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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산 능선에는 사연 많은 나무가 한그루 있다. 정상과 청운대 사이에 있는 소나무다. 풍경에 정신을 팔고 걷다보면 지나치기 십상이다. 나무 몸통에 난 구멍들을 시멘트로 메우고 그 위에 둥근 모양으로 하얗고 빨갛게 칠했다. 딱 사격 표적 모양이다. 그 옆 팻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1.21 사태 소나무〉
1968년 1월21일 북한 124군부대 소속의 김신조 등 31명의 무장공비들은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침투하여, 현 청운실버센터(청운동) 앞에서 경찰과 교전 후 북악산 및 인왕산 지역으로 도주하였다. 당시 우리 군·경과 치열한 교전 중 한 소나무에 15발의 총탄 흔적이 남게 되었고, 이후 이 소나무를 1.21사태소나무라 부르고 있다.
무장공비 일당은 당시 청와대 및 주변시설을 완벽하게 숙지하고 침투 간 아군복장과 민간복 착용, 취객으로 위장하는 등 치밀하고 철저하게 준비하여 도발을 자행하였다.
1월 21일 교전 후 14일간 작전 결과 침투한 31명 중 28명 사살, 2명 도주, 1명을 생포(김신조)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향토 예비군(68.4.1)이 창설되었다.
나무의 총탄 자국은 공비들이 백악산 능선을 타고 튀었음을 말해준다.
“박정희 모가지 따러왔수다.”
생포된 김신조가 방송 인터뷰에서 한 말은 서늘했다.
1.21 사태는 예비군만이 아니라 육군3사관학교와 전투경찰대를 만들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교련 교육을 실시하는 계기가 됐다. 북한에 복수를 하려고 만든 684특수부대에서 행해진 가혹한 대우는 실미도 사건을 불렀다. 그 뒤 인왕산과 백악산, 청와대 앞길은 절대 보안공간이 돼 일반인 통행이 막혔다. 이 사건은 두 가지 아이러니를 만들었다. 하나는 생태 보존이다.
아이러니1-청와대 나무들
총 맞은 나무 수령은 100년이 넘어 보인다. 꽤 나이 들어 보이지만 백악산에서 이 정도면 청년이다. 백악산은 길 아닌 곳은 갈 수 없고, 허용된 길이라도 다닐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었다. 비무장지대와 다를 바 없다. 백악산 식생이 철조망의 엄호를 받았다면 청와대 풀과 나무들은 정원사의 극진한 보호를 받아왔다. 그래서 청와대는 창덕궁 후원 못잖은 명품 정원이다. 나무마다 사연도 많다.
대통령과 나무
4월 5일이 식목일이 된 직접적인 계기는 1910년 4월 5일에 열린 순종의 친경제(親耕祭)다. 임금이 손수 나무를 심고 밭을 갈았다.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며 청와대는 장충단 공원, 어린이대공원, 국립수목원, 독립기념관, 남산 등과 함께 때마다 대통령이 나무 심는 단골장소가 됐다. 식목일에 심은 나무와 남긴 메시지도 갖가지다.
“나무를 아낄 줄 모르는 사람은 애국을 논할 자격이 없다” (1972년 박정희)
“가구마다 나라꽃 무궁화 1그루를 심자” (1992년 노태우)
“심고 보호하는데 그치지 말고 가꾸고 경영하자” (1994년 김영삼)
“산림녹화와 경제적 활용을 병행하자” (2000년 김대중)
“북악산을 전면 개방하겠다” (2007년 노무현)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은 63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한 공동으로 식목행사를 했다. 2015년 박근혜 대통령은 녹지원에 무궁화 15그루를 심었다. 사진을 통해 청와대 나무들의 사연을 알아본다.
정문을 통해 본관으로 가다보면 대정원 양편에 키가 훤칠한 금강송 무리가 있다. 춘양목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강릉~원주간 영동고속도로를 만들 때 10그루를 옮겨다 심었다.
본관 동쪽에 있는 1960년생 쥐띠 구상나무다. 1988년에 노태우 대통령이 심었다.
영빈관 동쪽에 있는 가이즈카 향나무. 박정희 대통령이 심었다. 일본 오사카 남부 가이즈카 지방이 고향이다. 1918년생 말띠이니 100살이 넘었다. 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대구 달성공원에 가이즈카 향나무가 이땅에서는 1호로 알려져있다. 문화재청은 이 나무를 사적지 부적합 수종으로 결정한 바 있다. 서울현충원에 있던 이 나무들은 대부분 국내 수종으로 바꿨다. 일제의 상징이니 뽑아내야 한다는 주장이 있고, 이땅에서 자라면 우리 나무인데 감정적 접근을 경계해야한다는 주장이 있다. 우리가 보는 노란 민들레는 대부분 서양민들레다.
