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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자의 말】
오늘은 우리의 경애하는 주은래총리 탄신 110돐이 되는 뜻깊은 날입니다. 지난 전쟁년대에만도 우리 겨레를 사랑하고 배려를 돌린 주은래의 업적은 이루다 말할수 없습니다. 이에 주은래총리 탄신 110돐을 기념하여 주은래와 조선족 양림의 우정이란 글 한편을 올리오니 여러 분들의 진지한 감상을 기대하여 봅니다.
주은래와 조선족 양림의 우정
1924년 1월 중국혁명의 선행자 손중산선생은 중국공산당의 방조와 협력하에 광주에서 공산당인이 참가한 국민당 제1차전국대표대회를 열고 련쏘, 련공, 부조농공의 3대혁명정책을 확정하였으며 국민당을 개조하고 제1차국공합작을 실현하였다. 이해 5월에는 군사정치간부양성을 취지로 한 황포군관학교까지 세웠다. 1923년 말 운남강무당을 졸업하고 광주로 달려간 조선인 양림은 선뜻이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갔다.
때는 바로 국공합작시기여서 양림은 황포군관학교 정치부주임인 주은래동지의 보고와 연설을 자주 들을수 있었다. 특히 광주시 동교대도대회장에서 한 주은래의 연설은 그의 마음을 환히 비추어주었다. 그때부터 그는 중국공산당인과 널리 접촉하면서 맑스주의를 보다 신앙하게 되였다.
제1차국공합작이 실현된후 주은래 등 동지들은 군사사업에 크나큰 중시를 돌리고 우수한 공산당원과 당의 열성자들을 황포군관학교의 교관 또는 학생으로 파견하였다. 양림도 그가운데의 한 사람이였다.
1925년 2월초에 동정군 정치부주임 주은래는 황포군관학교의 학생들을 친솔하여 제1차동정에 참가하였다. 동정의 목표는 진형명반동세력 소탕이였다. 이자들은 광주에 국민정부(24. 7.1)가 건립되고 그 산하에 국민혁명군이 조직되자 이에 불안을 느낀나머지 제국주의세력의 사출하에 국민혁명정부를 진공하기 시작하였던것이다.
양림은 주은래의 지도하에 학생군 제3기학생대대 제4대 상위대장으로 되여 200여명을 거느리고 동정에 나섰다. 그들은 해륙풍과 기타지구 인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진형명반동세력을 소멸하였다. 6월에는 주은래가 지도하는 동정군을 따라 광주에 돌아와 운남, 광서 군벌 양희민, 류진중의 반란을 평정하는 전투에 참가하였다.
1925년 6월경에 양림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이해 11월에 광동 조경현에서 국민혁명군 제4군 독립퇀이 정식으로 건립되였다. 엽정을 퇀장으로 하는 독립퇀은 중국공산당이 직접 지도하는 한갈래 혁명무장이였다. 이 퇀의 골간은 모두 공산당원과 공청단원이였는데 양림이 독립퇀 제3영 영장 겸 당소조장을 맡았다.
1926년 4월 양림은 당조직의 지시로 다시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갔다. 때는 황포군관학교 교장 장개석이 금방 공산당을 반대하는 이른바 《중산함사건》을 일으킨 직후였다. 한데서 학교내 좌파와 우파간의 투쟁은 아주 치렬하였다. 양림은 주은래동지의 두리에 굳게 뭉쳐 반혁명우파세력의 진공을 단호히 배격하였다. 이에 주은래동지는 양림에게 깊은 주의를 돌리였다.
양림은 명실공히 광주혁명투쟁에 참가한 조선인의 대표인물이였다. 그의 일거일동은 주은래동지에게 잊을수 없는 인상을 남기였다.
1926년 7월 력사적인 북벌혁명전쟁이 시작되였다. 수백명의 조선인들이 북벌군의 제4군, 제6군, 제8군 등 부대에 소속되여 광주를 떠나 북상하였다. 1927년 4월 12일과 7월 15일 장개석, 왕정위의 배반으로 말미암아 국공합작이 파렬되고 기세드높던 대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거의 모든 조선인들은 확고부동하게 중국공산당의 켠에 섰다. 그들 대부분은 장발규부대에 소속되여 광주로 가고 수십명 동지들이 《8.1》남창봉기에 참가하였다.
