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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주나라 말기 전국시대의 유물론적 경향의 유가(儒家).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 대하여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성). 그 시대는 전국의 7대 강국이 중국의 천하 통일을 지향하면서 격렬하게 대립하고, 그 와중에서 진(秦)이 통일 사업을 강력히 추진하였던 시대였다. 그는 객관적 조건이 무르익고 있던 중국 통일의 과제에 몰두하여, '군거화일'(群居和一)이라고 하는 질서를 지향하고 '예의'(禮義)라는 수단을 제기하였다. '군거화일'이란 천자, 제후, 사대부, 관인백리(官人百吏), 서민이 직분에 따라 일을 하고 각각 그 '직분'(職分)에 만족하는 질서를 일컫는다.
'예의'는 이 '분'(分)을 결정하는 기준(귀천지등貴賤之等, 장유지차長之差, 지우능불능지분知愚能不能之分)이며, 선왕(先王 : 성인聖人)의 제작(制作)에 따른 것이다. 이 '예의'의 '분'은 '천인(天人)의 분'(分)을 전제로 하고 있고, 인간의 자연에 대한 공통성이 이것에 의해 크게 발휘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부국강병의 문제도, 인재를 양성하는 문제도, 모두 '예의'에 의거하여 해결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예의'는 법가의 '법'(法)에 접근하고 있고, 인식론상으로는 도가의 영향이 농후하다. 그는 유가의 입장을 지키면서, 진(秦)의 입장에 서서 제가(諸家)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흡수하여 선진사상(先秦思想)의 집대성자라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순자』는 그의 언론(言論)을 모은 것이다.
사회에 대해 건강한 관심을 갖도록, 그리고 복잡다단한 인간 관계를 도덕적으로 해결하여 보다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원만한 사람을 키워 내는 것이 유가 사상의 큰 목적이다. 그래서 유가 사상은 정치철학이자 사회철학이며, 교육철학이자 인생철학이기도 하다. 유가의 경전인 『시경』이나 『서경』, 『주역』 등이 확립된 시기를 주(周)나라 초로 본다면, 유가 사상은 5~6백 년의 온축을 거쳐 마침내 공자에 의해 처음으로 집대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로부터 3백여 년 동안 어떤 외부 사상의 유입도 없이 중국 내에서 자생한 제자백가의 사상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빛나는 학문적 성취 중 하나다. 우주의 작동 원리에서 인간 내면의 심성 문제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상상력과 치밀한 탐구로 수많은 학파와 사상가들이 출몰하였다. 『순자』는 정통 유가를 자임한 순황(荀況)이 제자백가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초기 유가 사상을 두 번째로 집대성한 탁월한 학문적 업적을 담은 책이다. 전통 시대 중국을 지배해 온 정치적 이념으로서 유교 사상은 순자의 영향이 매우 컸다. 순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듣지 않음은 듣느니만 못하다. 듣는 것은 보느니만 못하다. 보는 것은 아느니만 못하다. 아는 것은 행하느니만 못하다. 학문은 그것을 행하게 되었을 때 그친다.
『순자』를 읽으면 관념적 도덕이 아니라 실천적 도덕을 생각하게 된다. 또한 갈등하는 현대 사회에서 지식인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리고 냉혹한 법치와 자본의 지배를 넘어서 인류를 위한 새로운 이념적 대안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순자는 정치적으로 부국강병과 실리를 숭상하던 전국 시대 말기에 왕도(王道)에 대해 목청을 높였으며, 예의로 질서를 잡아가는 예치(禮治) 국가를 세우라고 권고하였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복잡한 세금과 요역을 과감히 줄이고 투기 세력을 억제하여 농업 중심의 경제 질서를 안정시키자고 주장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신분의 대변동 시대에 오히려 신분 질서의 확립을 강조하는 한편, 도덕적ㆍ학문적 성취를 통한 신분 변동은 긍정하였다. 당시 중국 천하의 통일이 눈앞에 닥친 시대 분위기와 맞물려 제자백가의 다양한 주장들이 통합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각 학파의 사상가들은 다른 학파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였으며, 그들의 저작 또한 백과사전과 같은 성향을 띠게 되었다. 『순자』는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순자의 시대는 정치적으로 전국칠웅이 첨예하게 대립하였고 사상적으로 제자백가의 다양한 경쟁이 절정에 이르렀으며, 사회적으로 계급이 동요하고 신분 변동이 극심했다. 그래서 국가간의 합종연횡이 난무하고 부국강병을 추구한 법가 사상이 우세한 환경이었지만 순자는 최고의 학자로서 스스로를 위대한 유가 사상가로 자임하였다. 유가 내부로 볼 때 당시는 공자를 추종하는 세력들 사이에 분파 현상이 치열하고, 특히 맹자(孟子)에 의해 공자 사상의 정치적 의미가 더욱 풍부해진 시기였다.
