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룡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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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중편]팔부형이 이사가다(3) 댓글:  조회:1601  추천:48  2010-08-12
중편소설                 팔부형이 이사가다                                                               허룡석                                      3   그렇게 몇년세월이 흘렀다. 성철형의 누나 셋은 선후로 모두 시집갔고 웃음을 잊고 마음고생하던 고모부도 시름시름 간경화로 앓다가 지병으로 세상떴다. 벅적거리던 가정에 성철형과 고모만 남게 되였다. 그런데 못된 송아지 엉뎅이에 뿔 난다더니 팔부형이 나이 스물살을 넘어서자 어찌나 서방비위를 하는지 년로한 고모와 제각시를 내놓으라고 못살게 굴었다. 그러면 고모는 친동생인 나의 아버지한테 찾아와서 눈물을 지으며 어디에서 좀 비슷한거 있으면 알아보라고 부탁하군 하였다. 그래서 아버지가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다리저는 처녀도 만나보게 하고  귀머거리 처녀도 만나보게 하고 팔이 떨어진 처녀도 만나보게 했으나 그때마다 처녀쪽에서는 같은 불구와는 살수 있어도 겉보기에는 훤해도 분촌을 가리지 못하는 바보와 어떻게 사느냐며 모두 앵돌아버리군 했다. 그런데 성철형은 그런줄 아는지 모르는지  자기와 사는 녀자는 병신도 안되고 미워도 안된다며 제쪽에서 떵떵 큰소리다. 자기의 색시도 팔간집 새각시처럼 고와야 한단다. 처녀몇을 만나본후부터는 녀자냄새가 좋은줄 알았는지 고모를 더구나 못살게 굴었다. 마치 고모가 자기가 좋아하는 색시를 치마폭에 감춰두고 내놓지 않는듯 일밭에서 돌아와서는 고모 치마폭을 싸고 돌며 제 각시를 찾았는가고 닥달질이였다.    그러던차 어느날 아버지가 고모를 찾아갔다. 이곳에서 60리 떨어진 해란촌에 인물체격이 나무랄데 없는 스물한살짜리 바보처녀가 있는데 자기가 가서 혼사말을 걸었더니 새기부모들이 성철형의 멀끔한 사진을 보고는 당사자를 만나보자 한다고 알렸다. 고모는 마땅한 자리가 나졌다는 말에 반색을 하다가 처녀도 멍청하다는 소리에는 그만 한숨을 후 내쉬였다.<정신이 온천한 팔다리 떨어진 병신이래두 괜찮겠는데 그러루한것들이 마주서서 어떻게 살아간다구 그러우.><참 누님두, 병신이래두 정신이 온천한것들은 다 돌아서지 않수? 보리밥에는 고추장이 제격이지. 그러루한게 아니구는 마주 설것 같지 않은데 어떡하겠수. 성철이 그눔 제가 신수 멀쑥하다구 인물은 또 얼마나 밝힌다구 그러오? 내 보기엔 이 자리까지 놓치면 이젠 정말 더 찾아보기 어려울것 같소.><에ㅡ구, 하늘두 무심하지, 펀펀하던걸 저렇게 만들구. 그렇찮으문 새기들을 땡땡 튕겨가며 장가보내겠는걸 가지구.><이제 그 소리해 뭐하겠수, 죽은 아이 자지 만지기지. 내 래일 성철이 데리구 한번 새기집에 다녀올게, 누님 그런줄 아우.>고모도 별수없이 좋도록 하라구 했다. 그날저녁 아버지가 성철형에게 처녀사진을 보여주며 래일 새기보러 가자고 했더니 성철형은 너무 좋아 딱정벌레를 잡아문 뚜꺼비마냥 아버지를 안고 펑펑 뛰는것이였다. 고모는 곁에서 분수없이 좋아하는 불쌍한 아들의 꼴을 보더니 돌아앉으며 눈굽을 훔쳤다. 아버지는 뜻밖에도 이튿날 성철형의 선보러 가는데 나보고 함께 가자지  않는가. 나는 펄쩍 뛰였다. 내가 왜 약국 감초처럼 그런데 다 시시하게 끼여들겠느냐며 나누웠다. 아버지는 노여워하며 외사촌도 가까이 지내면 친사촌인데 왜 형의 일에 그처럼 무관심하느냐고 나를 나무랐다. 팔부형을 데리고 말떼러 가는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곁에 사람이 있어야 할게 아니냐고 했다. 아버지가 팔부형을 데리고 가는데 정말 아버지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랴싶어 나는 별수없이 입을 다물고말았다. 형이 선보러 가는데 동생이 따라가야 한다니. 털도 내리쓸어야 빛이 난다는데 이건 털을 올리쓸게 생겨먹지 않았는가.못입어 잘란놈 없고 잘입어 못난놈 없다더니 이튿날 겉보기에 의젓한 성철형한테 아래우 골덴 새옷까지 입혀 내놓으니 이목구비가 훤했다. 거기에다 좀 낡기는 했으나 아버지가 신던 까만 구두까지 신겨놓으니 제법 훌륭한 신랑감이였다. 우리는 뻐스를 타고 공사마을까지 갔다가 또 10리가량 산길을 걸어서 처녀가 있다는 해란 6대에 이르렀다. 길에서 아버지가 새기집에 가서 순서에 따라 하라는대로 여사여사하게 처사하라고 골백번 당부했으나 처녀생각에 마음이 들떴는지 성철형은 처녀사진만 들여다보며 <근심맙소.. 내 다 하꾸마> 하고 건성건성 대답하고는 줄창 앞장서 씨엉씨엉 걸었다.우리 일행은 새기있는 마을에 이르러 동쪽켠에 자리잡고 있는 하얗게 회칠한 한 륙간 초가집으로 찾아갔다.  우리는 삽작문을 밀고 뜨락에 들어섰다. 그런데 어디에 숨었다 뛰쳐나오는지 갑자기 황둥개 한마리가 달려들며 당장 허벅다리를 물것처럼 왕왕 짖어댔다. 아무 준비없던 성철형은 깜짝놀라 황급히 아버지뒤에 가 숨느라다 구두 한쪽이 벗겨져나갔다. 나는 제꺽 삽작문에서 가름대 한대 뽑아들고 사납게 달려드는 개를 집뒤로 쫓아버렸다.아버지는 방문께로 다가가 점잔을 빼며 어험어험 하더니 <계심는가.> 하고 주인을 찾았다.잇달아 <뉘시우?>하며 방문이 빠금이 열렸다.<예, 지난번에 혼사일루 왔다간 립신촌의 장달수올시다.>그 소리에 방문이 활짝 열렸다. 오십대로 보이는 작달막하고 빼빼마른  주인이 반갑게 맞아주었다.<아, 예. 날래 이리 들어오시우.>우리는 방문으로 들어가 널직한 정주간으로 안내되였다. 정주간에서 몸집이 둥실둥실한 녀인이 가는 웃음을 띠우며 허리굽혀 우리를 맞았다. 아버지는 성철형과 나를 집주인들에게 소개했다.<그간 무고하셨습능가. 소뿔은 단김에 빼랬다구 오늘 아예 신랑감을 데리구 왔수다.>새기부모들은 신수가 멀쑥한 성철형을 보더니 대번에 안색이 환해졌다. 성철형은 아버지가 가르치는대로 허리굽혀 점잖게 두분께 인사올렸다. <안녀하심둥?>우리는 새기부모들과 일정한 사이를 두고 자리잡고 앉았다. 나는 성철형의 아래켠에 앉았다. 새기부모들을 보니 성철형에게 아주 관심을 두는것 같았다. 아버지와는 전번에 만나 서로 혼사말을 주고받은 구면이여서인지 어른끼리 두루 인사치례를 하다가 새기어머니가 화제를 성철형에게로 돌렸다.<총각은 올해 나이 얼마요?><예, 스,스물서임다.><나이는 비슷한것 같구만. 총각이 이렇게 츨츨하게 생긴게 새기들을 많이 만나봤겠소 양?><예, 그, 그래두 잔체는 하, 한번두 못해 봤스꾸마.><그랬구만. 그래 무슨 병은 없소.>새기어머니는 마디에 옹이라고 바보한테 다른 몹쓸병까지 있을가봐 걱정해서인지 이렇게 물어왔다.<이, 있스꾸마.><양? 그래 무슨 병이 있소?> 새기어머니의 얼굴이 대뜸 굳어지는 표정이 확연했다.<아, 아때 낭게서 까, 까꿀루 떨어진게 정시 좀 부, 불정상이랍더꾸마.>나는 속으로 어처구니없어 웃음을 참을수 없었다. 남이 알지도 못하는 저따위 바보소리를 할게 뭐람? 바보는 워낙 이렇게 고지식한걸가?<에구, 저걸 어째?>새기어머니는 맹랑하다는듯 혀를 끌끌 찼다. 그리고는 흙에 묻혀 어지러워진 옥돌을 앞에 놓고 본래의 맑고 투명한 색갈과 광채를 들여다보는 유능한 장인바치마냥 성철형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 보는것이였다. 성철형이 바보스러운 소리를 하여 새기어머니가 실망하여 성철형을 찬찬히 뜯어보는가 하여 아버지가 저으기 안달아했다. 아버지가 새기어머니를 흘깃 쳐다보고는 성철형에게 껌뻑껌뻑 눈짓했으나 성철형은 보았는지 말았는지 새기어머니 묻는 말에만 신경썼다. <쯧쯧쯧, 펀펀한 아까운 사람 이렇게 만들었구만.> <나두 아때는 또, 똑똑했답더구마. 지금두 영 또, 똑똑합꾸마. 날마다 일할라두 나가구 공수두 파, 팔부씩 받구 헤헤.> <쯧쯧쯧, 일은 잘 하는 모양이구만, 그래 곱게 키운 우리 딸을 총각한테 맡겨 놓으문 아끼구 고와하겠소?><사진에 있는 따, 딸을 주문사 내 영 고, 고바하겠쓰꾸마.>이때 안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머리가 더부룩한 처녀 하나가 노래를 부르며 불쑥 뛰쳐나왔다.<우리 맘속의 붉은 태양 조국변강 비춰주네…> 그 서슬에 우리는 그만 깜짝 놀랐다. 아까는 마당에서 황둥개가 뛰쳐나는 통에 놀랐는데 이번에는 안방에서 처녀가 이렇게 불쑥 뛰쳐나오다니. 뛰쳐나온 처녀가 인사치례도 없이 노래를 부르는 한편 손발을 곱게 놀려가며  정히 춤을 추는데 련습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문공단배우 왔다 울고 갈 지경으로 여물어다진 춤이였다. 게다가 갸름한 얼굴, 오목오목 보조개진 포송포송한 얼굴, 젖빛의 부드러운 살결을 가진 처녀는 그야말로 린근마을에서 보기 드문 인물이였다. 다만 눈길이 초점없어 보이고 그우에 커다란 거마리가 붙어있는것처럼  굵직하게 그려져있는 눈섭이 뭔가 모자란다는 느낌을 줄뿐이였다. 처녀는 춤을 추다말고 제어머니를 바라보며 소리쳤다.<엄마, 난 저 동무 좋습다ㅡ> 처녀가 안방에서 한참이나 문구멍으로 내다보고 훤칠하고 사나이다운 성철형의 의젓함에 홀딱 반해버린것이였다. 성철형의 동공이 갑자기 탁구공만큼 커졌다. 그는 뚫어지게 처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호주머니에서 처녀의 사진을 꺼내들고 뛰쳐나온 처녀와 대조해 보는것이였다. 아마 팔간집 새각시보다도 훨씬 더 곱고 올때 줄창 보며 왔던 사진속의 새기보다도 더 고와보였던 모양이였다. 성철형이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처녀는 오래동안 갈라져있던 련인을 만난듯 성철형의 앞에 와 두손을 잡더니 펄쩍펄쩍 노루뜀을 뛰는것이였다. 성철형도 그녀같이 펄쩍펄쩍 수소뜀을 뛰며 손을 잡고 빙빙 돌았다. 처녀는 어느새 성철형의 목을 끌어안더니 입이고 얼굴이고 목이고 침을 찔찔 흘려가며 마구 키스해댔다. 으흐흐., 내가 다 온몸이 오싹해났다. 그 서슬에 성철형도 맞받아 키스하며 처녀의 입이고 코고 마구 빨아넘겼다. 그러던중 어느사이 한쪽손이 인민공사 공공식당의 커다란 죽사발을 엎어놓은듯한 처녀의 풍만한 젖가슴에 올라가 두부 비지 짜듯 마구 주물러댄다. 그랬더니 처녀는 점점 흥분되는지 자기몸을 성철이 몸에 갖다대며 비비꼬기 시작했다. 저걸어째, 저대로 가만 놔두면 체면이고 부끄러움이고 모르는 인간들이  당금이라도 옷을 벗어내치고 어른들 앞에서 무슨 짓을 해댈지 몰랐다. 새기어머니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함지만한 엉덩이를 추슬더니 황망히 일어섰다. <야, 곱단아, 이젠 됐다. 그만들 해라.>새기어머니는 찰거머리마냥마냥 서로 딱 붙어 안떨어지겠다는 곱단이란 처녀를 뜯어내려 애썼다. 나도 벌떡 일어나 방게처럼 처녀를 꽉 집고 놓지 않는 성철형을 뒤로 힘주어 잡아당겼다. 자석마냥 서로 끌어당기는 그들 둘을 겨우 뜯어내자 새기어머니는 처녀를 급급히 안방으로 들이몰았다. 성철형이 발정난 수소마냥 씩씩거리며 따라 들어가겠다는것을 내가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제어머니한테 쫓겨 안방으로 들어가던 처녀가 눈을 흘기죽하며 꼬시랑거렸다. <이씨, 베ㅡ기ㅡ싫다…>처녀는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하고 닫더니 다시 문을 벌컥 열고 고아댔다.<엄마, 저 내 실랑재를 보내문 아이 됨다 예?><오냐, 오냐, 알았다. 알았어.>원래는 사위감과 사돈이 될 분 앞에서 모자라기는 매일반이나 자기딸이 인물이 환하다는것을 턱대고 좀 값지게 놀다 못이기는척 값을 높여 혼사를 정하자 했겠는데 미처 어쩔새 없이 뛰쳐나온 딸의 망칙스러운 꼴을 보이고 나니 새기어머니는 어쩔바를 몰라했다.  턱을 쳐들기는 고사하고 허리를 낮추며 연신 사과하는 수밖에 없었다. <참, 아이 됐습꾸마. 애가 철딱사니 없어서…쟤가 워낙 춤추기 좋아하다 보니…><원, 별말씀을, 다 피차일반입지뭐.>아버지가 신심이 생겼는지 새기부모들 앞에 한걸음 나앉았다. 새기쪽에서 어떻게 생각하든 혼사에는 총각쪽에서 모르는척 주동을 쥐는것이 상례였다.<쟈들이 서로 좋아하는것 같은데 이 자리에서 말을 떼면 안되겠습능가?><글쎄, 쟤들이 보자마자 저렇게 좋아들 하는걸 보니 서로 연분이 있는것 같기두 한데…>새기아버지도 담배를 뻑뻑 빨며 싫다는 소리는 안했다.<그럼 그렇게 하겝소. 쟤들이 좋다문 됩지비, 난 동의합꾸마.>딸애의 흉허물이 다 드러나 되려 속이 조마조마해났는지 새기어머니가 아버지의 장훈에 제꺽 태도표시를 했다. <쟤들이 좋아하구 당신 좋다문 됐지. 내사 뭐랄게 있소.>새기아버지가 담배불을 비벼끄며 마누라를 흘끔 쳐다보는것이였다. 반달같은 딸이 있으면 온달같은 사위를 삼는다지만 둘다 보기에는 멀쩡해도 등신에 반편인것들을 어찌하랴.혼사는 앉은 자리에서 이루어지게 되였다. 성철형은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그 자리에서 넙죽 업드려 장인, 장모될 분한테 절을 하였다. 색시 고우면 처가집 말뚝 보고도 절 한다더니 아마 고운 처녀를 보고 나니 절을 많이 하고 싶어졌던지 성철형이 연속 엎드려 절을 하려 하는것을 아버지가 끄당겨 곁에 눌러앉혔다. 일은 생각보다 순조롭게 풀려갔다. 잔치날은 후에 차차 잡기로 하고 우리는 <사위>덕에 점심에 닭까지 잡아먹고 떠날 차비를 했다. 그런데 우리가 떠나는 기미를 알아챘는지 처녀가 어느사이 머리까지 말끔히 빗고 꽃부리 옷을 갈아입고 있다가 우리가 집을 나서려 할 때에  뛰쳐나와 따라 오겠다고 봉당에서 허둥지둥 신까지 찾아 신는것이 아닌가. 처녀의 부모들이 분수없이 날뛰는 딸을 말리느라 법석을 놓았다. 이것을 두고 룡이 가는데 구름이 따르고 범이 가는데 바람이 따른다고 했던가. 처녀는 백사불구 멀쑥해보이는 성철형을 따라 오려했다.고운 옷을 차려입고 따라 나서는 처녀를 보더니 성철형도 떠나기 아쉬워 되돌아 들어가겠다고 버둥버둥하는것을 나와 아버지가 겨우 돌려세워 놓았다. 새기부모들이 처녀를 달래는사이 우리는 성철형을 끌고 그집문을 나섰다. 뒤에서 갖은 좋은 말로 달래는 새기부모들의 애원하는 소리와 신랑을 따라 가지 못하게 한다고 발버둥질하는 처녀의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올 때에는 여물을 찾아가는 소마냥 성철형이 앞장서 성큼성큼 걸어왔지만 갈 때에는 절에 꿀단지를 두고 떠나는 중마냥 연신 뒤돌아보며 나한테 끌려오다싶이 했다. 그러다가 자그마한 산등성이를 에돌아 처녀 사는 마을이 보이지 않자 공연히 나와 버럭버럭 홰를 쓰는게 아니겠는가. 그러더니 처녀사진을 꺼내들고 들여다보며 어린애마냥 엉엉 소리내여 울었다. 나는 어처구니없어 두 손을 허리에 지르고 서서 철딱서니없이 노는 성철형의 꼬라지를 아니꼽게 흘겨보았다. 그래도 아버지가 다가와서 차분하게 달랬다. 이제 잔치하면 사진에 있는 이 새기가 네 각시되니 그때면 날마다 같이 있을수 있다며 얼리고 닥치고 구슬려서야 술취한 사람을 끌고오듯 집까지 무사히 데리고 올수 있었다. 내가 따라 가지 않았더면 아버지가 오늘 숱한 고생을 할번했다.처녀보러 갔다 돌아온 이튿날부터 성철형은 상사병에 걸렸는지 다리 부러진 노루마냥 자리에 누워 끙끙거리며 일하러도 나가지 않았다.  그는 날마다 고모보고 빨리빨리 잔치하지 않는다고 성화질이였다. 서방비위가 나 마을 청년들 잔치라면 빠짐없이 참석해본 그라 잔치해야 각시가 자기집에 와 있는다는것을 알고 있는것 같았다. 고모는 별수없이 아버지한테 찾아와 저것들을 빨리 잔치시켜야지 자꾸 늦추었다가는 일이 생길것 같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이튿날로 또 새기집에 찾아가서 사돈들과 잔치날을 상론했다. 아버지가 찾아가니 새기어머니는 신을 꺼꾸로 신고 달려나오며  반겨맞더란다. 그 사이 새기집에서도 야단이 났던것이다. 성철형이 갔다온 후부터 처녀는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뛰쳐나가 보이는  마을사람마다 붙잡고 자기가 래일 멀리멀리 시집간다고 자랑하며 골목길에서 춤을 추어대는데 마을사람들 보기 민망해 죽겠다는것이였다. 천상 배필을 만났는가. 봉과 황이 갈라져 있으니 서로가 안달이다. 량쪽 사정이 다 그러하니 갖춰놓은건 없어도 어서 빨리 애들을 결혼시키자는데 합의를 보았다. 두 집에서는 오는 국경절로 잔치날을 잡았다.잔치날 신랑집에서는 지난날의 낡은것을 타파한다는 신식법에 따라 혁명적으로 함에 모주석저작 네권과 낫 한자루를 넣고 생산대의 손잡이뜨락또르를 빌려 일찌감치 해란촌으로 신부맞으러 갔다. 그때는 손잡이뜨락또르가 농촌 생산대들에 갓 자리잡을 때라 농촌에서는 가장 현대적 농기계이자 운수도구였다. 이러한 신식 운수도구로 신부를 맞아오는것은 수레나 마차를 쓰기보다 훨씬 자랑스러운 일이였다. 나도 신랑집 들러리로 뽑혀 생산대에서 사온지 얼마 안되는 뜨락또르에 앉아 어깨 으쓱히 신부맞으러 함께 갔다. 그사이 마을사람들이 찾아와 부조돈 50전 혹은 30전씩 내놓으며 불쌍한 성철형의 결혼을 축하해주고 잔치집에서 차려준 옥수수국수를 맛보고 근들이 잔치술을 마셔주었다. 점심때가 좀 지나 신부를 실은 뜨락또르가 신랑집에 도착하였다. 새각시가 온다는 조무래기들의 떠드는 소리에  마을 독보조로인들이 자리를 털고나와 신부차를 맞으며 덩싱덩실 춤을 추었다. 남들이 춤추는것을 보더니 조건반사가 일어났는지 너울을 쓴 신부가 뜨락또르에서 펄쩍 뛰여내리더니 로인들과 엉켜 함께 춤을 추어댔다. 시집간다며 그간 그렇게 련습했다는 춤을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우리 맘속의 붉은 태양 조국변강 비춰주네…>초면강산 신부가 차에서 뛰여내려 자기네와 함께 춤을 추자 영문을 모르는 로인들은 더욱 성수나서 손을 머리우로 내저으며 빙빙 돌아갔다. 이쁘고 츨츨한 신부의 춤솜씨가 어찌나 눈부신지 마을사람들은 입을 하 벌렸다<저 자식 각시복이 터졌네. 어데 가 저렇게 환한 색시를 데려왔지?>.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신부를 칭찬하자 뜨락또르곁에 서서 구경하며 헤벌죽 웃기만 하던 성철형도 흥이 났는지 로인들 춤판에 끼여들어  손벽을 짝짝치며 명가수마냥 구성지게 노래를 불러댔다. <도라지, 도라지, 도ㅡ라지…><좋ㅡ다. 좋지.><잘ㅡ한다.><얼씨구 ㅡ절씨구.>마을사람들은 제집 일처럼 기뻐서 환성을 지르며 흥을 돋구었다. 하지만 신부와 함께 온 들러리들과 신랑집에서는 손에 땀을 쥐였다. 저러다 어리숙한것들이 숱한 사람들 앞에서 무슨 망신스러운 일을 벌릴지 몰랐다. 도를 넘기전에 마무리 지어야 했다. 우리는 이젠 신부가 큰상을 받아야 한다며 우르르 쓸어나가 계속 춤을 추고 노래부르겠다고 뒤로 나자빠지는 신랑과 신부를 떼여다 큰상에 눌러앉혀놓았다. 그러다보니 그렇다할 망신스러운 일은 없었고 오히려 거기까지는 잔치가 아주 자연스러웠다. 마을사람들도 잔치가 잘 되였다고 칭찬이 자자했다.오후 한나절이 잘 되여서야 새각시구경을 하던 마을사람들이 모두 흩어져 갔다. 신부들러리로 왔던 점잖은 사돈들도 모두 잘 접대하여 돌려보냈다. 손님접대에 팽이처럼 돌아치던 신랑집에서는 그제야 어른아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점심삼아 저녁삼아 잔치음식을 음복하게 되였다. 큰상을 받은 신랑신부는  밥을 좀 더 먹으라 해도 배고프지 않다며 손에 손을 잡고 급급히 안방에 들어가 버렸다.고모와 아버지, 누님과 매형들 그리고 모처럼 혼사에 참여해준 가까운 친척들과 조카들이 정주간에 차려놓은 밥상 몇개에 모여 앉아 오늘 잔치가 생각보다 잘 되였다고 이야기 꽃을 피우며 잔을 내기도 하고 식사하기도 했다. 나는 매형들과 한상에 앉았다.그런데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정주간에서 한창 술잔을 돌리며 식사하는데 갑자기 안방으로부터 <철떡, 철떡> 떡치는듯한 소리와 함께 신부의 숨 넘어가는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저게 무슨 소리야?><저것들이 지금 무슨짓을 하는거야?><아이, 저것들이 대낮에…?>우리는 술을 마시고 밥을 먹다가 아연하여 입에 밥을 문채 혹은 술잔을 든채 서로 쳐다보기만 하였다. 짝짝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숨소리가 점점 거세게 들려왔다. 신부는 쌀마대에 깔린듯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질렀고 신랑은 징구량수레를 끌고 령마루에 오르는 황소마냥 씩씩씩 거센 숨을 내뿜었다. 큰 매형이 벌떡 일어섰다. <내 저것들을 그저…>건너 어른들상에 앉아있던 아버지가 제꺽 매형을 붙잡았다.<관 놔두게, 이 세월에 남의 눈치를 보지 않구 구속없이 제먹대루 사는것두 어쩌면 편할지두 모르지.> 첫날 대낮에 청명날 눈을 뜬 청개구리마냥 펄쩍펄쩔 뛰며 즐거움을 만끽하는 신랑신부의 말못할 부부교향악소리가 딹살을 돋구며 귀전을 련속 때려댄다. 집안식구들은 저 체신머리없는것들을 저대로 내버려둬도 되느냐는듯 서로 눈치를 보다가 아버지의 말에 모두들 무거운 저가락을 다시 들었다. 그런데 잠시후에는 정주간과 안방을 가로막은 사이문이 쇠돌을 캐내는 남포소리에 울리듯 드렁드렁 절주있게 떨어대여 또다시 정주간사람들을 놀래웠다. 한데 엉킨 <쌀마대>들이  어느새 저도 모르게 사이문까지 굴어온 모양이였다.<삼춘네 칸에서 어째 저램다?>옥수수국수를 후룩후룩 먹어주던 일곱살짜리 큰 조카애가 저가락을 든채 두눈이 올롱해서 자기아버지를 쳐다보며 물었다. 애아버지인 큰 매형이 미처 할 말을 찾지 못했다.<응, 그 삼춘네 잔치했다구 좋아서 춤을 추느라구 저랜다.>아버지가 별일 아니라는듯 술 한잔 쪽 비우며 태연스레 대꾸했다. <야, 그럼 재밋겠다. 우리 볼라가자.>큰 조카애가 저가락을 든채 발딱 일어서니 작은 조카애들 몇이 <야, 우리두 볼라가자.>하며 우르르 용수철 튕기듯 발딱발딱 일어섰다. <보긴 뭘봐. 앉아.>큰 매형이 안방문께로 몰켜가려는 애들을 막아나서며 하나하나 숫구멍을 때려 눌러 앉혔다. 이러다 철모르는 애들까지 망치겠다고 생각했던지 애들을 아예 밖으로 내몰았다.<너넨 나가 놀다 내래 들어와 밥을 먹어라.><아이, 때시걱두 다 지난땐데 걔들을 밥을 먹여야지 어째 밖으루 내쫓습둥? 잔치날에 아이들을 굶기겠습둥?>애어머니들이 나서 두둔하며 자기애들을 끌어다 곁에 눌러 앉히고 먹던 국수를 계속 먹게 했다.<엣씨, 저것덜 땜에 술맛이 다 떨어진다.> 매형들이 자리를 털고 훌훌 일어섰다 그러는걸 아버지가  다시 매형들을 꾸짖었다.<정말 왜들 이래? 자네들이 쟤들과 다를게 뭔가. 다르다면 그저 체면차리구 눈치보기가 다를뿐이지. 쟤들두 사람이 아닌가. 불쌍한 애들이 어쩌다 저렇게 좋다구 인생의 즐거움을 누리는데 자네 눈꼴 사나와 할게 뭔가. 날래 앉게, 우린 못들은척 하구 우리 술이나 마시세.>아버지는 술 한잔을 쪽 비우고 나서 매형들을 들으라는듯 한마디 했다.<예로부터 남녀간의 교합이란 마치 천지간에 비가 오는 자연의 리치와 비슷하거든, 비가 오자면 바람이 일고 번개와 우뢰가 곁들이기 마련이지. 그렇게 해야 초목과 곤충과 오곡이 성하는 법이지. 풍운이 일지 않구 번개와 우뢰가 동반하지 않는다면 어찌 비가 올것이며 비가 오지 않는데 어찌 오곡이 풍성하겠는가. 남녀간의 깊은 사랑두 구름과 비를 몰아온다하여 운우지정이라 하지 않나. 저런 격정이 없으면 그걸 어찌 사랑이라 하구 자식들이 어찌 성할수 있겠나.  인간이란 동물두 후대가 번식하지 않으면 대가 끊어질거구 이 세상은 .또 원숭이 천하가 되고 말거야. 자네들두 모두 결혼하여 애까지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러니 성한 사람의 사유로만 생각하지 말구 쟤들의 켠에 서서 생각해 보면 안되겠나? 같은 일두 낮과 밤이 다를뿐이구 체면이란 낯가죽이 다를뿐이지, 안 그런가? 그러니 어서들 앉게 > 불행이 눈섭에서 떨어져 바보로 된후 여태껏 지지리 괄시받고 몰리다 어쩌다 저렇게 좋아하는 처남을 우리가 눈꼴사나와 할게 뭔가. 저들은 저들 세상의 즐거움이 따로 있는게 아닌가. 매형들은 이렇게 생각했는지 서로 눈치를 보다가 제자리에 털썩털썩 주저앉았다. 매형들은 성철형네를 체신머리없는 눔들이라고 괘씸히 생각하던 마음을 버렸는지 편한 마음으로 아까보다 술을 더 줄기차게 마셨다. 나는 말없이 부지런히 술을 따랐다. 매형들은 술을 흠뻑 취토록 마시는것으로 불쌍한 처남의 눈물겨운 결혼을 축하하기로 작정한것 같았다. 정주간의 술상이 다 끝나갈 때까지도 안방의 운우지정은 계속 몰아쳐 그 대안이 어디까지인지 알수 없었다. 20여년간 억눌려있던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이 해란강 보뚝이 떠진듯 걷잡을수 없이 분출하는 모양이였다. 정주간에서는 그러한 번개도 우뢰소리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듯 말없이 저가락질하고 술잔들을 비웠다.  누나들 앉은 상을 흘끔 바라보니 세 누나는 저가락질은 하면서도 흐르는 눈물을 걷잡을수 없어하였다. 저렇게 부끄러움도 모르게 된 성철형이 불쌍하여 그녀들은 밥을 먹는건지 눈물을 먹는건지 자기로도 분간할수 없었다. 나중에는 아예 저가락을 내던지고 서로 부둥겨안고 소리를 죽여가며 흐느꼈다. 어머니들이 울자 애들도 덩달아 울었다. 안쪽 로인들상에 앉은 고모도 체면이라는게 뭔지 모르는 아들며느리들의 일이 기가 차서인지 아니면 저렇게 장가를 보내야만 하는 아들이 새삼스레 가슴아파서인지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아 앉은 자리에서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약한 다리에 침이 간다고 병신자식 더 귀여워 했건만 쥐구멍에 볕이 들 날이 아득해서였을가. 아버지도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장알박힌 솥뚜껑같은 한손으로 눈굽을 찍으며 다른 한손으로는 연신 술잔을 들어올렸다. 잔치날이 상사날로 된듯  비애에 빠진 분위기에 젖어버렸는지 나도 처음으로 성철형이 불쌍하고 가엾게 느껴져 마음이 울적해졌다. (계속)장백산 2009년 6기
16    [중편]팔부형이 이사가다(2) 댓글:  조회:1622  추천:40  2010-08-10
중편소설                 팔부형이 이사가다                                                                                                                   허룡석                                 2   성철형은 그해 나이 스물다섯이다. 성철형은 원래 우리 마을에서 백여리 떨어진 홍성공사 용성대대 태생이다. 성철형도 아홉살 전까지는 다른 애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유나 행실이 다를바 없었다. 게다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고 귀염을 등에 지고 다녔다. 그런데 아홉살후부터 그의 인생에는 먹장구름이 드리웠다. 소학교 2학년때였다고 한다. 어느날 하학하여 마을애들과 함께 우르르 쓸어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버들방천속에 우뚝 선 비술나무 꼭대기에 까마귀둥지가 있는걸 보고 누군가 저걸 들춰볼가고 하였다. 약삭바른 애들 몇이 자기가 나무에 바라오른다고 손바닥에 침을 퉥퉥 뱉고는 신을 벗어던지고 나무에 매달렸다. 그러나 맥이 모자라 모두 중도에서 미끄러져 내려왔다.   <저리 비껴. 내가 올라 갈게.>    같은 또래지만 다른 애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성철형이 책가방을 벗어던지고 손바닥에 침을 퉥퉥 밷고는 신을 신은채로 나무에 바라오르기 시작하였다. 시골애들의 놀음이란 나무에 바라오르는것이 보통이라 마을애들 모두가 령리한 다람쥐마냥 나무에 바라오를줄 알았다. 다만 힘에 따라 바라오르는 높낮음차이가 있을 뿐이였다.     다른 애들보다 뚝심있는 성철형이 씩씩거리며 다른 애들이 오른 곳보다 더 높이 바라오르는데 보기에는 팔뚝같이 실해해보이던 발밑의 마른 나무가지가 갑자기 툭 하고 끊어지면서 성철형은 어쩔사이 없이 <앗.> 소리지르더니 총에 맞은 까마귀마냥 아래로 내리꼰졌다. <성철아. 성철아.>깜짝 놀란 애들이 소리지르며 달려갔다. 성철형은 벌써 인사불성이였다. 왼쪽머리에서는 피가 흘렀고 왼쪽 팔이 너덜거렸다. 큰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한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리며 성철형을 엇갈아 업고 받들며 마을로 돌아왔다. 피범벅이 된 아들의 <죽은>꼴을 보고 혼비백산한 성철형의 어머니 (나의 고모)와 아버지 (나의 고모부)는 소수레에 아들을 싣고 용하다는 이웃마을 퉁사발이란 별호를 가진 의원한테로 찾아가 사정사정했다. 퉁사발의원은 피못이 된 성철형을 대충 보더니 자기로서는 어쩔수 없으니 어서 현립병원으로 가보라 하여 그날밤으로 30리 떨어진 현립병원으로 소수레를 몰았다. 나무에서 떨어져 머리를 상하고 팔이 부러진 성철형은 현립병원에 석달이나 입원해있었다. 석달후 퇴원해 집에 돌아온 성철형은 볼라보게 이상해졌다. 지난날의 초롱초롱한 눈빛은 어디로 사라지고 초점없이 사람쳐다 보기가 일쑤였다. 나무에서 떨어질 때 대뇌에서 무슨 나사못이라도 빠져나갔는지 하는 말도 두서가 없어 앞뒤가 맞지 않았고 어떤 때에는 하던말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엉뚱한 소리를 하여 사람들을 놀래우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신신펀펀하던 애가 나무에서 떨어진후 멍청해졌다고 탄식했다.  병원에서 돌아왔다고 성철형을 보러 몰려왔던 개구쟁이 친구들도 이젠 더는 성철형과 재미나게 놀수 없음을 알고는 락심하며 돌아갔다. 그래도 가까왔던 이웃집애들이 성철형이 심심해 한다고 하학후면 몇번 찾아왔다가 그가 번마다 이상하게 노는 짓거리를 보고 더는 찾아오지 않았다. 고모와 고모부는 멍청해진 성철형을 바라보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우로 딸 셋을 낳고 아래로 요행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하늘도 무심키로 가문의 대를 이을 아들을 바보로 만들다니. 고모와 고모부는 돈을 꾸어가며 잘한다는 큰 병원과 밀방을 안다는 용한 의사를 다 찾아다니다싶이 했으나 조금 차도가 보일듯 하나 원상회복은 되지 않았다. 학교에 가면 바보라고 애들한테 몰리워만 댔다. 그대로 놔두면 애가 더 멍청해질것 같아 고모부는 성철형을 더는  학교에 보내지 못하고 집에서 누나들이  아는대로 글공부를 가르치게 하였다. 고모부는 워낙 린근에 소문난 민간예인이였다. 목청이 어찌나 청청하고 우렁찬지 그가 노래를 부를라치면 남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군하였다. 선률이 애잔하고 간간한 민요가락이나 타령을 넘길 때에는 아낙네들의 마음을 뒤설레이게 하였고 선률이 굵직하고 활기띤 혁명가요를 부를 때에는 남정네들이 또다시 총을 들고 해방전쟁터나 조선전쟁터에 나선듯 온몸에 힘이 솟구쳐 하였다. 적어도 근방 50리 안팍에서 결혼식이나 환갑을 치를 때면 의례 고모부를 청해다 흥을 돋구군 하였다. 마을의 오락판과 생산대년말결산 때에도 고모부가 없어서는 안되였다. 간혹 고모부가 친척나들이라도 가게 되면 생산대에서는 하루이틀 미루었다가 고모부가 돌아온후에 년말결산을 짓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성철형이 멍청이로 되면서부터 더는 고모부의 구성진 노래소리를 들을수 없었다. 마을사람들도 간혹 오락판이 생겨도 속을 썩이는 고모부의 심정을 리해하여 억지로 고모부에게 노래를 요청하지 않았다.아들을 바보로 만든 그 마을에서 더 살 재미가 없었다. 나무는 옮기면 죽지만 사람은 옮겨야 산다는데 이사하면 낫겠는가.  성철형이 열두살나던 해에 고모부는 성철의 외삼촌 (나의 아버지)의 소개로 우리 마을로 이사오게 되였다. 속담에 외삼촌이 사는 골에는 가지도 말랬지만 이곳밖에 올데가 없었나 보다. 나의 아버지 장달수는 원래 향중학교에서 어문교원으로 있다가 반우파운동때에 누군가 아버지가 농업합작사의 암퇘지가 개체때의 암퇘지보다 새끼를  적게 낳는다는 말을 했다고 고자질하여 하마트면 우파에 걸려들번 하였다. 그래도 교장이 나서서 <우파로 되겠냐 돌아가 농사짓겠냐>하며 너절로 선택하라 하여 아버지는 화김에 교원일을 때려치우고 결연히 마을에 돌아와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우리 마을로 이사온지 얼마 안되여 마을 사람들도 보기에는 멀쑥하게 생긴 성철형이 좀 모자라는 아이라는걸 다 알게 되였다. 고모부와 누나들이 새 고장에 와서도 사람들한테 잘못보일가봐 성철형에게 아무리 례절을 가리치고 정상적인 사람처럼 처사하라고 그렇게 알려줬건만 두마디 안짝에 본바탕이 드러나 사람들의 놀라움을 자아내군 하였다. 그래서인지 성철형은 사람만나기를 꺼려하면서 집구석에 박혀있었다. 언제부터인지 성철형은 글공부대신 일에 재미를 붙여 누가 시키지 않아도 집의 일이고 남의 일이고 못하는것이 없었다. 하루는 생산대장이 마당을 깨끗이 쓸고있는 나이보다 우둑진 성철형을 보더니 애가 일은 할것같으니 그냥 집에 둬두기보다 나와 생산대일을 시키며 사람들과 접촉하게 하는게 좋지 않겠느냐고 고모부에게 말했다. 계속 집에 둬봐야 나아질것은 없을것 같아 고모부는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하여 성철형은 열여섯살부터 생산대 일을 하게 되였다. 이렇게 팔부형은 마을에서 제일 나젊은 인민공사 사원이 되였다. 인민공사 사원은 나라의 말단 <직원>으로서 신청도 비준도 필요없었다. 이튿날부터 일하러 나가면 되였다.성철형은 원래 뚝심이 있어 힘든일도 남못지 않게 하였다. 눈썰미도 좋아 남이 하는 일을 눈여겨 보았다가 가래질이나 밭갈이하는 등 요령있는 일도 곧잘 흉내내군 하였다. 문화대혁명기간 <농업에서는 대채를 따라 배워야 한다>는 모주석의 위대한 호소에 따라 전국이 대채를 따라 배우며 대채에서 하는 일이면 뭐나 따라배웠다. 평공하는것마저도 대채에서 하는대로 따라 했다. 우리 마을 생산대들에서도 하루일이 끝난 뒤끝이면 밭머리에 모여 앉아 대채평공을 하였다. 대장이 먼저 그날 일의 강약에 따라 최고공수를 정해놓으면 사원마다 자기가 일한 로동량에 가늠하여 공수를 자보하고 군중이 평의하여 장부에 기입하군 하였다. 어떤 사람은 겸손하게 자기 일한것보다 낮게 자보하여 군중이 토론하여 올려주었고 욕심스러운 어떤 사람은 자기 일한것보다 높이 자보하여 군중들이 내리 깍기도 하였다. 성철형은 나이 어리고 일이 서툴다고 누구의 건의였든지 처음에 팔부를 주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20세전까지 3년남짓 팔부를 받으니 성철형은 그것이 자기가 받아야 할 고정 공수인가 하여 날마다 자기차례가 돌아오면 우쭐해서 팔부를 자보하였다. 하여 알게 모르게 바보와 팔부가 맞아떨어져 많은 사람들이 아예 성철형을 팔부라 불렀다. 그래도 성철형은 헤헤 웃으며 달갑게 받아들이군 하였다 하지만 성철형의 부모와 누나들은 아니였다. 어수룩한 사람을 업신본다고 성철형을 팔부라고 부르는 사람들과 대판으로 시비를 따지군 했는데 성철형이 되려 마을사람들 편이 되여 아버지, 어머니, 누나들과 눈을 부라릴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하지만 성철형이 스무살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일도 미립이 터 상로력과 거의 맞먹기에 생산대에서는 그가 팔부를 자보해도 공수를 기입하는 사람이 알아서 10부를 적어넣기도 하고 11부, 12부를 기입해주기도 하였다. 성철형은 고모부를 닮았는지 목청이 좋아 밭머리 휴식때면 누나들이 배워준 노래를 곧잘 부르군 하였다. 무는 말이 있으면 차는 말이 있다더니 재주도 각각인가. 공부는 그렇게 배워줘도 머리에 잘 들어가지 않는데 음악세포는 남달리 티였는지 노래만은 몇번 따라 부르면 곧잘 배워냈다. 한번 배운 노래는 입력이 된듯 오래도록 잊을줄 몰랐다. 후에야 안것이지만 어떤 정신지체자들에게는 이러한 특수공능이 있다고 했다. 아마 성철형도 어딘가 그런 특수공능이 있는듯 했다. 사원들이 장난삼아 성철형의 노래를 요청하면 성철형은 유치원애들처럼 좋아라고 궁둥이를 털고일어나 노래가락을  넘기군 하였다. 그것도 사원들이 재청을 요구할 사이도 없이 노래를 한다하면 련이어 서너컬레씩 부르고야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원들의 박수소리가 그에게는 최고의 영예였다. 그렇게 며칠을 부르고 나면 밑천이 드러나 그냥 하던 노래를 반복하는지라 사원들도 점차 재미가 떨어져 휴식시간에도 드러누워 휴식하거나 제잡담을 하며 노래를 요청해 오지 않았다. 그러면 되려 성철형이 조급증이 나서 <어째 어전 내 노래를 아이 듣겠습둥?> 하며 일어서서는 남이야 듣건말건 제흥에 겨워 손벽을 짝짝치며 노래 서너컬레를 부르군 하였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성철형과 별로 만날 일이 없어 잘 몰랐는데 지난해 가을철에 초중을 졸업하고 마을에 돌아와 거의 날마다 성철형과 같이 일하게 되면서부터 성철형의 어수룩한 행실을 보고 기가 질렸다. 형제도 잘 두면 보배이고 못두면 원쑤라더니 나에게 이런 팔부형이 있다는게 창피스럽기 짝이 없었다.그런데 이듬해 봄에 생각밖의 일이 벌어졌다. 그날도 생산대에서 논밭 드럼감기를 끝내고 밭머리에서 대채평공을 할 때였다. 성철형의 공수토론차례가 되여 성철형이 여느때와 같이 흙물이 튕긴 손을 높이 쳐들며 <팔부>하고 소리치자 기공원도 그 소리를 받아 <팔부>하고 소리치고는 장부에 2등로력공인 12부를 기입해주었다.그런데 그런 내막을 모르는 팔간집 새각시가 손을 들며 <전 의견이 있어요.> 라고 하는것이 아니겠는가. 사원들의 시선이 모두 새각시쪽으로 쏠렸다. 그녀는 20리 떨어진 용평마을에서 지난 설에 우리 마을에 갓 시집온 새각시였다. 듣자니 원래있던 생산대에서 몇년간 부녀대장으로 있으며 입당까지 하고 시집왔다는데 인물도 환하고 일도 걸싸게 하거니와 바른소리도 잘했다.<전 의견이 있어요. 저 동무가 일하는걸 보면 상로력 못지 않은데 어찌 본인이 팔부를 자보한다하여 팔부만 주겠습니까. 제 생각엔 오늘은 12부는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보니까 저 동무한테 언제나 팔부만 주는것 같던데 이건 당에서 제창하는 안로분배원칙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새각시의 똑부러진 의견이였다. 남정네들은 담배를 피우며 시무룩히 웃기만 했다. 곁의 아낙네들은 새각시의 귀에다 대고 뭐라고 소곤소곤 말해주고 있었다.이때 성철형의 곁에 있아 담배를 피우던 문백이란 나그네가 시물시물 웃으며 성철형을  시까슬렀다. 나이 서른을 넘긴 그는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바이올린을 가지고 있으며 콩나물악보책을 볼줄 아는 <예술가>였다. 그는 하품도 예술적으로 한다며 남들처럼 <하>하지 않고 하품이 끝날 때면 입을 오무리며 <오>자를 붙여 <하ㅡ오>했고 트림할 때에도 그저 껄 하지 않고 예술적으로 한다며 <꺼ㅡ얼>했다. 예술에는 절벽이라고 농민들을 깔보며 벼라별 <예술>을 자랑하는 그가 아니꼬와 마을사람들은  이름대신 풍각쟁이라는 월계관을 씌워주었다. 그는 현성에서 공부하다가 어렸을 때 농촌으로 하방한 부모를 따라 우리 마을로 왔다는데 남다른 재간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일에는 베돌이였다. 또한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구경거리를 만들지 못해 안달을 떠는 사람이였다. <야, 니 팔부를 달라는데 저 안까이 네 달라는 팔부 안주구 왕청같은 공수를 주겠단다. 그런데두 니 가만있니?>그러잖아도 전에는 팔부를 자보하면 아무런 시비없이 무사통과되여 시비많은 사람들과 비해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는데 오늘은 어째 별랗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능구렁이 문백이가 곁에서 이렇게 꼬드기자 성철형은 그제야 웬 영문인줄 알았는지 밸이 왈칵 치밀어했다. 새로온 새각시가 자기가 달라는 공수를 안주겠다는건 자기를 업신여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병신이나 좀 모자라는 사람들은 누가 자기를 업신여긴다고 여길 때면 불물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체면과 자존심을 세우려 하는 반항적 역심리가 있다고 한다. 저 새각시가 자기를 업신여겨 달라는 팔부를  안주겠다는데 팔부형이 가만 있을리 없었다. 성철형은 땅에서 솟아나는 손오공마냥 벌떡 일어서며 꽥 소리를 질렀다.< 씨불란 싸, 쌍간나새끼, 니 뭐이라니? 파,팔부를 아이 주겠다구? 니, 니 오널 죽어봐라.>성철형은 자기가 깔고앉았던 소대가리만큼한 돌을 안느라고 낑낑거렸다. 그 돌을 들어 괘씸한 저년의 대가리를 까부실 잡도리였다. 그걸보고 저쪽켠에 앉아있던 아낙네들이 깜짝놀라 고아댔다. <우구, 저걸 어째?><이봅소, 나그내들이 곁에서 말리재이쿠 뭘함두?><저 도깨비 저걸루 사람치자구 저래재이요?><각시 빨리 뛰오, 펄쩍이 앉아 뭘하오? 날래 뛰란데..>새각시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아낙네들이 고아치며 등을 밀어내는 통에 얼뻥뻥해서 슬렁슬렁 내뛰기 시작하였다.그사이 끝내 소대가리만큼한 돌을 끌어안고 일어선 성철형이 그녀뒤를 쫓아가며 소리질렀다.<저 씨불란 가, 간나새끼, 니 달캤니? 서, 서라.>새각시는 돌덩이를 안고 눈에서 불찌를 떨구며 천방지축 쫓아오는 성철형을 뒤돌아보고서야 사태가 상서롭지 못함을 알아챘는지 얌전한 새각시답지 않게 자개바람을 일구며 뻔질나게 마을로 내뛰였다.아무리 힘이 솟구치는 젊은이라 해도 소대가리만큼한 돌덩이를 안은 성철형이 바람결처럼 사라지는 새각시를 따라 잡을리 없었다. 그것나마 마음은 급한데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서였던지 성철형은 그만 뭣엔가 걸려 땅에 메친 청개구리마냥 앞으로 펄쩍 꼬꾸라졌다. 뒤쫓아 달려간 나와 영호며 인섭이 등 젊은또래들이 성철형을 일쿼세우고 어깨넘어로 그냥 <씨불란 쌍간나새끼, 니 어디 죽어봐라.>며 욕설을 퍼부어대는 성철형을 얼리고 닥치며 밭머리로 끌고왔다. 나는 모닥불을 뒤집어쓴듯 얼굴이 뜨거워났다. 남은 생각해서 공수를 더 주겠다는데 팔부형이 그것이 된장인지 똥인지도 가리지 못하고 이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다니. 씨, 창피스러워서.사원들의 욕총은 부실한 사람을 꼬드겨 일을 저지르게 한 문백에게로 넘어갔다. 그러잖아도 나살이나 먹고 회의에서는 바른 소리 한마디 안하다도 드문드문 엉뚱하게 생쥐처럼 끼여들어 일을 비틀어놓는 통에 종종 사람들의 미움을 받던터였다. 문백이는 사람들의 욕총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사실 문백이도 평소에 싸움질이란 하지 않고 사람좋게 헤헤 웃기만 하는 성철형을 그저 롱담으로 고드겼을 뿐인데 일이 이렇게까지 번져질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을것이였다. 벼짚에도 속이 있다고 모자라는 사람한테 숨은 똥밸이 있다는것을 문백이도 오늘에야 그걸 실감했을것이다. 오늘 정말 인명사고라도 났더면 어쩔번 했는가. 문백이는 자기 잘못으로 큰 일을 저지를번 했다고 생각하는지 도적놈 개에게 물린듯 누가 뭐라고 꾸짖든 고개를 숙이고 아무 변명도 하지 못하였다. 미운놈은 주던 떡도 한입 뚝 떼여먹고 준다더니 그통에 문백이는 그날 받아야 할 공수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그날 일은 그날에 끝나는가 했더니 그게 아니였다. 부실한데는 정말 약이 없나보다. 이튿날에도 성철형은 어디에서 찾아냈는지 굵다란 괭이자루를 메고 팔간집새각시네 집에 찾아가 <씨불란 쌍간나새끼 나오라>고 야단쳤다. 자기를 업신보는 사람과는 영원히 전쟁뿐이라는 태세였다. 그래도 성철형은 마당에 서서 소리만 꽥꽥 지를뿐 다른 과격한 행위는 하지 않았다. 새각시는 멋도 모르고 성철형을 두둔하여 바른 소리를 한마디 했다가 감사하다는 소리를 듣기는 고사하고 괭이자루를 메고와 골통을 박살내겠다는 성철형의 발광질에  혼겁이 나 그날 일하러도 나가지 못하였다. 모자라는 사람한테는 시비고 도리고 없었다. 그저 무조건 달래야 했다. 생산대회계인 새각시 남편 인국이가 평소에 자기도 사 피우지 못하는 악수표 담배 두갑을 성철형에게 찔러주고 이제 고구마 한 광주리 삶아주마고 구슬려서야 이 일을 겨우 마무리 지었다. 성철형은 개선장군마냥 괭이자루를 척 둘러메고는 휘바람을 휙휙 불며 집으로 돌아갔다. 모자라는 사람한테도 강호의 의리라는것이 있는가. 이튿날부터 성철형은 과연 팔간집새각시를 보고도 모르는척 하였다. 하지만 새각시는 성철형만 보면 호랑이를 피하는 순한 양마냥 할끔할끔 눈치를 보며 멀리찍이 피해다녔다. 지난날 사나이들을 찜쪄먹을만큼 활달하고 혁명적이던 부녀대장의 패기가 불물을 가리지 않는 성철형앞에서는 가뭇없이 사라졌다. 그후부터 사원들은 성철형이 하는 일이면 덮어놓고 잘한다고 엄지를 내들고 춰줄뿐 성철형이 하는 일을 두고 시야비야하는 사람이 더는 없었다. 잔잔한 부실이로만 보아왔던 성철형에게 사람을 놀라게 하는 울뚝밸이 숨어있는줄 안후부터는 긁어 부스럼만들 필요가 없다고 여겼던것이리라. 장백산 2009년 6기
