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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은 제 집안에서 등잔불을 밝혀도 안 되는가?
(박춘월의 《록》을 두고 최삼룡, 최룡관씨와 토론함)
김 학 송
최삼룡 씨는《록색의 매력과 비반복적인 이미지》라는 평론에서 박춘월의 시를《자연을 제제로 한 시로서 자연의 마력을 만끽하면서 생명의 활력을 읊조린 한수의 현대주의적풍물시》라고 평가하였다.
박춘월의 시 《록》은 자연 제재의 시이고 시적주제는 《생명의 활력을 읊조린》데 있다고 했는데, 이는 아무런 객관적인 증거도 제시하지 않고 오로지 주관적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이 시의 진의(眞意)를 왜곡한 평론이다.
이 시의 제재는 결코 최삼룡씨의 해석처럼 자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태초 에덴의 잎사귀가 짜낸 도포》라는 첫 행부터 시작하여 《에덴동산에 들어설 때가 있다》는 마지막 행에 이르기까지 이 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에 바탕을 둔 시이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기독교의 종교상징에 철저하게 기대인 종교시이다.
그런데 최삼룡 씨는 첫 행에 대한 분석에서만은 기독교의 《성경》과의 련관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최삼룡 씨는 첫 행의 마지막에 등장하여 네 번이나 거듭하여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이미지인 《도포》에 대해서부터는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주관적인 해석을 가하기 시작하여 론리의 일관성을 잃는다. 이를테면 최삼룡 씨는 제목《록》과 《도포》를 《화자의 상상에 의하여 록색은 산과 물이 떨쳐입은 례복의 겉옷으로 되였다》고 제 마음대로 분석하였다. 하지만 록색은 기독교의 상징에서는 여호와걸쳤던 도포나 성모 마리아가 걸쳤던 망토의 색깔이며 따라서 기독교상징에서는 푸른색 도포(또는 검은 색 도포)는 기독교의 상징으로 되였다. 이는 《성경》을 조금만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다. 만일 최삼룡 씨가 이런 상식도 모르고 그런 주관적인 해석을 했다면 그것은 무지의 소산이였겠지만 아주 유식한 분이 이런 동에 닿지 않는 해석을 했으니 그 동기를 의심하지 않을 없다. 19세기 프랑스의 스탕달의 유명한 소설 《붉은것과 검은것》에서 《검은 것》은 당시 천주교의 신부나 수녀들이 입었던 《검은 색깔의 도포(黑色道袍)》를 뜻하고 또 이 《검은 색깔의 도포(黑色道袍)》는 기독교세력을 상징하는 것임은 주지하는 바이다.
이 시에서의 아주 중요한 이미지인 도포의 종교적인 상징의미가 밝혀지기만 하면 이 시는 리해하고 해석하기 아주 쉬워지며 결코 그다지 난해한 시만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제1련에서 《테초의 에덴의 잎사귀가 짜낸 도포/ 몇천년을 걸어오며 나붓기다/ 그 펄럭임 강이 되고 바다가 되였다》는 것은 기독교가 몇 천 년의 발전과정을 거쳐서 오늘날에는 그 교세(敎勢)가 《강과 바다》 같이 되였음을 암묵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제2련의 《강가에서 호수 같은 날개옷을 주어입고》는 기독교의 입교의식인 세례를 암시하는 것인데, 이는 《성경》에서 그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예수가 요단 강가에서 처음으로 여호와가 파견한 날개 달린 천사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려고 할 때 여호와의 성령이 흰 비둘기로 변하여 날아내려 예수의 정수리우에 머물렀다고 하니 이 시에서의《날개옷》은 지칭하는 바가 아주 분명하다. 속세에서의 더러운 때를 벗고 기독교 세계에로의 령적인 비상의 시작을 암시하는 것이다. 