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룡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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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녹쓴 철길 우에서
2019년 07월 15일 11시 21분  조회:2167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녹쓴 철길 우에서

허룡석

 

유유히 흐르는 해란강을 옆에 끼고 있는 드넓은 세전이벌 한복판에 나의 고향 마을이 오붓이 자리잡고 있다. 그 고향 마을의 뉘연한 앞언덕에는 일제시대에 부설한 철길 한갈래가 길다란 두 다리를 동서로 뻗고 있다. 조선전쟁 때에는 이 철길로 수많은 항미원조 물자들이 수없이 수송되였고 나라 건설 시기에는 변강 건설에 크나큰 기여를 하기도 했었다. 그러던 그 철길이 가지가지로 살길이 나진다는 개혁개방 시기에 와서 막혀버려 고향 사람들은 애석함을 금할 수 없어한다. 이젠 그 철길로 기차가 통하지 않은 지도 20년이 나마 된다. 

첫 진눈까비가 흩날리던 지난 초겨울의 어느 날, 오랜만에 고향 마을에 찾아갔다가 아직도 지난날의 그 어떤 잔정과 미련이 남아서인지 나는 울적한 마음으로 한적한 그 철길 우에 올라섰다. 거무불그스름하게 녹쓴 철길이 거칠은 황초 속에 쓸쓸히 누워있는 모습은 마치 늙고 지치고 병들고 맥이 진한 로인이 앙상한 두 다리를 뻗어버리고 저세상으로 간 사체를 방불케 했다.

이 철길은 조양천으로부터 개산툰에 이른다 하여 조개선이라 불렸다. 지난 세기 30년대 초에 중국을 장기적으로 침략하고 략탈하기 위하여 일본제국의 점령하에 있던 동북의 남만철도회사에서 설계하고 부설한 철길로서 1933년 11월에 정식 통차 하였으니 이젠 80고령이 넘었다. 조개선은 조양천에서 장도선과 련결되여 전국 각지로 통할 수 있었다. 건국 전과 건국 초기에는 린국과도 직접 기차가 통했었다. 길이 60키로메터에 간이역이 5개 밖에 안되는 이 철길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짧은 간선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력사는 가장 오랜 철길 중의 하나였고 또한 국제선로이기도 했다.

철길을 마을 앞에 두고 우리는 세상에 고고성을 울려서부터 기차의 기적소리를 들으며 자랐었다. 저녁이면 그 기적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잠들었고 새벽이면 아침을 알리는 수탉의 울음소리로 알고 깨여나군 했었다.

녹쓴 철길 우에 올라서니 유치원 때 손에 손 잡고 씩씩하게 노래 부르며 이 철길을 따라 웃마을 유치원에 놀러 가던 일이며 어른들의 뒤를 따라 철길 너머 산기슭에 있는 렬사비로 오르내리던 기억이 새롭다. 철부지 때엔 레루에 올라서 빨리 걷는 시합도 해보았고 침목을 세며 빨리 달리기 경색도 해보았다. 애들이 편을 나누어 철길 량옆에 엎드리여 군대놀음도 해보았고 기차가 올 때면 남몰래 동전을 철길 우에 놓아 납작해지게 하는 장난도 쳐보았었다. 

한마디로 철길은 우리들 동년의 즐거운 놀이터이기도 했다. 그 때는 양로공들이 날마다 시간대로 오르내리며 철길을 점검하고 깨끗이 청소하다 보니 철길의 자갈들도 하나 흐트러짐이 없었고 철길 옆의 오솔길들도 깨끗하게 정비되여있었다. 보드라운 잔모래가 깔린 철길 량옆 오솔길에는 깜찍하고 이쁜 노랗고 빨갛고 파란 꽃들이 소담소담 피여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관리하는 사람마저 없어 오솔길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무쇠우박을 맞은듯 여기저기 크고 작은 홈채기들로 울퉁불퉁했다. 철길의 자갈들도 오르내리는 짐승들의 발길에 채워 제멋대로 여기저기 흩어져 나뒹굴었다.