15    [중편]팔부형이 이사가다(1) 댓글:  조회:2085  추천:81  2010-08-09
중편소설             팔부형이 이사가다                                                         허룡석                                  1 삼라만상이 쥐죽은듯 고요한 야밤삼경이다. 하늘에서는 밤새 또글또글 빛을 뿌리던 별들도 지쳤는지 빛을 잃고 꺼뻑꺼뻑 조을고 있다.     산기슭을 따라 뉘연히 펼쳐진 사과배과원과 마을을 둘러싼 소소리 솟은 백양나무들도 4월의 거센 봄바람에 지쳤는지 인제는 조용히 잠들었다.     한입 뚝 떼여먹은 옥수수떡마냥 삼면으로 마을을 둘러싼 대머리산도 병아리를 품은 어미닭마냥 마을을 한품에 안은채 꾸벅꾸벅 졸고있다. 내가 사는100여호되는 립신마을도 그 품속에서 마을채로 굳잠에 빠져버렸다. 조상들이 쪽박차고 두만강을 건너와서부터 세워진 마을, 해방후에도 줄곧 허청리라고 불렸으나 문화대혁명을 맞으면서 낡은것을 타파하고 새것을 수립한다는 뜻으로 립신이라는 입에 잘 오르지도 귀에도 서먹한 이름을 달게 된 마을이였다.     <고양이 가마목에서 편히 겨울을 나는> 자래의 자산계급 게으름뱅이 사상을 타파한다며 겨울내내 쉬지 못하고 봄철까지 마을앞 논판의 원전화건설에 내몰려 지칠대로 지친 남녀사원들은 나무칼로 귀를 베여가도 모르게 잠에 곯아떨어졌다. 언제 열릴지도 모를 9차전국당대회의 소집을 혁명적 실제행동으로 맞이한단다. 온 마을은 집집마다 전등이 꺼져있다. 고양이의 부스럭 방귀소리에도 놀라 정신없이 짖어대는 귀밝은 개들조차 집지킴에 지쳤는지 마을은 괴괴하기만 하다.     깊이 잠든 마을의 고요한 정적을 깨뜨리려나. 마을 복판에 덩실하게 들어앉은  대대사무실에 갑자기 전등이 환히 켜졌다. 아니나다를가 잠시후 백양나무에 높이 달아맨 도깨비 주둥이같은 확성기에서 이젠 자면서도 부를수 있는 <대해항행은 키잡이에 의거하네> 노래가 고음으로 울려나왔다. 잇달아  무산계급전사의 전투적 패기로 넘치는 우렁찬 목소리가 산간마을의 정적을 깨뜨리며 울러퍼지기 시작했다. <아, 아, 사원 여러분 듣깁니까? 듣깁니까? 사원 여러분 주의하여 들으십시요. 지금부터 립신대대 빈하중농들에게 한없이 인심을 격동시키는 특대희소식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오매에도 갈망해오던 9차 전국당대회가 오늘 북경에서 승리적으로 페막되였습니다. 우리 맘속의 붉디붉은 태양이신 모주석께서 재차 주석으로 당선되셨고 모주석의 가장 가장 가장 친밀한 전우이신 림부주석께서 또다시 부주석으로 당선되셨습니다. 어찌 이뿐이겠습니까.  이번 당대회에서는 완고하게 자본주의길로 나아가던 집권파를 무리로 끌어내리고 태산이 무너져도 견정하게 모주석을 따라 혁명하려는 무산계급혁명파들이 중앙에 대거 진출하였습니다. 이는 모택동사상의 위대한 승리이며 무산계급독재의 위대한 승리이며 전국 여러 민족 인민들의 념원을 충분히 구현한 영명한 결책입니다. 사원 여러분, 지금 남녀로소 모두 일어나 대대사무실앞에 모이십시요. 우리는 전국인민들과 함께 인심을 고무하는 이 특대경사를 경축해야 하겠습니다. 모주석께 충성하는 우리의 붉디붉은 마음을 표달할 때가 왔습니다. 우리는 불타는 충성의 마음으로 이 특대경사를 열렬히 경축해야 합니다. 그러니 모두들 10분내에 준비해둔 초롱불을 들고 나와 각 패별로 대대사무실마당에 모이십시요.> 들어보니 사원들의 귀에 호적을 둔 현공작대 한조장의 목소리다. 지난 가을에 접어들면서 상급의 지시에 쫓아 이 마을에도 모택동사상선전대로 현에서 한명원, 왕염, 김억만 등 세명이 파견되여 내려왔다. 현조직부에서 과장으로 일한다는 한명원이 조장을 맡았다. 사원들은 습관적으로 그를 한조장이라 불렀다.   모주석의 최신지시나 중앙의 특대희소식이 있을 때면 언제나 대대당지부서기 김덕만이 아니라 한조장이 나서 방송하거나 밭머리에서 전달하군 하였다. <도깨비주둥이>가 울리기 시작하자 마을은 정규훈련을 받은 야전군 병영마냥 집집마다 거의 동시에 불들이 환히 켜졌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된후 이젠 3년째.  번개불에 콩을 볶는 이런 혁명적 행동들이 한달에도 몇번씩은 있는지라 사원들도 제법 군사화되여 부대전사들 못지 않게 행동들이 민첩하였다. 한밤중에 도적이 들어와 동네 개들이 무리로 짖어대도 그대로 잠에 곯아떨어져있던 사원들이 도깨비 주둥이같은 대대확성기가 입을 열었다하면 그것이 전투의 나팔소리인양 모두가 자리를 차고 일어날수 있었다. 성철형은 온하루 아직도 채 녹지 않은 논판을 까내고 흙을 지여나르느라 지칠대로 지쳤다. 그는 초저녁부터 귀찮게 안아달라고 칭얼대는 형수 곱단이를 발길로 찬장밑에 밀어던지고 구석쪽에 피해가 혼곤히 잠들었다. 그러다가 오줌이 마려워 깨난틈에 하는짓밖에 모르는 형수가 또다시 감겨든다. 더 피할수 없어 그녀와 한판 핍진하게 그 일을 치르는데 갑자기 귀청을 째는듯한 확성기소리가 울려왔다. 벼락치듯한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성철형은 그만 형수의 배우에서 굴러떨어졌다. 어, 무슨 9차당대회가 끝났다구? 비록 마을에서 팔부로 불리우는 성철형이지만 그것이 귀에 설지는 않았다. 공작대에서는 벌써 몇달 전부터 9차당대회가 열리고 끝날지 모르니 사원들 모두가 사상적준비를 충분히 하고 있다가 일단 희소식이 전해오면 즉시 일떠나 성대하고도 장중하게 경축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선전해 왔던것이였다. 팔부생각에도 지금 녀편네를 끼고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을 때가 아니였다. 이런 큰 정치행사때에 어물어물하며 늦게 나가거나 나가지 않았다가는 큰 경을 치게 된다는걸 성철형도 잘 알고 있었다. 최신지시가 내려왔다는 그날 밤에도 공작대의 휘동하에 온 마을사람들이 거리에 떨쳐나가 북과 징을 울리며 한바탕 경축행사를 벌릴 때에 영호아버지가 이웃마을 제사집에 갔다가 좀 늦게 나왔다고 빈하중농이 사상각오가 낮다고 회의때마다 비판받군 했었다.  성철형은 서둘러 옷을 주어입기 시작했다. 온 몸이 달아오른 형수가 두부모같이 하얗고 부푼 알몸으로 성철형의 다리를 부둥켜 안으며 칭얼댔다. <하던걸 채 하지두 않구 이렇게 감까?> <야, 이 바보야, 이게 어느 때라구  하, 하던거 계속 하자구 그래, 늦게 가문 비, 비판받는다. 알기나 해? ×보다 주, 중요한게 저, 정치란게다. 정치.> 성철형은 자그마한 찬장우에서 초롱을 찾아내려다 우에 앉은 먼지를 대충 털어버렸다. 뚜껑을 열고 성냥을 그어 안에 고정시켜놓은 초 두대에 불을 붙쳤다. 원래는 한대였는데 어둠을 밝혀주는 모주석과 림부석을 대표한다며 초를 한대 더 넣은것이다. 이 초롱은 마을 부련회 부녀들이 오보호와 성철형처럼 좀 모자라는 사람들한테 통일적으로 만들어준것이였다. 성철형은 한손에 불빛이 환한 초롱을 들고 한손으로 단추를 잠그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씨, 무스게 이것보다 더 맛있는게 있다구 하던것두 채 아이하구 감까? 밖에서 리대장네 암캐가나 콱 하구 이젠 들어오지두 마.> 화가 치민 형수가 탱탱히 살아난 자기 젖무덤을 거머쥔채 등뒤에서 꼬시랑거린다. 성철형은 들었는지 말았는지 그 길로 우리 집으로 달려왔다. <야, 학수야 자니? 빠, 빨리 일어나라.> <어째 또 왔소? 나절루 나가재이리라구.> <야, 임마 느, 늦게 가문 비, 비판받는다…> 성철형은 나와 외사촌간이다. 그는 나보다 5살이나 이상이다. 지난해 가을에 내가 초중을 졸업하고 마을로 돌아와 농사를 짓게 되자 팔부 성철형도 륜기라는것을 아는지 처처에서 나를 자기동생이라 자랑하며 내 역성을 들어주느라 야단이였다. 하지만 나는 팔부형이 나를 동생이라 하는것도 싫었고 역성을 들어주는것은 딱 질색이였다. 어떤 때는 역성을 든다는것이 오히려 사람들의 웃음거리를 만들군 했다. 그통에 나도 성철형과 함께 쓸데없는 말밥에 씹히기도 했다. 내가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는 되도록 성철형을 멀리하고 피하려 했으나 성철형은 그런 눈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어미닭이 병아리를 싸고 돌듯 언제나 나를 싸고돌았다. 이런 정치행사나 큰 일이 있을 때면 저지력인 성철형도 사회경력이 짧은 내가 걱정되는지 제발 오지 말았으면 해도 기어코 찾아와서는 이래라저래라 하며 형의 처사를 하느라 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를 찾아온것이였다. 나는 싫은대로 초롱을 찾아들고 성철형을 따라 나섰다. 성철형은 너 간부되고 발전하자면 이런 큰 정치행사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둥 자기도 어떻게 하던것도 그만두고 곱단이를 뿌리치고 나왔는지를 자랑삼아 늘여놓는것이였다. 그가 횡설수설하는게 귀찮아 나는 듣는둥마는둥 했다. 대대사무실 마당에 달려가 보니 벌써 세개 생산대 사원들이 거의 다 나와 있었다. 성철형은 늦게 나왔다고 누구한테 욕이라도 먹을가봐 나보다 눈치빠르게 제껙 우리가 속해있는 2패의 줄에 비비고 들어갔다. 쳇, 눈치가 빠르기는 도가집 강아지네.  민병패장 영호가 나보다도 성철형을 보고 반색하며 다가왔다. <야, 형님두 다 나왔소?> 늦게 나왔다고 비판하는 사람은 없고 되려 영호가 반겨맞아주니 성철형은 헤헤 하고 웃었다. <내라구 안 나오문 되니? 하던것두 다 제쳐놓구 나왔다. 헤헤…> <이 밤중에 자지 않구 하긴 뭘 했단 말이오?> <헤헤, 너네 듣기 좋아하는 그 맛있는거 있재이야…> <양? 그럼 아즈마이하구 그 맛있는걸 하다 나왔단 말이우?> <맞다맞아. 한 절반 하다 방송듣구 놀라서 이렇게 달아 왔재이야. 헤헤…> <야, 형님이 사상각오 대단하오 양?> <그렇채이문 비, 비판받는거 어찌니. 저 학수두 내 데리구 나왔다. 헤헤… > 나는 쓰거워서 성철형을 흘겨보았다. 내가 나온것도 제 공로란다. 아마 우리 마을에서 성철형이 가장 솔직하고 가식이 없는 사람이라 해야 할것이다. 그는 무슨 일이든 자기가 한 일은 곧이곧대로 사람들에게 털어놓군 한다. 부부간의 비밀도 례외가 아니였다. 그래서 사람들한테 팔부취급을 받는지도 몰랐다. 있는대로 한것대로 고스란히 말을 하고도 왜 자기가 남들한테 그냥 몰리워대는지 성철형은 도무지 아는것 같지 않았다. 오늘도 성철형이  곧이곧대로 말했으나 자기마음을 알아주는 패장의 칭찬까지 받았다고 생각하는지 기분이 좋아서 귀신쫓는 무당마냥 초롱불을 높이 쳐들고 동서남북으로 마구 내저어댔다. 멍청한 성철형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척 나는 목을 빼들고 앞쪽을 내다보았다. 곁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던 영호아버지가 엄포를 놓았다. <입들을 다물지 못해, 지금 어느 때라구 그따위 소리를 하구 있는거야, 큰 경을 치지 못해서.> 영호가 아버지한테 혀를 홀랑 내밀며 저쪽으로 대오를 정돈하려 달려갔다. 나는 속으로 깨고소해났다. 공작대 한조장과 대대당지부서기 김덕만이, 민병련장 마만철이가 맨 앞에서 대오를 점검하고 있었다. <저 씨팔, 뒤에서 초롱을 말좇대가리처럼 내젓는게 누구야?> 두억시니마냥 험상궂게 생긴 만철이가  우리 뒤쪽켠을 가리키며 욕설을 퍼붓는 소리가 들려왔다. 작달막한 키에 딱 바라지게 생긴 한조장이 만철이를 흘겨보며 꾸지람했다. <그따위 싸가지 없는 소리두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하라구.>  만철이는 실수한줄 알고 뒤더수기를 긁적거렸다. <아, 예..말좇대가리 아니구 개좇대가리..그것두 아니구…저>  생산대에서는 이름난 말썽꾸러기였고 민병패에서도 락후분자로 정평나 공청단에도 들지 못하던 그가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반란에는 도리가 있다.”는 모주석의 지시를 누구보다도 먼저 터득해서인지 앞장서 대대당지부와 공청단, 민병련 등 조직을 모조리 반란하고  간부들을 죄다 타도하면서부터 일약 반란파맹장으로 린근에 명성을 떨치고 온 마을을 쥐락펴락하는 민병련장이 되였다 한다. 그가 쩍하면 자기가 띠고 다니던 손바닥만큼 넓은 소가죽혁띠를 뽑아들고 <집권파>와 <계급의 적>들을 어떻게나 혹독하게 족쳐대는지 누구든 그의 손에 걸려들기만 하면 보지도 못한 증조할아버지가 첩까지 두었다고 없는 일도 <불지>않고는  견뎌내지 못한단다. 부농성분을 가진 1대의 한 <계급의 적>은 그의 혹독한 매질에 견디다못해 밤중에 갇혀있던 <우사칸>에서 가만히 빠져나와 “헌병대장 마만철이를 타도하자.”를 높이 웨치며 마을 우물에 빠져 자살하기까지 하였다. 범도 사람 셋을 잡아먹으면 귀가 째진다지만 만철이는 그래도 책임추궁을 받기는커녕 <계급의 적>들과의 투쟁에서 과단하고 과감하다고 표양을 받기도 했단다. 그가 손에 사람들의 피비린내나는 혁띠만 들고있는걸 보면 동네의 크고작은 개들도 사나운 늑대를 만난듯 모두 꼬리를 빳빳이 끼고 마을밖으로 피해 달아난단다. 한창 교배하던 개들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 엉덩이를 붙힌채 서로 제방향으로 뛰려다 길바닥에 나뒬굴기도 했다. 상급에서는 그를 계급각성이 높은 전도유망한 간부라 추어올리고 사원들은 뒤에서 일제시기 <헌병대장>보다 더 악독한 눔이라고 손가락질 했다. 마을아이들은 그를 천하에 둘도 없는 도깨비로 여겼다. 아무리 떼질쓰며 죽어번저지던 애도 “마도깨비 고톨 빼러 온다.”하면 금방 숨이 넘어간듯 울음을 딱 그치고 엄마젖이 산인가 하여 그뒤에 머리를 파묻고 숨소리 하나 없었다. 운동전에는  락후분자로 몰리다보니 나이 30이 되도록 시집오려는 처녀가 없어 로총각으로 묵어빠졌다. 그러다가 반란파두목으로 된후 화선입당이라는것도 하고 우에서 중시하는 <혁명간부> 후계자로 지목된후에는 외지에서 꽃같은 색시를 맞아들이고 달덩이같은 아들까지 보았다. 그후부터 만철이는 우산으로 범잡은 포수마냥 더욱 우쭐렁거렸다. 우리켠으로 달려온 만철이가 게사니마냥 꽥꽥 고아댔다. <저, 씨팔, 말좇대가리처럼… 아니 초롱을 마구 내저어대는게 누구야? 너 2대의 팔부가 아니야? 넌 또 왜 나왔니?> <방송에서 안까이 스나덜이  다 나오라해서 나왔는데, 하던것두…> 성철형이 하던것도 제쳐놓고 나왔는데 왜 욕부터 하느냐고 덤벼들려는것을  영호아버지가 제꺽 성철이를 툭 치며 웃음띤 얼굴로 만철에게 말하였다. <이런 대경사에야 사람이 많을수록 더 좋은게 아니우? 저 사람두 모주석께 충성하는 마음으루 달려나온건데 둬마디 칭찬해줘야 할게 아니겠수?>     그제야 만철이는 평소에 사람을 깔보고 욕하던 습관대로 말이 빗나갔음을 알아챘는지 저으기 누그러들었다. 이런 정치대경사때에는 아무리 팔부라도 자각적으로 나온 사람을 욕하는것이 아니잖는가. <근데 왜 초롱은 그렇게 질서없이 마구 내젓는거야?> <야, 기분좋으니까 그렇지. 형님은 기분 아이좋수?> 얼씨구, 팔부형주제에 뭐 정치를 아는가? 기분좋다고 둘러부치는걸 보니. 나는 속으로 쓴웃음이 나왔다. <기분좋더라두 참았다가 내래 행진하면서 호각소리에 맞춰 절주있게 흔들란 말이야. 알겠어?> <양, 알았다이.> 남들이 모두 무서워하는 도깨비한테도 별 욕을 먹지 않자 성철형은 더욱 기분이 좋아했다. 그는 초롱은 다시 감히 내젓지 못하고 선자리에서 술취한 사람마냥 절루덕절루덕하기도 하고 한손을 쳐들고 빙글빙글 돌기도 하며 충성무를 춰댔다. 나는 성철형이 주책없이 노는꼴이 창피스러워 그만하라고 그의 엉덩이를 콱 밀쳐놓았다. 그래도 그는 나한테는 언제나 너그러웠다. 경축대오는 민병련장의 구령에 따라 움직였다. 저마다 초롱불은 든 150여명 대오가 늘여서니 대머리산에서 내려온 불룡마냥 구불구불 꿈틀거렸다. 오늘따라 웬지 대오는 10리나 떨어진 공사마을로 향했다. 장강은 동으로 흐르고 해바라기 태양따르네. 우리는 만강의 격정으로 9차당대회 경축하네 우리는 환호하네, 목청껏 노래하네. 밤중에 뭐가 부러진 둥굴소 고함지르는것 같은 만철이의 선창에 사원들은 오래전부터 배워둔 <만강의 격정으로 9차당대회 맞이하네>란 노래를 한어로 부르며 어정어정 걸었다. 사원들이 아직도 잠에서 채 깨여나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일에 지쳐서인지 노래소리는 만철이의 기대치만큼 높지 못하였다. 만철이가 앞뒤로 뛰여다니며 더 높이 더 세게 부르라고 닥달을 했으나 중이 소리높이 념불을 외우는 소리에 불과했다. 다들 옆구리를  들이찌르는 싸늘한 밤랭기를 막느라 옷깃을 여미는데 더 신경을 썼다. 그런대로 우리 대오가 천여호가 모여사는 공사마을을 가로질러 공사청사앞에 가 보니 마당에는 폭죽터진 종이들이 바람에 어지러이 나뒹굴뿐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경축행사를 마치고 흩어진지 퍼그나 오랜것 같았다. 이런 큰 정치행사에 공사에까지 와 주공작대와 공사간부들한테 립신대대의 혁명열정을 보여주려 했을텐데 (사실은 자기네 공로를 보여주려했을것이다) 공작대와 공사간부들은 언녕 이불속에 들어갔는지 보아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그대로 돌아설 한조장네가 아니였다. 공사에까지 왔다갔다는 표시로 구호라도 높이 웨쳐 주공작대와 공사간부들이 이불속에서라도 그 혁명적 목소리를 듣게 해야 했다. 그래야 인상을 남겨 래일 공사에 와 경축활동정황을 회보할 때에 “어제밤 공사청사앞에서 구호를 소리높이 웨친것이 우리 립신대대였습니다.” 하면 평소보다 더 높은 점수를 딸것이 아니겠는가. 한조장의 지시에 따라 만철이가 선참으로 구호를 웨쳤다. <립신대대 빈하중농들은 9차당대회 승리적 결속을 열렬히 경축한다.> <립신대대 혁명적 군중들은 당중앙의 결의를 견결히 옹호한다.> <위대한 수령이시며 위대한 도사이시며 위대한 키잡이신 모주석 만세. 만세 만만세.> <모주석의 가장 가장 가장 친근한 전우이시며 우리의 영명한 부통수이신 림부주석 영원히 건강. 영원히 건강. 영원히 건강하시라.> 공사청사마당에서 소재지마을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한바탕 구호를 웨치게 한후 한조장은 만철이더러 그 자리에서 경축대오를 해산시키게 했다. 우리들도 여기에서 구호만 웨치면 집으로 돌아간다는것을 알고있기에 시키는대로 목청을 높여 구호를 웨쳤다. 그리고는 해산소리와 함께 와야 소리지르며 굴레벗은 소떼마냥 오던 길에 나서 반달음을 놓았다. 공사마을로 올 때에는 구호를 웨치고 노래부르고 호각소리에 맞추어  절주있게 초롱을 흔들며 양걸춤까지 추며 오다나니 시간이 많이 지체되였지만 갈 때에는 풀어놓으니 구유에 콩여물을 남겨두고 온 소들마냥  반달음쳤다. 초롱불들도 질서없이 흩어져 마치 공사마을에서 귀신불이 질서없이 사처로 날아나오는듯 했다. 게사니마냥 키가 껑충한 성철형도 우리네 젊은또래 오리무리를 따라 반달음을 놓았다. 그런 와중에도 영호는 성철형을 돌아보며 시까슬렀다. <형님은 집에서 아즈마이 눈이 빠지게 기다리겠는데 가서 맛있는거 마즈해야 하재이캤소?> <야 임마, 이,이젠 닭덜이 울겠는데 아, 아무리 맛있는게래두 언제  마즈 할새  있니. 낮에는 또 원전화해야지, 우리 안까이새끼두 이, 이젠 드베진지 오래겠다.> <그래두 누가 아우? 형님의 맛있는거 먹구싶어 그냥 기다리겠는지…> <하하하.> 젊은또래들의 웃음소리가 조는 별들을 깨우려는듯 하늘공중에 울러퍼졌다. 그들은 어수룩한 성철형을 안주로 질근질근 씹으며 재미나게 웃어주는것이 이젠 습관이 된것 같았다. 그래도 가재는 게 편이여서인지 나는 그러는 영호네가 아니꼬왔다. 어느듯 마을골목길에 들어섰다. 생산대 리대장네 큼직한 집옆에 붙여지은 창고같은 성철형네 자그마한 집에 불이 환히 켜져있었다. <저것보우, 아즈마이 불을 켜놓구 형님을 기다리구 있재이오?> 영호가 능글거렸다. <그, 글쎄, 저 빌어먹을게 어째 불을 아이껐나. 저, 전기세 자꾸 올라가는데…>.> <형님, 집에 가 하던걸 마즈 하면 래일 우리한테 들려줘야 아오 양?> <응응, 그래 아, 알았다.> 성철형은 부부간에 밤에 하는 일을 그들에게 회보하는것을 응당한 일로 생각했던지 그 무슨 농쟁기를 빌려달라는 부탁을 받을 때처럼 정색해서 대꾸했다. 우리는 성철형네 집앞을 지나갔다. 성철형이 집에 들어서니 누워있던 곱단이가 발딱 일어나 앉으며 환성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 어째 이재 옴까? 온 밤 자재이쿠 기다렸는데…> <에구, 이 머저리 저, 정말 자재이쿠 있구나? 불은 어째 아이끄구 있냐? 전기세 자꾸 올라가는데.> <하던거 마즈 해야지 내 혼자 어떻게 잡미까. 아무리 자자해두 아이되는데.> <에구, 이게 나, 날마다 하던거하던거하메 나, 나그내를 잡는다 잡아. 일은 하재이쿠 날마다 노, 놀구 먹구 자기만 하니까 아, 앙캐궁리뿌이지> 영호네 뒤에서 걷던 나는 호기심에 끌려 가던 걸음을 멈추고 발뼘발뼘 창문가로 다가갔다. 성철형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소다를 잘먹어 하옇게 부풀대로 부풀어 잘 쪄진 만두같은 형수의 젖무덤을 보더니 인간의 본능이 솟구쳤는지 옷을 활활 벗어내치더니  형수를 끌어안고 이불속으로 들어가는것이였다. 형수는 너무좋아 성철형의 목을 딱 감아안다가 몸을 흠칫 떨었다. <아이, 무스거 경축할라 간다던게 어째 몸이 이렇게 얼었슴까. 우, 이것두 싹 얼었네.> 둘은 전등을 끄는것도 잊고 이불속에서 엎치락뒤치락 했다. 확성기소리에 놀라 끊겼던 맛있는 작업을 다시 시작한것이다. 나도 웬지 전에없이 이상해나며 온 몸이 후끈 달아오르고 부르르 떨려왔다. 갑자기 내 등뒤에서 킥킥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에 돌아다보니 어느새 뒤따라 왔는지 영호네들이 내 어깨넘어로 불빛이 환한 집안을 들여다보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나는 못할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흠칫 놀랐다. 부끄럽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하여 나는 소리를 죽여가며 양떼를 몰듯 그들을 제집으로 쫓았다.(계속) 장백산2009년 6기
14    [중편]진혼곡(해후)5 댓글:  조회:862  추천:45  2010-07-27
중편소설               진혼곡(해후)                                                                   허룡석                                  5 순철이는 홍순이 뜻대로 그네들과 가까이 지내려 애썼다. 그들이 누룽지를 퍼지워 나눠먹을 때면 사두었던 순대며 물만두를 슬그머니 갖다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대번에 그것들을 도로 홍순이 침대에 던져버렸다. “흥, 고양이 쥐 생각는군, 우리두 날 살려줄 사람이 있다. 굶어죽어두 네년건 안먹는다. 퉤.” 그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순철이가 몇번이나 과일이며 음식들을 갖다줘도 그것들이 번번히 날아건너왔다. 어떤 때는 남의 성의를 너무 무시하는것 같아 그의 남편이 송구스러워하며 받아둘려해도 그녀가 막무가내였다. 곰팡이 낀 내 누룽지를 먹어도 네년이 주는 그따위 고기는 안 먹는다는 배심이였다. 기나긴 세월의 쉼없는 흐름은 선혈이 랑자하게 배여있던 그녀의 상처에 진을 바르고 두툼한 돌이끼를 씌여놓아 굳은 옹이로 만들어놓은탓인지 그러한 동정에도 그녀의 그 옹이는 풀어지지 않았다. 어느날 순철이는 밖에 물건사러 나갔다가 입원재무과에 들려 채옥이네 치료비 정황을 알아보려 했다. 뜻밖에도 거기서 채옥이 남편을 만나게 되였다. 아마 그는 이름조차 남기지 않고 거액을 넣어준 고마운 사람 차문하러 다시 온것 같았다. 그런데 곱살하게 생긴 40대의 녀회계가 순철이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바로 저분이예요. 전번에 그 집 치료비에 쓰라구 돈 만원을 넣어준 분이 바로 저분입니다.” 그 소리에 채옥이 남편은 순철이를 돌아보더니 화뜰 놀라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우리 치료비를 댔다는 분이 이, 이분이라구?...”“틀림없어요. 저분이 맞습니다. 전번에는 부부 함께 오셨댔는데. 어떻게 되는 분인지 그렇게 제 집일처럼 생각합니까. 정말 조련채입니다.”“부부간이 함께 왔댔다구유? 그, 그럼 이 분이…”“아, 예…” 더는 숨길수 없는지라 순철이는 그를 보며 인사했다. “예, 박순철이라구 합니다. 우리 집사람 뜻이래서…”“이거, 이거…강철산이라 합꾸마…” 철산이는 꺽꺽거리며 뒤말을 있지 못하더니 바삐 되돌아서 나갔다. 그에게는 너무나도 청천벽력같이 느껴지는 일이였다. 자기 마누라한테 정신없이 머리를 끄댕기우고 하루건너 욕을 퍼먹는 건너편 녀인과 그 남편이 자기 안해 치료비로 이런 거금을 넣어주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채옥이네 치료비가 얼마 남지 않은것을 보고 순철이는 카드를 꺼내 만원을 긁어 채옥이 이름으로 더 넣어주었다. 재무과에서 일을 마치고 병실에 들어서니  채옥이 부부가 침대에 나란히 앉아 그를 낯선 손님 쳐다보듯 놀라웁게 이윽토록 바라보는것이였다. 아마 남편한테서 자초지종을 들은 모양이였다. 그러던 그녀가 침대에서 내려 종이 한장을 홍순이침대에 활 던졌다. “그집 돈인줄 알았더면 아예 쓰지두 않았을건데 모르구 다 써버렸으니 어쩔수 없구만. 내가 여기 돈을 꿔썼다는 쪽지를 썼으니 이후 어떻게 해서라두 갚아주겠소.” 순철이가 웃으며 그 쪽지를 그녀한테 도로 갖다주었으나 받지 않으니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그녀가 또 그 쪽지를 가지고 와 홍순이침대에 던져버렸다. 순철이는 어쩔수 없이 그것을 받아 홍순이 손에 쥐여주었다. 이튿날 밖에 나갔다 들어오던 철산이가 급급히 채옥이한테로 다가가더니 그녀의 귀에 대고 뭔가 소곤거렸다. 그러더니 그녀가 화들짝 놀라는듯 하더니 두눈이 휘둥그래지고 입이 벌어진채 이쪽을 바라보는것이였다. 남편의 입이 귀가에서 떨어졌지만 벌려진 그녀의 입은 닫혀질줄 몰랐다. 한참이나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던 그녀는 스르르 자리에 들어눕는것이였다. 그리고는 이불을 끌어당겨 머리위까지 올리썼다. 잠시후 그녀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더니 또 이쪽을 바라보는것이였다. 하지만 전처럼 먹이를 노리는듯하던 뱀의 독살스러운 눈길이 아니였다. 그녀는 끌신을 발에 꿰고 이쪽으로 건너왔다. “또 돈 만원을 넣어줘 고맙기는 하오만 이 돈은 못쓰겠소. 쓰기전에 찾아내다 돌려줄테니 그런줄 아우.” 하지만 말투는 전보다 많이 누그러졌다. 가시도 많이 빠져있었다. 아마 홍순이네가 자기를 진심으로 도우려하는 진정을 안것 같았다.채옥이가 비칠거리며 돈 찾으러 나가려 하는것을 철산이가 그녀를 붙잡아다 침대에 눌러앉혀 놓고는 귀에 대고 뭔가 한참이나 소곤거렸다. 그녀는 남편에게 설복되였는지 아니면 자기가 너무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던지 이슬이 반짝이는 눈길로 이쪽을 바라보고는 침대에 또다시 드러눕는것이였다. 점심에 순철이는 가까운 닭곰집에 전화로 닭곰을 예약하였다. 닭곰이 오는 그대로 몽땅 맞은켠 침대로 들고갔다. 채옥이가 한사코 받지 않으려 하는것을 철산이가 그것을 받아 자기들 침대머리 궤상우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처음으로 순철이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는 안해의 귀에 대고 또 한참이나 뭔가를 속삭이였다. 그녀가 더는 별소리없자 철산이는 비닐주머니를 풀어헤쳤다. 그는 아직 뜨끈뜨끈한 곰한 닭의 각을 뜯기 시작했다. 구수한 닭고기 냄새가 병실에서 감돌았다. 남편이 새하얀 살코기를 찢어 안해의 입가에 가져갔으나 그녀는 이리저리 입을 돌리며 받아먹으려 하지 않았다. 남편이 하도 지꿎게 밀어넣어서였는지. 구수한 닭고기 냄새가 누룽지에 절은 위를 자극해서였는지 아니면 홍순이네 성의가 가슴에 맞혀갔는지 결국은 닭고기를 받아물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끝내 뜨거운 눈물이 쭈르륵 흘러내렸다. 모진 세월의 재를 한벌 뒤집어 쓴 그녀는 끝내 그 싸늘한 재무지를 헤집고 감격의 불씨가 움트며 고개를 쳐든것인가. 그녀는 눈물을 이쪽에 보이지 않으려는듯 고개를 저쪽으로 돌렸다. 그후에도 순철이는 홍순의 분부대로 자주 맛있는 음식을 사다주며 그들이 되도록 누룽지를 먹지 않게 했다. 그들도 더는 거절하지 않고 그런대로 받아주었다. 이튿날 아침 맞은켠 침대의 채옥이가 아침술을 놓기 바쁘게 어디론가 사라졌다. 채옥이가 화장실로 갔는가 하여 한참이나  기다려도 종무소식이다. 점적주사를 놓으러 들어왔던 간호사도 기다리다가 투덜거리며 나가버렸다. 철산이는 말도 없이 나간 안해가 걱정되여 애궂은 두손만 마주 부비며 공연히 들락날락 했다. 점심때가 다 되여서야 채옥이는 땀벌창이 되여 병실에 들어섰다. “당신 아픈 몸으루 어데 갔다 인제 오는거야? 말두 없이…호사가 다 홰를 쓰며 나갔잖어…”“그럴 일이 좀 있어서…” 후들후들 떨려나는 다리를 한손으로 두드리며 채옥이는 고뿌를 찾아 물부터 벌컥벌컥 들이켰다.순철이가 홍순이 식사한 그릇을 들고 세면실로 나가기를 기다려 채옥이는 남편을 끌어당겼다.“이봅소. 이걸 저 김주임 베개밑에 살그머니 갖다 넣읍소…”그것은 빨간 천쪼박과 뭐라고 글씨를 쓴 종이쪼박이였다.“이게 뭔데?...”“내 아까 시내에 있는 유명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 방토를 해왔습꾸마 … 아무리 미워하던 사람두 저렇게 죽는다니…사람이사 살아얍지…우리사 맘뿐이지 어쩌겠습두…그릇 씻을라 간 분이 들어오기전에 날래 갖다 넣읍소…” 그게 무슨 소용있는 짓이냐는듯 남편이 머뭇거리자 채옥이는 어서 갖다 넣으라고 손을 홰홰 저어댔다. 철산이는 딴 사람으로 변한듯한 안해를 물끄럼히 바라보더니 어쩔수 없다는듯 그것들을 쥐여들고는 슬그머니 홍순이 침대로 다가갔다. 돌아누운 홍순이는 이불속에서 그들이 소곤거리는 소리를 다 들었으나 모르는척 시치미를 뗐다. 벼개 귀퉁이가 슬쩍 들리는듯 하더니 그녀 남편이 자취없이 물러갔다. 잠시후 홍순이가 덮은 이불이 잔잔히 떨리고있었다. 끈질기게 잡아당기던 삶의 욕망이란 끈을 활 놓아버려서인지 홍순이 상태는 하루가 다르게 못해갔다. 며칠후 홍순이는 혼미상태에 빠져들어갔다. 의사들이 달려왔다. 의사들은 자세히 진찰해보더니 순철에게 이젠 후사를 준비해야 할것 같다고 귀뜸하고는 돌아져 나갔다. 올것이 오리라는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오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하였다. 순철이는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졌다. 그는 침대머리에 다가앉으며 퉁퉁 부어있는 홍순이의 얼굴을 어루쓸었다. 의사들이 고개를 저으며 그저 돌아서 나가는것을 보더니 뭔가 짚히는것이 있어서인지 맞은켠 침대에서 점적주사를 맞고있던 채옥이가 주사바늘을 잡아빼며 와들짝 뛰여내렸다. 그녀는 홍순이의 침대머리에 앉아있는 순철이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어째 의사들이 그저 나감두?”순철이는 맥없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예? 그럼 희마이 없다는 얘깁두? 우구 이걸 어째…”그녀는 홍순이 머리맡에 다가가더니 눈물젖은 목소리로 홍순이를 불렀다. “이봅소,,,홍순이 아니…김주임…김주임…내 양채옥이꾸마. 날 좀 봅소… 눈뜨구 날 좀 봅소…”홍순이는 가까스로 눈을 뜨더니 채옥이를 쳐다보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입새에서 가냘픈 소리가 새여나왔다.“미…안…해…요…” 채옥이는 홍순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눈물을 왈칵 쏟았다. “아이구…김주임…이게 어찌된 일이우…내 방토까지 했는데두…”홍순이의 눈귀에서는 맑은것이 흘러내렸다. 홍순이는 정기없는 눈으로 순철이를 쳐다보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트렁크안에…상장과…메달들이…제가…갖구…가겠어요…” 홍순이가 시집올 때 가지고 왔던 트렁크안에 자기가 산아제한사업을 하면서 받았던 크고작은 상장, 증서, 메달들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는줄 순철이도 잘알고 있었다. 홍순이는 그것들을 일생동안 몸과 마음 다 바쳐 사업한 영광스럽고도 자랑스러운 징표로 간주하며 이사할 때마다 하나라도 빠뜨릴세라 알심들여 챙겼왔었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가겠다니. 순철이는 잘못 듣지나 않았나 하여 자기귀를 의심했다.“여보…그건 당신이 딸애한테 물려줄거라 하지 않았소?...”“이젠…필요없어요…다…태워주세요…추도회도…하지…마세요… ”순철이는 눈물을 머금으며 고개를 가벼히 끄덕이였다.“…이분 치료비를…” 순철이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렇게 눈을 감은 홍순이는 더는 혼수상태에서 깨여나지 못한채 이튿날 오전 열시경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현, 지구, 성과 전국의 산아제한사업모범이 변강민족지구의 한 병원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평생 선진과 모범의 월계관을 떠이고 꽃다발속에서 가슴뿌듯이 살아왔던 홍순이는 60이 청춘이라 하는 글로벌시대에 60도 채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곁에서 채옥이가 륜기인양 넉두리를 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운명할 때 그의 곁에는 그의 뒤시중을 평생 들어줬던 남편 순철이와 그한테 끌려가 류산당했던 채옥이밖에 없었다. 채옥이곁에는 류산후유증과 몰래 넣은 피임환때문에 하루도 번한 날이 없이 30년간 병마에 시달려온 안해를 보살펴온 허리 구부정한 남편 철산이가 서있었다. 장백산기슭 해란강반에 그처럼 널리 울려퍼졌던 이름난 모범이라 해도 그의 죽음은 보통사람과 다름없이 쓸쓸하고 적막했다. 그제날의 영광과 칭송은 해란강 물결따라 동해로 흘러간지 오랬다. 순철이가 종이끝이 보이는 꼭 쥐여진 홍순이의 오른손을 펼치니 찢겨진 종이쪼각들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채옥이가 돈을 꿔썼다는 증거로 던져준 종이였다. 떨리는 손으로 눈에 익은 종이쪼박들을 주어들고 보던 채옥이는 그만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아이고 김주임…이것두 갖구 갈라구 그랬수?...말은 텁게해두 속으론 아슴채서 쓴건데…내 미쳤지…지난 일을 두구…다 죽는 사람과 앙갚음은 무슨 앙갚음이였겠수…죄는 미워해두 사람은 미워하지 말랬는데…” 채옥이는 친동기를 잃은듯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마구 쳐댔다.나많은 간호사가 들어와 순철이네를 도와 홍순이의 유체를 렴습하였다. “떠나보내기전에 혼을 불러야 한다는데 어떻게 부르는지…”그 말에 호사가 제꺽 동을 달았다.“병원안에 돈을 내면 대리로 불러주는 사람 있어요…”이때 어깨를 들먹이며 렴습을 거들어주던 채옥이가 막아나섰다.“…흑…흑…혼을 어떻게 싻을 내 부르게 함두?... 마지막 가는 길이사 기래두 가까운 사람들이 불러얍지.” 채옥이는 남편을 돌아보았다. “이봅소…영자아부지…당신 혼을 부를줄 알재임두…당신  좀 부릅지비…” 눈물을 머금고 서있던 철산이는 아무말없이 홍순이의 옷을 찾아들고 창문턱에 올라섰다. 그는 창문을 활 열어제꼈다. 그리고는 창문밖으로 홍순이의 옷가지를 휘여휘여 내저었다. 그는 홍순이의 이름 석자를 또박또박 소리높이 웨쳤다. “김ㅡ홍ㅡ순ㅡ”“여호ㅡ여호ㅡ여호ㅡ”“복, 복, 복” 그는 친인의 혼을 부르듯 목이 메여했다. 열려진 창문으로 갑자기 이름모를 새 한 마리가 포르릉 날아 들어왔다.  새는 날개를 파득거리며 병실을 한고패 돌고는 도로 창문으로 포르릉 빠져나갔다. 그것이 홍순이의 혼인가. 그녀의 혼이 하늘로 올라가는지 땅으로 들어가는지 알수 없었다. 연변문학 2010년 제4호  
13    [중편]진혼곡(해후)4 댓글:  조회:999  추천:44  2010-07-26
중편소설               진혼곡(해후)                                                         허룡석                            4     채옥이의 행악질을 당한후부터 홍순이는 몰라보게 유순해졌다. 입에도 빗장을 지르고 있었다. 전처럼 트집도 부리지 않았고 짜증도 내지 않았다. 음식도 좋다궂다 타발이 없었다. 전에는 심심하면 책이나 잡지를 들고 들여다보기도 했으나 이젠 점적주사를 맞으나 안맞으나 두눈을 감고 조용히 누워있기만 하였다. 사실 홍순이는 요사히 많은것을 사색하고 있었다. 평온하기만 하던 홍순이 가슴에서는 지금 오그랑팥죽이 벌렁벌렁 끓고있었다. 웬지 눈만 감으면 수없이 날려오던 지난날의 꽃다발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전에없이 만사람의 눈길이 창끝처럼 날아와 가슴에 박히고 만사람의 주먹이 우박처럼 날아와 제 몸을 진창으로 만들군 했다. 꿈속에서도 숱한 아기원혼들이 달려들어 자기의 가죽을 발라내고 자기의 뼈를 갉아먹군 하였다. 그는 몇번이나 꿈속에서 소스라쳐 놀라 깨여났다. 그때마다 온 몸은 땀으로 흥건했다. 따져보니 이러한 원혼들이 이 민족지구에서 이미 몇차례 떠돈것 같았다. 반우파 투쟁때에는 숱한 민족인테리들의 원혼이 떠돌았고 3년재해시기에는 헤아릴수 없는 남녀로소의 원혼들이 떠돌았었다. “문화대혁명”때에는 수많은 민족간부들의 원혼이 떠돌았다. 그런데 지금은 빗나간 산아제한으로 하여 숱한 민족아기들의 원혼이 떠도는것이 아닌가. 사실 홍순이도 우리 민족 인구가 마이너스성장을 가져오고 많은 민족학교들이 문을 닫게 되면서부터 자기가 지난날 그처럼 빈틈없이 산아제한사업을 해온것이 과연 잘한 일인가를 되새겨보기도 했었다. 그러다도 이는 자기와 무관한 일이라고 스스로  위안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채옥이를 만나고 채옥에게 행악질을 당한후부터 스스로 자기를 위안해왔던 마음의 방선이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내렸던것이다. 자기때문에 채옥이처럼 평생 고통받으며 살아온 우리 민족 녀성들이 어찌 그 한사람뿐이랴. 그처럼 선량하고 순진하며 성실하던 평안촌의 금자엄마, 생금엄마도 부인병으로 숱한 고통을 겪다가 벌써 저세상사람이 되였다지 않는가. 지난날 자기 한사람 손에서 죽어간 우리 민족 애들만도 수천수만에 달하는데 변강민족지구에서 자기와 같이 맹종했던 “모범”이 열명, 백명, 천명이였다면 그런 “모범”들 손에서 죽고 사라진 우리 민족 애들은 그 얼마였을가. 그때 정책 허용범위내의 그 애들이 모두 태여났더라도 우리 민족은 지금처럼 인구 마이너스 성장을 가져오지 않았을것이 아닌가. 숱한 학교들이 문을 닫고 돼지치기를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아무리 출국바람이 불고 민족적 대이동이 생겨도 총체적 민족인구는 줄어들지 않았을것이다.  태여날수 있는 아이들도 태여나지 못하게 하여 나라에 좋은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민족에게는 영원히 용서못할 천고의 죄를 지은것이였다. 산은 금을 냄으로써 파헤쳐지게 되고 나무는 벌레를 끼게 하여 파먹히게 된다더니 한 민족도 자기가 저지른 죄가로 자신이 크게 다치게 되지 않았는가. 당원으로서, 간부로서 그때는 아이를 적게 낳게 할수록 당의 말을 잘 듣는줄로 알았고 나라의 기본국책을 잘 따르는줄로 알았다. 그런데 나보다 정책을 더 잘 알수 있은 상급간부들은 왜 그렇게 하라고만 등을 밀어댔지? 남에게 던진 욕이 자기 명예를 치고 남에게 던진 돌이 자기 숫구멍을 친다고 할 제 숱한 녀인들과 어린애들의 목숨을 앗아간 자기같은 살인녀는 무슨 징벌을 받아야 할가. 죄를 지어 30년이면 그 보응이 따른다더니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이미 소금에 절인 부추가 되여 밭에 다시 돌아갈수 없을바에는 일찌감치 땅속깊이 묻혀 좋은 비료가 되여 새로운 부추의 성장을 돕게 하는것이 하느님의 명지한 징벌이겠지. 눈속에 파묻힌 시체는 눈이 녹으면 자연히 드러나는 법이라더니 시간이란 녹딱지가 자기몸에서 서서히 떨어져 나가니 험상궂은 자신의 몰골이 환히 들여다 보이는듯 했다. 뼈아픈 경험은 훌륭한 스승이라지만 치른 학비는 너무도 엄청났다. 자기가 치른 학비보다도 민족이 낸 대가가 되돌릴수없이 처참했다. 인생이 갑자기 흐릿해 보일 때가 있다더니 자기가 이젠 어디로 가야하나 하고 묻는 순간을 맞게 되지 않았는가. 삶이 돌연 중단되는 순간 지금까지 자기가 가고있다고 생각했던 곳이 하나의 아물아물한 신기루로 되여버리지 않는가. 반우파투쟁때와 대약진, 인민공사화 운동, “문화혁명”때에 우에서 하라는대로 했다가, 아니 그보다 더 창발적으로 더 열광적으로 했다가 많은 잘못을 저질러 나중에 후회로 가슴을 쥐여뜯던 우리 민족 간부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데 몇십년후에 내가 그들의 전철을 밟아 이처럼 후회하고 통탄하는 일을 또다시 저지르게 될줄 꿈엔들 생각했겠는가. 그는 문득 한가지 일이 떠올랐다. 산아제한사업에서 돌출한 성과를 따낸 그는 80년대초에 성과 지구를 대표하여 전국산아제한사업경험교류회에 참석한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성을 대표하여 대회에서 격정드높이 경험소개를 하였었다. 전국 5개 민족자치구, 30개 민족자치주에서 그는 유일하게 대회에서 경험소개를 한 소수민족지구의 소수민족간부였다. 그의 경험소개는 많은 간부들의 박수갈채를 받았었다. 그런데 오후에 있은 토론회에서 중앙 어느 과학원의 인구학을 전문 연구한다는 로학자 한분이 반기를 들고 나설줄이야. “우리 나라는 다민족국가입니다. 전국에 55개 소수민족이 있는데 소수민족 지구마다 상황이 부동합니다. 소수민족지구의 인구수, 인구분포정황, 자연생존조건, 사회경제발전정황 등 구체실정에 따라 산아제한정책을 령활성있게 집행할수 있지요. 당에서 제창하는 산아제한은  주체민족인 한족을 위주로 하는것이지 인구가 적은 소수민족을 상대하는게 아닙니다. 소수민족에 대한 당의 산아제한정책은 인구 천만명이하되는 소수민족은 아이 둘을 낳을수 있으며 인구가 더 적은 민족은 셋도 낳을수 있고 넷까지도 낳을수 있습니다. 조선족인구는 지금190만 정도이니 우리 나라 소수민족중 인구수가 중등수준에 속하는 민족이지요. 그러니 조선족은 정책에 따라 도시에서는 아이 둘씩 낳을수 있고 농촌에서는 아이 셋도 낳을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인구가 많지 않은 조선족도 10억이 되는 한족과 마찬가지로 꼭 아이 하나씩만 낳게 한다면 인구가 급속도로 줄게 되여 장차 20년후에는  인구가 마이너스 성장을 가져오게 됩니다. 인구가 적은 민족일수록 마이너스성장이 가속화됩니다. 한 민족의 인구증장률이 한번 마이너스선에 이르게 되면 그 회복기가 상당히 오랜 시일이 걸리게 됩니다. 이는 당과 정부에서도 제창하는것이 아닙니다. 변강민족지구에서 이런 엄중한 후과를 고려해 보신적이 있는지요.?” 그 로학자는 홍순이가 소개한 경험가운데의 일부 관점과 작법들을 사정없이 비판하였다. “산아제한정책을 실시함에 있어 소수민족들에게는 먼저 당의 민족정책을 구체적으로 잘 설명해준 토대우에서 자원의 원칙에 따라 소수민족 스스로 선택하게 하여야 합니다 이를테면 소수민족은 아이 둘씩 낳을수 있을 뿐만아니라 특수 정황하에서는 셋도, 넷까지 낳을수 있다는 정책을 말입니다. 이래야만 당과 정부의 따사로움이 제대로 소수민족들에게 전해질수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만일 당의 민족정책을 덮어감추고 아이 하나씩만 낳게 하는것이 당의 산아제한정책이라고 한다면 이는 당의 산아제한정책을 외곡하는것으로 됩니다. 아까 김주임의 경험소개를 들을라니 산속에 숨어들어간 소수민족부녀까지 찾아내여 류산시켰다고 들었는데 이는 아주 타당하지 못한 작법이라 생각됩니다. 지어 아주 착오적인 작법입니다. 소수민족 지구에서 그렇게 강제로 류산당했거나 인공류산당한 사람들 또 그 가속과 친척들이 당과 정부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수 있겠습니까. 당의 각급 간부들에 대한 믿음이 갈수 있겠습니까? 이는 선전사업을 위주로 하고 경상적 사업을 위주로 하며 피임을 위주로 하여야 한다는 중앙의 “3위주”정신과도 어긋나는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지방당위위신을 수호하고 자기사업성과를 보호하기 위하여 그때 홍순이는 이렇게 당돌히 대답했었다. “학자님의 조언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당과 정부에서 소수민족을 관심하고 배려할수록 우리 소수민족들은 자태가 높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체민족인 한족이 아이 하나씩 낳는데 같은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으로서 우리 소수민족이라고 왜 아이 둘씩 낳겠습니까? 그것도 문화가 가장 발달한 민족이라는 조선족말입니다. 우리 조선족은 당과 정부의 지시라면 무조건 발벗고 나서는 우량한 전통이 있습니다. 항일전쟁때도 그랬고 해방전쟁때도, 항미원조때도 그랬습니다. 