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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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집 사랑 이야기
2009년 01월 31일 22시 50분  조회:4996  추천:59  작성자: 박문희

<2007년도 재외동포문학 응모>

나의 집 사랑 이야기

○ 중국 길림성 화룡시 희망복리원 원장 리 문 철

나는 1954년 12월 화룡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병환으로 일을 할 수가 없었고 나와 누나도 몸이 허약하여 늘 시름시름 앓곤 했다. 일가 일곱 식솔의 생계는 어머니 한 사람에 달려있었다. 어머니는 건축공사에서 임시공으로 일하거나 강변에서 모래를 쳐 얻은 수입으로 온 집 식구를 먹여 살려야 했다.

집이 너무 가난해서 소학교를 다닐 때 나는 새 옷을 입어본 적이 없었고 원족도 딱 한번밖에 가본 적이 없었다. 원족을 가려면 맛있는 것을 도시락에 싸가지고 가야 하는데 우리 집에서는 그럴 형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소학교를 다닐 때 있은 한 가지 일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그때 내가 쓰는 공책이란 형편없는 저질이었는데 그런 것마저 살 돈이 없어 정면을 쓰고 나서는 뒤 면에도 글을 써야 했다. 몇 푼 안 되는 연필도 없어 연필 끄트머리를 나무 가지에 동여매여 썼다. 그런 연필로 공책 뒷면에 숙제를 하려니 조금만 힘을 주어 글을 써도 공책에 구멍이 펑펑 뚫리기 일쑤였다.

그때 우리 반에 젊은 여자 선생님이 담임으로 오셨는데 한번은 내가 쓰고 있는 공책과 연필을 들여다보시더니 갑자기 "너 이것도 책이라고 가지고 다니니? 너 아빠엄마는 이런 걸 너에게 주어 학교에 보낸다니?" 하고 몹시 화를 내시면서 나의 공책을 빼앗아 와락와락 찢어 바닥에 동댕이치는 것이었다.
그날 나는 갈기갈기 찢어져 바닥에 널려진 공책을 보면서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모른다. 그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어느 사람이 보이지 않는 길모퉁이에 숨어서 정말 오랫동안 울었었다.
집으로 돌아 온 나는 머리에 열이 나면서 며칠 앓아누웠다. 열이 몹시 나는 나 때문에 어머니는 몹시 마음 아파하시면서 강변에 모래 치러도 나가지 않고 나를 간호하셨다.

그런데 토요일 날 저녁인가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 우리 집으로 날 보러 찾아오셨다. 등에는 애기를 업고 있었고 왼손에는 달걀구럭이, 그리고 오른손에는 공책, 연필 등 학용품이 들려있었다.

우리 반 학생이 우리 집에 왔다가 내가 앓는것을 보고 선생님한테 보고를 한 모양이었다. 후에 생각해보니 선생님은 나를 호되게 비평하시고 그래서 내가 앓는것이나 아닌지 하여 몹시 걱정하셨던것 같다.

우리 집을 찾으시어 병환으로 누워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 한발 막대기를 휘저어도 거칠 것 하나 없는 우리 집의 가난한 살림형편을 보시고 난 선생님은 자식공부하나 변변히 대주지 못하여 미안해 하시는 어머니의 자책어린 말씀에 눈시울을 붉히시었다.

선생님은 그날 눈이 퀭해진 나의 얼굴을 유심히 뜯어보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었다.
"내가 너를 잘못 꾸지람 했구나. 어린 것이 얼마나 억울하고 마음 아팠겠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
그날 어머니와 아버지도 눈물을 흘리셨다.
그 후 선생님은 자주 우리 집으로 찾아오셔 나에게 보충수업을 해주곤 하셨다.
나는 선생님이 나한테 선물하신 학용품을 정말 소중하게 다루었다.
그것은 나에게 어둠속의 등불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 일은 나의 머리 속에 영원히 지워버릴 수 없는 감동적인 영상으로 남아 나를 고무하고 채찍질한다.

가난했던 가계, 암울했던 동년은 나에게 간고소박하고 고생과 노고에 견디는 품성을 키워주었으며 자상하신 아버지, 근로하신 어머니와 따뜻하신 선생님의 사랑은 나의 어린 가슴에 맑고 밝은 마음의 씨앗을 심어주었다.

아마 그 마음의 씨앗이 눈을 틔고 그 눈이 작은 줄기로 자라 점차 아치를 치고 열매를 맺게 되었을게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점차 가난한 아이들과 사회의 최하층에 처해있는 힘없는 사람들을 도와주려는 뜻을 확고히 굳히게 되었고 종당에는 자기의 필생의 사업으로 삼게 된것이다.


30여년 전인 1974년도에 있은 일이다. 문화혁명 후기였던 그때는 전반 사회가 말 그대로 침체상태였는데 그러던 중 수년 전에 타도되었던 등소평이 다시 정치무대에 나타나면서 새로운 움직임들이 보이는 듯 했다. 그때 나는 갓 스무살이었는데 농촌에서 뽑혀 와 화룡시 부동산관리소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때 단위에 종업원 숙소가 없어 나는 한 개인집 방을 세내어 들었다.

그 집 방에 들고 나서야 그 집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집 주인은 박씨였는데 무슨 죄를 지었는지 감옥살이를 하고 있었고 그의 아내는 병으로 앓는데다가 고정수입도 없이 아이 다섯이나 데리고 있었다. 아이들 중 큰 아이는 14살이였고 작은 것은 6살밖에 되지 않았다. 수입이라야 내가 집세로 내는 8원이면 고작일 터이였다. 그렇다 할만한 수입 내원도 없이 여섯 식솔이 도대체 무얼 먹고 산단 말인가? 정말 살아갈 길이 막막한 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 몇은 당연히 학교를 중퇴하고 집에 눌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찬란한 동년을 만끽해야 할 어린 나이에 학교를 중퇴하다니? 그 광경을 보는 나는 마음이 괴롭기 짝이 없었다.

나의 앞에는 두가지 선택이 놓여있었다. 남이야 어찌 되든 눈을 질끈 감고 그집을 훌쩍 떠나 다른 집을 세내어 드는 길과 이 집에 그냥 눌러 있으며 그들과 고생을 함께 하는 길 이 두가지었다.

이 집을 떠나려고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막상 떠나려고 하니 양심이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어릴 때 고생하던 생각이 되살아 나면서 동정심이 괴어 올라와 이 집을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이 치밀었던 것이다.

나한테 무슨 도울 힘이 크게 있으랴만 그래도 나는 사업이 있는 한창 나이 아닌가? 아버지가 죄를 지었다고 아이들까지 죄를 받아야 하나? 이 아이들을 이대로 방치한다면 장차 커서 무용지물이 될게 아닌가?

고민끝에 나는 결국 이 집에 눌러 앉기로 마음을 굳혔다.
우선 나는 매달 39원 되는 월급을 몽땅 이 집에 맡겨 살림을 유지하게 했다.
그리고 학교에 찾아가 선생님들과 연통을 해서 아이들을 모두 학교에 다시 들어가게 했다. 그리고 낮에는 출근을 하고 밤에는 아이들에게 학과지도를 해주었다.

생계를 잇기 위해 나는 봄에는 애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 나물을 캤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물고기를 잡았으며 가을에는 이삭주이를 하고 겨울에는 산에 가 땔나무를 해왔다.

그리고 짬을 내여 아이들을 데리고 감옥에 가 아이들의 아버지를 면회하고 매번 잘 개조를 해서 하루속히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신신 당부를 했다.

그때 복직을 한 등소평이 나라가 잘 되려면 계급투쟁도 계급투쟁이지만 우선 경제를 춰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펴서 한창 철도수송 분야로부터 정돈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얼마 못가서 계급투쟁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등소평을 다시 권좌에서 몰아내고 전국적으로 그를 재 비판하는데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온 나라가 다시 계급투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어갔다.

이런 판국에 나는 뭘 하고 있었는가? "나쁜 사람의 가정"과 계선을 나눌 대신 그들과 고락을 함께 하고 심지어 감옥을 찾아가 “나쁜 사람”을 면회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러는 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

이해하기는 고사하고 나의 입장에 문제가 있다면서 수차 나를 찾아 “교육”하기도 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왜서 어디가 잘못됐는지 그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어 무척 곤혹스러웠다. 이유를 알 수 없으니 “계선”을 나눌 수 없어 남이야 뭐라 하든 나는 그냥 나대로 내 할 일을 했다.

내가 “기본 도리”를 깨닫지 못하니 우리 회사에서도 더는 못본 척 그대로 놔둘 수 없었던지 대회에서 수차 나를 공개 비판을 했다. 당시 계급투쟁을 부르짖던 살벌한 환경에서 회사의 책임자들도 아래 직원이 “검은 오류(黑五類)”와 휩쓸리는 것을 관계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책임 추궁을 받을 소지가 있었던만큼 나를 내놓고 비판하는 것은 아주 지당하고 자연스러운 일일 터이었다.

그래도 결국 나는 머리를 시종 “깨치지” 못하고 그냥 그집에서 4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에 “4인방”이 잡혀 나오고 개혁개방이 시작되어 세상이 살만해졌다.
박씨네 살림은 점차 호전되게 시작했고 아이들의 학습 성적도 많이 올라갔다.

맏이는 학급의 단지부서기로 되었고 둘째는 학급장으로 되었으며 넷째는 전국 소학생 스케이트시 게임에서 금상을 타기도 했다.

박씨도 열심히 개조를 해서 복역 기간을 2년 줄이고 1987년에 앞당겨 출옥해 가족과 단란히 모이게 되었다.

그들 온 집 식구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나의 마음도 말할 것 없이 개운하고 후련해졌다. 그리고 내가 한 일에 대한 보람을 처음으로 가슴 뿌듯하게 받아 안았다.

그 때를 시작으로 해서 나는 의지가지 없는 고아, 가정 살림 형편이 어려운 학생, 지체 장애자, 그리고 형기가 차 석방됐거나 노동 교양에서 풀려나온 인원들을 도와주고 교양하고 안치하는 사업과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안락한 집은 행복의 일대 근원이다. 그것은 바로 착한 양심 다음의 자리를 차지한다. 집은 모든 사람이 자라는 요람이다. 정다운 내 집이 없으면 내가 대하고 있는 것이 비록 온 세상일지라도 역시 커다란 감방에 지나지 않는다. 쾌락과 궁전 속을 지날지라도 언제나 초라하지만 내 집만 한 곳은 없다.