정부 사업으로 춘추전국시대 서적을 총정리했던 한나라 유향(劉向)은 순자가 남겼다는 수만 자의 문헌과 '손경의 책'이란 이름으로 돌아다닌 322편의 글 가운데 중복된 290편을 빼고 32편으로 확정하여 재정리하였다. 그리고 『손경신서(孫卿新書)』라 이름을 붙인 다음 「서록(敍錄)」을 달았다. 순자 본인의 초기 저작들은 그의 생전에 이미 널리 유행했었으며, 현존 『순자』의 상당 부분은 그 초기 작품들로 생각된다. 나머지는 그의 제자들의 기록과 후인들이 순자의 이름을 빌어 지은 글 혹은 다른 작품들이 뒤섞여 있다. 하지만 『순자』의 모든 내용은 본인의 친필 저작 여부와 무관하게 일관된 사상체계를 갖추고 있어 순자의 기본 사상을 연구하는 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현재 전해지는 『순자』 20권은 당나라 양량(楊倞)1)이 두 차례 정리하고 재편집하여 주석을 덧붙인 것이다. 『순자』는 대부분 각 편의 핵심 주제를 편명으로 삼고 있다. 그 30여 편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하늘과 인간의 일, 정치ㆍ경제와 논리학에 이르기까지 백과사전식의 종합적인 학문을 다루고 있다.
당나라 말기 한유(韓愈)가 "맹자는 순정하고도 지순하지만, 순자는 대체로 순정하되 조금 하자가 있다"고 평한 이래 송나라 이후의 성리학에서는 한결같이 순자 사상을 부정하고 멀리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은 주로 『순자』의 「성악(性惡)」2)편과 「비십이자(非十二子)」편에 집중되었을 뿐, 『순자』 전체를 진지하게 연구하거나 주석한 사람은 없었다. 순자가 재조명된 것은 청나라에 이르러서이다. 많은 유학자들이 양량 주석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 위서 여부를 고증하였으며, 해독이 어려운 글자에 상세한 해설을 덧붙였다. 이들을 종합하여 『순자』에 관한 가장 상세하고 완전한 주석서 『순자집해(荀子集解)』를 낸 사람은 왕선겸(王先謙)3)이다.
순자는 현세의 군주를 지극히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현실 군주를 위대한 성왕으로 만들어 도덕적인 나라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그 방법은 신분에 기초한 예의를 통해 사회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 사고의 바탕에는 인위적인 노력으로 하늘을 제어하고 악한 본성을 교화하며, 각종 폐단을 해소해야 한다는 사유가 깔려 있다.
1) 천생인성(天生人成), 성악(性惡), 정명(正名)
순자는 사람의 사회성을 중시하였으며, 국가 권력을 개인의 자유보다 우선시하였다. 그는 사회 질서의 안정을 위한 예(禮)의 두 가지 기능을 중심으로 사유하였다. 하나는 신분 등급ㆍ도덕적 성취 등 각종 질서를 분명하게 구분시켜 주는 인위적 기능 즉 명분(明分)이며, 다른 하나는 인류로 하여금 원만하고 만족스러운 집단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기능 즉 사군(使群) 기능이다. 순자 사유의 바탕은 이 두 문제를 중심으로 엮어져 있다. 순자의 우주관과 인생관은 한마디로 자연 세계가 인문 세계에 의해 주재된다는 천생인성(天生人成)4)이다.
천지의 기운으로 세상만물이 생겨났으니 이들을 조화롭게 꾸미고 성취시키는 것은 사람, 즉 성인의 일이다.
하늘의 도와 인간 행위의 조화로 이 세계가 이루어졌으며, 예의라는 인간의 힘이 개입되었을 때 하늘은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다는 사고다. 순자는 하늘과 인간을 완전히 나누어 생각하면서 하늘을 그저 불변하는 자연체로만 파악한다. 인간 세상의 치란(治亂)은 하늘 때문이 아니라 인위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사람 스스로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초점은 인위, 즉 예를 강조하는 데 있었다.
