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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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술의 탄생과 그 산고
2011년 11월 09일 12시 19분  조회:10785  추천:28  작성자: 박문희


된장술의 탄생과 그 산고

 

--연변민들레마을과 연변두레마을 분쟁사건 조사실기

 

 

1. 술의 력사를 바꾼 오덕장로주

 

요즘 연변의 깊은 산골짜기에서 태여난 된장술이 항간에 급속히 퍼지면서 크게 화제거리다.  된장이 갖고있는 영양물질과 질병을 치료하고 예방할수 있는 기능들이 분명 된장술속에 녹아 들어가 출시 시작부터 소비자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고 술생산허가부문인 길림성기술감독국의 현장검사와 엄격한 검측을 거쳐 생산되고있으니말이다.

 

하다면 수천년 양주사상 콩에서 술을 걸러낸 전례가 워낙 없는데, 그래 연변민들레마을 리동춘회장을 비롯한 된장술 양조자 제씨들이 짜장 술의 수천년력사를 바꾸었다는 말인가?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지난 6월 중국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의 주최하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사상 최초로 열린 “전통된장과 된장술의 영양학적 가치 발굴을 위한 학술세미나”에서는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장로주의 탄생을 양주업계의 획기적인 혁명으로 일컫고 그 영양학적가치를 높이 평가하였으니 이는 필경 일대 경사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흔히 좋은 결과가 쉽게 얻어지는것이 아니듯이 된장술 역시 잉태하여 고고성을 터칠 때까지 모진 산고를 동반했었다.

 

2. 한국목사와 중국기업인의 악수 
 

 

 
연변민들레마을과 된장술의 탄생을 알아보자면 우선 그들의 오늘이 있도록 조건을 제공하여준 "연변두레마을"을 말하지 않을수 없다.

 

연변두레마을은 1997년, 한국 경기도 구리시 두레교회의 김진홍목사가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의란진 련화촌에 투자하여 설립한 한국독자 기업이다. 김진홍목사는 일찍 60년대 살길이 꽉 막힌 사회최하층 걸식자들을 이끌고 남양만이라는 곳에 새마을 생존터를 마련해주었던 전기적 인물이다. 그후 그는 이러한 공동체운동을 펼쳐나가기 위하여 한국 지리산자락에 "두레공동체운동본부"를 설립하고 세계 여러나라에 공동체운동정신을 고양, 전파하는 사회적기업체들을 만들어 나갔었다.

 

당시 연변의 후한 투자유치정책으로 김진홍목사는 연길시 의란진 련화촌의 400헥타르(120 만 평)의 대지와 전체 마을을 50년의 기한으로 임대하게 되였다. 그러나 연변두레마을의 경영체제는 완벽한 기업경영시스템이 아닌 교회식 경영시스템, 말하자면 현장에 책임자를 파견한 뒤 경영보고만 듣고 결책하는 식의 원격조종 관리체계여서 실행초기부터 예상외의 문제점들을 많이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현장에 파견된 총경리가 교회식으로 일군들에게 새벽기도를 강요하는가 하면 탈북자를 수용하는 등 중국정책에 위배하는 일들을 골라가면서 저지르다보니 자연 지방 관련 당국의 주의를 불러일으키게 되였고 나중에는 책임자가 추방당하는 처벌까지 받게 되였다. 설상가상으로 보상금을 받고 련화촌을 떠났던 원주민들이 연변두레마을에 란입하여 소동을 부리는 바람에 마을경영에 큰 차질이 빚어질수밖에 없었다. 이에 김진홍목사앞에 시급하게 나선 특급과제는 신도들의 헌금으로 세운 연변두레마을을 어떻게 기사회생시키느냐였다. 김진홍목사가 해결책을 찾지 못해 밤잠도 설치던 그때 마침 리동춘씨가 등장했다.

