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룡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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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고대문명중심지-중동(4)(허룡석)
2008년 04월 20일 10시 33분  조회:1334  추천:98  작성자: 허룡석

세계고대문명중심지-중동(4)

두터운 감정 알알한 마음


허룡석


7월 3일 아침 대표단은 요르단에 대한 방문일정을 마치고 수리아변경으로 떠났다. 대사관 래참찬과 쇼쉬 그리고 요르단작가협회 싸디그.주다주석이 우리를 바랜다며 기어코 한차에 올랐다. 

요르단남부는 갈수록 고비사막이였지만 북으로 가면서 보니 산에도 푸르른 빛갈이 흘렀고 검푸른 올리브원이 뙈기뙈기 보였으며 남새밭과 곡식밭이 뉘엿이 펼쳐지기도 했다. 이 며칠째 날마다 죽은 물고기 몸뚱아리 같은 희뿌연 고비사막만 보아오다 생의 푸르름을 보게 되니 이 땅에도 이처럼 삶이 약동하는 곳이 있냐싶게 눈이 번쩍 뜨이였다  
우리를 태운 차가 10시경에 요르단ㅡ수리아변경 해관입구에 도착하자 차량검사소가 나타났다. 카빙총을 거꾸로 멘 한 군인이 길 한가운데 나서 남색기를 높이 쳐들고  차를 막아세웠다. 차가 칙 멈춰서기 바쁘게 군인은 성큼 차에 뛰여올라왔다. 그는 거수경례를 대충 붙이고는 운전수와 이것저것 통행증과 기타 서류들을 요구해 검사하더니 나중에는 우리 일행의 려권을 보자고 했다. 려권도 반드시 여기에서 검사를 마쳐야 하는가부다고 생각한 쇼후가 서둘러 가방안에서 우리 모두의 려권을 내놓으려 하자 래참찬이 막아나섰다. 래참찬은 그 군인보고 너는 차량통행증만 검사하면 되지 려권검색은 해관에서 할 일이니 네가 검사할 책임범위가 아니라고 면박을 주었다. 그러자 군인은 석쉼한 음성을 높이며 려권검사도 자기 검사범위이니 려권검사를 맞히지 않으면 차가 해관으로 들어갈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에 화가 치민 래참찬이 벌떡 일어서며 안쪽호주머니에서 외교관신분증을 꺼내보이더니 그와 한결 음성을 높였다. 군인은 외교관신분증을 받아 자세히 보더니 차렷자세로 군례를 붙이더니 더는 군소리 없이 차에서  뛰여내렸다. 방금까지만도 기고만장하던 군인이 왜 갑자기 온순한 면양이 되였는지 우리가 그 영문을 몰라 래참찬한테 물었더니 래참찬은 성이 가시지 않아 노기를 띤채 말했다 

“저 자식이 우리를 만만히 보고 한몫 챙기자는거였지요. 자기 검사범위도 아니면서 려권을 보자 해놓고는 이것저것 구실을 잡아 뭘 얻어먹자는 수작이지요. 이전에도 종종 이런 일에 맞띠웠거든요. 그 자식이 또 그러는게 눈꼴 사나와 내가 나는 중국대사관 문화참찬이다. 네가 그냥 이렇게 나오면 너의 행위를 너의 나라 외교부에 고발하겠다고 했더니 저렇게 찍소리 못하고 물러가는거지요.”

우리는 그제야 통쾌하게 웃었다. 사람사는 곳이면 어디에나 부정비리가 있기 마련인가보다. 더우기 경제적으로 발달하지 못한 나라일수록 부패행위가 더 심한것 같다. 오늘 우리 차에 우리 나라의 당당한 외교관이 앉았기에 쓸데없는 시끄러움을 던것 같았다.

느릿느릿하는 사업효률은 요르단 어디 가나 마찬가지 같았다. 그저 려권검색을 마치면 되는 간단한 수속도 이리저리 불려가 지문과 눈알을 검사마치고 이곳저곳에서 기다리고 하다보니 12시가 넘어서야 요르단변경을 넘어설수 있었다. 우리 일행은 국경을 넘어서기전에 래참찬과 쇼쉬와 뜨거운 악수를 나누며 요르단방문기간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를 배동하고 여러모로 도움준데 진심으로 감사드렸다. 싸디그.주다주석은 우리를 하나하나 포옹해주며 장차 기회가 있으면 다시 요르단에 오는걸 환영한다며 못내 섭섭해하였다. 

수리아경내에 들어서니 수리아주재 중국대사관 문화참찬 섭국안과 그의 부인(후에 알고보니 문화참의 간사가 귀국하여 그의 부인으로 대체했었다.) 그리고 수리아작가협회 부주석이 소형뻐스를 갖고 나와 대표단을 기다리고있었다. 요르단쪽의 수속이 늦어지다보니 그들은 이제나저제나 꼬빡 세시간이나 차에서 기다렸었다. 우리는 서로 수인사를 나누고 그들의 차에 올라 수리아수도 디마스크로 향했다. 저 멀리 이라크변경과 이어진 곳에는 굵다란 철조망이 둥글둥글 아츠랗게 늘여져있었다. 그 철조망은 총소리 폭파소리가 그치지 않는 국세가 불온정한 이라크를 지척에 두고있음을 실감하게 했다. 