하기에 우리 변강민족지구 조선족들이 살고있는 마을이면 촌마다에 렬사비가 우뚝 세워져 있습니다. 그 속에는 항일을 위하여, 공화국창립을 위하여, 보가위국을 위하여 희생된 수천수만 우리 민족의 우수한 아들딸들이 고히 누워있습니다. 이는 전국의 소수민족지구에서 우리 변강민족지구에서만 볼수 있는 혁명적 경관입니다. 이는 또한 우리 민족의 대대손손 전해내려오는 크나큰 자랑이기도 합니다. 력사적으로도 이처럼 훌륭한 혁명전통을 가지고 있는 우리 민족이 나라의 기본국책으로 되여있는 산아제한사업에서라고 뒤져서야 되겠습니까. 학자님의 관심과 걱정은 감사합니다만 우리 민족의 공산주의적사상각오와 나라에 충성하는 드높은 민족적 책임감을  깊이 믿어주셨으면 합니다. 우리 조선족은 산아제한사업에서도 나라의 큰 국면을 돌보면서 견결히 대정방침을 집행해 나갈것입니다. 우리는 소수민족이라 하여 나라의 혜택만 받을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라의 부담을 함께 떠메고나가는 나라의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해 계속 노력할것입니다.“ 홍순이는 지금 그때가  어이없었다. 그때 한참이나 자기를 물끄럼히 바라보던 그 로학자의 웅숭깊은 속뜻을 인제야 알것 같았다. 정책이 뭔지도 모르고 열광에 들떠 덤벼치는 자기가 얼마나 한심하고 안타까왔으면 그런 눈길로 자기를 그렇게 바라보았겠는가. 원인은 숨겨져 있었지만 결과는 그때 이미 알려져 있은것이였다. 그 로학자는 그때 벌써 20년후의 우리 민족의 비참한 운명을 내다보고 있었던것이였다. 돌이켜보니 그때 당보에 실렸던 그 보도기사가 옳았단 말인가? 당시 지구내 많은 지방에서 덮어놓고 어린애 하나씩만 낳도록 강요하는 바람이 불어 기자가 예민하게 문제점을 보아내고 그런 기사를 발표한것이였는가? 그 보도기사가 옳았다면 왜 그대로 집행하지 않고 후에도 계속 아이 하나씩만 낳도록 관철하게 했겠는가. 과연 아름드리 버드나무 가지를 치라는건데 도끼를 잘못 휘둘러 곁에 있던 팔뚝사리 뽕나무가 중대가리 된 꼴이 되였단 말인가? 그때 토론회를 사회하던 조장이 홍순이 답변을 듣고 좌우를 둘러보며 이렇게 엄숙하게 말했었다.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이라면 누구든지 나라의 기본국책을 관철집행할 의무가 있습니다. 변강민족지구에서 온 김주임의 말씀은 원칙성과 당성이 아주 강한 훌륭한 답변입니다. 저 분은 전국산아제한사업에서 소수민족간부의 우수한 전형이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조선민족의 우수한 사상성과 변강소수민족지구 간부들의 드높은 당성을 따라 배워야 합니다. 전국의 산아제한사업을 틀어쥐는 간부들이 모두 김주임처럼 국가와 민족간의 모순을 정확히 처리하면서 원대한 리상을 안고 책임성있게 사업을 밀고 나간다면 우리 나라의 산아제한사업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것입니다”. 그 회의에서 돌아온후 얼마 안되여 홍순이는 지구산아제한판공실주임으로 전격 발탁되였다. 조직의 관심과 배려에 홍순이는 가슴이 후더워났다. 그는 공사와 현에서 하던 경험을 부단히 총화하며 변강민족지구 산아제한사업을 줄기차게 밀고나갔다. 믿음은 사람들이 비범한 능력을 발휘하게 할수있는 촉매제라 했던가. 믿음은 용감한 행동과 영웅적 행위를 창조해 낸다고 했던가. 믿음은 상상력을 풍부히 하고 비상한 지혜를 발휘하게 한다고 했던가. 하지만 그 믿음자체가 삐뚤어진 믿음일 경우 그 믿음으로 하여 발휘된 열성과 행위와 지혜가 당과 정부의 형상에 먹칠하고 자기 민족에게 끼친 악과는 무엇으로 미봉할수 있단말인가. 썩 후에야 정책적으로 삐뚤어진줄 알고 시정을 했으나 그것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였다. 사람들이 기를 쓰고 아이를 낳으려 할 때에는 기를 쓰고 못낳게 막았다가 이젠 두번째 아이를 낳으십사해도 거의 낳으려는 사람이 없었다. 때로는 가장 나쁘던것이 가장 좋은것일수도 있고 가장 좋던것이 가장 나쁜것 일수도 있다더니 그제날 자기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던것이 력사의 고험을 이겨내지 못하고 오늘날에 와서는 가장 나쁜것으로 돼버리지 않았는가. 처지의 조화란 때때로 한번씩 방향을 돌려놓아 인간의 운명을 또 하나의 숙제로 바꾸어놓기를 좋아하는지 모르겠구나. 호ㅡ, 버둥거릴 때는 사납기가 이를데 없다도 또 꺾이려고 들면 한정없이 약해지는것이 녀자의 마음일가. 그때 자기와 함께 이름을 날렸던 녀모범들을 하나하나 손꼽아보니 가정적으로 행복했던 사람들은 별반 없었던것 같았다. 옳든그르든 잘한다고 춰주는 통에 하늘 절반이 아니라 옹군 하늘을 떠멜듯이 날뛸수록 가정은 불행해졌고 남편도 자식도 행복하지 못했던것이였다. 거의 모두가 나처럼 자애로운 어머니가 되지 못했고 살뜰한 안해가 되지 못했다. 이제와서 보니 그때 그 모범들이 애뜻한 가정의 재미를 잃어갈수록 모든 정력을 혁명에 몰붓는것으로 정신적 위안을 찾으려한것 같았다. 또 그럴수록 선진과 모범이란 월계관도 더 많이 날아든게 아니였겠는가. 그때는 그래도 혁명하느라고 그럴수 밖에 없었다고 스스로 자신을 위안했는데 이제와서 알고보니 결국은 제민족에게 죄를 짓는 짓거리로 가정도 자식도 돌보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그만 억장이 무너져내렸다. 쾌락은 이따금씩 찾아오는 방문객이지만 고통은 잔인하게 나한테 매달려 떨어지지 않는구나… 생각이 많아질수록 홍순이는 깊은 죄책감에 빠졌다. 치료에 대한 욕심도 사라져갔고 삶의 의욕도 멀어져갔다. 그러니 자연 도고하던 자태도 밥물 잦아들듯 했고 해해년년 찧고쫏으며 멋들어지게 장식해왔던 화려한 모범적 틀도 망가져 내려앉았다. 그래서인지 해당 지도간부들이나 단위직원들 그리고 친척, 친우들이 병문안을 와도 홍순이의 정서가 전과 같지 않았다. 동서들과 시누이들이 순철이를 대신해 륜번으로 시중을 들려해도 모두 밀어보냈다. 홍순이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사라져갔다. 그의 그러한 정서가 문안오는 사람들에게 근심과 걱정을 더해주었다. 맞은켠 녀인의 행악질을 당한후부터 꿈결에서도 화뜰화뜰 놀라 깨여나고 갑자기 이상하게 유순해지는 홍순이가 순철이는 저으기 걱정되였다. 밥 먹을 때에도 료리가 입에 맞느냐고 우정 말을 걸어보아도 묵묵부답이다. 식사가 끝난후에는 조심스레 그의 손에 책이나 잡지를 쥐여줘도 말없이 도로 내려놓군 하였다. 그의 머리맡에 앉아 재미있는 이야기로 흥을 돋구어도 그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간호사가 좀 늦게 와 주사를 놓아도 더는 닦아세우는 일이 없었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일가? 자존심이 크게 손상받아서일가? 아니면 자기 병정황을 알아서일가? 아무튼 홍순이는 많이 달라져갔다. 이쪽에서는 그러든말든 저쪽침대의 녀인은 수시로 시퍼렇게 날이 선 눈길을 날려왔다. 순철이는 그러는 그녀와 시비라도 한바탕 캐고싶도록 아니꼬왔지만 그래도 세상물정을 좀 안다는 도시신사가 높고 낮음을 모르고 제멋대로 날뛰는 농촌아낙네를 사정없이 쪼아놓을수도 없는 일이였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하루는 간호사가 들어와 고급간부병실의 수리가 끝났으니 홍순이네가 그쪽으로 옮겨갈수 있다고 전해왔다. 그 말을 들은 순철이는 큰 짐이라도 부리운듯 숨이 활 나왔다. 오늘에라도 당장 그쪽에 옮겨가 날마다 병아리 채가려고 노리고 앉아있는 독수리같은 맞은켠 녀인을 보지 않아도 홍순이 정서가 많이 나아질것 같았다. 오후 느지막해 홍순이가 맞던 점적주사를 떼내자 순철이는 서둘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홍순이가 순철이 손을 조용히 잡았다. 그리고는 가느다란 소리를 뽑아냈다. “옮기지 말자요.” “뭐요? 옮기지 말자니?...” “그냥 여기 있자요.” “여기 어떻게 그냥 있는다구 그래오. 한시라두 빨리 옮겨가야지.” 순철이는 건너 침대를 흘끔 바라보며 볼부은 소리를 했다. “전…여기가 좋아요.” 홍순이는 오래간만에 가벼운 미소를 띠였다. “뭐요? 여기가 좋다구?” 순철이는 의아한 눈길로 홍순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행악질당하고 날마다 살기띤 눈총을 받으면서도 여기가 좋다구? 이 사람 뭔가 잘못된게 아닌가? 순철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리해되지 않았지만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사람과 언성을 높일수도 없었다. 별수없이 꿍지려던 짐들을 헤쳐 도로 제자리들에 가져다 놓았다. 이튿날저녁녘에 간호사가 들어와 맞은켠 침대에 입원한 녀인을 보고 말했다. “재무과에서 전화왔는데 이제 이틀후면 입원비가 다 떨어진다고 합니다. 빨리 집에 련락하여 래일로 입원비를 보충하도록 하세요.” “뭐유? 들어올 때 5천원 넣었는데 그 돈이 벌써 다 떨어진담두?” “지금은 초시작이여서 그렇지 다음부터는 하루에 천원두 넘어들어갈거예요.” “뭐, 할날에 천원씩이나? 그럼 쌀을 몇마대 팔아야 하는건데?” 간호사는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듯 들은척도 안하고 휑하니 나가버렸다. 그들 내외는 억이 막히는지 두눈이 데꾼해서 서로 마주 쳐다보고 있었다. “이걸 어쩜두? 어디 가서 그 많은 돈을 꿔옴두?” “글쎄…” “이젠 이만 치료했으문 됐습지 우리 내일 나가겝소..” “치료가 이제 시작이라는데 나가문 어쩌자구. 내 나가 친척들한테 전화를 쳐볼게.” “친척들두 다 구차한게 뉘네 그렇게 큰돈 뀌여주겠슴두.” 그녀 남편은 전화치러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멍하니 침대에 앉아 흐릿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창문밖의 몇십년 묵은 버드나무우에서 까마귀가 아침부터 청승맞게 까욱까욱 울어댔다. 이윽하여 그녀의 남편이 들어왔다. “어찌 됐슴두?” 녀인이 다급히 물었다.” “딸애한테 내 동생한테서껀 여러 곳에 전화를 걸었는데 모두 좀 바빠하는것 같은데…아무래두 래일 당장은 될것 같지 않구먼…” “청도에 가 일하는 딸애한테는 왜 전화했슴두. 이젠 걔들 돈 얼마를 썼는데. 걔들두 빚꾸레 나앉게 만들겠슴두?” “래일 큰 조카한테서껀 당신 사춘언니한테서껀 다시 전화를 걸어볼게.” “친척이라는게 다 구차한 촌사람들인게 누군들 돈이 있어 생각처럼 훌훌 내놓겠슴두. 한국 나가 돈 벌었다는 집들두 시내에 집들을 사놔서 남아도는 돈이 있겠슴두. 그만둡소. 낼 우리 나가겝소. “나가긴 어딜 나간다구 그래. 의사가 지금 치료할 때 바싹 잡줴야 한다구 하잖았소.” “그럼 어쩝두? 내땜에 애들 거지 만들겠슴두?” “정 안되문 또 남은 쌀이라두 팔아야지.” “쌀을 얼매나 팔문 치료비 되겠슴두…” 그녀남편도 다른 방도가 나지 않는지 침대에 걸터앉아 한숨만 내쉬였다. 자그마한 병실안이라 그들이 하는 의논을 이쪽에서 듣지 않을수가 없었다. 홍순이의 머리를 사정없이 끄당겨놓은 후부터 그들을 늘 아니꼽게만 보아오던 순철이였지만 그들이 하는 의논소리를 듣고는 그들의 가긍한 처지에 저으기 동정이 갔다. 치료비를 이어대지 못하면 래일에라도 당금 나가야 할 사람들이 아닌가. 그러면 생사가 어찌될지 알수 없는 일이였다. 의료보험카드를 내들고 치료받는 국가간부들보다 아직도 농촌 농민들의 처지가 많이 어려운것 같았다. 그들은 이쪽의 눈길을 의식했는지 이마를 맞대고 뭔가 수군수군하더니 함께 어디론가 나갔다. 그러자 자는것 같이 두눈을 감고 조용히 누워있던 홍순이가 슬그머니 상반신을 일으켜 그들 침대쪽을 바라보더니 순철이를 쳐다보았다. “동무도 저들이 의논하는 소리를 들었지요?” “당신 안 자구있었던거요?”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인가요? 우리가 좀 도와주면 안될가요?” “뭐요? 당신이 그렇게 괄세를 당하구두 저들을 도와주자구?” “그럴 리유가 있었어요. 사실 잘아는 사람들이였는데…후에 말씀드릴게요. 우리가 도와주지 않으면 당장 돈 나올데가 없는것 같지 않아요. 살점이라곤 없는 분이 매일 가마치를 물에 퍼지워 자시는걸 보세요. 우리 치료비 한 만원쯤 대주면 안될가요?” “뭐요? 만원이나?” “저는 의료보험카드로 치료받으니 괜찮아요. 저 아주머니네는 현금이 없이는 안되잖아요. 저들을 좀 살려줍시다.’ 순철이는 애원에 가까운 홍순이 눈길을 바라보고는 더 뭐라고 할수 없었다. 보아하니 그들사이에는 뭔가 확실히 말못할 사연이 있는것 같았다. 그렇찮으면 단순한 동정에서 자기에게 행패질해대던 사람한테 단번에 그런 거금으로 도와나서려 할수 있겠는가. 남편이라고 믿고 하는 소리일테니 앞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수 없었다. 순철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였다. “고마워요, 카드를 갖고 있지요? 지금 저와 함께 재회과로 가자요…” ‘아니, 내 가서 넣어주지. 당신 그 몸으루 어떻게…” “아니예요. 제손으로 넣어드리고 싶어요.” 홍순이는 머리를 쓰다듬어 올리고 나들이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는 순철이의 부축을 받으며 침대에서 내렸다. 그들 둘은 함께 재무과로 갔다. 홍순이는 순철이가 넘겨주는 카드를 받아들고 자기손으로 만원을 긁어 채옥이의 이름으로 치료비를 넣어주었다. “이 돈이 다 떨어지면 동무가 더 넣어주세요…” 순철이는 홍순이를 물끄럼히 바라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이튿날 이른아침에도 잠을 설쳤는지 날샌 올빼미마냥 거부시시한 맞은켠 부부는 어두운 얼굴로 뭐라고 수군거리더니 남편이 또다시 밖으로 나갔다. 치료비문제가 그냥 잘 풀리지 않는 모양이였다. 아마 또 친척들한테 전화치러 나간것 같았다. 근심에 쌓여 침대에 앉아있는 녀인은 안절부절 못하며 공연히 이것저것 쥐였다 놓군 하였다. 홍순이는 자는척하며 그녀의 일거일동을 지켜보았다. 한참후 채옥의 남편이 들어왔다. 그는 굳어진 표정으로 안해를 바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전화 칠만한 곳에는 돌아가며 다 쳤는데 잘 안되는구먼.” “이젠 더 전화치느라구두 말구 아예 나가겝소. 집에 가서 약이나 사먹습지 어쩌겠슴두.” “그저 약방약이나 사먹어 될 병이문 당장 입원하라 했겠소. 정 안되문 오후에 나가더라두 방법을 좀 더 곰곰히 생각해 보기오.” 8시쯤 되자 간호사가 점적주사병이 담긴 손잡이밀차를 밀고 들어와 홍순이의 팔에 주사침을 꽂았다. 날마다 간호사가 들어와서는 홍순이와 그녀에게 함께 점적주사를 놓군 하였는데 오늘은 홍순에게만 놓고 간호사는 돌아나갔다. 아마 치료비때문에 그녀에게는 놓아주지 않는것 같았다. 자기에게는 주사를 놓기는커녕 문안 한마디 없이 나가는 매정한 간호사를 물끄럼히 바라보던 그녀는 깊은 한숨을 후 내쉬였다. 그리고는 부러운듯 평온히 누워 점적주사를 맞는 홍순이쪽을 바라보고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런 기분에 더 앉아있을수 없었던지 침대머리에 앉아 턱을 고이고있던 그녀의 남편이 벌떡 일어서더니 또 휑하니 밖으로 나갔다. 남편이 나가자 그녀는 벌떡 일어나 앉아 뭔가 궁리하는것 같더니 갑자기 물건들을 주어모아 꿍지기 시작했다. 한참후 그녀의 남편이 들어왔다. 그는 짐을 꿍지는 안해를 멍하니 바라볼뿐 말리지 않았다. 그도 치료비를 이어댈 상황이 못됨을 알고 실망한것 같았다.  녀인은 흐느끼며 침대우에 낡은 보를 펴놓고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주섬주섬 걷어쌌다. “지금은 돈이 없으면 죽었지 별쉬 있슴두. 아매두 죽기는 매일반인데 애한테 빚더미는 남기지 말아얍지…” “후…별쉬없구만, 내 가서 결산하구 올게.” 그녀의 남편은 안해를 측은히 바라보고는 고개를 뚝 떨구며 밖으로 나갔다. 그의 허리도 들어올 때보다 훨씬 더 휜것 같았다. 입원비를 이어대지 못해 출원하자고 보니 자기를 이 꼴로 만들어놓은 홍순이가 저쪽에 태평스레 누워 점적주사를 맞는것이 볼수록 원통하고 괘씸했다. 또다시 분통이 발칵 터진 그녀는 벌떡 일어나 건너침대로 다가갔다. “야, 이년아. 숱한 안까이들 초를 해놓구 네년은 이렇게 호강하느냐? 오냐…그래 콱 맞아봐라…네년이 제명에 죽는가 어디 보자…귀신두 자불구만 있지 않을게다…” 곁에 앉아 잡지를 번지작거리던 순철이가 벌떡 일어서며 또다시 전쟁의 불길을 몰아오려는 그녀를 말려냈다. “왜 또 이러십니까?...” 홍순이는 말없이 주사침을 잡아뽑더니 이불을 머리위까지 끄당겨 올렸다.  이때 주눅이 들어 나갔던 그녀의 남편이 문을 벌컥 열고 젊은이들마냥 날파람일구며 달려들어왔다. 그는 순철이한테 밀리우면서도 가만히 누워있는 홍순이에게 삿대질을 하며 욕설을 퍼부어대는 마누라를 보더니 화뜰 놀랐다. “당신 미쳤어? 정말 왜 이래?” 남편은 고개를 뒤로 돌려 계속 욕설을 퍼부어대는 안해의 손목을  잡아끌고 복도로 나갔다. 그는 소리를 죽려가며 말했다. “당신 다 죽어가는 사람과 왜 또 그래? 이제 한두달 살지두 모를 사람과…” “뭐...뭐이람두?...” “그 사람 자궁암 말기래서 수술두 못하구 죽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래…” “예?...” 채옥이는 그만 석고상마냥 그 자리에 굳어졌다. “그리구 우린 가지 안아두 되겠소. 치료비 들어왔다는구만.” “뭐이람두?...” 우묵하게 꺼져들어간 채옥이의  두눈이 화등잔만해졌다. “이재 결산할러 재회에 갔더니 어제저녁에 누군가 돈 만원을 넣구 갔다오.” “예, 그것두 만원이나? 에구, 고맙기두 해라.” “그저 도와주구 싶은 사람이라면서…그 돈이 다 떨어지면 또 돈을 넣어주겠다며 치료비 근심은 하지 말구 치료 잘하라며 가더라우.” “에구 고맙기두 해라. 세상에 이런 고마운 사람 다 있담두?” “그것보우, 세상에는 그래두 맘좋은 사람 많단데. 당신두 그맘 비우라구. 지나간 일을 너무 속에 넣어두구 그래지 말구…저 사람두 그때 책임이 아니문 무슨 그렇게 했겠소…” 절망의 눈물을 훔치며 데친 시래기꼴이 되여있던 그녀는 금시 기분이 돌아서 이번에는 기쁨의 눈물, 고마움의 눈물을 흘렸다. 돈이 만능인가. 잠시후에는 간호사가 들어와 웃음띤 얼굴로 그녀에게 점적주사를 놓아주었다. 방금전까지만도 인정머리 없어보이던 간호사를 아니꼽게 쳐다보며 앙상한 팔을 불쑥 내미는 그녀는 여느때보다 당당했다. 그녀의 갸냘픈 얼굴에는 홍조가 어렸다. 아니. 삶의 생기가 넘쳤다. 그러는 그들을 훔쳐보다가 홍순이는 슬그머니 돌아누웠다.(계속) 연변문학 2010년 제4호
12    [중편] 진혼곡(해후)3 댓글:  조회:894  추천:43  2010-07-22
  중편소설 진혼곡(해후) 허룡석   3 경임이는 여러모로 수소문하여 양채옥이가 하룡 룡지마을 사촌언니집에 피신가 있다는 확실한 소식을 알아냈다. 경임이는 그 길로 홍순에게 전화로 알렸다. 홍순이는 이 정황을 공사당위 리서기에게 회보했다. 전 공사적으로 류산을 피해 숨어다니는 임신부들이 적지 않음도 곁들었다. “그런 임신부들을 모조리 찾아들여야 하오.  말로 해서 안될 때는 과단한 조치가 따라서야 하오. 이번 단속에 한사람이라두 새서는 안되지. 사반기업 차를 내줄테니 동무가 직접 가서 그 임신부를 찾아오오.. 가만, 내가 파출소 오소장한테 전화를 할테니  경찰 한사람 데리고 가오.” “군중사업인데 경찰을 데리고 가는게 합당하겠어요? 제가 평안대대 부녀주임과 같이 갈려 하는데요.” “여자 둘만 가서 되겠소? 경찰을 데리고 가오. 당의 계획생육정책을 어기는 사람한데는 인민독재의 무서움도 보여주어야 하오.” 이튿날 이른아침 홍순이는 파출소의 성이 구씨라는 꺽다리경찰과 함께 사반기업자동차를 타고 룡지로 떠났다. 그들은 가는 길에 평안촌에 들려 경임이를 싣고 함께 떠났다. 홍순이네 일행은 룡지대대가 속해있는 하룡현 동산공사로 먼저 찾아갔다 그들은 공사서기를 찾아 본 공사에 온 용건을 간단히 말하며 소개신을 꺼내보였다. 공사서기는 소개신을 보더니 공사부련회주임을 불러 홍순이네 사업을 협조하게 하였다. 부련회주임은 먼저 룡지대대에 전화를 걸어 오전에 룡지에 내려가 처리할 일이 있으니 당지부서기와 부녀주임이 대대사무실에서 대기하고 있도록 해달라고 통지하였다. 동산공사 부련회주임의 안내로 그들 일행은 함께  룡지대대로 떠났다.  룡지대대에  이르러보니 일밭에 나갔던 당지부 박서기와 부녀주임이 통지를 받고 대대사무실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지 부련회주임이 박서기네한테 홍순이 일행을 소개하고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그들은 곧장 채옥이가 와있다는 사촌언니 집으로 갔다. 그 마을 부녀주임이 앞장서 길안내를 했다. 채옥이의 사촌언니네 집에서는 낯선 사람들이 대대당지부 서기와 부녀주임 그리고 낯모를 사람들과 경찰까지 합세해 들이닥치자 모두들 그만 깜짝 놀라했다. 채옥이가 살고 있는 공사의 간부들이 산아제한정책을 위반하고 이곳에 피신해 와있는 채옥이를 찾으러 왔다는 소리에 사촌언니는 꺽꺽거리며 말도 바로 번지지 못했다. 경찰까지 따라 온걸 보면 그저 일 같지 않았다. 그러잖아도 어제아침  채옥이 남편이 대대사무실에 전화를 쳐와 사촌언니를 찾았던것이였다. 전날 공사간부들이 자기집에 와서 영자엄마를 찾았는데 자기가 말말중에 말이 빗나가 공사간부들이 혹시 영자엄마 잡으러 그곳에 갈지 모르니 영자엄마를 며칠간 다른 곳으로 피신시켜 달라는 급전이였다. 사촌언니는 어쩔바를 몰라하다가 아들을 시켜 생산대의 수레를 빌어 그날 오후로 채옥이를 남편이 꿀벌을 치는 청수동림장 양봉장으로 실어가 숨게 했다. 청수동림장 양봉장은 깊은 산속에 자리잡고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드물었다. 그곳이면 안전할것 같았다. “양채옥동무가 이집에 와 있는줄 알고 왔습니다. 저희들도 당의 정책을 집행하러 왔을뿐입니다. 그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세요. 저희들이 잘 모셔갈테니깐요” 긴장한 분위기를 완화하려는듯 홍순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촌언니는 얼굴근육이 굳어졌는지 얼굴을 실룩거리며 말을 바로하지 못했다. “이분들이 그 먼곳에서 소개신까지 가지구 공사에 들렸다 여기루 왔는데 어서 사실대루 말하구려.” 박서기가 곁에서 보다못해 한마디 충고했다. 경찰을 보고 놀란데다 자기네 공사부련회주임까지 함께 왔다는 박서기말에 사촌언니는 더는 입을 봉하고있을수가 없었다. 아무리 사촌동생이라 해도 산아제한정책을 어기고 자기집에 와 숨어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말하지 않았다가는 장차 자기 가정에도 무슨 루를 끼칠지 모를 일이였다. “문화대혁명”때에도 조직의 말을 잘듣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큰 봉변을 당했던가. 순간 누구한테도 절대 말하지 말라던 애원에 가까운 채옥이의 부탁이 귀가에 울려왔다. 동생의 말을 듣느냐 조직의 말을 따르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사촌언니는 끝내 조직의 켠에 돌아서지 않을수 없었다. 자기가 말하지 않아도 조직에서는 언제든 꼭 밝혀낼것이니 그때면 자기 집도 <죄인>을 감춰준것으로 되지 않겠는가. 그는 채옥이가 이 마을에서도 50리 떨어진 청수동림장 막치기 양봉장에 가있다는것을 가까스로 토해냈다. 박서기도 그런 곳이 있으며 이 집 주인이 그곳에서 대대의 꿀벌을 치고있다고 실증했다. 그 말이 실말임을 믿은 홍순이네는 사촌언니네 집을 나서자마자 곧추 청수동림장으로 떠났다. 당지 부련회주임은 오후에 급한 회의를 불러놨다며 그길로 공사로 돌아갔다. 그 마을의 부녀주임도 돌아갔다. 박서기가 길안내로 나섰다. 홍순이네가 집을 나서자 사촌언니는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채옥아, 내가 너한테 미안하구나, 이후에 내가 너를 어떻게 볼고…” 해방패 자동차가 목재를 실어나른다는 울퉁불퉁한 산길을 따라 한 40리가량 달리자 더는 자동차가 들어설 길이 없었다. 앞에는  좁다란 수레길밖에 보이지 않았다. 박서기는 이젠 10리길을 걸어서 들어가야 한다며 모두 차에서 내리라고 했다. 그들은 차를 그곳에 세워두고 걸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뉘연한 산비탈을 따라 걷다보니 얼마 못가 모두가 땀투성이 되였다. 한낮이 되자 산속도 무더웠다. 뜨겁고 무거운 공기가 골짜기에 꽉 들어찼으나 실바람조차 불어오지 않았다. 뙤약볕은 머리꼭대기에서 내리비치고 볕에 단 열기는 뜬김처럼 발밑에서 솟아올랐다. 그들은 저저마다 웃옷을 벗어 팔에 걸치거나 어깨에 둘러메고 씩씩거리며 산속으로 들어갔다. 산이 높으니 골도 깊었다. 잠태를 쫓고 더위와 싱갱이질하며 한시간남짓 걸어서야 그들은 양봉장에 이를수 있었다. 백양나무, 물푸레나무, 봇나무, 가둑나무들이 꽉 들어선 그곳 경치는 가관이였다. 산속의 맑고 시원한 공기는 페부에 차분히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름다운 경치를 흔상할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걸음을 재우쳤다. 공사간부들이 자기를 잡으러 갈지도 모름다는 남편의 전화를 받고 사촌언니가 혼비백산하여 앞뒤를 가릴새없이 어제 자기를 이  산속에 피신해 들여보내긴 했지만 채옥이는 마음이 잡히지 않고 불안하기만 했다. 그것도 새파란 각시가 이 심산속에서 형부와 단둘이 함께 있는다는것이 어간 쑥스러운 일이 아니였다. 그는 제발 본고장에서 사람이 오지 않기를 바랐고 이곳에서 하루빨리 내려갈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는 배속의 둘째아이를 낳기 위해서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며칠 버티지 않을수 없었다. 어색한대로 금방 형부와 함께 점식식사를 치르고 밖에 나앉아 볕쪼임도 할겸 형부가 캐온 약재를 널어 말리던 채옥이는 갑자기 산아래에서부터 사람 한무리 올라오는것을 보고 저으기 긴장해났다. 이 깊은 산골에 무슨 사람들이 들어 온단말인가. 혹시 날 잡으러 오는 사람들이 아닐가? 채옥이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귀틀집으로 달려들어갔다. “아즈반님, 저기 사람들이 잔뜩 올라와요. 날래 나가 보세요.” 집안으로 뛰여들어오며 어쩔바를 몰라하는 채옥이의 황급한 소리에 올무를 손질하던 사촌언니 남편 억수는 벽에 세워놓은 사냥총을 들고 바삐 밖으로 나갔다.  산아래에서 올라오던 사람들도 어떤 녀인이 벌떡 일어나 귀틀집안으로 들어가는것을 보았는지 반달음질치며 올라왔다. 억수는 손채양을 해가지고 올라오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올라오는 사람들중 대대당지부 박서기가 있는걸 보고 그는 들었던 사냥총을 내리웠다. 채옥이가 귀틀집에 들어가 문틈으로 올라오는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화뜰 놀랐다. 뛰뚱거리며 올라오는 저 녀자 대대부녀주임 최경임이 아닌가. 저 키큰 녀자는 또 누구지? 어마나, 우리 마을 집체호로 내려왔다가 공사부련회주임으로 올라간 김홍순이 아닌가. 저 꺽다리경찰은 또 누구지? 순간 저들이 자기 잡으러 온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뇌리를 쳤다. 더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귀틀집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뛰쳐나가서는 무작정 뒤산으로 내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올라오던 사람들이 그녀를 발견하고 쫓아올라왔다. “영자엄마. 거기 섭소.. 내 경임이꾸마.” “아주머니, 나 집체호에 있던 홍순입니다. 뛰지 마세요..” 들은둥만둥 채옥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정신없이 산위로 뛰기만 했다. 임신한지 여섯달이 다되는 몸으로 뒤산으로 한참 올리뛰던 채옥이는 얼마가지 못하고 제몸을 못이겨 길에 폴싹 꼬꾸라졌다. 젊고 힘센 꺽다리경찰이 맨먼저 뒤따라 쫓아왔다. 뒤이어 홍순이와 경임이도 숨을 헐떡이며 달려올라왔다. “어디 다치지 않았슴두? 달키는 어째 달슴두? 쯧쯧쯧…” 경임이가 다가가 부축하려 했다. “그 몸으로 어떻게 뛴다구 그랩니까. 괜찮으세요?” 홍순이도 달려 올라왔다. 채옥이는 자기를 부축하려는 경임이와 홍순이를 뿌리치더니 길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벌겋게 상기된 그의 얼굴은 온통 땀투성이였다. “제발 나를 잡아가지 말아주세요. 이 애를 꼭 낳게 해줘요… 이 배속의 애가 아들이랍니다. 영자아부지 구대독신이여서 시집에서는 이 애를 꼭 낳으라구 해요… 제가 이 은혜를 잊지 않겠으니…” 채옥이는 눈물, 코물, 땀까지 흘려가며 여러 사람들한테 꾸뻑꾸뻑 절을 했다. 그처럼 활달하고 도고하던 처제가 체면이고 체신이고 다 구겨박는것이 안스러운지 억수가 홍순이네를 둘러보며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거 너무 하는거 아이미까. 아이 둘을 낳는게 뭐 대단한 죄라구 여기꺼지 잡을라 왔스미까. 이곳에서는 아이 둘을 낳아두 끽 소리 없는데…” 그러자 박서기가 억수를 흘겨보며 눈을 끔뻑했다.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는가. 이곳에서라구 누가 둘을 낳게 한다구 그래?” “조선족은 소수민족이라서 아이 둘을 낳을수 있다구 그때 박서기 회의때 말하지 않았스미껴?” “그건 자네 잘못들은거지. 그따위 소린 하지두 말라구.” 박서기는 손을 홰홰 내저으며 억수의 입을 막아버렸다. 경임이와 홍순이가 채옥이를 부축하여 일으키려 했다 채옥이는 배를 그러안고 버티고앉아 한사코 일어서려 하지 않았다. “영자낳구 5년만에 선 앤데…터불두 정책에 맞는다던데…제발 얘를 낳게 해주세요…내 이렇게 빌게요…” “이러지 말구 어서 일어나세요. 차에 앉아 돌아갑시다.” “전 절대 못일어나요.” 말로해서는 될것 같지 않았다. 경임이와 홍순이가 안 일어나겠다고 발버둥치는 채옥이를 억지로 일쿼세웠다. 그러는것을 억수가 나서 제지시키려 했다. 꺽다리경찰이  억수를 가로 막아나섰다. 억수는 경찰을 밀쳤다. 억수와 경찰사이에 싱갱이가 벌어졌다. 박서기가 억수를 끄잡아당겼다. “공무를 집행하는 간부들과 이게 무슨 짓인가. 모르는척 하게.” 억수는 화가 치밀어 꺽다리경찰을 쏘아보다가 또 박서기도 아니꼽게 쳐다보았다. 경임이와 홍순이가 채옥이를 부축하여 산아래로 내려갔다. 부축하는건지 잡아가는건지 채옥이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겁질린 양마냥 안가겠다고 버티며 질질 끌려갔다. “아주버님, 내 애기를 살려주세요…살려주세요…” 채옥이가 목을 뒤로 젖히며 애처롭게 부르짖었다. 그 소리를 듣더니 또다시 분기가 울컥 치민 억수가 와들렁하며 쫓아가려는것을 박서기가 억수를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후과를 좀 생각하라구.” 억수는 박서기를 흘겨보고는 화김에 들었던 사냥총을 땅에 쾅 들이박았다. “엣씨. 무슨 늠의 세상이야…애덜두 맘대루 못낳게…” 총가목이 금방 부러져나가 억수의 손에는 총대만 쥐여져 있었다. 총대가 그의 손에서 부르르 떨렸다. 뒤에 남아 억수를 경계하던 꺽다리경찰은 억수가 노려만 볼뿐 더는 움직이지 않자 홍순이네를 따라 털썩털썩 산아래로 내려갔다. “엑키, 나두 내려가봐야겠군. 선진이 되려는 타지방 간부들과 이곳 일을 껴들어서는 뭘해? 변통머리없이…”     억수를 붙잡고 서있던 박서기는 타고왔던 차를 놓치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생각이 펄쩍 들었던지 억수를 흘겨보며 이렇게 한마디 내뱉고는 부랴부랴 홍순이네를 쫓아내려갔다.     경치좋은 골짜기에서는 사나운 짐승에게 덜미를 물리워 끌려가는 새끼양인듯 채옥이의 애처로운 울부짖음소리가 오래도록 처량히 울려퍼졌다.     그들이 탄 차가 현립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네시경이였다. “다 왔어요. 내리자요.” 하지만 기진맥진하여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옥이는 구석을 파고들며 좀처럼 트럭 뒤좌석에서 내리려하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어서 내리자요’” “안돼요. 못내려요. 난 애한테 죽을 죄를 지을수 없어요…차라리 나를 죽여요…” 채옥이는 배를 끌어안은채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갈듯 그냥 뒤쪽으로 비비고 들어앉았다. “안되겠어요. 부축해내리세요.” 꺽다리경찰과 경임이가 채옥이의 두 팔을 잡았다. “안돼요 이러지 말아요…제발 빌게요…” 채옥이는 내려오지 않겠다고 죽을 힘을 다해 두다리를 뻗대며 애걸했다. 서로 당기고 뻗대는 사이 갑자기 채옥이 사타구니에서 피가 터져나왔다. 채옥이는 아래가 뜨끈한 감을 느끼며 안깐힘을 써 한쪽 손을 빼냈다. 그가 다급히 아래를 만져보니 그의 손에는 붉은 피가 즐벅히 젖어있었다. “이…이게...애가 나오잖아…악…” 채옥이는 피를 보더니 그만 그 자리에 기절해 쓰러졌다. 꺽다리 경찰과 경임이도 너무 놀라 인차 손을 떼였다. “뭘해요. 빨리 구급실로 옮겨요…” 꺽다리경찰이 채옥이를 건뜩 들어안고 병원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채옥이가 떠난 자리에는 벼짚과 붉은 피가 범벅이 되여있었다. 10리 울퉁불퉁 산길을 기진맥진하게 끌려와서인지. 아니면 40리 산길을 트럭에서 들볶아대여서인지. 또 차에서 내리지 않겠다고 뻗대며 너무 악을 쓴 탓인지 채옥이는 다 큰 사내애를 인공류산기키기전에 병원문앞에서 류산하고 말았다. 혼수상태에서 깨여나 아이가 떨어져나간줄 안 채옥이는 구곡간장을 비트는 울음을 터뜨리다 실신했다. 구급을 거쳐 깨여나서는 자기배를 만져보다 자기 머리를 잡아뜯으며 미친듯이 울부짖다가 또다시 정신을 잃었다. 곁사람들도 차마 눈뜨고 볼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였다. 의사들도 한숨을 풀풀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날저녁 홍순이는 잠을 설쳤다. 채옥이의 애절한 울부짖음이 귀전을 때리고 채옥이의 하신에서 흘러내린 붉은 피가 눈에 선하여 도무지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자기가 하는 일이 과연 잘하는짓인가. 이렇게 하는것이 과연 당의 말을 듣는것인지 자기로서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속이 떨려왔다. 그러다도 혁명하자면 나약해서는 안된다고 스스로 위안하기도 했다. 그는 온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자기를 볶고 지지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 홍순이는 풀이 죽어 당위 리서기에게 어제 채옥이가 끌려오다 병원문앞에서 류산하게 된 정황을 회보하였다. “당의 산아제한정책을 위반하는 사람은 대가를 치러야 하는거요.. 절대 나약해서는 안되오. 피해 다니는 기타 임신부들도 모두 찾아들여야 하오” 리서기는 홍순이를 치하하고 고무하며 새로운 임무를 주었다. 홍순이는 모순된 심정으로 당위의 지시를 집행했다. 그는 각 대대와 공사직속 단위들을 돌아다니며 외지에 피해갔거나 숨어있는 임신부들을 모조리 찾아내여 류산시켰거나 인공류산시켰다. 외지에 피신해갔던 태평대대의 최선녀, 리순희도 그렇게 “모셔”왔고 홍선대대의 박분녀, 동명대대의 장만옥, 류신대대의 함분옥 등도 모두 그렇게 끌려왔다. 대전공사는 전에없이 계획외임신0, 계획외출산 0기록을 돌파하여 당해에 산아제한 꼴찌모자를 벗어버렸을뿐만아니라 일약 현의 선진전형으로 되였다. 현위서기, 현장들마저도 이처럼 뛰여난 대전공사의 산아제한성과에 깜짝 놀랐다.     해마다 비판을 밥 먹듯하던 “꼴찌공사”가 대번에 모범공사가 되자 그 진동이 더욱 컸다. 현에서는 대전공사에서 각 공사 주관 부서기, 부련회 주임, 대대당지부 서기, 부녀주임들은 물론 각 생산대 정치대장과 부녀대장들까지 참가한 전 현 현지회의를 열고 대전공사의 산아제한경험을 성세호대히 전 현에 일반화하였다.     조선족이 다수를 차지하는 소수민족공사에서 철저하게 산아제한사업을 틀어쥔 경험은 독특한 설복력이 있었다. 얼마후에는 지구에서도 대전공사에 내려와 전 지구 산아제한사업현지회의를 열고 그들의 경험을 대폭적으로 선전하였다. 홍순이도 눈꽃처럼 날아드는 초청을 받아 지구와 각 현, 시, 및 성을 오르내리며 산아제한사업을 틀어쥔 경험소개를 하였다. 깊은 산속에 들어가 계획외 아이를 낳으려던 채옥이를 찾아내여 견결히 류산시킨 경험은 전형적 실례로 소개되였다. 사업에서 휘황한 성과를 따낸 홍순에게 영예와 꽃다발이 무더기로 쏟아져내렸다. 홍순이는 자기가 하는 산아제한사업의 정확성을 가일층 확신하게 되였다. 공사당위에서는 산아제한사업성과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전 공사 산아적령기 부녀들의 부인병검사를 해준다는 명의로 각 대대와 공사직속기관 부녀들을 공사위생소에 불러들여 본인들 몰래 모두 피임환을 넣게 하였다. 홍순이가 직접 감독했다. 그덕에 대전공사에서는 이듬해에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현은 물론 주와 성의 모범공사로 되였다. 이대로라면 5년, 10년도 모범은 문제없을것 같았다. 풀을 베려거든 다시는 싹이 돋아나지 않게 아예 뿌리까지 뽑아버려야지 그대로 두었다간 봄이 되면 또다시 성가시게 군다는 격언을 알아서였던가. 본인 몰래 산아적령기 부녀들에게 피임환까지 넣고보니 그들이 또다시 임신할가봐 걱정하는 시름을 덜게 되였다. 대전공사의 간부들은 잠을 자도 발편잠을 잘수 있게 되였다. 대전공사당위서기로 내려왔던 리서기는 령도능력이 뛰여나 규례를 타파하고 3년만에 현의 부서기로 승진하였다. 홍순이도 련속 3년간 현, 지구, 성의 모범인물이 되였다. 이듬해에는 사업수요로 현에 올라가 현산아제한판공실 주임으로 되였다. 홍순이가 전 현의 산아제한사업을 틀어쥐면서부터 광명현의 산아제한사업에는 새로운 기상이 나타났다. 그는 대전공사에서 하던 경험을 살려 전 현 범위에서 공사와 진, 현직속기관의 구석구석까지 파고들며 계획외 임신이 없도록 빈틈없는 대책을 대였다. 그는 길 가다도 배부른 녀인만 보아도 임신이 아닌가 하여 뒤조사를 하군 하였다. 한번은 간경화복수로 배에 물이 찬 녀인도 임신이 아닌가 하여 병원에 끌고 갔다가 사람을 웃긴적도 있었다. 락후현의 모자를 벗어버리려고 홍순이가 현당위의 지시에 좇아 전 현적으로 성세호대하게 산아제한사업을 밀고나가고 있을 때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지구당위 기관지인 <변강일보>에 생뚱같이 “변강시 침직공장에서 소수민족이 어린애 둘씩 낳도록 고무”라는 기사가 실렸던것이였다. 내용인즉 이 침직공장에서는 당의 민족정책을 실속있게 관철집행하여 소수민족이 아이 둘을 낳도록 제창할 뿐만아니라 독신자녀증을 내려는 소수민족도 설복하여 아이 둘을 낳도록 설복하여 소수민족들의 옹호를 받고있다는것이였다. 이 기사로 하여 전 현의 산아제한사업이 대혼란에 빠졌다. 많은 소수민족들이 이 신문을 들고 와 당보에서도 소수민족은 아이 둘을 낳을것을 제창하는데 왜 우리 현에서는 하나밖에 낳지 못하게 하느냐고 걸고들었다. 하여 홍순이가 집행하는 산아 제한사업이 큰 애로에 봉착하게 되였다. 홍순이는 현당위 리서기를 찾아가 당보에 산아제한사업을 저애하는 이런 기사가 실리면 기층에서 어떻게 산아제한사업을 밀고 나가느냐고 항의를 제기하였다. 현당위에서는 홍순이의 의견이 도리있다고 인정하고 이런 의견을 지구당위에 반영하였다. 그후 당보에 더는 소수민족이 어린애 둘을 낳도록 제창한다는 기사가 실리지 않았다. 하지만 정정이 나가지 않아 한시기 그 보도기사가 계속 산아제한사업을 저애하는 역할을 놀았었다. 그 보도기사가 배격된후 홍순이는 산아제한사업에 더욱 열을 올렸다. 그는 대전공사에서 하던 방법대로 부녀들의 신체검사를 한다는 명의로 현직속기관의 산아적령기부녀들을 모두 현립병원에 불러들여 본인 몰래 피임환을 넣게 하였다. 각 공사와 진에서도 이 방법을 취하게 하고 일일이 검사하고 감독하였다. 홍순이의 꾸준한 노력으로 이듬해에 광명현도 일약 성과 지구의 산아제한선진현이 되였다.    사업열성이 높고 뛰여난 사업성과를 올린 홍순이는 성과 지구의 신문인물이 되여 신문, 방송, 텔레비에서 사흘이 멀다하게 그의 사적이 보도되였다. 하지만 그녀가 가서 사업하는 곳의 많은 소수민족군중들은 홍순이를 “마귀”, “악녀”라고 저주했다. 도적이 도적을 잡으면 경찰보다 낫고 사람이 사람을 잡으면 늑대보다 더 흉악해진다더니 녀자가 녀자를 잡으니 이렇게 지독해질변이라구야. 어떤 사람은 밤중에 그의 집에 돌총질하여 유리창을 박살내기도 했고 누군가는 그가 타고다니는 자전거바퀴 바람을 빼놓고 핸들을 후려놓기도 했다. 두번째 아이를 임신했다가 홍순이에게 끌려가 류산당했던 평안대대의 양채옥이는 너무도 원통하고 억울하여 남몰래 대전산의 귀신바위에 가 제물을 차려놓고 집집마다 씨를 말리게 하는 홍순이란 악녀를 귀신님이 어서 잡아갑시사 하고 두손을 삭삭 비비며 빌기까지 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그만 들통나 당의 산아제한정책을 위반하고도 당의 우수한 모범간부를 모독했다는 죄명으로 반면전형이 되여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갖은 비판투쟁을 받았다.    (계속) 연변문학 2010년 제4호
11    [중편] 진혼곡(해후)2 댓글:  조회:919  추천:46  2010-07-20