영빈관 앞에 있는 무궁화. 2000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기념해 김대중 대통령이 심었다.
상춘재 부근에는 나무 120여 종이 자란다. 잔디밭에 있는 반송은 청와대의 상징 같은 나무다. 177세(2022년 기준) 먹었다. 키 12m, 폭 15m가 넘는다. 반송 옆에는 적송 3그루가 있다. 4그루로 보이지만 오른쪽 두 그루는 뿌리를 같이 하는 한그루다.
녹지원 뒤 숲에서 자라는 회화나무 고목 중 하나다. 단정하고 늠름하게 생겼다. 청와대 관람 안내인이 설명하는 자리이자 포토존이다.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이 심은 동백나무. 녹지원과 이어진 상춘재 동쪽에 있다.
상춘재 앞에 있는 백송. 전두환 대통령이 심었다.
최규하 대통령이 1980년에 심은 독일가문비나무. 1944년생 원숭이띠다. 대통령 전용 헬기장 옆에 있다.
연풍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작은 공원인 버들마당이 있다. 여기에 훤칠한 용버들 한그루가 서있다. 이 땅에서 가장 굵고 큰 나무로 알려져 있다. 천연기념물감이다. 버들은 물을 좋아한다. 근처에 개울이 흘렀다는 증거다.
대정원 동편 소정원 한가운데 있는 이팝나무. 박근혜 전 대통령이 심었다.
수궁터에 있는 주목. 줄기가 붉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썩어 천 년, 합해 삼천년을 간다’는 청와대에서 최고참 나무다. 743세(2022년기준) 잡수신 왕할아버지다. 그 왼쪽에 구 청와대 본관 터임을 표시한 호리병조각이 있다.
수궁터에 있는 단풍나무의 한 종류인 복자기. 1980년생 원숭이띠다. 1996년 김영삼 대통령이 심었다.
성곽로 끝, 백악산 정상에서 청와대쪽으로 타고 내려오는 능선 중간에 백악정이 있다. 청와대 담장 밖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본래 정자가 없었는데 2004년 4월에 만들었다. 서울 사대문 안은 물론 아차산, 남산, 관악산까지 보인다. 이 한쪽에 2004년 5월 16일 노무현 대통령이 심은 서어나무가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심은 산딸나무도 백악정에 있다.
관저 앞, 관저와 침류각 사이에는 거대한 낙우송 무리가 서있다. 조경을 할 때, 광화문 쪽과 삼청동 쪽에서 관저를 가리도록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나무를 심을 때는 대개 정원의 가장자리에 심는다. 김영삼·박근혜 두 대통령이 심은 나무는 정원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대통령의 성격과 나무 심는 위치도 연관이 있을까. 이승만·윤보선 두 대통령 이름이 붙은 나무는 없다. 당시는 경무대 시절이라 지금의 청와대보다 영역이 작았고, 식목이 다른 일보다 우선순위에서 밀렸을 수 있겠다. 정문에서 본관으로 들어가는 길 양 옆에 잘 생긴 반송이 11그루씩 서있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조경을 했지만 이름표가 붙어있지는 않다.
아이러니2
아이러니가 하나 더 있다. 백악산 청와대 일대의 문화유산이 알려진 과정이다. 드문드문 밝혀지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밝힌 곳은 학계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청와대 경호처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경호실 직원 몇몇이 역사문화유산 관련 연구 동아리를 만들었다. 자료를 수집하고 발품을 팔아 펴낸 책이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이다. 2007년의 일이다. 내용이 치밀하고 충실하다.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추천사에서 이렇게 밝혔다.
“청와대 내부와 인근의 문화유산을 새롭게 발굴하여 상세히 소개하고 있어, 이는 단순
히 호사가적인 관심의 충족이 아니라 그간 잊혀져왔던 이 땅의 역사와 내력을 정확하고 상세하게 소개한 본격적인 문화유산 저술이라는 점에서 놀라움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끼게 합니다.”