 

리동춘은 흑룡강성 태생으로 개혁개방후 조선족농촌인구의 도시 및 해외진출로 농촌마을이 공동화되고 집체경제가 무너져나가는 형편에서 분산된 조선족농촌마을을 병합하여 집중촌을 건설함으로써 조선족농촌 재조합발전의 시대를 연 인물이였다. 언론보도를 통해 리동춘의 사적을 접한 김진홍은 연변두레마을을 운영함에 있어서도 반드시 리동춘과 같은 원견, 능력과 지도력을 가진 현지인이 필요하다는 점을 절실히 느끼고 즉시 한국두레공동체운동본부의 동북아본부장인 임진철씨를 파견하여 리동춘과 접촉하도록 하였다.

 

당시 북경에서 기업을 경영하고 있던 리동춘은 임진철교수가 일개 한국인으로써 조선족 농촌사회 해체위기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대하여 경이롭게 생각하면서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뒤미처 2003년 1월 9일, 북경중앙대학 황유복교수를 대회장으로 모시고 그를 위시한 조선족사회지성인과 농촌간부들, 그리고 한국의 농업계인사들이 함께 하는 중국 최초의 조선족농촌발전 국제학술회의를 열어 큰 성황을 이루었다.

 

그번 대회를 계기로 리동춘은 새로운 인생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였다. 아울러 김진홍목사와 그의 동지들은 리동춘을 신임한 나머지 아예 리동춘을 권유하여 북경의 개인 사업체를 버리고 함께 연변두레마을을 건설하자고 거듭 제안해왔다. 그들의 끈질기고 진정어린 요청과 후한 투자조건, 그리고 자기가 추진하는 뜻과 비슷한 공동체운동의 비전에 마음이 동한 리동춘씨는 마침내 두레마을 건설에의 동참을 결의하게 되였다.

 

김진홍목사는 리동춘을 대표로하는 중국조선족발전기금회준비위원회(가칭)에 연변두레마을의 땅 100헥타르를 무상기증하기로 결정하고 2005년 5월 12일 한국 국회의사당 소회의실에서 기증식을 성대하게 치렀으며 정착에 필요한 상당한 투자와 지원약속도 하였다. 드디여 리동춘은 당년 12월 15일 독자적으로 연변민들레생태산업연구유한회사를 설립하였다.

 

3. 좋은 만남 좌절의 시작

 

김진홍목사와 리동춘씨의 첫 합작사업은 신심과 열정이 충만한 가운데 시작됐다.

 

연변두레마을, 민들레마을과 한국순창진미식품주식회사 등 3자가 연변두레마을 기성의 된장공장을 합작운영키로 하고 민들레마을과 한국순창진미회사에 공장 전체를 인계했다. 매년 500톤 이상 전통장류 생산수출계약도 체결했다.

 

김진홍목사는 리동춘씨를 연변두레마을의 공동개발위원장으로 임명하고 연변두레마을 개발사업의 모든 업무를 위임한 동시에 리동춘씨와 공동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에 근 만자에 달하는 연변두레마을개발계획서와 신청서를 상정하였다. 당시 자치주정부 란승관 부주장은 드높은 관심을 가지고 친히 신청서에 지시사항을 달아서 연길시정부에 이첩하였으며 드디여 연길시 강백준부시장이 도시건설계획국에 사업검토를 지시하고 나아가 개발도면을 전면적으로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한창 사업이 무르익어 가던중, 2006년 2월 연변두레마을에 갑작스런 인사변동이 생겼다. 당시 연변두레마을의 총경리로 사업하던 정병석씨를 대체하여 현임 박상돈씨가 총경리로 부임돼온것이였다.

