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과 종교시
ㅡ박춘월 시인님의 시 "록"은 종교시인가
뉴욕 신학대학 이 수나
G. B. Tennyson과 E. E. Ericson은 “문학은 종교에서부터 발생”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문학을 통시적으로 원시 종합 예술의 유추적 개념에서 출발했다고 인정할 때 종교성의 잠재력과 그 영향을 배제 할 수 없지않겠나요. 중국동포 문학 학자들은 서구문학에서는 성경을 한편의 문학저서로 보고있는데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한번 문의드려봅니다.
성경을 한편의 문학저서로 보는데 반해서 두번째 성경으로 꼽히는 문학작품이 바로 우리가 너무나도 익숙한 Víctor Hugo의 "레미 제라블"입니다. 산맥과도 같은 방대한 분량의 고난이 쌓이고 수난을 점철하면서 마지막에 사랑으로 용서로 승리로 이어지는 것이 "레미 제라블"이 아닙니까.
우리는 "레미 제라블"을 읽을 때 누구도 이 위대학 작품을 두번째 성경이라고까지 생각한 사람이 없으며 그렇게 불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작품속에서 주인공과 함께 승화하는 예수의 인간사랑, 원수도 사랑할수 있고 사랑이 원수도 용서할수 있는 큰 힘을 로마제국 시대에 태어나 인간들의 죄를 위해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당장 "레미 제라블"의 마지막 폐이지를 덮을 때 우리는 기독교가 무엇인지 성경이 무엇인지 이런 것이 머리속에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를 감싼 것은 그냥 사랑과 용서 그리고 힘입니다.성경도 문학작품이고 "레미 제라블"이 두번째 성경이라는 것도 다 학자들이 가져다붙인 말씀이고 그렇게 연구를 거듭해오면서 이론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렇게되어 서구문화의 기본 바탕을 형성하고 있는 가장 위대한 종교가운데 하나인 기독교는 우리 모두의 생활에 영향을 아니 끼친 곳이 없다는 것을 승인하여야 합니다. 인류 근현대 문학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기독교는 불교의 영향권하에 있었던 중국을 제외하고 한국 일본 나아가 동구권에서도 거대한 파급을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 근현대 문학에 있어서 기독교는 가장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개화기 때에 서구에서 수용되어 들어와 한국의 근현대 문학의 기틀을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한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에 가장 널리 퍼져있고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종교가 기독교임을 살펴볼 때 문학과 기독교에 대한 논의는 논의자체가 불필요할 만큼이나 우리 모두의 문학작품에서 사랑과 용서로 나아가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기고 증오가 언제나 사랑 앞에서 무력해지는 얼마나 많은 작품들과 만나게 되었습니까.
이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실제로 가장 두려워해야하는 것은 아무 작품이나 기독교작품이다거나 또는 기독교의 사상을 선도하는 작품이다는 평가를 함부로 내릴수가 없게 됩니다. 종교가 문학작품의 생활바탕이 되어 그것이 다시 문학작품속에서 인간의 삶으로 융합하고 변화하여 수많은 히스토리에 업히고 자기자신만의 키워드를 안고 우리 앞에 나타날 때에 우리가 읽는 것은 그 작품이 주는 감동만 생각하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썼기 때문에라던가, 어떤 사람이 어떤 환경하에서 썼기 때문에 작품의 키워드를 그쪽으로 접근하려고하거나 임의적으로 몰아가는 것은 문화비판에서 절대 있을수 없거니와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실례로 박춘월님의 "록"을 이야기하여보기로 합니다.
제가 읽은 "록"이라는 시는 말그대로 한편의 보통시입니다.
