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영화 ‘트루먼 쇼’는 작은 섬 모양의 세트장에 갇혀 일거수일투족이 TV로 방영되는 트루먼 버뱅크(배우 짐 캐리)의 삶을 그렸다. 특히 트루먼이 배를 타고 거대한 세트장 속 바다 끝에 위치한 평평한 벽을 발견하고, 그곳에 달린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걸어나가는 장면이 유명하다.
보통의 평범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이 영화를 보고 ‘기발한 영화적 상상’이란 생각을 먼저하게 될 것이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 과학계 정설로 받아들여진 오늘날 평평한 세트장에 사람을 가두고 관찰한다는 개념이 신선할 수밖에 없어서다. 그런데 이 영화가 사실은 실제 우리 삶을 그대로 그린 것이라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장하는 ‘지구 평면설’을 믿는 사람들이다.
◇확증편향의 오류에 빠진 ‘평면지구인’들
넷플릭스에 공개된 다큐 ‘그래도 지구는 평평하다(2018)’는 위와 같은 지구 평면설을 믿는 이들을 다룬다. 스스로를 ‘평면 지구인(Flat Earther)’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구체 지구론’이 정설이 된 게 사실은 ‘트루먼 쇼’ 같이 거대한 음모를 위해 사람들을 세뇌시킨 결과라고 주장한다. 나사(NASA)와 정부 기관이 지구가 평평하다는 사실을 숨기고 하늘 밖으로 사람들이 나가는 걸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닐 암스트롱 등 우주인들의 역사도 모두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배워온 교과서와 정반대 주장을 하는 이들이 그저 헛소리를 하는 괴짜처럼 보이겠지만, 다큐는 놀랍게도 이런 평면지구인이 미국에서 끊임없이 양산되고 있다고 말한다. 미국 유명 과학 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이 2018년 조사한 결과 미국인의 약 2%(650만 명)가 지구평면설을 믿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큐는 이들 평면지구인들이 ‘평평한 지구 학회(Flat Earth Society)’를 결성하고 심지어 2017년 노스캐롤라이나주 롤리에서 국제 학회까지 여는 모습을 따라간다. 이 과정에서 평면지구인들의 모습을 보면 생각보다 멀쩡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듯해 놀라게 될 것이다. 개중에는 미국 경찰국 법의학 컨설턴트 등 과학적 지식이 다분해 보이는 전문직종의 사람들도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평면지구론을 설명하며 엉터리 근거를 댈 때마다 금세 현실감각이 돌아오게 된다. ‘지평선이 평평한 걸 내 눈으로 봐서 지구가 평평하다는 걸 안다. 신기루 현상도 있다지만 그건 과학자들의 음모론이다’는 식의 주장이 대부분이어서다. 다큐도 이 같은 허점을 보여주기 위해 이들의 모습을 분석하거나 반박하는 실제 과학 전문가들의 장면을 계속 교차해서 보여준다.
전문가들은 특히 이 같은 평면지구인들의 믿음이 ‘확증편향의 오류’로부터 온 것이라고 지적한다. 과학적 사고는 A라는 가설이 B라는 결론으로 도출되기까지 무수히 많은 검증을 거치는 방식을 택하지만, 평면지구인들은 B라는 결론을 미리 정해 놓고 이에 맞는 근거들을 끼워맞춘다는 것이다. 실제 다큐에선 평면지구인들이 ‘지구가 평평하다’는 주장에 끼워 맞출 근거를 찾기 위해 각종 엉터리 과학 실험을 하는 모습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틀려도 틀렸다고 말하지 못 하는 진짜 이유
평면지구인들은 수차례 자신들의 주장이 자기 모순에 부딪히는 모습을 보이지만, 결코 자신들이 틀렸다고 말하지 못 한다. 전문가들은 이들이 스스로를 구체 지구론을 믿는 이들을 음모론에서 구해낼 영웅처럼 여기고, 이를 통해 구축한 영향력과 공동체를 잃을까 봐 두려워한다고 지적한다.