 

박상돈씨는 부임하자 된장공장의 합작을 부정하고 나섰다. 불문곡직하고 자기의 부하직원(한국인)을 시켜 합작공장의 열쇄를 파쇄하고 합작측의 직원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길을 막았다. 이 일을 알게 된 한국두레공동체운동본부는 박상돈씨를 파견할 때 업무교대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렇다고 해명하면서 곧 해결해줄 것이니 합작측더러 참고 기다리라고 양해를 구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박상돈씨는 합작공장을 빼앗아내고서는 오히려 합작측이 계약내용을 리행하지 않았다고 거꾸로 바가지를 들씌우면서 리동춘씨를 “외국기업을 통째로 삼키려는 날강도”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양측은 심각한 대치상태에 처하게 되였으며 그것은 또 무시로 충돌로 이어졌다. 와중에 경찰의 조사를 수차례 거치기도 하였다. 합작측은 문제가 없으면서도 번번이 조사를 당하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경찰측은 민사사건이니 아예 법으로 해결하라고 밀어부쳤다. 결과 합작업무는 정지되고 따라서 수출계약리행은 불가능해졌으며 그로 해서 빚어진 손실은 해가 바뀔수록 계산하기조차 어렵게 될 것이였다. 김진홍목사가 개척한 합작사업이 박상돈부부의 불가사의한 소행으로 인해 철저한 파산의 기로에 놓이게 된것이다.

 

합작계약에 연변두레마을은 40%의 주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은 실무능력이 없어도 합작만 성사시켜나간다면 50년이란 긴 시간에 거대리익을 창출할수 있는것이다. 그런데 뭣이 불편하고 불만스러워서 이 합작을 박살내지못해 안달을 떤단 말인가?

 

4. 갈등의 주범--신앙과 문화의 차이

 

 

박상돈씨 부임 한달후 그의 부인인 임명자장로가 한국두레교회의 파견을 받고 선교사의 이름으로 연변두레마을에 나타났다. 그는 연변두레마을 교육원장이란 명의를 걸고 민들레마을의 사업에까지 사사건건 참견하기 시작했다.

 

봄을 맞아 민들레마을에서는 구덩이를 파고 마을어구에 장승조각상을 해 세우기 시작했다. 임명자장로는 장승세우는 일은 미신활동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세우지 못하게 방해하고 나섰다. 기독교문화에서는 장승문화를 용납할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기에 길섶에 장승을 만들어 세우면 안된다는 것이였다.

 

리동춘씨는 생태산업발전과 결부하여 토템문화를 연구하는 학술세미나를 조직한바 있다. 임명자장로는 이것도 미신활동이라고 하면서 반대해나섰다. 리유는 학술회의 주제가 "토템문화가 인류에게 주는 계시"라는데 이거야말로 황당하다는것이다. 인류에게 계시를 줄수 있는 이는 오로지 하느님뿐인데 토템문화가 인류에게 계시를 준다고 하니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화와 리념의 차이, 신앙의 차이로 량자간 모순의 곬은 갈수록 깊어지기 시작했다.

 

5. 조작된 음해사건들

 

1) 기증한 토지가 사기극으로

리동춘씨가 기증받은 땅을 다루려고 하니 100헥타르중 70헥타르는 연변두레마을의 전임 총경리가 김진홍목사 몰래 한국기독교장로인 신씨라는 사람에게 이미 사용권을 팔아넘긴 땅이였다. 김진홍목사가 그것을 모르고 리동춘에게 기증했으니 결국 그 땅의 새 “임자”가 나타나 김진홍목사와 리동춘은 부득이 법정소송에 말려들어 패소하게 되였다. 리동춘씨가 중급법원에 상소할것을 요구했으나 박상돈씨는 상소를 거부하다가 두레본부의 핍박에 의해 서류만 제출하고 비용은 지불하지 않아 상소인이 오히려 피상소인으로 전락되여 다시 한번 패소하는 랑패를 보게 되였다.

 

2) 모든 투자금약속이 백지화

리동춘씨와 함께 추진하는 연변두레마을 개발계획은 실현될수 없는 공상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심지어 자기의 지휘본부까지 눈에 넣지 않고 적대모순으로 끌고 가면서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등 현장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모든 사업과 투자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토지 임대 14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도 연변두레마을의 땅은 여전히 페허상태에 처해있다.