한 사람은 그 나이가 얼마든 사업에서 성공했거나 실패했거나를 막론하고 아무리 수고하거나 천애지각 그 어디를 방랑할지라도 우리의 피로한 희망은 평온을 찾아 역시 가정으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현실 생활에서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 의지 가지 없는 고아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갈 곳이 없고 가정의 따사로움을 누릴 수 없는 그들은 약세 군체로서 사회에서 소외된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1982년이었다. 화룡시 투도진에 어려서 부모를 잃은 아이가 있었는데 형님 집에서 초중까지 다녔다. 그러나 고중에 시험 쳐 붙은 후에는 학비를 이어 대지 못해 더는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나는 아내와 그 아이를 우리 집에 데려다 키우며 공부시키는게 어떨가 하고 상의를 했다. 아내는 얼굴에 난색을 띠었다.

1979년에 결혼한 나에게는 그때까지 아직 아이가 없었다.
그때 나의 누나가 장기환자로 앓다가 사망한지 얼마 안 되었다. 누나가 사망한 후의탁할 곳이 없는 두 외조카를 내가 데려다 키우고 있었다. 네 식솔이 18평방미터밖에 안 되는 비좁은 집에서 붐비는 삶이 원래 기막힌데다 16살 나는 고중 학생 하나를 더 데려다 키운다는 건 누가 봐도 머리를 저을 일이었다.

난색을 짓던 아내는 끝내 나의 뜻을 따라 주었다. 그러는 아내가 나는 너무도 고마왔다.
아이를 우리 집에 데려 와서 보름만인가 나의 아내가 병으로 입원하게 되었다. 한 병실에 김해연이란 여자애가 입원해 있었는데 너무 울어서 눈이 다 부어 있었다. 여러 번 캐물어서야 그 애는 자기가 고아라고 실토정했다. 자기가 아주 어릴 적에 어머니가 세상을 떴고 아버지도 얼마 전에 자기 하나를 남겨놓고 사망했다고 했다.

아내가 출원하자 우리는 그 애를 우리 집에 데려왔다.
하여 우리 집 식구가 또 하나 늘었다. 우리는 두 아이를 학교에 보내어 공부도 시키고 병 치료도 해주었으며 또 늘 영양식품을 사다 먹이고 입에 맞게 전문 밥과 요리를 해주어 점차 건강이 회복되게 했다.

아이들이 미안해 하니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얘야, 여기가 바로 너희들 집이고 나는 너희 엄마다. 마음 놓고 있으면서 공부에 전념해야 한다, 다들 알았지?"

아이 둘만 키우고 공부까지 시키려니 어려움이 이만 저만이 아니였는데 그 후 우리가 아이를 하나 낳자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매달 39원의 노임으로 아이 둘을 공부시키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그때 우리는 정말 굶기를 밥먹듯 했다. 하루에 끼니 두 때를 제대로 먹을 수 있으면 그건 아주 정상 생활을 하는 거였다.

1988년 전까지 우리 집에서는 석탄을 때본 적이 없었다. 돈이 안 드는 땔감이란 저목장이나 기차역 목재적재장의 나무껍질부스러기를 주어다 때는 것이었다. 경비원들은 안전 책임 사고가 날까 봐 저목장이나 적재장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그래도 긴 겨울을 나려면 그것을 줍는 길 밖에 없었으므로 나는 경비원들의 눈을 피해가며 용케 적재장에 들어가 한 마대씩 나무껍질을 긁어 담아 짐으로 메여 오군 했다. 이렇게 하기를 몇 년이었던지?

그러나 불을 때면 추운 겨울은 날 수 있었지만 다섯 식솔의 배가 저절로 불러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밥을 먹자면 돈이 있어야 했다.

당시 아내는 양식 창고에 출근하고 있었고 나는 중앙농업학교 5년 통신수업을 마치고 종자공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얼마 안 되는 노임만 가지고서는 다섯 식솔이 먹고 살기도 힘들었으므로 돈을 만들기 위해 우리 부부는 출근을 하는 한편 퇴근 후의 시간을 이용하여 돼지치기 등 가축사양을 벌이기 시작했다. 돈을 만들기 위해 먹이는 돼지한테도 돈은 들여야 했다. 먹이 비용을 줄이기 위해 나와 아내는 쓰레기무지를 뒤지며 넝마주이 하듯 남들이 버린 감자껍질과 배추 잎을 주어다 얼리어서는 돼지를 먹이거나 닭 먹이로 했다. 때는 맏이가 갓 태어났을 때어서 아내는 애기를 업고서 짐승먹이 주이를 다녔다.

밀차에 뜨물통을 싣고 식당을 돌아다니며 뜨물 한통에 2원이나 5원씩 주고 사다가 돼지를 먹였다. 골목길에 뜨물을 쏟뜨려 길바닥이 어지럽혀지면 멀리 가서 펌프 물을 길어다 골목길을 청소하기도 했다.

돈이 없어 끼니 쌀이 떨어질 때가 많았다. 그러면 외상으로 쌀을 사다가 밥을 지어 먹고 나중에 돼지도 팔고 달걀도 팔고 하여 그 돈으로 쌀값을 갚기도 하였다.

처음 데려다 키운 아이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3년만에 대학에 시험 쳐 붙었다. 이는 그때 우리 집에서 처음으로 있은 큰 경사였다. 나는 아이가 너무도 대견하고 자랑스러워 좁은 집에 친구들을 몇몇 불러다 “축하연”을 차렸다. 친구들은 저마다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기념품을 하나씩 들고 와 춤노래로 방이 떠나갈 듯 우리 집에 새로 난 대학생을 요란스레 축하해주었다.

그날 밤 새 대학생은 우리 부부 앞에서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아내도 그 애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렸다.
“사내답지 않게 울긴!”
이렇게 그애를 나무람 했지만 나도 그만 눈물 두 방울을 떨구고 말았다.


허리띠를 졸라매고서라도 자식을 공부시킨다는 우리 말 속담이 있다. 우리 민족이 자식교육을 중히 여기고 문화를 중히 여기는 우량한 전통을 잘 보여주는 속담이다. 그러나 실 생활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도 늘 목격하게 된다. 적지 않은 가정들은 너무도 가난하여 허리띠를 암만 졸라매도 자식을 공부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가정의 아이들은 공부를 계속 하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지만 가계마저 이어가기 어려운 상황에서 부모들이 돈을 댈 수 없어 학교를 중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며 대학시험에 높은 점수로 합격되었지만 농민이나 도시 빈곤층 부모로서는 감당키 어려운 학비 때문에 대학공부를 포기해야 하는 일이 결코 보기 드문 일이 아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조선 함경북도에서 태어났다. 나라를 잃고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건너온 할아버지는 가난한 살림에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도 아버지를 공부시켜 중학교를 마치게 했다. 중학교 졸업생이라면 그 당시 큰 인테리였는데 그 보람으로 아버지는 화룡시예술단 창시자로 활약할 수 있었고 전직 연출(감독)로 되어 장막극 <흥부와 놀부>로 전국 우수연출상을 수상하고 <늙은 양주> 등 유명한 노래가사들을 많이 창작해 낼수 있었다.

그러나 그후 3년 대기황 때 심한 병환에 시달리면서 우리 가정은 몹시 어려운 나날을 이어왔었다. 아버지가 장기환자인데다 누나까지 지병이 도지다보니 아버지의 노임은 병구완에 다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어머니는 나를 공부시키려고 모진 고생을 다 했다.

그러나 얼마 후 문화혁명이 터지는 바람에 나는 대학공부를 할 기회를 놓지고 말았다. 문화혁명이 끝난 후 5년간 중앙농업학교 통신수업을 받기도 했으나 한창 나이에 공부할 기회를 놓쳤던 일은 내 가슴에 여전히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가 어릴 때 고생을 많이 했고 한창 배울 나이에 공부를 할수 없었던 이런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에 나는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하는 빈곤한 가정의 학생들을 보면 도시 그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 눈에 고아나 집이 가난해서 공부를 할수 없는 애들이 발견되거나 그런 애들이 있다는 말을 얻어 들으면 무작정 그 애들을 찾아 우리 집에 데려오거나 무슨 방법을 대서든 도와주곤 했다.

아이들이 늘어나니 나의 39원 노임만 가지고서는 아이들을 학교공부를 시키기는 커녕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나는 많은 고민을 했다. 때 마침 개혁개방이 갓 시작되어 개인 창업열이 한창 오를 때였다. 그때 나는 중앙농업학교 5년 통신학습을 마치고 화룡시종자공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고민 끝에 나는 개인 창업을 해서 돈을 벌기로 마음 먹고 아내와 함께 회사에 출근하는 한편 과외시간을 이용하여 가축사양을 벌였다. 후에는 아예 단위에 적을 남겨둔 채 노임도 받지 않고 나와 곰 사육장을 꾸렸다. 그 수입은 내 기대 이상으로 짭짤했다. 나는 그 수입을 전부 고아들 부양과 학생들 보조에 썼다.

데려다 키우는 아이들은 늘어만 갔다. 그러니 집이 너무 비좁아 집을 새로 지어야 하는데 돈을 다 아이들 부양과 보조에 쓰다보니 1987년에 와서야 18평방미터짜리 초가집을 2000원에 팔고 시 교외에 땅을 얻어 66 평방미터 되는 벽돌집을 짓게 되었다.

이 집을 지을 때 임시 셋방에 들 돈이 없어 길가에 비닐막막 텐트를 쳐 놓고 그 안에서 살았다. 전기도 물도 공급이 안 되는 텐트 속에서 지내는 생활이란 정든 연인들이 경치 좋는 강가에 멋진 텐트를 쳐 놓고 사랑과 아름다운 추억을 엮어가는 그런 낭만과는 하늘과 땅만큼 동이 뜬 것이었다. 친척 친구들이 이러는 나를 보고 기가 막혀 자기들 집에 임시 들라고 하였지만 나는 그들에게 페를 끼치는 게 싫어 내가 데리고 있던 고아들만 그들에게 잠시 돌봐달라 부탁하고 우리 부부는 딸 아이를 데리고 봄부터 가을까지 옹근 7개월을 텐트 속에서 지냈다. 집을 짓는데 돈이 딸려 재료를 이어대기 어려웠던 까닭에 집 짓는 일은 자꾸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뭐니뭐니 해도 빗바람 몰아치는 장마철이 견디기 어려웠다. 비가 주룩주룩 새는 캄캄한 텐트안에서 뜬 눈으로 날을 지새우는 고생이란 말 그대로 비참함 그 자체였다.

