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룡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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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수필]녹쓴 철길 우에서 댓글:  조회:2166  추천:0  2019-07-15
녹쓴 철길 우에서 허룡석   유유히 흐르는 해란강을 옆에 끼고 있는 드넓은 세전이벌 한복판에 나의 고향 마을이 오붓이 자리잡고 있다. 그 고향 마을의 뉘연한 앞언덕에는 일제시대에 부설한 철길 한갈래가 길다란 두 다리를 동서로 뻗고 있다. 조선전쟁 때에는 이 철길로 수많은 항미원조 물자들이 수없이 수송되였고 나라 건설 시기에는 변강 건설에 크나큰 기여를 하기도 했었다. 그러던 그 철길이 가지가지로 살길이 나진다는 개혁개방 시기에 와서 막혀버려 고향 사람들은 애석함을 금할 수 없어한다. 이젠 그 철길로 기차가 통하지 않은 지도 20년이 나마 된다.  첫 진눈까비가 흩날리던 지난 초겨울의 어느 날, 오랜만에 고향 마을에 찾아갔다가 아직도 지난날의 그 어떤 잔정과 미련이 남아서인지 나는 울적한 마음으로 한적한 그 철길 우에 올라섰다. 거무불그스름하게 녹쓴 철길이 거칠은 황초 속에 쓸쓸히 누워있는 모습은 마치 늙고 지치고 병들고 맥이 진한 로인이 앙상한 두 다리를 뻗어버리고 저세상으로 간 사체를 방불케 했다. 이 철길은 조양천으로부터 개산툰에 이른다 하여 조개선이라 불렸다. 지난 세기 30년대 초에 중국을 장기적으로 침략하고 략탈하기 위하여 일본제국의 점령하에 있던 동북의 남만철도회사에서 설계하고 부설한 철길로서 1933년 11월에 정식 통차 하였으니 이젠 80고령이 넘었다. 조개선은 조양천에서 장도선과 련결되여 전국 각지로 통할 수 있었다. 건국 전과 건국 초기에는 린국과도 직접 기차가 통했었다. 길이 60키로메터에 간이역이 5개 밖에 안되는 이 철길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짧은 간선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력사는 가장 오랜 철길 중의 하나였고 또한 국제선로이기도 했다. 철길을 마을 앞에 두고 우리는 세상에 고고성을 울려서부터 기차의 기적소리를 들으며 자랐었다. 저녁이면 그 기적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잠들었고 새벽이면 아침을 알리는 수탉의 울음소리로 알고 깨여나군 했었다. 녹쓴 철길 우에 올라서니 유치원 때 손에 손 잡고 씩씩하게 노래 부르며 이 철길을 따라 웃마을 유치원에 놀러 가던 일이며 어른들의 뒤를 따라 철길 너머 산기슭에 있는 렬사비로 오르내리던 기억이 새롭다. 철부지 때엔 레루에 올라서 빨리 걷는 시합도 해보았고 침목을 세며 빨리 달리기 경색도 해보았다. 애들이 편을 나누어 철길 량옆에 엎드리여 군대놀음도 해보았고 기차가 올 때면 남몰래 동전을 철길 우에 놓아 납작해지게 하는 장난도 쳐보았었다.  한마디로 철길은 우리들 동년의 즐거운 놀이터이기도 했다. 그 때는 양로공들이 날마다 시간대로 오르내리며 철길을 점검하고 깨끗이 청소하다 보니 철길의 자갈들도 하나 흐트러짐이 없었고 철길 옆의 오솔길들도 깨끗하게 정비되여있었다. 보드라운 잔모래가 깔린 철길 량옆 오솔길에는 깜찍하고 이쁜 노랗고 빨갛고 파란 꽃들이 소담소담 피여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관리하는 사람마저 없어 오솔길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무쇠우박을 맞은듯 여기저기 크고 작은 홈채기들로 울퉁불퉁했다. 철길의 자갈들도 오르내리는 짐승들의 발길에 채워 제멋대로 여기저기 흩어져 나뒹굴었다. 지난날 그처럼 흥성했던 철도연선 마을에는 이젠 이 철길 옆 오솔길로 손 잡고 명랑하게 노래하며 걸어갈 유치원 어린이들도 없다. 우리의 동년처럼 장난 칠 애들도 없다. 철길은 지난날의 생기를 잃은 지 오랬고 인간들과의 정이 멀어진 지도 옛날이였다. 1964년 내가 열세살 나던 해에 중학교 입학시험을 쳐놓고 갈 곳도 별로 없는지라 집에서 한가하게 놀고 있는데 길건너에 사는 작은집 어머니가 찾아와 자기네 둘째와 함께 개산툰 걔들 외가집에 놀러 가지 않겠는가고 했다. 작은집 어머니의 형제들과 친척들이 개산툰화학섬유팔프공장에 출근하는 줄 나도 귀동냥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그 때는 그렇게 큰 국유기업에 출근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대단히 부러워하는 일자리였다. 나에게는 사돈집에 놀러 가는 꼴이였으나 기차를 타고 간다는 소리에 귀가 벌쭉해졌다. 마을 앞으로 달려가고 달려오는 파란 렬차나 검은 화물차는 수없이 보았어도 아직 한번도 기차를 타보지 못했던 연고였다.  나는 동갑짜리 사촌동생과 함께 8리 길을 걸어 공사구역 한쪽 끝에 있는 연동역(동성용진역)에 가 멀리에서 바라보기보다 엄청 육중한 렬차에 올랐다. 렬차가 서서히 떠나자 나무와 전선대가 휙휙 지나가고 그 큰 산과 벌들도 통채로 달려왔다가는 그대로 물러가는 것이 하도 신기하여 렬차를 타고 가는 내내 머리를 차창 밖에 내놓고 달리고 춤추는 바깥세상을 구경하다 보니 개산툰에 이르렀을 때에는 머리에 석탄재가 바글바글했었다. 이렇게 나는 이 조개선에서 인생의 첫 렬차를 타보았다. 중학교 시절에는 숱한 학생들과 함께 이 렬차를 타고 로투구 만인갱 참관을 가기도 했고 녀동생이 시집갈 때에는 여러 친척들과 함께 이 렬차를 타고 둘러리로 조양천에 가기도 했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온 후에는 이 철길을 넘나들며 일터로 나갔고 회의하러도 다녔다. 이 철길 우에서 석탄재를 뒤집어쓰고 정해진 시간 안에 건조실 석탄을 부리우느라 청춘의 비지땀을 흘리기도 했다. 여름이면 이 철다리 밑 강에서 목욕도 하고 물고기잡이도 했으며 겨울이면 바글거리는 애들과 함께 썰매도 타고 스케트도 탔었다. 홍수가 져 몇번이나 마을을 휩쓸고 가던 강도 지금은 실개천으로 변해버려 물고기란 사돈의 팔촌도 볼 수 없고 썰매를 탈 만한 얼음조차 얼굴 수 없다. 물론 썰매 탈 아이들도 없다. 개혁개방 이후 조개선의 종점에 있는 개산툰화학섬유팔프공장도 시장경제의 충격으로 갈수록 내리막길을 걷다가 나중에는 개혁의 칼도마에 오르게 되였다. 그런데 공장이 외지기업에 팔려가면서 종업원들의 로임문제와 양로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지 못하여 종업원들이 의견을 제기하다 못해 나중에는 수천명이 이 철길에 드러누워 항의하여 세상을 놀래우기도 했었다. 공장이 팔려간 후에도 한시기 시장경제의 진통으로 끙끙거리다가 더는 버틸 수 없어 결국 문을 닫는 운명을 면치 못했다. 공장문이 닫기면서 변강의 끝자락에 있는 이 공장에 원목과 석탄을 쉼없이 수송하던 화물차도 자취를 감추었다. 이런저런 원인으로 렬차를 타고 다닐 사람들도 갈수록 줄어들어 렬차마저 사라졌다. 이 공장으로 하여 흥성하던 개산툰진도 날로 쇠퇴해져 지금은 지난날의 생기를 찾아볼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외국으로 도시로 뿔뿔이 떠나갔다. 지난 20여년간 사라진 것은 기차만이 아니였고 녹쓴 것은 철길만이 아니였다. 철길 주위에 있던 많은 것들도 따라서 사라지고 ‘녹쓸고’ 쇠퇴해졌다. 저기 철길 아래에 있던 새벽농민대학도 시장경제 도래와 함께 장기간 시시콜콜 앓음소리를 내다가 별수없이 2011년 초에 연길의 직업고중에 합병되여 옮겨갔다.  연변의 첫 초급농업사 책임자이며 전국로력모범인 김시룡의 창의하에 1958년 대약진시기에 전국에서 제일 먼저 건립된 농민대학으로 중앙수장들의 높은 중시를 받았었다. 나라의 투자로 4층 학교 청사를 짓고 많은 농업기술 인재들을 양성하기도 했었다. 농민대학이 잘 나갈 때에는 전 현 각 인민공사들에서 싹수가 있는 농업 기술인재들을 이 학교에 보내여 벼재배, 과수재배, 축산업 등 전문 농업기술을 배우게 하였다. 학생들은 졸업 후 본지방에 돌아가 골간 기술인재로 활약하면서 지방의 농업생산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었다. 나의 둘째누나도 1960년대 초에 이 학교를 다녔는데 소학교에 다니던 내가 한번은 누나를 찾아갔다가 학교식당에서 새하얀 이밥을 큰사발에 무둑히 담아주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개혁개방 이후 시장경제 발전과 농촌생산 경영체제 개혁의 변화, 알곡을 비롯한 농부산물 가격의 하락으로 농업기술 인재 양성을 취지로 하던 새벽농민대학 학생 원천은 갈수록 크게 줄어들었다. 숨져가는 학교를 살려보려고 학교지도부와 상급 해당 부문에서는 나라와 외국인들의 도움으로 영어학과와 컴퓨터학과 등 사회에서 환영하는 새로운 학과를 설치하며 여러모로 모지름을 써보기도 했으나 결국은 얼마 지탱하지 못하고 학교 설립 50여년 만에 문을 닫게 되였다. 전국에 이름을 날리던 전국의 첫 농민대학은 시장경제의 충격으로 이렇게 력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 지금은 ‘지치고 병들고 녹쓴’ 텅 빈 건축물들만 저렇게 진눈까비 속에 쓸쓸히 웅크리고 있다. 이 철길을 마주하고 있던 저기 보이는 중학교도 문을 닫은 지 오랬다. 연길현 제11중학교 명칭을 가진 중학교는 우리가 다닐 때까지만도 학생이 500명 가량  되였는데 지금은 학생들 종적조차 없어졌다. 그 서쪽에는 중학교에 붙지 못한 학생들로 농업중학교를 꾸렸는데 학생 수가 우리 중학교 버금이 되였다. 그런데 개혁개방 이후 학생 근원이 해마다 줄어들어 중소학교가 합병되여 겨우 운영되던 것이 그것도 얼마 안되여 문이 닫겨버렸다.  우리가 다닐 때 공사 중심소학교는 민족련합학교로서 학생이 500명 가량 되였고 조선족학생이 80%이상 차지했다. 연길현(후에 룡정시로 개명)에서도 인구가 가장 많고 면적이 가장 큰 공사여서 이만큼이라도 지탱했지 작은 향진의 학교들은 모두 문을 닫은 지 오래다. 나라의 혜택으로 몇년 전에 중학교 청사는 새로 지었지만 학생들은 하나도 없이 괴괴하기만 하다. 듣자니 뭐 로인활동실로 되였다나. 텅 빈 새 청사보다도 어쩐지 울창한 백양나무 그늘 속에서 남녀학생들이 바글바글 희희락락 뛰놀던 운동장과 낡긴 했어도 정들었던 그제날의 중학교 청사가 우렷이 안겨오며 가슴이 애절해났다.  이 철길을 앞에 두고 있는 나의 고향마을도 마찬가지였다. 연변의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산아제한 정책으로 출생률이 대폭 낮아진 데다 개혁개방 후 젊은이들과 아낙네들이 거의다 외국으로, 도시로 빠져나가다 보니 100여호 되는 큰 마을이 점차 황페해져갔다. 비여있는 집들이 갈수록 늘어났고 대다수 논과 밭들이 외지 사람들 손에 넘어갔다. 그저 저세상이 오래지 않은 이 땅의 로영웅들이 쓸쓸히 고향을 지켜가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자랄 때까지만도 얼마나 활기찬 마을이였던가. 청년들이 우글우글하고 학생들이 바글바글했었다. 저녁이면 마을 구락부에서 흥겨운 손풍금 소리 울려나오고 피끓는 청춘남녀들의 활기찬 노래소리가 별들이 도글거리는 밤하늘에 울려퍼졌었다. 