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룡석
http://www.zoglo.net/blog/xulongxi 블로그홈 | 로그인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나의카테고리 : 프로필/앨범/동향/알림

세계고대문명중심지-중동(2)(허룡석)
2008년 01월 05일 15시 39분  조회:989  추천:78  작성자: 허룡석
세계고대문명중심지-중동(2)



허룡석



3. 요르단 작가들과 한자리에 앉아 

 
이튿날아침 우리가 식사를 마치고 호텔홀에 앉아있노라니 대사관의 래참찬과 쇼쉬가 찾아왔다. 래참찬이 우리 대표단이 요르단에서의 방문일정을 개략적으로 소개하였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데 요르단작가협회 부주석 바싸얼·스리다도 호텔에 들어섰다. 쉰살남짓해보이는 그의 이마는 마른 풀이 듬성듬성한 고비사막마냥 머리카락 몇대 없었고 우람진 체구에 당금 해산을 앞둔 녀인마냥 배가 남달리 불쑥 나와있었다. 배가 나온탓인지 그는 멀리찍이 서서 손을 쑥 내밀며 우리와 일일이 악수하고는 우리들 한가운데 엉거주춤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쏘파등받이에 등을 갖다대며 신비스럽게 환영회와 좌담회를 하기전에 한가지 중요한 문제를 의논하자고 했다. 중요한 문제를 의논한다니 우리는 모두 그의 주위에 모여앉아 귀를 강구었다. 

내용인즉 이번에 중국작가대표단이 모처럼 왔을 때 요르단작가협회와 중국작가협회간에 금후 량국간의 친선적인 문화교류에 관한 협정을 체결해야 하지 않겠느냐는것이였다. 이전에 요르단작가협회에서는 중국작가협회에 량국의 문화교류를 추진할데 관한 협정을 체결하자는 요청을 해왔었다. 중국작가협회에서도 이에 동의하며 국가문화부에 보고를 올렸으나 아직 비준이 내려오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를 떠나보내는 환송식저녁만찬에서 중국작가협회당조서기 김병화동지가 우리한테 다음과 같이 교대했었다. 이번에 중국작가대표단이 요르단에 가게 되면 가능하게 요르단작가협회에서 이 문제를 제기할것이니 우리켠의 구체정황을 잘 해석해주라고 부탁했다. 아니나다를가 요르단작가협회에서 만나자마자 이 문제를 직방배기로 제기하니 아얼타이단장과 내가 김병화동지의 의사대로 이런 정황을 해석하며 이번 방문때에는 이 협정을 체결하기 어렵다고 했으나 부주석은 갖은 리유를 대며 기어코 협정을 체결하자는데로 밀어부쳤다. 좋은 일에 서로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우리가 아무리 내심하게 설명해도 부주석은 쏘파등받이에 등을 붙인채 자기의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았다. 곁에서 묵묵히 듣고만 있던 래참찬이 듣다못해 한마디 참견했다.

《방금 단장님과 부단장님이 구체정황을 충분히 설명하시는것 같던데 중국작가협회측의 의사가 그러하니 다음번으로 미루기로 하지요.》

《중국작가대표단이 우리 나라에 한번 오시기 쉽지 않은데 오늘 그냥 협정을 체결하는걸로 하시지요.》

부주석은 그냥 외고집을 부렸다. 의논하자 해놓고는 의논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자기네의 의사를 우리한테 강요하려는 그의 태도가 어쩐지 불쾌하게 느껴졌다. 보아하니 이번에 협정을 체결하지 않으면 자기네 작가들한테 그 무슨 교대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는것 같았다.

래참찬도 그의 고집스러운 태도에 화가 났는지 갑자기 버럭 언성을 높였다. 

《이분들이 그렇게 해석했는데도 왜 그냥 일방적으로 밀어부치려 합니까? 중국정부의 비준이 없이 어떻게 협정을 체결한다고 그럽니까? 이곳 작가협회는 자기 임의대로 할수 있지만 중국작가협회는 중국정부의 비준을 받아야 합니다.》

래참찬이 화를 내니 부주석은 흰자위 가득한 눈으로 래참찬을 힐끗 쳐다보더니 마지 못해 입을 다물었다. 우리도 뜻밖이라 래참찬을 쳐다보았다.

