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룡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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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미니소설) 양보 (허룡석) 댓글:  조회:668  추천:1  2021-02-28
양보 허룡석     열흘 동안 외지에 출장나갔다가 어제 저녁 늦게야 집으로 돌아온 ☓☓공사 부경리 전창남은 늘어지게 통잠을 실컷 자고 나서 점심때가 다될 무렵에야 단잠에서 깨여났다. 습관적으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던 그는 피씩 웃었다. “어, 이거 너무 잤는 걸!” 그는 절구통 같은 몸이 쭉 늘어나도록 기지개를 켜고^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실팍한 몸집이 보기와는 다르게 민첩했다. 그는 서둘러 이부자리를 개여올리고 나서 말끔히 세수하고 머리까지 쪽 빗어넘겼다. 옷까지 다 주어입고 나니 별로 할 일이 없는지라 그는 쏘파에 앉아 그간 밀린 신문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홀연 문이 벌컥 열리더니 푸르뎅뎅해난 안해가 회오리바람마냥 휙 날려 들어왔다. “아니, 벌써 퇴근시간이…” “당신이 하긴 잘해요! 이렇게 큰 문제도 나하고 토론 없이 당신 맘대로 하니. 그래 이 집이 당신 혼자 사는 집인가요? 그 따위 양보니 뭐니 하면 로임이 오르는가요? 급이 오르는가요? 사람이 화 나서 어디 견디겠어요!” 안해는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기관총을 쏘아대며 들가방에서 신문 한장을 꺼내 차탁 우에 활 내던졌다. “하, 이거 뭐 어쨌다구 또 이 야단이요, 엉?” 전경리는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해반주그레하던 안해가 갑자기 무엇 때문에 이처럼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 “엉이 다 뭐예요. 이따위 신문에 나자구 그래 고래등 같은 집 한채를 떼우는가 말이예요. 아이고 분해라! 당신을 믿다간 거지신세 면치 못하겠어요!” 전경리는 그제야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뭉툭한 손으로 얼른 신문을 주어들었다. 그가 첫 면을 쭉 훑어보니 아니나 다를가 아래켠에 눈에 확 띄는 표제가 한눈에 안겨왔다. “☓☓공사 부경리 전창남동지 자기에게 차례진 집을 다른 간부에게 양보” 그리고 그 밑에는 “이런 간부는 따라 배워야 할 바이다!”라는 제목으로 된 편집자의 단평까지 달았다. 유들유들한 전경리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여올랐다. “어이구 답답도 해라, 아직도 웃어요? 글쎄 국가에서 주는 새집을 남한테 양보할게 뭔가 말이예요. 아이 둘까지 데리고 40평방도 되나마나한 이 집에서 3년 살았으면 잘살았지 무엇이 아까와서 그래요? 이번엔 왜 그리 철저한 체해요, 예? 어디 좀 말해보라는데!” “됐소, 됐소, 당신이 뭐 알기나 하구 그렇게 보글보글 끓소? 에-. 녀편네들이란 머리는 길어두 소견은 짧아. 그럼 당신이 좀 말해보오. 새로 지은 그 집 위치가 어떻소?” “예?…” “그 집이 몇평인지 알기나 하오?” “그건…” “그래 우리 공사에서 올해만 집 짓구 명년에는 안 짓는답데?” “…?” “그래 당신은 큰 녀석한테 이 집을 물려주지 않을 작정이요?” “…?” 안해는 금시 탄알이 떨어진 기관총마냥 입만 하 벌리고 있을 뿐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했다. 송곳 같던 눈총도 저으기 무지러졌다. “보오, 당신이 대체 뭘 안다구 이 야단인가 말이요.” 전경리는 시뚝해서 쏘파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방안을 뚜벅뚜벅 거닐었다. 안해가 화를 낼 때면 쥐 죽은 듯이 잠자코 있다가도 안해가 가만있을 때면 되려 위풍을 부리는 전창남이였다. “이번에 지은 집들은 공원 뒤쪽이여서 거리가 먼데다 45평방밖에 안된단 말이요. 명년에는 장마당 뒤골목에 간부사택을 짓는데 한^집 면적을 70평방씩 할거요. 시내복판이라 위치도 아주 좋지, 생각해보오. 우리 이번에 새집에 들면 또 다음해에 가서두 새집에 들겠다구 당신이면 말할 만하오? 올해까지 들면 낡은 집에서 사는 간부는 나 혼자뿐이니 명년에는 싫다구 해두 새집이 차례진단^말이요. 그리구 명년에는 종업원사택두 기본상 해결되니 이 집을 큰녀석한테 물려줘두 누가 나서서 큰소리할 사람두 없지. 올해 새집에 들구 이 집을 큰녀석한테 물려줘보오. 아직 세방살이하는 젊은이들이 적잖은데 잔치두 하지 않은 아들한테 국가주택을 물려주게 되면 그래 가만있을 것 같소? 당신과 토론이 없을 때야 다 타산이 있어서 그런 거지. 사람이 간부질하자면 머리가 팩팩 돌아야지 당신 같아서야, 에-쯧쯧쯧!” “오. 그런 영문이였구만요. 그런 걸 난 또 공연히 끓었지.” 안해는 그제야 가을배추잎 같던 얼굴에 화기를 띠우며 쏘파에 탈싹 몸을 묻었다. 그리고는 남편의 손에서 그 신문을 받아^쥐였다. “그래도 간부질하는 당신이 아무튼 낫군요. 집에선 내가 경리래도 손들었어요. 보세요. 자태 높은 체해서 이렇게 신문에도 척 나고 안속은 안속대로 채우니 이게 정말 꿩 먹고 알 먹기라는 게로군요. 호호호!” “쉬-, 어디 나가 그런 말은 절대 번지지 마오. 이건 원칙문제요.” “걷어치워요. 당신의 그따위 원칙을 난 손금 보듯 환해요. 큰애를 천수동림장에서 시내에 끌어온 것도 당신이 조화를 피운 거고 작은집 병만이를 공안국에 밀어넣은 것도 당신이 연줄을 달았지요. 어디 그뿐인가요?…” “됐소, 됐소! 입만 열면 끝이 없다니까.” “흥, 내가 만일 당신의 상급이라면 난 당신같이 안팎이 다른 간부를 언녕 철직시켰겠어요.” 안해는 일부러 남편을 흘겨보며 야죽거렸다. “허, 그래두 올라만 가니 재간이 아니오.” 신문을 들고 보는 전경리는 제법 득의양양해서 어깨까지 으쓱해보였다. “또 어깨를 으쓱하누만요. 됐어요, 점심엔 내가 한턱 내겠어요. 호호호!” 안해는 기분이 좋아서 옷을 갈아입고는 부엌으로 내려갔다. 《군자란》연변인민출판사 1983년
56    [수필]녹쓴 철길 우에서 댓글:  조회:2165  추천:0  2019-07-15
녹쓴 철길 우에서 허룡석   유유히 흐르는 해란강을 옆에 끼고 있는 드넓은 세전이벌 한복판에 나의 고향 마을이 오붓이 자리잡고 있다. 그 고향 마을의 뉘연한 앞언덕에는 일제시대에 부설한 철길 한갈래가 길다란 두 다리를 동서로 뻗고 있다. 조선전쟁 때에는 이 철길로 수많은 항미원조 물자들이 수없이 수송되였고 나라 건설 시기에는 변강 건설에 크나큰 기여를 하기도 했었다. 그러던 그 철길이 가지가지로 살길이 나진다는 개혁개방 시기에 와서 막혀버려 고향 사람들은 애석함을 금할 수 없어한다. 이젠 그 철길로 기차가 통하지 않은 지도 20년이 나마 된다.  첫 진눈까비가 흩날리던 지난 초겨울의 어느 날, 오랜만에 고향 마을에 찾아갔다가 아직도 지난날의 그 어떤 잔정과 미련이 남아서인지 나는 울적한 마음으로 한적한 그 철길 우에 올라섰다. 거무불그스름하게 녹쓴 철길이 거칠은 황초 속에 쓸쓸히 누워있는 모습은 마치 늙고 지치고 병들고 맥이 진한 로인이 앙상한 두 다리를 뻗어버리고 저세상으로 간 사체를 방불케 했다. 이 철길은 조양천으로부터 개산툰에 이른다 하여 조개선이라 불렸다. 지난 세기 30년대 초에 중국을 장기적으로 침략하고 략탈하기 위하여 일본제국의 점령하에 있던 동북의 남만철도회사에서 설계하고 부설한 철길로서 1933년 11월에 정식 통차 하였으니 이젠 80고령이 넘었다. 조개선은 조양천에서 장도선과 련결되여 전국 각지로 통할 수 있었다. 건국 전과 건국 초기에는 린국과도 직접 기차가 통했었다. 길이 60키로메터에 간이역이 5개 밖에 안되는 이 철길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짧은 간선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력사는 가장 오랜 철길 중의 하나였고 또한 국제선로이기도 했다. 철길을 마을 앞에 두고 우리는 세상에 고고성을 울려서부터 기차의 기적소리를 들으며 자랐었다. 저녁이면 그 기적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잠들었고 새벽이면 아침을 알리는 수탉의 울음소리로 알고 깨여나군 했었다. 녹쓴 철길 우에 올라서니 유치원 때 손에 손 잡고 씩씩하게 노래 부르며 이 철길을 따라 웃마을 유치원에 놀러 가던 일이며 어른들의 뒤를 따라 철길 너머 산기슭에 있는 렬사비로 오르내리던 기억이 새롭다. 철부지 때엔 레루에 올라서 빨리 걷는 시합도 해보았고 침목을 세며 빨리 달리기 경색도 해보았다. 애들이 편을 나누어 철길 량옆에 엎드리여 군대놀음도 해보았고 기차가 올 때면 남몰래 동전을 철길 우에 놓아 납작해지게 하는 장난도 쳐보았었다.  한마디로 철길은 우리들 동년의 즐거운 놀이터이기도 했다. 그 때는 양로공들이 날마다 시간대로 오르내리며 철길을 점검하고 깨끗이 청소하다 보니 철길의 자갈들도 하나 흐트러짐이 없었고 철길 옆의 오솔길들도 깨끗하게 정비되여있었다. 보드라운 잔모래가 깔린 철길 량옆 오솔길에는 깜찍하고 이쁜 노랗고 빨갛고 파란 꽃들이 소담소담 피여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관리하는 사람마저 없어 오솔길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무쇠우박을 맞은듯 여기저기 크고 작은 홈채기들로 울퉁불퉁했다. 철길의 자갈들도 오르내리는 짐승들의 발길에 채워 제멋대로 여기저기 흩어져 나뒹굴었다. 지난날 그처럼 흥성했던 철도연선 마을에는 이젠 이 철길 옆 오솔길로 손 잡고 명랑하게 노래하며 걸어갈 유치원 어린이들도 없다. 우리의 동년처럼 장난 칠 애들도 없다. 철길은 지난날의 생기를 잃은 지 오랬고 인간들과의 정이 멀어진 지도 옛날이였다. 1964년 내가 열세살 나던 해에 중학교 입학시험을 쳐놓고 갈 곳도 별로 없는지라 집에서 한가하게 놀고 있는데 길건너에 사는 작은집 어머니가 찾아와 자기네 둘째와 함께 개산툰 걔들 외가집에 놀러 가지 않겠는가고 했다. 작은집 어머니의 형제들과 친척들이 개산툰화학섬유팔프공장에 출근하는 줄 나도 귀동냥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그 때는 그렇게 큰 국유기업에 출근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대단히 부러워하는 일자리였다. 나에게는 사돈집에 놀러 가는 꼴이였으나 기차를 타고 간다는 소리에 귀가 벌쭉해졌다. 마을 앞으로 달려가고 달려오는 파란 렬차나 검은 화물차는 수없이 보았어도 아직 한번도 기차를 타보지 못했던 연고였다.  나는 동갑짜리 사촌동생과 함께 8리 길을 걸어 공사구역 한쪽 끝에 있는 연동역(동성용진역)에 가 멀리에서 바라보기보다 엄청 육중한 렬차에 올랐다. 렬차가 서서히 떠나자 나무와 전선대가 휙휙 지나가고 그 큰 산과 벌들도 통채로 달려왔다가는 그대로 물러가는 것이 하도 신기하여 렬차를 타고 가는 내내 머리를 차창 밖에 내놓고 달리고 춤추는 바깥세상을 구경하다 보니 개산툰에 이르렀을 때에는 머리에 석탄재가 바글바글했었다. 이렇게 나는 이 조개선에서 인생의 첫 렬차를 타보았다. 중학교 시절에는 숱한 학생들과 함께 이 렬차를 타고 로투구 만인갱 참관을 가기도 했고 녀동생이 시집갈 때에는 여러 친척들과 함께 이 렬차를 타고 둘러리로 조양천에 가기도 했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온 후에는 이 철길을 넘나들며 일터로 나갔고 회의하러도 다녔다. 이 철길 우에서 석탄재를 뒤집어쓰고 정해진 시간 안에 건조실 석탄을 부리우느라 청춘의 비지땀을 흘리기도 했다. 여름이면 이 철다리 밑 강에서 목욕도 하고 물고기잡이도 했으며 겨울이면 바글거리는 애들과 함께 썰매도 타고 스케트도 탔었다. 홍수가 져 몇번이나 마을을 휩쓸고 가던 강도 지금은 실개천으로 변해버려 물고기란 사돈의 팔촌도 볼 수 없고 썰매를 탈 만한 얼음조차 얼굴 수 없다. 물론 썰매 탈 아이들도 없다. 개혁개방 이후 조개선의 종점에 있는 개산툰화학섬유팔프공장도 시장경제의 충격으로 갈수록 내리막길을 걷다가 나중에는 개혁의 칼도마에 오르게 되였다. 그런데 공장이 외지기업에 팔려가면서 종업원들의 로임문제와 양로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지 못하여 종업원들이 의견을 제기하다 못해 나중에는 수천명이 이 철길에 드러누워 항의하여 세상을 놀래우기도 했었다. 공장이 팔려간 후에도 한시기 시장경제의 진통으로 끙끙거리다가 더는 버틸 수 없어 결국 문을 닫는 운명을 면치 못했다. 공장문이 닫기면서 변강의 끝자락에 있는 이 공장에 원목과 석탄을 쉼없이 수송하던 화물차도 자취를 감추었다. 이런저런 원인으로 렬차를 타고 다닐 사람들도 갈수록 줄어들어 렬차마저 사라졌다. 이 공장으로 하여 흥성하던 개산툰진도 날로 쇠퇴해져 지금은 지난날의 생기를 찾아볼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외국으로 도시로 뿔뿔이 떠나갔다. 지난 20여년간 사라진 것은 기차만이 아니였고 녹쓴 것은 철길만이 아니였다. 철길 주위에 있던 많은 것들도 따라서 사라지고 ‘녹쓸고’ 쇠퇴해졌다. 저기 철길 아래에 있던 새벽농민대학도 시장경제 도래와 함께 장기간 시시콜콜 앓음소리를 내다가 별수없이 2011년 초에 연길의 직업고중에 합병되여 옮겨갔다.  연변의 첫 초급농업사 책임자이며 전국로력모범인 김시룡의 창의하에 1958년 대약진시기에 전국에서 제일 먼저 건립된 농민대학으로 중앙수장들의 높은 중시를 받았었다. 나라의 투자로 4층 학교 청사를 짓고 많은 농업기술 인재들을 양성하기도 했었다. 농민대학이 잘 나갈 때에는 전 현 각 인민공사들에서 싹수가 있는 농업 기술인재들을 이 학교에 보내여 벼재배, 과수재배, 축산업 등 전문 농업기술을 배우게 하였다. 학생들은 졸업 후 본지방에 돌아가 골간 기술인재로 활약하면서 지방의 농업생산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었다. 나의 둘째누나도 1960년대 초에 이 학교를 다녔는데 소학교에 다니던 내가 한번은 누나를 찾아갔다가 학교식당에서 새하얀 이밥을 큰사발에 무둑히 담아주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개혁개방 이후 시장경제 발전과 농촌생산 경영체제 개혁의 변화, 알곡을 비롯한 농부산물 가격의 하락으로 농업기술 인재 양성을 취지로 하던 새벽농민대학 학생 원천은 갈수록 크게 줄어들었다. 숨져가는 학교를 살려보려고 학교지도부와 상급 해당 부문에서는 나라와 외국인들의 도움으로 영어학과와 컴퓨터학과 등 사회에서 환영하는 새로운 학과를 설치하며 여러모로 모지름을 써보기도 했으나 결국은 얼마 지탱하지 못하고 학교 설립 50여년 만에 문을 닫게 되였다. 전국에 이름을 날리던 전국의 첫 농민대학은 시장경제의 충격으로 이렇게 력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 지금은 ‘지치고 병들고 녹쓴’ 텅 빈 건축물들만 저렇게 진눈까비 속에 쓸쓸히 웅크리고 있다. 이 철길을 마주하고 있던 저기 보이는 중학교도 문을 닫은 지 오랬다. 연길현 제11중학교 명칭을 가진 중학교는 우리가 다닐 때까지만도 학생이 500명 가량  되였는데 지금은 학생들 종적조차 없어졌다. 그 서쪽에는 중학교에 붙지 못한 학생들로 농업중학교를 꾸렸는데 학생 수가 우리 중학교 버금이 되였다. 그런데 개혁개방 이후 학생 근원이 해마다 줄어들어 중소학교가 합병되여 겨우 운영되던 것이 그것도 얼마 안되여 문이 닫겨버렸다.  우리가 다닐 때 공사 중심소학교는 민족련합학교로서 학생이 500명 가량 되였고 조선족학생이 80%이상 차지했다. 연길현(후에 룡정시로 개명)에서도 인구가 가장 많고 면적이 가장 큰 공사여서 이만큼이라도 지탱했지 작은 향진의 학교들은 모두 문을 닫은 지 오래다. 나라의 혜택으로 몇년 전에 중학교 청사는 새로 지었지만 학생들은 하나도 없이 괴괴하기만 하다. 듣자니 뭐 로인활동실로 되였다나. 텅 빈 새 청사보다도 어쩐지 울창한 백양나무 그늘 속에서 남녀학생들이 바글바글 희희락락 뛰놀던 운동장과 낡긴 했어도 정들었던 그제날의 중학교 청사가 우렷이 안겨오며 가슴이 애절해났다.  이 철길을 앞에 두고 있는 나의 고향마을도 마찬가지였다. 연변의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산아제한 정책으로 출생률이 대폭 낮아진 데다 개혁개방 후 젊은이들과 아낙네들이 거의다 외국으로, 도시로 빠져나가다 보니 100여호 되는 큰 마을이 점차 황페해져갔다. 비여있는 집들이 갈수록 늘어났고 대다수 논과 밭들이 외지 사람들 손에 넘어갔다. 그저 저세상이 오래지 않은 이 땅의 로영웅들이 쓸쓸히 고향을 지켜가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자랄 때까지만도 얼마나 활기찬 마을이였던가. 청년들이 우글우글하고 학생들이 바글바글했었다. 저녁이면 마을 구락부에서 흥겨운 손풍금 소리 울려나오고 피끓는 청춘남녀들의 활기찬 노래소리가 별들이 도글거리는 밤하늘에 울려퍼졌었다. 그런데 지금은 낮이나 밤이나 쥐죽은 나라란다. 사람 사는 마을 같지 않단다. 마을 앞쪽에 있던 원래의 철공소와 정미소도 언녕 외지사람에게 팔려갔다. 그 통에 룡정 으로 통하는 큰길과 이어졌던 마을의 중심길도 토성에 둘러막혀 고향 로인들은 비좁은 옆길로 에돌아다녀야 했다. 굴러온 손님이 주인행세를 하고 마을을 개척한 주인들이 손님 쪽으로 밀려났다. 황페해지고 쓸쓸해져가는 마을은 우리 마을 뿐이 아니였다. 철로연선에 있는 동쪽켠의 동성, 연동이나 서쪽켠의 홍성, 태평, 대흥 등 조선족 마을들도 마찬가지였다. 배에 곱이 차고 수시로 술잔을 들 수 있는 지금은 되려 사람들이 고독하고 쓸쓸함을 느끼며 한숨소리만 높아가고 있다.  해방 직후에는 이 철길이 누워있는 세전이벌에서 길림성의 첫 호조조와 동북의 첫 인민공사가 고고성을 울렸었다. 전국로력모범 김시룡, 전국3.8붉은기수 리옥금, 성귀향지식청년본보기 려근택, 전국림업모범 림관동, 성로력모범 박봉금, 연변10대우수청년 마옥금 등 많은 선진과 모범인물들이 이 세전이벌에서 배출되였었다. 정치 돌출 세월에는 전국모주석저작학습기준병 황순옥을 배출하여 전국에 둘도 없는 ‘산골의 녀수재’로 천산남북에 명성을 떨치기도 했었다.  지난 세기 80년대 초에 주당위 서기였던 조남기동지의 지지와 지도하에 전국의 첫 로인절도 이곳 동성용진에서 태여났다. 이로써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에서 자기의 청춘을 이바지해온 연변의 로인들은 당과 정부의 배려로 자기들의 명절을 갖게 되였으며 수십년이 지난 지금은 가장 활기 띤 명절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였다. 하지만 개혁개방을 맞으며 지난날의 명성과 영예는 가뭇없이 사라졌다. 모든 것은 시장경제 속에서 갈팡질팡하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렇게 수십년이 지나도 성내거나 전국은커녕 시 안에서도 경제발전으로 이름이 날 만한 회사도 없고 크게 돈 번 인물도 없다. 외국에 가 막일로 돈을 벌어왔다는 사람들도 확대재생산에 돈을 쓰는 사람보다 ‘신선놀이’에 돈을 탕진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계급투쟁과 정치돌출을 위주로 하던 계획경제 시대에는 전국과 성, 주에 앞장선 ‘신생사물’들과 선진, 모범 인물들이 연변에서도 가장 많이, 가장 빨리 출현하더니 돈을 벌어 잘살라는 시장경제 시대에 들어서니 왜 남의 꽁무니를 따르고 있는 것일가? 다른 곳에서는 경제발전과 관광사업 발전을 위하여 일반철도는 물론 고속철도도 갈래갈래 신설하는데 이곳에서는 달리던 기차도 기적소리 끊은 지 오래다. 그렇다 할 남다른 자원도 없고 종점역 국유기업도 문을 닫고 고향사람들도 팍팍 줄어드는데 기차가 맥빠진 신음소리를 울리며 계속 달릴 수 있겠는가. 철길 우의 귀익은 기적소리 사라지니 철길 주위의 눈익은 모든 것이 활기를 잃어가는듯했다. 철길이 녹쓰니 철길 주위의 모든 것에도 ‘녹’이 쓸고 있었다.  언제면 이 철길 우에서 귀익은 그 기적소리가 다시 울려올 수 있을가? 언제면 철길 주위의 눈익은 모든 것이 그 기적소리에 따라 지난날의 활기를 되찾을 수 있을가? 언젠가는 린국과의 대문이 자유로이 열려지면 기차의 기적소리 다시 울려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면 그 기적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백여년간 이 세전이벌을 개척하고 가꾸어온 원주민들의 후손들이 아닐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 생각이 뇌리를 치니 마음은 왜 이렇게 서글퍼지는 것일가. 이 세전이벌의 곳곳에 나의 청춘의 발자국이 찍혀있고 나의 정열의 땀방울이 슴배여있어서일가? 나의 청춘의 꿈도 이 철길을 따라 뻗어나갔던 연고에서일가? 나는 쌀쌀한 바람에 흐느낌 소리를 내는 황초 속에 덮여 죽은듯이 누워있는 미라이 같은 침목을 밟으며 쓸쓸히 거닐다가 맥없이 녹쓴 철길에서 내려섰다. 이젠  다시는 고령로인의 사체 같은 이 철길을 밟고 싶지 않았다. 걸어봐야 마음만 쓰려올  뿐이다. 지금은 동년시절의 즐거움과 기쁨을 이어갈 천진란만한 애들도 없고 청춘시절의 동경과 희망을 이어갈 활기찬 젊은이들도 없다. 이제 고독과 쓸쓸함 속에서 한탄과 실망감으로 살아가는 로인들마저 하나 둘 저세상으로 가면 마을은 어떻게 될가? 그렇다고 내가 가서 고향마을을 지켜줄 재간도 용기도 없다. 범아재비가 력사의 수레바퀴를 막을 수 있겠는가. 금전소리 절컥거리며 줄기차게 달리던 기차가 숨소리를 잃은 것도 시장경제의 산물일 것이다. 마을사람들이 더 잘살아보겠다고 외국으로 도시로 빠져나가는 것도 어쩌면 시대 발전의 세대적 탈피과정일 것이다. 물은 내리흐르고 사람은 올리산다 하거늘 모두가 돈 잘 벌 수 있는 곳으로, 살기 좋고 편한 곳으로 떠나가는 걸 누가 그르다 하고 누가 막을 수 있으련만 정들고 눈익은 지난날의 많은 것이 사라지고 잃어지는 것은 마음을 허비기엔 족했다. 지난날의 모든 것이 있을 때에는 소중한 줄 모르다도 언젠가 이렇게 없어지고 사라지고 잃어져서야 그 때의 그 소중함을 통절하게 느끼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가?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고향마을이 주당위와 정부에서 진척시키고 있는 연길-룡정-도문 연룡도발전계획 안에 들어 마을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동경으로 가슴들이 새롭게 부풀어있다는 점이다. 고향마을의 새로운 도약적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음에 마음은 다소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정든 고향이여 부단히 발전하고 번영하라. 이 땅을 억척스레 가꾸며 세대로 구슬땀을 휘뿌려온 고향의 친인들이여 부디 행복하시라.  출처:2018 제6호
55    [수필]새빨간 거짓말과 새하얀 거짓말 댓글:  조회:590  추천:0  2019-07-15
새빨간 거짓말과 새하얀 거짓말 허룡석     사람을 속이는 거짓을 불문에서는 망어妄语라고도 한다. 거짓은 고의적으로 진실한 사실을 진실하지 않은 것처럼 꾸미거나 없는 일을 진실한 것처럼 분칠하여 듣는 사람들을 기편하는 행위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거짓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시비를 혼돈하게 만들고 시선을 흐리워 그 진가를 분간하지 못하게 만들어 궁지에 빠지게 한다. 하지만 거짓이라 하여 모두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유럽의 어느 나라 속담에는 “거짓말에도 새빨간 거짓말과 새하얀 거짓말이 있다”고 전한다. 새빨간 거짓말은 음특한 마음을 품고 사람들을 속여 자기의 그 어떤 목적에 이르려는 나쁜 의도가 숨어있고 새하얀 거짓말은 선량한 마음을 품고 사람 들에게 그 어떤 희망과 용기와 위안을 주기 위한 좋은 의도가 담겨있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새빨간 거짓말에는 악의가 숨겨져있고 새하얀 거짓말에는 선의가 깃들어있다 는 것이다. 기나긴 인생길을 숨가삐 톺아오다 보면 우리 사회에서도 새빨간 거짓말과 새하얀 거짓말이 엄연히 병행하고 있음을 심심히 느끼게 된다. 사람을 상대하며 살아가는 인간사회는 복잡다단하다. 인간생활에서 많은 사람들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고저 서로 리해하고 양보하고 도우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못나도 잘난 척, 없어도 있는 척, 심술궂어도 착한 척, 배운 것이 없어도 박사라고 새빨간 거짓말과 거짓행위를 하며 사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속으로 미워하는 사람도 겉으로는 아니 그런 척하고 자기보다 잘되고 잘나가는 사람을 시기질투하면서도 아닌 척하며 지어 잘못되기를 은근히 바라면서도 겉으로는 “계속 잘되기를 바라오.” 하며 마음에 없는 새빨간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회사에서는 암암리에 서로 물고 뜯으면서도 안 그런 척, 상사에게 불만과 의견이 가득하면서도 겉으로는 추어주며 아부하기도 한다.  사회적으로도 아닌 척 새빨간 거짓말과 거짓행위를 하는 사례도 적지 않은 것 같다. 도적은 도적질하고도 안한 척, 간상배는 돼지고기, 소고기, 물고기에 물을 주입하고도 안한 척, 장사군은 근량을 속여먹고도 안 그런 척, 곡식과 남새에 화학비료와 살충제를 쓸 대로 쓰고도 “세상에 둘도 없는 록색식품이요” 하고 새빨간 거짓말을 한다. 어떤 ‘부모관’들은 자기 관할 분야 실무에 문외한이면서도 전문가인 척, 해당 정책과 규정, 법규를 전혀 모르면서도 아는 척 새빨간 거짓말을 탕탕 쳐대는가 하면 “산속에 깊이 들어갈수록 펄펄 뛰는 물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다.”는 어처구니 없는 지시를 하고서도 중요한 지시를 한 척하고 사업에서 엄중한 실책을 빚어내고도 영원히 정확한 척한다. 어떤 부패 간부들은 낮에는 사람 말을 하고 밤에는 꺼리낌없이 귀신 짓을 하기도 한다.  만일 신성한 공권력을 행사하는 정부부문에도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미는 새빨간 거짓말과 거짓행위가 있다면 그것은 곧바로 백성들의 피해로 이어지게 된다. 그‘새빨간’이 심하면 심할수록 백성들의 신임을 잃게 된다.  아닌 척하며 산다고 하여 모두가 새빨간 거짓말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희망과 위안을 주는 아름다운 거짓말도 적지 않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애들을 키우고 부모를 모시고 가정을 영위하며 고달파도 안 그런 척, 아파도 안 아픈 척하기 일쑤다. 아버지들이 돈벌이에 힘들어도 웃음 짓고 슬퍼도 술 한잔으로 달래고 그 어떤 아픔과 고통이 있어도 속으로 눈물을 떨구며 남편으로, 아버지로서의 세대주 책임을 다하려 왼심을 쓴다. 다만 가정을 위하여, 자식들을 위하여 부모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 그런 일이 없는 척 ‘거짓’을 할 뿐이다. 이러한 의력과 품성, 노력은 자식들의 감동과 존경을 자아내고 긍정적 영향을 주기도 한다.  우리는 흔히 겉현상에 미혹되여 진가를 분별하지 못할 때가 있다. 매일 웃으며  사는 사람은 슬픔이 없는 줄로 알고 항상 씩씩해보이는 사람은 아픔이 없는 줄로  안다. 언제나 강해보이는 사람은 눈물이 없는 줄로 알고 언제나 밝아보이는 사람은 고통이 없는 줄로 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곁사람들을 즐겁게 하려고,  곁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려고 안 그런 척하는 것임을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을 뿐이다. 이러한 위대함을 새하얀 거짓말과 새하얀 거짓행위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는 거짓말도 있다. 이를테면 마을로인을 보고 깍듯이 인사하며 “언제 보나 이렇게 건강해보이십니다. 갈수록 젊어지시는 것 같습니다.” 하면 로인들은 즐거운 웃음을 짓는다. 녀성들을 보고는 “와, 점점 젊어지고 이뻐지시네.” 하면 겉으로는 손을 내저으면서도 속으로는 은근히 기뻐하는 것 등이다. 인사받는 분들은 그것이 뻔한 거짓말임을 알면서도 고깝게 듣지 않는다. 만일 보는 그대로 솔직하게 “야, 그간 보지 않았더니 어째 이렇게 폴싹했슴둥? 전혀 몰라보겠습꾸마.” 혹은 “어디 몹시 아픈 것 같구만. 얼굴색도 안 좋구, 주름도 늘구, 머리두 많이 빠지구. 로친이 다됐네.” 하면 듣는 이는 기분이 상해할 것이 분명하다. 때론 악의 섞인 진실보다 선의 있는 거짓이 사람들한테 쉽게 받아질 때도 있는 것이다. 새빨간 거짓말이나 새하얀 거짓말이나 모두 허위에 속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담겨있는 의도가 부동하니 나타나는 결과도 확연히 틀린다.   그 어떤 위인이나 평민이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허위적인 일면이 있다고 한다. 다만 시대와 처한 환경에 따라 깊고 옅음의 차이와 높고 낮음의 구별이 있을 뿐이라 한다.  사람 사는 사회에서 살아남자면 자연히 경쟁이 생성하게 되며 그 경쟁은 마음의 경계와 능력의 차이와 련계된다. 자기의 능력이 남을 따라가기 어려우면 본능적으로 시기와 질투가 생기게 된다. 자기의 능력으로 일정한 욕심은 챙겼지만 더 큰 욕심을 챙기려면 저도 모르게 마음 심처에 숨어있던 허위가 뛰쳐나오게 된다. 왜냐 하면 뛰는 놈 우에 있는 나는  놈을 따라잡고 릉가하려면 정상적 경로로 안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약육강식하는 경쟁사회에서 성실한 마음과 진실한 행위로만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도 허다하다. 지난날의 력사를 돌이켜보아도 성실하게 살고 진실하게 일하겠다는 사람들이 비판받고 처분받고 감옥에 가고 목이 잘린 사례들이 수두룩하다. 이와 반면에 바람 따라 돛을 달고 권위자에게 달라붙어 자기 마음을 어기면서라도 새빨간 거짓말을 하며 허위적으로 산 사람들이 중용되고 높이 벼슬하고 부귀영화를 누린 사례도 적지 않다. 성실하게 살고 진실하게 일하려는 사람들은 모두 관점 있고 능력 있고 마음가짐이 바른 인재들이다. 사람들의 허위와 위선은 본인의 사상과 도덕을 기초로 하지만 사회환경과 제도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허위와 위선이 발 붙일 수 없는 사회라면 성실과 진실이 성행할 것이고 허위와 위선이 살판치는 사회라면 성실과 진실이 발 붙일 자리가 없기에 살아남자면 자기를 위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나무는 바로 서있으려 하나 바람이 못살게 굴면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바다는 잔잔히 잠자려 하는데 태풍이 불어치면 세찬 파도가 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떤 경우에는 진실이 미움을 살 수 있고 허위가 환심을 살 수 있다. 진실하게 살든 허위적으로 살든 그 시대의 대환경에 적응할 줄 아는 사람이 살아남고 적응할 줄 모르면 도태될 수 밖에 없게 된다.  엄정히 법이 통하는 사회면 일이 생겨도 공평과 공정을 찾을 수 있고 진리가 통하는 사회라면 사람들의 신앙도 곧바른 것이다. 반면 권력이 살판치는 사회라면 억울한 사건을 피면할 수 없게 되고 금전이 만능인 사회에서는 신앙도 허무히 무너지게 된다. 허위가 살판치는 사회에선 진리도 괴론이 되고 믿음과 신용도 사라지게 된다. 법은 멀고 주먹이 가깝거나 법은 허울 뿐이고 ‘지시’가 살판치는 사회라면 그 누구도 안전감을 찾을 수 없게 되며 온 사회가 가면구를 써야 하는 악과를 초래할 것이다.  성실한 사람은 새빨간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성실하지만 무지하면 쓸모가 없고 지식과 능력은 있으나 성실하지 못하면 천만 위험한 것이다. 성실과 능력은 일종 힘의 상징이며 한 사람에게 있어서 고도로 되는 내심적 공정감이며 존엄감이다.   그 어떤 죄악이든지 허위와 배신보다 수치스럽고 가증한 것은 없다고 한다. 그 어떤 땅덩어리에서나 허위와 기편은 푸르른 잡초처럼 자란다고 한다. 잡초는 곡식보다 생명력이 강하다. 곡식은 심지 않으면 자라지 않고 가꾸지 않으면 잡초에 먹혀버린다. 잡초는 심지 않아도 절로 자라며 가꾸지 않아도 왕성하게 키돋움한다. 곡식을 키우려면 잡초를 뽑아버려야 하듯 성실과 진실을 키우려면 허위와 배신을 눌러버려야 한다. 모든 그릇된 것들은 사회의 제도와 규제에 따라 숙어들거나 기승을 부린다.   중국의 꿈을 실현하려는 이 사회에서 가면과 허위가 갈수록 숙어들고 진실과 성실이 허리 펴는 문명하고 조화로운 사회가 보다 훌륭히 이룩되기 바라는 마음이다. 출처:2018 제6호
54    [수필] 아픔이 진주를 낳는다 댓글:  조회:1172  추천:0  2019-07-15
아픔이 진주를 낳는다 허룡석       시대가 미증유의 발전을 가져오고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전에없이 향상됨에 따라 생활필수품에 대한 요구가 날따라 높아가고 있다. 삶이 다채롭고 여유로울수록 가지가지 장식품에도 각별한 호기심과 점유욕을 갖고 있다. 백세시대에 나이와 상관없이 자신을 보다 우아하고 품위있고 아름답게 단장하려는 것이 문명시대 문명한 생활의 일환이기도 하다. 그 선호도가 가장 높은 장식품 중의 하나가 바로 진주이다. 진주는 다만 상품가치가 높은 진귀한 보석이라 하여 우러르는 것만이 아니다. 그 내면에는 훨씬 더 미묘하고 경탄스러운 삶의 철리가 내포되여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시집 가는 딸에게 친정어머니가 진주를 선물하는 것이 오랜 풍습으로 되여있다고 한다. 많고 많은 값지고 귀중한 보석 중 왜 하필이면 진주를 선물하는 걸가? 진주가 함유하고 있는 고유의 값진 가격보다도 생명체가 오랜 시간 아픔과 고통을 견뎌낸 유일한 인내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란다. 결혼 후 삶에 상상 밖의 그 어떤 아픔과 고통이 닥치더라도 조개마냥 끈질긴 인내력으로 그 아픔과 고통을 이겨가며 사랑과 행복의‘진주’를 꾸준히 다듬어가라는 뜻깊은 의미에서였다. ‘대양의 녀왕’이라 불리는 진주는 수많은 광물성 보석과는 달리 하나의 생명체가 만들어낸 진귀한 보석이다. 천연적 진주는 바다 밑에 사는 특정한 종류의 조개에서 나온다고 한다. 다른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뭔가를 먹어야 살아갈 수 있는 조개가 먹이를 먹으려고 입(껍데기)을 벌릴 때에 간혹 부주의로 미세한 모래알까지 흡수하게 된다. 영원히 멀리했어야 할 불청객 이물질은 그로부터 부드럽고 안온하던 조개속을 파고들며 조개를 점차 괴롭히기 시작한다. 조개에 ‘병’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조개한테는 모래알을 끄집어낼 수 있는 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래를 털어낼 방법도 없다. 생명을 해치는 이‘암세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력을 다하여 막아낼 방도를 대야 했다.  조개껍질의 바로 밑에는 외투막이라는 막이 오투마냥 온몸을 둘러싸고 있다. 특이한 이 외투막은 조개가 흡수한 음식물의 미네랄을 리용하여 조개의 껍질을 만드는 물질을 배출한다. 조개는 자신의‘건강’을 챙기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이 귀중한 외투막을 일부 투입시켜 차츰 모래알을 층층이 감싸게 된다. 모래가 완전히 외투막에 싸여 더 이상 조개를 괴롭히지 않게 되기까지는 인간의 열달 잉태도 아닌 장장 7년이란 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그러니 가냘픈 조개가 기나긴 7년간이나 모래란‘암세포’의 시달림을 받았다는 말이 된다. 그것이 바로 조개가 장기간의 아픔을 감내하며 만들어낸 귀중한 진주이다. 병든 개한테서 값진 구황이 나오고 병든 소한테서 귀중한 우황이 나오듯 병든 조개한테서 진귀한 진주가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병들었다 하여 모든 ‘환자’가 진품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속에 진주가 들어있는 병적 조개의 모양은 다른 정상 조개와 완연히 다르다고 한다. 진주조개는 모양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아래우 껍데기도 잘 맞물리지 않는다. 한마디로 못생기고 꼴불견이라 한다. 부단히 두터운 껍질을 만들어야 할 외투막을 갈라내여 ‘암세포’를 막아내야 했으니 어떻게 다른 조개들처럼 단단하고 미끈한 정상적 껍데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못생긴 조개일수록 최상급의 진주가 들어있을 확률이 높다고 한다. 바다의 해류도 ‘재간둥이 잘생긴 놈 없다’는 인간세상의 섭리와 조화를 이루는 것인가? 천연적으로는 조개 3만개당 오직 20개 좌우의 조개만이 진주를 품고 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상품가치가 있는 진주는 3분의 1도 안된다고 한다. 은은하고 우아한 광채로 사람들의 환심을 끄는 진주는 많고 많은 해류들 속에서도 보잘 것 없는 조개가 만들어낸 분비물이다. 오랜 시간을 두고 고통을 참아가며 저항과 고뇌의 과정을 견디여낸 조개의 끈질긴 인내의 결정체이기도 하다. 고통으로 만들어낸 분비물이 이토록 아름답기는 해도 조개는 애초부터 그 고통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 고통을 안지 않으면 안되였다. 인간도 복잡다단한 인생길에서 이런저런 삶의 아픔과 고통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지만 본의 아니게 그런 아픔과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될 경우에 봉착할 때도 있다. 사람이 평생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의 삶 가운데도 생각 밖의 ‘모래알’, ‘이물질’이 침투하여 가끔씩 우리를 괴롭히기도 한다. 때론 그 아픔과 고통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인간세상이 저주스럽도록 심신을 괴롭일 때도 없지 않다. 이런 불행에 봉착했을 때 그것을 하나의 도전으로 받아들여 인생의 진주를 상생하느냐 아니면 그 고통과 아픔에 숙어들어 파멸의 길을 걷느냐는 각자의 의지와 마음가짐에 달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육체나 마음의 아픔 속에서 진주가 탄생하듯 육체나 마음의 상처는 때로 새로운 나를 찾아 자아를 확립하는 소중한 자극이 되여 탈태환골시킬 수도 있다. 이 세상에 아픈 상처와 모진 고통이 없이, 시련과 불행이 상존하지 않은 성공이란 있을 수 없다. 수많은 위인들이 바로 그런 아픔과 고통을 이겨내며 성공의 봉우리에 올라 인생의 ‘진주’로 세상에 빛을 발산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아픔과 고통을 안고 있다 하여 모두가 ‘진주’로 태여나는 것은 아니다.  ‘최상급의 진주’로 되기는 더욱 어렵다. 왜냐 하면 약자는 역경의 소용돌이에 쉽게 매몰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조개가 진주를 생성하지 못하듯 인간도 남달리 뛰여나게 성공한 사례는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멀리는 그만두고라도 우리 민족의 불굴의 항일투사이며 조선족문학의 대부일 뿐만 아니라 중국소수민족문학 거장으로도 받들리는 김학철선생도 그런 아픔과 고통을 겪으며 인생의 진주, 문학의 진주를 탄생시킨 전형적 대표의 한분이 아닐가 싶다.  가렬처절했던 항일전쟁 시기 최후의 분대장으로 일제침략자들과 영용히 싸우다 부상을 입고 어쩔 수 없이 포로가 되였다. 일본에 압송되여가서는 한쪽 다리까지 잘리며 감옥에서 갖은 시달림을 받았다. 일본 나가사끼감옥에서 4년 남짓한 감옥살이, 전향서를 쓰지 않는다고 총상 입은 다리를 치료해주지 않아 저가락으로 상처에 생긴 구데기를 집어내면서 그 아픔을 잊기 위해 줄기차게 독서를 했었다. 공화국 창립 후에는 남다른 명석한 두뇌로 사회발전과 사회현상에서 나타나는 부정과 비리들을 독립적인 사고방식으로 투시하고 질호한 탓으로 반우파투쟁, ‘문화대혁명’ 등 련속부절한 정치운동을 거치면서 그 분이 겪은 고통과 아픔이 누구보다도 훨씬 많고 컸음을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 ‘문화대혁명’ 중 현행 반혁명으로 판결받고 연길구치소와 추리구감옥에서 장장 10년간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린 기구한 인생, 평범한 사람들은 그 시련과 고통을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한생을 살다 보면 불행이 행복보다 두배는 더 많다고 하지만 김학철선생이 겪은 불행은 아마 열배도 더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선생은 ‘크고 작은 모래알’, ‘가지각색 이물질’이 평온하던 삶에 침투되여 인간으로서 참기 어려울 지경으로 괴롭히고 파먹어도 그 아픔과 고통에 비굴하게 숙어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도전으로 간주하고 자신만의 ‘외투막’으로 자신을 보호하면서 완강하게 끝까지 견뎌내였다. 추리구감옥의 경관마저도 “다른 령감들은 그 나이에 퍽퍽 죽어나가는데 그 령감은 외다리로 끄떡없이 살아있다. 왠지 아는가? 그 추운 겨울날씨에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랭수마찰을 하기 때문이다. 쯧쯧, 무슨 놈의 의지가 그리도 강할가!”고 감탄해마지 않았다지 않는가. 파란만장한 인생로정과 극한적인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인간승리의 신화를 창출한 그의 신념과 의지는 세인들의 감탄과 존경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다.  개혁개방을 맞아 가지가지 훼멸적 ‘정치감투’를 벗어버리고 또다시 인생의 새 삶을 찾았을 때에는 그 고통과 아픔을 자양분으로 만년에 창작의 필을 들고 문학의 수많은 반짝이는 ‘진주’를 탄생시켜 우리 민족 문학의 은하계를 보다 아름답게 수놓아갔으며 중국 여러 민족 문학의 보물고에도 핍진한 한페지를 수록하였다.  중앙정부의 대폭적 지원으로 내몽골사범대학 성락교구 안에 세워진 전국의 유일한 중국소수민족문학관 앞광장에는 중국 전근대적 여러 소수민족문학의 대표적 거장들의 동상이 숙연히 세워져있다. 그 가운데는 조선족문학의 유일한 대표적 거장으로 김학철선생의 동상도 세워져있다. 쌍지팽이를 짚고 한쪽 다리로 서서 저 멀리 앞을 응시하는 김학철선생의 강인한 모습은 죽어도 굴하지 않는 항일투사의 기백을 그대로 구현하였으며 우리 민족 문학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서는 어떠한 난관도 박차고 나아가라고 후배들을 고무격려하는듯하다. 김학철선생은 그야말로 문학의 진주, 인생의 진주로 중국소수민족문학의 광야에 우뚝 서있는 것이다. 불에 달군 쇠가 더욱 강해지고 끊겼다 다시 잇긴 뼈가 더욱 굳고 탄탄하듯 인생의 굴곡에 시달리고 마음의 상처로 시련을 겪은 사람이 평온하게 살아온 사람들보다 훨씬 크고 장려한 성공을 약속받는다는 것이 세상리치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문학분야에서 ‘분노가 시인을 낳고 불행이 작가를 낳는다’는 격언도 나온 것일가.  김학철선생이 만일 그런 아픔과 고통을 겪지 않았다면, 혹은 겪기만 하고 완강한 의력으로, 삶의 도전으로 그 아픔과 고통을 이겨내지 않았더면 그 후에 그처럼 훌륭한 문학의 ‘진주’들을 산생시킬 수 있었을가? 자신도 인생의 진주로 태여날 수 있었을가? 한국에서도 25년간 각고의 노력으로 력사적인 대하소설 《토지》를 써낸 박경리를 불행이 낳은 최고의 작가로 평하고 있다. 중국문단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과시한 장현량이나 진충실 같은 이름난 작가들도 모두 나름 대로 크나큰 아픔과 고통과 불행을 겪은 작가들이다. 그들은 이미 고인이 되였지만 그들이 남긴 문학진주는 후세에도 그 빛을 길이 뿌리게 될 것이다.  평범하고 안온하게 살아가는 조개한테서는 진주란 ‘아픔의 결정체’가 상생하지 못한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시련과 고통은 그 사람을 파멸시키는 독약이 아니라 보다 튼튼히 성장시켜 장차 보다 큰 성과를 따낼 수 있는 성공한 인재가 될 수 있는 자양분으로 곰삭이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인간도 삶의 상처받은 사람의 자생력이 보다 강해져 인간진주로 태여날 여지가 충분하다. 또한 그 상처가 크면 클수록, 의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종당에는 흑진주와도 같은 ‘최상급’ 인생의 진주로 태여날 확률도 훨씬 높은 것이다. “산은 기복이 심할수로 절승경개를 이루고 물은 락차가 클수록 만년경관을 이룬다.”는 도리이리라.  사람마다 끈질긴 인내로 피할 수 없는 삶의 아픔과 고통을 이겨내여 천연적으로 산생된 진귀한 ‘흑진주’는 되지 못하더라도 명색이라도 가질 수 있는 ‘양식진주’ 로라도 태여나 사회의 구석구석에서 빛을 발산한다면 이 세상은 보다 밝아지고 인류사회는 더욱 문명해질 것임은 의심할 바 없다. 하지만 값지다는 진주들 속에서 모조진주를 식별할 줄 알아야 속히우지 않듯이 울긋불긋 화려한 가면구로 장식한 ‘인간진주’들 속에서 ‘모조진주’를 감별하는 능력을 키우고 경계해야 할 것이다. 출처:2018 제6호
53    인분표[단편소설] 댓글:  조회:6164  추천:0  2017-11-13
