봉이 열렸으나 이듬해 1월 북한의 6차 핵실험 이후 상봉 행사가 2년 10개월 동안 끊겼습니다. 이산가족들은 기약 없는 기다림을 계속해야 했죠.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 확인이라도 하고 편지를 주고받고 싶은 마음. 이산가족들의 바람은 크지 않습니다. 상봉 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 대한적십자사로부터 북측 가족의 소식을 듣는 이는 많지 않죠. 여기에 포함되지 못한 대다수는 애만 태우고 있습니다. 암암리에 중국과 일본 등 브로커들을 통해 서신교환을 하는 방법을 찾아도 문제입니다. 수수료가 들어가는 데다 헤어진 가족이 맞는지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꼭 만날 날이 오겠지. 정말 꿈같다. 잘 있거라” 장사인(78)씨가 지난 2008년 중국을 거쳐 형에게서 받은 편지입니다. 장씨 형은 6.25 전쟁 당시 국군포로로 납북됐습니다. 수백번 곱씹어 봤을 편지. 죽은 줄만 알았던 형의 육필(肉筆)에 장씨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형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기도 했죠. 그러나 두 사람은 끝내 만나지 못했습니다. 지난 2013년 장씨는 형의 사망 소식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 걸까요. 이산가족 상봉 행사 정례화 또는 화상상봉, 서신교환을 늘리는 등 방법은 여러가지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말처럼 남과 북의 담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정진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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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 가족 중에 하나인 85살 이재일 할아버지 가족의 사연입니다.
이재일 할아버지는 동생인 76살 이재환 할아버지와 함께 금강산에 왔습니다.
첫 단체 상봉에서 1997년에 이미 숨진 북측의 형 대신 조카인 53살 리경숙 씨와 50살 리성호 씨를 처음으로 만났는데요.
상봉이 이뤄진 지 10분쯤 지났을 때 이재환 할아버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조카들이 아버지의 나이와 사망 시점도 모르고 있었다며 가족이 아닌 것 같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결국 북측 보장성원들이 호적까지 찾아와서 확인을 시켜줬고, 이후 상봉 행사에서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이 할아버지는 끝내 의심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반면, 형 재일 씨는 조카들이 혈육이 맞다고 수긍하는 분위기였다고 전해집니다.
대한 적십자사 관계자는 촌수가 먼 가족들이 생전에 처음 만나다 보면 핏줄이 맞는지 반신반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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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서울=연합뉴스) 공동취재단 이정진 기자 =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또다시 긴 이별을 감내해야 할 이산가족들은 언제 다시 볼지 모를 가족들과 눈물로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2박 3일간의 상봉행사가 모두 끝난 뒤 22일 오후 1시께 남측 이산가족들이 귀환 버스에 올라타자 북측 가족들은 마지막이 될지 모를 가족들의 모습을 눈에 담고자 버스 창문에 줄지어 섰다.
한신자(99) 할머니의 북측 딸 김경영(71) 씨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자 "(버스) 몇 번, 몇 번이에요"라고 외치며 한복 치마를 발목 위까지 걷어 올리고 다급히 뛰어나왔다.
한신자 할머니도 딸들이 나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며 창문을 두드리며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마침내 딸이 도착하자 모녀는 서로 창문을 격하게 두드리며 "아이고. 아이고" 울음을 터트렸다.
김경영 씨는 결국 "어머니, 어머니, 건강하시라요"라며 오열했다.
김경영 씨의 언니 김경실(72) 씨도 곧 도착해 버스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어머니. 어머니"라고 통곡했다.
한신자 할머니는 자리에서 일어선 채로 창문을 두드리며 "울지 마라"고 다독였지만, 자신도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창문이 열리지 않아 입 모양으로 대화할 수밖에 없어 아픔을 더했다.
북측 딸들의 키보다 버스 창문이 높자 남북 양측의 관계자들이 할머니들을 안아 올려 모녀가 창문을 사이에 두고 손바닥을 마주할 수 있었다.
북측 딸들은 출발하는 버스를 계속 따라가려다 북측 관계자들의 제지를 받고서야 걸음을 멈췄지만, 오열은 계속됐다.
최동규(84) 할아버지의 북측 조카 박춘화(58) 씨도 버스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이렇게 헤어져야 하나. 이렇게 기막힌 게 어딨니. 통일되면 이런 거 안 하잖아. 이게 뭐야 이게!"라며 울부짖었다.
고호준(77) 할아버지는 북측 가족과 차창에 손을 맞대며 오열하다 차문이 잠시 열리자 잠시 내려 북측 조카를 부둥켜안았다. 고호준 할아버지가 "어이구 자슥아. 어떻게 떠나니. 떼어놓고 가려니 발이 안떨어진다"고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북측 조카는 "삼촌. 울면 안 됩니다. 통일이 되면 건강하게 다시 만납시다"라며 울면서 위로했다.
권석(93) 할머니의 북측 손자 리철(61) 씨는 손가락으로 버스 창문에 '조국통일'이라고 쓴 뒤 손을 흔들었고, 차 안에 있던 남측 가족들은 손가락으로 하트를 그려 보였다.
김병오(88) 할아버지도 버스 밖 북측 여동생 김순옥(81)을 향해 하트를 그렸고 여동생도 하트로 화답했다.
이관주(93) 할아버지의 조카 리광필(61) 씨는 창문에 막혀 소리가 들리지 않자 손바닥에 볼펜으로 "장수하세요"라고 써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이관주 할아버지는 울다 끝내 선글라스로 눈을 감췄다.
남측 이산가족을 태운 버스는 오후 1시28분께 금강산을 출발, 오후 3시15분께 동해선 육로를 통해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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