 작달막한 키에 웃음기 적고 하냥 엄숙하다고 보아오던 요르단의 래참찬에 비해 섭참찬은 훤칠한 키에 얼굴에 웃음을 담고있는 화기로운분이였다. 그도 쉰을 넘겼지만 나이보다는 훨씬 젊고 깔끔해보였다. 오랜 군인출신인 그의 안해 역시 성격이 활달하고  접촉성이 좋은분이였다. 그는 북경의 어느 군인병원에서 근무하다가  지난해에 남편이 심장병으로 일터에서 까무러쳐 구급치료를 받은후 조직의 배려로 명예퇴직하고 수리아에 와 남편을 보살피고있었다. 섭참찬은 요르단의 래참찬과 함께 중동에서 여러 아랍나라들을 돌며 20여년이나 사업한 경력이 깊은  외교관이였다. 그는 아랍나라들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정황을 손금보듯 알고있는 아랍통이기도 했다. 오는 도중 그는 우리에게 많은 재미나는 아랍세계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려주었다.

아랍나라에는 예로부터 전해내려온 세가지 류행어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인간의 모든것을 전지전능하신 알라(하느님)에게 맡기라는것이다. 사람이 죽고 사는 운명도 신의 뜻이요 잘살고 못사는 화복도 신의 뜻이니 더 오래 살겠다고 버둥거리지도 말고 더 잘살겠다고 헤덤비지 말아라.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죽는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단다. 남보다 잘살지 못해도 그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남을 질투하지 않으며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아간단다. 둘째는 모든 일은 미룰수 있으면 래일로 미루라는것이다. 양털같은 래일이 있는데 급해할것 있는가. 일이란 서두르면 망쳐먹기 쉽다. 늦게 하는것이 망쳐먹기보다는 낫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나 서두르는 법이 없다. 셋째는 괜찮다는것이다. 아무리 큰일이 생겨도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다. 무슨 일이나 너그럽게 생각해야지 생각이 많으면 골치 아프다. 그래서 아랍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일이란 없단다. 

아랍나라에는 또 세가지가 달다는 말이 있단다. 첫째는 물이 달다는것이다. 아랍은 비가 적게 내리고 물이 귀한 곳이지만  모래불에서 나는 정갈한 물이라 물이 있는 곳이기만 하면 모두 그 맛이 꿀맛 같아 혀까지 묻어 넘어간다는것이다. 둘째는 수박이 달다는것이다. 우기라곤 없는 사막에서 인공으로 재배하는 수박이라 그 맛이 달지 않을리 없었다. 셋째는 처녀가 달다는것이다.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들이 아직도 그 엄격한 계률에 따라 수천년 보존해내려온 전통적혼인을  고집하는지라 혼전성행위는  낯을 들고 다니지 못할 추잡한 행위로 간주되여 엄벌을 받기에 시집가기전의 처녀는 말그대로 순결하다는것이다. 

수리아는 아랍나라에서 유일하게 사회주의로 자칭하는 나라이다. 수리아면적은 18만k㎡로서 길림성면적과 비슷하다.(그중 1200k㎡에 달하는 콜란고지는 아직도 이스라엘에 점령되여있다) 인구는 1800만명이며 80%이상이 아랍인이다. 그외 쿨드인, 아르메니야인, 뚜르크메니아인과 첼케스인 등 민족이 있다. 관방용어는 아랍어이며 영어와 프랑스어를 통용하고있다. 국민중 85% 이상이 이슬람교를 신봉한다. 

수리아동부는 고원지대이며 남부는 황량한 사막이며 서북부는 광활한 초원이다. 초원과 사막이 수리아국토의 절반이상을 차지한다.
수리아는 중동지구에서도 력사가 유구한 나라이지만  력사적으로 줄곧 외세의 침략을 받아온 약세국이였다. 수리아는 1946년에야 완전히 독립하면서 아랍수리아공화국을 창립하였다. 1958년에는 이집트와 합병하고 아랍련합공화국을 세웠다가 1961년 9월에 갈라져나와 다시 아랍수리아공화국으로 되였다. 수리아는 일찍 1956년 8월에 우리 나라와 외교관계를 건립하였다.

수리아에서는 “헌법”으로 국민대다수가 신앙하는 이슬람교를 립법의 주요근거로 규정하였다. 현임대통령 바싸얼.아싸드는 이미 작고한 하지즈.아싸드의 둘째아들로서 35세때인 2000년 7월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였다. 당시 의회에서 제정한 수리아“헌법”에 의하면 대통령후선인은 년령이 반드시 40세 이상이여야 한다고 규정되여있었다. 그런데 이대로 하면 35세밖에 안되는 둘째아들이 대통령후선인으로 될수 없었다. 수리아의회에서는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대통령후선인의 년령을 34세 이상으로 수정했다. 그래서야 둘째아들이 법적으로 아버지의 뒤를 계승하여 대통령으로 될수 있었다. 원래는 군에서 장군으로 있던 맏아들이 줄곧 후계자로 점찍혀있었으나 웬 일인지 어느날 갑자기 교통사고로 저세상으로 가는통에 의사로 있던 둘째아들이 준비없이 대통령보좌에 오르게 되였다. 대통령후계자로 점찍혀있던 맏아들이 돌연사하자 당시 요직에 있던 그의 삼촌이 한시기 은근히 대통령자리를 넘보고 친신들을 긁어모으며 암암리에 모략을 펼치다 대통령한테 들통이 나 그만 고비사막으로 추방당하였다. 꿈이 길면 재미없겠다고 여긴 대통령은 급급히 의사사업에 몰두하고있던 둘째아들을 대통령보좌에 올리밀었다. 1970년에 현임대통령의 아버지 하지즈. 아싸드가 정권을 잡은후 옛 쏘련과 중국의 모식대로 장장 30년간이나 중동지역에서 첫 사회주의나라를 건설한답시다가 2000년 6월에 병으로 세상을 떴다.

