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룡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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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중편]《팔부형이 이사가다》

인분표[단편소설]
2017년 11월 13일 14시 45분  조회:6165  추천:0  작성자: 허룡석
 요즘은 어쩐지 애들처럼 기분이 붕붕 뜬다. 며칠후이면 새로 산 아빠트에 이사가게 된다는 즐거움때문인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마냥 흥분에 젖어있다.

30여년간 끼살이하듯 30평방메테 되는 자그마한 낡은 단층집에서 부모를 모시고 아들딸을 키우며 비좁게 살다가 일본에 나가 박사공부를 마치고 거기에 남아 어느 큰 회사에서 중층간부로 사업하는 아들이 거금을 들여 몇달전에 연길의 번화 구역에다 140여평방메터 되는 궁월같은 새 아빠트를 사주었다. 이젠 젊음을 불살 라버린 자그마한 이 현성을 떠나 자치주 수부도시에서 살게 되였다. 그러니 어찌 감회가 새롭지 않겠는가. 재직에 있을 때에는 그토록 가고싶어도 갈수 없었던 수부 도시를 퇴직후에 가게 된것이다.

나와 안해는 신이 나서 코노래를 흥얼거리며 며칠전부터 이사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버릴건 버리고 줄인걸 줄이고 포장할건 포장하면서 사타구니에 비파소리 나고 겨드랑이에 불이 일게 바삐 돌아쳤다. 그래도 힘든줄 몰랐다.

오래동안 별로 들춰보지 않은 낡은 책상의 서랍들도 하나하나 모두 정리하였다. 문득 한 서랍 밑바닥에서 누런 낡은 편지봉투 하나를 발견하였다. 뭘가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쏟아놓고보니 모두 지난날의 증과 표 따위들이였다. 량식구매증, 석탄 구매증, 천표, 량표, 그것도 지방량표와 국가량표가 따로 있었다. 이외에도 고기표, 부식품표, 리발표, 목욕표 등 별의별 표가 다 있었다. 기아에 허덕이며 헐벗었던 당시에는 모든것이 부족하여 배급제를 실시하였는데 이런 증이나 표가 없으면 물건을 살수가 없었다. 개혁개방이후 물질이 풍요로와지고 생활이 펴이자 이런 증과 표들이 더는 쓸모없게 되여 언젠가 이렇게 한데 모아 서랍에 처박아둔것 같았다. 모두가 감감 잊고 있던 력사의 견증물들이였다.

(응? 그런데 이게 뭔가?  인분표? 아니. 인분표도 여기에 끼여있다니!)

순간 나의 머리속에서는 벼락이 치고 천둥이 울리듯 꽈르릉 하는 소리가 났다.  다른 증과 표들은 모두 무심하게 지나쳤으나 인분표만은 보는 순간 머리가  뜨거워 나고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목에서 뭔가 뜨거운것이 울컥 괴여오르는듯했다.

낡고 허름해진 누른 종이표는 40여년이 지났는지라 색이 바랬고 접혀진 자리는 거의 끊질듯했다. 나의 손이 떨렸다. 나의 청춘을 조롱하고 나의 인생을 짓밟았던 인분표, 그 인분표를 들고있노라니 잊지 못할 하향지식청년시절의 이왕지사들이 꼬리를 물고 클로즈업되여 다가왔다.

1.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한때 전국을 휩쓸었던 홍위병들의 광란적인 혁명적열기가 점차 사그라지자 “반란”에 공을 세운 도시의 홍위병들이 카멜레온이 몸색을 바꾸듯 갑자기 지식청년으로 탈바꿈하여 산골로, 농촌으로 내려가는 바람이 전국을 휩쓸었다. “지식청년들이 농촌에 내려가  빈하중농들의 재교육을 받는것은 아주 필요하다.”는 위인의 교시를 받들고 수천수만의 “반란전사”들이 멋도 모르고 “상산하향”의 기치를 높이 쳐들었다. 우리 현성에서도 중학교마다  학생들이 서로 내려갈 곳과 함께 내려갈 짝을 뭇느라고 분주히 뛰여 다녔다.

나는 가정성분이 부농이라고 학생들한테 몰리고 조직의 배척을 받다보니 남들이 모두 혼이 나가듯 발광하던 그 드세찬 문화대혁명에도 참가하지 못했다. 참가하고 싶어도 어느 반란조직에서나 받아주지 않으니 갈 곳이 없었다. 홍위병에도 가입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무산계급혁명의 초석인 빈농, 하중농 성분을 가진 애들만 들게 하다가 후에는 “단결할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단결해야 한다.”며 중농과 상중농집 애들도 홍위병에 받아주었다. 그러나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나쁜분자, 우파분자 등 5류분자의 자식들은 계급의 원쑤라고 받아주지 않았다. 행여나 하던 나의 희망은 또다시 물거품이 되였다. 학급 학습위원이던 내가 하루아침에 개밥의 도토리신세가 되자 일부 선생님들은 나의 처지를 몹시 동정했다. 하지만 후에는 선생님들도 하나하나  끌려나와 투쟁맞다보니  더는 나를 동정할 겨를이 없었다. 나가나 들어오나 “계급”을 모르는 우리 집 황둥개 밖에 나를 반겨 맞는 “동지”가 없었다.

이웃집 동급학년 애들이 “상산하향”한다고 떠들며 분주히 서둘러댔다. 나도 하향하여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고싶었다. 농촌에 내려가 계급의 적들의 몸에 배여있다는 “자산계급의 오물”을 녹여내며 각이 물러나도록 일하여 조직의 인정을 받고 사회의 긍정을 받고싶었다. 나도 가는 곳마다 쫓겨다니는 “개새끼”나 “쥐새끼”가 아니라 무산계급의 단결대상이 되고싶었다.

나는 부모들 몰래 가두판사처에 찾아가서 “광활한 천지에 내려가 단련받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가두판사처에서는 “5류분자 자식들이 더구나 농촌에 내려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며 나의 “혁명적” 행동을 “견결히” 지지하였다. “위대한 운동”이후 “계급적 원쑤새끼”의 요구가 처음으로 조직의 긍정을 받은 것이였다. 나의 마음속에서는 파아란 삶의 새싹이 돋아났다.

그들이 어떻게 학교와 련계했는지 나도 학교의 통지를 받고 하향명단에 들게 되였다. 나는 하향가는 날에야 함께 내려갈 12명 동학들을 만나게 되였다. 남녀 모두가 한반급 학생들이였으나 “위대한 운동”에서 따돌림을 당해 오래동안 접촉하지 못하다보니 저으기 서먹서먹했다. 나는 낯에 철판을 깔고 주동적으로 그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앞으로 많이 도와달라고 굽석거렸다. “자산계급”인 내가 먼저 알은체하지 않으면 “무산계급”인 그들이 먼저 나를 알은체할리 만무했다. 동학들은 건성으로 악수는 하지만 성분이 “개똥”인 내가 자기들의 “깨끗한 비단보”에 끼이는것을 별로 환영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도 함께 내려갈수 있다는것만으로도 좋았다. 공부할 때에는 모두 내 도움을 받던 애들이 아니였던가.

수천명 하향지식청년들이 현체육장에서 현혁명위원회 지도간부의 격정에 넘치는 연설을 듣고 혁명적 군중들과 가속들, 교원들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트럭에  앉아 사면팔방으로 떠나갔다. 우리도 트럭에 앉아 현성과 백여리 떨어진 광진공사 중성 2대 집체호로 내려갔다. 미리 통지를 받았는지 마을의 빈하중농들이 동구밖에까지 나와 북과 징을 울리며 우리를 맞아주었다. 우리의 마음은 저도모르게 세차게 뛰였다. 마을에서 유일한 벽돌집이 그래도 우리 집체호였다. 허름한 초가집들 속에 우뚝 서있는 집체호는 닭무리속의  학과 같았다. 후에 알고보니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빈하중농들이 우에서 내려보낸  하향지식청년안치비에 생산대자금을 보태여 지난 여름에 다그쳐 지은 집이란다.