 요즘은 어쩐지 애들처럼 기분이 붕붕 뜬다. 며칠후이면 새로 산 아빠트에 이사가게 된다는 즐거움때문인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마냥 흥분에 젖어있다. 30여년간 끼살이하듯 30평방메테 되는 자그마한 낡은 단층집에서 부모를 모시고 아들딸을 키우며 비좁게 살다가 일본에 나가 박사공부를 마치고 거기에 남아 어느 큰 회사에서 중층간부로 사업하는 아들이 거금을 들여 몇달전에 연길의 번화 구역에다 140여평방메터 되는 궁월같은 새 아빠트를 사주었다. 이젠 젊음을 불살 라버린 자그마한 이 현성을 떠나 자치주 수부도시에서 살게 되였다. 그러니 어찌 감회가 새롭지 않겠는가. 재직에 있을 때에는 그토록 가고싶어도 갈수 없었던 수부 도시를 퇴직후에 가게 된것이다. 나와 안해는 신이 나서 코노래를 흥얼거리며 며칠전부터 이사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버릴건 버리고 줄인걸 줄이고 포장할건 포장하면서 사타구니에 비파소리 나고 겨드랑이에 불이 일게 바삐 돌아쳤다. 그래도 힘든줄 몰랐다. 오래동안 별로 들춰보지 않은 낡은 책상의 서랍들도 하나하나 모두 정리하였다. 문득 한 서랍 밑바닥에서 누런 낡은 편지봉투 하나를 발견하였다. 뭘가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쏟아놓고보니 모두 지난날의 증과 표 따위들이였다. 량식구매증, 석탄 구매증, 천표, 량표, 그것도 지방량표와 국가량표가 따로 있었다. 이외에도 고기표, 부식품표, 리발표, 목욕표 등 별의별 표가 다 있었다. 기아에 허덕이며 헐벗었던 당시에는 모든것이 부족하여 배급제를 실시하였는데 이런 증이나 표가 없으면 물건을 살수가 없었다. 개혁개방이후 물질이 풍요로와지고 생활이 펴이자 이런 증과 표들이 더는 쓸모없게 되여 언젠가 이렇게 한데 모아 서랍에 처박아둔것 같았다. 모두가 감감 잊고 있던 력사의 견증물들이였다. (응? 그런데 이게 뭔가?  인분표? 아니. 인분표도 여기에 끼여있다니!) 순간 나의 머리속에서는 벼락이 치고 천둥이 울리듯 꽈르릉 하는 소리가 났다.  다른 증과 표들은 모두 무심하게 지나쳤으나 인분표만은 보는 순간 머리가  뜨거워 나고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목에서 뭔가 뜨거운것이 울컥 괴여오르는듯했다. 낡고 허름해진 누른 종이표는 40여년이 지났는지라 색이 바랬고 접혀진 자리는 거의 끊질듯했다. 나의 손이 떨렸다. 나의 청춘을 조롱하고 나의 인생을 짓밟았던 인분표, 그 인분표를 들고있노라니 잊지 못할 하향지식청년시절의 이왕지사들이 꼬리를 물고 클로즈업되여 다가왔다. 1.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한때 전국을 휩쓸었던 홍위병들의 광란적인 혁명적열기가 점차 사그라지자 “반란”에 공을 세운 도시의 홍위병들이 카멜레온이 몸색을 바꾸듯 갑자기 지식청년으로 탈바꿈하여 산골로, 농촌으로 내려가는 바람이 전국을 휩쓸었다. “지식청년들이 농촌에 내려가  빈하중농들의 재교육을 받는것은 아주 필요하다.”는 위인의 교시를 받들고 수천수만의 “반란전사”들이 멋도 모르고 “상산하향”의 기치를 높이 쳐들었다. 우리 현성에서도 중학교마다  학생들이 서로 내려갈 곳과 함께 내려갈 짝을 뭇느라고 분주히 뛰여 다녔다. 나는 가정성분이 부농이라고 학생들한테 몰리고 조직의 배척을 받다보니 남들이 모두 혼이 나가듯 발광하던 그 드세찬 문화대혁명에도 참가하지 못했다. 참가하고 싶어도 어느 반란조직에서나 받아주지 않으니 갈 곳이 없었다. 홍위병에도 가입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무산계급혁명의 초석인 빈농, 하중농 성분을 가진 애들만 들게 하다가 후에는 “단결할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단결해야 한다.”며 중농과 상중농집 애들도 홍위병에 받아주었다. 그러나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나쁜분자, 우파분자 등 5류분자의 자식들은 계급의 원쑤라고 받아주지 않았다. 행여나 하던 나의 희망은 또다시 물거품이 되였다. 학급 학습위원이던 내가 하루아침에 개밥의 도토리신세가 되자 일부 선생님들은 나의 처지를 몹시 동정했다. 하지만 후에는 선생님들도 하나하나  끌려나와 투쟁맞다보니  더는 나를 동정할 겨를이 없었다. 나가나 들어오나 “계급”을 모르는 우리 집 황둥개 밖에 나를 반겨 맞는 “동지”가 없었다. 이웃집 동급학년 애들이 “상산하향”한다고 떠들며 분주히 서둘러댔다. 나도 하향하여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고싶었다. 농촌에 내려가 계급의 적들의 몸에 배여있다는 “자산계급의 오물”을 녹여내며 각이 물러나도록 일하여 조직의 인정을 받고 사회의 긍정을 받고싶었다. 나도 가는 곳마다 쫓겨다니는 “개새끼”나 “쥐새끼”가 아니라 무산계급의 단결대상이 되고싶었다. 나는 부모들 몰래 가두판사처에 찾아가서 “광활한 천지에 내려가 단련받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가두판사처에서는 “5류분자 자식들이 더구나 농촌에 내려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며 나의 “혁명적” 행동을 “견결히” 지지하였다. “위대한 운동”이후 “계급적 원쑤새끼”의 요구가 처음으로 조직의 긍정을 받은 것이였다. 나의 마음속에서는 파아란 삶의 새싹이 돋아났다. 그들이 어떻게 학교와 련계했는지 나도 학교의 통지를 받고 하향명단에 들게 되였다. 나는 하향가는 날에야 함께 내려갈 12명 동학들을 만나게 되였다. 남녀 모두가 한반급 학생들이였으나 “위대한 운동”에서 따돌림을 당해 오래동안 접촉하지 못하다보니 저으기 서먹서먹했다. 나는 낯에 철판을 깔고 주동적으로 그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앞으로 많이 도와달라고 굽석거렸다. “자산계급”인 내가 먼저 알은체하지 않으면 “무산계급”인 그들이 먼저 나를 알은체할리 만무했다. 동학들은 건성으로 악수는 하지만 성분이 “개똥”인 내가 자기들의 “깨끗한 비단보”에 끼이는것을 별로 환영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도 함께 내려갈수 있다는것만으로도 좋았다. 공부할 때에는 모두 내 도움을 받던 애들이 아니였던가. 수천명 하향지식청년들이 현체육장에서 현혁명위원회 지도간부의 격정에 넘치는 연설을 듣고 혁명적 군중들과 가속들, 교원들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트럭에  앉아 사면팔방으로 떠나갔다. 우리도 트럭에 앉아 현성과 백여리 떨어진 광진공사 중성 2대 집체호로 내려갔다. 미리 통지를 받았는지 마을의 빈하중농들이 동구밖에까지 나와 북과 징을 울리며 우리를 맞아주었다. 우리의 마음은 저도모르게 세차게 뛰였다. 마을에서 유일한 벽돌집이 그래도 우리 집체호였다. 허름한 초가집들 속에 우뚝 서있는 집체호는 닭무리속의  학과 같았다. 후에 알고보니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빈하중농들이 우에서 내려보낸  하향지식청년안치비에 생산대자금을 보태여 지난 여름에 다그쳐 지은 집이란다. 그날 저녁 생산대에서는 우사에 덧붙여 지은 회의실에서 우리들을 환영하는 사원대회를 열었다. 우리는 귀빈으로 초대되여 가슴에 붉은 꽃을 달고 회의실가운데 벽을 등지고 나란히 앉았다. 현성 어느 기관에서 내려왔다는 키가 작달만하고 평퍼짐하게 생긴 “모택동사상 선전대”의 한조장이 먼저 손을 내저으며 연설했다. “…도시의 지식청년들이 농촌에 내려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아야 하는 력사적 의의와 현실적 의의를 똑똑히 리해하고 모주석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훌륭한 지식청년으로 성장할것을 부탁합니다.” 이어 깡마른 바지가랑대처럼 길쭉한 정치대장이 나서서 강조했다. 목은 조롱박 입구처럼 약했으나 목소리는 아주 우렁찼다. “…홍위병들의 혁명정신을 계속 발양하여 농촌에 와서도 무산계급독재하에서의 계속 혁명을 잘하며 비판과 대비판의 무기를 잘 응용하여 계급의 적들과 용감히 투쟁하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얼굴이 “수호전”의 리규처럼 수염투성인 생산대장이 나서서 석쉼함 목소리로 하향지식청년들이 광활한 천지에서 혁명을 위해 농사짓는다는 웅심으로 대채를 따라 배우는 운동중에서 생력군역할을 충분히 발휘할것을 요구하였다. 알고보니 한 생산대에 대장이 둘이 있었다. 한 사람은 정치를 틀어쥐고 다른 한사람은 생산을 틀어쥔단다. 서렬은 정치대장이 앞이란다. 그외 부대장들도 몇이 있었다. 그들이 계급투쟁과 계급의 적이란 말을 할 때마다 나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손에 땀을 쥐며 가슴을 두근거렸다. 어디를 가나 “개새끼” 신세는  면치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갈마들며 저으기 주눅이 들고 어깨가 처졌다. 붉은 꽃도 달지 말아야 할 사람이 달아서인지 앞가슴에서 달달 떠는듯 했다. 내 처지에서 백지장같이 “순결”한 사람들만 참여할수 있는 정치생활은 엄두도 못 내기에 나는 그저 수걱수걱 일을 잘하는것으로 자신을 개조하려 했다. 나는 어지럽고 힘든 일도 꺼리지 않고 맡겨주는 일이면 몸을 내번지고 열심히 해제꼈다.   나는 점차 사원들의 칭찬을 받게 되였고 집체호에서 일을 가장 잘하는 청년으로 정평이 났다. 그런데 그것이 되려 집체호친구들의 질투의 대상으로 될줄이야. 호장이나 부호장 등 다른 애들은 정치적으로 빨리 발전하려고 정치학습에나 대비판 에는 적극적이였으나 힘들고 어지러운  일에는 소극적이였다. 또한 대대와 공사에 회의를 자주 다니다보니 일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공수는 공수대로 받았다. 나는 회의에 갈 일도 없기에 매일 괭이, 삽과 호미하고만 씨름하였다. 그들이 받는 것은 정치보수였고 내가 받는것은 로동보수였다. 천금사랑은 없어도 일사랑은 있다고 농촌에서는 일이 사랑이였다. 일만 잘하면 사원들은 별로 성분을 따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리 성분이 나쁘다고 뒤가 나가는줄 모르고 일하느냐?”며 나를  측은해 하기도 했다. 나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였는지 모른다. 이듬해 년말에 나는 집체호에서 유일하게 선전사원으로 선출되여 붉은 꽃을 달고 낫과 삽을 상으로 수여받았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부터 줄곧 이붓자식 신세였던 나는 농촌에 와서야 “선진”이란 영예를 갖게 되였고 축하의 박수를 받아보았다. 줄곧 “개새끼”나 “쥐새끼”란 모욕적인이고 폭력적인 말만 듣다가 처음으로 사람대접을 받게 된것이였다. 그날 저녁 나는 희열의 눈물을 흘리며 이불밑에서 손전등을 켜들고 집에다 만장같은 편지를 썼다. 편지지는 나의 눈물로 얼룩졌다. 후에 안 일이지만 아버지, 어머니는 눈물젖은 이 막내의 편지를 읽으며 함께 편지지를 적셨다고 한다. 2 어느날 저녁 또 사원대회가 열렸다. 기실 사원대회는 거의 날마다 열렸다. 다만 내가 정치학습이나 비판대회에 참가할 자격이 없었기에 정치회의에 빠질뿐이였다. 그러나 생산문제를 토론하는 회의에는 참가할수 있었다. 그때면 나는 한번도 빠지지 않았다. 성분이 나쁜 내가 참가할수 있는 회의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지 않으면 빈하 중농들의 눈에 날수 있었다. 정치회의를 할 때에는 박대장이 사회했고 생산회의를 할 때에는 오대장이 사회했다. 오대장은 다음날 생산포치를 하고 한가지 토론의제를 내놓았다. “여러해 똥을 푸던 ‘포로’가 병이 심해 드러누웠으니 더는 똥을 푸지 못할것 같습다. 아마 새로운 분이 나와야 할것 같습꾸마. 누기 자원할 분이 있으면 자원해 봅소.” 후에 알고보니 그 ‘포로’라는 사람은 항미원조때 지원군에서 중대장으로 사선을 넘나들며 용감히 싸우던 사람이였다. 그는 전사들을 지휘하여 수십차례 크고작은 전투에 참가하여 앞장에서 돌진하며 적들을 무더기로 소멸하였다. 그러다가 치렬한 모 고지 진지전에서 포탄에 중상을 입고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적에게  포로되였다. 그는 포로영에서도 굴하지 않고 지원군포로들을 조직하여 적들과 견결히 투쟁하다가  포로교환때에 풀려 나왔다. 다수 포로들이 적들의 기만책에 대만으로 갔으나 그는 갖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견결히 자기의 조국을 선택하였다. 그런데 그는 생각밖으로 조직의 엄격한 심사를 받고 당적과 군적을 쫄딱 떼우고 “죽음이 두려워 파렴치한 포로가 되였다”는 딱지를 쓰고 고향에 쫓겨와 농사를 짓게 되였다. 사활적인 전투에서 두번이나 공을 세워 크고작은 간부들이 문쪽이 다슬도록 줄을 이어 가정위문을 오고 마을사람들이 한결같이 우러러보던 영웅이였으나 후에 포로가 되는 바람에 그 공은 “똥무지”가 되여버렸다. 몸이 잔페가 된 그는 운동때마다 갖은 투쟁을 당해야 했고 어지럽고 힘든 일만 차례졌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여서부터 그에 대한 비판과 투쟁이 그칠줄 몰랐다. 원래 몸이 잔페인데다 자주 처참하게  투쟁을 당하다보니 정신적으로 희망의 끈이 끊어지고 육체적으로 뼈와 살이 다 물러났는지 이젠 아주 드러누웠단다. 마을사람들은 어른아이 할것없이 비루먹은 강아지 대하듯 모두 습관적으로 그를  “똥포로”라고 얕잡아 불렀다. 농촌에서 인분푸는것과 같은 더럽고 힘든 일은 아마 그런 “조국을 배반한 포로”들이 아니면 나같은 “계급의 적”들만 하는것  같았다. 마을에서나 집체호에서 성분이 제일 검은 내가 자원하지 않으면 빈하중농들이 나를 어떻게 볼가? 진심으로 재교육을 받으러 온 "개새끼"로 보아줄가? 대장이 누가 자원할 사람이 없는가고 묻는것도 나를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닐가?  남들이 “학철이 하는게 어떻소?” 하고 추천하기전에 내가 주동적으로 나서서 자원하는것이 더 혁명적이 아닐가?  또한 이 기회가 성분이 나쁜 나같은 “자산계급”이 단련할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니겠는가. 주저하며 갑자를 시간이 없었다. 나는 끝내 남먼저 손을 들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사원들이 눈길이 일제히 나한테 쏠리였다. 그들의 눈길에는 의혹과 놀라움이 담겨있었다. 집체호친구들은 아니꼽게 나를 흘겨보았다. 오대장도 뜻밖이라는듯 의아하게 물었다. “학철이 정말 할수 있겠소? 진심이요?” 내가 공연히 제 방구에 놀란것인가? 하지만 이미 말을 꺼낸 이상 견결히 나설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일어서서 힘있게 말했다. “진심입니다. 빈하중농들이 믿어준다면 잘할 자신이 있습니다.” 곁에 앉은 한 늙스구레한 아낙네가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낮은 소리로 한마디 튕겨주었다. “장가두 안간 새파란 청년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한다구 그래오? 날래 아니라구 하오.” 오대장은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어지럽고 힘든 일을 집체호동무가 이처럼 남먼저 자원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꾸마. 이는 빈하중농들의 재교육을 잘 받아보겠다는 하향지식청년의 크나큰 결심이 아니겠습둥. 우리 열렬한 박수로 환영하겝소.” 사원들이 박수로 환영을 표하긴 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네가 하면 얼마나 할지 하는 미덥지 않아하는 태도였다. 오대장이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도 이 어지럽고 힘든 일을 하겠다는 정신이 얼마나 좋습둥. 하지만 이 일은 장난이 아니오. 보기엔 하잘것 없는 일 같지만 이는 대채를 따라 배우는 혁명정신과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큰일이오. 어디 잘해보오. 하지만 어린 나이에 해보다가 힘들어 못하겠다면 아무때나 내놓아도 되오.” 이미 결심발표를 한 이상 아무리 힘들어도 한동안은 견지해야 할게 아닌가. 그래도 자원한것이 "계급의 적"에게 강다짐으로 떠맡긴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겠는가. 이튿날부터 나는 인분푸는 일에 달라붙었다. 인분푸는 일은 교대도 인계도 필요없었다. 그저 철판으로 땜해 만든 인분통을 실은 수레를 몰고 나가면 다였다. 도구라야 장대긴 철바가지와 양철물통 하나가 전부였다. 그런데 인분통에 다가가니 구린내가 물씬 풍겨오며 구역질이 욱 치밀었다. 시내에서 어쩌다 인분수레와 마주치면 코를 씨쥐고 멀찍히 에돌아갔는데 이젠 내가 그 인분통과 인연을 맺게 되였으니 내 신세도 가련하고 한심했다. 삶의 길이란 원래 이렇게 굴곡적인가. 팔자타령을 해봐야 소용없었다. 이것이 운명이라면 고스란히 받아들일수 밖에. 누가 “자산계급”의 자식으로 태여나라던가. 나는 춘하추동 가리지 않고 인분수레를 몰고 골목골목 다니며 집집의 변소들을 훑었다. 그래도 겨울에는 오줌똥이 얼어붙어 그다지 역겹지 않았다. 하지만 언 오줌똥을 녹여 비료로 만들려면  오장륙부가 태를 치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우사마당 한켠에 커다란 중국식가마를 걸어놓고 장작을 지펴 인분을 녹일 때면 도저히 맡아낼수 없는 구린내에 정신이 다 아찔해났다. 처음에는 울긋불긋한 인분덩이가 보기 싫고 구린내가 역겨워 대짜배기 마스크를 끼고 풍사방지안경까지 착용하였다. 그러나 빈하중농들이 보면 “재교육을 받으러 왔다는 '개새끼'가 무슨 저따위냐”고 험담을 할가봐 후에는 아예 벗어버렸다. 인분이 녹으면 흙을 퍼넣고 커다란 삽으로 자주 휘저어며 버무려야 했다. 인분과 흙이 골고루 버무려지면 밀차에  실어다 두엄무지에 갖다 쏟아놓았다. 이렇게 되여 겨울에도 인분으로 만든 거름 무지가 점점 높아갔다. 인분거름은 만들기 어려워 그렇지 일단 만들어만 놓으면 우사에서 쳐낸 소똥보다 훨씬 효능이 좋다고한다. 그런데 일을 마치고 집체호로 들어가면 친구들이 모두들 눈을 흘기고 코를 싸쥐며 마치 집안에 변소가 들어온듯 나를 멀리찍히 피하는것이였다. 나의 몸에서 역한 구린내가 풍긴다는가. 나는 이미 그런 냄새에 절어 별로 감각이 없는데 곁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옷도 자주 씻느라 했으나 냄새는 여전하단다. 이젠 속살에 까지 구린내가 밴것인가? 이것이 빈하중농들의 재교육을 꾸준히 받으니 “자산계급의 썩어빠진 냄새가 빠져나가고 무산계급의 향기가 들어온” 성과인가? 하지만 누구나 외면하고 싫어했다. 나는 집체호친구들과 한자리에 앉아 밥을 먹기 미안하여 그들이 먼저 먹고 일어나기를 기다렸다가 남은 밥과 반찬을 먹어야 했다. 나는 내가 사용하는 수저와 그릇도 나 절로 씻어 따로 보관했다. 여름에 인분푸는 일이란 더구나 고역이였다. 인분에 앉았던 대가리 시퍼런 똥파리들이 마구 얼굴에 덥쳐드는가 하면 구데기가 우글거리는 썩어빠진 구뎅이에서 구린내가 돗바늘마냥 코를 찔렀다. 그래도 나는 구리지 않은척 꾹 참고 열심히 인분들을 퍼냈다. 그런데 집집마다 땅에 웅덩이를 파고 변소를 대충 짓다보니 수분이 다 빠져나가 인분류실이 많았다. 거름무지 쌀무지라는데 한해에 이렇게 류실되는 거름이 얼마겠는가. 별다른 화학비료들이 없이 거름에 의거해 농사를 지어야 하는 형편에서 이건 너무나도 큰 손실이였다. 어떤 집에는 아예 변소조차 없어 가만가만 남의 집 변소로 드나들거나 들에 나가 해결했다. 거름류실을 방지하는 대책은 없을가? 어느날, 나는 인분수레를 몰고 한 집에 가서 인분을 푸다가 그 집에서 모내기 철까지 먹고난 빈 김치독을 내다 볕쪼임시키는것을  보고 문득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집집마다 변소 웅덩이에 낡은 독을 묻으면 오줌똥류실을 방지할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오대장을 찾아가 지금 집집에서 인분류실이 많은 정황을 회보하고 집집마다 변소에 낡은 독을 묻으면 거름을 더 많이 모을수 있지 않겠는가고 정중히  의견을 드렸다. 그리고 지금 사원들이 변소관리와 인분관리에 중시를 돌리지 않는데 량과 질에 따라 얼마간씩 공수를 주면 사원들의 적극성을 동원하는데 유리하지 않겠는가고 조심스레 덧붙였다. 오대장은 놀랍게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손벽을 탁 쳤다. “과연 그렇군. 한뉘 농사를 지어왔다는 우린 왜 그 생각을 못했을가? 지식청년이 다르긴 다르군. 집집마다 그렇게 하도록 사원대회를 열고 동원해야겠소.” 오대장은 그날저녁으로 사원대회를 열고 내가 말한 방법대로 가가호호에서 변소를 개진하고 변소가 없는 집에서는 빠른 기일내에 변소를 지을것을 호소하였다. 하지만 적지 않은 사원들이 심드렁한 태도였다. 머리에 털이 돋아 변소에 독을 묻고 오줌똥을 받아낸다는 소린 듣다 처음이란다. 그런데 현에서 내려온 공작대 한조장이 이 방법에 아주 흥취를 가졌다. 그는 회의에서 “이는 대채를 따라 배우는 운동가운데서 나타난 기발한 착상으로서 혁명을 위해 농사를 짓자면 새로운 방법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사원들은 처음에 별로 내켜하지 않았으나 생산대에서 내리먹이고 공작대까지 나서서 동원하는데다가 공수까지 준다고 하니 그다지 반대하는것 같지 않았다. 이튿날부터 집집마다 변소개조에 달라붙었다. 어느 집에나 모두 낡은 독이 한두개씩은 있는터라 재료가 문제될것은 없었다. 그런데 어떤 집에서는 손을 대기 싫어 나를 불러다 변소에 독을 묻어달라고 했다. 변소웅덩이 주변의 흙들도 파내면 비료가 될수 있는데다 이는 사원들이 나를 믿기 때문이라고 여겨 나는 기꺼이 그런 사원들을 도와나섰다.  50여호 되는 농호가운데서 내가 독을 묻어준 집이 스무호는 되는것 같았다. 변소없던 집에서도 남의 공수를 벌어주게 할수 없다고 생각했던지 겨끔내기로 널판자를 얻어다 새로 변소를 지었다. 일주일도 안되여 집집의 변소가 개조되였거나 새롭게 지어졌다. 공작대 한조장이 대대회의에서 어떻게 소개했는지 대대간부들이 우르르 우리 생산대에 내려와 변소를 돌아보았다. 변소개조에 흡족해진 그들은 이튿날로 우리 생산대에서 현지회의를 열고 우리 생산대의 변소개혁을 전 대대에 보급했다. 닷새후에는 공사간부들이 내려와 집집의 변소를 돌아보고는 아주 훌륭한 발상이라며 우리 생산대에서 전 공사 현지회의를 열고 이 새로운 방법을 전 공사에 보급했다. 이로 하여 나도 이름이 나기 시작했다. 빈하중농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변소개조방법을 한 하향지식청년이 고안해 냈다고 하면서 떠들썩하게 칭찬하였다. 나는 그해에 생산대와 대대의 로동모범이 되고 대대와 공사의 하향지식청년전형이 되였다. 기자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련속 부절히 공사와 대대, 생산대와 나를 찾아와 취재하고 나의 사적을 신문과 방송에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나는 그것이 되려 부담스러웠다. 성분이 나쁜 내가 이름이 나면 되려 말썽이 많아지고 질투의 대상이 되지 않겠는가. 나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살려는데 환경은 나를 들볶았다. 변소를 개조하고 공수를 준다고 하니 사원들은 여느때보다 변소관리에 무척 신경을 썼다. 어떤 집에서는 가축들이 분변을 훔쳐먹을가봐 뚜껑을 해달았고 남이 훔쳐갈가봐 신경을 곤두세웠다. 가까운 일밭에 갔다도 뒤가 마려우면 자기집 변소에 달려와 뒤를 보았다. 남의 집에 놀러갔다도 뒤가 묵직해나면 뿌랴부랴 자기집으로 뛰여갔다. 사람들이 너무하다고 손가락질하며 웃으면 “어쩌겠소. 그게 대채를 따라 배우는 실제행동이 아니겠소.” 라고 “혁명적” 말로 둘러댔다. 하지만 속으로는 “흥. 똥이자 공수이구 공수이자 돈인데 왜 남 좋은 노릇을 해?.” 라고 속심을 드러냈다. 집집에서는 학교에 다니는 애들한테도 되도록이면 학교변소에서나 길가에서 대소변을 보지 말고 집에와 보도록 단속했다. 어떤 애들은 뒤가 마려운걸 참으며 학교에서 집으로 달려오다가 그만 도중에 바지에 싸는 해프닝을 벌리기도 했다. 변소가 개조되니 또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어떤 사원들은 변소독안에 구정물같은것을 부어넣어 량을 늘였다. 여기에는 두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공수를 더 벌기 위한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분을 퍼내다 터밭에 내고는 말을 들을가봐 물을 부어 량을 채우는것이였다. 나는 제때에 생산대에 이런 문제를 반영하였다. 오대장은 사원대회를 열고 만약 이런 문제가 다시 발견될 경우엔 공수를 10배로 깎는 처분을 안기겠다고 엄중히 경고하였다. 공작대 한조장은 일부 사원들이 인분을 터밭에 내는 문제를 엄숙히 비판하였다. “인민공사의 사원으로서 날마다 인민공사의 량식을 먹고 있으니 배설한 분변도 마땅히 인민공사의 것이여야 할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인민공사의 물건을 남몰래 자기 터밭에 낸다는것이 어디 인민공사 사원으로서 할짓입니까? 이건 엄숙히 말하면 혁명을 위하여 농사짓는 광범한 빈하중농사원들에 대한 모욕이며 대채를 따라 배우는 운동에 대한 파괴행위입니다.” 자기 집의 인분도 인민공사의것이란 말에 어떤 사원은 천정을 쳐다보며 쓰겁게 웃었다. 나도 이 일을 이렇게 로선의 높이에까지 끌어올려 비판하는것이 옳은지   속으로는 여간 찜찜하지 않았다. 공연히 긁어서 부스럼 만든것 같아 사원들 보기 미안했다. 한조장은 “불량한 행위와 과감히 투쟁”하는 나의 사적을 대대와 공사에 반영하여 나는 또 “사적인것과 과감히 투쟁하는 전형”이 되였다. 나는 그것이 불안했다. 이런 “전형”이 되기 위해 문제를 반영한것도 아닌데. 그통에 일부 사원들은 나를 아니꼽게 여기며 뒤욕을 하기도 하였다. 성분이 나쁘다는 저촉사상으로 그저 부지런히 일하여 자기의 착취계급사상을 꾸준히 개조하겠다고 시작한 일이 뜻밖에도 이렇게 선진이요 모범이요 하는 영예를 무더기로 안겨주니 오히려 바늘방석에 앉은듯 안절부절했다. 시작한바에는 아마도 더 잘해야 할것 같았다. 이젠 중도에서 그만 둘수도 없었다. 운명은 뜻있는자에게는 길을 열어주고 뜻없는자는 질질 끌고 다닌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남에게 질질 끌려다니지 말고 스스로 자기의 운명을 개척하리라 다짐했다. 나는 부담없이 인분 푸는 일을 더 잘 하기 위하여 고민끝에 집체호에서 나올것을 오대장에게 제기했다. 집단적으로 생활하는 집체호에 인분푸는 사람이 있으니 집체호에 적잖은 불편을 가져다주게 된다는 리유에서였다. 날마다 새벽에 나가다보니 다른 사람들의 수면에 영향을 주고 저녁에 늦게 들어가다보니 집체호의 다른 일을 할수 없어 눈치가 보였다. 게다가  고약한 냄새때문에 남들과 한자리에 앉아있기도, 함께 밥먹기도 불편했다. 오대장은 나의 말이 도리가 있다고 여겼던지 공작대 한조장, 생산대 정치대장, 빈하중농 정치호장, 집체호 호장과 토론하고 나를 오보호 박아바이네 집에 주숙을 잡아주었다. 그후부터 나는 박아바이네 집에서 먹고 자면서 일하러 다니게 되였다. 생산대에서 하향지식청년들에게만은 몽땅 입쌀을 주는데다가 그 량도 사원들보다 훨씬 많아 박아바이네 량주도 은근히 반겨하는 눈치였다. 나는 짬짬이 박아바이네 힘든 일도 부지런히 도와 드렸다. 박아바이네도 늘그막에 좋은 아들을 하나 얻었다고 동네방네 자랑했다. 나도 집체호에 있을 때의 마음고생을 덜고 편하게 일할수 있게 되였다. 3 나의 머리속에는 자나깨나 어떻게 하면 비료를 더 많이 만들겠는가 하는 생각뿐이였다. 그러나 50여호밖에 안되는 가가호호의 제한된 변소 인분만으로는 비료를 많이 만들기 어려웠다. 나는 생산대밖의 인분도 실어오려 생각했다.  공사소재지에 위치해있는 우리 마을에는 공사기관, 중소학교, 공소합작사, 신용사, 병원, 사반기업 등 기관들이 있어 공동변소들도 많았다. 어느날 해질무렵 나는 여러 기관의 공동변소들을 돌아보았다. 변소마다 인분량이 많아 사원들 집의 인분량과는 비교도 안되였다. 나는 낮에 마을의 인분들을 다 퍼내고 이튿날새벽에 공사기관 공동변소로 갔다. 그런데 첫날부터 생각밖의 충돌이 생길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거기엔 벌써 나먼저 두 사람이 와서 한창 인분을 푸고있었다. 나도 그들과 알은체를 하며 한켠에서 인분을 푸려 하자 두사람이 똥바가지를 내려놓고 나한테 다가왔다. 이웃 생산대에서 인분을 푸는 나이 지긋한 사원들이였다. “오, 누군가 했더니 2대의 모범지식청년이구만.” 그들이 나를 눈박아보더니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생산대똥이나 풀게지 왜 여기까지 나온게우?” 나는 태도좋게 웃으며 대꾸했다. “생산대의 인분만으로 비료를 많이 만들기 어려워서 공동변소 인분을 좀 퍼갈가구요…” “모범이 다르긴 다르군. 하지만 이건 우리들이 몇해전부터 맡아놓은 점이란 말이우.” 뭐? 자기들이 맡아놓은 점이라니. 지금 쩍하면 이건 공사의 점이요 저건 대대의 점이요 하더니 변소에도 점이란것이 있는가? “이 동무 시내에서 내려온 지식청년이여서 잘 모르는가본데 우린 언녕부터 모두 분공해서 공동변소를 나눴거든. 이를테면 우리 1대에서는 공사기관변소와 합작사 변소를 맡구 3대에서는 중학교변소를 맡구 4대에서는 소학교변소를 맡구 5대에서는…”  “그럼 우리 2대에서는 원래 어느 변소를 맡았댔습니까?” “뭐? 2대? 2대에서는 전에 포로가 똥을 푸던데 누가 그런 겁쟁이 똥포로한테 구역을 떼여준단 말이오?” “다같이 혁명을 위해 농사를 짓고 다같이 대채를 따라 배우는데 우리 2대에서도 어느 구역을 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래부터 젊은이가 똥을 펐다면 어느 구역을 맡을수 있었겠는지 모르겠지만 … 그나저나 젊은이는 혼자 벌어 혼자 먹는 사람이 아니요? 우린 똥을 퍼서 대여섯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한단말이오. 그러니 이런 공동변소에는 눈을 떼는게 좋겠소.” 보아하니 말로는 통할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인분때문에 선진이요 모범이요 하는 영예를 가득 지니고 있는 내가 그들과 드잡이를 할수도 없었다. 그런데 언제 부터 공동변소도 이렇게 “지방깡패”들이 차지하고 있었단말인가? 이들이 빈하중농이 옳기나 한가? 우에서 이런 정황을 알고나 있는건가? 대채를 따라 배우는 운동중에도 이런 페단이 있다니? 하지만 어쩔수 없었다. 수레를 돌려세우는수 밖에 없었다. 그후에도 내가 새벽에 인분수레를 몰고 중소학교, 합작사, 은행 등 단위의 공동 변소를 돌아보았으나 모두 꼭 같은 일에 봉착했다. 말 몇마디 못해보고 쫓겨오는 신세가 되였다. 인분푸는데서도 따돌림을 당하다니. 하지만 그 많은 기관과 단위 공동변소의 인분을 나만 퍼올수 없다는것이 여간 아쉽지 않았다. 더구나 이는 우리 생산대에서만 밑지는 일이 아닌가. 우리 생산대 에서도 량식을 더 많이 증산하면 그만큼 나라에 유리하지 않겠는가. 더도 말고 공평하게 퍼올수 있는 방법은 없을가? 어느날, 나는 오대장을 찾아가서 내가 기관의 공동변소들에 인분푸러 갔다가 당한 봉변을 하소연했다. 오대장은 상을 찡그리며 세상에 그런 일도 다 있었느냐며 놀라와했다. “공동변소의 그 많은 인분을 우리가 한통도 퍼오지 못하면 우리 생산대의 손실이 아닙니까? 제 생각에는 공사에 반영해서 각 생산대에서 공평하게 퍼가도록 방법을 대게 하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생산대마다 표를 나눠주면 표에 따라 인분을  퍼갈수 있게 하든지 말입니다.” “음. 그 방법이 좋을것 같군. 내 공작대 한조장한테 말해 공사에 반영하도록 해보겠소. 아무리 대채를 따라 배운다구 그깟 똥을 가지구두 서로 다퉈야 하니 원.” 그후 한조장이 공사에 어떻게 반영했는지 공사에서는 과연 우리 의견을 받아들여 표를 찍어 각 생산대에 내려보냈다. 그리고 인분관리를 잘하게 하기 위하여 각 기관, 단위에서는 공동변소에 모두 널문을 해달고 자물쇠를 잠구게 했다. 각 생산대마다 배당된 날자에 표를 가지고 가면 직일서는 사람이 표를 확인하고 자물쇠를 열어 주도록 했다. 표를 받아쥔 나는 무등 기뻤다. 나의 의견이 받아들여진것도 기뻤고 나도 공동변소 인분을 퍼올수 있다는것이 기뻤다. 담배종이 두장 크기만큼한 표 앞면에는 웃머리에 “영길현 광진공사 인분 관리소’라고 씌여져있었고 가운데는 큼직하게 “인분표”라고 찍혀있었다. 오른쪽에는 작은 글씨로 “표에 따라 인푼을 퍼야 함”이라고 찍혀있었고 왼쪽에는 “날자가 지나면 작페”라고 찍혀있었다. 맨아래에는 년월일이 찍혀있었다. 뒤면에는 큰 글씨로 웃쪽에 “혁명을 위하여 농사를 짓자!”고 찍혀있었고 아래쪽에는 “농업에서는 대채를 따라 배우자!”고 찍혀있었다. 그리고 벼이삭그림으로 둘레를 보기 좋게 감쌌다. 이런 표가 생산대마다 일주일에 한장씩, 한달에 넉장씩 나왔다. 각 생산대의 인분 푸는 사원들은 해당날자에 표를 가지고 지정된 공동변소에 가서 인분을 풀수가 있었다. 오대장은 우리 생산대에서도 공동변소의 인분을 퍼올수 있게 된것은  나의 공로라며 생산대회의에서 나를 입이 마르게 칭찬해주었다. 공작대 한조장도  “우리 공사의 이름난 모범 하향지식청년이 제기한 의견이여서 공사에서 쉽게 받아들인것 같다.”며 “모든 청년들은 혁명을 위해 열심히 농사를 지으려는 학철동무의 고상한 혁명정신을 따라 배우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일부 집체호청년들이 입을 삐쭉 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다른 생산대 인분푸는 사원들한테도 욕사발을 얻어먹었다. 이건 틀림없이 내가 제기해서 자기네 공수벌이를 방해한것이라 며 혼자 벌어 혼자 먹는 사람이 무슨 욕심을 그렇게 부리느냐는 질타였다. 하지만 이게 어디 내 개인욕심을 부린건가. 모두 집체리익을 위해 제기한 정당한 의견이 아닌가. 공동변소의 인분을 퍼오면서부터 우리 생산대의 비료무지는 날따라 높아만 갔다. 사원들은 “똥포로”가 인분을 풀 때보다 비료무지가 곱절이나 늘어났다고 했다. 나는 저으기 자호감을 느꼈다. 이젠 더는 성분때문에 신경이 씌여지지 않았다. 나만 부지 런하면 스스로 나의 운명을 개변할수 있을것 같았다. 나는 몸아 아파도 내색하지 않고 날마다 일하러 나갔다. 한번은 심한 리질에 걸려 일어설 맥조차 없었으나 당날 인분표를 쓰지 않으면 작페가 되기에 저녁 퇴근녘에 공사기관 공동변소에 인분 푸러 나갔다가 하마트면 인분구덩이에 꺼꾸로 떨어질번하였다. 내가 인분통옆에 주저앉아 식은땀을 흘리고있는데 마침 공사 지식 청년판공실 염주임이 퇴근하다가 맥없이 앉아있는 나를 보고 어디 아픈가고 물으며 나를 공사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몸과 마음 다 바쳐 일한 나는 그후 하향지식청년대표로 뽑혀 선후로 공사와 현에서 열리는 하향지식청년대표대회에 참석하여 대회발언까지 하였다. 발언고는 내가 초고를 쓰고 공작대 한조장이 수개하였는데 받아보니 똥푸는것을 세계혁명과 중국혁명 높이에까지 끌어올리며 나의 사적을 하늘만큼 부풀렸다. 나는 너무 고무풍선을 탄것 같아 한조장을 찾아가 의견을 제기했더니 한조장은 이것도 혁명의 수요이니 그대로 발언하라고 했다. 그런데 생각밖에도 그 발언이 좋다고 대회측 에서는 나를 지구대표대회에 가서 전형발언을 하도록 추천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나는 공사나 현뿐만아니라 전 지구적으로도 유명한 인기인물이 되였다. 이름을 날리게 되자 각 지구 많은 집체호들에서 전문적으로 나의 사적을 학습하였다. 각 현, 시 하향지식청년들과 귀향지식청년들의 열정에 넘친 편지가 눈송이마냥 날아들었다. 그중에는 나의 사적에 큰 감동을 받았다며 경험소개를 해달라는 지식청년이 있는가 하면 나를 “모주석의 훌륭한 지식청년”이라고 칭송하는 지식청년도 있었다. 지어 “혁명적우의”를 맺고싶다고 고백하는 녀지식청년들도 더러 있었다. 그 뜻을 모르는바는 아니였지만 선진이요, 모범이요 하는 여러 가지 “혁명적 영예”를 지닌 나로서는 서뿔리 아무 녀지식청년들과 “혁명적우의”를 맺을수 없었다.  더우기 온 사회가 계급투쟁을 “날마다 말하고 달마다 말하고 해마다 말하며” 대비판의 “혁명기치”를 높히 쳐들고 있는 환경속에서 출신이 나쁜 “뚜꺼비”가 출신이 좋은 “고니고기”를 맛보려 한다면 그것은 “반혁명행위”나 다름없는 일이였다. 그래도 인간의 원초적 본능은 가슴밑바닥에 파랗게 살아있어 숫총각의 생숭생숭한 마음으로 그중의 “성분이 나빠 자기도 혁명과 생산 1선에서 고민이 많다”는 한 녀지식청년 한테만 “혁명의 길에서 서로 돕고 전진하며 모주석의 훌륭한 지식청년이 되기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회답편지를 보냈다. 동병상련이라고 그후 우리 “검은 넝쿨에 달린 검은 열매”들은 남몰래 서신래왕을 하게 되였다. 조직의 열렬한 고무와 녀지식청년과의 싱숭생숭한 “혁명적우의”에 도취되여 나의 혁명정신은 하늘을 찌를듯했다. 그만큼 사상부담도 커져 몸이 아파도 시름놓고 병치료를 할수 없었다. 새벽 일찌기 똥푸러 나가기 위해 옷을 그대로 입고 자는 일이 많아 이 “계급의 적”의 몸에 또다른 숫한 “계급의 적”들이 근질근질 기여다녔다. 내가 인분푸기에 정력을 다 바치고있을 때에 “똥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다. 앓아누워도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어 기여다니며 자기절로 대충 끓여 먹다가 죽었단다. 죽게 되여도 곁에 더운물 한사발 떠주는 사람이 없고 들여다보는 사람조차 없었으니 죽어도 얼마나 쓸쓸하고 고독하고 원통스럽게 죽었겠는가. 전쟁판에서 얼마나 용맹하게 싸웠을 사람인데 본의아니게 포로가 되다보니 돌아와서 일생동안 사람축에 들지 못하고 시도때도 없이 투쟁받다가 비루먹은 개처럼 “더럽게” 죽었다. 나의 전임ㅡ”똥포로”의 죽음은 나게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까마귀 까마귀속” 을 알아서인지 나는 그 “똥포로”의 죽음이 더없이 가엾게 느껴졌고 무서워졌다. 성분이 “개똥”인 이 후임도 고생스레 “혁명적 빈하중농들의 똥”을 푸다가 언젠가 전임처럼 그런 비참한 끝장을 보지 않을가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났다. 겉으로는 간부들이 이 “똥푸개모범”을 잘한다고 춰주고 조직에서 영예를 안겨주지만 사실 어디로 가든 사람들이 모두 코를 싸쥐고 눈총을 쏘는 숨쉬는 “변소”이고 “똥무지” 였다. “똥포로”처럼 “개죽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죽도록 혁명하는 길만이 유일한 해탈의 길이였다.   4 내가 인분을 푼지 4년이 되는 해부터 우에서 우수한 하향지식청년들을 추천하여 도시의 로동자로 올려보내는 지표가 내려왔다. 이는 수많은 지식청년들의 몸을 달구어놓았다. 어떤 지식청년들은 하루빨리 고역스러운 농촌을 벗어나 도시로 돌아갈수 있는 문을 뚫느라고 앞뒤로 뻔질나게 뛰여다녔다. 나는 성분이 성분인지라 나한테는 이러한 지표가 차례지지 않을줄 알고 아무런 내색도 없이 자기 할 일만 부지런히 하였다. 어떤 사원들은 나를 찾아와서 “넌 이름난 모범인데 왜 이러고 있느냐? 남들처럼 좀 뛰여다녀야 하지 않겠느냐?”고 귀뜸해주기도 했다. 나는 그때마다 웃으며 “저는 아직도 빈하중농들의 재교육을 더 많이 받아야 합니다.” 라고 마음에 없는 변명을 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서글픔을 금할수 없었다. 시어미 역정에 개배때기를 찬다고 나는 열심히 인분 푸는것으로 서글픔을 달래였다. 그런데 정작 생산대회의에 내놓고 토론을 붙이니 사원들이 한결같이 성분이 “개똥”인 나를 첫 사람으로 추천할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다른 지식청년들두 잘 했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학철이처럼 농촌에 내려온 이듬해부터 어지럽고 힘든 일을 꾸준히 찾아한 청년이 어디 있수? 난 학철이 좋겠수.” 한 로농이 선참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채이쿠. 그만큼 고생했으문 이젠 시내에 올라가야지므. 성분이 나쁘다구 똥진 오소리처럼 농촌에 처박혀 뒤가 나가게 일만 하는게 정말 보기 구차하단데. 이젠 학철이가 그 더러운 똥푸개일을 한지도 몇핸데.” 그런데 나의 사업을 그렇게 지지하며 발언고까지 수개해주던 공작대 한조장이 싱거운 소리를 할줄이야. “그간 학철이가 남보다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잘 받은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분때문에 우에 올려보내도 통과될런지 모를 일입니다.” 그 소리에 사원들이 왁작 떠들어댔다. “그 성분이라는것두 할아버지때 일인데 손자대에까지 바가지를 씌워 기를 못펴게 할게 뭐 있습둥? 이게 당의 정책에 맞습둥?” “저 학철인 일만 일이라구 된리질에 걸렸을 때 제때에 치료를 받지 못해 지금두 쩍하문 뒤가 풀려 남의 눈을 피해서 대대위생소 리의사를 찾아간답더구마. 혁명적 농사를 위해 자기 몸꺼지 다 바치는 이런 청년이 추천을 받지 못하문 어떤 사람이 추천받아야 합둥? 안 그렇습둥?” “옳습꾸마.” 사원들은 한결같이 동의하였다. 나는 목이 꺽 메여올랐다. 나를 첫 사람으로 추천해서라기보다도 나를 그만큼 인정해주고 리해해주는 사원들의 그 진실하고 선량한 마음이 고마워서였다. 이만하면 만족이였다. 꾸밈새없는 사원들의 인정만 받으면 더 바랄것이 없었다.  나는 엉거주춤 일어나서 수줍게 말했다. “빈하중농 여러 분들의 추천에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자격이 안됩니다. 저는 이곳에서 여러분들의 재교육을 몇해 더 받겠습니다.” 나의 말에 사원들이 이구난방 떠들어댔다. “쯔쯔쯔. 저 말하는걸 좀 보우. 사람이 너무 착해빠졌어. 남들은 농촌을 하루빨리 떠나지 못해 안달복달인데. 그간 고생을 적게 해서 아직두 몇해 더 있겠다는가?” “학철인 저게 큰 모병이란데. 똥을 푸겠다고 할 때는 와늘 남먼저 나서더니 좋은 일에는 언제나 저렇게 뒤걸음만 치니 원. 본인이 저럴수록 우린 더 적극적으로 추천해야 합꾸마. 안그렇습둥?” “옳소!” 사원들은 더 토론할 여지가 없다는듯 만장일치로 나의 손을 들어주었다. 생산대에서는 나의 명단을 대대에 올려보냈다. 이에 시샘을 느낀 집체호의 한 친구가 “비단보”속의 “개똥”인 내가 자기들 먼저 추천을 받은것이 달통되지 않아 간부들을 찾아가서 소동작을 하였다. 하지만 대대에서도 순조롭게 통과되여 나의 명단을 공사에 올려보냈다. 그렇게 되자 오히려 내 마음은 불안해났다. 한조장말처럼 성분이 나쁜 내가 과연 공사에서 무사히 통과될수 있겠는가. 통과되지 않아도 좋다. 나도 이젠 이런 일에도 남들과 경쟁할수 있는 사회의 떳떳한 일원이 되였다는것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해났다. 아닌게아니라 며칠후 오대장이 나를 찾아와서 공사의 토론에서 미끄러졌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짐작하고있던터라 별로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못내 서운했다. “성분때문인게 아니라 무슨 혁명의 수요라는것 같습데. 어쩌겠소. 더 노력해 다음번에 보기오. 하지만 학철이두 사원들의 마음을 알았으니 사원들을 나무라진 마오.” 오대장은 안됐다는듯 나의 어깨를 툭툭치며 위안했다. 사흗날 뜻밖에도 공사지식청년판공실 염주임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우사마당 한켠에서 인분을 버무리고있는 나를 끌고 버들방천 강뚝우로 올라갔다. 우리는 강뚝에 나란히 앉았다. “동무도 추천이 비준되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겠는데 어떻게 생각하오?” 나는 되도록 태연한척 말했다. “저는 아무 의견도 없습니다. 저는 아직 빈하중농들의 재교육을 더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저는 락심하지 않고 맡은바 일을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니 고맙소. 사실 이번에 공사에서는 동무의 추천문제를 어느 누구보다도 신중히 토론했소. 그 누구보다도 자격이 당당하지만  결국 혁명의 수요로 동무를 남겨두기로 했소.” 염주임은 권연 한대 붙여물었다. 나에게도 한대 권했으나 나는 피울줄 모른다며 공손히 사절했다. “조직에서 동무같은 지식청년전형 한사람을 양성한다는것이 쉬운 일이 아니요. 더구나 성분이 나쁜 지식청년가운데서 이런 전형을 양성한다는건 더구나 쉬운 일이 아니오. 그간 동무의 노력도 크지만 조직의 부축임도 적지 않았소. 최근에 지구 지식 청년판공실에서 동무를 성지식청년대표대회에 보내기로 결정했다고 통지왔소. 또 대회 전형발언까지 시키려 준비하고 있소. 이런 대목에 동무가 추천받아 도시로 올라가게 되면 다년간 조직에서 양성한 노력이 물거품이 되게 되오. 그래서 토론끝에 동무를  광활한 천지에 남겨두기로 한거요. 추천을 받아가는 지식청년은 필경 소수요. 다수는 아직도 광활한 천지에 남아있소. 동무의 문제도 성분때문이 아니라 혁명의 수요인거요. 그러니  조직의 이런 의도를 동무도 충분히 리해했으면 하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별로 한것도 없는 저한테 이런 과분한 영예를 안겨주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혁명의 수요하면 저는 영원히 광활한 천지에 뿌리박고 꽃피우고 열매맺겠습니다.” 염주임도 일어서며 나의 손을 굳게 잡아주었다. “훌륭하오. 그런 결심과 용기가 있다면 우리도 시름을 놓겠소. 아무튼 우리가 사람을 잘못보지 않았구만. 동무는 성분의 구애를 받지 말고 적극적으로 당을 따라 학습하며 되도록 빨리 입당신청서를 쓰도록 하오.”  나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나더러 입당신청서를 쓰라다니? 부농자식도 입당할수 있단 말인가? 나는 가슴이 부풀어오르며 눈굽이 젖어났다. “아직 입당조건과 거리가 멀지만 조직에서 믿어준다면 입당을 쟁취하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겠습니다.” “혁명을 한다는것은 일체를 당에 바친다는것을 의미하오. 그러자면 가지가지 시련을 극복하고 고난과 싸워야 하오. 보다 꾸준히 노력해서 새로운 운명에 적극적 으로 도전해보오.” “알겠습니다. 그 말씀 깊이 명기하겠습니다.” 그후 나는 성지식청년대표대회에 참가하여 대회발언까지 하였다. 신문, 방송 등 성보도매체에서도 나의 사적을 굉장히 보도하였다. 그후에도 몇번 로동자모집명액이 내려와 사원들이 번마다 나를 추천했으나 공사에 올라가 번번히 통과되지 못하였다. 그 대신 다른 지식청년들이 추천을 받아 올라갔다. 몇번 추천해 올려보내도 내가 “혁명의 수요”로 통과되지 못하자 사원들은 별수 없이 다른 집체호친구들을 추천했다. 후에는 대학생추천명액까지 내려와 사원들이 또 나를 추천했으나 역시 통과되지 못했다. 이렇게 한해두해 지나가자 나와 함께 내려왔던 집체호청년들이 모두 올라가고 나만 달랑 남게 되였다. 집체호의 빈자리는 새로 내려온 나어린 지식청년들이 메웠다. 한두해가 지나자 그들도 륙속 추천을 받아 올라갔다. 마을사람들은 “혁명의 수요”로 도시에도 올라가지도 못하고 대학에도 가지 못하며 구린내나는 집집의 변소를 들추며 나이만 먹어가는 나를 보고 “혁명의 수요”가 사람을 죽인다고 한탄했다. 그후 “4인무리”가 꺼꾸러지며 형세가 돌변했다. 하향지식청년전형이였던 나는 하루아침에 모든 영예를 몽땅 빼앗겼다. 나같은 전형은 “4인무리”가 만들어낸 가짜 전형이란다. 나는 “4인무리”의 추종자로 락인이 찍혀 눈총을 받고 욕설을 먹어야 했다. 억이 막혔다. 짭지 않은 8년 동안의 노력이 나무아미타불이 되였다. 그간 나쁜 성분에서 조금이나마 해탈되여 사람축에 드는가싶더니 또다시 거지발싸개마냥 내동댕이쳐 “개똥”이 되였다. 아아, 앞으로 오는 범은 피해도 뒤로 오는 팔자는 피하지 못한다더니 나는 평생 이렇게 개밥에 도토리로 살아야 하는 팔자인가. 다행히 나의 사정을 잘아는 마을간부들과 사원들이 나를 측은하게 생각했다. 모든 영예가 다 없어진 이듬해에야 나는 “늙다리지식청년”으로 사원들의 추천을 받아 현성의 한 자그마한 철합금공장에 로동자로 올라갈수 있었다. 이때에는 누구도 나를 찾아 “혁명의 수요”로 농촌에 남아야 한다고 설교하는 사람이 없었다. “동무가 올라가면 그간 조직에서 알심들여 양성한 성과가 나무아미타불이 된다.”고 “가슴아파” 하는 사람도 없었다. 내가 배치받은 공장에 첫 출근을 해보니 나의 후배로 우리 집체호에 내려왔던 지식청년이 공장장으로 있지 않는가. 나는 그 후배의 밑에서 묵묵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나는 광활한 천지에서 인분을 푸던 그 열정과 정신으로 기술혁신을 하며 마음속의 상처를 아물궈갔다. 광활한 천지에서는 “올해도 고험 다음해에도 고험” 하며 시켜주지 않던 입당도 도시에 올라와서야 할수 있었다. 당을 따라 학습한지 꼬박 12년만이였다. 부지런히 일하여 그후에는 부공장장으로 승진하기도 했다. 대학시험제도가 회복되여 시험을 치려해도 우에서는 무슨 골간이요, 간부양성 대상이요 하면서 시험도 치지 못하게 했다. 나는 또 “혁명의 수요”에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개혁개방문이 열리고 시장화가 실시되면서 계획경제의 산물인 우리의 자그마한 철합금공장은 문을 닫게 되였다. 나는 로동자들과 함께 또 실업의 고배를 마시게 되였다. 우리의 시대는 왜 이렇게 불행한가. 3년재해 시기에는 먹을것이 없어 키가 크지 못했고 공부해야 할 시기에는 농촌에 내려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느라고 “쭉정이 지식청년”이 되고말았다. 련애하고 가정을 이루러야 할 때에는 똥푸는 모범으로 고린내를 뒤집어써야 했고 가정을 먹여살려야 할 때는 일자리가 없어 헤매였다.  하방, 하향, 하해, 하강. 우리 시대에는 왜 어디에나 오를 “상”자가 붙지 않고 내려갈 “하”자만 붙는지 모를 일이였다. 귀신의 작간인가?… ×                                         × 인분표 두장을 들고 들여다보며 이왕지사들을 떠올리노라니 저도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솟아올랐다. 그 시절에 속으로 남몰래 흘렸던 눈물이 인제야 밖으로 시름없이 솟아나는것인가? 그때는 어쩔수 없이 삶의 방식이라고 여겼던 인분표가 지금에 와보니 내 인생을 롱락한 증표였다. 생각할수록 “계급의 적”이였던 내 삶이 허무했고 내 인생이 불행했다. 문득 갖은 시달림을 받다가 불쌍하게 죽은 나의 전임- “똥포로”가 생각났다. 눈은 펀히 뜨고있다만 나도 결국 그 “똥포로”의 신세가 되지 않았는가. 언제 다가왔는지 장갑을 끼고 앞치마를 두른 안해가 나를 툭 건드리며 나무람했다. “아이, 짐은 꾸리지 않구 그렇게 멍해 앉아 뭘해요? 어머, 당신 지금 눈물을 흘리고있어요? 나는 황급히 눈물을 훔쳤다. “아니…아무것도 아니오…” “대체 뭘 들여다보며 그렇게 울어요?” 안해는 나의 손에서 인분표를 낚꿔채다 보더니 역귀신을 본듯 놀란소리를 지르는것이 아닌가. “우구 이게 동무 인생을 망쳤다는 그 똥푭니까? 여직껏 이따위건 왜 보관하구 있어요?” “그건 내가 지구와 성의 하향지식청년대표대회에 참가하면서 공동변소의 인분을 제때에 푸지 못해 작페가 되였던 표요.” “아이고 원통해라. 부끄럽지도 않아 아직도 그때 일을 떠올려요? 한뉘를 눌리워 살구 얼리워 살았으면 됐지 뭐가 아쉬워 이따위 똥표를 들여다보고 있는건가요?” 안해는 다짜고짜 인분표를 쫙쫙 찢었다. 나는 저도모르게 소리쳤다. “아니, 그건 왜 찢소?” “그럼 남겨뒀다 무덤속으로 가지고 가겠어요? 나는 와자자하게 신문에 난걸 보구 알았지만 제발 자식들은 옛날에 아버지가 똥푸개 모범이였다는걸 알지 못하게 해요. 창피하지도 않아요? 내 그때 무슨 정신에 똥푸개모범을 우러러보구 먼저 련애편지를 썼던지…지금 보면 어처구니 없어서…” 역시 부농성분을 가진 안해도 젊었을 때 늘 소외당하고 억눌려 살았었다. 그런 원인에서인지 그때 그시절 일만 떠올리면 이가 갈리는 모양이였다. 훤한 인물체격을 가진 그녀가 성분만 나쁘지 않았어도 나같은 “똥푸개”한테 시집오지 않았을것이다. 아마 안해도 이제 와서 나한테 “혁명적우의”를 맺고싶다고 먼저 편지한걸 후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까워 그래는게 아니라 그 속에 내 청춘이 담겨져있고 내 인생이 녹아있기 때문이오. 다시말하면 저주로운 그 시대의 력사가 말이오.” “그런다고 이미 흘러간 인생을 되찾을수 있어요? 잃어버린 청춘을 되돌려올수 있어요?” “두고 보느라면 그런 력사를 저주하구 그런 력사가 되풀이 되지 않게 하는데 도움이 될게 아이오.” “뭐 력사를 동무가 씁니까? 이젠 그런데 신경쓰지 말고 아들이 사준 널직한 아빠트에서 호의호식하며 만년이나 즐겁게 보냅시다. 아픈 추억을 자꾸 떠올려봐야 자신만 괴로울뿐이예요. 재채기를 해도 뒤가 풀리는 그 똥싸개병이나 좀 열심히 치료하세오. 나두 늘그막에 좀 손에 물을 적게 적시게스리. 똥푸는 모범두 오래 하더니 이젠 제 뒤도 바로 건사하지 못하면서리…” “…” 나는 입을 하 벌린채 안해를 쳐다보며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똥푸던 시절에  된리질에 걸린것도 무릅쓰고 “선진”이요, “모범”이요 하며 간부들이 마른 비행기를  태워주는통에 죽을둥살둥 모르고 일만 하다보니 제때에 치료하지 못하였다.  그것이 고질이 되였는지 도시에 올라온후 좋다는 약을 다 써봐도 효험이  없었다. 이는 위대한 “상산하향운동”과 “빈하중농재교육”이 나에게 남겨놓은 “영원한 기념”이였다. 그렇다. 세월이 약이라고 가슴속에 박힌 옹이를 뽑아버리고 여생을 즐겁게 보내 는것이 바람직할것 같다. 그게 어디 나 한사람이 겪은 아픔이더냐. 수천수만의  “지식청년”들이 그 “혁명”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고통을 겪지 않았던가. 다만 황당하고  저주스러운 그런 력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두손 모아 빌뿐이다. 나는 안해가 찢어버린 인분표를 주어 창밖에 휙 내던졌다. 누렇게 바랜 휴지같은 종이쪼박은 느믈느믈 맥없이 아래로 흩어져내렸다. 잘가거라. 다사다난했던 나의 청춘이여! 2014년 연변문학 제12기    