발전도상국인 수리아는 농업을 위주로 하나 요르단보다 자연조건이 비교적 우월하다. 이란, 사우디, 이라크 등 나라들과는 비할바가 못되지만 그래도 석유와 천연가스가 나며 중동지역에서 량식을 수출하는 다섯개 나라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공업기초가 매우 박약하다. 사회주의체제를 답습해서인지 수리아에서는 아직도 국유기업이 주도적지위를 차지하며 현대공업은 선지 몇십년 력사밖에 안된다. 수리아도 수십년간 사회주의를 해오느라 했지만 아직도 경제적으로  요르단에 뒤떨어져있고 인민들의 생활수준도 요르단보다 못하단다.

수도 디마스크는 4500여년의 력사를 갖고있는 고로한 도시로서 “천국속의 도시”로 불리고있다. 370만 인구를 가진 디마스크는 아랍나라에서 민족적특색과 지역적인 문화특색을 띤 금장식품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디마스크도 현대적시스템에 따라 운영되지 못하는 다른 아랍나라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도시관리가 째이지 못하고 느슨하여 구라파의 발달도시들에 비하면 차이가 많단다.

수도 디마스크시교에 이르러 우리는 벌써 혼잡한 교통상황에 맞띠웠다. 길은 좁지 않은데 오가는 승용차, 트럭, 트랙터, 마차까지 한데 엉켜 뒤범벅이였다. 이렇게 혼란스러워도 차량을 지휘하는 교통경찰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좌우통로를 구별하는 차선도 없었고 차도와 인행도를 구별하는 교통선 한줄 없이 길바닥은 밋밋하기만 했다. 네거리에서도 교통신호등이 보이지 않았다. 시대가 영웅을 낳고 환경이 살길을 만든다더니 디마스크의 교통상황이 장기간 이러하다보니 이곳 운전수들의 운전기술을 뛰여나게 만들고 림기응변하는 능력을 대단히 키워줘 자전거가 들어갈 틈새만 생겨도 차를 들이몰아 요리조리 용케 빠져나간단다. 이채롭다고 해야 할지 이곳 운전수들은 차의 방향등을 켜는 법이 없이 자기가 차창밖으로 손을 내들어 교통경찰마냥 팔을 폈다가뒀다하며 방향을 제시하는것이였다. 차들이 이렇게 엉키다보니 차들이 부딪치고 긁히는 일이 비일비재란다. 오늘 처음 몰고 나온 새 차가 남의 낡은 차에 옆구리가 갈비뼈 보일 정도로 긁히고 엉뎅이가 엉성하게 골받이를 당해도  그저 피씩 웃고 지나간단다. 부주의로 긁어놓았거나 골받이를 한 운전수도 앉은자리에서 손을 쳐들어 거수경례로 미안함을 표시하면 그만이다. 차가 부딪치고 긁혀도 종래로 손붙임하거나 다투는 일이 없으며 손해배상 같은 소리는 번지지도 않는단다. 사람이 오래 살다보면 엎음갚음이라는것이다. 이곳 운전수들은 인내성도 좋아 길이 막혀도 경적을 빵빵 울리며 앞차를 재촉하는 일이 없었다. 언제든 길이 저절로 열릴 때까지 태평스레 기다리는것을 응당한 일로 여긴단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앉은 차의 운전수도 꼬물도 조급해함이 없이 길이 조금 열리면 한보 나가고 길이 막히면 담배를 꼬나물고 여유롭게 기다리군 했다. 오히려 차에 앉은 만만디 우리 일행들이 더 갑갑증이 나했다. 모두가 더위를 먹고 쏘고 토하는 사람들이라 빨리 가서 주숙을 잡고 휴식하고싶었지만 길이 막혀 생각대로 되지 않으니 공연히 짜증이 났던것이다. 시간이 퍽 오래 지나서야 우리의 차가 발撡 발撡  시내에 들어설수 있었다. 이젠 오후 두시경이라(중국의 저녁 일곱시) 우리는 곧추 호텔로 가 휴식하는줄로 알았는데 의외로 수리아작가협회로 방문간다는것이였다. 더위에 시달려 지칠대로 지친 아얼타이단장이 작가협회는 오후에 가면 안되겠는가고 했더니 안내원이 작가협회 주석을 비롯한 임직원들이 모두 작가협회에서 기다린다는데야 더 뭐라고 할수 없었다. 우리가 작가협회청사라는 한 건물에 이르러 3층으로 올라가보니 아니나다를가 수리아작가협회기관 임직원 10여명이 주석사무실에 모여앉아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있었다.

후쎄인.주마라고 부르는 수리아작가협회 주석은 오동통하고 작달막한 키에 머리는 작고 코가 컸으며  해산을 당금 앞둔듯한 불쑥 나온 배에 멜끈바지를 받쳐입고 두손은 습관적으로 바지멜끈을 잡고있었다. 그를 보는 순간부터 이전에 텔레비에서 보아오던 구라파마술단의 코미디배우 신통하다는 생각이 들며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걸 어쩔수 없었다. 게다가 말할 때에는 코맹맹이소리에 두손을 내들고 춤추듯 갖은 동작을 다하며 말하는데 그 모양이 하도 우습강스러워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수 없었다. 나만 그런가 했더니 일행 모두가 맥꼴을 못추는 와중에도 입을 막고 웃음을 참느라 킥킥거리고있었다. 주석의 좌석뒤에는 그가 바싸얼.아지즈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클로즈업되여 걸려있었다.