지난날 그처럼 흥성했던 철도연선 마을에는 이젠 이 철길 옆 오솔길로 손 잡고 명랑하게 노래하며 걸어갈 유치원 어린이들도 없다. 우리의 동년처럼 장난 칠 애들도 없다. 철길은 지난날의 생기를 잃은 지 오랬고 인간들과의 정이 멀어진 지도 옛날이였다.

1964년 내가 열세살 나던 해에 중학교 입학시험을 쳐놓고 갈 곳도 별로 없는지라 집에서 한가하게 놀고 있는데 길건너에 사는 작은집 어머니가 찾아와 자기네 둘째와 함께 개산툰 걔들 외가집에 놀러 가지 않겠는가고 했다. 작은집 어머니의 형제들과 친척들이 개산툰화학섬유팔프공장에 출근하는 줄 나도 귀동냥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그 때는 그렇게 큰 국유기업에 출근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대단히 부러워하는 일자리였다. 나에게는 사돈집에 놀러 가는 꼴이였으나 기차를 타고 간다는 소리에 귀가 벌쭉해졌다. 마을 앞으로 달려가고 달려오는 파란 렬차나 검은 화물차는 수없이 보았어도 아직 한번도 기차를 타보지 못했던 연고였다. 

나는 동갑짜리 사촌동생과 함께 8리 길을 걸어 공사구역 한쪽 끝에 있는 연동역(동성용진역)에 가 멀리에서 바라보기보다 엄청 육중한 렬차에 올랐다. 렬차가 서서히 떠나자 나무와 전선대가 휙휙 지나가고 그 큰 산과 벌들도 통채로 달려왔다가는 그대로 물러가는 것이 하도 신기하여 렬차를 타고 가는 내내 머리를 차창 밖에 내놓고 달리고 춤추는 바깥세상을 구경하다 보니 개산툰에 이르렀을 때에는 머리에 석탄재가 바글바글했었다. 이렇게 나는 이 조개선에서 인생의 첫 렬차를 타보았다. 중학교 시절에는 숱한 학생들과 함께 이 렬차를 타고 로투구 만인갱 참관을 가기도 했고 녀동생이 시집갈 때에는 여러 친척들과 함께 이 렬차를 타고 둘러리로 조양천에 가기도 했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온 후에는 이 철길을 넘나들며 일터로 나갔고 회의하러도 다녔다. 이 철길 우에서 석탄재를 뒤집어쓰고 정해진 시간 안에 건조실 석탄을 부리우느라 청춘의 비지땀을 흘리기도 했다. 여름이면 이 철다리 밑 강에서 목욕도 하고 물고기잡이도 했으며 겨울이면 바글거리는 애들과 함께 썰매도 타고 스케트도 탔었다. 홍수가 져 몇번이나 마을을 휩쓸고 가던 강도 지금은 실개천으로 변해버려 물고기란 사돈의 팔촌도 볼 수 없고 썰매를 탈 만한 얼음조차 얼굴 수 없다. 물론 썰매 탈 아이들도 없다.

개혁개방 이후 조개선의 종점에 있는 개산툰화학섬유팔프공장도 시장경제의 충격으로 갈수록 내리막길을 걷다가 나중에는 개혁의 칼도마에 오르게 되였다. 그런데 공장이 외지기업에 팔려가면서 종업원들의 로임문제와 양로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지 못하여 종업원들이 의견을 제기하다 못해 나중에는 수천명이 이 철길에 드러누워 항의하여 세상을 놀래우기도 했었다. 공장이 팔려간 후에도 한시기 시장경제의 진통으로 끙끙거리다가 더는 버틸 수 없어 결국 문을 닫는 운명을 면치 못했다. 공장문이 닫기면서 변강의 끝자락에 있는 이 공장에 원목과 석탄을 쉼없이 수송하던 화물차도 자취를 감추었다. 이런저런 원인으로 렬차를 타고 다닐 사람들도 갈수록 줄어들어 렬차마저 사라졌다. 이 공장으로 하여 흥성하던 개산툰진도 날로 쇠퇴해져 지금은 지난날의 생기를 찾아볼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외국으로 도시로 뿔뿔이 떠나갔다.

