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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출세와 효도의 갈림길에서
허룡석
어쩌면 이 세상 모든것은 너무도 빨리 시들어지고 사라져가는듯 하다. 무정한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처럼 불타던 많고많은 욕망마저 서서히 시들어버리고 모든 생명체들도 한줌의 흙으로 삭아가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 한가지 남는것이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효가 아닐가싶다.
어머니들은 위대하다. 자신의 피와 살로 자식들에게 다함없는 사랑을 몰붓는 어머니들은 이 세상의 영원한 거인, 생의 홰불이라고 칭송해도 과분하지 않으리라.
나의 어머니도 수많은 어머니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거인이셨고 생의 홰불이셨다. 어머니는 거인마냥 우뚝 서서 자신의 귀중한 그 청춘의 홰불로 자신을 불태우며 사그라져가는 이 갸냘픈 명에 생의 활력을 부여하셔 기적적 생명을 만들어주셨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자식으로서 그러한 어머니를 위하여서는 무슨 효도인들 못하겠는가. 그 옛날 이야기처럼 머리카락을 잘라 신을 삶아드리고 허벅다리 살을 베여 부모를 공대하지 못할지라도 출세와 효도의 갈림길에서 량심을 어기지 않는 선택을 할수 있지 않을가 사료된다.
2013년 여름, 북경에 계시는 선생님들과 선배님들 5쌍이 부부동반하여 연길에 소풍을 오시게 되였다. 장기간 일본에 가 계신다는 일찍 중앙민족학원에서 우리 담임 교원을 하셨던 리용식선생님도 부인을 배동하여 함께 오시였다. 그분들이 훈춘에 가셨다가 연길에 돌아온날 저녁 우리 몇몇 동창생들도 백산호텔 귀빈청에서 선생님 들과 자리를 함께 하게 되였다. 나는 일부러 리용식선생님 곁에 자리를 잡고앉았다. 서로 인사의 말씀이 끝나고 축배의 잔을 돌린후 나는 리용식선생님한테 따로 술을 부어올리며 조용히 말씀드렸다.
“혹 선생님은 기억하시겠는지 모르겠지만 30여년전 졸업시 저를 학교에 남지 않겠는가고 하시던 선생님의 말씀을 저는 지금도 잊지 않고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대뜸 놀라운 표정을 지으셨다.
“암. 기억하고있지. 그때 동무를 확실히 학교에 남기자고 했는데 돌아가겠다니 참 아쉬웠댔소.”
“그때 비록 북경에 남지는 못했지만 선생님의 그 고마운 마음은 제가 영원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자못 아쉬운듯 이렇게 말씀했다.
“그건 조직의 고려였지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였소. 그때 동무가 조직의 기대 대로 북경에 남았더면 어떻게 발전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방에 와서도 그만하면 아주 잘한거지. 조선족인재들이 우글거리는 연변에서 신문방송언론사와 문화부문 책임자로 오래동안 사업했으니 얼마나 잘한거요. 내 알건대 우리 민족대학 조문번역전업을 졸업하고 지방에 돌아간 동무들가운데서 동무처럼 이만큼한 사업경력을 쌓은 학생이 없는것 같소.”
“별로 잘하지는 못했습니다만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제가 지방에 돌아와 이만큼이라도 자리를 굳힐수 있은것은 선생님들의 따뜻한 관심과 교양과 갈라 놓을수 없습니다. 잊지 못할 그 고마운 마음담아 제가 특별히 선생님께 이 잔을 올리고싶습니다."
“좋소. 우리 함께 들기오.”
술을 잘 마시지 못하신다는 선생님은 통쾌하게 잔을 굽냈다.
우리의 대화를 엿들은 곁에 앉은 한 동창생이 나한테 조용히 말했다.
“학교졸업때 그런 일이 있었소? 우린 그런줄 정말 몰랐댔소.”
“후, 알면 뭐하겠나. 다 지나간 일이다.”
1979년 여름, 대학졸업을 몇달 앞둔 어느날 담임교원 리용식선생님이 나를 조용히 찾았다.