청와대 일대의 문화유산 몇 개만 살펴보자.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 각자
1990년대에 대통령 관저 뒤에서 ‘천하제일복지’가 새겨진 바위를 발견했다. 청와대 자리가 예부터 명당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표석 왼편에 연릉오거(延陵吳据)라는 글자로 보아 중국 남송 연릉 지역 출신 오거의 글씨를 집자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위 아래는 물이 솟는 천하제일복지천이 있다. 관저를 새로 지을 때 지금의 모습으로 주변을 정비했다.
침류각(枕流閣)
오운정과 함께 문재인 대통령이 손석희 전 앵커와 퇴임 인터뷰를 한 장소다. 흐르는 물을 베개 삼는다(枕流)는 뜻이다. 본래 관저 자리에 있었다. 1989년에 관저를 지으며 지금 자리로 옮겼다.
오운정(五雲亭)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며 후원인 경무대 만들었다. 지금의 청와대 자리다. 일제가 훼손하기 전인 1910년대 이전까지 이곳은 창덕궁 후원처럼 수려한 계곡과 정원이 있었다. 경무대에는 32개동의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오운각(五雲閣)은 임금 휴식처, 융문당(隆文堂)은 과거시험을 보는 장소이고, 융무당(隆武堂)은 군사를 조련하는 장소였다. 오운정은 청와대에서 유일한 정자다.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 글씨다. 관저 자리에 있던 정자를 관저를 신축하며 현재 자리로 옮겼다.
석조여래좌상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경 제작돼 경주 남산 계곡에 있던 불상이다. 이를 일제 때인 1912년 데라우치 총독이 서울 남산 총독 관사인 왜성대로 가져갔다. 1939년 총독 관사를 현재 청와대 자리에 만들며 함께 옮겼다. 관저를 새로 지을 때 지금 위치로 이전했다. 몸체가 온전하고 연꽃문양을 새긴 대좌까지 남아있는 통일신라 석불은 많지 않다. 기독교 장로 대통령 시절에 불상의 존재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김영삼 대통령 때는 불상을 치워버렸다는 헛소문이 돌았다. 이명박 대통령 때는 일부 신도들이 성모상과 예수상을 함께 들여놓으라는 요구도 했다.
팔도배미 터
영빈관 앞뜰을 좌우 각각 8개 구역으로 나눈 공간이다. 1893년 고종이 신무문 밖에 경농재를 짓고 그 앞을 팔도를 상징해 8등분했다. 조선 8도, 즉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를 의미한다. 농사를 체험하며 풍흉을 살필 목적으로 만들었다. 고종은 이곳에서 매년 봄 신하들과 전국에서 올라 온 곡식 종자를 심었다고 한다. 친경전(親耕田)이란 이름보다는 ‘팔도배미’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렸다.
걸으면 보이는 것들
지난 4월 6일 백악산 남측 탐방로를 개방했다. 삼청 안내소~만세동산 약수터~청운대 쉼터~청운대전망대~법흥사 터~삼청 안내소로 돌아오는 코스다. 여유 있게 걸어 2시간 정도 걸린다. 4월 26일, 이 길을 한 바퀴 돌고 청와대앞길을 거쳐 분수대까지 걸었다. 코앞에 있는 청와대는 성곽로 능선에 가로막혀 보이지 않는다. 경사가 급한 길을 숨 가쁘게 올라가니 샘터이자 쉼터인 만세동방이 나온다. 바위를 타고 흐르는 물이 움푹한 홈으로 떨어진다. 마실 수 없으니 손이나 얼굴을 씻으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쉬고 있는데 산불감시원 아저씨 둘이 나누는 이야기가 들린다. 한 분은 신입으로 보였다.
“여기는 전국 일급지예요. 청와대 뒷산이라 그만큼 신경을 써요. 우리는 서울국유림관리소 소속이고요. 다른 데는 보통 오전 10시에서 7시까지 근무하지만 우리는 그보다 1시간 빨리 일을 시작해요. 자부심을 가져도 돼요.”
(일당 7만3280원인 산불 감시원이 되기는 쉽지 않다. 15kg짜리 등짐 메고 2km걷기 체력을 시험한다. 기계톱질을 얼마나 잘하는지도 본다. 재산이 4억 원을 넘으면 응시를 제한한다. 고등학교 대학교 재학생도 안 된다.)
법흥사 터 한쪽 작은 샘에는 청둥오리 한 쌍이 수시로 물속에 머리를 박았다. 가까이 가보니 물속에는 올챙이가 바글바글했다. 지나가는 등산객이 말했다.
“저놈들 요즈음 신났어요. 이 계곡 곳곳에 있는 물웅덩이를 오르내리며 영양보충을 하느라고 바쁘거든요.”