중편소설 진혼곡(해후) 허룡석   2    채옥이란 그녀를 쳐다본  순간부터 홍순이는 갑자기 가슴에서 바위덩이가 쿵ㅡ 하고 떨어지는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금시 벼락을 맞은듯 한줄기의 거센 불줄기가 찡하니 온몸을 가로질러 지나갔다. 너무 심한 자극을 받은 그의 신경은 폭발이라도 하려는듯 뜨끔거렸다. 무섭게 방망이질하는 심장도 밖으로 튀여나올듯 했다. 너무 놀라고 분통이 터져 처음에는 뼈만 앙상한 그녀를 잘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찬찬히 뜯어보니 그제날 평안촌의 양채옥이 옳았다. 30년전보다 많이 늙고 여위고 볼품없이 변했다. 그녀는 원래 그 마을에서 “3백3흑”이라 불리던 예쁘장스러운 녀인인줄 홍순이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농촌에서 살아도 희고 부드러운 살결, 물기어린 흰자위, 옥돌같이 희고 오종종한 이빨을 가진 녀인이였다. 또한 칠흙처럼 검은 머리채, 언제나 놀란듯 둥그렇게 뜬 검은 동자, 선명하게 휘여든 검은 눈섭을 가졌었다. 하지만 그간 얼마나 고생했으면 사람이 저렇게 몰라보게 변했을가. 그때는 씻은 팥알처럼 또글또글 윤기가 흐르던 사람이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 시원하던 이마엔 굵다란 주름이 쭉쭉 가로 지나가고 그믐밤같던 검은 머리에도 두벌세벌 서리가 내렸다. 억실하던 눈귀에도 주름이 가로세로 잡히여 그 옛날 양채옥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그 눈매마저 덧없는 세월의 그물코에 둘러싸인듯했다. 그 마을을 떠나고 그 공사를 떠나 도시에 올라온후에는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채옥이였다. 그런데 어떻게 몇십년이 지난 오늘 이렇게 지구병원의 한병실에서 우연히 만난단 말인가. 그리고 이렇게 부종이 심하게 난 자기를 어떻게 대번에 알아본단 말인가. 원쑤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세상이 이렇게 좁고 작단 말인가. 자기가 이제부터 한 병실에 있는 양채옥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막연하였다. 비록 그때는 당의 산아제한정책을 집행하느라 한 일이지만 강제로 류산당했거나 인공류산당했던 당사자들은 모두 자기를 마귀 취급하는줄 홍순이는 잘 알고있었다. 발벗고 나서 혁명하느라면 남의 미움사기 마련이지만 양채옥이를 본후부터  가슴에 돌덩이가 드리운듯 마음은 왜 이렇게 무거워만 지는건지? 채옥이를 다시는 보지 않게 래일이라도 당장 고급간부병실로 옮겨가고 싶었다. 눈을 감고 지나간 일들을 돌이켜보느라니 그는 어느듯  열광에 들떴던 혁명의 년대로 돌아갔다.      1968년 가을에 홍순이는 전국의 수천만 지식청년들과 마찬가지로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으러 씩씩하게 농촌으로 내려갔다. 부반장이였던 그는 반급의 남녀학생 10여명과 짝을 무어 현성에서 150리나 떨어져있는 대전공사 평안촌 집체호로 내려가 자리잡았다. 수한전농사를 겸해 짓는 평안촌은 농촌치고는 조건이 괜찮았다. 도시에서는 먹어보기 어려운 이밥을 하루세끼 먹을수 있었고 토막나무는 아니라도 산에서 땔나무를 해다 땔수 있었다.     그때 홍순이는 청순하고 천진하며 몸매가 호리호리한 열여덟살 애어린 처녀였다. 도시에서 대혁명을 겪고 내려온 그의 몸에서는 봄날의 아침과 같은 청춘의 생기가 가득 넘쳐흘렀다. 하지만 그는 도시에서의 고린내나는 아가씨의 때를 깨끗이 씻어버리고 하루빨리 빈하중농들과 한덩어리가 되고싶었다. 그는 성근한 마음으로 빈하중농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농사일들을 하나하나 배웠다. 부녀들이 하는 나래뱃기, 벼뿌리치기, 모상판정리 등 자질구레한 일은 물론 남성들이 하는 두엄끄기, 수레몰이, 밭갈이 등 힘든 농사일도 곧잘 배워냈다. 지어 그 힘든 저수지공사장에 가서도 남성청년들에게 뒤질세라 몸을 내번지고 일하여 선진일군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무슨 일을 하나 사원들은 인물좋고 총명하고 활달하고 솜씨잰 그와 한조에 편입되기를 바랐다. 하야말쑥하던 피부는 점차 검실검실 “영웅빛갈”이 되였다. 가냘프던 몸매는 탄성있게 다져졌다. 진일, 마른일 가리지 않고 억척스레 일하고 정치학습과 비판회에서 앞장섰기에 그는 스무살에 집체호에서 맨먼저 입당하였다. 이듬해에 그는 생산대 부녀대장이 되였고 다음해에는 대대당지부 위원겸 대대부녀주임이 되였다. 간부로 될 천부적 재질을 가졌는지 그는 맡기는 일마다 깐지게 해나갔다. 사업성과가 돌출하여 스물네살나는 해에는 대대당지부 서기로 되였다. 그후에는 공사부련회 주임으로 자리를 옮겨가 광활한 천지에서 그가 해야 할 일들이 더욱 많아졌다.    당시 농촌의 많고많은 일가운데서도 산아제한사업이 가장 골치 아픈 문제였다. 우리 나라에서 지난 50년대에 북경대학 교장 마인초가 멀리 앞을 내다보고 “인구통제론”을 내놓았다가 엄한 비판을 받았었다. “사람이 많으면 열의가 높고 기세가 크다”는 전쟁준비론은 수많은 “후비군대”가 태여나게 하였다.  마인초가 비판받고 타도된후 우리 나라 인구학은 그때로부터 20여년간이나 침체상태에 빠져있었다. 이런 무정부상태에서 가구당 평균 5.8명의 어린애를 낳아 공화국이 창건될 때에 4억 5천만이던 우리 나라 인구가 30년후에는 10억을 넘어서게 되였다. 인구가 폭증해서야 제정신을 차리게 되였다. 전국적으로 산아제한사업이 돌풍마냥 일어났다. 언제나 불타는 혁명열성으로 끓어번지는 변강소수민족지구도 례외가 아니였다. 뿐만아니라 성내 어느 지구보다도 더 급진적이고 열광적이였다. 하지만 광명현의 산아제한사업은 그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광명현은 전 지구의 “꼴찌현”으로 되였다. 대전공사는 또한 광명현의 “꼴찌공사”로 되여 광명현의 산아제한사업발전을 저애하였다. 이러한 때에 홍순이가 대전공사의 부련회 주임으로 발탁된것이였다. 현당위에서는 이 공사의 원래  당위서기를 현의 중요치 않은 한 부서로 전근 시키고 현정부판공실에서 일하던 리과장라는 간부를 새로운 당위서기로 내려보냈다.  리서기는 부임하자마자 자기의 유력한 조수로 될 공사부련회주임감을 물색하였다. 그러던중 현공작대의 소개로 평안대대의 당지부서기 김홍순이를 알게 되였다. 료해해보니 전 공사적으로 평안대대의 모든 사업이 앞장서 나가고있었다. 이런 열성과 능력이면 부녀사업도 훌륭히 잘해나갈수 있을것 같았다. 그는 현조직부의 비준을 거쳐 홍순이를 공사부련회주임자리에 올려왔다. 그는 홍순이와 조직담화를 하면서 여러가지 부녀사업중에서도 먼저 산아제한사업을 바싹 틀어쥐여 2년내에 전 현의 “꼴지모자”를 벗어버릴 임무를 주었다. 홍순이는 이를 자신에 대한 당조직의 신임으로 깊이 받아들였다.     대전공사는 인구 2만여명에 달하는 변강민족지구에서도 가장 큰 공사의 하나로서 16개 대대에 150여개 생산대가 있었다. 그중 15개 대대가 알쭌한 조선족대대였고 한개 대대가 민족혼합대대였다. 이외 농장 한개, 공사기업 여섯개, 합작사, 농전소, 수리소, 농업기술보급소, 량식관리소, 신용사, 중소학교 등 공사직속 부문들이 적지 않았다. 홍순이는 부임하자마자 날마다 자전거를 타고 각 대대와 기업, 공사직속 부문들을 채바퀴 돌듯했다. 그가 가지고 다니는 빨간목책에는 산아제한사업에 관한 조사수치들이 깨알마냥 오글오글 들어찼다. 보름동안의 까근한 조사를 마치자 그는 공사당위의 동의를 거쳐 전 공사 대대와 직속기관 부녀주임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 공사당위 리서기가 지난날 대전공사의 산아제한사업에 존재하는 부족점을 피력하고 산아제한사업을 바싹 틀어쥐여야 할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2년내에 전 현의 락후공사모자를 벗어버릴것을 요구하였다.     홍순이가 빨간목책을 펴들고 각 대대와 공사직속기관의 산아제한정황을 손금보듯 하나하나 참빗질하였다. 짧은 시일내에 빈틈없이 한 그의 조사에 회의에 참가했던 각 대대의 부녀주임들은 모두 입을 딱 벌렸다. 새로 부임된 공사당위서기와 부련회주임의 잡도리를 보니 아이 낳는 문제에서 전처럼 대충 응부만 해서는 될것 같지 않다는 예감이 들었다. “태평대대에는 계획외 임신이 여덟이 있고 평안대대에는 열두명, 동명 대대에는 열명이 있습니다…16개 대대에서 계획외 임신한 부녀들이 도합286명이나 있습니다 가능하게 조사에 빠진 임신부들이 더 있을수 있습니다. 그리고 합작사에 두명, 사반기업에 일곱명, 신용사에 한명, 중학교 교원들 가운데 세명, 소학교 교원들 가운데 다섯명, 농장에 15명…비농호 부녀들 가운데도 계획외 임신부들이 도합 82명 있습니다. 문제가 생각보다 엄중하다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임신한지 이미 다섯달, 여섯달이 되는데 이제 더 늦추면 또 새로운 문제가 생길것입니다. 부녀주임들은 돌아간후 각 생산대 부녀대장회의를 소집하고 공사당위의 정신을 전달하고 인츰 락실하여야 하겠습니다. 공사위생소에서는 임신부들을 류산시키고 인공류산시킬 만단의 준비를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대대 임신한 부녀들중 세번째 임신은 없고 모두 두번째 임신입니다. 정책에 조선족은 아이 둘을 낳을수 있다고 하던데…” 태평대대 부녀주임이 조심스레 말했다. “우리 대대 임신부들두 거개 두번째 임신인데…” 평안대대 부녀주임도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이에 당위 리서기가  노기를 띤채 언성을 높였다. “두번째 임신이면 어쨌단 말입니까? 현에서 통계를 낼 때에는 근본 두번째 임신은 지표에 넣지도 않습니다. 지구와 성도 마찬가집니다. 우리 공사에 두번째 임신이 이렇게 많으니 전 현의 꼴찌밖에 더 될게 있겠습니까. 그러니 내려가 잘 전달하십시요. 공사당위의 지시니 두번째 임신도 무조건 류산시켜야 한다구 말입니다. 당원가속과 간부가속들이 앞장서 당위의 지시를 관철하기 바랍니다. 이제 각 대대 당지부서기들 회의를 따로 소집하고 산아제한사업을 친히 틀어쥐도록 강조하겠습니다. 달수가 넘어나 류산하기 어려운 임신부들은 조건이 좋고 기술이 높은 현립병원에 가서라도 인공류산시켜야 합니다. 만일 어느 대대나 공사직속기관에 두번째 아이를 낳는 사람이 있다면 지도자의 책임을 추궁할뿐만 아니라 본인들에게도 엄한 처벌을 내릴것입니다.” 회의에 참석했던 부녀간부들은 서로 쳐다만 볼뿐 찍소리도 하지 못하였다. 대전공사에서는 전례없이 두번째 임신을 견결히 반대하고 단속하는 열풍이 일었다. 사흗날부터 공사위생소는 각 대대에서 류산하러 들어오는 임신부들로 꽉 찼다. 거의 모두 조선족부녀들이였다. 압력에 못이겨 자각적으로 온 당원가속과 간부가속도 더러 있었지만 많이는 간부들한테 억지로 끌려와 류산을 강요당하는 부녀들이였다. 홍순이는 날마다 공사병원에 와 돌아보며 류산한 정황을 통계하였다. 임신 달수가 높아 공사병원에서 인공류산시키기 어려운 임신부들은 본인이 동의하든 말든 사반기업자동차로 현립병원으로 실어날랐다. 날마다 병원에 가 류산정황을 일일이 체크하며 통계하던 홍순이는 며칠이 지났는데도 각 대대마다 류산하러 오지 않은 임신부들이 몇몇씩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중에서도 임신달수가 가장 높은 부녀들중의 한사람인 평안대대의 양채옥이라는 임신부의 이름이 없는것이 류달리 홍순이의 주의를 끌었다. 홍순이는 평안대대 집체호로 하향하면서부터 그녀를 잘 알고있었다. 30대 초반인 채옥이는 사리밝고 인정많고 손부부리 여문 녀인이였다. 생산대에서도 녀성감농군이였고 부녀사업 골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남존녀비사상이 장난쳐서인지 아니면 시집의 압력때문인지 첫번째로 딸을 낳고는 아들을 하나 더 낳으려고 또다시 임신하였는데 인젠 대여섯달이 되였다. 만일 이번 집중류산에 빠지게 되면 달이 넘어 아이를 낳는 상황이 벌어질것이였다. 그가 아이를 낳게 되면 달수가 많은 임신부들의 련쇄반응이 일어날것이 뻔했다. 그러면 전현의 “꼴찌모자”를 벗는데 큰 역작용을 일으키게 될것도 불보듯 했다 홍순이는 그길로 평안대대에 전화를 걸어 부녀주임 최경임을 찾았다. 반시간후에 최경임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녜, 안녕하세요. 일이 있어 찾았어요. 그 대대에서 공사병원에 와 류산한 정황이 어떠한가 해서요.” “예, 공사의 지시대로 집에 있는 임신부들은 모두 동원해가서 류산시켰슴다. 다만 외출한 사람만이…” “혹시 양채옥이란 임신부랑 외출한게 아닌가요?” “우,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심까? 정말 그 양채옥이라는 임신부가 빠졌슴다…” “어디로 갔는데요?” “우리두 잘 모름다. 집에서두 잘 모른다하구…” “어디로 갔는지 잘 모른다니요? ” “류산동원을 하기전까지만두 집에 있었는데 그 집에 가보구서야 그가 없어진줄 알았슴다…” 홍순이는 손에 땀이 나는지 전화를 왼손에 바꿔쥐였다. “그러면 류산을 피해간게 아닌가요?” “글쎄말임다. 그집 나그내두 잘 모른다구 잡아떼니…” “이봐요. 최주임, 이번 집중단속에 한 사람이라도 빠져선 안됩니다. 내가 오후에 평안대대에 내려갈테니 대대사무실에서 기다리세요.” “예, 알았슴다.” 전화를 내려놓은 홍순이는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공사기관식당에서 점심술을 내려놓기 바쁘게 홍순이는 자전거를 타고 밭머리 길을 따라 평안촌으로 내려갔다. 대대사무실에서 최경임이 기다리고 있었다. “채옥아주머니네 집에 가 보자요.” 자전거에서 뛰여내리기 바쁘게 홍순이는 자전거를 밀며 경임과 함께 채옥이네 집으로 향했다. 채옥이네 집은 마을 복판에 자리잡고 있었다. 경임이 인기척을 내며 집안에 들어섰다. 집안에서는 30대 초반의 젊은 사나이가 혼자 점심식사를 하고있었다. 일밭에서 금방 돌아온듯 바지가랭이가 걷혀져있었다. 손님이 온것을 보고 그는 입에 밥을 문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옥이 남편 강철산이였다. “영자아부지 그냥 혼자 계시네. 이분은 공사부련회 김주임입꾸마.” 철산이는 홍순이에게 허리굽혀 인사했다. “예, 알만하꾸마. 전에 우리 마을 집체호에 왔댔습지. 날래 올라오십소.” “식사하시는데 안됐습니다.” 홍순이는 온돌에 올라가 앉으며 집안을 둘러보았다. 집안은 어디라없이 깨끗이 거둬져있었다. 며칠째 안해가 자리비운 집이라 하지만 어디에나 안해의 여문 손길이 닿아있었다. “저, 공사부련회주임이 영자엄마 일땜에 오셨는데 영자엄마 그냥 안돌아왔슴두?” 경임이가 물었다. “예, 나간지 며칠되는데 아직…” 철산이도 크고작은 부녀간부들이 왜 왔다는걸 짐작하는지  말을 얼버무렸다. “어디에 가신건데요?” 홍순이가 물었다. “그쎄, 며칠전부터 ㄴ시 친척집에 일보러 간다간다 하던게 거기로 갔는지…” “영자엄마한테서 ㄴ시에 친척이 있다는 소리는 못들었는데....” “영자외삼촌되는 친척이 있씀다…” “ㄴ시 어디라 하던가요?” “원래는 신흥가였는데 지금은 아래개방지 어디루 이사갔다 하던데 나두 잘 모르꾸마.” 경임이가 무릎걸음으로 앞에 나앉으며 말했다. “까놓구 말입지 우리가 어째 온걸 영자아부지두 알게꾸마. 지금 전 공사적으루 두번째 임신한 부녀들을 동원하여 류산시키는데 영자엄마 이때에 없어진건 어디루 피해간게 아이겠슴두? 영자엄마 한 사람때문에 우리 대대에서 임무완성하는데  영향주는데 그러지 말구 좀 련락해서 인차 오게 합소. 영자엄마 어딜 간거 영자아부지 모른다는게 말이 됨두?” “나두 두분이 어째 왔다는걸 알만하꾸마. 그런데 다른 고장에서는 조선족은 아이 둘을 낳아두 말이 없다는데 어째 이곳에서는 이렇게 사람을 못살게 굼두?” “무슨 말을 그렇게 함두? 당의 정책을 집행하는게 사람을 못살게 구는겜두?” 경임이가 눈을 치켜 올렸다. 홍순이는 경임의 옷섶을 살짝 당기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전국은 어디 가나 마찬가지입니다. 아이 하나씩 낳으라는건 나라의 기본국책인데 어디라구 다르겠습니까. 그러니 어서 련락해서 돌아와 류산하게 하세요.” “우리 처 사춘이 있는곳에서는 아이 둘씩 낳두 끄떡 소리 없답더구마…” “전국은 한 장기판인데 어데 그런 곳이 있다구요?” “저 하룡 룡지라는덴데 거기서는…” 철산이는 뭔가 자기가 실언했다고 생각했는지 제꺽 뒤끝을 흐렸다. 홍순이는 경임이를 쳐다보았다. 경임이도 홍순이를 쳐다보았다. “저는 전에 이집 아주머니와 함께 일도 하면서 잘 알고있습니다. 영자엄마는 사리밝고 인품좋은 분이지요. 영자아버지도 생산대에서 부대장사업 하시느라 수고 많으시구요. 이런 가정에서 당의 계획생육정책을 앞장서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희들은 두분만 믿구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럼 수고해주세요.” 홍순이가 일어나자 경임이도 얼떨떨하게 일어섰다. 철산이는 찌뿌둥한 얼굴로 그들이 나가는것을 선자리에서 지켜보았다. 밖으로 나오자 경임이가 의아쩍게 홍순이를 쳐다보며 물었다. “영자아부지 가타부타 아무런 태도표시두 없는데 그저 이렇게 나와 되겠슴까?” “더 말해봤대야 영자엄마 간곳을 말할것 같지 않더군요. 아까 들었지요. 화룡 룡지라는 곳에 친척집이 있다지 않았어요? 이전에 영자엄마한테서 그런 소릴 들은적이 없었습니까?” “글쎄꾸마, 아, 있는것 같쓰꾸마, 전에 채옥이가 화룡 어딘가 친척이 꿀벌치기 하는데 가서 꿀을 사온적이 있었슴다. 간염으로 앓는 영자아부지께 대접한다면서.” “아까 영자아버지가 어망결에 그 친척집 주소를 말했는데 그집 아주머니 ㄴ시 친척집에 간게 아니라 가능하게 룡지에 있다는 그 친척집에 가 숨었을수 있어요. 방법을 대여 그 친척집이 있다는 마을주소를 확실히 알아보세요. 류산을 피해 간 사람이 제발로는 돌아오지 않을거예요. 우리가 찾아가는 수밖에 없을것 같습니다.” “예, 내 잘 알아보겠슴다..” 경임이는 그제야 홍순이의 깊은 뜻을 알수 있었다.(계속) 연변문학 2010년 제4호 
10    허룡석 프로필 댓글:  조회:1785  추천:112  2010-07-19
허룡석략력 1951년 2월 출생 1979년 12월 중앙민족대학 민족언어번역학부 졸업 1980년부터 연변일보사 기자, 부주임, 주임, 부총편집으로 사업 1995년부터 연변인민방송국 국장력임 길림성라지오텔레비죤방송예술가협회리사,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예술가협회 부회장, 중국조선족라지오텔레비죤방송우수원고 평의회 부주임위원 력임 1999년부터 연변일보사 사장, 총편집, 당위서기 력임, 주제8차당대회대표,제8기  주당위위원, 고급편집 중국기자협회 리사, 중국소수민족신문연구회 상무부회장, 길림성신문업협회 부회장, 연변기자협회 주석 력임 2006년부터 연변작가협회주석, 당조서기 력임, 중국작가협회 회원, 중국작가협회 제6기, 7기전국위원, 중국 한국 일본 동아세아문학 포럼위원회 중국측 위원, 제9기전국소수민족문학”준마상” 평심위원 력임,2010년 퇴직 문학작품 중편소설 , , 등 단편소설 , 등 40여편 산문, 기행, 수필, 잡문, 칼럼, 동화 등 100여편 신문기사집  장편기행  등
9    [중편] 진혼곡(해후)1 댓글:  조회:1262  추천:67  2010-07-19
중편소설 진혼곡(해후) 허룡석                                                 1 “떨거덕” 료리를 집어 한입 맛을 보던 홍순이는 저가락을 활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꼿꼿한 눈길로 남편 순철이를 쳐다보았다. “병원식당 밥과 채는 입에 안맞아 하는줄 알면서 또 이렇게 사왔어요?” “오늘점심에는 이곳 반찬이 괜찮다구 해서 사온건데…입에 안 맞소?” 홍순이가 또 짜증을 부린다. 순철이는 부랴부랴 홍순이가 밀어낸 침대머리 궤상우의 음식들을 거두었다. “좀만 기다리오. 내 집에 가 입에 맞는걸로 해올테니.” “그만 두세요. 먹고싶지 않아요..” 홍순이는 뿌루퉁해서 자리에 드어누우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어린애마냥 순철이는 미안스레 홍순이를 바라보며 급급히 병실을 나갔다. 맞은켠 침대에서 누룽지를 더운 물에 퍼지워 시쿤내가 물씬 풍기는 김치쪼각을 찢어 반찬으로 점심을 먹고있던 60대의 아낙네가 그러는 그들을 유심히 바라본다. 키는 작지 않으나 몸은 바싹 말라있었다. 보기 싫을 정도로 관골이 튀여나왔다. 역시 60대 남짓해보이는 얼굴에 가래톳마냥 굵직한 주름들이 얼기설기 깊이 패인 그녀의 남편인듯한 나그네가 눈치가 보이는지 이쪽에 눈을 파는 그녀를 자꾸 잡아당긴다. 그녀는 어제 오후 늦으막해 이 병원에 입원해 들어온 농촌녀인이였다. 의사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 그녀도 엄중한 자궁병으로 들어온곳 같았다. 순철이가 나가자 맞은켠의 녀인은 침대에서 내려 홍순이의 침대로 살금살금 다가가 침대머리에 써붙인 환자의 이름을 들여다본다. 그는 한자로 씌여진 이름을 잘 알아볼수 없었던지 저쪽에 가 수더분해 보이는 남편을 끌고와서 그 이름을 가리켜 보였다. 그리고는 도로 자기침대로 끌고가 소곤거렸다. “저 여자 이름이 뭐라구 썼습던두?” “김홍순이라 쓴것 같던데…” “예? 김홍순이 맞습지?... 김홍순이…” “건데 왜 자꾸 쓸데없는 일에 삐치구 그래?” “별랗게 얼굴이나 말소리 익다 했지…” 그 침대에 누워있는 녀인은 김홍순이 옳았다. 지구산아제한판공실주임으로 있다가 두해전에 자리를 낸 홍순이다. 자궁암말기로 이 병원에 입원한지 보름이 되였다. 원래는 병원 서쪽켠의 아늑한 정원에 자리잡은 고급간부병실에 입원해야 했으나 그곳을 새롭게 장식하는 바람에 림시로 일반환자들이 입원하는 보통병실에 입원하고 있었다. 그것도 독방을 차지하고 있다가 급히 입원할 환자가 들어왔으나 자리가 없어 병원측에서 홍순이네 동의를 거치고 농촌에서 왔다는 그 녀인을 한 병실에 입원시킨것이였다. 자궁암말기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에 깜짝 놀란 순철이는 일루의 희망이라도 있으면 수술해보자고  간청했지만 의사들은 수술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도리질했다. 북경이나 상해 큰 병원에 가면 어떻겠는가 해도 갈 필요없다고 했다. 기껏해야 두석달을 넘기지 못할거란다. 락담할 충격이지만 순철이로서는 어쩔수 없는 일이였다. 별수없이 홍순이는 지금 그저 통증을 줄이는 물리치료를 받고 있었다. 홍순이는 그저 자궁염치료를 받고있는줄로 알고있었다. 그런데 여러날 지나도 효험은커녕  고통스럽기만 한지 괜한 일에도 공연히 짜증을 부리며 화를 내군 했다. 남편 순철이는 지구공업국 국장으로 있다가 지난해에 퇴직했다. 넓적한 얼굴에 입이며 코며 눈이 큼직큼직하게 자리잡고 있어 순철이는 사람들에게 수양있는 간부다운 묵직한 인상을 주었다. 안해가 입원한후 순철이는 하루 세끼 집에서 밥과 반찬을 해서 날라왔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 3년전에 카나다로 공부하러 간후부터 집에는 그들 부부만 남게 되였다. 안해가 병원에 입원한 뒤로 그는 안해의 곁에 붙어있다싶이 살틀히 시중을 들었다. 자주 짜증을 부리는 안해를 그는 늘 웃는 얼굴로 위안하군 했다. 평생을 제몸도 집도 돌보지 않고 혼신을 다해 사업하느라 고생해온 안해를 마지막에나마 편히 보내주고 싶었다. 오늘점심은 병원식당에서 여러가지 맛좋은 료리들을 한다기에 호기심에 끌려 맛갈스러운것으로 골라 사왔는데도 사정없이 퉁을 맞은것이였다. 한시간남짓 지났을가. 순철이가 집에서 따로 밥과 반찬을 해가지고 땀벌창이 되여 병실에 들어섰다. 그는 웃옷을 벗기 바쁘게 침대머리로 다가와 홍순이를 가볍게 흔들었다. “여보, 당신이 좋아하는 밥과 채를 해왔소.. 얼른 일어나오..” 홍순이는 토라졌는지 뒤돌아눕는다. 순철이는 이불을 살며시 끌어내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지 말구 일어나오. 이후엔 병원식당에서 아무리 맛있는 제비둥지를 한대두 사오지 않을테니까. 자, 일어나 앉소.” 남편이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일으키자 홍순이는 못이기는척 일어나 앉았다. 순철이는 갖고온 밥과 반찬을 궤상우에 차려놓았다. “자, 당신이 좋아하는 고사리볶음. 신선한 오이무침. 기장밥, 오다가 사온 순대…” 홍순이는 순철이를 할기죽 흘겨보며 쥐여주는 수저를 받아들었다. 그는 밥과 반찬과 순대를 고루 맛보더니 입맛이 당기는지 맛갈스레 먹기 시작했다. 순철이는 곁에서 물을 부어주고 집기 편하게 반찬을 엇바꾸어 앞에 놓아주기도 했다. 홍순이가 식사를 마치자 순철이는  더운물에 수건을 적셔 홍순이의 손과 얼굴을 깨끗이 닦아주었다. 맞은켠 침대에서 퍼지운 누룽지에 신 김치로 점심식사를 에때운 빼빼 마른 녀인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홍순이네를 탐문하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순철이가 그릇들을 챙겨들고 세면실로 나갔다. 그 녀인도 슬그머니 따라 나섰다. “어딜 가려구 그래?” 그녀 남편이 물었다. “변소 좀 갔다올려구.” “그럼 내 부축할게…” “관둡소. 내절루 갈만 하꾸마.” 순철이가 세면실로 들어가자 그 녀인도 따라 들어갔다. 녀인은 순철이가 그릇을 부시는 곁에 다가가 손을 씻는척하며 말을 걸었다. “에구, 수고하십꾸마.” 안해와 한 병실에 갓 입원한 환자임을 알고 순철이는 웃음을 지었다. “아, 예…” “집에 안사람이 입원한지 오래됐습두?>” “예, 한 보름 됐습니다.” “무슨 병으루 입원했습지?” “예, 자궁병이라 하던데…” “병이 중하담두?” “뭐, 그리 중한건 아니구요…” “김홍순이라 하는것 같던데.” “예, 맞습니다.” “혹시 전에 광명현 대전공사에서 부련회 주임 하지 않았댔습두?” “옳습니다. 그걸 어떻게…” “그 전에는 평안촌이라는 마을에 집체호루 내려왔댔습지?” 순철이는 두눈이 휘둥그래서 그 녀인을 쳐다보았다. “예, 맞습니다. 어떻게 그리 잘 아십니까?…” “후에는 광명현에서 계획생육판공실주임 했습지?” “맞습니다. 후에는 지구산아제한판공실에서 일하다 퇴직했습니다. 혹시 전부터 잘 아시는 분입니까?” “내 좀 압꾸마.” 처음에는 피기없는 얼굴에 웃음을 담고 사글사글 말을 걸어오던 녀인이 생각밖으로 퉁명스럽게 한마디 하고는 자리를 떴다. 물기있는 손을 훽훽 털고는 휑하니 자리를 뜨는 그 녀인을 뒤돌아보며 이상한 녀인이라는듯 순철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계속 그릇을 씻었다. 병실로 급급히 들어온 그녀는 곧추 홍순이 침대머리로 다가갔다. “이봅소, 이봅소…” 그녀 남편이 다가와 그녀를 잡아끌었다. “왜 이래? 면목두 모루는 사람과…” 녀인은 남편의 손을 활 뿌리치며 이불을 걷어젖혔다. “이보, 당신 김홍순 맞지?...” 금방 식사를 끝내고 조용히 누워 휴식하던 홍순이는 시끄럽다는듯 아니꼽게 응대했다. “그런데는요? 누군데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건가요?” “전에 대전공사에서 부련회 주임 했지?” 두눈에 독을 쓰고 반말까지 해가며 자기를 노려보는 그녀를 홍순이는 의아쩍게 쳐다보았다. “그런데는요?...” “맞구나. 너 그년이 맞구나. 아이 낳을만한 안깐덜이문 돌아가며 잡아들여 도투새끼 불알까듯하던 마귀년이 맞구나. 네 이년…” 날이 선 그녀의 두눈은 먹이를 노리는 매마냥 시퍼런 불빛이 번뜩이였다. 그녀는 대번에 홍순이의 머리채를 거머쥐여 홍순이를 잡아일으켰다. “네 이년, 내 귀신이 돼서라두 네 년을 찾아가자 했는데 오늘 여기서 잘 만났구나…” “당신 미쳤어? 왜 이래…” 그녀 남편이 달려들어 그녀의 두손을 떼내려했다. 허나 집게처럼 집혀진 그녀의 우악진 손을 풀어낼수 없었다. 평소에는 곁사람이 재채기를 해도 날려갈듯 비칠거리던 마누라한테 어디서 이런 힘이 뻗쳐왔는지 알수 없었다. 사람이 살다보면 벼라별 상봉이 다 있다지만 깊은 악연을 맺었다가 어느 날엔가 문득 이렇게 만나게 된 상봉이란 시퍼렇게 살아있던 분노가 분출구를 찾아 화산처럼 폭발한것이다. “이게 무슨 돼먹지 못한 짓거리야? 이손 떼지 못해?...” 홍순이는 머리채를 거머쥐운채 버둥거리며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온 몸을 좌우로 비틀었다. “네 이년, 나를 모르겠느냐? 내가 평안촌에 있던 양채옥이다. 30년전에 네년이 사람들을 데리구 와 청수동림장 양봉장에 숨어있는 나를 기어이 잡아다 여섯달이 다된 아이를 류산시켰지. 그뒤부터 내가 큰 병 얻어 얼매나 고생하며 살아왔는지 아냐?...이년…” 그릇을 씻어들고 들어오던 순철이가 이 뜻밖의 광경을 보고 너무 놀라 침대우에 그릇을 내던지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짓입니까? 할 말이 있으면 그 손 놓구 말씀하시오. 다 죽어가는 사람한테 이게 무슨 행패질입니까?” 순철이가 달려들어 그녀의 손을 풀어내려고 했으나 모지름을 썼다. 그녀 남편이 녀인의 허리를 끌어안아 뒤로 잡아당겼다. 홍순이 죽는다고 고아친다. 그 바람에 의사와 호사들이 달려들어왔다. “이게 무슨 짓들입니까? 어서 손을 떼시오..” 의사가 엄한 소리로 꾸짖어서야 양채옥이라 자칭하던 그녀는 비로서 손을 뗐다. 하지만 어느새 가래짝같은 손이 올라가며 부석부석한 홍순이의 귀썀을 불이 번쩍나게 갈겼다. “이년아. 눈깔을 똑바루 뜨구 봐라. 내가 누군가. 다 큰 애를 류산시켰으면 됐지 왜 또 후에는 신체검사한답시구 나 몰래 피임환을 넣어 사람을 이렇게 말라죽게 만들었냐?...그간 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냐? 네 같은 년은 열번 죽어도 다 겪지 못할 아픔을 난 한꺼번에 겪으면서 검질기게 살아온 목숨이다…이년…” 홍순이는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화가 치밀어 그녀에게 맞욕을 퍼부으려다가 갑자기 두눈이 휘둥그래지더니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이 뚝 멎었다. “그래, 두 눈깔을 똑바루 뜨구 봐라. 네 이년, 나를 알만하지? 그때두 정책에 아이 둘은 나을수 있다던데 네년은 왜 그렇게 눈깔에 쌍불을 켜구 두번째 임신한 온 동네 안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돼지잡듯 엎어놓았냐. 그따위 선진이 그렇게 좋더냐? 그따위 모범이 그렇게 좋더냐?” 그녀는 제 분을 못이겨서인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속에 피임환이 든줄두 모르구 시간이 갈수록 아래배 아프구 하혈이 심하니까 흑흑흑…그저 제 병이 나 그런가 했는데 나중에야 알구보니…글쎄 피임환이 30년이나 배속에서 살을 파고들어 이꼴이 됐지 뭐야…흑흑흑…병치료하느라구 집까지 다 팔아먹구 숱한 빚을 걸머져 하나밖에 없는 딸애가 대학입학통지서를 받구서두 대학에두 못갔다…아이구 원통해라…” 그녀는 자기침대에 가 쓰러지더니 엉엉 소리치며 통곡했다. 급작스레 벌어진 돌발사태에 그녀의 남편도 순철이도 어찌할바를 몰라했다. 평소에는 비실비실하던 자기 마누라가 왜 갑자기 살을 맞은 암펌마냥 펄펄 날뛰며 저 녀자에게 행패를 부렸는지. 저 녀자 정말 그때 그 부련회 주임이란 말인가? 그릇 씻으러 간 사이 무슨 맞갖잖은 일이 벌어졌길래 면목도 모르는 촌녀인이  가만히 누워있는 자기 안해에게 행패를 부렸는지. 한 병실에 입원한 환자들이면 초면이라도 서로 동정하고 위안하는것이 상례인데 환자들끼리 이렇게 치고 박고 날뛰며 싸우기는 보기 드문 일이였다. 의사는 침대에 엎드려 흐느끼는 녀인을 쏘아보며 엄포를 놓았다. “여기는 병실입니다. 절대 환자들의 안정이 필요합니다. 어린애두 아닌 분이 이게 무슨짓입니까?”   그리고는 간호사들을 휘동하여 자리를 떴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나간후에도 그녀는 슬피 흐느끼며 넉두리를 했다. “…우리 동네 금자 에미구 생금 에미두 몇십년 동안 배속에 피임환이 들어있는줄 모르구 크구작은 병원 다 돌아다니며 숱한 돈을 팔다 비달비달 앓다죽었지…불쌍한 애들은 또 얼매나 많이 잡아치우구…그렇게 배속에서 다 큰 애덜두 죄다 잡아뺐으니 어떻게 종재(종자) 늘어나겠냐…애들이 없으니 동네핵교두 다 문닫구…나두 그때 류산한후부터 얼매나 고생하며 살아왔는지 아냐…그래두 네년은 벼슬만 잘하구, 펀히 살아 호강하구…뭐? 병원식당밥이 맛이 없어 못먹는다구?...이 년아…우린 그런 밥두 사먹을 돈이 아까와 입원할라 오며 집에서 가마치(누룽지) 한 주먼지 메구 왔다… 아이고 내 팔자야…” 보아하니 그녀의 아픔은 가죽밖에 드러난 아픔이 아니라 모질게 뼈짬을 에이며 골수에 뿌리깊이 박힌 아픔같았다.    여지껏 이름난 녀성간부로 상급의 중용을 받으며 고개를  떳떳이 쳐들고 살아온 홍순이였다. 하찮는 농촌아낙네한테서 그처럼 창피를 당했으니 그녀로 말하면 하늘이 낮다고 펄펄 뛸 일이였다. 하건만 오늘은 웬인인지 말살에 쇠살에 악담하며 펄펄 뛰는 그녀인을 그저 쳐다만 보고는 언제나 도고하던 간부답지 않게 이불을 뒤집어쓰고 드러누웠다. 우는지 떠는지 그가 들쓴 이불이 그의 몸체를 따라 오르내리고있었다. 일이 안될라니 림시로 보통병실로 옮겨왔더니 재수없이 무지막지한 농촌아낙네를 만나 이런 봉변을 당한것이 아닌가. 연고없이 촌녀인에게 행패를 당한 안해를 대신하여 순철이는 건너쪽 침대에 노기찬 눈길을 보냈다. 그쪽 녀인의 남편은 송구스러운 눈길로 이쪽을 바라보다가 순철이의 사나운 눈길과 마주치자 황급히 눈길을 딴 곳으로 돌렸다. 두 남편은 각각 자기 안해 침대머리에 앉아 안해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를 몰라 절절맸다. 저쪽 남편은 이쪽의 눈치를 보며 엎드려 흐느끼며 넉두리를 하는 마누라를 그만하라는듯 흔들어대고 있었다. 순철이는 홍순이의 이불을 이쪽저쪽 꼭꼭 여며주면서 귀속말로 홍순이를 위안해주었다 갑자기 그쪽 침대의 농촌아낙네가 벌떡 일어나 뱀처럼 도사리고 앉아서 독기어린 눈으로 이쪽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 독기어린 눈빛과 심상치 않은 자세가 금시 먹이를 덮쳐물려고 목을 뽑아드는 뱀과 같아 언제 또다시 덮쳐올지 몰랐다. (계속)연변문학 2010년 제4호
8    세계고대문명중심지-중동(6)(허룡석) 댓글:  조회:1113  추천:97  2008-05-09
세계고대문명중심지-중동(5)9. 국제적쟁의 많은 콜란고지에서 허룡석 연변작가협회 주석 7월 9일 오전, 대표단일행은 아랍세계 특히는 시리아와 이스라엘간에 력사적쟁의가 가장 많은 콜란고지(戈兰高地)를 참관하고저 쿠네이트라성으로 떠났다. 쿠네이트라성은 이스라엘과 국경을 마주하고있는 수리아의 변경성으로서 세계가 주목하는 콜란고지가 바로 이 성내에 자리잡고있었다. 국제사회의 많은 관심을 끌고있는 콜란고지는 아직 대외에 개방하지 않은 군사요충지였다. 1967년의 제3차중동전쟁때부터 이스라엘은 수리아의 령토인 콜란고지를 장장 40년간 점령하고있었다. 그때로부터 수리아는 이스라엘을 자기의 숙적으로 간주하고 아랍세계에서와 국제적사무에서 한걸음도 양보없이 이스라엘과 견결히 대항해나섰다. 콜란고지는 수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에 있는 군사요충지로서 누가 점령하면 누가 군사적으로 아주 유리한 위치에 처하게 된다. 하기에 이스라엘은 이전에 점령했던 수리아의 기타 령토는 국제여론의 압력에 못이겨 모두 돌려주었지만 콜란고지만은 돌려주지 않고있다. 만일 콜란고지를 돌려주게 되면 자기들이 수리아의 군사적감시하에 처하게 되며 이스라엘동북변경의 안전보장에 커다란 후환을 남기게 된다고 인정하고있기때문이였다. 20세기 40년대에 중동땅에 이스라엘이란 없던 나라가 생겨나면서부터 아랍세계에는 화약냄새가 짙게 풍기기 시작했고 전쟁이 그칠 사이 없었다. 아랍나라들에서는 이스라엘을 중동평화를 파괴하는 간악한 장본인으로 보고있지만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막강한 힘을 갖고있는 이스라엘을 감히 힘으로는 대처하지 못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민들과 세계적여론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만 미국과 유럽의 영국, 프랑스 등 강국들이 이스라엘켠에 서서 지원하고 두둔하고 어루쓰는통에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고있다.  이스라엘은 세계각지에서 모여온 유태인들이 모여사는 이민국이다. 유태인의 원조는 고대싼족의 지맥인 시버래인이다. 시버래인은 기원전 13세기말에 팔레스티나로 옮겨와 자리를 잡았고 기원전 11세기에 시버래왕국을 건립하였다. 기원전 10세기중엽에 이르러서는 가장 흥성하고 번영한 시기를 맞이했었다. 기원전 63년에는 로마인들이 침입해왔다. 대다수 유태인들은 조상들이 장기간 피땀으로 가꿔놓은 가원을 억울하게 침략자들한테 몽땅 빼앗기고 팔레스티나에서 쫓겨나 유럽과 아메리카로 살길을 찾아 흩어져갔다. 그후 19세기말 구라파에 모여살며 일정한 힘을 키워온 유태자산계급은 “유태복국주의운동”을 발기하고 1897년에 이르러 “세계유태복국주의조직”을 창립하였다. 1917년에 로제국인 영국이 팔레스티나를 점령하고 그해 11월 2일에 “유태인들이 팔레스티나에 자기 민족의 가원을 건립하는것을  찬성한다”는 선언을 발표하였다. 1922년 7월 24일에 국제련맹에서는 영국에서 내놓은 “위임통치훈령”을 통과하고 팔레스티나에 “유태민족의 가원”을 건립하기로 결정하였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에서는 팔레스티나를 “분할통치”할데 관한 결의를 채택하고 팔레스티나에 각각 아랍국과 유태국을 건립하며 예루살렘은 국제화를 실시하며 유엔에서 관리하기로 결정하였다. 유엔의 결의에 따라 1948년 5월 14일에 이스라엘은 전세계에 유태인들의 나라성립을 선고하였다. 이스라엘이 성립된후 이스라엘정부에서는 천방백계로 세계각지에 널려있는 유태인들을 이민시키는것을 첫번째로 가는 기본국책으로 삼았다. 이민래원은 주로 두개 지역으로 나뉘여졌는데 하나는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오는 이민이고 다른 하나는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오는 이민이였다. 1948년부터 1972년사이에 네차례 대규모적인 이민운동이 벌어졌는바 약 140만명에 달하는 세계각지의 이민들이 이스라엘로 들어왔다. 80년대말부터 90년대초에는 구쏘련이 해체되고 동유럽에 극변이 일면서 100여만에 달하는 이른바 사회주의진영나라에 있던 유태인들이 이스라엘로 밀려들어왔다. 1984년에는 이스라엘정부에서 취한 “머시행동”과 “소라문행동”으로 또 3만여명의 유태인들을 비행기로 공중수송해왔다. 2001년부터 2002년사이에 에피오티아 등 아프리카나라에서 유태인 8만여명이 이스라엘로 건너왔다. 2004년 6월부터 아직도 세계각지에 널려있던 유태인들이 또다시 이스라엘로 몰려드는 새로운 고조가 일어나고있다. 이와 같은 몇차례의 대규모적인 이민운동으로 하여 이스라엘은 세계적으로 가장 빠른 인구고속증장을 가져왔다. 1948년에 나라가 세워질 때에는 인구가 120만밖에 안되였으나 현재는 근 700만명으로 치달아오르고있다. 국민중 유태인이 540만명을 차지하고 아랍인이 130만명을 차지하며 기타 민족이 5% 가량 차지한다. 중국혈통의 화인은 2만명 가량 된다.  유태인은 세계적으로 공인하는 근면하고 지혜로운 민족이다. 나라없는 설음을 안고 2000여년동안이나 세계각지에 떠돌이로 살고있을 때도 유태인들은 끈질긴 노력과 뛰여난 총명으로 이민국의 정치, 경제, 과학, 교육, 문화 등 각 분야에서 자기들의 뚜렷한 위치를 찾았으며 상층부문에서 맹활약하던 거두들이 수없이 출현하였다. 사회과학대사 칼·맑스, 자연과학대가 아인슈타인, 심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로이드 등 명성이 뜨르르한 세계적거장들은 모두가 유태인출신들이다. 더욱 놀라운것은 1901년에 첫 노벨상을 시상해서부터 2001년까지의 100년사이에 노벨상수상자가 도합 680명이였는데 그중 유태인과 유태인혈통의 수상자가 138명으로서 수상자수의 5분의 1을 점하였다는것이다. 하지만 유태인은 세계인구의 500분의 1밖에 안된다.  유엔에서 팔레스티나에 자기들의 나라를 세우기로 결의하자 세계각지에 널려있던 많은 유태인들이 환희와 감격에 젖어 장기간 몸을 담그고있던 원 나라에서의 모든 직을 버리고 오매에도 그리던 새롭게 세워진 자기 나라에로 달려왔다. 과학가는 첨단기술을 가지고 상인은 돈다발을 메고 일반인은 나라를 위해 모든걸 다 바치려는 뜨거운 마음을 안고 시집간 딸이 오랜만에 친정으로 오는 마음으로, 핍박에 의해 떠돌이 하던 아들이 눈물을 머금고 부모를 찾아오는 마음으로 이스라엘로 모여왔다. 미국과 그의 동맹국들인 유럽의 영국, 프랑스 등 강국들도 자기들의 리익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장차 아랍나라들을 견제하고 대처할수 있는 거점과 발판으로 여기고 새로 세워진 이스라엘에 방대한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주었다. 하여 자연자원이 극도로 결핍한 이스라엘은 국민들의 단합된 힘과 외부의 원조로 아주 짧은 시간내에 아랍땅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공인하는 경제고속성장을 이룩하였으며 아랍나라들에서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하는 많은 세계적첨단과학기술을 소유한 경제대국, 군사대국으로 되여 아랍사람들앞에서 우쭐렁거렸다. 특히 세계의 주목을 끄는것은 이스라엘에서 나라건립초기부터 어린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전반 국민교육에 커다한 중시를 돌리고 장기간 교육에 대한 투자를 대폭 늘였다는 점이다. 하여 국민들의 각종 자질이 아주 높아졌는바 과학가와 기술일군이 만명당 140명에 달하여 세계발달국수준에 도달하였다. 아모스·오즈와 같은 국제적 영향력이 대단한 걸출한 작가들도 수두룩이 배출하였다. 이스라엘에는 “유태인 두 사람에게는 머리 세개 있다.”는 속담이 있다. 그만큼 총명한 사람들이 또한 모두가 나라발전문제를 둘러싸고 사색한다는것이다. 세계발전사를 연구하는 많은 전략전문가들은 온 나라 국민들이 대통령으로부터 택시기사에 이르기까지 평등하게 의견을 교환하고 쟁론하며 교류할수 있다는 조화로운 사회분위기를 이스라엘이 신속히 발전할수 있는 가장 중요한 “비밀무기”로 보고있다. 이처럼 종합적자질을 갖춘 국민을 갖고있는 이스라엘은 점차 여러 아랍나라들이 미워하면서도 무서워하는 숙적으로 되였다. 이스라엘은 짧디짧은 몇십년간의 노력을 거쳐 인구당 GDP가 2.5만딸라에 달했으며 종합적경제실력이 세계 12대강국의 행렬에 들어섰다. 다년간의 전쟁으로 관광업이 엄중한 타격을 받고 전쟁에 대처하기 위하여 GDP의 10%를 군사비용에 처넣으면서도 짧은 시간내에 수백년의 분투를 거쳐 이룩한 기타 발달국의 수준에 이른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경제발전과 더불어 이스라엘은 이미 세계 제4대무기수출국으로 되였으며 미국, 영국, 인도, 터키 등 나라들에 레이저시스템, 무인정찰기, 미싸일 등 세계첨단장비들을 수출하고있다. 이스라엘이 수출하는 무기중 약 5%의 소총과 탄약들이 내전을 겪고있는 아시아와 아프리카국가들에 흘러들고있어 국제사회의 질책을 받기도 한다. 장기적이고도 온당하게 고속경제성장을 이룩한 이스라엘은 교육이 뒤떨어져 국민자질이 낮고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근본 자기들의 상대도 안되는 아랍인들을 렬등민족이라고 깔보며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1947년에 유엔이 팔레스티나에서 두 나라의 분할통치결의를 채택할 때는 이스라엘의 국토면적을 1.49만k㎡(약 연변땅의 1/3정도 됨)로 명확히 규정했으나 다섯차례의 중동전쟁을 거친후 지금은 실제적으로 2.5만k㎡의 면적(북경시의 면적보다 좀더 큼)을 통제하고있었다. 그가운데 수리아의 콜란고지면적 1200k㎡도 들어있다. 이스라엘은 나라가 건립되여서부터 자기보다 10배도 더되는 아랍인들의 포위속에서도 멸망되기는 고사하고 싸울 때마다 자기의 국토면적을 넓혔으며 유태인의 존재를 세상에 떳떳이 과시하였다. 팔레스티나와 이스라엘과의 모순은 중동문제의 핵심과 관건이였다. 제1차, 제3차와 제5차 중동전쟁의 폭발은 모두 팔레스티나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생사판가리전쟁이였다. 그중에서 서로 자기것이라고 장기간 아귀다툼하는 예루살렘의 전망이 가장 복잡하고 해결하기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 이 문제의 해결은 당지 아랍인과 유태인의 세속권익과 관계될뿐만아니라 전세계 기독교, 무슬린과 유태인들의 종교감정과 종교권익에 관계되기때문이다. 예루살렘은 3대종교가 서로 대체할수 없는 성지이며 아랍인과 유태인의 충돌이 가장 먼저 폭발하는 곳이기도 하다. 1947년에 유엔에서 이스라엘에 아랍국과 유태국을 세우기로 결의를 채택할 때는 예루살렘을 국제화하며 유엔에서 관할한다고 명확히 규정했으나 간이 커진 이스라엘은 일방적으로 1950년에 수도를 원래의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에로 옮겨왔으며 1980년 7월에는 예루살렘을 자기들의 떼여놓을수 없는 영원한 수도라고 전세계에 공공연히 선포하였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가지고있는 대다수 나라에서는 유엔의 결의를 존중하여 자기들의 대사관을 의연히 텔아비브에 두고있다. 팔레스티나와 이스라엘의 충돌로부터 인기된 아랍과 이스라엘간의 모순은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시간이 가장 오래고 관련면이 가장 광범위한 지역적충돌이다. 팔레스티나에 아랍국과 유태국이 함께 세워진이래 령토분쟁의 발단으로부터 종교모순, 정치충돌, 문화차이, 자원쟁탈과 민족적원한으로 하여 선후 다섯차례나 대규모 중동전쟁이 일어났다. 전쟁결과 여러 나라가 련합하여 싸운 아랍인들도 이가 갈리도록 저주하는 유태인들을 “바다로 쫓아내지 못했으며” 자기의 힘을 믿고 야심발발하게 고군작전한 유태인들도 아랍땅에서의 “대이스라엘제국”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아랍땅에서 전쟁의 불길이 끊임없이 타오르면 자기들의 세계적형상과 장원한 리익에도 손상이 된다고 인정한 유엔과 미국 등 대국들이 나서서 아랍인과 유태인들을 “화해”시키고 모순충돌을 해결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해결을 보기는커녕 모순은 점점 더 커가고 충돌은 갈수록 치렬해졌다. 장기간 이스라엘과 강경히 대처해오던 팔레스티나의 유명한 정신수령 아라파트가 죽은후 2004년부터 팔레스티나내부의 파벌모순이 갈수록 첨예해지면서 이스라엘을 주요목표로 한 강경파들의 “자살성폭탄”사건이 도처에서 일어나 아랍세계는 물론 전반세계가 극단적테로의 살벌한 ㎸廈?nbsp;시달리고있다.    우리가 쿠네이트라성소재지에 도착하자 길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있던 쿠네이트라성작가협회 주석이 우리 차에 올랐다. 70여세 된 로주석은 우리와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하는 말이 콜란고지를 참관하고 내려와서 식사전에 자기네 작가협회 회원들과 좌담회를 가지기로 하고 이미 통지했는데 괜찮겠는가고 했다. 이곳에서 좌담회를 가지는것은 원래 계획에 없던 행사였다. 로주석은 자기네 작가들이 모두 중국동지들을 보고싶어하기에 시간이 촉박하여 중국동지들의 동의를 거치지 못하고 먼저 통지해 대단히 미안하다고 덧붙였다. 섭참찬은 아얼타이단장의 의견을 물었다. 아얼타이단장은 또 나의 의견을 물었다. 콜란고지를 참관하고 내려와서 어차피 성소재지에서 식사하게 되였기에 이들이 이미 통지까지 내보냈다니 시간을 짜내 좌담회를 간단히 갖기로 합의를 보았다. 우리가 자기네의 의사를 존중해주니 로주석은 매우 감격해하였다.  콜란고지는 성소재지에서 50㎞ 가량 떨어져있었다. 그 구간에 군사검문소가 세개나 세워져있었다. 검문소마다 보초서던 군인이 우리 차를 세우고 통행증을 검사했다. 세번째 검문소에 이르러 로주석과 우리를 안내하는 작가협회일군이 검문소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우리 일행중 왕립순이 카메라를 내들고 뻐스차창밖으로 검문소와 그 주위를  록상하니 총을 꺼꾸로 멘 군인이 달려오더니 당금 카메라를 빼앗을듯이 눈을 부라리며 을러메였다. 접촉성이 좋은 섭참찬이 나서 이분들은 중국에서 온 국가작가대표단인데 이곳 규정을 모르고 한것이니 량해하라고 부드럽게 해석했다. 중국대표단이라는 말에 험상궂게 나오던 군인은 퍽 누그러들면서 여기에서 마음대로 촬영하면 안된다고 다시한번 엄포를 놓았다. 왕립순도 즉시 카메라를 거두며 미안하다고 성근히 사과하니 군인은 우호적으로 손을 흔들며 물러갔다. 