지난 20여년간 사라진 것은 기차만이 아니였고 녹쓴 것은 철길만이 아니였다. 철길 주위에 있던 많은 것들도 따라서 사라지고 ‘녹쓸고’ 쇠퇴해졌다. 저기 철길 아래에 있던 새벽농민대학도 시장경제 도래와 함께 장기간 시시콜콜 앓음소리를 내다가 별수없이 2011년 초에 연길의 직업고중에 합병되여 옮겨갔다. 

연변의 첫 초급농업사 책임자이며 전국로력모범인 김시룡의 창의하에 1958년 대약진시기에 전국에서 제일 먼저 건립된 농민대학으로 중앙수장들의 높은 중시를 받았었다. 나라의 투자로 4층 학교 청사를 짓고 많은 농업기술 인재들을 양성하기도 했었다. 농민대학이 잘 나갈 때에는 전 현 각 인민공사들에서 싹수가 있는 농업 기술인재들을 이 학교에 보내여 벼재배, 과수재배, 축산업 등 전문 농업기술을 배우게 하였다. 학생들은 졸업 후 본지방에 돌아가 골간 기술인재로 활약하면서 지방의 농업생산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었다. 나의 둘째누나도 1960년대 초에 이 학교를 다녔는데 소학교에 다니던 내가 한번은 누나를 찾아갔다가 학교식당에서 새하얀 이밥을 큰사발에 무둑히 담아주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개혁개방 이후 시장경제 발전과 농촌생산 경영체제 개혁의 변화, 알곡을 비롯한 농부산물 가격의 하락으로 농업기술 인재 양성을 취지로 하던 새벽농민대학 학생 원천은 갈수록 크게 줄어들었다. 숨져가는 학교를 살려보려고 학교지도부와 상급 해당 부문에서는 나라와 외국인들의 도움으로 영어학과와 컴퓨터학과 등 사회에서 환영하는 새로운 학과를 설치하며 여러모로 모지름을 써보기도 했으나 결국은 얼마 지탱하지 못하고 학교 설립 50여년 만에 문을 닫게 되였다. 전국에 이름을 날리던 전국의 첫 농민대학은 시장경제의 충격으로 이렇게 력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 지금은 ‘지치고 병들고 녹쓴’ 텅 빈 건축물들만 저렇게 진눈까비 속에 쓸쓸히 웅크리고 있다.

이 철길을 마주하고 있던 저기 보이는 중학교도 문을 닫은 지 오랬다. 연길현 제11중학교 명칭을 가진 중학교는 우리가 다닐 때까지만도 학생이 500명 가량  되였는데 지금은 학생들 종적조차 없어졌다. 그 서쪽에는 중학교에 붙지 못한 학생들로 농업중학교를 꾸렸는데 학생 수가 우리 중학교 버금이 되였다. 그런데 개혁개방 이후 학생 근원이 해마다 줄어들어 중소학교가 합병되여 겨우 운영되던 것이 그것도 얼마 안되여 문이 닫겨버렸다. 

우리가 다닐 때 공사 중심소학교는 민족련합학교로서 학생이 500명 가량 되였고 조선족학생이 80%이상 차지했다. 연길현(후에 룡정시로 개명)에서도 인구가 가장 많고 면적이 가장 큰 공사여서 이만큼이라도 지탱했지 작은 향진의 학교들은 모두 문을 닫은 지 오래다. 나라의 혜택으로 몇년 전에 중학교 청사는 새로 지었지만 학생들은 하나도 없이 괴괴하기만 하다. 듣자니 뭐 로인활동실로 되였다나. 텅 빈 새 청사보다도 어쩐지 울창한 백양나무 그늘 속에서 남녀학생들이 바글바글 희희락락 뛰놀던 운동장과 낡긴 했어도 정들었던 그제날의 중학교 청사가 우렷이 안겨오며 가슴이 애절해났다. 