그날 저녁 생산대에서는 우사에 덧붙여 지은 회의실에서 우리들을 환영하는 사원대회를 열었다. 우리는 귀빈으로 초대되여 가슴에 붉은 꽃을 달고 회의실가운데 벽을 등지고 나란히 앉았다.

현성 어느 기관에서 내려왔다는 키가 작달만하고 평퍼짐하게 생긴 “모택동사상 선전대”의 한조장이 먼저 손을 내저으며 연설했다.

“…도시의 지식청년들이 농촌에 내려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아야 하는 력사적 의의와 현실적 의의를 똑똑히 리해하고 모주석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훌륭한 지식청년으로 성장할것을 부탁합니다.”

이어 깡마른 바지가랑대처럼 길쭉한 정치대장이 나서서 강조했다. 목은 조롱박 입구처럼 약했으나 목소리는 아주 우렁찼다.

“…홍위병들의 혁명정신을 계속 발양하여 농촌에 와서도 무산계급독재하에서의 계속 혁명을 잘하며 비판과 대비판의 무기를 잘 응용하여 계급의 적들과 용감히 투쟁하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얼굴이 “수호전”의 리규처럼 수염투성인 생산대장이 나서서 석쉼함 목소리로 하향지식청년들이 광활한 천지에서 혁명을 위해 농사짓는다는 웅심으로 대채를 따라 배우는 운동중에서 생력군역할을 충분히 발휘할것을 요구하였다.

알고보니 한 생산대에 대장이 둘이 있었다. 한 사람은 정치를 틀어쥐고 다른 한사람은 생산을 틀어쥔단다. 서렬은 정치대장이 앞이란다. 그외 부대장들도 몇이 있었다.

그들이 계급투쟁과 계급의 적이란 말을 할 때마다 나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손에 땀을 쥐며 가슴을 두근거렸다. 어디를 가나 “개새끼” 신세는  면치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갈마들며 저으기 주눅이 들고 어깨가 처졌다. 붉은 꽃도 달지 말아야 할 사람이 달아서인지 앞가슴에서 달달 떠는듯 했다.

내 처지에서 백지장같이 “순결”한 사람들만 참여할수 있는 정치생활은 엄두도 못 내기에 나는 그저 수걱수걱 일을 잘하는것으로 자신을 개조하려 했다. 나는 어지럽고 힘든 일도 꺼리지 않고 맡겨주는 일이면 몸을 내번지고 열심히 해제꼈다.  

나는 점차 사원들의 칭찬을 받게 되였고 집체호에서 일을 가장 잘하는 청년으로 정평이 났다. 그런데 그것이 되려 집체호친구들의 질투의 대상으로 될줄이야. 호장이나 부호장 등 다른 애들은 정치적으로 빨리 발전하려고 정치학습에나 대비판 에는 적극적이였으나 힘들고 어지러운  일에는 소극적이였다. 또한 대대와 공사에 회의를 자주 다니다보니 일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공수는 공수대로 받았다. 나는 회의에 갈 일도 없기에 매일 괭이, 삽과 호미하고만 씨름하였다. 그들이 받는 것은 정치보수였고 내가 받는것은 로동보수였다. 천금사랑은 없어도 일사랑은 있다고 농촌에서는 일이 사랑이였다. 일만 잘하면 사원들은 별로 성분을 따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리 성분이 나쁘다고 뒤가 나가는줄 모르고 일하느냐?”며 나를  측은해 하기도 했다. 나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였는지 모른다.

이듬해 년말에 나는 집체호에서 유일하게 선전사원으로 선출되여 붉은 꽃을 달고 낫과 삽을 상으로 수여받았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부터 줄곧 이붓자식 신세였던 나는 농촌에 와서야 “선진”이란 영예를 갖게 되였고 축하의 박수를 받아보았다. 줄곧 “개새끼”나 “쥐새끼”란 모욕적인이고 폭력적인 말만 듣다가 처음으로 사람대접을 받게 된것이였다. 그날 저녁 나는 희열의 눈물을 흘리며 이불밑에서 손전등을 켜들고 집에다 만장같은 편지를 썼다. 편지지는 나의 눈물로 얼룩졌다. 후에 안 일이지만 아버지, 어머니는 눈물젖은 이 막내의 편지를 읽으며 함께 편지지를 적셨다고 한다.

2

어느날 저녁 또 사원대회가 열렸다. 기실 사원대회는 거의 날마다 열렸다. 다만 내가 정치학습이나 비판대회에 참가할 자격이 없었기에 정치회의에 빠질뿐이였다. 그러나 생산문제를 토론하는 회의에는 참가할수 있었다. 그때면 나는 한번도 빠지지 않았다. 성분이 나쁜 내가 참가할수 있는 회의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지 않으면 빈하 중농들의 눈에 날수 있었다. 정치회의를 할 때에는 박대장이 사회했고 생산회의를 할 때에는 오대장이 사회했다.

오대장은 다음날 생산포치를 하고 한가지 토론의제를 내놓았다.

“여러해 똥을 푸던 ‘포로’가 병이 심해 드러누웠으니 더는 똥을 푸지 못할것 같습다. 아마 새로운 분이 나와야 할것 같습꾸마. 누기 자원할 분이 있으면 자원해 봅소.”

후에 알고보니 그 ‘포로’라는 사람은 항미원조때 지원군에서 중대장으로 사선을 넘나들며 용감히 싸우던 사람이였다. 그는 전사들을 지휘하여 수십차례 크고작은 전투에 참가하여 앞장에서 돌진하며 적들을 무더기로 소멸하였다. 그러다가 치렬한 모 고지 진지전에서 포탄에 중상을 입고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적에게  포로되였다. 그는 포로영에서도 굴하지 않고 지원군포로들을 조직하여 적들과 견결히 투쟁하다가  포로교환때에 풀려 나왔다. 다수 포로들이 적들의 기만책에 대만으로 갔으나 그는 갖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견결히 자기의 조국을 선택하였다. 그런데 그는 생각밖으로 조직의 엄격한 심사를 받고 당적과 군적을 쫄딱 떼우고 “죽음이 두려워 파렴치한 포로가 되였다”는 딱지를 쓰고 고향에 쫓겨와 농사를 짓게 되였다. 사활적인 전투에서 두번이나 공을 세워 크고작은 간부들이 문쪽이 다슬도록 줄을 이어 가정위문을 오고 마을사람들이 한결같이 우러러보던 영웅이였으나 후에 포로가 되는 바람에 그 공은 “똥무지”가 되여버렸다. 몸이 잔페가 된 그는 운동때마다 갖은 투쟁을 당해야 했고 어지럽고 힘든 일만 차례졌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여서부터 그에 대한 비판과 투쟁이 그칠줄 몰랐다. 원래 몸이 잔페인데다 자주 처참하게  투쟁을 당하다보니 정신적으로 희망의 끈이 끊어지고 육체적으로 뼈와 살이 다 물러났는지 이젠 아주 드러누웠단다. 마을사람들은 어른아이 할것없이 비루먹은 강아지 대하듯 모두 습관적으로 그를  “똥포로”라고 얕잡아 불렀다.