"록"이라는 푸름의 키워드를 제목에서 나타내고 있듯이 자연과의 대화를 시사하는 한편의 풍물시라고 부를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이 시에서 저는 아무런 성서의 설화적 모티프나 작품속에 투영된 기독교 의식을 발견할수가 없습니다. "에덴"이라는 지명 이름은 구약성경의 창세기에서 나오는 이상향입니다. "녹(록)야원"이라고 부릅니다. 영원한 푸름과 아름다운 자연의 상징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오늘의 현실생활에서 "에덴"이라는 명칭을 빌어다 사용하는 가게들과 커피샵들도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실제로 에덴이라는 지명이 어디 있는가를 놓고 미국에서는 일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논쟁이 끝없습니다. 대체로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 만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 있는 것으로 추측하지만, 또 다른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비유로 만든 가공의 존재라고 보고 있습니다.
때문에 성서도 한권의 문학서적으로 볼 때 우리는 "록"에서 사용된 "에덴"과 "동산"이 던지는 의미는 먼저 자연과 영원한 푸르름에다가 詩的 사상이 지향하는 높이와 詩的 사상이 내재하는 깊이에다가 사색을 조준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하여 이 시에서 사용된 단어들이 풍기는 이미지, 예하면 "도포"라던가 "날개옷"이라던가 "신" "새소리"같은 allegory적 사물 인식을 다만 이 시의 평면적 수직성과 수평성의 의미영역으로 확대하기에도 사실은 역부족입니다. 왜냐하면 이 시가 한편의 보통시로도 너무 잘 된 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중국 동포 학자분들이 굳이 이 시를 기독교시로 나아가 기독교사상을 선도하는 종교시로 보려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기독교시의 특질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기독교와 시가문학과의 상관 관계와 기독교시의 본질을 파고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한편의 시를 뜯어맞추기하는 식으로 아무런 영적 감동을 받을수 없는 길지않은 시에서 기독교의 사상을 찾아본다는 것은 말그대로 찾아보고자하는 사람이 억지로 "지어내기"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오히려 무엇이 기독교의 사상을 전도하는 종교시"인가를 이론적으로 해석하려면 우리가 종교생활속에서 빠뜨릴수 없는 성서 번역과 찬송가의 보급을 이야기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찬송가의 가사들을 음악이 없이 시로 읽을 때와 음률을 달아 노래로 부를 때에 받게 되는 감동은 이와 같은 시적 변모 과정을 가장 생동하게 보여줍니다.
그런데 "록"을 두고 종교를 선전하는 이미지 종교시로 몰아가는 중국 동포 학자분들의 평론을 몇편 읽었습니다.
1-[박춘월의 시 《록(綠)》을 보고서 / 延邊大學 敎授 金 海 龍 ]
2-[백성은 제 집안에서 등잔불을 밝혀도 안 되는가?] [박춘월의 《록》을 두고 최삼룡, 최룡관씨와 토론함) 김학송]
이 2편의 평론에서 "록"을 종교시로 분석하는 이유를 한번 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록》이라는 이 시에 《성경전서 · 창세기》편에 나오는 무화과 나뭇잎을 상기시키는《잎사귀》가 론급된 것으로 미루어보면 이 시에서의 《도포》는 예수교 교인들의 도포를 말할 것이다. 하지만 시에서는 일반적인 승복(僧服)으로서의 도포가 아니라 예수교에 대한 상징으로 쓰이고 있다.]
- 따라서 제1편 《태초 에덴의 잎사귀가 짜낸 도포 / 몇 천 년 걸어오며 나붓긴다/ 그 펄럭임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는 예수교가 날따라 흥성하여 감을 뜻한다고 보겠다. 그리고 2련에서 《도포속으로 걸어 들어간다》고 한 것은 사람들이 예수교에 입교함을 시사하고, 3련에서의 《도포의 서랍》이란 예수교의 성경이나 찬송가 같은 것을 간직하고 있는 문갑(文匣)을 시사하고, 그 서랍에서 새알 《몇 알을 꺼내 호주머니에 넣는다》는 것은 예수교의 교의를 얼마간 받아들임을 뜻하고, 4련에서의 《도포 뒤울안》이란 예수교회(예배당)를 뜻한다. 그리고 5련에서의 《에덴동산》은 락원을 이른다.]
