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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희가 맑스의 론술을 조작한 실상(實狀) /김월성
2007년 09월 15일 17시 43분  조회:4515  추천:56  작성자: 박문희

박문희가 맑스의 론술을 조작한 실상(實狀) 

김 월 성


박문희의 글은 주로 세번째 장절인 <<인류 원초의 문화에 영원한 가치원소가 없는가?( 이하 <<영원한 가치원소>>로 략칭함)에서 맑스의 론술을 인용하기도 하고 조작하기도 했다. 박문희는 "맑스, 엥겔스의 심각한 론술을 살펴본다"고 했지만 기실 원시인들의 생명일체감정을 바탕으로 삼고있는 남영전의 이른바 <<토템문화론>>을 변호하기 위해 이른바 "희랍신화의 '영구한 매력'", 이른바 "희랍신화의 '천진성'", 이른바 "희랍신화의 '거대한 매력'"이라는 엉뚱한 개념들을 허위조작해 가지고 그것으로써 "희랍예술"에 대한 맑스의 평가를 "희랍신화"에 대입시는 작법으로 희랍신화와 희랍예술에 대한 맑스의 본의를 완전히 변형시켜 버리고있다. 

그 점을 살펴보기 위해 먼저 신화와 희랍예술에 대한 맑스, 엥겔스의 론술을 살펴보기로 하자. 맑스의 다음과 같은 론술에서 우리는 신화의 생성 년대를 똑똑히 확인할 수 있다.

야만시대의 저급단계에서 인류의 고급적인 속성이 발전되기 시작했다. 개인의 존엄, 웅     변, 종교적 감정, 정직, 강인, 용감성이 이 시기에 이미 품격(品格)의 일반적인 특징이     되었다. 하지만 잔혹, 간험(奸險)과 열광도 뒤따랐다. 종교령역에서의 자연숭배와 인격화에  관한 신령(神靈) 및 대지배자에 대한 모호한 개념들이 발생했다. (중략) 상상이라는 인     류의 발전에 그처럼 큰 기능을 일으키는 것이 이 시기의 신화, 전기(傳記)와 전설을 비롯    한 미기재(未記載)의 문학을 생성시키기 시작했고 또 이미 인류에게 강력한 영향을 일    으켰다.(馬克思. <<摩爾根<古代社會>一書摘要>>. 人民出版社. 1965. 54-55페지.)

맑스는 신화가 인류의 야만시대 저급단계의 생성물임을 분명하게 지적하고있다. 야만시대의 저급단계가 바로 원시사회인 것이다.(맑스와 엥겔스는 원시사회를 몽매시대, 야만시대로 나누고 시대마다 저급, 중급, 고급단계로 각각 나누었다.) 엥겔스의 <<가정, 사유제와 국가의 기원>>을 참조. 그런가하면 엥겔스는 희랍예술은 원시사회가 해체되고 성숙된 노예제사회의 상승기 즉 인간의 문명시대의 제작물임을 지적했다. 엥겔스는 노예제가 사회생산로동에 더욱 큰 규모의 분공이 있게 했음을 지적하면서 희랍예술은 희랍노예제의 생성물임을 다음과 같이 론술하고있다.


  ... ... 그리하여 고대문화의 번영 즉 희랍문화를 위해 조건을 마련했다. 노예제가 없으     면 희랍국가가 없었으며 희랍의 예술과 과학이 없었을 것이다.(趙常林, 林婭. <<馬克思主義文化學>>. 中國文化書院. 1988. 387. 재인용).


맑스, 엥겔스의 상기의 론술에서 우리는 "신화"는 야만시대 저급단계의 생성물이며 "희랍예술"은 문명시대 즉 희랍의 노예사회의 더욱 큰 분공(分工)의 생성물임을 분명히 확인할수 있다. 그리고 박문희가 주요한 근거로 삼고있는 <<정치경제학비판. 도언>>에서는 "희랍신화"와 "희랍예술"간의 관계를 "희랍신화는 희랍예술의 무기고일뿐만아니라 그것의 토양이다."라고 분명하고도 통속하게 해명했다. 맑스에 따르면 "희랍신화"는 "희랍예술"의 "무기고"나 "토양"일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것이다.