농촌에서 인분푸는것과 같은 더럽고 힘든 일은 아마 그런 “조국을 배반한 포로”들이 아니면 나같은 “계급의 적”들만 하는것  같았다. 마을에서나 집체호에서 성분이 제일 검은 내가 자원하지 않으면 빈하중농들이 나를 어떻게 볼가? 진심으로 재교육을 받으러 온 "개새끼"로 보아줄가? 대장이 누가 자원할 사람이 없는가고 묻는것도 나를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닐가?  남들이 “학철이 하는게 어떻소?” 하고 추천하기전에 내가 주동적으로 나서서 자원하는것이 더 혁명적이 아닐가?  또한 이 기회가 성분이 나쁜 나같은 “자산계급”이 단련할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니겠는가. 주저하며 갑자를 시간이 없었다. 나는 끝내 남먼저 손을 들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사원들이 눈길이 일제히 나한테 쏠리였다. 그들의 눈길에는 의혹과 놀라움이 담겨있었다. 집체호친구들은 아니꼽게 나를 흘겨보았다.

오대장도 뜻밖이라는듯 의아하게 물었다.

“학철이 정말 할수 있겠소? 진심이요?”

내가 공연히 제 방구에 놀란것인가? 하지만 이미 말을 꺼낸 이상 견결히 나설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일어서서 힘있게 말했다.
“진심입니다. 빈하중농들이 믿어준다면 잘할 자신이 있습니다.”

곁에 앉은 한 늙스구레한 아낙네가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낮은 소리로 한마디 튕겨주었다.

“장가두 안간 새파란 청년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한다구 그래오? 날래 아니라구 하오.”

오대장은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어지럽고 힘든 일을 집체호동무가 이처럼 남먼저 자원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꾸마. 이는 빈하중농들의 재교육을 잘 받아보겠다는 하향지식청년의 크나큰 결심이 아니겠습둥. 우리 열렬한 박수로 환영하겝소.”

사원들이 박수로 환영을 표하긴 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네가 하면 얼마나 할지 하는 미덥지 않아하는 태도였다.

오대장이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도 이 어지럽고 힘든 일을 하겠다는 정신이 얼마나 좋습둥. 하지만 이 일은 장난이 아니오. 보기엔 하잘것 없는 일 같지만 이는 대채를 따라 배우는 혁명정신과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큰일이오. 어디 잘해보오. 하지만 어린 나이에 해보다가 힘들어 못하겠다면 아무때나 내놓아도 되오.”

이미 결심발표를 한 이상 아무리 힘들어도 한동안은 견지해야 할게 아닌가. 그래도 자원한것이 "계급의 적"에게 강다짐으로 떠맡긴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겠는가.

이튿날부터 나는 인분푸는 일에 달라붙었다.

인분푸는 일은 교대도 인계도 필요없었다. 그저 철판으로 땜해 만든 인분통을 실은 수레를 몰고 나가면 다였다. 도구라야 장대긴 철바가지와 양철물통 하나가 전부였다. 그런데 인분통에 다가가니 구린내가 물씬 풍겨오며 구역질이 욱 치밀었다. 시내에서 어쩌다 인분수레와 마주치면 코를 씨쥐고 멀찍히 에돌아갔는데 이젠 내가 그 인분통과 인연을 맺게 되였으니 내 신세도 가련하고 한심했다. 삶의 길이란 원래 이렇게 굴곡적인가. 팔자타령을 해봐야 소용없었다. 이것이 운명이라면 고스란히 받아들일수 밖에. 누가 “자산계급”의 자식으로 태여나라던가.

나는 춘하추동 가리지 않고 인분수레를 몰고 골목골목 다니며 집집의 변소들을 훑었다. 그래도 겨울에는 오줌똥이 얼어붙어 그다지 역겹지 않았다. 하지만 언 오줌똥을 녹여 비료로 만들려면  오장륙부가 태를 치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우사마당 한켠에 커다란 중국식가마를 걸어놓고 장작을 지펴 인분을 녹일 때면 도저히 맡아낼수 없는 구린내에 정신이 다 아찔해났다. 처음에는 울긋불긋한 인분덩이가 보기 싫고 구린내가 역겨워 대짜배기 마스크를 끼고 풍사방지안경까지 착용하였다. 그러나 빈하중농들이 보면 “재교육을 받으러 왔다는 '개새끼'가 무슨 저따위냐”고 험담을 할가봐 후에는 아예 벗어버렸다. 인분이 녹으면 흙을 퍼넣고 커다란 삽으로 자주 휘저어며 버무려야 했다. 인분과 흙이 골고루 버무려지면 밀차에  실어다 두엄무지에 갖다 쏟아놓았다. 이렇게 되여 겨울에도 인분으로 만든 거름 무지가 점점 높아갔다. 인분거름은 만들기 어려워 그렇지 일단 만들어만 놓으면 우사에서 쳐낸 소똥보다 훨씬 효능이 좋다고한다.

그런데 일을 마치고 집체호로 들어가면 친구들이 모두들 눈을 흘기고 코를 싸쥐며 마치 집안에 변소가 들어온듯 나를 멀리찍히 피하는것이였다. 나의 몸에서 역한 구린내가 풍긴다는가. 나는 이미 그런 냄새에 절어 별로 감각이 없는데 곁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옷도 자주 씻느라 했으나 냄새는 여전하단다. 이젠 속살에 까지 구린내가 밴것인가? 이것이 빈하중농들의 재교육을 꾸준히 받으니 “자산계급의 썩어빠진 냄새가 빠져나가고 무산계급의 향기가 들어온” 성과인가? 하지만 누구나 외면하고 싫어했다. 나는 집체호친구들과 한자리에 앉아 밥을 먹기 미안하여 그들이 먼저 먹고 일어나기를 기다렸다가 남은 밥과 반찬을 먹어야 했다. 나는 내가 사용하는 수저와 그릇도 나 절로 씻어 따로 보관했다.

여름에 인분푸는 일이란 더구나 고역이였다. 인분에 앉았던 대가리 시퍼런 똥파리들이 마구 얼굴에 덥쳐드는가 하면 구데기가 우글거리는 썩어빠진 구뎅이에서 구린내가 돗바늘마냥 코를 찔렀다. 그래도 나는 구리지 않은척 꾹 참고 열심히 인분들을 퍼냈다.

그런데 집집마다 땅에 웅덩이를 파고 변소를 대충 짓다보니 수분이 다 빠져나가 인분류실이 많았다. 거름무지 쌀무지라는데 한해에 이렇게 류실되는 거름이 얼마겠는가. 별다른 화학비료들이 없이 거름에 의거해 농사를 지어야 하는 형편에서 이건 너무나도 큰 손실이였다. 어떤 집에는 아예 변소조차 없어 가만가만 남의 집 변소로 드나들거나 들에 나가 해결했다. 거름류실을 방지하는 대책은 없을가?
어느날, 나는 인분수레를 몰고 한 집에 가서 인분을 푸다가 그 집에서 모내기 철까지 먹고난 빈 김치독을 내다 볕쪼임시키는것을  보고 문득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집집마다 변소 웅덩이에 낡은 독을 묻으면 오줌똥류실을 방지할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오대장을 찾아가 지금 집집에서 인분류실이 많은 정황을 회보하고 집집마다 변소에 낡은 독을 묻으면 거름을 더 많이 모을수 있지 않겠는가고 정중히  의견을 드렸다. 그리고 지금 사원들이 변소관리와 인분관리에 중시를 돌리지 않는데 량과 질에 따라 얼마간씩 공수를 주면 사원들의 적극성을 동원하는데 유리하지 않겠는가고 조심스레 덧붙였다.

오대장은 놀랍게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손벽을 탁 쳤다.

“과연 그렇군. 한뉘 농사를 지어왔다는 우린 왜 그 생각을 못했을가? 지식청년이 다르긴 다르군. 집집마다 그렇게 하도록 사원대회를 열고 동원해야겠소.”

