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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고향(외8수)-박춘월
2019년 07월 18일 10시 29분
조회:714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박춘월
고향(외8수)
천천히 썩어서
기울어져 가는
나무받침대의
몰락의 진행이다
물감이 차르르 돌던
옛날의 그 유화
기름기 다 빠지고
터덕터덕 갈라터져서
구질구질하다
마른 락엽이
바스락거리는
그 숲사이를 뒤져보면
빨간 볼의 어린 내가
뛰놀고 있는데
너는 내가 벗어버린
껍질 같은 것인가
람루한 차림의
궁상맞은 너를
아― 너를
중년이 다 된 내가
오늘도
다시 껴입어본다
사랑
두 사람이 마주섰을 때 생기는
합쳐진 자기장이 있다
두 사람은 그것을
뭉텅뭉텅 뜯어먹으면서 산다
달이 기울어졌다가 둥그렇게 차오르듯이
자기장도 그러기를 되풀이한다
그 둥그렇게 차오르기 반복이
간혹 멈추는 사람도 있다
허기진 사람이 서서히 상대를 증오하고
한없는 욕설로 활활 타오르기도 한다
자칫 반주검이 돼서 나가는 수도 있다
누구의 몸에 비극의 끈이 동여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간이 가장 놀기 좋아하고
인간을 송두리채 휘저을 수 있는
운명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인간 사이에서 벌여대는
유희이다
이슬
다치지 마!
난 터지기 직전이야
난 누구보다 순결을 주장하지
령롱하게 반짝이는
동그란 내 몸은 차거워
이 새벽의 잠간의 체류와
풀잎과의 악수는
내 생의 궤적이야
순간이나마 웃어주랴
허나 난 눈물에 가깝지
난 다 보고 있어
난 다 담고 있어
난 부서지기 직전이야
만지지 마!
흔적
너와 내가 찢어지던
어지러운 그 자리에
아홉밀리그램의 내 생각이
살며시 앉는다
나무가지에 내리는
잠자리모양으로
생각은 알을 쓸고
수많은 너와 내가 부화된다
부재의 망사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연극
수많은 잠자리들이
머리속에서 가슴속에서
마구 날아다니는
내가 널 죽여버리고 싶었던
얼룩진 옛터
허공
여백은
오직 너만이 만들 수 있다
적막과 넉넉함의
미학이 숨 쉬는 공간
온갖 잡동사니를
죄다 얹어둘 수 있는 선반
얹어둔 물건 찾아가지 않으면
천천히 풍화시켜
무로 만들어버리는
커다란 로천동굴
빛이 비춰도 눈이 부시지 않고
컴컴하면 별을 품을 수 있다
죄다 담을 수 있지만
하나도 담지 않고 있다
온전히 비여있어서 아름다운
우주의 주머니에는
변계가 없다
바람과 함께
주머니에 아주 잠간 담겨보는
우리의 함성…
두만강에서
물이 운다
울음소리 마디들에서
흰옷 입은 사람들이
걸어나와
아리랑고개
넘는다
소용돌이가 급하다
손에 손잡고
강강수월래
뿌리워 나가지 말거라
휘둘리워도
손 놓지 말거라
뒤돌아보지 말라
순리대로
유유히 가자
구불구불 흐르자
물아 물아
우리 이젠 웃자
온 세상이 술렁인다!
꿈
나는 무이면서도 허이고
또한 존재한다
현실을 리탈한 언덕 우
계시의 동영상
내가 펼치는 무의식의 줄기는
어디까지 뻗어가고저 하는가
꽃잎 몇점이 날릴 법한 그 동네
두 세상 사이에서
내가 왔다 갔다 한다
의식이 잠이 들면
그제서야 수면 우에 떠올라
내게 또 다른 공간을 제안하는
무의식의 무대 우로 올라가
내 한계를 찢어버리고
자유의 변계선을 넘어서 본다
내 현주소를 초월해서 건재하는
다른 한 허상의 나라
내 무의식의 힘있는 왕국
그곳에서 나는
여러가지 내 얼굴과 마주한다
무슨 일들이 일어날 것인지
예측 불가한 영화가 방영된다
내가 주인공이다
춤
중력을 거슬러
하늘에 솟구쳐 보는 일
강력하게 세상을
빨아들이는 일
육신이 령혼이랑
같은 색갈이 되는 일
허공 속에
자신을 집어넣는 일
바람을
밀고 나가는 일
강물이 되여
굽이치며 흐르는 일
가파른 산 중턱에서
커다란 자신을 만나는 일
저기
팔과 다리와 손을 펼쳐들고
사나운 파도가 덮쳐온다
보름달
달이 왔다
휘영청 밝은 달이
칠흑의 내 허공에도
활짝 뜬다
둥근 달이
나는 만져본다
손끝으로
그리움이라는 단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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