52    [수필] 인생도 사계절 (허룡석) 댓글:  조회:1418  추천:0  2017-09-22
수필 인생도 사계절 허룡석 오랜만에 모아산 산정에 올랐다. 비록 립춘이 지난지 이슥하건만 봄기운은 느낄수가 없다. 북방의 집요한 겨울의 랭기는 아직도 가셔지지 않았다. 대신 공기는 아주 청신했다. 북경, 천진 등 대도시들의 스모그현상은 찾아볼수 없는 고향의 청신함이다. 시내안에서 늘 대형 성냥갑같은 콩크리트울안에 갇혀 근시안같던 시야가 졸지에 탁 틔였다. 오랜만에 저 멀리 눈길을 던지며 동서남북을 훤히 바라볼수 있었다. 눈길이 트이니 성냥갑안에 오그라들었던 내 마음도 활짝 펴진다. 나는 몸을 돌렸다. 지금 내가 살고있는 북쪽 연길보다도 어쩐지 내가 나서 자란 남쪽 세전이벌에 먼저 몸이 돌아진다. 드넓은 세전이벌은 올해따라 하느님이 손이 크게 하사한 두터운 솜이불을 덮고 시름없이 굳잠에 빠져있는듯 하다. 풀을 먹여 빨아놓은듯한 하얀 솜이불은 이른 봄의 해빛에 반사되여 유난히 눈을 부시게 한다. 세전이벌은 겨울의 강추위에 얼어붙은듯 꼼짝하지 않고 누워있는다. 하지만 자연의 힘을 누가 모르랴. 이제 봄이 오면 내가 언제 굳잠에 빠졌느냐듯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  자기의 직책에 충실할것이다. 이제 그 넓은 가슴에서 오곡백과가 씨붙이고 무르익도록 자기의 몸을 포근히 덮혀오고 기름지게 걸구어갈것이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선량한 인간들이 자기몸에서 자양분을 량껏 섭취하도록 풍만한 가슴을  풀어헤칠것이다. 나의 청춘의 구슬땀도 슴배여있는 저 세전이벌은 결코 잠자고 있는것이 아니리라. 지난해 인간에게 자양분을 바쳐  야위고 피곤해진 몸에 충전을 하며 서서히 태동을 꿈꾸고 있으리라. 자연은 수천수만년을 살아와도 조금도 바보스럽지 않다. 언제나 제정신에 산다. 100여년전에 선조들의 부지런한 손길에 의해 태고연한 자연의 옷을 벗어버리고 태여난 저 세전이벌도 쉴줄도 알고 일할줄도 안다. 흐트러질 때가 없다. 세전이벌은 총명하다. 자기에게 충성하는 인간과 자기를 속여먹으려는 인간도 어김없이 가려본다. 인간들의 성실함에 따라 베푸는 은혜도 각이하다. 세전이벌은 춘하추동 사계절에 따라 질서있게 돌아간다. 봄이면 씨뿌리고  여름이면 가꾸고 가을이면 수확하고 겨울이면 저장하는것이 자연의 상징이다. 태양이  서쪽에서  뜨지 않는한 이 법칙은 영원히 뒤바뀌지 않는다 사계절로 게으름없이 꾸준히 살아가는 저 넒은 벌, 지금은 동면을 끝내고 태동을 꿈꾸고 있을 저 세전이벌을 바라보며 문득 사람의 인생도 사계절로 살아가는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친다. 울며 이 세상을 찾아와서부터 웃으며 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누구나 어김없이 소년, 청년, 장년, 로년기를 거쳐야 한다. 소년시기는 인생의 씨앗을  뿌리는 봄이요 청년시기는 인생을 가꾸는 여름이요 장년시기는 인생의 성과를  수확하는 가을이요 로년시기는 지난날을 총화하며 인생의 경력을 저장하는 겨울이 아닐가. 소년시기는 인생발육단계에서 기초지식을 배우고 세상을 접촉하며 나는 장차 무엇을 할가 하는 인생의 꿈을 심어가는 봄이다. 인생의 비옥한 밭을 갈고 이랑을 짓고 오동통한 씨앗을 뿌리는 계절이다. 청년시기는 오곡백과가 강렬한 해빛을 받아 왕성한 생명력을 과시하는 여름처럼 혈기왕성한 정력기이다. 봄에 세운 꿈을 보다 확실히 검토해보며 확정된 꿈을 실천적으로 가꾸어가는 여름이다. 씨를 뿌린 인생의 목표에 물주고 비료주고 김매고 북을 돋구고 가지자르는 가꿈의 계절이다. 장년시기는 인간적으로 성숙되고 사업적으로 안정되여 봄에 심고 여름에 가꾼 인생의 목표에서 노력의 성과를 거두는 가을이다. 자식을 낳아 키우고 리념이 굳어지고 정력을 쏟아부은 일에서 열매를 따게 되는 계절이다. 로년시기는 일생동안 심고 가꾸고 거둔 성과를 저장하는 계절이다. 또한 육체적으로 기력이 떨어져도 정신을 가다듬으며 래일을 준비하는 겨울이다. 몸은 늙어가도 마음은 청춘이다. 자기가 걸어온 길을 되새겨보며 잘하고 못함을 검토하며 새로운 리념과 실천으로 또다시 돌아올 새봄의 도래를 맞이하는 계절이다. 자연과 마찬가지로 인생도 자기의 사계절을 맞이하고 철철이 해야 할 일을 하게 되는것 같다. 철을 어기면 농사를 망치듯이 인간도 철을 어기면 인생을 망치게 된다. 곡식농사를 지으나 인생농사를 지으나 철을 세분하면 바로 하루하루의 시간이다. 시간의 가치는 금전의 가치와 같다. 시간과 금전은 가장 유용하게 잘 사용함에 그 가치가 있다. 돈이 많으면 무엇하랴. 다 죽게 되였는데도 돈쓰기 아까와 쓸곳에 쓰지 않으면 실제상 그는 가난뱅이며 그의 돈은 수지에 지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자기와 타인의 행복에 유용하게 쓰지 않으면 그의 인생은 가라지 인생일것이다. 인생의 풍요로운 수확을 바라며 시간을 아껴쓰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 그것이 바로 인생을 살아갈수 있는 목표이다. 자기의 제한된 시간을 사회의 도덕적 수요에 부합되며 자기의 능력과 특장에 알맞는 인생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데 유용하게 쓰는 사람이 인생을 살줄 아는 사람이다. 또한 성과를 낼수 있는 사람이다. 목표가 없으면 눈부신 성과를 거둘수 없다. 하기 싫은 일에서 성과를 내기는 어렵다. 사람이 숨이 붙어있다하여 사는것이 아니다. 아무런 꿈과 뜻이 없으면 먹고 자고 교배할줄 밖에 모르는 짐승과 다를바 없는것이다. 아무런 목적없이 심심풀이로 책을 펼쳐든다면 얼마나 큰 시간랑비인가. 아무것도 살 생각없이 거리를 돌고 돈다면 심신이 얼마나 피로한가. 목표가 없이 가랑잎처럼 바람에 밀려가고 밀려오며 되는대로 살아간다면 그 인생은 얼마나 허탈하고 허황한가. 확정된 목표가 있다면 거기에 쓸 시간이 충족하다. 순조롭게 인생의 궤도에 올라설수 있다. 문제에 부딪쳐도 방황하지 않는다. 아무리 현란하고 우월한 목표가 손짓해도 자기의 능력과 흥취, 자기가 세운 목표에 부합되지 않으면 거기에 미혹되지 않고 꾸준히 자기의 목표를 향해 나간다. 수류탄을 만들 능력에 원자탄이 손짓한다 하여 거기에 혼을 빼았겨서야 되겠는가. 할 일이 가장 많은 사람은 시간이 가장 충족한 사람이다. 할 일이 많다는것은 그가 나가야 할 목표가 확실하고 명확하기에 갈림길에 들어선 사람처럼 우유부단하거나 방황하는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쉽게 사회환경의 손에 놀아나는 갈대로 되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자기의 환경을 만들어가기에 힘쓰며 자기의 인생목표로 환경을 지배하려 한다. 시간을 랑비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자기가 해야 할 인생의 목적을 확정하기는 했으나 그 목표에 충실하지 않고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며 그 목표에 부합되는 일을 하려 하지 않는데 있다. 농사를 지으려 작정했으나 무엇을 심어야 할지 어떻게 가꿔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 결국 철을 어기게 되는것과 마찬가지 도리이다. 시간을 아끼라 하여 휴식도 없이 련속부절히 일하라는것이 아니다. 휴식을 잘 하고 공간시간을 충분히 리용하면 자기의 목표를 보다 훌륭히 실현할수 있다. 유익한 오락과 체육단련은 심신을 건강하게 한다. 목표있는 일을 하다 쉬는 휴식은 유쾌하고 거뿐하고 엔돌핀을 발산하나 목표없이 놀기만 하는 휴식은 오히려 인생을 갉아먹는 괴수이고 시간을 훔쳐먹는 흉수이다. 우리의 인생은 무한정한것이 아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늘이 준 제한된 시간안에 있다. 자연의 사계절과 인생의 사계절은 본질적 구별이 있다. 자연의 사계절은 갔다가 다시 돌아오지만 인생의 사계절은 한번뿐이다. 가면 그뿐이다. 올해 농사를 잘 짓지 못했다면 다음해에 경험을 총화하며 다시 잘 지으면 되지만 인생의 농사는 한번 잘못 지으면 그만이다. 그저 다음 세대들에게 인생의 경험과 교훈을 남겨줄뿐이다. 하기에 인생의 사계절은 그만큼 귀중하고 보귀한것이다. 인생에는 실험도 없고 련습도 없다. 지금 잠자는듯한 저 세전이벌의 상태는 로년기에 들어선 인생과 비슷하지 않을가 싶다. 무슨 큰일을 하는것처럼 떠들썩하지도 않고 남의 시선도 끌지 않으며 조용히 묵묵히 자기의 체념에 빠져있다. 그렇다고 잠자는것이 아니다. 죽은것은 더욱 아니다. 새봄을 맞을 차비를 하고있다. 로년기에 들어선 사람도 피곤하고 떠들썩하고 자랑스러웠던 인생의 봄, 여름, 가을을 회고하며 양파껍질을 벗기듯 허위와 체면, 필요이상의 자존심 등 겉딱지들을 한겹한겹 벗겨버리며 거뜬한 몸으로 재생의 봄을 맞이하고저 만전을 갖추고 있다. 남보기엔 기력이 빠져 조용한것 같아도 인생의 겨울철은 면면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 저 세전이벌처럼 이제 새봄이 오면 키지개를 켜고 일어나 보다 장중하고 묵직하게 인생의 새봄을 장식할것이다. 잠자는듯한 세전이벌을 바라보노라니 춘하추동을 쉼없이 멋지게 살아가며 인류에게 끝없는 은혜를 베풀어가는 대자연한테서 삶의 철리를 터득한것 같다. (이제 봄이 오면 너도 솜이불을 차던지고 잠을 깰테지. 나도 허위딱지들을 털어버리며 잠을 깰거야. 너도 충족한 에네르기로 만전을 갖추고 나올거지. 나도 알찬 청춘의 마음을 안고 씩씩하게 나올거야. 이제 약동하는 새봄이 올때 우리 보람찬 희망을 아고 이 산정에서 다시 만나자꾸나. 도라지 2013년 제5기
51    [소설] 렬사비 (허룡석) 댓글:  조회:1613  추천:0  2017-09-20
소설 렬사비 허룡석 마을앞의 뉘연한 산언덕에는 낡고 헐망한 렬사비가 서있다. 먼길에 지칠대로 지쳐 당금 쓰러질듯한 로인네의 초라한 모습으로 황초속에 쓸쓸히 서있다. 렬사비를 세울 때에는 죽어도 굴하지 않는 선렬들의 영웅기개를 안받침하듯 주위에 푸르고 낏낏한 소나무와 이깔나무들로 울창했으나 언제부터인지 다 찍어가고 지금은 누구도 욕심내지 않는 메마른 황초들만 렬사비를 둘러싸고 찬바람에 쓰륵쓰륵 흐느낌소리를 내고있다. 반세기 남짓한 비바람속에서 바랠대로 바래지고 헐망할대로 헐망해진 렬사비는 자기를 이 세상에 태여나게 했으나 이젠 자기를 돌볼 기력조차 없이 갈수록 황페해지고 초라해지는 룡성마을을 처량하게 내려다보고있다. 20세기 50년대초에 세워진 이 렬사비에는 항일렬사 3명, 해방전쟁렬사 12명, 항미원조렬사 35명의 이름이 또박또박 새겨져있다. 이들은 여러 혁명시기에 거의 다 달래동 각 툰에서 참군했던 열혈청년들이였다. 인민공사설립후 달래동마을을 룡성 대대로 개명하였다. 렬사비도 룡성대대의 자랑스러운 렬사비로 되였다. “문화대혁명”전에는 해마다 청명절이나 추석이면 렬사비를 찾아 술을 붓고 절을 올리고 선서하고 청소하는 남녀로소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었다. 설명절이면 선렬들을 기리고 우러르는 마을의 간부들과 청년들, 학생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렬군속가족들을 일일이 찾아 위문하며 꽃을 달아주고 마당을 쓸어주고 물을 길어주고 나무를 패주기도 했다. 그때면 병국령감 등 렬군속들은 조직과 마을사람들의 진정어린 관심에 마음이 후더워지군 했다. 조국과 인민을 위해 피를 헛되이 흘리지 않았다는 긍지감을 가슴 뿌듯이 느끼군 했었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지금은 렬사비에 발길을 돌리는 사람이 없고 렬군속가족을 찾아 위문하는 사람도 없다. 다만 여든고개를 넘긴 병국령감만이 중풍을 맞은 후유증으로 가재걸음을 하며 형님을 만나는 기분으로 산언덕을 종종 오르내릴뿐이다. 조선전쟁시기에 그들 형제는 당의 호소에 적극 향응하여 함께 전쟁판으로 나갔으나 형님은 남의 나라땅에서 무주고혼이 되여 묻혀있었고 병국령감은 왼팔을 잃고 오른 다리에 파편을 박은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저 렬사비에는 형님 박병철의 이름도 새겨져있었다. 지팽이를 짚고 병약한 몸으로 헐헐거리며 렬사비를 찾을 때마다 병국령감의 마음은 허전하고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한메터 높이의 널판자에 흰칠을 올려 렬사비를 정결하게 둘러 막았던 울타리는 없어진지 오랬다. 렬사들이 뭔지도 모르는 뒤마을의 소때와 양떼들이 제멋대로 쓸어들어와 이리저리 떠박기도 하고 오줌똥을 갈기기도 했다. 렬사비기초는 벽돌이 떨어져나가고 세면이 부스러져 렬사들의 앙상한 뼈가 들여다 보이는듯 처량하고 원통했다. “혁명렬사들 영생불멸하리”라는 붉은 글자도 색이 다 바래져 가까이에서 뜯어보아야 새겨넣은 글씨체를 알아볼수 있었다. 황초속에 초라하게 서있는 5메터 높이의 렬사비는 형체를 알아볼수 없는 만신창 시체를 방불케 했다. 개혁개방이후 날로 헐망해가는 렬사비를 그대로 보고만 있을수 없어 병국령감은 마을의 렬사가족들을 휘동하여 향과 촌의 책임자들을 번질라게 찾아다니며 렬사비를 수건해줄것을 바랐으나 번번이 물건너가는 흙보살이 되고 말았다. 렬사비는 렬사들 충혼의 상징인데 렬사비에 발길을 돌리는 사람이 없어도 깨끗하고 숙연한 모습으로 서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안타깝게 호소해도 듣는 사람들은 마이동풍이였다. 모두들 도약식 발전과  경제지표를 올리는데 투자하고 신경을 쓸뿐 헐망해가는 렬사비에  관심을 돌리는 간부는 없었다. 여느 조선족마을들과 다름없이 이 마을에서도 한국바람에 나젊은 아낙네들과 청년들은 다 빠져나가고 늙은이들은 하나둘 “연통대학”으로 가 많은 집들이 비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이 없으니 결혼잔치도 없고 애들 울음소리도 없다. 백여년동안 피땀을 흘리며 일구고 가꿔놓은 논과 밭들도 거의 다 외지사람들 손으로 넘어갔다.  그저 바람앞의 초불같은 병국령감같은 늙은이들이 갈수록 황페해지는 마을을 고독히  지키고있을뿐이다. 마을이 기울어져가고 인구가 급감하자 전해부터는 뒤마을  한족 촌과 합병되여 한족마을 이름을 따 립신촌으로 되였다. 우리 민족의 얼이  슴배였던 달래동이나 룡성이라는 마을이름은 력사의 뒤울안으로 사라지게 되였다. 마을이 합병된후에도 병국령감은 부촌장이라는 허울좋은 직책을 띤 60넘은  동길이를 찾아가 렬사비수건문제를 다시 제기하였다. 동길이가 이 마을에서 제일  나어린 사람이라 합병된 촌에서는 소학교때부터 소대장 한번 못해본 “꺽꺽이”에게 부촌장이라는 “높은 직무”를 씌워주었다. 그 직무에 그 직책이라더니 “꺽꺽이”는 뒤마을 촌장한테로 번질라게 뛰여다녔다. 그렇게 몇번 제기하여 석달후엔가 한번은 동길이가 병국령감을 찾아왔다. 자기가 왕촌장한테  마을 렬군속들의 뜻을 몇번 제기했더니 왕촌장이 하는 말이 수건은 할수 있는데 렬사비를 촌소재지인 자기네 마을에 옮겨와야 한단다. 그 말을 듣고 병국령감은 풍맞은 사람같지 않게 펄쩍 뛰였다. “우리 마을 렬사비를 어떻게 렬사가 둘밖에 없는 그 마을로 옮겨간단 말인가. 랭수에 이 부러질 소리를 하지 말라 하라구.” 그때 뒤마을에 렬사가 둘밖에 없어 렬사비를 세울 형편이 못되여 사정사정하여 달래동마을 렬사비에 해방전쟁때의 자기촌 두 렬사의 이름을 새겨넣게 되였다. 그런데 이제 와선 통채로 옮겨가겠다니. “꺽꺽…왕촌장말이 이젠 마을도 없어지는데 꺽꺽…어떻게 렬사비를 빈 마을에 다시 수건하겠는가구 합데다. 꺽꺽…” “마을이야 쓰러져가두 렬사들의 피줄을 이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아직 눈이 펀해 있지 않는가?” “만일 꺽꺽…마을사람들이 렬사비를 옮기는걸 동의하지 꺽꺽…않으면 원래 자리에다 렬사비를 수건하지 못하겠다구 꺽꺽…합더구마. 어떻게 벌어들인 뭉치돈을 꺽꺽…사람두 없는 황초밭에 던져버리겠는가구 하면서…꺽꺽…" “이젠 우리 마을 렬사비를 아예 자기네 렬사비로 만들자구? 도투자리에서 개꿈 꾸지 말라 하라구….” 화가 치민 병국령감은 지팽이를 짚고 후둘거리며 마을 집집이 찾아다니며 우리 마을 렬사들의 충혼이 깃들어있는 신성한 렬사비를 절대 다른 마을로 옮겨가게 해서는 안된다고 사지가 삐뚤어고 입이 오그라든 령감로친들한테 동침을 놓았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하루건너 산언덕에 올라가 렬사비를 살펴보았다. 동길이의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들은후부터 병국령감은 엎치락뒤치락하며 며칠밤을 바로 자지도 못했다. 여러해동안 그렇게 앞뒤로 뛰여다니며 렬사비수건을 호소했더니 일이 상상밖으로 번져가고있지 않는가. 어느날 시내에 들어가 술을 마시고 돌아온 손자 창수가 병국령감에게 눈을 흘겼다. 그는 한국에 가 여러해 일하다가 비자가 만기되여 다시 비자를 내려고 집에 돌아와 한달째 눌러있는 중이였다. 그의 아버지, 어머니, 삼촌과 사촌들도 모두 한국에서 돈벌이에 혈안이 되여있었다. 두해전에 할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뜬 후에는 보모를 청해 할아버지를 돌보게 하였다. 원래는 양로원에 보내려 했으나 죽어도 정든 마을을 떠나지 않고 형님의 이름이 새겨져있는 렬사비를 지켜보겠다고 고집을 부려 어쩔수 없었다. “요새 듣자니까 할아바이 무슨 렬사비를 옮겨가는걸 제일 반대한다면서요?” 병국령감은 두눈을 부릅떴다. “그런데는 어째? 그게 잘못됐냐?” “야, 할아바이두 답답합꾸마. 몸두 편찮은데 쓸데없는 일에 그렇게 발벗고 나서 반대할게 있습둥? 아무데나 있으면 없기보다야 낫지 않겠습둥?” “무라구? 이눔아, 쓸데없는 일이라니? 그게 네가 할 소리냐? 거기에 네 큰 할애비 이름두 새겨져있다. 그런걸 어디에 옮겨간단 말이냐? 그게 어디 그렇게 허타이 대할 문제냐?” “큰 할아바이 이름이 새겨있으면 뭘 합둥? 지금 모두 먹구 살기 바빠 눈을 펀히 뜨고있는 제 부모형제들도 돌보기 바쁜판에 누기 몇십년전에 죽은 렬사들을 생각 한담둥? 그저 죽은 사람들만 불쌍합지.” “뭐라구? 그것두 말이라구 하냐? 그래 렬사들이 없었으문 너들이 이만큼이라두 잘살수 있을것 같냐?” 그 말에 손자녀석이 더구나 발끈했다. “그런 말씀 하지두 맙소. 할아바이네는 그때나 지금이나 어째 그냥 거짓말만 하메 삼둥? 할아바이네나 아부지 젊었을 때는 잘 살았습둥? 우리 세대두 잘 살게면 지금 모두 한국에 쓸어나가 막벌이를 하겠습둥? 할아바이때는 젊은이들이 모두 전쟁판에 나가 죽어서 마을에 젊은이 없구 우리 세대에 와서는 할아바이네 원쑤라고 싸우던 나라에 돈벌이하러 쓸어나가느라 젊은이들이 없구. 그저 배를 곯치 않고 엉치 가리울 옷이 있으면 잘사는겝둥? 집안에 앉아 그냥 옛날말만 하지 말구 다른 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 좀 봅소. 이젠 우리 세대두 발달한 나라들과 비교하며 앞을 보구 빛이 나게 살아야 합꾸마. 시내에 아빠트두 있구 차두 있구 돈두 두둑해야 합꾸마. 이게 어느 때라구 자꾸 뒤를 돌아보구 옛날말만 함둥? 나라가 발전하지 못하면 백성두 사람값에 못가꾸마. 까놓구 말해 사람들이 모두 돈벌이에 정신나가 하는판에 우린 렬사라는 단어조차 잊은지 오래꾸마. 지금 할아바이네 밖에 생각하는 사람 누기 있습둥?” 병국령감은 화가 치밀어서인지 아니면 할 말을 찾지 못해서인지 주름이 가득 한 입술을 부르르 떨뿐 화가 치민 눈길로 손자만 흡떠보았다. “그리고 저 큰 뒤동네에는 어째 렬사들이 둘밖에 없다는데 이 동네는 렬사들이 그렇게 많습둥? 전에두 할아바이네 혼자 혁명했습둥? 그러길래 봅소. 지금 뒤동네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한데 이 동네는 사람이 있는가구.” “뭐야? 이눔새끼, 그래 이 할애비는 사람이 아니냐?” 병국령감은 그제야 할 말을 찾은듯 침방울을 튕겼다. “뒤동네에서는 사람이 갈수록 불어나서 마을을 단단히 지키니까 이젠 사람이 없어지는 우리 마을두 합병하고  이름두 그동네 이름걸구 렬사비두 가져가자는게 아니겠습둥? 가져 가게 내버려 둡소. 렬사들 이름만 그대로 있으면 됩지 무스거 다른걸 고려할게 있습둥? 이름이 있은들 누기 들여다 본답둥? 보든말든 그래두 저렇게 헐망해 없어지기보다는 낫재임둥? 이젠 할아바이두 그깟 렬사비에 신경 좀 그만 쓰구 병치료나 잘합소.” “뭐라구? 네 이놈…이놈…” 병국령감은 떨리는 손으로 뱀이 나가는지 구렁이 나가는지 제멋대로 지껄여대는 손자를 가리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눔이 내 손자 옳기나 한가? 젊은놈들의 생각은 우리와 완판 틀리는가? 손자와 다툰후 병국령감을 화가 치밀어 엎치락뒤치락 그날밤을 새우다싶이 했다. 세월이 변해도 이렇게도 변했는가. 내가 과연 옛날생각만 하고있는건가? 병국령감은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많은것들을 곰곰히 생각해보게 되였다. 지금 젊은놈들은 지난날 “자기가 살고있는 새농촌건설을 잘하는것이 바로 중국 혁명을 잘하는것이고 세계혁명에 공헌하는것이다”고 하던 설교에 길들여졌던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들과는 완판 틀렸다. 그 자식들은 “이 좋은 세월에 우리라고 왜 한뉘 촌에 박혀 엉덩이를 하늘로 쳐들고 개고생하겠느냐”며 능력이 있으나 없으나 젊음이란 밑천 하나를 턱대고 살길을 찾아 외국으로 대도시로 뿔뿔히 찾아떠났다. 초중이나 졸업한 손자녀석도 한국에 나가 막일하며 돈을 벌더니 무슨 돈귀신이 들어붙었는지 고향에 돌아오려 하지 않는다. 왜 젊은놈들은 자기가 나서 자란 고향에 그렇게 미련이 없는지 알고도 모를 일이였다. 과연 이 늙은이가 달라지는 세상과 너무 멀어져  있는것인가? 이튿날 “꺽꺽이” 부촌장 동길이가 집집이 돌아다니며 회의를 한다고 통지했다. 병국령감이 비틀거리며 회의실에 가보니 30명가량되는 토배기 마을 늙은이들이 거의 다 모였다. 오빠를 해방전쟁에서 잃은 방아집로친도 있었고 동생을 조선전쟁에서 잃은 덕배령감도 있었다. 결혼 한달만에 남편을 전쟁판에 보내고 유복녀를 키우며 여지껏 “렬사의 안해”로 굳은 절개를 지키며 고독하게 늙어온 백내장로친도 있었다. 이밖에도 모두 콜콜 병자랑하는 로친들이 아니면 중풍을 맞아 침을 질질 흘리고 옆으로 삐여지게 게걸음하는 령감들이였다. 펀펀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들이 전에는 이 마을건설에 몸을 내번지고 일하던 “꼬리없는 소”들이였으며 현, 주, 성의 모범과 선진이라던 영웅들이였다. 동길이가 종이장을 내들고 말했다. “여러분들두 꺽꺽…들어서 다 알겠지만 우리 마을 꺽꺽…렬사비를 뒤마을 한족동네에 옮겨다 수건하자 하는데 꺽꺽…여러분들 생각이 어떤지 지금 투표를 하, 하겠습꾸마. 꺽꺽…남아있는 여러분들은 이 마을 사람들을 꺽꺽…대표합꾸마. 여러분 들이 옮겨가는걸 동의하면 꺽꺽…렬사비가 뒤동네에라두 새롭게 세워지구 꺽꺽 …동의하지 않으면 그냥 저렇게 비바람에 시달리다 꺽꺽…언젠가 무너져내려 흙무지 되구말게꾸마. 이제 표를 꺽꺽…나눠드리겠는데 동의하는 분들은 꺽꺽…동구래미를 치구 동의하지 않는 분들은 꺽꺽…승하기표를 칩소. 꺽꺽…똑똑히 들었습지? 어떤 결과 나오던지 꺽꺽…그건 여러분들이 선택한게꾸마. 꺽꺽…그럼 지금부터 투표를 하겠습꾸마. 꺽…” 이게 민주를 발양한다는건가? 이걸 저 ‘꺽꺽이”가 생각해낸건가? 동길이는 사람마다 자그마한 종이 한장씩 나누어주고 꽁다리연필도 몇사람에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로인들은 저마다 후둘거리는 손을 내들고 표를 받았다. 그들은 별로 생각도 하지 않고 표에 태도표시를 해서는 동길이를 소리쳐 불렀다. 그러면 동길이는 잰걸음으로 다가가 표를 받았다. 이렇게 잠간새에 표를 다 걷어들였다. 동길이는 걷어들인 표를 그래도 몸이 좀 성하다는 령감로친한테 주어 맞춰보게 했다. 담배 반대를 피울 사이도 안되여 검표를 끝낸 령감이 동길이한테 표를 넘겨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다 동의구먼.” 동길이는 표를 받아쥐며 어리벙벙해했다. 분명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반대하는 령감도 있지 않았는가. 그런데 모두 동의라니. 그가 다시 표를 한장한장 훑어 보았으나  틀림없는 만표였다. “꺽꺽…렬사비를 옮겨가는데 몽땅 동입꾸마. 꺽꺽…” 동길이가 꺽꺽거리며 높이 소리쳤다. 하지만 로인들의 표정에는 즐거움도 웃음기도 없었다. 침울한 얼굴들에는 대낮에 남한테 뭔가 소중한것을 빼앗긴듯한 원통함과 서글픔이 서려있었다. 동길이가 다시 소리쳤다. “꺽꺽…그럼 이대로 촌정부에다 회보해서 꺽꺽…렬사비를 인차 뒤마을에 옮겨다 다시 짓도록 하겠습꾸마. 꺽꺽…박수...” 그러나 박수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동길이는 멋적게 파회를 선포했다. 회의가 긑난후 동길이가 병국령감한테 다가와 의아쩍게 물었다. “꺽꺽…아바이는 옮겨가는걸 처음부터 꺽꺽…반대하지 않았습둥? 꺽꺽…그런데 어째 오늘은 동의표를 냈습둥? 꺽…” 병국령감이 깊은 탄식소리를 내며 말했다. “어제밤 손자녀석과 한바탕 다투었소. 늙은것이 집안에 들어앉아 옛날소리만 하며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줄 모른다구 되게 몰려댔지. 후ㅡ, 낸들 어쩌겠소. 이젠 다 파먹은 김치독이지. 세월이 흘러가는대루 따르는 수밖에. 렬사비꺼지 옮겨가문 나두 양로원에나 갈가부다… 2015년 제4기    
50    [소설] 수의가게(허룡석) 댓글:  조회:5605  추천:0  2017-09-18
단편소설 수의가게 허룡석     1   여기가 어디지? 무슨 수의가게들이 이렇게 촘촘이 들어앉아있지? 큰 병원 주위여서 그런가? 주위를 둘러보니 울긋불긋 화려한 간판을 건 수의가게가 적어도 스무나무집 되였다. “조선족수의가게”라고 쓴 간판이 다수였다. 아무리 화려한 간판을 걸어도 사람들은 평소에 그런 간판을 보면 귀신사촌을 본듯 몸이 오싹해하며 저도 모르게 눈길을 돌려버린다. 하지만 가정에 상사가 나지면 또 어쩔수없이 발길을 들이미는 곳이기도 했다. 시골에서 올라온 앙골라머리 덕철이는 가운데쯤 자리잡은 한 “조선족수의가게”에 취직하여 날마다 마당발이 되여 뛰여다니고있었다. 성실하고 온후한 인상이 참빗마냥 까다로운 주인의 눈에 들었나부다. 덕철이는 오늘도 여느때와 같이 아침일찍 가게에 출근하여 이곳저곳 쓸고 닦고 털어낸다. 이때 손님 한분이 인기척을 내며 가게에 들어섰다. 이른 아침부터 쉬가 붙으려나. 남은 슬퍼서 찾아오겠지만 장사군은 웃음주머니 흔들거린다. “어서 오십쇼ㅡ.” 습관적으로 앙골라머리를 쓸어넘기며 들어선 손님을 반갑게 쳐다보니 아니, 형님이 아닌가. “어? 헝님이 어떻게 이렇게 일찌기?...” “응. 병원에 오던 걸음에 너 가게 문이 열렸길래 들렸다. 그런데 넌 뭐냐? 계속 이런데서 일할거냐?” 형님은 마차를 타고 사흘은 들어갈듯 우묵하게 패인 눈으로 덕철이를 언잖게 쳐다보았다. “헝님은 그저 볼 때마다 그 소리오? 여기서 일하는데는 어쨌다구 그러오?” 한두번도 아니고 만날 때마다 하는 형님의 꾸중질이다. 좋은 소리도 세번 하면 듣기 싫다는데. 덕철이는 저으기 불쾌해났다. “그래두 넌 허나사나 촌간부 출신인데 일할데 없어 남들이 다 꺼리는 이런데서 일하냐말이다. 다른 일자리두 찾으면 얼마든지 있을게 아니냐?” “당안에두 못들어가는 촌간부두 뭐 간부요? 다른 일자리들두 두루 알아봤는데 어디 먹구 살게 월급을 주오? 그래두 여기서 일하니 로임에 장려까지 한달에 몇천원씩은 벌지 않소. 이것두 그냥 하자는게 아니라 한국비자가 나올 때까지만  하자는건데. 지금 대학졸업생들두 화장터일이랑 사우나 때밀이랑 하지 못해 헤맨다는데 아무데서나 돈을 벌문 안되우?” 덕철이는 지난세기 90년대초에 대학입시에서 몇점 모자라 미역국 먹은후 줄곧 고향에서 농사를 지어왔다. 그러다 남들보다 썩 뒤늦게 지난해에야 외국에 나갈려고 한 려행사를 통해 출국수속을 넣었다. 그때로부터 덕철이는 시내에 들어와 이 수의가게에서 심부름군으로 일하며 비자나오기를 기다리고있는터였다. 형님은 어쩔수 없다는듯 가게문을 나서며 말했다. “그래두 이따위 일은 그만두는게 좋겠다. 네 안깐과 애들이 네가 전문 주검 주무르는 일 하는줄 알문 기절초풍할게다. 그래두 좀 체면이 서는 일을 찾아봐라.” 덕철이는 도회지의 어느 큰 외국회사에서 일한다며 농촌에 있는 식구들을 속이고 남들이 모두 꺼리는 “귀신의 사촌집”에서 일하고있었다. “지금 세월에 체면이 한근에 얼마라구. 손바닥만한 겉에 낯짝보다 속에서 순대를 불쭉히 만드는게 장땅이지. 내 걱정말구 헝님이나 병치료 잘하우.” 덕철이의 형님도 외국에 나가 8년철이나 뼈를 간다는 건설공지를 돌아다니며 돈을 벌고 귀국한후 이 도시에 덩실한 아빠트를 사 살고있었다. 그런데 그 8년동안 힘든 막벌이하며 진이 다 빠졌는지 고혈압이며 당뇨병이며 신염으로 저 큰 병원의 인기모델이 되였는지 하루건너 병원출입이였다. “병 한가지에 약은 천가지”라는데 저렇게 다병하니 약은 몇천가지겠는가. 외국에 가 번 돈도 이젠 그 약에 야금야금 다 비벼먹는것 같았다. 덕철이의 형수는 한국에 나간지 10년나마 되지만 지금도 돌아오지 않고있다. 그래도 처음에는 몇년에 한번씩 다녀가는것 같더니 한 5년째는 왔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여 형님은 초중에 다니는 딸애와 함께 외톨이생활을 하고있었다. 그런데 학생들이 늘 밤늦게까지 공부하는지라 지난 봄부터는 애를 아예 학교기숙사에 들여보냈다. 한번은 애가 학교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집으로 돌아오다 건달놈한테 정신없이 쫓긴 후에는 시름이 놓이지 않았던것이다. 그날도 신세타령하는 “다리 부러진 노루”들이 모인 술자리에 나갔다가 늦게 오다보니 애 마중을 가지 못했었다.     형님이나 누나나 모두 외국에 가 돈을 벌어 도회지에 아빠트를 사놓고 사는데 자기만 두더지처럼 시골에서 땅을 뚜지며 사는것이 늘 어깨가 처지던 덕철이였다. 모두가 땅에 코를 박고 “변소”를 하늘로 쳐들고 농사지을 때에는 형제들 가운데서 덕철이네 형편이 기중 나았었는데 외국문이 열리면서부터 자기집 신세가 제일 따라지로 되였다. 덕철이보다 일솜씨가 못하던 형님, 누나가 외국나가 돈을 벌더니 모두 그보다 더 잘사는것이 아닌가. 아무리 형제간이라도 생각할수록 불편했고 은근히 시기가 났다. 게다가 변통성이 없고 돈벌줄 모른다고 늘 바가지를 긁어대는 안해의 잔소리에 귀가 다 먹먹했다. 사실 애들 공부 뒤바라지도 걱정이였다. 그래서 지난해부터는 촌의 회계며 부촌장이라는 “멋진”감투를 다 벗어 팽개치고 집에서 부치던 밭도 몽땅 안해한테 밀어맡기고는 승벽심에 외국에 나갈 차비를 했는데 그것도 어쩐지 생각처럼 잘되지 않는다. 남들은 수속을 넣으면 두석달만에 비자가 나온다는데 나는 이게 뭔가? 덕철이의 출국수속은 반년이 지나도록 꿩 구워먹은 자리이다. 원래는 여기서 눈을 질끈 감고 두석달 일하며 외국갈 로자나 벌려했는데 반년이나 눌러 있으니 형님의 꾸중이 잦아지는것도 무리는 아니였다. 씨팔껏, 빨리 비자가 나와야겠는데…   2    해가 둥실 떠올라서야 손님 한분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 “어서 오십쇼ㅡ.” 덕철이는 언제 불쾌한 일이 있었더냐는듯 검실검실한 얼굴에 금방 웃음을 띄우며 열정적으로 맞았다. “저, 우리 형님이 돌아갔는데 지금 가봐줄수 있겠습둥?” 40여세 돼보이는 오동통하고 작달막한 손님이 조심스레 물었다. “가보겝소. 집은 어딥둥?” “원림사택쪽인데 차를 갖구 왔으니 같이 앉아 가문 됩꾸마. 가만, 수의를 사야겠는데, 저 수의는 얼매씩 함둥?” 덕철이는 비단으로 만든 고급수의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2000원이구 이건 1800원이구 이건…” “모두 그렇게 비쌉둥?” “이쪽에 눅은것두 있습꾸마. 이건 800원이구 이건 600원이구…” 손님은 잠간 주춤하더니 말했다. “그래두 젤 비싼걸루 줍소.” 이것이 지금 사람들의 심리다. 마지막 길을 가는 사람한테 눅거리수의를 입혀 보내려는 사람은 별반 없었다. 죽은 사람을 생각하는것도 있겠지만 죽은 사람을 각박하게 굴었다가 산사람한테 무슨 화가 미칠가봐 더 걱정하는듯 했다. 덕철이는 2천원짜리 수의를 꺼내 비닐주머니에 정히 넣었다. “저, 여기서 사진두 해줌둥?” “예. 합꾸마.” “얼맵둥” “50원짜리두 있구 100원짜리두 있습꾸마.” “예? 그것두 그리 비쌉둥?” “어디나 다 그 값이꾸마. 사진을 잘해 고급가꾸에 넣어 줍꾸마.” “그럼 100원짜리 사진꺼지 마즈 하겝소.” 손님은 이촌짜리 낡은 사진 한장을 내놓았다. 오래전에 찍은 증명사진같았다. 덕철이는 사진을 들고 보며 말했다. “사진이 낡아 썩 빤하게 나올것 같지 못합꾸마. 그런줄 압소.” “그저 사람이 알리문 됩꾸마. 빨리 가겝소.” “값을 톱지 않는걸 보니 통쾌한분 같습꾸마. 수의는 1900원에 드리구 사진은 80원에 해드리겠습꾸마.” “감사합꾸마. 면바루 마음좋은 분 만났구만. 빨리 가깁소.” 손님은 수의값과 사진값을 내놓으며 재촉했다. “사진은 저녁때쯤 와서 찾아갑소. 가깁소.” 덕철이는 렴습에 필요한 도구들을 갖춰가지고 문을 나서 차에 올랐다. “관을 파는 사람은 사람죽기만 기다린다”더니 수의가게를 꾸리는 사람도 사람이 죽었다고 찾아오는것만큼 반가운 일이 없었다. 남들이 들으면 매정한 놈들이라고 욕하겠지만 그것이 밥통과 이어진 명줄이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원림사택쪽 한 아빠트단지 5층집에 들어가보니 집안에 남녀 몇사람이 앉아 있다가 우르르 일어났다. “저 방에 있습꾸마.” 덕철이를 데리고 온 손님이 북쪽 방문을 가리켰다. 덕철이가 문을 떼고 들어가보니 지독한 구린내와 시신이 부패되는 내가 코를 찔렀다. 집안식구들이 눈물을 머금은채 코를 싸쥐고 방안을 기웃기웃 들여다 보았다. 이젠 이런 일이 몸에 밴지라 덕철이는 아무렇지 않은듯 시신으로 다가갔다. 시신은 홀딱 벗은채로였는데 온 몸에 인분이 게발린채 말라붙어있었다. 죽을 때 이렇게 옷을 벗어내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아마 죽을 때 뒤가 나오고 어딘가 불편해서 손발을 내저으며  뒤채다 온 몸을 매질한것 같았다. 곁에 사람이 없이 홀로 저세상에 간것이 분명했다. 애기가 세상에 태여나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에서 누는 똥을 배내똥이라 한다. 그런데 신기한것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누는 똥도 배내똥이라 한다는 사실이다. 용어가 같을뿐만아니라 그것의 성분도 비슷하다고 하니 세상만사가 시작과 끝,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는 말이 과연 옳은가보다. 망인의 눈은 흡뜬채로였고 입도 일그러져 있었다. 늘 보아오는 일인듯 이 망인의 머리맡에도 빈 술병이 나뒹굴어있었다. 덕철이는 시신을 살펴보고 나와 나무람조로 말했다. “상세난지 여러날 되는것 같은데 어쩨 인제야 알았습둥?” “…그냥 앓던 형님이 여러날째 련락이 없구 핸드폰두 안받길래 미심해서 오늘 문을 떼구 들어와보니 이렇게…” 알고보니 망인이 외국에 돈벌이 간 안해한테 리혼당하고 고독하게 여러해째 혼자 되는대로 살다가 극락세계로 간것이였다. 전에는 큰 국유기업에서 중층간부로 있으며 집안에서도 어험어험 어깨살구며 살다가 기업이 문을 닫으며 로임이 고양이밥이나 사먹을 가련한 신세로 추락되면서 체면이 발바닥이 되였단다. 자기의 비참한 신세를 한탄하여 죽으면서도 눈을 감지 못한건가. “연세두 많은것 같지 않은데…” “쉰두 되나마나 합꾸마.” “정말 안됐습꾸마. 어찌겠습둥? 집안에서 나서 몸을 닦구 수의를 입히겠습둥? 아니문 내가 하랍둥?”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에는 경험이 없어 주인집과 묻지도 않고 손을 걷어 붙이고 시신을 깨끗이 렴습해주었더니 주인집에서 우리가 자체로 할걸 누가 하라 했느냐며 눈을 부라리는통에 시비만 캐다 돈 한푼 못받고 빈손에 돌아온적도 있었다. 그후부터는 덕철이는 뻔한 일도 사사건건 어찌하랴를 반드시 주인과 물었다. 친척들의 눈을 의식해서인지 동생이란 사람이 주저주저하다 마지 못해 나섰다. “그럼 어찌겠습둥. 내가 합지…” 이때 한쪽눈은 작고 한쪽눈은 큰 한 녀인이 자웅눈을 할기며 막아나섰다. “그만두시오. 아무리 형제간이라두 저 어지러운걸 어떻게 손을 댄다구 그랩미까? 그냥 이분이 하게 하시오…” “그래두 내가 동생인데 마지막 길이사 어떻게…” 수의가게에 가서 덕철이를 청해 올 때는 자기가 손댈 생각을 안하고 청했겠는데 여러 집안사람들 앞에서는 아닌 보살을 한다. 덕철이는 이런 경우도 많이 보아왔다. “아무리 동생이래두 좀 산사람의 살펴두 봐야재이캤습미까? 저걸 손질하구 그 냄새 달구 당신 집에 들어올것 같습미까?” 동생은 주저하다 덕철이한테 물었다. “거기서 하문 얼마를 받습둥?” “경우에 따라 값이 다른데 저 정도문 4백원은 받아야 합꾸마.” “예? 그렇게 비쌉둥?” “보시다싶이 상세난지 여러날 되는데다 저렇게 많이 어지럽지 않습둥. 그리구 몸을 닦구 세 구멍을 막구 굳어진 손발을 주무르구 수의를 입히구 하자문 그만한 값두 눅은게꾸마. 다른데서는 5,6백원두 달라할겝꾸마.” 동생이 주저하는데 안해인듯한 자웅눈녀인이 손을 저었다. “그냥 그 값대루 하시오” 지금은 이전과 달리 많은 남편들이 안해들 손에 쥐여 불에 탄 개가죽처럼 오그라들어 산다더니 이 집에서도 결정권은 안해한테 있는것 같았다. 덕철이가 녀인을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고복은 자체루 하겠습둥 아니문 내가 다 하랍둥?” “고복이라니? 그건 또 뭘 하는겝니까?” “혼을 부르는걸 말합꾸마.” “혼을 부르는것두 따루 돈 받습미까?” “다른 집에서는 값을 따로 받지만 난 값은 따루 받지 않겠습꾸마.” “그럼 거기서 부르시오.” 지금 사람들은 거의 다 이렇다. 가는 사람이 편안히 가라고 비통한 마음담아 망인의 가족에서 나서 고복을 하겠다는 사람도 거의 없다. 또 할줄 아는 사람도 별반  없다. 그렇다고 안해도 되겠느냐 하면 또 모두 해달란다. 그것도 죽은 사람을 생각해 서라기보다는 산사람한테 화가 미칠가봐서였다. 보아하니 이 집에서도 돈을 따로 받는다해도 덕철이더러 하라 했을것이였다. “렴습이 끝나면 시신을 저레 화장텀에 보내겠습둥 아니면 집에 두겠습둥?” 손님은 아무 고려도 없이 손을 내저었다. “끝나는대루 화장텀에 보내겠습꾸마.” 지금은 어느 집이나 거의 다 이렇다. 례일(礼日)을 받아 3일장을 하는 집은 거의 없다. 그저 사진을 갖춰놓고 제상을 차례두면 그만이였다. 예전처럼 장사를 지내기 전에 친지들이 망인의 시신옆에서 밤을 새우는 경야(经夜)라는 례의도 없다. 곡을 하는것도 제멋대로다. 상례대로라면 조문객이 찾아오면 상주는 “애고. 애고.”하고 조문객은 “어이. 어이.”하고 곡을 해야 하나 뒤바꿔 곡을 해도 틀리는줄마저 모른다. 많은 집들에서는 상주가 아예 곡도 하지 않고 지어 웃는 얼굴로 조문객을 맞는다. 조문객들도 망인의 제상에만 례를 행하고 상주에게는 례를 행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전에는 복인(服人)(상복을 입은 사람)이 아닌 친족, 친지, 마을좌상중에서 상례에 밝고 경험이 있으며 초종범절을(初终凡节)(초상을 치르는데 관한 모든 처리) 맡아서 진행하는 호상(护喪)을 내세웠으나 지금은 그런 례의를 갖추는 집도 없다. 덕철이는 화장터에 령구차를 한시간후에 도착하도록 련락하고는 제꺽 일에 달라붙었다. 그는 먼저 망인의 나이와 이름, 직위를 묻고는 속옷을 달라해서는 북쪽창문을 열어제끼고 옷을 내저으며 혼을 불러주었다. 혼도 되는대로 대충대충 불러주는것과 전통적인 상례방식대로 정성다해 부르는 두 가지가 있다. 농촌에서는 지붕우에 올라가 부르나 도시에서는 북쪽창문을 열고 부른다. 창턱에 올라서서 왼손으로 옷깃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옷의 안섶을 잡고 크고 긴 목소리로 웨치는데 망인이 남자라면 성명과 년령, 직함을 웨치고 여자라면 주소, 본관, 성씨를 웨친후에 “복!복!복!”하고 세번 웨친다.  제대로 하자면 시끄럽기도 하지만  덕철이는 언제나 듣는 상주들이 편하고 마음에 닿도록 정성을 다해 불렀다. 수의가게에서 일하다보면 감장강아지로 돼지를 만드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덕철이는 그렇게 한적이 없었다. 돈을 벌어도 량심적으로 벌어야 한다는것이 순후한 덕철이의 신조였다. 옛날에는 처녀총각이 죽었거나 결혼은 했으나 제명에 죽지 못한 젊은 사람은 한이 맺혀 아귀신이 되여 집사람들을 불러간다고 귀신이 되지 못하게 사람들이 많이 밟고다니는 길 한가운데 묻기도 했으나 지금은 모두 화장하니 그런 일도 없었다. 혼을 부르고나서 덕철이는 렴습을 시작했다. 렴습에도 소렴과 대렴이 있는데 소렴은 사망된지 이틀째되는 날 아침에 수의를 입히는것을 말하고 대렴은 소렴을 끝낸 이튿날 즉 사망한지 3일 새벽에 입관하는 의식을 말한다. 하지만 지금 이런 절차도 다 사라졌다. 그저 할수 있는것만큼 한꺼번에 해버리면 그만이다. 덕철이는 대야에 물을 떠다 시신을 깨끗이 닦기 시작했다. 먼저 눈을 내리쓸어 감게 하고 일그러진 입을 바로잡아 놓았다. 시신은 오물이 말라붙어 쉽게 떨어지지 않았으나 그래도 깨끗해질 때까지 닦고 또 닦았다. 피와 오물이 나오지 않도록 탈지면으로 망인의 코와 귀, 항문을 틀어막았다. 수의만 입혀놓으면 이런 일은 했는지 안했는지 상주들이 알바 없지만 그래도 덕철이는 언제 빼먹은적이 없었다. 이 망인은 죽은지도 여러날 지나 이미 오물이 나올대로 다 나왔지만 제명에 죽지 못한 불쌍한 사람이라 여겨서인지 그래도 절차를 빼먹지 않고 막을 곳은 다 막았다. 몸을 깨끗이 닦은후 먼저 새 속옷을 아래도리로부터 입히고 그우에 수의를 입힌후 양말을 신기고 장갑을 끼워주고 몸을 반듯하게 바로잡아놓았다. 손과 팔다리를 바르게 뻗도록 한참 주무른 다음에 다리를 가지런히 모아 발끝이 위로 향하게 하고 두 팔을 몸통에 나란히 붙여 평온한 모습이 되도록 했다. 그리고는 렴포로 어깨, 허리, 발목쪽 세곳을 묶어놓았다. 모든 절차가 끝나자 시신의 머리가 북쪽으로 향하도록 눕히고 흰베로 얼굴을 가리운후에 홑이불을 달라해서는 머리까지 덮어주었다. 덕철이는 일을 마치고 나와 상주들과 물었다. “이제 령구차가 오문 시신을 내려가야 하는데 재비루 내려가겠습둥 아니문 우리 내려 가람둥?” 동생이란 사람이 인제야 주인인듯 도끼눈을 했다. “4백원안에 그 값까지 다 들어있는게 아임둥?” “시신을 내려가는 값은 따로 내야 합꾸마. 미덥재이문 딴데 가 물어봅소.” 자체로 내려가자면 또 자기남편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던지 자웅눈녀인이 앞질러 말했다. “거기서 내려갑소. 얼마를 받습미까?” “내 혼자는 안되니까 사람 하나 더 불러와야 합꾸마. 5층이니까 한사람한테 적어두 백원씩은 줘야 합꾸마.” 5층에서 내려가자면 더 불러도 되였으나 덕철이는 받을만치 불렀다. 자웅눈녀인은 시끄럽다는듯 손을 내저으며 그대로 하라고 했다. 친척들이나 형제들이라 해도 시신을 들어나르는 일은 모두 꺼려했다. 더우기 시신을 나르다가 혹 허리나 발목을 다치거나 이튿날 갑자기 앓아눕기라도 하면 아무리 치료해도 낫질 않아 평생 고생한다는 미신을 믿어서인지 이런 일은 되도록 피하려 했다. 이젠 모두 호주머니가 딱하게 곯지 않은이상  뭐든지 돈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러니 이런 일은 자연히 덕철이네가 해야 할 몫이였다. 그렇다고 물어보지 않고 먼저 들어내려가면 돈을 더 내라느니 안주겠다느니 시비가 생기게 된다. 하기에 이런 일도 사전에 똑똑히 말해두어야 했다. 덕철이네가 하는 일은 일마다 돈과 관계되여 모두 맺고 끊어야 했다. 덕철이는 이웃 수의가게에서 일을 보는 성국이한테 핸드폰을 쳤다. 수의 가게들에서는 심부름군을 보통 한 사람씩밖에 안쓰는지라 그들은 일손이 필요할 때면 서로 불러다 손을 맞추며 함께 돈을 벌기도 했다. 얼마후 성국이가 왔다. 령구차도 도착했다. 그들 둘은 령구차의 담가에 시신을 들어올려 층계를 굽이굽이 조심스레 돌며 내려다 령구차에 실었다. 상주가 결산하고 차에 오르며 날돈을 떼운듯 덕철이한테 투박하게 말했다. “래일 일찍 화장하겠으니 사진을 꼭 오늘내로 해야 합꾸마예?” “근심맙소. 꼭 오늘내루 됩꾸마.” 령구차가 떠났다. 상주들이 탄 승용차가 그뒤를 따랐다. 수십년 함께 살아온 사람이 죽은 후에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길을 보낸다고 상주들이 더러 령구차에 함께 앉아가야 하는데 많은 집들에서는 꺼려서인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 집에서도 령구차는 따로 가고 상주들은 승용차에 앉아 뒤를 따른다. 저승길과 인생길은 저렇게 융합되지 않는건가? 덕철이는 떠나가는 차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농촌이나 도시에서나 이전처럼 7일장이나 5일장 같은건 자취감춘지 오래고 3일장을 하는 집조차 거의 없다. 어른이나 젊은이나 모두 죽은 이튿날로 급급히 화장해버린다. 이것도 시대가 발전하고 사람들의 관념이 진보해서인지 아니면 사람들의 인정이 매말라서인지 모를 일이였다. 그런데 다른 민족들은 이튿날로  화장해버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 덕철이네는 택시에 앉아 가게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도시 서쪽다리를 건너며 보니 다리아래 잔디밭에서 숱한 남녀들이 군데군데 모여앉아 트럼프치기 아니면 화토치기를 하고있었다. 다리남쪽 강뚝에서는 할 일 없는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 장기를 두기도 하고 한담하기도 했다. 시신을 렴습하러 이젠 이 다리를 수없이  지나다니며 보아도 저렇게 날마다 한가하게 빈둥거리는 사람들이 줄어들줄 몰랐다. 그런 사람들이 또한 거의 다 우리 민족들이였다. 아마 모두 외국가 돈은 벌고 와서 할 일은 없고 하니 신선세월을 보내는것 같았다. 아니, 할 일이 없는것이 아니였다. 