오대장은 그날저녁으로 사원대회를 열고 내가 말한 방법대로 가가호호에서 변소를 개진하고 변소가 없는 집에서는 빠른 기일내에 변소를 지을것을 호소하였다. 하지만 적지 않은 사원들이 심드렁한 태도였다. 머리에 털이 돋아 변소에 독을 묻고 오줌똥을 받아낸다는 소린 듣다 처음이란다. 그런데 현에서 내려온 공작대 한조장이 이 방법에 아주 흥취를 가졌다. 그는 회의에서 “이는 대채를 따라 배우는 운동가운데서 나타난 기발한 착상으로서 혁명을 위해 농사를 짓자면 새로운 방법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사원들은 처음에 별로 내켜하지 않았으나 생산대에서 내리먹이고 공작대까지 나서서 동원하는데다가 공수까지 준다고 하니 그다지 반대하는것 같지 않았다.

이튿날부터 집집마다 변소개조에 달라붙었다. 어느 집에나 모두 낡은 독이 한두개씩은 있는터라 재료가 문제될것은 없었다. 그런데 어떤 집에서는 손을 대기 싫어 나를 불러다 변소에 독을 묻어달라고 했다. 변소웅덩이 주변의 흙들도 파내면 비료가 될수 있는데다 이는 사원들이 나를 믿기 때문이라고 여겨 나는 기꺼이 그런 사원들을 도와나섰다.  50여호 되는 농호가운데서 내가 독을 묻어준 집이 스무호는 되는것 같았다. 변소없던 집에서도 남의 공수를 벌어주게 할수 없다고 생각했던지 겨끔내기로 널판자를 얻어다 새로 변소를 지었다.

일주일도 안되여 집집의 변소가 개조되였거나 새롭게 지어졌다. 공작대 한조장이 대대회의에서 어떻게 소개했는지 대대간부들이 우르르 우리 생산대에 내려와 변소를 돌아보았다. 변소개조에 흡족해진 그들은 이튿날로 우리 생산대에서 현지회의를 열고 우리 생산대의 변소개혁을 전 대대에 보급했다. 닷새후에는 공사간부들이 내려와 집집의 변소를 돌아보고는 아주 훌륭한 발상이라며 우리 생산대에서 전 공사 현지회의를 열고 이 새로운 방법을 전 공사에 보급했다. 이로 하여 나도 이름이 나기 시작했다. 빈하중농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변소개조방법을 한 하향지식청년이 고안해 냈다고 하면서 떠들썩하게 칭찬하였다. 나는 그해에 생산대와 대대의 로동모범이 되고 대대와 공사의 하향지식청년전형이 되였다. 기자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련속 부절히 공사와 대대, 생산대와 나를 찾아와 취재하고 나의 사적을 신문과 방송에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나는 그것이 되려 부담스러웠다. 성분이 나쁜 내가 이름이 나면 되려 말썽이 많아지고 질투의 대상이 되지 않겠는가. 나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살려는데 환경은 나를 들볶았다.

변소를 개조하고 공수를 준다고 하니 사원들은 여느때보다 변소관리에 무척 신경을 썼다. 어떤 집에서는 가축들이 분변을 훔쳐먹을가봐 뚜껑을 해달았고 남이 훔쳐갈가봐 신경을 곤두세웠다. 가까운 일밭에 갔다도 뒤가 마려우면 자기집 변소에 달려와 뒤를 보았다. 남의 집에 놀러갔다도 뒤가 묵직해나면 뿌랴부랴 자기집으로 뛰여갔다. 사람들이 너무하다고 손가락질하며 웃으면 “어쩌겠소. 그게 대채를 따라 배우는 실제행동이 아니겠소.” 라고 “혁명적” 말로 둘러댔다. 하지만 속으로는 “흥. 똥이자 공수이구 공수이자 돈인데 왜 남 좋은 노릇을 해?.” 라고 속심을 드러냈다. 집집에서는 학교에 다니는 애들한테도 되도록이면 학교변소에서나 길가에서 대소변을 보지 말고 집에와 보도록 단속했다. 어떤 애들은 뒤가 마려운걸 참으며 학교에서 집으로 달려오다가 그만 도중에 바지에 싸는 해프닝을 벌리기도 했다.

변소가 개조되니 또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어떤 사원들은 변소독안에 구정물같은것을 부어넣어 량을 늘였다. 여기에는 두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공수를 더 벌기 위한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분을 퍼내다 터밭에 내고는 말을 들을가봐 물을 부어 량을 채우는것이였다. 나는 제때에 생산대에 이런 문제를 반영하였다. 오대장은 사원대회를 열고 만약 이런 문제가 다시 발견될 경우엔 공수를 10배로 깎는 처분을 안기겠다고 엄중히 경고하였다.

공작대 한조장은 일부 사원들이 인분을 터밭에 내는 문제를 엄숙히 비판하였다.

“인민공사의 사원으로서 날마다 인민공사의 량식을 먹고 있으니 배설한 분변도 마땅히 인민공사의 것이여야 할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인민공사의 물건을 남몰래 자기 터밭에 낸다는것이 어디 인민공사 사원으로서 할짓입니까? 이건 엄숙히 말하면 혁명을 위하여 농사짓는 광범한 빈하중농사원들에 대한 모욕이며 대채를 따라 배우는 운동에 대한 파괴행위입니다.”

자기 집의 인분도 인민공사의것이란 말에 어떤 사원은 천정을 쳐다보며 쓰겁게 웃었다. 나도 이 일을 이렇게 로선의 높이에까지 끌어올려 비판하는것이 옳은지   속으로는 여간 찜찜하지 않았다. 공연히 긁어서 부스럼 만든것 같아 사원들 보기 미안했다.

한조장은 “불량한 행위와 과감히 투쟁”하는 나의 사적을 대대와 공사에 반영하여 나는 또 “사적인것과 과감히 투쟁하는 전형”이 되였다. 나는 그것이 불안했다. 이런 “전형”이 되기 위해 문제를 반영한것도 아닌데. 그통에 일부 사원들은 나를 아니꼽게 여기며 뒤욕을 하기도 하였다.

성분이 나쁘다는 저촉사상으로 그저 부지런히 일하여 자기의 착취계급사상을 꾸준히 개조하겠다고 시작한 일이 뜻밖에도 이렇게 선진이요 모범이요 하는 영예를 무더기로 안겨주니 오히려 바늘방석에 앉은듯 안절부절했다. 시작한바에는 아마도 더 잘해야 할것 같았다. 이젠 중도에서 그만 둘수도 없었다. 운명은 뜻있는자에게는 길을 열어주고 뜻없는자는 질질 끌고 다닌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남에게 질질 끌려다니지 말고 스스로 자기의 운명을 개척하리라 다짐했다.

나는 부담없이 인분 푸는 일을 더 잘 하기 위하여 고민끝에 집체호에서 나올것을 오대장에게 제기했다. 집단적으로 생활하는 집체호에 인분푸는 사람이 있으니 집체호에 적잖은 불편을 가져다주게 된다는 리유에서였다. 날마다 새벽에 나가다보니 다른 사람들의 수면에 영향을 주고 저녁에 늦게 들어가다보니 집체호의 다른 일을 할수 없어 눈치가 보였다. 게다가  고약한 냄새때문에 남들과 한자리에 앉아있기도, 함께 밥먹기도 불편했다. 오대장은 나의 말이 도리가 있다고 여겼던지 공작대 한조장, 생산대 정치대장, 빈하중농 정치호장, 집체호 호장과 토론하고 나를 오보호 박아바이네 집에 주숙을 잡아주었다.

그후부터 나는 박아바이네 집에서 먹고 자면서 일하러 다니게 되였다. 생산대에서 하향지식청년들에게만은 몽땅 입쌀을 주는데다가 그 량도 사원들보다 훨씬 많아 박아바이네 량주도 은근히 반겨하는 눈치였다. 나는 짬짬이 박아바이네 힘든 일도 부지런히 도와 드렸다. 박아바이네도 늘그막에 좋은 아들을 하나 얻었다고 동네방네 자랑했다. 나도 집체호에 있을 때의 마음고생을 덜고 편하게 일할수 있게 되였다.