우리가 왜 웃는지 상관없이 그는 자기대로  손을 내저으며 하고싶은 말을 그냥 해댔다.

“우리 수리아는 아랍땅의 유일한 사회주의나라이며 중국은 동방에 우뚝 솟은 사회주의나라입니다. 우리는 모두 위대한 사회주의나라로서 장기간의 시련속에서  두터운 우정을 쌓아왔습니다. 우리는 우호적인 중국작가대표단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오늘 반가운 동지들을 만나뵙게 되여 무한한 영광을 느낍니다. 어떻습니까? 이 무더운 날씨에 고생들이 많으시지요?”

그러잖아도 날씨가 너무 더워 모두가 더위를 먹고 맥꼴을 못춘다고 아얼타이단장이 말하자 주석은 신이 나서 더욱 활기를 띠며 말했다.
“그것 보세요. 중국보다는 날씨가 많이 무덥지요. 그런데 우리 아랍의 날씨가 왜 이렇게 무더운지 아십니까? 그건 바로 간 곳마다 불장난을 일삼는 그 고약한 미국놈들때문이지요. 그 놈들이 우리 이슬람교의 당당한 주권국인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몰렴치하게 침략하며  폭탄을 무더기로 퍼붓고 숱한 유정에 불을 달아놓은탓이지요. 그 놈들이 이런 지랄을 하기전에는 우리 이곳의 날씨도 이렇게는 무덥지 않았지요. 그러니 더위를 먹은분들은 죄없는 하늘을 저주할것이 아니라 그 벼락맞을 미국놈들을 저주해야지요.”

그의 코미디적인 유모아에 매료된척 우리는 그간 참고있던 웃음을 이 기회에 탁 터치며 하하 소리내여 웃어주었다.

우리가 웃어주니 그는 우리가 자기의 뛰여난 연설테크닉과 유머매너에 엄청 감염된줄 알고 더욱 신이 나서 교향악단 지휘마냥 두손을 내저으며 다음 악장을 시작했다. 

“당신들 중국은 위대한 대국입니다. 땅이 크고 인구가 많은데다 지금은 경제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있지요. 이는 우리 사회주의나라들의 영광이지요. 그런데 이전에는 계급립장이 분명하게 사회주의진영과 대립되는 제국주의자들과 맞서 과감히 싸우던  위대한 중국이 어찌되여 개혁개방후부터는 국제사무에서 미국의 눈치만 보는가 말입니다. 우리 자그마한 수리아도 미국놈들과는 한치의 양보도 없이 용감이 맞서 싸우고있습니다.  그런데 당신들 중국이 왜 또 우리 아랍나라의 철천지원쑤인 이스라엘하고는 가깝게 지내는겁니까? 이스라엘은 미국의 교활한 주구로서 우리 아랍나라에 숱한 재앙을 가져다준 악착 같은 놈들입니다. 그 놈들은 지금도 우리의 땅을 강점하고있는 철천지원쑤이지요. 또 있지요. 우리 아랍쪽에도 사해가 있는데 당신들 총서기가 왜 우리 아랍나라에는 오지 않고 하필이면 원쑤놈들 이스라엘을 방문하면서  이스라엘쪽 사해에서 수영하는가 하는겁니다. 우리 아랍사람들은…”

하다하다 그의 말이 궤도에서 벗어나 점차 정치에로 넘어가자 우리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것도 감촉하지 못했는지 그는 말할수록 흥분되여 연설테크니션인듯 계속 도도히 열변을 토해댔다.

민감한 정치문제에 미치자 섭참찬이 과단하면서도 례의있게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이분들이 모두 몸도 편찮고 아주 피곤해하시는데 서로 례의적인 인사나 나누고 돌아가 휴식하게 하는게 어떻겠습니까? 그럼 중국작가대표단 단장님이 방문의 말씀이 있을겁니다.”

신이 나 한창 줄기차게 열변을 토하던 주석이 갑자기 전원이 끊긴 로버트마냥 팔을 내든채 시무룩이 입을 다물자 피곤에 젖어있던 우리 단장이 정신을 추스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단장이 인사말을 떼자마자 주석의 핸드폰이 전투마당의 돌격나팔소리마냥 굉장한 소리를 내며 울려 우리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주석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핸드폰을 꺼내들고 멋스레 받기 시작하는데 우리앞에서 말할 때와 같이 손짓해가며 좋이 몇분간이나 열변을 토했다. 주석이 핸드폰을 거두자 단장이 다시 입을 열려 하는데 한 녀사무일군이 두툼한 서류를 들고 들어와 주석앞에 내려놓았다. 주석은 필을 찾아들고 문건에 일일이 싸인하다보니 또 한참 지체되였다. 녀사무일군이 싸인을 받아가지고 자리를 뜨자 단장이 다시 두어마디 시작했는데 갑자기 사무상우의 전화벨이 따르릉 울렸다. 주석은 아무런 주저 없이 사무상에 다가가 또 전화를 받기 시작하는데 인차 끝날 잡도리가 아니였다. 주석의 무례한 행위에 화가 치민 단장은 사람을 이렇게 무시하는 나라는 처음 보았다며 이젠 더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섭참찬은 이곳 사람들이 원래 이런 성격이니 노여워말라고 단장을 위안했다.

주석은 전화를 다 받고나서야 앞에 나앉으며 단장더러 계속 이야기하라고 손짓했다. 단장은 노여움이 가시지 않아 그저 우리 일행을 일일이 소개하고는 원래 준비했던 인사의 말은 다 삼켜버리고 더 할 얘기가 없다고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주석은 손님의 정서와 눈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훌쩍 일어서더니 대문짝만한 사진앞으로 다가갔다.