그런데 지금은 낮이나 밤이나 쥐죽은 나라란다. 사람 사는 마을 같지 않단다. 마을 앞쪽에 있던 원래의 철공소와 정미소도 언녕 외지사람에게 팔려갔다. 그 통에 룡정 으로 통하는 큰길과 이어졌던 마을의 중심길도 토성에 둘러막혀 고향 로인들은 비좁은 옆길로 에돌아다녀야 했다. 굴러온 손님이 주인행세를 하고 마을을 개척한 주인들이 손님 쪽으로 밀려났다. 황페해지고 쓸쓸해져가는 마을은 우리 마을 뿐이 아니였다. 철로연선에 있는 동쪽켠의 동성, 연동이나 서쪽켠의 홍성, 태평, 대흥 등 조선족 마을들도 마찬가지였다. 배에 곱이 차고 수시로 술잔을 들 수 있는 지금은 되려 사람들이 고독하고 쓸쓸함을 느끼며 한숨소리만 높아가고 있다.  해방 직후에는 이 철길이 누워있는 세전이벌에서 길림성의 첫 호조조와 동북의 첫 인민공사가 고고성을 울렸었다. 전국로력모범 김시룡, 전국3.8붉은기수 리옥금, 성귀향지식청년본보기 려근택, 전국림업모범 림관동, 성로력모범 박봉금, 연변10대우수청년 마옥금 등 많은 선진과 모범인물들이 이 세전이벌에서 배출되였었다. 정치 돌출 세월에는 전국모주석저작학습기준병 황순옥을 배출하여 전국에 둘도 없는 ‘산골의 녀수재’로 천산남북에 명성을 떨치기도 했었다.  지난 세기 80년대 초에 주당위 서기였던 조남기동지의 지지와 지도하에 전국의 첫 로인절도 이곳 동성용진에서 태여났다. 이로써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에서 자기의 청춘을 이바지해온 연변의 로인들은 당과 정부의 배려로 자기들의 명절을 갖게 되였으며 수십년이 지난 지금은 가장 활기 띤 명절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였다. 하지만 개혁개방을 맞으며 지난날의 명성과 영예는 가뭇없이 사라졌다. 모든 것은 시장경제 속에서 갈팡질팡하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렇게 수십년이 지나도 성내거나 전국은커녕 시 안에서도 경제발전으로 이름이 날 만한 회사도 없고 크게 돈 번 인물도 없다. 외국에 가 막일로 돈을 벌어왔다는 사람들도 확대재생산에 돈을 쓰는 사람보다 ‘신선놀이’에 돈을 탕진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계급투쟁과 정치돌출을 위주로 하던 계획경제 시대에는 전국과 성, 주에 앞장선 ‘신생사물’들과 선진, 모범 인물들이 연변에서도 가장 많이, 가장 빨리 출현하더니 돈을 벌어 잘살라는 시장경제 시대에 들어서니 왜 남의 꽁무니를 따르고 있는 것일가? 다른 곳에서는 경제발전과 관광사업 발전을 위하여 일반철도는 물론 고속철도도 갈래갈래 신설하는데 이곳에서는 달리던 기차도 기적소리 끊은 지 오래다. 그렇다 할 남다른 자원도 없고 종점역 국유기업도 문을 닫고 고향사람들도 팍팍 줄어드는데 기차가 맥빠진 신음소리를 울리며 계속 달릴 수 있겠는가. 철길 우의 귀익은 기적소리 사라지니 철길 주위의 눈익은 모든 것이 활기를 잃어가는듯했다. 철길이 녹쓰니 철길 주위의 모든 것에도 ‘녹’이 쓸고 있었다.  언제면 이 철길 우에서 귀익은 그 기적소리가 다시 울려올 수 있을가? 언제면 철길 주위의 눈익은 모든 것이 그 기적소리에 따라 지난날의 활기를 되찾을 수 있을가? 언젠가는 린국과의 대문이 자유로이 열려지면 기차의 기적소리 다시 울려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면 그 기적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백여년간 이 세전이벌을 개척하고 가꾸어온 원주민들의 후손들이 아닐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 생각이 뇌리를 치니 마음은 왜 이렇게 서글퍼지는 것일가. 이 세전이벌의 곳곳에 나의 청춘의 발자국이 찍혀있고 나의 정열의 땀방울이 슴배여있어서일가? 나의 청춘의 꿈도 이 철길을 따라 뻗어나갔던 연고에서일가? 나는 쌀쌀한 바람에 흐느낌 소리를 내는 황초 속에 덮여 죽은듯이 누워있는 미라이 같은 침목을 밟으며 쓸쓸히 거닐다가 맥없이 녹쓴 철길에서 내려섰다. 이젠  다시는 고령로인의 사체 같은 이 철길을 밟고 싶지 않았다. 걸어봐야 마음만 쓰려올  뿐이다. 지금은 동년시절의 즐거움과 기쁨을 이어갈 천진란만한 애들도 없고 청춘시절의 동경과 희망을 이어갈 활기찬 젊은이들도 없다. 이제 고독과 쓸쓸함 속에서 한탄과 실망감으로 살아가는 로인들마저 하나 둘 저세상으로 가면 마을은 어떻게 될가? 그렇다고 내가 가서 고향마을을 지켜줄 재간도 용기도 없다. 범아재비가 력사의 수레바퀴를 막을 수 있겠는가. 금전소리 절컥거리며 줄기차게 달리던 기차가 숨소리를 잃은 것도 시장경제의 산물일 것이다. 마을사람들이 더 잘살아보겠다고 외국으로 도시로 빠져나가는 것도 어쩌면 시대 발전의 세대적 탈피과정일 것이다. 물은 내리흐르고 사람은 올리산다 하거늘 모두가 돈 잘 벌 수 있는 곳으로, 살기 좋고 편한 곳으로 떠나가는 걸 누가 그르다 하고 누가 막을 수 있으련만 정들고 눈익은 지난날의 많은 것이 사라지고 잃어지는 것은 마음을 허비기엔 족했다. 지난날의 모든 것이 있을 때에는 소중한 줄 모르다도 언젠가 이렇게 없어지고 사라지고 잃어져서야 그 때의 그 소중함을 통절하게 느끼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가?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고향마을이 주당위와 정부에서 진척시키고 있는 연길-룡정-도문 연룡도발전계획 안에 들어 마을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동경으로 가슴들이 새롭게 부풀어있다는 점이다. 고향마을의 새로운 도약적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음에 마음은 다소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정든 고향이여 부단히 발전하고 번영하라. 이 땅을 억척스레 가꾸며 세대로 구슬땀을 휘뿌려온 고향의 친인들이여 부디 행복하시라.  출처:2018 제6호
5    [수필]새빨간 거짓말과 새하얀 거짓말 댓글:  조회:591  추천:0  2019-07-15
새빨간 거짓말과 새하얀 거짓말 허룡석     사람을 속이는 거짓을 불문에서는 망어妄语라고도 한다. 거짓은 고의적으로 진실한 사실을 진실하지 않은 것처럼 꾸미거나 없는 일을 진실한 것처럼 분칠하여 듣는 사람들을 기편하는 행위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거짓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시비를 혼돈하게 만들고 시선을 흐리워 그 진가를 분간하지 못하게 만들어 궁지에 빠지게 한다. 하지만 거짓이라 하여 모두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유럽의 어느 나라 속담에는 “거짓말에도 새빨간 거짓말과 새하얀 거짓말이 있다”고 전한다. 새빨간 거짓말은 음특한 마음을 품고 사람들을 속여 자기의 그 어떤 목적에 이르려는 나쁜 의도가 숨어있고 새하얀 거짓말은 선량한 마음을 품고 사람 들에게 그 어떤 희망과 용기와 위안을 주기 위한 좋은 의도가 담겨있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새빨간 거짓말에는 악의가 숨겨져있고 새하얀 거짓말에는 선의가 깃들어있다 는 것이다. 기나긴 인생길을 숨가삐 톺아오다 보면 우리 사회에서도 새빨간 거짓말과 새하얀 거짓말이 엄연히 병행하고 있음을 심심히 느끼게 된다. 사람을 상대하며 살아가는 인간사회는 복잡다단하다. 인간생활에서 많은 사람들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고저 서로 리해하고 양보하고 도우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못나도 잘난 척, 없어도 있는 척, 심술궂어도 착한 척, 배운 것이 없어도 박사라고 새빨간 거짓말과 거짓행위를 하며 사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속으로 미워하는 사람도 겉으로는 아니 그런 척하고 자기보다 잘되고 잘나가는 사람을 시기질투하면서도 아닌 척하며 지어 잘못되기를 은근히 바라면서도 겉으로는 “계속 잘되기를 바라오.” 하며 마음에 없는 새빨간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회사에서는 암암리에 서로 물고 뜯으면서도 안 그런 척, 상사에게 불만과 의견이 가득하면서도 겉으로는 추어주며 아부하기도 한다.  사회적으로도 아닌 척 새빨간 거짓말과 거짓행위를 하는 사례도 적지 않은 것 같다. 도적은 도적질하고도 안한 척, 간상배는 돼지고기, 소고기, 물고기에 물을 주입하고도 안한 척, 장사군은 근량을 속여먹고도 안 그런 척, 곡식과 남새에 화학비료와 살충제를 쓸 대로 쓰고도 “세상에 둘도 없는 록색식품이요” 하고 새빨간 거짓말을 한다. 어떤 ‘부모관’들은 자기 관할 분야 실무에 문외한이면서도 전문가인 척, 해당 정책과 규정, 법규를 전혀 모르면서도 아는 척 새빨간 거짓말을 탕탕 쳐대는가 하면 “산속에 깊이 들어갈수록 펄펄 뛰는 물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다.”는 어처구니 없는 지시를 하고서도 중요한 지시를 한 척하고 사업에서 엄중한 실책을 빚어내고도 영원히 정확한 척한다. 어떤 부패 간부들은 낮에는 사람 말을 하고 밤에는 꺼리낌없이 귀신 짓을 하기도 한다.  만일 신성한 공권력을 행사하는 정부부문에도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미는 새빨간 거짓말과 거짓행위가 있다면 그것은 곧바로 백성들의 피해로 이어지게 된다. 그‘새빨간’이 심하면 심할수록 백성들의 신임을 잃게 된다.  아닌 척하며 산다고 하여 모두가 새빨간 거짓말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희망과 위안을 주는 아름다운 거짓말도 적지 않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애들을 키우고 부모를 모시고 가정을 영위하며 고달파도 안 그런 척, 아파도 안 아픈 척하기 일쑤다. 아버지들이 돈벌이에 힘들어도 웃음 짓고 슬퍼도 술 한잔으로 달래고 그 어떤 아픔과 고통이 있어도 속으로 눈물을 떨구며 남편으로, 아버지로서의 세대주 책임을 다하려 왼심을 쓴다. 다만 가정을 위하여, 자식들을 위하여 부모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 그런 일이 없는 척 ‘거짓’을 할 뿐이다. 이러한 의력과 품성, 노력은 자식들의 감동과 존경을 자아내고 긍정적 영향을 주기도 한다.  우리는 흔히 겉현상에 미혹되여 진가를 분별하지 못할 때가 있다. 매일 웃으며  사는 사람은 슬픔이 없는 줄로 알고 항상 씩씩해보이는 사람은 아픔이 없는 줄로  안다. 언제나 강해보이는 사람은 눈물이 없는 줄로 알고 언제나 밝아보이는 사람은 고통이 없는 줄로 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곁사람들을 즐겁게 하려고,  곁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려고 안 그런 척하는 것임을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을 뿐이다. 