무슨 짓을 못해서 이처럼 말도 못할 고생을 사서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여러 가지로 자문을 해보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간이었다.
그러다가 새날이 밝으면 모든 잡념을 다 뒤로 하고 다시 힘을 내서 집짓는 일에 뛰어들곤 했다.

아무튼 천신만고 끝에 66평방미터짜리 아담한 집이 지어져 우리는 드디어 새집들이를 하게 되었다. 나는 친척 친구들에게 잠시 맡겼던 여섯명의 고아를 모두 불러들였다.

“여기가 바로 너희 집이다. 이제 너희들은 다시 떠돌뱅이 노릇을 하지 않아도 된다. 여기서 시름놓고 살면서 공부도 열심히 잘해야 한다. 다들 알겠지?”

김은실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다. 다병한 아버지가 80여세의 할머니를 모시고 있는 집에 은실 아래로 초중에 다니는 여동생까지 달려 있어 수입 내원이 없는 집에 생활형편이란 말이 아니었다. 이제 바로 고중공부를 시작해야 하는 김은실은 앞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할지 앞에 길이 있기나 한지 그저 캄캄하기만 했다.

이 일을 알게 된 나는 주동적으로 은실을 찾아가 그를 우리 집에 데려왔고 학비를 대주어 계속 고중공부를 하게 했다.

은실이는 우리 집에서 4년을 있으면서 머리를 동여매고 공부를 하여 작년에 북경교통대학에 붙었다.

입학통지서를 받은 날 은실이는 기뻐할 대신 여전히 수심어린 얼굴빛이었다.
"너 웬일이냐? 오늘 같은 날 너 의례 기뻐해야 할 거 아니야? 전업이 너 마음에 안 들어 그러냐?”
머리를 가로 젓는 은실이는 무슨 말못할 사연이라도 있는듯 했다.
“그게 아니라면 대체 무슨 일이냐? 가타부타 말이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이렇게 내처 따져 물어서야 은실이는 자기의 걱정을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그런 게 다 아니에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병이 중하지 집은 찌그러져 금방 허물어질 것 같고 동생도 중학교에 들어갔지 하니 대학을 가도 공부가 머리에 들어갈 것 같지 않아요. 대학공부고 뭐고 아예 집어치우겠어요."

4년간 피타게 공부를 해서 어렵사리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중점대학에 붙었는데 그걸 포기하겠다니? 은실이는 두고 가는 아버지와 동생이 걱정되어 그러지만 나로서는 그러는 그를 두고 볼 수 없었다.

나는 아내와 상의하고 은실이가 북경에 가 시름 놓고 공부할 수 있도록 그의 다병한 아버지와 초중 공부를 하는 동생을 함께 우리 집에 옮겨 오게 했다.
김은실은 드디어 마음을 놓고 북경으로 떠났다.

은실이 아버지와 동생은 지금도 우리 집의 성원으로 우리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최광일은 내가 다년간 후원해준 특곤생이다. 나는 줄곧 "양민"이란 이름으로 그에게 돈을 부쳐주었었다. 내가 이 일을 극비에 부쳤으므로 그는 "양민"이란 사람이 누군지 몰라 사처에 수소문하면서 "양민"을 찾았다. 그가 많은 사람을 통해 수소문하는 과정에 점차 "의혹"의 눈길이 나한테로 집중되면서 1997년 어느 날 어느 우연한 일로 나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긴 시일 끝에 요행 나를 만나게 된 광일이는 이런 말을 나에게 들려주었다.

"저는 ‘양민’이 나한테 부친 소유의 송금 통지서를 모두 복제하여 보관해 뒀어요. 저는 제가 ‘양민’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찾지 못한다 해도 저는 저도 역시 ‘양민’ 과 같은 사람으로 되려고 작심했습니다."

1998년 최광일은 우수한 성적으로 북경우전학원에 입학했다.

그가 북경에서 학습하는 기간에 나는 그에게 컴퓨터가 급히 수요 된다는 사실을 알고 컴퓨터를 사도록 5000원 돈을 부쳐주어 그의 학습이 영향을 받지 않게 했다.

2000년 그는 북경시 20개소 중점대학의 일본어경연에서 단연 1등을 하였으며 2002년에는 일본에 가 연구생공부를 하게 되었다.

용화향 신안촌에 사는 차영옥은 진취심이 있고 학습 성적도 우수했다. 그러나 그가 처한 가정환경은 너무도 불행했다. 아버지는 암으로 세상을 떴고 어머니는 장기 환자로 병상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오빠 또한 정신병환자였다. 불쌍한 어린 영옥이의 이런 사정을 알게 된 나는 그를 여러 모로 살뜰히 도와주었다. 1998년 그는 길림농학원에 시험 쳐 들어갔다.

대학에 보낼 때 나는 학교에 영옥이의 특수정황을 소개해주었다. 나의 소개를 들은 학교에서는 그의 학비를 면제해주는데 동의했다. 작년에 영옥이는 학업을 순조롭게 완성하고 졸업 후 한 제약공장에 들어가 근무하게 되었다.

출근한지 한 달 만에 그는 나에게 노임과 함께 편액 한 틀을 보내왔다. 편액에는 다음과 같은 글발이 새겨져 있었다.

--학문탐구는 저의 꿈이었습니다. 저의 꿈이 우리 집의 불행으로 수포로 돌아갈 때 아버지가 다함없는 사랑으로 저의 꿈이 활짝 피어나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그 하늘같은 은혜를 어디 간들 잊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고아를 데려다 키우고 가정이 빈한한 학생들을 부조한다는 소식이 널리 퍼져 우리 글 신문인 <길림신문>에 나의 사적이 크게 실리었고 그 뒤 연변TV에서도 찾아와 나의 사적을 취재해 갔다. 얼마 후 <고향의 아침>이란 제하에 나의 사적이 2집 시리즈로 크게 보도되었다.

화룡시교육국의 리직퇴직 간부들이 이 보도를 보고 감동된 나머지 모금을 해가지고 쌀, 기름을 사들고 돈을 가지고 우리 집을 찾아 왔다.

그들은 한구들 가득한 손자손녀들을 앉혀놓고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물 마실 때 우물 판 사람을 잊어선 안된다. 너희들의 이 아버지는 너희들의 은인이다. 아버지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좋은 사람으로 자라거라. 학습을 잘해서 장차 아버지처럼 좋은 일을 많이 해야 한다. 우리는 석양에 걸음이 빠른데 너희들은 앞날이 창창한 나라의 기둥감들이다. 건실하게 잘자라서 …

그날 우리는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할 것 없이 모두 울었다.

나의 사업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해마다 설명절이면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입쌀, 과일 등 식품과 옷가지들을 가지고 위문을 왔으며 물만두를 가득 빚어가지고 오기도 했다. 전화로 관심과 문안을 표하는 사람들은 더 많았다. 내가 아이들의 곤난을 해결하는데 어려움이 생기면 관계 부문의 일군들도 나를 찾아와 함께 해결책을 연구하기도 했다.

2001년도 관계 부처의 협력과 지지밑에 우리 부부는 개체의 명의로 화룡시희망복리원을 설립했다. 대문 기둥에 간판을 거는 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이 특수한 가정의 설립을 축하해 주었다.

그해 연길감옥에서 나를 교양보도원으로 특별위임을 하여 정기적으로 감옥에 가서 형기가 차 감옥을 나오는 석방인원들에게 출옥교육보고를 해달라고 했다 . 그리고 공안부문에서는 우리 희망복리원 아이들에게 집체호구를 등록해주어 고아나 출옥후 여러 가지 원인으로 호적등록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진정 자기의 안신처가 있게 하였다.

이때로부터 고아를 데려다 키우고 경제내원이 없어 공부를 할수 없는 애들을 부조하고 출옥인원들을 안치하는 일은 명실공히 나의 사업으로 되었다. 나는 그 전보다 더 바삐 돌아쳐야 했다.


고아를 수양하고 빈곤층 아이들을 도와줌에 있어서 먹고 자는 일과 학비를 대주는 일만 해주면 일이 다 끝나는 게 아니다. 아이들을 키우고 도와주면서 내가 갈수록 깊이 느끼게 되는 일이었다.

김일은 고아로서 거리를 떠돌며 걸식하던 유랑아였다. 어머니는 그를 낳자 어디론가 가버렸고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농사를 짓다가 그를 더 키울 힘이 없게 되자 그를 집에서 내쫓았다. 어린 김일이는 거리를 누비며 떠돌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기의 어머니가 누군지도 모르고 어느 해 어느 달에 세상에 태어났는지도 몰랐다.

민정부문에서는 그에게 출생증명서가 없다는 이유 때문에 그를 수용할 수가 없다면서 나더러 그를 키울 수 없겠느냐고 물어왔다. 그때 나는 이미 9명의 아이들을 데려다 키우고 있었으니 하나쯤 더 데려다 키우는 건 문제가 안 될 것이라고 민정부문의 관련일꾼들이 생각한 모양이었다.

내가 마음을 먹고 하는 일이니 망정이지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속 태울 일이 많고 돈도 엄청 들었다. 이제 한사람 더 받아 키운다는 것은 너무도 벅찬 일이었다. 당분간 대답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작 때가 다닥다닥한 남루한 옷차림에 봉두난발을 한 어린이가 불안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때 나는 마음이 아려오며 거부를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수용하지 않으면 그 아이가 또다시 유랑걸식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차마 내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그를 받았다.

이 아이가 방금 왔을 때 한 가지 모병이 있었는데 저녁에 잘 때가 되면 언제나 상의로 머리를 감싸고 고슴도치처럼 온 몸을 꼬부리고 자는 것이었다. 그러다가도 전등만 켜지면 발딱 일어나 공포에 질린 눈으로 불안스레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

거리에서 유랑 걸식하던 그가 그 어떤 불의의 습격에 마주치었을 때 이를테면 한밤중 길가의 집 모퉁이에서 몸을 옹송그린 채 불안한 쪽잠을 자다가 난데없는 발길과 주먹세례를 받을 때 무의식 중 그것에 저항하는 습관적 동작임을 나는 보아낼 수 있었다. 그러는 그를 볼 때마다 나는 명치끝이 아파왔다.