힘들고 어지럽고 낯이 깎이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할 뿐이다. 아무런 미련도 없이 공무원직마저 버리고 나가 돈을 벌고 돌아온 사람들도 원직은 다시 회복할수 없고 눈에 안차는 일은 하기 싫고하니 자연히 저 대오에 발을 들여놓는다. 밤이면 무도장, 안마방, 술집, 커피숍에서 “인생”을 만끽한다. 날마다 빈둥거리며 신선세월을 보내다 벌어온 돈을 다 비벼쓰면 울며 겨자먹기로 또 외국에 나가 뼈갈이를 해야 할것이다. 그러다보면 너남이 내 형님처럼 고질병이 들어 제명이나 살겠는가. 덕철이는 계속 이 일을 하느라면 이제 언젠가 저기서 빈둥거리는 사람들 가운데 자기  손이 가야 할 사람들이 한둘이 아닐것이라고 생각했다. 죽는 사람이 많을수록 수의가게를  꾸리는 사람들한테는 돈 벌 기회가 차례지겠지만 제명에 죽지 못하는 우리 민족들이 많아지는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되였다.   3   어느듯 추분이 다가왔다. 그래도 비자는 강에 돌 던진 격이였다. 나는 외국에 가지 말라는 팔자인가? 왜 남들처럼 일이 술술 풀리지 않지? 그렇다고 어디가 해볼 곳도 없었다. 수속을 넣은 려행사에 물어보면 그저 기다리라고만 한다. 덕철이는 공연히 홰가 치밀었다. 오늘도 덕철이가 가게를 지키고 앉아 있는데 양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키가 훤칠한 손님 한분이 들어섰다. “어서 오십쇼ㅡ.” 덕철이는 제꺽 일어나 앙골라머리를 쓸어넘기며 반갑게 맞았다. “내 동생이 갑자기 죽었는데 당신 지금 나하구 같이 가기오.” 첫마디부터 일군을 부려먹는 명령조다. 말하는 투를 보니 큰 간부 아니면 큰 부자 같았다. 덕철이도 이젠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다보니 찾아오는 사람들 신분을 열에 아홉은 알아맞출수 있었다. “지금 당장 가시겠습둥?” “다시 물어봐야 알겠소?” 손님이 거적눈을 흘겼다. “그런데 저, 수의나 사진이나 무슨 상사에 수요되는것은 없으신지…” 수의가게에 찾아오면 모두 수의부터 찾고 사진을 맡기는데 이 손님은 까먹었는지 그런데는 한마디 말도 없다. 슬프고 급한 마음에 잊고 있다면 일깨워줄 필요가 있었다. “그런건 다 필요없소. 사람만 가면 되오.” 덕철이는 모를 일이라는듯 고개를 걔웃하며 필요한 도구들을 갖춰들고 손님을 따라 나섰다. 손님이 몰고 온 차는 대단히 고급승용차였다. 이런 차를 “뻔츠”라 하는지 “뽀마”라 하는지 하여간 전에는 자주 타보지 못한 차였다. 그것이 공가차인지 개인차인지 덕철이가 상관할바가 아니였다. 그들은 강남 한 아파트단지에 이르러 차에서 내렸다. 밖에서 기다리던 귀부인 차림을 한 녀인이 다가왔다. 목에서, 귀에서, 손가락에서 모두 황금빛이 번쩍인다. “어째 밖에서 기다리는거요?” 양복손님의 말에 귀부인이 눈을 할기죽했다. “그래 죽은 사람과 혼자 집안에 같이 있으라고요?” 양복손님은 더 말이 없었다. 덕철이는 그들을 따라 1단원 3층으로 올라갔다. 손님이 열쇠를 꺼내들고 동쪽집 문을 열었다. 집안에서는 술내가 진동했다. 널직한 객실에 술상이 그대로 놓여져있는데 먹다남은 명태와 낙지 기타 마른 안주감들이 지저분히 널려있었다. 굽높은 유리고뿌 두개에 돈많은 사람들이 잘 마신다는 서양술인지 아니면 맥주인지 누끄무레한것이 밑굽에 조금씩 남아있었다. “저 방이오.” 양복손님이 동쪽방을 가리켰다. 덕철이가 들어가보니 침대에 누워있는 시신에 이불이 폭 씌여져있었다. 덕철이가 다가가 이불을 살며시 당겨보았다. 삼검불 같은 머리칼이 드러났다. “이크, 여자네…” 덕철이는 시신얼굴을 얼핏 보고는 바삐 그대로 돌아나왔다. “상세난 분이 젊은 여자분 같구만요…” “내 동생인데 불세루 저렇게 됐소. 당신넨 여자시신은 처리안하오?” 덕철이를 데리고 왔던 양복손님이 퉁명스레 물었다. “안 하는건 아니지만 젊은 여자분이여서 손을 대기가…” 덕철이도 적지 않은 녀인시신을 렴습해 보았지만 할 때마다 어쩐지 손이 떨렸다. 제명에 돌아간 나많은 녀인들 시신을 다룰 때는 그래도 괜찮았으나 제명에 가지 못한 젊은 녀인들 시신을 다루자면 어쩐지 가슴이 떨렸다. 만일 양복손님이 죽은 동생이 젊은 녀자라는걸 똑똑히 말했더면 올지말지를 고려했을것이였다. “마지막 길인데 여자시신은 그래두  여자분이 다루어야 하지 않겠는가 해서 하는 말씀입꾸만은…” 전통적으로 망인이 남자면 남자가 수의를 입히고 녀자면 녀자가 수의를 입히게 되여있다. 하지만 어쩐지 지금은 그런것도 별로 따지지 않는다. 제 명에 죽은 녀인은 상주들이 덕철이가 손을 댈것을 요구하면 덕철이도 군소리없이 렴습하군 했었다. 그런데 제 명에 죽지 못한 젊은 녀자들 시신에는 함부로 손을 대지 않았다. 오늘도 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말은 제대로 해야 했다. 덕철이가 양복손님을 쳐다보며 이렇게 말하자 양복손님은 곁에 선 귀부인을 바라보았다. 그 눈길이 마주치자 귀부인이  발끈했다. “나는 왜 보는가요? 그래 내가 손을 대라는건가요?” “그래두 나젊은 여동생몸인데 마지막가는 길에 낯선 남자한테 맡긴다는것두 그렇긴 하구…” “저 시누이 몸을 본 스나들이 어디 한둘인가요? 저런 주물럭 몸을 남자가 한번 더 본들 큰 일 나는가요?” 양복손님이 도끼눈을 하며 버럭 화를 냈다. “불쌍히 죽은 사람을 놓구 무슨 말을 그렇게 험하게 하는거요?” 귀부인이 양복손님 턱밑에 달라붙으며 잇새로 말을 내뱉았다. “어디 죽은담에만 말하는가요? 살아있을 때에두 내나 당신이나 얼매나 일깨워 줬어요? 돈벌라 간 남편이 곁에 없다구 그렇게 스나들과 분별없이 섭쓸려 다니지 말라구. 그래두 어디 말을 듣습데까. 당신두 알잖아요. 이 몇년간 저 시누이와 놀아난 스나들걸 다 떼내문 한 빼크는 될거라는걸…” “그 주디를 다물지 못하겠소?...” 남을 앞에 세워놓고 악담을 퍼붓는 안해가 민망스러운지 양복손님은 덕철이를 흘끔 바라보며 큰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귀부인은 “주디”를 다물다 덕철이를 보며 말했다. “돈을 곱절 줄테니 그냥 손을 대세요.” 덕철이는 어쩔바를 몰라하며 양복손님을 쳐다보았다. 그렇다고 오빠가 직접 나서 손을 댈수도 없다고 여겼던지 양복손님은 주저하다 그대로 하라고 턱질했다. “그럼 내 손을 대겠습꾸마예?... 곱절이면 적어두 6백원은…” 덕철이가 송구스럽게 말하며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귀부인이 그대로 하라는듯 꽈배기같은 금가락지 두개를 낀 하얀손을 내저었다. “…저 수의같은건?...” “평소에 즐겨입던 옷을 입히면 돼요. 저기 옷가지들이 있잖아요.” 귀부인은 쏘파를 가리키며 눈굽을 찍었다. 말은 말투레질처럼 하다도 속은 쓰린건가. 덕철이가 다가가 쏘파에 놓여있는 옷들을 그러안았다. 속옷부터 겉  옷까지 말짱 새것이였다. 또한 모두 고급이였다. 자기네가 파는 제일 비싼 수의보다도  열배는 더 비쌀것 같았다. 그래서 수의를 안산건가?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입어볼 엄두조차 못낼 이 비싼 옷들을 다 태운다는것이 여간 아까운 일이 아니였다. 순간 덕철이 눈에는 토스레옷을 입고 사래긴 밭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정신없이 일하는 안해가 보였다. 덕철이는 웬지 울컥해나며 눈굽이 젖어들었다.  덕철이는 그 옷들을 걷어안고 다시 방문을 떼고 들어갔다. 죽은 녀인을 보니 얼굴이 밀랍같았다. 꽤나 반주그레하게 생겼는데 40도 되나마나해 보였다. 옷을 벗기며 보니 이상하게도 온몸 여기저기에 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브래지어가 벗겨져있는 풍년두부모같은 하얀 젖에는 험하게 할킨 자리가 나있었다. 아래도리도 마찬가지였다. 목에도 눌리운 자리가 검붉게 나있었다. 다시 살펴보니 혀도 빠금히 가로 나와 있지 않는가. 덕철이는 화뜰 놀랐다. 이는 병들어 급사한게 아니라 남의 손에 죽은것이 분명했다. 무슨 원한이 있는지 두눈도 펀히 뜬채 천정을 퀭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살아있을 때에는 그 눈이 애교스럽고 아름다워 숱한 남정들을 홀렸겠지만 지금은 어딘가 날이 선듯한 그 눈을 바라보는 덕철이는 가슴이 섬찍해났다. 그는 황급히 방을 나섰다. “저기…저기요…그저 일이 아닙꾸마…” 양복손님과 귀부인은 황황히 허둥대는 덕철이를 놀랍게 바라보았다. “왜 그러는거요?” “…저분이 병으로 급사한게 아니라 남에게…남에게…” “뭐라구?” “온몸 여기저기 퍼렇게 멍이 들구 목에 눌리운 자리두 있구 혀까지…” “그럼 내 동생이 억울하게 어느 놈한테 죽었단 말인가?” 양복손님의 거적눈이 단통 왕개구리눈이 되였다. “그런것 같습꾸마…들어가 보십소…” 양복손님이 안방에 달려들어가 녀동생의 시신을 여겨보더니 고개를 하늘로 돌렸다. 눈에서는 닭똥같은 눈물이 쭈루룩 흘러내렸다. 양복손님이 돌아져 나왔다. 그는 주먹으로 자기 손바닥을 탕탕 쳐댔다. “이게…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그러잖아두 불쎄루 죽으니 이상하다 했더니…” “그러게 내가 뭐라 했습니까? 그렇게 정신없이 놀아대단 언젠가는 어느 스나들 손에 죽을지 모를거라구.” “또 그 주디를 너펄거리겠소?” 화난 귀부인이 고개를 홱 돌렸다. 귀에서 쇠굴레같은 귀걸이가 용을 쓰며 번쩍거렸다. “…보셨습지?...이건 내가 처리할게 아니라 공안국에 알려야 할것 같습꾸마…” 덕철이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간 덕철이가 많은 시신을 다루다보면 종종 의심스러운 시신들이 있어 중도에서 일손을 거두군 했다. 헛탕을 치더라도 말밥에 오를 짓은 하지 말아야 했다. 그런 날은 아주 재수에 옴이 붙은 날이였다. 오늘도 께름한 젊은 여자시신을 보고도 6백원을 날리게 됐다.    “살았을 때 숱한 스나들과 붙어다녔으니 어느 스나 손에 죽은줄 어떻게 알겠어요. 그러니 그냥 처리하게 하세요…” 양복손님이 귀부인을 흘겨보며 소리를 질렀다. “그것두 말이라구 하오? 혼자 오죽 고독하면 그렇게 했겠소? 쟤가 정말 남의 손에 죽었으면 천당에 가서두 눈을 감겠소? 억울해서인지 지금두 눈을 펀히 뜨구 있지 않소?” “그럼 어쩌겠어요? 공안국에 알리문 이걸 조사한다 저걸 조사한다 하며 우리를 적게 들볶겠어요? 그 성화를 누기 받아내겠어요? “ 양복손님이 눈을 부라리며 침방울을 튕겼다. “당신 동생이문 그런 말이 나오겠소? 강아지새끼 죽어두 영문을 캐는데 펀펀하던 사람이 남의 손에 죽었다는데 그만 두라니…아까부터 보자보자하니…” “동생이 그렇게 불쌍할게면 왜 살아 생전에 온 시내 돌개바람 다 피우지 못하게 잘 교육 못했어요?” “당신… 당신…” 양복손님은 귀부인을 손가락질하며 화가 나 뒤말을 잇지 못했다. 앙칼스러운 말은 의사도 치료하기 어려운 상처를 낸다는데 덕철이 듣기에도 귀부인이 너무 했다. 생전에야 어떠했든 죽은 사람 들어도 이를 갈며 돌아누울 저런 말을 어떻게 함부로…관에 들어가도 막말은 하지 말라했는데… 화사하게 화장한 얼굴에 열기오른 귀부인이 덕철이를 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 천원 줄테니 그냥 처리하세요.” 천원? 와, 천원이면 적은 돈이 아니였다. 덕철이는 여태까지 숱한 시신을 렴습해도 한꺼번에 그렇게 많은 돈을 받아보지 못했다. 돈만 생각하면 눈을 질끈 감고 주인들이 하라는대로 할수도 있었겠으나 그래도 덕철이는 시비경우가 발랐다. 저 시신은 분명 자기가 다룰 시신이 아니였다. “돈이 적어서가 아니라…저 시신은 제가 다룰게 아닙꾸마. 아마두 경찰들이 와서 봐야 할것 갔습꾸마…그럼 난 가보겠습꾸마…” 덕철이는 이렇게 떠듬거리며 도구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려 했다. “아이, 이봅소. 돈을 싫어하는 사람 다 있습미까?...돈이 적으면 오백원 더 줄게요…” 덕철이는 잠간 걸음을 멈칫했으나 못들은척 그냥 문을 나섰다. 뒤에서 양복손님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기오. 공안국에 가 신고하기오…” “신고할테면 당신 혼자 가세요…” “당신 그냥 이렇게 나올거요?...” … 덕철이는 그네들의 다툼소리를 뒤에 남기며 급급히 층계를 내려섰다. 저녁에 덕철이는 다른 가게에서 일하는 성국이를 불러 함께 한잔 했다. 재수에 옴이 붙은 날에는 술이라도 한잔 해야지 그대로는 잘수 없었다. “동생두 오늘 나갔더랬수?” 덕철이가 술을 따르며 덤덤히 물었다. 성국이가 덕철이보다 두살 아래라고  호형호제하는 처지다. “말두 마우. 오늘 나두 재수에 옴이 붙었다니까. 썩은 여자시신 주물렀다니까.” 성국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덕철이가 성국이를 쳐다보았다. “젊은 여자가 죽어 엎어져있는걸 번져보았더니 한쪽 얼굴이 다 썩어 구데기 와글와글 하는게 아니겠소…온 몸두 물렁물렁하구…에익, 지금 생각해도 속이…’” “그럼 죽은지 적어두 반달이상 되겠구만.” 일하다보면 덕철이도 더러 부패해진 시신을 주물러보았다. “후. 모두 돈은 벌었다만 왜 사는게 이꼴인지 모르겠다니.” 덕철이는 술잔을 들어 단모금에 냈다. “동생은 지난달에 몇번 나갔소?” “아마 한 40번쯤은 나갔을거요. 헝님은?” “한 쉰번쯤 나갔을거요.” “제명에 못죽은 사람 여나문 되지?” “그렇채이쿠. 달마다 비슷하단데.” “그런데 다른 민족들은 제명에 죽는데 우리 민족은 왜 제명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소?” “40, 50대에 죽는 사람들이 푸술하지 않소. 외국에 나가 을병이 들어 돌아와 앓다 죽는 사람, 가정이라는게 없이 술이나 퍼먹으메 되는대로 살다 죽는 사람, 과부, 뽀톨이 제멋대루 붙어 놀아나다 남의 손에 죽는 사람, 그런데 우리 그런 사람들 돈을 번다는게 께름하기두 하오.” 다른 가게들에서도 달마다 적지 않은 시신을 다룰것이였다. 어디 이뿐인가. 이젠 교를 믿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져 그런 사람들은 죽어도 우리 민족 전통 상례대로 하지 않는다. 생전에 자기들이 믿던 천주교, 기독교, 불교 등 종교의 상례절차로 의식을 행하게 한다. 그렇게 종교의식대로 상례가 행해진 사람들까지 망라하면 제 명에 죽지 못한 사람들 수가 훨씬 더 많을것이였다. “생각하문 사람사는게 다 개××같소. 동생두 봤겠지만 새 아파트마다 밖에 위성접수기가 다닥다닥 나붙은걸 보문 집 산 사람들이 거의 다 우리 민족들인데 그런 집안에 온전한 가정이 몇이나 있습데?...그런 집들에 이제 우리 손이 가야 할  후보 귀신들이 한둘이 아닐게우…”  “그런데 외국나가 돈을 그렇게 벌었다는 사람들이 왜 돈벌이에는 투자를 안한다오? 헝님두 알다싶이 조선족수의점이라는 간판은 버젓이 내걸어두 로반은 열에  아홉이 다른 민족들이 아니우. 헝님네 로반두 그렇구 우리 로반두 그렇구…” “만만디 다른 민족들이 쾌쾌디 우리 민족을 찜쪄먹는다니까.” “이 일두 께름해 그렇지 돈벌이는 어느 벌이보다 더 잘되지 않소. 로반은 그저 척 꾸려만 놓구 결국은 우리가 돈을 벌어주는게지. 우리두 돈을 벌지만 큰돈은  로반이 챙기지 않소. 체면이구 뭐구 난 돈이 있으문 이런데 투자하겠소.” “후, 우리 민족은 체면을 중히 여겨 굶어죽어두 겨떡은 안먹구 얼어죽어두 겨불은 안쬔다는 심사지.” “그래두 외국가서는 처녀불알 파는 일두 다 한다지 않소.” “여기서두 그렇게 내번지구 하문사 제 가정두 지키구 제 입살이두 얼마든지 할만 하지. 지금 다른 민족들이 여기서 벽바르기와 벽돌쌓는 미쟁이일을 하면서 하루에 5,6백원씩은 번다지 않소. 농촌에서는 밭이나 과수원이 거의 다 남의 손에 들어가구. 하여간 보이지 않는 안에 돈은 다른 민족들이 다 벌어간다니까… “앉은 자리에서 그렇게 벌문사 외국가기보다 못하지 않지무.” 그들 둘은 서로 권커니작커니 하며 부지런히 잔을 냈다. 제집 일도 아닌데 왜 자기들 속이 이처럼 와자자해나는지 자기들도 딱히 뭐라고 말할수 없었다. 성국이가 한잔 비우며 물었다. “헝님 외국비자는 어째 지금두 감감 무소식이오?” “어느눔이 쌤싸먹었는지 종무소식이오. 이젠 그렇게 애타게 기다려지지두 않소.” 굶은 아이 굿하러 간 엄마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다 지친듯 시간이 오래니 덕철이는 언제부턴지 거기에 별로 신경이 씌여지지 않았다. 활활 타오르던 출국열이 왜 비맞은 불처럼 이렇게 사글어지는지 자기도 딱히 모를 일이였다. 그들 둘은 간단한 안주에 술 한병 비우고는 자리를 떴다. 래일 일에 지장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제길할, 오늘 6백원을 허망 떼웠다니까…아니 천소시돈을…그 돈이면 아 학비를…” 덕철이는 돌아오면서도 놓쳐버린 큼직한 인민페 여나무장이 머리속에서 그믈그믈 날아다녔다. 그는 화가 나는지 앙골라머리를 빡빡 쓸어넘겼다.   4 점잖아 보이는 손님 한분이 가게에 들어섰다. “어서 오십쇼ㅡ.” 덕철이가 앙골라머리를 쓸어넘기며 반갑게 맞았다. 들어온 손님은 아무말도 없이 가게안을 휘 둘러보기만 했다. “뭐가 수요되시는지…” 손님은 덕철이쪽으로 몸을 돌리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뭘 당장 살려는건 아니구… 좀 물어볼게 있어서…” 덕철이는 좀 아쉬운 생각이 들었으나 그래로 열정적으로 말했다. “물어볼게 있으문 물어보십소. 내 아는게라문사…” 아무것도 사지 않으며 이렇게 들어와 그저 이것저것 묻기만 하다 가는 손님들도 더러 있었다. 그래도 덕철이는 언제나 깍듯히 대했다. 그런 손님들 가운데 큰 일거리가 숨어있을 수도 있었다. 일없이야 백화상점도 아닌 이런 가게에 누가 발을 들여놓겠는가. “여기서 멜레하구 골회 처리하는 일두 하는지 해서…” “예ㅡ.그런것두 다 합꾸마. 무슨 처리할 일이 있습둥?” 큰 벌이가 생길듯 했다. 덕철이는 대뜸 화색을 띄우며 걸상을 내주었다. 그리고는 자기도 마주 앉으며 천천히 이야기하라고 권했다. 손님이 미안스레 그 걸상에 앉으며 말꾸러미를 풀었다. 들어보니 돌아간지 30여년되는 부모들 산소를 파내고 골회를 처리하려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는 문의였다. 집에서 형제들이 모여앉아 토론도 해보았으나 나이 들어도 구체적인 상례를 몰라 체면을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왔단다. 왜 부모들 묘지를 파헤치느냐는 덕철이가 물을 일이 아니였다. 어떤  사람들은 시간이 오래니 효성을 다했다고 여겨서 그럴수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점을 쳐보고 가정화를 막으려고 파헤치는 경우도 있었다. 더우기 지금은 어지간한 산더기도 개발하고 별장을 짓는다고 거기에 있던 오랜 묘지들을 정부의 명의로 기한내로 옮겨가게 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부모들 합장한겝둥 아니문 따로 매장한겝둥…” “전에 다 따로 매장했습지. 후에 한다한다하메 결국 합장은 못했습꾸마. 멜레하는데두 무슨 규칙이 있습니까?” “있습지. 제대루 하자문 꽤나 품이 들어야 합꾸마.” 세간에서는 묘를 파내 옮기는것을 “멜레”라고 하는데 표준적으로는 파묘(破墓)라 한다.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비슷하다. 전통적인 의식대로 하자면 파묘하기전에 먼저 토지신에게 술을 붓고 신고제를 지내면서 그간 별고없이 조상님을 지켜주신 토지신의 로고에 감사를 드리고 파묘할데 대한 신고를 올린다. 그리고는 파묘할 묘에 제를 지내면서 “모년 모월 모일에 모손 모는 존령께 고하나이다. 이곳에 장사지낸지 너무 오래 되여서 체백(体魄)이 편안치 못할까 렴려되여 다른 장소로 옮기고자 하오니 존령께옵서 놀라지 마시옵소서.” 하는 식의 축문을 올려야 한다. 연후에 삽으로 묘의 서쪽부터 한번 찍고 “파묘!”하고 웨치면서 사방을 찍은후에 흙을 파낸다. 관이 드러낼 때에는 조심하여 헤쳐야 한다. 관을 열어 혹 시신의 살이 잘 썩지 않은 곳이 있으면 대나무칼로 긁고 털어낸후에 뼈를 하나하나 조심스레 빠짐없이 주어 미리 준비해놓은 칠성판에 원모양대로 올려놓는다. 그래야 뼈를 빠짐없이 다 주어냈는지 쉽게 알수 있다. 뼈가 다 놓여지면 긴 삼베로 칠성판과 함께 머리쪽에서부터 감는다. 만일 다른 곳에 옮겨 묻지 않고 화장하려면 칠성판은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뼈만 주어 깨끗한 보에 싸서 화장터에 보내 화장하면 된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상례(丧礼)를 따르는 집이 거의 없다. 혹 파묘한다 해도 그저 후레자식 이붓아비 뫼를 벌초하듯 되는대로 파내서는 굵은 뼈만 대수대수 주어 비닐주머니에 넣어 옮기거나 화장해 버린다. 그래도 아무런 불효감도 느끼지 못한다. 손님은 들을수록 귀가 열리는지 아니면 까다롭고 복잡하다고 생각해서인지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제절로 하자면 꽤나 복잡하구만. 저, 여기서 해주면 값은 어떻게 받습니까?” “집(묘지) 한채 파고 처리하는데 보통 천원씩 받는데 거리와 현지정황을 보아 좀씩 오르내립꾸마” “그럼 두채에 2천원좌우 들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뿐이 아닙지. 다른 곳에 집을 새롭게 쓰려면 품도 많이 들고 돈도 적지 않게 들어야 합지. 뼈를 파내 화장해도 화장비두 들어야 하구 골회함값두 써야 할게꾸마.” “골회를 처리하는데두 골회함을 써야 합니까?” “그럼 그저 써료주머니에 넣어 처리하겠습둥? 그러문사 자식된 도리 아입지.” 손님은 뭔가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화장한 골회는 어떻게 처리하면 좋습니까?” 골회를 잘 처리하는것도 조상에 대한 후손의 효심과 공경심을 표달하는것이다, 골회처리에도 몇가지 방법이 있기는 한데 보통 두가지 방법을 쓴다. 한가지 방법은 산에 들어가 여러해 자란 큰 소나무를 찾아 그 나무밑에 묻는다. 뜻인즉 “나를 이 세상에 태여나게 해주신 부모님의 은덕은 송죽처럼 사철 푸르고 이 세상에 오래오래 전해가시라.”는 뜻이다. 두번째 방법은 두 강물이 합치는 어느 합수목을 찾아 물에 띄워 보낸다. 뜻인즉 “인간세상을 뜨신 후에라도 태여나신 고향에도 가보시고 생전에 못하신 세계유람두 해보시며 극락세계에서 쾌락히 보내시옵소.” 하는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느 책이나 문건의 정의가 아니라 그저 산사람들의 소박하고 공경스러운 마음일 뿐이다. “골회를 저레 화장텀에서 화장하는대로 날려보내문 어떻습니까? 우리 집 사람은 남들도 그렇게 하더라며 그게 편할거라 하는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면 돈도 적게 들고 번거롭지 않을뿐만 아니라 고인이 하늘로 편히 올라간다고 여기는 원인에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천진하고 고지식하다. 지금 어느 구석인들 량심을 팔아먹지 않은 곳이 있는가. 화장터에서 돈은 돈대로 받고 그 골회들을 어떻게 처리한다는 내막을 알면 사람들은 기절초풍할것이다. 그런 내막들을 잘알고 있는 덕철이는 손님들이 그럴 생각이 있어 하는것 같으면 “남한테 맡겨 시름이 놓이느냐, 그래도 자기들 눈으로 보면서 처리하는게 좋을게꾸마,”고 권고한다. 돈은 좀 들더라도 마지막 불효는 저지르지 말라는 충고에서였다. 그렇다고 남들이 모르는 화장터의 “잠재규칙”을 사람들에게 곧이곧대로 터놓을수는 없었다. 그러면 자기 머리에 언제 무슨 봉변이 떨어질지 모르기 때문이였다. 이 일을 하면서 화장터와 련계할 일들이 많은데 관계가 버성겨지면 자연 돈벌이에 영향을 주지 않을수 없는 노릇이였다. 아무리 성실한 사람이라도 감출것은 감추며 살아야 하는 세상이다. “내 딴말은 하지 않겠습꾸만은 그래도 청명이나 추석, 중양절같은 날을 받아 제 눈으로 보며 처리하는게 부모님께 마지막으로 하는 효도일게꾸마.” 손님은 손바닥을 비비며 덕철이를 한참 쳐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들었습니다. 제대로 하자면 생각보다 많이 까다롭군요. 내 집에 가서 잘 의논해보구 필요하면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덕철이도 자리에서 일어나 바래며 시원스레 말했다. “그렇게 하십소. 구체방법은 다 말씀드렸으니 재비루 하시든지 아니문 우리 손이 필요하문 다시 찾아오십소.” “정말 감사합니다.” 손님도 덕철이의 진정을 알았는지 깊숙히 허리굽혀 인사하며 나갔다. 지금 세상에 어디에나 “잠재규칙”이 있듯 돈벌이를 위해 자기들이 하는 여러가지 방법을 손님들에게 털어놓지 않는것이 수의가게의 “원칙”이다. 하지만 성실하고 정직한 덕철이는 자기가 아는대로 다 말해준다. 그래서 손님들이 알려준 방법대로 자체로 해도 무방했고 자기네를 다시 찾아오면 고마왔다. 그렇게 다 말해줘도 왔다간 손님들은 열에 아홉은 다시 와서 덕철이네 손을 빌군 했다. 부모께 마지막으로 효도하고저 상례를 아는 사람을 청해 순서있고 절차있게 행하자는 이도 있고  자기들이 하자니 번거롭고 시끄러워 돈으로 편하게 하자는 이도 있었다. 덕철이가 수의가게의 “잠재규칙”을 찾아오는 사람들한테 다 말해주어 다른 수의가게들의 눈총을 받고 말밥에 오르기도 했으나 덕철이는 그저 못들은척 했다. 이는 화장터의 관계처리와 성격이 다르므로 감출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일을 하며 보느라면 눈꼴 사나운 일들도 비일비재다. 어떤 자식들은 합수목에 가서도 부모들 골회를 부모가 준 손으로 뿌리려 하지 않는다. 한줌한줌 정성들여 쥐여 뿌리는것이 아니라 쓰레기를 버리듯 강변에 왈칵 엎어놓기도 하고 왕자갈을 던지듯 한꺼번에 강에 와락 뿌려던지기도 한다. 골회함도 깨끗이 태워서 재를 강에 띄워보내는것이 아니라 돌로 망탕 쪼개서는 그 쪼각들을 그대로 강에 훌훌  던져버리기도 한다. 아니면 아예 덕철이네한테 맡겨놓고 자기들은 들놀이를 나온듯 강변에서 웃고  떠들며 술이나 퍼마시다 얼근해 비틀거리며 간다. 천당에 간 부모들이 자식들의 그런 불효를 안다면  얼마나 괴로와하고 분통이 터져하겠는가. 그런 자식들이 부모 생전에도 제대로  효도를 했을가고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귀신도 빌면 은혜를 베풀고 마음가짐 잘 먹으면 북두칠성도 굽어본다는데 그런 몰상식한 행실을 볼 때마다 덕철이는 속으로  “호로자식들! 저래구두 일이 잘못되문 조상탓이라 하겠지. 집안귀신이 사람 잡아간다는 소릴 못들어본 모양이구나.” 하고 욕설을 퍼붓군 했다. 집안에 모기가 들어오면 부모는 자식들을 걱정하여 자기를 뜯어먹으라고 옷을 벗고 잔다는데 그런 자식들은 모기가 들어오면 부모들 옷을 벗겨 재울것 같았다. 시대는 몰라보게 발전하고 생활은 해마다  좋아지는데 어쩐지 사람들의 례의와 도덕은 세대세대 땅에 떨어지는듯 했다. 전에는 우리 민족 상례의식이 너무 복잡하고 까다로워 형식에 치우친 점도 없진 않았고 어려운 살림형편에 상례를 치르기 위한 비용도 많이 들어 이로 인한 피해도 적지 않았다. 낡은것을 모조리 때려부신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농촌에서는 황두막도 없어지고 황두도 사라졌다. 이제는 시대가 많이 달라지고 일상생활 절주도 빨라진데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외국으로 대도시로 갔기에 굳히 낡은 전통방식을 고집할 필요도 없게 되였다. 상례의 의식절차도 오늘날의 현실에 맞도록 행해지는것도 당연지사라 하겠다. 하지만 문제는 반드시 알고 행해야 할 최저한도의 절차와 의식마저 감감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시대발전을 따른 좋은 일인지 아니면 민족전통을 잃은 슬픈 일인지? 덕철이도 이 일을 하기전에는 상례에 대해 깜깜부지였다. 오죽하면 20년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형들 뒤를 따라 상주로 나섰다가 마을로인들한테서 “후레자식!”이란 욕까지 먹었겠는가. 장기간 병환에 계시던 아버지가 세상뜨시자 마을사람들이 모두 조문을 왔었다. 마을로인들이 찾아와 조문하면서 상주들께 허리를 굽히며 차례로 례를 행했다. 덕철이 차례에 이르자 나젊은 상주라도 깍듯히 대했다. 앞에 선 마을좌상로인이 허리를 굽히며 정중히 조상했다. “부친님 병환이 위중하시더니 상사까지 당하셔서 얼마나 비감하시옵니까.” 덕철이도 황공하게 제꺽 허리를 굽히며 고맙게 례를 받았다. “무슨, 괜채이꾸마.” 좌상로인의 두눈이 단통 작두눈이 되여 덕철이를 썰어보더니 휙 돌아서 가벼렸다. 그후 마을에서는 “아버지 세상떠 얼마나 비감하겠느냐.” 했더니 아무 꺼리낌없이 “괜챕꾸마.”하는 후레자식이 다 있더라며 덕철이를 욕했다. 그저 별 생각없이 평소에 하던 습관대로 대꾸했는데 그것이 이렇게 큰 파문을 일으킬줄은 몰랐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사람들 욕이 옳았다. 아버지가 세상떴는데 괜찮다고 했으니 욕을 먹어 싸지 않은가. 덕철이는 자책감에 한동안 마을에서 고개를 들고 다닐수 없었다. 상사에는 평소의 습관이 통하지 않았다. 아니, 금물이였다. 덕철이는 비자나오기를 기다리며 시내에 올라와 어쩔수 없이 이 일을 하면서 처음에는 걸음마다 코밥을 먹었다. 숱한 상례의식을 행할줄 몰랐고 사람들이 묻는 상례상식도 대답해 줄수 없었다. 상례란 망인의 령혼을 위로하고 명복을 비는 의식과 절차인데 수의가게에서 일한다는 사람이 늘 도끼들고 나물캐러 가듯 해서야 어디 될 말인가. 거미도 줄을 쳐야 벌레를 잡는다는데 아마도 이 일로 밥을 먹자면 필요한 상례상식을 갖춰야 했다. 관상쟁이 제 관상 못보고 점쟁이 제 점 못친다지만 그래도 흉내라도 내야 하지 않겠는가. 그후부터 덕철이는 전에 이 일을 하던 분들을 찾아다니며 상례지식을 배웠고 여기저기서 상례문화에 관한 책들도 얻어다 고중생 대학입시 준비하듯 머리를 동이고 탐독하군 했다. 그저 밥벌이나 하자는 심사로 대충대충 응부하기와 알고 하자는 마음가짐이 천양지차였다. 글속에 글이 있고 말속에 말이 있다더니 상례문화도 파고 드니 그 깊이가 한정없었다. 이 일도 배우고 실천하니 점차 소경이 눈을 뜨는듯 했다. 이젠 부근 수의가게에서 덕철이가 한다하는 “상례박사”로 받들렸다. 다른 수의 가게에서 모를것이 있으면  덕철이를 찾아와 묻거나 청해가군 했다. 그저 밥벌이를 위해 되는대로 이 일을 오래한 사람들보다 시간은 길지 않으나 파고들며 알고 일하는 덕철이의 “권위”가 점차 수립되였다. 체면이 깍이는 일이라도 알고 일하니 일하기 편했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모두 만족해했다. 덕철이도 자연 이 일에 재미를 붙이게 되였다. 그저 밥벌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재미를 붙이고 열성스레 일하니 우리 민족이고 타민족이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다른 수의가게보다 훨씬 더 많아졌다. 그러니 돈벌이도 날따라 잘 되였다. 하지만 남의 밑에서 일하는 처지라 건데기는 물론 주인의것이였다. 상례문화를 캐고들며 갖은 고생을 다하는 덕철이는 국물에 고기부스레기를 얻어먹을 뿐이였다.   5 어느듯 이듬해 봄이 되였다. 산과 들은 겨우내 소리없이 자던 잠을 깨고 연한 초록색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만물이 기지개를 켜며 생장을 서두르는 봄이면 인간은 어쩐지 비달비달하던 몸들이 갑자기 꺼져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간 외국비자가 내려온지 퍼그나 되였으나 덕철이는 어쩐지 외국나갈 궁리를 하지 않고 자기하는 일에만 바삐 돌아쳤다. 봄철이면 수의가게 일들이 어느 계절보다도 좀 바삐돌아쳐야 했다. 안해가 “빨리 외국에 나가지 않고 시내서 뭘 꾸물거리느냐?”고 시골에서 독촉이 성화같았으나 덕철이는 마이동풍이다. 어느날 오후, 오전에 렴습을 나갔다가 점심을 대충 먹고 가게에서 다리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또 일거리가 생기려는건가.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그런데 저쪽에서는 애어린 녀자의 울음소리만 와 하고 들려왔다. 이게 무슨 전환가. 덕철이는 핸드폰에 대고 다시 소리쳤다. “여보시오. 누구십니까? 무슨 일입니까?” “…삼촌…내 미홥다…미화…흑흑…” “뭐뭐? 미화? 너 그런데 무슨 일이냐? 울긴 왜 우냐?” 덕철이는 졸지에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왔다. 미화라면 병원갈 때면 종종 이 가 게에 들려 자기를 꾸중하던 형님네 딸애였다. “…삼촌…흑흑흑…아부지…아부지 상세났습다…와…” “뭐뭐? 뭐라구?...아부지 상세나다니…” 덕철이는 화뜰 놀라 두눈이 부엉이눈이 되였다. “…이재…이재 학교에서 집에 와보니 글쎄 아부지 상세난채 침대에 누워있었슴다 …난 이제 어찌랍니까…엉엉엉…” 덕철이는 그만 참나무방망이에 뒤통수를 얻어맞은듯 핸드폰을 든채 멍해졌다. 형님이 갑자기 세상 뜨다니. 이게 무슨 소린가. 그래서 며칠째 형님이 안보인건가? 나도 일이 바빠 련락을 못했더니. “…삼촌...삼촌…” 핸드폰에서 울음에 젖은 미화의 애절한 목소리가 련속 울려나왔다. 덕철이는 앙골라머리를 털며 정신을 차렸다. “어…알았다. 놀라지 말아라. 내 인차 가마…” 이런 날벼락이 어디 있는가. 외국가 돈벌고 여러가지 병을 달고 돌아온 형님이 오래 살지 못할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급히 돌아갈줄은 생각지 못했었다. 제명을 살지 못하고 아까운 나이에 죽는 사람들 일이 남의 일 같지 않더니 우리 가문에도 그런 액운이 뛰쳐나지 않았는가. 덕철이는 서둘러 수의며 렴습에 필요한 도구들을 갖춰들고 문밖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개발구쪽 풍미아파트앞에서 내리니 밖에 나와 기다리던 미화가 달려나와 덕철이품에 안기며 와 울음을 터뜨렸다. “…삼촌…난 이제 누구와 살랍미까…” 덕철이도 눈물을 쭈루룩 흘리며 미화를 다독였다. “울지 마라. 이 삼촌이 있지 않냐…그만해라… 어서 들어가 보자…” 덕철이는 미화를 달래며 집안에 들어섰다. 죽은 형님을 살펴보니 몸이 언녕 굳어져있었다. 죽은지 여러날 되였다. 오늘 금요일이여서 미화가 학교 기숙사에서 집에 오니 형님이 사망한걸 발견했지 그렇지 않으면 아직도 모를번 하지 않았는가. 자기가 그 숱한 시신들을 렴습하며 왜 사람들이 자기 지기들이 죽은줄 제때에 몰랐는가고 속으로 욕해 보기도 했지만 오늘 자기가 당하고보니 그들을 리해할수 있을것 같았다. 형님의 머리맡에도 술병이 나뒹굴었다. 아마 오래동안 술로 육신의 아픔을 달래온것 같았다. 앓는 몸에 술을 입에 대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건만… 전에는 집안에 림종이 가까운 사람이 있으면 집식구들이 깨끗한 옷을 갖춰놓고 림종을 지키거나 유언을 들어주며 단정한 모습으로 존엄있게 세상을 하직하도록 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은 집들에서 사람이 죽을 림박이 되여도 곁에 식구들 그림자조차 볼수 없이 홀로 쓸쓸히 저 세상으로 간다. 그러니 단정한 모습이고 존엄이고 운운할수조차 없는 현실이다. 유언을 남길 사람은커녕 제똥에 매질당하지 않게 곁에서 보살펴줄 사람도 없고 남의 손에 죽어도 곁에서 지켜줄 사람이 없다. 숱한 시신을 렴습하면서 그렇게 죽은 사람들을 동정하고 그런 집 식구들을 속으로 욕했는데 결국 자기 형님도 지금 그꼴이 되지 않았는가. 덕철이는 눈물을 흘리며 제명을 살지 못한 형님의 혼을 불러드렸다. 천당에 가서라도 웃음을 안고 건강하게 즐겁게 살라고 목이 메게 기원했다. 그리고는 서둘러 렴습을 했다. 몸을 깨끗이 닦고 구멍을 막고 수의를 입혔다. 손발을 주물러 평온한 모습을 갖추어놓았다. 빼빼마른 시신에 수의를 입히고 바로눕혀 놓고보니 헝겊막대기에 보자기를 씌운듯 했다. 외국가 일하며 뼈와 살을 다 버리고 병과 아픔만 주어가지고 왔다. 겨릅대같은 형님의 시신을 바라보며 덕철이는 저도모르게 또 눈물이 쏟아졌다. 내 손으로 형님의 마지막 길을 보내자고 형님이 그처럼 반대하는 이 일을 계속 한건가. 내 손으로 형님을 보내자고 비자가 내려와도 출국하지 않고 이렇게 눌러앉아있은건가. 그것이 하늘의 뜻이였는가. 자기마저 출국했더면 정말 어떻게 되였겠는가. 아아. 크면서 사람사는 꼴이 왜 이 모양이란 말인가…살아서도 존엄없이 산 사람들이 죽을 때라고 존엄있게 죽겠는가. 덕철이는 얼결에 책상우에서 형님의 유서를 발견했다. 안해에게도 딸애에게도 아니고 덕철이에게 쓴것이였다. “…동생아…내 아마두 며칠 살것 같지 못하다…아무리 약을 먹어두 고름이 살이 되지 않는구나…외국나가 돈은 좀 벌었다만 사는게 사람같지 않았다. 죽을 병이 드니 세상이 다 귀찮다. 사실 우린 리혼한지 오랬다. 그저 사람들 말밥에 오르는게 싫어 체면에 덮어감추고 아닌 보살했을뿐이다…사랑의 기쁨은 순간으로 지나가지만 사랑의  고통은 평생 들어붙어 떨어지지 않는구나. 넌 외국가지 말라. 돈이 사람 잡는다…돈이 사랑 죽인다…돈은 벌어 집은 샀다만 가정은 살수 없구나. 외국의 돈은 왔다만 집안의 웃음은 다 갔다…외국가 힘들게 일하는 누나두 내 길을 걸을가 걱정된다…남두 믿지  말구 돈두 믿지 말라. 네 가정은 네가 지켜라…애비에미없이 공부할 미화가  불쌍하다 …불쌍한 미화를 부탁한다…대학 갈 때까지만 좀 보살펴 주라…돈도 몇푼 안남았다 …미안하다…” 유서를 읽는 덕철이 눈에서는 눈물이 걷잡을수 없이 흘러내렸다. 형님은 자기 죽을줄 알고 곁에 사람이 없으니 이렇게 유서까지 써놓았다. 형님은 가정을 박살내며 돈번것을 후회했다, 자기 몸을 망가뜨리며 돈번것을 후회했다. 사람이 백년을 살아도 3만 6천일밖에 안된다는데 형님은 그 절반도 못살고 이렇게 가다니. 개도 안먹는다는 돈이 대체 뭐길래 사람들은 거기에 엎어져 일어날줄  모르게 하는건가. 밥사발은 눈물이요 죽사발은 웃음이라더니 왜 사람이 밥을 먹을만하니 죽 먹을 때의 웃음은 다 걷어가는것일가. “사람이 50전에는 목숨으로 돈을 벌고 60후에는 돈으로 목숨을 산다는데 헝님은 40전에 목숨으로 번돈을 다 밀어넣으면서두 어찌 50이 되기전에도 목숨을 사지 못한단 말이오…” 유서를 보고나니 형님은 그간 술로 육신의 아픔보다도 마음의 아픔을, 사랑의 고통을 더 달랜것 같았다. (불쌍한 헝님, 선량한 사람 단명하고 악한 사람 빨리 늙는다했는데 차라리 악하기라도 했더면 늙더라도 죽지는 않았을게 아니오…) 덕철이는 인제야 제명에 죽지 못한 사람들의 머리맡에서 늘 술병이 나뒹굴던 리유를 제대로 알것 같았다. 그것은 단순히 자기 인생에 대한 실망과 타락과 저주가 아니라 가정을 잃고 사랑을 잃은 불쌍한 외기러기들의 진정제였고 마취제였다. 내가 왜 형님의 그런 아픔을 제대로 몰랐던가. 왜 생전에 더 걱정해 주지 못했던가. 되려 꾸중한다고 고깝게도 생각하지 않았던가. 덕철이는 쓰다듬기만 하던 자기의 앙골라 머리를 두 손으로 거죽이 일 지경으로 으스러지게 거머쥐였다. (사랑은 살그머니 왔다가 떠들썩하며 간다는데 헝님네 사랑은 아무런 내색도 내지 않고 슬그머니 가버린건가. 돈만 사람을 죽이는게 아니라 체면도 사람을 죽이는구나.) 덕철이는 미화한테서 아주머니 외국 전화번호를 알아가지고 전화를 했다. 리혼한줄 모르는척 하고 전화를 했다. 남편이 아니, 전 남편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도 아주머니 아니, 전 아주머니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일이 바빠 갈것 같지 못하단다. 돈을 보낼테니 덕철이가 나서 후사처리를 해달란다. 그리고 다달이 소비돈을 보낼테니 미화도 잘 돌봐달란다. 울뚝밸이 치솟은 덕철이는 순진한 강아지같던 시동생답지 않게 전화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즈마이는 언제부터 그렇게 인정머리 없어졌소? 동네집 나그내 죽었소? 아즈마이는 배꿉에서 이깔이 자랄 때까지 거기서 돈이나 콱 벌어 혼자 잘사오…” 덕철이는 외국에 나가있는 누나한테도 전화를 했다. 누나는 큰 동생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단통 울음을 터뜨렸다. 동생이 어떻게 그렇게 죽을수 있느냐며 통탄했다. 돈이 동생을 죽였다고 한탄했다. 자기는 일이고뭐고 다 팽개치고 래일에라도 당장 들어가고 싶지만 비행기표를 끊느라면 며칠 걸릴지 모르겠단다. 그러면서 먼저 돈을 부칠테니 후사에 아끼지 말고 쓰란다. 그래도 한 배속을 나온 형제가 달랐다. 남이 된 아주머니와는 판판 달랐다. 남이라는 남자에 점이 하나 떨어져 님이 되여 죽자살자하다가 언젠가 떨어졌던 그 점이 심술스레 되올라붙어 또 남이 되여 아귀다툼한다더니 그 말 그른데 없었다. 그런데 어느 고약한 놈이 천금같은 그 점을 제멋대로 롱락하면서 때로는 떼버렸다가 언젠가는 또 올려붙이기도 하면서 사람을 희노애락에 빠져들게 하는건가. 그 요사한 놈이 돈이란 말인가? 방 중에는 남편이 제일이요 집 중에는 안해가 제일이라는데 그 요사한 돈놈때문에 방에는 남편이 없고 집에는 안해가 없게 만드는건가. “누얘두 이번에 아예 다시 안나갈 작정하구 들어오우. 누얘두 지금 약을 달구 식당에서 날마다 열댓시간씩 일하며 몸을 다 망가먹구 있지 않소. 누얘두 리혼하구 애두 돌보지 못하메 돈을 벌어 뭘하오? 어째 헝님길을 걷구 싶소? 집이 박살나구 애들을 다 버린담에 돈으루 요를 만들어 깐들 잠이 잘 올것같소? 빈대 죽이는 멋에 초가삼간 다 태우지 말구 날래 들어오우.” “너는 비자가 나왔느냐, 한국에 나올거냐?”  누나의 말에 덕철이는 음성을 버럭 높였다. “비자는 나왔지만 난 안나갈거요. 여기서 벌며 내 안깐 내 지키구 내 새끼 내 지킬거우. 난 형님이나 누얘 길을 걷지 않을거요.” 부모를 섬기고 처자를 사랑하고 가정을 지킨다는 전통적 관념이 아니, 영원히 지켜가야 할 인간의 미덕이 고무풍선마냥 하나하나 팡팡 터져가고있다. 모두 말로는 그 미덕을 지키기 위해 돈벌라 간다지만 왜 덕철이가 보아온것은 모두가 상반되는 결과를 가져온 가정들인가. 사람은 젊거나 건강할 때는 배로 숨쉬고 나이가 들어 허약해지거나 병이 골수에 미치면 그 숨이 점차 가슴으로 올라오고 나중에는 목에까지 차오르면 생의 종말을 맞는다고 한다. 사람의 숨이 목에서 끊어진다고 생명을 목숨이라 한다는데 왜 어떤 사람들은 배에서 목에까지 올라오는 숨결이 장강을 지나듯 하고 형님같이 불쌍한 사람들은 개울물 건너듯 하단 말인가. 이것도 하늘이 내려준 운명인가 아니면 그  어떤 유혹에 빠져들어 자초한 운명인가. 조문하러 올 손님도 별로 없지만 그래도 칠성판에 눕혀놓은 형님시신을 흰보로 막아놓고 그앞에 제상을 차려놓았다. 안해와 고향마을에 있는 친척로인 몇분은 래일 오후에나 들어설것이였다. 저녁에 덕철이가 형님시신과 마주 앉아 눈물을 훔치며 홀로 술잔을 들었다. 곁에서 눈이 퉁퉁 부어오른 미화가 어깨를 세차게 들먹이며 숨이 넘어갈듯 흐느낀다. 그것이 더더욱 덕철이 가슴을 미여지게 했다. (내 가슴도 이렇게 미여지는데 넌 오죽하겠느냐. 울고싶으면 실컷 울어라…) 그러는데 가게의 로반과 성국이 등 가게일을 하며 면목익힌 친구들 몇이 조문하러 왔다. 성국이가 부탁했던 형님유상을 만들어 들고왔다. 이웃 사촌이라더니 덕철이는 형제들이 찾아온듯 반가와하며 벌떡 일어나 그네들의 손을 잡아흔들었다. 이 밤에 찾아올 일가친척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들이 오니 마음 한구석이 열리는듯 했다. 덕철이는 형님유상을 제상 웃머리에 세워놓았다. 손님들이 친인인양 무릎꿇고 엎드려 유상에 절을 했다. 조상이 끝나자 다른 사람들은 좀 앉았다 위로의 말을 남기고 떠나가고 성국이만 남아 덕철이를 동무했다. 둘은 초촐한 술상에 마주  앉았다. “난 외국에 안나갈라우.” 덕철이는 술을 따르며 뜬금없이 왕청같은 소리를 했다. “양? 그렇게 눈이 헐게 비자 나오기를 기다리더니…” 성국이가 술을 받으며 두눈이 휘둥그래 했다. “난 돈을 꿔서라두 여기서 진짜 우리 민족 수의댄을 꾸릴가 하오. 난 헝님의 길을 걷지 않구 여기서 일하메 내 안깐과 내 새끼는 내가 지키겠소. 모두 그 빌어먹을 돈때문에  제 명을 살지 못하구 가는 불쌍한 사람들을 내손으로 깨끗히 씻어보내겠소. 힘두 없구 지식두 없지만 사라져가는 우리 민족 장례문화두 내가 지킬만큼 지켜보겠소.” 성국이가 놀랍게 덕철이를 쳐다보다가 반색했다. “헝님이 잘 생각했소. 헝님은 이젠 이런 일에 박사니까 헝님이 진짜 우리 민족 수의댄을 꾸리면 터밭에서 물먹은 염지자라듯 할게우.” “거렁뱅이두 밤이문 부마노릇하는 꿈을 꾼다는데 사람이 손이 마르구 대학 못갔다구 어찌 꿈꺼지 없겠수. 내 이 일을 생각한지 꽤나 됐소.” “이매를 맞대구 일하면서두 헝님이 그런 룡꿈을 꾸는줄 몰랐구만. 그래서 헝님이 비자 내려와두 출국을 그냥 미룬게로군. 헝님이 진짜 우리 민족 수의댄 꾸리문 나두 거기서 일하구 싶은데 받아주겠수?” “동생이 오겠다문 내사 환영이지. 그리구 외국가 여러해째 몸을 다 망가뜨리며 돈을 버는 누나두 내 회사에 불러올거우. 여기서 전화받으메 집만 지켜줘두 밥벌이는 할거요. 하나밖에 없는 누나를 헝님길을 걷게 내버려두지 못하겠소. 본인이 하자구 하겠는지는 모르겠지만…” 덕철이는 앞에 있는 잔을 들어 단모금에 냈다. “헝님, 감사하오. 그리구 잘 생각했소. 누나걱정꺼지 하니 내 다 코마루 찡해나우. 내 누나두 외국나가 개고생하오만…그럼 이제부턴 헝님을 로반으루 모시겠소. 자, 한잔 받소.” 성국이가 제꺽 술병을 찾아쥐고 술 한잔 따랐다. “아직은 시간이 좀 걸릴듯 하니 지금은 아무 내색 내지마우. 칠칠하구 미끈한 나무는 모두 재목으로 잘려나가니 뒤탈리고  허리굽은 키작은 나무라도 이 선산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덕철이는 성국이가 부어준 술을 또 단모금에 굽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자기를 보며 인자하게 웃음짓는 형님유상을 이윽토록 바라보다 떨리는 입을 열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울메 왔다가 웃으메 가야 한다는데 헝님이 제 명을 살지 못한것만두 원통한데 어째 속으로 피눈물을 떨구메 갔소…이제 날보구 웃으문 뭣하우…날더러 어쩌라구…헝…님…” 덕철이는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더니 꺼이꺼이 간이 찢어지게 울었다. 쉴새없이 쿨적이던 미화도 울음을 터뜨렸다. 성국이는 이쪽저쪽 그들을 말리다 자기도 손바닥으로 눈물을 이쪽저쪽 훔쳤다. 그래도 형님유상은 건강하고 즐거울 때처럼 시름없이 그냥 웃기만 한다. 2013년 제6기            
49    [수필] 출세와 효도의 갈림길에서(허룡석) 댓글:  조회:1729  추천:3  2017-09-12