이러한 위대함을 새하얀 거짓말과 새하얀 거짓행위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는 거짓말도 있다. 이를테면 마을로인을 보고 깍듯이 인사하며 “언제 보나 이렇게 건강해보이십니다. 갈수록 젊어지시는 것 같습니다.” 하면 로인들은 즐거운 웃음을 짓는다. 녀성들을 보고는 “와, 점점 젊어지고 이뻐지시네.” 하면 겉으로는 손을 내저으면서도 속으로는 은근히 기뻐하는 것 등이다. 인사받는 분들은 그것이 뻔한 거짓말임을 알면서도 고깝게 듣지 않는다. 만일 보는 그대로 솔직하게 “야, 그간 보지 않았더니 어째 이렇게 폴싹했슴둥? 전혀 몰라보겠습꾸마.” 혹은 “어디 몹시 아픈 것 같구만. 얼굴색도 안 좋구, 주름도 늘구, 머리두 많이 빠지구. 로친이 다됐네.” 하면 듣는 이는 기분이 상해할 것이 분명하다. 때론 악의 섞인 진실보다 선의 있는 거짓이 사람들한테 쉽게 받아질 때도 있는 것이다. 새빨간 거짓말이나 새하얀 거짓말이나 모두 허위에 속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담겨있는 의도가 부동하니 나타나는 결과도 확연히 틀린다.   그 어떤 위인이나 평민이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허위적인 일면이 있다고 한다. 다만 시대와 처한 환경에 따라 깊고 옅음의 차이와 높고 낮음의 구별이 있을 뿐이라 한다.  사람 사는 사회에서 살아남자면 자연히 경쟁이 생성하게 되며 그 경쟁은 마음의 경계와 능력의 차이와 련계된다. 자기의 능력이 남을 따라가기 어려우면 본능적으로 시기와 질투가 생기게 된다. 자기의 능력으로 일정한 욕심은 챙겼지만 더 큰 욕심을 챙기려면 저도 모르게 마음 심처에 숨어있던 허위가 뛰쳐나오게 된다. 왜냐 하면 뛰는 놈 우에 있는 나는  놈을 따라잡고 릉가하려면 정상적 경로로 안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약육강식하는 경쟁사회에서 성실한 마음과 진실한 행위로만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도 허다하다. 지난날의 력사를 돌이켜보아도 성실하게 살고 진실하게 일하겠다는 사람들이 비판받고 처분받고 감옥에 가고 목이 잘린 사례들이 수두룩하다. 이와 반면에 바람 따라 돛을 달고 권위자에게 달라붙어 자기 마음을 어기면서라도 새빨간 거짓말을 하며 허위적으로 산 사람들이 중용되고 높이 벼슬하고 부귀영화를 누린 사례도 적지 않다. 성실하게 살고 진실하게 일하려는 사람들은 모두 관점 있고 능력 있고 마음가짐이 바른 인재들이다. 사람들의 허위와 위선은 본인의 사상과 도덕을 기초로 하지만 사회환경과 제도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허위와 위선이 발 붙일 수 없는 사회라면 성실과 진실이 성행할 것이고 허위와 위선이 살판치는 사회라면 성실과 진실이 발 붙일 자리가 없기에 살아남자면 자기를 위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나무는 바로 서있으려 하나 바람이 못살게 굴면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바다는 잔잔히 잠자려 하는데 태풍이 불어치면 세찬 파도가 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떤 경우에는 진실이 미움을 살 수 있고 허위가 환심을 살 수 있다. 진실하게 살든 허위적으로 살든 그 시대의 대환경에 적응할 줄 아는 사람이 살아남고 적응할 줄 모르면 도태될 수 밖에 없게 된다.  엄정히 법이 통하는 사회면 일이 생겨도 공평과 공정을 찾을 수 있고 진리가 통하는 사회라면 사람들의 신앙도 곧바른 것이다. 반면 권력이 살판치는 사회라면 억울한 사건을 피면할 수 없게 되고 금전이 만능인 사회에서는 신앙도 허무히 무너지게 된다. 허위가 살판치는 사회에선 진리도 괴론이 되고 믿음과 신용도 사라지게 된다. 법은 멀고 주먹이 가깝거나 법은 허울 뿐이고 ‘지시’가 살판치는 사회라면 그 누구도 안전감을 찾을 수 없게 되며 온 사회가 가면구를 써야 하는 악과를 초래할 것이다.  성실한 사람은 새빨간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성실하지만 무지하면 쓸모가 없고 지식과 능력은 있으나 성실하지 못하면 천만 위험한 것이다. 성실과 능력은 일종 힘의 상징이며 한 사람에게 있어서 고도로 되는 내심적 공정감이며 존엄감이다.   그 어떤 죄악이든지 허위와 배신보다 수치스럽고 가증한 것은 없다고 한다. 그 어떤 땅덩어리에서나 허위와 기편은 푸르른 잡초처럼 자란다고 한다. 잡초는 곡식보다 생명력이 강하다. 곡식은 심지 않으면 자라지 않고 가꾸지 않으면 잡초에 먹혀버린다. 잡초는 심지 않아도 절로 자라며 가꾸지 않아도 왕성하게 키돋움한다. 곡식을 키우려면 잡초를 뽑아버려야 하듯 성실과 진실을 키우려면 허위와 배신을 눌러버려야 한다. 모든 그릇된 것들은 사회의 제도와 규제에 따라 숙어들거나 기승을 부린다.   중국의 꿈을 실현하려는 이 사회에서 가면과 허위가 갈수록 숙어들고 진실과 성실이 허리 펴는 문명하고 조화로운 사회가 보다 훌륭히 이룩되기 바라는 마음이다. 출처:2018 제6호
4    [수필] 아픔이 진주를 낳는다 댓글:  조회:1172  추천:0  2019-07-15
아픔이 진주를 낳는다 허룡석       시대가 미증유의 발전을 가져오고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전에없이 향상됨에 따라 생활필수품에 대한 요구가 날따라 높아가고 있다. 삶이 다채롭고 여유로울수록 가지가지 장식품에도 각별한 호기심과 점유욕을 갖고 있다. 백세시대에 나이와 상관없이 자신을 보다 우아하고 품위있고 아름답게 단장하려는 것이 문명시대 문명한 생활의 일환이기도 하다. 그 선호도가 가장 높은 장식품 중의 하나가 바로 진주이다. 진주는 다만 상품가치가 높은 진귀한 보석이라 하여 우러르는 것만이 아니다. 그 내면에는 훨씬 더 미묘하고 경탄스러운 삶의 철리가 내포되여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시집 가는 딸에게 친정어머니가 진주를 선물하는 것이 오랜 풍습으로 되여있다고 한다. 많고 많은 값지고 귀중한 보석 중 왜 하필이면 진주를 선물하는 걸가? 진주가 함유하고 있는 고유의 값진 가격보다도 생명체가 오랜 시간 아픔과 고통을 견뎌낸 유일한 인내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란다. 결혼 후 삶에 상상 밖의 그 어떤 아픔과 고통이 닥치더라도 조개마냥 끈질긴 인내력으로 그 아픔과 고통을 이겨가며 사랑과 행복의‘진주’를 꾸준히 다듬어가라는 뜻깊은 의미에서였다. ‘대양의 녀왕’이라 불리는 진주는 수많은 광물성 보석과는 달리 하나의 생명체가 만들어낸 진귀한 보석이다. 천연적 진주는 바다 밑에 사는 특정한 종류의 조개에서 나온다고 한다. 다른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뭔가를 먹어야 살아갈 수 있는 조개가 먹이를 먹으려고 입(껍데기)을 벌릴 때에 간혹 부주의로 미세한 모래알까지 흡수하게 된다. 영원히 멀리했어야 할 불청객 이물질은 그로부터 부드럽고 안온하던 조개속을 파고들며 조개를 점차 괴롭히기 시작한다. 조개에 ‘병’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조개한테는 모래알을 끄집어낼 수 있는 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래를 털어낼 방법도 없다. 생명을 해치는 이‘암세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력을 다하여 막아낼 방도를 대야 했다.  조개껍질의 바로 밑에는 외투막이라는 막이 오투마냥 온몸을 둘러싸고 있다. 특이한 이 외투막은 조개가 흡수한 음식물의 미네랄을 리용하여 조개의 껍질을 만드는 물질을 배출한다. 조개는 자신의‘건강’을 챙기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이 귀중한 외투막을 일부 투입시켜 차츰 모래알을 층층이 감싸게 된다. 모래가 완전히 외투막에 싸여 더 이상 조개를 괴롭히지 않게 되기까지는 인간의 열달 잉태도 아닌 장장 7년이란 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그러니 가냘픈 조개가 기나긴 7년간이나 모래란‘암세포’의 시달림을 받았다는 말이 된다. 그것이 바로 조개가 장기간의 아픔을 감내하며 만들어낸 귀중한 진주이다. 병든 개한테서 값진 구황이 나오고 병든 소한테서 귀중한 우황이 나오듯 병든 조개한테서 진귀한 진주가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병들었다 하여 모든 ‘환자’가 진품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속에 진주가 들어있는 병적 조개의 모양은 다른 정상 조개와 완연히 다르다고 한다. 진주조개는 모양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아래우 껍데기도 잘 맞물리지 않는다. 한마디로 못생기고 꼴불견이라 한다. 부단히 두터운 껍질을 만들어야 할 외투막을 갈라내여 ‘암세포’를 막아내야 했으니 어떻게 다른 조개들처럼 단단하고 미끈한 정상적 껍데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못생긴 조개일수록 최상급의 진주가 들어있을 확률이 높다고 한다. 바다의 해류도 ‘재간둥이 잘생긴 놈 없다’는 인간세상의 섭리와 조화를 이루는 것인가? 천연적으로는 조개 3만개당 오직 20개 좌우의 조개만이 진주를 품고 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상품가치가 있는 진주는 3분의 1도 안된다고 한다. 은은하고 우아한 광채로 사람들의 환심을 끄는 진주는 많고 많은 해류들 속에서도 보잘 것 없는 조개가 만들어낸 분비물이다. 오랜 시간을 두고 고통을 참아가며 저항과 고뇌의 과정을 견디여낸 조개의 끈질긴 인내의 결정체이기도 하다. 고통으로 만들어낸 분비물이 이토록 아름답기는 해도 조개는 애초부터 그 고통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 고통을 안지 않으면 안되였다. 인간도 복잡다단한 인생길에서 이런저런 삶의 아픔과 고통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지만 본의 아니게 그런 아픔과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될 경우에 봉착할 때도 있다. 사람이 평생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의 삶 가운데도 생각 밖의 ‘모래알’, ‘이물질’이 침투하여 가끔씩 우리를 괴롭히기도 한다. 때론 그 아픔과 고통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인간세상이 저주스럽도록 심신을 괴롭일 때도 없지 않다. 