이처럼 고통스럽게 비틀려져 있는 여린 심령을 제때에 교정하지 않고 치유하지 않는다면 나이가 커감에 따라 비틀린 마음도 교정 없이 자랄 것인데 그러면 그때 그의 눈에 이 사회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비쳐질 것인가?

기왕 아이를 수용한 이상 나는 반드시 아이에게 가장 깊은 정과 사랑을 주어야 하며 그로 하여금 가정의 따사로움과 부모의 사랑을 느끼게 해야 한다. 하여 다른 애들과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심리상태를 가지게 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 나는 매일 저녁 그와 함께 보내면서 잠을 자도 그가 안전감을 가지도록 품에 꼭 그러안고 잤다. 6개월 동안 나는 그와 함께 잤다. 아이가 자기 나이를 모르지만 그러나 키가 겅충하게 커서 나는 그를 직접 2학년에 붙였다. 그리고 낮에 학교를 보낼 때에는 용돈을 조금씩 쥐어주어 차를 타거나 점심을 사먹게 했고 오후 학교에서 돌아오면 또 과일이나 과자 같은 것을 사주어 먹게 했다. 아무튼 일반 가정의 아이들이 누리는 삶을 그도 되도록 누리게 하려고 안간 힘을 다 넣었다.

석 달이 지나갔다. 이 아이는 점차 심리상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해탈되어 잠잘 때의 그 버릇을 고쳐버리는데 성공했다. 하여 다른 아이들처럼 뛰놀며 유쾌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김일이한테는 유랑생활을 할 때부터 남의 물건을 훔치는 버릇이 있었다.
집에 사람이 없을 때면 나의 방에 들어와 나의 호주머니도 들췄고 다른 애들의 방에 들어가 호주머니를 들추기도 했다. 그리고는 사탕이나 과자를 사다 아이들과 함께 나누어 먹으면서 어느 학부형이 내가 고아라고 불쌍하다면서 돈을 주더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런 줄을 감감 모르고 나는 김일이를 도와주는 이들이 하도 고마와 학교에 선생님을 찾아 감사를 드리러 갔는데 선생님은 그런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이가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아이가 자극을 받을가봐 기회를 타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아무런 내색도 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 날 전혀 뜻하지 않던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김일이가 다른 아이의 방에 들어가 한 아이의 호주머니를 들추다가 그 방에서 자는 아이가 밖에서 돌아오는 통에 그만 덜미를 잡혔던 것이다.

삽시에 온 집안의 기운이 팽팽해졌다. 나이가 많고 주먹이 센 애가 그 일을 알고 김일을 쪼지었다.
<누구누구 준 돈이라고 하잖았어? 그게 다 거짓말이지? 또 누구 방을 털었니? 솔직히 탄백하지 않았다간 내 주먹에 맞아 죽을 줄 알아라. 알아들었어?>

열 살도 안되는 어린 김일이는 잔뜩 겁이 나서 또 다른 애 누구누구의 호주머니를 턴 일까지 다 실토했다.

김일이 이 정도로 “탄백”을 했는데도 주먹이 센 아이는 쪼지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뿐이야? 아버지가 널 울집에 데려 오기 전에도 남의 돈을 훔쳤지?”
김일이는 그렇다고 머리를 끄덕였다.
“너무 배고파서…”

그러다나니 나중에 어린 김일이는 나의 호주머니를 턴 일까지 털어놓았다.
다른 사람, 다른 애들의 호주머니를 턴 일까지는 애들이 분한대로 넘길수 있었지만 나의 호주머니를 털었다는 말에 애들은 치를 떨었다.

“이 새꺄! 너도 사람새끼냐? 개만도 못한 놈. 은혜를 원수로 갚는 놈!”
“형, 누나. 나 잘못했어. 다신 안그럴게. 제발 안 그러겠어. 엉엉…”
김일이가 손이야 발이야 비는 데도 애들은 용서하지 않았다.
“이런 새끼와 한집에 살자니 낯이 뜨거워 못살겠다.”
“이런 새끼는 이 집에서 쫓아내야 한다. 야 당장 여기서 꺼져라!”

불쌍한 어린 김일이는 그말에 그만 잔뜩 겁이 나서 형이야 누나야 하며 울음보를 터뜨렸다.
“나 다시 안그럴게. 나를 쫓아내지 마! 엉엉엉!...”

이 일을 나는 그날 연길에 회의를 갔다 오다나니 그 이틑날에야 알게 되었다.

우리 집 식구로 살고 있는 10여 명의 애들이 이구동성으로 분개를 표시했다.
만장일치로 이런 은덕도 모르고 패가망신하는 애를 어떻게 남겨둘 수 있느냐며 집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원래 김일에 대해 조금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던 차라 이번에 터진 일이 너무 뜻밖의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이 일을 아이들을 교육하는 기회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아이들의 말을 내심하게 다 듣고 나서 그들을 차분히 타일렀다.

“김일이를 쫓아내자구? 너들 생각해 봐라. 걔를 쫓아내면 걔가 어디로 가겠니? 김일이는 아직 어리다. 어린 아이가 왜 잘못을 저지를 때가 없겠느냐. 너희들 잘 생각해 봐.”

이렇게 아이들을 꾹 눌러 놓고 내 방으로 돌아 왔는데 그 때까지 아무 말도 없던 나의 아들이 뒤따라 들어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손버릇 나쁘고 양심도 없는 아이를 왜 그냥 남겨두려고 합니까? 이 애를 남겨두면 다른 애들도 얼굴이 깎인다고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아이들이 다 벼르고 있어요.”라고 나를 설복하러 들었다.
다른 애들이 김일이를 쫓아버리자고 할 때 나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러나 친 아들이란 놈이 이런 말을 할 때 나는 천둥같이 화를 내었다.

“너희들은 양심들을 어디다 내팽겨 버렸니? 너는 애비에미 다 해주는 밥을 먹고 근심걱정 없이 자랐지만 김일이는 아버지 어머니 다 없는 고아다. 이제 열살도 안되는 걔를 내쫓으면 걔는 어디로 가야 하냐? 너 인정머리 있는 놈이냐? 너한테 걔를 쫓아 낼 권리가 있냐? 나가겠으면 네가 나가라! ”

내가 화를 몹시 내는 바람에 아이들 열몇이 문밖에 와서 무슨 일이 생길가봐 조마조마해서 모여서 있었다.

그 기척을 알고 나는 아이들을 모두 들어와 앉으라 하고 김일이도 불러오게 하였다.아이들이 분개해서 쏘아보는 가운데 김일이는 고개를 푹 떨구고 나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어깨를 들먹이며 울었다. 얼굴은 언녕 눈물 범벅이 되었다. 나는 기일이를 나의 옆에 끌어다 앉히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딱 그쳐. 남자애라는게 울면 못쓴다. ”
그러면서 그 애를 비평할 대신 칭찬을 해줬다.

“내가 보기엔 너에게 사랑스러운 점이 있다. 너는 나이가 어리지만 어른들처럼 맛있는 걸 사서 다른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었던거지?”

김일이는 내 말이 너무 뜻밖이었던지 더 크게 흐느끼며 재빨리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래, 그게 너에게는 큰 쾌락이었지. 넌 종래로 혼자 사먹는 법이 없이 그냥 다른 애들과 같이 나누어 먹었잖아?”
김일이는 더욱 크게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런데 어느 애가 갑자기 큰소리로 “걔는 훔친 돈으로 산거에요. 아버지 호주머니까지 털어낸 양심없는 나쁜 애에요!” 하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못써. 김일이는 어머니 얼굴도 못보고 자랐고 자기가 어느 날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너희들은 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의지 가지 없이 불행하게 자란 애들이다. 배가 하도 고프니까 물건을 훔쳐 먹을 수 있지 않니? 그러다 그것이 버릇이 될 수도 있지. 그게 어디 아이들 탓 뿐이겠냐? 우리 어른들한테도 책임이 있다. 물론 훔치는건 나쁜 버릇이다. 그러나 어린 애가 잘못을 저질렀다 해서 함부로 쫓아내야 한다면 얘가 정말 나쁜 아이가 될 수 있잖겠니? 너희들 정말 김일이를 나쁜 아이로 만들고 싶니? ”

아이들이 조용해졌다.

이쯤 되자 나는 아이들의 기분전환을 시켜볼 요량으로 한마디 농담을 했다.
“수호전 너들 봤지? 양산백 호걸들이 부자집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이야기? 김일이가 그 옛날에 태어났더라면 틀림없이 양산백 호걸들처럼… ”

그런데, 나는 아이들의 기분 전환을 시키려고 농담삼아 한 말인데, 그만 내가 실수를 한 것이다. 어느 앤가 나의 말을 중단시키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버진 부자가 아니잖아요? 돈을 벌어도 다 우리를 위한 거잖아요?”

그가 이렇게 말하자 다른 애들도 다투어 말했다.
“아버진 택시 타는 돈도 아까워 그냥 삼륜차를 타시지 않아요? 돈을 절약하느라고 술담배도 다 끊으시고 어머니 병치료를 위해 상해에 가실 때도 그 먼 길을 침대차도 안 타시고…식사 때도 늘 우리가 다 먹은 다음 어머니와 함께 우리가 남긴 밥과 채를 자시지 않아요? 우리가 다 먹어 남은 밥이 없으면 라면도 끓여 자시고 때론 굶기도 하시잖아요?...그러면서도 우리한테는 소비로 하라고 달마다 소비돈을 주시지 않아요?... ”

이 애는 말을 하다가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그 바람에 방안의 애들이 모두 엉엉 울어대서 방안이 그만 울음바다가 돼버렸다.

그 통에 나도 그만 눈물을 흘려버렸다.

그 날 일이 있은 후 아이들은 모두 어른이 된 것 같았다. 공부를 더 열심히 했고 서로간에 더욱 관심하고 아껴주면서 사이가 훨씬 가까와졌다. 김일의 진보는 더욱 눈에 띄게 알리었다.

