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룡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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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그때 나는 9원에 울었다
2011년 04월 30일 14시 26분  조회:1591  추천:72  작성자: 허룡석

그때 나는 9원에 울었다


허룡석

날마다 점심때 쯤이면 우리 반급 교실이 있는 북경 중앙민족대학 2호 청사문어구에는 조그마한 흙판이 나걸려있었다. 거기에는 전국 각지에서 부쳐온 돈을 찾아가라는 학생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있다.

하지만 대학에 온지 1년이 넘어도 나는 그 흙판을 들여다 본적이 한번도 없었다. 왜냐하면 많은 학생들이 애타게 바라보는 그 흙판이 나와 아무런 인연도 닿지 않았기 때문이였다. 그때 벌써 70을 넘긴 량부모님과 위병으로 시름시름 앓는 녀동생을 두고 온 고향집에서 돈을 부쳐보낼리 만무했고 또 그럴만한 친척도 없었기때문이였다.

그런데 어느 하루 하학하여 곧바로 그 청사대문을 빠져나와 숙소로 돌아오는데 한 침실에 있던 털보가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나의 앞길을 가로막는것이였다

“로얼, 형님한테 돈이 왔습데.”

평소에도 성격이 덜덜한 그가 종종 덤벼치는데다 롱담도 잘하기에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럼 네가 찾아 가져라.”

“야, 정말이라는데. 믿지 못하겠으면 같이 가보기오”

그는 불문곡직 나의 팔을 잡아끌고 대문앞으로 가 둘러보는 학생들을 비집고 소흑판앞에 나섰다.

“저것 보오. 저게 로얼이름이 아니오?”

내가 미심쩍게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아니나다를가 나의 이름이 번듯이 적혀있었다.

응? 정말이네. 근데 누가 돈을 부쳐왔지? 생산대보조를 받으며 살아가는 우리 집에서는 부쳐올리 없고. 아마 또 누군가 물건사달라는 부탁을 한것같았다. 그때 지방에서는 부식품과 일용품이 몹씨 긴장한 때라 내가 방학에 집에 가면 원래 사업하던 공사기관간부들과 마을사람들 혹은 친척들이 물건을 사보내달라는 부탁을 적지 않게 해왔던것이였다.

“로얼, 오후에 내 마침 위공촌에 갈 일이 있는데 돈을 내 찾아줄게.”

“응, 그래라.”

위공촌은 학교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자그마한 시가지였다.

잠시후 그가 돈깍지를 찾아들고나왔다. 그때는 지금처럼 신분증이 없이도 그저 아무개라고 이름을 대고 싸인만 하면 돈깍지를 내주었다.

“와, 로얼,  이게 뭐요? 90원이나 부쳐왔소, 오늘은 한턱 내야겠소.”

“뭐야? 90원이라구?”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공사에서 단위서기로 있을 때 한달로임이 35원이였는데 90원이면 거의 석달로임과 맞먹지 않는가. 누가 이런 거금을 부쳐왔지?

“정말이야? 그럼 오늘저녁 우리 침실에서 무조건 시스다.”

70년대에 온 북경에 시스(西四)란 거리에 조선족국수집이 딱 한집 있었는데 북경에 사는 조선족들과 북경에서 공부하는 조선족학생들의 단골집이였다. 그때는 큼직한 국수 한그릇에 30전, 개고기 한접시에 50전, 생맥주 한고뿌에 10전씩 할 때라 5원쯤이면 대여섯이 실컷 먹을수 있었다.

“돈을 찾아오면 니 직접 우리 침실 애들을 다 일러라.”

“알았음.”

털보는 익살스레 거수경례를 하며 저만큼 달아났다.

나는 반에서 나이 두번째라 동학들한테서 <로얼>이라 불렸지만 <로얼>구실을 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일년가도 호주머니는 말라죽은 빈대껍데기신세라 늘 침실 친구들의것을 얻어먹기만 했지 언제 한번 둘째형님다운 구실을 못했던것이다. 친구들은 우리 집 형편을 다 아는지라 별소리 없었지만 나는 늘 마음 한구석에 누구한테 빚지고 사는 기분이였다. 그러던차에 누군가 이런 거금을 부쳐왔다니 앞뒤를 가릴새 었었다. 한번이라도 우선 마음의 빚을 갚고볼 판이였다.