이때 요르단작가협회 주석 싸디그·주다가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벗들, 잘 주무셨습니까?》

훤칠한 키에 너부죽한 얼굴을 가진 주석은 거수경례를 척 붙였다가 손을 높이 쳐들었다 내리며 우리와 일일이 악수하는데 그 독특한 군인다운 스타일이 참 보기 좋았다. 

우리가 금방 이야기되였던 정황을 그에게 다시 자세히 말했더니 그는 한참 침묵을 지키더니 입을 열었다.

《중국측 사정이 그러하다면 별수 없지요. 이후에 다시 보는걸로 합시다. 그럼 지금 환영식장으로 떠나시지요.》

조급해난  부주석이 그래도 뭔가 말하려 하는것을 주석이 손을 저어 막아버리는것이였다. 우리가 탄 차는 한 건물앞에 이르러 칙― 하고 멈춰섰다. 이층으로 된 아담한 양옥이 요르단작가협회의 사무청사란다.

우리 일행이 주석의 안내하에 환영식장에 이르니 30여명 작가들이 모였는데 거의가 70세좌우의 로인들이였다. 우리 일행이 들어서자 그들은 일제히 기립하며 박수로 환영을 표했다.

그러나 환영식장이 중국과는 달리 간소하고 썰렁하게 느껴졌다. 환영한다는 현수막도 없었고 작가협회를 주관하는 정부측관원도 없었다.

싸디그·주다주석이 나서서 간단히 환영사를 하고 우리 단장이 나서서 답사를 하니 그만이였다. 마치 나라와 나라간의 중대한 문화교류행사가 아니라 자기들 작가협회내부의 평소의 자그마한 보통모임 같았다. 초촐한 환영식이 있은 뒤 곧바로 좌담으로 넘어갔다. 

요르단 작가들은 개혁개방이후 근 30년간이나 비약적인 경제발전
을 가져와 세계의 주목을 받고있는 중국에 대하여 알고싶은것이 너무도 많은것 같았다. 좌담을 시작한다는 주석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회장은 대뜸 활기를 띠며 질문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져나왔다. 
80세 고령이 된다는 한 로작가가 선참 일어서서 질문했다.

《중국이 계획경제건설에서 시장경제건설로 넘어간후 작품심사를 어떻게 하는지요? 문예작품마다 당이나 정부 관원들이 일일이 심사하는가요?》

이에 아얼타이단장이 나서서 답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날의 극<좌>로선때와는 달리 작가들의 작품을 편집부나 잡지사에서 심사하면 되지요. 개혁개방이후 사상이 해방되고 관념이 바뀌면서 이전보다 문학창작과 심사가  많이 자유로와졌지요.》

《그럼 정치적 제한없이 나름대로 창작해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제한이야 있지요. 집정당에 불리한 글이나 독자들에게 해가 되는 글을 써서는 안되지요. 모르긴 해도 이 나라에서도 그렇게 하면 안되겠지요? 세상 어느 나라에도 절대적인 자유란 있을수 없지요.》
이번에는 머리가 허연 로시인이 일어나 질문했다.

《중국이 개혁개방이후 경제가 고속도로 발전하고있는줄로 알고있습니다만 그 덕에  작가들의 원고료도 많이 높아졌겠지요? 작가부자들도 많이 나왔는가요?》 
이번에는 호남성작가협회에서 온 유명한 소설작가 왕약문이 나서 답복했다.

《물론 원고료도 많이 올랐지요. 지금 중국작가들중 한해 원고료수입을 100만딸라이상씩 올리는 작가도 더러 있구요. 수십만딸라씩 올리는 작가는 적지 않지요. 하지만 대다수 작가들의 수입은 높은편이 못되지요. 작가들의 지명도와 작품질 그리고 출판사나 잡지사의 원고료표준이 같지 않은데도 원인이 있지요.》
좌중에서는 놀라움과 감탄의 소리가 우― 하고 쏟아져나왔다.