이 일을 통해 나는 아이들에게 인성교육을 해야 할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었다. 아이들에게 먹고 잘 곳이 있게 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 것은 절대 아니다. 아이들을 어떻게 참된 인간으로 키우느냐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먹고 입고 자는 문제는 돈으로 해결할수 있는 일이지만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돈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었다. 반대로 돈을 잘 못 쓰다가는 오히려 아이들을 해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아이들을 참된 인간으로 키우자면 진정 아이들을 사랑하는 뜨겁고도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시시각각으로, 처처에서 그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을 장차 사회건설에 적응할 수 있는, 이상이 있고 삶의 올바른 목표가 있는, 도덕적 자각이 있고 진취심과 밝은 꿈이 있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헌신적 노력을 할 수 있는, 그런 인간으로 키워내는 일, 적어도 그 기초 작업을 잘 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작업은 아이들의 실정에 맞게 해야지 처음부터 요구를 너무 높여도 안 되었다. 실제로 아이들을 물질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나의 사업에서 절반에도 못 미치는 일이었다. 그들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간으로, 이상이 있는 인간으로 키우기 위한 데 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겨울방학이나 여름방학이면 애들을 데리고 화룡시 13용사기념비, 청산리항일유적지에 가서 혁명전통교양을 하였으며 또 연변과기대를 견학하여 아이들의 나라와 고향을 사랑하고 과학과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주었다.

자금이 어려운 형편에서도 아이들에게 해마다 각종 신문, 간행물을 1000여원어치 주문해서 짬짬이 보게 하였고 다달이 독서모임을 한 차례씩 열어 독서심득을 나누게 했다.

아이들의 학교에서의 학습정황을 알아보기 위해 자주 학교를 찾아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학습을 열심히 하는 아이는 제때에 칭찬을 해주고 고무를 해주었으며 잘못을 저지른 아이에 대해서는 제때에 타일러 잘못을 깨닫고 고치도록 했다.

김철희는 두도진 신민촌의 장애인가정에서 온 애인데 내가 수양하여 공부시키는 애이다. 이 애가 한번은 담배를 피우다가 선생님에게 발각되었다. 학교지도부에서는 철희더러 전교 사생들 앞에서 자기검사를 하도록 요구했다. 철희는 전교 사생들 앞에서 자기 체면을 구기는 일을 받아 당할 수가 없어 집으로 도망쳐와 행장을 꾸려가지고 농촌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도와 농사를 짓겠다고 했다.

나는 그러는 철희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얘야, 네가 고중공부를 할수 있다는게 어디 쉬운 일이냐? 몸이 불편하신 너의 부모님들은 네가 여기서 열심히 공부해서 꼭 출세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계신다. 네가 이 꼴로 집으로 돌아가면 너희 부모님들이 얼마나 실망하시겠냐? 요만한 좌절도 이겨나가지 못하는 애가 당당한 남자라고 자부할 수 있니? 이래 가지고 앞으로 어떻게 부모에 효도할 것이며 앞으로의 삶은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

여러 모로 리치를 따져주자 드디어 철희는 자기 잘못을 느끼고 학교에 돌아가겠다고 했다.

철희가 마음을 돌려먹자 나는 즉시로 학교 당국을 찾아가 철희의 가정상황을 소개하고 학교에서 철희에게 관심을 돌려 줄 것을 부탁했다. 학교의 교장 선생님은 이때에야 내가 철희의 친부모가 아닌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럼에도 내가 철희에 대해 이처럼 관심하는데 몹시 감동되어 했다. 결국 학교에서는 철희에게 주려던 처분결정을 철회했다. 철희는 학교에 돌아간 후 학습에 열중하여 종당에는 우수한 성적으로 장춘외국어학원에 붙는데 성공했다. 지금 철희는 이미 대학을 마치고 안휘성 황산시의 한 여행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한때 화룡시내에서는 적지 않은 학생들이 PC방 중독에 몸과 정신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엄마, 학교 다녀올게요.” 이렇게 말하고 집을 나간 뒤 곧바로 지하 PC방에 가서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퀭한 눈동자로 몇 시간씩 게임에 빠지는 자녀들 때문에 학부모들이 모진 애를 다 태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말들을 무심히 넘길 수 없는 나는 우리 집에는 PC방에 다니는 애들이 없는지를 조사해 보았다. 그런데 알아본 결과 우리 집 몇몇 애들도 밤마다 PC방에 다닌다는 것이 아닌가? 무척 놀란 나는 즉시 그 애들을 불러 놓고 단단히 다짐을 땄다. 그 아이들은 이제부터는 PC방에 가지 않겠노라고 굳게 결심발표를 하는 것이었다. 그 후 나는 아이들을 매일 저녁 열시 전에 자도록 하고 열두시 쯤 아이들의 신발이 제대로 있나 검사를 했다. 아무런 이상이 없어 시름을 놓았었는데, 어느 날 열두 시에 아이들이 자는 방을 일일이 돌며 검사했더니 웬걸, 두 녀석이나 자리에 없지 않는가? 신발은 분명 제자리에 그대로 놓여있는데 이 녀석들은 도대체 어디로 증발했지?

그날 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시내의 PC방을 한집한집 참빗질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두시간 만에 찾아 들어간 담배연기 자욱한 한 PC방에서 나는 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한 채 키보드와 마우스를 움직이며 게임에 푹 빠져 있는 우리 집 녀석들을 발견했다.

알고 보니 이 녀석들은 내가 매일 신발검사를 한다는 것을 어느 결에 눈치를 채고 신발을 제 자리에 얌전하게 앉혀 놓는것으로 나를 속여넘기고 창문으로 해서 감쪽같이 새어버린 것이었다.

그날 밤 녀석들을 집까지 끌어다 놓은 나는 아무 말도 않고 녀석들더러 우선 제 방에 가서 자게 했다.
이틑날 저녁 나는 PC방 출입이 잦은 녀석들을 불러다 앉혀놓고 교육을 했다.

--너들 생각해 봐라. 애비를 속이고 밤 열두시에 창문으로 빠져 세시, 지어 네시까지 담배연기가 매캐한 PC방에서 게임을 하느라 정신 없다. 매일 이렇게 몸이 혹사당하니 이틑날 공부에 정신집중이 되겠냐? 그래 일단 PC방 중독에 걸리면 심신이 다 망가지는 걸 몰라?

--친부모를 일찍 여의고 불쌍히 자란 너희들이 자기 운명을 자기로 개척해야 할거 아니냐? 공부란 단순히 공부하기 위해 하는거 아니야. 자기 운명을 앞으로 자기로 열어나갈 수 있는 기능을 닦아 사회에 떳떳이 나설 수 있는 당당한 이 사회의 주인으로 자라나자면 오늘 어릴 때부터 해로운 유혹을 스스로 물리칠 줄 알아야지.

--너희들이 잘 자라줘야 이 아버지도 기쁜거다. 너희들 잘 자라주지 않고 하나하나 심신이 망가진다면 내가 그래 시름을 놓을 수 있겠니?

나는 녀석들더러 반성문을 쓰게 하였다.
“속으로 우러나오는 반성을 해야지, 맘에도 없는 반성으로 또 한번 아버지를 속여선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지?”

“알고 있어요.” 하고 두 녀석은 기어들어가는 소리를 했다.
“알고 있다니 시름을 놨다.” 나는 왜 목소리가 그리 낮으냐고 녀석들에게 강요를 하지 않고 웃음띤 얼굴로 녀석들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그리고는 전체 모임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이상, 전도와 운명에 대한 교육을 하고 모두들 결심서를 쓰도록 했다. 전반 교육과정에 나는 위협과 공갈 같은 저질적인 교육방법은 쓰지 않았다. 그날부터 며칠 동안 나는 PC방 출입이 비교적 잦았던 녀석을 내방에 데려다 같이 잤다. 그 후 우리 집 아이들은 다시는 PC방 출입을 하지 않았고 평소보다 공부에 더 열중을 하였다.

아이들에게 남을 관심하고 도울 줄 아는 품성을 키워주기 위해 나와 아내는 매년 청명절 때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열사비 앞에 가서 벌초를 하였으며 친인을 잃은 아이들에게는 제물을 사가지고 친인의 묘소를 찾아가 제를 지내게 하였다. 명절이나 휴가에는 아이들과 함께 홀로 계시는 노인들을 찾아가 마당 청소도 해드리고 빨래도 해드리고 창문유리도 닦아드렸다.

아이들에게 우리 말 예절과 한어예절도 가르쳐 아침 저녁으로 집안 어른들과 동네어른들에게 인사를 할 줄도 알게 하였다.

사스로 온 나라가 바짝 긴장하던 때였다. 나는 아이들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불행이닥쳤을 때 불행을 당한 사람들을 관심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키워주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사스로 불행을 당하고 있는데 이럴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를 내놓고 집안에서 토론을 벌였다.

“우리도 사랑의 헌금을 해야죠.”

형기가 차서 우리 집에 와 있는 청년이 자기의 소비돈에서 선참 50원을 내놓았다. 그가 솔선수범을 하자 너도 나도 다투어 호주머니를 털었다. 5원, 10원, 20원…이렇게 모은 성금이 800원 되었다.
우리 구역 한 집에 가스폭발사고가 났을 때도 부상자치료를 돕기 위해 우리 애들은 쓰지 않고 모여두었던 소비돈을 모아 모두 280원을 만들어 의연했다.

이런 일들을 통해 아이들은 사랑의 마음을 우썩우썩 키워갔다.

우리는 해마다 성탄절 날이나 설날이면 집안에서 송구영신행사를 가지곤 했다. 그해 성탄절에도 우리 집 10여명 식구들은 선물들을 준비해놓고 오락활동을 벌이고 잛은 글짓기 시합도 가졌다. 과거, 현재, 장래란 세 단어를 가지고 짧은 글 짓기를 하였는데 김일이가 글 두개를 지어 단연 1등을 했다.
그가 지은 글은 이러했다

과거 나는 집도 없이 떠도는 유랑아였어요. 그러나 현재 나는 따듯한 가정이 있는 학생이예요. 장래 나는 훌륭한 경찰이 되어 나쁜 사람과 맞서 용감히 싸우겠어요.

그리고 한어로도 글을 하나 지었다
去我有家,在我有)暖的家,e我要孝敬88和。(과거 나에게는 집이 없었어요. 현재 나에게는 따뜻한 집이 있어요. 장래 나는 아버지 어머니에게 효도할래요.)

이런 스스로 교육활동을 통해 아이들은 아주 자연스레 밝은 마음을 갖추게 되었다.

올해 소학교 5학년생인 김일은 지금 반급의 중대장이고 남을 잘 돕고 노동 잘하고 하여 작년에 학교에서 최우수 진보상과 노동열애상을 탔다. 6.1국제아동절 날에는 자기도 불우한 학생이지만 다른 아이들에게 자기가 입던 옷도 벗어주고 내가 준 소비돈을 쓰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자기보다 더 어려운 아이들을 도와주기도 했다.