3

나의 머리속에는 자나깨나 어떻게 하면 비료를 더 많이 만들겠는가 하는 생각뿐이였다. 그러나 50여호밖에 안되는 가가호호의 제한된 변소 인분만으로는 비료를 많이 만들기 어려웠다. 나는 생산대밖의 인분도 실어오려 생각했다.  공사소재지에 위치해있는 우리 마을에는 공사기관, 중소학교, 공소합작사, 신용사, 병원, 사반기업 등 기관들이 있어 공동변소들도 많았다. 어느날 해질무렵 나는 여러 기관의 공동변소들을 돌아보았다. 변소마다 인분량이 많아 사원들 집의 인분량과는 비교도 안되였다.
나는 낮에 마을의 인분들을 다 퍼내고 이튿날새벽에 공사기관 공동변소로 갔다. 그런데 첫날부터 생각밖의 충돌이 생길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거기엔 벌써 나먼저 두 사람이 와서 한창 인분을 푸고있었다. 나도 그들과 알은체를 하며 한켠에서 인분을 푸려 하자 두사람이 똥바가지를 내려놓고 나한테 다가왔다. 이웃 생산대에서 인분을 푸는 나이 지긋한 사원들이였다.
“오, 누군가 했더니 2대의 모범지식청년이구만.”
그들이 나를 눈박아보더니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생산대똥이나 풀게지 왜 여기까지 나온게우?”
나는 태도좋게 웃으며 대꾸했다.
“생산대의 인분만으로 비료를 많이 만들기 어려워서 공동변소 인분을 좀 퍼갈가구요…”
“모범이 다르긴 다르군. 하지만 이건 우리들이 몇해전부터 맡아놓은 점이란 말이우.”
뭐? 자기들이 맡아놓은 점이라니. 지금 쩍하면 이건 공사의 점이요 저건 대대의 점이요 하더니 변소에도 점이란것이 있는가?
“이 동무 시내에서 내려온 지식청년이여서 잘 모르는가본데 우린 언녕부터 모두 분공해서 공동변소를 나눴거든. 이를테면 우리 1대에서는 공사기관변소와 합작사 변소를 맡구 3대에서는 중학교변소를 맡구 4대에서는 소학교변소를 맡구 5대에서는…” 
“그럼 우리 2대에서는 원래 어느 변소를 맡았댔습니까?”
“뭐? 2대? 2대에서는 전에 포로가 똥을 푸던데 누가 그런 겁쟁이 똥포로한테 구역을 떼여준단 말이오?”
“다같이 혁명을 위해 농사를 짓고 다같이 대채를 따라 배우는데 우리 2대에서도 어느 구역을 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래부터 젊은이가 똥을 펐다면 어느 구역을 맡을수 있었겠는지 모르겠지만 … 그나저나 젊은이는 혼자 벌어 혼자 먹는 사람이 아니요? 우린 똥을 퍼서 대여섯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한단말이오. 그러니 이런 공동변소에는 눈을 떼는게 좋겠소.”
보아하니 말로는 통할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인분때문에 선진이요 모범이요 하는 영예를 가득 지니고 있는 내가 그들과 드잡이를 할수도 없었다. 그런데 언제 부터 공동변소도 이렇게 “지방깡패”들이 차지하고 있었단말인가? 이들이 빈하중농이 옳기나 한가? 우에서 이런 정황을 알고나 있는건가? 대채를 따라 배우는 운동중에도 이런 페단이 있다니? 하지만 어쩔수 없었다. 수레를 돌려세우는수 밖에 없었다. 그후에도 내가 새벽에 인분수레를 몰고 중소학교, 합작사, 은행 등 단위의 공동 변소를 돌아보았으나 모두 꼭 같은 일에 봉착했다. 말 몇마디 못해보고 쫓겨오는 신세가 되였다. 인분푸는데서도 따돌림을 당하다니.
하지만 그 많은 기관과 단위 공동변소의 인분을 나만 퍼올수 없다는것이 여간 아쉽지 않았다. 더구나 이는 우리 생산대에서만 밑지는 일이 아닌가. 우리 생산대 에서도 량식을 더 많이 증산하면 그만큼 나라에 유리하지 않겠는가. 더도 말고 공평하게 퍼올수 있는 방법은 없을가?
어느날, 나는 오대장을 찾아가서 내가 기관의 공동변소들에 인분푸러 갔다가 당한 봉변을 하소연했다. 오대장은 상을 찡그리며 세상에 그런 일도 다 있었느냐며 놀라와했다.
“공동변소의 그 많은 인분을 우리가 한통도 퍼오지 못하면 우리 생산대의 손실이 아닙니까? 제 생각에는 공사에 반영해서 각 생산대에서 공평하게 퍼가도록 방법을 대게 하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생산대마다 표를 나눠주면 표에 따라 인분을  퍼갈수 있게 하든지 말입니다.”
“음. 그 방법이 좋을것 같군. 내 공작대 한조장한테 말해 공사에 반영하도록 해보겠소. 아무리 대채를 따라 배운다구 그깟 똥을 가지구두 서로 다퉈야 하니 원.”
그후 한조장이 공사에 어떻게 반영했는지 공사에서는 과연 우리 의견을 받아들여 표를 찍어 각 생산대에 내려보냈다. 그리고 인분관리를 잘하게 하기 위하여 각 기관, 단위에서는 공동변소에 모두 널문을 해달고 자물쇠를 잠구게 했다. 각 생산대마다 배당된 날자에 표를 가지고 가면 직일서는 사람이 표를 확인하고 자물쇠를 열어 주도록 했다.
표를 받아쥔 나는 무등 기뻤다. 나의 의견이 받아들여진것도 기뻤고 나도 공동변소 인분을 퍼올수 있다는것이 기뻤다.
담배종이 두장 크기만큼한 표 앞면에는 웃머리에 “영길현 광진공사 인분 관리소’라고 씌여져있었고 가운데는 큼직하게 “인분표”라고 찍혀있었다. 오른쪽에는 작은 글씨로 “표에 따라 인푼을 퍼야 함”이라고 찍혀있었고 왼쪽에는 “날자가 지나면 작페”라고 찍혀있었다. 맨아래에는 년월일이 찍혀있었다. 뒤면에는 큰 글씨로 웃쪽에 “혁명을 위하여 농사를 짓자!”고 찍혀있었고 아래쪽에는 “농업에서는 대채를 따라 배우자!”고 찍혀있었다. 그리고 벼이삭그림으로 둘레를 보기 좋게 감쌌다.
