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고 류원무선생을 추모하여
기축년 새해를 코앞에 둔 2008년 12월 7일, 이날은 우리 조선족문단의 우수한 원로작가이시며 다산작가이신 류원무선생이 너무도 갑작스레 우리와 영결한 문단의 비운의 날이였다.
류원무선생은 간암으로 확진된지 한달도 못되여 총망히 우리곁을 떠나셨다. 나와 함께 호북성에 가셔 연변작가협회문학상 후원자금을 유치하시고 돌아오신후 한달도 못되여 우리와 영결하신것이다.
그이는 죽음앞에서도 그처럼 태연자약하셨다. 그이는 이 세상에 고결한 정신 령혼기사의 마지막 웃음을 남기시며 조용히 저세상으로 가셨다.
한 작가협회 임직원은 <나는 작가들이 이처럼 위대한줄 다시 한번 깊이 느꼈다. 자기가 간암후기로 앓고있어 이제 영원히 눈을 감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것는 뻔이 아시면서도 어쩌면 그처럼 태연하고 소탈하실수 있었을가. 참 너무나 깨끗하고 멋지게 인생을 마치셨다. >고 감탄해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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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10일, 내가 중앙민족간부학원에서 중국작가협회제9차전국소수민족 문학<준마상> 종심평의에 참가하고 있는데 종래로 보지 않던 낯선 지방전화가 핸드폰에 들어왔다.
회의중이기도 하려니와 지금은 사처에서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아내는지 개구쟁이딱친구인듯 “출국 안하시겠소.”, “회의에 안오시겠소.”, “기념품을 안사시겠소.”, “명인책에 안들어 오시겠소.”, “광고를 안하시겠소.”하는 등 내용의 간녹일듯한 성가신 낯모른 전화들이 시도때도 없이 쓸어들어오는 때인지라 나는 개의치않고 계속 회의에 열중했다.
그런데 얼마후 그 낯선 지방전화가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듯 련속 핸드폰에 들어왔다. 받지 않으면 시끄럽게 계속 울려올것 같기에 나는 조용히 복도에 나가 핸드폰을 열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연변작가협회 허주석이십니까?...”
전화에서는 사나이의 석쉼한 한족말소리가 울려나왔다.
“녜, 그런데는요?...”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아, 반갑습니다. 저는 호북성 양번시에서 한 술회사 경리로 있는 류청이라하는 청년입니다. 저도 연변에서 나서자란 조선족인데 어려서부터 한족학교를 다니다보니 조선말을 잘 못합니다…”
“녜? 조선족이라구요? ...”
주체민족이 북적대는 나라의 한복판 중원지대에 조선족젊은이가 기업가로 있다니? 나는 핸드폰을 오른손에 바꿔쥐였다.
“제가 지난 국경절에 연변에 다녀왔는데 연변작가협회가 경제적으로 많이 어렵다고 하더군요. 많은 문학상들이 한국지원에 의해 꾸려진다던데 조선족으로서 조선족문학사업을 돕고싶은 마음에 이렇게 불문곡직 전화를 걸었습니다. 지금 저희 기업에서 거금을 들여 중국보고문학상도 협찬하고 있거든요…”
“녜? 뭐라구요? 조선족문학사업을 돕겠다구요?...”
나의 귀가 번쩍 열렸다. 그러잖아도 할일은 많으나 자금이 말라 양복에 넥타이를 맨 점잖은 거지가 되여 해마다 사처에 손을 내밀고 구걸하는판인데 주동적으로 우리를 돕겠다는 기업인이 나서니 귀맛이 당기지 않을수 없었다.
“구체문제는 허주석님을 한번 만나뵙고 의논할가 하는데요.”
나는 그의 신분과 신원을 다시 확인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지금 북경에 와 회의에 참가하고 있거든요. 이렇게 하면 어떨가요? 11월 중순쯤 중국작가협회에서 귀주성에 가 <제9차전국소수민족문학준마상>시상식을 하게 되는데 그때 제가 호북에 잠깐 들려 의논하면 어떨가요?”
“녜, 그게 좋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는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그때 다시 만납시다. 안녕히.”
핸드폰을 내리면서 나는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였다. 나젊은 조선족기업가가 조선족이 희소한 중원지대에서 큰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는것에 놀라왔고 주동적으로 조선족문학사업을 돕겠다고 나서는 기업가가 있다는것이 기쁜 일이 아닐수 없었다. 하지만 큰 기대는 걸지 않았다. 기업인들이 도와나선다해도 기껏해야 2ㅡ3만원이 고작이였기 때문이였다. 그래도 <벽돌집>을 지을수는 없어도 <초가집>은 지을수 있을것 같아 사절할수는 없었다.
며칠후 <준마상>평의가 고조에 오르고 있을 때에 낯선 핸드폰전화번호가 울려왔다. 나는 혹시 호북성 조선족기업가의 전화가 아닐가싶어 주저없이 전화를 받았다. 아니나다를가 바로 그의 전화였다.
“허주석님, 안녕하세요? 호북에 있는 류청입니다. 우리 기업에서 협찬하는 <제3차중국보고문학상> 시상식이 11월 8일에 이곳에서 열리게 되는데 그때면 우리 동사장님도 모두 만나보실수 있게 될겁니다. 보고문학상시상식에 중국작가협회 령도들도 참가하게 되는데 허주석님도 그 시상식에 참가하실겸 6일쯤 이곳에 오실수 없겠습니까? 우리 호북성작가협회 황주석님도 허주석님을 잘 아시던데요.. 왕복 비행기표값, 호텔주숙비 등 모든 비용은 저희들이 담당하겠습니다.”
“11월 6일에요?...”