기실 검문소를 지나면서부터는 마음대로 카메라촬영을 해서는 안된다고 사전에 귀띔을 받은터였다. 한참후에 로주석네가 작달막하고 오동통하게 생긴 한 군인을 데리고 차에 올라왔다. 콜란고지까지는 이 군인이 우리를 안내한다고 하면서 지금부터 우리 일행이 이 군인의 말에 따라줄것을 부탁하였다. 마지막 검문소에서 콜란고지를 가는데 반시간 가량 걸렸다.  이 길에 들어서면서부터 금방 전쟁을 치른듯 페허에 페허가 잇달았다. 무너지고 파괴된 집들이 줄줄이 그대로 방치되여있었다. 이곳은 워낙 인구가 3만명 가량 되던 자그마한 진이였는데 1967년 제3차 중동전쟁때부터 이스라엘의 강점하에 있었다. 1974년에 국제여론의 강력한 비난에 못이겨 이스라엘군이 철군하면서 이곳에 있던 주택, 학교, 병원 등 건축물들을 모조리 파괴하고 달아났다. 그때로부터 이젠 30여년이 지났지만 수리아에서는 파괴된 “상처”를 거두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두고있었다. 그 원인을 물었더니 첫째는 전세계에 이스라엘침략군의 만행을 폭로하기 위하여 견증물로 남겨놓은것이고 둘째로는 국내국민들에게 장기적으로 애국주의교양을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수리아정부측에서는 아랍세계는 물론 기타 세계 각국에서 오는 가지각색 명목의 국가대표단을 모두 콜란고지를 참관하도록 배치하고 이스라엘의 침략만행을 공소하며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민들의 성원과 세계여론의 지지를 얻어내려 했다. 국내적으로는 경상적으로 각계각층의 인민대중과 학생들을 조직하여 이곳을 참관하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침략자에 대한 국내인민들의 불타는 적개심을 가일층 불러일으키고 애뮐聆프ㅍ탔?고양시키고있었다. 우리의 차는 한 커다란 페허더미앞에 멈춰섰다. 이곳은 원래 이 진에서 가장 큰 하나의 중학교였는데 이스라엘군이 급급히 철거하면서 자기의 보금자리를 지켜내려고 울부짖으며 항의하는 교원과 학생들을 강제로 쫓아내고 학교 전체를 사정없이 폭파시켜버렸다. 로주석은 그때 이 중학교의 교원이였단다. 어문교원을 담임했지만 체육에 애호가 있는 그는 아침저녁으로 이 학교의 널다란 운동장에서 표창던지기련습을 열심히 하여 성에서 열린 체육운동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따냈었다. 이젠 학교가 페허로 된지 30여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이 페허더미앞에 와서면 교실에서 울려나오던 학생들의 랑랑한 글소리 들리는듯하고 넓은 운동장에서 즐겁게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는듯하여 그냥 가슴이 쓰려오며 눈시울이 젖어난다고 했다. 비분에 젖어 이야기하는 그의 눈에는 어느덧 커다란 이슬방울이 그렁그렁 맺혔으며 솥뚜껑 같은 손바닥으로 자주 눈시울을 훔쳤다. 우리도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숙연해졌다. 우리의 눈앞에도 파괴되기전의 생기발랄한 이 학교의 모습이 방불히 보이는듯했으며 어렸을 때 다니며 많은 이야기를 남겨놓았던 정든 농촌중학교의 모습도 동시에 우렷이 안겨와 애절한 감정을 서로 융합시켜놓았다. 전쟁이란 이렇게 잔혹한것이였다. 세상 어느 나라나 공부하는 귀여운 학생들이 있기 마련이건만 력사를 더듬어보면 약소국의 학생들은 늘 전쟁의 피해자가 되여 공부할 자유마저 빼앗기는것이다. 이런 가슴아픈 일이 다시는 재연되지 말아야 하며 세계상의 모든 학생들이 마음놓고 공부할수 있는 평화로운 환경이 마련되기를 기원하며 우리는 무거운 발걸음을 떼였다.  우리는 또 이층으로 된 한 건물앞에 멈춰섰다. 건물은 절반가량 무너졌고 출입문과 창문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블록으로 된 바깥벽은 마치 우박맞은 소똥마냥 탄알자국이 다닥다닥했다. 우리가 탄알자국을 유심히 살펴보는데 여태껏 줄곧 말이 없이 우리를 안내하던 군인이 자진해나서서 이것은 기관총탄자국이고 이건 돌격총탄자국이고 이건 보총탄알자국이라고 일일이 설명해주었다. 이 병원은 원래 이 진에서 규모가 가장 큰 인민병원이였는데 이스라엘군이 철거해가면서 이 병원도 모조리 폭파하려고 날뛰였다. 그들은 의사와 간호사들을 강제로 몰아내려 했으나 그들이 버티고 나가지 않으니 위협적수단으로 바깥벽에 대고 여러가지 규격의 총으로 한바탕 란사하였었다. 이와 같이 의사와 간호사들을 쫓아내고는 입원한 환자들까지 쫓아내려 했으나 움직일수 없는 환자들이 많아 별수 없이 입원실이 있는 켠은 감히 폭파시키지 못했다는것이다. 하여 이 병원은 유일하게 전부 파괴되지 않은 건물로 남아있게 되였다. 하지만 집안벽에도 총탄자국이 수두룩하였다.  병원지붕에 올라서니 저 멀리 콜란고지가 한눈에 안겨왔다. 콜란고지는 하나의 커다란 산등성이였다. 산우는 이스라엘군이 점령하고있었는데 군데군데 지어진 새하얀 건물들과 그우에 안장된 레이다들이 해빛에 반사되여 시야에 똑똑히 안겨왔다. 산아래는 수리아군이 차지하고있었는데 완전히 이스라엘의 군사감시하에 놓여있었다. 둥글둥글 감아친 철조망이 두 나라의 국경임을 알려주고있었다. 국경사이에는 어느 나라에서 내버린것인지 낡아빠진 승용차와 트랙터가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로주석의 말에 의하면 산너머에는 커다란 자연호수가 하나 있는데 이스라엘에서 강점하기전에는 수리아서부의 중요한 음료수래원의 하나였단다. 이스라엘이 콜란고지를 강점한후에는 이스라엘과 담판하며 “비럭질”로 음료수를 해결하군 한단다. 이스라엘측에서 선심을 쓰는척할 때면 수문을 크게 열어주어 음료수문제가 해결되나 두 나라에 모순이 생기거나 자기네 기분이 언짢을 때에는 조금 열어놓거나 아예 닫아버려 하류에 있는 수리아측에서 마실 물이 없어 란리가 일어나게 했다. 제 나라 땅을 남에게 강점당하고 물마저 마음대로 마실수 없으니 수리아백성들이 이스라엘을 사무치게 증오하지 않을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도 별다른 해결책이 없이 분하고 억울한대로 담판을 통해 음료수를 해결하고있었다. 이스라엘이 심술을 부려 물을 잘 보내주지 않으면 수리아에서는 유엔과 대국들의 성원을 입어 간신히 물문제를 해결하였다. 수리아사람들은 수리아에서 콜란고지를 찾아오기전에는 음료수문제가 영원히 쉽게 풀리지 않을것이라고 통탄하고있다.  콜란고지 량측에는 유엔에서 파견한 평화유지부대가 주둔하고있었다. 그래도 평화유지부대가 콜란고지에 진주하면서부터 서로 물고 뜯던 두 나라 국경의 모순충돌이 많이 적어졌다. 평화유지부대에서는 유엔의 해당 헌장을 엄수하면서 두 나라간에 새로운 모순충돌이 발생하는것을 제지시키고있으며 일단 어느 구석에서 충돌이 발생하면 평화유지부대에서 유엔을 대표하여 조해에 나섰다. 유엔의 결정에 따라 상임리사국인 중국에서 파견한 평화유지부대도 콜란고지에서 근무를 집행하고있었다. 우리 나라의 위상이 국제적으로 나날이 높아져 국제사무에서도 한몫 크게 담당하고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가슴 뿌듯한 자호감을 느꼈다. 하지만 남의 싸움을 말리거나 싸우지 못하게 평화를 유지해주는 평화유지부대라 하지만 이곳에 파견되여와 근무하는 여러 나라 군인들도 수시로 되는 생명의 위협을 받고있었다. 테로의 돌연습격을 받거나 도처에 매장되여있는 지뢰를 밟을수도 있으며 두 나라의 무력충돌에서 하루아침에 풀잎의 이슬로 사라질수 있었다. 2006년 10월의 어느날 수리아측에 있는 평화유지부대군영에 난데없는 박격포탄 한발이 날아와 터졌는데 군인 네명이 당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중의 한명은 중국에서 파견한 평화유지부대의 병사였다. 우리의 자제병들은 세계평화를 위하여 세계각지에서 조용히 피와 땀을 흘려가고있었다. 지금은 비록 싸움이 처절한 전쟁마당이 아니라지만 콜란고지에 파견된 평화유지부대에서 해마다 사상자가 발생하고있어 유엔에서도 은근히 골머리를 앓고있다.  로주석은 저 멀리 바라보이는 콜란고지를 가리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콜란고지 저쪽에 아직도 우리 동포 2만여명이 이스라엘의 통치하에 신음하고있습니다. 이젠 조국과 떨어져있은지 40년이 되지만 아직도 조국의 품에 돌아오지 못하고있습니다. 조국인민들은 침략자의 강점하에 도탄속에서 헤매고있는 우리의 동포들을 한시도 잊은적이 없습니다.” 안하무인인 이스라엘이 수리아땅이였던 콜란고지를 점령하면서부터 콜란고지쪽에 있던 수리아의 네개 마을도 이스라엘의 통치하에 들게 되였다. 당시 이스라엘에 점령당할 때에는 네개 마을 인구가 7000여명밖에 안되였으나 40년이 지난 지금은 2만여명으로 늘어났다. 후에 섭참찬한테서 들은 이야기지만 수리아정부에서는 조국의 따뜻한 품과 떨어져 사는 불쌍한 그 2만여명이 하루 빨리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있지만 오히려 그 “불쌍한 동포”들이 돌아오려 하지 않고있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장기적인 고속경제성장과 더불어 그들의 생활수준도 대단히 높아져 지금의 수리아국민들의 생활수준과 비교도 안되게 우월하기때문이였다. 수리아정부에서 때때로 랍치해간 자기네 동포들을 돌려보내달라고 이스라엘정부에 교섭하면 이스라엘측에서는 가라고 해도 가지 않고 갖은 방법을 다해 자기네 국적에 넘는걸 무슨 방법이 있느냐며 배포유한 소리를 한단다. 그러면 화가 치민 수리아측에서는 견결히 조국에 돌아오려는 자기네 동포를 억류해놓고 세계인민들을 기만하는 도깨비소리를 한다고 맹공격한단다. 이스라엘정부에서는 전세계에 “진실”을 홍보하고 수리아백성들이 “사실의 진상”을 알게 하고저  “랍치되여간 동포”들더러 수리아에 가 친척방문을 하도록 “선심”을 썼다. 배포유한 이스라엘정부에서는 수리아사람들보다 배부른 그들이 절대 경제적으로 많이 뒤떨어진 “조국”으로 도망치지 않으리라는것을 굳게 믿고있었다. 수리아정부에서도 옛 생각 그대로 애국심이 있는 자기네 동포들이 수리아국경만 넘어서면 다시는 침략자의 이스라엘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여기고 그들이 친척방문 오는걸 흔쾌히 동의하였다. “랍치되여간 동포”들은 뜻밖에 이스라엘정부에서 다년간 보지 못했던 형제들과 친척들을 만나볼수 있게 되여 대단히 감사해하며 자기들이 어떻게 잘살아가고있는가 자랑하려는 들뜬 마음에 딸라주머니를 메고 숱한 생활필수품과 금은장신구, 텔레비, 랭동기 등을 큰 트럭에 싣고 자기네는 고급승용차에 앉아 호호탕탕히 수리아로 들어갔다. 이스라엘에 “랍치되여간 동포”들이 금의환향한 모습을 보고 수리아 친척들은 눈이 휘딱 뒤집혀졌다. 당국의 선전처럼 자기네 친인들이 침략자들한테 끌려가 짐승보다 못한 생활을 하며 죽지 못해 살아가는가 했더니 이렇게 대부자가 되여 돌아올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것이였다. “랍치되여간 동포”들이 친척방문을 오는통에 가까운 친척들은 하루밤새에 모두 벼락부자가 되였다. 이렇게 되니 “랍치되여간 동포”들이 어떻게 하면 조국의 품에 돌아올것인가 하는것이 문제가 아니라 수리아 친척들이 살기 좋다는 이스라엘로 도망쳐 살수 있느냐 하는것이 구석구석에서 수군거리는 열띤 화제거리로 되였다. 수리아 친척들은 나날이 썩어간다는 이스라엘이 자기네 위대한 수리아보다 더 발전하고 이스라엘침략자들이 자기네보다도 훨씬 더 잘산다는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였다. 동포들이 방문온 기회를 놓칠세라 수리아정부관원들이 “랍치되여간 동포”들을 찾아나와 당신들을 한시도 잊지 않고있는 위대한 조국으로 돌아오라고 열심히 “교육”하면 “랍치되여간 동포”들은 겉으로는 “몹시 안타까와”하며 돌아오고싶어도 이스라엘에서 이젠 국적까지 넘겨놓고 돌아가지 못하게 한다며 한숨을 풀풀 내쉬고 밤이면 친척들한테 가만가만 이스라엘이 수리아보다 여사여사하게 발전하고 살기 좋다고 홍보하였다. 여태껏 모든것이 침략국 이스라엘보다 우월한 자기네 위대한 사회주의나라에서 “세상에 부럼없이” 살아오던 수리아 친척들의 마음만 들뜨게 했다. 이스라엘이 여차여차하게 발전하고 살기 좋다는 소리가 한입에서 만입으로 전해지는통에 수리아당국에서는 부득불 “랍치되여간 동포”들의 친척방문을 막아버리는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미 이스라엘국적에 넘은 그들을 억지로 잡아둘수도 없었다. 공연히 지난날 침략자들한테 끌려가지 않겠다고 발버둥치던 애국심이 높던 그제날의 자기네 동포들을 믿고 친척방문을 허락했다가 “랍치되여간 동포”들이 조국에 돌아오기는커녕 조국에 있던 동포들마저 이스라엘로 도망쳐버릴 위험이 갈수록 커졌던것이였다. 우리 나라에서도 60년대초에 사회주의조국과 멀리 떨어진 바다건너 장개석의 암흑한 통치하에서 신음하며 죽지 못해 살아가는 대만동포들이 암흑을 버리고 광명을 찾아오면 4대기물(재봉침, 자전거, 라지오, 손목시계)을 장려한다는 정책이 있었던것 같다. 그때 우리 나라 백성들은 집에 사회주의우월성을 과시하는 4대기물을 갖춰놓고 사는것이 최대의 념원이였으나 정작 그렇게 갖춰놓고 사는 가정은 극소수였다. 우리는 남들보다 잘살지 못하면서도 압박받고 착취받던 구사회와 대비하며 인민이 주인된 사회주의나라에서 세상에 부럼없이 가장 행복하게 사는줄로 알고있었다. 하지만  도탄속에서 허덕인다던 암흑한 대만에서는 그때 벌써 우리와는 다른 4대기물(주택, 승용차, 텔레비, 랭동기)을 갖춰놓고 사는 사람들이 푸술한줄 우리는 감감 모르고있었다. 대륙의 “후한” 장려정책이 대만에 전해지자 대만사람들의 웃음거리로 되였다는 이야기를 썩후에야 듣게 되였다.  수리아와 이스라엘의 사실이 보여주다싶이 온 나라 백성들을 꼭같이 잘살게 해준다는 사회주의가 날따라 썩어간다는 자본주의보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모든 면에서 아무리 우월하다 해도 경제가 발전하지 못하고 백성들의 생활이 자랑스러울 정도로 펴이지 못하면 아무런 설득력이 없게 되고 믿음을 잃게 되는것이다, 이태전에 길림성신문보도일군대표단이 서유럽 11개 나라에 참관을 갔을 때 지난날 사회주의진영에서 우리 나라와 떨어질수 없는 친밀한 형제라던 알바니아, 로므니아, 뽈스까, 웽그리아, 벌가리아, 체스꼬 슬로벤스꼬, 동부독일 등 동유럽사회주의나라 백성들이 살길을 찾아 자본주의 서유럽나라들에 쓸어들어와 남성들은 막일하고 거리바닥장사하고 비럭질하는가 하면 녀성들은 매음하는 등 가슴아픈 사연들을 적지 않게 보고 들었다. 당시 우리의 마음은 아주 착잡했으며 모순으로 가득 찼다. 사회주의는 뭐나 자본주의보다 우월하여 짧은 시일내에 누구나 다 행복하게 살수 있는 공산주의를 실현한다던 사회주의나라의 백성들이 왜 나중에 자본주의나라에 와 살길을 찾아야 하는가. 그들이 부르짖던 쏘련식사회주의가 그래 공산주의로 가는 금다리가 아니였단 말인가? 그래서 70여년간 사회주의진영에서 그 누구도 대체할수 없는 빛나는 모델로, 큰형님으로 우러러 불리우던 쏘련을 비롯한 동유럽사회주의나라들이 만백성들의 민심을 잃고 하루아침에 무너진것이 아니겠는가.  한 나라가 갈라져 부동한 제도를 실시한 동서독일의 나라발전차이가 그 전형적인 일례라 하겠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자 유엔은 독일의 힘을 갈라놓고저 미국과 쏘련이 독일을 나누어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1945년까지 독일의 수도였던 베를린시를 미국, 영국, 프랑스와 쏘련이 나누어 점령하였다. 그후 서베를린시는 서독의 수도로 되고 동베를린시는 동독의 수도로 되였다. 서독은 미국을 따라 자본주의제도를 실시하고 동독은 쏘련을 따라 사회주의제도를 실시하면서 두개 적대진영으로 나뉘여져 장기간 대치상태에 처해있었다. 그런데 10여년이 지나면서부터 서독의 경제가 동독보다 훨씬 발전하게 되여 갈수록 많은 동독의 백성들이 사회주의고 뭐고 모든걸 팽개치고 살기 좋은 서독으로 도망쳐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되자 동독정부에서는 도망치는 자국백성들을 막다 못해 1961년 8월에 동서베를린사이의 45.1k㎡에 이르는 경계선에 콩크리트장벽을 쌓고 철조망을 쳐놓아 자유로 드나들던 국경을 봉쇄했다. 그래도 도망치는 사람들을 막아낼수 없었다. 어떤 사람은 기구를 타고 하늘로 도망쳤고 어떤 사람은 땅굴을 파고 땅밑으로 도망쳤으며 또 어떤 사람은 변방군에게 뢰물을 먹이고 “감歌걋瞼?사라지기도 했다. 세계적여론에 골치아파난 동독정부에서는 애국주의정신이 꼬물만치도 없이 나라망신만 시키는 저주로운 “매국주의자”들을 엄하게 다스리고저 서독으로 도망치다 붙잡힌 탈출자에게 최고 8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제재에도 불구하고 살길을 찾아떠나는 동독백성들의 탈출은 계속되였다. 변방을 보위하는 변방군의 일이란 탈출자들을 감시하고 잡아내는 일이 위주였다. 1989년 11월 4일, 독재통치로 하여 장기간 잠재웠던 분노가 일시에 폭발한 동베를린시의 100만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성세호대한 반정부대시위를 벌려서야 동독정부는 핍박에 못이겨 동서독일의 국경을 다시 전면개방한다고 선포하였으며 28년간이나 동서베를린시를 갈라놓았던 콩크리트장벽을 허물어버렸다. 그후 한해도 못되여 장장 40여년간 쏘련식사회주의제도를 실시해오던 락후한 동독은 자본주의제도를 실시해온 발전한 서독에 무조건 흡수통일되고말았다. 이로써 세계정치적풍운의 산물로 태여나 장기간 적대진영으로 나뉘여 존재해왔던 독일은 비류혈적으로 굴곡적이였던 한단락 력사를 종말짓게 되였다. 곡절 많았던 독일의 력사는 한 나라의 력사뿐만아니라 세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두개 진영의 복잡다단한 력사의 한자薦堅竪?했다.  미제국주의 코밑에서 근 반세기동안 견정불의하게 공산주의기치를 높이 들고 용감히 사회주의길로 나아가 카리브해의 “밝은 등대”로 불리우던 아메리카주의 유일한 사회주의 나라 꾸바의 “혁명할수록 가난해지는”현상도 사람들의 깊은 사색을 자아낸다. 1959년 1월에 무장투쟁에 성공하여 새로운 인민의 정권을 세우고 아메리카땅에서 가장 살기 좋은 첫 사회주의나라를 만들겠다던 카스트로의 원대한 리상은 점차 물거품으로 되여갔으며 나중에는 공상으로 돼버렸다. 혁명이 성공된후 그는 외국자본을 몰수하고 지주, 자본가를 타도하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눠주면서 완전히 쏘련식사회주의제도를 실시하였다. 하지만 꾸바경제는 장기간 미국의 경제봉쇄작전에 시달렸고 전쏘련과 동유럽 여러 사회주의나라 지원과 중국의 원조에 의거해 나라를 간신히 유지해나갈 정도였다. 장기간 대립상태로 존재하던 두개 진영이 깨뜨려지고 랭전이 붕괴됨에 따라 전쏘련이 로씨야로 바뀌고 예리친이 대통령으로 올라와 집정하면서부터 꾸바의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전쏘련이 아메리카주의 사회주의전형으로 내세웠던 카리브해의 “밝은 등대” 꾸바를 돕고저 장기간 의무적으로 수입해들이던 꾸바의 주鴉稚銖갭炷?설탕수입을 중단하였고 혼란스럽던 문화대혁명을 결속지은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하면서 자기 나라 경제건설에 전력하면서 여태껏 무상으로 주던 각종 지원을 끊어버리자 꾸바는 완전히 고립되였으며 나라경제도 붕괴직전에 이르게 되였다. 이렇게 되자 수십년간 생활고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언제면 잘살수 있을가 하던 허무한 기대를 포기하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살길을 찾아 미국과 기타 나라로 대량 밀항하기 시작하였다. 정부에서 밀항자들을 아무리 엄하게 징벌해도 백성들의 탈출은 계속되였다. “위대한 혁명수령” 카스트로를 더욱 난처하고 격분케 한것은 1933년에 카스트로의 친딸인 알리나 페르난데스마저 아버지가 령도하는 위대하다는 사회주의 꾸바를 버리고 제국주의 미국으로 망명하여 세계여론의 웃음거리를 만들었다는것이다.  여러 형제적사회주의나라들이 장기간의 피어린 무장투쟁으로 서로 도우며 혁명을 성공시켰으나 정권을 잡은후 경제건설에는 하나같이 자본주의에 뒤지게 되는 원인이 과연 무엇이였을가? 백성들을 잘살게 하기 위한 순박한 마음으로 장기간 피흘리며 혁명해온 사회주의혁명가들로 놓고 말하면 이는 심각한 사색을 자아내는 침통한 력사적교훈이 아닐수 없다.  그 어떤 정치이데올로기만으로는 배를 불릴수 없고 몸을 가릴수 없는것이다. 못살고 가난한 나라에서는 국민들의 애국주의정신이라는것도 무색해지기 마련이다. 수십년간 “사회주의혁명”을 해도 그냥 남보다 잘살지 못하면 그건 사회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인들 누가 옹호하고 지지하며 지어 목숨을 바치려 하겠는가. 이곳에 와서 우리는 가난은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한 등소평동지의 말씀이 천만지당한 철리임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였다.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과학발전을 도모하고 고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하여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해마다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릴 때 만일 우리 나라에서 아직도 경제발전을 저애하던 그제날의 정치로선대로 계급투쟁을 기본고리로 삼고 몇년에 한번씩 무자비한 정치운동을 하며 사람잡이에 이골이 나있고 인민들의 생활수준이 60∼70년대의 가난한 상태에 머물러있다면 우리도 애국주의를 운운할수 있겠는가? 배가죽이 등에 가 붙은 굶어죽는 사람들한테 아무리 위대하고 고상하다는 정치적설교인들 먹혀들어가겠는가?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아무런 삶의 희망도 발전가망도 보이지 않는 그러한 사회주의를 옹호하겠는가? 한 나라의 위치가 바로 서지 못하면 그 나라의 백성들도 밖에 나가 설자리가 없게 되며 가는 곳마다 업신당하고 모독당하기 마련이다. 사회주의제도를 실시한다는 수리아와 자본주의제도를 실시한다는 이스라엘과의 경제발전차이에서 나타난 철 같은 사실들을 통해 우리는 발전은 가장 큰 도리라고 한 등소평동지의 말씀을 이곳에 와서 깊이 터득하게 되였다. 동시에 늦게나마 세계적발전흐름을 명철히 통찰하고 개혁개방시책으로 장기간 고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날따라 향상되고 나라의 종합적국력이 강화되고 우리 나라의 위상이 국제적으로 갈수록 높아지고있음을 우리는 다행스럽게 생각하게 되였으며 자랑스럽게 느끼게 되였다.  세계근대사의 력사가 보여주는바와 같이  한 나라의 통치자가 자기의 종신적인 독재통치자리를 지켜가기 위하여 자신을 신격화하고 개인숭배하며 갖은 수단으로 고압적철통통치를 실행하고 부동한 정견자를 숙청하고 인민대중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나라치고 경제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세계적발전을 이룩한 나라가 없으며 백성이 마음 편히 잘사는 나라가 없는것이다. 이곳에서는 사진찍어도 괜찮다는 군인의 허락하에 우리는 콜란고지와 페허들을 배경으로 수리아벗들을 청하여 함께 기념사진들을 남겼다.  우리가 병원지붕에서 내려오니 주인측에서 갈증이 날텐데 가까운 곳에 가 홍차를 마시자 하기에 일행은 한 차집으로 안내되였다. 인가가 없는 편벽한 곳에 이렇게 크고 널직한 차집이 있을줄은 몰랐다. 이곳은 국내외참관객들을 대상하여 꾸린 차집이였다. 차집뒤는 바로 국경으로서 둥글둥글 철조망이 아득히 뻗어있었다. 집안에 앉아 홍차를 마시며 열려진 창문으로 우연히 널직한 뒤뜨락을 들여다보니 토담이 빙 둘려져있었는데 그가운데로 철조망이 한줄 가로질러 지나갔다. 뒤뜨락을 두개로 갈라놓은것이였다. 저것도 혹시 국경선이 아닐가싶어 차집주인하고 물었더니 아니나다를가 그것이 과연 국경선이였다. 원래는 평화로운 한집 뜨락이였는데 이스라엘이 콜란고지를 점령하면서부터 뒤뜨락을 절반 빼앗기게 되였단다. 그것이 통분하여 차집주인의 아버지가 세상을 뜨면서도 언젠가 저 빼앗긴 뒤뜨락을 되찾게 되면 자기 묘지에 와서 알려달라는 유언까지 남겼단다. 하지만 아버지가 세상뜬지도 20여년이 되였지만 아직도 아버지에게 뒤뜨락을 찾았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드리지 못하고있단다. 아버지는 아마 지금까지도 천당에서 눈을 감지 못하고계실거라며 차집주인은 눈시울을 적셨다. 그 이야기를 듣는 우리의 마음도 무거워졌다. 아직도 지구우의 곳곳에서 총소리, 대포소리 그치지 않고있는데 전쟁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눈물 흘리게 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못을 박아놓고있는것인가. 우리는 뭐라고 위로할수가 없어 그저 그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었다.  차집에서 나와 우리는 군인의 허락을 받고 철조망앞에 서서 멀리 콜란고지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겼다. 일행이 사진을 찍고 차에 오를 때 나는 뒤에 남아 철조망밑에서 화산재 같은 돌 하나를 주어 멜가방에 넣었다. 세계가 주목하는 국제적쟁의로 유엔의 평화유지부대까지 들어와있는 콜란고지의 평범하게 나딩구는 돌일지라도 자못 큰 “국제적”기념의의가 있을거라고 나름대로 생각했기때문이였다.  우리는 콜란고지에서 내려와 기다리고있는 쿠네이트라성 작가들과 간단한 좌담회를 가진후 규모가 큰 한 로천식당에 가 로주석의 아들이 초대한다는 점심을 맛갈스레 먹고는 귀로에 올랐다. (다음호에 이음) <<연변문학>> 2008년 4월호 
7    세계고대문명중심지-중동(5)(허룡석) 댓글:  조회:2221  추천:76  2008-04-20
세계고대문명중심지-중동(5)8. 아랍사람들의 “대범한” 일본새 허룡석이튿날아침 9시경에 우리는 력사고적을 참관하고저 수도 디마스크에서 220㎞ 떨어져있는 타이드무얼로 떠났다. 타이드무얼로 가는 길 량켠도 가도가도 끝없이 펼쳐진 고비사막뿐이였다. 사막이라 하여 건축에 쓸수 있는 보드라운 모래가 아니라 썩박돌이 부서진듯한 크고작은 알갱이들이였다. 거기에다 소머리, 양머리만큼한 돌뎅이들이 사처에 널려있었다. 그것도 땅이라고 목숨 질긴 이름 모를 풀들이 가끔씩 빠득빠득 뿌리를 내리고 자라긴 했으나 날마다 이글거리는 폭양을 이겨내지 못해서인지 삶의 푸른색을 띠지 못하고 누르무레한 병색을 띠고있었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간혹 수십 수백마리씩 무리지은 양떼들이 나타나서 그런 풀마저도 갉아먹으니 사막이 번대머리가 되지 않을리 있을가싶었다. 사막 한가운데로 녀인의 가리마마냥 아득히 쭉 뻗은 아스팔트길로는 석유를 만재한 길다란 송유차들이 쉼없이 우리가 탄 차곁으로 쉭쉭 지나갔다. 해가 점점 높이 떠오르자 차안도 점차 더워나기 시작하였다. 자기네 작가협회의 차가 낡았다 하여 상급의 당기관에 가 빌려왔다는 차도 새것이긴 하나 역시 에어컨장치가 없었다. 차창을 열면 시원하겠는가 하여 열었더니 대번에 차안보다 더 뜨거운 열기가 쓸어들어오는통에 차창을 제꺽 도로 닫을수밖에 없었다.  줄기차게 달리던 차가 갑자기 칙하고 멈춰섰다. 운전수가 내려서 일을 보니 우리도 일을 보라고 멈춰선줄로 알고 분분히 차에서 내려 볼일을 보고 다시 차에 오르니 차는 푸드득푸드득 선자리에서 방귀만 뀔뿐 더는 움직여주지 않는다. 운전수가 뭐라고 중얼중얼하기에 설사에 지쳐 졸고있는 쇼후한테 물었더니 휘발유가 떨어졌단다. 저런, 주유소는커녕 인가조차도 보이지 않는 이 고비사막에서 휘발유가 떨어지면 야단이 아닌가. 어찌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그래도 명색이 국가대표단인데 휘발유가 떨어져 중도에서 멈춰서다니. 무엇이나 사전에 꼼꼼히 준비하는 중국에서는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였다. 무엇 하느라고 사전에 요만한 준비사업도 안해놓았는지 알고도 모를 일이였다. 아직 갈길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이제 겨우 절반을 왔단다. 아직도 100여㎞ 가야 하는데 지금 이곳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되였다. 우리는 다시 차에서 내렸다. 이곳 사람들의 일본새가 왜 이 모양이냐며 우리가 원망하고 안달아하는데도 운전수는 시물시물 사람좋게 웃으며 별로 조급해하는것 같지 않았다. 섭참찬도 사람좋게 그저 허허 웃으며 자기는 아랍사람들의 이런 일본새에 습관되여 놀랄것도 없다고 했다. 그러잖아도 자기가 어제저녁에 우리를 안내하는 작가협회일군을 보고 래일 먼길을 가게 되니 여러가지로 준비사업을 잘하라고 특히 귀띔했는데도 이 모양이라며 차뒤에서 운전수와 뭐라고 옥신각신하는 작가협회일군을 불러왔다. 섭참찬은 작가협회일군하고 한참 뭐라고 말하더니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작가협회일군이 어제 운전수더러 준비사업을 잘하라고 하니 운전수가 눈을 부라리며 자기 일에 간섭말라 하더란다. 상급당기관에서 차와 함께 내려보낸 운전수라 자기네도 어쩔수 없다는것이였다. 당기관에서 온 운전수라도 아래에 내려오면 상급지도자행세를 하기에 오히려 자기들이 운전수의 눈치를 보아가며 비위를 맞춰줘야 한단다. 그러면서 섭참찬더러 자기가 이미 운전수와 말했으니 오늘의 불찰로 운전수를 너무 꾸지람하지 말아달란다. 그 화풀이가 자기들한테 돌아오면 난처해진단다. 실로 어처구니없었다. 당기관에서 차를 모는 사람이 뭐가 대단해서 쩔쩔매는지 모를 일이였다. 별다른 해결책이 없었던지 운전수는 무턱대고 길 한가운데 나서 두손을 쳐들고 마구 휘저어대며 지나가고 오는 차량과 송유차들을 막아나섰다. 그들한테서 휘발유를 해결받으려 하는것 같았으나 오가는 차들은 누구 하나 알은체하지 않고 더운 바람을 덮씌우며 휙휙 지나갔다. 운전수는 별수 없던지 길가에 물러서서 여기저기에 핸드폰을 쳐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잃은 당나귀를 찾는 게으른 농부마냥 이마에 손을 얹고 동서남북을 한참 살펴보더니 홀연 사막 한가운데로 터벅터벅 걸어가는것이였다. 그가 왜 사막으로 들어가는지 의아쩍어 우리의 눈길은 일제히 그의 뒤를 쫓아갔다. 그는 어느 사이 자그마한 모래언덕뒤로 사라졌다. 그가 보이지 않으니 우리는 더욱 불안했다. 이 허허고비사막에 휘발유가 떨어져 길가에 멈춰서있는 차는 우리 차밖에 없었다. 이젠 영그러진 태양도 불비를 퍼붓기 시작하는지라 어떻게 하면 더위를 피해볼가 하여 어떤이는 차에 오르내려보았으나 차안팎이 무덥기는 매일반이였다. 더위를 먹고 고생하는이들은 개미가 채바퀴 돌듯 안절부절했다. 물이라도 마시면 좀 낫겠나 하여 모두들 생수병 하나씩 찾아들고 애꿎은 물만 마셔댔으나 물도 뜨거워 온몸에 소금물만 내돋게 했다. 섭참찬이 불안해하는 우리를 보고 그래도 방법이 나지겠지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위안했으나 일행의 불안한 마음들은 좀처럼 가셔지지 않았다. 휘발유가 쉽사리 해결되지 않으면 언제까지든지 여기를 떠나기 어려울것 같았다. 이때 홀연 등골을 써늘하게 하는 고함소리가 들려오기에 소리 나는쪽을 바라보니 아까 모래언덕뒤로 사라졌던 운전수가 무엇에 쫓기듯 황급한 소리를 지르며 천방지축 달려오고있었다. 우리는 모두 깜짝 놀랐다. 모양을 보아서는 무슨 짐승한테 쫓기는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 고비사막에 무슨 놈의 짐승이 있단 말인가. 있다면 생명력이 강한 표범이나 사자 같은 흉악한 맹수뿐일텐데. 우리는 긴장해났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운전수의 뒤를 쫓아오는 짐승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가까이로 달려오자 우리는 욱― 모여들며 웬 일이냐고 긴장하게 물었으나 그는 흥분되여 뭐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차에 뛰여올라 큼직한 비닐통을 들고 내리더니 또다시 오던 방향으로 뛰여가는것이였다. “휘발유가 있답니다. 휘발유를 찾았대요!” 운전수의 말을 알아들은 쇼후가 환성을 질렀다. “뭐? 휘발유를 찾았다구?” 우리는 얼떨떨해졌다. 그리고 믿어지지 않았다. 이 고비사막에서 휘발유를 찾았다니 웬 소리인가. 아무리 석유가 많이 나는 아랍땅이라지만 샘물처럼 허망에 풍풍 솟는 휘발유가 있단 말인가?   그래도 무슨 영문임을 알아차렸는지 작가협회일군이 운전수의 뒤를 따라 뛰여갔다. 금방까지만 해도 불안과 더위로 맥꼴을 못추던 우리도 휘발유를 찾았다는 소리에 기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여 작가협회일군의 뒤를 따라 뛰였다.  모래언덕을 넘어서 우묵스레한 곳에 이르러보니 누가 언제 내던진것인지 도람통 여라문개 나딩굴고있었다. 먼저 뛰여간 운전수가 뒤따라온 작가협회일군과 함께 도람통을 하나하나 흔들어보고있었다. 모두가 빈통이였다. 우리는 저으기 실망했다. 그래도 운전수는 밑굽에나마 휘발유가 있음직한 도람통을 다른 도람통우에 올려놓고 가지고 온 비닐통안에 열심히 찌워넣고있었다. 그렇게 도람통들의 밑굽 휘발유를 다 찌워넣으니 큼직한 비닐통에 거의다 찼다. 하지만 고까짓걸 가지고는 아직도 태반 부족이였다. 이때 운전수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는 운전수의 얼굴에는 송골송골 돋은 땀방울과 함께 웃음꽃이 피여났다. 자기가 아까 전화를 했더니 제일 가까운 곳의 주유소에서 휘발유 두통을 모터찌클에 싣고 왔다는것이였다. 우리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았다. 운전수들이 장거리를 자주 뛰다보니 부근 주유소정황들을 잘 알고있는것 같았다. 모래언덕을 넘어서 바라보니 아니나다를가 저 멀리 우리 차곁에 모터찌클 한대 서있었다. 우리는 환성을 지르며 달려내려갔다. 운전수와 작가협회일군은 서둘러 비닐통을 하나하나 들어 차의 기름탕크에 쏟아넣었다. 그들이 수고하는것이 미안해 엄지를 내들고 너희들이 방법이 있다고 춰줬더니 운전수는 팔소매로 땀을 훔치며 헤헤 웃는다. 하지만 속으로는 일본새가 바르지 못해 고생을 공연히 사서 하는 그가 천진스럽고도 가긍하게 느껴졌다. 휘발유를 다 넣자 우리는 서둘러 차에 올라 갈길을 재촉했다. 운전수도 한시름 놓였는지 차를 몰면서 가끔 우리를 돌아보며 말을 걸기도 하고 웃기도 하였다. 섭참찬은 시무룩이 웃으며 고개만 저을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인가가 없는 이 고비사막에서 휘발유가 떨어지니 모두들 깜짝 놀랐잖아요. 어쩌면 이 사람들의 일본새가 이럴수 있습니까?” “아랍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여서 놀랄것도 없지요. 국가적으로 외국수반들을 접대할 때도 울지도 웃지도 못할 일들이 수두룩하지요.”  섭참찬은 여러 아랍나라들을 돌면서 직접 겪은 재미나면서도 입이 딱 벌어지는 해프닝들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우리의 사유와 관념으로서는 상상도 되지 않는 그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우리는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한번은 우리 나라 총리가 한 아랍나라를 방문하게 되였다. 중국대사관에서는 몇달전부터 총리영접사업에 관한 준비사업을 빈틈없이 해왔으며 해당국 주관부문과도 수시로 련계를 달며 준비사업을 검토했다. 총리가 도착하는 날 이 나라에 와서 부임된지 얼마 안되는 중국대사관의 대사는 영접책임이 중대하기에 세시간전부터 공항에 나가 영접준비사업을 일일이 체크하였다. 그런데 사전에 다 약속되였던 비행장에 펴놓아야 할 붉은 주단을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었다. 국제관례에 따라 국가수반을 영접할 때는 비행장에 붉은 주단을 펴놓는것이 상례였다. 대사가 해당국 책임일군을 찾아 물으니 벌써 다 준비되였으니 걱정말란다. 그런데 한시간이 지나도 붉은 주단을 펴놓을 기미라곤 보이지 읺았다. 대사가 다시 그 책임일군을 찾아 물으니 자기가 이미 다 포치해놓았다는데 왜 믿질 않느냐며 오히려 자기쪽에서 불쾌해하더란다. 또 한시간이 지났지만 붉은 주단은 의연히 보이지 않았다. 아랍사람들의 일본새를 잘 모르는 대사는 안달아나기 시작했다. 총리도착시간이 당금인데 붉은 주단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으니 이게 어디 될 말인가. 중국같으면 벌써 몇시간전에 다 펴놓았을것이 아닌가. 대사가 재차 그 책임일군을 찾았으나 이젠 아예 련락도 되지 않고 사람도 찾을수 없었다. 속이 후끈 달대로 단 대사가 급급히 그의 아래사람들한테 물으니 모두들 아랍식으로 두손을 펴들고 어깨를 으쓱하며 도리머리질만 할뿐이였다. 비행기가 착륙할 시간이 점점 박근해오는데도 붉은 주단도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당금 대사를 그르칠것만 같아 대사는 단가마우의 개미마냥 쩔쩔매며 돌아쳤다. 이 사람들이 어찌 이럴수 있단 말인가. 홀연 저 멀리 하늘가에서 우르릉하는 보잉기엔진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대사는 온몸에 식은땀이 쫙 흘렀다. 인젠 보잉기가 까만 점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대사는 그만 하늘땅이 맞붙으며 까무라칠 지경이였다. 이때 어디에 숨어있다가 나오는지 붉은 주단을 멘 사람들이 줄줄이 달려나오더니 붉은 주단을 펴야 할 자리에 쫘르륵, 쭉쭉 순식간에 다 펴놓고는 개선장군인양 소리를 지르며  되돌아 달려들어오는것이였다. 혼비백산했던 대사는 그만 입을 딱 벌린채 유령같이 나타난 그들을 초점없는 눈길로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간 어디에 가 뭘 하다 나오는지 아무리 찾아도 그림자도 보이지 않던 그 책임일군이 대사곁에 불쑥 나타나며 “보셨지요? 비행기가 내리기전에 다 펴놓지 않았습니까?” 하며 되려 제쪽에서 기분좋게 자랑하더란다. 너무 놀라 얼이 쑥 빠졌던 대사는 그를 멍하니 쳐다보며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짧은 시간이나마 속타고 놀란걸 생각하면 귀뺨이라도 갈겨놓고싶었지만 그럴수도 없었다. 해야 할 일은 해놓지 않고 그간 어디에 갔댔느냐고 대사가 격하게 힐문했더니 별로 할 일이 없어 홍차 마시러 갔댔단다. 그러면서 오히려 자기를 찾았댔느냐고 정색해서 반문하더란다. 대사는 억이 막혀 말이 나가지 않았다. 거짓말이라도 하면 한바탕 화라도 내련만 그렇게 진지하고 솔직하게 말하는데 뭐라 하겠는가. 그저 이 놈, 갓 부임한 내가 너때문에 십년 감수한줄 아느냐고 속으로 욕할수밖에 없었다. 아랍사람들과 익숙해지고 아랍사람들의 성격과 마음을 속속들이 알고나면 그들의 일본새를 리해할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리해할수 없는 일들이 수두룩하단다. 또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우리 나라 인대회에서 앞서렬을 차지하는 한 자력 깊은 부위원장이 우호적인 어느 아랍나라를 방문하게 되였다. 하루는 방문일정에 따라 한 환영행사에 참석하게 되여 관례대로 국가에서 파견한 의장대 모터찌클 석대가 앞에서 길안내를 하게 되였다. 그런데 한 네거리에서 모터찌클 석대가 지나가고 뒤의 차는 붉은 등을 만나 멈춰서게 되였다. 푸른 등이 켜질 때를 기다려 네거리를 지나고 보니 길안내와 보위임무를 맡았다는 모터찌클차대가 간데온데 없어졌다. 아무리 련락해도 련락도 되지 않는지라 별수없이 자체로 길을 물으며 행사장을 찾아가다보니 시간이 많이 지체되였다. 부위원장을 배동했던 중국대사가 화가 치밀어 행사장에 혼자 먼저 도착해 빈들거리는 모터찌클차대책임자를 찾아 우리 위원장 차를 기다리지도 않고 무슨 길안내를 이렇게 하느냐고 꾸짖었더니 그 책임자가 한다는 소리가 더 가관이더란다. 앞만 보며 가는 우리가 뒤에 떨어진 당신네를 어떻게 알겠는가. 당신네가 도정신해 앞을 잘 보며 우리를 따라와야 할게 아닌가. 이제부터는 뒤떨어지지 말고 자기네를 잘 따르라고 오히려 열심히 충고까지 하더란다. 세상에, 이렇게 길안내하는 국가의장대도 있단 말인가. 대사는 숫구멍에 망치 한대 얻어맞은듯 입을 하― 벌린채 할 말을 찾지 못했단다. 후에 그들의 무책임한 행실을 그 나라 해당 부문에 반영해도 몇달이 지나도 가타부타 아무런 답복도 없더란다. 우리의 시각에서 보면 국가적수반을 안내하는 중요한 행사에서 나타난 이들의 무책임한 행위는 엄중한 실직으로 처리되겠으나 아랍나라에서는 이런 일로 본인이 검토하거나 해당 부문에서 처분하는 일은 거의 없단다. 이는 규률이 엄한 우리 동양사람들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것 같았다. 섭참찬은 또 이런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우리 나라 외교부에서 부부장으로 있던분이 어느 대국주재 중국대사로 부임되여갔다. 그가 간지 얼마 안되여 우리 나라의 중요지도자 한분이 그 나라를 방문하게 되였다. 새로 부임되여간 중국대사가 영접사업을 빈틈없이 하느라 했으나 실제영접과정에서 비교적 큰 생각밖의 차실이 빚어지게 되였다. 원래 중앙기관에서만 돌던 인테리출신이라 실제적인 기층조직관리경험이 없는데다 국가적수반을 맞이하는 중대한 영접사업을 처음 한탓에 아마 차실이 빚어졌던가본다. 본인도 자기의 착오를 뼈저리게 느끼고 여러차례 심각한 검토서를 썼으며 조직에서도 그에게 해당한 처분을 주었다. 하지만 대사는 이 일로 하여 안팎으로 크나큰 정신적압력을 느끼며 너무 고민하여 나중에는 가지 말아야 할 길을 선택하여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였단다. 우리는 이 대조적인 이야기를 들으면서 깊은 사색에 잠겼다. 우리와 아랍사람들간의 사이에 이데올로기면에서 빚어지는 차질뿐만이 아니였다. 장기적으로 형성된 아랍사람들과 동방사람들의 사유와 관념상의 차이로 우리 나라와 아랍나라에서 공동주최하는 여러가지 행사때에도 많은 해프닝이 빚어지기도 했다. 우리 나라 경제, 문화분야에서 종종 아랍나라들과 여러가지 박람회나 비엔날레(展銷會)를 가지는데 이곳 사람들이 무슨 일이나 질질 끌어 다른 지역 나라들과 합작할 때보다 훨씬 애를 먹는단다. 무슨 일이나 시작은 해놓고 질질 끌다가 바쁜 대목에 가서야 와닥닥 달구쳐 주최측의 애간장을 말린단다. 이를테면 상품을 전시해야 할 매장을 어느날까지 다 만들어놓아야 한다고 계약까지 명확히 체결하였는데도 평소에는 가시아비 제사날 미루듯 미루다가도 테프를 끊어야 할 전날에야 모여들어 밤을 새워가며 미친년 국거리 썰듯 복새통을 놓으며 이튿날 손님이 다 모여 행사를 시작하기 직전에야 겨우 일을 마무리한단다. 일을 지체시키지 않았다 쳐도 주최측으로 놓고보면 얼마나 사람을 간 떨어지게 하는 일본새인지 모른다. 그래서 아랍나라들과 한번 이런 행사를 치르고나면 우리측 관리일군들은 염병을 앓고난 사람처럼 오래동안 그 스트레스를 풀지 못한단다. 우리도 요르단에서 겪었던 해프닝들을 이야기했다. 요르단에서 우리는 일정에 따라 요르단의 유일한 항구도시인 야커바를 참관하고 곧바로 200여㎞ 떨어진 옛 도시 페트라에 가 하루밤을 묵고 이튿날 페트라옛성을 참관하게 되여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를 안내하는 작가협회일군들도 우리가 주숙할 호텔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것 같지 않았다. 저녁어둠이 깃들어 페트라에 도착했으나 우리가 들려고 하는 호텔을 찾지 못하여 차를 여기저기에 세워놓고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물었다. 이 사람이 저쪽일거라고 하면 차를 그쪽으로 몰고 가 알아보았고 저 사람이 이쪽일거라고 하면 또 이쪽으로 차를 몰고 와 물어보다나니 시간이 많이 지체되였다. 작가협회일군도 호텔찾기에 지쳤는지 인젠 늦었으니 먼저 시내에서 저녁이나 먹고 다시 찾아보자고 하는것을 래참찬이 안된다고 딱 잡아뗐다. 아무리 늦어도 주숙할 호텔을 찾아야지 국가대표단을 길바닥에서 헤매게 해놓고 어떻게 식사부터 하겠느냐고 질책했다. 작가협회일군은 아무 대꾸도 못하고 마지못해 계속 호텔찾기에 나섰다. 우리도 별수없이 그들이 차를 모는대로 끌려다녔다. 인구가 2만여명밖에 안되는 자그마한 도시에 호텔이 모두해야 몇곳 안되는데 한시간 남짓 돌아도 우리가 들어야 할 호텔을 찾지 못한다는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작가협회일군이 호텔마다 들어가 알아보더니 나중에 우리 차를 오던 길로 돌려세우는것이였다. 워낙 우리가 주숙해야 할 호텔은 시내안에 있는것이 아니라 우리가 오던 길가에 있었다. 우리는 오던 길로 20여㎞가량 되돌아가서야 주숙하기로 예정한 고전성보식호텔을 찾을수 있었다. 알고보니 한심한것은 사전에 미리 해당호텔에 련락도 없이 자기나름대로 페트라에 가면 어느 호텔에 들어야겠다고 앉아서 생각했을뿐이였다. 