순자는 사람의 본성을 악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본질적ㆍ이성적으로 악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타고난 본능 혹은 동물적 욕망의 결과가 악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탄생 후 사회적 존재가 되면서 인간의 악한 성질이 발현된다는 의미다. 그 발현 양태는 경쟁과 다툼이며 결과는 사회적 혼란이다. 순자가 성악설을 제기한 목적은 인위적인 교육과 감화를 통해 인간의 악한 성질을 바꾸어 선한 행위를 하도록 이끌려는 것, 즉 화성기위(化性起僞)5)였다. 따라서 순자 성악설의 요지는 인위적 예의를 강조하는 데 있다.
순자의 인식론은 소극적인 적폐의 해소, 즉 해폐(解蔽)6)와 적극적으로 명분을 바로 세워 공공 인식에 도달한다는 정명(正名)으로 대표된다.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내재하는 맑고 깨끗한 마음이 가려져 있을 때 한 쪽으로 치우치는 폐단이 생겨나므로 인위의 결정인 예를 통해 쌓여가는 폐단을 해소하는 것이 올바른 인식에 도달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명분을 바르게 세움으로써 공공 인식에 도달할 수 있으며, 인위의 결정체인 예의로 사회 혼란을 야기하는 인식의 헷갈림을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2) 성왕(聖王)
사람의 사회성을 강조하고 집단의 질서를 중시했던 순자는 그 질서를 관장하는 중추로서 군주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선을 향해 가는 모든 인위적 행위의 표준인 예의를 만들고 주도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성왕(聖王)이다. 현실 군주는 이 성왕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천하를 다스리는 막중한 책임뿐만 아니라 도덕적 판단의 최고의 준칙이 되어야 하는 만큼 군주의 지위와 역할은 높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적인 군주인 성왕은 인륜의 극치이고 이상적 인격의 최고 형태이다. 성왕은 우선 인격적으로 완전하고 지혜가 출중해야 한다. 예의와 그것의 역사적 원칙인 통류(統類)7)를 꿰뚫고 있어야 하며, 철저히 규범을 준수하여 왕도(王道)를 실현해야 한다. 인간의 끊임없는 적극적 행위를 통해 선을 쌓아가니 모든 인민의 가치 판단의 준거가 된다. 이러한 성인은 예의를 힘써 배우고 실천하여 역사에 관통하는 원칙을 깨달으면 누구나 될 수 있다. 즉, "길거리의 어떤 사람도 우(禹)임금처럼 성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순자는 군주 정치라는 현실적 한계 때문에 기왕에 세(勢)를 얻어 군주가 된 사람의 정치적 영향력을 인정하고, 왕도엔 못 미치지만 믿음을 강조하며 법과 인민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패도(覇道) 또한 긍정한다. 어떤 상태든지 인위적 노력만 기울일 수 있으면 예치사회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순자』의 상당 부분은 현명한 관료의 임용, 외재적 규범 확립, 복지 정책 등 이를 위한 구체적인 정책ㆍ대안들을 다루고 있다.
3) 예치(禮治)
순자는 외재적 사회 규범을 통해 질서 있는 사회를 복원코자 하였다. 순자는 예의야말로 도덕적으로 완벽한 질서를 구가할 수 있는 매우 구체적이고도 실행 가능한 규범이며, 역사적으로 성왕의 나라에는 예의의 대원칙인 통류가 관통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시ㆍ서를 통한 내부적 성인 공부, 즉 내성(內聖)의 길보다는 예의를 드높이는 외부적 왕도의 실천 즉 외왕(外王)의 길을 더 중시하였다.