좀은 뜻밖이였다. 그때 우리는 연변작가협회에서 처음으로 주관하게 되는 <제2회김학철문학상> 시상식날자를 11월 5일로 잡아놓고 한창 준비중에 있었다.
“그때면 다른 일들이 좀 있긴한데… 하여간 그때에 떠나는걸로 힘써볼게요…”
“그래요? 반갑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시상식대회의 공식 초청장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저, 그런데 한가지 부탁이 있는데요…”
“무슨 부탁이신지 말씀하십시오. 제가 할수 있는 일이면…”
“다름아니라 연변작가협회에 저와 한 성씨를 가진 작가 한분이 계신데 오실 때 같이 오실수 없겠는가 해서요…”
“한 성씨라구요? 류씨성을 가진 분이 몇분 있는데 어느 분을 말씀하는건지요?”
“류원무 그분을 말입니다.”
“녜? 그분과는 어떻게 아시는 사이인가요?”
“녜, 전에 한마을에서 사시던 분인데 잘 아는 사이입니다.”
“녜, 그렇군요, 그런데 그분이 금년에 두번 수술하셔서 먼길을 떠날수 있겠는지 모르겠군요, 제가 연변에 돌아가면 그분과 잘 의논해 보지요..”
“녜, 고맙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저으기 의아쩍었다.
(같은 성씨라니, 류원무선생과 친척사이인가? 류원무 선생도 종래로 호북에서 기업을 하는 친척이 있다는 얘기를 하신적이 없었는데.)
북경에서 <준마상>평의를 원만히 마치고 돌아온 이튿날로 나는 류원무선생댁에 전화를 걸었다.
“류선생님, 호북에서 기업을 하는 류청이라는 경리를 아십니까? 그분이 연변작가협회를 돕고싶다며 전화를 걸어왔던데요, 전에 선생님과 한 마을에 살았다며 잘 아는 사이라던데요?”
류원무선생은 소탈하게 허허 웃으셨다.
“그런 아는 사람 있어요. 허주석이 시간이 있다면 지금 내 작가협회로 건너가지요.”
나는 류원무선생과 무릎을 마주하고 앉아서야 호북에 있다는 류청이 바로 하나밖에 없는 류원무선생의 아드님인줄 알고 깜짝 놀랐다. 또한 류청이 나한테 전화하게 된 경과도 알게 되였다.
지난 국경절기간에 류청은 약혼녀와 함께 반년도 안되는 사이에 두번씩이나 수술을 한 아버지가 걱정되여 아버지를 뵈러 먼 호북에서 달려왔다.
아버지는 류청에게 지난 4월에 작가협회에서 전체 직원들을 조직하여 신체검사를 할 때에 페암초기가 발견되여 제때에 수술을 받을수 있었기에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있게 되였다며 작가협회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아들도 아버지가 고맙게 생각하는 작가협회에 감사함을 금할수 없었다.
아들이 이젠 자기가 경영하는 기업도 괜찮게 되여가고 있으니 뭔가 고향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싶다며 연변에 희망소학교 같은걸 꾸리면 어떻겠는가고 했다. 이에 아버지는 주저없이 그래도 교육은 중시하는 부문과 관심하는 사람이 많다며 지금 작가협회가 매우 어려우니 작가협회를 도와 조선족 문학사업을 춰세우는것이 급선무라며 작가협회상황과 조선족문단의 정황을 아들에게 들려주었다.
작가협회가 살아야 문단이 산다는것이 류원무선생의 고집이였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작가협회를 돕기로 하였다. 류원무선생은 이 일은 직접 작가협회 허주석과 의논하되 절대 류원무의 아들이란 얘기를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작가협회를 도우려는것이 자기 마음일뿐 그 어떤 명예를 위해 좋은 일을 한다는듯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다는것이였다.
그런데 국경절기간 내가 철응주석을 단장으로 하는 중국작가대표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가 제1회한일중동아세아 문학포럼에 참가하고 있을 때라 류청은 나를 만나지 못하고 호북에 돌아가게 되였다.
그는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을 잊지 않고 사업여가에 북경에 있는 나한테 전화를 걸어 온것이였다.
나는 감격되여 류원무선생의 손을 굳게 잡았다.
“고맙습니다. 작가협회를 위해 참 좋은 일을 하셨습니다. 조선족문단을 위해 큰 일을 하셨습니다. 작가협회를 대표해 충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뭘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지만 조건이 주어지지 않아 못하고 있을뿐이지 작가들의 마음을 꼭 같을겁니다. 작가협회를 돕는것은 오랜 회원으로서 으례 해야 할 일이지요. 허주석도 이 일이 성사되기전에는 누구한테도 말하지 마세요..”
좋을 일을 하시면서도 티를 내지 않고 남을 낮추어말하지 않는 작가적 고매한 덕성을 갖춘 류원무선생의 말씀들은 나의 페부를 뜨겁게 달구었다. 나는 그이의 건강을 념려하며 함께 호북에 다녀올 일을 의논하였다.
11월 1일 저녁 9시경, 내가 집에 있는데 류청한테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허주석님 일이 좀 변화가 생겼네요, 아마도 3일쯤 들어오셔야 할것같습니다. 우리 동사장님이 출국하시게 되여 주석님이 6일에 들어오시면 동사장을 만나볼수 없게 되네요, 그래도 동사장이 계실 때 오셔야 일이 순조로울뗀데…”
“아하. 어떻하죠? 5일에 다른 한가지 문학상 시상식을 갖기로 하고 이미 다 포치했는데…”
“원래의 약속시간에 맞춰 그쪽일을 배치하셨을줄 알고 있습니다만 동사장이 귀국하신후에 오시게 되면 년말결산전에 예산안을 내놓기 어렵게 되네요. 하신다는 그 문학상시상식도 아주 중요하시겠지만 좀 뒤로 미룰수는 없겠습니까?”