그러다보니 그 호텔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 일행이 주숙할 방이 있기나 한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뛰여든것이였다. 그러다 방이 없으면 또 다른 호텔을 찾아헤매야 했다. 아랍사람들의 이런 주먹구구 일본새에 익숙할대로 익숙한 래참찬도 화가 치밀어 이러길래 아랍사람들이 그 자그마한 이스라엘과 몇차례 싸워도 한번도 이기지 못한다고 뒤욕을 했다. 무슨 일을 하나 사전에 빈틈없이 계획을 세우고 일하는 유태인종인 이스라엘사람들은 싸울 때도 면밀한 작전계획을 세우고 싸우나 아랍사람들은 싸울 때에도 평소의 주먹구구식으로 싸우다보니 아랍사람들이 번번이 랑패를 본단다. 이를테면 대포는 대포대로 끌고 가고 포탄은 포탄대로 운수하다보니 이스라엘군이 진공을 발동해 포를 쏘아야겠는데 포탄을 찾지 못해 허둥대다 대포고 사람이고 몽땅 이스라엘군의 전리품으로 되고만다는것이였다.  아랍사람들은 미리 준비한다는 관념이 없이 일에 부딪쳐야 다음 일을 어떻게 할것인가를 생각한단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루에 몇백킬로씩 뛸 때에도 차안에 물이나 음료를 갖춰놓는 법이 없다. 가다가 슈퍼를 만나야 물을 사서 올려온다. 어떤 날에는 수백킬로를 달려도 슈퍼를 만나지 못할 때에는 그 더위에도 갈증을 참아야 했다. 이런 경우를 감안해 오히려 대사관측에서 물을 몇상자씩 사서 올려놓았기에 미지근한 물이나마 수시로 마실수 있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오다보니 우리는 피곤도 무더위도 잊은채 타이드무얼에 무사히 도착할수 있었다. 우리는 타이드무얼에서 력사고적을 흥미진진하게 참관한후 이튿날부터 여러 성에 내려가 지방작가협회들과도 좌담을 나누었다. 그런데 더욱 한심한것은 우리가 지방에 대한 참관방문을 마치고 수도 디마스크로 돌아올 때에도 중도에서 또 휘발유가 떨어져 시간을 퍼그나 지체했다는것이다. 올 때에 휘발유가 떨어져 고생하던 교훈을 섭취해서라도 다시는 그와 류사한 일이 발생되지 말아야 했었으나 그것이 아니였다. 휘발유가 떨어졌다고 할 때에는 오후 세시경이라 바깥날씨가 차안보다 더 무더워 우리는 오도가도 못하고 땀을 좔좔 흘리며 차안에서 꼬빡 한시간가량 기다렸다. 운전수도 더운게 싫은지 차에서 내리지 않고 이번에는 앉은자리에서 핸드폰만 쳐댔다. 두번이나 휘발유가 떨어지고보니 저로서도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던지 우리보고 조금만 기다리라 하는것이였다. 그런데 우리를 단가마안에서 한시간나마 기다리게 했다. 알고보니 운전수의 동생이 근처 어느 시골에 살고있는데 동생더러 휘발유를 얼마 가지고 어디까지 오라고 핸드폰을 쳐대는것이였다. 동생은 하던 일을 제쳐놓고 집에 있던 휘발유를 트럭에 싣고 급급히 20리길을 달려와서야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날수 있었다.   려행길에서 내가 가만히 살펴볼라니 보편적으로 체대가 우람진 아랍사람치고는 키가 작달막하고 왜소하게 생긴 쉰을 넘긴 운전수가 참 재미있는 사람이였다. 운전수의 직책이라면 시간에 맞춰 대표단일행을 안전하게 실어가고 실어오면 그만이련만 그것이 아니였다. 우리가 크고작은 좌담회를 할 때마다 운전수는 한번도 빠지지 않고 꼭꼭 참여하는데 그것도 뒤좌석이나 구석쪽을 차지하는것이 아니라 언제나 앞자리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있었다. 전업성을 띤 작가들지간의 좌담회가 그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련만 그가 무슨 흥취로 참가하는지 알고도 모를 일이였다. 자리에 앉아서는 별로 할 일이 없으니까 슬리퍼를 끌고 다니던 터덜터덜한 맨발을 걸상우에 올려놓고 발가락사이를 뚜지기도 하고 또 한참후에는 코구멍을 후비기도 하였다. 그러다가도 보도매체의 카메라렌즈가 쭉 돌아갈 때면 언제 그랬냐싶게 점잖게 앉아 발언하는 사람을 쳐다보기도 했다. 좌담회에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와 모두들 웃을 때면 자기도 그 분위기에 매료된듯 덩달아 같이 하하 웃어주기도 했다. 그래서 혹시 카메라에 찍히기 위해 자기와는 무관한 좌담회에 참가하여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것 아니냐고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것만 같지 않았다. 우리와 함께 식사할 때도 그는 맨먼저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그래도 누가 나서서 “당신이 왜 여기에 앉았소? 저쪽에 가 앉으면 안되오?” 하는 사람도 없었다.  맛있는 료리가 오르면 남들이 맛볼 사이도 없이 그 접시를 들어다 자기앞의 작은 접시에 쭉 갈라놓고는 볼이 미여지게 맛갈스레 먹었다. 운전수의 주책없는 그러한 행실이 우리로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너무 눈꼴이 사나울 때면 종종 운전수가 너무한다고 의론하였다. 하지만 주인들이 상관하지 않는데 손님의 신분인 우리가 뭐라고 할수 없었다. 어떤 날에는 오후 몇시에 어디로 떠난다고 약속하고 모두들 제시간에 호텔홀에 모였지만 운전수가 보이지 않을 때가 푸술했다. 작가협회일군이 조급해 찾아보면 운전수는 그때까지 호텔방에서 코를 골며 시름없이 자고있었다. 우리가 좌담회를 할 때 운전수가 자기와는 상관없는 좌담회에 참가하느라 말고 방에 올라가 일찌감치 휴식했더면 그렇게는 피곤하지 않았을것이다. 이렇게 번마다 불리워 내려오면서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우리 보고 이젠 떠나자고 손을 앞으로 휙 내젓는다. 운전수가 자면 우리는 기다리고 운전수가 손을 저으면 우리가 “전진”하는것이 마치 상급당기관에서 왔다는 운전수가 우리를 지휘하는것 같았다. 운전수가 하고싶은대로 해도 우리를 배동하는 작가협회 부주석도 감히 어쩌지 못하는것 같았다. 우리가 간혹 섭참찬하고 운전수의 무책임하고 주책머리없는 일들을 말하면 섭참찬도 도리머리질 했다. 섭참찬도 알아보았는데 당기관에서 내려온 운전수여서 작가협회에서 관할하기 어려울뿐만아니라 날마다 저녁이면 인사까지 내며 달래야 한다는것이였다. 자본주의제도를 실시하는 요르단에서는 운전수의 그 어떤 특권행위도 느끼지 못했는데 사회주의제도를 실시한다는 시리아에서 이런 느낌을 받게 되는것은 과연 무엇때문인지? 생활을 책임진 부단장이라 내가 간혹 반의로 네가 잘한다고 엄지를 내들거나 번역을 시켜 우리를 위해 차를 모느라고 수고 많다고 칭찬하며 갖고 갔던 중국록차를 선물하기도 하면 그도 같이 엄지를 내들며 내 허리를 안아주기도 하는것이였다. 그후부터 그는 누구보다도 나와 가까이 지냈다. 어떤 때에 차안에 물이 두세병밖에 남지 않으면 나한테 차례지지 않을가봐 슬그머니 먼저 물병을 쥐여주기도 하고 고적을 참관할 때도 전문 내뒤를 따르며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어떤 고적에 가 간혹 사진찍을 생각이 없어 남이 찍는것을 보기만 하면 내곁에 와서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너는 왜 사진을 안찍는가고 했다. 그리고는 카메라를 달라 해서는 제일 적합한 위치를 찾아주며 나를 위해 샤타를 누르기도 했다. 그의 열성에 못이겨 나는 찍지 않으려던 사진도 여러장이나 더 찍었다. 한번은 쑤워이다시에 갔다가 그곳의 부흥당조직에서 전문 우리를 위해 마련한 문예공연을 보게 되였다. 공연뒤끝에 우리는 또  미술써클실, 음악써클실, 컴퓨터실 등 이곳저곳 참관하다가 차에 오를 때에야 나는 려권이며를 넣은 멜가방을 두고 온줄 알게 되였다. 아마 공연을 볼 때 옆에 놓아두었던 멜가방을 잊고 그대로 일어서 나온것이 분명했다. 내가 정신이 펄쩍 들어 홱 돌아서 멜가방 찾으러 가려는데 운전수가 시물시물 웃으며 내 멜가방을 눈앞에 높이 쳐드는것이였다. 내가 멜가방을 잊고 두고 온것을 보고 그가 주어들고 우리의 참관이 끝날 때까지 말없이 들고 다녔던것이였다. 나는 몹시 감격되여 멜가방보다 먼저 그를 와락 끌어안으며 감사의 뜻으로 그의 잔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도 시무룩이 웃으며 나의 등을 다독여주는것이였다. 그후 우리의 관계는 더 돈독해져 좋은 배경을 만나면 서로 청하여 함께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시리아를 떠날 때도 그는 우리를 공항까지 실어다주면 되지만 기어이 공항홀까지 따라들어와 짐을 만재한 밀차를 열심히 밀어주었다. 려권과 티켓검사를 마치고 탑승휴계실로 들어가기전에 우리는 며칠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안내하느라 수고한 작가협회일군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운전수와도 작별하려 하니 뜻밖에도 운전수는 티켓이 없어도 자기도 탑승휴계실로 들어갈수 있다며 작별인사를 하지 않는것이였다. 뿐만아니라 자기가 나서서 탑승귀빈실에 모시겠다고 했으나 우리는 별로 믿지 않았다. 그런데 작가협회일군은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으나 그는 어떻게 들어왔는지 안으로 들어왔을뿐만아니라 말 그대로 우리를 탑승귀빈실에 들게 하였다. 작가협회에서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한낱 운전수에 불과한 그가 해낸것이다. 우리는 너무 뜻밖이였다. 외교관신분증으로 우리와 함께 귀빈실에 들어온 섭참찬내외도 운전수의 능력에 혀를 두르는것이였다. 아무리 당기관 운전수라 해도 일반 운전수는 이렇게 못한다는것이였다. 이 운전수는 빽이 어지간한 운전수가 아니라고 했다. 혹시 뒤심이 든든한 빽이라도 있어 국가적인 작가협회에 내려와서도 안하무인격이였는지 모를 일이였다. 작별할 때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악수했으나 나와는 열렬히 포옹했다. 사람이 겉보기에는 거칠고 맺히지 못한것 같지만 성실하고 마음이 뜨거운 사람이였다. 어찌 보면 운전수가 격식을 따지지 않고 터프하면서도 진실하고 열정적이고 마음 뜨거운 아랍사람들의 전형적인 대표가 아닌가싶기도 했다. <<연변문학>> 2008년 3월호
6    세계고대문명중심지-중동(4)(허룡석) 댓글:  조회:1333  추천:98  2008-04-20
세계고대문명중심지-중동(4)두터운 감정 알알한 마음 허룡석 7월 3일 아침 대표단은 요르단에 대한 방문일정을 마치고 수리아변경으로 떠났다. 대사관 래참찬과 쇼쉬 그리고 요르단작가협회 싸디그.주다주석이 우리를 바랜다며 기어코 한차에 올랐다.  요르단남부는 갈수록 고비사막이였지만 북으로 가면서 보니 산에도 푸르른 빛갈이 흘렀고 검푸른 올리브원이 뙈기뙈기 보였으며 남새밭과 곡식밭이 뉘엿이 펼쳐지기도 했다. 이 며칠째 날마다 죽은 물고기 몸뚱아리 같은 희뿌연 고비사막만 보아오다 생의 푸르름을 보게 되니 이 땅에도 이처럼 삶이 약동하는 곳이 있냐싶게 눈이 번쩍 뜨이였다   우리를 태운 차가 10시경에 요르단ㅡ수리아변경 해관입구에 도착하자 차량검사소가 나타났다. 카빙총을 거꾸로 멘 한 군인이 길 한가운데 나서 남색기를 높이 쳐들고  차를 막아세웠다. 차가 칙 멈춰서기 바쁘게 군인은 성큼 차에 뛰여올라왔다. 그는 거수경례를 대충 붙이고는 운전수와 이것저것 통행증과 기타 서류들을 요구해 검사하더니 나중에는 우리 일행의 려권을 보자고 했다. 려권도 반드시 여기에서 검사를 마쳐야 하는가부다고 생각한 쇼후가 서둘러 가방안에서 우리 모두의 려권을 내놓으려 하자 래참찬이 막아나섰다. 래참찬은 그 군인보고 너는 차량통행증만 검사하면 되지 려권검색은 해관에서 할 일이니 네가 검사할 책임범위가 아니라고 면박을 주었다. 그러자 군인은 석쉼한 음성을 높이며 려권검사도 자기 검사범위이니 려권검사를 맞히지 않으면 차가 해관으로 들어갈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에 화가 치민 래참찬이 벌떡 일어서며 안쪽호주머니에서 외교관신분증을 꺼내보이더니 그와 한결 음성을 높였다. 군인은 외교관신분증을 받아 자세히 보더니 차렷자세로 군례를 붙이더니 더는 군소리 없이 차에서  뛰여내렸다. 방금까지만도 기고만장하던 군인이 왜 갑자기 온순한 면양이 되였는지 우리가 그 영문을 몰라 래참찬한테 물었더니 래참찬은 성이 가시지 않아 노기를 띤채 말했다  “저 자식이 우리를 만만히 보고 한몫 챙기자는거였지요. 자기 검사범위도 아니면서 려권을 보자 해놓고는 이것저것 구실을 잡아 뭘 얻어먹자는 수작이지요. 이전에도 종종 이런 일에 맞띠웠거든요. 그 자식이 또 그러는게 눈꼴 사나와 내가 나는 중국대사관 문화참찬이다. 네가 그냥 이렇게 나오면 너의 행위를 너의 나라 외교부에 고발하겠다고 했더니 저렇게 찍소리 못하고 물러가는거지요.” 우리는 그제야 통쾌하게 웃었다. 사람사는 곳이면 어디에나 부정비리가 있기 마련인가보다. 더우기 경제적으로 발달하지 못한 나라일수록 부패행위가 더 심한것 같다. 오늘 우리 차에 우리 나라의 당당한 외교관이 앉았기에 쓸데없는 시끄러움을 던것 같았다. 느릿느릿하는 사업효률은 요르단 어디 가나 마찬가지 같았다. 그저 려권검색을 마치면 되는 간단한 수속도 이리저리 불려가 지문과 눈알을 검사마치고 이곳저곳에서 기다리고 하다보니 12시가 넘어서야 요르단변경을 넘어설수 있었다. 우리 일행은 국경을 넘어서기전에 래참찬과 쇼쉬와 뜨거운 악수를 나누며 요르단방문기간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를 배동하고 여러모로 도움준데 진심으로 감사드렸다. 싸디그.주다주석은 우리를 하나하나 포옹해주며 장차 기회가 있으면 다시 요르단에 오는걸 환영한다며 못내 섭섭해하였다.  수리아경내에 들어서니 수리아주재 중국대사관 문화참찬 섭국안과 그의 부인(후에 알고보니 문화참의 간사가 귀국하여 그의 부인으로 대체했었다.) 그리고 수리아작가협회 부주석이 소형뻐스를 갖고 나와 대표단을 기다리고있었다. 요르단쪽의 수속이 늦어지다보니 그들은 이제나저제나 꼬빡 세시간이나 차에서 기다렸었다. 우리는 서로 수인사를 나누고 그들의 차에 올라 수리아수도 디마스크로 향했다. 저 멀리 이라크변경과 이어진 곳에는 굵다란 철조망이 둥글둥글 아츠랗게 늘여져있었다. 그 철조망은 총소리 폭파소리가 그치지 않는 국세가 불온정한 이라크를 지척에 두고있음을 실감하게 했다.  작달막한 키에 웃음기 적고 하냥 엄숙하다고 보아오던 요르단의 래참찬에 비해 섭참찬은 훤칠한 키에 얼굴에 웃음을 담고있는 화기로운분이였다. 그도 쉰을 넘겼지만 나이보다는 훨씬 젊고 깔끔해보였다. 오랜 군인출신인 그의 안해 역시 성격이 활달하고  접촉성이 좋은분이였다. 그는 북경의 어느 군인병원에서 근무하다가  지난해에 남편이 심장병으로 일터에서 까무러쳐 구급치료를 받은후 조직의 배려로 명예퇴직하고 수리아에 와 남편을 보살피고있었다. 섭참찬은 요르단의 래참찬과 함께 중동에서 여러 아랍나라들을 돌며 20여년이나 사업한 경력이 깊은  외교관이였다. 그는 아랍나라들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정황을 손금보듯 알고있는 아랍통이기도 했다. 오는 도중 그는 우리에게 많은 재미나는 아랍세계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려주었다. 아랍나라에는 예로부터 전해내려온 세가지 류행어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인간의 모든것을 전지전능하신 알라(하느님)에게 맡기라는것이다. 사람이 죽고 사는 운명도 신의 뜻이요 잘살고 못사는 화복도 신의 뜻이니 더 오래 살겠다고 버둥거리지도 말고 더 잘살겠다고 헤덤비지 말아라.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죽는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단다. 남보다 잘살지 못해도 그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남을 질투하지 않으며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아간단다. 둘째는 모든 일은 미룰수 있으면 래일로 미루라는것이다. 양털같은 래일이 있는데 급해할것 있는가. 일이란 서두르면 망쳐먹기 쉽다. 늦게 하는것이 망쳐먹기보다는 낫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나 서두르는 법이 없다. 셋째는 괜찮다는것이다. 아무리 큰일이 생겨도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다. 무슨 일이나 너그럽게 생각해야지 생각이 많으면 골치 아프다. 그래서 아랍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일이란 없단다.  아랍나라에는 또 세가지가 달다는 말이 있단다. 첫째는 물이 달다는것이다. 아랍은 비가 적게 내리고 물이 귀한 곳이지만  모래불에서 나는 정갈한 물이라 물이 있는 곳이기만 하면 모두 그 맛이 꿀맛 같아 혀까지 묻어 넘어간다는것이다. 둘째는 수박이 달다는것이다. 우기라곤 없는 사막에서 인공으로 재배하는 수박이라 그 맛이 달지 않을리 없었다. 셋째는 처녀가 달다는것이다.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들이 아직도 그 엄격한 계률에 따라 수천년 보존해내려온 전통적혼인을  고집하는지라 혼전성행위는  낯을 들고 다니지 못할 추잡한 행위로 간주되여 엄벌을 받기에 시집가기전의 처녀는 말그대로 순결하다는것이다.  수리아는 아랍나라에서 유일하게 사회주의로 자칭하는 나라이다. 수리아면적은 18만k㎡로서 길림성면적과 비슷하다.(그중 1200k㎡에 달하는 콜란고지는 아직도 이스라엘에 점령되여있다) 인구는 1800만명이며 80%이상이 아랍인이다. 그외 쿨드인, 아르메니야인, 뚜르크메니아인과 첼케스인 등 민족이 있다. 관방용어는 아랍어이며 영어와 프랑스어를 통용하고있다. 국민중 85% 이상이 이슬람교를 신봉한다.  수리아동부는 고원지대이며 남부는 황량한 사막이며 서북부는 광활한 초원이다. 초원과 사막이 수리아국토의 절반이상을 차지한다. 수리아는 중동지구에서도 력사가 유구한 나라이지만  력사적으로 줄곧 외세의 침략을 받아온 약세국이였다. 수리아는 1946년에야 완전히 독립하면서 아랍수리아공화국을 창립하였다. 1958년에는 이집트와 합병하고 아랍련합공화국을 세웠다가 1961년 9월에 갈라져나와 다시 아랍수리아공화국으로 되였다. 수리아는 일찍 1956년 8월에 우리 나라와 외교관계를 건립하였다. 수리아에서는 “헌법”으로 국민대다수가 신앙하는 이슬람교를 립법의 주요근거로 규정하였다. 현임대통령 바싸얼.아싸드는 이미 작고한 하지즈.아싸드의 둘째아들로서 35세때인 2000년 7월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였다. 당시 의회에서 제정한 수리아“헌법”에 의하면 대통령후선인은 년령이 반드시 40세 이상이여야 한다고 규정되여있었다. 그런데 이대로 하면 35세밖에 안되는 둘째아들이 대통령후선인으로 될수 없었다. 수리아의회에서는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대통령후선인의 년령을 34세 이상으로 수정했다. 그래서야 둘째아들이 법적으로 아버지의 뒤를 계승하여 대통령으로 될수 있었다. 원래는 군에서 장군으로 있던 맏아들이 줄곧 후계자로 점찍혀있었으나 웬 일인지 어느날 갑자기 교통사고로 저세상으로 가는통에 의사로 있던 둘째아들이 준비없이 대통령보좌에 오르게 되였다. 대통령후계자로 점찍혀있던 맏아들이 돌연사하자 당시 요직에 있던 그의 삼촌이 한시기 은근히 대통령자리를 넘보고 친신들을 긁어모으며 암암리에 모략을 펼치다 대통령한테 들통이 나 그만 고비사막으로 추방당하였다. 꿈이 길면 재미없겠다고 여긴 대통령은 급급히 의사사업에 몰두하고있던 둘째아들을 대통령보좌에 올리밀었다. 1970년에 현임대통령의 아버지 하지즈. 아싸드가 정권을 잡은후 옛 쏘련과 중국의 모식대로 장장 30년간이나 중동지역에서 첫 사회주의나라를 건설한답시다가 2000년 6월에 병으로 세상을 떴다. 발전도상국인 수리아는 농업을 위주로 하나 요르단보다 자연조건이 비교적 우월하다. 이란, 사우디, 이라크 등 나라들과는 비할바가 못되지만 그래도 석유와 천연가스가 나며 중동지역에서 량식을 수출하는 다섯개 나라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공업기초가 매우 박약하다. 사회주의체제를 답습해서인지 수리아에서는 아직도 국유기업이 주도적지위를 차지하며 현대공업은 선지 몇십년 력사밖에 안된다. 수리아도 수십년간 사회주의를 해오느라 했지만 아직도 경제적으로  요르단에 뒤떨어져있고 인민들의 생활수준도 요르단보다 못하단다. 수도 디마스크는 4500여년의 력사를 갖고있는 고로한 도시로서 “천국속의 도시”로 불리고있다. 370만 인구를 가진 디마스크는 아랍나라에서 민족적특색과 지역적인 문화특색을 띤 금장식품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디마스크도 현대적시스템에 따라 운영되지 못하는 다른 아랍나라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도시관리가 째이지 못하고 느슨하여 구라파의 발달도시들에 비하면 차이가 많단다. 수도 디마스크시교에 이르러 우리는 벌써 혼잡한 교통상황에 맞띠웠다. 길은 좁지 않은데 오가는 승용차, 트럭, 트랙터, 마차까지 한데 엉켜 뒤범벅이였다. 이렇게 혼란스러워도 차량을 지휘하는 교통경찰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좌우통로를 구별하는 차선도 없었고 차도와 인행도를 구별하는 교통선 한줄 없이 길바닥은 밋밋하기만 했다. 네거리에서도 교통신호등이 보이지 않았다. 시대가 영웅을 낳고 환경이 살길을 만든다더니 디마스크의 교통상황이 장기간 이러하다보니 이곳 운전수들의 운전기술을 뛰여나게 만들고 림기응변하는 능력을 대단히 키워줘 자전거가 들어갈 틈새만 생겨도 차를 들이몰아 요리조리 용케 빠져나간단다. 이채롭다고 해야 할지 이곳 운전수들은 차의 방향등을 켜는 법이 없이 자기가 차창밖으로 손을 내들어 교통경찰마냥 팔을 폈다가뒀다하며 방향을 제시하는것이였다. 차들이 이렇게 엉키다보니 차들이 부딪치고 긁히는 일이 비일비재란다. 오늘 처음 몰고 나온 새 차가 남의 낡은 차에 옆구리가 갈비뼈 보일 정도로 긁히고 엉뎅이가 엉성하게 골받이를 당해도  그저 피씩 웃고 지나간단다. 부주의로 긁어놓았거나 골받이를 한 운전수도 앉은자리에서 손을 쳐들어 거수경례로 미안함을 표시하면 그만이다. 차가 부딪치고 긁혀도 종래로 손붙임하거나 다투는 일이 없으며 손해배상 같은 소리는 번지지도 않는단다. 사람이 오래 살다보면 엎음갚음이라는것이다. 이곳 운전수들은 인내성도 좋아 길이 막혀도 경적을 빵빵 울리며 앞차를 재촉하는 일이 없었다. 언제든 길이 저절로 열릴 때까지 태평스레 기다리는것을 응당한 일로 여긴단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앉은 차의 운전수도 꼬물도 조급해함이 없이 길이 조금 열리면 한보 나가고 길이 막히면 담배를 꼬나물고 여유롭게 기다리군 했다. 오히려 차에 앉은 만만디 우리 일행들이 더 갑갑증이 나했다. 모두가 더위를 먹고 쏘고 토하는 사람들이라 빨리 가서 주숙을 잡고 휴식하고싶었지만 길이 막혀 생각대로 되지 않으니 공연히 짜증이 났던것이다. 시간이 퍽 오래 지나서야 우리의 차가 발撡 발撡  시내에 들어설수 있었다. 이젠 오후 두시경이라(중국의 저녁 일곱시) 우리는 곧추 호텔로 가 휴식하는줄로 알았는데 의외로 수리아작가협회로 방문간다는것이였다. 더위에 시달려 지칠대로 지친 아얼타이단장이 작가협회는 오후에 가면 안되겠는가고 했더니 안내원이 작가협회 주석을 비롯한 임직원들이 모두 작가협회에서 기다린다는데야 더 뭐라고 할수 없었다. 우리가 작가협회청사라는 한 건물에 이르러 3층으로 올라가보니 아니나다를가 수리아작가협회기관 임직원 10여명이 주석사무실에 모여앉아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있었다. 후쎄인.주마라고 부르는 수리아작가협회 주석은 오동통하고 작달막한 키에 머리는 작고 코가 컸으며  해산을 당금 앞둔듯한 불쑥 나온 배에 멜끈바지를 받쳐입고 두손은 습관적으로 바지멜끈을 잡고있었다. 그를 보는 순간부터 이전에 텔레비에서 보아오던 구라파마술단의 코미디배우 신통하다는 생각이 들며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걸 어쩔수 없었다. 게다가 말할 때에는 코맹맹이소리에 두손을 내들고 춤추듯 갖은 동작을 다하며 말하는데 그 모양이 하도 우습강스러워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수 없었다. 나만 그런가 했더니 일행 모두가 맥꼴을 못추는 와중에도 입을 막고 웃음을 참느라 킥킥거리고있었다. 주석의 좌석뒤에는 그가 바싸얼.아지즈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클로즈업되여 걸려있었다. 우리가 왜 웃는지 상관없이 그는 자기대로  손을 내저으며 하고싶은 말을 그냥 해댔다. “우리 수리아는 아랍땅의 유일한 사회주의나라이며 중국은 동방에 우뚝 솟은 사회주의나라입니다. 우리는 모두 위대한 사회주의나라로서 장기간의 시련속에서  두터운 우정을 쌓아왔습니다. 우리는 우호적인 중국작가대표단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오늘 반가운 동지들을 만나뵙게 되여 무한한 영광을 느낍니다. 어떻습니까? 이 무더운 날씨에 고생들이 많으시지요?” 그러잖아도 날씨가 너무 더워 모두가 더위를 먹고 맥꼴을 못춘다고 아얼타이단장이 말하자 주석은 신이 나서 더욱 활기를 띠며 말했다. “그것 보세요. 중국보다는 날씨가 많이 무덥지요. 그런데 우리 아랍의 날씨가 왜 이렇게 무더운지 아십니까? 그건 바로 간 곳마다 불장난을 일삼는 그 고약한 미국놈들때문이지요. 그 놈들이 우리 이슬람교의 당당한 주권국인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몰렴치하게 침략하며  폭탄을 무더기로 퍼붓고 숱한 유정에 불을 달아놓은탓이지요. 그 놈들이 이런 지랄을 하기전에는 우리 이곳의 날씨도 이렇게는 무덥지 않았지요. 그러니 더위를 먹은분들은 죄없는 하늘을 저주할것이 아니라 그 벼락맞을 미국놈들을 저주해야지요.” 그의 코미디적인 유모아에 매료된척 우리는 그간 참고있던 웃음을 이 기회에 탁 터치며 하하 소리내여 웃어주었다. 우리가 웃어주니 그는 우리가 자기의 뛰여난 연설테크닉과 유머매너에 엄청 감염된줄 알고 더욱 신이 나서 교향악단 지휘마냥 두손을 내저으며 다음 악장을 시작했다.  “당신들 중국은 위대한 대국입니다. 땅이 크고 인구가 많은데다 지금은 경제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있지요. 이는 우리 사회주의나라들의 영광이지요. 그런데 이전에는 계급립장이 분명하게 사회주의진영과 대립되는 제국주의자들과 맞서 과감히 싸우던  위대한 중국이 어찌되여 개혁개방후부터는 국제사무에서 미국의 눈치만 보는가 말입니다. 우리 자그마한 수리아도 미국놈들과는 한치의 양보도 없이 용감이 맞서 싸우고있습니다.  그런데 당신들 중국이 왜 또 우리 아랍나라의 철천지원쑤인 이스라엘하고는 가깝게 지내는겁니까? 이스라엘은 미국의 교활한 주구로서 우리 아랍나라에 숱한 재앙을 가져다준 악착 같은 놈들입니다. 그 놈들은 지금도 우리의 땅을 강점하고있는 철천지원쑤이지요. 또 있지요. 우리 아랍쪽에도 사해가 있는데 당신들 총서기가 왜 우리 아랍나라에는 오지 않고 하필이면 원쑤놈들 이스라엘을 방문하면서  이스라엘쪽 사해에서 수영하는가 하는겁니다. 우리 아랍사람들은…” 하다하다 그의 말이 궤도에서 벗어나 점차 정치에로 넘어가자 우리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것도 감촉하지 못했는지 그는 말할수록 흥분되여 연설테크니션인듯 계속 도도히 열변을 토해댔다. 민감한 정치문제에 미치자 섭참찬이 과단하면서도 례의있게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이분들이 모두 몸도 편찮고 아주 피곤해하시는데 서로 례의적인 인사나 나누고 돌아가 휴식하게 하는게 어떻겠습니까? 그럼 중국작가대표단 단장님이 방문의 말씀이 있을겁니다.” 신이 나 한창 줄기차게 열변을 토하던 주석이 갑자기 전원이 끊긴 로버트마냥 팔을 내든채 시무룩이 입을 다물자 피곤에 젖어있던 우리 단장이 정신을 추스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단장이 인사말을 떼자마자 주석의 핸드폰이 전투마당의 돌격나팔소리마냥 굉장한 소리를 내며 울려 우리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주석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핸드폰을 꺼내들고 멋스레 받기 시작하는데 우리앞에서 말할 때와 같이 손짓해가며 좋이 몇분간이나 열변을 토했다. 주석이 핸드폰을 거두자 단장이 다시 입을 열려 하는데 한 녀사무일군이 두툼한 서류를 들고 들어와 주석앞에 내려놓았다. 주석은 필을 찾아들고 문건에 일일이 싸인하다보니 또 한참 지체되였다. 녀사무일군이 싸인을 받아가지고 자리를 뜨자 단장이 다시 두어마디 시작했는데 갑자기 사무상우의 전화벨이 따르릉 울렸다. 주석은 아무런 주저 없이 사무상에 다가가 또 전화를 받기 시작하는데 인차 끝날 잡도리가 아니였다. 주석의 무례한 행위에 화가 치민 단장은 사람을 이렇게 무시하는 나라는 처음 보았다며 이젠 더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섭참찬은 이곳 사람들이 원래 이런 성격이니 노여워말라고 단장을 위안했다. 주석은 전화를 다 받고나서야 앞에 나앉으며 단장더러 계속 이야기하라고 손짓했다. 단장은 노여움이 가시지 않아 그저 우리 일행을 일일이 소개하고는 원래 준비했던 인사의 말은 다 삼켜버리고 더 할 얘기가 없다고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주석은 손님의 정서와 눈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훌쩍 일어서더니 대문짝만한 사진앞으로 다가갔다. “에, 이 사진은 보시다싶이 제가 지난해에 대통령님의 접견을 받을 때 함께 찍은 사진이지요. 중국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수리아에서도 대통령과 단독으로 함께 사진을 찍는다는건 쉬운 일이 아니지요. ” 이어 그는 서랍을 들추더니 두툼한 신문 한뭉치를 꺼내여 우리 일행 매 사람한테 나눠주는것이였다. “이건 제가 대통령의 접견을 받을 때 중앙신문들에서 다룬 특대뉴스지요. 그땐 정말 굉장했지요.” 그는 또 여기저기에서 책을 꺼내여 우리한테 나누어주는데 사람마다 도합 다섯권씩이였다. “이는 최근년간에 제가 출판한 책이지요. 이걸 보시면 우리 수리아문단정황을 환히 알수 있지요.” 그는 우리가 아랍어를 모른다는걸 생각도 안했는지 흥이 도도하여 우리앞에서 국제도서출판발행의식을 하고있었다. 우리는 두툼한 신문과 책을 한아름씩 받아들고 어이없어 서로 쳐다보았다. (알아볼수도 없는 무거운 책이 짐이 된다고 귀국할 때에 다들 호텔방에 버리고 왔지만 나는 그 책들을 모두 꿍져가지고 돌아와 중국작가협회도서관에 기증했다.) 이것으로 그의 “공연”이 끝나는가 했더니 이번에는 또 가타부타 우리더러 모두 일어서란다. 우리는 영문도 모른채 얼떨떨하게 일어섰다. 그는 서랍에서 자그마한 곽을 꺼내더니 그안에서 작은 휘장을 집어내 하나하나 우리 앞가슴에 친히 달아주었다. “이것은 우리 작가협회의 휘장인데 기념으로 드리지요. 이건 중국벗들과 같이 귀한 국제벗들한테만 드리는것이지요.” 우리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솔직하고 열정적인 면에는 고마와할 일이지만 우리가 어떻게 생각할지를 무시하고 자기나름대로 우리를 밀어붙이는데는 저으기 불쾌감이 들었다. 우리는 마치 외국에서 온 국가대표단이 아니라 수리아의 한개 성에서 올라온 수리아작가협회 소속회원들 같았다. 주석은 나눠줄건 나눠주고 달아줄건 달아주고나서는 또 두손을 내들고 연설을 시작하는데 자기 소속 회원들한테 문학강의를 하는듯싶었다.  참을성이 좋을것 같아보이던 섭참찬이 참다 못해 벌떡 일어서며 저분들이 이젠 돌아가 쉬여야 한다며 사정없이 밀막아서야 주석은 내키지 않은대로 코미디연설을 끝냈다. 나오면서 섭참찬은 아랍사람들은 대방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 하고싶은 일과 말을 다 해야 시름을 놓는다며 리해하라고 했다. 요르단에 있을 때 래참찬이 우리한테 해주던 말과 꼭같았다. 수리아작가협회 주석은 원래 지난해에 임기가 차 자리를 내야 했으나 대통령과 무슨 막역한 관계인지 대통령이 나서서 한마디 천금 같은 〈지시〉를 하는통에 련임하게 되였단다. 작가들의 투표로 자유선거를 하는 요르단같은 자본주의나라에서는 있을수 없는 일이란다.  우리의 주숙을 배치한 곳은 시교에 있는 4성급호텔이였다. 관광계절이라 시내중심에 있는 호텔은 모두 초만원이여서 이곳에 자리를 잡았단다. 이곳에서는 손님이 오기전에 방을 예약하는것이 아니라 손님이 온후에야 예약하다보니 관광호황기에는 좋은 호텔을 예약할수 없었다. 호텔방의 시설도 요르단호텔방과 아주 흡사하여 다른 나라에 왔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아랍나라들은 어느 나라에 가나 호텔방시설이 거의 비슷하단다. 이날 오후 느지막해 우리는 그들의 일정배치대로 수리아작가들과 좌담모임을 가졌다. 전국각지에서 온 수리아의 유명하다는 시인, 소설가, 평론가, 씨나리오작가 등50여명이 모여 우리를 기다리고있었다. 수리아 로작가들은 모두 중국에 심후한 감정을 지니고있었다. 아마 같은 사회주의나라이고 모택동시대에 중국의 물질적지원을 많이 받았던 원인 같았다. 그들은 개혁개방이후의 중국에 대해서도 농후한 흥취를 가지고있었으며 많은것을 알고싶어하였는데 대체로 요르단작가들이 제기하던 문제들과 비슷하였다. 우리는 그들의 물음에 성근하고도 진지하게 답복해주었다. 뜨거운 감정에 푹 젖은 한 로작가의 진정어린 발언은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었다. “오늘 이렇게 중국대표단을 뵙게 된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중국에 남다른 감정을 갖고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어린 시절 공부할 때 교실에서 제일 먼저 쥔것이 중국연필이였고 운동장에서 제일 먼저 찬 뽈이 중국축구공이였으며 거리에서 제일 먼저 탄 자전거도 중국자전거였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쓰시던 재봉침도 중국에서 만든것이였습니다. 저뿐만아니라 여기에 앉아계시는 많은분들도 그러했을겁니다. 우리 나라가 어려울 때 중국에서는 우리 나라에 무상으로 수많은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공장도 세워주고 수력발전소도 앉혀주고요. 만약 그때의 그런 국제주의정신으로 된 중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경제적으로 뒤졌던 우리 나라는 더욱 큰 어려움을 겪게 되였을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영원히 잊지 않을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주의대가정의 형제적친선이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그의 진지한 감정에 감동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웬지 마음 한구석이 알알해나기도 했다. 우리가 어려서 공부할 때에는 자기 나라에서 생산한 연필도 쉽게 사게 안되여 꽁다리연필을 나무꼬챙이에 매여 썼고 축구공을 살 형편이 못되여 코물을 풀쩍거리며 마대쪼각 같은걸 주어다 헝겊뽈을 만들어 찼다. 국가사업일군들이 사업용으로나 타던 자전거 같은 사치품은 아예 만져보지도 못했었다. 하지만 수만리 떨어져있는 낯모를 외국의 아이들은 벌써 50년대부터 중국연필로 공부하고 중국뽈을 찰수 있었으며 중국자전거를 탈수 있었다니 우리보다 더 행복하게 자란것 같았다. 어찌 수리아뿐이랴. 煂 남, 라오스, 캄보디아, 알바니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알제리아, 탄자니아, 꽁고, 지어 아메리카의 자그마한 섬나라 꾸바 등 세계의 수많은 사회주의나라들과 발전도상에 있는 나라에서 잘살지도 못하는 중국의 지원을 무상으로 숱해 받았었다. 숱한 자금을 들여 서방사람들이 철도를 놓을수 없다는 탄자니아의 고비사막에 철도를 부설해주고 기타 나라들에도 공장을 세워주고 수력발전소를 세워주고 농장을 세워주는 등  피로써 맺어진 “형제적”나라들을 위해 돈 파는 일을 무수히 해주었다. 지어 당시 사회주의진영에서 면적은 연변땅 절반정도밖에 안되고 인구도 지금의 연변인구만큼밖에 안되는 유럽의 “영용한 수리개”로 불리우던 알바니아 같은 나라에서는 중국에서 지원한 물자들이 너무 많아 넣어둘 자리가 없어 강재며 세멘트며를 여기저기 로천에 무져놓아 썩여버려도  아까운줄 몰라했다. 아낄 필요가 없다는것이 그들의 굳어진 관념이였다. 수요될  때 없다고 또 손을 내밀면 세계혁명을 하려 하는 위대한 중국에서 국제주의정신을 발양하여 얼마든지 새것을 준다는것이였다. 그때 당시 우리 나라 로동자들의 평균월로임이 40원 좌우일 때 알바니아에 지원한 자금은 엄청나게도 알바니팀慣릿?4000여원이였다니 기막힌 노릇이 아닐수 없었다. 문화대혁명때 타도되였다가 후에 “해방”되여 알바니아주재 중국대사로 파견되여갔던 희붕비(후에 우리 나라 외교부 부장으로 사업하였음)동지는 중국에서 지원한 숱한 물자들이, 그것도 중국에서도 없어 못쓰는 귀한 물자들이 알바니아땅에서 도처에 나딩굴고 썩고 엄청 랑비되는것을 보고 가슴아파 알바니아에 대한 필요이상의 물자지원을 줄이고 절약한 부분을 나라건설에 돌려썼으면 좋겠다는 조사보고를 중앙에 올려보냈었다. 하지만 그후에도 알바니아에 대한 지원은 한푼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때 당시 “강철을 많이 제련하고 량식을 많이 증산하여 영용한 아세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인민들을 많이 지원하자”는 구호가 전국을 휩쓸 때였다. 당시 대채의 한 농민이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 “비료를 만들라면 쉽겠지만(亚飞와 压肥가 발음이 비슷함) 석탄을 실으라면(拉美와 拉煤가 발음이 비슷함) 멀리 가야 할걸.”라고 하여 위대한 국제주의정신을 모독했다는 죄명으로 비판투쟁을 받기도 했었다.  제 나라 백성은 헐벗고 굶주리고 제 나라 건설에 자재가 엄청 부족되는데도 세계지원은 사심없이 하는것이 당시 우리 나라가 제창했던 위대한 국제주의정신이였고 세계혁명이였는지 알고도 모를 일이였다. 특히 3년재해시기 나라안에서는 수천수백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굶어죽고 신강에서는 공사와 현을 단위로 사람들이 무리지어 쏘련으로 도망쳐 가 여러개 현이 텅 비다싶이 되였고 광동에서는 숱한 마을에서 가족끼리 홍콩으로 도망쳐 갔지만 살길을 찾아 떠나가는 사람들을 통제할수가 없었다.  더욱 가슴아픈 일은 그렇게 가난한 중국의 숱한 지원을 받고도 후에는 적지 않은 나라들이 중국과 등을 돌리기도 하고 지어 원쑤가 되여 싸우기도 했다는것이다. 알바니아 같은 나라는 중국의 지원을 숱해 받아먹고도 중국이 미국과 래왕하다 수교까지 하게 되자 새로운 수정주의라고 비난하다가 배터지게 무상으로 주던 지원마저 끊기니 중국과 아주 등을 돌려대고 악독하게 중국을 새로운 제국주의라고 맹공격하였다. 더욱 통탄?일은 煂 남같은 나라에서는 중국에서 지원한 입쌀을 먹으며 중국에서 지원한 총을 들고 중국과 판가리로 싸웠다는 악몽 같은 이야기였다. 다행히 개혁개방의 설계사 등소평동지가 나라를 다스리면서부터 이러한 대가없이 무상으로 해주던 세계적지원을 단호히 끊어버리고 인심을 얻는 부민강국의 시책으로 자국민들의 생활수준제고에 모를 박았다. 자리를 보고 다리를 펴는 실사구시한 영명한 결책이 아닐수 없었다. 흰고양이나 검은 고양이가 힘들여 잡은 쥐를 산넘고 바다건너 얼럭고양이 좋은 노릇만 할수는 없는것이다. 우리 나라 백성들이 지금도 썩 잘산다고 말할수는 없지만 개혁개방전보다는 생활수준이 보편적으로 현저히 제고된것만은 사실이다. 만일 지난날의 위대한 “국제주의정신”이 계속되고 “세계혁명”이 계속된다면 우리의 생활수준은 오늘의 지수에도 미치지 못하게 되리라는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13억 인구를 먹여살릴 힘은 우리 자신에게밖에 없다. 13억 인구가 헐벗고 굶주리는 날에는 세계 그 어떤 발달나라도 우리를 먹여살리지 못한다. 만일 13억 인구가 헐벗고 굶주려 수천수백만 인구가 이전과 같이 살길을 찾아 주변나라와 주변지구로 도망쳐간다면 주변나라와 주변지구들【??황충처럼 쓸어들어온 난민들로 하여 온통 란리가 터질것이다. 그러니 중국은 우선 제 나라 땅에서 세계인구의 4분의 1에 달하는 제 나라 백성을 잘살게 하는것도 “세계혁명”에 대한 크나큰 기여가 아니겠는가. 좌담회에서 수리아작가협회 주석은 좌담회에 참석한 자기 나라 작가들의 이름을 순서대로 하나하나 찍어가며 발언시키고 질문하게 하는데 그대로 가만있으면 우리에게는 발언기회가 주어질것 같지 않았다. 우리는 요르단작가들과의 좌담경험이 있는지라 주석이 우리한테 발언기회 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알고싶은 점이 있으면 그들의 “방선”을 돌파하고 중간중간 주동적으로 “출격”하여 이것저것 묻군 하였다. 우리가 “제멋대로 출격”하니 주석은 저으기 아니꼬와하는 눈치였다. 사회주의로 자칭하는 수리아에서 작가협회는 당의 령도를 받는 국가기관으로서 중국의 작가협회와 그 성능이 비슷하였다. 수리아작가협회는 줄곧 정부의 자금에 의해  운영되다가 1994년부터는 기제를 바꾸어 정부의 자금지원을 끊어버렸다. 우리 말대로 하면 “젖”을 뗀것이다. 하지만 정부에서는 마구 “젖”을 떼여 작가협회를 거지로 만든것이 아니라 규모가 큰 호텔 하나를 지어주어 호텔경영수익으로 작가협회를 운영해나가게 했다. 사회적경제환경이 해마다 좋아짐에 따라 호텔경영수익도 점점 많아져 정부에서 지원해주던 자금보다  훨씬 많아졌으며 따라서 작가협회운영도 정부에서 자금을 대줄 때보다  더 원활해졌다. 수리아작가협회에서는 작가협회기관일군들의 로임과 복리, 작가협회 활동의 모든 비용을 자체로 해결할뿐만아니라 작가들을 위하여 많은 실제적인 좋은 일을 하고있었다. 작가협회심사에서 통과된 회원들 창작작품의 출판비용을 50%씩 보조해주며 회원에 가입하여 일정한 년한에 도달되는 회원들은 의료위생보험에 가입시켜주고 문학창작에 특출한 기여가 있는 이름난 로작가들에게는 해마다 문학창작기여생활보조금을 지불해주고있었다.  수리아작가협회에는 전국회원이 1000여명 있으며 각 성마다 소속작가협회가 있다. 수리아작가들은 사회적지위가 높아 어디에 가나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시끄러운 일에 부딪쳤을 때 회원증만 내들면 많은 문제가 무난히 풀린단다. 작가들의 사회적지위가 높기에 문학에 애호가 있는 많은 국가 간부와 공무원, 기업가들이 작가협회 회원에 가입하려고 시간을 짜내 열심히 창작하며 일단 회원으로 인정되면 무한한 영광으로 간주한다. 저녁식사는 작가협회에서 배치했다. 우리가 안내되여 간 식당은 굉장이 큰 로천식당이였는데 음식상만 수백개나 줄느런히 놓여있었고 벌써 많은 자리가 손님들로 차있었다. 이곳은 봄, 여름, 가을 삼계절 비가 내리지 않다보니 어디에 가나 이런 로천식당이 수두룩하였다. 식당주위에는 커다란 인공호수가 만들어져있었고 호수안에서는 10여메터 높이의 큰 물방아와 작은 물방아 몇개가 먹었던 물을 쭈르륵쭈르륵 토하며 빙글빙글 돌아가고있었다. 아랍은 물이 귀한 곳이기에 규모가 비교적 큰 로천식당이라면 이처럼 주위에 물이 있어야 사람들이 잘 찾아온단다. 낮에는 너무 더워 모두들 사무실과 집에 박혀 나오지 않다가도 서늘한 밤이 되면 이렇게 가족끼리 나와 초만원을 이룬단다.   우리의 식사가 거의 끝나 마주앉은 량켠에서 빈객들이 번역원 하나를 두고 일상이야기를 나누는 틈을 타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아랍인들이 앉아있는 좌석을 돌아보았다. 자기네와 인종이 다른 내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나에게 눈길을 돌리며 미소짓기도 하고 손을 저어 친선을 표시하기도 했다. 상마다 거의다 로소삼대가 끼인 가족별로 혹은 련인별로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분위기가 자별나게 애애해보였다. 아랍나라에서는 공과 사의 계선이 아주 명확하여 퇴근후에는 기본상 공무를 론하지 않는단다. 공무는 출근시간에 단위에서 처리하는것이지 퇴근후에 집에 와서도 공무를 론하는 사람은 사업능력이 낮은 사람으로 취급되기에 퇴근후에는 사업관계로 사람을 찾거나 식사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모두가 가족별로 저녁시간을 즐기는것을 천직으로 여긴단다. 그래서인지 내가 많은 상을 두루 돌아보아도 모두가 가족별로 보였지 사업을 론한다고 보여지는 상은 거의 없었다. 이곳에서 단위의 일과 가정의 일이 모순될 때에는 먼저 가정일을 처리하게 한단다. 왜냐하면 단위의 일은 다른 사람이 대신하여 처리할수 있지만 가정의 일은 누구도 대체할수 없기에 네가 알아서 잘  처리하라는것이다. 이곳에서는 가정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는 사람은 단위나 회사에서 사람들의 눈밖에 난다. 가정은 나라의 가장 기초적인 세포인데 자그마한 가정일도 잘 처리하지 못하는 사람이 단위일도 잘할수 없다는것이다. 부모께 효도하지 않는 사람도 사람들의 배척을 받는다. 자기를 낳아키운 부모께도 효성하지 못하는 불효자식이 나라에 충성한다는건 침발린 거짓말로밖에 취급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한테는 의리라는것도 있을수 없으므로 사람들은 친구로도 사귀려 하지 않는단다. 이슬람교의 엄격한 교률을 순순히 따르는 이곳 아랍사람들이 아직도 보수적이고 낡은 전통관념을 고집해서인지는 몰라도 혼인과 가정관념만은 특별히 강한것 같았다.  나는 그 가족적인 분위기에 매료되여 카메라를 꺼내들고 이쪽저쪽에 대고 연신 샤타를 눌러댔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내가 샤타를 눌렀던 앞상에서 예쁘장한 한 아가씨가 일어나 나한테로 사뿐사뿐 다가와 나를 쳐다보며 뭐라고 차분히 말하는것이였다. 나는 속이 꿈틀해났다. 내가 뭘 잘못했나? 내가 아랍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아가씨는 두손을 자기 눈앞에 갖다대며 사진찍는 시늉을 했다. 아차,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사람들을 외국인이 함부로 사진찍어 안되는게 아닐가? 나는 연신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번역원 쇼후를 소리쳐 불러왔다. 쇼후도 무슨 일이 생겼나 하여 급급히 달려왔다. 나는 이 아가씨가 저들의 동의없이 내가 사진을 찍었다고 이러는지 나를 대신해 사과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쇼후는 그 아가씨의 말을 듣더니 시무룩이 웃으며 말했다. “외국에서 오신 귀빈 같은데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면 안되겠는가 하는군요.” 아아, 그런걸 난 또, 나는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국가대표단의 일원이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사람들의 전통적습관을 존중하지 않고 건드렸다면 그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였다. 내가 기분 전환하며 흔쾌히 응낙하자 아가씨는 대범하게 나의 한쪽팔을 잡으며 스스로 포즈를 취했다. 쇼후가 초점을 맞추어 샤타를 연신 눌렀다. 아가씨는 고맙다고 가슴에 손을 대고 허리굽혀 인사하며 물러갔다. 내가 그 아가씨와 무랍없이 사진찍는것을 보더니 주위의 이 상 저 상에 앉았던 아가씨와 젊은 각시들이 우르르 쓸어나오더니 자기네와도 기념으로 함께 사진찍으면 안되겠는가고 했다. 뜻밖에 호박이 넝쿨채 떨어진 격이였다. 내가 일일이 응낙하자 그네들은 웃음띤 얼굴로 나의 한켠에 혹은 량켠에 서서 포즈를 취하며 정성들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카메라를 갖고 나온 아가씨들은 자기들 카메라를 쇼후에게 부탁하여 샤타를 누르게 했다. 카메라가 없는 아가씨들은 나와 찍은 사진을 가질수 없음을 번연히 알면서도 열심히 사진찍는것이 참으로 귀엽고 직순해보였다. 우리가 이쪽에서 사진을 찍으며 왁작거리자 식사자리에 눌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 일행도 이켠으로 다가왔다. “어허, 허부단장이 여기에서 혼자 좋은 일을 하고있는줄 몰랐군요. 우리도 좀 아랍의 이쁜 아가씨들과 기념사진 한장 남깁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주위의 사진찍을 아가씨들은 다 찍었는지 이젠 나오는 아가씨들이 더는 없었다. 카메라를 내들고 기다리던 일행은 멋적게 되였다. 그렇다고 주동적으로 어느 아가씨를 청해 찍을수도 없었다.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들이 전통적이고 보수적이긴 하지만 우리가 상상했던것처럼 너무 그런것 같지도 않았다. 특히 나젊은 세대들은 현대적이고 개방적인것을 많이 받아들인것 같았다. 많은 젊은이들은 전통적인 아랍식옷보다도 청바지 등 시체옷차림을 선호하는것 같았고 나많은 녀인들은 전통적인 습관대로 검은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다녔으나 그렇게 하고 다니는 처녀들은 아주 드물었다. 적지 않은 처녀들은 아예 머리에 노오란 물감을 들이기도 하고 현대적이고도 다양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다녔으며 가슴이 깊숙이 패인 섹시한 옷도 스스럼없이 입고 다녔다. 외국손님을 만나면 주동적으로 사진찍자고 청드는걸 봐도 낯선 사나이들이 녀인들의 얼굴을 보게 해서는 안된다는 아랍의 낡은 전통관념도 점차 무색해지는것 같기도 했다<<연변문학>> 2008년 2월호