- 이렇게 보면 4련에서의 이른바 《무더기로 쌓인 벌레울음》이란 예수교에 배치되는, 지어는 예수교를 망라한 모든 종교를 반대하는, 련속 부절히 자꾸만 들려오는 속세의 듣기 싫은 소리를 암시한다.
- 그러면 이 듣기 싫은 벌레울음 소리가 과연 무엇인가? 무신론사상일수도 있고, 유물론 지어는 맑스주의일수도 있다. 또 혹여는 우리당의 목소리일 수도 있다.
이상은 1-[박춘월의 시 《록(綠)》을 보고서 / 延邊大學 敎授 金 海 龍 ]에서 평론하시는 분이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 박춘월의 《록》을 두고 최삼룡, 최룡관씨와 토론함) 김학송]에서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제1련에서 《테초의 에덴의 잎사귀가 짜낸 도포/ 몇천년을 걸어오며 나붓기다/ 그 펄럭임 강이 되고 바다가 되였다》는 것은 기독교가 몇 천 년의 발전과정을 거쳐서 오늘날에는 그 교세(敎勢)가 《강과 바다》 같이 되였음을 암묵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 제2련의 《강가에서 호수 같은 날개옷을 주어입고》는 기독교의 입교의식인 세례를 암시하는 것인데, 이는 《성경》에서 그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예수가 요단 강가에서 처음으로 여호와가 파견한 날개 달린 천사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려고 할 때 여호와의 성령이 흰 비둘기로 변하여 날아내려 예수의 정수리우에 머물렀다고 하니 이 시에서의《날개옷》은 지칭하는 바가 아주 분명하다. 속세에서의 더러운 때를 벗고 기독교 세계에로의 령적인 비상의 시작을 암시하는 것이다. 《도포속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것은 더욱 명료하게 기독교에 입교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현관에 놓인 풀꽃으로 엮은 신 신는다》는 이 제3련에서 《현관》은 기독교의 대문을 의미하며 《풀꽃》은 원죄로 인한 순간적인 인간의 생명과 부귀영화의 무상함을 뜻하며, 《신》은 그러한 무상한 인생의 길을 걸어가게 됨을 의미한다. 태초 에덴동산에서 인간의 조상이라는 아담과 이브가 여호와의 말을 거역해 지은 원죄로 인해 영원성을 상실한 인간들이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하여 기독교의 수련을 거치게 되는 것을 다음 행으로부터 보여주고 있다. 《도포의 서랍에는 새소리 많아》는 기독교의 언약궤 같은 서랍에는 하나님의 성령의 거룩한 소리가 많이 담겨 있다는 뜻이며, 《몇 알 꺼내여 호주머니에 넣고》는 하나님의 성령의 거룩한 목소리를 많이 들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체질화한다는 뜻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 제4련은의 첫 행인《도포 뒤울안 시원한 그늘 속》은 비기독교적인 이교(異敎)세력들이 살아가는 사회적공간을 암시한 것이다. 이런 사회적공간에는 하남님의 거룩한 성령의 소리와는 다른 더러운 《벌레울음》이 《무더기로 쌓여》있지만 그것을 파헤치면서 나아간다면 하나님의 구원과 가까운 《웬 오솔길 입구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이 련에서 《벌레》는 가장 관건적인 이미지로서 기독교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는 배치되는 악하고 추한 대상을 상징하는바 이 시에서도 이렇게 해석해야만 이 시의 진의(眞意)를 파악할 수 있다.
- 제5련은 이 시의 결말이다. 즉 이시의 시적인 주제가 최종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순간 / 오솔길에 깊이 빠져들 때가 있다》는 말은 기독교에 깊이 빠져든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기독교적 수련을 거쳐서 다시 원죄를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받는 《에덴동산에 들어갈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 2편의 평론에서 제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물음 1)- 무슨 근거로 잎사귀가 꼭 무화과 나뭇잎을 상기시키는거가 되어야 하는가요?
물음 2)- 무슨 근거로 무화과는 꼭 "성경 창세기"에서만 나오는 것이여야 하는가요?