아하, 일이 참 딱하게 되였다. 3일에 들어가지 않으면 그쪽일이 금년내에 성사되기 어렵고 이미 다 포치해놓은 김학철문학상시상식도 대밑에 와 미루기도 어려운 일이였다.
그래도 이쪽일은 다 지어진 밥이여서 괜찮지만 그쪽일을 떼우지 말고 하루빨리 성사시키는것이 먼저 해야 할 큰 일이였다. 어렵기는 해도 이쪽 문학상을 며칠 미룬다하여 크게 랑패될 일은 없었다. 나는 고려끝에 김학철문학상을 잠시 뒤로 미루기로 하고 해당분들한테 량해를 구하는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나는 주당위선전부책임자와 사회자 및 축사를 준비시킨 분들한테 일일이 전화를 걸어 특수상황이 생겨 시상식을 10일 이후로 미루어야겠다고 설명하는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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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일 아침 7시 40분, 나와 류원무선생은 아침 일찍 서둘러 북경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10시에 북경에 도착하여 오후 1시 30분에 무한으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게 되였다.
나는 비행기에 오른후 기내식으로 얼마든지 점심을 에때울수 있었으나 몸이 편찮은 류원무선생이 아침식사도 설치셨다기에 점심때가 되자 나는 그이를 휴계실식당으로 모셨다. 류원무선생은 별말씀없이 뒤따라오셨다. 그이가 밀국수를 주문하시기에 나도 그대로 따랐다. 그런데 그이는 절반도 안드시고 저가락을 내려놓았다.
“왜 그렇게 안드십니까? 입맛이 틀리시는가요? 다른걸로 주문할가요?”
“그만 두세요. 밀국수면 소화가 괜찮겠는가 했는데 그것도 그저 그렇구만.”
“기내식이 일을걸 알면서도 선생님때문에 여기에 모셨는데 그렇게 안드시면 어떡합니까?”
“그랬어요? 그런걸 난 또 허주석이 배고파 그러는가 해서 군소리없이 따라왔지.”
후에 알고보니 류원무선생은 그때 벌써 암세포가 이미 간장에 확산되여 소화를 저애하고 있었지만 그때는 그런줄을 모르고 있었다. 류원무선생은 간부위가 무겁고 부딧하다며 이제 돌아오면 간장을 검사해봐야겠다고 하셨다. 나는 속으로 은근히 걱정스러웠다. 이미 페암수술을 하신 분인데 혹시…
나는 점심값을 치르시겠다고 서두르는 그이를 밀막았다. 참 고지식하고 후더운 분이셨다.
우리는 오후 제시간에 비행기에 올라 세시간후에 무한에 도착했다. 류청이와 그의 약혼녀가 공항에 마중 나와있었다.
머리를 막깎고 작달막한 키에 다부지게 생긴 류청은 아버지를 보자 어린애마냥 달려와 아버지를 얼싸안았다. 이제 만나본지 한달밖에 안되는데 저렇게 반가울수가. 부자지간의 풋풋한 혈육적 인정미가 푸근히 안겨왔다.
약혼녀는 이쁘장스럽고 호리호리한 사천처녀였는데 류원무선생의 짐을 받으며 말끝마다 사글사글하게 아버지라고 하는데 참 귀염상스러웠다.
우리는 류청이 몰고온 승용차에 앉아 그들 술기업이 자리잡고 있는 양번시로 향했다.
양번(襄樊)시는 지난날의 양양(襄阳)시와 번성(樊城)시를 합병하여 이루어진 지구급 도시이다. 우리 나라 복지에 자리를 잡고있는 양번시의 면적은 1.97평방킬로메터로서 연변땅의 절반도 안되지만 인구는 600만에 달하며 시구역 인구는 220만명에 달한다.
양번시는 전국력사문화명성, 중국매력도시, 국가원림도시, 중국우수관광도시로 명명되여 있다. 양번시는 력사적으로 상인들이 운집하고 서생들이 활개치던 곳이며 군사가들이 반드시 쟁탈하는 군사요충지였다. 중국의 고전명작 <삼국연의> 120회중32회 이야기가 이곳에서 발생된 일이라 한다. 이곳에는 지금도 제갈량의 고거와 활동지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호북성에서 무한다음으로 가는 큰 도시인 양번시는 무한에서 북쪽으로 400여 키로메터 떨어져있었다.
호북에서 처음으로 아버지를 모시게 된 류청은 흥분에 젖어 젊은이의 패기로 180키로메터 시속으로 차를 냅다 문대고있었다. 자기는 어제밤 한잠도 바로 자지 못했단다. 오늘 아버지를 맞을 생각을 하니 도무지 잠이 오지 않더란다. 이 나이를 먹어도 자기는 아버지와 응석도 잘 부리는데 때론 아버지를 형님이라 한다며 하하하 소리내여 웃었다.
류원무선생은 가타부타 말씀없이 그저 시무룩히 웃으실뿐이였다. 문턱을 넘어서지 않은 며느리가 아버지, 아버지하고 개여올리며 귤을 발라드리기도 하고 쵸콜레트를 쥐여드리기도 했다. 한족처녀가 조선족 <시아버지>를 곰살궂게 대하니 곁에서 보기에도 좋았다.
양번시에 거의 도착할 무렵 류청의 핸드폰이 자주 울렸다. 들어보니 저녁연회를 어디에다 배치했는가 하는 문의내용들이였다. 류청은 핸드폰을 거두면서 자기수하 경리들이 알리지도 않았는데 아버지가 오신다는 소식을 얻어듣고 서로 연통하며 지금 저마다 저녁연회에 참석하겠다고 저런단다.