수필 출세와 효도의 갈림길에서 허룡석 어쩌면 이 세상 모든것은 너무도 빨리 시들어지고 사라져가는듯 하다. 무정한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처럼 불타던 많고많은 욕망마저 서서히 시들어버리고 모든 생명체들도 한줌의 흙으로 삭아가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 한가지 남는것이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효가 아닐가싶다.  어머니들은 위대하다. 자신의 피와 살로 자식들에게 다함없는 사랑을 몰붓는 어머니들은 이 세상의 영원한 거인, 생의 홰불이라고 칭송해도 과분하지 않으리라. 나의 어머니도 수많은 어머니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거인이셨고 생의 홰불이셨다. 어머니는 거인마냥 우뚝 서서 자신의 귀중한 그 청춘의 홰불로 자신을 불태우며 사그라져가는 이 갸냘픈 명에 생의 활력을 부여하셔 기적적 생명을 만들어주셨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자식으로서 그러한 어머니를 위하여서는 무슨 효도인들 못하겠는가. 그 옛날 이야기처럼 머리카락을 잘라 신을 삶아드리고 허벅다리 살을 베여 부모를 공대하지 못할지라도 출세와 효도의 갈림길에서 량심을 어기지 않는 선택을 할수 있지 않을가 사료된다. 2013년 여름, 북경에 계시는 선생님들과 선배님들 5쌍이 부부동반하여 연길에 소풍을 오시게 되였다. 장기간 일본에 가 계신다는 일찍 중앙민족학원에서 우리 담임 교원을 하셨던 리용식선생님도 부인을 배동하여 함께 오시였다. 그분들이 훈춘에 가셨다가 연길에 돌아온날 저녁 우리 몇몇 동창생들도 백산호텔 귀빈청에서 선생님 들과 자리를 함께 하게 되였다. 나는 일부러 리용식선생님 곁에 자리를 잡고앉았다. 서로 인사의 말씀이 끝나고 축배의 잔을 돌린후 나는 리용식선생님한테 따로 술을 부어올리며 조용히 말씀드렸다. “혹 선생님은 기억하시겠는지 모르겠지만 30여년전 졸업시 저를 학교에 남지 않겠는가고 하시던 선생님의 말씀을 저는 지금도 잊지 않고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대뜸 놀라운 표정을 지으셨다. “암. 기억하고있지. 그때 동무를 확실히 학교에 남기자고 했는데 돌아가겠다니 참 아쉬웠댔소.” “그때 비록 북경에 남지는 못했지만 선생님의 그 고마운 마음은 제가 영원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자못 아쉬운듯 이렇게 말씀했다. “그건 조직의 고려였지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였소. 그때 동무가 조직의 기대 대로 북경에 남았더면 어떻게 발전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방에 와서도 그만하면 아주 잘한거지. 조선족인재들이 우글거리는 연변에서 신문방송언론사와 문화부문 책임자로 오래동안 사업했으니 얼마나 잘한거요. 내 알건대 우리 민족대학 조문번역전업을 졸업하고 지방에 돌아간 동무들가운데서 동무처럼 이만큼한 사업경력을 쌓은 학생이 없는것 같소.” “별로 잘하지는 못했습니다만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제가 지방에 돌아와 이만큼이라도 자리를 굳힐수 있은것은 선생님들의 따뜻한 관심과 교양과 갈라 놓을수 없습니다. 잊지 못할 그 고마운 마음담아 제가 특별히 선생님께 이 잔을 올리고싶습니다." “좋소. 우리 함께 들기오.” 술을 잘 마시지 못하신다는 선생님은 통쾌하게 잔을 굽냈다. 우리의 대화를 엿들은 곁에 앉은 한 동창생이 나한테 조용히 말했다. “학교졸업때 그런 일이 있었소? 우린 그런줄 정말 몰랐댔소.” “후, 알면 뭐하겠나. 다 지나간 일이다.”     1979년 여름, 대학졸업을 몇달 앞둔 어느날 담임교원 리용식선생님이 나를  조용히 찾았다.   “조직에서 동무를 학교에 남길 타산인데 남을 의향이 있소?” 리용식선생님은 중앙민족학원 조문번역학부가 선 이후의 첫기졸업생으로서 나이는 나와  비슷했지만 선배이자 선생님이기에 나는 깍듯이 존대했다. “예? 저를 학교에 남기려 하신다구요? ” 전혀 생각밖이라 나는 놀랍게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먼저 학부의 전직공청단서기로 남길가 하는데 이제 편제가 나면 교원으로 넘길가 하오. 만일 학교에 남을 생각이 없으면 북경에서 다른 단위를 선택해도 되오.” 몇을 학교에 남기는가고 물으니 내가 유일하다신다. 내가 대학에 오기전에  공사의 공청단서기로 있은 경력때문인가? 학교온 후에도 나는 장족, 위글족, 몽골족, 하사크족, 조선족 등 다섯개 전업이 있는 민족언어학부의 공청단선전위원 사업을 맡아하고있었다. 당시 학교에 남는것과 북경대학 동방언어학부, 중앙인민방송국, 민족출판사, 중앙민족번역국,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등 단위와 부문들은 우리 대학  졸업생들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졸업림박이면 학생들이 사업환경이나 생활환경 등 여러가지 조건이 지방보다 훨씬 우월한 북경에 남으려고 서로 갖은 연줄을 달아 앞뒤로 뛰여다니는 판인데 나는 생각밖으로 움안에서 떡 함지를 받아안은격이라 할가. 우리가 민족출판사에서 실습할 때에도 담당편집이 나의 번역수준을 기중 괜찮게 평가하였다는것도 후에 들어서 알게 되였다.  아마 대학가기전 다년간 신문방송사 골간통신원으로  활약하면서 부지런히 글을 쓴것이 큰 밑바탕이 된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북경에 남을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가정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기에 내가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고향에 돌아갈 생각만 하고있었다. 그런데 정작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잔잔하던 가슴이 흥분으로 들뛰였다. 나는 설레이는 가슴을 진정하며 잘 고려해 보겠다고 선선히 대답했다. 갑자기 마음이 둥둥 뜨는듯 했다. “촌놈”이 행운스럽게 수도 북경에 와 공부하고 꿈에도 생각지 않게 수도공민이 된다니 어찌 마음이 들뜨지 않겠는가.  무슨 지방의 후비간부라고 여러해 동안 대학에 갈려고 해도 보내주지 않아 나중에 "이판삼판 생떼질쓰며" 뒤늦게야 학교에 가다보니 졸업을 앞둔 내 나이 29살이라 반급에서 두번째로 나이 많았다. 그때 이미 연길에 약혼녀가 있었다. 내가 북경에 남게 되면 약혼녀를 북경에 전근시켜와야 70고개에 올라선 부모님을 모셔올수 있었다. 나는 흥분된 마음을 가까스로 누르며 약혼녀와 부모님한테 편지를 띄워 학교의 뜻을 전하며 그네들의 의사를 물었다. 약혼녀한테서는 북경에 남든 돌아오든 나의 의사를 따르겠다고 금방 회답이 왔으나 집에서는 여러날 지나도록 종무소식이였다. 담임선생님이 두번째로 나의 의사를 물을 때 나는 체면을 무릅쓰고 한가지 요구를 제기했다. 나는 이미 대상이 있는 로총각인데 5년내에 안해의 호구를 북경에 들여올수 있으면 남는것을 고려해 보겠다고 했다. 선생님은 다른 학생들은 무조건 남으려 해도 남기 어려운 형편인데 그런 과분한 요구까지 제기하느냐는듯 나를 쳐다 보고는 학교에 반영은 해보겠지만 희망은 적을것이라고 했다. 며칠후 단임선생님이 또다시 나를 찾았다. 아니나다를가 지금 학교는 물론 북경의 어느 단위에나 10년, 20년씩 천리만리 갈라져 사는 견우직녀들이 수두룩한데 학교에서 그런 담보를 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면서 나더러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란다. 사실 그때 북경에 지방의 호구를 들여온다는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하여 어떤 학생들은 북경에 남기 위해 다년간 사귀며 뒤를 받쳐주던 지방의 련인을 차버려 일련의 풍파를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렇게 할수 없었다. 자기가 잘되려고 수년간 나를 믿고 따르던 선량한 처녀의 가슴에 못을 박을 수 없었다. 내가 북경에 남는다고 생각했던지 일부 교원들이 나한테 북경처녀를 소개하기도 했다. 나는 지방에 이미 대상이 있다고 솔직하게 사절했다. 따르는 처녀를 두고 량다리 걸치기를 할수 없었다. 하지만 북경처녀와 결혼하는것이 년로한 부모님을 북경에 빨리 모셔올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였고 현실문제이기도 했다. 그렇게 되면 로처녀로 만들어놓은 지방처녀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는가? 솔직히 말하면 나도 다른 동창들과 마찬가지로 정말 북경에 남고싶었다. 하지만 부모님들은 생각하면 또 쉽게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내가 북경에서 남들처럼 10년이고 20년이고 안해의 호구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다가는 부모님들이 고향에서 고독한 나날을 보내시다 쓸쓸히 세상을 뜨실것이였다. 더우기 70세를 넘기신 아버지도 내가 대학에 온후 중풍에 걸리셨다지 않는가. 나는 고민에 빠졌다. 어찌해야 좋을지. 그러던차 한달쯤 지난 어느날 고향의 한 마을에 사는 사촌형한테서 편지가 날아왔다. “…너의 편지를 받고 마다매(나의 어머니)는 날마다 눈물로 세월을 보낸다.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이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북경에 남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가고 락루하신다. 그러니 너도 잘 생각해 보아라. 내 생각에는 그래도 돌아 오는것이 좋을것 같다…” 사실 어머니는 내가 대학에 공부하러 가는것부터 탐탁해하지 않으셨다. 평범한 농촌부녀인 어머니는 내가 공사간부로 된것에 만족해하시면서 어서 빨리 결혼하여 손자손녀들만 안겨주기를 바라셨다. 나이도 어리지 않기에 여기저기에서 소개해 들어오는 처녀들도 적지 않았다. 또한 수천명 귀향, 하향청년들을 거느리는 공사의 공청단서기로 있었기에 따르는 처녀들도 한둘이 아니라 할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더 배워야겠다는 욕심에 "철밥통" 공사간부도 포기하고 부모의 마음도 모르는척 하면서 기어코 학교로 온것이였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로서 불효를 저지른것은 아닌지 나 홀로 고민할  때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작은 집 어머니말씀에 의하면 내가 달을 채우지 못하고 세상에 태여나서부터 앓기도 많이 앓았다고 한다. 어느 로인인가 자주 앓는 애들은 이름을 천하게 지으면 명이 길것이라 하여  나에게 “매지” (망아지)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래집 사촌형 애명이 “쇄지” (송아지)이니 그렇게 부르는것이 음양으로 서로 어울린단다. 이 피덩이가 살아만 준다면 개똥애라 불러도 무방했다. 하여 동네는 물론 린근 마을 에서도 “쇄지”와 “매지”있는 세흥촌 허씨네 집안이라면 모르는 사람들을 내놓고는 다 알았단다. 젖이 안나는 어머니는 나를 안고 동네를 돌며 동냥젖을 먹였다. 맘씨고운 마을 어머니들은 나를 불쌍히 여겨 자기애들 입에서 젖꼭지를 빼내여 나의 입에 물려 주었다. 그럴 때면 나는 가리지 않고 암팡스레 젖을 빨아댔단다. 하지만 모두가 번마다 그렇게 마음을 쓰는것은 아니였다. 어떤 아낙네는 젖을 주기는커녕 자주 앓음 자랑하는 나의 병이 자기애한테  옮을가봐 설설 뒤걸음치며 비아냥하기도 했다. 그럴수록 어머니는 나를 꼭 살리고야 말겠다고 옥다짐했다. 어머니의 그 정성에 감화된 나와 동갑자리를 가진 몇몇 이웃집 어머니들과 아무때건 군소리없이 젖을 물려주는 작은 어머니가 있어 나는 그런대로 젖배를 곯지 않을수 있었다. 하지만 렴치없이 언제까지도 계속 동냥젖을 먹여 키울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좀 춰서자 암죽을 끓여먹였다. 그런데 “천인젖”을 먹던 입에 생뚱같은 맛을 가진것이 들어가니 나는 떠넣은 암죽을 뱉어내며 울음으로 거센 “항의”를 해댔단다. 그래도 어쩔수 없었다. 마음아파도 암죽맛을 들여야 했다. 어머니는 동네방네를 다니며 사탕가루를 구해다 암죽에 섞어먹였다. 배고파 울어 번져지던 나는 어쩔수 없이 암죽을 좀씩 받아먹었다. 당시 사탕가루가 아주 귀했으나 어머니는 어디서 어떻게 구해오는지 나의 암죽에 사탕가루를 떨구지 않았다. 나는 암죽을 먹다도 별안간 젖생각이 나는지 시도 때도 없이 발버둥치며 울어 번져지다가 자주 암죽 그릇을 훌떡 뒤집어놓기도 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너무 안타까와 손바닥으로  온돌바닥을 치며 넉두리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도 어머니는 제꺽 눈물을 닦고 일어나 다시 암죽을 끓여 나를 달랬다. 암죽끓이는 일은 다른 사람이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어떤 때는 작은 어머니가 그런 장면에 맞띄워 내가 불쌍하고 어머니가 안쓰러워 자기젖을 물려주려 하면 어머니가 막아나섰다. “아매두 젖먹구 자랄 애가 아닌데 자꾸 그러문 얘가 언제 암죽맛을 들이겠소. 보기 구차해두 관두우.” 그렇게 하루에도 몇번씩 나한테 암죽을 끓여먹이느라 납쟁개비 여러개나 구멍이 뚫려버렸다. 어머니의 열손가락은 불에 데고데여 감각을 모르는 두터운 살이 들어 앉았다. 나는 이렇게 선량한 어머니들의 동냥젖을 먹으며 자랐고 어머니의 정성이 담긴 암죽을 먹으며 푸들어갔다. 그런데 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여난 탓인지 하루건너 앓음 자랑이였다. 오고가는 감기를 빼놓지 않았고 설사요 페염이요 하며 의원집문턱이 다슬게 드나들었다. 의원집에 호구를 붙인다고 또 마을사람들 말밥에 오를가봐 어머니는 나를 둘쳐업고 남의 눈을 피해  버들방천속으로 해서 아래마을 의원보러 다니군 했다. 너무 자주 다닐 때는 버들방천속에서 서성거리며 날이 어둡기를 기다려 마을에 들어서군 하였다. 내가 여섯살때에 한번은 내가 잃어져 마을사람들이 일떠나 나를 찾은적이 있었다. 그날따라 마을의 큰 대돌에 물이 넘치게 흘러들어왔다. 어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이 아들이 대돌에 빠졌는가 하여 생사를 불문하고 선참으로 가슴을 치는 대돌에 뛰여 들어 정신없이 나를 찾아헤맸다. 나의 주검을 찾아내는 날에는 어머니도 물에 빠져 죽겠다고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는 대돌을 따라 사품치는 해란강에까지 뛰여들어 나를 찾겠다는것을 마을사람들이 모여들어 어머니를 잡아끌며 겨우 말려냈다. 그날밤 어머니는 울음으로 날을 새웠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내가 다 큰 후에 작은 어머니가 여러번이나 나한테 가만히 들려준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남다른 정성을 다 한 엄마가 아니면 그렇게 병약했던 네가 이 세상에 살아있었을지도 모른다. 엄만 너 하나만 믿구 살아오셨다. 그러니 너 이후 엄마 은공을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다. “비천한” 농민으로서의 나의 부모는 나에게 우월한 사회환경과 재부를 안겨 주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필생의 정력과 심혈로 하나뿐인 아들을 이만큼 키워주신 분들이였다. 내가 이 세상에 태여날 때에는 어머니가 나의 생명의 태줄을 끊어주었지만 내가 북경에 남아 부모님들이 고향에서 외로히 세상뜨실 때에는 내가 효도의 정감을 끊게 될것이니 이는 내 평생의 영원한 아픔으로 남게 될것이다. 그러면 나는 스스로 불효자식이란 마음의 멍에를 지고 고통스레 살아가게 될것이 였다. 나는 사촌형의 편지를 받고 여러날 고민했다. "그래도 발전하자면 여러모로 조건이 좋은 북경에 남아야 한다. 작은 늪에서는 큰 고기가 자랄수 없다. 드넓은 바다가 나의 수영장이다."고 "출세"가 목소리를 높히면 "효도"가 "그래 너의 출세를 위해 평생을 너를 위해 아글타글하신 부모들의 가슴에 피눈물이 고이게 할거냐? 효성이 지극하면 북두칠성도 굽어본다 했다. 개구리가 되였다고 올챙이때를 잊지 말아라."고 반박했다. 나의 머리속에서 "출세"와 "효도"가 며칠을 두고 론쟁했다. 나중에는 결국 "효도"가 이겼다. 고민끝에 아쉽지만 학교에, 북경에 남으려던 생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출세와 효도를 모두 가질수가 없는 현실에서 도덕적 선택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나의 장래보다도 우선 량심이 있는 인간이 되고 싶었고 은혜를 아는 자식이 되고 싶었다. 평생 하나밖에 없는 이 아들을  믿고 사시는 부모들 가슴에 한을 박을수 없었고 마음에 피눈물이 고이게 할수 없었다. 나 하나를 "희생"하면 부모님들도 의탁할 곳이 있고 약혼녀도 더는 인생의 풍파를 겪지 않겠는데 나 하나가 잘되겠다고 효도에 못을 박고 도덕을 말아 먹을수는 없는 일이였다. 내가 입을 꾹 다물고있었기에 동학들은 졸업할 때까지도 리용식선생님이 나와 하신 담화를 감감 모르고있었다. 아니, 지금까지도 동학들이 거의 모르고있다. 일부 학생들이 북경에 남자고 앞뒤로 뛰여다닐 때에 내가 학교에서 남으라는것도 사절하고 "멍청이짓"을 하고 돌아왔다면 동학들이 믿지도 않을것이였고 받아들여지지도 않을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내가 연변에 돌아와 일자리를 배치받았으나 집이 없어 한동안 부모님들을 모셔 오지 못했다. 대신 우리는 주일마다 고향에 찾아가 위안을 드렸고 박봉을 잘라 식량대와 약비를 대드렸다. 이듬해에 20평방메터도 안되는 집이라도 차려져 시내에 모셔오려 했으나 아버지는 편찮은 몸으로 비좁은 집에 들어가 자식들한테 페를 끼치지 않으려 하셨고 어머니도 정든 농촌을 떠나기 싫어하셨다. 아버지가 지병으로 고향 마을에서 세상을 뜨셔서야 어머니는 어쩔수 없이 연길시에 들어오셔 우리와 함께 이곳저곳 여러 차례 이사하시며 10여년간 생활하시다 80여세에 세상을 뜨셨다. 마지막 몇해는 치매에 시달리며 고생하시기도 하였다. 그 10여년간 여러번 이사하며 시어머니를 모시고 애 둘을 키우느라 마음씨 고운 안해가 많은 고생을 했다.     아버지가 세상뜨셔부터 나는 해마다 청명과 추석이면 안해와 함께 산소에 다녀 왔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시자 어머니의 골회를 아버지산소곁에 모셨다.     1994년 11월, 조선 해당부문의 초청에 의해 부주필이였던 내가 연변일보사 조선방문대표단 부단장 신분으로 평양에 방문갔을 때 공교롭게도 어머니 3년제를 맞게 되였다. 나는 갖고 갔던 과일, 사탕, 과자 등속과 조선의 해산물로 평양 고려호텔 22층 침실방에 풍성한 제상을 차려놓고 제를 지냈다. 령험하신 어머니 혼이 들어와 상을 받으시라고 북쪽창문을 열어놓고 자신의 귀중한 청춘의 꽃잎, 생명의 꽃잎으로 나의 생명을 바꿔주시고 자신에겐 갸날프고 앙상한 꽃대만 남기셨던 고마운 어머니님께 감사의 절을 올렸다. 나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하느님께 빌었다. “자식을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평생 고생하시다 인제야 고향땅에 돌아오신 우리 어머니를 극진히 보살펴주옵소서!”     몇년전에 모아산양지쪽에 별장군이 들어앉게 되여 룡정시정부의 통지에 따라 부모들 산소를 부득불 옮기게 되였다. 사촌형과 누님들이 수십년동안 효도할대로 했으니 이 기회에 다시 옮기느라 말고 골회를 처리하라고 했다. 하지만 차마 그렇게 처리하기엔 어쩐지 불효감이 들어 아버지의 골회를 공경스레 하나하나 빠짐없이 파내여 연길시 장의관에서 화장하였다. 그리고는 골회함에 정히 넣어 어머니의 새  골회함과 함께 룡정시장의관에 한해 더 모셨다가 (묘소를 옮기게 한 룡정시정부측의 배치에 따라) 가문 어른들의 토론을 거쳐 이듬해 중양절에야 눈비를 맞으며 소하룡 합수목을 찾아 두분의 골회를 한줌한줌 정성스레 강물에 띄워 보냈다.     "전생에 가보지 못한 고향도 돌아보시고 세계유람을 하시라."며 골회를 띄이는 순간 갑자기 이왕지사들이 떠오르며 눈물이 왈칵 쏟아져나와 앞을 가렸다.     "아버지, 어머니 이것이 두번째 리별입니까? 이것이 영원한 리별입니까? 이 못난 자식이 지금 불효를 저지르고 있는것은 아닙니까?"     내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니 함께 갔던 둘째누님도 눈물을 흘렸고 매부와 사촌 형도 눈굽을 찍었다. 손꼽아보니 장장 32년간 부모님산소에 다녀왔었다. 우리는 주위사람들로부터 효자, 효부라는 칭찬을 많이 듣기도 했지만  지금 돌이 켜보면 많은 자식들처럼 왜 부모님들 생전에 더 잘해 드리지 못했던가고 후회되며 가슴이 알알해난다. 부모님들이 모두 세상을 뜨시고 내가 사업에서 일부 좌절을 겪었을 때에 “당시 내가 학교의 의도대로 북경에 남았더면 지금쯤 어떻게 되였을가?”는 허황한 생각을 굴려보기도 했었다. 후에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친구들과 동사자들은 거의 모두 “그때 참  착오적인 결정을 했었다.”고 맹랑해하고 나무람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지방에 돌아온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출세와 효도의 갈림길에서 자식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할뿐이다. 그런데 북경에 남고싶었던 마음이 아직도 어느 한 구석에 남아있는지 몇십년후에도 내가 북경에서 사업하거나 북경으로 전근해가는 황당한 꿈을 종종 꾸기도 했다. 자기를 낳아키운 부모한테도 효도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혈연관계가 없는 당과 국가를 위하여 한맘한뜻으로 충성할수 있겠는가. “꼬부랑나무가 산을 지키고 못배우고 못난 자식이 부모곁을 지킨다.”는 격언이 있다. 효도를 위하여 잠시 로 되는 것도 인간의 도덕이고 량심이라 하겠다. 물론 그 가 본인의 발전과 전도에는 영향을 끼칠수도 있겠지만.                           2017년 6월
48    회중시계로 일어난 풍파 댓글:  조회:1732  추천:47  2011-06-15
회중시계로 일어난 풍파 허룡석 먹고 입고 쓸것이 보다 풍요로와진 지금은 회중시계를 귀물로 취급하는 사람이 별반없다. 그것나마 이젠 아주 도태되였는지 백화점에서도 보기 힘들다. 하지만 지난 70년대 말까지만 해도 회중시계는 차고 싶어도 마음대로 찰수 없는 귀물이자 사치품이였다. 150여호되는 우리 마을에도 공사에 다니거나 합작사에 다니고 교원으로 사업하며 로임타는 몇분이 손목시계나 회중시계를 갖고 있을뿐 땅을 뚜지는 농민들이 회중시계를 산다는것은 지금 로임족들이 승용차를 사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였다. 그런데 그때 내가 생활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아버지께 효도한다고 북경에서 회중시계를 사보낸것이 마을에서 풍파를 일으킬줄으야. 지금도 아버지를 곤혹스럽게 했던 그때 일을 떠올리면 마음이 알알해난다. 지난 세기 70년대말은 전국이 대동란의 <문화대혁명>을 금방 결속 지은터라 지방에서는 일용품과 부식품이 아주 결핍하였다. 상대적으로 수도 북경은 전국의 그 어느곳 보다 나았다. 그런 관계로 내가 중앙민족대학에 입학한후 원래 사업하던 공사의 간부들과 고향사람들, 친척들로부터 이런저런 물건 사달라는 부탁을 적지 않게 받아왔다. 한번은 입학 첫학기에 남의 부탁을 받고 물건사러 왕부정백화상점에 간적이 있었다. 나는 백화점매장을 돌아보다가 우연히 회중시계를 진렬해놓은 매장을 지나게 되였다. 회중시계를 보니 아버지가 떠오르면서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평범한 농사군으로 살아오신 아버지는 일생동안 시계라곤 차보지 못하셨다. 그래서인지 회중시계를 아주 부러워하셨다. 한번은 우리 집에 마실오신 이웃마을 한 로인의 회중시계를 받아쥐고 이리저리 만져보시고는 시간이 잘 맞냐 값이 얼마냐고 물으시며 놓기 아쉬워하는것을 본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회중시계를 살 형편이 못되였으므로 마음 아픈대로 그렇게 지나갔다. 그런데 멀리 집을 떠나 수도 백화점에서 회중시계를 보고나니 나의 마음은 다시금 설레였다. 아버지 생전에 꼭 저 회중시계를 사드리고 싶었다. 값을 보니 가장 눅은거라야 25원이였는데 그것도 길림에서 만든것이였다. 은빛케스로 만들어진 시계는 꽤나 정교해보였다. 그때 나의 호주머니에는 대학에 간다고 친척들과 마을분들이 한푼두푼 쥐여준 돈이 100원가량 있었다. 그 돈은 어쩌면 내가 대학졸업할 때까지 아껴 써야 할 밑천이였다. 집에서는 돈을 부쳐올 여력이 없었다. 시계를 사느냐 마느냐 그 자리에서 한참 바장이다 나는 끝내 발길을 돌리고말았다. 아직 돈 쓸 일이 많을텐데 하고 생각하니 주저되지 않을수 없었다. 이후 사업에 참가하여 첫 로임으로 사드리자 하고 서운한대로 학교로 돌아왔다. 하지만 잠자리에 누워서도 그 정교한 시계와 년로하신 아버지 얼굴이 번갈아 떠오르며 좀처럼 잠을 이룰수 없었다. 이미 70고개를 넘기신 아버지가 늘 건강하실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몇년 공부하는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알랴. 일이 생겼을 때 후회하지 말고 건강하실 때 몇년만이라도 즐겁게 해드리자. 돈이야 없으면 안쓰면 되지. 반달후 또 남의 부탁으로 그 백화점에 다시 갔을 때 나는 용단을 내리고 그 회중시계와 시계줄을 샀다. 그길로 우전국에 가  나무함에 잘 포장하여 편지와 함께 집에 부쳐보냈다. 일주일후 녀동생한테서 편지가 왔다. “…아부지는 그 시계를 받고 너무 반가와 그날 저녁에만도 몇번이나 꺼내 보셨는지 모르오. 이튿날에는 밖에 나가셔 보는 사람마다 시계를 꺼내보이시며 아들이 북경에서 부쳐왔다고 자랑하셨소. 집에서 시계를 꺼내보실 때면  또 ‘걔가 돈이 없겠는데 이 귀한걸 사보내다니’ 하고 마음 아파하시며 공돈을 팔았다고 나무람하시기도 하오. 하지만 아부지 그렇게 반가와하시는 걸 보면 잘 사보낸 같소. 오빠 쓸 돈이 모자라겠지만…” 녀동생의 편지를 받고나니 나는 안도의 숨이 후 나갔다. 아버지가 그처럼 반가와 하신다니 얼마간의 효도를 한것 같아 기분도 즐거웠다. 나는 이듬해 여름방학에 집으로 나오게 되였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록 아버지가 시계를 꺼내보시는 양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나는 궁금해서 어느날 녀동생을 보고 가만히 물었다. “어째 아부지 시계 보시는 양이 없니?” 녀동생은 머밋거리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혹 잃었거나 고장난거니?” “아니…저…” “좀 제대로 말해봐라.” “아부지 절대 말하지 말라 하셨는데…아부지…그 시계를 팔아버렸소…” “뭐라구? 그 시계를 팔았다구? 왜? 돈이 바빠서?”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그 시계때문에 말썽이 생겨서…” 아버지가 그 시계를 받고 너무 반가와 남들과 자랑을 하시다보니 온 마을 사람들이 그 일을 다 알게 되였다. 그런데 년말에 생산대에서 보조호를 토론을 할 때 그 시계때문에 풍파가 일어났었단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년로하시고 녀동생도 병때문에 일을 제대로 못하다보니 내가 대학에 간후 우리 집은 생산대의 보조대상이 되였다. 그해 겨울에도 보조대상을 토론할 때 일부 사원들이 우리 집을 계속 보조호에 넣는것을 반대하더란다. 보조대상이 어떻게 그 비싼 회중시계를 차고 다닐수 있느냐 하는것이 주요 리유였단다. 생각밖으로 그중에서도 나와 가장 가깝게 친하던 친구의 어머니가 제일 반기를 들고 나오더란다. “하나뿐인 아들이 집도 돌보지 않구 대학에 갔으문 됐지 왜 우리가 그 뒷시발 들어야 함둥? 그렇게 구차하다는 집에 분이 고급시계랑 차구 다닌다는데 말이나 됩둥? 이 동네 보조를 안받아두 시계차구 다니는 분이 몇이나 있습둥?” 아버지는 송곳방석에 앉은 기분이였단다. 너무 미안하고 송구스러워 아버지는 연신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이제부턴 우리를 보조대상에서 빼소. 보조호에 넣지 마소…” 그래도 다수 분들이 나서 “다 빤이 보는 일인데 용섹이 무슨 돈이 있어 시계를 사보냈겠느냐. 효도하느라 그랜거지. 그집 형편을 모두 모르는것두 아니니 그냥 보조호에 넣자.”고 하여 그해에도 보조호에 들어가게 되였단다. 보조호에 들면 한해동안 식량대금을 면제받을수 있었다. “아마 오빠만 대학에 가고 그 집에서 아들 몇이라도 하나도 대학에 못가니 질투나 더 하는것 같습데…” 녀동생이 여간 분해하지 않았다. 그 풍파가 있은후 아버지는 보조를 받으며 시계를 차고 다니시기 너무 미안하게 생각되여 어느날엔가 언제부터 그 시계를 욕심내던 대장의 아버지에게 23원에 팔아 그 돈을 몽땅 생산대에 식량대로 들여놓으셨단다. 나는 녀동생의 말을 듣고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보조 주기를 반대했다는 사원들도 나무람할수 없었다. 제 공부하러 가면서 다른 분들한테까지 페를 끼친다는것은 참 미안한 일이였다. 하지만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어머니가 나서 제일 반대하더란 이야기는 많이 섭섭하게 들렸다. 생산대의 보조를 받는것이 미안하여 애지중지하시던 시계를 파신 아버지심정은 얼마나 착찹하셨을가. 나는 평생 시계를 차보시지 못한 아버지 원을 꺼드리려는 생각만 했지 그로하여 일어날 풍파는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아버지를 생각한다는것이 되려 심려만 끼쳐드린 셈이다. 후, 학교를 졸업하고 사업에 참가한후 다시 사드리지. 하지만 내가 졸업하기전에 아버지는 중풍에 걸리셨다. 우리가 결혼한후 우리 부부의 로임이 농촌에 계시는 부모님들의 식량대와 약값으로 들어가고 아이까지 키우다보니 다시 회중시계를 사드릴 여유가 없었다. 80년대초에 이 회중시계사건을 종자로  나는 짬짬이 <석순령감의 숙원>이란 단편소설을 써 연변인민출판사에서 꾸리던 <아리랑>문학지 15기에 발표하여 원고료 85원을 받았다. 회중시계 세개반을 살 돈을 번것이다. 하지만 더는 회중시계를 살 필요가 없게 되였다. 아버지는 전해에 이미 세상을 뜨셨다.  아아, 회중시계를 제대로 차보시지도 못하고 쓴소리만 들으시다 세상뜨신 아버지… <연변녀성> 2011년 제2기
47    작가는 갔으나 덕성은 남아 댓글:  조회:1788  추천:45  2011-06-08
ㅡ고 류원무선생을 추모하여 기축년 새해를 코앞에 둔 2008년 12월 7일, 이날은 우리 조선족문단의 우수한 원로작가이시며 다산작가이신 류원무선생이 너무도 갑작스레 우리와 영결한 문단의 비운의 날이였다. 류원무선생은 간암으로 확진된지 한달도 못되여 총망히 우리곁을 떠나셨다. 나와 함께 호북성에 가셔 연변작가협회문학상 후원자금을 유치하시고 돌아오신후 한달도 못되여 우리와 영결하신것이다. 그이는 죽음앞에서도 그처럼 태연자약하셨다. 그이는 이 세상에 고결한 정신 령혼기사의 마지막 웃음을 남기시며 조용히 저세상으로 가셨다. 한 작가협회 임직원은 <나는 작가들이 이처럼 위대한줄 다시 한번 깊이 느꼈다. 자기가 간암후기로 앓고있어 이제 영원히 눈을 감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것는 뻔이 아시면서도 어쩌면 그처럼 태연하고 소탈하실수 있었을가. 참 너무나 깨끗하고 멋지게 인생을 마치셨다. >고 감탄해마지 않았다. 1 2008년 10월 10일, 내가 중앙민족간부학원에서 중국작가협회제9차전국소수민족 문학<준마상> 종심평의에 참가하고 있는데 종래로 보지 않던 낯선 지방전화가 핸드폰에 들어왔다. 회의중이기도 하려니와 지금은 사처에서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아내는지 개구쟁이딱친구인듯 “출국 안하시겠소.”, “회의에 안오시겠소.”, “기념품을 안사시겠소.”, “명인책에 안들어 오시겠소.”, “광고를 안하시겠소.”하는 등 내용의 간녹일듯한 성가신 낯모른 전화들이 시도때도 없이 쓸어들어오는 때인지라 나는 개의치않고 계속 회의에 열중했다. 그런데 얼마후 그 낯선 지방전화가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듯 련속 핸드폰에 들어왔다. 받지 않으면 시끄럽게 계속 울려올것 같기에 나는 조용히 복도에 나가 핸드폰을 열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연변작가협회 허주석이십니까?...” 전화에서는 사나이의 석쉼한 한족말소리가 울려나왔다. “녜, 그런데는요?...”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아, 반갑습니다. 저는 호북성 양번시에서  한 술회사 경리로 있는 류청이라하는 청년입니다. 저도 연변에서 나서자란 조선족인데 어려서부터 한족학교를 다니다보니 조선말을 잘 못합니다…” “녜? 조선족이라구요? ...” 주체민족이 북적대는 나라의 한복판 중원지대에 조선족젊은이가 기업가로 있다니? 나는 핸드폰을 오른손에 바꿔쥐였다. “제가 지난 국경절에 연변에 다녀왔는데 연변작가협회가 경제적으로 많이 어렵다고 하더군요. 많은 문학상들이 한국지원에 의해 꾸려진다던데  조선족으로서 조선족문학사업을 돕고싶은 마음에 이렇게 불문곡직 전화를 걸었습니다. 지금 저희 기업에서 거금을 들여 중국보고문학상도 협찬하고 있거든요…” “녜? 뭐라구요? 조선족문학사업을 돕겠다구요?...” 나의 귀가 번쩍 열렸다. 그러잖아도 할일은 많으나 자금이 말라 양복에 넥타이를 맨 점잖은 거지가 되여 해마다 사처에 손을 내밀고 구걸하는판인데 주동적으로 우리를 돕겠다는 기업인이 나서니 귀맛이 당기지 않을수 없었다. “구체문제는 허주석님을 한번 만나뵙고 의논할가 하는데요.” 나는 그의 신분과 신원을 다시 확인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지금 북경에 와 회의에 참가하고 있거든요. 이렇게 하면 어떨가요? 11월 중순쯤 중국작가협회에서 귀주성에 가 <제9차전국소수민족문학준마상>시상식을 하게 되는데 그때 제가 호북에 잠깐 들려 의논하면 어떨가요?” “녜, 그게 좋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는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그때 다시 만납시다. 안녕히.” 핸드폰을 내리면서 나는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였다. 나젊은 조선족기업가가 조선족이 희소한 중원지대에서 큰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는것에 놀라왔고 주동적으로 조선족문학사업을 돕겠다고 나서는 기업가가 있다는것이 기쁜 일이 아닐수 없었다. 하지만 큰 기대는 걸지 않았다. 기업인들이 도와나선다해도 기껏해야  2ㅡ3만원이 고작이였기 때문이였다. 그래도 <벽돌집>을 지을수는 없어도 <초가집>은 지을수 있을것 같아 사절할수는 없었다. 며칠후 <준마상>평의가 고조에 오르고 있을 때에 낯선 핸드폰전화번호가 울려왔다. 나는 혹시 호북성 조선족기업가의 전화가 아닐가싶어 주저없이 전화를 받았다. 아니나다를가 바로 그의 전화였다. “허주석님, 안녕하세요? 호북에 있는 류청입니다. 우리 기업에서 협찬하는 <제3차중국보고문학상> 시상식이 11월 8일에 이곳에서 열리게 되는데 그때면 우리 동사장님도 모두 만나보실수 있게 될겁니다. 보고문학상시상식에 중국작가협회 령도들도 참가하게 되는데 허주석님도 그 시상식에 참가하실겸 6일쯤 이곳에 오실수 없겠습니까? 우리 호북성작가협회 황주석님도 허주석님을 잘 아시던데요.. 왕복 비행기표값, 호텔주숙비 등 모든 비용은 저희들이 담당하겠습니다.” “11월 6일에요?...” 좀은 뜻밖이였다. 그때 우리는 연변작가협회에서 처음으로 주관하게 되는 <제2회김학철문학상> 시상식날자를 11월 5일로 잡아놓고 한창 준비중에 있었다.  “그때면 다른 일들이 좀 있긴한데… 하여간 그때에 떠나는걸로 힘써볼게요…” “그래요? 반갑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시상식대회의 공식 초청장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저, 그런데 한가지 부탁이 있는데요…” “무슨 부탁이신지 말씀하십시오. 제가 할수 있는 일이면…” “다름아니라 연변작가협회에 저와 한 성씨를 가진 작가 한분이 계신데 오실 때 같이 오실수 없겠는가 해서요…” “한 성씨라구요? 류씨성을 가진 분이 몇분 있는데 어느 분을 말씀하는건지요?” “류원무 그분을 말입니다.” “녜? 그분과는 어떻게 아시는 사이인가요?” “녜, 전에 한마을에서 사시던 분인데 잘 아는 사이입니다.” “녜, 그렇군요, 그런데 그분이 금년에 두번 수술하셔서 먼길을 떠날수 있겠는지 모르겠군요, 제가 연변에 돌아가면 그분과 잘 의논해 보지요..” “녜, 고맙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저으기 의아쩍었다. (같은 성씨라니, 류원무선생과 친척사이인가? 류원무 선생도 종래로 호북에서 기업을 하는 친척이 있다는 얘기를 하신적이 없었는데.) 북경에서 <준마상>평의를 원만히 마치고 돌아온 이튿날로 나는 류원무선생댁에 전화를 걸었다. “류선생님, 호북에서 기업을 하는 류청이라는 경리를 아십니까? 그분이 연변작가협회를 돕고싶다며 전화를 걸어왔던데요, 전에 선생님과 한 마을에 살았다며  잘 아는 사이라던데요?” 류원무선생은 소탈하게 허허 웃으셨다. “그런 아는 사람 있어요. 허주석이 시간이 있다면 지금 내 작가협회로 건너가지요.” 나는 류원무선생과 무릎을 마주하고 앉아서야 호북에 있다는 류청이 바로 하나밖에 없는 류원무선생의 아드님인줄 알고 깜짝 놀랐다. 또한 류청이 나한테 전화하게 된 경과도 알게 되였다. 지난 국경절기간에 류청은 약혼녀와 함께 반년도 안되는 사이에 두번씩이나 수술을 한 아버지가 걱정되여 아버지를 뵈러 먼 호북에서 달려왔다. 아버지는 류청에게 지난 4월에 작가협회에서 전체 직원들을 조직하여 신체검사를 할 때에 페암초기가 발견되여 제때에 수술을 받을수 있었기에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있게 되였다며 작가협회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아들도 아버지가 고맙게 생각하는 작가협회에 감사함을 금할수 없었다. 아들이 이젠 자기가 경영하는 기업도 괜찮게 되여가고 있으니 뭔가 고향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싶다며 연변에 희망소학교 같은걸 꾸리면 어떻겠는가고 했다. 이에 아버지는 주저없이 그래도 교육은 중시하는 부문과 관심하는 사람이 많다며 지금 작가협회가 매우 어려우니 작가협회를 도와 조선족 문학사업을 춰세우는것이 급선무라며 작가협회상황과 조선족문단의 정황을 아들에게 들려주었다. 작가협회가 살아야 문단이 산다는것이 류원무선생의 고집이였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작가협회를 돕기로 하였다. 류원무선생은 이 일은 직접 작가협회 허주석과 의논하되 절대 류원무의 아들이란 얘기를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작가협회를 도우려는것이 자기 마음일뿐 그 어떤 명예를 위해 좋은 일을 한다는듯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다는것이였다. 그런데 국경절기간 내가 철응주석을 단장으로 하는 중국작가대표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가 제1회한일중동아세아 문학포럼에 참가하고 있을 때라 류청은 나를 만나지 못하고 호북에 돌아가게 되였다. 그는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을 잊지 않고 사업여가에 북경에 있는 나한테 전화를 걸어 온것이였다. 나는 감격되여 류원무선생의 손을 굳게 잡았다. “고맙습니다. 작가협회를 위해 참 좋은 일을 하셨습니다. 조선족문단을 위해 큰 일을 하셨습니다. 작가협회를 대표해 충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뭘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지만 조건이 주어지지 않아 못하고 있을뿐이지 작가들의 마음을 꼭 같을겁니다. 작가협회를 돕는것은 오랜 회원으로서 으례 해야 할 일이지요. 허주석도 이 일이 성사되기전에는 누구한테도 말하지 마세요..” 좋을 일을 하시면서도 티를 내지 않고 남을 낮추어말하지 않는 작가적 고매한 덕성을 갖춘 류원무선생의  말씀들은 나의 페부를 뜨겁게 달구었다. 나는 그이의 건강을 념려하며 함께 호북에 다녀올 일을 의논하였다. 11월 1일 저녁 9시경, 내가 집에 있는데 류청한테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허주석님 일이 좀 변화가 생겼네요, 아마도 3일쯤 들어오셔야 할것같습니다. 우리 동사장님이 출국하시게 되여 주석님이 6일에 들어오시면 동사장을 만나볼수 없게 되네요, 그래도 동사장이 계실 때 오셔야 일이 순조로울뗀데…” “아하. 어떻하죠? 5일에 다른 한가지 문학상 시상식을 갖기로 하고 이미 다 포치했는데…” “원래의 약속시간에 맞춰 그쪽일을 배치하셨을줄 알고 있습니다만 동사장이 귀국하신후에 오시게 되면 년말결산전에 예산안을 내놓기 어렵게 되네요. 하신다는 그 문학상시상식도 아주 중요하시겠지만  좀 뒤로 미룰수는 없겠습니까?” 아하, 일이 참 딱하게 되였다. 3일에 들어가지 않으면 그쪽일이 금년내에 성사되기 어렵고 이미 다 포치해놓은 김학철문학상시상식도 대밑에 와 미루기도 어려운 일이였다. 그래도 이쪽일은 다 지어진 밥이여서 괜찮지만 그쪽일을 떼우지 말고 하루빨리 성사시키는것이 먼저 해야 할 큰 일이였다. 어렵기는 해도 이쪽 문학상을 며칠 미룬다하여 크게 랑패될 일은 없었다. 나는 고려끝에 김학철문학상을 잠시 뒤로 미루기로 하고 해당분들한테 량해를 구하는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나는 주당위선전부책임자와 사회자 및 축사를 준비시킨 분들한테 일일이 전화를 걸어 특수상황이 생겨 시상식을 10일 이후로 미루어야겠다고 설명하는수밖에 없었다. 2 11월 3일 아침 7시 40분, 나와 류원무선생은 아침 일찍 서둘러 북경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10시에 북경에 도착하여 오후 1시 30분에 무한으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게 되였다. 나는 비행기에 오른후 기내식으로 얼마든지 점심을 에때울수 있었으나 몸이 편찮은 류원무선생이 아침식사도 설치셨다기에 점심때가 되자 나는 그이를 휴계실식당으로 모셨다. 류원무선생은 별말씀없이 뒤따라오셨다. 그이가 밀국수를 주문하시기에 나도 그대로 따랐다. 그런데 그이는 절반도 안드시고 저가락을 내려놓았다. “왜 그렇게 안드십니까? 입맛이 틀리시는가요? 다른걸로 주문할가요?” “그만 두세요. 밀국수면 소화가 괜찮겠는가 했는데 그것도 그저 그렇구만.” “기내식이 일을걸 알면서도 선생님때문에 여기에 모셨는데 그렇게 안드시면 어떡합니까?” “그랬어요? 그런걸 난 또 허주석이 배고파 그러는가 해서 군소리없이 따라왔지.” 후에 알고보니 류원무선생은 그때 벌써 암세포가 이미 간장에 확산되여 소화를 저애하고 있었지만 그때는 그런줄을 모르고 있었다. 류원무선생은 간부위가 무겁고 부딧하다며 이제 돌아오면 간장을 검사해봐야겠다고 하셨다. 나는 속으로 은근히 걱정스러웠다. 이미 페암수술을 하신 분인데 혹시… 나는 점심값을 치르시겠다고 서두르는 그이를 밀막았다. 참 고지식하고 후더운 분이셨다. 우리는 오후 제시간에 비행기에 올라 세시간후에 무한에 도착했다. 류청이와 그의 약혼녀가 공항에 마중 나와있었다. 머리를 막깎고 작달막한 키에 다부지게 생긴 류청은 아버지를 보자 어린애마냥 달려와 아버지를 얼싸안았다. 이제 만나본지 한달밖에 안되는데 저렇게 반가울수가. 부자지간의 풋풋한 혈육적 인정미가 푸근히 안겨왔다. 약혼녀는 이쁘장스럽고 호리호리한 사천처녀였는데 류원무선생의 짐을 받으며 말끝마다 사글사글하게 아버지라고 하는데 참 귀염상스러웠다. 우리는 류청이 몰고온 승용차에 앉아 그들 술기업이 자리잡고 있는 양번시로 향했다. 양번(襄樊)시는 지난날의 양양(襄阳)시와 번성(樊城)시를 합병하여 이루어진 지구급 도시이다. 우리 나라 복지에 자리를 잡고있는 양번시의 면적은 1.97평방킬로메터로서 연변땅의 절반도 안되지만 인구는 600만에 달하며 시구역 인구는 220만명에 달한다. 양번시는 전국력사문화명성, 중국매력도시, 국가원림도시, 중국우수관광도시로 명명되여 있다. 양번시는 력사적으로 상인들이 운집하고 서생들이 활개치던 곳이며 군사가들이 반드시 쟁탈하는 군사요충지였다. 중국의 고전명작 <삼국연의> 120회중32회 이야기가 이곳에서 발생된 일이라 한다. 이곳에는 지금도 제갈량의 고거와 활동지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호북성에서 무한다음으로 가는 큰 도시인 양번시는 무한에서 북쪽으로 400여 키로메터 떨어져있었다. 호북에서 처음으로 아버지를 모시게 된 류청은 흥분에 젖어 젊은이의 패기로 180키로메터 시속으로 차를 냅다 문대고있었다. 자기는 어제밤 한잠도 바로 자지 못했단다. 오늘 아버지를 맞을 생각을 하니 도무지 잠이 오지 않더란다. 이 나이를 먹어도 자기는 아버지와 응석도 잘 부리는데 때론 아버지를 형님이라 한다며 하하하 소리내여 웃었다. 류원무선생은 가타부타 말씀없이 그저 시무룩히 웃으실뿐이였다. 문턱을 넘어서지 않은 며느리가 아버지, 아버지하고 개여올리며 귤을 발라드리기도 하고 쵸콜레트를 쥐여드리기도 했다. 한족처녀가 조선족 <시아버지>를 곰살궂게 대하니 곁에서 보기에도 좋았다. 양번시에 거의 도착할 무렵 류청의 핸드폰이 자주 울렸다. 들어보니 저녁연회를 어디에다 배치했는가 하는 문의내용들이였다. 류청은 핸드폰을 거두면서 자기수하 경리들이 알리지도 않았는데 아버지가 오신다는 소식을  얻어듣고 서로 연통하며 지금 저마다 저녁연회에 참석하겠다고 저런단다.  아직도 비가 자주 내린다는 남방의 양번지구는 습해서인지 해질녘인데도 산과 들에 안개가 얄포름히 끼여 가시도가 많이 떨어졌다. 이곳은 우리보다 해가 많이 길어 저녁 6시가 되여도 어두워지지 않았다. 우리는 어슬녘에야 우리의 주숙을 잡았다는 한강호텔에 이르렀다. 4성급인 한강호텔은 랑번시에서 가장 호화로운 호텔이란다. 이곳에는 한국의 한강과 꼭 같은 이름을 가진 강이 시내 한가운데를 꿰지르며 흐르고 있었는데 호텔도 강 이름을 따라 지은것이였다. 후에 식사할 때 한 신문사사장의 말에 의하여 한국의 조상들이 이곳에서 한국에 건너가 이곳의 강과 지방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다 썼는데 한국의 한강 발원지와 한강 끝자락 지방이름이 이곳 이름과 꼭 같다는 력사기재가 있다고 했다. 나는 그것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를 믿을수가 없었다. 그 사장은 또 중국의 한 학자가 이러한 내용의 론문을 잡지에 공개발표하였다가 한국정부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고 했다. 류청은 아버지와 나를 응접실이 딸리고 화장실 두개, 침실이 갖춰진 널찍한 스위트룸(套间)에 각각 들게 하였다. 그들에게 큰 부담을 끼치는것 같아 나는 표준방에 들어도 괜찮다고 했으나 고향 지도자가 오셨는데 의례 이런 방에 모셔야 한다며 나를 그예 밀막았다. 우리는 호텔에서 대충 정리하고 그들이 배치한 환영연회장으로 옮겨갔다. 환영연회를 베푼다는곳은 양번시에서도 이름있는 한 술집에 배치했는데 널직한 대청에 큰상 세상이 준비되여 있었다. 원래는 주변의 부총경리와 판공실 일군들로 한상을 준비시켰으나 기층 각 부문의 경리들이 소식을 듣고 자발적으로 몰려와 판공실에서는 별수없이 세 상으로 늘였단다. 류청이 부문경리들은 후에 보자고 극구 제지했으나 총경리의 아버지가 오시는데 자기네가 어찌 빠지겠느냐며 <령도의 지시를 어기며> 이렇게 부득부득 모여왔단다.  환영연회는 자별나게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진행되였다. 연회에 참석한 크고작은 경리들이 하나하나씩 술잔을 들고 류원무선생곁에 와 경의를 표하며 술을 권하였다. 그들 남녀를 물론하고 모두가 <류총경리의 아버지면 자기들 아버지> 라며  <아버지, 아버지>하고 친절하게 부르는 소리가 입에서 떨어질줄 몰랐다. 류청이 짭디짧은 반년사이에 얼마나 큰 성과를 따내고 위망이 높았으면 민족이 다른 임직원들이 저럴듯 친절할가싶었다. 류원무선생과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그들은 나한테도 륜번으로 술을 권하며 우수한 조선족인재를 양성하여 자기들한테 보내주어 고맙다며 류청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여러 경리들이 절반쯤 륜번으로 술을 권한후 류원무선생이 술잔을 들고 일어섰다. 그러니 여러 경리들은 아버지가 자식들한테 술을 권하는데 일어설 필요가 없다고 법석이였다. “우리 류청에 대한 여러분들의 지지와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류청이가 사업에서 자그마한 성과라도 거두었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의 지지와 협력과 갈라놓을수 없습니다.  금후에도 계속 류청을 지지해주고 잘 협력해줄것을 부탁드립니다.” 세상에 앉은 여러 남녀경리들은 모두 일어나 박수로 감사를 표하고 나서  잔을 들어 굽을 냈다. 나도  류청고향의 <지방령도> 자격으로 잔을 들고 일어섰다. “류청의 사업을 힘껏 지지해주고 있는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부터는 양번시 인민들뿐만 아니라 연변의 류청 고향인민들도 자기의 아들과 그 아들이 운영하는 석화술기업을 지켜보고 있을것입니다. 류청이 보다 큰 성과를 따내고 석화술기업이 날로 번영창성하여 소속 임직원들의 돈주머니가 갈수록 두툼해지기를 기원합니다. 여기 앉은 여러 경리님들과 관리일군들이 머저 부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 경리들은 좋다고 또 일어서 힘찬 박수로 감사를 표하고는 잔들을 통쾌하게 굽냈다.  류원무선생도 나도 그날저녁 그들의 열성과 환대에 못이겨 평소보다 술을 퍼그나 더 마셨다. 이튿날부터 소속 각 부문별로 류원무선생을 초대하는 연회가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류원무선생은 몸이 점점 불편해져 응부하기 어려웠다. 연회에 참가하면 보통 서너시간씩 걸리는데 몸이 불편한 류원무선생에게는 큰 고역이였다. 간 부위가 아파나고 소화가 되지 않아 산해진미를 앞에 두고도 몇저가락 집지 못하고 수저를 내려놓고는 연회가 끝날 때까지 앉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들에게 여러 분들의 성의는 고맙지만 네가 나를 생각하면 이젠 연회를 그만두게 하라고 <사정>했다.  하여 류청은 각 부문의 연회배치를 밀막아버리고 끼니마다 소화가 잘 될수 있는 음식을 챙겨드렸다. 