이 철길을 앞에 두고 있는 나의 고향마을도 마찬가지였다. 연변의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산아제한 정책으로 출생률이 대폭 낮아진 데다 개혁개방 후 젊은이들과 아낙네들이 거의다 외국으로, 도시로 빠져나가다 보니 100여호 되는 큰 마을이 점차 황페해져갔다. 비여있는 집들이 갈수록 늘어났고 대다수 논과 밭들이 외지 사람들 손에 넘어갔다. 그저 저세상이 오래지 않은 이 땅의 로영웅들이 쓸쓸히 고향을 지켜가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자랄 때까지만도 얼마나 활기찬 마을이였던가. 청년들이 우글우글하고 학생들이 바글바글했었다. 저녁이면 마을 구락부에서 흥겨운 손풍금 소리 울려나오고 피끓는 청춘남녀들의 활기찬 노래소리가 별들이 도글거리는 밤하늘에 울려퍼졌었다. 그런데 지금은 낮이나 밤이나 쥐죽은 나라란다. 사람 사는 마을 같지 않단다. 마을 앞쪽에 있던 원래의 철공소와 정미소도 언녕 외지사람에게 팔려갔다. 그 통에 룡정 으로 통하는 큰길과 이어졌던 마을의 중심길도 토성에 둘러막혀 고향 로인들은 비좁은 옆길로 에돌아다녀야 했다. 굴러온 손님이 주인행세를 하고 마을을 개척한 주인들이 손님 쪽으로 밀려났다. 황페해지고 쓸쓸해져가는 마을은 우리 마을 뿐이 아니였다. 철로연선에 있는 동쪽켠의 동성, 연동이나 서쪽켠의 홍성, 태평, 대흥 등 조선족 마을들도 마찬가지였다. 배에 곱이 차고 수시로 술잔을 들 수 있는 지금은 되려 사람들이 고독하고 쓸쓸함을 느끼며 한숨소리만 높아가고 있다. 

해방 직후에는 이 철길이 누워있는 세전이벌에서 길림성의 첫 호조조와 동북의 첫 인민공사가 고고성을 울렸었다. 전국로력모범 김시룡, 전국3.8붉은기수 리옥금, 성귀향지식청년본보기 려근택, 전국림업모범 림관동, 성로력모범 박봉금, 연변10대우수청년 마옥금 등 많은 선진과 모범인물들이 이 세전이벌에서 배출되였었다. 정치 돌출 세월에는 전국모주석저작학습기준병 황순옥을 배출하여 전국에 둘도 없는 ‘산골의 녀수재’로 천산남북에 명성을 떨치기도 했었다. 

지난 세기 80년대 초에 주당위 서기였던 조남기동지의 지지와 지도하에 전국의 첫 로인절도 이곳 동성용진에서 태여났다. 이로써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에서 자기의 청춘을 이바지해온 연변의 로인들은 당과 정부의 배려로 자기들의 명절을 갖게 되였으며 수십년이 지난 지금은 가장 활기 띤 명절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였다.

하지만 개혁개방을 맞으며 지난날의 명성과 영예는 가뭇없이 사라졌다. 모든 것은 시장경제 속에서 갈팡질팡하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렇게 수십년이 지나도 성내거나 전국은커녕 시 안에서도 경제발전으로 이름이 날 만한 회사도 없고 크게 돈 번 인물도 없다. 외국에 가 막일로 돈을 벌어왔다는 사람들도 확대재생산에 돈을 쓰는 사람보다 ‘신선놀이’에 돈을 탕진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계급투쟁과 정치돌출을 위주로 하던 계획경제 시대에는 전국과 성, 주에 앞장선 ‘신생사물’들과 선진, 모범 인물들이 연변에서도 가장 많이, 가장 빨리 출현하더니 돈을 벌어 잘살라는 시장경제 시대에 들어서니 왜 남의 꽁무니를 따르고 있는 것일가?