《도포속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것은 더욱 명료하게 기독교에 입교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현관에 놓인 풀꽃으로 엮은 신 신는다》는 이 제3련에서 《현관》은 기독교의 대문을 의미하며 《풀꽃》은 원죄로 인한 순간적인 인간의 생명과 부귀영화의 무상함을 뜻하며, 《신》은 그러한 무상한 인생의 길을 걸어가게 됨을 의미한다. 태초 에덴동산에서 인간의 조상이라는 아담과 이브가 여호와의 말을 거역해 지은 원죄로 인해 영원성을 상실한 인간들이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하여 기독교의 수련을 거치게 되는 것을 다음 행으로부터 보여주고 있다. 《도포의 서랍에는 새소리 많아》는 기독교의 언약궤 같은 서랍에는 하나님의 성령의 거룩한 소리가 많이 담겨 있다는 뜻이며, 《몇 알 꺼내여 호주머니에 넣고》는 하나님의 성령의 거룩한 목소리를 많이 들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체질화한다는 뜻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제4련은의 첫 행인《도포 뒤울안 시원한 그늘 속》은 비기독교적인 이교(異敎)세력들이 살아가는 사회적공간을 암시한 것이다. 이런 사회적공간에는 하남님의 거룩한 성령의 소리와는 다른 더러운 《벌레울음》이 《무더기로 쌓여》있지만 그것을 파헤치면서 나아간다면 하나님의 구원과 가까운 《웬 오솔길 입구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이 련에서 《벌레》는 가장 관건적인 이미지로서 기독교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는 배치되는 악하고 추한 대상을 상징하는바 이 시에서도 이렇게 해석해야만 이 시의 진의(眞意)를 파악할 수 있다.
제5련은 이 시의 결말이다. 즉 이시의 시적인 주제가 최종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순간 / 오솔길에 깊이 빠져들 때가 있다》는 말은 기독교에 깊이 빠져든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기독교적 수련을 거쳐서 다시 원죄를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받는 《에덴동산에 들어갈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일언이페지하면 이 시는 13행밖에 안되는 함축된 시속에서 여호와에 대한 배반으로 인한 락원상실-실락원(失樂園)과 여호와에 대한 신앙의 회복으로 인한 락원회복-복락원(福樂園)의 기독교문학의 전통적인 원형상징패턴을 훌륭하게 재현한 종교시다.
주지하다시피 현대주의문학의 가장 중요한 철학 및 사상적 기초를 닦아놓은 독일의 철학가 니체가 《하나님은 죽었다》고 공언(公言)했다. 그런데 최삼룡씨는 독실한 기독교적인 신앙을 읊은 박춘월의 시에 현대주의라는 타이틀을 달아놓았는데, 이는 마치 늙은이에게 아기의 때때옷을 입혀놓은 것처럼 어울리지 않는다.
우에서 본바와 같이 박춘월씨의 시 《록》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통적인 기독교의 종교상징에 바탕을 둔 종교시이다.
최룡관씨가 《기독교시면 어떻단 말입니까? 지금도 시를 쓰는데 령역제한이 있습니까?》라고 반문을 했다. 그렇다, 종교신앙은 중국헌법에 규정된 공민의 자유권리이기 때문에 종교를 신앙하고 또 종교시를 쓴 것 역시 자유이다. 다만 말하고 싶은 것은 필자가 자신의 리해와 해석에 좇아 종교시를 종교시라고 평가하는 것도 헌법에 규정된 공민의 자유의 권리다.
최삼룡 씨나 최룡관 씨처럼 종교적인 냄새가 짙은 박춘월의 시《록》을 거듭거듭 칭찬하고 또 중국공산당 연변조선족자치주위원회의 기관지에 버젓하게 실어주고 대상 만원까지 안겨주는 자유만 있고, 이에 대해 어쩌다가 반론을 제기하는 자유는 없단 말인가?
원님은 남의 집에 불을 싸질러도 괜찮고 백성은 자기 집안에서 등잔불을 밝혀도 안 된단 말인가? ( 2006년 6월 15일 연길에서)
(이 글은 <우리 동네 문학 동네>에 실렸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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