남창봉기의 중공전적위원회서기는 주은래동지였다. 그는 언녕부터 양림 등 동지들을 통하여 조선인혁명가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던 동지들이 또 수십명이나 남창봉기에 참가하니 주은래는 보다 깊은 인상을 받았다. 주은래동지의 마음속에는 조선동지들이 있었고 조선동지들의 심금속에는 주은래동지의 거룩한 형상이 깊숙히 뿌리를 내리였다.
1934년 1월 21일, 중앙혁명근거지 서금에서 중화쏘베트공화국 제2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렸다. 그번 대회에 조선인양림이 조선민족대표로 참가하였고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 집행위원으로 당선되였다.
북벌전쟁준비당시 양림은 국민혁명군 제4군 독립퇀 제3영 영장이였다. 그후 그는 황포군관학교에 소환되였다가 1927년 8월에 쏘련 모스크바에 류학을 갔다. 그는 1930년 봄에 귀국한후 선후로 중공동만특위 군위서기, 중공만주성위 군위서기로 사업하면서 30년대초 동만과 남만의 항일무장투쟁에 중대한 기여를 하였다. 그때 주은래동지는 중공중앙국 서기 겸 중앙쏘베트 로전위원회주임이였다. 언녕부터 조선인 양림의 위인됨을 알고 있은 주은래동지는 양림을 중앙혁명근거지에 소환하기로 하였다. 1933년 1월 양림은 주은래동지의 지시에 의해 강서성 서금에 갔다. 주은래는 양림을 자기 수하에 두고 로전위원회 참모장이란 중책을 맡기였다.
로전위원회란 로동 및 전쟁위원회의 간칭이다. 이 위원회에서는 중앙근거지 경제, 군사, 로동면에서의 모든 동원사업을 책임지고 관리하며 전쟁동원시에 중앙정부의 각 부와 위원회, 군구, 지방정부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할수 있었다. 이렇듯 중요한 부문에 조선인 양림을 부른것은 그에 대한 주은래동지의 깊은 신임과 배려였다.
양림은 주은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주은래의 직접적인 지도밑에서 중앙혁명근거지의 군민들을 조직하여 반《포위토벌》투쟁에로 궐기시키기 위하여 주야로 사업하였다. 그때 주력홍군에 보내는 로농전사들은 모두 보충퇀의 집중훈련을 거쳐야 하였다. 양림은 동지들과 함께 짧은 기간내에 10개의 보충퇀을 조직하고 친히 훈련을 지도하여 주력홍군에 보내였다. 그는 또 근거지안의 각급 정부들을 지도하여 길닦기, 다리부설을 다그치고 반《포위토벌》 단기비용 60여만원을 모아 제4차 반《포위토벌》의 승리에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하였다.
주은래동지는 또 양림을 중화쏘베트공화국 림시중앙정부 총동원무장부 참모장 직에 등용하였다. 그리곤 모택동동지와 상의하여 양림을 중화쏘베트공화국 제2차전국대표대회에 부르고 중앙집행위원의 중책을 맡기였던것이다.
주은래의 배려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양림의 안해 리추악이 중공만주성위 녀성부에서 사업하다가 중공주하중심현위 부녀위원으로 부임되였다는것을 알고 제2차 전국대표대회 기간에 모택동동지와 함께 만주성위 대표인 하성상을 만나 리추악의 형편을 자상히 물으시고 리추악을 중앙근거지로 전근시키자고 하였다.
그 무렵에 중공만주성위 순시원 풍중운동지가 주하에 가서 리추악을 찾았다.
《모택동동지께서는 서금에서 소집한 중앙쏘베트공화국 제2차대표대회에서 만주성위 대표 하성상을 만나주시고 동무를 중앙근거지에 전근시켜 양림동지와 함께 사업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다오…》
《예?!》
리추악은 뜻밖의 희소식에 너무도 기뻐 이렇게 거듭 되뇌이였다.
《당에 감사를 드립니다. 모택동, 주은래동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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