학교선생님을 통해 아이들이 셈이 다 들었다는 말을 들을 때면 나는 매양 격동되곤 한다. 나는 많은 고생을 감내하면서 밤낮 그들을 위해 쏟은 심혈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니었구나, 너희들은 마침내 앞으로 자기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구나, 너희들에게 마침내 자기의 인생 이상과 삶의 목표가 있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과 보람감에 기쁜 감정과 더불어 가슴이 후련하고 뿌듯해났다.
이처럼 다년래 나는 선후로 고아 10여명을 수양하면서 그들더러 가정과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느끼게 하였으며 그들의 건전한 성장에 평탄한 길을 깔아주었다.

30여 년래 학생후원에 돈이 얼마 들어갔는지는 나 자신도 계산해낼 방법이 없다. 매번 학교에서 개학을 할 때면 아이들의 학비문제가 나의 주요한 걱정거리로 된다. 아이들을 위해 정부 관련부처와 학교를 뛰어다니며 학비감면문제로 해당일군들과 상의를 해야 하는데, 여기에 신경이 여간 씌우는 게 아니다. 그러나 매번 아이들이 대학입학통지서를 받을 때면 나와 아내는 친자식이 대학에 붙었을 때와 꼭 같은 희열에 푹 잠기게 되는데 이 때면 노고로 인한 모든 고달픔과 번뇌가 씻은 듯 말끔히 가시어지고 모종의 성취감으로 정신이 부쩍 난다.


1998년 10월의 어느 날 아내가 갑자기 온몸의 힘이 빠지면서 목으로 밥을 넘기지 못했다. 병원에 가 검사를 해보니 의사가 하는 말이 간암후기가 아닌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마른 하늘에 생벼락을 맞은 듯 앞이 캄캄해났다.

과로로 인해 아내를 이 지경이 되게 만든 내가 용서 못할 죄인으로 느껴졌다.

1979년 나와 채명자는 결혼해서 18평방미터짜리 집에서 지극히 어렵게 살아왔다.아이를 낳기도 전에 고아들을 데려다 키우면서 돼지를 먹여 판 돈으로 아이들을 학교공부 시켰다. 첫 아이를 낳을 때 나는 30원 되는 병원 주원비도 대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런 형편에서도 우리는 자기 집을 출옥한 인원이 사회로 진입하는 중계소로 삼고 그들을 데려다 밥을 먹이고 그들에게 일거리를 찾아주기 위해 동분 서주했다. 이러는 나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내 신랑”이라고 하면서 불평 하나 없이 나와 모든 고락을 같이 해온 아내! 아이를 낳아 키우느라, 생계를 돌보느라, 내가 하는 일을 돕느라 과로로 불치병에 걸린 아내!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죄책감에 나는 그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아내만은 살려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즉시 상해 병원에 가 확진을 하고 시급히 치료를 해야겠다고 결단을 내리고 즉시 행동에 옮겼다.

상해로 떠나는 날 내가 수양했던 고아들과 학생들이 모두 우리를 바래러 왔다.

그 애들에게 무슨 돈이 있으랴? 하지만 그들은 우러나오는 진심에서 자기 몸에 있는 돈을 다 털어냈다. 10원이 있는 애는 10원을, 5원이 있는 애는 5원을, 2원이 있는 애는 2원을 내놓았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꼭 병 치료를 잘해서 빨리 돌아와야 돼요. 우리는 모두 어머니를 한번 잃었는데 또 잃을 수는 없어요. 우리는 다 어머니가 돌아오실 날을 손꼽아 기다릴 거예요."

이 광경을 보면서 우리 부부는 모두 눈물을 흘렸다.
세상에 모자간이 아니면서도 모자간을 초월하는 사랑만큼 가슴 치는 정이 또 있을까?

아내는 떨리는 손으로 병 치료에 쓰려고 준비했던 만원 돈에서 천원을 내여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아이들의 정과 기대를 한 몸에 안고 우리는 상해에 도착했다. 하늘도 눈이 있는가 보다. 진일보의 검사를 거쳐 아내의 암증의혹은 배제되고 종양으로 확진이 내렸다.

몸속에 지금도 종기가 6, 7개 남아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나와 우리 아이들은 모두가 일장 악몽에서 깨어난 심정이었다.0

아내에 대해 조금 시름을 놓게 된 나는 내가 이미 푹 빠진지 오래인 사업속으로 다시 빠져 들어갔다.
한번은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에 맞닥쳤다.

진래감옥의 초청을 받고 가 감옥수들에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그런데 거기서 내가 30년 전에 후원해주었던 주인집 박씨의 맏아들을 만나게 될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를 통해서 안 일이지만 그의 아버지 박씨는 출옥후 얼마 안 되어 사망했다. 이미얘기를 한 바이지만 그때 맏이는 학교에서 단지부서기를 했었는데 졸업 후 어쩌구러 집에 돌아가 농사를 짓게 되었다. 감옥수의 아들로 고생스레 자라온 그였지만 평생 농촌에서 땅을 뚜지며 묵묵히 살아나가야 할것을 생각하니 도저히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자기의 기막힌 신세를 한탄하며 모대기던 그는 시내에 들어가 살길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고 혈혈 단신으로 어느 큰 도시에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어느 우연한 기회에 남의 돈을 아주 쉽게 자기 손에 넣었다.

그때 학교에서 단지부서기를 할 때 노래처럼 부르던 이상과 인생목표는 이미 그의머리속에서 까맣게 사라져버린지도 오랬다.

그는 쉽게 훔친 돈뭉치의 유혹을 부리치지 못하고 독한 마음을 먹었다. 살아가기에 충분한 돈을 훔친 다음 손을 씻고 사람답게 살아가겠다는 범죄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결과는 이런 마음을 사려먹었을 때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얼마 안 돼 그는 절도죄를 짓고 진래감옥에 들어갔다.

진래감옥에서 강연을 하는 나를 알아본 박모는 몹시 놀랐다고 했다. 이삼십년 전 자기에게 삶의 희망을 안겨주었던 사람을 강산이 몇 번 변한 오늘 자랑스러운 곳도 아닌 감옥에서 만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부끄러워 나를 만나지 않으려 했다고 실토정했다. 그런데 부끄러운대로 나의 도움을 받고 싶더라면서 주동적으로 나를 찾은 경위를 나중에 내가 그와의 면회를 마치는 순간에 밝히는 것이었다.
면회실에서 우멍한 눈으로 나를 일별하고는 참괴스레 머리를 돌리고 한동안 침묵하던 그가 갑자기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그의 눈물은 끝이 없었다. 그 눈물은 감동의 눈물이기에 앞서 부끄러움의 눈물이자 자기를 도와준 사람의 희망을 저버리고 굽은 길에 들어선 못난 자기에 대한 뉘우침의 눈물이요 회한의 눈물이었으리라.

그도 한때는 학급을 이끄는 학생대표였지 않았는가? 그때 그 열정과 호기는 어디로 갔어? 대관절 무슨 유혹이 너를 이렇게 만들었냐? 무슨 유혹이? 배우기 싫어서? 일하기 싫어서? 무엇 때문에? 도대체 무엇 때문에??

지난 20여년간 그에게서 무슨 말못할 사연이 있었는지는 알수 없었지만 나는 불현듯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자리에서 그는 그 이상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나도 말을 몇 마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낱낱이 읽고 있었다.
작별하면서 나는 "새 출발 준비를 열심히 해! " 하고 한마디를 했다.
그는 말은 없이 그저 머리만 거듭 힘 있게 끄덕여 보였다.
그 후에 나는 수차례 그를 면회하러 갔다.

그도 감옥에서 열심히 노동개조를 했다. 개조 표현이 좋아 1998년 그는 드디어 2년 앞당겨 출옥하였다. 하지만 40을 바라보는 그는 어디 갈 곳마저 없었다.

나는 그를 우리 집에 데려다 잡일을 시켰다.
그 후 나는 그에게 대상도 소개해주고 혼례식도 치러주었다. 하여 그에게는 포근한 가정이 있게 되었다. 그 후에는 외국노무를 나가겠다고 하여 수속을 해주었다.

한번은 그한테 돈이 급히 수요 되었다. 갑자기 어디 가 꾸려 해도 꿀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나는 남몰래 아내의 의약비용에서 2000원을 잘라내어 그에게 주었다.

얼마 전 나의 아내가 한국으로 갈 때 그는 2000원을 아내의 손에 쥐어주면서 "이전에 아저씨가 저한테 뀌어준 거래요."라고 했다. 아내는 "아저씨가 뀌어준 돈은 지금 돌려주지 않아도 괜찮아. 우선 조카 살림을 춰 세우고 나중에 봐."

아주머니의 이해와 지지 앞에서 아주머니의 몸속 간장에 아직 혈관종기가 다섯 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감동된 나머지 아주머니를 덥석 그러안고 말 한마디 못하고 눈물만 좔좔 흘렸다.

지금 그는 연길시의 한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데 일가 세 식구가 본분을 지키면서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지금도 몇달에 한번씩 전화를 걸어 잘 있느냐 무슨 어려움은 없느냐고 문안을 한다.

남윤송은 타인상해죄로 17년 유기형을 언도받았는데 나의 도움 밑에 개조에 노력하여 2003년 2월 앞당겨 풀려나왔다. 출옥 후 일시 거처할 곳이 없자 나는 그더러 우리 집에 와 있게 하였다.

그는 심한 폐결핵으로 앓고 있었는데 당시 우리 집에는 내가 데려온 가난한 애들이 6명이 들고 있어서 아이들에게 감염이 될까봐 걱정이었다.

생각 끝에 그에게 단독 방을 하나 내주었고 아내도 따로 그에게 식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그가 매번 식사를 끝내면 식기를 끓여서 소독을 했다. 그의 병이 깨끗이 완치 될 때까지 견지했다.

그러나 생활상의 관심과 병에 대한 치료만으로는 남윤송의 "사상병"을 퇴치하기에 부족했다. 사회상에서 기시를 받는 일이 내키지 않아 그는 기분이 몹시 상해 있었다.

하루는 남몰래 애꿎은 술만 축내면서 한밤중이 되도록 자지 않고 속에 가득 깔려있는 울분을 쉼 없이 토해내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 타이르고 말렸으나 그는 듣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나를 쥐어흔들면서 내가 자기의 고충을 모른다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그는 키꼴이 1.93미터나 되는 헌걸찬 사내인데 반해 나는 키가 1.58미터밖에 안 되는 왜소한 몸이어서 근본상 힘센 그를 말려내는 재간이 없었다.

