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어느 생일상에서 모두가 “박철이 어머니 언제 돌아왔습니까?”는 물음에 50대 녀성 최영희가 하던 말이 생각난다.
“한국에서 몇년간 다른 일을 하다가 간병일이 쉽고 돈벌이도 된다는 친구의 소개로 한동안 간병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할머니의 간병을 하면서부터 눈앞에 90대 친정어머니가 얼른거려서 도저히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돈이 뭐길래 친어머니도 멀리하고 타남의 할머니를 돌봐야 하는가고 생각하던차 마침 ‘있을 때 잘해’라는 노래가 나를 두고 하는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고민끝에 늦더라도 후회하지 않으려고 돌아왔습니다.”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친구는 로인간병을 했습니다. 몇년전에 친정어머니가 사망했을 때 집에 가지 않은것이 종신 죄로 느껴지며 늘 후회의 눈물을 흘린답니다.”
“늦더라도 후회하지 않으려고 돌아왔다!”는 최영희는 “종신 죄를 졌다”며 눈물로 후회한다는 그녀 친구의 말에서 부모효도란 말로 하는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것임을 알게 되였다.
효란 부모를 모시는것으로서 입으로만 모시는 시늉을 하는것이 아닌 내 몸처럼 부모를 모시는것이다.
왜 몸으로 부모를 잘 모셔야 하는가? 그것은 부모가 생명을 준 은인이기때문이다. 부모에 대한 헌신은 나의 목숨에 대한 은공의 베품이다.
세상에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없다.
부모들의 자식사랑은 그 자식이 자식농사를 해봐야 진정 알게 된다.
우리 민족의 상례문화 핵심은 “효”이고 주체는 “례”이다. 그런데 “포기”시대인 현실은 상례문화마저 “낡은 습관”, “낡은 전통”이라며 포기하는것이 문제다.
조상들이 “효”로 만들고 “례”로 가꾸어온 “제사법”이 후세들을 잘 먹이기 위해 선조들이 만든 법이라고 하는데 생각해보면 그렇다. 근거란 제사상에 정성껏 올린 제물을 결국은 망자가 먹는것이 아닌 산사람이 먹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지금은 상례를 지키는것마저 부담이나 시끄러움으로 멀리하니 문제가 아닌가?
돈이나 지위, 명성 따위로 부모사랑을 저울질하려는 풍조를 인간의 마음이 황페화한 징조라 하겠다.
인간으로 마음이 황페되면 으르렁거리며 사는 짐승과 다름이 없다는 생각이다. 효는 이를 제일 무서워한다.
“늦었지만 후회하지 않으려고 돌아왔다.” 최씨녀성에게 있어서 “늦었다고 할 때가 시작이다”, “종신죄를 졌다”며 후회하는 최씨 친구녀성에게 “후회에는 약이 없다”를 건네고싶다.
“망자를 생각하면 살아있는 사람들은 모든것을 후회한다.”
부모생각을 하면서 눈굽을 적시던 어느 선배의 말이 떠오른다.
길림신문 2017-2-28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