5    세계고대문명중심지-중동(3)(허룡석) 댓글:  조회:899  추천:82  2008-04-20
<<연변문학>> 2008년1월호
4    세계고대문명중심지-중동(2)(허룡석) 댓글:  조회:987  추천:78  2008-01-05
세계고대문명중심지-중동(2)허룡석3. 요르단 작가들과 한자리에 앉아    이튿날아침 우리가 식사를 마치고 호텔홀에 앉아있노라니 대사관의 래참찬과 쇼쉬가 찾아왔다. 래참찬이 우리 대표단이 요르단에서의 방문일정을 개략적으로 소개하였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데 요르단작가협회 부주석 바싸얼·스리다도 호텔에 들어섰다. 쉰살남짓해보이는 그의 이마는 마른 풀이 듬성듬성한 고비사막마냥 머리카락 몇대 없었고 우람진 체구에 당금 해산을 앞둔 녀인마냥 배가 남달리 불쑥 나와있었다. 배가 나온탓인지 그는 멀리찍이 서서 손을 쑥 내밀며 우리와 일일이 악수하고는 우리들 한가운데 엉거주춤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쏘파등받이에 등을 갖다대며 신비스럽게 환영회와 좌담회를 하기전에 한가지 중요한 문제를 의논하자고 했다. 중요한 문제를 의논한다니 우리는 모두 그의 주위에 모여앉아 귀를 강구었다.  내용인즉 이번에 중국작가대표단이 모처럼 왔을 때 요르단작가협회와 중국작가협회간에 금후 량국간의 친선적인 문화교류에 관한 협정을 체결해야 하지 않겠느냐는것이였다. 이전에 요르단작가협회에서는 중국작가협회에 량국의 문화교류를 추진할데 관한 협정을 체결하자는 요청을 해왔었다. 중국작가협회에서도 이에 동의하며 국가문화부에 보고를 올렸으나 아직 비준이 내려오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를 떠나보내는 환송식저녁만찬에서 중국작가협회당조서기 김병화동지가 우리한테 다음과 같이 교대했었다. 이번에 중국작가대표단이 요르단에 가게 되면 가능하게 요르단작가협회에서 이 문제를 제기할것이니 우리켠의 구체정황을 잘 해석해주라고 부탁했다. 아니나다를가 요르단작가협회에서 만나자마자 이 문제를 직방배기로 제기하니 아얼타이단장과 내가 김병화동지의 의사대로 이런 정황을 해석하며 이번 방문때에는 이 협정을 체결하기 어렵다고 했으나 부주석은 갖은 리유를 대며 기어코 협정을 체결하자는데로 밀어부쳤다. 좋은 일에 서로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우리가 아무리 내심하게 설명해도 부주석은 쏘파등받이에 등을 붙인채 자기의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았다. 곁에서 묵묵히 듣고만 있던 래참찬이 듣다못해 한마디 참견했다. 《방금 단장님과 부단장님이 구체정황을 충분히 설명하시는것 같던데 중국작가협회측의 의사가 그러하니 다음번으로 미루기로 하지요.》 《중국작가대표단이 우리 나라에 한번 오시기 쉽지 않은데 오늘 그냥 협정을 체결하는걸로 하시지요.》 부주석은 그냥 외고집을 부렸다. 의논하자 해놓고는 의논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자기네의 의사를 우리한테 강요하려는 그의 태도가 어쩐지 불쾌하게 느껴졌다. 보아하니 이번에 협정을 체결하지 않으면 자기네 작가들한테 그 무슨 교대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는것 같았다. 래참찬도 그의 고집스러운 태도에 화가 났는지 갑자기 버럭 언성을 높였다.  《이분들이 그렇게 해석했는데도 왜 그냥 일방적으로 밀어부치려 합니까? 중국정부의 비준이 없이 어떻게 협정을 체결한다고 그럽니까? 이곳 작가협회는 자기 임의대로 할수 있지만 중국작가협회는 중국정부의 비준을 받아야 합니다.》 래참찬이 화를 내니 부주석은 흰자위 가득한 눈으로 래참찬을 힐끗 쳐다보더니 마지 못해 입을 다물었다. 우리도 뜻밖이라 래참찬을 쳐다보았다. 이때 요르단작가협회 주석 싸디그·주다가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벗들, 잘 주무셨습니까?》 훤칠한 키에 너부죽한 얼굴을 가진 주석은 거수경례를 척 붙였다가 손을 높이 쳐들었다 내리며 우리와 일일이 악수하는데 그 독특한 군인다운 스타일이 참 보기 좋았다.  우리가 금방 이야기되였던 정황을 그에게 다시 자세히 말했더니 그는 한참 침묵을 지키더니 입을 열었다. 《중국측 사정이 그러하다면 별수 없지요. 이후에 다시 보는걸로 합시다. 그럼 지금 환영식장으로 떠나시지요.》 조급해난  부주석이 그래도 뭔가 말하려 하는것을 주석이 손을 저어 막아버리는것이였다. 우리가 탄 차는 한 건물앞에 이르러 칙― 하고 멈춰섰다. 이층으로 된 아담한 양옥이 요르단작가협회의 사무청사란다. 우리 일행이 주석의 안내하에 환영식장에 이르니 30여명 작가들이 모였는데 거의가 70세좌우의 로인들이였다. 우리 일행이 들어서자 그들은 일제히 기립하며 박수로 환영을 표했다. 그러나 환영식장이 중국과는 달리 간소하고 썰렁하게 느껴졌다. 환영한다는 현수막도 없었고 작가협회를 주관하는 정부측관원도 없었다. 싸디그·주다주석이 나서서 간단히 환영사를 하고 우리 단장이 나서서 답사를 하니 그만이였다. 마치 나라와 나라간의 중대한 문화교류행사가 아니라 자기들 작가협회내부의 평소의 자그마한 보통모임 같았다. 초촐한 환영식이 있은 뒤 곧바로 좌담으로 넘어갔다.  요르단 작가들은 개혁개방이후 근 30년간이나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가져와 세계의 주목을 받고있는 중국에 대하여 알고싶은것이 너무도 많은것 같았다. 좌담을 시작한다는 주석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회장은 대뜸 활기를 띠며 질문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져나왔다.  80세 고령이 된다는 한 로작가가 선참 일어서서 질문했다. 《중국이 계획경제건설에서 시장경제건설로 넘어간후 작품심사를 어떻게 하는지요? 문예작품마다 당이나 정부 관원들이 일일이 심사하는가요?》 이에 아얼타이단장이 나서서 답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날의 극<좌>로선때와는 달리 작가들의 작품을 편집부나 잡지사에서 심사하면 되지요. 개혁개방이후 사상이 해방되고 관념이 바뀌면서 이전보다 문학창작과 심사가  많이 자유로와졌지요.》 《그럼 정치적 제한없이 나름대로 창작해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제한이야 있지요. 집정당에 불리한 글이나 독자들에게 해가 되는 글을 써서는 안되지요. 모르긴 해도 이 나라에서도 그렇게 하면 안되겠지요? 세상 어느 나라에도 절대적인 자유란 있을수 없지요.》 이번에는 머리가 허연 로시인이 일어나 질문했다. 《중국이 개혁개방이후 경제가 고속도로 발전하고있는줄로 알고있습니다만 그 덕에  작가들의 원고료도 많이 높아졌겠지요? 작가부자들도 많이 나왔는가요?》  이번에는 호남성작가협회에서 온 유명한 소설작가 왕약문이 나서 답복했다. 《물론 원고료도 많이 올랐지요. 지금 중국작가들중 한해 원고료수입을 100만딸라이상씩 올리는 작가도 더러 있구요. 수십만딸라씩 올리는 작가는 적지 않지요. 하지만 대다수 작가들의 수입은 높은편이 못되지요. 작가들의 지명도와 작품질 그리고 출판사나 잡지사의 원고료표준이 같지 않은데도 원인이 있지요.》 좌중에서는 놀라움과 감탄의 소리가 우― 하고 쏟아져나왔다. 《중국은 인구가 워낙 많으니까 책을 한번 내면 발행량도 엄청 많겠네요?》 《네. 제가 알기로는 발행량이  260만부를 초과한 이름난 작가도 있지요.》 이에 아얼타이단장이 한마디 덧붙혔다. 《저분도 중국에서 명성이 뜨르르한 이름난 작가인데 저분의 <국화>라는 장편소설도 발행량이 100만부를 넘겼답니다.》  좌중에서는 또다시 놀라움과 감탄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뒤이어 축하의 박수소리가 요란히 울렸다. 요르단 작가들의 작품은 보통 천부씩 인쇄하고 가장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래야 5천부를 넘기지 못한단다. 수적으로는 중국보다 엄청 적은것 같지만 인구비례로 보면 훨씬 많은편이였다. 머리에 검은 수건을 두른 푼더분하게 생긴 한 녀시인이 손을 들며 일어섰다. 《중국에 50여개 민족이 있다는데 소수민족들도 모두 중국글로 창작하는가요?》 모두가 묻는것이 비교적 민감한 문제들이였다. 이번에는 내가 나서 답복했다. 《아닙니다. 무슨 문자로 창작하느냐는 작가의 의사에 달렸지요. 여러 소수민족들이 자기 민족의 문자로 창작하는걸 중국정부에서는 제창하고 고무하지요. 저는 조선족인데 조선족작가 대다수가 자기 민족글인 조선글로 창작하고있지요. 우리 대표단 단장님은 몽골족시인이신데 몽골문으로 많은 명시들을 창작했지요.》 《소수민족글로 창작한 작품의 원고료가 중국글로 창작한 작품의 원고료와 같은가요?》 《정책적으로는 물론 동등하지요. 다만 지방에 따라 다르고 출판사나 잡지사에 따라 다를뿐이지요. 경제발전정황과 경제형편이 서로 틀리니깐요.》   나는 이때에야 비로소 중국작가협회에서 이번 작가대표단의 단장, 부단장을 왜 소수민족으로 구성했는가를 알것 같았다. 아랍나라들은 모두가 다민족국가로서 나라마다 민족문제가 돌출한 문제로 나서고있었다. 이어 요르단 작가들은 작가협회의 체제문제며 경비래원문제며 작가협회 내부기구며 작가들의 년령구조며 하여튼 자기들이 알고싶은 문제를 수두룩히 제기했다. 우리가 일일이 답복하고 우리가 알고싶은 문제도 제기하려 할 때에 싸디그·주다주석이 이젠 시간이 퍼그나 지났다며 좌담회를 이만하고 식사하러 가자고 하였다. 그들이 일방적으로 좌담회를 끝내는것이 의아쩍어 우리는 서로 마주 쳐다보았다. 우리식과는 뭔가 틀리는데가 있었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을수도 없었다. 중국에서는 이런 중대한 행사가 있을 때면 행사전이나 행사뒤끝에 기념촬영을 하는것이 관례인데 여기에서는 그럴 기미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체면불구하고 래참찬한테 두 나라 작가들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는데 기념촬영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고 제기해서야 제가끔 흩어지던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어 기념촬영을 할수가 있었다. 나오면서 나는 의문점을 래참찬한테 물었다. 《우리도 알고싶은것이 많은데 이 사람들은 왜 일방적으로 좌담회를 끝내는겁니까?》  《이곳 사람들은 원래 이렇습니다. 어떻게 평형을 잡는다거나 대방의 정서를 고려한다거나 하는건  념두에도 두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하고싶은대로 하면 그만이지요. 이런 정황을 아시고 다음번부터는 저 사람들이 시간주기를 기다리지 마시고 묻고싶은것이 있으면 앞질러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어이없어 피식 웃고말았다. 나라와 나라를 대표하는 국제교류에서마저도 주인된 사람들이 대방손님들의 정서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나름대로 일처사하는것이 그래도 례의를 지킨다는 우리로서는 도무지 리해되지 않았다. 저녁식사에는 주석, 부주석, 비서장만 남아 우리를 배동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다. 좌담회에서 묻지 못한것을 나는 저녁식사하는 틈을 타서 알고싶은 문제들을 가담가담 알아보았다. 요르단의 작가협회는 국가기관이 아니라 순전한 민간단체였다. 주석, 부주석의 임기는 2년으로서 작가들의 선거를 거쳐 산생하는데 한기를 더 련임할수 있었다. 작가협회에 39명 일군이 있는데 모두가 로임을 받지 않는 자원봉사자들이였다. 주석 싸디그·주다는 대학교 교수였고 부주석 바싸얼·시리다는 국가 농업부의 고문이였다. 그들은 로임도 원 단위에서 타고있었다. 작가협회의 운영자금도 자제로 해결하는데 꼭 필요한 중대한 항목이 있을 때에만 보고를 올려 정부의 자금지원을 신청한다. 작가협회청사도 임대하고있는데 임대비는 정부에서 지출하고있었다. 지난해 주석, 부주석이 중국작가협회의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할 때도 모두 자기 주머니를 털어 출국했었단다. 요르단작가협회에 전국회원 300여명 있으며 전직작가는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자기 일터를 갖고있는 업여작가들이였다. 회원중 80%좌우가 시인들이고 소설가, 평론가, 씨나리오작가는 소수였다. 요르단에는 작가협회외에 작가련합회라는 문학단체가 또 하나 있는데 회원이 400여명 된단다. 1987년전에는 작가련합회만 있었는데 정치색채가 농후하고 내부모순이 심하여 정부에서 강압적으로 해산시켰었다. 거기에서 나온 일부 사람들이 후에 작가협회를 세우고 정부의 지지를 쟁취하고 자금지원을 받게 되였다. 그뒤 작가련합회도 다시 재건되고 역시 정부를 반대해나섰지만 정부에서는 너그럽게 필요한 자금을 지원해준단다. 두 협회는 서로 소 닭 보듯하며 은근히 경쟁을 벌렸다. 나라에서는 나라를 대표하는 문화행사때는 항상 작가협회를 내세웠다. 요르단 작가들이 책을 출판하는데 다음과 같은 몇가지 도경이 있었다. 우선 국가적인 심사를 거쳐 아주 우수하다고 인정되는 작품은 국가문화부에서 책임지고 출판한다. 작가협회의 심사에 통과되면 작가협회에서 출판비용의 35%를 보조하고 나머지는 본인이 부담한다. 다음으로는 기업이나 단체의 협찬으로 출판하는것과 자비로 출판하는것 등이였다. 이곳의 원고료도 높지 않아 작가로서 부자가 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요르단 문인들이 전국회원에 가입하려면 저서 두권이상 내놓아야 신청자격을 가질수 있었다. 회원은 종신제가 아니라 퇴직하면 명예회원으로 인정해준다. 요르단작가협회도 로년화되여  40세이하의 젊은 작가가 10%도 안되였다. 국가작가협회와 지방작가협회에서 달마다 여러가지 활동을 한두번씩 벌리는데 비용은 자체로 해결한다. 활동뒤끝에 모여앉아 회식하는 일은 거의 없이 헤여지면 그뿐이였다. 전국작가협회 회원에 가입하면 사회적 지명도가 높아져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본인들도 아주 자호감을 가진다. 하기에 회비가 비교적 높지만 회원 모두가 자각적으로 회비를 제때에 납부하며 회비를 늦게 납부하는것을 수치로 생각한다.  그후 우리는 지방에 내려가서도 그곳 작가협회 회원들과도 좌담회를 가졌는데 역시 중국에 대하여 알고싶어하는것이 너무도 많았다. 그들은 중국은 나라가 크고 인구가 많고 발전이 빠르다면서 중국에서 사는 우리를 부러워하면서 모두가 중국에 가보았으면 하는 마음이였다. 그들은 중국과 요르단이 영원히 우호적으로 지내며 두 나라의 문화교류가 더욱  빈번해지기를 희망하였다.     4. 성보산과 고로마극장    이튿날 오전 9시에 우리는 아바스·아몽왕국의 유적지인 성보산과 고로마극장을 참관하러 떠났다. 대사관의 래참찬과 쇼쉬 그리고 싸디그·주다주석이 우리를 배동했다. 차를 타고 가는 길에서 우리는 래참찬과 싸디그·주다주석과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며 요르단에 관한 많은 정황을 소개받았다.  요르단하시무왕국은 군주립헌제국가로서 권력은 국왕을 위수로 하는 하시무가족왕실의 손에 장악되여있다. 국왕은 국가원수이자 3군통수이며 총리를 임명하고 의회를 비준하고 해산할 권리를 가지고있다. 요르단하시무왕국은 아랍반도의 서쪽에 위치해있는데 서쪽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티나와 린접해있고 동북쪽은 이라크와 마주하고있으며 동남쪽은 사우디와 이웃하고있다. 국토면적은 8.9키로메터이고 인구는 560만명이며 92%이상이 무슬린이다. 인구중 요르단아랍인이 40%를 점하고 팔레스티나인이 50%를 점하며 기타는 뚜루크메니인, 아르메니야인, 끼르끼즈인, 토이기인 등 소수민족들이다. 언어는 아랍어와 영어를 통용한다. 요르단의 국토는 아랍고원의 일부로서 서부는 산간지대이고 동부와 동남부는 사막지대로서 사막이 전국 국토면적의 80%좌우를 차지한다. 경지면적은 전국면적의 4%밖에 안된다. 요르단은 기본상 내륙국가로서 유일한 출해구는 요르단 최남단에 있는 야커바만으로서 직접 홍해로 통할수 있다. 한대지구에 속하는 요르단은 대륙성기후가 아주 건조하며 아침저녁의 온도차이가 비교적 심하다. 우기는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로서 그전에는 거의 비 한방울 내리지 않는다. 酬知?기온은 20도좌우이고 3월부터 7월까지의 평균 기온은 40도좌우이다. 요르단은 12개성으로 나뉘여있으며 수도는 암만으로서 인구는 220만이다. 수도 암만은 요르단국토의 서북쪽에 위치해있으며 요르단 전국의 정치, 경제, 문화, 상업과 국제교류의 중심이기도 하다. 암만은 력사가 유구한 산의 도시로서 7개의 산마루에 자리잡고있다. 최근년간에는 도시건설속도가 아주 빨라 지금은 22개 산마루에로 확장되였다. 암만시의 제일 높은 곳의 해발은 918메터이며 시내의 고도차이가 수백메터에 달한다. 그래서인지 암만시내에서는 자전거를 탄 사람을 볼수 없었다. 자전거를 타자면 타는 시간보다 끌고 다니는 시간이 훨씬 더 많기때문이리라. 요르단은 중립국으로서 미국이나 중국과도 모두 우호적으로 지내려 한다. 발전중의 나라에 속하는 요르단은 경제기초가 박약하고 자원이 결핍한 나라로서 나라건설과 국민이 수요하는 생필품 등 거의 모든것을 수입에 의거한다. 중동지구 거의 모든 나라에서 석유와 천연가스가 나지만 유독 요르단만은 세상만사를 점지한다는 알라의 혜택을 받지 못해서인지 석유와 천연가스가 나지 않는다. 거의 모든 아랍나라들이 석유와 천연가스로 부유해졌지만 요르단은 아직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는 형편이다. 그러기에 밖으로는 외채가 많고 안으로는 적자가 많으며 나라적으로는 실업률이 높은 모순이 비교적 첨예하다. 요르단 국왕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가는 곳마다 지원을 구걸하기에 요르단 사람들은 자기들의 국왕을 가련한  《거지국왕》이라 한다.  하지만 요르단 사람들은 자기들의 국왕을 아주 존경하였다. 가난한 나라를 춰세우고 국민들을 남못지 않게 살게 하려고 체면을 무릅쓰고 세상을 돌아다니며 각종 지원을 얻어오는 국왕을 아주 고맙게 생각하며 우러러 받들었다. 더우기 여러 강국들사이에 끼여있으며 다른 나라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다른 나라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척하며 림기응변으로 대외관계를 처리해야 함과 동시에 가난으로 하여 발생되는 여러가지 국내모순도 처리해야 하는 국왕의 어려움을 국민들은 가슴깊이 리해하고있었다. 국민들은 자기네가 척박한 땅에서 이만큼이라도 살수 있는것은 국왕의 덕으로 간주하고있었다. 후쎄인국왕이 만년에 늙고 병약한 몸으로 미국에 지원을 요청하러 갔다가 병이 위급하여 미국에서 구급치료를 거치고 국내에 돌아와 병원에 입원하였을 때 병원앞은 국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국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자기들을 위해 로심초사하는 국왕이 재생할수 있기를 기도했다. 그날따라 어쩌다 비가 내렸지만 국민들은 누구 하나 우산을 들려 하지 않았다. 우산을 들면 국왕을 살리려는 자기들의 경건한  마음에 얼룩이 져 국왕의 치료효험에 영향이 간다는것이였다. 하지만 국민들의 그처럼 경건한 마음도 국왕을 살려내지 못하였다. 국왕이 세상뜨자 온 나라가 비통에 잠겼다. 국왕의 장례날 전국 각지의 수많은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수도에 몰려와 자기들이 우러러 받들던 국왕과 고별하였다.  많은 나라의 수반들도 분분이 달려와 장례식에 참가하여 후쎄인국왕을 천당에 보냈다. 미국의 현임대통령과 퇴임한 몇기의 대통령들이 자기들의 친밀한 벗을 바래려고 모처럼 대양을 건너왔으며 병이 위중하여 치료중인 로씨야대통령 예리친도 만사불구하고 달려왔다. 그날도 비가 내렸는데 요르단 국민들을 따라 어느 나라 수반도 우산을 들지 않았다. 장례식을 치른후 요르단 전국은 40일동안 국장을 하며 자기들의 존경하는 국왕을 추모하였다. 온 나라 텔레비죤방송국들에서는 모든 프로를 취소하고 하루종일 코란경을 랑송하며 후쎄인국왕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국왕의 생전의 유언에 따라 국왕의 묘지는 간소하게 꾸며졌다. 조상들을 모시는 릉묘안의 나무 한대 풀 한포기 없는 모래땅에 시신을 안치할만한 2평방메터밖에 안되는 곳에 국왕을 모셨다. 자그마한 흰 대리석을 표징으로 그우에 풍막을 쳐놓았을뿐 그 어떤 시설도 지키는 사람도 없었다. 일반 아랍인들의 묘지와 별반 구별이 없었다. 국왕은 생전에 자기의 장례를 어떻게 치를것인가를 많이 생각해왔던것 같았다. 한 나라의 군주로서 국왕은 세계상의 다른 나라 국왕이나 대통령 못지 않게 자기의 장례를 얼마든지 성대하고 규모 크게 치르게 할수 있었고 자기의 릉묘를 호화롭고 웅위롭게 만들수도 있었다. 하지만 국왕은 나라형편과 이슬람교의 교률 및 기타 여러 면을 옳게 분석하고 절대적인 권위를 떠나 자기의 후사를 깨끗하고 간소하게 지혜롭게 처리했다. 이로 하여 국민들은 생전에 자기들을 위하여 동분서주하고 로심초사하신 국왕이 죽은 뒤에도 자리가 불편해 고생한다며 애달파했고 더더욱 우러르게 되였다.  1999년 2월 7일에 후쎄인국왕의 아들 아부두라 2세·본·후쎄인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대내외정책면에서 아버지의 기정방침을 집행하면서 요르단의 경제발전을 위하여 힘을 다하고있다. 로국왕은 사상이 보수적이여서 전통적인것에 집념하면서 새로운 세계적인 발전과 흐름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지어 국민들의 핸드폰사용마저도 허용하지 않았다. 새로 왕위에 오른 국왕은 사상이 개방적이여서 의식과 관념 등 많은 면에서 세계적인 발전의 흐름을 받아들여 정치, 경제, 문화 등을 세계와 접궤시키려 애써왔다. 요르단 사람들은 나라와 국민을 위하여 로심초사하는 자기들의 젊은 국왕이 50세도 되기전에 때이르게 늙어가고있다며 가슴아파하고있다. 요르단의 건축물과 거리, 공공장소, 사무실 그 어디에서나 후쎄인국왕과 아부두라 2세·본·후쎄인국왕의 크고작은 초상화를 볼수 있다.  성보산은 암만시와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아 차가 반시간가량 달려 금방 도착할수 있었다. 7월은 중동에서 찜통더위철이라 차안도 더웠지만 차에서 내리니 대번에 숯가마속에 떨어진듯한 느낌이였다. 불덩이가 그대로 숫구멍을 지져놓는듯하여 태양모를 쓰고도 준비해간 양산을 펼쳐들지 않으면 안되였다. 성보산으로 오르는 길은 별로 가파롭지 않았으나 우리의 몸은 어느새 물자루가 되여버렸다. 우리 일행외에도 산에 먼저 오른 관광객이 적지 않았다. 산으로 오르는 길에 둘씩 짝을 짓고 아무렇게나 편할대로 총을 멘 군인들이 종종 보였다. 정세가 복잡다단한 이라크와 잇대여있고 피난하러 오는 숱한 이라크난민들속에 테러분자들도 끼여들어 종종 사단을 일으키고 요르단경내에서 규모가 비교적 큰 폭발테러사건을 이따금씩 조작하는통에 대통령의 명령으로 중요부문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관광지에도 경비가 강화되였다는것이였다. 군인들을 보는 순간부터 우리가 별로 안전하지 못한 곳에 와있음을 다시한번 실감하게 되였다. 성보산에 오르니 높다란 아름들이 돌기둥이 여나문개 외로이 서있고 옛집터가 어수선히 널려있을뿐 기대치만큼 우리에게 놀라움과 감동을 줄만한 그 무엇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력사가 유구한 아바스·아몽왕국의 유적지였다.  철석기시대 초기인 기원전 13세기때에 지금의 암만주위에 태양신을 신봉하는 아몽인부락이 나타났다. 기원전 11세기에 아몽인들은 아바스·아몽왕국을 건립하고 수도를 지금의 성보산에 세우고 그 이름을 아몽이라 불렀다. 아몽인들이 성보산에 수도를 정하면서부터 암만은 력사적으로 줄곧 도시의 중심으로 되여왔다. 잔존해있는 문물고적은 여러 력사년대의 면모를 보여주고있는바 지금 성보산에 남아있는 유적은 주로 기원 161∼180년에 세워졌던 애미얼왕궁의 유적이였다. 성보산에는 또한 1951년에 세워진 력사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안에는 요르단 전국에서 발굴된 력사문물들이 진렬되여있다. 이를테면 요르단하곡에서 발굴된 구석기시대의 돌칼, 돌도끼 등이다. 지금으로부터 10만년이상의 력사를 갖고있는 이러한 문물들은 요르단에 현존해있는 가장 오랜 력사문물이다.   성보산유적보다 더더욱 가관인것은 성보산에서 한눈에 바라보이는 암만도시의 정경이였다. 봉이봉이 산세를 타고 앉은 도시의 건축물들은 12급 태풍을 만난 바다의 집채 같은 파도마냥 그대로 넘실대는것 같았다. 그런데 도시의 모든 건축물들이 하나 같이 암회색 빛갈이였다. 알고보니 건축물들의 색채가 울긋불긋하면 7000년의 유구한 력사를 갖고있는 고전적도시의 형상에 손색이 간다고 나라적으로 색갈을 통일한다는것이였다. 우리는 성보산에서 몇장의 기념촬영을 남기고 암만 구도시구역에 자리잡고있는 고로마극장으로 향했다. 고로마극장은 기원 2세기 중엽에 산허리를 들이깎아 산세에 따라 만든것이였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아주 장관이였다. 고대인들이 무슨 힘으로 산을 들이깎아 이렇게 웅장한 로천극장을 만들어냈을가 하는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설계풍격은 제라스의 고로마극장과 아주 흡사하였다. 극장은 원형으로 지어졌는데 바위를 쪼아 만들어진 33줄 돌좌석에 6000명을 용납할수 있었다. 건축인들은 시공과정에 성학원리를 충분히 리용하여 극장의 어느켠에 앉아있든 무대우에서 노래하고 랑송하고 연설하는 소리를 모두 똑똑히 들을수 있게 하였다. 극장 한가운데 서서 높은 소리로 말하면 자기의 목소리가 머리우에서 감돌아치는 소리를 금방 들을수 있었다. 내가 밑에서 아츠랗게 쳐다보이는 극장 꼭대기를 가리키며 일행에게 올라가보지 않겠는가고 했더니 일행 모두가 꼭대기를 쳐다만 볼뿐 도리머리질이였다. 나는 그들을 제쳐놓고 혼자서 정상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좌석이 가파로운데다 통로를 찾으며 오르다보니 한식경이 좋이 걸렸다. 정상에 오르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이 턱에 닿아 오장륙부 모두가 활랑거렸다. 머리를 정상성벽밖에 내놓는 순간 시원한 바람이 정답게 맞아주어 기분이 자못 상쾌했다. 뜻밖인것은 이곳에서도 암만시의 정경을 한눈에 굽어볼수 있다는 점이였다. 다른 각도에서 암만시를 바라보니 다른 도시를 바라보듯 암만시의 정경이 새롭게 안겨왔다. 돌아서서 극장안을 내려다보니 마치 갑옷을 떨쳐입은 고대의 무사들이 창과 칼을 비껴들고 오르락내리락 엎치락뒤치락 날렵하게 격투하는 장면이 한눈에 보이는듯했고 서로 죽기내기로 찌르고 막는 비장한 장면의 기복에 따라 관중석을 꽉 채워 앉아 미친듯이 환호성을 토해내는 파렴치한 귀족들의 랑패상이 보이는듯했다. 사람은 개미처럼 보여도 어서 내려오라고 재촉하는 일행의 목소리는 꼭대기에서도 아주 똑똑하게 들려왔다. 그제야 환각에서 깨여나 내려가려고 서둘렀다. 이것도 등산과 마찬가지로 내려가기가 올라오기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내려갈 때가 훨씬 더 가파롭게 느껴져 조금만 조심하지 않아도 금방 아래로 내리꼰져 육장버러지가 될것 같았다. 말초신경을 곤두세우고 아래다리에 딱 힘을 주며 아래로 겨우 다 내려가니 다리 힘줄을 팽팽이 틀어놓은듯 두다리가 뻐근히 아파났다. 그런데도 일행은 올라가보니 어떠한가고 련속 질문했다. 고로마극장 량켠에는 《요르단민간생활박물관》과 《요르단민속박물관》을 차려놓고 관광객들을 맞이하고있었다. 민간생활박물관에는 요르단인들의 복장과 실내시설, 악기, 수공업품 등이 전시되여있고 민속박물관에는 요르단과 요르단하 서안지구의 민족복장과 예술벽화들이 전시되여있었다. 요르단인들의 천짜는 모습과 갖추어놓은 틀은 우리 조선족들의 베짜는 기술과 베틀과 비슷했다. 고로마극장은 이미 암만시의 주요한 관광지로 되였으며 요르단의 중요한 문화행사와 예술행사를 벌려가는 주요한 장소로 되였다.        (다음호에 이음) <<연변문학>> 2007년 12월호
3    세계고대문명중심지-중동(1)(허룡석) 댓글:  조회:1111  추천:65  2008-01-05
세계고대문명중심지-중동(1)허룡석구라파, 아세아, 아프리카지역이 서로 다정하게 포옹하고 키스하려는 곳에 심술궂게 끼여들어 그 포옹을 영원히 저애하는 땅덩어리가 하나 있으니 세상사람들은 이곳을 일컬어 중동이라 부른다. 중동이란 예로부터 세계문명을 뽐내며 뭐나 다 아는척하던 구라파사람들이 지어낸 지명이다. 당년에 구라파사람들은 동아세아에서도 제일 동쪽끝에 거대한 륙지항공모함마냥 자리를 틀고앉은 중국을 일컬어 원동이라 불렀었다. 자기네 구라파와 원동이란 중국사이에 이름없이 똬리를 틀고앉아있는 이 땅덩어리를 중동이라 이름지었다. 세상사람들은 당시 세계문명을 주도해나가던 구라파사람들을 본따서 습관적으로 이곳을 중동이라 부르게 되였다. 중동지구에 자리잡고있는 아랍세계는 서쪽의 대서양으로부터 동쪽의 아랍해에 이르기까지 북쪽의 지중해로부터 아프리카의 중부가 망라되는데 애급, 이스라엘, 요르단, 수리아 등 22개 나라가 서로 이웃해있다. 중동지역의 면적은 1420km2로서 중국땅의 약 1.5배 남짓하다. 인구는 3억으로서 중국인구의 4분의 1도 안된다. 중동지역은 우리에게 있어 퍼그나 생소하고 신비로운 땅으로 알려져있다. 이곳에는 아름다운 지중해 해안이 있고 아랍세계의 생명의 강 닐강이 있으며 달나라경색을 방불케 하는 망망한 고비사막이 있는가 하면 그속에는 늘 푸른 오아시스도 있다. 또한 천태만상의 암석동굴이 사처에 널려있으며 헤아릴수 없이 많은 옛성터의 유적과 고풍스러운 예술적건축물들이 즐비하다. 이 땅덩어리는 일찍 세계인류문명의 활무대로서 다른 대륙의 인류들이 나무를 비벼 불씨를 얻고 수렵으로 생계를 이어갈 때에 이곳에서는 벌써 무수한 인류문명의 기적을 창조하였었다. 내노라고 바람결마냥 오고가던 여러 대제국들이 이곳에서 하나하나 건립되고 또 이곳에서 하나하나 멸망되였으며 종종별별 대대소소의 종교들이 이곳에서 아귀다툼하고 생사판가리 하였었다. 이러한 대제국들이 창조한 인류문명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면서 본의아닌 공동으로 중동지역의 인류문명의 년륜을 새록새록 새겨왔으며 중동지역의 력사적 재부를 창조해왔다. 이곳에는 아직도 채 발굴해내지 못한 력사적 문화유산이 무진장하다. 세상사람들은 중동지역을 만화통이라 일컫는다. 이곳은 지리적변화가 다단하고 인종이 혼잡하고 건축풍격이 각이하다. 종교성지인 이곳에는 너속에 나 있고 나속에 너 있으며 너와 나가 서로 얼기설기 엉켜져 실마리를 찾기 어렵다. 서로 뒤질세라 강대함과 문명함을 뽐내던 여러 제국들이 횡행하던 곳이라 애급인, 파스인, 그리스인, 로마인, 유태인, 토이기인, 아랍인들이 이곳에서 서로 한치의 땅이라도 다투며 자기들의 존재를 과시했었다. 중동지역의 많은 곳에서 제멋대로 나뒹구는 돌덩이 하나를 주어들어도 그것은 수천년의 력사가 담겨져있다고 한다. 서양사람들이 세계의 인류문명을 주도해나가기전에는 사실상 이곳이 세계 인류문명의 중심지였다. 비단의 길도 이곳을 통해 중국과 구라파로 이어졌으며 아세아, 아프리카, 구라파의 문화와 물자교류의 뉴대로 교량으로 되였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대적중동은 이미 지난날의 빛나는 력사적문명이 퇴화되고 색바래져 더는 인류문명의 중심지였던 흔적과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전 지구적 비약적인 발전과 변혁속에서도 어쩌면 색바라지 않는 화강석마냥 보수적전통을 가장 많이 보류하고있으며 세상과는 퍼그나 동떨어진 락후의 땅으로 되여있었다. 이곳의 청진사와 전통적바자(집시), 그리고 살아가는 모습은 의연히 《천하루밤 이야기》에 나오는 묘사마냥 이색적이고 신비로운 색채를 띠고있다. 중동지역에 가보면 현대적문명의 향수보다는 마치 거대한 로천세계 력사박물관에 들어선듯한 기분이며 세계고대사사이를 누비며 인류의 가장 보귀한 력사발전사를 감수받는듯하다. 얼마전에 나는 중국작가협회에서 중동지역 일부 나라 작가협회의 초청으로 조직된 중국작가대표단 부단장의 신분으로 (단장은 내몽골자치구작가협회 주석 아얼타이임) 신비한 베일에 가려있는 중동지역의 요르단, 시리아 등 아랍나라를 방문하면서 아랍문화의 한귀퉁이나마 엿볼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였다. 1. 세계최호화호텔앞에서 6월 27일 오후 5시 30분, 우리 대표단 일행 5명은 중국국제항공공사 보잉기를 타고 아랍에미리트련방의 국제공항인 두바이시로 향했다. 두바이시는 아랍에미리트련방의 해변도시로서 중동지역으로 가는 려객들이 거개 두바이시를 거쳐 여러 아랍나라로 간다. 북경으로 오가는 아랍나라 항공공사의 려객기도 수두룩하지만 우리 대표단이 중국 려객기에 탑승한데는 그럴만한 리유가 있었다. 우리 나라의 내부규정에 따르면 출국방문하는 국가대표단은 반드시 국내항공공사의 려객기를 타야지 외국려객기에 앉아서는 안된단다. 국내항공공사의 비행기표값이 외국항공공사 비행기표값보다 엄청 비싸지만 국내항공공사의 리익을 챙겨주다보니 시장경제규률을 어기고 《계획경제》모식을 택한 모양이다. 우리가 탄 보잉기의 수백명 려객들은 거개가 중국인들이였다. 이들 모두가 중동지역 여러 나라들에 가서 장사하거나 로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였다. 그들중에서도 중동 여러 나라 석유회사들과 계약을 맺고 그곳에 가 석유를 채굴한다는 중국석유공사의 로동자들이 다수였다. 우리 중국조선족들이 한국이나 일본, 미국 등 나라에 숱한 사람이 나가 돈벌이한다는것은 알아도 중동지역에 나가 장사하고 일하는 중국사람들이 이처럼 많을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게다가 놀라운것은 북방사람보다도 남방사람들이 다수라는 점이였다. 대체로 절강, 강소, 안휘, 광동사람들이였다. 아마도 계획경제시기에 중공업의 혜택을 적게 받아온 남방사람들이 그 혜택을 많이 받아온 북방사람들보다 시장경제의식이 훨씬 앞선것 같았다. 려객기안은 빈자리 하나 없이 중국사람들로 꽉 찼다. 그탓이였던지 출국한다는 느낌보다도 국내려객기에 오르지 않았나 하는 착각까지 가지게 되였다. 려객기가 리륙한지 몇시간이 지나자 기창밑으로 주마등마냥 흐르는것은 일망무제한 고비사막이였다. 폭격이라도 맞은듯 질서없이 울퉁불퉁 벌거벗은 돌산들도 끝간데없이 펼쳐졌다. 간혹 가다 푸른 점들이 쌀의 뉘처럼 보이는데 마치 고비사막에 부추단 하나를 박아놓은듯 왜소하고 가냘파보였다. 불그스레하고 희뿌연 그 고비사막속에도 토굴집 같은 인가들이 종종 나타나기도 했다. 저렇게 메마르고 척박한 땅에서 사람이 산다는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저곳에 비하면 산 좋고 물 맑은 연변땅에서 사는 우리가 얼마나 다행스럽고 자랑스러운지 모르겠다. 려객기는 어느덧 중동지역에 들어섰던것이다. 근 8시간을 날아 려객기는 두바이시에 착륙했다. 공항홀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텔레비죤에서나 보아오던 신비의 땅에 와있음을 실감했다. 드넓은 공항홀에는 피부색과 옷차림이 서로 다른 인종들로 붐볐다. 서양인들도 아니고 동양인과도 구별되는 아랍인들이 다수였고 그들의 차림새에 우리의 눈길이 빨려갔다. 공항일군들의 옷차림은 하나같이 아랍인들의 특유의 전통의상이였다. 남성들은 머리에 새하얀 천수건을 치고 검은 띠를 두르고 희고 긴 가운을 입었고 녀인들은 검은 수건을 치고 검은 가운을 입고 근무하고있었다. 홀에서도 많은 아랍인들이 이런 옷차림을 하고 분주히 오갔다. 일부 나많은 녀인들은 아랍인의 전통대로 검은색 가운에 검은 수건으로 얼굴을 빈틈없이 가리고 다니는데 마치 검은 숯덩이가 그대로 움직이는듯했다. 아랍남성들의 호방적인 구레나룻과 코수염도 아주 인상적이였다. 여러 아랍나라로 가는 려객기에 탑승하려고 사람들이 여기 저기에 줄을 지어 서있는데 그속에는 중국인들이 수두룩했고 키가 작달막한 타이, 월남, 캄보디아 나라 모습의 남녀들도 적지 않았다. 거의 모두가 로무일군들 같았다. 입국검색을 마치고 나오니 중국국제항공공사 두바이지사의 한 일군이 우리 대표단일행을 기다리고있었다. 우리는 그의 안내에 따라 밖으로 나왔다. 공항홀에 있을 때에는 에어콘덕분에 더운줄 몰랐는데 밖에 나오니 뜨거운 열기가 대번에 확확 엄습해와 금시 사우나의 찜질방에 들어선듯했다. 지금은 중동지역에서도 가장 무더운 때라는데 날마다 평균 기온이 45도좌우라니 이후 이런 날씨에 어떻게 견딜가싶었다. 우리는 더위에 숨막히는 소형뻐스에 앉아 두바이시교에 있는 지정된 호텔로 안내되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루밤 묵고 래일오후 2시 30분에 요르단 수도 암만으로 가는 려객기를 갈아타게 되여있었다. 단장을 제외하고 우리는 한방에 두사람씩 배치되였다. 방은 꽤나 널직하고 깨끗했다. 이곳 시간은 중국보다 4시간이나 늦은지라 우리가 자리에 들 때에는 중국의 아침 6시경이였다. 이튿날아침 9시에(북경시간 오후 1시) 일어나 아랍식으로 간단히 식사하면서 오전나절을 어떻게 보내랴를 의논했다. 모두들 귀한 시간을 호텔에서 랑비하지 말고 가까운 곳에서 아랍에미리트련방을 수박겉핥기나마 돌아보자는데 합의를 보았다. 이곳에서 수도가 그리 멀지 않으면 수도부터 가보자고 했다. 북경외국어대학에서 아랍어연구생으로 공부하며 우리 대표단 번역으로 초청된 쇼후가 우리의 의사를 호텔려행사일군에게 전했다. 려행사일군은 수도 아부자비는 이곳에서 200km남짓이 떨어져있어 갔다 제 시간에 돌아오기 어렵다며 가까운 해변을 돌며 청진사와 세계에서 숙박료가 제일 비싸다는 아라비아호텔구경을 하면 어떻겠느냐 했다. 우리는 아쉬운대로 그의 의사를 따르기로 했다. 차비, 관광비로 사람당 17딸라씩 내란다. 우리는 그들이 그어놓은 코스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전사이자 가이드인 모함메드가 연도에서 자기 나라를 소개했다. 아랍에미리트련방은 바다를 끼고있는 해안국가로서 면적은 8만여km2이며 인구는 400여만이다. 면적이나 인구나 우리 연변보다 곱절 크고 많을뿐이였다. 이 나라 인구중 아랍인들이 3분의 1뿐이고 나머지는 외국이민들이란다. 관방언어는 아랍어와 영어를 통용하고있었다. 이 나라는 력사적으로 보루뚜갈, 네덜란드, 불란서, 영국 등 서방렬강들의 침략을 장기간 받아오다 1971년 3월에야 독립을 선포했다. 그 이듬해초에 7개 추장국들이 련합하고 나라이름을 아랍에미리트련방이라 하였다. 아랍에미리트련방은 기타 아랍나라들보다 썩 뒤늦게 1984년 11월에야 우리 나라와 외교관계를 건립하였다. 아랍에미리트련방은 세계 세번째로 가는 석유대국으로서 석유매장량은 978억통이며 세계석유매장량의 근 10%를 차지한다. 천연가스 저장량은 5.8억m3로서 역시 세계에서 세번째로 가는 천연가스대국이다. 이 나라 석유수입은 정부재정수입의 85%를 넘어서고있다. 메마른 고비사막에서 가난에 허덕이던 나라가 석유가 나면서부터 일약 부유한 나라로 탈바꿈하여 많은 국민들이 돈을 물쓰듯한단다. 딸라주머니를 어깨에 걸치고 이딸리아 명표안경을 걸고 나귀나 락타의 등에 앉아 일본제 록음기의 건들어진 노래를 들으며 자유로이 사막지대를 오고가는 이 나라 백성들을 도처에서 볼수 있단다. 관광뻐스는 별로 크지도 작지도 않은 한 청진사에 잠간 들렸다가 해변가의 고속도로로 질주했다. 시름없이 넘실대는 바다는 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수영장마냥 그 어느 나라의 바다물보다도 푸르러보였다. 해변은 거의 모두가 부드럽고 폭신한 백사장으로서 우리 중국이라면 더없이 훌륭한 해수욕장으로 되련만 이곳에서는 그대로 방치해두고있는듯 아무런 시설도 없었다. 그 넓고 긴 백사장에는 모래를 쌓으며 장난치는 몇몇 개구쟁이들과 비키니차림을 한 남녀 한쌍이 손을 잡고 거닐뿐 백사장은 한적하기만 했다. 푸르른 바다물은 스스로도 흥미가 없는듯 백사장기슭을 덤덤히 핥고있었다. 문득 저 멀리 바다 한가운데 옥수수를 쪼개 세운듯한 흰건물이 신기루마냥 우리 시야에 안겨왔다. 