《중국은 인구가 워낙 많으니까 책을 한번 내면 발행량도 엄청 많겠네요?》

《네. 제가 알기로는 발행량이  260만부를 초과한 이름난 작가도 있지요.》

이에 아얼타이단장이 한마디 덧붙혔다.

《저분도 중국에서 명성이 뜨르르한 이름난 작가인데 저분의 <국화>라는 장편소설도 발행량이 100만부를 넘겼답니다.》 

좌중에서는 또다시 놀라움과 감탄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뒤이어 축하의 박수소리가 요란히 울렸다.

요르단 작가들의 작품은 보통 천부씩 인쇄하고 가장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래야 5천부를 넘기지 못한단다. 수적으로는 중국보다 엄청 적은것 같지만 인구비례로 보면 훨씬 많은편이였다.

머리에 검은 수건을 두른 푼더분하게 생긴 한 녀시인이 손을 들며 일어섰다.

《중국에 50여개 민족이 있다는데 소수민족들도 모두 중국글로 창작하는가요?》

모두가 묻는것이 비교적 민감한 문제들이였다. 이번에는 내가 나서 답복했다.

《아닙니다. 무슨 문자로 창작하느냐는 작가의 의사에 달렸지요. 여러 소수민족들이 자기 민족의 문자로 창작하는걸 중국정부에서는 제창하고 고무하지요. 저는 조선족인데 조선족작가 대다수가 자기 민족글인 조선글로 창작하고있지요. 우리 대표단 단장님은 몽골족시인이신데 몽골문으로 많은 명시들을 창작했지요.》

《소수민족글로 창작한 작품의 원고료가 중국글로 창작한 작품의 원고료와 같은가요?》

《정책적으로는 물론 동등하지요. 다만 지방에 따라 다르고 출판사나 잡지사에 따라 다를뿐이지요. 경제발전정황과 경제형편이 서로 틀리니깐요.》  

나는 이때에야 비로소 중국작가협회에서 이번 작가대표단의 단장, 부단장을 왜 소수민족으로 구성했는가를 알것 같았다. 아랍나라들은 모두가 다민족국가로서 나라마다 민족문제가 돌출한 문제로 나서고있었다.

이어 요르단 작가들은 작가협회의 체제문제며 경비래원문제며 작가협회 내부기구며 작가들의 년령구조며 하여튼 자기들이 알고싶은 문제를 수두룩히 제기했다. 우리가 일일이 답복하고 우리가 알고싶은 문제도 제기하려 할 때에 싸디그·주다주석이 이젠 시간이 퍼그나 지났다며 좌담회를 이만하고 식사하러 가자고 하였다. 그들이 일방적으로 좌담회를 끝내는것이 의아쩍어 우리는 서로 마주 쳐다보았다. 우리식과는 뭔가 틀리는데가 있었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을수도 없었다.

중국에서는 이런 중대한 행사가 있을 때면 행사전이나 행사뒤끝에 기념촬영을 하는것이 관례인데 여기에서는 그럴 기미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체면불구하고 래참찬한테 두 나라 작가들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는데 기념촬영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고 제기해서야 제가끔 흩어지던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어 기념촬영을 할수가 있었다.

나오면서 나는 의문점을 래참찬한테 물었다.

《우리도 알고싶은것이 많은데 이 사람들은 왜 일방적으로 좌담회를 끝내는겁니까?》 

《이곳 사람들은 원래 이렇습니다. 어떻게 평형을 잡는다거나 대방의 정서를 고려한다거나 하는건  념두에도 두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하고싶은대로 하면 그만이지요. 이런 정황을 아시고 다음번부터는 저 사람들이 시간주기를 기다리지 마시고 묻고싶은것이 있으면 앞질러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어이없어 피식 웃고말았다. 나라와 나라를 대표하는 국제교류에서마저도 주인된 사람들이 대방손님들의 정서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나름대로 일처사하는것이 그래도 례의를 지킨다는 우리로서는 도무지 리해되지 않았다.