“에, 이 사진은 보시다싶이 제가 지난해에 대통령님의 접견을 받을 때 함께 찍은 사진이지요. 중국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수리아에서도 대통령과 단독으로 함께 사진을 찍는다는건 쉬운 일이 아니지요. ”

이어 그는 서랍을 들추더니 두툼한 신문 한뭉치를 꺼내여 우리 일행 매 사람한테 나눠주는것이였다.

“이건 제가 대통령의 접견을 받을 때 중앙신문들에서 다룬 특대뉴스지요. 그땐 정말 굉장했지요.”

그는 또 여기저기에서 책을 꺼내여 우리한테 나누어주는데 사람마다 도합 다섯권씩이였다.

“이는 최근년간에 제가 출판한 책이지요. 이걸 보시면 우리 수리아문단정황을 환히 알수 있지요.”

그는 우리가 아랍어를 모른다는걸 생각도 안했는지 흥이 도도하여 우리앞에서 국제도서출판발행의식을 하고있었다. 우리는 두툼한 신문과 책을 한아름씩 받아들고 어이없어 서로 쳐다보았다. (알아볼수도 없는 무거운 책이 짐이 된다고 귀국할 때에 다들 호텔방에 버리고 왔지만 나는 그 책들을 모두 꿍져가지고 돌아와 중국작가협회도서관에 기증했다.)

이것으로 그의 “공연”이 끝나는가 했더니 이번에는 또 가타부타 우리더러 모두 일어서란다. 우리는 영문도 모른채 얼떨떨하게 일어섰다. 그는 서랍에서 자그마한 곽을 꺼내더니 그안에서 작은 휘장을 집어내 하나하나 우리 앞가슴에 친히 달아주었다.

“이것은 우리 작가협회의 휘장인데 기념으로 드리지요. 이건 중국벗들과 같이 귀한 국제벗들한테만 드리는것이지요.”

우리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솔직하고 열정적인 면에는 고마와할 일이지만 우리가 어떻게 생각할지를 무시하고 자기나름대로 우리를 밀어붙이는데는 저으기 불쾌감이 들었다. 우리는 마치 외국에서 온 국가대표단이 아니라 수리아의 한개 성에서 올라온 수리아작가협회 소속회원들 같았다. 주석은 나눠줄건 나눠주고 달아줄건 달아주고나서는 또 두손을 내들고 연설을 시작하는데 자기 소속 회원들한테 문학강의를 하는듯싶었다.  참을성이 좋을것 같아보이던 섭참찬이 참다 못해 벌떡 일어서며 저분들이 이젠 돌아가 쉬여야 한다며 사정없이 밀막아서야 주석은 내키지 않은대로 코미디연설을 끝냈다.

나오면서 섭참찬은 아랍사람들은 대방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 하고싶은 일과 말을 다 해야 시름을 놓는다며 리해하라고 했다. 요르단에 있을 때 래참찬이 우리한테 해주던 말과 꼭같았다.
수리아작가협회 주석은 원래 지난해에 임기가 차 자리를 내야 했으나 대통령과 무슨 막역한 관계인지 대통령이 나서서 한마디 천금 같은 〈지시〉를 하는통에 련임하게 되였단다. 작가들의 투표로 자유선거를 하는 요르단같은 자본주의나라에서는 있을수 없는 일이란다. 

우리의 주숙을 배치한 곳은 시교에 있는 4성급호텔이였다. 관광계절이라 시내중심에 있는 호텔은 모두 초만원이여서 이곳에 자리를 잡았단다. 이곳에서는 손님이 오기전에 방을 예약하는것이 아니라 손님이 온후에야 예약하다보니 관광호황기에는 좋은 호텔을 예약할수 없었다. 호텔방의 시설도 요르단호텔방과 아주 흡사하여 다른 나라에 왔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아랍나라들은 어느 나라에 가나 호텔방시설이 거의 비슷하단다.

이날 오후 느지막해 우리는 그들의 일정배치대로 수리아작가들과 좌담모임을 가졌다. 전국각지에서 온 수리아의 유명하다는 시인, 소설가, 평론가, 씨나리오작가 등50여명이 모여 우리를 기다리고있었다. 수리아 로작가들은 모두 중국에 심후한 감정을 지니고있었다. 아마 같은 사회주의나라이고 모택동시대에 중국의 물질적지원을 많이 받았던 원인 같았다. 그들은 개혁개방이후의 중국에 대해서도 농후한 흥취를 가지고있었으며 많은것을 알고싶어하였는데 대체로 요르단작가들이 제기하던 문제들과 비슷하였다. 우리는 그들의 물음에 성근하고도 진지하게 답복해주었다. 뜨거운 감정에 푹 젖은 한 로작가의 진정어린 발언은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었다.