그한테 이리저리 밀치어 내 몸 여러 곳에 멍이 들었고 다리는 어디에 다쳤는지 피까지 흘렀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그냥 설득작업을 하였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를 원망해서는 안 된다. 우선 네가 사회를 위해 해놓은 일이 뭔가를 생각해야지. 죄를 지었으면 대가를 치루기 마련 아니야? 남들이 왜 너를 차별시 하겠냐? 우선 남들이 널 차별시하고 깔본다고 탓하기에 앞서 네 자신이 차별시 당한 짓을 한 게 아니야? 네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려면 자기절로 꿋꿋이 일어나야 한다. 너 오늘 이런 꼴로는 백년가도 사람들에게 존중 받을 수 없다. "

그날 마침내 정신을 차린 그는 나를 붙들고 울면서
"나는 정말 무용지물입니다. 나에게 과연 차별시 당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날이 올까요?" 하고 물었다.

나는 "그건 네가 마음먹기에 달렸다. 네가 마음만 먹으면 그런 날이 안 올 리 없다."고 하면서 그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 일이 있은 뒤 그는 다시는 자기의 삶에 비관하지 않고 일마다 열심히 했다. 병이 완치되자 그는 천진에 가서 일자리를 찾았다.

얼마 전에 그는 천진에서 전화를 걸어왔는데 회사에서의 사업상황을 자세히 전하고 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의 몸은 여기 천진에 살고 있지만 화룡의 나의 집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화룡의 집은 영원히 내 마음속에 있는 집입니다. "

그의 전화로부터 나는 그의 꽁꽁 얼었던 마음이 완전히 풀렸음을 폐부로 느끼었고 그의 앞날이 창창하기를 기원해마지 않았다.

이씨는 상해죄로 8년 유기형에 언도된 사람으로 돈화시 추리구 감옥에서 복역했었다. 그더러 잘 개조를 해서 하루속히 사회에 돌아오도록 나는 늘 감옥에 가서 그를 면회하군 했다. 면회 때마다 마음속 얘기를 나누면서 열심히 개조를 하라고 고무 격려해 줬고 과학기술 도서와 문화서적도 자주 보내주어 장래 출옥한 후 사회에서 일을 찾는데 기초를 닦게 했다.

이씨가 향기가 차 석방된 후 경제수입이 없어 생활이 어렵게 되자 나는 만원을 내서 목기공장을 꾸리도록 도와주었다.

몇 년간 경영을 열심히 잘한 보람으로 공장은 경기가 갈수록 좋아져 지금 이씨는 이미 백만 자산을 갖춘 민영기업가로 되었다.

장청학이란 청년은 상해죄로 유기형 7년에 언도되어 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한번은 감옥에 가 보고를 할 때 특히 그를 보러 간적이 있다.

그 때 장청학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도 세상을 떴지 내가 이 모양이지 삶이란 것이 이제 나에겐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

범인이 앞으로의 생활에 신심을 잃는다면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상태에 빠지게 되며 새 출발을 할 결심과 용기마저 잃게 된다. 복형인원에게 있어서 이것만큼 치명적인 것은 없다.

이점을 잘 알고 있는 나는 그의 손을 꼭 쥐고 말했다. "낙망할 이유가 없어. 신심을 잃지 말고 열심히 개조를 해. 너 원하기만 한다면 출옥 후 나를 찾아와라. 내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

나의 말을 들은 그는 삶의 희망을 가지고 용기를 가다듬었다. 그는 마침내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감옥에서 열심히 일하며 개조의 노력을 기울였다. 개조 표현이 아주 돌출했으므로 그는 2년 앞당겨 석방되었다.

그가 출옥하는 날 나와 아내는 새 옷을 사가지고 감옥으로 그를 마중 갔다. 식당에 가서 식사도 같이 하고 택시를 내서 그를 데리고 연길시내를 한 바퀴 구경시키면서 그 사이에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가를 느껴보게 했다.

그는 감동되어 이렇게 말했다. "저를 믿는다면 저더러 이 경리 집에 남아 일하게 해주세요."

나는 정말 그를 우리 집에 남겨 매달 600원 노임을 주면서 그에게 할 만한 일을 맡겼다. 감옥에서 나오면 어떻게 살아나갈까 무슨 나에게 차례질 일감이나 있을까 걱정이 많았던 그는 일감이 생기고 생활이 보장되자 정서도 매우 좋아졌고 일을 해도 자신감에 넘쳐했다.

어느 한번 나는 연길감옥에서 보고를 할 때 형기가 거의 끝나가고는 있으나 돌아갈 집이 없는 왕모의 사정을 알고 왕모가 석방되는 날에 주동적으로 감옥까지 찾아와서 왕모를 나의 집에 입적시켰다. 또한 왕모에게 인력거를 사주어 왕모의 생계문제도 해결해주었다. 절도범죄자인 주모는 만기석방 된 후 나를 찾아와 도움을 청하였다. 나는 두말없이 사법부문과 향정부에 찾아가 주모에게 농사에 필요한 생산대부금을 해결해주었다. 장춘에서 농업박람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또 주모에게 여비를 대주면서 박람회에 참가하여 치부의 길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최근 나는 또 3명의 형기가 차 출옥한 석방인원과 원조커플이 되었다. 그중의 둘은 갈 곳이 없는 무의탁자이다. 그들에게 장사를 해보라고 돈 만원을 뀌어주면서 "바른 길만 걷는다면 어느 때든 도와줄 용의가 있다."고 했다. 그들도 노력을 아끼지 않아 장사가 꽤 잘 되고 있다.

이처럼 30여 년래 나는 시종 변함 없이 이른 바의 많은 "불량자"들과 접촉하면서 그들을 도와주고 교양하는 사업에 많은 심혈을 기울려왔으며 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사회에 유익한 사람으로 돌려세웠다.

내가 도와준 청소년 치고 다시 죄를 짓고 들어간 사람은 하나도 없다. 나는 이 점을 다시 없는 자랑으로 생각한다.


몇 년래 나는 초청을 받고 여러 번 연변 자치주내 각지를 돌면서 사적보고를 하였다. 작년에 연길감옥의 초청을 받고 곧 출옥하게 될 석방인원들에게 강연을 한차례 하였는데, 그들은 나의 보고를 듣고 모두 감동을 금치 못하였다.

어느 하루는 박문길이라는 청년이 우리 집에 찾아 왔는데 그는 자기는 최근 연길 감옥에서 출옥한 자로 감옥에서 나의 보고를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나는 당신이 보고에서 말한 그 일들을 사실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보나마나 당신은 허풍 치는데 불과하지요. 오늘 이 세상에 당신이 말한 것과 같은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까? 나는 그 많은 고아와 빈곤한 학생을 정말 수양하고 있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자 오늘 이 집을 찾아온 겁니다. "
이어 그는 도전적인 어조로 이렇게 말을 이었다.

"당신의 마음이 그렇게 좋다면, 나를 수양할 수 있다고 지금 감히 답복 줄 수 있습니까? "

나는 주저 없이 말을 받았다.
"안 될 거 없소. 원한다면 지금부터 우리 집에 머무르오. "

그는 말한 대로 우리 집에 머물러 살았다.
그가 우리 집에 머무른 시간은 십여 일간이었다.

어느 날 그가 나보고 이런 말을 했다.
"이 원장님, 이 원장님한테 두 손 들었습니다. 당신이 실지 한 일은 당신이 말한 것에는 비교가 안 되게 훨씬 더 많더군요.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은 당신이 말한 것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직접 내 눈으로 보려는 것이었는데, 지금 나는 그 말이 사실임을 확인했습니다. 당신은 정말 대단한 분이고 훌륭한 분입니다. 이 사회에 당신과 같은 사람이 몇 분만 더 있어도 좋을텐데…"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보시다시피 나는 몸이 튼튼한 사람입니다. 제가 여기서 고히 이원장이 끓여주는 밥만 먹고있을 수는 없습니다. 제가 나가거든 그 자리에 가난한 아이 하나를 더 받아 기르세요. 나는 꼭 당신을 따라 배워 해야 할 일을 하고 가야 할 길을 가겠습니다. 후에 능력이 될 때면 꼭 와서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방탕한 아이의 개심은 금주고도 못 바꾼다는 속담이 있다. 나는 박문길과 내가 도와주었던 모든 "방탕아", "문제아"들이 꼭 자기의 앞길을 잘 헤쳐 나가리라고 확신한다.

나는 그들에게 대량의 심혈을 몰부었을 뿐만 아니라 대량의 자금도 쏟아 부었다. 나를 두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문철은 돈 많은 부자라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에게는 확실히 큰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나는 1974년부터 경제적으로 고아와 빈곤학생들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그들을 도와주려면 반드시 자금이 있어야 했으므로 나는 이 문제의 해결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 나는 1985년에 회사의 직을 보류한 채 노임도 받지 않고 나와 자체로 돈이 될 만한 일들을 여러 가지 벌렸다. 돼지사양도 하고 점포도 차리고 식당도 경영하면서 자금누적도 얼마간 했었다.

2001년에는 종자공사 경리 직을 그만두었다.

후에 나는 곰 20여 마리를 치고 샤워실도 경영하여 해마다 근 10만원의 수익을 올렸다.

그간 내가 고아들을 데려다 키우지 않고 빈곤한 학생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지 않고 석방해제인원들을 여러모로 도와주지 않았다면 지금 나에게는 100만원을 웃도는 자금이 있을 것이며 이미 큰 부자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여전히 비교적 가난한 상태에 있다.

그것은 내가 다년간에 걸쳐 번 돈을 모두 고아, 빈곤학생, 장애인, 그리고 석방해제인원들을 돕는데 썼기 때문이다.

한번은 아내가 감개에 젖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양주가 긴긴 세월 적어도 별장 한 채와 고급승용차 한대는 잃어버린 것 같네요."

그러는 아내를 보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선물한 것’이요. ‘잃어버렸다’와 ‘선물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요. ‘잃어버렸다’는 것은 제대로 지키지 못해 누군가가 우리 몰래 가져갔다는 것이고 ‘선물했다’는 것은 우리가 자원해서 내놓은 것이고 기여한 것이 아니겠소! 이런 명세를 구구히 따질 필요야 없지. 물론 이런 일들을 하노라니 우리에게 희생이 있게 되고 우리 살림이 조금 고달파진 건 사실이지만, 그러나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오. 우리는 조금 고달프지만 그 대신 의지 가지 없는 고아들이 의탁이 있게 되고 돈 없는 학생들이 대학 꿈을 이루고 방탕아 문제아들이 올바른 길을 걷게 되지 않았소? 이 큰 명세는 따져야 하오. 세상에 이보다 더 보람 있는 일이 어데 있소?"