저녁식사에는 주석, 부주석, 비서장만 남아 우리를 배동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다. 좌담회에서 묻지 못한것을 나는 저녁식사하는 틈을 타서 알고싶은 문제들을 가담가담 알아보았다.

요르단의 작가협회는 국가기관이 아니라 순전한 민간단체였다. 주석, 부주석의 임기는 2년으로서 작가들의 선거를 거쳐 산생하는데 한기를 더 련임할수 있었다. 작가협회에 39명 일군이 있는데 모두가 로임을 받지 않는 자원봉사자들이였다. 주석 싸디그·주다는 대학교 교수였고 부주석 바싸얼·시리다는 국가 농업부의 고문이였다. 그들은 로임도 원 단위에서 타고있었다. 작가협회의 운영자금도 자제로 해결하는데 꼭 필요한 중대한 항목이 있을 때에만 보고를 올려 정부의 자금지원을 신청한다. 작가협회청사도 임대하고있는데 임대비는 정부에서 지출하고있었다. 지난해 주석, 부주석이 중국작가협회의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할 때도 모두 자기 주머니를 털어 출국했었단다.

요르단작가협회에 전국회원 300여명 있으며 전직작가는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자기 일터를 갖고있는 업여작가들이였다. 회원중 80%좌우가 시인들이고 소설가, 평론가, 씨나리오작가는 소수였다.

요르단에는 작가협회외에 작가련합회라는 문학단체가 또 하나 있는데 회원이 400여명 된단다. 1987년전에는 작가련합회만 있었는데 정치색채가 농후하고 내부모순이 심하여 정부에서 강압적으로 해산시켰었다. 거기에서 나온 일부 사람들이 후에 작가협회를 세우고 정부의 지지를 쟁취하고 자금지원을 받게 되였다. 그뒤 작가련합회도 다시 재건되고 역시 정부를 반대해나섰지만 정부에서는 너그럽게 필요한 자금을 지원해준단다. 두 협회는 서로 소 닭 보듯하며 은근히 경쟁을 벌렸다. 나라에서는 나라를 대표하는 문화행사때는 항상 작가협회를 내세웠다.

요르단 작가들이 책을 출판하는데 다음과 같은 몇가지 도경이 있었다. 우선 국가적인 심사를 거쳐 아주 우수하다고 인정되는 작품은 국가문화부에서 책임지고 출판한다. 작가협회의 심사에 통과되면 작가협회에서 출판비용의 35%를 보조하고 나머지는 본인이 부담한다. 다음으로는 기업이나 단체의 협찬으로 출판하는것과 자비로 출판하는것 등이였다. 이곳의 원고료도 높지 않아 작가로서 부자가 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요르단 문인들이 전국회원에 가입하려면 저서 두권이상 내놓아야 신청자격을 가질수 있었다. 회원은 종신제가 아니라 퇴직하면 명예회원으로 인정해준다. 요르단작가협회도 로년화되여  40세이하의 젊은 작가가 10%도 안되였다. 국가작가협회와 지방작가협회에서 달마다 여러가지 활동을 한두번씩 벌리는데 비용은 자체로 해결한다. 활동뒤끝에 모여앉아 회식하는 일은 거의 없이 헤여지면 그뿐이였다. 전국작가협회 회원에 가입하면 사회적 지명도가 높아져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본인들도 아주 자호감을 가진다. 하기에 회비가 비교적 높지만 회원 모두가 자각적으로 회비를 제때에 납부하며 회비를 늦게 납부하는것을 수치로 생각한다. 

그후 우리는 지방에 내려가서도 그곳 작가협회 회원들과도 좌담회를 가졌는데 역시 중국에 대하여 알고싶어하는것이 너무도 많았다. 그들은 중국은 나라가 크고 인구가 많고 발전이 빠르다면서 중국에서 사는 우리를 부러워하면서 모두가 중국에 가보았으면 하는 마음이였다. 그들은 중국과 요르단이 영원히 우호적으로 지내며 두 나라의 문화교류가 더욱  빈번해지기를 희망하였다. 