아직도 비가 자주 내린다는 남방의 양번지구는 습해서인지 해질녘인데도 산과 들에 안개가 얄포름히 끼여 가시도가 많이 떨어졌다. 이곳은 우리보다 해가 많이 길어 저녁 6시가 되여도 어두워지지 않았다.
우리는 어슬녘에야 우리의 주숙을 잡았다는 한강호텔에 이르렀다. 4성급인 한강호텔은 랑번시에서 가장 호화로운 호텔이란다. 이곳에는 한국의 한강과 꼭 같은 이름을 가진 강이 시내 한가운데를 꿰지르며 흐르고 있었는데 호텔도 강 이름을 따라 지은것이였다. 후에 식사할 때 한 신문사사장의 말에 의하여 한국의 조상들이 이곳에서 한국에 건너가 이곳의 강과 지방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다 썼는데 한국의 한강 발원지와 한강 끝자락 지방이름이 이곳 이름과 꼭 같다는 력사기재가 있다고 했다. 나는 그것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를 믿을수가 없었다. 그 사장은 또 중국의 한 학자가 이러한 내용의 론문을 잡지에 공개발표하였다가 한국정부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고 했다.
류청은 아버지와 나를 응접실이 딸리고 화장실 두개, 침실이 갖춰진 널찍한 스위트룸(套间)에 각각 들게 하였다. 그들에게 큰 부담을 끼치는것 같아 나는 표준방에 들어도 괜찮다고 했으나 고향 지도자가 오셨는데 의례 이런 방에 모셔야 한다며 나를 그예 밀막았다. 우리는 호텔에서 대충 정리하고 그들이 배치한 환영연회장으로 옮겨갔다.
환영연회를 베푼다는곳은 양번시에서도 이름있는 한 술집에 배치했는데 널직한 대청에 큰상 세상이 준비되여 있었다. 원래는 주변의 부총경리와 판공실 일군들로 한상을 준비시켰으나 기층 각 부문의 경리들이 소식을 듣고 자발적으로 몰려와 판공실에서는 별수없이 세 상으로 늘였단다. 류청이 부문경리들은 후에 보자고 극구 제지했으나 총경리의 아버지가 오시는데 자기네가 어찌 빠지겠느냐며 <령도의 지시를 어기며> 이렇게 부득부득 모여왔단다.
환영연회는 자별나게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진행되였다. 연회에 참석한 크고작은 경리들이 하나하나씩 술잔을 들고 류원무선생곁에 와 경의를 표하며 술을 권하였다.
그들 남녀를 물론하고 모두가 <류총경리의 아버지면 자기들 아버지> 라며 <아버지, 아버지>하고 친절하게 부르는 소리가 입에서 떨어질줄 몰랐다. 류청이 짭디짧은 반년사이에 얼마나 큰 성과를 따내고 위망이 높았으면 민족이 다른 임직원들이 저럴듯 친절할가싶었다. 류원무선생과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그들은 나한테도 륜번으로 술을 권하며 우수한 조선족인재를 양성하여 자기들한테 보내주어 고맙다며 류청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여러 경리들이 절반쯤 륜번으로 술을 권한후 류원무선생이 술잔을 들고 일어섰다. 그러니 여러 경리들은 아버지가 자식들한테 술을 권하는데 일어설 필요가 없다고 법석이였다.
“우리 류청에 대한 여러분들의 지지와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류청이가 사업에서 자그마한 성과라도 거두었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의 지지와 협력과 갈라놓을수 없습니다. 금후에도 계속 류청을 지지해주고 잘 협력해줄것을 부탁드립니다.”
세상에 앉은 여러 남녀경리들은 모두 일어나 박수로 감사를 표하고 나서 잔을 들어 굽을 냈다.
나도 류청고향의 <지방령도> 자격으로 잔을 들고 일어섰다.
“류청의 사업을 힘껏 지지해주고 있는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부터는 양번시 인민들뿐만 아니라 연변의 류청 고향인민들도 자기의 아들과 그 아들이 운영하는 석화술기업을 지켜보고 있을것입니다. 류청이 보다 큰 성과를 따내고 석화술기업이 날로 번영창성하여 소속 임직원들의 돈주머니가 갈수록 두툼해지기를 기원합니다. 여기 앉은 여러 경리님들과 관리일군들이 머저 부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 경리들은 좋다고 또 일어서 힘찬 박수로 감사를 표하고는 잔들을 통쾌하게 굽냈다.
류원무선생도 나도 그날저녁 그들의 열성과 환대에 못이겨 평소보다 술을 퍼그나 더 마셨다.
이튿날부터 소속 각 부문별로 류원무선생을 초대하는 연회가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류원무선생은 몸이 점점 불편해져 응부하기 어려웠다. 연회에 참가하면 보통 서너시간씩 걸리는데 몸이 불편한 류원무선생에게는 큰 고역이였다. 간 부위가 아파나고 소화가 되지 않아 산해진미를 앞에 두고도 몇저가락 집지 못하고 수저를 내려놓고는 연회가 끝날 때까지 앉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들에게 여러 분들의 성의는 고맙지만 네가 나를 생각하면 이젠 연회를 그만두게 하라고 <사정>했다. 하여 류청은 각 부문의 연회배치를 밀막아버리고 끼니마다 소화가 잘 될수 있는 음식을 챙겨드렸다. 그래도 류원무선생의 식사량은 줄어들기만 했다.
우리는 류청의 안내로 그의 사무실에도 가보고 랑번시의 술판매회사들에도 가보았으며 양번시와 100여키로메터 떨어져있는 곡성현(谷城县) 석화진(石花镇)에 있는 술공장에도 찾아가 술생산과정을 돌아보기도 했다.