이런 불행에 봉착했을 때 그것을 하나의 도전으로 받아들여 인생의 진주를 상생하느냐 아니면 그 고통과 아픔에 숙어들어 파멸의 길을 걷느냐는 각자의 의지와 마음가짐에 달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육체나 마음의 아픔 속에서 진주가 탄생하듯 육체나 마음의 상처는 때로 새로운 나를 찾아 자아를 확립하는 소중한 자극이 되여 탈태환골시킬 수도 있다. 이 세상에 아픈 상처와 모진 고통이 없이, 시련과 불행이 상존하지 않은 성공이란 있을 수 없다. 수많은 위인들이 바로 그런 아픔과 고통을 이겨내며 성공의 봉우리에 올라 인생의 ‘진주’로 세상에 빛을 발산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아픔과 고통을 안고 있다 하여 모두가 ‘진주’로 태여나는 것은 아니다.  ‘최상급의 진주’로 되기는 더욱 어렵다. 왜냐 하면 약자는 역경의 소용돌이에 쉽게 매몰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조개가 진주를 생성하지 못하듯 인간도 남달리 뛰여나게 성공한 사례는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멀리는 그만두고라도 우리 민족의 불굴의 항일투사이며 조선족문학의 대부일 뿐만 아니라 중국소수민족문학 거장으로도 받들리는 김학철선생도 그런 아픔과 고통을 겪으며 인생의 진주, 문학의 진주를 탄생시킨 전형적 대표의 한분이 아닐가 싶다.  가렬처절했던 항일전쟁 시기 최후의 분대장으로 일제침략자들과 영용히 싸우다 부상을 입고 어쩔 수 없이 포로가 되였다. 일본에 압송되여가서는 한쪽 다리까지 잘리며 감옥에서 갖은 시달림을 받았다. 일본 나가사끼감옥에서 4년 남짓한 감옥살이, 전향서를 쓰지 않는다고 총상 입은 다리를 치료해주지 않아 저가락으로 상처에 생긴 구데기를 집어내면서 그 아픔을 잊기 위해 줄기차게 독서를 했었다. 공화국 창립 후에는 남다른 명석한 두뇌로 사회발전과 사회현상에서 나타나는 부정과 비리들을 독립적인 사고방식으로 투시하고 질호한 탓으로 반우파투쟁, ‘문화대혁명’ 등 련속부절한 정치운동을 거치면서 그 분이 겪은 고통과 아픔이 누구보다도 훨씬 많고 컸음을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 ‘문화대혁명’ 중 현행 반혁명으로 판결받고 연길구치소와 추리구감옥에서 장장 10년간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린 기구한 인생, 평범한 사람들은 그 시련과 고통을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한생을 살다 보면 불행이 행복보다 두배는 더 많다고 하지만 김학철선생이 겪은 불행은 아마 열배도 더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선생은 ‘크고 작은 모래알’, ‘가지각색 이물질’이 평온하던 삶에 침투되여 인간으로서 참기 어려울 지경으로 괴롭히고 파먹어도 그 아픔과 고통에 비굴하게 숙어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도전으로 간주하고 자신만의 ‘외투막’으로 자신을 보호하면서 완강하게 끝까지 견뎌내였다. 추리구감옥의 경관마저도 “다른 령감들은 그 나이에 퍽퍽 죽어나가는데 그 령감은 외다리로 끄떡없이 살아있다. 왠지 아는가? 그 추운 겨울날씨에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랭수마찰을 하기 때문이다. 쯧쯧, 무슨 놈의 의지가 그리도 강할가!”고 감탄해마지 않았다지 않는가. 파란만장한 인생로정과 극한적인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인간승리의 신화를 창출한 그의 신념과 의지는 세인들의 감탄과 존경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다.  개혁개방을 맞아 가지가지 훼멸적 ‘정치감투’를 벗어버리고 또다시 인생의 새 삶을 찾았을 때에는 그 고통과 아픔을 자양분으로 만년에 창작의 필을 들고 문학의 수많은 반짝이는 ‘진주’를 탄생시켜 우리 민족 문학의 은하계를 보다 아름답게 수놓아갔으며 중국 여러 민족 문학의 보물고에도 핍진한 한페지를 수록하였다.  중앙정부의 대폭적 지원으로 내몽골사범대학 성락교구 안에 세워진 전국의 유일한 중국소수민족문학관 앞광장에는 중국 전근대적 여러 소수민족문학의 대표적 거장들의 동상이 숙연히 세워져있다. 그 가운데는 조선족문학의 유일한 대표적 거장으로 김학철선생의 동상도 세워져있다. 쌍지팽이를 짚고 한쪽 다리로 서서 저 멀리 앞을 응시하는 김학철선생의 강인한 모습은 죽어도 굴하지 않는 항일투사의 기백을 그대로 구현하였으며 우리 민족 문학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서는 어떠한 난관도 박차고 나아가라고 후배들을 고무격려하는듯하다. 김학철선생은 그야말로 문학의 진주, 인생의 진주로 중국소수민족문학의 광야에 우뚝 서있는 것이다. 불에 달군 쇠가 더욱 강해지고 끊겼다 다시 잇긴 뼈가 더욱 굳고 탄탄하듯 인생의 굴곡에 시달리고 마음의 상처로 시련을 겪은 사람이 평온하게 살아온 사람들보다 훨씬 크고 장려한 성공을 약속받는다는 것이 세상리치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문학분야에서 ‘분노가 시인을 낳고 불행이 작가를 낳는다’는 격언도 나온 것일가.  김학철선생이 만일 그런 아픔과 고통을 겪지 않았다면, 혹은 겪기만 하고 완강한 의력으로, 삶의 도전으로 그 아픔과 고통을 이겨내지 않았더면 그 후에 그처럼 훌륭한 문학의 ‘진주’들을 산생시킬 수 있었을가? 자신도 인생의 진주로 태여날 수 있었을가? 한국에서도 25년간 각고의 노력으로 력사적인 대하소설 《토지》를 써낸 박경리를 불행이 낳은 최고의 작가로 평하고 있다. 중국문단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과시한 장현량이나 진충실 같은 이름난 작가들도 모두 나름 대로 크나큰 아픔과 고통과 불행을 겪은 작가들이다. 그들은 이미 고인이 되였지만 그들이 남긴 문학진주는 후세에도 그 빛을 길이 뿌리게 될 것이다.  평범하고 안온하게 살아가는 조개한테서는 진주란 ‘아픔의 결정체’가 상생하지 못한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시련과 고통은 그 사람을 파멸시키는 독약이 아니라 보다 튼튼히 성장시켜 장차 보다 큰 성과를 따낼 수 있는 성공한 인재가 될 수 있는 자양분으로 곰삭이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인간도 삶의 상처받은 사람의 자생력이 보다 강해져 인간진주로 태여날 여지가 충분하다. 또한 그 상처가 크면 클수록, 의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종당에는 흑진주와도 같은 ‘최상급’ 인생의 진주로 태여날 확률도 훨씬 높은 것이다. “산은 기복이 심할수로 절승경개를 이루고 물은 락차가 클수록 만년경관을 이룬다.”는 도리이리라.  사람마다 끈질긴 인내로 피할 수 없는 삶의 아픔과 고통을 이겨내여 천연적으로 산생된 진귀한 ‘흑진주’는 되지 못하더라도 명색이라도 가질 수 있는 ‘양식진주’ 로라도 태여나 사회의 구석구석에서 빛을 발산한다면 이 세상은 보다 밝아지고 인류사회는 더욱 문명해질 것임은 의심할 바 없다. 하지만 값지다는 진주들 속에서 모조진주를 식별할 줄 알아야 속히우지 않듯이 울긋불긋 화려한 가면구로 장식한 ‘인간진주’들 속에서 ‘모조진주’를 감별하는 능력을 키우고 경계해야 할 것이다. 출처:2018 제6호
3    [수필] 인생도 사계절 (허룡석) 댓글:  조회:1419  추천:0  2017-09-22
수필 인생도 사계절 허룡석 오랜만에 모아산 산정에 올랐다. 비록 립춘이 지난지 이슥하건만 봄기운은 느낄수가 없다. 북방의 집요한 겨울의 랭기는 아직도 가셔지지 않았다. 대신 공기는 아주 청신했다. 북경, 천진 등 대도시들의 스모그현상은 찾아볼수 없는 고향의 청신함이다. 시내안에서 늘 대형 성냥갑같은 콩크리트울안에 갇혀 근시안같던 시야가 졸지에 탁 틔였다. 오랜만에 저 멀리 눈길을 던지며 동서남북을 훤히 바라볼수 있었다. 눈길이 트이니 성냥갑안에 오그라들었던 내 마음도 활짝 펴진다. 나는 몸을 돌렸다. 지금 내가 살고있는 북쪽 연길보다도 어쩐지 내가 나서 자란 남쪽 세전이벌에 먼저 몸이 돌아진다. 드넓은 세전이벌은 올해따라 하느님이 손이 크게 하사한 두터운 솜이불을 덮고 시름없이 굳잠에 빠져있는듯 하다. 풀을 먹여 빨아놓은듯한 하얀 솜이불은 이른 봄의 해빛에 반사되여 유난히 눈을 부시게 한다. 세전이벌은 겨울의 강추위에 얼어붙은듯 꼼짝하지 않고 누워있는다. 하지만 자연의 힘을 누가 모르랴. 이제 봄이 오면 내가 언제 굳잠에 빠졌느냐듯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  자기의 직책에 충실할것이다. 이제 그 넓은 가슴에서 오곡백과가 씨붙이고 무르익도록 자기의 몸을 포근히 덮혀오고 기름지게 걸구어갈것이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선량한 인간들이 자기몸에서 자양분을 량껏 섭취하도록 풍만한 가슴을  풀어헤칠것이다. 나의 청춘의 구슬땀도 슴배여있는 저 세전이벌은 결코 잠자고 있는것이 아니리라. 지난해 인간에게 자양분을 바쳐  야위고 피곤해진 몸에 충전을 하며 서서히 태동을 꿈꾸고 있으리라. 자연은 수천수만년을 살아와도 조금도 바보스럽지 않다. 언제나 제정신에 산다. 100여년전에 선조들의 부지런한 손길에 의해 태고연한 자연의 옷을 벗어버리고 태여난 저 세전이벌도 쉴줄도 알고 일할줄도 안다. 흐트러질 때가 없다. 세전이벌은 총명하다. 자기에게 충성하는 인간과 자기를 속여먹으려는 인간도 어김없이 가려본다. 인간들의 성실함에 따라 베푸는 은혜도 각이하다. 세전이벌은 춘하추동 사계절에 따라 질서있게 돌아간다. 봄이면 씨뿌리고  여름이면 가꾸고 가을이면 수확하고 겨울이면 저장하는것이 자연의 상징이다. 태양이  서쪽에서  뜨지 않는한 이 법칙은 영원히 뒤바뀌지 않는다 사계절로 게으름없이 꾸준히 살아가는 저 넒은 벌, 지금은 동면을 끝내고 태동을 꿈꾸고 있을 저 세전이벌을 바라보며 문득 사람의 인생도 사계절로 살아가는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친다. 울며 이 세상을 찾아와서부터 웃으며 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누구나 어김없이 소년, 청년, 장년, 로년기를 거쳐야 한다. 소년시기는 인생의 씨앗을  뿌리는 봄이요 청년시기는 인생을 가꾸는 여름이요 장년시기는 인생의 성과를  수확하는 가을이요 로년시기는 지난날을 총화하며 인생의 경력을 저장하는 겨울이 아닐가. 소년시기는 인생발육단계에서 기초지식을 배우고 세상을 접촉하며 나는 장차 무엇을 할가 하는 인생의 꿈을 심어가는 봄이다. 인생의 비옥한 밭을 갈고 이랑을 짓고 오동통한 씨앗을 뿌리는 계절이다. 청년시기는 오곡백과가 강렬한 해빛을 받아 왕성한 생명력을 과시하는 여름처럼 혈기왕성한 정력기이다. 봄에 세운 꿈을 보다 확실히 검토해보며 확정된 꿈을 실천적으로 가꾸어가는 여름이다. 씨를 뿌린 인생의 목표에 물주고 비료주고 김매고 북을 돋구고 가지자르는 가꿈의 계절이다. 장년시기는 인간적으로 성숙되고 사업적으로 안정되여 봄에 심고 여름에 가꾼 인생의 목표에서 노력의 성과를 거두는 가을이다. 자식을 낳아 키우고 리념이 굳어지고 정력을 쏟아부은 일에서 열매를 따게 되는 계절이다. 