   이 점을 확인한 다음 박문희가 맑스, 엥겔스의 그러한 론술들을 어떻게 자의대로 뜯어고치고 조작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박문희는 <<영원한 가치원소>>의 장절의 4, 6, 7, 8 단락들에서 이른바 "희랍신화"를 무려 일곱번이나 반복하고있다. 그중 4째 단락에서 처음 인용한 "희랍신화"만이 맑스의 본의일뿐 나머지는 모두가 박희문이 조작해낸것이다. 박문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희랍의 예술 나아가 서방예술에 가지는 희랍신화의 의의에 대해 그는(맑스를 가리킴-     필자) "희랍신화는 단지 희랍예술의 무기고이기만 한것이 아니라 희랍예술의 토양"이라     고 규정하고나서 "력사와 시공(時空)을 초월한 희랍신화의 거대한 매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있다. 희랍예술과 사시(史詩)에 내포된 신화는 "영구한 매력"을 가지고있     는바 지금까지도 "여전히 우리에게 예술적향수를 주고있으며 모종 방면으로 놓고 말하면     그것은 일종 규범적인 그리고 초월할수 없는 보기이기도 하다."(박문희. <<김월성의 <토템문화론>을 론함>>. <<문학과 예술>>. 2007. 4호.)

바로 이 부분이다. 처음에 인용한 "희랍신화"는 맑스의 말을 인용한것이다. 그러나 련속이어지는 "력사와 시공을 초월한 희랍신화의 거대한 매력"은 박문희가 출처를 밝히지 않았기때문에 찾아볼수도 없고 확인할수도 없다. 그러나 신화에 대한 맑스의 관점을 총적으로 고찰해보면 맑스가 이른바 "력사와 시공을 초월한 희랍신화의 거대한 매력"을 이야기할수가 없다고 판단된다. 앞의 인용문에서도 볼수 있듯이 맑스는 신화를 야만시대 저급단계의 생성물로 간주했다. 그리고 박문희가 근거로 삼고있는 <<정치경제학비판. 도언>>의 론술을 보면 희랍신화를 희랍예술의 "토양", "희랍예술의 전제", "희랍예술의 소재" 혹은 "희랍예술의 토양과 모태(母胎)"의 정도로밖에 인정하지 않았다.1) <<馬克思, 恩格斯選集>> 二券. 人民出版社. 1974. 113페지. 참조. 또한 맑스는 "자연력이 실제적으로 지배를 받게 됨에 따라 신화도 역시 소실된다."(동상서. 같은 곳)고 분명히 지적했다. 그러한 립장에 있었던 맑스가 "력사와 시공간을 초월한 희랍신화의 거대한 매력"을 담론했다는 박문희의 론술에는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다. 맑스가 어디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박문희의 가르침을 기다린다.

  잇달아 박문희는 맑스의 론술을 인용하면서 "희랍의 예술과 사시(史詩)에 내포된 신화는 '영구한 매력'을 가지고있는바 지금까지도 '여전히 우리에게 예술적향수를 주고있으며 모종 방면으로 놓고 말하면 그것은 일종 규범적인 그리고 초월할수 없는 보기이기도 하다.'"( 박문희의 글.)라고 기술하고있다. 여기에서 이른바 "희랍의 예술과 사시(史詩)에 내포된 신화"는  박문희가 자의적으로 조작해낸것임이 틀림없다.

  맑스의 원문에는 "희랍예술과 사시(史詩)에 내포된 신화"가 아니라 "희랍예술과 사시"라고 분명하게 적혀 있다.(<<馬克思, 恩格斯選集>> 二卷. 114페지. 참조.) 그러나 박문희는 "희랍예술과 사시"라는 맑스의 론술에 난데없는<<... ... 에 내포된 신화>>를 억지로 덧붙여넣었다. 그러한 작법으로 박문희는 "희랍예술과 사시"에 대한 맑스의 높은 평가를 "희랍예술과 사시에 내포된 신화"에 대한 평가로 바꾸어놓았다. 그래서 "희랍예술과 사시"에 대한 맑스의 평가는 거기에 "내포된 신화"에 대한 평가로 탈바꿈되고 말았다. 박문희가 왜 이런 작법을 썼을가?