류청이 총경리로 있는 호북성 양번시 석화술유한회사는 138년의 력사를 가지고 있는 호북성에서 가장 오랜 술기업으로서 현재 600여명 임직원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오랜 기업도 시장경제의 충격을 이기지 못해 점차 내리막 길을 걷게 되였다. 기업을 춰세울 새로운 인재와 경영리념이 시급했다.
그때 류청은 중국기획연구원 객원교수, 중국기획협회 상무리사의 신분으로 전국각지를 돌아다니며 기업운영과 기획관리 등에 관하여 강의하고 있었다. 그가 광주에서 강의하고 있을 때에 우연히 석화술유한회사 동사장 조원량이 류청의 강의를 듣고 귀가 번적 열리게 되였다. 그는 한주일 사이에 네번이나 광주에 내려가 류청과 면담을 나누었다. 류청은 석화술기업에 대한 소개와 직면한 곤난을 듣고 단도직입적으로 석화기업의 병근원을 면바로 집어내고 <치료>방안을 제시하였다. 류청의 경영리념은 동사장을 깊이 흡인하였으며 눈앞이 환해지게 하였다.
진단을 옳게 해도 그 <병>을 치료할 의사가 있어야 했다. 동사장은 정중히 류청을 자기기업 총경리로 모실 의향을 내비쳤다. 류청은 일찍 <중국이동통신>, <하이얼>, <오량액>, <커룽>, <붉은 잠자리> 등 큰 기업들에서 사업한적 있었는바 양번시의 석화술기업은 그에게 있어서 소형기업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류청은 한 로인의 진정과 자기의 술기업에 한없이 애착하는 그의 경영인정신에 감동되여 고려끝에 동사장의 진정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2008년 5월 12일에 류청은 동사장의 손에서 초빙서를 받아들고 정식으로 석화술유한회사의 집행총경리에 부임하였다. 그날 오후에 있은 <석화 2008년 경영회>에서 그는 <취임연설>을 하였다. 브랜드경영, 시장정보, 판매경로개척, 기업정신, 기제세밀, 경영관리 등에 관한 그의 새로운 리념과 경영전략은 종업원들의 두눈을 휘둥그래지게 하였으며 기업소생에 신심을 가지게 되였다. 이날 사천 문천지구에서 대지진이 일어나는 같은 시각에 석화기업에서도 <소지진>이 일어났다. 종업원들은 새로운 총경리의 부임에 커다란 기대를 걸었으며 기업의 새 희망을 보게 되였다.
하지만 길은 순탄하지만 않았다. 일부 부문경리들은 하늘에서 난데없이 떨어진 이 불청객 <락하산병>을 근본 믿지 않았다. 자기들이 10년, 20년씩 술기업에서 실천하며 갖은 노력을 다해도 시장경제의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는데 술기업이란 근본 알지도 못하는 <외계인>이 뛰여들어 술기업을 춰세운다는것은 수탉이 알 낳으려는 주제넘은 일로 여겼다.
어떤 부문경리들은 그가 수백리씩 달려 아래에 내려가 정황료해를 할 때에도 물 한모금 권하지 않았고 담배 한대 건네지 않았다. 때론 시끄러운 일을 조작하며 의도적으로 그와 엇서기도 했다. 그래도 류청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자기의 경영리념대로 일을 밀고나갔다. 그는 부문경리들을 하나도 바꾸지 않고 원래의 인마를 이끌고 술판매시장이 갈수록 위축되고 있는 형편에서도 년간 술 판매량을 원래의 1.3억원에서 3억으로 제정했다. 사람들은 입을 딱 벌렸다.
기업가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있다. <작은 기업에서는 일을 만들고 큰 기업에서는 사람을 만든다.>, <일을 만드는 회사는 크지 못하고 사람을 만드는 회사는 작아지지 않는다.> 전세계적 상품경쟁을 관찰해보면 두가지 기업제품이 비슷할 때에 소비자들은 눈부신 광고전략에 마음을 두는것이 아니라 기업의 량심, 성심, 애심에 마음을 두는것이다. 오직 적극적으로 사회의 책임을 감당하는 회사만이 소비자들의 존중을 받을수 있고 사회의 인정을 받을수 있다는것이 류청의 견해이고 리념이였다. <기업은 사회의 공민으로서 반드시 상응한 사회의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고 인정한 류청은 부임되여 첫날에 첫번째로 한 일이 바로 사천 문천지진재해구에 20만원을 기증한것이다. 그의 기업은 양번시와 호북성에서도 가장 빠른 시간내에 가장 많이 기증한 기업으로 되여 대번에 성과 시 보도매체들과 당정부문의 중시를 불러 일으켰다.
양번시에서는 단오절이면 주민들이 대문에 쑥을 꽂는 전통적습관이 있다. 류청은 전체 직원들을 동원하여 숱한 쑥을 준비하였다가 단오절날 새벽 2시에 손전등을 켜들고 랑번시의 거리와 골목을 누비며 쑥을 꽂을수 있는 대문들에 모두 쑥을 꽂아놓게 하였다. 하여 단오날 아침 양번시의 천가만호에서는 석화술회사에서 보내준 자그마한 단오절선물을 받고 크게 감동되였다. 시민들은 석화술기업을 단단히 기억하게 되였다. 다른 기업에서 생각하지 못한 작은 선물로 사람들에게 무한한 신뢰와 감동을 주는 큰일을 석화술회사에서 한것이다. 석화술회사의 애심과 성심에 보답하고저 시민들은 분분이 석화술을 사 마셨다. 류청이 부임된 한달후 석화술기업의 판매량은 1500만원에 달하여 지난해 같은 시기보다 1.8배 늘어났다.
류청은 부임된 두달사이에 만키로메터를 달리며 200여명 가맹상들을 찾아 정황을 료해하였다. 석화의 여러 판매구역, 류통시장, 부문회사, 판사처를 돌아다니며 종업원들의 사업환경, 생활정황. 판매정황을 알아보며 문제점들을 찾아내여 하나하나 해결하군 했다.