로년시기는 일생동안 심고 가꾸고 거둔 성과를 저장하는 계절이다. 또한 육체적으로 기력이 떨어져도 정신을 가다듬으며 래일을 준비하는 겨울이다. 몸은 늙어가도 마음은 청춘이다. 자기가 걸어온 길을 되새겨보며 잘하고 못함을 검토하며 새로운 리념과 실천으로 또다시 돌아올 새봄의 도래를 맞이하는 계절이다. 자연과 마찬가지로 인생도 자기의 사계절을 맞이하고 철철이 해야 할 일을 하게 되는것 같다. 철을 어기면 농사를 망치듯이 인간도 철을 어기면 인생을 망치게 된다. 곡식농사를 지으나 인생농사를 지으나 철을 세분하면 바로 하루하루의 시간이다. 시간의 가치는 금전의 가치와 같다. 시간과 금전은 가장 유용하게 잘 사용함에 그 가치가 있다. 돈이 많으면 무엇하랴. 다 죽게 되였는데도 돈쓰기 아까와 쓸곳에 쓰지 않으면 실제상 그는 가난뱅이며 그의 돈은 수지에 지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자기와 타인의 행복에 유용하게 쓰지 않으면 그의 인생은 가라지 인생일것이다. 인생의 풍요로운 수확을 바라며 시간을 아껴쓰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 그것이 바로 인생을 살아갈수 있는 목표이다. 자기의 제한된 시간을 사회의 도덕적 수요에 부합되며 자기의 능력과 특장에 알맞는 인생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데 유용하게 쓰는 사람이 인생을 살줄 아는 사람이다. 또한 성과를 낼수 있는 사람이다. 목표가 없으면 눈부신 성과를 거둘수 없다. 하기 싫은 일에서 성과를 내기는 어렵다. 사람이 숨이 붙어있다하여 사는것이 아니다. 아무런 꿈과 뜻이 없으면 먹고 자고 교배할줄 밖에 모르는 짐승과 다를바 없는것이다. 아무런 목적없이 심심풀이로 책을 펼쳐든다면 얼마나 큰 시간랑비인가. 아무것도 살 생각없이 거리를 돌고 돈다면 심신이 얼마나 피로한가. 목표가 없이 가랑잎처럼 바람에 밀려가고 밀려오며 되는대로 살아간다면 그 인생은 얼마나 허탈하고 허황한가. 확정된 목표가 있다면 거기에 쓸 시간이 충족하다. 순조롭게 인생의 궤도에 올라설수 있다. 문제에 부딪쳐도 방황하지 않는다. 아무리 현란하고 우월한 목표가 손짓해도 자기의 능력과 흥취, 자기가 세운 목표에 부합되지 않으면 거기에 미혹되지 않고 꾸준히 자기의 목표를 향해 나간다. 수류탄을 만들 능력에 원자탄이 손짓한다 하여 거기에 혼을 빼았겨서야 되겠는가. 할 일이 가장 많은 사람은 시간이 가장 충족한 사람이다. 할 일이 많다는것은 그가 나가야 할 목표가 확실하고 명확하기에 갈림길에 들어선 사람처럼 우유부단하거나 방황하는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쉽게 사회환경의 손에 놀아나는 갈대로 되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자기의 환경을 만들어가기에 힘쓰며 자기의 인생목표로 환경을 지배하려 한다. 시간을 랑비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자기가 해야 할 인생의 목적을 확정하기는 했으나 그 목표에 충실하지 않고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며 그 목표에 부합되는 일을 하려 하지 않는데 있다. 농사를 지으려 작정했으나 무엇을 심어야 할지 어떻게 가꿔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 결국 철을 어기게 되는것과 마찬가지 도리이다. 시간을 아끼라 하여 휴식도 없이 련속부절히 일하라는것이 아니다. 휴식을 잘 하고 공간시간을 충분히 리용하면 자기의 목표를 보다 훌륭히 실현할수 있다. 유익한 오락과 체육단련은 심신을 건강하게 한다. 목표있는 일을 하다 쉬는 휴식은 유쾌하고 거뿐하고 엔돌핀을 발산하나 목표없이 놀기만 하는 휴식은 오히려 인생을 갉아먹는 괴수이고 시간을 훔쳐먹는 흉수이다. 우리의 인생은 무한정한것이 아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늘이 준 제한된 시간안에 있다. 자연의 사계절과 인생의 사계절은 본질적 구별이 있다. 자연의 사계절은 갔다가 다시 돌아오지만 인생의 사계절은 한번뿐이다. 가면 그뿐이다. 올해 농사를 잘 짓지 못했다면 다음해에 경험을 총화하며 다시 잘 지으면 되지만 인생의 농사는 한번 잘못 지으면 그만이다. 그저 다음 세대들에게 인생의 경험과 교훈을 남겨줄뿐이다. 하기에 인생의 사계절은 그만큼 귀중하고 보귀한것이다. 인생에는 실험도 없고 련습도 없다. 지금 잠자는듯한 저 세전이벌의 상태는 로년기에 들어선 인생과 비슷하지 않을가 싶다. 무슨 큰일을 하는것처럼 떠들썩하지도 않고 남의 시선도 끌지 않으며 조용히 묵묵히 자기의 체념에 빠져있다. 그렇다고 잠자는것이 아니다. 죽은것은 더욱 아니다. 새봄을 맞을 차비를 하고있다. 로년기에 들어선 사람도 피곤하고 떠들썩하고 자랑스러웠던 인생의 봄, 여름, 가을을 회고하며 양파껍질을 벗기듯 허위와 체면, 필요이상의 자존심 등 겉딱지들을 한겹한겹 벗겨버리며 거뜬한 몸으로 재생의 봄을 맞이하고저 만전을 갖추고 있다. 남보기엔 기력이 빠져 조용한것 같아도 인생의 겨울철은 면면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 저 세전이벌처럼 이제 새봄이 오면 키지개를 켜고 일어나 보다 장중하고 묵직하게 인생의 새봄을 장식할것이다. 잠자는듯한 세전이벌을 바라보노라니 춘하추동을 쉼없이 멋지게 살아가며 인류에게 끝없는 은혜를 베풀어가는 대자연한테서 삶의 철리를 터득한것 같다. (이제 봄이 오면 너도 솜이불을 차던지고 잠을 깰테지. 나도 허위딱지들을 털어버리며 잠을 깰거야. 너도 충족한 에네르기로 만전을 갖추고 나올거지. 나도 알찬 청춘의 마음을 안고 씩씩하게 나올거야. 이제 약동하는 새봄이 올때 우리 보람찬 희망을 아고 이 산정에서 다시 만나자꾸나. 도라지 2013년 제5기
2    [소설] 렬사비 (허룡석) 댓글:  조회:1613  추천:0  2017-09-20
소설 렬사비 허룡석 마을앞의 뉘연한 산언덕에는 낡고 헐망한 렬사비가 서있다. 먼길에 지칠대로 지쳐 당금 쓰러질듯한 로인네의 초라한 모습으로 황초속에 쓸쓸히 서있다. 렬사비를 세울 때에는 죽어도 굴하지 않는 선렬들의 영웅기개를 안받침하듯 주위에 푸르고 낏낏한 소나무와 이깔나무들로 울창했으나 언제부터인지 다 찍어가고 지금은 누구도 욕심내지 않는 메마른 황초들만 렬사비를 둘러싸고 찬바람에 쓰륵쓰륵 흐느낌소리를 내고있다. 반세기 남짓한 비바람속에서 바랠대로 바래지고 헐망할대로 헐망해진 렬사비는 자기를 이 세상에 태여나게 했으나 이젠 자기를 돌볼 기력조차 없이 갈수록 황페해지고 초라해지는 룡성마을을 처량하게 내려다보고있다. 20세기 50년대초에 세워진 이 렬사비에는 항일렬사 3명, 해방전쟁렬사 12명, 항미원조렬사 35명의 이름이 또박또박 새겨져있다. 이들은 여러 혁명시기에 거의 다 달래동 각 툰에서 참군했던 열혈청년들이였다. 인민공사설립후 달래동마을을 룡성 대대로 개명하였다. 렬사비도 룡성대대의 자랑스러운 렬사비로 되였다. “문화대혁명”전에는 해마다 청명절이나 추석이면 렬사비를 찾아 술을 붓고 절을 올리고 선서하고 청소하는 남녀로소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었다. 설명절이면 선렬들을 기리고 우러르는 마을의 간부들과 청년들, 학생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렬군속가족들을 일일이 찾아 위문하며 꽃을 달아주고 마당을 쓸어주고 물을 길어주고 나무를 패주기도 했다. 그때면 병국령감 등 렬군속들은 조직과 마을사람들의 진정어린 관심에 마음이 후더워지군 했다. 조국과 인민을 위해 피를 헛되이 흘리지 않았다는 긍지감을 가슴 뿌듯이 느끼군 했었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지금은 렬사비에 발길을 돌리는 사람이 없고 렬군속가족을 찾아 위문하는 사람도 없다. 다만 여든고개를 넘긴 병국령감만이 중풍을 맞은 후유증으로 가재걸음을 하며 형님을 만나는 기분으로 산언덕을 종종 오르내릴뿐이다. 조선전쟁시기에 그들 형제는 당의 호소에 적극 향응하여 함께 전쟁판으로 나갔으나 형님은 남의 나라땅에서 무주고혼이 되여 묻혀있었고 병국령감은 왼팔을 잃고 오른 다리에 파편을 박은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저 렬사비에는 형님 박병철의 이름도 새겨져있었다. 지팽이를 짚고 병약한 몸으로 헐헐거리며 렬사비를 찾을 때마다 병국령감의 마음은 허전하고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한메터 높이의 널판자에 흰칠을 올려 렬사비를 정결하게 둘러 막았던 울타리는 없어진지 오랬다. 렬사들이 뭔지도 모르는 뒤마을의 소때와 양떼들이 제멋대로 쓸어들어와 이리저리 떠박기도 하고 오줌똥을 갈기기도 했다. 렬사비기초는 벽돌이 떨어져나가고 세면이 부스러져 렬사들의 앙상한 뼈가 들여다 보이는듯 처량하고 원통했다. “혁명렬사들 영생불멸하리”라는 붉은 글자도 색이 다 바래져 가까이에서 뜯어보아야 새겨넣은 글씨체를 알아볼수 있었다. 황초속에 초라하게 서있는 5메터 높이의 렬사비는 형체를 알아볼수 없는 만신창 시체를 방불케 했다. 개혁개방이후 날로 헐망해가는 렬사비를 그대로 보고만 있을수 없어 병국령감은 마을의 렬사가족들을 휘동하여 향과 촌의 책임자들을 번질라게 찾아다니며 렬사비를 수건해줄것을 바랐으나 번번이 물건너가는 흙보살이 되고 말았다. 렬사비는 렬사들 충혼의 상징인데 렬사비에 발길을 돌리는 사람이 없어도 깨끗하고 숙연한 모습으로 서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안타깝게 호소해도 듣는 사람들은 마이동풍이였다. 모두들 도약식 발전과  경제지표를 올리는데 투자하고 신경을 쓸뿐 헐망해가는 렬사비에  관심을 돌리는 간부는 없었다. 여느 조선족마을들과 다름없이 이 마을에서도 한국바람에 나젊은 아낙네들과 청년들은 다 빠져나가고 늙은이들은 하나둘 “연통대학”으로 가 많은 집들이 비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이 없으니 결혼잔치도 없고 애들 울음소리도 없다. 백여년동안 피땀을 흘리며 일구고 가꿔놓은 논과 밭들도 거의 다 외지사람들 손으로 넘어갔다.  그저 바람앞의 초불같은 병국령감같은 늙은이들이 갈수록 황페해지는 마을을 고독히  지키고있을뿐이다. 마을이 기울어져가고 인구가 급감하자 전해부터는 뒤마을  한족 촌과 합병되여 한족마을 이름을 따 립신촌으로 되였다. 우리 민족의 얼이  슴배였던 달래동이나 룡성이라는 마을이름은 력사의 뒤울안으로 사라지게 되였다. 마을이 합병된후에도 병국령감은 부촌장이라는 허울좋은 직책을 띤 60넘은  동길이를 찾아가 렬사비수건문제를 다시 제기하였다. 동길이가 이 마을에서 제일  나어린 사람이라 합병된 촌에서는 소학교때부터 소대장 한번 못해본 “꺽꺽이”에게 부촌장이라는 “높은 직무”를 씌워주었다. 그 직무에 그 직책이라더니 “꺽꺽이”는 뒤마을 촌장한테로 번질라게 뛰여다녔다. 그렇게 몇번 제기하여 석달후엔가 한번은 동길이가 병국령감을 찾아왔다. 자기가 왕촌장한테  마을 렬군속들의 뜻을 몇번 제기했더니 왕촌장이 하는 말이 수건은 할수 있는데 렬사비를 촌소재지인 자기네 마을에 옮겨와야 한단다. 