  

4. 성보산과 고로마극장 
 
이튿날 오전 9시에 우리는 아바스·아몽왕국의 유적지인 성보산과 고로마극장을 참관하러 떠났다. 대사관의 래참찬과 쇼쉬 그리고 싸디그·주다주석이 우리를 배동했다. 차를 타고 가는 길에서 우리는 래참찬과 싸디그·주다주석과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며 요르단에 관한 많은 정황을 소개받았다. 

요르단하시무왕국은 군주립헌제국가로서 권력은 국왕을 위수로 하는 하시무가족왕실의 손에 장악되여있다. 국왕은 국가원수이자 3군통수이며 총리를 임명하고 의회를 비준하고 해산할 권리를 가지고있다. 요르단하시무왕국은 아랍반도의 서쪽에 위치해있는데 서쪽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티나와 린접해있고 동북쪽은 이라크와 마주하고있으며 동남쪽은 사우디와 이웃하고있다. 국토면적은 8.9키로메터이고 인구는 560만명이며 92%이상이 무슬린이다. 인구중 요르단아랍인이 40%를 점하고 팔레스티나인이 50%를 점하며 기타는 뚜루크메니인, 아르메니야인, 끼르끼즈인, 토이기인 등 소수민족들이다. 언어는 아랍어와 영어를 통용한다. 요르단의 국토는 아랍고원의 일부로서 서부는 산간지대이고 동부와 동남부는 사막지대로서 사막이 전국 국토면적의 80%좌우를 차지한다. 경지면적은 전국면적의 4%밖에 안된다. 요르단은 기본상 내륙국가로서 유일한 출해구는 요르단 최남단에 있는 야커바만으로서 직접 홍해로 통할수 있다. 한대지구에 속하는 요르단은 대륙성기후가 아주 건조하며 아침저녁의 온도차이가 비교적 심하다. 우기는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로서 그전에는 거의 비 한방울 내리지 않는다. 酬知?기온은 20도좌우이고 3월부터 7월까지의 평균 기온은 40도좌우이다. 요르단은 12개성으로 나뉘여있으며 수도는 암만으로서 인구는 220만이다.

수도 암만은 요르단국토의 서북쪽에 위치해있으며 요르단 전국의 정치, 경제, 문화, 상업과 국제교류의 중심이기도 하다. 암만은 력사가 유구한 산의 도시로서 7개의 산마루에 자리잡고있다. 최근년간에는 도시건설속도가 아주 빨라 지금은 22개 산마루에로 확장되였다. 암만시의 제일 높은 곳의 해발은 918메터이며 시내의 고도차이가 수백메터에 달한다. 그래서인지 암만시내에서는 자전거를 탄 사람을 볼수 없었다. 자전거를 타자면 타는 시간보다 끌고 다니는 시간이 훨씬 더 많기때문이리라.

요르단은 중립국으로서 미국이나 중국과도 모두 우호적으로 지내려 한다. 발전중의 나라에 속하는 요르단은 경제기초가 박약하고 자원이 결핍한 나라로서 나라건설과 국민이 수요하는 생필품 등 거의 모든것을 수입에 의거한다. 중동지구 거의 모든 나라에서 석유와 천연가스가 나지만 유독 요르단만은 세상만사를 점지한다는 알라의 혜택을 받지 못해서인지 석유와 천연가스가 나지 않는다. 거의 모든 아랍나라들이 석유와 천연가스로 부유해졌지만 요르단은 아직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는 형편이다. 그러기에 밖으로는 외채가 많고 안으로는 적자가 많으며 나라적으로는 실업률이 높은 모순이 비교적 첨예하다. 요르단 국왕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가는 곳마다 지원을 구걸하기에 요르단 사람들은 자기들의 국왕을 가련한  《거지국왕》이라 한다. 