오후면 보통 자습시간이라 평소에는 늘 교실로 가지 않으면 도서관으로 갔는데 그날만은 홀로 숙소에서 자습하며 털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털보가 나타나지 않았다. 조금 더 기다려보지 하면서 거의 다섯시까지 기다려도 종무소식이였다.”

“돈 찾으러 간다던 자식 어데가 뒤졌나?”

나는 더 기다릴수 없어 그를 찾아떠났다. 먼저 교실에 가 자습하는 한 반급 학생들과 물으니 털보가 썩 전에 가방을 찾아메고 도서관에 갔을거라는것이였다. 내가 널직한 도서관에 가 샅샅이 빗질하며 찾아보니 이 자식 글쎄 한쪽구석에서 태평스레 자전을 뒤져가며 뭔가 공부하고있는것이 아니겠는가.

“야, 임마, 다섯시 다 되는데 네 여기서 뭘하냐?”

털보는 나를 쳐다보더니 히쭉 웃는것이였다.

“니 침실애들을 다 일렀니?”

털보는 고개도 쳐들지 않고 심드렁히 대답했다.

“못일겄소.”

나는 다가가 그가 보는 사전을 탁 덮었다. 저도모르게 큰소리가 나갔다.

“뭐라구? 다섯시가 다 돼가는데 아직두 못일겄다는게 말이 되냐?”

그제야 그는 나를 쳐다보며 볼부은 소리를 하였다.

“오늘은 그만두기오.”

“뭐야? 그만두다니. 너 나를 깔보는거야?”

“오늘 형님때문에 내 숱한 망신을 당했소,”

“그게 무슨 소리야?”

그가 위공촌우전국에 가 당당히 돈깍지를 쑥 들이미니 잠시후에 돈 9원을 내보내더란다. 그래서 성격이 급한 털보가 도로 쑥 들이밀며 “호홀 칸바.”했단다. 돈깍지를 다시 들여다보던 복무원이 도로 9원을 내밀며 “니 호홀 칸바.”하더란다. 털보가 다시 들이미니 복무원이 다시 내밀며 “니 칸 춰러바?”하더란다. 그래서 털보가 화를 벌컥내며 “니 칸 춰러바, 쩌 부쓰 쥬쓰왠마?” 소리치며 돈깍지를 찬찬히 들여다보니 아닌게 아니라 9원이더란다. 이게 어떻게 된일이지? 아까 볼 때는 분명 90원이 아니였던가. 그런데 다시 보니 틀림없는 9원이였다.  그래 그는 제멋에 창피스러워 찍소리 못하고 교실로 돌아와 가방을 메고 도서관으로 왔단다.

“옛소”

털보는 호주머니에서 돈  9원과 함께 령수증을 꺼내 나에게 넘겨주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나는 망연했다. 누구 돈이든 상관없이 먼저 어쩌다 한턱 쏠려고 했다가 이게 무슨 꼴인가.

“임마, 이거라도 한끼는 톡톡하잖아?”

“무슨 돈인지두 모르구 그걸 다 쓰구 로얼 빚구렁에 빠지겠소?”

그때 나는 반급에서 가장 어려운 학생의 하나로 평의되여 학교에서 1급 보조로 달마다 4원씩 지급받던터였다. 나는 그 돈으로 비누,치약 등을 해결했다. 그러니 나에게 있어 9원은 결코 작은 돈이 아니였다. 누군가 무슨 부탁을 하는 돈이 틀림없기에 나도 그 돈으로 시스에 가잔 말을 더는 못하였다.

누구 부쳐보낸것이더냐고 물으니 자기도 돈 액수에만 신경썼지 누가 보낸건지는 똑똑히 보지 못했다는것이였다. 북청더퍼리같은 자식, 그날저녁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누가 보낸 돈일가? 아무튼 며칠후면 편지가 따라 올테니 그때 다시 볼판이였다. 그런데 며칠후에 온 편지를 받다보니 녀동생이 보낸 편지가 아니겠는가.