  남영전의 토템문화를 비호하려는 박문희에게 대해 말할 때 "희랍예술"에 대한 맑스의 높은 평가는 별 의미가 없는것이였다. 앞에서 이미 확인했듯이 "희랍예술"은 인류의 원초문화인것이 아니라 희랍노예제의 생성물이였기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원시인들의 상상의 생성물이라고 하는 신화를 선택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런데 신화를 야만시대 저급단계의 생성물로 인정했던 맑스가 박문희의 구미에 맞도록 신화를 높이 평가할 리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희랍예술과 사시"라는 맑스의 론술에 "...에 내포된 신화"를 덧붙여넣음으로써 "희랍예술"에 대한 권위성을 띤 맑스의 높은 평가를 신화에 도용(盜用)했던것이다. 그 결과 "희랍신화"와 "희랍예술"에 대한 맑스의 론술은 완전히 변형되고 말았다. 박문희는 나의 이러한 판단도 "저질언어"로 인정하는지?

   박문희는 6, 7, 8단락들에서도 이른바 "희랍신화의 '영구한 매력'", 이른바 "희랍신화의 '천진성'", 이른바 "희랍신화의 '거대한 매력'"이라는것을 네 번이나 반복하고있다. 박문희는 맑스의 론술인것처럼 인용부호까지 달고있지만 희랍신화의 "영구한 매력"이나 희랍신화의 "천진성"은 원문(原文)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말그대로 박문희의 조작품인것이다.

  이와같이 박문희는 맑스가 말한 "희랍예술과 사시"에 억지로 "신화"를 덧붙여 넣음으로써 맑스의 본의를 완전히 탈바꿈시켰고 또 맑스가 지적한 야만시대 저급단계의 생성물인 "신화"와 희랍노예제의 생성물인 "희랍예술"에서의 "예술"을 바꿔치기를 하는 작법으로 "희랍예술"에 대한 맑스의 론술을 "희랍신화"에 대한 론술로 완전히 왜곡하고있다.

  물론 박문희는 남영전이 주장하고있는 원시인들의 생명일체화감정의 영속성 혹은 영원성의 근거를 마련하려고 맑스의 론술까지 조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작법이야말로 박문희 자신도 타매하고 있는 "저질언어" 혹은 저질행위일 뿐만 아니라 사기적 행각이라고 인정한다. 나는 남영전 본인도 박문희의 이러한 작법에는 부정적일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이러한 사기적 행각은 남영전의 <<토템문화론>>을 비호할 대신 그것을 궁지에로만 몰아갈 것임을 박문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조작과 왜곡을 통해 박문희는 신화에 대한 맑스의 론술을 완전히 "자가당착적인 편파"(박문희의 말)로 만들어 버리고말았다. 왜냐하면 박문희도 인용하고있듯이 맑스는 "신화는 소실"되는것이라고 분명히 지적했다. 그런데 박문희의 말대로 맑스가 "희랍신화의 영구한 매력"을 말했다면 "영구한 매력"을 지닌 "신화"는 "소실"될수가 없는것이다. 말 그대로 "영구한 매력"을 지니고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리쯤은 우리가 다 알고있는 일반 상식에 지나지 않는것이다. 그러므로 "신화가 소실"된다는 맑스의 론술과 박문희가 맑스의 론술이라고 조작해낸 "희랍신화의 영구한 매력"은 서로간에 엄청난 모순을 초래하게 된다. 그래서 맑스의 론술은 박문희가 질타하고있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가당착적인 편파"가 되어버리고 만것이다.