이런 표가 생산대마다 일주일에 한장씩, 한달에 넉장씩 나왔다. 각 생산대의 인분 푸는 사원들은 해당날자에 표를 가지고 지정된 공동변소에 가서 인분을 풀수가 있었다. 오대장은 우리 생산대에서도 공동변소의 인분을 퍼올수 있게 된것은  나의 공로라며 생산대회의에서 나를 입이 마르게 칭찬해주었다. 공작대 한조장도  “우리 공사의 이름난 모범 하향지식청년이 제기한 의견이여서 공사에서 쉽게 받아들인것 같다.”며 “모든 청년들은 혁명을 위해 열심히 농사를 지으려는 학철동무의 고상한 혁명정신을 따라 배우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일부 집체호청년들이 입을 삐쭉 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다른 생산대 인분푸는 사원들한테도 욕사발을 얻어먹었다. 이건 틀림없이 내가 제기해서 자기네 공수벌이를 방해한것이라 며 혼자 벌어 혼자 먹는 사람이 무슨 욕심을 그렇게 부리느냐는 질타였다. 하지만 이게 어디 내 개인욕심을 부린건가. 모두 집체리익을 위해 제기한 정당한 의견이 아닌가.
공동변소의 인분을 퍼오면서부터 우리 생산대의 비료무지는 날따라 높아만 갔다. 사원들은 “똥포로”가 인분을 풀 때보다 비료무지가 곱절이나 늘어났다고 했다. 나는 저으기 자호감을 느꼈다. 이젠 더는 성분때문에 신경이 씌여지지 않았다. 나만 부지 런하면 스스로 나의 운명을 개변할수 있을것 같았다.
나는 몸아 아파도 내색하지 않고 날마다 일하러 나갔다. 한번은 심한 리질에 걸려 일어설 맥조차 없었으나 당날 인분표를 쓰지 않으면 작페가 되기에 저녁 퇴근녘에 공사기관 공동변소에 인분 푸러 나갔다가 하마트면 인분구덩이에 꺼꾸로 떨어질번하였다. 내가 인분통옆에 주저앉아 식은땀을 흘리고있는데 마침 공사 지식 청년판공실 염주임이 퇴근하다가 맥없이 앉아있는 나를 보고 어디 아픈가고 물으며 나를 공사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몸과 마음 다 바쳐 일한 나는 그후 하향지식청년대표로 뽑혀 선후로 공사와 현에서 열리는 하향지식청년대표대회에 참석하여 대회발언까지 하였다. 발언고는 내가 초고를 쓰고 공작대 한조장이 수개하였는데 받아보니 똥푸는것을 세계혁명과 중국혁명 높이에까지 끌어올리며 나의 사적을 하늘만큼 부풀렸다. 나는 너무 고무풍선을 탄것 같아 한조장을 찾아가 의견을 제기했더니 한조장은 이것도 혁명의 수요이니 그대로 발언하라고 했다. 그런데 생각밖에도 그 발언이 좋다고 대회측 에서는 나를 지구대표대회에 가서 전형발언을 하도록 추천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나는 공사나 현뿐만아니라 전 지구적으로도 유명한 인기인물이 되였다.
이름을 날리게 되자 각 지구 많은 집체호들에서 전문적으로 나의 사적을 학습하였다. 각 현, 시 하향지식청년들과 귀향지식청년들의 열정에 넘친 편지가 눈송이마냥 날아들었다. 그중에는 나의 사적에 큰 감동을 받았다며 경험소개를 해달라는 지식청년이 있는가 하면 나를 “모주석의 훌륭한 지식청년”이라고 칭송하는 지식청년도 있었다. 지어 “혁명적우의”를 맺고싶다고 고백하는 녀지식청년들도 더러 있었다. 그 뜻을 모르는바는 아니였지만 선진이요, 모범이요 하는 여러 가지 “혁명적 영예”를 지닌 나로서는 서뿔리 아무 녀지식청년들과 “혁명적우의”를 맺을수 없었다.  더우기 온 사회가 계급투쟁을 “날마다 말하고 달마다 말하고 해마다 말하며” 대비판의 “혁명기치”를 높히 쳐들고 있는 환경속에서 출신이 나쁜 “뚜꺼비”가 출신이 좋은 “고니고기”를 맛보려 한다면 그것은 “반혁명행위”나 다름없는 일이였다. 그래도 인간의 원초적 본능은 가슴밑바닥에 파랗게 살아있어 숫총각의 생숭생숭한 마음으로 그중의 “성분이 나빠 자기도 혁명과 생산 1선에서 고민이 많다”는 한 녀지식청년 한테만 “혁명의 길에서 서로 돕고 전진하며 모주석의 훌륭한 지식청년이 되기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회답편지를 보냈다. 동병상련이라고 그후 우리 “검은 넝쿨에 달린 검은 열매”들은 남몰래 서신래왕을 하게 되였다.
조직의 열렬한 고무와 녀지식청년과의 싱숭생숭한 “혁명적우의”에 도취되여 나의 혁명정신은 하늘을 찌를듯했다. 그만큼 사상부담도 커져 몸이 아파도 시름놓고 병치료를 할수 없었다. 새벽 일찌기 똥푸러 나가기 위해 옷을 그대로 입고 자는 일이 많아 이 “계급의 적”의 몸에 또다른 숫한 “계급의 적”들이 근질근질 기여다녔다.
내가 인분푸기에 정력을 다 바치고있을 때에 “똥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다. 앓아누워도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어 기여다니며 자기절로 대충 끓여 먹다가 죽었단다. 죽게 되여도 곁에 더운물 한사발 떠주는 사람이 없고 들여다보는 사람조차 없었으니 죽어도 얼마나 쓸쓸하고 고독하고 원통스럽게 죽었겠는가. 전쟁판에서 얼마나 용맹하게 싸웠을 사람인데 본의아니게 포로가 되다보니 돌아와서 일생동안 사람축에 들지 못하고 시도때도 없이 투쟁받다가 비루먹은 개처럼 “더럽게” 죽었다.
나의 전임ㅡ”똥포로”의 죽음은 나게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까마귀 까마귀속” 을 알아서인지 나는 그 “똥포로”의 죽음이 더없이 가엾게 느껴졌고 무서워졌다. 성분이 “개똥”인 이 후임도 고생스레 “혁명적 빈하중농들의 똥”을 푸다가 언젠가 전임처럼 그런 비참한 끝장을 보지 않을가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났다. 겉으로는 간부들이 이 “똥푸개모범”을 잘한다고 춰주고 조직에서 영예를 안겨주지만 사실 어디로 가든 사람들이 모두 코를 싸쥐고 눈총을 쏘는 숨쉬는 “변소”이고 “똥무지” 였다. “똥포로”처럼 “개죽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죽도록 혁명하는 길만이 유일한 해탈의 길이였다.
 