“…오빠, 연길 일보사에서 두번에 보내온 돈 4원, 5원을 모아 9원을 보냈는데 받았는지 모르겠소.. 추운 겨울이 닥쳐오니 한족 솜저고리라도 사입으라고 어머니가 한푼도 못다치게 했소…”

그제야 나는 생각났다. 여름방학에 집에 갔다가 매부네 집에 가게 되였다. 말말간에 나는 그 마을에서 보도선색을 하나 쥐고 원고 한편을 써서 연변일보사에 보냈었다. 마을에서도 누군가 보도선색을 알려주어 글 한편을 써서 또 한부 일보사에 보낸적이 있었다. 그것이 모두 신문에 보도되여 일보사에서 집주소로 원고료를 보내왔던것이였다. 학교에 오기전에 내가 공사단위서기로 있으면서 연변일보사의 골간통신원으로 있은데다 전 주에서 한족 5명과 조선족이 4명밖에 참가못한 연변일보사통신원강습반에 뽑혀가 두달남짓 일보사 편집기자선생님들을 따라 취재를 배우다보니 적지 않은 편집기자들을 알고 있는터였다. 또한 그분들이 내가 대학에 갈 때 많은 도움을 주신 분들이였다.

녀동생의 편지를 받은 날 저녁 나는 자리에 누워 생각이 많아졌다. 그 원고료 9원을 집에서 쓸것이지 나한데 그대로 보내다니. 아버지 어머니가 고령인데다 어머니는 내가 집에 있을 때에도 시름시름 앓는 몸이였다. 생산대일도 바로 못하는 녀동생도 입에 약을 달고있어야 했다. 신체가 비교적 건강하신 아버지가 반주술을 즐겨하시기에 공사에 다닐 때 로임이 나오면 근들이 술 한근이라도 사들고 들어오면 그렇게 반가워하시던 아버지가 내가 대학에 온후에는 한달가도 입에 술잔을 대보시지 못하신단다. 집에서 그 돈을 다 써도 호랑이 이빨에 끼인 마대쪼각이겠는데 먼 외지에 나와있는 나를 걱정하여 한푼도 차실없이 보내며 한족솜저고리를 사입으라 하니.

나는 생각할수록 불효를 저지른 자책감에 마음이 쓰리였고 자식에 대한 내리 사랑에 가슴이 뭉클해났다. 어려서는 아버지가 없으면 누굴 믿고 어머니가 없으면 누굴 의지하랴 했는데 날개가 굳어지니 늙으신 부모님을 팽개치고 앓는 녀동생도 돌보지 못하며 부득부득 우기고 학교로 온것이 과연 잘한 일인가? 평범한 농촌부녀이신 어머니는 내가 공사간부로 된것에 만족하시며 하루 빨리 손자는 안겨주지 않고 멀리 대학으로 떠나가는것을 탐탁치 않아 하셨다.

내가 학교에 온후에도 70을 넘기신 아버지가 늘 생산대보조를 받는것이 미안하여 그 년세에 젊은이들도 마다하는 그 높은 건조실꼭대기에 올라가 이영을 옌다시지 않는가. 나는 웬지 울음이 벌컥 나오며 자신을 걷잡을수 없었다. 한침실친구들이 그  흐느낌소리를 들을가봐 나는 이불을 머리위까지 올리쓰고 애써 소리를 죽여가며 오열하였다. 그것이 남의 돈이였다면 요구하는 물건을 사서 부쳐주면 다였겠는데 아버지가 술도 안 사드시고 어머니와 녀동생이 약도 안사고 보낸 돈이라고 생각하니 그렇게 가슴에 찔려왔다. 그것을 어찌 돈 9원이라고만 하랴. 그것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드팀없는 사랑이였고 오누이의 두터운 혈육의 정이였다. 나이 스물일곱을 먹도록 이렇게 오열하기는 처음이였다. 생각할수록 년로하신 아버지 어머니가 가엾었고 돈이 없어 약도 못쓸 앓는 녀동생이 불쌍했다.

이튿날 나는 그 돈 9원을 도로 집에 부쳐보냈다. 나는 학교의 보조로 솜옷도 타입고 있으니 걱정하시지 말라고, 하지만 이것이 내가 북경에 남을 기회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계기로 되였는지도 모르겠다.