“조직에서 동무를 학교에 남길 타산인데 남을 의향이 있소?”
리용식선생님은 중앙민족학원 조문번역학부가 선 이후의 첫기졸업생으로서 나이는 나와 비슷했지만 선배이자 선생님이기에 나는 깍듯이 존대했다.
“예? 저를 학교에 남기려 하신다구요? ”
전혀 생각밖이라 나는 놀랍게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먼저 학부의 전직공청단서기로 남길가 하는데 이제 편제가 나면 교원으로 넘길가 하오. 만일 학교에 남을 생각이 없으면 북경에서 다른 단위를 선택해도 되오.”
몇을 학교에 남기는가고 물으니 내가 유일하다신다. 내가 대학에 오기전에 공사의 공청단서기로 있은 경력때문인가? 학교온 후에도 나는 장족, 위글족, 몽골족, 하사크족, 조선족 등 다섯개 전업이 있는 민족언어학부의 공청단선전위원 사업을 맡아하고있었다. 당시 학교에 남는것과 북경대학 동방언어학부, 중앙인민방송국, 민족출판사, 중앙민족번역국,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등 단위와 부문들은 우리 대학 졸업생들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졸업림박이면 학생들이 사업환경이나 생활환경 등 여러가지 조건이 지방보다 훨씬 우월한 북경에 남으려고 서로 갖은 연줄을 달아 앞뒤로 뛰여다니는 판인데 나는 생각밖으로 움안에서 떡 함지를 받아안은격이라 할가. 우리가 민족출판사에서 실습할 때에도 담당편집이 나의 번역수준을 기중 괜찮게 평가하였다는것도 후에 들어서 알게 되였다. 아마 대학가기전 다년간 신문방송사 골간통신원으로 활약하면서 부지런히 글을 쓴것이 큰 밑바탕이 된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북경에 남을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가정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기에 내가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고향에 돌아갈 생각만 하고있었다. 그런데 정작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잔잔하던 가슴이 흥분으로 들뛰였다. 나는 설레이는 가슴을 진정하며 잘 고려해 보겠다고 선선히 대답했다. 갑자기 마음이 둥둥 뜨는듯 했다. “촌놈”이 행운스럽게 수도 북경에 와 공부하고 꿈에도 생각지 않게 수도공민이 된다니 어찌 마음이 들뜨지 않겠는가.
무슨 지방의 후비간부라고 여러해 동안 대학에 갈려고 해도 보내주지 않아 나중에 "이판삼판 생떼질쓰며" 뒤늦게야 학교에 가다보니 졸업을 앞둔 내 나이 29살이라 반급에서 두번째로 나이 많았다. 그때 이미 연길에 약혼녀가 있었다. 내가 북경에 남게 되면 약혼녀를 북경에 전근시켜와야 70고개에 올라선 부모님을 모셔올수 있었다. 나는 흥분된 마음을 가까스로 누르며 약혼녀와 부모님한테 편지를 띄워 학교의 뜻을 전하며 그네들의 의사를 물었다. 약혼녀한테서는 북경에 남든 돌아오든 나의 의사를 따르겠다고 금방 회답이 왔으나 집에서는 여러날 지나도록 종무소식이였다.
담임선생님이 두번째로 나의 의사를 물을 때 나는 체면을 무릅쓰고 한가지 요구를 제기했다. 나는 이미 대상이 있는 로총각인데 5년내에 안해의 호구를 북경에 들여올수 있으면 남는것을 고려해 보겠다고 했다. 선생님은 다른 학생들은 무조건 남으려 해도 남기 어려운 형편인데 그런 과분한 요구까지 제기하느냐는듯 나를 쳐다 보고는 학교에 반영은 해보겠지만 희망은 적을것이라고 했다.
