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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행복에 관하여
행복을 얻으려면 만족에서 멀어져야 한다
인간이란 행복하지 않으면 만족할 줄 모른다. 이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그러면 행복이란 무엇이며, 어떠한 상태의 것인가? 도대체 행복의 크기는 어떻게 잴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사람마다의 대답은 각기 다른 것이고, 또한 선뜻 대답할 수 있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물론당연한 일이다. 인간이란 평생을 이 문제의 답을 얻기 위해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 자신이나 당신 그리고 어느 누구이고 모르는 일이다. 행복을 어떤 방법으로 잴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 암시해 보겠다. 그 하나는 우리의 행복은 얻음으로써 그 얻음에 의해 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이렇듯 대부분의 사람들은 얻은 것에 따라 행복의 크기를 잰다.
다른 하나의 방법은 잃는 것에 따라 행복을 측정하는 방법이다. 우리들은 건강과 질병에서 보듯이, 평소 건강할 때에는 건강에 대한 행복감을 모른다. 건강을 잃고 병마에 시달릴 때 비로소 건강을 되찾고자 몸부림친다.
병마는 몸으로 하여금 고통과 외로움을 안겨 준다. 하지만 우리가 건강할 때는 아무 이상도 느끼지 못한다. 행복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행복에 취해 있을 때에는 느끼지 못하던 것을 이것을 잃었을 때 비로소 고통에 의해 그 소중함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가지고 있던 것을 잃고 나서야 '나는 행복했었는데...' 하고 후회하는 것이다.
어차피 같은 햄을 먹는 것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먹어라.
이미 앞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유태인들은 계율에 의해 금지되고 있는 음식이 많다. 돼지고기로 만든 햄도 그 중의 하나이다.
유태인들의 특성이라면 이 책에서도 여러번 말했듯이 아주 낙관적인 성품이라는 점이다. 경우에 따라 일시적으로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끝도 없이 낙관적이기만 하다. 이들은 어차피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라면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지니고 살아가자는 마음가짐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만들어 준 세상을 축복 속에 즐기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존경하지 않는 죄악이 된다는 것이다.
말할것도 없이 유태인들에게는 햄을 먹지 못하게 엄격하게 금지되어있다.이러한 금지 속에서도 만약 햄을 먹어야 할 경우가 생긴다면 죄의식을 갖기 보다는 차라리 즐거운 마음으로 먹으라는 것이다.정말로 유태인적인 성품을 보여주는 속담이다.
남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마치 향수를 뿌리는 일과도 같다. 이 때는 당신에게도 몇 방울 정도는 묻는다.
유태인들은 특히 선물 주기를 즐기는데, 이것은 자선하는 것을 의무시하는 유태인 사회이기 때문이리라.
히브리어에서는 '자선'과'정의'가 '체다카'라고 하는 같은 말로 쓰이는데, 영어에서 자선을 뜻하는 '체리티'의 어원을 보면 라틴어의 '기독교인이 사랑'이라는 말이며, '남에게 베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유태인들의 의식으로는 자선이란 남에게 베푼다는 뜻이 아니라 해야할 당연한 행위로 되어 있다. 유태인의 어떤 가정에서고 아이가 어릴 때부터 저금통을 갖게 하는데, 이 저금통이 바로 자선에 쓰이는 것이다. 저금통이 가득 채워지면 '시나고케'를 통해 자선에 쓰이게 된다.
하지만 이들의 자선에도 일정한 제한이 있다. 자기 수입의 어느 일정한도 이상을 자선에 내놓는 일은 계율로 금지되어 있다. 부자로 사는 여유있는 사람의 경우 5분의 1정도가 허용되고, 보통 가정의 경우 10분의 1까지 허용된다. 물론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받게 된다.
오늘날 우리 세대에서 볼 수 있는 복지제도의 바탕이 된 구민법이 영국에서 시작된 것이 17세기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에 앞서 이미 유태교의 계율에서는 복지제도가 확립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제다카'정신이 얼마나 강렬했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 일이다.
유태인 사회는 동족끼리는 마치 친형제와 같이 가깝게 지낸다. 그러므로 자기 형제가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면 기쁘게 돕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탈무드>는 남의 힘에 의해 살아가서는 안된다고 훈계하고 있지만, 지금도 유태인 지역에 생활이 어려운 동족이 있으면 서로 수입금의 일부를 내 놔 어려운 동족을 돕고 있는 현실이다. 친절과 선행을 베풀어 남을 기쁘게 해 주는 일은 물론 자기 자신도 함께 즐거움을 갖게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는 것은 순간적인 일이나, 반대로 불행을 행복으로 가꾸는 데는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
가장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 해도 그가 가장 불행한 고통의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은 순간의 일이다. 하지만 반대로 불행한 늪에서 하우적이던 사람이 행복의 정상을 얻기까지는 실로 오랜 세월, 아니 평생의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인간이란 본래부터 지나친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쉽게 만족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기가 살고 있는 환경에 적응하고 만족할 수 없으므로 평생동안 행복감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필자에게도 가끔 불화 때문에 상담하러 오는 부부가 있다.그 가운데는 이혼까지도 생각하는 부부도 없지 않다. 그 때마다 나는 며칠이 아니고 3년간 깊이 생각해 보고 다시 찾아오라고 일러보낸다.
왜냐하면, 불행을 딛고 행복의 정상을 차지하는 데는 아주 오랜 세월 즉 평생을 보낸 끝에 그 방법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유태인의 격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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