그 말을 듣고 병국령감은 풍맞은 사람같지 않게 펄쩍 뛰였다. “우리 마을 렬사비를 어떻게 렬사가 둘밖에 없는 그 마을로 옮겨간단 말인가. 랭수에 이 부러질 소리를 하지 말라 하라구.” 그때 뒤마을에 렬사가 둘밖에 없어 렬사비를 세울 형편이 못되여 사정사정하여 달래동마을 렬사비에 해방전쟁때의 자기촌 두 렬사의 이름을 새겨넣게 되였다. 그런데 이제 와선 통채로 옮겨가겠다니. “꺽꺽…왕촌장말이 이젠 마을도 없어지는데 꺽꺽…어떻게 렬사비를 빈 마을에 다시 수건하겠는가구 합데다. 꺽꺽…” “마을이야 쓰러져가두 렬사들의 피줄을 이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아직 눈이 펀해 있지 않는가?” “만일 꺽꺽…마을사람들이 렬사비를 옮기는걸 동의하지 꺽꺽…않으면 원래 자리에다 렬사비를 수건하지 못하겠다구 꺽꺽…합더구마. 어떻게 벌어들인 뭉치돈을 꺽꺽…사람두 없는 황초밭에 던져버리겠는가구 하면서…꺽꺽…" “이젠 우리 마을 렬사비를 아예 자기네 렬사비로 만들자구? 도투자리에서 개꿈 꾸지 말라 하라구….” 화가 치민 병국령감은 지팽이를 짚고 후둘거리며 마을 집집이 찾아다니며 우리 마을 렬사들의 충혼이 깃들어있는 신성한 렬사비를 절대 다른 마을로 옮겨가게 해서는 안된다고 사지가 삐뚤어고 입이 오그라든 령감로친들한테 동침을 놓았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하루건너 산언덕에 올라가 렬사비를 살펴보았다. 동길이의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들은후부터 병국령감은 엎치락뒤치락하며 며칠밤을 바로 자지도 못했다. 여러해동안 그렇게 앞뒤로 뛰여다니며 렬사비수건을 호소했더니 일이 상상밖으로 번져가고있지 않는가. 어느날 시내에 들어가 술을 마시고 돌아온 손자 창수가 병국령감에게 눈을 흘겼다. 그는 한국에 가 여러해 일하다가 비자가 만기되여 다시 비자를 내려고 집에 돌아와 한달째 눌러있는 중이였다. 그의 아버지, 어머니, 삼촌과 사촌들도 모두 한국에서 돈벌이에 혈안이 되여있었다. 두해전에 할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뜬 후에는 보모를 청해 할아버지를 돌보게 하였다. 원래는 양로원에 보내려 했으나 죽어도 정든 마을을 떠나지 않고 형님의 이름이 새겨져있는 렬사비를 지켜보겠다고 고집을 부려 어쩔수 없었다. “요새 듣자니까 할아바이 무슨 렬사비를 옮겨가는걸 제일 반대한다면서요?” 병국령감은 두눈을 부릅떴다. “그런데는 어째? 그게 잘못됐냐?” “야, 할아바이두 답답합꾸마. 몸두 편찮은데 쓸데없는 일에 그렇게 발벗고 나서 반대할게 있습둥? 아무데나 있으면 없기보다야 낫지 않겠습둥?” “무라구? 이눔아, 쓸데없는 일이라니? 그게 네가 할 소리냐? 거기에 네 큰 할애비 이름두 새겨져있다. 그런걸 어디에 옮겨간단 말이냐? 그게 어디 그렇게 허타이 대할 문제냐?” “큰 할아바이 이름이 새겨있으면 뭘 합둥? 지금 모두 먹구 살기 바빠 눈을 펀히 뜨고있는 제 부모형제들도 돌보기 바쁜판에 누기 몇십년전에 죽은 렬사들을 생각 한담둥? 그저 죽은 사람들만 불쌍합지.” “뭐라구? 그것두 말이라구 하냐? 그래 렬사들이 없었으문 너들이 이만큼이라두 잘살수 있을것 같냐?” 그 말에 손자녀석이 더구나 발끈했다. “그런 말씀 하지두 맙소. 할아바이네는 그때나 지금이나 어째 그냥 거짓말만 하메 삼둥? 할아바이네나 아부지 젊었을 때는 잘 살았습둥? 우리 세대두 잘 살게면 지금 모두 한국에 쓸어나가 막벌이를 하겠습둥? 할아바이때는 젊은이들이 모두 전쟁판에 나가 죽어서 마을에 젊은이 없구 우리 세대에 와서는 할아바이네 원쑤라고 싸우던 나라에 돈벌이하러 쓸어나가느라 젊은이들이 없구. 그저 배를 곯치 않고 엉치 가리울 옷이 있으면 잘사는겝둥? 집안에 앉아 그냥 옛날말만 하지 말구 다른 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 좀 봅소. 이젠 우리 세대두 발달한 나라들과 비교하며 앞을 보구 빛이 나게 살아야 합꾸마. 시내에 아빠트두 있구 차두 있구 돈두 두둑해야 합꾸마. 이게 어느 때라구 자꾸 뒤를 돌아보구 옛날말만 함둥? 나라가 발전하지 못하면 백성두 사람값에 못가꾸마. 까놓구 말해 사람들이 모두 돈벌이에 정신나가 하는판에 우린 렬사라는 단어조차 잊은지 오래꾸마. 지금 할아바이네 밖에 생각하는 사람 누기 있습둥?” 병국령감은 화가 치밀어서인지 아니면 할 말을 찾지 못해서인지 주름이 가득 한 입술을 부르르 떨뿐 화가 치민 눈길로 손자만 흡떠보았다. “그리고 저 큰 뒤동네에는 어째 렬사들이 둘밖에 없다는데 이 동네는 렬사들이 그렇게 많습둥? 전에두 할아바이네 혼자 혁명했습둥? 그러길래 봅소. 지금 뒤동네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한데 이 동네는 사람이 있는가구.” “뭐야? 이눔새끼, 그래 이 할애비는 사람이 아니냐?” 병국령감은 그제야 할 말을 찾은듯 침방울을 튕겼다. “뒤동네에서는 사람이 갈수록 불어나서 마을을 단단히 지키니까 이젠 사람이 없어지는 우리 마을두 합병하고  이름두 그동네 이름걸구 렬사비두 가져가자는게 아니겠습둥? 가져 가게 내버려 둡소. 렬사들 이름만 그대로 있으면 됩지 무스거 다른걸 고려할게 있습둥? 이름이 있은들 누기 들여다 본답둥? 보든말든 그래두 저렇게 헐망해 없어지기보다는 낫재임둥? 이젠 할아바이두 그깟 렬사비에 신경 좀 그만 쓰구 병치료나 잘합소.” “뭐라구? 네 이놈…이놈…” 병국령감은 떨리는 손으로 뱀이 나가는지 구렁이 나가는지 제멋대로 지껄여대는 손자를 가리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눔이 내 손자 옳기나 한가? 젊은놈들의 생각은 우리와 완판 틀리는가? 손자와 다툰후 병국령감을 화가 치밀어 엎치락뒤치락 그날밤을 새우다싶이 했다. 세월이 변해도 이렇게도 변했는가. 내가 과연 옛날생각만 하고있는건가? 병국령감은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많은것들을 곰곰히 생각해보게 되였다. 지금 젊은놈들은 지난날 “자기가 살고있는 새농촌건설을 잘하는것이 바로 중국 혁명을 잘하는것이고 세계혁명에 공헌하는것이다”고 하던 설교에 길들여졌던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들과는 완판 틀렸다. 그 자식들은 “이 좋은 세월에 우리라고 왜 한뉘 촌에 박혀 엉덩이를 하늘로 쳐들고 개고생하겠느냐”며 능력이 있으나 없으나 젊음이란 밑천 하나를 턱대고 살길을 찾아 외국으로 대도시로 뿔뿔히 찾아떠났다. 초중이나 졸업한 손자녀석도 한국에 나가 막일하며 돈을 벌더니 무슨 돈귀신이 들어붙었는지 고향에 돌아오려 하지 않는다. 왜 젊은놈들은 자기가 나서 자란 고향에 그렇게 미련이 없는지 알고도 모를 일이였다. 과연 이 늙은이가 달라지는 세상과 너무 멀어져  있는것인가? 이튿날 “꺽꺽이” 부촌장 동길이가 집집이 돌아다니며 회의를 한다고 통지했다. 병국령감이 비틀거리며 회의실에 가보니 30명가량되는 토배기 마을 늙은이들이 거의 다 모였다. 오빠를 해방전쟁에서 잃은 방아집로친도 있었고 동생을 조선전쟁에서 잃은 덕배령감도 있었다. 결혼 한달만에 남편을 전쟁판에 보내고 유복녀를 키우며 여지껏 “렬사의 안해”로 굳은 절개를 지키며 고독하게 늙어온 백내장로친도 있었다. 이밖에도 모두 콜콜 병자랑하는 로친들이 아니면 중풍을 맞아 침을 질질 흘리고 옆으로 삐여지게 게걸음하는 령감들이였다. 펀펀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들이 전에는 이 마을건설에 몸을 내번지고 일하던 “꼬리없는 소”들이였으며 현, 주, 성의 모범과 선진이라던 영웅들이였다. 동길이가 종이장을 내들고 말했다. “여러분들두 꺽꺽…들어서 다 알겠지만 우리 마을 꺽꺽…렬사비를 뒤마을 한족동네에 옮겨다 수건하자 하는데 꺽꺽…여러분들 생각이 어떤지 지금 투표를 하, 하겠습꾸마. 꺽꺽…남아있는 여러분들은 이 마을 사람들을 꺽꺽…대표합꾸마. 여러분 들이 옮겨가는걸 동의하면 꺽꺽…렬사비가 뒤동네에라두 새롭게 세워지구 꺽꺽 …동의하지 않으면 그냥 저렇게 비바람에 시달리다 꺽꺽…언젠가 무너져내려 흙무지 되구말게꾸마. 이제 표를 꺽꺽…나눠드리겠는데 동의하는 분들은 꺽꺽…동구래미를 치구 동의하지 않는 분들은 꺽꺽…승하기표를 칩소. 꺽꺽…똑똑히 들었습지? 어떤 결과 나오던지 꺽꺽…그건 여러분들이 선택한게꾸마. 꺽꺽…그럼 지금부터 투표를 하겠습꾸마. 꺽…” 이게 민주를 발양한다는건가? 이걸 저 ‘꺽꺽이”가 생각해낸건가? 동길이는 사람마다 자그마한 종이 한장씩 나누어주고 꽁다리연필도 몇사람에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로인들은 저마다 후둘거리는 손을 내들고 표를 받았다. 그들은 별로 생각도 하지 않고 표에 태도표시를 해서는 동길이를 소리쳐 불렀다. 그러면 동길이는 잰걸음으로 다가가 표를 받았다. 이렇게 잠간새에 표를 다 걷어들였다. 동길이는 걷어들인 표를 그래도 몸이 좀 성하다는 령감로친한테 주어 맞춰보게 했다. 담배 반대를 피울 사이도 안되여 검표를 끝낸 령감이 동길이한테 표를 넘겨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다 동의구먼.” 동길이는 표를 받아쥐며 어리벙벙해했다. 분명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반대하는 령감도 있지 않았는가. 그런데 모두 동의라니. 그가 다시 표를 한장한장 훑어 보았으나  틀림없는 만표였다. “꺽꺽…렬사비를 옮겨가는데 몽땅 동입꾸마. 꺽꺽…” 동길이가 꺽꺽거리며 높이 소리쳤다. 하지만 로인들의 표정에는 즐거움도 웃음기도 없었다. 침울한 얼굴들에는 대낮에 남한테 뭔가 소중한것을 빼앗긴듯한 원통함과 서글픔이 서려있었다. 동길이가 다시 소리쳤다. “꺽꺽…그럼 이대로 촌정부에다 회보해서 꺽꺽…렬사비를 인차 뒤마을에 옮겨다 다시 짓도록 하겠습꾸마. 꺽꺽…박수...” 그러나 박수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동길이는 멋적게 파회를 선포했다. 회의가 긑난후 동길이가 병국령감한테 다가와 의아쩍게 물었다. “꺽꺽…아바이는 옮겨가는걸 처음부터 꺽꺽…반대하지 않았습둥? 꺽꺽…그런데 어째 오늘은 동의표를 냈습둥? 꺽…” 병국령감이 깊은 탄식소리를 내며 말했다. “어제밤 손자녀석과 한바탕 다투었소. 늙은것이 집안에 들어앉아 옛날소리만 하며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줄 모른다구 되게 몰려댔지. 후ㅡ, 낸들 어쩌겠소. 이젠 다 파먹은 김치독이지. 세월이 흘러가는대루 따르는 수밖에. 렬사비꺼지 옮겨가문 나두 양로원에나 갈가부다… 2015년 제4기    
1    [수필] 출세와 효도의 갈림길에서(허룡석) 댓글:  조회:1729  추천:3  2017-09-12