하지만 요르단 사람들은 자기들의 국왕을 아주 존경하였다. 가난한 나라를 춰세우고 국민들을 남못지 않게 살게 하려고 체면을 무릅쓰고 세상을 돌아다니며 각종 지원을 얻어오는 국왕을 아주 고맙게 생각하며 우러러 받들었다. 더우기 여러 강국들사이에 끼여있으며 다른 나라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다른 나라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척하며 림기응변으로 대외관계를 처리해야 함과 동시에 가난으로 하여 발생되는 여러가지 국내모순도 처리해야 하는 국왕의 어려움을 국민들은 가슴깊이 리해하고있었다. 국민들은 자기네가 척박한 땅에서 이만큼이라도 살수 있는것은 국왕의 덕으로 간주하고있었다.

후쎄인국왕이 만년에 늙고 병약한 몸으로 미국에 지원을 요청하러 갔
다가 병이 위급하여 미국에서 구급치료를 거치고 국내에 돌아와 병원에 입원하였을 때 병원앞은 국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국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자기들을 위해 로심초사하는 국왕이 재생할수 있기를 기도했다. 그날따라 어쩌다 비가 내렸지만 국민들은 누구 하나 우산을 들려 하지 않았다. 우산을 들면 국왕을 살리려는 자기들의 경건한  마음에 얼룩이 져 국왕의 치료효험에 영향이 간다는것이였다.

하지만 국민들의 그처럼 경건한 마음도 국왕을 살려내지 못하였다. 국왕이 세상뜨자 온 나라가 비통에 잠겼다. 국왕의 장례날 전국 각지의 수많은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수도에 몰려와 자기들이 우러러 받들던 국왕과 고별하였다.  많은 나라의 수반들도 분분이 달려와 장례식에 참가하여 후쎄인국왕을 천당에 보냈다. 미국의 현임대통령과 퇴임한 몇기의 대통령들이 자기들의 친밀한 벗을 바래려고 모처럼 대양을 건너왔으며 병이 위중하여 치료중인 로씨야대통령 예리친도 만사불구하고 달려왔다. 그날도 비가 내렸는데 요르단 국민들을 따라 어느 나라 수반도 우산을 들지 않았다.

장례식을 치른후 요르단 전국은 40일동안 국장을 하며 자기들의 존경하는 국왕을 추모하였다. 온 나라 텔레비죤방송국들에서는 모든 프로를 취소하고 하루종일 코란경을 랑송하며 후쎄인국왕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국왕의 생전의 유언에 따라 국왕의 묘지는 간소하게 꾸며졌다. 조상들을 모시는 릉묘안의 나무 한대 풀 한포기 없는 모래땅에 시신을 안치할만한 2평방메터밖에 안되는 곳에 국왕을 모셨다. 자그마한 흰 대리석을 표징으로 그우에 풍막을 쳐놓았을뿐 그 어떤 시설도 지키는 사람도 없었다. 일반 아랍인들의 묘지와 별반 구별이 없었다. 국왕은 생전에 자기의 장례를 어떻게 치를것인가를 많이 생각해왔던것 같았다. 한 나라의 군주로서 국왕은 세계상의 다른 나라 국왕이나 대통령 못지 않게 자기의 장례를 얼마든지 성대하고 규모 크게 치르게 할수 있었고 자기의 릉묘를 호화롭고 웅위롭게 만들수도 있었다. 하지만 국왕은 나라형편과 이슬람교의 교률 및 기타 여러 면을 옳게 분석하고 절대적인 권위를 떠나 자기의 후사를 깨끗하고 간소하게 지혜롭게 처리했다. 이로 하여 국민들은 생전에 자기들을 위하여 동분서주하고 로심초사하신 국왕이 죽은 뒤에도 자리가 불편해 고생한다며 애달파했고 더더욱 우러르게 되였다. 