 

3) 상급 김진홍목사도 막무가내

한국두레본부에서는 2008년6월 공문을 내려 된장공장을 민들레마을에 넘겨주라고 지시했으나 한사코 불복했다. 이에 김진홍목사가 직접 현장에 행차하여 민들레마을의 일군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지나간 불미스런 일은 서로가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하자고, 저녁중으로 박상돈씨부부와 잘 상의하여 해결할터니 기대하라고 새삼스레 약속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박상돈부부를 설득시키지 못하고 약속을 어긴 채 귀국해버렸다.

 

김진홍목사는 귀국후 동료들 앞에서 “리동춘은 우리가 필요하여서 초청해온 분이니 죄가 없다. 그를 이런 곤경에 처하게 하여 너무도 안타깝다”면서 림시공장을 짓고 어려움을 극복해나가도록 한화 2,000만원을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4) 순창회사직원 경상해 사건

합작자인 한국순창진미식품주식회사에서 시비를 따지러 연변두레마을을 찾아왔다. 순창은 한국고추장의 대표브랜드이다. 순창회사는 연변두레마을에서 된장의 원료를 생산하여 수입하고자 합작에 동참했던 것이다. 그런데 멀쩡한 기업이 생산을 시작도 못한채 두레본부의 조처만 기다리는 판이였다.

 

그러나 무한정 참고 기다릴수만은 없는 순창진미회사는 2008년 12월말 드디여 연변두레마을에 와서 문제를 걸고 들었다. 합작공장을 가동하기 위해 치열한 몸싸움을 벌리기까지 하였다. 와중에 순창측 파견을 받고 온 직원이 연변두레마을 마당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들이닥친 5~6명 괴한들에게 구타당하여 팔뼈가 부러지는 경난을 치르게 되였다.

 

5) 민들레마을 전기선 절단사건

2009년 11월, 박상돈씨는 민들레마을에서 전기세를 일년동안 내지 않았다는 리유로 엄동설한 자기의 부하직원을 시켜 고압선에 올라가서 연변두레마을로부터 민들레마을로 이어온 전기선을 끊도록 사촉하였다. 이로하여 민들레회사 직원들과 그곳에서 생활하는 농호들이 근 반개월간 전기가 끊기여 밥도 제대로 끓여먹지 못한채 추위에 떨면서 지냈다. “기독교인들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준다던데 이 사람들 기독교인 맞는가?” 하는 원성이 빗발쳤다.

 

사실 연변두레마을의 박상돈씨는 리동춘과 한국 김진홍목사댁에서 열린 두레공동체운동본부 회의에 참가하여 민들레마을에 농사보상금을 지불하겠다는 지불각서를 쓴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상돈씨는 보상금지불은 고사하고 그 돈에서 전기세를 계산하자는 제안도 받아 들이지 않고 전기선을 끊은것이였다.

 

6) 인권유린과 중상해 사건

2010년 민들레마을에서 된장술이 개발되여 술공장을 한창 신축하고 있는데 박상돈씨가 수도물을 끊었다. 수도물은 연변두레마을의 동의를 거쳐서 그곳 우물에서 이어온 것이였다. 지역주민들이 박상돈을 찾아가서 왜 물을 끊느냐고 따지자 박상돈은 리동춘과 모순이 있어서 끊었다고 공개적으로 선전포고를 하고 나섰다.

 

이에 분개한 민들레마을 일군들이 저녁에 박상돈씨가 승용차를 몰고 들어가는 길을 막아나서 그와 시비를 따지자고 하였다. 갑자기 승용차의 뒤문이 열리더니 박상돈의 부하직원인 왕반장이 뛰여내리면서 쇠사슬을 휘두르고 벽돌장을 뿌려서 민들레마을의 직원 한사람의 머리에 타박상을 입혔다. 연길병원에 긴급호송해가 진단한 결과 피가 머리속으로 떨어져 두번의 수술을 받았다. 감정결과 중상해로 왕반장은 응징을 받기도 하였다.