류청의 새로운 경영모식과 새로운 경영리념에 따라 석화술기업은 달마다 놀라운 속도로 발전되여 치렬한 시장경제속에서 침체되고 내리막 길을 걷는 다른 기업들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종업원들의 로임봉투도 갈수록 두터워졌다. 원래 기업을 떠나려던 사람들도 새 희망을 보고 눌러앉았다. 이미 떠났던 사람들도 다시 찾아와 받아달라고 애원했다.
처음에는 <하늘에서 떨어진 락하산병>을 믿지 않고 버성기기만 하던 부문경리들도 점차 류청의 경영능력에 탄복하게 되였으며 그를 믿고 따르게 되였다. 석화기업의 종업원들은 그를 삶의 구성으로 간주하게 되였다.
많은 정부 해당부문과 보도매체들이 찾아와 석화술회사의 발전<비밀>을 알고싶어하면 류청은 갖은 핑게로 회피하군 했다. 이제 시작에 지나기 않는데 <허리를 굽히고 목소리를 낮추는>것이 기업발전에 유리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석화기업에서는 문화사업을 지지하는 사업을 석화기업발전과 진흥을 위한 하나의 중요한 내용으로 삼고 올해 100여만원을 투자하여 <제3차 중국서지보고문학상>을 협찬하였다. (서지(徐迟)는 우리 나라 저명한 보고문학작가로서 저명한 수학가 진경윤의 사적을 쓴 보고문학 <골드바하의 추측>의 작자이다.) 11월 8일, 류원무선생과 나는 이 문학상시상식에 참가하였을뿐만 아니라 대회측의 배치로 귀빈의 신분으로 주석대에 올라 중국의 유명한 보고문학작가들에게 상패와 상금을 발급하였다.
그날 오후 류청은 다른 일들을 제쳐놓고 나의 침실로 찾아왔다.
“이번에 허주석님께서 저의 아버지를 모시고 이처럼 먼 곳에까지 오셔 참 고맙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이번 기회에 오시지 못하면 이제 다시는 오실 기회가 없게 될것입니다. 아버지의 신체상황으로 보아 아마 반년을 넘기지 못하실겁니다. 저는 아들로서 아버지 성격을 잘 압니다. 겉으로는 저렇게 소탈하셔도…아버지는 가정과 저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하신 분이신데…”
류청은 목이 꺽 메여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아버지앞에서는 언제나 쾌활하고 활달한 아들로 응석까지 부리던 류청의 마음속에는 이처럼 깊은 걱정과 비감이 숨겨져있었다.
류원무선생은 호북에 와서 아들이 일하는 모습을 친히 보시고는 많은 위안을 받으셨고 기분도 퍼그나 좋으셨다. 하여 나는 류원무선생이 이제 반년을 넘기지 못하리라는 류청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버지가 이제 살아계실날이 얼마 없으니 아들로서 단 하루라도 아버지를 즐겁게 해드리려는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앞에서 격에 맞지 않게 애들처럼 응석을 부리기도 합니다만. 아버지의 몸이 많이 불편하신줄 알면서도 이 먼 길을 오시게 했습니다…”
젊은이는 어깨를 들먹이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나는 그의 어깨를 다독여주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위안했다.
“아버지는 저 몸으로도 늘 작가협회사업을 걱정하시고 조선족문학사업을 걱정 하셨습니다. 제가 아버지께 마지막으로 해드릴수 있는 위안이 작가협회를 도울수 있으면 도우라는 아버지의 소원을 꺼 드리는게 아니겠습니까. 이곳에 오셔서도 날마다 저만 보시면 계약을 작성했느냐 하는 <잔소리>입니다. 이제 계약이 다 작성되였으니 보시고 별 의견이 없으시면 오늘 체결하도록 합시다.”
내가 계약서를 받아보니 우리가 의논된 내용이 기본상 반영되여 있었다. 나는 간단한 수개의견을 제기하고 계약서에 동의를 표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나의 의견에 따라 몇곳을 수개하였다.
“체결은 아버지 침실에 가서 하는게 어떻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나는 그의 마음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우리는 류원무선생 침실에 가 그의 앞에서 계약을 체결하고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아버지앞에서 류청은 또다시 쾌활한 아들로 돌아왔다.
“하하, 존경하는 우리 아버지, 이젠 시름이 놓이지요?”
류원무선생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날 저녁으로 우리는 북경행 려객기에 올랐다. 류청네 10여명 일행이 공항에 와 우리를 바래였다.
3
밤중에 북경에 도착하여 비행기에서 내리자 류원무선생은 다리를 옮기기 매우 힘겨워 하셨다. 간부위가 아파나며 켜운다고 하셨다. 내가 곁에서 부축해 드릴려해도 기어코 사절하시며 자기절로 완강히 걸으셨다.
이분은 워낙 이런 분이셨다. 그이는 사리를 위해 종래로 불평을 부리지 않았고 조직에서 주는 자그마한 혜택이라도 언제나 고맙게 받아들이군 하셨다. 당신이 몸이 불편해 병원에 입원해있을 때도, 페암수술을 하고 전립선수술을 받았을 때도 종래로 단위에 알리지 않는 성미셨다. 우리가 후에 알고 크게 나무라시면 허허 웃으시며 “모두가 단위일로 바쁘겠는데 뭐 개인일까지 다 알려 무담을 끼치겠느냐”고 하셨다. 이날도 선생은 간통을 참으시며 자기발로 천천히 걸어 나오시다보니 우리는 맨 마지막 손님으로 공항을 나섰다.
