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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나에게 간보란
2024년 01월 09일 17시 49분  조회:1219  추천:0  작성자: 오기활
내가 도문시 홍광향 달라자(툰)에서 백부님이 “문화혁명”때에 억울한 루명을 쓰고 타살된 것으로 생산대 정치대장직무에서 물러나20대 나이에 5년간 생산대 돼지사양원으로 일하다가 사래사거(社来社去)로 초생한 연변농학원입학하였다. 학교에서 입당까지하고 1974년에 졸업하니 도문시 홍광공사 당위에서 농민신분인 나를 홍광공사수의소 소장으로 배치하였다.
그때 홍광공사수의소의 재직원들로 일본류학생 ‘아바이', 토배기 수의 ‘전문가', 길림농업대학생이 있었다. 이렇게 ‘높은' 사람들 중에서 제일 막내(26살)인 내가 농민신분으로 소장을 한다는 것은 실로 큰 압력이였다. 그때 홍광공사수의소는 진찰실도 없이 공사정부 청사에서 단칸 사무실을 차지하고 어디에 앓는 가축가금이 있으면 달려가서 치료를 하였다.
홍광공사는 1965년 5월 1일에 도문시가 건립될 때 도문시의 유일한 공사였는데 후에 연길현 월청공사와 왕청현 신농공사를 도문시에 편입시켰다.
내가 홍광공사수의소에 배치받고 얼마 안되여 인사를 하려  도문시축목국에 갔더니 국장이 하는 말이 3개 공사수의소 중 월청공사수의소가 1류이고 홍광수의소가 2류이고 다음이 신농공사수의소(수의 1명)라고 소개하였다. 소개를 받고 나서 나는 속으로 붉은 홍, 빛날 광에 걸맞게 홍광공사수의소를 1류의 수의소로 만들어야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그로부터 나는 ‘야심'을 실현 할 경로를 찾다가 공사와 대대 수의들의 사업 관념을 ‘혁명'해야 한다는데 모를 박고 정치상에서 믿어주고 경제상에서는 돌봐주면서 수의들의 사업 열정을 분발시켰다. 그래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하여 1974년 8월 1일부터 <축목수의>라는 간보를 직접 꾸리고 적극 활용하였다.
 나는 간보를 꾸리면서 취재, 강판글쓰기, 등사, 18개 대대 발행까지 혼자서 했는데 과연 날이 갈수록 간보의 인기가 높았다. 내가 간보를 잘 꾸리니 공사당위에서는 해마다 모내기대전 회전때마다 나를 대회전지휘부에서 일하게 하다가 후에는 공사당위 선전위원, 2년 후에는 조직위원으로 배치하였다.
그때 나는 수의소를 떠나지 않겠다고 당위 서기인 강기관 앞에서 울고 불면서 떼를 쓰다가 “당원이 조직의 분배에 복종하는 것은 조직 원칙이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1979년 9월에 수의소를 떠났다.
나는 홍광공사에서 사업한 10년간에 수의소에서 7년, 당위와 경제위원회에서 3년을 지내며 <<축목수의>>, <<모내기>>,  <<홍광>>, <<홍광주보>>, <<홍광의원>> ,<<당의생활>>, <<계획생육>> , <<경제효과>> 등 간보100여 기를 열심히 꾸렸다.
나는 지금까지 《红光间报汇集》을 나의 열정의 “혼”이 슴배인 30대 “자서전”으로 정히 수장한다.
내가 수의소 소장을 맡고 “정치상에서 믿어주고 경제상에서 돌봐주니”열의가 충천되여 일심으로 일했다.
 <<간보>>로 중심사업을 포치하고 분공하여 기층수의들을 책임맡고 “류동홍기”활동으로 “비기고 배우며 따라잡고 릉가하는” 경쟁을 벌였더니  눈이 확트일 정도로 사업이 변화였다.
한번은 우리들이 교통이 편벽하고 산등성이에 자리한 후안산 마을의 소를 치료하면서 시간적으로 정맥주사를 놓는데 밤에 놓을 정맥주사를 내가 책임지고 밤에 걸어서 현장에 도착하니 수의소의 다른 두 명도 서로 약속없이 따로따로  왔었다. 실로 감동의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나는 제일 막내로 소장을 지내며 속심나누기 활동을 벌려 부인의 지주성분으로 입당을 꿈도 못 꾸던  손덕충(조선귀국화교,토배기수의), 귀국화교가 성분이 없어 입당이 곤난하다던 팽작성이 입당했고 외지에서 전근해온 오혁근(후에 시축목국 국장으로 승진)까지  3명의 입당이 홍광공사수의소의 정치력사에서 입당이 처음이였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했다.
<<간보>>를 통해 선진수의, 우수사양원을 제때에 발견하고 제때에 표창하였다.
 대대수의들을 대상한 <<류동홍기>>를 류동시켰더니 18개 대대의 수의들이 <<류동홍기>>뽑기에 정신없었다.
도문서 30여리 떨어진 산골에 자리한 흥진대대는 정치, 생산 등 면에서 락후하기로 공사에서 손꼽힌다.
그런데 대대수의(김봉룡)이 1977년에 <<류동홍기>>을 뽑자 온 대대농민들이 경사가 났다며 야단이였다. 며칠후 대대당지부서기(리룡철)가 나를 찾아와 “돼지를 잡아서 대접하겠으니 오짬장이 흥진에서 와서 대대수의 회의를 하오”라는 청구하였다. 그래서 흥진대대에서 전공사 수의들의 회의를 했더니 “흥진대대 력사에서 공사급회의가 처음이다”며 돼지를 잡고 온 동네가 큰잔치를 벌렸다.  