 

6. 이상한 소송과 명징한 판결

 

2011년 초, 연길시법원으로부터 리동춘한테 두가지 소환장이 날아왔다. 연변두레마을의 법인대표인 김진홍목사가 민들레마을의 리동춘을 법에 고소했다는 것이다. 내용인즉 하나는 김진홍목사가 불찰로 중국의 법을 어기고 리동춘에게 땅을 기증하였으니 그 잘못을 법원에서 인정해달라, 따라서 잘못 기증한 땅을 되찾아달라, 한마디로 리동춘을 두레마을 지반에서 몰아내달라는 것이였다. 다음 하나는 김진홍목사가 임명한 공동개발위원장의 권한으로 연변두레마을에 투자유치를 한것이 잘못되였으니 역시 투자유치항목을 취소시키고 관련 투자자를 몰아내달라는 것이였다.

 

그러나 법정 판결은 무정했다. 결국 두가지 소송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중급법원으로까지 상소되여 끌고 나갔다. 결과 리동춘씨의 최종 승소로 판결이 났다. 리동춘씨는 본 소송사건의 전후시말과 동기부여를 보면 이 소송은 분명 박상돈씨가 조작한 것이지 김진홍목사의 소행일수 없다고 단정하고있다.

 

7. 생태문화예술절과 오덕문화절 그리고 된장술의 탄생

 

 

 

연변두레와 문화와 리념상 지긋지긋하게 충돌해온 민들레마을은 산출이라곤 거의 없는 경영환경속에서 장장 6~7년이란 시간을 지탱해왔다. 연변두레마을은 한국선교회로부터 달마다 봉급과 경비가 조달되지만 민들레마을은 고립무원한 독불장군에 불과하였다. 불행중 다행으로 민들레마을 전통된장을 알아주는 연변소비자들의 주문이 자주 들어와 회사여직원이 들가방에 된장을 담아들고 뻐스를 타고 집집이 배달을 다니면서 연명해왔던 일을 떠올리며 리동춘은 자못 감개무량해했다.

 

역경속에서도 연변생태문화예술절과 전통된장오덕문화절, 민족의 대표술인 된장술을 배태했다. 이미 7회를 이어온 생태문화예술절과 된장오덕문화절은 새로운 문화를 선도하는 의미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문화지성인들이 인정하는 축제로 되였다.

 

회사의 설립취지대로 연변에 세계 최대의 민족전통발효식품산업단지를 일으켜 세우려는 민들레마을의 꿈을 간단없이 숙성시켜왔다. 이 꿈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참아넘길수있었다.제품을 만들지 못하게 하면 거꾸로 제품의 시장을 미리 먼저 개척하는데로 방향을 돌리면서 제품개발을 멈추지 않았는데 이렇게 개발된 민들레마을의 전통된장생산공법은 이미 2009년 길림성급무형문화재로 등록된 상황이다.

 

이러한 결실이 밑거름이 되여 2008년 8월 사단법인 연변생태문화예술협회까지 설립되였다. 리동춘회장은 “해마다 치르는 축제에 연변두레마을로부터 기증받은 땅의 나머지 30헥타르 토지임대료가 보탬이 되였고 김진홍목사 역시 행사때마다 축사와 함께 대표단을 파견하여 동참해주었으니 감사한 마음은 항상 간직하고있다”고 밝혔다.

 

맺는 말

 

중국공민으로서 중국 땅에서 왜 외국인에게 그토록 기시를 받으면서도 참고 있었는가 하는 물음에 리동춘씨는 “얼핏 보기에 이 사건은 밥그릇 빼앗기 싸움처럼 보이지만 실은 서로 다른 목적의 문화를 주장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우선 서로간 문화에 대한 리해와 소통이 없이는 갈등의 해소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연변라지오텔레비죤신문 부간

<생활안내> 2011-11-7 제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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