  혹자는 "신화"와 "예술"이라는 두 글자 차이를 가지고 뭘 떠들어대느냐고 힐책할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어디 두 글자 차이만이 문제인가? 앞에서 맑스와 엥겔스의 론술을 통해 이미 확인했듯이 "신화"는 야만시대 저급단계의 생성물이고 맑스가 "영구한 매력"을 지니고있다고 격찬한 "희랍예술"은 희랍노예제의 결과물인것이다. 그러므로 "희랍예술"에 대한 맑스의 평가를 "희랍신화"에 대입시키려는 작법은 그 발상부터가 소의 머리를 잘라다가 말의 몸체에 붙여주려는것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소행일수밖에 없다. 박문희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론 인간에게는 무의식적인 착각이 없을수는 없다. 그리고 전공자가 아닌 우리가 그처럼 방대한 맑스, 엥겔스의 저작들을 일일이 다 접촉할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박문희인 경우, 맑스의 론술에 대한 그러한 조작이나 바꿔치기는 순간적인 착각에서거나 몰리해에서 비롯된것일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박문희는 <<정치경제학비판. 도언>>의 마지막 부분을 주요한 근거로 삼고 자기의 론의를 전개했다. 두 페지 정도의 분량밖에 안되는 그 부분에서 맑스는 "희랍예술"과 "희랍신화"와의 관계를 아주 분명하고도 통속하게 론술했다. 박문희는 또 카시르의 <<인론>>도 읽었다고 한다. 카시르도 예술과 신화의 구별점을 담론했다. 특히 박문희는 일반인들은 아직 구경도 하지 못했을 <<후한서. 고구려전>>이나 <<한서. 지리지>>의 내용까지 거론할수 있을 정도의 깊은 학문을 쌓았다. 그러한 박문희가 자신의 론지의 근거로 삼고있는 맑스의 <<정치경제학비판. 도언>> 마지막 부분의 그처럼 통속적인 론술을 오독(汚瀆)했거나 제대로 해독하지 못했다고 하면 아마 믿을 사람이 없을것이다. 

그러면 맑스의 그 부분의 론술을 살펴보기로 하자. 
  
희랍신화는 희랍예술의 무기고일 뿐만아니라 그것의 토양이다. 
    
희랍예술의 전제는 희랍신화이다. 말하자면 이미 인민들의 환상을 통한 일종 비자각적인    예술적가공을 거친 자연과 사회형식 자체이다. 그것이 희랍예술의 소재인 것이다.2)

매우 통속적인 론술이다. 첫 번째 어록은 박문희도 인용하고 있다.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맑스는 "희랍신화"는 "희랍예술"의 "무기고", "토양", "전제", "소재"로만 인정했을 뿐이다. 맑스는 "신화"를 사람들의 "환상"을 통한, 그리고 "비자각적인 예술적가공을 거친 자연과 사회형식 자체"만으로밖에 인정하지 않았다.  맑스에 따르면 "환상"과 "비자각적인 예술방식(인간의 자각적인 예술방식이 아닌 - 필자)에 의해 가공된 자연과 사회 자체"로서의 "신화"인 까닭에 "신화"는 희랍예술의 토양이나 소재로만 될수 있었을뿐 "영구한 매력"을 지닌 예술의 높이에까지는 이를수 없는 것이다. 맑스가 그러한 "비자각적인 예술적가공을 거친 자연과 사회형식 자체"에 "영구한 매력"이 있다고 말했을 리가 없다. 맑스의 상기의 론술들을 통해서도 비록 "예술"과 "신화"라는 두 글자 차이이지만 "희랍신화의 영구한 매력"이라는 박문희가 조작해낸 가짜 맑스의 론술이 얼마나 황당한것인지를 감지할수 있다.

   박문희는 이른바 인류의 원초문화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 생명일체화의 원시적감정의 영속성을 립증하려는 의도에서 신화의 가치만을 높이기에 몰두하다보니 론리적 오유까지 범하고있다. "희랍신화"가 "희랍예술의 토양"이라는 맑스의 론술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생활은 문학예술의 토양"이라는 개념과 같은 론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생활이 문학예술의 토양이기는 하지만 생활자체가 문학예술인것은 아니다. 같은 리치로 희랍신화가 희랍예술의 토양이기는 하지만 희랍신화자체가 희랍예술인 것은 아닐 것이다. 희랍예술 속에 망라되였거나 반영되여 있는 신화를 희랍예술의 "영구한 매력"으로 풀이하려는 시도는 론리적으로도 어불성설이라는 얘기다.  

  그밖에 박문희는 맑스의 <<정치경제학비판. 도언>>의 마지막 단락을 인용하고나서 "그는(맑스를 가리킴- 필자 주) 인류의 '동년시대',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지 못하는 영아상태'가 아니라 '성숙된 어린이'인 인류의 원초 조상들의 '천진성'에 '영구한 매력'이 있음을 극명하게 시사하고있다."라는 론의를 전개하고있다.