물음 3)- 이상 1) 2)의 근거를 설명하지 못하였으면서 어떻게 "...에서 미루어보면 "이 시에서의 '도포'는 '예수교 교인들의 도포를 말할 것이다."로 근정하시나요?
물음 4)- 무근거를 근거로 삼는 평론도 있으십니까?
방금 위에서 저는 "물음 4)- 무근거를 근거로 삼는 평론도 있으십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대답은: "없습니다."입니다. 적어도 제가 알기에 무근거를 근거로 삼는 평론은 없습니다. 평론의 전문을 하나하나 묻고 대답하고 질문하고 풀이할수는 없겠습니다.
"록"의 이미지를 기독교시로 확장시켜갈 때의 첫 단추가 "에덴"이라는 지명과 "잎사귀" "도포" 이런 낯설은 단어들을 임의대로 가져다가 유순호선생님의 표현을 빈다면 exaggeration, twists, misleading, - 夸大하고,歪曲하고,误导하는데서부터 잘못 끼어지기 시작합니다. 이럴 때 "록"을 기독교를 선도하는 시로 보지 않는 분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여야 했습니다.
A - 세상에는 무화과만 잎사귀가 있나? B - 세상에는 성경에서만 무화과가 나오나? C - 세상에서 도포는 예수교인들만 입나?
그리고 "록"을 "기독교를 선도하는 시"로 평론하는 학자분들의 무근거를 근거로 하는 평론에서 이상과 같은 질문에 대답하게 하여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참으로 "세상에는 무화과에만 잎사귀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을 때, "세성에서 무화과는 성경에서만 나오는 것"임을 증명하였을 때, 또 그리고 "세상에서 도포는 예수교인들만 입는다."는 것을 증명하였을 때, 이분들의 평론은 결코 무근거를 근거로 하는 평론이 아님을 승인하여 드릴수가 있게 됩니다.
이와같은 질문은 아마 수백개라도 드릴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은 2- 백성은 제 집안에서 등잔불을 밝혀도 안 되는가? "박춘월의 《록》을 두고 최삼룡, 최룡관씨와 토론함) 김학송"에서도 한단락을 뽑아 같은 질문을 드려볼수가 있습니다.
- 제2련의 《강가에서 호수 같은 날개옷을 주어입고》는 기독교의 입교의식인 세례를 암시하는 것인데, 이는 《성경》에서 그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예수가 요단 강가에서 처음으로 여호와가 파견한 날개 달린 천사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려고 할 때 여호와의 성령이 흰 비둘기로 변하여 날아내려 예수의 정수리우에 머물렀다고 하니 이 시에서의《날개옷》은 지칭하는 바가 아주 분명하다. 속세에서의 더러운 때를 벗고 기독교 세계에로의 령적인 비상의 시작을 암시하는 것이다. 《도포속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것은 더욱 명료하게 기독교에 입교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여기서 제가 드리고 싶은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물음 1)- 《강가에서 호수 같은 날개옷을 주어입고》(a) 강물에 비낀 자신의 그림자를 상상할수도 있잖을가요? (b) 비를 막기 위하여 벼짚으로 만든 도포를 걸치고 낚시는 태공을 상상할수도 있지않을가요? (c) 강물에 비낀 산자락이나 나무 그림자를 상상할수도 있잖을가요? (d) 녹음방초가 우거진 강기슭에서 석양이 질 때에 하늘을 날으는 기러기나 비둘기를 상상할수도 있지않을가요? (e) 비속을 달리는 13인의 아해(이상)이 강옄으로 달린다고 상상하면 어때요?
물음 2)- 이미 앞에서 잠간 말씀드린바 있는 "무근거를 근거로 하는" "잎사귀"와 "무화과"의 확장적 twists로부터 비평가들이 굳이 수십 수백가지로 상상할수 있는 이 시구절의 수직적 또는 수평적 이미지를 한편의 히스토리처럼 만들어가는 원인에 대하여 문의드립니다.
A-기독교의 세례를 암시한다는 이유와 근거? B- 날개옷이 날개달린 요한이라는 이유와 근거? 여전이 이 평론속에는 이유와 근거를 제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로 답은 역시 "무근거를 근거로 하는 평론"입니다.