“오늘 이렇게 중국대표단을 뵙게 된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중국에 남다른 감정을 갖고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어린 시절 공부할 때 교실에서 제일 먼저 쥔것이 중국연필이였고 운동장에서 제일 먼저 찬 뽈이 중국축구공이였으며 거리에서 제일 먼저 탄 자전거도 중국자전거였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쓰시던 재봉침도 중국에서 만든것이였습니다. 저뿐만아니라 여기에 앉아계시는 많은분들도 그러했을겁니다. 우리 나라가 어려울 때 중국에서는 우리 나라에 무상으로 수많은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공장도 세워주고 수력발전소도 앉혀주고요. 만약 그때의 그런 국제주의정신으로 된 중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경제적으로 뒤졌던 우리 나라는 더욱 큰 어려움을 겪게 되였을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영원히 잊지 않을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주의대가정의 형제적친선이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그의 진지한 감정에 감동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웬지 마음 한구석이 알알해나기도 했다. 우리가 어려서 공부할 때에는 자기 나라에서 생산한 연필도 쉽게 사게 안되여 꽁다리연필을 나무꼬챙이에 매여 썼고 축구공을 살 형편이 못되여 코물을 풀쩍거리며 마대쪼각 같은걸 주어다 헝겊뽈을 만들어 찼다. 국가사업일군들이 사업용으로나 타던 자전거 같은 사치품은 아예 만져보지도 못했었다. 하지만 수만리 떨어져있는 낯모를 외국의 아이들은 벌써 50년대부터 중국연필로 공부하고 중국뽈을 찰수 있었으며 중국자전거를 탈수 있었다니 우리보다 더 행복하게 자란것 같았다.

어찌 수리아뿐이랴. 煂 남, 라오스, 캄보디아, 알바니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알제리아, 탄자니아, 꽁고, 지어 아메리카의 자그마한 섬나라 꾸바 등 세계의 수많은 사회주의나라들과 발전도상에 있는 나라에서 잘살지도 못하는 중국의 지원을 무상으로 숱해 받았었다. 숱한 자금을 들여 서방사람들이 철도를 놓을수 없다는 탄자니아의 고비사막에 철도를 부설해주고 기타 나라들에도 공장을 세워주고 수력발전소를 세워주고 농장을 세워주는 등  피로써 맺어진 “형제적”나라들을 위해 돈 파는 일을 무수히 해주었다. 지어 당시 사회주의진영에서 면적은 연변땅 절반정도밖에 안되고 인구도 지금의 연변인구만큼밖에 안되는 유럽의 “영용한 수리개”로 불리우던 알바니아 같은 나라에서는 중국에서 지원한 물자들이 너무 많아 넣어둘 자리가 없어 강재며 세멘트며를 여기저기 로천에 무져놓아 썩여버려도  아까운줄 몰라했다.

아낄 필요가 없다는것이 그들의 굳어진 관념이였다. 수요될  때 없다고 또 손을 내밀면 세계혁명을 하려 하는 위대한 중국에서 국제주의정신을 발양하여 얼마든지 새것을 준다는것이였다. 그때 당시 우리 나라 로동자들의 평균월로임이 40원 좌우일 때 알바니아에 지원한 자금은 엄청나게도 알바니팀慣릿?4000여원이였다니 기막힌 노릇이 아닐수 없었다. 문화대혁명때 타도되였다가 후에 “해방”되여 알바니아주재 중국대사로 파견되여갔던 희붕비(후에 우리 나라 외교부 부장으로 사업하였음)동지는 중국에서 지원한 숱한 물자들이, 그것도 중국에서도 없어 못쓰는 귀한 물자들이 알바니아땅에서 도처에 나딩굴고 썩고 엄청 랑비되는것을 보고 가슴아파 알바니아에 대한 필요이상의 물자지원을 줄이고 절약한 부분을 나라건설에 돌려썼으면 좋겠다는 조사보고를 중앙에 올려보냈었다. 하지만 그후에도 알바니아에 대한 지원은 한푼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때 당시 “강철을 많이 제련하고 량식을 많이 증산하여 영용한 아세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인민들을 많이 지원하자”는 구호가 전국을 휩쓸 때였다. 당시 대채의 한 농민이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 “비료를 만들라면 쉽겠지만(亚飞와 压肥가 발음이 비슷함) 석탄을 실으라면(拉美와 拉煤가 발음이 비슷함) 멀리 가야 할걸.”라고 하여 위대한 국제주의정신을 모독했다는 죄명으로 비판투쟁을 받기도 했었다.  제 나라 백성은 헐벗고 굶주리고 제 나라 건설에 자재가 엄청 부족되는데도 세계지원은 사심없이 하는것이 당시 우리 나라가 제창했던 위대한 국제주의정신이였고 세계혁명이였는지 알고도 모를 일이였다. 특히 3년재해시기 나라안에서는 수천수백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굶어죽고 신강에서는 공사와 현을 단위로 사람들이 무리지어 쏘련으로 도망쳐 가 여러개 현이 텅 비다싶이 되였고 광동에서는 숱한 마을에서 가족끼리 홍콩으로 도망쳐 갔지만 살길을 찾아 떠나가는 사람들을 통제할수가 없었다.  더욱 가슴아픈 일은 그렇게 가난한 중국의 숱한 지원을 받고도 후에는 적지 않은 나라들이 중국과 등을 돌리기도 하고 지어 원쑤가 되여 싸우기도 했다는것이다. 알바니아 같은 나라는 중국의 지원을 숱해 받아먹고도 중국이 미국과 래왕하다 수교까지 하게 되자 새로운 수정주의라고 비난하다가 배터지게 무상으로 주던 지원마저 끊기니 중국과 아주 등을 돌려대고 악독하게 중국을 새로운 제국주의라고 맹공격하였다. 더욱 통탄?일은 煂 남같은 나라에서는 중국에서 지원한 입쌀을 먹으며 중국에서 지원한 총을 들고 중국과 판가리로 싸웠다는 악몽 같은 이야기였다. 다행히 개혁개방의 설계사 등소평동지가 나라를 다스리면서부터 이러한 대가없이 무상으로 해주던 세계적지원을 단호히 끊어버리고 인심을 얻는 부민강국의 시책으로 자국민들의 생활수준제고에 모를 박았다. 자리를 보고 다리를 펴는 실사구시한 영명한 결책이 아닐수 없었다. 흰고양이나 검은 고양이가 힘들여 잡은 쥐를 산넘고 바다건너 얼럭고양이 좋은 노릇만 할수는 없는것이다. 우리 나라 백성들이 지금도 썩 잘산다고 말할수는 없지만 개혁개방전보다는 생활수준이 보편적으로 현저히 제고된것만은 사실이다. 만일 지난날의 위대한 “국제주의정신”이 계속되고 “세계혁명”이 계속된다면 우리의 생활수준은 오늘의 지수에도 미치지 못하게 되리라는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13억 인구를 먹여살릴 힘은 우리 자신에게밖에 없다. 13억 인구가 헐벗고 굶주리는 날에는 세계 그 어떤 발달나라도 우리를 먹여살리지 못한다. 만일 13억 인구가 헐벗고 굶주려 수천수백만 인구가 이전과 같이 살길을 찾아 주변나라와 주변지구로 도망쳐간다면 주변나라와 주변지구들【??황충처럼 쓸어들어온 난민들로 하여 온통 란리가 터질것이다. 그러니 중국은 우선 제 나라 땅에서 세계인구의 4분의 1에 달하는 제 나라 백성을 잘살게 하는것도 “세계혁명”에 대한 크나큰 기여가 아니겠는가.