북경에서 류청이 부탁한 친구가 마중하여 우리를 호텔로 안내했다. 류원무선생은 호텔에 온 후에서 계속 통증을 느꼈으나 내가 너무 걱정할가봐 되도록 내색을 내지 않으셨다.
이튿날 연길에 도착하여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내가 이 길로 병원에 가 진찰하자고 했더니 그이는 지금은 피곤해 쉬고 싶다며 래일 보자고 하셨다. 나는 그 말씀을 곧이 듣고 집에까지 모셔다 드리고는 돌아섰다.
그런데 이튿날 전화를 드려 오늘은 병원에 가보셔야 하지 않겠는가고 했더니 어제 오후에 맏딸과 함께 병원에 갔다오셨다지 않는가. 나에게 페를 끼치지 않을려고 나를 밀막아 보내셨던것이다. 진찰결과를 물었더니 그저 문제가 좀 있는것같다고 하실 뿐이였다. 나는 미심쩍어 아들 류청이한테 전화를 걸어 물었더니 이미 간암말기로 확진되여 수술할 필요가 없어 집에 돌아와 점적주사를 맞고있는 형편이란다. 이젠 반년이 아니라 두달도 넘길것 같지 못하다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이의 병이 이처럼 엄중할줄은 미처 생각지 못한터였다.
이튿날 나는 절대 오지 말라고 밀막는 류원무선생의 사절도 마다하고 직원들과 함께 그의 집으로 병문안을 갔다. 본인도 이미 자기의 병세를 알고 있는지라 우리도 뭐라고 위안하기가 어려웠다. 우리가 그래도 모르는척 치료를 제때에 잘하면 인츰 완쾌될것이라는 <거짓>에 류원무선생은 저승을 앞둔 사람 같지 않게 소탈하게 웃으시며 “내 병세는 내가 다 알고있으니 위안할 필요가 없다.”시며 우리와 롱담도 하시는것이 아니겠는가. 죽음앞에서도 너무나 초연하신 그이의 소탈한 모습에 되려 우리들의 눈시울이 젖어올랐다.
“김성휘, 리행복선생 같은분들은 60도 넘기지 못하고 세상떴는데 나는 70도 훨씬 넘겼으니 이만큼 살면 잘산거지요. 뭘 아수할게 있겠어요.. 허허허.”
나는 13일에 김학철문학상시상식을 할 때에 호북에 갔다온 정황을 작가들한테 회보할려하는데 류선생께서 그때엔 그래도 나오셔 자리에 계셔야 하지 않겠는가고 하며 내가 책임지고 모셔가고 모셔오겠다고 했다.
그러니 선생께서는 “호북에 갔다온건 나하구 상관없는 일로 쳐주세요. 하지만 다른 상두 아니구 김학철선생 문학상 시상식이라니 내 꼭 나가도록 하겠어요.>라고 하셨다. 하지만 류원무선생은 그날 아침 나한테 전화를 걸어와 몸이 생각처럼 말을 듣지 않는다며 시상식에 끝내 참석하시지 못하셨고 내가 소개한 호북행차경위도 친히 듣지 못하셨다. 하지만 시상식에 참가한 문인들은 류원무선생의 고마운 소행에 감동되여 열렬한 박수로 류원무선생에게 고마움을 표하였다. 그후 적지 않은 작가들이 류원무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병문안도 할겸 나의 말을 전달해주기도 하면서 다시금 고마움을 표했다.
류원무선생이 병석에 계시는 기간 몇몇 원로분들과 소설계 중견들이 류원무선생의 병이 더 위중해지기전에 작가협회의 명의로 선생의 소설창작 51주년 기념회를 가질것을 제기하여 왔다.
내가 이러한 건의를 두고 류원무선생의 의견을 물었더니 류원무선생은 몸이 아파 참가할수 없다는 리유로 완곡히 사절하셨다. 그래도 일부 작가들은 본인이 몸이 아파 결석해도 기념회를 그냥 가지자는데로 의견을 모았다. 내가 재차 작가들의 의견을 류원무선생에게 전달하자 류원무선생은 나를 생각하면 절대 그런 일을 벌리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제야 안된다는 리유를 세가지로 밝히시는것이였다.
“첫째, 내 우에 나보다 우수한 선배분들이 많았지만 작가협회의 명의로 그 무슨 창작 몇주년 기념회 같은걸 연적이 없었다. 그러니 내가 하면 주제넘은 일로 되고만다.
둘째, 사람들이 이번에 나의 아들이 작가협회에 문학상협찬을 하였기에 이번 기념회를 연다고 여길수도 있으니 나를 욕먹일 일을 하지 말아달라.
셋째, 저승길을 눈앞에 두고 창작기념회 같은걸 연다는건 죽는 사람한테 환갑상을 받기는것처럼 아무런 의의가 없으니 헛수고를 하지 말아달라.”
내가 작가 여러분들의 의견이니 잘 고려해 보시라고 했더니 작가들의 성의는 고맙게 받겠으나 더 고려할 여지가 없다고 잡아떼셨다.
11월 28일, 나와 우요동이 주당위 선전부 채영춘 부부장일행을 배동하여 류원무선생을 위문하러 갔다. 채영춘부부장은 리흥국부장의 따뜻한 문안을 전하면서 하루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시길 바랐다. 그때에도 류원무선생의 문학창작기념회를 열데 관한 문제가 의론되였다. 채영춘부부장도 류원무선생이 그런 영광을 누릴 자격이 당당하시다며 설득했으나 류원무선생은 자기의 견해를 굽히지 않으셨다. 채영춘부부장은 나오면서 <참 덕성이 높으신 분>이라고 감탄하였다.
12월 3일, 내가 장춘에 출장가는 날에 류원무선생은 병이 위중해져 연변병원에 입원하게 되였다. 마침 류청이 아버지가 오래 앉으시지 못하리라는걸 알고 미혼처와 함께 연길에 와 있었다.