이와같은 "무근거를 근거"로 하는 위에 몇분들의 평론에서 저는 무더기로 질문을 드릴수 있지만 생략하고자 합니다. 다음 아래에서 읽을수 있는 "무근거를 근거로 하는 평론"의 진위가 가장 생동하게 나타나있기 때문입니다.
- 이렇게 보면 4련에서의 이른바 《무더기로 쌓인 벌레울음》이란 예수교에 배치되는, 지어는 예수교를 망라한 모든 종교를 반대하는, 련속 부절히 자꾸만 들려오는 속세의 듣기 싫은 소리를 암시한다. (박춘월의 시 《록(綠)》을 보고서 / 延邊大學 敎授 金 海 龍)
- 그러면 이 듣기 싫은 벌레울음 소리가 과연 무엇인가? 무신론사상일수도 있고, 유물론 지어는 맑스주의일수도 있다. 또 혹여는 우리당의 목소리일 수도 있다. (박춘월의 시 《록(綠)》을 보고서 / 延邊大學 敎授 金 海 龍)
여기서 "듣기 싫은 벌레울음 소리가 과연 무엇인가" "우리당의 목소리일 수도 있다"는 무슨 뜻인가요? 분명한바 이들 비평가들은 먼저 "록"이라는 시에 대하여 "무근거를 근거로 하는 평론"에서 "록"의 수직적 수평적 이미지를 exaggeration, twists, misleading, - 夸大하고,歪曲하고,误导(유순호 작가님의 "김관웅현상과 문화대혁명지향의 연변인) 하고 확장해석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짜깁기와 꿰맞추기식 방법으로 가독교시가 아닌 한편의 순수한 보통 풍물시를 "기독교시"로 만들고, 다시 "기독교시"를 "우리 당이 싫어하는 시"로 비약시키고, 나아가 기독교와 "우리 당"을 적대적 대립관계에 마주세운 것이 "록"의 비평자들이 "무근거를 근거"로 하는 exaggeration, twists, misleading, - 夸大하고,歪曲하고,误导 (유순호 작가님의 "김관웅현상과 문화대혁명지향의 연변인) 하는식의 평론에서 도달하고자하는 목적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보아낼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는 마지막 질문을 드려볼 차례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하지않겠습니다. 이미 유순호작가님의 논문 "김관웅현상과 문화대혁명지향의 연변인"에서 잘 소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말 속담에 '코에 걸면 코걸이' 되고 '귀에 걸면 귀걸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비평가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한편의 시에다가 "무근거를 근거로 하는 평론"을 제출하면서 순수한 일반 독자들을 오도하기는 참으로 식은죽 먹기입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정말 "기독교를 선도하는 종교시였구나."고 깜빡할수 있겠으며 "우리 당이 좋아하지 않는 시"로 여론을 만들고 나아가 "우리 당"으로 지칭된 공산당에 고발하고 이런 시를 발표한 신문사나 잡지사 또는 편집관련자들을 추궁할수 있다는 것은 이미 교대되어 있는 사실에서 잘 알수 있습니다.
이럴 때 이렇게 "귀걸이식" "코걸이식". 그리고 "무근거를 근거로 하는 평론"이 보통 비평가들도 아닌 대학의 전문학자나 교수들의 손에서 나왔다는 자체가 보다 사회에 일으킬수 있는 나쁜 영향은 치명적이라고 보지않을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시일수록 좋은 쪽으로 상상하여야 합니다. 고의적으로 나쁜 쪽으로 확장해석하는 습관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더구나 "우리 당"을 운운하는 쪽으로 확장해석하고 exaggeration, twists, misleading, - 夸大하고,歪曲하고,误导하는 행위는 참으로 학자적인 양심에서 어긋나는 행위라고 하지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행위는 비판하여야 합니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문학쟁명을 만들어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언제던지 반론을 환영합니다.
뉴욕에서 이 수나 올림.
(본문은 에서 퍼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