좌담회에서 수리아작가협회 주석은 좌담회에 참석한 자기 나라 작가들의 이름을 순서대로 하나하나 찍어가며 발언시키고 질문하게 하는데 그대로 가만있으면 우리에게는 발언기회가 주어질것 같지 않았다. 우리는 요르단작가들과의 좌담경험이 있는지라 주석이 우리한테 발언기회 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알고싶은 점이 있으면 그들의 “방선”을 돌파하고 중간중간 주동적으로 “출격”하여 이것저것 묻군 하였다. 우리가 “제멋대로 출격”하니 주석은 저으기 아니꼬와하는 눈치였다.

사회주의로 자칭하는 수리아에서 작가협회는 당의 령도를 받는 국가기관으로서 중국의 작가협회와 그 성능이 비슷하였다. 수리아작가협회는 줄곧 정부의 자금에 의해  운영되다가 1994년부터는 기제를 바꾸어 정부의 자금지원을 끊어버렸다. 우리 말대로 하면 “젖”을 뗀것이다. 하지만 정부에서는 마구 “젖”을 떼여 작가협회를 거지로 만든것이 아니라 규모가 큰 호텔 하나를 지어주어 호텔경영수익으로 작가협회를 운영해나가게 했다. 사회적경제환경이 해마다 좋아짐에 따라 호텔경영수익도 점점 많아져 정부에서 지원해주던 자금보다  훨씬 많아졌으며 따라서 작가협회운영도 정부에서 자금을 대줄 때보다  더 원활해졌다. 수리아작가협회에서는 작가협회기관일군들의 로임과 복리, 작가협회 활동의 모든 비용을 자체로 해결할뿐만아니라 작가들을 위하여 많은 실제적인 좋은 일을 하고있었다. 작가협회심사에서 통과된 회원들 창작작품의 출판비용을 50%씩 보조해주며 회원에 가입하여 일정한 년한에 도달되는 회원들은 의료위생보험에 가입시켜주고 문학창작에 특출한 기여가 있는 이름난 로작가들에게는 해마다 문학창작기여생활보조금을 지불해주고있었다. 

수리아작가협회에는 전국회원이 1000여명 있으며 각 성마다 소속작가협회가 있다. 수리아작가들은 사회적지위가 높아 어디에 가나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시끄러운 일에 부딪쳤을 때 회원증만 내들면 많은 문제가 무난히 풀린단다. 작가들의 사회적지위가 높기에 문학에 애호가 있는 많은 국가 간부와 공무원, 기업가들이 작가협회 회원에 가입하려고 시간을 짜내 열심히 창작하며 일단 회원으로 인정되면 무한한 영광으로 간주한다.

저녁식사는 작가협회에서 배치했다. 우리가 안내되여 간 식당은 굉장이 큰 로천식당이였는데 음식상만 수백개나 줄느런히 놓여있었고 벌써 많은 자리가 손님들로 차있었다. 이곳은 봄, 여름, 가을 삼계절 비가 내리지 않다보니 어디에 가나 이런 로천식당이 수두룩하였다. 식당주위에는 커다란 인공호수가 만들어져있었고 호수안에서는 10여메터 높이의 큰 물방아와 작은 물방아 몇개가 먹었던 물을 쭈르륵쭈르륵 토하며 빙글빙글 돌아가고있었다. 아랍은 물이 귀한 곳이기에 규모가 비교적 큰 로천식당이라면 이처럼 주위에 물이 있어야 사람들이 잘 찾아온단다. 낮에는 너무 더워 모두들 사무실과 집에 박혀 나오지 않다가도 서늘한 밤이 되면 이렇게 가족끼리 나와 초만원을 이룬단다.  