순자는 역사적으로 관통하는 예의 원칙이 지금의 정치 권력에 반영되어 모든 인민들이 그로써 예의 구체적 행위를 유추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가치관의 표준이라고 생각했다. 순자는 도덕을 실천하는 현실 속의 군주를 후대의 성왕이란 뜻에서 후왕(後王)이라 불렀고, 예의가 나라를 다스리는 원리원칙이라 보았다. 그도 공자처럼 주나라 도덕정치이념의 건설자인 주공(周公)을 따르고자 하였다. 주공의 치국 이념 속에 관통하고 있는 보편적 법칙이 선왕의 예법을 충분히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순자는 예의에 통달하는 외부적 수양만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그의 「악론(樂論)」편을 보면 내성 공부의 중요한 일면으로 내적 심성을 도야시키는 역할 또한 중시하였다. 즉, 예의로 교화를 행하여 멋진 나라를 만들려면, 예를 통한 외부적 절제와 더불어 음악을 통한 내부적 덕성의 조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백성들의 욕망을 적절히 만족시켜 줌과 동시에 신분에 따른 분수를 지키도록 알맞게 절제시키는 예와 악의 기능을 모두 중시했다. 교화를 통한 질서의 확립이라는 정치적 목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역시 사람이다. 그래서 순자가 주장한 예의치국의 핵심은 항상 다스리는 사람, 즉 치인(治人)에게 모아진다. 통치이념이나 법제(法制)의 존재 여부보다 어떤 사람이 그 원칙을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천하를 주유했고 오래 살았으며 학문적 위상이 당대 최고였던 점을 감안하면, 순자의 제자들은 대단히 많았을 것이다. 진나라의 천하통일에 결정적 공헌을 하였던 한비(韓非)와 이사(李斯) 외에도, 전국시대 말기에서 진나라를 거쳐 한나라 초까지 유학을 이은 사람은 거의 순자의 문하생이거나 그의 제자의 제자들이 많았다. 특히 유가 경전에 대한 전승과 전파에서 순자 사상의 공헌은 지대한 것이었다. 한(漢)나라 때에 유학은 국가 이데올로기가 되었는데, 그 학문적 바탕인 경학은 대부분 순자의 학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특히 『시경』과 『춘추』, 『예기』는 순자의 제자 및 그 제자의 제자들에 의해 온전히 후대에 전승되었다.
순자 스스로도 "학문하는 방법은 경전을 암송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예를 읽는 데서 끝난다"고 할 정도로 경전을 중시했다. 『순자』 전체를 볼 때 『시경』 인용이 84문장, 『역경』 인용이 2곳, 『서경』 인용이 15항목에 이른다. 그 외에도 공자의 말과 격언 등을 인용하여 사회 문제에 대해 날카로운 평가를 내리고 있는 점은 『춘추』의 비판적 글쓰기 방법을 그대로 이은 것이라 하겠다. 한나라와 당나라의 유학이 사실상 경학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순자의 유학사에서의 위치는 대단히 중요하다. 거의 모든 유가 경전의 전승이 순자와 크든 적든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대로 성리학이 지배하는 송나라 이래 『순자』는 철저히 부정당하였다.
그러다가 서구적 근대화의 과정에서 오랫동안 동아시아 사회를 이끌어 온 유교 그 자체가 송두리째 부정당하게 되었다. 유학 스스로 현대 사회와 인류 전체를 향해 보다 적극적인 실천 대안을 스스로 마련하지 못한다면 지난 수천 년 동안 동양 사회를 이끌어 온 선인들의 지혜는 몽땅 역사 속 한 페이지로 끝나 버리고 말 것이다. 성리학적 고담준론으로만 유학을 이해하지 말고, 주자학의 극복을 통한 새로운 대안 모색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적극적 사회적 실천성과 건강한 삶의 성취라는 원시 유학 본래의 측면을 되살려야 한다. 현대적 시각에서 『순자』를 다시 읽어야 할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순자는 예의라는 도덕의 틀을 통해 모든 사회 문제를 극복하려 하였다. 사람 사이의 원만한 관계를 의미하는 예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함으로써 순자는 예에 사회적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 예는 동아시아 사회 전반에 걸쳐 삶과 사회의 핵심이 되었다. 공자가 유학을 보편 학문으로 승화시킨 유학 발전의 첫 번째 위업을 달성하였다면, 순자는 유학을 사회철학으로 구성해낸 유학 발전의 두 번째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현대 사회는 법의 지배가 사회 정의의 척도가 된다. 제도보다 인간을 앞세운 것이 예이고, 사람보다 제도를 앞세우는 것이 법이다. 법을 만들고 지배하는 사람이 정치의 핵심이어야지 법이 사람을 지배하는 정치여선 안 된다. 이를 긍정한다면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데 순자의 예론(禮論)은 매우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유학에서의 군주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덕이 있는 사람이 군주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고, 하나는 군주라면 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맹자로 대표되는 전자의 입장은 정치적 혼란기에 도탄에 빠진 민중의 함성을 담고 있으며, 순자로 대표되는 후자의 입장은 정치적 안정기에 지도자들의 도덕성에 대한 강력한 요청이다. 『순자』를 읽으면 민주주의에 '갇힌' 우리의 편협한 사유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며, 정치적인 것과 정치가에 대한 새로운 자기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순자는 사람을 중시한 인문주의자였으나, 현실 군주를 인정한 상태에서 '예의'라는 절대적인 가치 기준만을 강조했다. 이는 자칫 절대 권력을 소유한 통치자들에게 독재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 그의 제자 한비와 이사가 혹독한 법치주의자가 된 것은 이런 권위주의적 가능성과 무관하지 않다. 이 외에 『순자』를 읽으면 악한 인성을 소유한 인간 세계에 어떻게 성인이 출현하게 되는지 명쾌한 해답을 얻을 수 없는 등 일부 사상적 한계도 있다.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과도하게 신분 등급을 강조하고 있는가 하면, 권리와 의무의 상호관계에 대한 제도적 구상을 하지 못한 점 등이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한계를 알고 『순자』를 읽을 필요가 있으며, 배경을 버리고 보편적 사유를 끌어 내는 현대적 독해를 해야 한다.
