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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대학입시시절 자습으로 익히였던 중국지리속의 주산군도는 상식그대로 중국의 최대군도로서 크고작은 섬이 1390개로 헤아려진다. 그래서 천도지성으로 불리우는 주산군도는 오늘날 지구급 주산시로 되여 산하에 정해, 보타 2개구와 14개진, 7개향을 두고 면적이 943평방킬로메터, 인구 69만을 이룬다. 그만큼 력사가 유구하여 6000여년 전 신석기시대에 벌써 인류의 활동을 보이고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진나라 진시황은 일찍 서복이라는 신하를 동남연해의 봉래, 방장, 영주 세개의 신선산에 보내여 장생불로초를 찾게 하였다고 한다. 그중 봉래산이 오늘의 주산군도의 대산도로서 섬안에는 서복을 기리는 정자, 서복의 “동도기념비”등 고대건축물을 찾아볼수가 있다.
이것이 대학입시시절 지리공부에서 익힌 상식이 아닌 현실알아보기라면 주산군도 주체섬과 바다를 사이두고 바라보는 보타산은 군도의 동부바다에 위치하여 그 면적이 41.05평방킬로메터로 나타난다. 섬전체가 수풀이 우거진 산체를 이룬데다가 수령이 100살 이상의 고목이 1329그루 (그중 녹나무 한 그루는 수령이 800년, 나무 둘레의 길이가 6메터)나 서고있어 보타산의 옛스러움을 그대로 풍겨준다.
하나 보타산부두를 나서고 보타선경 정문에 들어서도 어디가 어딘지를 모르겠다. 관광지도를 펼치니 정문안으로 한참 더 나아가면 보타산의 상징경관인 남해관음불상 구내이고 이 구내 바다가에 남대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관광단체객이 아닌 나, 발가는 대로다.)
나는 무작정 앞으로 걷기만 했다. 수풀구간을 지나니 백사장이 펼쳐지고 그 너머 언덕같은 산우에 하늘에 치솟은 웅장한 남해관음불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남대문이 있다는 바위산 아래 바다가로 가보자!)
목표를 잡으니 걸음이 빨라진다. 가랑비가 소리없이 내리는 날씨라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조금 뒤에야 남대문 바다가 첫 경관잡기가 상상외로 적중했다는 것을 느껴야 했다. 남대문과 이어진, 해발이 고작 수메터를 기록하는 언덕산 정상부 숲속에 “신라초기념비”가 서고있었으니 말이다. 너무도 뜻밖이여서 심장이 툭 멎는것만 같다. 그래서 피는 속이지 못한다고 하는걸가.
나는 신라초기념비를 지켜보다가 지나가는 관광객을 보고 사진한장을 부탁했다. 그리곤 기념비 뒤면을 보고서야 무언가 다소 알것 같았다.
신라초기념비의 비문을 보면 보타산은 력사속 명주로 불리운 녕파의 관문이자 동남해안의 요충지로서 신라의 청해진 대사 장보고가 당나라와의 무역을 중시하여 교역품 운송에 보타산 항로를 많이 리용했다고 씌여있었다. 또, 보타산 남쪽 련화양에 암초가 있으니 그 암초를 신라초라고 부른다고 밝혀져 있다. 관광지도를 보니 내가 서고있는 구간 앞바다가 련화양이였고 바위산으로 된 신라초기념비 아래 바다가는 암초구역임을 알리는 들쑹날쑹한 바위무리들이 바다를 헤집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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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초기념비에 감사했다. 아니, 신라초기념비를 세운 주산시 보타산관리국과 한국해상왕 장보고기념사업회가 감사했다. 기념비로 보아 2003년 11월에 세운것인데 바로 3년전 이때의 일, 나 주산군도 보타산행은 신라초기념비 하나만으로도 대만족이였다.
내가 주산군도 보타산으로 달려옴은 중국불교의 4대명산중의 하나인 중국불교 관음보살도장에서 우리 김교각—지장보살님의 옛자취를 찾아볼수 없겠는가 하는, 행여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헌데 첫걸음, 첫 경관에서 전혀 생각밖으로 신라의 청해진 대사로서 고대해상왕으로 이름높은 장보고를 대하게 되니 그 기쁨은 이루다 말할수가 없다.
력사연구가에게 있어서 실머리만한 선색이면 파고들 여지가 큼을 시사한다. 나의 머리에는 우리 겨레의 일대 위인이고 고대해상왕이였던 장보고의 형상이 우렷히 떠올랐다.
고대해상왕 장보고로 말하면 조선반도삼국시기 신라사람으로서 본명은 궁복(弓福), 궁파(弓巴)로 전해진다. 그 시절 일본 승려 원인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礼行记)에는 장보고라고 기록되어있다. 장보고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지만 어린 시절부터 활쏘기와 창던지기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 궁복, 궁파로 불리운것은 역사사실인것 같다. 어찌하든 장보고는 신라가 낳은 바다의 영웅이고 가난한 어부의 아들이었다.
그후 장보고는 청년으로 자라난 후 자기보다 열 살가량 어린 동향후배 정년과 더불어 당나라로 건너갔고 30살 쯤에 오늘날 강소성 서주지방의 절도사 휘하의 주력부대—무령군에 가입하고 30대 초반의 나이에 벌써 군사 5000명을 거느리는 무령군 소장 군직에 올랐다고 하니 과시 여간내기가 아닌가부다.