우리의 식사가 거의 끝나 마주앉은 량켠에서 빈객들이 번역원 하나를 두고 일상이야기를 나누는 틈을 타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아랍인들이 앉아있는 좌석을 돌아보았다. 자기네와 인종이 다른 내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나에게 눈길을 돌리며 미소짓기도 하고 손을 저어 친선을 표시하기도 했다. 상마다 거의다 로소삼대가 끼인 가족별로 혹은 련인별로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분위기가 자별나게 애애해보였다. 아랍나라에서는 공과 사의 계선이 아주 명확하여 퇴근후에는 기본상 공무를 론하지 않는단다. 공무는 출근시간에 단위에서 처리하는것이지 퇴근후에 집에 와서도 공무를 론하는 사람은 사업능력이 낮은 사람으로 취급되기에 퇴근후에는 사업관계로 사람을 찾거나 식사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모두가 가족별로 저녁시간을 즐기는것을 천직으로 여긴단다. 그래서인지 내가 많은 상을 두루 돌아보아도 모두가 가족별로 보였지 사업을 론한다고 보여지는 상은 거의 없었다. 이곳에서 단위의 일과 가정의 일이 모순될 때에는 먼저 가정일을 처리하게 한단다. 왜냐하면 단위의 일은 다른 사람이 대신하여 처리할수 있지만 가정의 일은 누구도 대체할수 없기에 네가 알아서 잘  처리하라는것이다. 이곳에서는 가정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는 사람은 단위나 회사에서 사람들의 눈밖에 난다. 가정은 나라의 가장 기초적인 세포인데 자그마한 가정일도 잘 처리하지 못하는 사람이 단위일도 잘할수 없다는것이다. 부모께 효도하지 않는 사람도 사람들의 배척을 받는다. 자기를 낳아키운 부모께도 효성하지 못하는 불효자식이 나라에 충성한다는건 침발린 거짓말로밖에 취급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한테는 의리라는것도 있을수 없으므로 사람들은 친구로도 사귀려 하지 않는단다. 이슬람교의 엄격한 교률을 순순히 따르는 이곳 아랍사람들이 아직도 보수적이고 낡은 전통관념을 고집해서인지는 몰라도 혼인과 가정관념만은 특별히 강한것 같았다. 

나는 그 가족적인 분위기에 매료되여 카메라를 꺼내들고 이쪽저쪽에 대고 연신 샤타를 눌러댔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내가 샤타를 눌렀던 앞상에서 예쁘장한 한 아가씨가 일어나 나한테로 사뿐사뿐 다가와 나를 쳐다보며 뭐라고 차분히 말하는것이였다. 나는 속이 꿈틀해났다. 내가 뭘 잘못했나? 내가 아랍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아가씨는 두손을 자기 눈앞에 갖다대며 사진찍는 시늉을 했다. 아차,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사람들을 외국인이 함부로 사진찍어 안되는게 아닐가? 나는 연신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번역원 쇼후를 소리쳐 불러왔다. 쇼후도 무슨 일이 생겼나 하여 급급히 달려왔다. 나는 이 아가씨가 저들의 동의없이 내가 사진을 찍었다고 이러는지 나를 대신해 사과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쇼후는 그 아가씨의 말을 듣더니 시무룩이 웃으며 말했다.

“외국에서 오신 귀빈 같은데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면 안되겠는가 하는군요.”

아아, 그런걸 난 또, 나는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국가대표단의 일원이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사람들의 전통적습관을 존중하지 않고 건드렸다면 그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였다. 내가 기분 전환하며 흔쾌히 응낙하자 아가씨는 대범하게 나의 한쪽팔을 잡으며 스스로 포즈를 취했다. 쇼후가 초점을 맞추어 샤타를 연신 눌렀다. 아가씨는 고맙다고 가슴에 손을 대고 허리굽혀 인사하며 물러갔다. 내가 그 아가씨와 무랍없이 사진찍는것을 보더니 주위의 이 상 저 상에 앉았던 아가씨와 젊은 각시들이 우르르 쓸어나오더니 자기네와도 기념으로 함께 사진찍으면 안되겠는가고 했다. 뜻밖에 호박이 넝쿨채 떨어진 격이였다. 내가 일일이 응낙하자 그네들은 웃음띤 얼굴로 나의 한켠에 혹은 량켠에 서서 포즈를 취하며 정성들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카메라를 갖고 나온 아가씨들은 자기들 카메라를 쇼후에게 부탁하여 샤타를 누르게 했다. 카메라가 없는 아가씨들은 나와 찍은 사진을 가질수 없음을 번연히 알면서도 열심히 사진찍는것이 참으로 귀엽고 직순해보였다. 우리가 이쪽에서 사진을 찍으며 왁작거리자 식사자리에 눌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 일행도 이켠으로 다가왔다.
“어허, 허부단장이 여기에서 혼자 좋은 일을 하고있는줄 몰랐군요. 우리도 좀 아랍의 이쁜 아가씨들과 기념사진 한장 남깁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주위의 사진찍을 아가씨들은 다 찍었는지 이젠 나오는 아가씨들이 더는 없었다. 카메라를 내들고 기다리던 일행은 멋적게 되였다. 그렇다고 주동적으로 어느 아가씨를 청해 찍을수도 없었다.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들이 전통적이고 보수적이긴 하지만 우리가 상상했던것처럼 너무 그런것 같지도 않았다. 특히 나젊은 세대들은 현대적이고 개방적인것을 많이 받아들인것 같았다. 많은 젊은이들은 전통적인 아랍식옷보다도 청바지 등 시체옷차림을 선호하는것 같았고 나많은 녀인들은 전통적인 습관대로 검은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다녔으나 그렇게 하고 다니는 처녀들은 아주 드물었다. 적지 않은 처녀들은 아예 머리에 노오란 물감을 들이기도 하고 현대적이고도 다양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다녔으며 가슴이 깊숙이 패인 섹시한 옷도 스스럼없이 입고 다녔다. 외국손님을 만나면 주동적으로 사진찍자고 청드는걸 봐도 낯선 사나이들이 녀인들의 얼굴을 보게 해서는 안된다는 아랍의 낡은 전통관념도 점차 무색해지는것 같기도 했다

<<연변문학>> 2008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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