실제 ‘평면지구인들의 왕’으로 불리는 ‘마크 서전트’는 다큐에서 내내 유튜브와 팟캐스트를 통해 평면지구인들 사이 인기를 끌며 각종 강연을 하고, 심지어 그를 알아보고 사인을 요청하는 이들이 많다고 자랑한다. 특히 2015년 유튜브 전체 검색 건수가 5만 건에 불과했던 지구 평면설 영상이 2018년 1940만 건에 달했다며, 지금이야말로 평면지구인들이 뭉쳐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마크의 말처럼 평면 지구인들은 자신들의 사상을 널리 알리기 위해 상당히 끈끈한 모습을 보인다. 서로 만날 때마다 ‘평평히 살자’는 사인을 주고 받고, 삶의 곳곳을 지구 평면설과 관련된 티셔츠, 책, 평평한 지구모형 탁자 등 각종 굿즈로 채우기 시작한다. 덕분에 본래 목수가 직업이었던 한 평면지구인은 아예 평평한 지구 모형만 만들며 수익을 창출하기까지 한다.
급기야 평평한 지구인 모임 내 각자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파벌까지 생긴다. 마크는 자신들의 모임 내 70%가 평평한 지구 위에 반구형 물체가 덮고 있다고 믿고, 나머지 30%는 위가 뻥 뚫린 평평한 지구 모형이 여러 개 있다고 믿는다고 말한다. 이들은 서로 다른 파벌의 사람들을 찍어내기 위해 각 파벌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정부 기관의 스파이’란 가짜뉴스를 퍼뜨린다. 다큐는 그만큼 평면지구인들이 실제 지구평면설이 거짓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자신들의 소속감을 강화하기 위해 몰두한다는 사실을 계속 짚어낸다.
◇음모론은 또 다른 음모론을 낳는다
다큐 속 과학자들은 그럼에도 이들 평면지구인들을 결코 “경멸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지구평면설 같은 음모론이 또 다른 음모론을 계속 낳을 수 있는 만큼 그저 웃긴 이야기로만 치부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실제 다큐 속 평면지구인들은 지구 평면설 이외에도 ‘백신은 위험하다’, ‘나사는 히브리어로 ‘속이다’란 뜻으로 사기 집단이다’ ‘언론이 모든 남성들을 여성으로 만들려고 트랜스젠더 옹호론을 조장한다’ 등 각종 음모론도 함께 퍼뜨린다. 심지어는 유명한 평면지구인들 스스로도 ‘사실은 우리를 감시하는 정부기관 사람들이다’ 등의 음모론에 시달린다.
전문가들은 이들 음모론 논쟁이 과학자들이 결코 이길 수 없는 양상으로 흐르는 게 특히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아무리 각종 합리적인 근거를 대도 음모론자들은 “믿을 수 없다”며 끊임없이 말도 안 되는 반박 증거를 갖다가 끼워 넣는다는 것이다. 실제 다큐 속 한 평면지구인은 “왜 과학자들은 구체지구론이 틀렸다는 고백과 함께 내부고발을 안 하냐”는 물음에 “생계 때문에 주저하는 것”이란 주장을 펴고, 주변 수많은 평면지구인들 또한 이 대답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큐는 이런 행동이 결국은 음모론을 주장하는 자신들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결과를 낳는다고 지적한다. 평면지구인들은 다큐에서 자신들이 주장한 음모론 때문에 소셜미디어 그룹에서 강퇴 당하거나, 심지어 이혼까지 당했다고 고백한다. 다큐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지난해 마이크 휴즈란 미국 남성이 평면지구설을 직접 증명하겠다며 사제 로켓에 몸을 실었다가 추락사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결국 다큐 속 과학자들의 다음과 같은 일침은 유튜브 등 각종 소셜미디어를 통해 확인되지 않은 가짜뉴스가 진실처럼 떠도는 요즘을 저격하며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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