1999년 2월 7일에 후쎄인국왕의 아들 아부두라 2세·본·후쎄인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대내외정책면에서 아버지의 기정방침을 집행하면서 요르단의 경제발전을 위하여 힘을 다하고있다. 로국왕은 사상이 보수적이여서 전통적인것에 집념하면서 새로운 세계적인 발전과 흐름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지어 국민들의 핸드폰사용마저도 허용하지 않았다. 새로 왕위에 오른 국왕은 사상이 개방적이여서 의식과 관념 등 많은 면에서 세계적인 발전의 흐름을 받아들여 정치, 경제, 문화 등을 세계와 접궤시키려 애써왔다. 요르단 사람들은 나라와 국민을 위하여 로심초사하는 자기들의 젊은 국왕이 50세도 되기전에 때이르게 늙어가고있다며 가슴아파하고있다. 요르단의 건축물과 거리, 공공장소, 사무실 그 어디에서나 후쎄인국왕과 아부두라 2세·본·후쎄인국왕의 크고작은 초상화를 볼수 있다. 

성보산은 암만시와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아 차가 반시간가량 달려 금방 도착할수 있었다. 7월은 중동에서 찜통더위철이라 차안도 더웠지만 차에서 내리니 대번에 숯가마속에 떨어진듯한 느낌이였다. 불덩이가 그대로 숫구멍을 지져놓는듯하여 태양모를 쓰고도 준비해간 양산을 펼쳐들지 않으면 안되였다. 성보산으로 오르는 길은 별로 가파롭지 않았으나 우리의 몸은 어느새 물자루가 되여버렸다. 우리 일행외에도 산에 먼저 오른 관광객이 적지 않았다. 산으로 오르는 길에 둘씩 짝을 짓고 아무렇게나 편할대로 총을 멘 군인들이 종종 보였다. 정세가 복잡다단한 이라크와 잇대여있고 피난하러 오는 숱한 이라크난민들속에 테러분자들도 끼여들어 종종 사단을 일으키고 요르단경내에서 규모가 비교적 큰 폭발테러사건을 이따금씩 조작하는통에 대통령의 명령으로 중요부문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관광지에도 경비가 강화되였다는것이였다. 군인들을 보는 순간부터 우리가 별로 안전하지 못한 곳에 와있음을 다시한번 실감하게 되였다.
성보산에 오르니 높다란 아름들이 돌기둥이 여나문개 외로이 서있고 옛집터가 어수선히 널려있을뿐 기대치만큼 우리에게 놀라움과 감동을 줄만한 그 무엇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력사가 유구한 아바스·아몽왕국의 유적지였다. 

철석기시대 초기인 기원전 13세기때에 지금의 암만주위에 태양신을 신봉하는 아몽인부락이 나타났다. 기원전 11세기에 아몽인들은 아바스·아몽왕국을 건립하고 수도를 지금의 성보산에 세우고 그 이름을 아몽이라 불렀다. 아몽인들이 성보산에 수도를 정하면서부터 암만은 력사적으로 줄곧 도시의 중심으로 되여왔다. 잔존해있는 문물고적은 여러 력사년대의 면모를 보여주고있는바 지금 성보산에 남아있는 유적은 주로 기원 161∼180년에 세워졌던 애미얼왕궁의 유적이였다. 성보산에는 또한 1951년에 세워진 력사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안에는 요르단 전국에서 발굴된 력사문물들이 진렬되여있다. 이를테면 요르단하곡에서 발굴된 구석기시대의 돌칼, 돌도끼 등이다. 지금으로부터 10만년이상의 력사를 갖고있는 이러한 문물들은 요르단에 현존해있는 가장 오랜 력사문물이다.  

성보산유적보다 더더욱 가관인것은 성보산에서 한눈에 바라보이는 암만도시의 정경이였다. 봉이봉이 산세를 타고 앉은 도시의 건축물들은 12급 태풍을 만난 바다의 집채 같은 파도마냥 그대로 넘실대는것 같았다. 그런데 도시의 모든 건축물들이 하나 같이 암회색 빛갈이였다. 알고보니 건축물들의 색채가 울긋불긋하면 7000년의 유구한 력사를 갖고있는 고전적도시의 형상에 손색이 간다고 나라적으로 색갈을 통일한다는것이였다.