한번은 리서기가 흥진서 다종경영을발전시킬려니 흥진대대수의를 배양해 달라고 청구하기에 나는 연변농학원과 련계하여 김봉룡을 반년간 연변농학원에가서  학습하게 하였다.
 1983년 호도거리생산책임제를 실시하자 흥진촌에서 서른살을 갓넘긴 봉룡이를 촌민주임으로 선거, 김봉룡이 몇년간의 알찬 노력으로 촌모를 변화시킨데서 1985년 12월 19일 <<연변일보>>톱기사에 “오로지 고향건설 위해 신화를 엮는 세대주”란 제목으로 김봉룡의 사적을 소개했다.
1978년에 홍광공사수의소가  “주선진수의소”로 평의되였을 때 발생한 어처구가 없는 일다.
 주축목국에서 조직한 년말총화대회때 나의 아들이  급성 간염으로 내가 참가할수 없어서 팽작성(한족)을  주총결회의에 참가시켰다. 그런데 도문시축목국의 책임자가 팽작성이 발언하면 인기가 없다며 우리의 발언자료를 월청공사수의소 소장을 발언하게 하여 월청공사수의소가 “주선진단위”로 상장을 팄다. 며칠후에 내막을 알게된 나는 대대수의들게 교대할수 없다며  억울하여 <<연변일보>>에 “선진영예를 도적 맡혔다”는 제목의 원고를 투고했더니 편집부에서 조사일꾼을 파견한후 시정부 부시장(남현후)게 정황을 반영한데서 시축목국잭임자가 큰 욕을 당하고 주축목국에서 다시 홍광공사수의소에 영예증서를 발급했다.
이를 계기로 홍광공사당위서기(강기관)가 전공사 당원대회에서 “전공사 대대당지부서기들이 대대수의들의 시업열정과 조직성을 따라 배우라”고 했다.
간보를 꾸리니 18개 대대의 정황을 손급보듯 하였다.
 1981년도에 내가 당위선전위원으로 지낼때 <<연변일보>>사 도문시 주재기자(리금석)가 홍광향글쓰기 열성자 학급반을 조직하였다. 제일 마지막 날에 보도선색을 제공할때 내가 18개 대대의 신문선색을 하나하나씩 제공하였는데 그때 12개 기사가 신문에 발표되여  이번 학습반이 수확이 대단하다며 리금석기자가 기뻐했다.
1982년 <<경제효과>> 제 1기에 “들긇는 흥진골”이라는 제목으로 호도거리농사후의 흥진촌변화를 소개하였다.
   흥진촌은 집체농사때 해마다 국가의 반소량(反銷粮)에 의거했는데 어느해에 상급에서 온 공작대가 “흥진에서 단 한 알의 량식이라도 나라에 바쳐야는 한다.”고 강요하기에 할수없이 촌에서 개인집들의 팥을 30근을 모아서 처음으로 나라에 바친 웃음거리 있었다.
 그런데 호도거리 농사후 어느 날 흥진촌의 당지부서기(리종철)가 집체로 곡식뒤주를 지을 나무를 비준 받겠다며 향정부를 찾아왔다.
나는 “이것이 신문이다”며 흥진촌에 내려가 심도있게 조사한후 “곡식뒤주를 마련하는 희열”이란 제목으로 연변일보에 투고했더니 1982년 10월1일 2면 톱기사에 발표, 이 원고가 연변일보 년말평비에서 우수원고로 평의되여  30원의 상금을 탔다.
   홍광향당위의 촌문화실건설이  길림성선진단위로 평의되고 홍광향당위의 예비당원교육경험이 전 주조직공작사업회에서 소개되였다.
모든 간보에 <<문제와 건의>>라는 전란을 설치해 큰 효과를 보았다.
1. 1982년에 도문시에서 부문마다 참관을 조직하는 것에 농민들이 원성이 많아 <<문제와 건의>>에  연변일보에 “참관유람바람을 막아주시요”라는 원고를 보내 82년 10월 9일 1면에 이 원고를 실은 뒤 계속하여 편집자의 말과 함께 “참관유람 바람을 견결히 막아버리자”라는 전문란을 꾸렸는데 그 전문란에 중공도문시반공실의 반성과 함께 “참관유람을 막을 대책”까지 실었다.
2. 연변의 첫 “텔리비죤”마을의 중학생들이 돈에 물들어 학교를 중퇴하는 실정을 조사하여 길림일보 <<红色社员>>报 올려 1983년 3월5일 1면 <<红色社员>>报 톱기사에 단평까지 배합하여 발표하였다.
… …
지금 간보늘 펼쳐보니 마음에 가책되는 일들이 한둘이 아니다.
말하자면 <<계획생육>>간보에 “비법결혼명단”, “다섯이상 호주명단”등 전문란,  <<당의생활>> ”전란에 “오공 5대에서 개인과 집체에서 껌 하나에 3전씩 사다가 10전씩 판문제 합당한가?, 집중3대 모사원이 9월 3일부터 다섯마리의 소를 사다가 팔아서 돈을 벌었는데 합당한가?” 하가남새대, 집중남새대 모 사원이 지난해부터 집체일을 하지않고 개인 돈벌이를 하는데 응당한가? 등 내용을 보면 너무나 천진하고 어리석었다는 생각에 반성이 앞선다.
모두어 말하면 간보는 내가 30대에 쓴 “자서전”으로 나에게 사업방법, 사업책임감, 사업열정, 신문령감을 키워준 명실공한 문자기록으로 나의 앞길을 밝혀주고 때때로 자신을 성찰하고 앞길을 비쳐주는 손색없는 거울이다
/오기활 
                길림신문 2023년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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