《저기 저 곳이 보이지요? 저기가 바로 세계에서 유일하게 7성급호텔로 불리우는 아라비아호텔입니다.》 운전수가 갑자기 앞을 가리키며 소리치자 쇼후가 번역해주었다. 세계에서 높이가 가장 높고 가격이 가장 비싼 호텔이 바로 저것이란다. 호텔이 어찌나 호화롭고 휘황한지 그 급수를 밝히기 어려워 그저 세계최고급이라는 의미에서 7성급이라 한단다. 호텔은 바다를 메운 인공섬에 돛배모양으로 지어졌는데 높이는 321m로서 56층에 달한다. 이 호텔은 한 영국의 저명한 설계사가 세계 이름난 여러 호텔의 장점을 따다 설계했는데 그 조형이 현대적이고 독특하고 아름답기로 세계 유명한 호텔경영가들이 한결같이 부러워 침을 흘린단다. 세상의 부호들은 물론 부유한 나라의 대통령과 총리들도 이곳에 와 한번 자보는것이 소원이란다. 호텔에는 방마다 설계가 다른 침실이 202개 있다. 200m 높이에 있는 관람대에 나서면 두바이시와 그 주위의 전경이 한눈에 안겨온다. 사람들은 이 호텔에 와 보아야 금빛찬란하다는 단어의 참뜻을 실감하게 된단다. 가장 호화로운 782m2의 대통령방은 금으로 도금하였는데 하루밤 숙박료가 3만딸라란다. 하인들이나 든다는 구석쪽에 있는 제일 값싼 방이라야 하루밤 숙박료가 1500딸라란다. 이 호텔에 든 손님은 세계에서 가장 호화로운 승용차를 타고 공항에 드나들수 있으며 호텔 28층에 있는 헬기장에서 현대화헬기를 타고 15분간 공중선회하면서 도시와 바다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할수 있다. 주숙한 손님이 만일 바다밑에 있는 해족관에 가 바다고기를 맛보려 한다면 호텔에서 잠수정에 모시고 바다로 들어가는데 바다밑 세상을 맘껏 구경할수 있다. 엎딘바에 절이라고 왔던바에 이렇듯 호화롭고 설비구전한 세계최호화호텔을 눈요기라도 하고싶은 생각이 굴뚝 같아 우리가 안으로 들어갈려고 하니 NO, 호텔경비원들이 막아나섰다. 호텔안을 구경하는 관광비가 인당 100딸라란다. 우리는 초풍할 지경으로 놀라 휘둥그래진 눈으로 서로 한참 쳐다보았다. 세상 어디에 가도 눈요기하는데만도 100딸라씩 내라는 곳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살아 평생 언제 다시 와볼지도 모를 곳이라지만 사람마다 100딸라씩 선뜻 내놓기는 주저가 들었다. 더우기 자기 돈을 내놓으라면 살점을 떼내는듯한 아픔을 느끼는 중국사람들이라 100딸라라는 소리에 손부터 홰홰 내저었다. 우리 《가난뱅이》대표단 일행은 고기맛을 보려는 흥분에 들떠 닭 쫓던 무엇이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한참이나 호텔을 쳐다보며 겉모양이나마 눈자리나게 요기했다. 우리는 잔뜩 흥분에 들떴던 기분이 와르르 무너져내린 마음을 달래려는듯 호텔경비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호텔앞에서 포즈를 취하며 애꿎은 사진기샤타만 눌러댔다. 연길공원에서도 자그마한 조형을 배경으로 사진찍으려 해도 사진사들이 달려나와 돈을 내라는데 그 유명한 세계최호화호텔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맘껏 찍는데도 너그러이 돈을 내라지 않는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했다. 우리는 그 유명한 호텔부근에 우리의 발자국이라도 남겼다는데 만족해야 했다. 2. 두바이―암만공항에서 오후 1시에 중국국제항공공사 두바이지사에서 보낸 소형뻐스가 약속대로 호텔앞에 와 멎었다. 방값은 항공공사에서 책임진다기에 우리는 그대로 뻐스에 올랐다. 북경에서 요르단 수도 암만으로 곧바로 짐을 부쳤기에 중도에서 짐을 끌고다니는 고역은 덜었다. 뻐스안은 숨쉬기가 어렵게 열기가 확확했다. 바깥날씨가 45도라니 에어콘이 없는 뻐스안이 시원할리가 없었다. 아랍사람들은 사막의 고온에 습관되여 에어콘이 없어도 탓하지 않는단다. 그러나 온대지역에서 온 우리는 열대기온에 견디기 어려웠다. 우리가 더위에 시들어진탓인지 바깥의 건물도 나무도 모두다 무더위에 녹아내릴듯 후줄근해보였다. 다만 사람들만이 이런 고온에 습관되였는지 씩씩하게 오가며 생기를 피웠다. 우리는 두바이국제공항에 이르자 서둘러 탑승수속을 했다. 쇼후가 자진해서 수속하는 줄에 가 섰다. 앞에 사람이 여나문명밖에 없었으나 발목 부러진 당나귀가 사막에서 수레를 끌듯 도무지 축이 나지 않았다. 반시간이 지나면서부터 다리를 자주 엇바꾸어 디디는 쇼후가 지쳐보여 내가 가서 바꿔주려 하니 순진한 쇼후는 그예 나를 밀막았다. 나는 앉아있지 않는 성미라 해산을 앞둔 임신부마냥 대청에서 오르락내리락했다. 또 반시간가량 지나서 쇼후가 허구픈 웃음을 지으며 맥없이 걸어나왔다. 《수속은 한거여?》 《시간이 연착되여 4시에 떠난답니다.》 《뭐여? 헛고생했잖아?》 《그럼 언제부터 수속한대?》 《두시후부터 한답니다.》 《이젠 두시가 다됐잖아?》 《다시 줄을 서랍니다.》 알고보니  어처구니  없었다. 사전에 통보하지도 않고 한시간가량 줄을 서서 겨우 제 차례가 오니 암만으로 가는 비행시간이 연착되였으니 비껴서란다. 우리 중국에서도 비행시간이 자주 연착되기는 매일반이지만 그래도 사전에 통보라도 하지 않는가. 여기 사람들은 이런 일에 습관되였는지 군소리없이 물러서는데 중국사람들은 두덜거리기를 좋아하는지 누가 듣건 말건 한참 두덜거리다 꼬인 속이 풀렸는지 그제야 이 시간을 어찌 보낼고 했다. 누군가 쇼핑이나 하자고 했다. 그제야 공항홀을 여겨보니 면세점과 식당들이 즐비했다. 매대마다 오색령롱한 각가지 세계명품들이 구전한것 같았다. 쇼후가 우리를 이끌고 쇼핑에 나섰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거의 모든 매대마다에 중국인 판매원이 한둘씩 있는것이였다. 이것은 이곳에 드나드는 중국인이 얼마나 많느냐를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하기에 값을 묻고 흥정함에 조금도 불편함이 없었다. 아랍에미리트련방 화페 디얼한은 1딸라 대 3.7원으로서 인민페보다 가격이 곱절 더되게 높았다. 그러다보니 물가도 자연 높아 중국보다 두세배 비쌌다. 중국보다 물가가 싼가 하던 일행의 기대는 수포로 돌아가고 그렇다고 빈손으로 돌아설수도 없었다. 우리 일행은 그들과 기막혀할 정도로 값을 톱으며 기념으로 남길만한 자그마한 물건들을 한두개씩 챙겼다. 우리가 시간맞춰 돌아와보니 비행시간이 또 연착되여 저녁 6시가 되여야 떠난단다. 일행은 그만 물먹은 사막의 모래더미마냥 걸상에 무너져내렸다. 그래도 저녁은 공항측에서 준다기에 우리는 지정된 식당에 가서 간단한 저녁을 챙겨먹었다. 우리는 저녁 6시에 탑승했다. 비행기에 올라보니 중국에서 두바이로 올 때와는 완연 다른 풍경이였다. 려객기안은 거의 다 아랍인들이였는데 아이들을 두셋씩, 대여섯씩 가진 가족들이 수두룩했다. 마치 우리 이곳에서 뻐스를 타는듯 온 가족이 비행기를 타는것이 예상사인것 같았다. 그만큼 그들의 돈주머니가 불룩하다는걸 말해주는게 아닐가. 비행기가 요르단수도 암만에 착륙할 때는 저녁 9시경이였다. 한 나라의 수도공항이라 하지만 시야에 안겨오는 모든것이 너무나 수수하고 초라하다는 느낌이였다. 중국의 자그마한 변강도시 연길공항보다도 작고 낡아있었다. 우리가 탄 비행기가 세시간 반이나 연착되다보니 여러 나라에서 오는 비행기가 한데 들이닥쳐 여기저기에서 몰려든 려객들로 낡고 초라한 공항이 금시 터질듯했다. 전쟁피난을 떠난 난민떼와 다를바 없었다. 우리도 사람들한테 떠밀려 려권검색대앞에 가 줄을 섰다. 우리가 늦게 도착하는통에 사전에 약속되였던 저녁환영행사와 만찬회가 제대로 열릴지 걱정이였다. 우리는 저으기 조바심이 나서 입국수속을 빨리 해줬으면 했으나 검사일군들은 조금도 서두르는양이 없었다. 그들은 여유작작하게 려객들마다 웃으며 이야기하는데 그 무슨 한가한 사람이 유희를 놀고있는듯했다. 거의 반시간 걸려 우리앞에 대여섯밖에 남지 않았다 했더니 웬걸, 한사람이 한가정을 대표하다보니 수속할 때면 소리 한마디에 구석쪽에서 안해와 애들이 한무리씩 쓸어나와 검사관들에게 려권을 건네주고 얼굴을 보여주는것이였다. 옷차림은 수수해도 온 가족이 비행기를 타고다니는걸 보니 새삼스레 아랍인들의 돈주머니가 우리보다 훨씬 두둑함을 실감했다. 중국에서는 일반 백성들이 온 가족이 비행기를 타고 나들이 한다는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였다. 우리가 이제나저제나 차례를 기다리는데 안쪽으로부터 키가 작달막하고 예쁘장하게 생긴 한 동방처녀가 나타나더니 검사관과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는것이였다. 혹시 우리 마중을 나온 대사관일군이 아닐가? 처녀는 목을 빼들고 이줄 저 줄 살펴보더니 우리쪽으로 다가왔다. 《혹시 중국에서 오시는 작가대표단이 아닌가요?》 처녀는 앞에 선 나보고 물었다. 《그렇습니다. 혹시…》 《맞네요. 반가와요. 저는 요르단주재 중국대사관 문화처의 쇼쉬입니다. 단장님이신가요?》 서가라는 처녀는 맑게 웃으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분은 부단장이시구 단장은 저분이십니다.》 곁에 섰던 호남작가협회에서 온 왕약문이 아얼타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쇼쉬는 자기네 문화참잔과 요르단작가협회 주석이 비행기 시간이 연착된줄을 모르고 제 시간에 나왔다가 돌아갔단다. 이제 두번째로 마중을 나왔다면서 아래서 기다리다 시간이 너무 오래서 웬 영문인가 하여 올라왔단다. 쇼쉬는 검사관한테 다가가 아랍어로 뭐라고 말하니 검사관이 손을 내젓는것이 뭔가 안된다는것 같았다. 쇼쉬가 우리한테 돌아와 애티나게 웃으며 말했다. 《국가대표단이니 록색통로로 나가게 해달라고 했더니 마구 안된다네요. 요사이 아랍나라에서 테러활동이 잦아 검사가 엄한가봐요.》 우리 차례가 오니 검사관은 려권을 받아 일일이 확인하면서 자그마한 케스안에 손을 들이밀어 지문을 찍게 하고 외눈박이 렌즈에 한쪽눈씩 들이대고 크게 뜨란다. 여태껏 여러 나라를 돌아다녀도 입국시에 이렇게 지문과 눈알을 검사하는 나라는 없었다. 테러활동이 창궐한 중동지역이라 테러분자들을 검색하기 위한 조치거니 생각하고 하라는대로 할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입국수속을 마치고 짐 찾으러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생각밖으로 그곳은 온통 아수라장이였다. 여러 나라 려객기가 한꺼번에 들이닥치다보니 사람들이 밀고당기며 복새판을 이루었고 여기저기에 짐짝들이 무더기로 쌓여있었다. 짐을 찾은 사람들은 밖으로 나오겠다고 내밀고 짐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들이밀었다. 우리가 온 곳이 어느 나라 수도 공항이 아니라 마치 살길을 찾아 떠난 피난민들이 몰려든 질서없는 부두에 오지 않았나 착각할 지경이였다. 우리의 입국수속이 늦어지다보니 임자 없는 우리의 짐들이 짐수송대에서 몇고패나 돌았는지 알수 없었다. 우리는 붐비는 사람들속에 끼여들어 자기의 짐들을 챙겼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기념품을 넣은 작가협회의 짐짝과 쇼후의 짐이 보이지 않았다. 또 반시간가량 기다려 이젠 짐들의 꼬리가 끊겼으나 우리의 두 짐짝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별수없이 쇼후더러 공항사업일군을 찾아 반영하라 했더니 수염이 더부룩한 배뚱뚱이 공항사업일군은 심드렁하게 한쪽구석에 잔뜩 쌓아놓은 짐짝무지를 가리키며 저기에 가 찾아보라고 했다. 그것이 임자 있는 남의 짐들인가 했더니 짐수송대에서 몇고패씩 돌아도 찾아가지 않는 짐들을 내리워 구석에 처박아놓았던것이였다. 과연 그 짐짝무지에서 우리의 짐 두개를 찾아내였다. 그제야 우리는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아랍사람들도 수송대에서 자기의 짐을 찾지 못하니 저절로 그 짐무지에 와 자기 짐을 찾고있었다. 아마 이런 경우가 많아 아랍사람들은 그렇게 찾는데 습관된것 같았다. 우리는 밀차 세개에 짐을 나누어 싣고 안전검사하는 곳으로 비비고 나갔다. 그런데 그곳의 질서도 엉망이였다. 관리일군이 없다보니 수십개의 짐 실은 밀차가 제가끔 틈사리에 들이미느라 누구도 쉽게 빠져나갈수 없었다. 아랍사람들은 무슨 짐이 그렇게 많은지 밀차마다 마대짝 같은 짐이 산더미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그 란장판에도 얼굴을 붉히며 다투거나 싱갱이질하는 사람이 없이 그저 자기 밀차만 들이밀뿐이였다. 밀차로 다른 사람을 쳐놓았거나 남의 짐을 번져놓으면 손을 쳐들어 미안함을 표시하면 그만이였다. 당한 사람도 손을 쳐들고 고개를 끄덕이면 그만이였다. 당할것이 당했다는듯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듯했다. 우리는 이리저리 밀리다가 겨우 빠져나와 안전검사기에 짐들을 내려놓을수 있었다. 안전검사를 마친 짐들을 다시 밀차에 싣고 나오는데 우리 중국과는 달리 자기 짐이 맞냐고 짐표를 검사하는 사람도 없었다. 사람마다 밀차를 밀고 나가면 그뿐이였다. 어느 못된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도 짐짝 수십개씩은 훔쳐갈수 있을것 같았다. 저마다 땀에 흠뻑 젖어 바깥홀에 나오니 요르단주재 중국대사관 문화참잔과 요르단작가협회 주석, 부주석이 기다리고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대사관 문화참잔 래민주입니다.》 키가 작달만한 남방인 모습의 50대 사나이가 나서며 우리와 일일이 악수하며 환영을 표했다. 이어 요르단작가협회 주석, 부주석을 소개했다. 우리는 그들이 갖고나온 소형뻐스에 올랐다. 공항에서 암만시가지까지 50km 남짓했다. 이 차에도 에어콘이 없었다. 땀에 흠뻑 젖은 몸이 다시 시루안에 들어온 느낌이였다.  내가 암만공항의 혼잡스러운 정경을 떠올렸더니 래참잔은 례사롭게 말했다. 《아랍사람들이 인품이 후하고 솔직한건 좋은데 조직성이나 규률성이 우리처럼 째이지 못했지요. 제 하고싶은대로 하는것이 이곳 사람들의 습성이지요. 하지만 이슬람교를 믿는 신도들이라 나쁜 일은 절대 하지 않지요.》 그래서 공항안이 그렇게 혼잡해도 짐이 잃어지는 일이 종래로 없었다고 한다. 아랍사람들은 자기 물건이 아닌것은 억지로 밀어줘도 절대 가져가지 않는단다. 남의 물건을 훔친다든가 빼앗는 등 나쁜 일을 하면 죽어서도 지옥에 가 알라의 천벌을 받는다는걸 굳게 믿기에 모두가 좋은 일을 하려고 애쓸뿐 나쁜 궁리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우리는 그제야 짐표검사를 하지 않는 리유를 알것 같았다. 세상에 이런 《뢰봉》나라도 있단 말인가? 시내에 들어서니 밤 11시가 다되였다. 북경시간으로는 새벽 4시다. 이곳은 아랍에미리트련방보다도 한시간 더 늦어 북경시간과의 차이가 5시간이나 되였다. 작가협회 주석은 너무 늦어서 환영식은 못하겠으나 저녁식사는 꼭 해야 한다며 우리를 잡아끌었다. 우리는 피곤하다는 리유로 굳이 사절하고는 차를 곧장 우리가 투숙할 호텔로 몰게 했다. 투숙할 예루살렘호텔이 4성급이라고는 하나 방꾸밈새나 시설이 중국의 초대소수준이나 될가 했다. 방이 비좁은데다 끌신도 세면도구도 없었다. 방에 놓인 텔레비죤은 중국에서 80년대초에나 볼수 있었던 큰 목침만한 12촌짜리였다. 손바닥만한 형광막이나마 쉴새없이 네 눈이 펀들 내 눈이 펀들 하는통에 화면내용을 제대로 보기 어려웠다. 샤와하는 곳도 겨우 한사람이 설만한 자리밖에 없었다. 몸을 움직이며 돌아설 때에는 앞뒤가 어디엔가 긁일가봐 걱정이였다. 기대치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다. 짐을 풀고 샤와를 하고나니 새벽 1시가 되였다. 피곤이 몰려와 서로 문안할 사이도 없이 저마다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호에 이음) <<연변문학>> 2007년 12월호
2    [회고] 철응주석과 맺어진 우연한 인연 댓글:  조회:4653  추천:98  2007-10-21
회고철응주석과 맺어진 우연한 인연허룡석 연변작가협회 주석가을의 열기가 아직 사그러지지 않았던 2006년 11월 중순, 당중앙의 따뜻한 배려하에 중국문학예술계련합회 제8차 전국대표대회와 중국작가협회 제7차 전국대표대회가 북경에서 동시에 성황리에 개최되였다. 호금도, 온가보, 리장춘, 당가선 등 당과 정부의 주요 지도자들이 선후로 대회에서 중요한 연설을 발표하였다.  대표들은 조화로운 사회를 구축하자면 조화로운 문화건설을 앞세워야 하며 문학예술인들의 로동을 존중해야 한다는 호금도총서기의 보고정신에 가슴들이 부풀어있었다.  11월 12일 오전, 북경호텔 금색대청은 진지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중국작가협회 제7차 전국대표대회는 예정된 대회의정에 따라 중국작가협회 제7기 전국위원회 개인위원선거에 들어갔다. 이에 앞서 각 성, 시, 자치구 및 중앙직속기관, 신강건설병퇀과 연변조선족자치주 등 전국 43개 단체회원작가협회의 사업을 주관하는 단체위원 43명은 주석단에서 통과를 마친 뒤였다. 전국 950명 대표중 사유로 대회에 출석하지 못한 대표들을 제외한 845명 대표들이 무기명투표방식으로 위원 후선인들에게 신중한 한표를 찍었다. 156명 후선인 모두가 순조롭게 위원에 당선되였다. 그런데 유독 이번기 주석의 후선인으로 지정된 철응의 표가 800표 아래로 떨어져  795표에 머물렀다. 나는 철응이 나이가 어리고 경력이 짧다고 문단에서 그의 주석부임에 반대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것은 들어 알고있었지만 전국위원선거에서부터 이런 결과가 나오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많은 대표들도 투표결과에 저으기 놀라는 표정들이였다. 오후에 있을 주석, 부주석선거에서 철응이 과연 무난히 통과될수 있을런지. 오후 3시경, 제7기 전국위원회 위원들이 제7기 전국위원회 주석, 부주석, 주석단위원을 선거하게 되였다. 단체위원 43명과 개인위원 156명중 사유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위원을 제외한 175명 위원들이 선거에 참가했다. 중공중앙조직부책임자가 나서서 중앙은 작가들의 의견을 충분히 청취하고 신중한 토론을 거쳐 철응동지를 중국작가협회  제7차 대표대회 전국위원회 주석후선인으로 추천한다고 공포하고나서  그의 경력과 성과를 선독하였다. 총감표인과 감표인들이 공포되고 위원들은 무기명투표에 들어갔다. 중국문단에서 5년만에 새로운 주석이 탄생하는 력사적 시각이였다. 전국의 수많은 작가들과 문학도들, 그리고 국내외 보도매체들이 지금의 이 시각을 조용히 지켜보고있었다.  나는 두말없이 철응에게 찬성표를 찍었다. 총감표인은 175표중 174표가 유효표라고 공포했다. 무대아래에서는 모두가 숨을 죽이고 무대우를 쳐다보며 투표결과를 기다렸다. 나는 저으기 긴장해났다. 《철응 득표 162표!》 순간 나는 무거운 짐이라고 부리운듯 긴장이 풀렸다. 위원들은 우렁찬 박수를 보냈다. 기타 부주석, 주석단위원들도 모두 순조롭게 선거되였다.  선거가 끝나자 숱한 위원들이 철응한테 몰려가 손을 잡아흔들기도 하고 포옹하기도 하며 열렬한 축하를 보냈다. 나도 사람들을 비집고 나가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축하합니다.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고마와요!》 철응은 나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었다.  철응의 당선으로 하여 중국문단은 두가지 돌파를 가져왔다. 중국작가협회창립 57년이래 철응은 나이가 가장 어리고 유일무이한 녀성주석으로 되였다. 그는 중국문단의 거두들인 모순과(1∼3기 주석) 파금의(4∼6기 주석) 뒤를 이어 세번째로 중국작가협회 주석의 자리를 굳혔다.  1957년에 북경에서 태여난 철응은 하북성 조현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백양전》파 문학의 대표작가였던 손리를 흠모했던 철응은 1975년 하북성 보정시 제11중학을 마치자 도시에 남거나 해방군2포병문공단에 문예병으로 들어갈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중국의 녀《고리끼》가  되려는 꿈을 안고 농촌에 내려갔다. 그는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으면서 그해부터 문학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단편소설 《오, 향설이》, 《6월의 화제》는 1982년과 1984년에 전국우수단편소설상을 받았으며 중편소설 《단추 없는 붉은 적삼》은 전국 제3차 우수중편소설상을 탔다. 이밖에 수필집 《녀인의 낮과 밤》은 제1차 로신문학상과 제6차 장중문문학상을 받았으며 1982년에(25세) 중국작가협회 회원으로 되였다.  철응의 대표작으로는 장편소설《대욕녀》, 《분화》, 《비 없는 도시》, 《장미문》 등이 있고 중편소설로는 《영원이란 얼마나 먼가》, 《대면》, 《목화더미》, 《단추 없는 붉은 적삼》등 14편이 있으며 단편소설로는 《오, 향설이》, 《임신부와 소》, 《안드레의 저녁》등 80여편이 있다. 이밖에 160만자에 달하는 《철응문집》 5권이 있다. 그의 일부 작품들은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로씨야, 에스빠냐, 오지리, 덴마크, 노르웨이 등 나라에서  번역출판되여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철응은 《화산》잡지 편집부에서 소설편집으로 근무했고 선후로 하북성문련 부주석, 하북성 제4기 리사, 주석, 당조부서기, 전문작가로 있었으며 39세에 중국작가협회 제5기 주석단 성원으로 당선되면서부터 중국작가협회에서 유일한 녀성 부주석을 겸임하였다. 또한 전국단체회원단위 주석중 그는 유일한 중앙후보위원이였다. 내가 철응주석을 알게 된것은 참으로 우연한 기회였다. 우연한 기회에 맺어진 우연한 인연은 한번 만나는것으로 끝난것이 아니라 작가협회란 이 집단속에서 공동한 사업을 끈끈한 뉴대로 자주 만나면서 필연으로 이어져갔다.  내가 작가협회에 전근된지 몇달 안되는 지난 7월 중순의 어느날, 퇴근해 돌아온 안해가 문득 나한테 이렇게 물어왔다.  《중국작가협회에 철응이라는 부주석이 있는가요? 중앙후보위원까지 한다던데요?》 《응? 철응부주석?…》 《대단한분이시라던데요, 그분이 며칠후면 연변에 오신다는걸 알고있나요?》   《뭐? 연변에 오신다구? 그런 통지는 받지 못했는데… 누가 그럽데?》 《성에 있는 절친한 친구가 소개하면서 본인의 요구가 그러하니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데요, 중국작가협회 부주석이 오신다는데 어찌 당신한테야 알리지 않겠어요?》 중국작가협회 부주석이 온다면서 왜 연변작가협회와는 련락이 없을가? 나는 작가협회 원 부주석 서진청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자기도 철응이 연변에 온다는 소식은 못들었다면서 지난해 우리 협회에서 하북성작가협회와 손잡고 호가장전투장에 김학철, 김사량문학비를 세울 때 큰 수고를 하신 분이니 잘 접대해야 한다고 했다. 아무리 작가협회와는 련락이 없이 친구의 소개로 온다지만 이름난 작가이고 중국작가협회 부주석인데 연변작가협회가 등한시할수는 없는 일이였다. 나는 안해와 상론하고 접대임무는 작가협회에서 넘겨받기로 하고 구체 스케줄을 짰다.  7월 18일 점심, 나와 안해는 각기 승용차 한대씩 가지고 공항에 나가 철응일행을 맞이했다. 우리가 내든 환영패쪽을 따라 예쁘장한 중년녀인을 앞세운 일행 네명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혹시 철응주석이 아니신지요?》 안해가 나서며 반갑게 물었다.  《네, 제가 철응이예요.》 《안녕하세요? 제가 바로 장춘에 있는 친구가 얘기하던 김xx예요!》 《네, 그러세요? 반갑습니다. 김녀사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이번에 와서 페를 끼치게 되였어요. 제가 소개하지요. 이분은 저의 아버지시고 이분은 저의 어머니예요. 그리고 이분은 인민문학출판사 소설편집 쑈포예요.》 안해가 주역이고 나는 보조역인지라 안해와 철응일행의 인사가 끝나서야 내가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환영합니다. 저는 이 사람의 남편되는 사람입니다.》 나는 신분을 밝히지 않고 그저 안해를 뒤따라나온 남편역을 했다.  《그러세요? 반갑습니다. 이렇게 모처럼 가족이 나와 마중해주니 고마운 말씀 어떻게 드려야 할지…》 《천만에요. 가족이 오셨으니 가족이 나와 마중하는거야 응당한 일이지요. 안해의 친구가 안해를 믿고 접대임무를 맡겼으니 남편된 저도 등한해서는 안되는 일이지요, 안그래요? 허허허.》 《호호호, 참 고마와요!》 철응은 워낙 용모가 예쁘장한데다가 녀성이 간부가 되면 흔히 남성화되는 그런 모습은 꼬물만치도 찾아볼수 없고 첫 인상에도 부드럽고 아련한 녀성의 매력을 그대로 가지고있는 인상만점 스타일이였다.  우리는 서둘러 공항홀을 빠져나와 안해가 가지고 온 차에 철응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내가 앉은 차에 철응과 쑈포를 모셨다. 차는 시내로 향했다.  《존함은 들어모신지 오랩니다만 오늘 이렇게 뵙게 되여 영광을 느낍니다.》 《친구의 친구라서 그런지 저도 어쩐지 두분이 초면이라는 감이 없이 아주 반갑네요.》 《연변에 처음 오시는가요?》 《네, 처음 와요. 저 쑈포가 장춘출신이라 연변이 여차여차하게 좋은 고장이라고 소개하는통에 연변을 택하게 되였어요.》 《이 고장에 오시길 잘했습니다. 사실 연변은 참 좋은 고장이지요. 10대 명산중의 하나인 천혜의 장백산이 있구요, 이웃나라들인 조선과 로씨야에 잇대여있어 해외관광도 편하지요.》 《참 기대되네요…》 《저, 그런데 철응주석이 연변에 오시는걸 연변작가협회에서는 알고있는가요?》  나는 시치미를 떼며 정색해서 물었다.  《아니요, 작가협회에 알리지 않았어요.》 《관청어른이 내려오시는데 지방관리가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이번에 저희들이 공무로 오는것이 아니니깐 길림성작가협회와 연변작가협회에 모두 알리지 않았어요. 그리고 작가협회란 모두 넉넉치 못한 단위인데 알리면 괜히 페나 끼치게 되지요. 게다가 이곳 작가협회 주석도 바뀌였다고 하던데 저는 면목도 모르고, 그저 조용히 왔다 조용히 갈려 해요.》 하는 말도 명인이나 큰 간부 같지 않게 틀거지가 없고 소박했다.  《그래도 이곳 작가협회에야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알려도 이곳 작가협회에서는 벌써 다 알고있는것 같던데요?》 《네? 작가협회에서 제가 오는걸 알구있다구요? 그럴순 없는데요…》철응의 고운 두눈은 금시 올롱해졌다.  《허허, 사실은 제가 바로 김녀사의 남편이자 새로 왔다는 연변작가협회 사업을 주관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원래의 명함장에 단위와 전화번호를 고쳐쓴 낡은 명함장을 건넸다.  《네? 새로 오신 주석님이시라구요?》 철응과 쑈포는 너무나 뜻밖이라는듯 서로 쳐다보며 입을 딱 벌렸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공교로울수가 있어요? 전연 뜻밖이네요.》 《만일 안해의 친구가 저의 안해가 아니라 다른 친구한테 접대임무를 맡겼더라면 이른바 연변작가협회 책임자라는 사람이 중국작가협회 부주석이 연변에 왔다가셨다는것조차 깜깜 모르는 허수아비가 될번했습니다. 참 너무하시는군요.》  나는 섭섭함을 드러냈다.  《아니, 그런게 아니구요. 이번 걸음은 개인휴가차니까 어디에도 페를 끼치지 않으려 했거든요. 하지만 연변은 초행이라 그저 길안내를 해줄 분이 있으면 되지 싶었어요. 그래서 저의 친구가 연변에 아주 믿음직한 친구에게 부탁해놓았다기에 시름놓고  온건데 그분의 남편되는 분이 새로 오셨다는 작가협회 주석일줄이야 누가 꿈엔들 생각이나 했겠어요. 이건 참으로 한부의 소설 같네요. 피치 못할 인연인가 봅니다. 참 너무너무 반가와요.》 우리는 작가협회란 한넝쿨에 오롱조롱 달린 열매라는 의미에서 다시한번 뜨거운 악수를 나누었다.  《과연 그런가 봅니다. 만나야 할 인연은 피할수 없는가봅니다.》  멀어졌던 거리가 순식간에 바싹 당겨져 우리는 오랜 친구마냥 기분좋게 이야기꽃을 피웠다.  차는 어느새 백산호텔에 와 멎었다. 방을 배정받고나서 우리는 모여앉아 철응일행의 행차로선을 의논했다. 그들은 우리가 짠 훈춘―장백산―경박호 스케줄을 보고 시간표에 찬성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번 걸음은 공무가 아니니 절대 지방당정기관과 보도매체에 알리지 말아달라고 했다. 겉보기가 속보기라더니 철응은 확실히 허장성세하는 여느 명인들과는 달랐다. 《중앙후보위원이자 중국작가협회 부주석인 모모한 분이 오셨는데 상급에 회보하지 않으면 저의 실책으로 됩니다.》 《제가 온걸 주석님 내외간밖에는 아무도 모르는데 실책이 될거야 없지요. 그리고 다른 한가지는 저희들 경비문제 같은건 절대 신경쓰지 말아주세요. 저희가 다 알아서 할테니깐요. 저를 그저 동사자로 친구로 대해주세요. 그래야 저도 편하거든요.》 상론의 여지도 없이 짤라 말하는 철응의 말을 따르지 않을수 없었다.  《거참 딱하군요. 이것도 저것도 안된다 하면 저는 할 일이 없군요.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가요? 어쩌다 오셨는데 이번엔 제가 책임지고 배동해드리겠습니다.》 《일이 바쁘시겠는데 그래도 괜찮겠어요?》 철응네 일행은 못내 기뻐하였다. 그의 아버지, 어머니는 더욱 즐거워했다.  《그런데 한가지 요구가 있습니다.》 《뭔데요? 말씀하세요.》 《철응주석님의 행차를 아무리 비밀에 부친다 해도 우리 작가협회끼리 그러면 안되지요. 이후엔 별로 시간이 있을것 같지 않은데 오늘저녁 우리 작가협회주석단과 함께 식사하시는것이 어떻겠습니까?》 철응은 뭔가 생각하더니 통쾌하게 응낙했다.  나는 즉시 작가협회에 전화를 걸어 저녁에 철응주석과 함께 식사하게 되니 기관일군들과 주석단성원들에게 통지하라고 했다. 그날 우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우리는 행차스케줄에 따라 훈춘에 가 묵으면서 경신, 권하, 방천을 돌아보고 변방초소망경대에 올라 세 나라 경치를 감상하기도 했다. 우리는 훈춘에 가서도 철응일행의 행차를 작가협회에만 알렸을뿐 당정기관에는 알리지 않았다. 우리가 장백산에 가는 날에는 하루종일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  숱한 사람들이 천지도 보지 못한채 물병아리가 되여 덜덜 떨며 내려왔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올라가지도 말라고 손을 홰홰 내저었다. 우리 일행은 래일은 어떨가 하여 하루 묵기로 했다. 이튿날은 과연 뜻대로 구름 한점 없이 맑게 개인날이여서 파아란 천지와 천태만상인 장백산절경을 마음껏 감상할수 있었다. 철응일행은 하루묵기를 잘했다면서 몹시 기뻐하였다.  《저도 많은 곳에 가보았지만 연변처럼 아름답고 경치 좋은 곳은 정말 드물게 보는군요. 훈춘도 그렇고 장백산도 그렇고. 이번에 연변에 오기를 정말 잘한것 같네요. 쑈포, 감사해.》 철응은 연신  감탄했다.  로화가인 그의 아버지도 연변은 가는 곳마다 수채화라며 래년에는 그림을 그리러 다시 오고싶다고 했다. 철응일행이 즐거워하자 안내하는 우리도 자연 기분이 좋았다.  천지에서 내려와 방에 든지 얼마 안되여 철응이 갑자기 나를 찾았다. 방금 단위에서 전화가 왔는데 급한 일이 있으니 꼭 돌아오라고 한다면서 아마 경박호에는 가보지 못하고 래일 떠나야 할것 같다고 했다. 《별수가 없군요.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가요? 여태까지는 주석님의 분부대로 비밀을 지켜드렸는데 가실 때에라도 우리 자치주지도자들한테 알려야지 않겠습니까?》 철응은 처음에도 안 알렸는데 이제 알리겠느냐며 극구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동의했다.  나는 즉시 등개서기 비서한테 전화를 걸었다. 마침 등개서기가 집에 계신단다. 나는 이 며칠 철응주석이 휴가차로 며칠간 연변에 체류한 정황과 급한 사연이 있어 스케줄을 마치지 못하고 래일 떠나야 한다는 사연을 등개서기한테 회보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윽고 비서한테서 전화가 왔다. 등개서기한테 회보했더니 저녁에 철응일행을 만나보고 저녁식사를 함께 하겠다는것이였다. 등개서기가 이렇게 중시해주니 나는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우리는 서둘러 장백산에서 내려왔다.  그날 저녁 등개서기는 백산호텔에서 연회를 차려 철응일행을 초대하고 기념품을 증정하였다. 주당위상무위원이며 선전부 부장인 리득룡, 부부장 채영춘도 자리를 함께 했고 나와 안해도 동석했다. 등개서기는 철응주석의 연변방문에 대해 환영을 표하고나서 전국의 더욱 많은 이름난 작가들이 연변에 와서 생활체험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우리에게 새해에는 유명작가들이 연변에 모일수 있는 프로젝트를 작성해보라고 했다. 이튿날아침에 리득룡부장과 채영춘부부장이 철응일행과 아침식사하고 이들을 환송했다. 식사후 철응이 생각밖에 옆칸에서 대기하고있던 신문, 방송, 텔레비죤 등 보도매체들의 취재를 받다보니 그만 시간이 지체되였다. 우리 부부가 곁에서 거듭 재촉하여 부려부랴 공항에 도착해보니 비행기좌석표가 다 나가고 없었다. 공항일군들은 이게 어느땐데 인제야 오는가고 나무라며 저녁비행기를 타고 가는수밖에 없다고 했다. 나와 안해가 공항책임일군을 찾아 중국작가협회 부주석이고 중앙후보위원이라고 설명하며 돌아쳐서야 겨우 비행기에 오를수 있었다. 철응일행은 우리 손을 잡고 연신 사의를 표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 손을 잡고 놓을줄 몰랐다.  짧디짧은 며칠사이지만 우리는 동행하면서 사업, 창작, 가정, 혼인 등에 대하여 무랍없이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두 작가협회와 두 가정사이에 두터운 우정을 쌓았다.   이튿날저녁 철응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우리 집에 전화를 걸어와 나와 안해에게 자기들을 친인처럼 환대해준데 대하여 재삼 사의를 표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전화를 바꾸어가며 고맙다는 말을 곱씹으며 꼭 한번 내외간이 석가장에 놀러 오라고 신신당부했다.  그후에도 철응은 북경에서 중국작가협회 회의가 있을 때면 내가 든 방번호를 알아가지고 먼저 전화를 걸어와 안해까지 곁들어 문안하군 했다. 그는 연변행은 자기들에게 잊을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주었다면서 작은 성의라며 나의 안해한테 잠옷을 선사하기도 했다.                   이처럼 철응가정과 우연히 맺어진 인연때문에 이번 주석선거에 나는 은근히 신경이 씌였다.  지난 8월 북경에서 중국작가협회 제6기 10차주석단확대회의가 소집되였을 때 중앙조직부와 중앙선전부 두 간부 3국 책임자들이 각 단체회원단위 책임자들과 개별담화를 나누며 작가협회 주석후선인을 추천하게 했다. 당시 중앙에서 내놓은 후선인이 따로 없는지라 추천범위가 넓어 적지 않은 작가들이 제기되였는데 그중에서도 왕몽, 하경지 등 유명한 로작가들이 많이 거론되였었다.  그런데 9월 중국작가협회 제7차 대표대회 주비좌담회를 할 때에는 철응과 다른 한 유명한 작가를 후선인으로 내놓고 우리들더러 선정하라고 했다. 지난번에 있은 주석후선인 추천시에 많은 단체회원단위의 서기, 주석들이 새 시대 사업수요로부터 고려하여 이번기 주석선거에는 70세이상의 작가는 후선인에 넣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중앙에서 받아들인것 같았다.  철응이 주석후선인에 오르자 나는 사실 깜짝 놀랐다. 로작가, 명작가들이 수두룩한 중국문단에서 40대 녀작가가 주석후선인에 거론된다는것은 대단히 쉽지 않은 일이기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몹시 기쁘기도 했다. 우연히 맺은 인연이지만 철응이 주석후선인이 된다면 그야말로 반가운 일이였다.  중앙조직부와 중앙선전부 두 간부 3국 책임자들이 나와 담화할 때 나는 두말없이 철응을 추천하며 네가지 리유를 들었다.  첫째, 당의 령도하에 있는 인민단체인 중국작가협회도 반드시 정확한 정치방향을 견지해야 하는바 철응은 우선 정치면에서 믿음직하다. 중국작가협회 단체회원단위의 주석중 그는 유일한 중앙후보위원이다.  둘째, 그의 창작성과가 돌출하여 중국문단에서 확실히 긍정을 받고있으며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기에 실무면에서 설득력이 있다.  셋째, 한창 정열적으로 사업할수 있는 40대의 나이여서 사유가 활발하고 관념이 참신하여 중앙에서 제기한 조화로운 문화건설수요에 알맞는다. 넷째, 중국작가협회창립 57년 력사에 녀주석이 나온적이 없다. 비슷한 조건에서 녀작가가 주석이 된다면 국내외적으로 그 영향력이 훨씬 클것이다.  나의 말에 만족되는지 두 간부 3국 책임자들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였다.  담화가 끝난후 나는 곧장 철응을 찾아갔다.  《축하합니다. 주석후선인이 되면서 왜 말 한마디 없었습니까?》 《뭘요, 다 조직에서 하는 일인데 제가 뭘 말하겠어요. 아직 온양중인데요. 되면 좋고 안돼도 무방하고 두가지 사상준비를 해야죠.》 말하는 사람은 담담히 말했지만 듣는 사람은 다시한번 그의 넓은 흉금과 대범함에 감탄했다. 큰 그릇은 큰 그릇이였다.  이야기중에 내가 개별담화정황을 말했더니 그는 호호 소리내여 웃었다.  《참 개괄을 잘하시네요. 아무튼 적극 지지해주셔서 고마와요!》 지난 10월에 연변작가협회창립 50돐 기념행사때문에 중국작가협회에 갔을 때에도 작가협회기관임직원들이 철응이 주석이 될 가능성이 많다고 의론하는것을 보고 나는 은근히 기뻤다.  이번 대표대회에 가서도 철응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로 약속이 돼있었으나 철응을 찾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좀처럼 시간이 나질 않았다.  9일 저녁, 전체 대표들과 함께 전국정협례당에서 래일 진행될 대표대회예비회의를 마치고 북경호텔로 돌아오니 아홉시가 넘었다. 9시 30분쯤 뜻밖에도 철응한테서 전화가 왔다.  《지금 시간이 나는데 허주석님은 어떠세요? 제가 건너갈가요?》 《아니, 제가 건너가지요.》 우리는 북경호텔 A청에 들고 철응이네는 귀빈청에 들어 가운데 라이부스청을 지나야 했다.   내가 귀빈청 8층에 이르러보니 철응이가 복도에 나와 기다리고있었다.  《삼촌과 아주머니는 그냥 건강하시지요?》 《녜. 건강하세요. 언니는 잘 있지요?》 우리는 서로 열정껏 두 가정문안을 하고나서 화제를 돌렸다.  《이번에 주석으로 당선되면 우리와 우리 연변작가협회를 잊으면 안됩니다.》 내가 롱을 했다.  《아직 될지도 모를 일이니깐 그 얘기는 하지 말자요.》 철응은 웃음을 지으며 화제를 회피했다. 그냥 그 겸손하고 소박한 태도였다.  《연변작가협회와 하북성작가협회가 지난해에도 손잡고 김학철, 김사량문학비를 세우는 큰 일을 했는데 이제 중국작가협회 주석으로 되면 함께 손잡고 더 큰 일을 해야 할게 아니겠습니까?》 《사실 연변에 대한 인상이 참 깊어요. 또 허주석님과 언니를 통하여 문화수준이 높고 례절이 밝고 인정이 깊은 조선족을 한층 더 알게 되였어요. 저의 아버지, 어머니도 자주 외우군 한답니다. 사업이 바쁘신 등개서기도 모처럼 저희를 환대해주셨구요. 지난번 연변작가협회창립 50주년때에도 제가 출국하지 않았다면 꼭 가서 축하했을거예요. 언제든 다시한번 기회를 내여 연변에 가보고싶어요.》 《그때 함께 식사할 때 등개서기가 철응주석을 비롯한 중국의 더욱 많은 유명작가들이 연변에 오시는걸 환영한다지 않았습니까? 저희들더러 새해에는 뭔가 프로젝트를 만들어 큰 문화행사를 만들어보라고 했지요. 등개서기는 문화사업을 아주 중시하는분입니다. 새해에 중국작가협회와 손잡고 연변에서 큰 문화행사를 벌려봅시다.》 《호호, 허주석님도 꽤나 성급하시네요. 저를 너무 협박하시네요.》 전국에서 온 대표들은 드디여 대표대회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새로운 희망과 신심에 부푼 가슴들을 안고 14일 저녁부터 륙속 북경을 떠났다. 연변대표단 성원들은 15일저녁 비행기로 북경을 떠나게 되였다. 떠나기전 나는 철응주석과 작별인사를 나누려고 그의 핸드폰번호를 눌렀더니 그는 한창 석가장으로 돌아가는 차안에 있었다. 그는 많은 구체적 이야기는 이후에 다시 나누자고 하면서 연변에서 작가대표대회를 언제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시간이 허락되면 연변작가대표대회에 꼭 참가하겠노라고 했다. 연변에 두터운 감정을 갖고있는 그의 진정어린 마음이 내심으로 고마왔다. 그는 빠른 시일내에 하북성작가협회사업을 교대하고 중국작가협회로 정식부임해야 했다.  나는 조화로운 문화건설을 구축하는 새로운 력사시기에 시대적인 중임을 떠멘 철응주석의 앞길에 행운이 깃들기를 빌면서 귀로에 올랐다.                                    2006년 11월 30일   연변문학 2007년 제1호
1    해와 달과 바람 (허룡석) 댓글:  조회:2562  추천:59  2007-10-09
해와 달과 바람허룡석어느날, 옥황상제가 해와 달과 바람을 불러놓고 물었다. 《인간세상은 지금 어떻게들 돌아가고있느냐?》 해가 성큼 나서며 말했다. 《지금 인간세상은 활기로 차넘치고있사옵니다. 소인이 있기에 어디에나 그 빛이 찬란하옵고 만물이 생장을 다투고 인간들은 부지런히 일하고 노래하며 삶의 터전을 가꿔가고있사옵니다.》 이에 달이 나서며 말했다. 《아니옵니다. 인간세상은 사시절 캄캄하고 인간들은 게으르기 짝이 없어 잠만 자고있사옵니다. 인간세상은 아무 생기 없어 살멋이라고 없는 죽음의 세상이옵니다.》 이번에는 바람이 나서며 말했다. 《해님과 달님의 말씀이 일리가 있긴 하오나 절반씩밖에 말씀드리지 못한줄로 아옵니다. 저는 낮이면 해님을 동무하고 밤이면 달님을 동무하며 세상을 두루 돌아보아 알고있사옵니다. 소인이 보기엔 인간세상은 참으로 살기 좋은 곳인줄 아옵니다. 인간들은 낮이면 열심히 일하며 곡식을 심고 나무도 심고 가축도 키우며 하루가 다르게 새모습을 보여주고있사옵니다. 또한 밤이면 한잠 푹 자면서 낮의 피로를 풀기도 하고 대를 이어가는 일도 즐겁게 하기도 하옵니다.》 해와 달과 바람의 말을 다 듣고나서 옥황상제가 입을 열었다. 《해와 달의 아룀도 일리가 있긴 하나 그래도 낮과 밤을 다 돌아보고있는 바람의 말에 믿음이 가는구나. 해는 낮만 보고 달은 밤만 보았겠으니 어찌 하루 스물네시간을 제대로 말할수 있겠느냐. 그러니 너들은 자주 교류하면서 인간세상을 제대로 알고 필요한 도움을 주도록 하거라.》 지금 우리의 신변에도 해와 달처럼 사람과 문제를 일방적으로 편면적으로 보고 시비를 가른답시는 사람들이 없진 않다. 자기의 친구나 가까운 사람의 말은 팥으로 메주를 쓴대도 곧이 들으나 자기와 거리가 멀거나 척진 사람의 말은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우선 부정부터 하고 나서는것이다. 흔히 한쪽 말만 듣고 시비를 캐려 헤덤비다보니 시비를 캐기는커녕 자기마저 시비에 말려들게 된다. 때론 도적이 먼저 매를 드는 격으로 시비가 궁해진 사람이 동정과 지지를 얻으려고 자기를 춰주고 믿어주는 사람한테 먼저 짝시비를 늘여놓으면 그 말만 듣은 사람은 눈먼 대포질을 해댄다. 결국 헛포만 쏘고 인격도 위신도 다 잃게 된다. 위인은 사상을 론하고 어른은 사건을 론하고 소인은 사람을 론한다고 한다. 앉기만 하면 사람을 론하고 헐뜯고 뒤소리하는 사람은 그 어떤 사모와 월계관을 썼든 그는 소인에 지나지 않는다. 세금도 안내는 남을 긍정하고 춰주는 말은 죽어도 하기 싫어하지만 남을 헐뜯고 뒤소리하라면 도시락을 싸들고 나선다. 세상에 자기를 소인이라 하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어른으로 위인으로 자처한다. 하지만 하는 행실을 보면 위인과 어른과 소인은 금방 구별된다. 물론 사람과 문제를 편면적으로 보고 짝시비를 하는데는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일수도 혹은 한두번일수도 있지만 습관적일 때에는 그의 인격과 련계시켜보지 않을수 없다. 위인과 어른과 소인은 그의 사상, 관념과 행실로 구별되는것이지 타고난것이 아니다. 시비를 가름에 있어서도 위인과 어른은 부동한 의견을 다 들어보고 시비를 캐려 하지만 소인은 흔히 한쪽말만 듣고 시비를 캐려 든다. 사람과 문제를 옳게 보고 실사구시하게 시비를 캐려면 바람처럼 낮과 밤을 다 알아보고 말해야지 해와 달처럼 제가 아는 쪽 시비만 해서는 영원히 짝시비밖에 할수 없는것이다.  위인과 어른의 행실은 사업과 단결에 도움이 되지만 소인의 행실은 사업과 단결에 방해가 된다. 온 사회가 조화로운 사회구축에 힘 다하는 마당에 우리의 신변에도 다수 사람들이 긍정하고 존경하는 위인과 어른이 보다 많아지기를 기대해본다. (문화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수 있습니다.) <<연변문학>> 2007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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