우리는 성보산에서 몇장의 기념촬영을 남기고 암만 구도시구역에 자리잡고있는 고로마극장으로 향했다. 고로마극장은 기원 2세기 중엽에 산허리를 들이깎아 산세에 따라 만든것이였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아주 장관이였다. 고대인들이 무슨 힘으로 산을 들이깎아 이렇게 웅장한 로천극장을 만들어냈을가 하는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설계풍격은 제라스의 고로마극장과 아주 흡사하였다. 극장은 원형으로 지어졌는데 바위를 쪼아 만들어진 33줄 돌좌석에 6000명을 용납할수 있었다. 건축인들은 시공과정에 성학원리를 충분히 리용하여 극장의 어느켠에 앉아있든 무대우에서 노래하고 랑송하고 연설하는 소리를 모두 똑똑히 들을수 있게 하였다. 극장 한가운데 서서 높은 소리로 말하면 자기의 목소리가 머리우에서 감돌아치는 소리를 금방 들을수 있었다. 내가 밑에서 아츠랗게 쳐다보이는 극장 꼭대기를 가리키며 일행에게 올라가보지 않겠는가고 했더니 일행 모두가 꼭대기를 쳐다만 볼뿐 도리머리질이였다. 나는 그들을 제쳐놓고 혼자서 정상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좌석이 가파로운데다 통로를 찾으며 오르다보니 한식경이 좋이 걸렸다. 정상에 오르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이 턱에 닿아 오장륙부 모두가 활랑거렸다. 머리를 정상성벽밖에 내놓는 순간 시원한 바람이 정답게 맞아주어 기분이 자못 상쾌했다. 뜻밖인것은 이곳에서도 암만시의 정경을 한눈에 굽어볼수 있다는 점이였다. 다른 각도에서 암만시를 바라보니 다른 도시를 바라보듯 암만시의 정경이 새롭게 안겨왔다.

돌아서서 극장안을 내려다보니 마치 갑옷을 떨쳐입은 고대의 무사들이 창과 칼을 비껴들고 오르락내리락 엎치락뒤치락 날렵하게 격투하는 장면이 한눈에 보이는듯했고 서로 죽기내기로 찌르고 막는 비장한 장면의 기복에 따라 관중석을 꽉 채워 앉아 미친듯이 환호성을 토해내는 파렴치한 귀족들의 랑패상이 보이는듯했다.

사람은 개미처럼 보여도 어서 내려오라고 재촉하는 일행의 목소리는 꼭대기에서도 아주 똑똑하게 들려왔다. 그제야 환각에서 깨여나 내려가려고 서둘렀다. 이것도 등산과 마찬가지로 내려가기가 올라오기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내려갈 때가 훨씬 더 가파롭게 느껴져 조금만 조심하지 않아도 금방 아래로 내리꼰져 육장버러지가 될것 같았다. 말초신경을 곤두세우고 아래다리에 딱 힘을 주며 아래로 겨우 다 내려가니 다리 힘줄을 팽팽이 틀어놓은듯 두다리가 뻐근히 아파났다. 그런데도 일행은 올라가보니 어떠한가고 련속 질문했다.
고로마극장 량켠에는 《요르단민간생활박물관》과 《요르단민속박물관》을 차려놓고 관광객들을 맞이하고있었다. 민간생활박물관에는 요르단인들의 복장과 실내시설, 악기, 수공업품 등이 전시되여있고 민속박물관에는 요르단과 요르단하 서안지구의 민족복장과 예술벽화들이 전시되여있었다. 요르단인들의 천짜는 모습과 갖추어놓은 틀은 우리 조선족들의 베짜는 기술과 베틀과 비슷했다. 고로마극장은 이미 암만시의 주요한 관광지로 되였으며 요르단의 중요한 문화행사와 예술행사를 벌려가는 주요한 장소로 되였다. 

     
(다음호에 이음)



<<연변문학>> 2007년 12월호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6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결과가 없습니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