나는 아내에게 또 이런 말을 했다. "기왕 이 길을 선택한 이상 이 길이 아주 어렵다 해도 후회 없이 끝까지 걸어 나가야 하오."

어떤 이들은 나를 바보라고 말한다. 바보라도 좋다.

나는 어려서 모진 고생을 다하며 자랐다. 오늘 잘 살게 되었다고 해서 지지리도 못살던 지난 날을 깡그리 잊어서는 안 된다. 오늘 나에게 능력이 있다면 사회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이것은 철칙으로 우리에게는 개인의 이익을 옴니암니 따져야 할 이유가 없다.

물론 내가 이런 신념을 가지고 일을 하는데 상당히 큰 대가를 치른 것은 사실이다.

우리 가정 식구들은 늘 아껴먹고 아껴 쓰면서 돈 한푼 함부로 낭비하지 않았다. 딸이 고중을 다닐 때도 매 주 돈 5원씩만 소비돈으로 주었고 아들이 소학교를 다닐때도 이틀에 50전 주었을 뿐이었다. 돈을 절약하기 위해 나는 담배와 술을 끊어버렸고 친구들이 가지는 모임에도 웬만하면 가지 않았다. 가라오케 같은 고소비 장소에는 더구나 드나든 적이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지금도 우리 집은 아이들이 먼저 밥을 먹고 나서야 우리 어른들이 비로소 밥술을 든다. 아이들이 다 먹고 나면 어른들이 먹을 것이 없을 때도 있다. 어른이 좀 굶더라도 친부모의 사랑을 너무 일찍 잃고 자란 이 애들을 굶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 시종 나의 생각이었다.

20여 년래 우리 네 식구는 종래로 단독으로 지낸 적이 없으며 우리 집 식구끼리 명절을 쇤 적도 없다.

우리 집에는 자금을 절약하기 위하여 택시도 마음대로 타지 못한다는 제도가 있다. 나도 물론 이 제도를 준수한다. 한번은 시에서 회의를 하다가 집에 급한 손님이 와서 급히 귀가해야 하였다. 택시를 타면 5원이 들었고 3륜차를 타면 1원이면 집까지 갈수 있었다. 하여 삼륜차를 불러 탔는데 마침 그 인력거군은 용정에서 온 사람으로 본지에서 인력거를 몰려니 아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꺼림칙해서 우리 화룡으로 와서 인력거를 모는 거였다. 그런데 이 분은 아마 텔레비전에서 나의 사적을 본 모양, "며칠 전 텔레비전에 나온 분 아닙니까? 참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대단한 일을 하시는 훌륭한 분이신데 어찌 이런 초라한 차를 타시는지요? 좋은 일을 말하기야 뭐 어렵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실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집에 이르러 돈 1원을 내니 그분은 "선생님이 저의 차에 앉으신 것만 해도 너무 영광스러운 일인데 어찌 돈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면서 기어이 받지 않으려 했다.

기차를 타도 돈을 절약하기 위해 나는 침대차에 앉지 않는다. 북경, 장춘, 상해, 사천 등 먼 곳으로 가도 좌석 표를 끊어가지고 앉은 채로 자면서 먼 거리를 줄이곤 했다.

때때로 조용히 생각을 하다보면 나는 나의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너무도 미안한 감을 느끼게 된다. 나의 아내는 중병이 있는 몸임에도 훌륭한 치료를 받을 대신 종일 나와 함께 고아들과 빈곤한 학생들을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다. 나의 두 자식도 자랄 때 우유 한통 못먹고 자랐다. 좀 큰 뒤에는 나를 따라 아침 일찍 일어나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해야 했다.

때로는 나도 어떤 억울함을 당하여 마음의 고통에 모대기고 분하고 원망스러울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지는 못하고 자기 자식에게 화풀이를 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나의 자식들은 용케도 참아내고 묵묵히 견뎌 내었다.

나의 딸 이춘이는 올해 23 살이다. 춘이는 어릴 때부터 줄곧 내가 수양하는 아이들, 빈곤한 아이들과 생활을 함께 했으며 나를 도와 나이가 자기와 같거나 자기보다 더 큰 아이들을 돌보군 하였다. 매일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나를 도와 곰을 먹이고 상점경영을 돕곤 했다. 말하자면 나의 사업에서 좌우 팔이 되어주었다.

작년에 그가 한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떠나갈 때 춘이는 두 눈을 깜빡이며 "아빠, 나한테 기념품을 사주지 않을래요?" 하고 물었다.
"너 가지고 싶은 게 뭐지?"
"MP3. 사주실래요?"
"그거 하나에 얼마씩 하는데?"
"600원 하는 것도 있고 1000원씩 하는 것도 있어요. "

나는 한참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이런 말을 했다.
"얘야, 우리 집은 오랫동안 간고분투 정신을 버리지 않고 이어왔다. 이 전통을 잊어서야 되겠니? 너 우선 한국에 가서 공부를 시작해라. 그러다 그것이 정말 수요되거든 자기 절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하나 사든지 하는 게 좋지 않겠니? "

딸은 이렇게 아버지에 대한 유감을 남긴 채 한국으로 떠나갔다.

기실, 나의 딸은 나를 따라 오랫동안 고생을 해왔는데 출국을 하면서 기념으로 MP3 한대 사달라는 건 조금도 분에 넘치는 요구가 아니었다.

하지만 집에 아직 돌봐줘야 할 어려운 아이들이 10여명이나 있는데 그들을 생각하면 가계계산을 꼼꼼히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나는 자기 자식들에 대해서는 이처럼 각박하면서도 의지 가지 없는 고아나 가정 살림이 어려운 학생들이나 석방해제인원들이나 홀로 사는 노인, 지체장애인과 같은 약세군체에 대해서는 오히려 씀씀이가 대범했다.

장홍란은 내가 수양한 빈곤학생인데 작년에 동북사범대에 시험 쳐 붙었다. 그를 대학에 보낼 때 나는 그에게 CD기 한대를 사주었다. 그의 언니가 출국유학을 갈 때 돈이 모자라니 나는 비싼 이식으로 돈 3만원을 꾸어 그를 출국유학 시켰다.

매년 설이 되면 나와 아내는 위문품을 가득 사가지고 독신노인, 지체장애자와 곤란 호들을 한 집 한 집 방문하며 그들을 위로했다. 수년래 나는 선후로 여러 명의 빈곤학생에게 컴퓨터와 CD기, 그리고 기타 생활용품을 사주었으며 석방해제인원들에게 장사를 하라고 자금을 대주었으며 고독한 노인들과 장애인들에게 식품이나 생활용품을 제공했는데 여기에 든 자금이 평균 해마다 만 여원어치 되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자기 친자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 세상에 자기가 낳은 자식을 아끼고 사랑하지 않을 부모가 어데 있겠는가?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하는 데는 나로서의 도리가 있다. 나의 딸이 이 아비한테서 MP3을 선물 받지 못한데 대해 조금은 유감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나의 딸은 어려서부터 친부모의 품에서 자라면서 가정의 따사로움과 부모의 사랑을 유감없이 받아왔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이 세상을 살면서 여러 가지 복을 누릴 수 있다. 그중 최고의 복은 아마 친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받는 것이리라. 이 의미에서 말하면 나의 딸은 분명 행복하다.

하지만 내가 데려다 키우는 아이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들 곁에는 자기를 낳아준 부모가 없다. 그 유감은 그 무슨 방법을 대든 미봉할 수가 없다. 내가 그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좀 더 쏟는 것은 미봉하기 어려운 그 유감을 단 얼마만큼이라도 줄여주어야겠다는 마음에서이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는 그 아픈 상처를 다문 얼마라도 무마해주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애들도 친부모가 있는 아이들과 꼭같이 행복하게 자라줬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나에게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이런 일들을 하는가 하고. 실상 나 개인으로 놓고 말하면 결코 그 무엇을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다. 보답을 바라는 것도 아니요 명예나 명성이나 그 어떤 관직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내가 그런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면 결코 이 길을 걷지 않았을 것이다.

기실 나라고 왜 편한 삶을 살고 싶지 않겠으며 늘 고달픈 삶을 살고 싶겠는가?
지금 나의 가장 큰 소망은, 우리 식솔들이 지금은 23명 대가정과 한데 섞이어 먹고살고 있지만 어느 땐가는 우리 네 식솔에게만 속하는 공간을 마련해 가지고 단란하게 모여 살면서 가정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내가 직접 차를 몰고 우리 식솔들을 태워 연변의 아름다운 산천을 함께 구경하는 것이다.

최근 나는 외상으로 26만원짜리 포크리프트 한대를 사서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희망복리원을 자기 힘으로 잘 꾸려나가자면 경제내원을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30여 년래 내가 수양한 고아, 경제지원을 해준 빈곤학생, 석방해제인원은 모두 70명에 이른다. 그중 북경, 상해, 운남, 사천, 대련, 장춘 등지의 대학에 간 아이가 33명이다. 일본에 연구생으로 간 학생을 포함하여 연구생도 3명이 나왔다. 한 학생은 졸업후 연변과기대 <꿈미래희망 장학재단>에서 근무하고 있고 몇몇은 기관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적지 않은 아이들은 남방의 한국 기업에 취직했다. 개인으로 창업을 한 아이들도 많다.

2000년부터 지금까지 나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에서 수여한 <꽃망울프로젝트 최우수 助學賞>, <차세대 배려 선진 개인>, <95 로력 모범>, <연변感動 10대인물>, 국무원에서 수여한 <전국민족단결 선진 개인> 등 여러 가지 영예를 받았고 사적이 <길림신문>, <연변일보>, <중국민족화보>, 연변TV방송 등 많은 신문간행물과 기타 매체에 보도됐다. 그러나 나는 이런 영예를 단지 나의 전진의 동력으로 간주할 따름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명예가 중요한게 아니다. 나의 명예와 관련해서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오로지 나의 영향으로 고아, 장애인, 가난한 학생, 감옥에서 나와 사회 사람들의 기시를 받으며 죽지못해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사회에서 소외된 많은 불행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안겨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 줬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한 가지 소망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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