나는 단위에 전화를 걸어 류원무선생의 마지막 길일수도 있으니 전체 직원들이 류원무선생 병문안을 가보도록 하였다. 나도 앞당겨 6일 연길에 도착하는 날로 병원에 가 류원무선생을 뵈였다.
병원에는 류청과 그의 미혼처, 삼촌부부, 류청의 두 누나가 류원무선생의 림종을 지키고있었다. 수척할대로 수척해져 병석에 누워있는 류원무선생은 이미 말을 못하고 계셨다. 내가 그의 손을 잡으며 나를 아실만한가고 했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시였다. 류청은 조용히 나를 밖으로 잡아끌었다 그는 복도에서 아버지가 며칠 지탱못할것 같은데 아마도 후사처리를 준비해야 할것같다고 했다.
나는 그와 후사문제를 의논한후 곧장 단위에 돌아와 후사준비를 포치했다. 그날은 토요일이라 직원들이 모두 휴식하고 있었지만 해당인원을 불러 당안을 찾아놓게 하고 추도사작성, 추도회내용, 추도회에 참가할 문인들의 통지범위 등을 배치하였다.
그날저녁 내가 류청을 동무하여 류원무선생의 림종을 지키려고 병원에 다시 갔더니 류청네는 출장갔다와 피곤하실텐데 자기네들이 있으니 어서 돌아가 쉬시라며 등을 밀었다. 류원무선생은 이미 의식을 잃고있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오후부터는 각혈하기 시작하였단다. 아직 시집문턱을 넘어서지 않은 류청의 미혼처 쇼예가 곁에서 시중을 들고있었다.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그녀의 두눈은 벌겋게 부어있었다.
병실에는 류청의 삼촌부부, 두 누나 등 여섯이 쏘파와 땅바닥에 자리를 펴고 누워자며 륜번으로 림종을 지키고 있었는데 내가 있으면 되려 그들의 휴식에 방해가 될것 같아 나는 한시간가량 앉아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일이 생기면 아무때든 련락하라고 일러두었다.
이튿날은 일요일이여서 내가 집에서 이사준비를 하고있는데 점심때가 좀 지나 류청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가 1시 55분에 세상을 뜨셨단다. 이사짐을 꾸려놓고 오후에 또 가볼가 했더니, 나는 하던 일을 제쳐놓고 부랴부랴 택시에 앉아 병원으로 달려갔다. 나는 우광훈이를 불러 그들 가속과 함께 후사처리를 하고 류원무선생의 유체를 장의사로 모셔갔다.
우리의 존경하는 원로작가 류원무선생은 이렇게 우리의 곁을 떠나가셨다. 민족문학을 사랑하고 관심하는 우리 문단의 우수한 선배작가이신 선생은 자기가 맺어놓은 문학상의 결실을 보시지 못하고 너무나 급급히 작가들과 영결하였다. 선생을 모시고 호북에 다녀온지가 어제 같은데 한달도 안되여 우리곁을 떠나시다니, 그날은 일요일이지만 나는 집에서 휴식하고 있는 직원들을 모두 불러내왔다. 가족에서 래일로 유체를 화장하겠다고 하기에 우리는 밤도와 각자가 할 일들을 맡아하였다.
작가협회에서 류원무선생의 사망소식을 통지할 때에 많은 작가들이 깜짝 놀라하였다. 너무나 뜻밖이였기 때문이였다. 누구도 그이가 이렇게 빨리 돌아가실줄 미처 생각도 못했던것이다. 그러잖아도 류원무선생이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월요일이면 위문갈가 했더니 이렇게 빨리 세상뜨셨느냐며 비통해하시는 분이 여럿이였다.
이튿날 오전에 열린 추도회에는 100여명 작가들과 친우들 및 가속들이 참석하여 비통한 마음으로 고인의 령전에 술을 부어올리며 그이의 마지막 길을 바래드렸다.
림종을 앞두고도 위문온 후배들에게 좋은 작품을 많이 창작하여 민족문단을 빛내라는 부탁을 잊지 않으시던 선배작가님..
곁에서 떠나지 않는 아들을 보고 어서 회사로 돌아가 맡겨진 책임을 다하라고 등을 미시던 미더운 아버지.
작가협회덕분에 페암을 발견하고 제때에 수술하여 목숨을 건졌다고 만날 때마다 감격해 하시던 원로스승님.
병석에서도 사천지진재해 소식을 들으시고 주동적으로 위문금 200원을 보내주신 책임성높은 로정협위원님.
만년에도 민족문학사업의 번영과 발전을 위하여 로심초사하시며 작가협회를 위하여 협찬금을 당겨오신 어르신님.
명예와 영예앞에서도 욕심을 부리지 않으시고 과단하고 명지하게 처사하시여 문인들을 감동시키신 선생님.
죽음앞에서도 추호의 흐트럼이 없이 작가의 고상한 지조를 엄연히 지켜시여 작가적 명성에 이채를 돋구신 로작가님.
그이는 동료들에겐 언제나 친근한 벗이셨고 후배들에겐 언제나 소탈하고 소박한 선배셨으며 자식들에겐 풋풋한 인정미 넘치시던 아버지셨다.
작가는 가셨으나 작가가 남겨놓은 고매한 덕성은 그대로 남아 오늘도 우리를 감동의 소용돌이에서 맴돌게 하고있다.
작가는 가셨으나 작가가 남겨놓은 주옥같은 작품들은 우리 민족의 보귀한 문학유산으로 남아 빛을 뿌릴것이다.
류원무선생님, 구천에서도 민족문학의 번영과 발전을 지켜보아 주소소
<연변문학> 2009년 제2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