그래도 류원무선생의 식사량은 줄어들기만 했다. 우리는 류청의 안내로 그의 사무실에도 가보고 랑번시의 술판매회사들에도 가보았으며 양번시와 100여키로메터 떨어져있는  곡성현(谷城县) 석화진(石花镇)에 있는 술공장에도 찾아가 술생산과정을 돌아보기도 했다. 류청이 총경리로 있는 호북성 양번시 석화술유한회사는 138년의 력사를 가지고 있는 호북성에서 가장 오랜 술기업으로서 현재 600여명 임직원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오랜 기업도 시장경제의 충격을 이기지 못해 점차 내리막 길을 걷게 되였다. 기업을 춰세울 새로운 인재와 경영리념이 시급했다. 그때 류청은 중국기획연구원 객원교수, 중국기획협회 상무리사의 신분으로 전국각지를 돌아다니며 기업운영과 기획관리 등에 관하여 강의하고 있었다. 그가 광주에서 강의하고 있을 때에 우연히 석화술유한회사 동사장 조원량이 류청의 강의를 듣고 귀가 번적 열리게 되였다. 그는 한주일 사이에 네번이나 광주에 내려가 류청과 면담을 나누었다. 류청은 석화술기업에 대한 소개와 직면한 곤난을 듣고 단도직입적으로 석화기업의 병근원을 면바로 집어내고 <치료>방안을 제시하였다. 류청의 경영리념은  동사장을 깊이 흡인하였으며  눈앞이 환해지게 하였다. 진단을 옳게 해도 그 <병>을 치료할 의사가 있어야 했다. 동사장은 정중히 류청을 자기기업 총경리로  모실 의향을 내비쳤다. 류청은 일찍 <중국이동통신>, <하이얼>, <오량액>, <커룽>, <붉은 잠자리> 등 큰 기업들에서 사업한적 있었는바 양번시의 석화술기업은 그에게 있어서 소형기업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류청은 한 로인의 진정과 자기의 술기업에 한없이 애착하는 그의 경영인정신에 감동되여 고려끝에 동사장의 진정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2008년 5월 12일에 류청은 동사장의 손에서 초빙서를 받아들고 정식으로 석화술유한회사의 집행총경리에 부임하였다. 그날 오후에 있은 <석화 2008년 경영회>에서 그는 <취임연설>을  하였다. 브랜드경영, 시장정보, 판매경로개척, 기업정신, 기제세밀, 경영관리 등에 관한 그의 새로운 리념과 경영전략은 종업원들의 두눈을 휘둥그래지게 하였으며 기업소생에 신심을 가지게 되였다. 이날 사천 문천지구에서 대지진이 일어나는 같은 시각에 석화기업에서도 <소지진>이 일어났다. 종업원들은 새로운 총경리의 부임에 커다란 기대를 걸었으며 기업의 새 희망을 보게 되였다. 하지만 길은 순탄하지만 않았다. 일부 부문경리들은 하늘에서 난데없이 떨어진 이 불청객 <락하산병>을 근본 믿지 않았다. 자기들이 10년, 20년씩 술기업에서 실천하며 갖은 노력을 다해도 시장경제의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는데 술기업이란 근본 알지도 못하는 <외계인>이 뛰여들어 술기업을 춰세운다는것은 수탉이 알 낳으려는 주제넘은 일로 여겼다.  어떤 부문경리들은 그가 수백리씩 달려 아래에 내려가 정황료해를 할 때에도 물 한모금 권하지 않았고 담배 한대 건네지 않았다. 때론 시끄러운 일을 조작하며 의도적으로 그와 엇서기도 했다. 그래도 류청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자기의 경영리념대로 일을 밀고나갔다. 그는 부문경리들을 하나도 바꾸지 않고 원래의 인마를 이끌고 술판매시장이 갈수록 위축되고 있는 형편에서도 년간 술 판매량을 원래의 1.3억원에서 3억으로 제정했다. 사람들은 입을 딱 벌렸다. 기업가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있다. <작은 기업에서는 일을 만들고 큰 기업에서는 사람을 만든다.>, <일을 만드는 회사는 크지 못하고 사람을 만드는 회사는 작아지지 않는다.> 전세계적 상품경쟁을 관찰해보면 두가지 기업제품이 비슷할 때에 소비자들은 눈부신 광고전략에 마음을 두는것이 아니라 기업의 량심, 성심, 애심에 마음을 두는것이다. 오직 적극적으로 사회의 책임을 감당하는 회사만이 소비자들의 존중을 받을수 있고 사회의 인정을 받을수 있다는것이 류청의 견해이고 리념이였다. <기업은 사회의 공민으로서 반드시 상응한 사회의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고 인정한 류청은 부임되여 첫날에 첫번째로 한 일이 바로 사천 문천지진재해구에 20만원을 기증한것이다. 그의 기업은 양번시와 호북성에서도 가장 빠른 시간내에 가장 많이 기증한 기업으로 되여 대번에 성과 시 보도매체들과 당정부문의 중시를 불러 일으켰다. 양번시에서는 단오절이면 주민들이 대문에 쑥을 꽂는 전통적습관이 있다.  류청은 전체 직원들을 동원하여 숱한 쑥을 준비하였다가 단오절날 새벽 2시에 손전등을 켜들고 랑번시의 거리와 골목을 누비며 쑥을 꽂을수 있는 대문들에 모두 쑥을 꽂아놓게 하였다. 하여 단오날 아침 양번시의 천가만호에서는 석화술회사에서 보내준 자그마한 단오절선물을 받고 크게 감동되였다. 시민들은 석화술기업을 단단히 기억하게 되였다. 다른 기업에서 생각하지 못한 작은 선물로 사람들에게 무한한 신뢰와 감동을 주는 큰일을 석화술회사에서 한것이다. 석화술회사의 애심과 성심에 보답하고저 시민들은 분분이 석화술을 사 마셨다. 류청이 부임된 한달후 석화술기업의 판매량은 1500만원에 달하여 지난해 같은 시기보다 1.8배 늘어났다. 류청은 부임된 두달사이에 만키로메터를 달리며 200여명 가맹상들을 찾아 정황을 료해하였다. 석화의 여러 판매구역, 류통시장, 부문회사, 판사처를 돌아다니며 종업원들의 사업환경, 생활정황. 판매정황을 알아보며 문제점들을 찾아내여 하나하나 해결하군 했다. 류청의 새로운 경영모식과 새로운 경영리념에 따라 석화술기업은 달마다 놀라운 속도로 발전되여 치렬한 시장경제속에서 침체되고 내리막 길을 걷는 다른 기업들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종업원들의 로임봉투도 갈수록 두터워졌다. 원래 기업을 떠나려던 사람들도 새 희망을 보고 눌러앉았다. 이미 떠났던 사람들도 다시 찾아와 받아달라고 애원했다. 처음에는 <하늘에서 떨어진 락하산병>을 믿지 않고 버성기기만 하던 부문경리들도 점차 류청의 경영능력에 탄복하게 되였으며 그를 믿고 따르게 되였다. 석화기업의 종업원들은 그를 삶의 구성으로 간주하게 되였다. 많은 정부 해당부문과 보도매체들이 찾아와 석화술회사의 발전<비밀>을 알고싶어하면 류청은 갖은 핑게로 회피하군 했다. 이제 시작에 지나기 않는데 <허리를 굽히고 목소리를 낮추는>것이 기업발전에 유리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석화기업에서는 문화사업을 지지하는 사업을 석화기업발전과 진흥을 위한 하나의 중요한 내용으로 삼고 올해 100여만원을 투자하여 <제3차 중국서지보고문학상>을 협찬하였다. (서지(徐迟)는 우리 나라 저명한 보고문학작가로서 저명한 수학가 진경윤의 사적을 쓴 보고문학 <골드바하의 추측>의 작자이다.)  11월 8일, 류원무선생과 나는 이 문학상시상식에 참가하였을뿐만 아니라 대회측의 배치로 귀빈의 신분으로 주석대에 올라 중국의 유명한 보고문학작가들에게 상패와 상금을 발급하였다. 그날 오후 류청은 다른 일들을 제쳐놓고 나의 침실로 찾아왔다. “이번에 허주석님께서 저의 아버지를 모시고 이처럼 먼 곳에까지 오셔 참 고맙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이번 기회에 오시지 못하면 이제 다시는 오실 기회가 없게 될것입니다. 아버지의 신체상황으로 보아 아마 반년을 넘기지 못하실겁니다. 저는 아들로서 아버지 성격을 잘 압니다. 겉으로는 저렇게 소탈하셔도…아버지는 가정과 저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하신 분이신데…” 류청은 목이 꺽 메여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아버지앞에서는 언제나 쾌활하고 활달한 아들로 응석까지 부리던 류청의 마음속에는 이처럼 깊은 걱정과 비감이 숨겨져있었다. 류원무선생은 호북에 와서 아들이 일하는 모습을 친히 보시고는 많은 위안을 받으셨고 기분도 퍼그나 좋으셨다. 하여 나는 류원무선생이 이제 반년을 넘기지 못하리라는 류청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버지가 이제 살아계실날이 얼마 없으니 아들로서 단 하루라도 아버지를 즐겁게 해드리려는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앞에서 격에 맞지 않게 애들처럼 응석을 부리기도 합니다만. 아버지의 몸이 많이 불편하신줄 알면서도 이 먼 길을 오시게 했습니다…” 젊은이는 어깨를 들먹이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나는 그의 어깨를 다독여주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위안했다. “아버지는 저 몸으로도 늘 작가협회사업을 걱정하시고 조선족문학사업을 걱정 하셨습니다. 제가 아버지께 마지막으로 해드릴수 있는 위안이 작가협회를 도울수 있으면 도우라는 아버지의 소원을 꺼 드리는게 아니겠습니까. 이곳에 오셔서도 날마다 저만 보시면 계약을 작성했느냐 하는 <잔소리>입니다. 이제 계약이 다 작성되였으니 보시고 별 의견이 없으시면 오늘 체결하도록 합시다.” 내가 계약서를 받아보니 우리가 의논된 내용이 기본상 반영되여 있었다. 나는 간단한 수개의견을 제기하고 계약서에 동의를 표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나의 의견에 따라 몇곳을 수개하였다. “체결은 아버지 침실에 가서 하는게 어떻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나는 그의 마음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우리는 류원무선생 침실에 가 그의 앞에서 계약을 체결하고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아버지앞에서 류청은 또다시 쾌활한 아들로 돌아왔다. “하하, 존경하는 우리 아버지, 이젠 시름이 놓이지요?” 류원무선생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날 저녁으로 우리는 북경행 려객기에 올랐다. 류청네 10여명 일행이 공항에 와 우리를 바래였다. 3     밤중에 북경에 도착하여 비행기에서 내리자 류원무선생은 다리를 옮기기 매우 힘겨워 하셨다. 간부위가 아파나며 켜운다고 하셨다. 내가 곁에서 부축해 드릴려해도 기어코 사절하시며 자기절로 완강히 걸으셨다. 이분은 워낙 이런 분이셨다. 그이는 사리를 위해 종래로 불평을 부리지 않았고 조직에서 주는 자그마한 혜택이라도 언제나 고맙게 받아들이군 하셨다. 당신이 몸이 불편해 병원에  입원해있을 때도, 페암수술을 하고 전립선수술을 받았을 때도 종래로 단위에 알리지 않는 성미셨다. 우리가 후에 알고 크게 나무라시면 허허 웃으시며 “모두가 단위일로 바쁘겠는데 뭐 개인일까지 다 알려 무담을 끼치겠느냐”고 하셨다. 이날도 선생은 간통을 참으시며 자기발로 천천히 걸어 나오시다보니 우리는 맨 마지막 손님으로 공항을 나섰다. 북경에서 류청이 부탁한 친구가 마중하여 우리를 호텔로 안내했다. 류원무선생은 호텔에 온 후에서 계속 통증을 느꼈으나 내가 너무 걱정할가봐 되도록 내색을 내지 않으셨다.      이튿날 연길에 도착하여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내가 이 길로 병원에 가 진찰하자고 했더니 그이는 지금은 피곤해 쉬고 싶다며 래일 보자고 하셨다. 나는 그 말씀을 곧이 듣고 집에까지 모셔다 드리고는 돌아섰다. 그런데 이튿날 전화를 드려 오늘은 병원에 가보셔야 하지 않겠는가고 했더니 어제 오후에 맏딸과 함께 병원에 갔다오셨다지 않는가. 나에게 페를 끼치지 않을려고 나를 밀막아 보내셨던것이다. 진찰결과를 물었더니 그저 문제가 좀 있는것같다고 하실 뿐이였다. 나는 미심쩍어 아들 류청이한테 전화를 걸어 물었더니 이미 간암말기로 확진되여 수술할 필요가 없어 집에 돌아와 점적주사를 맞고있는 형편이란다. 이젠 반년이 아니라 두달도 넘길것 같지 못하다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이의 병이 이처럼 엄중할줄은 미처 생각지 못한터였다.     이튿날 나는 절대 오지 말라고 밀막는 류원무선생의 사절도 마다하고  직원들과 함께 그의 집으로 병문안을 갔다. 본인도 이미 자기의 병세를 알고 있는지라 우리도 뭐라고 위안하기가 어려웠다. 우리가 그래도 모르는척 치료를 제때에 잘하면 인츰 완쾌될것이라는 <거짓>에 류원무선생은 저승을 앞둔 사람 같지 않게 소탈하게 웃으시며 “내 병세는 내가 다 알고있으니 위안할 필요가 없다.”시며 우리와 롱담도 하시는것이 아니겠는가. 죽음앞에서도 너무나 초연하신 그이의 소탈한 모습에 되려 우리들의 눈시울이 젖어올랐다. “김성휘, 리행복선생 같은분들은 60도 넘기지 못하고 세상떴는데 나는 70도 훨씬 넘겼으니 이만큼 살면 잘산거지요. 뭘 아수할게 있겠어요.. 허허허.”     나는 13일에 김학철문학상시상식을 할 때에 호북에 갔다온 정황을 작가들한테 회보할려하는데 류선생께서 그때엔 그래도 나오셔 자리에 계셔야 하지 않겠는가고 하며 내가 책임지고 모셔가고 모셔오겠다고 했다. 그러니 선생께서는 “호북에 갔다온건 나하구 상관없는 일로 쳐주세요. 하지만 다른 상두 아니구 김학철선생 문학상 시상식이라니 내 꼭 나가도록 하겠어요.>라고 하셨다. 하지만 류원무선생은 그날 아침 나한테 전화를 걸어와 몸이 생각처럼 말을 듣지 않는다며 시상식에 끝내 참석하시지 못하셨고 내가 소개한 호북행차경위도 친히 듣지 못하셨다. 하지만 시상식에 참가한 문인들은 류원무선생의 고마운 소행에 감동되여 열렬한 박수로 류원무선생에게 고마움을 표하였다. 그후 적지 않은 작가들이 류원무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병문안도 할겸 나의 말을 전달해주기도 하면서 다시금 고마움을 표했다.     류원무선생이 병석에 계시는 기간 몇몇 원로분들과 소설계 중견들이 류원무선생의 병이 더 위중해지기전에 작가협회의 명의로 선생의 소설창작 51주년 기념회를 가질것을 제기하여 왔다. 내가 이러한 건의를 두고 류원무선생의 의견을 물었더니 류원무선생은 몸이 아파 참가할수 없다는 리유로 완곡히 사절하셨다. 그래도 일부 작가들은 본인이 몸이 아파 결석해도 기념회를 그냥 가지자는데로 의견을 모았다. 내가 재차 작가들의 의견을 류원무선생에게  전달하자 류원무선생은  나를 생각하면 절대 그런 일을 벌리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제야 안된다는 리유를 세가지로 밝히시는것이였다. “첫째, 내 우에 나보다 우수한 선배분들이 많았지만 작가협회의 명의로 그 무슨 창작 몇주년 기념회 같은걸 연적이 없었다. 그러니 내가 하면 주제넘은 일로 되고만다. 둘째, 사람들이 이번에 나의 아들이 작가협회에 문학상협찬을 하였기에 이번 기념회를 연다고 여길수도 있으니 나를 욕먹일 일을 하지 말아달라. 셋째, 저승길을 눈앞에 두고 창작기념회 같은걸 연다는건 죽는 사람한테 환갑상을 받기는것처럼 아무런 의의가 없으니 헛수고를 하지 말아달라.” 내가 작가 여러분들의 의견이니 잘 고려해 보시라고 했더니 작가들의 성의는 고맙게 받겠으나 더 고려할 여지가 없다고 잡아떼셨다. 11월 28일, 나와 우요동이 주당위 선전부 채영춘 부부장일행을 배동하여 류원무선생을 위문하러 갔다. 채영춘부부장은 리흥국부장의 따뜻한 문안을 전하면서 하루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시길 바랐다. 그때에도 류원무선생의 문학창작기념회를 열데 관한 문제가 의론되였다. 채영춘부부장도 류원무선생이 그런 영광을 누릴 자격이 당당하시다며 설득했으나 류원무선생은 자기의 견해를 굽히지 않으셨다. 채영춘부부장은 나오면서 <참 덕성이 높으신 분>이라고 감탄하였다. 12월 3일, 내가 장춘에 출장가는 날에 류원무선생은 병이 위중해져 연변병원에 입원하게 되였다. 마침 류청이 아버지가 오래 앉으시지 못하리라는걸 알고 미혼처와 함께 연길에 와 있었다. 나는 단위에 전화를 걸어 류원무선생의 마지막 길일수도 있으니 전체 직원들이 류원무선생 병문안을 가보도록 하였다. 나도 앞당겨 6일 연길에 도착하는 날로 병원에 가 류원무선생을 뵈였다. 병원에는 류청과 그의 미혼처, 삼촌부부, 류청의 두 누나가 류원무선생의 림종을 지키고있었다. 수척할대로 수척해져 병석에 누워있는 류원무선생은 이미 말을 못하고 계셨다. 내가 그의 손을 잡으며 나를 아실만한가고 했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시였다. 류청은 조용히 나를 밖으로 잡아끌었다 그는 복도에서 아버지가 며칠 지탱못할것 같은데 아마도 후사처리를 준비해야 할것같다고 했다. 나는 그와 후사문제를 의논한후 곧장 단위에 돌아와 후사준비를 포치했다. 그날은 토요일이라 직원들이 모두 휴식하고 있었지만 해당인원을 불러 당안을 찾아놓게 하고 추도사작성, 추도회내용, 추도회에 참가할 문인들의 통지범위 등을 배치하였다. 그날저녁 내가 류청을 동무하여 류원무선생의 림종을 지키려고 병원에 다시 갔더니 류청네는 출장갔다와 피곤하실텐데 자기네들이 있으니 어서 돌아가 쉬시라며 등을 밀었다. 류원무선생은 이미 의식을 잃고있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오후부터는 각혈하기 시작하였단다. 아직 시집문턱을 넘어서지 않은 류청의 미혼처 쇼예가 곁에서 시중을 들고있었다.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그녀의 두눈은 벌겋게 부어있었다. 병실에는 류청의 삼촌부부, 두 누나 등 여섯이 쏘파와 땅바닥에 자리를 펴고 누워자며 륜번으로 림종을 지키고 있었는데 내가 있으면 되려 그들의 휴식에 방해가 될것 같아 나는 한시간가량 앉아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일이 생기면 아무때든 련락하라고 일러두었다. 이튿날은 일요일이여서 내가 집에서 이사준비를 하고있는데 점심때가 좀 지나 류청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가 1시 55분에 세상을 뜨셨단다. 이사짐을 꾸려놓고 오후에 또 가볼가 했더니, 나는 하던 일을 제쳐놓고 부랴부랴 택시에 앉아 병원으로 달려갔다. 나는 우광훈이를 불러 그들 가속과 함께 후사처리를 하고 류원무선생의 유체를 장의사로 모셔갔다.  우리의 존경하는 원로작가 류원무선생은 이렇게 우리의 곁을 떠나가셨다. 민족문학을 사랑하고 관심하는 우리 문단의 우수한 선배작가이신 선생은 자기가 맺어놓은 문학상의 결실을 보시지 못하고 너무나 급급히 작가들과 영결하였다. 선생을 모시고 호북에 다녀온지가 어제 같은데 한달도 안되여 우리곁을 떠나시다니, 그날은 일요일이지만 나는 집에서 휴식하고 있는 직원들을 모두 불러내왔다. 가족에서 래일로 유체를 화장하겠다고 하기에 우리는 밤도와 각자가 할 일들을 맡아하였다. 작가협회에서 류원무선생의 사망소식을 통지할 때에 많은 작가들이 깜짝 놀라하였다. 너무나 뜻밖이였기 때문이였다. 누구도 그이가 이렇게 빨리 돌아가실줄 미처 생각도 못했던것이다. 그러잖아도 류원무선생이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월요일이면 위문갈가 했더니 이렇게 빨리 세상뜨셨느냐며  비통해하시는 분이 여럿이였다. 이튿날 오전에 열린 추도회에는 100여명 작가들과 친우들 및 가속들이 참석하여 비통한 마음으로 고인의 령전에 술을 부어올리며 그이의 마지막 길을 바래드렸다. 림종을 앞두고도 위문온 후배들에게 좋은 작품을 많이 창작하여 민족문단을 빛내라는 부탁을 잊지 않으시던 선배작가님.. 곁에서 떠나지 않는 아들을 보고 어서 회사로 돌아가 맡겨진 책임을 다하라고 등을 미시던  미더운 아버지. 작가협회덕분에 페암을 발견하고 제때에 수술하여 목숨을 건졌다고 만날 때마다 감격해 하시던 원로스승님. 병석에서도 사천지진재해 소식을 들으시고 주동적으로 위문금 200원을 보내주신 책임성높은 로정협위원님. 만년에도 민족문학사업의 번영과 발전을 위하여  로심초사하시며 작가협회를 위하여 협찬금을 당겨오신 어르신님. 명예와 영예앞에서도 욕심을 부리지 않으시고 과단하고  명지하게 처사하시여 문인들을 감동시키신 선생님. 죽음앞에서도 추호의 흐트럼이 없이  작가의 고상한 지조를 엄연히 지켜시여 작가적 명성에 이채를 돋구신 로작가님. 그이는 동료들에겐 언제나 친근한 벗이셨고 후배들에겐 언제나 소탈하고 소박한 선배셨으며 자식들에겐 풋풋한 인정미 넘치시던 아버지셨다. 작가는 가셨으나 작가가 남겨놓은 고매한 덕성은 그대로 남아 오늘도 우리를 감동의 소용돌이에서 맴돌게 하고있다. 작가는 가셨으나 작가가 남겨놓은 주옥같은 작품들은 우리 민족의 보귀한 문학유산으로 남아 빛을 뿌릴것이다. 류원무선생님, 구천에서도 민족문학의 번영과 발전을 지켜보아 주소소    <연변문학> 2009년 제2기  
46    [잡문] 장원에 인재가 없다? 댓글:  조회:2155  추천:113  2011-05-23
잡문장원에 인재가 없다? 허룡석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자면 어떤 교육방식이 따라야 할가? 한 나라의 교육방침이 그 나라의 교육방식을 결정할진대 학교가 일으켜야 할 역할은 어디까지일가?     송조때의 호원이라는 사람이 일찍 이렇게 말한바 있다.     “천하를 다스리는것은 인재에 달렸고 인재를 길러내는것은 교화에 달렸으며 교화의 근본은 학교에 달렸다.” 이 말은 오늘에도 우리에게 깊은 사색을 안겨준다.     지금 우리의 교육이 어떤 인재를 양성하고 있는가? 우리의 교육이  개혁개방 수요에 적응되는 인재를 양성하고 있는가? 세계적 발전을 이끌어갈 첨단인재를 양성하고 있는가? 우리의 교육이 말밥에 오른지 오래다. 교육개혁호성이 갈수록 높아지고있다.    해마다 대학입시가 끝나면 전국의 크고 작은 보도매체가 끓는다. 그들은 서로 뒤질세라 모 학교의 모 학생이 성 혹은 지구의 문과장원, 리과장원이 되여 모 명문 대학에 입학하였다고 굉장히 보도한다. 그로하여 장원이 된 학생은 별을 딴듯 뿌듯함을 느끼고 그의 부모와 모교에서도 첨단인재를 양성한듯 무한한 영광을 느낀다. 또한 이는 주변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부러움을 자아내기에 족하다. 하지만 이런 기쁨과 자랑, 영광과 광환이 마라톤의 첫 스타트에 지나지 않는다.     근간에 중국대학입시장원조사보고과제 조사조에서는 세인들을 깜짝놀라게 하는 <중국대학입시장원 조사보고>를 내놓았다. 그 보고에 따르면 우리 나라에서1977년에 대학입시가 회복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30여년간 성급과 지구의 장원 1120여명을 조사한 결과 사회에서와 조직에서 인정해줄만한 고급인재가 한사람도 나오지 못했다는것이다.    북경대학이나 청화대학 등 전국의 열손가락안에 꼽히는 명문대학을 졸업한후 어떤 장원은 중학교에서 교원으로 일하다 퇴직하였고 어떤 장원은 슈퍼마케에서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또 어떤 장원은 기업에서 기사로 일하고 있고 어떤 장원은 매대에 서서 고기를 파는 평범한 장사군으로 되였다. 더욱 한심한것은 북경대학 중문계를 졸업한 한 장원은 3년간 일자리를 찾지 못하여 집에서 허송세월 보내다 밥은 먹고 살아야겠기에 나중에는 어머니를 도와 넝마주이를 하고있다.    먼곳 일은 그렇다치고라도 지난 수십년동안 우리 연변에서도 해마다 대학입시 때면 아무아무개가 성과 지구의 리과장원, 문과장원이 되여 모 명문대학에 입학했다는 굉장한 보도는 보았어도 그 뒤에는 그들가운데서 대들보로 쓸만한 인재가 나왔다는 소리는 들은적이 있는가?    지난 30여년간의 대학입시 점수가 가장 높은 장원들가운데서 정계에서는 성, 부급간부가 나오지 못하고 경제계에서는 권위인사가 나오지 못하고 상계에서는 거두가 나오지 못하고 과학계에서는 세계나 나라에서 공인할만한 과학가가 한사람도 나오지 못했다는 사실은 국민들을 경악케 한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과연 무엇 때문일가? 도리대로 말하면 성적이 가장 우수한 학생들속에서 거물급 인재가 나와야 하지만 왜 사람들의 기대와는 이처럼 거리가 먼것일가? 이는 국민들의 깊은 사색을 자아내지 않을수 없게 한다.    원인의 하나는 장원들이 학교를 선택함에 있어 자기의 취미나 특장을 고려하지 않고 체면때문에 덮어놓고 명문대학을 고르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학부를 선택한다는 점이다. 때문에 대학에 갈 때에는 자랑스럽고 체면이 서는 일이나 가서는 취미나 특장이 맞지 않아 곤욕을 치르다보니 자기의 장기를 발휘하지 못한다. 가정이나 모교에는 빛나는 광환을 둘러주었지만 자기에게는 실패의 구덩이를 파놓은셈이다.     다음으로는 장원들이 너무 <외나무다리>에 몰키게 했다는점이다. 지난 30여년래 북경대학과 청화대학에서 전국 장원의 93%를 싹쓸이해갔다. 게다가 그 가운데  70%이상이 경제관리학과에 몰키다보니 많은 장원들이 자기의 취미와 특장을 잃은채 <외나무다리>에서 떨어지게 되였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원인은 우리 나라 전통적인 교육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할가부다. 지금까지 실행해온 소학교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점수제1주의는 학생들의 형상성과 창발성을 매몰시키고 있다. 다른 면에서는 부족점이 많아도 점수만이 제일이라는 제도는 학생들이 교과서에 매달려 죽은 글만 읽게 만든다. 하다면 어떤 학생들이 교과서에 매달려 죽은 글을 잘 읽는가?     장원으로 된 학생들의 성격을 보면 대다수가 내성적이고 편면적이다. 이들은 거개 성격이 활달하지 못하고 과외활동에 참가하기 싫어하고 남과 교제하기 싫어한다. 교과서외에는 아는것이 없거나 적으며 교과서를 떠난 창발적 사유는 하려하지 않는다. 이런 관념과 사유로 공부하다보니 아무리 명문대학에 입학하여 박사, 연구생 공부까지 해도 사회에 나와서는 변화다단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쉽게 도태된다.      오히려 공부성적은 수수해도 활달하고 교제하기 좋아하며 대담히 모험하고 창발정신이 있는 학생들이 사회에 나와서는 재빨리 적응되고 보다 쉽게 발을 붙이고 급속히 성장하는 현실이다.     대학교에서 공부할 때에는 모두가 한 수평선에 서있는듯 하여 승자와 패자가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또한 모두가 하늘의 별을 딸듯한 자부심과 우월감을 가진다. 하지만 <사회대학>은 사정없이 승자와 패자를 갈라놓는다. 이때에야 패자는 자기를 반성해보게 되고 현실을 정시하지 않을수 없게 된다. 하지만 배운것과 현실은 그 거리가 너무나 멀어 많은 학생들이 <사회대학>에서 처음부터 다시 배우며 사회에 적응해 나간다. 하기에 적지 않은 학생들이 대학에 간것을 후회한다. 뭉치돈을 팔아 배운 지식을 사회에 나와 써먹을수 없으니 그럴법도 하다. 이것이 과연 학생들만의 문제겠는가?     우리 나라의 고등교육은 이미 <대중화>의 시대에 들어섰다. 인재선발도 다원화 시대에 들어섰다. 시험점수로만 인재를 선발하면 창발정신이 있고 남다른 독특한 재간과 능력이 있는 학생들이 배척되고 매몰되기 쉽다. 학생들의 자질을 전면적으로 평가하여 그 특성에 맞게 인재를 선발하고 양성하는것이 시대적 추세로 되고있다 또한 시장경제수요에 적응되는 인재를 양성하는것이 급선무이기도 하다.    비교에 따르면 중국, 미국, 일본, 한국 등 여러 나라 학생들중에서 교과서 내용대로 시험을 치면 중국학생들의 점수가 가장 높으나 형상적사유와 창발적사유를 발휘하는 시험에서는 꼴찌란다. 그러니 그들가운데서 어찌 세계와 나라에서 공인하는 정치가, 과학가, 경제학가가 나올수 있겠는가. 미국대학들에서는 시험점수는 높으나 창발성사유가 없는 학생은 록취하지 않는다. 하버드대학 등 명문대학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우리도 언제면 학생들이 죽은 글만 읽게 할것이 아니라 인재가 용솟음쳐 나올수있는 교육방식과 모식을 받아들일수 있을런지.    등소평은 생전에 이렇게 말하였다. “10년개혁의 가장 큰 실책은 교육에 있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가지 그러한 실책이 계속되고 있다.    나라적인 교육개혁은 더는 미룰수 없는 단계에 들어선것 같다. <연변문학> 2010년 제11기  
45    [수필] 류삼저 <고손녀>와 <결혼>하다 댓글:  조회:2767  추천:116  2011-05-07
류삼저 <고손녀>와 <결혼>하다허룡석2003년 11월초에 중국소수민족지구신문연구회 제6기전체회의가 광서쫭족자치구 류주(柳州)시에서 열렸다. 소수민족일보사들중 <로따거>(老大哥)로 불리는 연변 일보사도 이 연구회 창시단위의 하나였지만 그후 여러가지 원인으로 다년간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하여 이번 회의에는 꼭 참석해주십사 하는 요청도 간곡했지만 나는 개혁개방시대 다른 소수민족지구 일보사들에서는 어떤 지방재정의 혜택을 받고 있을가 하는 조사의도를 갖고 처음으로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연변일보사의 참석으로 하여 형제민족일보사 사장과 주필들은 대단히 기뻐 하였으며 나를 이 연구회의 상무부주석으로 추대하였다. 또한 다음 7기 회의는 연변일보사에서 주최할것을 요구하였다.회의후 우리는 광서쫭족자치구는 물론 전국에 이름을 떨친 문화관광지인 류삼저 (刘三姐) 고향으로 참관을 떠났다.류삼저는 남송때부터 전해내려온 광서쫭족민간전설중의 뛰여난 대표적 인물이였다. 그녀는 총명하고 령리하며 아름답고 호방적이여서 대대로 내려오며 사람들한테 <선녀>로 불렸다. 게다가 노래를 부를라치면 산가가 샘솟듯 하고 그 목소리 또한 청아하여 <가선>(歌仙)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녀는 쫭족인민들의 자랑이였으며 광서쫭족자치구의 명물이기도 했다. 2006년 류삼저의 고향으로 불리는 광서쫭족자치구 하지(河池)지구 의주(宜州)시에서 신청한 <류삼저산가(山歌)>는 첫번째로 국가급 비물질문화유산명록에 수록되였다.우리는 12일 오전 8시에 대회측에서 준비한 뻐스를 타고 류주에서 떠나 9시 반경에 의주시에 도착했다. 일행은 의주시선전부의 안내로 사전에 예약된 1호유람선에 앉아 룡강을 따라  류삼저고향으로 향했다. 량안의 풍경은 아주 아름다왔다. 남방특색을 띤 지평선에서 불쑥불쑥 솟은 석회석 산들이 줄줄이 뒤로 미끄러졌고 사탕수수, 바나나, 파이내플 등 북방에서는 볼수 없는 특이한 풍경들이 한눈에 안겨왔다. 배안에서 가이드는 류삼저고향의 유래를 소개하고 나서 우리에게 <류삼저> 영화에서 부르던 산가 몇곡을 가르쳐주었다. 이제 류삼저 고향 대문어구에 가면 숱한 처녀총각들이 <류삼저> 영화에서 나오던대로 <산가>로 대창을 해올것이니 우리도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것이였다. 즉 그 대문을 지날 때면 <모나으리>(莫老爷)패와 <류삼저>패로 나뉘여 산가대창으로 우렬을 가린다는것이였다. 우리는 <모나으리>패로 되여 <류삼저>패의 대창에 응부해야 한다는것이였다.가이드는 누가 전에 <류삼저>영화에서 나오는 산가를 부를줄 아는가  하여 신강 <창길일보>의 사부총편집이 <모나으리>로 뽑히고 귀주 <동인일보> 주사장이 <수재>로 뽑혔다. 나는 산가를 부를줄 모른다는데도 여러 민족이 함께 나서면 보기 좋다며 기어코 <수재>로 <발탁>시켰다. 우리는 배에서 미리 준비해둔 <모나으리>와 <수재>의 옷을 껴입고 배머리에 떠밀려나섰다. 동행자들은 그 꼴을 보며 우스워 죽겠다며 연신 사진기샤타를 눌러댔다. 나도 난생처음 <류삼저> 영화에서나 보아오던 <수재>의 모자를 쓰고 옷을 입고보니 웃음을 참을수 없었다. 우리가 배우에서 가이드의 지휘에 따라 한참 산가를 련습하노라니 배는 어느듯 류삼저고향의 대문어귀에 이르게 되였다. 멀리에서도 대문 량쪽 벼랑우에 수십명의 처녀총각들이 줄지어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것이 환히 보였다. 그 기세를 보고 우리는 저으기 긴장해났다.배가 대문앞에 이르자 가이드는 <모나으리>패가 먼저 <선불>을 걸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손과 발을 내저으며 동작이 거칠면 거칠수록 좋다고 하였다. 통치계급의 추악상과 랑패상을 여실히 보여주란다. 우리는 배에서 련습한 서투른 그대로 먼저 <선불>을 걸었다. 털보송이 참새새끼 둥지에서 갓 나왔거늘네 산가 잘한다한들 어찌 내 노래보다 많을소냐믿어지지 않으면 어디 이 배를 좀 보아라배머리에서 배꼬리까지 산가로 가득 찼노라 그러자 대문량견의 <류삼저>패들이 당장 대응해왔다. 노래할줄 모르면 오지나 마세요둔재의 노래 어찌 나보담 많으리오산가는 마음으로 부르는 선률이거늘어찌 물처럼 배에 싣고 다니리오 우리가 한단락 공격하면 그쪽에서 한단락 대응해왔다. 처음에는 재미로 하던것이 점차 경쟁으로 번져져 신강 <모나으리>는 <화>가 나서인지 가이드가 배워주지 않은 노래로 공격하고 우리는 배워준대로 공격하다보니 서로가 음정이 맞지 않아 함께 배를 탄 일행들의 폭소를 자아냈다 우리는 웃어번져졌다도 웃음이 멎으면 또 뭐라도 공격하는데 마지막에는 서로 손과 발을 내저으며 제좋은 소리를 치다보니 배에 앉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류삼저>네 패들도 웃느라 노래를 미처 이어대지 못했다. 제가끔 고아대던 <모나으리>패들은 자기네가 이겼다고 “와야” 환성을 올렸다. 가이드처녀도 눈물을 찔끔찔끔 짜며 이렇게 재미나는 대창은 처음 본다며 웃느라 몸을 가누지 못했다. 림시로 주어맞춘 아마추어패가 어찌 날마다 노래하는 프로패를 이길수 있으랴만 어떻든 그들이 노래를 이어대지 못하게 웃겼으니 이기긴 이긴것이 아니겠는가.대창이 끝나자 우리는 껴입었던 옷을 벗고 배에서 내려 대문을 지나게 되였다. 가이드는 대문을 지날 때 처녀들이 술을 한잔씩 권하니 돈 1원씩 준비하라고 했다. 내가 호주머니를 뒤져보니 1원짜리는 없고 2원짜리만 있었다. 내가 그대로 내놓으니 처녀는 고맙다며 한잔 더 마셔야 한다고 하여 다른 사람보다 한잔 더 마셨다. 처녀들은 우리와 대창을 하던 장면을 떠올려서인지 술을 권하면서도 우리를 쳐다보며 웃음을 참지 못해하였다.우리는 대문을 지나 류삼저의 고향집을 참관하였다. 제때에 수건을 하지 못해서인지 목조건물과 창고들은 많이 낡아있었다. 우리는 민족복장을 하고 건물앞에 서있는 쫭족처녀들과 기념촬영을 하였다. 고향집참관을 끝내고 우리는 널다란 공연장에 왔다. 공연장은 기암절벽과 나무숲이 둘러싸인이 천연적인 뜨락 한 복판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마치 영화에서나 보아오던 선경속에 들어선듯 했다. 우리 일행이 자리잡고 앉으니 문예공연이 시작되였다. 아마 오늘은 우리 일행이 중심인것 같았다. 쫭족처녀총각들이 짝을 지어 나무판대기를 신고 절주있게 춤을 추다가 우리더러 그걸 신고 걸어보라 하였다. 우리가 중간중간 끼여들어 처녀들의 어깨를 짚고 그들의 률동에 따라 움직이니 그런대로 걸을만 했다. 하지만 참대사이로 뛰는 뜀질은 잘 안되였다. 어떤 이는 절주를 맞추지 못해 참대목에 발목이 집혀 그 자리에 꼬꾸라지기도 했다. 그러면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나왔다.다채로운 문예공연이 끝나자 이번에는 혼례식을 거행한단다. 관람자들속에서 자기들 마음에 드는 신랑감을 골라 류삼저의 <고손녀>들과 결혼시킨단다.  처녀 둘이 각각 한손에 붉은 꽃이 달린 붉은 띠를 들고 다른 한손에는 붉은천을 들고 수백명이 앉은 관람석을 훑으며 신랑감을 물색하였다.그런데 나는 한 처녀가 사람들을 비집고 곧추 나한테로 오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설마 하면서도 긴장했다. 아니나다를가 처녀는 나한테 와 허리를 굽혀 인사하더니 붉은띠를 내 어깨에 걸쳐주고 붉은천을 내손에 쥐여주었다. 젊은이들도 수두룩한데 이 나이에 내가 신랑으로 선정되다니.“와, 허사장이 신랑에 뽑혔군그래.”“좋겠다, 난 몇번 와도 한번도 걸리지 못했는데…”일행들은 환성을 지르며 축하해 주었다. 처녀는 새물새물 웃으며 어쩔바를 몰라 극구 사양하는 나를 끌고 공연장 한복판으로 나왔다. 뒤이어 사천 <량산일보>의 이족 과부총편집도 다른 한 처녀에게 끌려나왔다. 그러자 당지 신문사인 <하지일보> 진사장이 공연장으로 나와 주동적으로 <새 신랑>들을 소개했다.“이 분은 <연변인민 모주석을 노래하네>란 유명한 노래의 고향에서 오신 연변일보사 사장으로서 조선족입니다.”관람객들은 “와야”하며 환성을 올렸다. 관람객들은 아마 <문화대혁명>시기 전국에 널리 울려퍼졌던 노래와 문화수준이 높은 조선족이라는데 큰 흥취를 가진것 같았다.나는 한발 나서며 허리를 굽혀 관람객들에게 정중히 인사했다.“한번도 결혼해보지 못한 로총각입니다. 많이 보살펴주십시요.”그러자 관중석에서는 더 큰 환호성이 울리고 폭소가 터져나왔다. 어떤 이는 좋다고 일어서서 마구 박수를 쳐댔다. 시치미를 떼고 정색해서 말하는것이 더 우스웠던 모양이다. 진사장이 공연히 조선족이라고 밝히는 바람에 나는 전국의 방방곳곳에서 온  관람객들 앞에서 조선족얼굴에 먹칠하지 않게 <신랑>역을 잘해야 겠다는 민족적 책임감을 느꼈다. 그러자면 사장이라는 우사모를 벗어던져야 했다.화려한 민족옷차림을 한 처녀 10여명이 줄지어나와 우리 앞에 늘여섰다. 마이크를 든 <중매군>이 말했다.“앞에 늘여선 류삼저 <고손녀>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신부 한명씩 고르세요. 마음곱고 인물곱고 신체좋고 손부부리 여문 신부를 고르면 평생 복을 누릴것이요, 악한 신부, 병다리 신부 고르면 평생 개고생해야 해요. 자, 지금부터 마음드는 처녀를 골라 보세요. 이리 보고 저리 보며 잘 골라야 합니다. 마음드는 처녀면 머리에 붉은 천을 씌워주세요.”아무리 오락이라도 숱한 사람들 앞에서 <어른>이 이리기웃 저리기웃 하며 <신부>를 고른다는것도 품위가 떨어지는  일인것 같아 나는 마주 서있는 처녀한테 붉은 천을 씌워주었다.“고마워요.”처녀는 허리굽혀 인사했다.관중석에서 환성이 터져올랐다. 그런데 나보다 일여덟살은 젊은 이족 과부총편집은 이쪽 저쪽 다니며 <신부>를 골라 관중들의 폭소와 함께 선의적인 <욕소리>가 터져나왔다.<신부>가 정해지자 다른 처녀들은 모두 물러가고 공연장복판에는 <신랑> <신부> 두쌍이 남게 되였다. 우리는 <중매군>의 안내대로 각각 <신부>의 손을 잡고 <신부>를 <신방>에 데려다주고는 제자리로 돌아왔다.“지금부터 신방에 있는 신부를 자기집에 데려가려면 몇가지 고비를 무사히 넘겨야 합니다. 처남, 처제들과 이모들이 <신부>를 순순히 보내지 않을거니깐요. 제가 하라는대로 하면 됩니다. 이쪽으로 오세요.”<중매군> 둘이 두 <신랑>을 따라 다녔다. 촬영기와 사진기들을 메고 든 기자들과 관람객들이 <신랑>을 따라 다니며 촬영했다. 총각 넷이 나오더니 내 앞에 둘씩 짝을 지어 참대를 어깨에 가로 메였다.“우선 저 처남들이 가로 멘 참대를 넘어야 해요.”쳐다보니 아득했다. 고도선수가 아닌이상 저 높은것을 어떻게 넘는단 말인가.“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큰처남, 둘째처남, 사정 좀 봐주세요> 하면 돼요.”내가 다가가 그대로 말했더니 <처남>들이 시뚝한다.“사정은 봐주겠지만 말로만 해서야 되겠어요?”“그럼 어쩌면 될가요?”“술이라도 대접해야죠.”“중매군. 술”내가 <중매군>을 돌아보며 얼결에 이렇게 소리치자 관중석에서 폭소가 터졌다. <중매군>도 웃느라 허리를 펴지 못했다.“새신랑이 감히 저하고 술을 달래요. 이렇게 간 큰 신랑 처음 보네요…”<중매군>이 웃다말고 손짓하자 쟁반에 술주전자를 받쳐든 처녀가 달려왔다. 내가 <처남>들께 술을 따라주자 그들은 단모금에 잔을 내더니 가름대를 가슴까지 내려왔다. 그것도 너무 높았다. 내가 또 한잔씩 따라 공손히 올렸다.“자, 한잔 더 마시고 사정 봐주던바 하고는 더 봐주세요”<처남>들이 술을 받아마시고는 술잔을 나한테 내밀었다.“그럼 누이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내가 <중매군>의 눈치를 보니 마셔야 한단다. 나는 그 잔을 받아마셨다. 그러니 다른 <처남>이 또 한잔 부어준다.“형님것만 마시고 제걸 안마시면 안되지요. 누이를 잘 부탁드립니다.”나는 또 어쩔수 없이 그 잔도 마셨다.두 <처남>은 그제야 가름대를 무릎까지 내려왔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하며 가름대를 손쉽게 건너갔다.두번째 가름대에 가서는 내가 주동적으로 술잔을 따르며 사정했다“셋째 처남, 넷째 처남. 먼 길을 왔는데 사정 좀 봐 주세요.”두 <처남>은 술을 받아 마시더니 가름대가 대번에 무릎아래로 내려왔다. 내가 이게 웬 떡이냐고 고맙다고 인사하며 건너는데 가름대가 갑자기 다리사이로 쑥 올라오는 통에 하마트면 걸려 넘어질번 했다. 관중석에서 와 웃음이 터졌다.“흥, 큰 형님네는 술 두 잔씩 주구 우리는 한잔밖에 안주구 무사히 지날줄 알았어요?”아하, 이 자식들 술 한잔 적게 주었다구 <심술>을 부리는구나. 나는 가름대를 가로탄채 처녀를 불러 또 술 한잔 마저 부어 주고서여 그 가름대도 무사히 넘을수 있었다. 작은 <처남>들이 <누이>를 부탁하며 부어주는 술 두잔도 어쩔수 없이 마셔야 했다. 대낮에 대문에서부터 여기까지 여섯잔을 받아마시고 나니 정신이 알딸딸해났다. 이거 <신부>를 데려오기전에 <신랑>이 먼저 취해 번져지겠네.이번에는 이모들 고비를 넘어야 한단다. 키가 크고 작은 <이모> 둘이 좁은 널판자를 한자 높이로 고여놓은 <외나무 다리> 가운데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있는데 저 외나무다리를 무사히 건너가야 한단다. 나는 첫번째 <이모>한테 다가가 시켜준대로 사정했다.“큰 이모님 조카를 신부로 맞게 이 다리를 무사히 건너가게 해주세요.”<큰이모>는 별소리없이 해쭉 웃으며 몸을 한켠으로 비끼기에 마음좋은 <큰이모>의 어깨를 살짝 짚으며 건너려는 순간 <큰이모>가 엉덩이를 삐쭉 내미는통에 나는 안떨어지겠다고 두팔을 허우적거리다 끝내 널판자에서 밀려 떨어졌다. 관중석에서 또다시 웃음이 터져나왔다. <다리>를 <지혜롭게> 건너지 못해 벌주란다. 나는 사양하다 못해 또 한잔 받아마셨다. <둘째이모>한테 다가가 사정하니 <둘째이모>는 못들은척 널판자 한가운데 떡 버티고 서있었다. 어쩌면 좋냐고 <중매군>을 쳐다보니 술 한잔 권하란다. 나는 공손히 술 한잔 따라 <둘째이모>에게 드렸다. 그런데 <둘째이모>는 손을 내밀지 않고 입만 짝 벌렸다.“둘째이모는 성격이 사나와서 먹여줘야 할것 같아요.”<중매군>이 실까스른다. 내가 술을 그녀의 입에 쏟아넣으려 하자 그녀는 발꿈치를 높이 쳐들고 입도 뿌죽히 내밀었다. 키가 나보다 더 큰 그녀가 발꿈치까지 쳐들자 나도 발꿈치를 쳐들고 술잔을 높이 쳐들어야 했다. 내가 <둘째이모>의 입에 술을 부어넣을 때 더러 코구멍으로 들어갔는지 <둘째이모>가 캑캑 거리며 그 자리에 폴싹 주저앉았다. 관중석에서 또다시 폭소가 터져나왔다. 나는 <고의적으로> <둘째이모>를 노엽혔다는 <죄명>으로 또 벌주를 마셨다.이젠 고비를 다 넘었는가 했더니 마지막으로 처제들 고비를 넘어야 한단다. 후유, 아직도 안 끝났나. 보는 사람들은 재미있어 죽겠다지만 <신랑>질 하기가 이렇게 어려울줄은 몰랐다.<큰처제>앞에 가서는 큰소리로 “처제, 아저씨가 왔소.”하란다. 그리고는 “처제, 약혼했소?”라고 물으란다. 약혼했다고 하면 “이 아저씨가 대도시에 사는 더 좋은 대상을 소개해줄테니 그 대상자와 갈라지오.”하란다. 그랬더니 <큰처제>는 엎디여 절을 하며 또 <감사술>을 권했다. <작은 처제>앞에 가서는 “내가 작은 처제를  대도시에 데려다 공부시킬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하라기에 그대로 했더니 <작은 처제>가 고맙다며 또 술을 따라준다. 보아하니 술고비를 넘겨야 <신부>를 데려갈수 있게 만든 오락인것 같았다. 워낙 주량이 많지 않은 나는 <신부데리러 가는 길에서> 이렇게 술을 마시고나니 알딸딸해 오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애써 일거일동을 자제했다.모든 고비를 순조롭게 지났으니 이젠 신방에 들어가 신부를 데려내와야 했다. <중매군>이 시켜주는대로 <신방>문어구에 가 “여보, 당신이 사랑하는 신랑이 간난신고를 겪고 인제야 왔으니 어서 문을 열어주오.” 라고 해도 안에서는 묵묵 부답이였다. 방문은 안으로 걸려있었다. <취한 신랑>이 재차 큰소리를 치니 그제야 안에서 <신부>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새여나왔다.“아무 례단도 없이 어찌 그렇게 쉽게 데려갈수 있겠어요.”<중매군>이 나서 <신부>를 데려가자면 <례단>으로 적어도20원은 내놓아야 한단다. 나는 먼곳에 와 전설속 명인의 <고손녀>와 <결혼>하려면 요까짓 돈이야 팔아야겠지 하면서 돈을 꺼내려고 호주머니를 뒤지는데 <하지일보> 진사장이 달려왔다.“허사장, 잔돈이 있습니가? 여기 잔돈이 있습니다. 큰 돈을 내밀면 거스름돈을 안줍니다.”그는 이 고장사람이라 오락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어찌 돈을 꿔서 귀한 신부를 데려가겠습니까?”내가 휘청거리는척 하며 호주머니를 뒤져보니 마침 잔돈이 있었다. 돈 20원을 뙤창문으로 들이미니 그제야 “고마워요.”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머리에 붉은천을 쓴 <신부>가 사뿐 걸어나왔다. 내가 신부의 손을 잡고 땅을 내디디려 할 때 <중매군>이 달려와 <신부>를 업고 <신부>의 두 무릎을 두손으로 받쳐들어여 한단다. 나는 시키는대로 신부를 업고 취한척 이리비틀 저리비틀 하며 공연장으로 걸어갔다. <신부>는 떨어질가바 내 목을 꼭 끌어안았다. 관람객들은 나의 걸음걸이와 <신부>의 모양을 보고 웃음을 터뜨리며 환성을 내질렀다. 나는 공연장 한복판에 와서 <신부>를 사뿐 내려놓았다. 그런데 와보니 <신랑신부>는 우리 한쌍뿐이였다. 후에야 알고보니 저쪽 <신랑>은 고비를 넘을 때마다 주는 술을 받아마시기 어려워 중도에서 기권하고 <도망>쳐 자취를 감추었던것이였다. 그러다보니 관중들의 시선이 <결혼식>과정 내내 모두 나한테 집중되였던것이였다. 나는 맡은바 <신랑>역만 열심히 하다보니 그런줄을 감감 모르고있었다.우리는 <중매군>이 시키는대로 돌아서서 먼저 <처가집>식구들에게 허리굽혀 세번 인사하고 다시 돌아서서 관람객들에게도 허리굽혀 세번 인사했다. 이번에는 <신랑 신부>를 마주 세워 인사하게 하는데 내가 허리를 굽힐 때 <중매군>이 나를 슬쩍 밀쳐 <신부>와 머리를 맞쫏게 했다. 머리에 붉은 천을 쓴 <신부>가 뒤로 휘청거리며 넘어지려는것을 내가 제껙 잡아주었다. 관중석에서는 또다시 즐거운 웃음이 터져나왔다. <신부>는 자그마한 가방에서 <결혼기념>으로 알락달락한 수놓이 공을 기념으로 나의 목에 걸어주었다. 진땀을 빼게 하는 <결혼식>을 끝내고 내가 제자리로 돌아오니 우리 일행은 열렬한 박수로 맞아주었다.“와, 오늘 허사장이 신랑역을 잘하셔 참 재미있었습니다.”“웃지두 않으시구 어찌나 웃기는지 참 많이 웃었습니다.”그날저녁 의주시선전부에서 저녁초대를 하였다. 술좌석에서 주인과 손님들은  낮에 있은 <결혼식>을 떠올리며 또다시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술이 몇순배 돌자 지방주인인 진사장이 건너와 나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저쪽상에 앉은 이모들과 처제들이 신랑이 결혼하자마자 처가집식구들을 잊고 술도 안붓느냐고 노염을 냅니다. 빨리 가보셔야겠습니다.”그쪽상에는 우리 회의를 위해 봉사하는 당지 여러 부문 녀성간부들과 녀성 일군들이 앉아있었다. 나는 진사장의 안내하에 그쪽상으로 건너갔다.“자, 큰 이모, 작은 이모, 그리고 처제들, 오늘 결혼한 조선족 새 신랑이 처가집 여러분들께 술을 부어 올리겠답니다. 박수ㅡ”진사장이 이렇게 소개하자 그 상의 녀성들이 모두 일어서서 환한 웃음을 지으며 힘껏 박수를 쳤다. 내가 일일이 술을 따르고나서 정색해서 한마디 했다.“큰 이모, 작은 이모, 그리고 이쁜 처제들. 오늘 다망중에 저의 결혼식에 참석해주셔 고맙고 치매증이 와 동서남북을 가리지 못하는 로신랑의 사정을 여러모로 보아주셔 참으로 고맙습니다. 이후 장백산기슭 해란강반에 오시면 제가 잘 초대해드리겠습니다.”그 말에 모두들 정말 처가집 식구가 된듯 좋아야단이다.“조선족신랑이 부어주는 술이야 다 마셔야지요.”“장백산기슭에서 행복하게 잘 사세요.”“해란강반에서 흰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다정히 사세요.”그녀들은 저저마다 잔을 굽냈다. 여지껏 흰술을 한잔도 못마신다던 녀성들도 모두 잔을 냈단다. 저녁식사가 끝난후 우리는 뻐스에 않아 류주로 돌아가게 되였다.“혹 두고 온 물건은 없는지 잘 살펴보십시요.”진사장이 뻐스에 오른 여러 사람들을 둘러보며 주의를 주었다.내가 제꺽 손을 들었다.“아차, 제가 큰 물건을 잊었네요.”“네? 가방을 두고 오셨어요?”“아니, 술 먹고 취하다보니 오늘 결혼한 신부를 챙기지 못했습니다.”그러자 뻐스안에서는 폭소가 터졌다.“그 신부는 하루신부니까 생각도 마세요.”“그 신부는 날마다 결혼하다보니 신랑이 얼만지 모릅니다. 그러니 아예 포기하세요.”나는 혼자 중얼거리는척 했다.“이거 금방 결혼했다는 신랑이 신부 이름두 나이두 어데 사는지도 모르니 얼빤한 결혼이긴 하군그래.”뻐스는 웃음과 즐거움을 담뿍 싣고 남방의 밤길을 줄기차게 달렸다.    