며칠후 단임선생님이 또다시 나를 찾았다. 아니나다를가 지금 학교는 물론 북경의 어느 단위에나 10년, 20년씩 천리만리 갈라져 사는 견우직녀들이 수두룩한데 학교에서 그런 담보를 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면서 나더러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란다. 사실 그때 북경에 지방의 호구를 들여온다는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하여 어떤 학생들은 북경에 남기 위해 다년간 사귀며 뒤를 받쳐주던 지방의 련인을 차버려 일련의 풍파를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렇게 할수 없었다. 자기가 잘되려고 수년간 나를 믿고 따르던 선량한 처녀의 가슴에 못을 박을 수 없었다. 내가 북경에 남는다고 생각했던지 일부 교원들이 나한테 북경처녀를 소개하기도 했다. 나는 지방에 이미 대상이 있다고 솔직하게 사절했다. 따르는 처녀를 두고 량다리 걸치기를 할수 없었다. 하지만 북경처녀와 결혼하는것이 년로한 부모님을 북경에 빨리 모셔올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였고 현실문제이기도 했다. 그렇게 되면 로처녀로 만들어놓은 지방처녀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는가?
솔직히 말하면 나도 다른 동창들과 마찬가지로 정말 북경에 남고싶었다. 하지만 부모님들은 생각하면 또 쉽게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내가 북경에서 남들처럼 10년이고 20년이고 안해의 호구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다가는 부모님들이 고향에서 고독한 나날을 보내시다 쓸쓸히 세상을 뜨실것이였다. 더우기 70세를 넘기신 아버지도 내가 대학에 온후 중풍에 걸리셨다지 않는가. 나는 고민에 빠졌다. 어찌해야 좋을지.
그러던차 한달쯤 지난 어느날 고향의 한 마을에 사는 사촌형한테서 편지가 날아왔다.
“…너의 편지를 받고 마다매(나의 어머니)는 날마다 눈물로 세월을 보낸다.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이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북경에 남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가고 락루하신다. 그러니 너도 잘 생각해 보아라. 내 생각에는 그래도 돌아 오는것이 좋을것 같다…”
사실 어머니는 내가 대학에 공부하러 가는것부터 탐탁해하지 않으셨다. 평범한 농촌부녀인 어머니는 내가 공사간부로 된것에 만족해하시면서 어서 빨리 결혼하여 손자손녀들만 안겨주기를 바라셨다. 나이도 어리지 않기에 여기저기에서 소개해 들어오는 처녀들도 적지 않았다. 또한 수천명 귀향, 하향청년들을 거느리는 공사의 공청단서기로 있었기에 따르는 처녀들도 한둘이 아니라 할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더 배워야겠다는 욕심에 "철밥통" 공사간부도 포기하고 부모의 마음도 모르는척 하면서 기어코 학교로 온것이였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로서 불효를 저지른것은 아닌지 나 홀로 고민할 때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작은 집 어머니말씀에 의하면 내가 달을 채우지 못하고 세상에 태여나서부터 앓기도 많이 앓았다고 한다. 어느 로인인가 자주 앓는 애들은 이름을 천하게 지으면 명이 길것이라 하여 나에게 “매지” (망아지)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래집 사촌형 애명이 “쇄지” (송아지)이니 그렇게 부르는것이 음양으로 서로 어울린단다. 이 피덩이가 살아만 준다면 개똥애라 불러도 무방했다. 하여 동네는 물론 린근 마을 에서도 “쇄지”와 “매지”있는 세흥촌 허씨네 집안이라면 모르는 사람들을 내놓고는 다 알았단다.
젖이 안나는 어머니는 나를 안고 동네를 돌며 동냥젖을 먹였다. 맘씨고운 마을 어머니들은 나를 불쌍히 여겨 자기애들 입에서 젖꼭지를 빼내여 나의 입에 물려 주었다. 그럴 때면 나는 가리지 않고 암팡스레 젖을 빨아댔단다. 하지만 모두가 번마다 그렇게 마음을 쓰는것은 아니였다. 어떤 아낙네는 젖을 주기는커녕 자주 앓음 자랑하는 나의 병이 자기애한테 옮을가봐 설설 뒤걸음치며 비아냥하기도 했다.