수필 출세와 효도의 갈림길에서 허룡석 어쩌면 이 세상 모든것은 너무도 빨리 시들어지고 사라져가는듯 하다. 무정한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처럼 불타던 많고많은 욕망마저 서서히 시들어버리고 모든 생명체들도 한줌의 흙으로 삭아가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 한가지 남는것이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효가 아닐가싶다.  어머니들은 위대하다. 자신의 피와 살로 자식들에게 다함없는 사랑을 몰붓는 어머니들은 이 세상의 영원한 거인, 생의 홰불이라고 칭송해도 과분하지 않으리라. 나의 어머니도 수많은 어머니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거인이셨고 생의 홰불이셨다. 어머니는 거인마냥 우뚝 서서 자신의 귀중한 그 청춘의 홰불로 자신을 불태우며 사그라져가는 이 갸냘픈 명에 생의 활력을 부여하셔 기적적 생명을 만들어주셨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자식으로서 그러한 어머니를 위하여서는 무슨 효도인들 못하겠는가. 그 옛날 이야기처럼 머리카락을 잘라 신을 삶아드리고 허벅다리 살을 베여 부모를 공대하지 못할지라도 출세와 효도의 갈림길에서 량심을 어기지 않는 선택을 할수 있지 않을가 사료된다. 2013년 여름, 북경에 계시는 선생님들과 선배님들 5쌍이 부부동반하여 연길에 소풍을 오시게 되였다. 장기간 일본에 가 계신다는 일찍 중앙민족학원에서 우리 담임 교원을 하셨던 리용식선생님도 부인을 배동하여 함께 오시였다. 그분들이 훈춘에 가셨다가 연길에 돌아온날 저녁 우리 몇몇 동창생들도 백산호텔 귀빈청에서 선생님 들과 자리를 함께 하게 되였다. 나는 일부러 리용식선생님 곁에 자리를 잡고앉았다. 서로 인사의 말씀이 끝나고 축배의 잔을 돌린후 나는 리용식선생님한테 따로 술을 부어올리며 조용히 말씀드렸다. “혹 선생님은 기억하시겠는지 모르겠지만 30여년전 졸업시 저를 학교에 남지 않겠는가고 하시던 선생님의 말씀을 저는 지금도 잊지 않고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대뜸 놀라운 표정을 지으셨다. “암. 기억하고있지. 그때 동무를 확실히 학교에 남기자고 했는데 돌아가겠다니 참 아쉬웠댔소.” “그때 비록 북경에 남지는 못했지만 선생님의 그 고마운 마음은 제가 영원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자못 아쉬운듯 이렇게 말씀했다. “그건 조직의 고려였지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였소. 그때 동무가 조직의 기대 대로 북경에 남았더면 어떻게 발전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방에 와서도 그만하면 아주 잘한거지. 조선족인재들이 우글거리는 연변에서 신문방송언론사와 문화부문 책임자로 오래동안 사업했으니 얼마나 잘한거요. 내 알건대 우리 민족대학 조문번역전업을 졸업하고 지방에 돌아간 동무들가운데서 동무처럼 이만큼한 사업경력을 쌓은 학생이 없는것 같소.” “별로 잘하지는 못했습니다만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제가 지방에 돌아와 이만큼이라도 자리를 굳힐수 있은것은 선생님들의 따뜻한 관심과 교양과 갈라 놓을수 없습니다. 잊지 못할 그 고마운 마음담아 제가 특별히 선생님께 이 잔을 올리고싶습니다." “좋소. 우리 함께 들기오.” 술을 잘 마시지 못하신다는 선생님은 통쾌하게 잔을 굽냈다. 우리의 대화를 엿들은 곁에 앉은 한 동창생이 나한테 조용히 말했다. “학교졸업때 그런 일이 있었소? 우린 그런줄 정말 몰랐댔소.” “후, 알면 뭐하겠나. 다 지나간 일이다.”     1979년 여름, 대학졸업을 몇달 앞둔 어느날 담임교원 리용식선생님이 나를  조용히 찾았다.   “조직에서 동무를 학교에 남길 타산인데 남을 의향이 있소?” 리용식선생님은 중앙민족학원 조문번역학부가 선 이후의 첫기졸업생으로서 나이는 나와  비슷했지만 선배이자 선생님이기에 나는 깍듯이 존대했다. “예? 저를 학교에 남기려 하신다구요? ” 전혀 생각밖이라 나는 놀랍게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먼저 학부의 전직공청단서기로 남길가 하는데 이제 편제가 나면 교원으로 넘길가 하오. 만일 학교에 남을 생각이 없으면 북경에서 다른 단위를 선택해도 되오.” 몇을 학교에 남기는가고 물으니 내가 유일하다신다. 내가 대학에 오기전에  공사의 공청단서기로 있은 경력때문인가? 학교온 후에도 나는 장족, 위글족, 몽골족, 하사크족, 조선족 등 다섯개 전업이 있는 민족언어학부의 공청단선전위원 사업을 맡아하고있었다. 당시 학교에 남는것과 북경대학 동방언어학부, 중앙인민방송국, 민족출판사, 중앙민족번역국,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등 단위와 부문들은 우리 대학  졸업생들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졸업림박이면 학생들이 사업환경이나 생활환경 등 여러가지 조건이 지방보다 훨씬 우월한 북경에 남으려고 서로 갖은 연줄을 달아 앞뒤로 뛰여다니는 판인데 나는 생각밖으로 움안에서 떡 함지를 받아안은격이라 할가. 우리가 민족출판사에서 실습할 때에도 담당편집이 나의 번역수준을 기중 괜찮게 평가하였다는것도 후에 들어서 알게 되였다.  아마 대학가기전 다년간 신문방송사 골간통신원으로  활약하면서 부지런히 글을 쓴것이 큰 밑바탕이 된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북경에 남을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가정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기에 내가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고향에 돌아갈 생각만 하고있었다. 그런데 정작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잔잔하던 가슴이 흥분으로 들뛰였다. 나는 설레이는 가슴을 진정하며 잘 고려해 보겠다고 선선히 대답했다. 갑자기 마음이 둥둥 뜨는듯 했다. “촌놈”이 행운스럽게 수도 북경에 와 공부하고 꿈에도 생각지 않게 수도공민이 된다니 어찌 마음이 들뜨지 않겠는가.  무슨 지방의 후비간부라고 여러해 동안 대학에 갈려고 해도 보내주지 않아 나중에 "이판삼판 생떼질쓰며" 뒤늦게야 학교에 가다보니 졸업을 앞둔 내 나이 29살이라 반급에서 두번째로 나이 많았다. 그때 이미 연길에 약혼녀가 있었다. 내가 북경에 남게 되면 약혼녀를 북경에 전근시켜와야 70고개에 올라선 부모님을 모셔올수 있었다. 나는 흥분된 마음을 가까스로 누르며 약혼녀와 부모님한테 편지를 띄워 학교의 뜻을 전하며 그네들의 의사를 물었다. 약혼녀한테서는 북경에 남든 돌아오든 나의 의사를 따르겠다고 금방 회답이 왔으나 집에서는 여러날 지나도록 종무소식이였다. 담임선생님이 두번째로 나의 의사를 물을 때 나는 체면을 무릅쓰고 한가지 요구를 제기했다. 나는 이미 대상이 있는 로총각인데 5년내에 안해의 호구를 북경에 들여올수 있으면 남는것을 고려해 보겠다고 했다. 선생님은 다른 학생들은 무조건 남으려 해도 남기 어려운 형편인데 그런 과분한 요구까지 제기하느냐는듯 나를 쳐다 보고는 학교에 반영은 해보겠지만 희망은 적을것이라고 했다. 며칠후 단임선생님이 또다시 나를 찾았다. 아니나다를가 지금 학교는 물론 북경의 어느 단위에나 10년, 20년씩 천리만리 갈라져 사는 견우직녀들이 수두룩한데 학교에서 그런 담보를 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면서 나더러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란다. 사실 그때 북경에 지방의 호구를 들여온다는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하여 어떤 학생들은 북경에 남기 위해 다년간 사귀며 뒤를 받쳐주던 지방의 련인을 차버려 일련의 풍파를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렇게 할수 없었다. 자기가 잘되려고 수년간 나를 믿고 따르던 선량한 처녀의 가슴에 못을 박을 수 없었다. 내가 북경에 남는다고 생각했던지 일부 교원들이 나한테 북경처녀를 소개하기도 했다. 나는 지방에 이미 대상이 있다고 솔직하게 사절했다. 따르는 처녀를 두고 량다리 걸치기를 할수 없었다. 하지만 북경처녀와 결혼하는것이 년로한 부모님을 북경에 빨리 모셔올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였고 현실문제이기도 했다. 그렇게 되면 로처녀로 만들어놓은 지방처녀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는가? 솔직히 말하면 나도 다른 동창들과 마찬가지로 정말 북경에 남고싶었다. 하지만 부모님들은 생각하면 또 쉽게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내가 북경에서 남들처럼 10년이고 20년이고 안해의 호구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다가는 부모님들이 고향에서 고독한 나날을 보내시다 쓸쓸히 세상을 뜨실것이였다. 더우기 70세를 넘기신 아버지도 내가 대학에 온후 중풍에 걸리셨다지 않는가. 나는 고민에 빠졌다. 어찌해야 좋을지. 그러던차 한달쯤 지난 어느날 고향의 한 마을에 사는 사촌형한테서 편지가 날아왔다. “…너의 편지를 받고 마다매(나의 어머니)는 날마다 눈물로 세월을 보낸다.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이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북경에 남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가고 락루하신다. 그러니 너도 잘 생각해 보아라. 내 생각에는 그래도 돌아 오는것이 좋을것 같다…” 사실 어머니는 내가 대학에 공부하러 가는것부터 탐탁해하지 않으셨다. 평범한 농촌부녀인 어머니는 내가 공사간부로 된것에 만족해하시면서 어서 빨리 결혼하여 손자손녀들만 안겨주기를 바라셨다. 나이도 어리지 않기에 여기저기에서 소개해 들어오는 처녀들도 적지 않았다. 또한 수천명 귀향, 하향청년들을 거느리는 공사의 공청단서기로 있었기에 따르는 처녀들도 한둘이 아니라 할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더 배워야겠다는 욕심에 "철밥통" 공사간부도 포기하고 부모의 마음도 모르는척 하면서 기어코 학교로 온것이였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로서 불효를 저지른것은 아닌지 나 홀로 고민할  때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작은 집 어머니말씀에 의하면 내가 달을 채우지 못하고 세상에 태여나서부터 앓기도 많이 앓았다고 한다. 어느 로인인가 자주 앓는 애들은 이름을 천하게 지으면 명이 길것이라 하여  나에게 “매지” (망아지)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래집 사촌형 애명이 “쇄지” (송아지)이니 그렇게 부르는것이 음양으로 서로 어울린단다. 이 피덩이가 살아만 준다면 개똥애라 불러도 무방했다. 하여 동네는 물론 린근 마을 에서도 “쇄지”와 “매지”있는 세흥촌 허씨네 집안이라면 모르는 사람들을 내놓고는 다 알았단다. 젖이 안나는 어머니는 나를 안고 동네를 돌며 동냥젖을 먹였다. 맘씨고운 마을 어머니들은 나를 불쌍히 여겨 자기애들 입에서 젖꼭지를 빼내여 나의 입에 물려 주었다. 그럴 때면 나는 가리지 않고 암팡스레 젖을 빨아댔단다. 하지만 모두가 번마다 그렇게 마음을 쓰는것은 아니였다. 