다른 곳에서는 경제발전과 관광사업 발전을 위하여 일반철도는 물론 고속철도도 갈래갈래 신설하는데 이곳에서는 달리던 기차도 기적소리 끊은 지 오래다. 그렇다 할 남다른 자원도 없고 종점역 국유기업도 문을 닫고 고향사람들도 팍팍 줄어드는데 기차가 맥빠진 신음소리를 울리며 계속 달릴 수 있겠는가. 철길 우의 귀익은 기적소리 사라지니 철길 주위의 눈익은 모든 것이 활기를 잃어가는듯했다. 철길이 녹쓰니 철길 주위의 모든 것에도 ‘녹’이 쓸고 있었다. 

언제면 이 철길 우에서 귀익은 그 기적소리가 다시 울려올 수 있을가? 언제면 철길 주위의 눈익은 모든 것이 그 기적소리에 따라 지난날의 활기를 되찾을 수 있을가? 언젠가는 린국과의 대문이 자유로이 열려지면 기차의 기적소리 다시 울려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면 그 기적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백여년간 이 세전이벌을 개척하고 가꾸어온 원주민들의 후손들이 아닐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 생각이 뇌리를 치니 마음은 왜 이렇게 서글퍼지는 것일가. 이 세전이벌의 곳곳에 나의 청춘의 발자국이 찍혀있고 나의 정열의 땀방울이 슴배여있어서일가? 나의 청춘의 꿈도 이 철길을 따라 뻗어나갔던 연고에서일가?

나는 쌀쌀한 바람에 흐느낌 소리를 내는 황초 속에 덮여 죽은듯이 누워있는 미라이 같은 침목을 밟으며 쓸쓸히 거닐다가 맥없이 녹쓴 철길에서 내려섰다. 이젠  다시는 고령로인의 사체 같은 이 철길을 밟고 싶지 않았다. 걸어봐야 마음만 쓰려올  뿐이다. 지금은 동년시절의 즐거움과 기쁨을 이어갈 천진란만한 애들도 없고 청춘시절의 동경과 희망을 이어갈 활기찬 젊은이들도 없다. 이제 고독과 쓸쓸함 속에서 한탄과 실망감으로 살아가는 로인들마저 하나 둘 저세상으로 가면 마을은 어떻게 될가? 그렇다고 내가 가서 고향마을을 지켜줄 재간도 용기도 없다. 범아재비가 력사의 수레바퀴를 막을 수 있겠는가.

금전소리 절컥거리며 줄기차게 달리던 기차가 숨소리를 잃은 것도 시장경제의 산물일 것이다. 마을사람들이 더 잘살아보겠다고 외국으로 도시로 빠져나가는 것도 어쩌면 시대 발전의 세대적 탈피과정일 것이다. 물은 내리흐르고 사람은 올리산다 하거늘 모두가 돈 잘 벌 수 있는 곳으로, 살기 좋고 편한 곳으로 떠나가는 걸 누가 그르다 하고 누가 막을 수 있으련만 정들고 눈익은 지난날의 많은 것이 사라지고 잃어지는 것은 마음을 허비기엔 족했다. 지난날의 모든 것이 있을 때에는 소중한 줄 모르다도 언젠가 이렇게 없어지고 사라지고 잃어져서야 그 때의 그 소중함을 통절하게 느끼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가?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고향마을이 주당위와 정부에서 진척시키고 있는 연길-룡정-도문 연룡도발전계획 안에 들어 마을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동경으로 가슴들이 새롭게 부풀어있다는 점이다. 고향마을의 새로운 도약적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음에 마음은 다소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정든 고향이여 부단히 발전하고 번영하라. 이 땅을 억척스레 가꾸며 세대로 구슬땀을 휘뿌려온 고향의 친인들이여 부디 행복하시라. 

출처:<장백산>2018 제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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