그럴수록 어머니는 나를 꼭 살리고야 말겠다고 옥다짐했다. 어머니의 그 정성에 감화된 나와 동갑자리를 가진 몇몇 이웃집 어머니들과 아무때건 군소리없이 젖을 물려주는 작은 어머니가 있어 나는 그런대로 젖배를 곯지 않을수 있었다.
하지만 렴치없이 언제까지도 계속 동냥젖을 먹여 키울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좀 춰서자 암죽을 끓여먹였다. 그런데 “천인젖”을 먹던 입에 생뚱같은 맛을 가진것이 들어가니 나는 떠넣은 암죽을 뱉어내며 울음으로 거센 “항의”를 해댔단다. 그래도 어쩔수 없었다. 마음아파도 암죽맛을 들여야 했다. 어머니는 동네방네를 다니며 사탕가루를 구해다 암죽에 섞어먹였다. 배고파 울어 번져지던 나는 어쩔수 없이 암죽을 좀씩 받아먹었다. 당시 사탕가루가 아주 귀했으나 어머니는 어디서 어떻게 구해오는지 나의 암죽에 사탕가루를 떨구지 않았다. 나는 암죽을 먹다도 별안간 젖생각이 나는지 시도 때도 없이 발버둥치며 울어 번져지다가 자주 암죽 그릇을 훌떡 뒤집어놓기도 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너무 안타까와 손바닥으로 온돌바닥을 치며 넉두리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도 어머니는 제꺽 눈물을 닦고 일어나 다시 암죽을 끓여 나를 달랬다. 암죽끓이는 일은 다른 사람이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어떤 때는 작은 어머니가 그런 장면에 맞띄워 내가 불쌍하고 어머니가 안쓰러워 자기젖을 물려주려 하면 어머니가 막아나섰다.
“아매두 젖먹구 자랄 애가 아닌데 자꾸 그러문 얘가 언제 암죽맛을 들이겠소. 보기 구차해두 관두우.”
그렇게 하루에도 몇번씩 나한테 암죽을 끓여먹이느라 납쟁개비 여러개나 구멍이 뚫려버렸다. 어머니의 열손가락은 불에 데고데여 감각을 모르는 두터운 살이 들어 앉았다.
나는 이렇게 선량한 어머니들의 동냥젖을 먹으며 자랐고 어머니의 정성이 담긴 암죽을 먹으며 푸들어갔다. 그런데 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여난 탓인지 하루건너 앓음 자랑이였다. 오고가는 감기를 빼놓지 않았고 설사요 페염이요 하며 의원집문턱이 다슬게 드나들었다. 의원집에 호구를 붙인다고 또 마을사람들 말밥에 오를가봐 어머니는 나를 둘쳐업고 남의 눈을 피해 버들방천속으로 해서 아래마을 의원보러 다니군 했다. 너무 자주 다닐 때는 버들방천속에서 서성거리며 날이 어둡기를 기다려 마을에 들어서군 하였다.
내가 여섯살때에 한번은 내가 잃어져 마을사람들이 일떠나 나를 찾은적이 있었다. 그날따라 마을의 큰 대돌에 물이 넘치게 흘러들어왔다. 어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이 아들이 대돌에 빠졌는가 하여 생사를 불문하고 선참으로 가슴을 치는 대돌에 뛰여 들어 정신없이 나를 찾아헤맸다. 나의 주검을 찾아내는 날에는 어머니도 물에 빠져 죽겠다고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는 대돌을 따라 사품치는 해란강에까지 뛰여들어 나를 찾겠다는것을 마을사람들이 모여들어 어머니를 잡아끌며 겨우 말려냈다. 그날밤 어머니는 울음으로 날을 새웠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내가 다 큰 후에 작은 어머니가 여러번이나 나한테 가만히 들려준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남다른 정성을 다 한 엄마가 아니면 그렇게 병약했던 네가 이 세상에 살아있었을지도 모른다. 엄만 너 하나만 믿구 살아오셨다. 그러니 너 이후 엄마 은공을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다.