어떤 아낙네는 젖을 주기는커녕 자주 앓음 자랑하는 나의 병이 자기애한테  옮을가봐 설설 뒤걸음치며 비아냥하기도 했다. 그럴수록 어머니는 나를 꼭 살리고야 말겠다고 옥다짐했다. 어머니의 그 정성에 감화된 나와 동갑자리를 가진 몇몇 이웃집 어머니들과 아무때건 군소리없이 젖을 물려주는 작은 어머니가 있어 나는 그런대로 젖배를 곯지 않을수 있었다. 하지만 렴치없이 언제까지도 계속 동냥젖을 먹여 키울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좀 춰서자 암죽을 끓여먹였다. 그런데 “천인젖”을 먹던 입에 생뚱같은 맛을 가진것이 들어가니 나는 떠넣은 암죽을 뱉어내며 울음으로 거센 “항의”를 해댔단다. 그래도 어쩔수 없었다. 마음아파도 암죽맛을 들여야 했다. 어머니는 동네방네를 다니며 사탕가루를 구해다 암죽에 섞어먹였다. 배고파 울어 번져지던 나는 어쩔수 없이 암죽을 좀씩 받아먹었다. 당시 사탕가루가 아주 귀했으나 어머니는 어디서 어떻게 구해오는지 나의 암죽에 사탕가루를 떨구지 않았다. 나는 암죽을 먹다도 별안간 젖생각이 나는지 시도 때도 없이 발버둥치며 울어 번져지다가 자주 암죽 그릇을 훌떡 뒤집어놓기도 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너무 안타까와 손바닥으로  온돌바닥을 치며 넉두리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도 어머니는 제꺽 눈물을 닦고 일어나 다시 암죽을 끓여 나를 달랬다. 암죽끓이는 일은 다른 사람이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어떤 때는 작은 어머니가 그런 장면에 맞띄워 내가 불쌍하고 어머니가 안쓰러워 자기젖을 물려주려 하면 어머니가 막아나섰다. “아매두 젖먹구 자랄 애가 아닌데 자꾸 그러문 얘가 언제 암죽맛을 들이겠소. 보기 구차해두 관두우.” 그렇게 하루에도 몇번씩 나한테 암죽을 끓여먹이느라 납쟁개비 여러개나 구멍이 뚫려버렸다. 어머니의 열손가락은 불에 데고데여 감각을 모르는 두터운 살이 들어 앉았다. 나는 이렇게 선량한 어머니들의 동냥젖을 먹으며 자랐고 어머니의 정성이 담긴 암죽을 먹으며 푸들어갔다. 그런데 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여난 탓인지 하루건너 앓음 자랑이였다. 오고가는 감기를 빼놓지 않았고 설사요 페염이요 하며 의원집문턱이 다슬게 드나들었다. 의원집에 호구를 붙인다고 또 마을사람들 말밥에 오를가봐 어머니는 나를 둘쳐업고 남의 눈을 피해  버들방천속으로 해서 아래마을 의원보러 다니군 했다. 너무 자주 다닐 때는 버들방천속에서 서성거리며 날이 어둡기를 기다려 마을에 들어서군 하였다. 내가 여섯살때에 한번은 내가 잃어져 마을사람들이 일떠나 나를 찾은적이 있었다. 그날따라 마을의 큰 대돌에 물이 넘치게 흘러들어왔다. 어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이 아들이 대돌에 빠졌는가 하여 생사를 불문하고 선참으로 가슴을 치는 대돌에 뛰여 들어 정신없이 나를 찾아헤맸다. 나의 주검을 찾아내는 날에는 어머니도 물에 빠져 죽겠다고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는 대돌을 따라 사품치는 해란강에까지 뛰여들어 나를 찾겠다는것을 마을사람들이 모여들어 어머니를 잡아끌며 겨우 말려냈다. 그날밤 어머니는 울음으로 날을 새웠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내가 다 큰 후에 작은 어머니가 여러번이나 나한테 가만히 들려준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남다른 정성을 다 한 엄마가 아니면 그렇게 병약했던 네가 이 세상에 살아있었을지도 모른다. 엄만 너 하나만 믿구 살아오셨다. 그러니 너 이후 엄마 은공을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다. “비천한” 농민으로서의 나의 부모는 나에게 우월한 사회환경과 재부를 안겨 주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필생의 정력과 심혈로 하나뿐인 아들을 이만큼 키워주신 분들이였다. 내가 이 세상에 태여날 때에는 어머니가 나의 생명의 태줄을 끊어주었지만 내가 북경에 남아 부모님들이 고향에서 외로히 세상뜨실 때에는 내가 효도의 정감을 끊게 될것이니 이는 내 평생의 영원한 아픔으로 남게 될것이다. 그러면 나는 스스로 불효자식이란 마음의 멍에를 지고 고통스레 살아가게 될것이 였다. 나는 사촌형의 편지를 받고 여러날 고민했다. "그래도 발전하자면 여러모로 조건이 좋은 북경에 남아야 한다. 작은 늪에서는 큰 고기가 자랄수 없다. 드넓은 바다가 나의 수영장이다."고 "출세"가 목소리를 높히면 "효도"가 "그래 너의 출세를 위해 평생을 너를 위해 아글타글하신 부모들의 가슴에 피눈물이 고이게 할거냐? 효성이 지극하면 북두칠성도 굽어본다 했다. 개구리가 되였다고 올챙이때를 잊지 말아라."고 반박했다. 나의 머리속에서 "출세"와 "효도"가 며칠을 두고 론쟁했다. 나중에는 결국 "효도"가 이겼다. 고민끝에 아쉽지만 학교에, 북경에 남으려던 생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출세와 효도를 모두 가질수가 없는 현실에서 도덕적 선택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나의 장래보다도 우선 량심이 있는 인간이 되고 싶었고 은혜를 아는 자식이 되고 싶었다. 평생 하나밖에 없는 이 아들을  믿고 사시는 부모들 가슴에 한을 박을수 없었고 마음에 피눈물이 고이게 할수 없었다. 나 하나를 "희생"하면 부모님들도 의탁할 곳이 있고 약혼녀도 더는 인생의 풍파를 겪지 않겠는데 나 하나가 잘되겠다고 효도에 못을 박고 도덕을 말아 먹을수는 없는 일이였다. 내가 입을 꾹 다물고있었기에 동학들은 졸업할 때까지도 리용식선생님이 나와 하신 담화를 감감 모르고있었다. 아니, 지금까지도 동학들이 거의 모르고있다. 일부 학생들이 북경에 남자고 앞뒤로 뛰여다닐 때에 내가 학교에서 남으라는것도 사절하고 "멍청이짓"을 하고 돌아왔다면 동학들이 믿지도 않을것이였고 받아들여지지도 않을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내가 연변에 돌아와 일자리를 배치받았으나 집이 없어 한동안 부모님들을 모셔 오지 못했다. 대신 우리는 주일마다 고향에 찾아가 위안을 드렸고 박봉을 잘라 식량대와 약비를 대드렸다. 이듬해에 20평방메터도 안되는 집이라도 차려져 시내에 모셔오려 했으나 아버지는 편찮은 몸으로 비좁은 집에 들어가 자식들한테 페를 끼치지 않으려 하셨고 어머니도 정든 농촌을 떠나기 싫어하셨다. 아버지가 지병으로 고향 마을에서 세상을 뜨셔서야 어머니는 어쩔수 없이 연길시에 들어오셔 우리와 함께 이곳저곳 여러 차례 이사하시며 10여년간 생활하시다 80여세에 세상을 뜨셨다. 마지막 몇해는 치매에 시달리며 고생하시기도 하였다. 그 10여년간 여러번 이사하며 시어머니를 모시고 애 둘을 키우느라 마음씨 고운 안해가 많은 고생을 했다.     아버지가 세상뜨셔부터 나는 해마다 청명과 추석이면 안해와 함께 산소에 다녀 왔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시자 어머니의 골회를 아버지산소곁에 모셨다.     1994년 11월, 조선 해당부문의 초청에 의해 부주필이였던 내가 연변일보사 조선방문대표단 부단장 신분으로 평양에 방문갔을 때 공교롭게도 어머니 3년제를 맞게 되였다. 나는 갖고 갔던 과일, 사탕, 과자 등속과 조선의 해산물로 평양 고려호텔 22층 침실방에 풍성한 제상을 차려놓고 제를 지냈다. 령험하신 어머니 혼이 들어와 상을 받으시라고 북쪽창문을 열어놓고 자신의 귀중한 청춘의 꽃잎, 생명의 꽃잎으로 나의 생명을 바꿔주시고 자신에겐 갸날프고 앙상한 꽃대만 남기셨던 고마운 어머니님께 감사의 절을 올렸다. 나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하느님께 빌었다. “자식을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평생 고생하시다 인제야 고향땅에 돌아오신 우리 어머니를 극진히 보살펴주옵소서!”     몇년전에 모아산양지쪽에 별장군이 들어앉게 되여 룡정시정부의 통지에 따라 부모들 산소를 부득불 옮기게 되였다. 사촌형과 누님들이 수십년동안 효도할대로 했으니 이 기회에 다시 옮기느라 말고 골회를 처리하라고 했다. 하지만 차마 그렇게 처리하기엔 어쩐지 불효감이 들어 아버지의 골회를 공경스레 하나하나 빠짐없이 파내여 연길시 장의관에서 화장하였다. 그리고는 골회함에 정히 넣어 어머니의 새  골회함과 함께 룡정시장의관에 한해 더 모셨다가 (묘소를 옮기게 한 룡정시정부측의 배치에 따라) 가문 어른들의 토론을 거쳐 이듬해 중양절에야 눈비를 맞으며 소하룡 합수목을 찾아 두분의 골회를 한줌한줌 정성스레 강물에 띄워 보냈다.     "전생에 가보지 못한 고향도 돌아보시고 세계유람을 하시라."며 골회를 띄이는 순간 갑자기 이왕지사들이 떠오르며 눈물이 왈칵 쏟아져나와 앞을 가렸다.     "아버지, 어머니 이것이 두번째 리별입니까? 이것이 영원한 리별입니까? 이 못난 자식이 지금 불효를 저지르고 있는것은 아닙니까?"     내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니 함께 갔던 둘째누님도 눈물을 흘렸고 매부와 사촌 형도 눈굽을 찍었다. 손꼽아보니 장장 32년간 부모님산소에 다녀왔었다. 우리는 주위사람들로부터 효자, 효부라는 칭찬을 많이 듣기도 했지만  지금 돌이 켜보면 많은 자식들처럼 왜 부모님들 생전에 더 잘해 드리지 못했던가고 후회되며 가슴이 알알해난다. 부모님들이 모두 세상을 뜨시고 내가 사업에서 일부 좌절을 겪었을 때에 “당시 내가 학교의 의도대로 북경에 남았더면 지금쯤 어떻게 되였을가?”는 허황한 생각을 굴려보기도 했었다. 후에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친구들과 동사자들은 거의 모두 “그때 참  착오적인 결정을 했었다.”고 맹랑해하고 나무람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지방에 돌아온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출세와 효도의 갈림길에서 자식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할뿐이다. 그런데 북경에 남고싶었던 마음이 아직도 어느 한 구석에 남아있는지 몇십년후에도 내가 북경에서 사업하거나 북경으로 전근해가는 황당한 꿈을 종종 꾸기도 했다. 자기를 낳아키운 부모한테도 효도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혈연관계가 없는 당과 국가를 위하여 한맘한뜻으로 충성할수 있겠는가. “꼬부랑나무가 산을 지키고 못배우고 못난 자식이 부모곁을 지킨다.”는 격언이 있다. 효도를 위하여 잠시 로 되는 것도 인간의 도덕이고 량심이라 하겠다. 물론 그 가 본인의 발전과 전도에는 영향을 끼칠수도 있겠지만.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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