백악산과 북악산
북악산이라고 많이 알려져 있지만 백악산이 정확한 이름이다. 행정명칭도 백악산이다. 정상에 있는 표지돌에도 ‘백악산 해발 342미터’라고 새겨있다. 정상에는 두 개의 바위가 있다. 그 중 큰 바위에 오목한 홈이 몇 개 있다. 성혈(性穴)이라고 하는데 선사시대 이래 소원을 기원하며 표면을 오래도록 갈고 파낸 흔적이다. 예부터 ‘알바위’, ‘알터’, ‘알홈’ 등으로 부른다. 전국에 이런 이름을 가진 바위가 꽤 있다.
부아암(負兒岩)
정상에서 남쪽 방향으로 8부 능선에 툭 튀어나와 있다. 바위 두 개가 포개져 있는데 아이를 업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붙은 이름이다. 광화문 쪽에서는 돌출부위가 드러나지 않지만 동쪽이나 서쪽에서 보면 멀리서도 뚜렷하게 보인다. 정도전이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며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이 바위를 옮겨 놓았다는 전설이 있다. 전설은 전설일 뿐이다.
법흥사 터(法興寺址)
백악산 동편 중턱에 있다. 신라시대 때 지은 절이라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자리가 협소하고 계곡물이 적어 스님 한둘이 생활할 수 있는 작은 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955년 절집을 지었으나 1.21사태 뒤 폐쇄하고 지금은 건물터, 축대, 주춧돌만 남아있다. 이 길을 개방할 때 문재인 대통령이 주춧돌에 앉아 쉬었다고 작은 소란이 일었다. 부처님이 보셨으면 한바탕 웃었겠다.
만세동방(萬世東方)
북악산 동쪽 6~7부 능선 계곡 중턱에는 약수터다. 바위에 만세동방 성수남극(萬世東方 聖壽南極)이라고 새겨져있다. 왕의 만수무강을 바라는 내용이다. 이승만 대통령 때는 이 계곡의 약수터에서 물을 떠다 먹었다고 전해진다.
청계천 발원지
백악산 인왕산 남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청계천으로 들어간다. 2005년 11월 종로구가 최장발원지를 조사했다. 백악산 서쪽 청운동 자하문 고개, 최규식 경무관 동상에서 백악산 쪽으로 약 150m 지점에 있는 약수터다. 백악산 동쪽 촛대바위 부근의 해발 245m 지점(동경 126°58′41.8″, 북위 37°35′34.4″)을 발원지라고 보는 주장도 있다.
촛대바위
숙정문 북서쪽 약 400m 지점에 있다. 도성길과 붙어있다. 정남 쪽에 경복궁이 있다. 일제가 바위 정수리에 박은 쇠말뚝을 광복 뒤 빼내고 촛대바위라고 이름 붙였다.
숙정문(肅靖門)
도성 4대문 중 북쪽으로 나가는 문이다. 조선시대엔 음양오행설에 따라 이 문을 열면 여풍(女風)이 분다고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비가 많이 내리면 숙정문을 닫고 남대문을 열었다. 북을 음이고, 남을 양으로 보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4대문 중 유일하게 사람이 지나다니는 문이 됐다.
4ㆍ19 최초 발포 현장
청와대 서쪽 광장, 분수대 옆 바닥에는 동판 하나가 누워있다. 일부러 찾아야 보인다. 1960년 4월 19일 화요일 오후 1시 40분경, 이승만 독재에 항거하는 시위대를 향해 처음으로 총을 쏜 현장이다. 이날 21명이 죽고, 172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를 추념해 2018년에 서울시가 만들었다. 국가 폭력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는 역삼각형 모양(가로 35cm, 세로 35cm)이다. 서울시가 선정한 인권 현장 62개소 중 한 곳이다.
분수대에서 북쪽으로 길을 건너면 무궁화동산이 나온다. 1993년 2월 김영삼 대통령 취임 후 안가를 헐어 내고 공원으로 만들었다. 행정구역상 궁정동이다. 1979년 10월26일, 이곳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총을 맞고 숨졌다. 병자호란 때 청에 굴복하기를 거부한 김상헌 집터 옆이다. 현장에는 죽음의 자리를 표시한 어떤 활자도 없다. 당시 공원을 조성하던 이가 바위 두 개를 포개놓고, 그 위로 가지를 드리운 소나무 한그루를 심어놓았다. 이 사정을 아는 사람만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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