4
내가 인분을 푼지 4년이 되는 해부터 우에서 우수한 하향지식청년들을 추천하여 도시의 로동자로 올려보내는 지표가 내려왔다. 이는 수많은 지식청년들의 몸을 달구어놓았다. 어떤 지식청년들은 하루빨리 고역스러운 농촌을 벗어나 도시로 돌아갈수 있는 문을 뚫느라고 앞뒤로 뻔질나게 뛰여다녔다. 나는 성분이 성분인지라 나한테는 이러한 지표가 차례지지 않을줄 알고 아무런 내색도 없이 자기 할 일만 부지런히 하였다. 어떤 사원들은 나를 찾아와서 “넌 이름난 모범인데 왜 이러고 있느냐? 남들처럼 좀 뛰여다녀야 하지 않겠느냐?”고 귀뜸해주기도 했다. 나는 그때마다 웃으며 “저는 아직도 빈하중농들의 재교육을 더 많이 받아야 합니다.” 라고 마음에 없는 변명을 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서글픔을 금할수 없었다. 시어미 역정에 개배때기를 찬다고 나는 열심히 인분 푸는것으로 서글픔을 달래였다.
그런데 정작 생산대회의에 내놓고 토론을 붙이니 사원들이 한결같이 성분이 “개똥”인 나를 첫 사람으로 추천할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다른 지식청년들두 잘 했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학철이처럼 농촌에 내려온 이듬해부터 어지럽고 힘든 일을 꾸준히 찾아한 청년이 어디 있수? 난 학철이 좋겠수.”
한 로농이 선참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채이쿠. 그만큼 고생했으문 이젠 시내에 올라가야지므. 성분이 나쁘다구 똥진 오소리처럼 농촌에 처박혀 뒤가 나가게 일만 하는게 정말 보기 구차하단데. 이젠 학철이가 그 더러운 똥푸개일을 한지도 몇핸데.”
그런데 나의 사업을 그렇게 지지하며 발언고까지 수개해주던 공작대 한조장이 싱거운 소리를 할줄이야.
“그간 학철이가 남보다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잘 받은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분때문에 우에 올려보내도 통과될런지 모를 일입니다.”
그 소리에 사원들이 왁작 떠들어댔다.
“그 성분이라는것두 할아버지때 일인데 손자대에까지 바가지를 씌워 기를 못펴게 할게 뭐 있습둥? 이게 당의 정책에 맞습둥?”
“저 학철인 일만 일이라구 된리질에 걸렸을 때 제때에 치료를 받지 못해 지금두 쩍하문 뒤가 풀려 남의 눈을 피해서 대대위생소 리의사를 찾아간답더구마. 혁명적 농사를 위해 자기 몸꺼지 다 바치는 이런 청년이 추천을 받지 못하문 어떤 사람이 추천받아야 합둥? 안 그렇습둥?”
“옳습꾸마.”
사원들은 한결같이 동의하였다. 나는 목이 꺽 메여올랐다. 나를 첫 사람으로 추천해서라기보다도 나를 그만큼 인정해주고 리해해주는 사원들의 그 진실하고 선량한 마음이 고마워서였다. 이만하면 만족이였다. 꾸밈새없는 사원들의 인정만 받으면 더 바랄것이 없었다.
 나는 엉거주춤 일어나서 수줍게 말했다.
“빈하중농 여러 분들의 추천에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자격이 안됩니다. 저는 이곳에서 여러분들의 재교육을 몇해 더 받겠습니다.”
나의 말에 사원들이 이구난방 떠들어댔다.
“쯔쯔쯔. 저 말하는걸 좀 보우. 사람이 너무 착해빠졌어. 남들은 농촌을 하루빨리 떠나지 못해 안달복달인데. 그간 고생을 적게 해서 아직두 몇해 더 있겠다는가?”
“학철인 저게 큰 모병이란데. 똥을 푸겠다고 할 때는 와늘 남먼저 나서더니 좋은 일에는 언제나 저렇게 뒤걸음만 치니 원. 본인이 저럴수록 우린 더 적극적으로 추천해야 합꾸마. 안그렇습둥?”
“옳소!”
사원들은 더 토론할 여지가 없다는듯 만장일치로 나의 손을 들어주었다. 생산대에서는 나의 명단을 대대에 올려보냈다. 이에 시샘을 느낀 집체호의 한 친구가 “비단보”속의 “개똥”인 내가 자기들 먼저 추천을 받은것이 달통되지 않아 간부들을 찾아가서 소동작을 하였다. 하지만 대대에서도 순조롭게 통과되여 나의 명단을 공사에 올려보냈다. 그렇게 되자 오히려 내 마음은 불안해났다. 한조장말처럼 성분이 나쁜 내가 과연 공사에서 무사히 통과될수 있겠는가. 통과되지 않아도 좋다. 나도 이젠 이런 일에도 남들과 경쟁할수 있는 사회의 떳떳한 일원이 되였다는것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해났다.
아닌게아니라 며칠후 오대장이 나를 찾아와서 공사의 토론에서 미끄러졌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짐작하고있던터라 별로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못내 서운했다.
“성분때문인게 아니라 무슨 혁명의 수요라는것 같습데. 어쩌겠소. 더 노력해 다음번에 보기오. 하지만 학철이두 사원들의 마음을 알았으니 사원들을 나무라진 마오.”
오대장은 안됐다는듯 나의 어깨를 툭툭치며 위안했다.
사흗날 뜻밖에도 공사지식청년판공실 염주임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우사마당 한켠에서 인분을 버무리고있는 나를 끌고 버들방천 강뚝우로 올라갔다. 우리는 강뚝에 나란히 앉았다.
“동무도 추천이 비준되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겠는데 어떻게 생각하오?”
나는 되도록 태연한척 말했다.
“저는 아무 의견도 없습니다. 저는 아직 빈하중농들의 재교육을 더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저는 락심하지 않고 맡은바 일을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니 고맙소. 사실 이번에 공사에서는 동무의 추천문제를 어느 누구보다도 신중히 토론했소. 그 누구보다도 자격이 당당하지만  결국 혁명의 수요로 동무를 남겨두기로 했소.”
염주임은 권연 한대 붙여물었다. 나에게도 한대 권했으나 나는 피울줄 모른다며 공손히 사절했다.
“조직에서 동무같은 지식청년전형 한사람을 양성한다는것이 쉬운 일이 아니요. 더구나 성분이 나쁜 지식청년가운데서 이런 전형을 양성한다는건 더구나 쉬운 일이 아니오. 그간 동무의 노력도 크지만 조직의 부축임도 적지 않았소. 최근에 지구 지식 청년판공실에서 동무를 성지식청년대표대회에 보내기로 결정했다고 통지왔소. 또 대회 전형발언까지 시키려 준비하고 있소. 이런 대목에 동무가 추천받아 도시로 올라가게 되면 다년간 조직에서 양성한 노력이 물거품이 되게 되오. 그래서 토론끝에 동무를  광활한 천지에 남겨두기로 한거요. 추천을 받아가는 지식청년은 필경 소수요. 다수는 아직도 광활한 천지에 남아있소. 동무의 문제도 성분때문이 아니라 혁명의 수요인거요. 그러니  조직의 이런 의도를 동무도 충분히 리해했으면 하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별로 한것도 없는 저한테 이런 과분한 영예를 안겨주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혁명의 수요하면 저는 영원히 광활한 천지에 뿌리박고 꽃피우고 열매맺겠습니다.”
염주임도 일어서며 나의 손을 굳게 잡아주었다.
“훌륭하오. 그런 결심과 용기가 있다면 우리도 시름을 놓겠소. 아무튼 우리가 사람을 잘못보지 않았구만. 동무는 성분의 구애를 받지 말고 적극적으로 당을 따라 학습하며 되도록 빨리 입당신청서를 쓰도록 하오.” 
나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나더러 입당신청서를 쓰라다니? 부농자식도 입당할수 있단 말인가? 나는 가슴이 부풀어오르며 눈굽이 젖어났다.
“아직 입당조건과 거리가 멀지만 조직에서 믿어준다면 입당을 쟁취하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겠습니다.”
“혁명을 한다는것은 일체를 당에 바친다는것을 의미하오. 그러자면 가지가지 시련을 극복하고 고난과 싸워야 하오. 보다 꾸준히 노력해서 새로운 운명에 적극적 으로 도전해보오.”
“알겠습니다. 그 말씀 깊이 명기하겠습니다.”
그후 나는 성지식청년대표대회에 참가하여 대회발언까지 하였다. 신문, 방송 등 성보도매체에서도 나의 사적을 굉장히 보도하였다.