  어법이 잘 맞지 않는데다가 "성숙된 어린이"라는 개념의 뜻을 리해할수가 없어서 이러한 론의의 확실한 취지가 무엇인지를 딱히 파악할수는 없지만 아마 박문희는 인류의 원초 조상들인 원시인들은 "영아"가 아니라 "성숙된 어린이"이며 그들이 지니고있는 "천진성"에 "영구한 매력"이 있음을 주장하고있는것 같다. 나름대로의 판단이 허용되고있는 오늘과 같은 자유로운 학술분위기속에서 자아의식이 결여된 원시인들의 사유를 "영아상태"에 비유했던 자신의 관점을 누구에게 강요해야 할 그 어떤 리유도 나에게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맑스가 그 점을 "극명하게 시사했다"는 론의만은 짚고 넘어가지 않을수 없다.  

  우선 "성숙된 어린이"가 어디에서 온것인지를 알수 없다. 맑스는 희랍예술의 "영구한 매력"을 담론하면서 "조야(粗野)한 어린이", "조숙한 어린이", "정상적인 어린이"를 말했을뿐이다. 맑스는 "희랍인을 정상적인 어린이"이라고 지적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천진성", "영원한 매력" 모두가 희랍예술에 대한 평가인것이다. 박문희는 생명일체화의 원시적감정에 대한 애착심으로부터 "야만인" 혹은 "무지몽매한 미개족속"이라는 원시인들에 대한 나의 지칭에 대단히 불만스러워하는것 같다. 그러나 엥겔스의 저작 <<가정, 사유제와 국가의 기원(家庭, 私有制和國家的起源)>>에서도 볼수 있듯이 맑스와 엥겔스는 인류사회를 몽매시대, 야만시대, 문명시대로 획분했다. 그리고 앞에서 엥겔스의 론술을 통해 확인할수 있었듯이 희랍예술은 문명시대 즉 희랍노예제의 생성물이였다. 맑스의 "천진성", "영구한 매력"은 바로 희랍노예제의 생성물인 "희랍예술"에 대한 평가인것이다. 맑스의 그러한 평가를 몽매시대나 야만시대의 "원초 조상"들인 원시인들과 련계시키는 시도 역시 사실무근인 허황한 론리 혹은 "자가당착의 편파"가 아닐수 없다. 그러므로 맑스가 "원초 인류의 조상들의 '천진성'에 '영구한 매력'이 있음을 극명하게 시사하고있다."는 박문희의 론술 역시 남영전의 이른바 "토템문화론"을 비호하기 위해 제멋대로 조작해낸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예술"과 "신화"를 바꿔치기를 한 자신의 작법을 기상천외한 묘법으로 간주했기에 박문희는 이러한 터무니없는 거짓말도 마음놓고 할수 있었을것으로 사료된다. 하지만 박문희의 생각과는 달리 종이장으로는 불덩이를 쌀수 없고 사실은 언제나 사실대로 밝혀지기 마련이다.  

  총적으로 박문희는 남영전의 생명일체화의 원시적감정을 바탕으로 삼고있는 이른바 토템문화론을 비호하기 위해 맑스의 론술을 조작, 왜곡하는 방법으로 맑스의 본의까지 탈바꿈시키고있다. 다른것은 모두 제쳐놓고 이 한 점만으로도 토템문화론을 비호하는 박문희의 주장은 모래성이 무너져 내리듯 저절로 주저앉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그밖에 박문희는 "비판적유심론철학자로서의 카시르의" "모든 리론이 반드시 정확하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렇다면 박문희의 관점에 반론을 전개하고있는 나의 립장에서는 "정확하다는 보장이 그 어디에도 없는" "비판적유심주의철학자 카시르"가 제기한 원시인들의 생명일체화감정을 인정할뿐만 아니라 그것의 영속성까지 주장하는 의도가 도대체 무엇이였으며 맑스의 론술을 조작해내고 왜곡까지 하면서라도 생명일체화의 원시적감정에 립각한 남영전의 토템문화론을 반드시 비호해야만 했던 당위성이 도대체 무엇이였던지를  박문희에게 묻지 않을수 없다.

//[문화산맥]CC론단/9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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