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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訓民正音 ]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다. 목판본으로 2권 2책이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에 소장되어 있다. 책으로서의 훈민정음에는 "나라말씀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니…"라고 한 《훈민정음예의본》과, 글자를 지은 뜻과 사용법 등을 풀이한 《훈민정음해례본》이 있다.
전자에 대해서는 《세종실록》과 《월인석보(月印釋譜)》 첫권에 같은 내용이 실려 있어 널리 알려졌으나, 후자에 대하여는 1940년 발견될 때까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한글의 형체에 대하여 고대글자 모방설, 고전(古篆) 기원설, 범자(梵字) 기원설, 몽골문자 기원설, 심지어는 창살 모양의 기원설까지 나올 정도로 구구한 억설이 있었으나, 이 책의 출현으로 모두 일소되고 발음기관 상형설(象形說)이 제자원리(制字原理)였음이 밝혀졌다.
후자는 예의(例義)·해례(解例)·정인지 서문 등 3부분 33장으로 되었는데, 예의는 세종이 직접 지었고, 해례는 정인지(鄭麟趾)·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최항(崔恒)·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 집현전(集賢殿) 학사가 집필하였다. 정인지가 대표로 쓴 서문에는 1446년 9월 상순으로 발간일을 명시하고 있어, 후일 한글날 제정의 바탕이 되었다.
1940년까지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臥龍面) 주하동(周下洞) 이한걸가(李漢杰家)에 소장되었던 해례본은 그의 선조 이천(李蕆)이 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세종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었다. 이 책이 발견되어 간송미술관에 소장되기까지에는 김태준(金台俊)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발견 당시 예의본의 앞부분 두 장이 낙장되어 있었던 것을 이한걸의 셋째 아들 용준(容準)의 글씨로 보완하였다. 용준은 안평대군체(安平大君體)에 조예가 깊었으며, 선전(鮮展)에 입선한 서예가였다.
낙장된 이유는 연산군의 언문책을 가진 자를 처벌하는 언문정책 때문에 부득이 앞의 두 장을 찢어내고 보관하였다고 하며, 이를 입수한 전형필은 6·25전쟁 때 이 한 권만을 오동상자에 넣고 피란을 떠났으며, 잘 때에도 베개 삼아 베고 잤다는 일화가 전한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훈민정음 [訓民正音]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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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 訓民正音 ]
유네스코가 1989년 6월 21일 ‘세종 대왕상’을 만들었대. 우리나라는 비교적 문맹1)자가 적은 편이지만 세계적으로는 아직도 문맹자가 매우 많아. 그래서 유네스코는 지구촌의 문맹 퇴치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한 단체나 개인을 선정해 세종 대왕상을 주기로 한 거지. 그런데 왜 유네스코는 이 상의 이름을 ‘세종 대왕’이라고 했을까?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임금, 세종 대왕
조선의 네 번째 임금은 세종 대왕이야. 세종 대왕은 태종 임금의 셋째 아들(충녕 대군)로 태어났지. 태종은 원래 맏아들인 양녕 대군을 세자로 삼았어. 그런데 양녕은 세자 자리에 걸맞지 않은 행실을 자꾸만 해서 결국 세자 자리에서 쫓겨나게 돼.
그러자 태종은 총명하고 학문이 뛰어난 충녕을 세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었지. 그 결과 우리 역사에서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한 임금인 세종 대왕이 즉위하게 되었어.
그런데 왜 우리는 세종을 다른 임금과는 달리 세종 대왕이라고 부를까? 그의 업적을 살펴보면 그 까닭을 쉽게 알 수 있어. 먼저 세종은 왕도 정치를 내세워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를 펼치고자 했어. 그래서 유능한 인재를 널리 구하고, 황희 정승처럼 청렴한 재상을 관리로 앉혀 깨끗한 정치를 했지.
다음으로 여진족을 정벌하거나 왜구를 쫓아내 영토를 확장하고 국방을 튼튼히 했어. 또 여러 가지 제도를 정비하고, 집현전2)을 설치하여 인재를 키우고 문화를 발달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지.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는 과학 기술도 놀랍도록 발전했어. 하지만 세종 대왕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훈민정음을 만든 거야. 이제 훈민정음에 대해 알아볼까?
세종 대왕은 왜 한글을 만드셨을까?
조선 시대 이전까지 우리 조상들은 한자로 글을 적었어. 그러나 우리말을 한자로 옮기는 것은 너무 어려웠지. 게다가 한자는 복잡해 먹고 살기 바쁜 백성들이 배우기에는 어려운 글자였어. 당연히 양반들만 글자를 사용했던 거지. 세종 대왕은 백성들이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누구나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는 ‘훈민정음’, 즉 한글을 만드셨어.
하지만 훈민정음 창제4)는 출발부터 어려움이 많았어. 최만리 등의 학자들이 “중국과 다른 문자를 만드는 것은 큰 나라를 모시는 예의에 어긋나며, 스스로 오랑캐가 되는 것입니다.”라며 격렬히 반대했거든.
그래도 세종 대왕은 뜻을 굽히지 않고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눈이 짓물러 한쪽 눈을 뜰 수 없을 때까지 연구했지. 그 결과 1443년에 드디어 훈민정음이 창제되었어.
훈민정음은 새로 만든 글자를 뜻하기도 하지만, 1446년 펴낸 훈민정음 해설서인 책이름이기도 해. 《훈민정음》은 한글을 창제한 목적과 세종이 쓴 서문, 한글을 만든 원리와 해례5) 등이 상세히 설명된 책으로, 우리나라 국보 70호이고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지정되었어.
특히 세종 대왕은 훈민정음 서문에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어도 그 뜻을 펴지 못한다. 내가 이것을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들이 쉽게 익혀서 날마다 편리하게 사용하기를 바란다.”라고 했어.
또 훈민정음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훈민정음으로 쓴 《용비어천가6)》, 《석보상절7)》, 《월인천강지곡8)》이라는 여러 종류의 책을 펴내기도 했지.
한글은 주로 누가 사용했을까?
한글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양반들은 상스러운 글자라는 뜻의 ‘언문(諺文)’, 소리를 나타내는 방법이 절반밖에 안되는 것 같다며 ‘반절’이라 부르면서 무시했어. 또 당시 여자들은 한문을 읽고 쓰는 것을 어려워했는데, 때마침 훈민정음이 생기자 궁궐과 양반집 여자들이 맨 처음으로 훈민정음을 쓰기 시작해서 ‘암글’이라고도 불렀대.
그 뒤 훈민정음의 편리함이 널리 알려져 상민 신분의 남자들도 쓰게 되면서 아주 빠르게 퍼져 나갔지. 그 결과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고 독창적인 우리 고유의 글자를 가지게 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