44    [수필] 부주장을 <비판>하다 댓글:  조회:1913  추천:92  2011-05-03
                  부주장을 <비판>하다                                 허룡석모택동주석의 후계자로 9차전국당대회 <당규약>에까지 명문으로 명확히 규정되였던 <위대한 부통수> 림표가 정변음모가 들통나 쏘련으로 도망치다가 1971년 9월 13일에 몽골 원둘한에 떨어져죽으면서 세상을 크게 놀래웠다. 하지만 국내적으로는 오래동안 비밀에 붙혀지다보니 인민들은 우리 나라에서 그런 초풍할 사건이 생긴줄도 감감 모르고 있었다. 림표의 죄행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중앙 1호문건이 <막단행정단위>인 농촌 생산대에까지 내려올 때는 1974년 초봄이였다. 정치돌출을 부르짖던 당시에 중앙으로부터 공사에 이르기까지 림표사건에 관한 중앙문건을 농촌 생산대 사원들한테까지 전달하는것이 가장 큰 정치였다. 하기에 농촌 가는 곳마다에서는 해당 중앙문건전달에 열을 올렸다. 그때 대대당지부서기로 부임된지 얼마 안되는 나는 열정에 끓어넘쳐 각 생산대를 돌아다니며 중앙문건을 직접 전달하였다. 대대소재지 세개 마을에서의 문건전달이 끝나자 나는 대대마을과 5리가량 떨어져있는 산골생산대인 제5생산대에 올라가 사원들한테 중앙문건을 전달하게 되였다. 점심을 치른뒤 내가 연길에서 내려온 주공작대의 김동무와 함께 눈길을 헤치며  5대로 올라가 보니 남녀사원들이 벌써 널직한 한 사원의 집에 빼곡히 모여있었다. 문화대혁명때 언제나 모주석의 곁에 붙어서서 모주석어록을 달랑달랑 흔들어대던 붉디붉은 <후계자>가, 그처럼 <영원히 건강하시라>고 전국인민들이 말끝마다 공경스럽게 개여올리던 <위대한 부통수>가 외국으로 도망치다 남의 나라에 떨어져 죽었다니 당시에 그보다 전국인민들을 놀래운 더 큰 정치가 없었다. 하여 사람들마다 그 자세한 내막을 알고싶어 하던차에 중앙문건이 내려왔다니 운신할수 있는 사람은 거의 다 모인터였다.    우리는 시간맞춰 회의를 시작하였다. 회의질서는 여느때보다도 좋았다. 모두들 도정신해 중앙문건에 귀를 기울이였다. 내가 중앙문건을 전달하기 시작한지 10분가량 지났을가 할때 누군가 웃방문을 떼며 들어오는 인기척이 났다. 지각한것이였다. 그런데 그 사람이 들어오자 웃방에서는 말벌둥지가 터진듯 어찌나 떠들어대는지 도저히 문건을 계속 읽어 내려갈수가 없었다. 정주간에 앉았던 아낙네들마저도 뉘집 아바이 저렇게 주새없느냐고 수근거리기도 했다. 나는 문건을 읽다말고 웃방에 대고 좀 조용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러자 웃방에서는 밥물잦듯 금시 조용해졌다. 내가 다시 중앙문건을 읽기 시작하여 5분가량 지났을가 한데 웃방에서는 또다시 벌렁벌렁 죽가마가 끓기 시작하였다. 문건전달을 중지하면 웃방에서 눈치를 채겠는가 하여 읽기를 중지하고 한참 기다렸으나 조용해지기는 고사하고 그 시간을 리용하여 더 떠들어댔다. 가만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니 그 무슨 제정때에 소장사하던 이야기까지 겯들어지고 있는것같았다. 이게 어느 때라고 저따위 소리까지 한단 말인가. 각 생산대를 돌아 다니며 문건전달을 해도 이렇게 떠드는 사원들이란 없었다.   나는 참다못해 웃방 문설주로 다가가 방안을 들여다 보며 음성을 높였다.    <웃방에서는 왜 이렇게 떠듭니까? 좀 조용하면 안되겠습니까? 이제 늦게 온 분이 어느 분이십니까?>   그러자 방 가운데 자리잡고 앉은 키꼴이 훤칠하고 얼굴이 길죽한 로인 한분이 웃음띤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자진해나섰다.<나외다.>.   <늦게 오신것만 해도 그런데 들어오시자마자 이렇게 떠들면 어떻게 합니까? 지금 무슨 문건을 전달하는지 모르십니까?>   <알구 있지. 아주 중요한 중앙문건이지. 헌데 오래간만에 어쩌다 옛친구들을 만나다보니 그렇게 됐구만. 이젠 안떠들테니 날래 문건을 계속 전달하오..>   한 마을에 살면서 대체 며칠이나 못보았기에 저렇게 떠든단 말인가. 그런데 김동무가 뭐가 짚히는것이 있는지 목을 빼들고 방안을 들여다 보더니 시무룩히 웃는것이 아닌가.    나는 음성을 가다듬어가며 계속하여 중앙문건을 전달하였다.  중앙문건이 워낙 길던터라 절반정도밖에 전달하지 못했는데 노루꼬리만한 겨울해가 서산에 기울어졌다.    <이보시오. 지부서기, 내 의견 좀 말할가? 이젠 저녁때가 다 된것같으데 문건전달은 그만하구 정지칸의 애기네들이 집에 가 저녁밥을 짓게 하는게 좋잖을가?>    목소리를 들어보니 보나마나 늦게 온 그 로인의 목소리였다. 저 령감 뭐 이 마을 좌상인가? 정주간에 앉은 아낙네들도 그 소리에는 귀가 번쩍 열렸는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모두들 어서 보내주어 저녁밥을 짓게 했으면 하는 눈치였다. 나는 못본척하고 중앙문건을 계속 읽어내려갔다. 10분가량 지나니 그 로인이 또 께껴댔다.<이보, 지부서기, 이젠 날이 다 어두워진다이. 중앙문건두 밥을 먹구 계속 전달받는게 좋채일가? 집집마다 돼지죽두 줘야 할게 아니우?>    보아하니 담이 어지간한  로인이 아니였다. 여러 생산대를 돌며 중앙문건을 전달해도 저렇게 감히 중도에 께껴대는 사람은 없었다.   <제일 늦게 오신 분이 제일 먼저 돌아가시겠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돌아갈려면 아바이 먼저 돌아가십시오. 문건전달을 자꾸 방해하지 말구.> 나는 화가 나서 한마디 쏘아주었다.<내 먼저 가자는게 아니라 밥할 애기네들을 먼저 보내자는게지.>    내가 또 뭐라고 쏘아부치려는데 공작대의 김동무가 나의 바지가랭이를 잡아당겼다. 아직도 전달할 내용이 많으니 저녁후에 계속 전달하면 어떻겠는가고 했다. 우리가 이 생산대로 올라 올 때에는 사원들한테 페를 끼치지 말고 늦어도 한꺼번에 다 전달하고 내려오려 했는데 공작대 김동무까지 이렇게 말하니 나는 그의 말을 존중하지 않을수 없었다. 모두들 저녁을 자시고 두시간후에 이 자리에서 계속 문건전달을 하겠다고 공포하니 사원들은 얼씨구나 하며 분분히 자리를 털고일어났다. 생산대장은 주인집과 의논하고 편하게 우리가 주인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도록 배치했다.   <허허, 나두 밥은 주겠지? 어데 가 먹을가?>   웃방에서 떠들어대던 그 로인이 반죽좋게 웃으며 정주간으로 건너왔다. (이런 비우장판 령감이라구야. 제집에 가 자시면 될것이지 회의방해만 하다 남의 밥 얻어먹을 소리까지 하구있네.)내가 그 령감에게 아니꼬운 눈길을 보내며 아랑곳하지 않는데 김동무가 그 로인과 반갑게 인사하는것이 아니겠는가. 아니, 공작대로 금방 내려온 분이 어떻게 이 마을 로인들을 알지? 그 로인과 악수하던 김동무가 시무룩히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이분이 누구신지 모르겠소??>    <이 마을 아바이들두 제가 적지 않게 알구 있지만 이 아바이만은 뉘집 아바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볼부은 소리로 대꾸했다.   <이분이 바로 주에서 공작대를 책임지고 오신 남명학부주장이시오.>    <예? 이분이 부주장 남…?>   나는 금시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문화대혁명때에 타도되였다가 후에 다시 해방되여 부주장으로 있는 남명학이라는 분이 계신다는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눈앞의 이 령감이 그 분일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놀라움과 호기심에 다시 그분의 아래위를 훓어보아도 생김새나 차림새나 큰 간부다운데라곤 없었다. 길에서 만나도 자치주의 큰 간부가 아니라 틀림없이 동네집 아바이로 짐작이 갈 분이였다. 나는 놀라움에 어정쩡하게 그분의 손을 잡으며 사과했다.   <아까는 모르고 욕했는데 죄송합니다.>   <허허, 지부서기 잘못이야 없지. 중앙문건을 전달하는데 친구들을 만나 반갑다구 떠들어댄 내가 잘못이지. 비판받아 싸지 싸. 젊은 서기 패기있다니까.> 남주장은 나의 손을 굳게 잡아주며 오히려 나를 치하해주었다.    알고보니 남명학부주장은 그해 우리 공사에 내려온 주공작대책임자로서 우리 대대에 <점을 잡게> 되였었다. 그는 아무런 통지도 없이 혼자 대대사무실에 찾아왔다가 지부서기가 공작대 분과 함께 5생산대로 중앙문건 전달하러 갔다는 부기원의 말을 듣고 곧추 5생산대로 찾아 올라왔던것이다. 그는 회의장소를 물어 찾아들어왔다가 뜻밖에도 몇십년전의 옛친구들을 만나 서로 인사치례를 하며 떠들다가 나한테 <비판>받았던것이다.   싸움끝에 정이 든다고 그후부터 남명학부주장은 나를 허동무라고 친절히 불러주었고 나도 스스름없이 그를 아바이라고 부르게 되였다.    그때는 현장도 농민들 눈에는 대단히 높은 간부로 보일 때였는데 그보다 더 높은 부주장이라니 농민들은 존경하면서도 슬슬 피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분은 틀거지가 없고 접촉성이 좋아 주동적으로 농민들과 허물없이 사귀였다. 그분은 이신작칙하고 실사구시하면서 우리에게 많은 보귀한 로간부의 우수한 전통을 물려주었다. 그때는 농민들이 농사짓는것이 아니라 대채를 따라 배운답시고 간부들의 행정명령에 의해 농사지을 때였다. 농사지을줄도 모르는 군대표와  반란파출신 간부들이 층층이 올라 앉아서는 언제까지 밭갈이 하오, 언제까지 파종하오, 언제까지 모내기를 하오, 언제까지 비료를 치오 하며 <혁명적>진도만 추구하며 내키는대로 일년농사를 지휘했다. 그럴 때면 남주장은 각 생산대를 돌아다니며 이렇게 말했다.<청명전에 조이홰지를 하라든가 4월모를 내라든가 하는 그따위 허튼소리를 듣지 마오, 농사란 절기가 있는 법이요. 농사를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는 농민들이 제일 잘아오. 농민들이 제일 적합하다고 생각할 때에 파종하고 모내기하고 비료를 치면 되오. 농사는 우에서 내리는 진도보다도 가을에 먹을 알이 있게 짓는게 상수요..>그는 우리에게도 우에 정신에만 매달리지 말고 로농들의 의견을 잘 들으며 실제적으로 일하라고 일깨워주군 하였다. 다른 대대에서는 상급의 지시를 높이 받들고 남을 놀래우는 성과를 따내려고 4월 중순 모내기를 했다가 현지회의가 끝난 후에는 얼굼을 맞아 벼모를 몽땅 죽이기도 했다. 우리가 남주장의 말씀대로 실제적으로 일하느라 간혹 우에서 요구하는 진도에 도달하지 못하여 공사의 비판을 받게 될 때면 남명학부주장이 나서서 우리를 두둔해주기도 하였다. 농사는 농민들이 절기에 맞춰 짓는것이지 시도 때도 없는 간부들의 행정명령에 의해 지어지는것이 아니였다. 지금은 그따위 행정명령이 없이도 농민들이 알아서 농사지으니 일도 많이 단축되고 생산량도 훨씬 높아졌다. <혁명을 위하여> 농사짓는다고 떠들어댈 때보다 <자기를 위하여> 농사지을 때에 더 잘 되고 있지 않는가. 지금 돌이켜보면 정치돌출의 그 세월에도 실사구시하게 일해 나가던 남명학부주장과 같은 로간부들의 인민을 위한 사명감과 사업에 대한 책임성에 탄복하게 되며 실사구시하고 이신작칙하는 사업작풍에 머리숙여진다. 동시에 농민들과 한덩어리되여 동고동락하던 그러한 우량한 전통이 그리워진다.  2010년  <로년생활> 제7기(\"매진\"이라는 필명으로 발표)  
43    [수필] 그때 나는 9원에 울었다 댓글:  조회:1590  추천:72  2011-04-30
그때 나는 9원에 울었다 허룡석 날마다 점심때 쯤이면 우리 반급 교실이 있는 북경 중앙민족대학 2호 청사문어구에는 조그마한 흙판이 나걸려있었다. 거기에는 전국 각지에서 부쳐온 돈을 찾아가라는 학생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있다. 하지만 대학에 온지 1년이 넘어도 나는 그 흙판을 들여다 본적이 한번도 없었다. 왜냐하면 많은 학생들이 애타게 바라보는 그 흙판이 나와 아무런 인연도 닿지 않았기 때문이였다. 그때 벌써 70을 넘긴 량부모님과 위병으로 시름시름 앓는 녀동생을 두고 온 고향집에서 돈을 부쳐보낼리 만무했고 또 그럴만한 친척도 없었기때문이였다. 그런데 어느 하루 하학하여 곧바로 그 청사대문을 빠져나와 숙소로 돌아오는데 한 침실에 있던 털보가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나의 앞길을 가로막는것이였다 “로얼, 형님한테 돈이 왔습데.” 평소에도 성격이 덜덜한 그가 종종 덤벼치는데다 롱담도 잘하기에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럼 네가 찾아 가져라.” “야, 정말이라는데. 믿지 못하겠으면 같이 가보기오” 그는 불문곡직 나의 팔을 잡아끌고 대문앞으로 가 둘러보는 학생들을 비집고 소흑판앞에 나섰다. “저것 보오. 저게 로얼이름이 아니오?” 내가 미심쩍게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아니나다를가 나의 이름이 번듯이 적혀있었다. 응? 정말이네. 근데 누가 돈을 부쳐왔지? 생산대보조를 받으며 살아가는 우리 집에서는 부쳐올리 없고. 아마 또 누군가 물건사달라는 부탁을 한것같았다. 그때 지방에서는 부식품과 일용품이 몹씨 긴장한 때라 내가 방학에 집에 가면 원래 사업하던 공사기관간부들과 마을사람들 혹은 친척들이 물건을 사보내달라는 부탁을 적지 않게 해왔던것이였다. “로얼, 오후에 내 마침 위공촌에 갈 일이 있는데 돈을 내 찾아줄게.” “응, 그래라.” 위공촌은 학교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자그마한 시가지였다. 잠시후 그가 돈깍지를 찾아들고나왔다. 그때는 지금처럼 신분증이 없이도 그저 아무개라고 이름을 대고 싸인만 하면 돈깍지를 내주었다. “와, 로얼,  이게 뭐요? 90원이나 부쳐왔소, 오늘은 한턱 내야겠소.” “뭐야? 90원이라구?”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공사에서 단위서기로 있을 때 한달로임이 35원이였는데 90원이면 거의 석달로임과 맞먹지 않는가. 누가 이런 거금을 부쳐왔지? “정말이야? 그럼 오늘저녁 우리 침실에서 무조건 시스다.” 70년대에 온 북경에 시스(西四)란 거리에 조선족국수집이 딱 한집 있었는데 북경에 사는 조선족들과 북경에서 공부하는 조선족학생들의 단골집이였다. 그때는 큼직한 국수 한그릇에 30전, 개고기 한접시에 50전, 생맥주 한고뿌에 10전씩 할 때라 5원쯤이면 대여섯이 실컷 먹을수 있었다. “돈을 찾아오면 니 직접 우리 침실 애들을 다 일러라.” “알았음.” 털보는 익살스레 거수경례를 하며 저만큼 달아났다. 나는 반에서 나이 두번째라 동학들한테서 <로얼>이라 불렸지만 <로얼>구실을 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일년가도 호주머니는 말라죽은 빈대껍데기신세라 늘 침실 친구들의것을 얻어먹기만 했지 언제 한번 둘째형님다운 구실을 못했던것이다. 친구들은 우리 집 형편을 다 아는지라 별소리 없었지만 나는 늘 마음 한구석에 누구한테 빚지고 사는 기분이였다. 그러던차에 누군가 이런 거금을 부쳐왔다니 앞뒤를 가릴새 었었다. 한번이라도 우선 마음의 빚을 갚고볼 판이였다. 오후면 보통 자습시간이라 평소에는 늘 교실로 가지 않으면 도서관으로 갔는데 그날만은 홀로 숙소에서 자습하며 털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털보가 나타나지 않았다. 조금 더 기다려보지 하면서 거의 다섯시까지 기다려도 종무소식이였다.” “돈 찾으러 간다던 자식 어데가 뒤졌나?” 나는 더 기다릴수 없어 그를 찾아떠났다. 먼저 교실에 가 자습하는 한 반급 학생들과 물으니 털보가 썩 전에 가방을 찾아메고 도서관에 갔을거라는것이였다. 내가 널직한 도서관에 가 샅샅이 빗질하며 찾아보니 이 자식 글쎄 한쪽구석에서 태평스레 자전을 뒤져가며 뭔가 공부하고있는것이 아니겠는가. “야, 임마, 다섯시 다 되는데 네 여기서 뭘하냐?” 털보는 나를 쳐다보더니 히쭉 웃는것이였다. “니 침실애들을 다 일렀니?” 털보는 고개도 쳐들지 않고 심드렁히 대답했다. “못일겄소.” 나는 다가가 그가 보는 사전을 탁 덮었다. 저도모르게 큰소리가 나갔다. “뭐라구? 다섯시가 다 돼가는데 아직두 못일겄다는게 말이 되냐?” 그제야 그는 나를 쳐다보며 볼부은 소리를 하였다. “오늘은 그만두기오.” “뭐야? 그만두다니. 너 나를 깔보는거야?” “오늘 형님때문에 내 숱한 망신을 당했소,” “그게 무슨 소리야?” 그가 위공촌우전국에 가 당당히 돈깍지를 쑥 들이미니 잠시후에 돈 9원을 내보내더란다. 그래서 성격이 급한 털보가 도로 쑥 들이밀며 “호홀 칸바.”했단다. 돈깍지를 다시 들여다보던 복무원이 도로 9원을 내밀며 “니 호홀 칸바.”하더란다. 털보가 다시 들이미니 복무원이 다시 내밀며 “니 칸 춰러바?”하더란다. 그래서 털보가 화를 벌컥내며 “니 칸 춰러바, 쩌 부쓰 쥬쓰왠마?” 소리치며 돈깍지를 찬찬히 들여다보니 아닌게 아니라 9원이더란다. 이게 어떻게 된일이지? 아까 볼 때는 분명 90원이 아니였던가. 그런데 다시 보니 틀림없는 9원이였다.  그래 그는 제멋에 창피스러워 찍소리 못하고 교실로 돌아와 가방을 메고 도서관으로 왔단다. “옛소” 털보는 호주머니에서 돈  9원과 함께 령수증을 꺼내 나에게 넘겨주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나는 망연했다. 누구 돈이든 상관없이 먼저 어쩌다 한턱 쏠려고 했다가 이게 무슨 꼴인가. “임마, 이거라도 한끼는 톡톡하잖아?” “무슨 돈인지두 모르구 그걸 다 쓰구 로얼 빚구렁에 빠지겠소?” 그때 나는 반급에서 가장 어려운 학생의 하나로 평의되여 학교에서 1급 보조로 달마다 4원씩 지급받던터였다. 나는 그 돈으로 비누,치약 등을 해결했다. 그러니 나에게 있어 9원은 결코 작은 돈이 아니였다. 누군가 무슨 부탁을 하는 돈이 틀림없기에 나도 그 돈으로 시스에 가잔 말을 더는 못하였다. 누구 부쳐보낸것이더냐고 물으니 자기도 돈 액수에만 신경썼지 누가 보낸건지는 똑똑히 보지 못했다는것이였다. 북청더퍼리같은 자식, 그날저녁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누가 보낸 돈일가? 아무튼 며칠후면 편지가 따라 올테니 그때 다시 볼판이였다. 그런데 며칠후에 온 편지를 받다보니 녀동생이 보낸 편지가 아니겠는가. “…오빠, 연길 일보사에서 두번에 보내온 돈 4원, 5원을 모아 9원을 보냈는데 받았는지 모르겠소.. 추운 겨울이 닥쳐오니 한족 솜저고리라도 사입으라고 어머니가 한푼도 못다치게 했소…” 그제야 나는 생각났다. 여름방학에 집에 갔다가 매부네 집에 가게 되였다. 말말간에 나는 그 마을에서 보도선색을 하나 쥐고 원고 한편을 써서 연변일보사에 보냈었다. 마을에서도 누군가 보도선색을 알려주어 글 한편을 써서 또 한부 일보사에 보낸적이 있었다. 그것이 모두 신문에 보도되여 일보사에서 집주소로 원고료를 보내왔던것이였다. 학교에 오기전에 내가 공사단위서기로 있으면서 연변일보사의 골간통신원으로 있은데다 전 주에서 한족 5명과 조선족이 4명밖에 참가못한 연변일보사통신원강습반에 뽑혀가 두달남짓 일보사 편집기자선생님들을 따라 취재를 배우다보니 적지 않은 편집기자들을 알고 있는터였다. 또한 그분들이 내가 대학에 갈 때 많은 도움을 주신 분들이였다. 녀동생의 편지를 받은 날 저녁 나는 자리에 누워 생각이 많아졌다. 그 원고료 9원을 집에서 쓸것이지 나한데 그대로 보내다니. 아버지 어머니가 고령인데다 어머니는 내가 집에 있을 때에도 시름시름 앓는 몸이였다. 생산대일도 바로 못하는 녀동생도 입에 약을 달고있어야 했다. 신체가 비교적 건강하신 아버지가 반주술을 즐겨하시기에 공사에 다닐 때 로임이 나오면 근들이 술 한근이라도 사들고 들어오면 그렇게 반가워하시던 아버지가 내가 대학에 온후에는 한달가도 입에 술잔을 대보시지 못하신단다. 집에서 그 돈을 다 써도 호랑이 이빨에 끼인 마대쪼각이겠는데 먼 외지에 나와있는 나를 걱정하여 한푼도 차실없이 보내며 한족솜저고리를 사입으라 하니. 나는 생각할수록 불효를 저지른 자책감에 마음이 쓰리였고 자식에 대한 내리 사랑에 가슴이 뭉클해났다. 어려서는 아버지가 없으면 누굴 믿고 어머니가 없으면 누굴 의지하랴 했는데 날개가 굳어지니 늙으신 부모님을 팽개치고 앓는 녀동생도 돌보지 못하며 부득부득 우기고 학교로 온것이 과연 잘한 일인가? 평범한 농촌부녀이신 어머니는 내가 공사간부로 된것에 만족하시며 하루 빨리 손자는 안겨주지 않고 멀리 대학으로 떠나가는것을 탐탁치 않아 하셨다. 내가 학교에 온후에도 70을 넘기신 아버지가 늘 생산대보조를 받는것이 미안하여 그 년세에 젊은이들도 마다하는 그 높은 건조실꼭대기에 올라가 이영을 옌다시지 않는가. 나는 웬지 울음이 벌컥 나오며 자신을 걷잡을수 없었다. 한침실친구들이 그  흐느낌소리를 들을가봐 나는 이불을 머리위까지 올리쓰고 애써 소리를 죽여가며 오열하였다. 그것이 남의 돈이였다면 요구하는 물건을 사서 부쳐주면 다였겠는데 아버지가 술도 안 사드시고 어머니와 녀동생이 약도 안사고 보낸 돈이라고 생각하니 그렇게 가슴에 찔려왔다. 그것을 어찌 돈 9원이라고만 하랴. 그것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드팀없는 사랑이였고 오누이의 두터운 혈육의 정이였다. 나이 스물일곱을 먹도록 이렇게 오열하기는 처음이였다. 생각할수록 년로하신 아버지 어머니가 가엾었고 돈이 없어 약도 못쓸 앓는 녀동생이 불쌍했다. 이튿날 나는 그 돈 9원을 도로 집에 부쳐보냈다. 나는 학교의 보조로 솜옷도 타입고 있으니 걱정하시지 말라고, 하지만 이것이 내가 북경에 남을 기회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계기로 되였는지도 모르겠다. 졸업을 앞두고 어느날 반주임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학교에서 나를 학교에 남길 타산인데 남을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만일 학교에 남기 싫으면 북경에서 다른 단위를 선택해도 된다고 했다. 졸업림박이면 학생들이 서로 북경에 남으려고 갖은 연줄을 달아 앞뒤로 뛰여다니는 판인데 나는 생각밖으로 움안에서 떡 함지를 받아안은격이였다. 나는 흥분으로 들뛰는 가슴을 진정하며 잘 고려해보겠다고 선선히 대답했다. 마음이 마냥 둥둥 떴다. 촌놈이 꿈에도 생각지 않게 위대한 수도 공민이 된다니 어찌 마음이 들뜨지 않겠는가. 그때 나는 이미 연길에 약혼녀가 있는지라 약혼녀를 북경에 전근시켜와야 년로한 부모님을 모셔올수 있었다. 나는 약혼녀와 부모들한테 편지를 띄워 학교의 뜻을 전하며 그네들의 의사를 물었다. 약혼녀는 남든 돌아오든 나의 의사를 따르겠다고 했다. 그런데 집에서는 종무소식이였다. 반주임이 두번째로 나의 의사를 물을 때 나는 부끄럽지만 체면을 무릅쓰고 한가지 요구를 제기했다. 나는 이미 약혼한 몸인데 5년내에 안해의 호구를 북경에 들여올수 있으면 남는것을 고려해 보겠다고 했다. 반주임은 다른 사람은 무조건 남으려 해도 남기 어려운 형편인데 그런 과분한 요구까지 제기하느냐는듯 나를 쳐다보고는 학교에 반영은 해보겠지만 희망은 적을것이라고 했다. 며칠후 반주임이 나를 찾았다. 아니나다를가 지금 학교에나 북경의 어느 단위에나 10년, 20년씩 천리만리 갈라져 사는 부부들이 수두룩한데 학교에서 그런 담보를 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면서 나더러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란다. 사실 그때 북경에 지방의 호구를 들여온다는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하여 어떤 이들은 북경에 남기 위해 다년간 사귀며 뒤를 받쳐주던 지방의 련인을 차버려 일련의 풍파를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렇게 할수 없었다. 자기가 잘 되려고 남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을 할수 없었다. 나는 속으로 정말 북경에 남고싶었다. 하지만 부모님들은 생각하면 또 그 필림이 끊어졌다. 내가 북경에서 10년이고 20년이고 안해의 호구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다는 고향에서 고독한 나날을 보내시던 부모님들이 그렇게 쓸쓸히 세상을 뜨실것이였다. 더구나 건강하시던 아버지도 이미 중풍에 걸렸다지 않는가. 나는 고민에 빠졌다. 그러던차 어느날 뜻밖에도 고향의 한 마을에 사는 사촌형한테서 편지가 날아왔다. “…너의 편지를 받고 마다매(나의 어머니)는 날마다 눈물로 세월을 보낸다.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이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북경에 남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고 하며 락루하신다. 그러니 너도 잘 생각해 보아라. 내 생각에는 그래도 돌아오는것이 좋을것 같다…” 그 편지를 받고 나는 학교에 남으려던 생각을 깨끗이 포기하고 연변일보사에 편지를 띄웠다. 사실의 전후과정을 이야기하며 연길에 돌아가면 일보사에서 받아줄수 있겠느냐고 문의했다. 얼마후 일보사에서 받겠다는 회답이 왔다. 일보사에 온후에야 나는 일보사에서 나의 편지를 받고 이미 학교해당부문에 나의 정황을 까근히 알아 보았다는것을 알았다. 내가 일보사에 출근한지 2년만에 중풍에 시달리시던 아버지는 첫애로 태여난 손녀도 안아보시지 못하고 세상을 뜨셨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신후에야 어머니가  고향을 떠나 연길로 들어오셨다. 어머니는 우리와 함께 18평방메터 집에서부터 여러번 이사하며 12년간 우리와 함께 사시다 80여세에 세상을 뜨셨다. 세상을 뜨시기전 몇해는 치매와 중풍에 시달리셨다. 부모님들이 세상을 뜨신 후에야 나는 종종 그 돈 9원을 떠올리게 되였고 그때 만일 학교에나 북경에 남았더면 나의 인생길이 어찌 되였을가 하는 생각을 굴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일뿐 만일이란 있을수 없었다.  2010년 연변녀성 제9기      
42    [수필] 우정의 내음은 짙다 댓글:  조회:3265  추천:85  2011-04-27
우정의 내음은 짙다ㅡ중국작가협회 원 당조서기 김병화동지의 리직을 애석해하며 허룡석 1 지난 2월 18일, 간밤에 내린 큰 눈은 중국 개혁개방결책중심지 수도 북경을 은빛세계로 소복히 단장하였다. 이번 눈은 110여일만에 북경에 처음 내린 눈이란다. 전날까지만도 북경시 기온이 10℃로 봄날의 화창한 날씨였으나 이날은 령하5도로 뚝 떨어져 봄날의 매서운 한파를 몰아왔다. 하지만 장기간 가뭄에 시달리던 북경시는 이번 큰눈으로 가뭄해소에 큰 도움을 받게 되였으며 시민들은 오래동안 고대하던 첫눈을 반겨맞았다.    밖에서는 보기 드문 한파가 들이닥쳐도 군사박물관 부근에 자리잡고 있는 중국철도호털 3층 다공능청 (多功能厅)은 열기로 훈훈하였다. 이날 오전 9시, 이곳에서 중국작가협회 제7기전국위원회 제4차전체회의가 장중히 열리였다. 이번 회의는 워낙 새로 세워진 성급 직할시 중경시당위에서 책임지고 중경시에서 열기로 되여 지난해부터 모든 준비사업이 완료되였으나 중국작가협회에 중대한 인사변동이 있게 되여 회의지점이 림시로 바뀌여 북경에서 열리게 된것이였다.     회의에는 여느 때와 달리 중앙조직부 지도자와 중앙선전부 지도자 및 중앙조직부 간부 3국 책임자와 중앙선전부 간부3국 책임자들이 나와 있었다.     중앙조직부 지도자는 김병화(金炳华)동지가 년령원인으로 더는 중국작가협회 당조서기를 련임하지 않을데 관한 청구를 접수하며 리빙(李冰)동지를 중국작가협회 당조서기로 임명할데 관한 중공중앙의 결정을 통보하였다. 이에 앞서 지난해 12월에 중국작가협회 내부에서는 이미 중공중앙의 결정이 공포된 상태였다. 중앙조직부 지도자는 김병화동지가 지난 8년남짓한 동안 중국작가협회의 사업을 조직지도하면서 거둔 뛰여난 성과를 충분히 긍정하면서 선후로 중공중앙정치국 상무위원 리장춘 (李长春), 중공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며 국가부주석 습근평(习近平), 중공중앙 정치국 위원이며 선전부장 류운산(刘云山), 중공중앙정치국 위원이며 중앙조직부 부장 리원조(李源潮) 등 중앙지도동지들이 김병화동지의 사업성취를 아주 높이 평가하였다고 전달하였다. 중국작가협회사업을 주관하는 기간 김병화동지는 당중앙의 각항 정신을 견결히 관철집행하고 문학계에서 정확한 정치방향을 견지하였으며 사업사로가 명확하고 조직협조능력이 강하며 문단의 단결에 중시를 돌리고 착실하고 세밀한 사업방법으로 문학계인사들의 보편적인 인정과 광범한 호평을 받았다고 지적하였다. 중공중앙정치국 위원이며 중앙선전부 부장 류운산동지는 최근의 한 회시에서 김병화동지를 <고급간부들중의 모범>라는 평을 내렸다.     중앙조직부 지도자가 이처럼 훌륭히 사업해온 김병화동지에게 충심으로 되는 감사와 숭고한 경의를 드린다고 하자 회장에서는 오래도록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뒤이어 김병화동지가 자기의 소감을 피력하였다. 그는 자기가 중국작가협회 사업을 주관하는 동안 일부 일들을 하기는 하였지만 많은 면에서 중앙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면서 중앙지도동지들의 과분한 평가에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겸손히 말하였다. 그는 또한 자기의 사업에서 일정한 성과가 있다면 그것은 작가협회 여러 동지들과 전국 문학계인사들의 지지와 관심과 갈라놓을수 없다고 하였다. 평소에는 연설고가 없이도 청산류수마냥 이야기를 잘하던 김병화동지가 위원들에게 리직인사를 할 때에는 그간 문학계인사들과 맺어진 두터운 우정을 못잊어서인지 목이 메여 가담가담 말을 잇지 못하였다. 곁에 앉은 중국작가협회주석 철응동지도 김병화동지의 꾸밈새없는 다분한 정에 감화되여 자주 눈굽을 찍고 있었다. 김병화동지의 리직연설은 주석대에 않은 동지들뿐만 아니라 많은 위원들의 신금을 울려주었다. 위원들은 그와 함께 눈물을 머금고 김병화동지의 발언을 귀담아 들었다. 김병화동지가 다년간 작가협회의 사업을 지지해주고 자기를 아끼고 사랑해준 전국위원들과 이들을 통하여 전국 문학계인사들과 벗들에게 충심으로 사의를 드린다며 허리굽혀 정중히 인사를 올릴 때 회장에서는 오래동안 박수소리가 그쳐지지 않았다. 박수소리가 그치지 않자 김병화동지는 일어서 다시 한번 위원들에게 허리굽혀 사의를 표했다. 밖에서는 한파가 기승을 부려도 장내에는 화창한 봄빛이 무르익었으며 동지간의 두터운 난류가 흘렀다. 회의 휴식시간이 되자 나는 주석대아래에 찾아가 김병화동지가 내려오기를 기다려 그와 굳은 악수를 나누며 <참 섭섭합니다. 인제 정이 깊어질가 하니 이렇게 갈라지게 되네요.>라고 하자 김병화동지는 나의 손을 힘있게 잡아주며 <임직시간은 제한있지만 우정은 영원할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아직 중국작가협회 부주석 직무는 그냥 있으니 전국회의때면 종종 만날수 있을거라고 하였다. 결혼후 전보다 훨씬 더 젊고 이뻐진 철응주석은 주석대에서 내려온 후에도 눈굽은 찍으며 <김서기 말씀이 너무나 심금을 울리네요.>라고 했다. 2 김병화동지는 올해 66주세이다. 1965년에 대학을 졸업한 김병화동지는 오래동안 대학에서 철학교수, 책임자로 사업하다가 1990년부터 2000년 9월까지 근 10년간 중공상해시위 상무위원 선전부장으로 있다가 그해 10월 15일에 중국작가협회 당조서기로 발령받아왔다. 그때 김병화동지도 자기가 중국작가협회에 가 사업하게 될줄은 생각지 못했다고 했다. 정식 발령이 내리기전 중앙조직부 지도자는 김병화 동지를 데리고 당시 중국작가협회 주석이지만 장기간 병석에 누워있는 파금한테 가 “이 동무를 중국작가협회사업을 주관하는 책임자로 보내려 하는데 어떻겠는가”고 의견청취를 하니 파금은 제꺽 김병화동지의 두손을 잡으며 동의한다고 표시했단다. 함께 상해에 있으며 파금도 김병화동지의 래력과 능력을 잘 알고 있었던것이였다. 이렇게 되여 김병화동지는 생소한 작가협회사업을 주관하게 되였다. 다년간 선전부장으로 있으며 신문, 출판, 문화사업을 령도해온 김병화동지는 아주 빨리 작가협회사업에 적응되였을 뿐만 아니라 창발성적으로 작가협회사업을 이끌어 나갔다. 그는 우선 중국작가협회가 언제든 작가들이 찾아와 <몸을 녹일수 있는>  따뜻한 집이 되여야 하며 작가협회기관 일군들은 작가들이 믿어줄수 있는  친인과 벗이 되여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번마다 전국회의에 참가하거나 작가협회에 갈 때면 거의 모든 일군들이 너무나 친절하고 착실하여 고맙다고 감사를 드리면 작가협회일군이 하는 말이 김병화동지가 온후부터 이렇게 하도록 엄격히 요구한다고 하였다. 솔직히 오랜분들의 말에 의하면 지난날의 중국작가협회는 이렇지 못하였으며 작가들간의 정도 이렇게 깊지 못하였다고 했다. 김병화동지는 중국작가협회사업을 주관하면서 작가들을 위하여 많은 실제적인 사업을 하였다.  그는 중국주류문단의 번영과 발전을 위하여 로심초사하였을 뿐만아니라 편벽한 서부지구와 변강소수민족지구 문학사업의 번영과 발전을 위하여서도 커다란 심혈을 기울렸다. 그는 중국의 소수민족문학은 중국주류문학의 중요한 구성부분이라고 강조하면서 자기가 친히 소수민족문학사업을  주관하고 소수민족지구 작가들의 의견을 참답게 듣고 구체문제해결을 위하여 실제적인 조치들을 대기도 하였다. 중국작가협회에서는 국가민족사무위원회와 손잡고 해마다 전국소수민족문학번역회의를 소집하고 김병화동지가 친히 회의를 사회하면서 소수민족문학창작과 번역사업경험을 교류하고 존재하는 문제를 연구분석하면서 민족문학창작 및 번역사업의 번영과 발전을 도모하기에 힘썼다. 이러한 관심과 중시는 여러 면에서 효력을 과시하였다. 중국작가협회산하 로신문학원에서는 소수민족문학 작가와 번역인재를 양성함에 있어서 학원수를 증가하고 교수내용을 보다 다채롭게 하도록 하였으며 소수민족작가들이 사회를 료해하고 사회와 접촉할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마련해주도록 하였다. 이로하여 많은 소수민족작가들이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보고 처음으로 수도 북경에 와보고 처음으로 연해지구에 가보고 처음으로 5성급 호텔에서 자보고 처음으로 산해진미를 먹어보는 감격적인 이야기들을 수두룩히 남기였으며 조국의 개혁개방 30년의 위대한 성취를 자기의 몸으로 체험하게 하였다. 중국작가협회에서는 자금까지 대여주며 여러모로  소수민족지구 작가협회사업을 지지해주고 소수민족모어창작을 고무하였으며 소속 잡지사와 출판사들에서 소수민족모어창작 작품번역량을 대폭 늘여 발표하고 출판하게 함으로서 중국주류문단과의 교류를 가속화하였다. 지난해부터는 중국작가협회 8천여명 회원들에게 소속 신문과 잡지를 무상으로 주문해주고 있다. 인구가 적은 소수민족 문학인재양성과 회원가입, 문학상 수상 등 면에서 언제나 푸른등을 켜주며 전국 55개 소수민족이 모두 자기의 작가와 회원을 가지고 있도록 대책을 대였다.     김병화동지는 가는 곳마다 기층작가협회와 작가들을 위하여 대변하였다. 2007년 9월에 신강위글자치구에서 전국소수민족문학번역사업회의를 할 때에 자치구당위와 정부에서 차린 연회석상에서 김병화동지는 중공중앙정치국 위원이며 신강위글자치구 당위서기인 왕락천(王乐泉) 동지에게 신강위글자치구작가협회가 경제면에서 어려움을 겪고있는것 같은데 왕서기께서 많이 보살펴주기를 바란다고 하자 왕락천동지는 <중국작가협회 김서기가 여러분들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는데 어떻게 듣고만 있겠는가>고 하면서 당장에서 자치구작가협회에 해마다 50만원씩 해결해주도록 하겠다고 표시하였다. 이에 우리는 자기일이런듯 기뻐하며 뜨거운 박수로 환영과 감사를 표하였다. 신강작가협회주석은 너무나 놀랍고 뜻밖이여서 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왕서기는 또 익살스럽게 “이 기회에 다른 부문에서도 돈을 달래서는 안되며 작가협회에 내려가는 경비를 문련에서 뜯어내서도 안된다”고 하여 연회에 참석한 작가들의 즐거운 웃음을 자아내였다. 신강작가협회는 아직 문련에 소속되여 있기에 경비가 모두 문련의 회계과를 거쳐야 했던것이다. 왕락천동지가 자기가 앉은 상의 손님들에게 돌아가며 술을 권할 때에 내가 <왕서기께서 이처럼 작가협회사업을 지지해주시니 우리도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같은 작가협회일군으로서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하니 왕락천동지는 <조선족은 문화가 발전한 민족입니다. 많은 면에서 우리를 앞서가고 있지요.>라고 하는것이였다. 그해부터 신강위글자치구 작가협회에서는 정부로부터 해마다 50만원씩 해결받게 되여 신강의 문학사업이 전에 없는 발전을 가져오게 되였다. 하여 신강작가협회주석들은 중국작가협회에서 여는 회의때마다 이것은 김서기공로라고 감격해하였다. 김병화동지는 문학사업차로 산동성에 갔을 때에도 산동성위 서기한테  작가협회사업을 보다 잘 지지할것을 건의하였다. 그후 산동성에서는 성작가협회주석단 겸직부주석들도 임직기간에 정치경제면에서 부청급대우를 받도록 해주었다. 겸직부주석들이 부청급대우를 받는다는것은 전국에 둘도 없는 규례를 창조한것이였다. 다른 지구 작가협회주석들은 이런 인심을 고무하는 이야기들을 들을 때면 김서기가 자기네 고장에도 한번 내려왔으면 좋겠다고 우스개를 하였다.  전국 각 성, 시, 자치구 작가협회책임자들은 김병화동지가 중국작가협회사업을 주관한후 전국의 문학창작사업에 보다 생기발랄한 국면이 나타났으며 전보다 훨씬 조화로운 문단이 형성되였다고 입을 모았다. 소수민족지구 작가협회책임자들은 김병화동지가 소수민족문학사업을 친히 주관한후 소수민족문학사업은 전례없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였으며 이로하여 무한한 고무와 편달을 받게 되였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3     내가 김병화동지를 알게 된것은 2년 남짓한 시간밖에 안되지만 김병화동지의 세련된 사업능력, 드높은 사업책임심과 성현다운 고매한 덕성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으며 두터운 우정을 맺게 하였다. 2006년 8월 내가 작가협회사업을 주관하게 된후 처음으로 중국작가협회에서 소집하는 회의에 참석하게 되였다. 나는 철응주석의 소개로 중국작가협회사업을 주관하는 김병화동지를 만나뵙게 되였다. 그의 사무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서 김병화동지는 이미 다른 사람을 통하여 내가 일보사에서 <착오>를 지고 작가협회에 오게 된것을 개략적으로 알고있는것 같았다. 나는 실사구시하게 회보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내가 당기관보에서 작가협회에 오게 된 경위를 낱낱히 이야기하였다. 김병화동지는 나의 아야기를 듣고 미소를 지으며 <문제의 근원은 동무한테 있지 않지만 일은 일보사에서 생겼으니 사장이 책임을 회피할수는 없지.>라고 하는것이였다. 대도시의 큰 신문사를 령도해온 오랜 선전부장출신이라 시비가 분명했다. 그러면서 김병화동지는 함께 작가협회사업을 하게 되여 기쁘다고 하면서 자기가 작가협회에 오게 된 경위도 스스럼없이 이야기해주는것이였다. 그가 선전부장출신이여서 그런지 이야기를 나눌수록 말이 통했고 감정이 통했다. 오래간만에 마음이 통하는 지도자와 이야기를 나누니 마음이 후련해났다. 김병화동지는 일보사 사장이 작가협회에 와 일하기는 전국적으로 처음인것  같다면서 작가협회에 오니 어떤 감수가 있느냐고 물었다. 당의 언론기구는 규률성이 강하고 정책성이 높지만 회원제를 실시하는 작가대오는 작가마다 개성이 강하고 상대적으로 자유화경향이 많아 내리먹이는 행정식으로는 잘 통하지 않으며 많이 토론하고 협상하며 작가들과 마음을 주고 받으며 벗으로 사귀여야 작가협회사업을 잘 할수 있을것 같다고 하니 김병화동지는 아주 찬성하면서 작가협회사업은 자기로서의 개성과 특성이 있으니 당정기관의 사업작법을 그대로 옮겨와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번 대화를 통하여 나는 전국문단과 소수민족문단 상황 등 많은것을 처음으로 료해하게 되였고 새로운 리치를 깨닫게 되였으며 작가협회사업에 점차 마음을 붙이게 되였다. 그번 회의기간에 중국작가협회주석단에서는 나를 전국위원으로 보충선거 하였고 자격이 모자라지만 사업수요로 1년후에 나를 중국작가협회 회원으로 받아주기도 하였다. 연변작가협회제8차 회원대표대회를 앞두고 한때 연변문단에서는 작지 않은 풍파가 일어났었다. 작가들은 작가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해당부문 일부 책임자들의   사업작법에 반발하여 선후 두차례 수십명 작가들이 련명으로 주당위서기에게 편지를 보내는 일이 발생하였으며 연변작가협회 8기주석단구성문제를 둘러싸고 시야비야로 벅적거렸다. 대체로 세가지 부동한 견해들이 있었는데 이런 문제를 잘 풀어나가지 않으면 작가대표대회에서 당위의 의도에 어긋나는 큰 이변이 일어날수 있는 상황에 처해있었다. 해당부문에서는 작가들에 대한 설복해설사업을 꾸준히 하는 한편 중국작가협회에 연변작가협회의 상황을 회보할 필요성을 느꼈다. 나는 김병화 동지에게 전화로 대표대회의 준비상황과 당면에 부딪치고 있는 문제점들을 간단히 회보하면서 북경에 들어가 중국작가협회의 지시를 듣고 싶다고 하였다. 김병화동지는 지시라고 할것은 없지만 함께 토론은 해보자고 하였다. 하여 나와 주당위선전부 간부처장이 함께 북경으로 떠났다. 북경에 도착하여 우리가 김병화동지에게  연변작가협회 제8차회원대표대회 준비상황을 회보하겠다고 하니 김병화동지는 집에 있는 당조성원과 주석단성원들을 불러다 함께 듣자고 하면서 해당 책임자들을 모두 불러왔다. 김병화동지는 회보를 듣고나서 작가협회의 사업은 당정기관과 달라 보다 세심한 사업이 필요하며 작가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작가들과 많이 협상하여야 했었는데 일이 이미 이렇게 되였으니 당위의 권위성도 확보하고 작가들의 의사도 존중할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면서 지난날의 차액선거(差额选举)를 그만두고 정액선거(等额选举)를 하는것이 어떻겠는가고 제의하였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보통 차액선거를 하여 민주를 충분히 발양해야 하지만 특수상황에서는 정액선거도 할수 있다는것이였다. 토론을 거쳐 우리는 그 의견을 접수하기로 하고 돌아가 주당위에 회보하기로 하였다. 중국작가협회에서는 연변작가협회 제8차회원대표대회 준비진전을 아주 관심하였으며 대표대회가 열릴 때에는 중국작가협회 당조성원이며 서기처서기인 장건동지를 파견하여 참석시켰다. 중국작가협회, 주당위와 대표들의 공동한 노력으로 대표대회는 순조롭게 열렸으며 주당위에서 내놓은 주석단후선인들도 기본상 순조롭게 선거되였다. 중국작가협회와 주당위에서는 선거결과에 기본상 만족해하였다. 이튿날 철응주석과 김병화서기가 메시지를 보내와 연변작가협회 제8차회원대표대회가 순조롭게 열린것을 축하하고 나의 당선을 축하하였다. 이로부테 나의 작가협회사업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였으며 중국작가협회와의 접촉이 잦아지고 김병화동지를 만날 기회도 많아지게 되였다. 나는 북경에 갈 기회가 있게 되면 철응주석과 김병화동지를 찾아 사업정황을 회보하고 중국문단이 돌아가는 새로운 정황들을 료해하였으며 사업에 도움되는 많은 조언들을 듣군 하였다. 그때마다 김병화동지는 작가들이 근간에 출판한 서적들을 내주기도 하고 햇차라며 자기에게 있던 록차, 우룡차들을 내주기도 하였다. 하여 우리 직원들도 김병화서기가 보내준 차들을 종종 맛볼수 있었다, 2007년 9월 중순이였다. 내가 신강에서 열린 전국소수민족문학번역사업회의에 참가했다가 북경에 돌아와 중국작가협회초대소에서 하루밤 묵게 되였다. 이튿날 내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오전 9시에 작가협회에서 대기시켜준 차를 타고 공항에 나가려는데 김병화동지의 비서가 전화를 걸어와 김병화서기가 나더러 좀 기다리라 한다는 것이였다. 어제저녁에 김병화서기가 내 침실에 와 한시간남짓 혀물없이 아야기를 나누다 갔는데 채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는가? 15분가량 지나 김볗화동지가 급급히 내 침실에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월병 두곽이 들려져있었다. 이제 일주일이 지나면 추석인데 이 월병을 갖고가 맛을 보라는것이였다. 알고보니 김병화동지가 아침일찍 친히 한 5셩급호텔에 가 사온 고급월병이였다. 너무 일찍하여 호텔상점이 문을 열지 않아 기다리다보니 이렇게 늦어졌다는것이였다.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나는 김병화동지의 성의에 감격되여 목이 꺽 메였다. 성부장급 고급간부가 지방의 자그마한 일군한테 이런 걱정을 다해주다니. 나는 김병화동지의 두손을 꼭 잡고  연신 사의를 표했다. 김병화동지는 미소를 지으며 친구끼리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의 비서는 가만히 누구한테나 다 이러는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날 북경을 떠나오는 나의 마음은 하루종일 평온하지 않았다. 이번 추석을 맞으며 우리 직원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김병화동지가 보내준 고급월병을 맛보게 되였다. 2007년 6월말 나는 중국작가대표단 부단장의 신분으로 중동 아랍나라들을 방문하게 되였다. 북경에 도착한 날 저녁 김병화동지는 중국작가협회당조를 대표하여 몇몇 당조성원들과 함께 작가협회부근의 한 호텔에서 연회를 차려 우리 대표단 성원들을 환송하였다. 그때에야 나는 해당일군한테서 내가 중동방문대표단 부단장이 된 경위를 알게 되였다. 해당부문에서는 처음에는 대표단일행이 모두 5명이여서 부단장을 둘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김병화동지가 대표단일행 자료를 심사할 때에 허룡석도 지방작가협회주석인데 부단장은 돼야 하지 않겠는가고 했단다. 아마 해당일군들은 대표단인원도 적거니와 나의 행정급별이 부단장이 될 자격이 안된다고 고려했을수도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김병화동지는 행정급별만 볼것이 아니라 전국43개 단체회원책임자는 모두 동등한 대우를 해줘야 한다고 했단다. 그러잖아도 새로 올라와 력사적 정황을 잘 모르는 일부 성급 단체회원 책임자들이 지구급인 연변이 어떻게 성급작가협회만 들수 있는 중국작가협회 단체회원에 가입했느냐고 이의를 갖고 있는줄 나도 여러번 들었으니 김병화동지가 듣지 못했을리는 없었을것이였다. 하여 내가 섭섭해하지 않고 연변작가협회가 섭섭해하지 않도록 이처럼 뒤에서 세심히 처사해주는것이리라. 마치 다심한 어머니가 작고 여린 막둥이가 여러 형들의 업심을 당하여 마음에 상처라도 받을가봐 사랑을 더 쏟아붓듯이. 나는 모태주병을 들고 김병화동지한테 술 권하러 건너갔다. 김병화동지는 주량이 작아 포도주를 마시고있었다. 나는 복무원더러 작은 잔을 가져오게 하여 모태주를 철철 넘치게 부어드렸다.                       <이는 저의 성의이자 연변조선족작가들 아니 전국조선족작가들의 성의입니다. 하고 싶은 모든 말이 이 술잔에 담겨져있으니 이 잔을 들어주십시요.> 김병화동지는 <부단장이 주는 술은 마셔야지.>하면서 단모금에 잔을 비웠다. 2008년 5월의 어느날이였다. 북경에서 오는 전화별이 울렸다. 전화를 받아보니 뜻밖에도 김병화동지였다. 그는 열정적으로 문안을 하고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중국, 한국, 일본 세 나라 작가협회에서 협상을 거쳐 올해부터2년에 한번씩 동아세아문학포럼을 갖기로 하고 각 나라에서 위원을 내오기로 했습니다. 중국측 위원으로 허주석도 넣기로 했는데 의견이 없습니까?> <의견이라니요? 대단한 영광인데요. 참 고맙습니다. 자그마한 연변작가협회를 이렇게 돌봐주셔서…> 중국측 위원이 10명, 20명일 경우 연변작가협회를 넣어주어도 고마운 일이겠는데 후에 알고 보니 중국측 위원이 모두 4명뿐인데 내 이름을 넣어주었던것이였다. 이는 중국작가협회에서 연변작가협회를 그만큼 념두에 두고있다는 것을 말해주는것이 아니겠는가. 하여 나는 중국측 위원의 신분으로 지난해 국경절기간에 철응주석을 단장으로 하는  중국작가대표단에 들어 한국에 가 <한일중제1회동아시아문학포럼>에 참가하였으며 <네트웨크문학과 그 발전전망>이란 론문을 발표하게 되였다. 이번 대표단에는 막언, 소동, 손혜분 등 중국문단의 거두 10여명이 참가하여 한국문단을 들썽하였다. 2년이란 시간은 길지 않지만 사업가운데서 맺어진 우정은 갈수록 깊어갔다. 지난해 3월에 복건성 복주에서 중국작가협회 제7기전국위원회 제3차전체회의를 할 때에 내가 김병화동지한테 가만히 물어보았다. <듣자니 금년내에 퇴직하신다는 말들이 있던데 사실인가요?> 김병화동지는 사실이라고 하였다. 나는 <많은 작가들과 회원단위 책임자들이 김서기가 더 하셨으면 하는데  더 하실 방법은 없는가>고 물었다. 그는 <이젠 나이도 많고하니 조직의 배치에 복종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소조토론 때에도 많은 위원들이 회의내용을 토론하다도 김병화동지의 리직문제를 둘러싸고 열렬히 의론하기도 했다. 어떤 위원은 김병화서기가 안하면 그만큼한 령도를 찾기 힘들다고 했고 어떤 위원은 작가협회위원들이 련명으로 중앙에 편지를 보내여 김병화동지가 몇년을 더 사업할수 있게 해달라고 제기하면 어떨가고도 했다. 어떤 로작가는 울먹울먹하면서 우리는 절대 김병화서기를 보내서는 안된다고 격동돼 하기도 했다. 내가 중국작가협회 당조성원이며 부주석인 고홍파동지에게 <위원들이 모두  김서기의 리직을 두고 저렇게 섭섭해 하는데 김서기가 사업을 더 하게 할수는 없는가>고 물었더니 고홍파동지는 <김서기도 이젠 70이 가깝습니다. 그분도 너무 피로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은 다 같으나 김서기도 이젠 좀 쉬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했다. 그말을 듣고보니 과연 그렇기도 했다. 어느 부문보다도 개성이 강하고 복잡다단한 문단의 사업을 8년남짓 하였으니 사실 얼마나 피곤했겠는가. 모름지기 속도 많이 썩였을것이고 근심걱정도 많았을것이였다. 일을 잘 하고 많이 할려다보면 스트레스도 그만큼 많이 쌓였을것이였다. 또 한면으로 생각해보면 우리 욕심만 차릴 일이 아니였다. 김서기가 만년에 건강하게 유쾌히 오래 사는것이 또한 우리의 바램이 아니겠는가. 이번기 전체회의에서 전국위원들이 그토록 걱정하고 섭섭해하던 일이 현실로 되였다. 김병화동지는 8년 4개월동안 중국문단을 위하여 로심초사하다 부끄럼없이 자리를 내게 되였다. 하지만 시장경제화 개혁개방시기에 김병화동지처럼 뚜렷한 사업성취로, 고매한 덕성으로 군중들의 애대를 받으며 자리를 내는 간부도 흔치는 않을것이다. 중앙과 지방, 부문과 단위들에 모두 김볗화동지와 같이 능력있고 덕성높은 간부들이 자리잡고 앉아 사심없이 일심정력 당의 사업을 위하여 일한다면 우리 나라의 현대화는 더욱 가속화될것이며 여러 민족 인민들은 마음편히 즐겁게 살아갈것이다.  훌륭한 지도자를 모시고 함께 일한 시간은 길지 않지만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러 존경하고 싶은 김병화동지가 리직후 쾌락하고 건강하기를 기원한다. 우리들 사이에 맺어진 우정의 내음은 오래도록 내 가슴속에서 감돌것이다. 새로 부임된 리빙동지는 1949년 11월 생으로 흑룡강성사람이다. 그는 길림대학졸업생이며 재직박사연구생학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선후로 공청단중앙, 중앙판공청에서 사업하였으며 중공중앙선전부 부비서장, 국무원신문판공실 부주임 사업을 력임하였다. 중국작가협회와 전국의 문단은 새로 부임된 리빙동지에게 새로운 기대를 걸고있다.   2009년 <연변문학> 제3기