“비천한” 농민으로서의 나의 부모는 나에게 우월한 사회환경과 재부를 안겨 주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필생의 정력과 심혈로 하나뿐인 아들을 이만큼 키워주신 분들이였다. 내가 이 세상에 태여날 때에는 어머니가 나의 생명의 태줄을 끊어주었지만 내가 북경에 남아 부모님들이 고향에서 외로히 세상뜨실 때에는 내가 효도의 정감을 끊게 될것이니 이는 내 평생의 영원한 아픔으로 남게 될것이다. 그러면 나는 스스로 불효자식이란 마음의 멍에를 지고 고통스레 살아가게 될것이 였다.
나는 사촌형의 편지를 받고 여러날 고민했다.
"그래도 발전하자면 여러모로 조건이 좋은 북경에 남아야 한다. 작은 늪에서는 큰 고기가 자랄수 없다. 드넓은 바다가 나의 수영장이다."고 "출세"가 목소리를 높히면 "효도"가 "그래 너의 출세를 위해 평생을 너를 위해 아글타글하신 부모들의 가슴에 피눈물이 고이게 할거냐? 효성이 지극하면 북두칠성도 굽어본다 했다. 개구리가 되였다고 올챙이때를 잊지 말아라."고 반박했다. 나의 머리속에서 "출세"와 "효도"가 며칠을 두고 론쟁했다. 나중에는 결국 "효도"가 이겼다. 고민끝에 아쉽지만 학교에, 북경에 남으려던 생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출세와 효도를 모두 가질수가 없는 현실에서 도덕적 선택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나의 장래보다도 우선 량심이 있는 인간이 되고 싶었고 은혜를 아는 자식이 되고 싶었다. 평생 하나밖에 없는 이 아들을 믿고 사시는 부모들 가슴에 한을 박을수 없었고 마음에 피눈물이 고이게 할수 없었다. 나 하나를 "희생"하면 부모님들도 의탁할 곳이 있고 약혼녀도 더는 인생의 풍파를 겪지 않겠는데 나 하나가 잘되겠다고 효도에 못을 박고 도덕을 말아 먹을수는 없는 일이였다.
내가 입을 꾹 다물고있었기에 동학들은 졸업할 때까지도 리용식선생님이 나와 하신 담화를 감감 모르고있었다. 아니, 지금까지도 동학들이 거의 모르고있다. 일부 학생들이 북경에 남자고 앞뒤로 뛰여다닐 때에 내가 학교에서 남으라는것도 사절하고 "멍청이짓"을 하고 돌아왔다면 동학들이 믿지도 않을것이였고 받아들여지지도 않을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내가 연변에 돌아와 일자리를 배치받았으나 집이 없어 한동안 부모님들을 모셔 오지 못했다. 대신 우리는 주일마다 고향에 찾아가 위안을 드렸고 박봉을 잘라 식량대와 약비를 대드렸다. 이듬해에 20평방메터도 안되는 집이라도 차려져 시내에 모셔오려 했으나 아버지는 편찮은 몸으로 비좁은 집에 들어가 자식들한테 페를 끼치지 않으려 하셨고 어머니도 정든 농촌을 떠나기 싫어하셨다. 아버지가 지병으로 고향 마을에서 세상을 뜨셔서야 어머니는 어쩔수 없이 연길시에 들어오셔 우리와 함께 이곳저곳 여러 차례 이사하시며 10여년간 생활하시다 80여세에 세상을 뜨셨다. 마지막 몇해는 치매에 시달리며 고생하시기도 하였다. 그 10여년간 여러번 이사하며 시어머니를 모시고 애 둘을 키우느라 마음씨 고운 안해가 많은 고생을 했다.
아버지가 세상뜨셔부터 나는 해마다 청명과 추석이면 안해와 함께 산소에 다녀 왔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시자 어머니의 골회를 아버지산소곁에 모셨다.