그후에도 몇번 로동자모집명액이 내려와 사원들이 번마다 나를 추천했으나 공사에 올라가 번번히 통과되지 못하였다. 그 대신 다른 지식청년들이 추천을 받아 올라갔다. 몇번 추천해 올려보내도 내가 “혁명의 수요”로 통과되지 못하자 사원들은 별수 없이 다른 집체호친구들을 추천했다. 후에는 대학생추천명액까지 내려와 사원들이 또 나를 추천했으나 역시 통과되지 못했다. 이렇게 한해두해 지나가자 나와 함께 내려왔던 집체호청년들이 모두 올라가고 나만 달랑 남게 되였다. 집체호의 빈자리는 새로 내려온 나어린 지식청년들이 메웠다. 한두해가 지나자 그들도 륙속 추천을 받아 올라갔다. 마을사람들은 “혁명의 수요”로 도시에도 올라가지도 못하고 대학에도 가지 못하며 구린내나는 집집의 변소를 들추며 나이만 먹어가는 나를 보고 “혁명의 수요”가 사람을 죽인다고 한탄했다.
그후 “4인무리”가 꺼꾸러지며 형세가 돌변했다. 하향지식청년전형이였던 나는 하루아침에 모든 영예를 몽땅 빼앗겼다. 나같은 전형은 “4인무리”가 만들어낸 가짜 전형이란다. 나는 “4인무리”의 추종자로 락인이 찍혀 눈총을 받고 욕설을 먹어야 했다. 억이 막혔다. 짭지 않은 8년 동안의 노력이 나무아미타불이 되였다. 그간 나쁜 성분에서 조금이나마 해탈되여 사람축에 드는가싶더니 또다시 거지발싸개마냥 내동댕이쳐 “개똥”이 되였다. 아아, 앞으로 오는 범은 피해도 뒤로 오는 팔자는 피하지 못한다더니 나는 평생 이렇게 개밥에 도토리로 살아야 하는 팔자인가.
다행히 나의 사정을 잘아는 마을간부들과 사원들이 나를 측은하게 생각했다. 모든 영예가 다 없어진 이듬해에야 나는 “늙다리지식청년”으로 사원들의 추천을 받아 현성의 한 자그마한 철합금공장에 로동자로 올라갈수 있었다. 이때에는 누구도 나를 찾아 “혁명의 수요”로 농촌에 남아야 한다고 설교하는 사람이 없었다. “동무가 올라가면 그간 조직에서 알심들여 양성한 성과가 나무아미타불이 된다.”고 “가슴아파” 하는 사람도 없었다.
내가 배치받은 공장에 첫 출근을 해보니 나의 후배로 우리 집체호에 내려왔던 지식청년이 공장장으로 있지 않는가. 나는 그 후배의 밑에서 묵묵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나는 광활한 천지에서 인분을 푸던 그 열정과 정신으로 기술혁신을 하며 마음속의 상처를 아물궈갔다. 광활한 천지에서는 “올해도 고험 다음해에도 고험” 하며 시켜주지 않던 입당도 도시에 올라와서야 할수 있었다. 당을 따라 학습한지 꼬박 12년만이였다. 부지런히 일하여 그후에는 부공장장으로 승진하기도 했다. 대학시험제도가 회복되여 시험을 치려해도 우에서는 무슨 골간이요, 간부양성 대상이요 하면서 시험도 치지 못하게 했다. 나는 또 “혁명의 수요”에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개혁개방문이 열리고 시장화가 실시되면서 계획경제의 산물인 우리의 자그마한 철합금공장은 문을 닫게 되였다. 나는 로동자들과 함께 또 실업의 고배를 마시게 되였다.
우리의 시대는 왜 이렇게 불행한가. 3년재해 시기에는 먹을것이 없어 키가 크지 못했고 공부해야 할 시기에는 농촌에 내려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느라고 “쭉정이 지식청년”이 되고말았다. 련애하고 가정을 이루러야 할 때에는 똥푸는 모범으로 고린내를 뒤집어써야 했고 가정을 먹여살려야 할 때는 일자리가 없어 헤매였다.  하방, 하향, 하해, 하강. 우리 시대에는 왜 어디에나 오를 “상”자가 붙지 않고 내려갈 “하”자만 붙는지 모를 일이였다. 귀신의 작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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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분표 두장을 들고 들여다보며 이왕지사들을 떠올리노라니 저도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솟아올랐다. 그 시절에 속으로 남몰래 흘렸던 눈물이 인제야 밖으로 시름없이 솟아나는것인가? 그때는 어쩔수 없이 삶의 방식이라고 여겼던 인분표가 지금에 와보니 내 인생을 롱락한 증표였다. 생각할수록 “계급의 적”이였던 내 삶이 허무했고 내 인생이 불행했다. 문득 갖은 시달림을 받다가 불쌍하게 죽은 나의 전임- “똥포로”가 생각났다. 눈은 펀히 뜨고있다만 나도 결국 그 “똥포로”의 신세가 되지 않았는가.
언제 다가왔는지 장갑을 끼고 앞치마를 두른 안해가 나를 툭 건드리며 나무람했다.
“아이, 짐은 꾸리지 않구 그렇게 멍해 앉아 뭘해요? 어머, 당신 지금 눈물을 흘리고있어요?
나는 황급히 눈물을 훔쳤다.
“아니…아무것도 아니오…”
“대체 뭘 들여다보며 그렇게 울어요?”
안해는 나의 손에서 인분표를 낚꿔채다 보더니 역귀신을 본듯 놀란소리를 지르는것이 아닌가.
“우구 이게 동무 인생을 망쳤다는 그 똥푭니까? 여직껏 이따위건 왜 보관하구 있어요?”
“그건 내가 지구와 성의 하향지식청년대표대회에 참가하면서 공동변소의 인분을 제때에 푸지 못해 작페가 되였던 표요.”
“아이고 원통해라. 부끄럽지도 않아 아직도 그때 일을 떠올려요? 한뉘를 눌리워 살구 얼리워 살았으면 됐지 뭐가 아쉬워 이따위 똥표를 들여다보고 있는건가요?”
안해는 다짜고짜 인분표를 쫙쫙 찢었다.
나는 저도모르게 소리쳤다.
“아니, 그건 왜 찢소?”
“그럼 남겨뒀다 무덤속으로 가지고 가겠어요? 나는 와자자하게 신문에 난걸 보구 알았지만 제발 자식들은 옛날에 아버지가 똥푸개 모범이였다는걸 알지 못하게 해요. 창피하지도 않아요? 내 그때 무슨 정신에 똥푸개모범을 우러러보구 먼저 련애편지를 썼던지…지금 보면 어처구니 없어서…”
역시 부농성분을 가진 안해도 젊었을 때 늘 소외당하고 억눌려 살았었다. 그런 원인에서인지 그때 그시절 일만 떠올리면 이가 갈리는 모양이였다. 훤한 인물체격을 가진 그녀가 성분만 나쁘지 않았어도 나같은 “똥푸개”한테 시집오지 않았을것이다. 아마 안해도 이제 와서 나한테 “혁명적우의”를 맺고싶다고 먼저 편지한걸 후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까워 그래는게 아니라 그 속에 내 청춘이 담겨져있고 내 인생이 녹아있기 때문이오. 다시말하면 저주로운 그 시대의 력사가 말이오.”
“그런다고 이미 흘러간 인생을 되찾을수 있어요? 잃어버린 청춘을 되돌려올수 있어요?”
“두고 보느라면 그런 력사를 저주하구 그런 력사가 되풀이 되지 않게 하는데 도움이 될게 아이오.”
“뭐 력사를 동무가 씁니까? 이젠 그런데 신경쓰지 말고 아들이 사준 널직한 아빠트에서 호의호식하며 만년이나 즐겁게 보냅시다. 아픈 추억을 자꾸 떠올려봐야 자신만 괴로울뿐이예요. 재채기를 해도 뒤가 풀리는 그 똥싸개병이나 좀 열심히 치료하세오. 나두 늘그막에 좀 손에 물을 적게 적시게스리. 똥푸는 모범두 오래 하더니 이젠 제 뒤도 바로 건사하지 못하면서리…”
“…”
나는 입을 하 벌린채 안해를 쳐다보며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똥푸던 시절에  된리질에 걸린것도 무릅쓰고 “선진”이요, “모범”이요 하며 간부들이 마른 비행기를  태워주는통에 죽을둥살둥 모르고 일만 하다보니 제때에 치료하지 못하였다.  그것이 고질이 되였는지 도시에 올라온후 좋다는 약을 다 써봐도 효험이  없었다. 이는 위대한 “상산하향운동”과 “빈하중농재교육”이 나에게 남겨놓은 “영원한 기념”이였다.
그렇다. 세월이 약이라고 가슴속에 박힌 옹이를 뽑아버리고 여생을 즐겁게 보내 는것이 바람직할것 같다. 그게 어디 나 한사람이 겪은 아픔이더냐. 수천수만의  “지식청년”들이 그 “혁명”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고통을 겪지 않았던가. 다만 황당하고  저주스러운 그런 력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두손 모아 빌뿐이다.
나는 안해가 찢어버린 인분표를 주어 창밖에 휙 내던졌다. 누렇게 바랜 휴지같은 종이쪼박은 느믈느믈 맥없이 아래로 흩어져내렸다.
잘가거라. 다사다난했던 나의 청춘이여!
2014년 연변문학 제1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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