41    [추천사]허룡석(2010.2.7~13) 댓글:  조회:1255  추천:62  2011-02-09
[금주의 문인 추천사(2010.2.7~13)]연변작가협회 주석 허룡석씨가 지난 1월 퇴임했다. 허룡석씨는 자신의 퇴임심정을 상세하게 그린 <창작후기-인생이 다시 태여나도록>(<장백산>2010년 6월호)에서 취임초기 어떤 평론가가 자기에게 연변작가협회를 <제2정신병원>으로 주석직은 <원장>직이라고 비유한적이 있다고 말하고 그후 과연 \"<병원>에서 <원장>질하기가 상상하던 것보다도 훨씬 힘들고 귀찮아 <위생청(상급기관 지칭-편자주)에 찾아가 펀펀한 사람을 <정신병환자>로 만들기전에 앞당겨 <퇴원>시켜줄것을 신청하기도 했었다\"고 회고했다. 허룡석씨는 이 글에서  <제2정신병원><원장>직을 맡은 4년반기간 이런 <환자>(사이비 작가)들과 현 연변작가협회를 둘러싼 조선족문단의 시시비비로 얽힌 숱한 <이상한 이야기>들을 엮었다고 회고하면서 이러한 전개상황을 <제2정신병원 원장>제하의 장편소설로 형상화하겠다고 밝혔다.그러나 허 전주석은 \"<환자>는 필경 소수였고 다수의 회원들은 말썽거리일에 관여하려 하지 않고 문단의 화목을 바라며 열심히 자기글을 써나갔\"고 \"또한 공평공정하며 량심있고 원칙있는 많은 분들이 여러모로 나의 사업을 지지해주고 위안해주고 리해해 주기도 했기에 오늘까지 <맞아죽지 않고> 그런대로 <원장>을 지탱해 올수있는 힘이 되여주었다\"고 피력하기도 했다. 4년반,길지도 짧지도 않은 주석 임직 기간,허룡석씨는 연변작가협회의 발전과 조선족문단의 발전에 공도 세웠고 마음고생도 많이 했다.그가 퇴임한후,연변작가협회는 당분간 주석직이 공백으로 남게 되였고 현 1인자는 당조서기로 연변주당위 선전부 부부장인 위아리(한족)가 겸직으로 임명되였고 구체실무는 2인자로 우요동부주석(만족)이 맡았으며 상근 부주석은 최국철씨(조선족)가 그대로 맡고 있다.조선족작가가 90%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연변작가협회 도대체 어디로 어떻게 갈것인가?역시 허룡석 전 주석이 퇴임하면서 남긴 문제이기도 하다.허룡석주석의 재직과 퇴임은 연변작가협회의 현주소를 극명히 나타내는 축영으로 조선족문학사에 각인될 사변인지도 모른다. 또한 조선족문단의 재생을 위하여 그가 계획하는 <제2정신병원 원장>이 하루빨리 집필발표되기를 기대하면서 허룡석 전 주석을 금주의 문인으로 추천한다.문학닷컴 편집국
40    [창작후기]인생이 다시 태여나도록 댓글:  조회:2373  추천:190  2011-02-08
창작후기(수개고)인생이 다시 태여나도록허룡석세월이 류수와도 같다더니 내가 연변작가협회에 와 몸을 담근지도 어언  5년철에 잡아든다. 사회의 시시비비한 여론과 일부 문인들의 욕총을 등에 지고 울며 겨자먹기로 작가협회의 문턱을 넘은지가 어제 같은데 이젠 퇴직할 나이가 가까와 온다. 천근무게 발길을 들여놓은 첫해는 문단의 <지진>과 <동란>속에서 보냈고 회원대표대회가 열린후부터는 마음을 열고 문인들과 친구가 되려고 노력하며 지내왔다.전국소수민족지구 당기관보중 유일하게 장장 9년간이나 시장으로 내몰려 장기간 로임도 제대로 내주지 못하던  연변일보사에서 내가 마지막 7년을 사장, 주필로 헐떡이였다. 다년간 로임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도 조직을 믿고 울분을 조용히 삭여오던 흥분된 편집기자들이 나중에는 조직이란 <보뚝>을 터뜨리고 프랑카드를 들고 주당위청사앞에 가 집단청원했다. 이튿날에는 분노한 퇴직일군들이 프랑카드를 들고 가 청원하며 원망스러운 당간부들에게 삿대질했다. 전국을 놀래운 기자들의 청원사건이 전국의 유일한 모범자치주에서 터졌다. 집정당의 기관보를 꾸리는 기자들과 거기에 한생을 바쳐온 퇴직일군들이 <어머니>청사앞에 가 <젖 좀 주소>하며 집단청원을 벌리기는 전국에서도 그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엄중한 정치> 사건이였다. 우에서 내리 누르고 아래에서 올리바치는 사면초가에 몰려 갖은 곤욕을 치르면서도 빈손으로 19층 청사를 지어놓고 다년간 노력했던 로임정책이 락실되니 본인은 광채롭지 못한 딱지를 쓰고 본의아니게 작가협회로 <승진>하게 되였다. 예상했던바와 같이 장기간 <놀던 물>에서 밀려 고패치는 <낯선 물>에 <풍덩> 빠지고보니 첫시작부터 온몸이 얼어들며 뻣뻣해났다. 일부 문인들이 <착오를 지고 (승진)해온 간부>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쌔려보았다. 지어 첫 주석단회의에서 어느 <각오높은> 어른은 “일보사에서 착오를 지고 쫓겨온 사람이 어떻게 작가협회주석을 하느냐?”고 공개적으로 힐문했고 어떤 어른은 나를 회원과 리사로 보충, 통과할 때에도 손자밥 떼먹은 <할배>마냥 천정을 쳐다보며 손을 들지 않았다. 또 어떤 어른은 인터넷에 글을 올려 문학도 모르는 사람이 주석을 한다고 명치끝이 따끔하게 꼬집기도 했다. 비록 <서리맞은 뱀>의 신세라도 마음은 파랗게 살아 “고래가 뭍에 밀려나니 개미들의 침노를 받는구나” 하는 허구픈 생각이 갈마들었다. 작가협회란 <이상한> 단체에 와  평소에 하찮게 보아오며 접촉하기조차 꺼려하던 <이상한> 사람들의 칼도마에 올라 이리저리 주물리운다는것이 그렇게 납득이 되지 않았고 서글퍼졌다. 당당하던 당기관보의 사장도 <날개가 부러지니> 이런 <모욕>과 <릉욕>을 당하는구나. 지방의 자그마한 사장도 <뭍에 밀려나> 이 꼴을 당하는데 국가주석을 지내던 류소기나 당의 총서기를 맡았던 등소평 등 큰 어른들이 억울하게 타도되여 <혁명파>란 허울을 쓴 무지막지한 인간들의 갖은 릉욕과 고통을 당했을 때의 그 심정이 어떠했을가 하는 주제넘은 생각도 굴려보았다. 비바람잘새없는 인간세상에서 사람이 살다보면 사업상의 불운, 개인적인 불행을 겪지 않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보아진다. (적지않은 경우 운수탓이기도 하지만) 그런 위기에 봉착해도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통제력을 잃지 않는 사람은 더욱 많지 않을줄 안다. 불행을 여하히 대처하느냐는 앞날을 여하히 예측하느냐에 크게 좌우된다. 나는 벙어리 랭가슴 앓듯 정신적 고통을 마음 밑바닥에 가라앉히며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것은 좌절했다 하여 락심하지 않고 성공했다 하여 지나친 기쁨에 도취되지 않는것이다.”는 면목도 모르는 나폴레옹의 명언으로 자신을 편달하기도 했다. 솔직히 사회에서는 문학이 전성기를 맞을 때에도 문인들을 <이상하게> 보는 시선이 많았다. 단위마다 <이상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문학을 한답시는 관계도 없는것 같지는 않다. 문학이 저조기를 맞고있는 지금은 그런 시선이 더하면 더했지 짝지지는 않을것이다. 어떤 사람은 작품을 보고 작가를 우러르다가 우연히 한번 만나보고는 만나지 않기보다 못했다고 후회했고 어떤 사람은 명성만 듣고 찾아갔다가  벌레를 삼킨듯 오만상을 찡그리며 돌아서기도 했다. 물론 극소수 문인들의 짓이겨진 형상이기는 하나  쥐 한마리 한가마 죽을 흐린다고 사회상에서 문단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망가져있음을 시인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하기에 나도 정상적인 사람들에게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가봐 소설을 쓴답시던 80년대초에도 작가협회 회원에 가입할 생각은 꼬물도 하지 않았었다.그런데 하늘의 풍운 측량키 어렵고 인간의 화복 짐작키 어렵다더니 몇십년후에 내가 그런 <이상한> 단체의 《두목》으로 오게 될줄이야 누가 꿈엔들 생각했겠는가. 와보니 아닌게아니라 첫시작부터 일부 문인들의 언행이 <이상하게> 안겨왔다. 일보사사장으로 있을 때에는 굽석굽석하던 사람들도 벼랑에서 떨어져 정신을 추지 못하는 사자는 마음대로 발길질해도 네가 감히 나를 어쩔소냐고 깨고소해하는 당나귀의 심사를 가졌는지 도처에서 불량한 여론을 일으키고 장애를 설치했다. C.h스퍼선의 말과 같이 “진실이 장화를 신고있는 동안 거짓과 비난이 온 세상을 돌아다닌다”는 격이였다. 또한 권력과 간부들에게 남다른 불만과 반감을 가지고 있는 일부 문인들에게 내가 <복수>의 과녁이 되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어느 한번 한 평론가는 술좌석에서 롱담으로 나에게 이런 말을 한적있다. “시인, 작가와 정신병환자는 종이 한장 차이요. 당신은 지금 정신병원 원장으로 온셈이요. 정신병환자들과 어울리자면 당신도 정신병환자질 해야 할거요..” 나는 사회에서만 그렇게 보는가 했더니 <환자>들도 그런줄은 아는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그 말을 우스개로 받아넘겼다. “당신들 <정신병환자>들끼리 그런 말을 했으니 망정이지 주석이란 작자가 그런 소리를 했더면 <원장>이 되자마자 <정신병환자> 들한테 맞아 죽었을거요.” 그러면서도 <제1정신병원>에서는 수적으로 <우세한> 환자들이 <약세>에 처한 의사들을 정신병환자라고 손가락질하며 욕한다던데 첫 시작부터 안겨오는 <행실>들을 보아 <제2정신병원>에서도 수적으로 우세한 <환자>들이 얼떨떨하게 추락된 <원장>을 <정신병환자>라고 몰아부치며 고달프게 굴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쳤다. 그후부터 나는 말썽많은 이 <병원>에서 여느 때에 <원장>이 되고 여느 때에 <환자>로 되여야 할가를 고민하기도 했다. 늘 <원장>인척 <뒤짐>지고 <어험어험> 건가래떼며 나다니면 <환자>들이 눈꼴사나와 <돌총질>할것이고 늘 <환자>들과 섭쓸리며 얼굴에 <검댕이칠>하고 싸다니면 “너까지 정신이 나갔냐?”고 우의 <위생청>어른들이 눈을 부라릴것이였다. 장차 실천속에서 <도>를 잡아가는 수밖에 없었다.일부 문인들의 시비와 여론이야 어떠하든 그래도 따뜻한 마음을 가진 대다수 회원들은 <문학을 모르는> 나를 포근히 받아주었고 대다수 리사들도 회원대표 대회에서 <다리부러진> 나를 주석으로 선거해주었다. 이에 너그럽고 정직한 많은 회원들과 리사들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이다.하지만 일부 <환자>들의 이상한 짓거리는 계속되였다. 어떤 <환자>는 나무뒤에 숨어 전문 <원장>의 일거일동을 <감시>하다가 <원장>이 어쩌다 출국하거나 출장가도 정신없이 <위생청>에 달려가 고자질하기도 하고 어떤 <환자>는 원칙에나 사업수요에 10만 8천리나 떨어진 <정신나간> 편파적 요구를 제기했다가 만족되지 않으면 다른 리유를 거들어 가는 곳마다 욕설을 퍼붓기도 하고 어떤 <환자>는 이제 <원장>이 자리를 내면 자기가 <원장>이 된다고 국내외를 돌아다니며 <홍보>하기도 했다. 또 어떤 <환자>는 분촌을 가리지 못하고 무슨 일에나 나서 관여하며 <재판관>노릇을 하려고 허둥대기도 했고 어떤 <환자>는 <정신병원>이 조용하면 무슨 재미가 있느냐며 <각설이>탈을 쓰고나와 말썽을 만들어 떠들어대기도 했다. <제1정신 병원>환자들은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전기막대기로 자기들을 엄하게 다스리는 의사들이 무서워 뒤에서 주먹질 한다지만 <제2정신병원> <환자>들은 <헝겊막대기>도 손에 쥐지 못한 <원장>마저 두려워하기는커녕 되려 턱밑에 달달 달리기도 했다.어디 그뿐인가. 어떤 <환자>들은 자기가 미워하는 <환자>를 한몽둥이로 쳐죽이려고 닉명으로 편지를 써 사처에 띄우거나 인터넷으로 있는 일 없는일 한데 뭉그려 서로 고발하고 무함하고 헐뜯으며 남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짓거리도 서슴없이 하여 문단에 혼란을 조성하기도 했다. 그런 편지와 메일을 받을 때면 문단에 이처럼 덕성이 모자라는 <문인>들이 끼여들어 <물을 흐리고> 있으니 사회에서 문단의 이미지가 구겨지지 않을수 있겠느냐는 허탈감을 금할수 없었다. 작가협회는 인민단체로서 회원은 작가협회편제를 점하는것도 아니고 로임을 받는것도 아닌데 왜 일부 <환자>들이 원칙적시비문제도 아닌 문단일에 이처럼 <관심>을 가지는지 도무지 리해가 되지 않았다. 또한 어떤 <환자>일수록 로임을 주는 단위일보다도 과외로 하는 문단일에 보다 <관심>을 가지는가 그 <성분>을 따져보지 않을수 없었다. 따져보니 뭔가 알것 같았다. 원래 바라지도 않던 <성분>이 복잡한 <병원>에서 <원장>노릇하기가 상상하던 것보다도 훨씬 힘들고 귀찮아 나는 <위생청>에 찾아가 펀펀한 사람을 <정신병환자>로 만들기전에 앞당겨 <퇴원> 시켜줄것을  신청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환자>는 필경 소수였다. 정직한 다수의 회원들은 말썽거리일에 관여하려 하지 않고 문단의 화목을 바라며 열심히 자기글을 써나갔다. 또한 공평공정하며 량심있고 원칙있는 많은 분들이 여러모로 나의 사업을 지지해주고 위안해주고 리해해 주기도 했다. 그것이 내가 오늘까지 <맞아죽지 않고> 그런대로 <원장>을 지탱해 올수있는 힘이 되여주었다.  광채롭지 못한 벙거지를 쓰고 작가협회에 온후 나는 되도록이면 목소리를 죽이고 키를 낮추었다. 한번 <서리맞은 뱀>의 신세라 물론 사업의욕과 열성도 예전과 같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맡겨진 직책은 리행해야 했고 해야 할 일들은 해나가야 했다. 고정된 문학사업자금이 조달되지 않는 형편에서 체면을 무릅쓰고 해마다 여기 저기에서 자금을 인입해들이고 50주년경축 행사를 벌리고 대사기와 번역작품을 출판하고 각종 세미나 등 문학행사를 벌리고 <연변작가협회문학상>, <김학철문학상>, <화림신인문학상> 등 여러 종류의 문학상시상식을 제때에 펼치고 산하 여러 창작위원회의 문학활동을 경제적으로 부축여주고 기관지주문을 보조하고 나젊은 작가들을 양성하고 연변밖의 창작위원회들을 순방하고 회원들간에 모순과 갈등이 생기면 화해시켜주고 중국작가협회에 우수작품을 추천하고 중국작가협회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등 전에는 해보지 못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느긋이 해나갔다.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작가협회주석이라면 글을 써야 했다. 나도 80년대초에 소설창작을 하느라고 머리를 극적거리며 <아리랑>, <연변문예>, <은하수>, <소설집>, <연변일보>등 간행물들에 소설 10여편과 수필, 동화, 잡문, 칼럼 등을 100여편 발표하기도 했다. 그후 점차 령도직위에 오르면서부터 맡은바 실무에 전력하기 위해 해도 좋고 안해도 누가 뭐라지 않는 과외로 하는 문학창작을 아예 놓아버렸다. 내가 주위를 두루 살펴보니 본직업과 과외로 하는 문학을 함께 쥐고있는 문인들 가운데 크게 성공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전직으로 하고있는 맡은바 실무만은 남보다 뒤져서는 안되였다. 그런데 작가협회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구석에 팽개쳐버린지 오랜 무즈러지고 털이 빠진 문학창작의 필을 다시 찾아들어야 했다.내가 작가협회에 온 초기에 한번은 청탁에 의해 <연변문학>에 칼럼 한편을 발표하게 되였는데 편집부에서는 나의 이름과 함께 <소설가>라는 호칭을 붙이게 되였다. 그런데 이에 불복하는 한 어른이 주필한테 전화를 걸어 “그 사람이 대체 소설을 몇편이나 썼길래 소설가라 하느냐.”고 힐책했다. 후에 나는 그 소리를 듣고 그 어른 말씀 틀리지 않았다고 했다. 소설을 쓰지 않은지도 20여년이 되는데 소설가라하기엔 가당치 않았다. 하지만 내심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작가협회주석이 문학창작을 할줄 모르면 어찌 작가들과 어울릴수 있으며 작가들을 거느리는 주석이라 하겠는가. 돈도 권세도 없는 자기중심의 작가들이 남다른 개성과 건드릴수 없는 자존심으로 살아가는데 자기들한테 붙여진 자랑스러운 호칭을 자격미달인 사람한테 공짜로 씌워주는게 불편하지 않을수 없었다. 또한 곰곰히 생각해보니 문학도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문학으로서의 본연이 따로 있었다. 만일 이 사회에 작가란 군체가 없다면 사회에 대해 책임지고 민족에 대해 책임지며 력사에 대해 책임지는 민족문화와 인류문화의 한 구석이 크게 구멍뚫리게 될것이다. 아무리 모지름써도 돈도 벌지 못하고 권력도 없는 작가들 더우기 모어로 창작하는 소수민족 작가들은 이 사회의 <불쌍한 >군체이다. 하지만 이들은 또한 민족문화의 번영과 인류문명의 발전을 추진해나가기 위해 개인의 득실을 따지지 않는 위대한 군체였다. 아글타글 뼈를 갈아온 <품싹>도 운운할수 없는 지금 형편에서 돈을 벌려고 글을 쓰는 우리 민족 작가는 거의 없는것 같다. 또한 까딱하면 정치풍파에 걸려들어 곤욕을 치를수도 있다. 하면서도 이들이 왜 험난한 이 길을 고집하고 있는것일가? 그 어떤 사명감과 민족감이 없다면 가능할수 있을가? (물론 어떤 문인은 나좋아서 하는 노릇이지  그까짓 사명감이요 민족감이요 하는 입에 발린 소린 운운조차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로서도 지난날 문단테두리밖에서 문단을 들여다 볼 때와 문단에 들어와 몸을 담구고 있을 때의 감정에 점차 미묘한 변화가 생기며 문인들을 리해하고 문인들을 동정하고 위대하면서도 불쌍한 문인들을 위해 힘써 대변해야겠다는 책임감도 지니게 되였다.오늘에 와서 나는 나를 욕하고 꼬집던 문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런 욕과 꼬집음이 나를 <핍박>하여 문학의 본연에 대해 보다 깊은 사색을 가지게 했고 무즈러진 필이나마 주어들고 다시 문학이란 <량산>에 오르게 했기 때문이다. 욕이 사랑이라고 그런 욕소리속에서 우리 문단에 문학애호가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 아니겠는가.산에 가면 산노래 부르고 들에 가면 들노래를 불러야 했다. 그후부터 나는 이름만 띤 허수아비 주석이 되지 않기 위해 글쓰기에 열중했다. 수필과 칼럼을 쓰기 시작하던데로부터 짬짬이 중동방문기를 써 <연변문학>에 10기에 거쳐 련재하고 후에는 그것을 보충, 수개하여 <신비한 아랍땅으로 가다>는 장편기행을 펴냈다. (기행내용과 련계시켜 썼던 쏘련과 동구라파사회주의 나라들이 왜 하루아침에 무너졌으며 우리는 거기에서 어떤 교훈을 섭취해야 하는가? 지난날 우리 나라에서 세계혁명을 한다고 발달한 나라들과는 등을 지고 아랍, 아프리카 등 지역의 가난한 나라들을 숱해 무상지원하고 계급투쟁학설에 따라 각 나라 반정부세력들을 대폭 지지한 력사적 교훈은 무엇인가 하는 등 이른바 우에서 눈을 밝히기 쉽다는 내용들이 5만자가량 도끼질 당하여 작품의 품위가 많이 떨어졌지만) 그후 근 30년전에 손을 대보았던 소설창작에 집념하며 본명과 필명(매진)으로 <장백산>에 중편소설 <팔부형이 이사가다>를, <연변문학>에 중편소설 <해후>를, (<울부짖는 원혼>이나 <진혼곡>으로 되여야 할 제목이 두리뭉실하게 고쳐져 제목과 내용이 어울리지 않아 많은 독자들의 의혹을 자아내기도 했다. 아마 아직도 다른 지구보다 개방되지 못한 정치환경속에서 웃어른들의 눈치에 너무 신경 쓴 탓인것 같다.) <도라지>에 단편소설 <전자뇌ㅡ 경례>를 발표하였다. 이외 <문화시대>, <연변녀성>, <단풍 수필집>, <로년생활>, <농가> 등 잡지와 출판물들에도 여러 쟝르의 작품 50여편을 발표하였다. 이번 작가초대석에 발표되는 <인생3부곡> 수필은 나의 다년간의 사업실천과 생활체험에서 떠오른 령감들이다. 사람이 한생을 살다보면 널뛰기처럼 쉼없이 오르락내리락 해야 하고 더 승진하고 발전하자면 맘에 없는 <정치>도 해야 했다. 뽈차기처럼 지도의 기전술에 따라 열심히 뛰여야 하지만 <축구도박>처럼 <정치 도박>에 말려들면 인생을 접어야 했다. 그리고 주위에 도사리고 있는 여러가지 소용돌이에도 신경을 써야 하지만 순진한 사람들은 남을 자기만큼 믿다가 혹은 일만 일이라 하다가 언젠가는 거기에 빠져들어 골탕을 먹기도 한다. 단편소설 <장기들의 반란>은 지난 단오절 련휴일에 쓴 작품이다. 비록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새로운 내용이 아니지만 장기들을 이인화하는 기법으로 부정부패를 질호해보자는 시도이기도 했다. (이 소설을 쓰면서 인체 장기들의 공능을 얼마감이라도 알아야 했기에 잠간이나마 <의학공부>를 하는 계기로도 되였다.) 이번에 함께 발표되는 잡문 <낯가죽은 엷으면 좋느리라>와 <아첨쟁이의 속마음>도 25년전에 연변일보사 편집판공실 부주임으로 있을 때 칼럼으로 쓴것인데 당시 사회와 관청바닥에서 갈수록 범람하기 시작하고 백성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부정부패를 겨냥한것들이다. 그런데 웬 일인지 지금 발표해도 늦을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잡문으로 수개하여 여기에 내놓는바이다. 이외에도 여러편의 작품들이 여러 잡지들과 종합집에서 발표를 기다리고 있다. 문학작품의 내재적 령혼에는 시종 하나의 정신이 관통되여 있는바 그 정신이 바로 작가가 마음속으로부터 부르고 싶은 <노래>인것 같다. 문학창작은 한 작가의 량심으로서 바로 예술화된 문학적언어로 자기의 량심을 써내고 민족의 량심을 써내며 력사적 량심을 써내고 나라의 량심을 써내는것이라 하겠다. 그 어떤 작가나 모두 자기가 보고 듣고 겪어온  잊을수 없는 생명적 생활체험을 예술화하여 문학작품으로 승화시키는것이 아니겠는가. 수십년간 언론계에서 사업하며 크고 작은 부문, 높고 낮은 간부들과 자주 접촉하고 변화무쌍한 관청사회에서 보고 들은것이 많다보니 사회문제와 부정부패를 소재로 쓸만한 글감들이 참 적지 않음을 문단에 온후에야 깨닫게 되였다. 다년간 모래속에 묻혀있던 문학적 창작소재의 진주를 여기에 와서 발견한셈이다. 지난날 문학창작과 담을 쌓고있을 때에는 그러한 소재들이 길바닥에서 나뒹구는 모래알에 지나지 않았으나 글을 쓸려고 작심하니 그 모래알들이 모두 하나하나의 진주로 빛을 뿌리며 다가오는것이 아니겠는가. 사람이란 자기가 살고 사업하던 원적지를 떠나 지난날의 생활과 시간적 거리가 생긴후에야 비로서 그때를 돌이켜 보게 되고 회억의 상태에 빠져들게 되는가 본다. 그래서 문학창작도 일종 회억에 대한 문학적서술이라 하지 않겠는가. 갈수록 놀라운 활약을 보이는 중국 주류문단과는 달리 최근년간 중국조선족 문단에는 사회문제와 부정부패를 무게있게 다루는 작가가 가물에 씨나듯 했다. 또한 회원들의 성분을 보아 사회문제와 부정부패를 깊이있게 쓸만한 생활체험을 가지고 있는 작가도 사실 많지 않다고 느껴진다. 나는 나의  상층사회 (비록 중앙급이나 성급은 아니지만) 생활체험을 바탕으로 사회문제와 부정부패를 다룬 문학창작을 할수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였다. 하지만 수십년간 필을 놓았다가 다시 문학창작을 할려니 창작기교가 따라 가지 못함을 깊이 느끼게 되였다. 언어도 마찬가지였다. 다년간 언론부문의 책임자로 있으며 사업수요로 리론서적은 적지 않게 보았으나 문학서적은 거의 뒤적이지 못하였다. 그것도 거의 한문과만 접촉하다 보니 전에 익혔던 우리 말과 글을 많이 잊어간 상태였다. 구슬도 꿰여야 보배지 널려있으면 모래와 다를바 없다지 않는가. 하여 주석이란 베일을 벗어버리고 언어공부를 다시 시작하는 한편 창작에서의 소학생이 되여 허심하게 여러 소설가와 평론가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글을 쓰고있는 형편이다. 한 평론가는 “작가가 되려면 주석이란 모자를 벗어제치고 저자거리의 광대가 되여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지당한 말이다. 주석이라는 감투를 쓰고 글을 쓰게 되면 그 어떤 심태와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가지가지 제한을 받게 될것이지만 저자거리 광대의 신분으로 글을 쓰면 아무 부담없이 글을 마음껏 피룰수 있을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렇게 하자면 용기가 필요했다. 누군가 자기는 “낮에는 사회주의를 하고 밤에는 자본주의를 한다”더니 나야말로 “낮이면 주석이 되고 밤이면 저자거리의 광대”로 되는셈이였다. 나의 글쓰기에 여러모로 가르침을 주고있는 정직한 여러 소설가, 평론가들에게 감사한 마음이다.작가는 작품으로 말하라는 리치는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 회원중 한해에 한편의 글이라도 쓰는 사람이 20%가량 되고 경상적으로 글을 쓰는 회원은 10%도 되나마나 하다는것이 회원들 자체의 평가이다. 어떤 회원은 돈이 들어가는 작가로부터 (출판비를 내야 함으로) 돈을 내지 않는 <아나운서>로 탈바꿈하여 없을수록 좋을듯한 문단의 <확성기>역할을 하며 시시비비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가협회 주석으로서 열심히 글쓰기를 배우며 부지런히 글을 쓰는 실제행동으로 무언의 본을 보여야 하지 않을가 하는 주제넘은 생각도 가져보았다. <절기>를 놓쳐 남보다 썩 뒤늦게야 <모내기>를 시작한 탓인지 비록 알알이 여문 글농사는 아니라도 부지런히 글농사를 짓다보면 풍작을 이룰 때도 있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글을 자주 써도 욕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은것 같다. 랭면을 온면으로  만드는 주제에 주석이라는 사람이 할 일 없으니 들어앉아 <밀가루반죽>만 주무른다고. 아마 이 자리는 글을 안써도 욕, 글을 써도 욕인가부다. 하지만 이미 <이상한> 모난 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이상 숫구멍에 정을 맞지 않으면 되려 이상할것이다.말타면 경마잡히고 싶어진다더니 글을 쓰다보면 종종 엉뚱한 욕심이 생기기도 하는것 같다. 그것은 한번도 써보지 못한 장편소설을 써보겠다는 욕심이다. 또한 다년간의 사업실천속에서 내가 뼈저리게 느꼈던 민족문화사업발전에 대한 밀어버릴수 없는 사명감으로 지금 짬짬이 <일보사 사장>이라는 장편소설을 집필하고있다. 짧지 않은 7년간 일보사 사장으로 있으면서 자신이 직접 겪은 생활체험을 바탕으로 개혁개방중 경제건설에만 중시를 돌리고 소수민족문화발전은 홀시하는 엄중한 실책으로 소수민족문자로 된 당기관보마저 장기간 시장에 내몰려 생존을 위해 버둥거리는 가운데서 나타난 내부적 모순과 외부적 갈등 및 상급간부들의 부당한 처사와 부정행위 등을 내용으로 경제건설시기에 소수민족지구에서 여하히 당의 민족정책을 실속있게 관철집행하여 소수민족문화를 보호하고 발전시키며 민족단결을 강화하고 변강의 안정을 도모할것인가 하는 중대한 주제를 반영하려 하고있다. 하지만 나를 걱정하는 어떤 분들은 또 화를 자초할가봐 쓰지 말라고 권유하는가 하면 기어코 쓰겠으면 퇴직후에 발표하라고 귀뜸하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밀어버릴수 없는 민족적 사명감으로 <우직한 곰>은 지금도 헐떡이며 계속 <땅을 뚜지고> 있다.퇴임후에는 <병원>에서 사업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감수와 사실들을 바탕으로 <제2정신병원 원장>이라는 장편소설 집필도 구상해보고 있다. 소설은 시장경제발전 시기에 소수민족문학이 전에없이 추락되고 소수민족작가들이 <아나운서>로 전락되여 가는 현실에 립각하여 작가와 사회, 문학과 정신문명, 경제발전과 문화발전 관계를 기술하면서 소수민족문학발전도 당의 민족정책을 떠날수 없으며 다민족 국가에서 소수민족문화, 문학이 발전하지 못하면 한 나라 문명도 운운할수 없다는 주제를 피력해보려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 물론 작품가운데는 주제를 둘러싸고 그간 우리 <병원>에서 벌어진 수많은 시시비비한 사건들이 빠질수 없게 된다. 이 작품이 발표되면 <병원>밖의 사람들은 놀랍고도 재미있게 볼것이지만 <병원>내에서는 말벌둥지 터질줄로 예상된다. 어떤 <환자>는 스스로 번호에 따라 자리를 찾아 앉아 <정신없이> 떠들것이며 지난날 <환자>들 서로가 모르던 많은 <병원>안의 내막들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것이기 때문이다. (<원장>으로서 이 <병동> 저 <병동> <환자>들의 <고자질>과 <하소연>, <욕설>을 거의다 듣다보니 내가 알고 있는 <병원>의 시시비비가 누구보다도 많다고 해야 할것이다) 필을 대느냐 마느냐 하는 고민도 없지 않지만 이는 그때에 가서 다시 볼 일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 모든것에 자신이 있어한다.”는 격언과 같이 이도 안난 녀석이 콩밥을 먹으려는 주제넘은 창작구상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작이 절반이라고 하려고만 하면 그리 어려운 일인것 같지는 않다. 늦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라는 말이 있다. 이 세상에 불가능이란 없다고 하면서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소원을 품고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숱한 무모한 짓을 하다가 결국은 죽게 된다. 나에게는 이제 글쓰는 소원 하나면 족하다. 물론 원숭이가 금가락지를 낀다고 해서 사람이 되는것이 아니고 초학자가 글 몇편을 쓴다고 해서 작가로 되는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속에 상상의 탑을 세워보는것도 허망한 일은 아닌것 같다. 우리 문단에는 10년, 20년만에 명작 한편 내놓는 대가도 필요하겠지만 해해년년 독자들이 재미있게 읽어볼 자그마한 글이라도 부지런히 쓰는 문학애호가도 필요할것 같다. 주추돌, 자갈, 모래가 어울려야 집이 되는것처럼.나는 그저 남들이 알아주지 않을가봐 걱정하지 않고 다만 자기의 능력이 모자람을 한탄하면서 분발할뿐이다. 이후 내가 여하히 글을 쓰든 어느만큼 쓰든 나 스스로는 자신을 영원히 애숭이 문학애호가로 여길뿐 절대 작가로는 생각하지 않으련다. 작가는 사회적으로 받들어모셔야 하는 인류령혼의 기사라는 고상한 호칭을 갖고 있기에 덕성과 작품이 독자와 사회적인 충분한 인정을 받지 못하면 작가라 할수 없기 때문이다. 덕성과 작품중 분명히 어느 한쪽 혹은 량쪽 모두 미달인데도 글 몇편 발표하고 책 한두권 출판하고는 가는 곳마다 스스로 대단한 작가인척 머리를 쳐들고 큰 소리치며 다니기는 아주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지도적자리에 있을 때 사람들이 기억하는것은 권력의 힘이고 자리를 낸후에도 사람들이 기억하는것은 능력의 힘이며 죽어서 진정의 꽃다발을 받을수 있는것은 덕성의 힘이라 생각한다. 내가 지금 크고작은 문학행사때마다 초청을 받아 출석하고 앞자리에 모시우고 축사를 하도록 하는것은 주석이란 우사모를 쓰고있기 때문이지 내 본인이 위대해서, 존경해서, 보고파서, 좋아서가 아닌줄 나는 잘 알고 있다. 어찌보면 내가 눈을 펀히 뜨고 어쩔수 없이 남들한테 <리용>되고 있을뿐이다. 우사모를 벗고 자리를 내면 이런 <황홀한 리용>도 금방 사라지게 된다. 남을 아는 자는 지혜로운 자이고 자기를 아는 자는 명철한 자이다. 남을 이기는 자는 장군이고 자기 스스로를 이기는 자는 원수(元帅)이다. 인간의 가치를 종국적으로 가장 잘 발휘할수 있는것은 권력도 재산도 지식도 아니라 사람의 됨됨인줄 안다. 권력, 재산, 지식은 영원한것이 아니지만 인간은 마지막 숨을 톱을 때까지 됨됨이를 가꾸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지식은 덕성 다음으로, 덕성은 본질적으로 한 인간을 다른 한 인간우에 올려 놓는다”는 에디슨의 말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지혜를 얻기전에 돈을 얻은 자는 잠시밖에 돈주인 노릇 못하고 덕성을 얻기전에 지식을 얻은 자는 평생 말썽을 등에 지고 다닌다”는 명언으로 자기에게 경종을 울릴것이다.정력과 열성, 능력만 따라 간다면 나이와 상관없이 영원히 퇴임하지 않는것이 글쓰기<사업>인것 같다. 나는 지금 글쓰기를 다시 배우게 된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문학사업에 대한 공헌은 운운못해도 퇴임한후에도 또다시 일할수 있는 <보금자리>를 마련한셈이다. 만일 내가 계속 일보사 사장으로 있다가 순조롭게 퇴임하게 되였다면 사회적 명성은 이즈러지지 않았겠지만 아마 다시 문학창작을 하게는 되지 않을줄로 안다. 지난날의 그 색안경에 막혀 <이상하게> 보아오던 <환자>들과 섭쓸리기 싫어서, 자존심 때문에, 체면때문에, 신심이 없는 등 원인은 여러가지라 하겠다. 늘 하던 지랄도 한달간 하지 않으면 먹먹해진다는데 몇십년동안 놓은 무즈러진 문학창작의 필을 퇴임한후에 다시 든다고 해서 돌연히 명작이 튀여나오겠는가. 그러면 나는 영광스럽게 퇴임한 대가로 되려 이젠 뭘하며 여생을 보내야 할가를 고민하게 될것이다. <오쟁이>를 지고 작가협회로 올 때는 도살장에 들어가는 소처럼 눈을 질끈 감고 들어왔지만 인자하신 <하느님>은 그 대가로 나에게 문학창작을 다시 배울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것이다. 퇴임후에 마작이나 놀고 낚시질이나 하며 한가하게 지낼가봐 성스러운 <일자리>걱정을  해준셈이다. 그 <일자리>를 위해 문학이란 <멍석>이 활짝 펼쳐져 있고 주위에 가르침을 줄수 있는 단수높은 <지도>들이 줄줄이 둘러서있는 지금부터 그 <멍석>우에서 뒹굴며 글쓰는 <지랄>을 배우게 한것이다. 그래야 퇴임후에 곁에 <지도>가 없이도, <맨땅>에서라도 독자적으로 <지랄>할수 있을것이 아니겠는가. 행복은 결코 많고 큰데만 있는것이 아니다. 작은것을 가지고도 고마와하고 만족할줄 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여백과 공간의 아름다움은 단순함과 간소함에 있는것이 아닐가.그간 사람들의 <이상한> 눈길을 끄는 <병원>에 몸을 담그고 늘 <환자>들과 접촉하며 <원장>을 몇해 했더니 나도 무슨 <병균>에 <감염>되였는지 언제부턴가 <정신이 나가기> 시작한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야 어찌 마흔에 신는 첫 보선도 아니고 퇴임할 림박에 와서 얼굴에 <검댕이>칠을 하고 문학이란 <멍석>우에서 뒹굴며 남들한테 아득히 뒤진 창작을 한답시고 <지랄>하겠는가. 적지 않은 사람들의 눈에는 “갈비뼈 아룽아룽한 여윈 몸에 널다란 팬티를 걸치고” 하는 그 <지랄>이 꼴불견이라도 한참 꼴불견일줄 안다. 하지만 누가 뭐라든 체면을 무릅쓰고 <지랄>하며 <땀을 흠뻑> 흘리느라니 유익한 점도 있는것 같다. 지난날 그 무엇엔가 틀어막혔던 숨통이 훤히 열려지고 다년간 나의 몸에 굳어졌던 그 어떤 딱지가 뚜둑뚜둑 떨어져나가고 얼기설기 엉켰던 그 어떤 틀이 망가져내리며 순수하고 천진하고 성실하던 지난날의 <빈하중농> 본연으로 <치료>되는듯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또한 어떤 <환자>들의 <개떡>같은 말도 <호떡>같이 들어줄 아량도 생겨나고 <각설이>같은 <환자>도 <갑순이>로 보아줄 <원장>의 느긋한 여유가 생겨난것 같기도 하다. 만일 그런 여유가 없이 지난날 엄숙하고 원칙적인 국장과 사장으로 있던 때의 시각과 <각오>대로라면 <정신나간> <환자>들과 밤낮 책상을 두드리며 할키고헐키는 살벌한 전쟁의 나날을 보내야 했을것이다.사람이 한생을 살아오다 자기가 걸어온 길을 우연히 돌이켜보노라면 전에는 감감 모르고 지냈던 신기루도 발견하게 되는것 같다. 나도 공직사업의 마지막 역에 이르러 내가 걸어온 길을 거슬러 더듬어보다가 나로서도 놀라운 사실에 아연해지기도 했다. 그것이 우연인가 필연인가. 나는 지나간 내 생애에서 아직 그 누구도 체험하지 못한 세개의 25년을 감각없이 겪어온것이다. 첫째는 20살에 남에게 떠밀려 덩덩하게 연변인민방송국 아나운서 시험을 쳤다가 미역국먹고 25년후에 연변인민방송국 국장,총편집으로 되였다. 둘째는 23살에 자신의 끈질긴 노력으로 연변일보사 전 주 통신원강습반에 (도합 9명 참가, 그중 조선족 4명) 뽑혔다가 25년후에 연변일보사 사장, 총편집으로 되였다. 셋째는 31살에 기자사업을 하는 여가에 첫 단편소설 <사랑과 령혼>을 연변작가 협회기관지인 <연변문예>에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가 25년후에 연변작가협회주석, 당조서기로 되였다. 거짓말같은 세개의 25년, 수수께끼같은 세개의25년, 우연과 필연이 겹쳐진 세개의 25년, 번번이 우연으로 맺어진 인연이 번번한 그 필연으로 공직사업을 마무리짓게 될줄 누가 알았겠는가. 나의 인생길은 내가 이 세상에 태여나기전부터 사전에 이미 이렇게 정해져 있었던것일가? 누구한테나 거의 모두 불가사이한 우연이 있겠지만 나한테도 이런 우연이 있을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하느님>은 내가 자신이 이미 정해놓은 이 틀에서 벗어날가봐 나를 그처럼 진통을 겪게 하면서도 마지막 우연을 기어코 이 틀에 맞춰넣어 필연으로 만든것일가? 아무튼 인생길이란 신비하고도 종잡을수 없는것 같기도 하다. 나는 인생길에서 더러 곡절을 겪긴 했으나 선량한 량심을 가죽속에 집어넣고 깨끗하게 걸어온 지난날에 자부심을 느끼며 회심의 미소를 지어본다. 누가 뭐래도 나는 나다. 또한 후회되는 일도 없다. (다만 마음 아팠을 때 대학졸업시 학교에서 학교 혹은 북경의 사업단위나 기관들에 남으라 할 때 부모의사를 거역하고 북경에 남아 발전했더면 나의 인생이 어찌 되였을가 하는 생각은 몇번 굴려본적 있다.) 좌절과 아픔이 바로 성숙이고 각성이라더니 좌절도 하나의 보귀한 재부로서 사람을 보다 리지적이고 랭철하게 하며 인생철학을 보다 깊이 터득하게 하는것 같다. 물은 락차가 커야 경관을 이루고 산은 기복이 심해야 절승경개가 된다는 도리일가.어떤 종류의 성공이든 성공하려면 자신을 팔아야 한다. 자기의 시간, 노력, 꿈, 재능, 힘 지어 뼈까지 갈아가며 쟁기질해나가야 한다. 이런 자질이 있고 없음에 따라 그 사람이 재간있는 <선수>냐 아니면 단순한 <팬>이냐 하는것이 판별된다. 운동장에 나서면 모두 선수라 자처한다. 문단에 발을 들여놓으면 모두 문인이라 자처한다. 하지만 진정한 <선수>와 소리치는 <팬>은 실천속에서 금방 구별된다. 작가협회에서 회원을 받아들일 때에는 조건이 구비되는 <선수>만 받아들이지 <팬>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보면 적지 않은 문인들이 <선수>로 들어왔다가 <팬>으로 뒤바뀌여 <관중석>에 올라가서는 <어느 선수 천재다>라고 소리치며 올리추지 않으면 <어느 선수 ×같다>며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붓기도 한다. 나는 이런 <팬>들이 자리를 오껴앉은 <관중석>에서 순순히 내려와 다시 <선수>로 복귀되여 <운동장>에서 땀을 철철 흘리며 뛰여다니는, 명실이 부합되는 <선수>가 되기를 바란다.  피아노는 훌륭한 악기로서 그것을 다룰줄 아는 예술가의 손에서는 아름다운 선률이 흘러나오지만 그것을 다룰줄 모르는 사람의 손에서는 귀찮은 소음이 쏟아져나온다. 문학도 마찬가지인것 같다. 진정 문학을 할줄 아는 사람한테서는 <아름다운 선률>이 흘러나와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지만 문학을 아는척 하는 사람한테서는 <귀찮은 소음>이 쏟아져나와 독자들을 돌아앉게 한다. 작가협회 회원이라면 누구나 그 명칭에 걸맞게 문학창작에 정진하며 부단히 새로운 성과를 거두어야 할줄 안다. (물론 전문작가가 없는 지금 자기가 몸을 담그고 있는 단위의 본직업이 첫째이다.) 나도 <원장>을 할 때까지 <환자>들을 위한 사업에 몰두하는 한편 <보통환자>의 자격으로 그 명칭에 걸맞게 열심히 문학이란 <피아노치기>를 잘 배워 독자들을 돌아앉게 하는 <귀찮은 소음>이 아니라 독자들을 모여들게 하는 <아름다운 선률>이 쏟아져 나오도록 힘쓸것이다. 그러면 나의 후반생도 어쩌면 전반생의 모든 겉치례와 가면들을 홀랑 벗어버리고 여생에 문학에 정을 붙힌 문학의 <피아니스트>로 다시 태여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 아니겠는가. 일생을 순풍에 돛단듯 살아온 사람은 자부심에 살고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은 슴슴하게 살고 좌절을 겪은 사람은 인생의 참맛을 알며 산다했다. 인생의 참맛을 아는 사람은 결코 인생을 헛되이 살지는 않을것이다.비록 복잡다단하긴 했으나 지나간 문단에서의 5년철을 돌이켜보면 감개가 무량하다. 본의아니게 <지구>에 추락되여 들어와 <외계인>이 체험하지 못했던 많은 보귀한 생활을 체험하게 되였다. 이러한 체험은 나의 인생에 지워버릴수 없는 값있는 락인으로 찍혀있을것이다. 돈 주고도 살수 없는 이러한 뜻깊은 인생체험을 할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시간이 지나며 보면 나는 내가 문단에 들어와 세운 <원칙>이 옳았음을 가슴 뿌듯이 느끼게 된다. 그것인즉 단단하고 울퉁불퉁한 장작은 나른한 끈으로 묶어야지 장작으로 묶을수 없다는 리치다. <환자>들이 <정신없이> 나와 <도끼>를 휘두르며 펄펄 뛸 때는 춰주고 달래고 피하여야지 <원장>인 내가 너한테 질소냐고 함께 <칼>을 빼들고 <정신없이> 맞대결하면 너팔고 나팔고 조상까지 파는 일로밖에 되지 않을줄 안다. 무술계의 진정한 고수(高手)는 자기의 강함을 쉽게 나타내지 않고 평소에 느슨한 태극권으로 자신의 재간을 감춘다했다. 꼭 생사결단을 내야 할 일이 아니라면 남이 치면 피하고 남이 진공하면 물러서고 남이 쫓으면 달아나면서 <연약>함으로 <강함>을 대처한다. 곁에서 보기엔 연약하고 무능하게 보일수는 있어도 그것은 흔히 <눈이 있어도 태산을 알아보지 못하는> 소인배들의 호들갑일뿐이다. 하지만 고수만이 고수를 알아본다 하겠다. 고수는 편파적인 충둥질에 드놀지 않고 쉽게 칼을 빼들어 애매한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한 문학애호가를 <작가초대석>에 초대하여 문인들과 속심을 터놓고 교류할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 <장백산>잡지 편집부에 감사한 마음이다. 2010년 8월  <장백산> 2010년 제6기  
39    [잡문] 아첨쟁이의 속마음(허룡석) 댓글:  조회:1460  추천:78  2011-02-08
아첨쟁이의 속마음 허룡석전국시기의 사상가이며 교육가인 순자는 일찍 이렇게 력설한바 있다.“옳은 비판을 하는 자 나의 스승이요, 성적을 긍정하는 자 나의 벗이요, 굽실굽실 아첨하는 자 나를 해치는 자이니라.”그래서 그는 평생을 스승을 존경하고 벗을 가까이 하고 아첨하는 자를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 모양이다.비록 까마아득히 먼 옛날에 력설한 격언이긴 하지만 오늘에 와서도 현실과 련계시켜 곰곰히 음미하노라면 유익한 계발을 받게 된다.나라가 새롭게 창립된후 단결, 호조, 우애가 지난날 낡은 사회의 용속한 인간관계와 권세관계를 대체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아첨을 인간도덕의 테두리에서 멀리 밀어던졌다. 하여 사회는 갈수록 조화로와지고 인간관계는 전에없이 윤택해지게 된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계획경제가 시장경제에로 전이하면서 사회경제발전템포가 갈수록 빨라지고 물질적 유혹이 도처에서 꼬리치고 돈다발이 곳곳에서 손짓하는 때에 지난날에 던져버린지 오랜 썩어빠진 아첨술을 다시 찾아들고 찧고쫗고 가공하여 <새세기에 맞는> 보다 고명한 아첨술을 발명해내는 벼슬아치들이 적지 않음도 부정할수는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아첨에 이골이 난 사람들을 보면 거개 천성적으로 능력으로 남과 경쟁할 신심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면 마음가짐이 삐뚤어진 사람들이다. 하지만 현실에 보다 가슴 아픈것은 평생 아첨이란 무엇인지 모른다던 능력있고 대바른 사람들도 회피할수 없는 오늘날의 실천속에서 가만 있으면 나만 손해본다는 생각에 본의아니게 아첨자대오에 가담하고있으니 누굴 탄해야 할가.자고로 충언은 귀에 거슬리고 아첨은 쉽게 귀에 솔솔 잘 들어온다 하였다. 이런 <철리>를 알고있는 아첨자들은 상급지도자의 앞에서는 발바리마냥 굽실거리며 발라맞추고 하급이나 백성들앞에서는 사냥개마냥 사납게 으르렁거린다. 춰주는 소리에 귀구멍을 열어놓고 다니는 지도자앞에서는 덮어놓고 지도자의 말과 행동 모든것이 훌륭하고 우아하고 정확하고 청렴하다고 받쳐올리고 지도자를 위해서는 칼산 불바다에도 뛰여들듯한 <두려움모르는 정신>을 과시하기도 한다. 지어 지도자가 방귀를 뀌여도 건강의 나팔소리라고 발라맞추고 게트림을 해도 소화의 소식이라 극찬한다. 혹 지도자가 무슨 부탁이라도 하면 무상의 영광으로 간주하고 당규률이고 헌법이고 뒤로 제쳐놓고 갖은 수단으로 고양이 뿔이라도 얻어바치려 헤덤빈다.허나 술군의 마음은 술에 있지 않듯 아첨쟁이의 속심은 아첨하는데만 그치는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제 안속 차리기 위한데 있는것이다. 혹자는 더 높은 영광의 자리에 바라오르기 위해서, 혹자는 <덕대우에 있는 기름종지>를 빨아볼가 해서, 혹자는 끝없는 명예와 영예를 갖기 위해서, 아무튼 사리를 도모하기 위한 심사임에 틀림없다.에로부터 나라를 흥성시키는 군주는 자기의 과오를 듣기 좋아하고 나라를 어지럽히고 황페시키는 군주는 아첨만을 듣기 좋아한다 했다. 지도자로서 만일 아첨쟁이의 위선적인 말에만 귀가 솔깃해진다면 판단에 오차가 생겨 옳은 의견을 배척하고 백성을 멀리하게 될것이며 간부등용시에도 마음의 천평이 귀속에 알사탕을 부어넣는 아첨쟁이쪽으로 기울어져 등용시키지 말아야 될 사람들이 처처에 들어앉아 간부와 백성간의 관계는 조화롭던 <물과 고기>로부터 서로 융합될수 없는 <물과 기름>으로 되여버릴것이니 결과는 당의 사업, 인민의 리익에 만회할수 없는 손해를 끼치게 됨이 뻔한것이다.한즉 지도자들은 옳바른 마음가짐으로 옳은 가르침을 주는 스승, 리해하고 긍정해주는 벗, 자기의 귀를 멀구고 눈을 멀구고 마음을 멀구게 하는 아첨쟁이를 똑바로 가려보고 합당한 자를 적당한 자리에 등용시켜야 할것이다. 아첨하는 자 충직하지 않고 바른 소리 잘하는 자 배신하지 않는다는 명언을 기억하는것이 바람직할것이다. 하지만 그 지도자 역시 아첨으로 올라온 량반이라면 이런 충고는 물론 소귀에 경 읽기밖에 안될것이다. 아첨을 받아 즐거워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어리석음을 나중에 후회로써 보상하게 될것이다. <장백산> 2010년 제6기  
38    [잡문] 낯가죽은 엷으면 좋느니라 (허룡석) 댓글:  조회:1522  추천:77  2011-02-08
잡문 낯가죽은 엷으면 좋느니라허룡석예로부터 항간에는 “발바닥은 두터우면 편하고 낯가죽은 엷으면 좋느리라.”는 설이 류전되고 있지만 밀물이 올리밀 때 한강물이 순간이나마 꺼꾸로 흐르듯 시기상조라 할가. 지금은 웬지 “발바닥은 엷을수록 좋고 낯가죽은 두터울수록 편하느니라.”고 상반되는 론조를 펴는 량반들이 더러 보이고있다. 이런 량반들은 개혁개방의 전에없던 풍요로운 물질적 혜택속에서 자기안속은 채울대로 채우면서도 밤이면 비단베개를 높이 베고 태평스레 사자코를 골아대고있으니 조상들이 구천에서 들어도 색바래진 수염을 부르르 떨며 참나무지팽이를 찾아들고 “고현놈”들의 정수리를 내리칠가 걱정된다“발다닥이 두터우면 금수강산 메주 밟듯해도 발탈 나지 않아 좋을고요, 낯가죽이 엷으면 열동풍 한서풍에 민감하여 도의에 어그러지는 행실 제어할수 있을거니 이 아니 좋을소냐.”는 조상들의 뜨거운 충고 천만지당하련만 후안(厚脸)의 량반들은 사욕에 눈이 어두워 낯뜨거운줄 모르고 후안무치한 짓을 계속 저질러대니 열기띤 백성들의 입김을 어이 감각할수 있으랴.후안의 량반들은 관가의 국록을 타먹으면서도 그에 만족되지 않아 어명을 어기고 만백성이 눈박아보는 “김치움”에서 “덕대”에서도  거치럭손질을 해가며 음으로 양으로 갖은 기량 다 보이니 녹아나는것은 국재요 높아가는것은 백성들의 원성이니 보다 많은 명시지재가 나서서 날따라 좀먹어가는 사회기강을 바로 세웠으면 하는 소박한 마음들이다.어질고 성실하던 사람도 한자리하면 량반감투를 정중히 쓰고 앉아 뭔가 후무릴것이 없나 사팔눈을 히번덕거리고 입이 석자나 나와 뜯어먹을것이 없나  헤벌려대고 장삼자락밑에서는 피줄이 툭툭 선 갈구리같은 손이 나와 주위를 어루쓰니 그 눈에 걸릴것 없고 그 입에 들어갈것 없고 그 손에 쥐울것 없다고 만사형통하신 부처님인들 어찌 감히 장담하오랴. 그러고도 <소> 먹은 량반은 어험어험 건가래 떼며 부정부패를 여사여사하게 척결하고 부패량반들을 여사여사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어명>을 엄숙히 전달하고 <돼지>먹은 량반은 돌아다니며 <기름종지>를 훔쳐먹은 <쥐>들을 잡는답시고 덤벼치고 <개>먹은 량반은 낮이면 만백성 위해 좋은 일 한답시고 비지땀 흘리는척 한다. 결과 똥먹은 개는 수염을 쓱 씻고 겨먹은 개 잡혀나와 목달아매우니 민심이 량심이라고 백성들은 어이없어 입을 하 벌리고 도리질만 한다. 나라 등 쳐먹고 남의 간 떼먹고 하루밤사이 명문거족이나 된듯 온 집안에 웃음소리 넘치며 로소동락하건만 갈수록 후안이 심해지는터라 이악스런 딱다구리들이 달려들어 물고 뜯어도 전연 감각을 모르니 이제 창창한 벼슬길에서 무치란 일 얼마나 저지를지 누가 알랴.남의 선(善)을 보면 자기 악(恶)을 감추고 남의 악을 보면 자기 선을 내세우니 음으로 양으로 응부에 이골이 난 이런 량반들껜 당성이니 청렴이니 하는 고귀한 용어 운운키보다 일개 백성 가늠하듯 낯가죽 두께를 재는것이 천만 지당하렸다.현명한 임금이 칙지 내리면 만백성 위한 명관이 받아물어야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이 평안하련만 후안의 량반들이 끼여들어 칙지를 보자기로 잡아쓰고 아래사람들 앞에서는 “어베야”하고 으름장놓으며 제 안속은 다 채우니 후안무치한 이런 량반 <암행어사>라도 나타나 명정기죄해야 함이 마땅한 도리라 하겠다.낯가죽이 발바닥이 되여 즐거울거면 차라리 우사모를 내려놓고 시골가 감자농사지음이 자기를 위하고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하는것이렸다. 하지만 얼굴 두꺼운 량반일수록 이러한 리치 깨닫치 못하니 종당에는 쇠고랑을 차고 콩밥먹는 신세되여야 눈물 코물 쥐여짜며 부처님의 야윈 다리라도 붙잡고 사정사정 해보겠지만 때는 이미 구명렬차 지나간 뒤일것이다.<장백산> 2010년 제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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