그러던 장보고를 “삼국사기”에서는 기원 828년, 즉 신라 흥덕왕4년에 당나라서 귀국한 뒤 신라왕에게 청해를 진수(镇守)할 것을 상주했다고 밝히고있다. 당시 서남 해안에서는 당나라의 해적들이 신라인을 로략질하여 노비로 팔거나 무역선을 략탈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는 임금의 허락을 받아 군사 1만 명을 모아 청해진(지금의 완도)을 설치하고 청해진 대사로 활동한 모양이다.
청해진이 건설된 뒤 장보고는 해적을 소탕하여 서남 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고 당, 신라,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 통로를 통한 무역활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신라 지배체제의 외곽적 존재로서 해상무역을 통해 장보고는 일종의 해상왕국을 형성하고 당나라에 견당매물사와 함께 교관선이라는 무역선을 보내 교역활동을 펼치였다. 840년에는 일본에 회역사를 파견하여 서신과 물건을 보내면서 일본과의 무역을 밀고 나갔다. 결과 장보고는 신라, 당나라, 일본과의 무역과 해상권을 장악한 해상왕으로 떠올랐고 그의 세력과 경제력은 국제적으로 극히 번성하여 막강함을 보여주었다.
장보고의 시절, 당나라와 신라와의 우호적 관계로 하여 지금의 산동반도 남쪽 연안일대를 중심으로 당나라의 연해지구들에는 자치집단을 이룬 신라인 촌락—신라방들이 많이 일어섰다. 이에 장보고는 해상무역활동을 통해 키운 경제력을 바탕으로 그제날의 산동 문등현 적산촌에 적산법화원이라는 절을 세우기에 이른다. 법화원내에 년간 500석의 곡식을 수확할수 있는 장전이 있어 신라류민들과 류학승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할수 있었고 많은 승려들이 법화원에 머물면서 정기적으로 법회를 열수 있었다고 하니 적산법화원은 산동반도 일대 당나라거주 신라인들의 활동중심지로, 신라와 당나라 그리고 일본 등 3국을 잇는 해상무역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된다. 장보고는 당연히 그 중심의 총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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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들을 모아 헤아려보는 고대해상왕—신라인 장보고의 대충 행적이라 하겠다. 그런 장보고가 주산군도 보타산의 “신라초기념비”비문에 따르면 당나라와의 무역과정에 교역품 운송에서 보타산항로를 많이 리용하게 되고 그로하여 보타산 남쪽 련화양 바다가에 신라초라는 옛이름까지 생겨났다고 하니 남방에 와서 틈틈히 고대겨레발자취를 추적하는 나에게 있어서 신선하게 안겨들수 밖에 없다.
나는 장보고관련 신라초기념비를 떠나 부근의 암초구간과 남천문바다가를 돌아보았다. 그러노라니 출렁이는 저 대해속에 장보고가 무역선을 이끌고 금시 보타산에 들어서는 것만 같다. 그속에 남천문을 벗어나 부근의 해변가 관음조와 “관음원에 가려고 하지 않는다”, 자죽림, 남해관음불상 (3층으로 이루어진 총높이 33메터, 그중 금동주조 불상의 높이 18메터, 인민페 4000여만원으로 1997년 음력 9월 29일 준공), 보타산관리국 주재 중심경관구 등지를 비속에서 답사해 보았지만 생각은 온통 장보고 하나 뿐이다.
잊을수 없는 2006년 11월 25일, 지장보살님 추적으로 보타산에 갔다가 고대해상왕—장보고의 행적을 더듬어보게 된 하루, 그 하루가 나에게는 그지없이 소중했던 하루가 아닌가 싶다. 소중한 하루라 함은 장보고 외에도 중국불교 4대명산—보타산도장의 유래를 다소라도 헤아리게 되였음에랴.
기원 863년에 일본의 고승 혜악스님이 불경 구하러 세번째로 당나라에 왔다가 산서 오대산에서 관음보살 불상 한존을 얻었다. 귀국행동중 주산군도 련화양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암초에 걸리고, 부득불 조음동으로 해서 대안에 오르고 장씨댁에 불상을 모실수 밖에. 이 불상이 “관음원에 가려고 하지 않는다”이다. 워낙 일본행인데 배가 암초를 만나 귀국하지 못하고 보타산에 머물게 되여 이렇게 불려진것 같다. 후에 이 관음불상을 모시고 보타산이 관음보살도장으로 떠오른다.
내가 알고있는 관음보살도장 유래관련자료 간략적집대성이다. 보타산관련 모든 자료들이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사실은 기원 863년 일본 고승 혜악스님의 귀국행이 그 혼자가 아니였다. 당나라 신라방 시절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礼行记)를 썼고 해상왕 장보고가 세운 적산법화원에 머물렀던 일본 승려 원인이 신라인들의 절대적 보호와 받들림속만이 당나라행이 성사되였던 것처럼 일본 고승 혜악스님도 신라인들의 도움속에서 움직이게 되였다. 신라초기념비 비문에 한패의 신라상인들이 오대산에서부터 혜악스님과 더불어 관음불상을 모시고 동행하고 있었다는것이 그러하다. 이것이 진실한 력사일진대 그번 관음불상으로부터 보타산 관음보살도장 형성에 이르기까지 신라방, 신라상인들의 역할을 배제할수가 있을까?!
보타산의 가랑비는 제법 대살비로 바뀌여지고 시간은 빨리도 흘러 오후 2시를 넘어선다. 불교경관들로 총총한 보타산을 하루품으로 답사한다는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지, 나는 부득불 후일을 기약하면서 급급히 귀로에 올라야 했다.
(2008년 3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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