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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說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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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장군의 유언
2010년 03월 28일 12시 31분  조회:1647  추천:0  작성자: 말(話)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이순신

 

 

이순신 [李舜, 1545~1598]

 

본관은 덕수()이고,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이다. 서울 건천동(, 현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1572년(선조 5) 무인 선발시험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실격되었다. 32세가 되어서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권지훈련원봉사()로 첫 관직에 올랐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과 발포수군만호()를 거쳐 1583년(선조 16) 건원보권관()·훈련원참군()을 지냈다.

1586년(선조 19) 사복시주부(簿)를 거쳐 조산보만호()가 되었다. 이때 호인()의 침입을 막지 못하여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그뒤 전라도 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이 되었다. 이후 1589년(선조 22) 선전관과 정읍() 현감 등을 거쳐 1591년(선조 24) 유성룡()의 천거로 절충장군·진도군수 등을 지냈다. 같은 해 전라좌도수군절도사(使)로 승진한 뒤, 좌수영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30여 척을 격파하였다(옥포대첩). 이어 사천에서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격파하였다(사천포해전). 또 당포해전과 1차 당항포해전에서 각각 적선 20척과 26척을 격파하는 등 전공을 세워 자헌대부()로 품계가 올라갔다. 같은 해 7월 한산도대첩에서는 적선 70척을 대파하는 공을 세워 정헌대부에 올랐다. 또 안골포에서 가토 요시아키[]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안골포해전), 9월 일본 수군의 근거지인 부산으로 진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무찔렀다(부산포해전).
 



15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에 있던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남해안 일대의 일본 수군을 완전히 일소한 뒤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합세하자 진영을 죽도()로 옮긴 뒤, 장문포해전에서 육군과 합동작전으로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적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전략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때에는 병사들의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한편, 피난민들의 민생을 돌보고 산업을 장려하는 데 힘썼다.

1597년(선조 30) 일본은 이중간첩으로 하여금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생포하도록 하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는 계략을 꾸몄다. 이를 사실로 믿은 조정의 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의 계략임을 간파하여 출동하지 않았다. 가토 기요마사는 이미 여러 날 전에 조선에 상륙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적장을 놓아주었다는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까지 몰렸으나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죽음을 면하고 도원수() 권율()의 밑에서 두 번째로 백의종군하였다.

그의 후임 원균은 7월 칠천해전에서 일본군에 참패하고 전사하였다. 이에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그는 13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명량대첩). 이 승리로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1598년(선조 31) 2월 고금도()로 진영을 옮긴 뒤, 11월에 명나라 제독 진린()과 연합하여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노량해전).


무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시문()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한시 등 여러 편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이 되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된 데 이어 좌의정이 추증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소는 아산시 어라산()에 있으며, 왕이 직접 지은 비문과 충신문()이 건립되었다. 통영 충렬사(사적 제236호), 여수 충민사(사적 제381호), 아산 현충사(사적 제155호) 등에 배향되었다.

유품 가운데 《난중일기()》가 포함된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는 국보 제76호로, 장검 등이 포함된 이충무공유물은 보물 제326호로, 명나라 신종이 무공을 기려 하사한 '충무 충렬사 팔사품(통영 충렬사 팔사품)'은 보물 제440호로 지정되었다. 이밖에도 그와 관련하여 많은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의 삶은 후세의 귀감으로 남아 오늘날에도 문학·영화 등의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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