성악설 때문에 송나라 이후 성리학자들은 순자를 거의 매장하여 버렸다. 순자 성악설의 '성(性)'자는 맹자 성선설의 '성'자와 달리 정치적ㆍ사회적 존재로써 인간의 본성을 얘기하는 개념으로 기실 성리학자들의 정치 의식과도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에 의해 혹독한 비판을 받았으니 순자 본인에겐 억울할 일이다. 고려시대 말엽 우리나라에 들어와 조선 왕조 전체를 지배한 유학은 바로 이 성리학이었다. 이 때문에 조선에서 순자는 금서였다. 그럼에도 성리학을 뛰어넘어 보려는 무수한 유학자들은 여전히 순자를 읽었으며, 거기서 많은 자극을 받은 듯하다. 예컨대 『순자』를 읽고 정약용의 글들을 읽으면 구절까지 유사한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전통 사상의 비판적 계승을 통해 동양과 서양의 조화, 전통과 현대의 접목을 시도할 때 순자 사상은 대안적 사유로써 새로운 유학의 건립에 매우 훌륭한 아이디어를 제공해 준다. 지배자가 제멋대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인치(人治)가 아니라, 높은 수양ㆍ엄격성ㆍ도덕성ㆍ청렴성을 갖춘 새로운 인간형의 창출에 미래 사회의 희망을 건다면, "공동체의 화해와 질서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을 길러 내는 것이 법제도보다 중요하다"는 순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볼 만하지 않는가? 이제 우리는 철학과 윤리학을 구분하고, 굳이 정치와 윤리를 구별하여 학문적 정의를 내리는 서양식 사유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는가?
1.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면 어떻게 이상적 인격체로서 성인이 출현할 수 있겠는가?
순자는 텅 비어 한결같으며 고요한 상태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인간 사회에 성인이 출현할 수 있다고 한다. 그의 성악설은 사람이 천성적으로 악한 존재로 태어난다는 말이 아니라 본성은 본래 투박한데 욕망 때문에 정치적 사회적으로 악한 결과를 낳는다는 말이다. 사람이 본래 지니고 있는 맑고 투명한 마음으로부터 성인이 출현하고, 이 성인의 가르침 때문에 성악한 인간이 도덕적인 예치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다.
2. 법치와 예치 가운데 어느 것이 사회문제 해결에 유용한가?
법치는 범죄를 공평하고 객관적인 법으로 강제하여 개인 중심의 사회 질서를 수립한다는 의미다. 주로 벌금과 형벌로 이미 저지른 '죄의 결과'를 단죄하려는 것이다. 예치는 각종 인륜을 바탕으로 도덕적인 교화를 실시하여 공동체 중심의 사회 질서를 수립한다는 의미다. 주로 예의염치(禮義廉恥)에 충실하도록 철저히 가르쳐 범죄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것이다. 어느 쪽이 더 나은 해결책인가.
『순자』, 순황 지음, 김학주 옮김, 을유문화사, 2001.
『순자』, 순황 지음, 장현근 옮김, 책세상, 2002.
[네이버 지식백과] 순자 [荀子] - 성왕이 다스리는 나라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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