1994년 11월, 조선 해당부문의 초청에 의해 부주필이였던 내가 연변일보사 조선방문대표단 부단장 신분으로 평양에 방문갔을 때 공교롭게도 어머니 3년제를 맞게 되였다. 나는 갖고 갔던 과일, 사탕, 과자 등속과 조선의 해산물로 평양 고려호텔 22층 침실방에 풍성한 제상을 차려놓고 제를 지냈다. 령험하신 어머니 혼이 들어와 상을 받으시라고 북쪽창문을 열어놓고 자신의 귀중한 청춘의 꽃잎, 생명의 꽃잎으로 나의 생명을 바꿔주시고 자신에겐 갸날프고 앙상한 꽃대만 남기셨던 고마운 어머니님께 감사의 절을 올렸다. 나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하느님께 빌었다.
“자식을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평생 고생하시다 인제야 고향땅에 돌아오신 우리 어머니를 극진히 보살펴주옵소서!”
몇년전에 모아산양지쪽에 별장군이 들어앉게 되여 룡정시정부의 통지에 따라 부모들 산소를 부득불 옮기게 되였다. 사촌형과 누님들이 수십년동안 효도할대로 했으니 이 기회에 다시 옮기느라 말고 골회를 처리하라고 했다. 하지만 차마 그렇게 처리하기엔 어쩐지 불효감이 들어 아버지의 골회를 공경스레 하나하나 빠짐없이 파내여 연길시 장의관에서 화장하였다. 그리고는 골회함에 정히 넣어 어머니의 새 골회함과 함께 룡정시장의관에 한해 더 모셨다가 (묘소를 옮기게 한 룡정시정부측의 배치에 따라) 가문 어른들의 토론을 거쳐 이듬해 중양절에야 눈비를 맞으며 소하룡 합수목을 찾아 두분의 골회를 한줌한줌 정성스레 강물에 띄워 보냈다.
"전생에 가보지 못한 고향도 돌아보시고 세계유람을 하시라."며 골회를 띄이는 순간 갑자기 이왕지사들이 떠오르며 눈물이 왈칵 쏟아져나와 앞을 가렸다.
"아버지, 어머니 이것이 두번째 리별입니까? 이것이 영원한 리별입니까? 이 못난 자식이 지금 불효를 저지르고 있는것은 아닙니까?"
내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니 함께 갔던 둘째누님도 눈물을 흘렸고 매부와 사촌 형도 눈굽을 찍었다. 손꼽아보니 장장 32년간 부모님산소에 다녀왔었다.
우리는 주위사람들로부터 효자, 효부라는 칭찬을 많이 듣기도 했지만 지금 돌이 켜보면 많은 자식들처럼 왜 부모님들 생전에 더 잘해 드리지 못했던가고 후회되며 가슴이 알알해난다.
부모님들이 모두 세상을 뜨시고 내가 사업에서 일부 좌절을 겪었을 때에 “당시 내가 학교의 의도대로 북경에 남았더면 지금쯤 어떻게 되였을가?”는 허황한 생각을 굴려보기도 했었다. 후에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친구들과 동사자들은 거의 모두 “그때 참 착오적인 결정을 했었다.”고 맹랑해하고 나무람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지방에 돌아온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출세와 효도의 갈림길에서 자식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할뿐이다. 그런데 북경에 남고싶었던 마음이 아직도 어느 한 구석에 남아있는지 몇십년후에도 내가 북경에서 사업하거나 북경으로 전근해가는 황당한 꿈을 종종 꾸기도 했다.
자기를 낳아키운 부모한테도 효도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혈연관계가 없는 당과 국가를 위하여 한맘한뜻으로 충성할수 있겠는가. “꼬부랑나무가 산을 지키고 못배우고 못난 자식이 부모곁을 지킨다.”는 격언이 있다. 효도를 위하여 잠시 <못난이>로 되는 것도 인간의 도덕이고 량심이라 하겠다. 물론 그 <잠시>가 본인의 발전과 전도에는 영향을 끼칠수도 있겠지만.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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