졸업을 앞두고 어느날 반주임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학교에서 나를 학교에 남길 타산인데 남을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만일 학교에 남기 싫으면 북경에서 다른 단위를 선택해도 된다고 했다. 졸업림박이면 학생들이 서로 북경에 남으려고 갖은 연줄을 달아 앞뒤로 뛰여다니는 판인데 나는 생각밖으로 움안에서 떡 함지를 받아안은격이였다. 나는 흥분으로 들뛰는 가슴을 진정하며 잘 고려해보겠다고 선선히 대답했다. 마음이 마냥 둥둥 떴다. 촌놈이 꿈에도 생각지 않게 위대한 수도 공민이 된다니 어찌 마음이 들뜨지 않겠는가.

그때 나는 이미 연길에 약혼녀가 있는지라 약혼녀를 북경에 전근시켜와야 년로한 부모님을 모셔올수 있었다. 나는 약혼녀와 부모들한테 편지를 띄워 학교의 뜻을 전하며 그네들의 의사를 물었다. 약혼녀는 남든 돌아오든 나의 의사를 따르겠다고 했다. 그런데 집에서는 종무소식이였다.

반주임이 두번째로 나의 의사를 물을 때 나는 부끄럽지만 체면을 무릅쓰고 한가지 요구를 제기했다. 나는 이미 약혼한 몸인데 5년내에 안해의 호구를 북경에 들여올수 있으면 남는것을 고려해 보겠다고 했다. 반주임은 다른 사람은 무조건 남으려 해도 남기 어려운 형편인데 그런 과분한 요구까지 제기하느냐는듯 나를 쳐다보고는 학교에 반영은 해보겠지만 희망은 적을것이라고 했다.

며칠후 반주임이 나를 찾았다. 아니나다를가 지금 학교에나 북경의 어느 단위에나 10년, 20년씩 천리만리 갈라져 사는 부부들이 수두룩한데 학교에서 그런 담보를 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면서 나더러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란다. 사실 그때 북경에 지방의 호구를 들여온다는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하여 어떤 이들은 북경에 남기 위해 다년간 사귀며 뒤를 받쳐주던 지방의 련인을 차버려 일련의 풍파를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렇게 할수 없었다. 자기가 잘 되려고 남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을 할수 없었다.

나는 속으로 정말 북경에 남고싶었다. 하지만 부모님들은 생각하면 또 그 필림이 끊어졌다. 내가 북경에서 10년이고 20년이고 안해의 호구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다는 고향에서 고독한 나날을 보내시던 부모님들이 그렇게 쓸쓸히 세상을 뜨실것이였다. 더구나 건강하시던 아버지도 이미 중풍에 걸렸다지 않는가. 나는 고민에 빠졌다. 그러던차 어느날 뜻밖에도 고향의 한 마을에 사는 사촌형한테서 편지가 날아왔다.

“…너의 편지를 받고 마다매(나의 어머니)는 날마다 눈물로 세월을 보낸다.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이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북경에 남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고 하며 락루하신다. 그러니 너도 잘 생각해 보아라. 내 생각에는 그래도 돌아오는것이 좋을것 같다…”

그 편지를 받고 나는 학교에 남으려던 생각을 깨끗이 포기하고 연변일보사에 편지를 띄웠다. 사실의 전후과정을 이야기하며 연길에 돌아가면 일보사에서 받아줄수 있겠느냐고 문의했다. 얼마후 일보사에서 받겠다는 회답이 왔다. 일보사에 온후에야 나는 일보사에서 나의 편지를 받고 이미 학교해당부문에 나의 정황을 까근히 알아 보았다는것을 알았다.

내가 일보사에 출근한지 2년만에 중풍에 시달리시던 아버지는 첫애로 태여난 손녀도 안아보시지 못하고 세상을 뜨셨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신후에야 어머니가  고향을 떠나 연길로 들어오셨다. 어머니는 우리와 함께 18평방메터 집에서부터 여러번 이사하며 12년간 우리와 함께 사시다 80여세에 세상을 뜨셨다. 세상을 뜨시기전 몇해는 치매와 중풍에 시달리셨다.

부모님들이 세상을 뜨신 후에야 나는 종종 그 돈 9원을 떠올리게 되였고 그때 만일 학교에나 북경에 남았더면 나의 인생길이 어찌 되였을가 하는 생각을 굴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일뿐 만일이란 있을수 없었다. 

2010년 연변녀성 제9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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