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고대문명중심지-중동(5)
9. 국제적쟁의 많은 콜란고지에서
허룡석 연변작가협회 주석
7월 9일 오전, 대표단일행은 아랍세계 특히는 시리아와 이스라엘간에 력사적쟁의가 가장 많은 콜란고지(戈兰高地)를 참관하고저 쿠네이트라성으로 떠났다. 쿠네이트라성은 이스라엘과 국경을 마주하고있는 수리아의 변경성으로서 세계가 주목하는 콜란고지가 바로 이 성내에 자리잡고있었다. 국제사회의 많은 관심을 끌고있는 콜란고지는 아직 대외에 개방하지 않은 군사요충지였다.
1967년의 제3차중동전쟁때부터 이스라엘은 수리아의 령토인 콜란고지를 장장 40년간 점령하고있었다. 그때로부터 수리아는 이스라엘을 자기의 숙적으로 간주하고 아랍세계에서와 국제적사무에서 한걸음도 양보없이 이스라엘과 견결히 대항해나섰다. 콜란고지는 수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에 있는 군사요충지로서 누가 점령하면 누가 군사적으로 아주 유리한 위치에 처하게 된다. 하기에 이스라엘은 이전에 점령했던 수리아의 기타 령토는 국제여론의 압력에 못이겨 모두 돌려주었지만 콜란고지만은 돌려주지 않고있다. 만일 콜란고지를 돌려주게 되면 자기들이 수리아의 군사적감시하에 처하게 되며 이스라엘동북변경의 안전보장에 커다란 후환을 남기게 된다고 인정하고있기때문이였다.
20세기 40년대에 중동땅에 이스라엘이란 없던 나라가 생겨나면서부터 아랍세계에는 화약냄새가 짙게 풍기기 시작했고 전쟁이 그칠 사이 없었다. 아랍나라들에서는 이스라엘을 중동평화를 파괴하는 간악한 장본인으로 보고있지만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막강한 힘을 갖고있는 이스라엘을 감히 힘으로는 대처하지 못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민들과 세계적여론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만 미국과 유럽의 영국, 프랑스 등 강국들이 이스라엘켠에 서서 지원하고 두둔하고 어루쓰는통에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고있다.
이스라엘은 세계각지에서 모여온 유태인들이 모여사는 이민국이다. 유태인의 원조는 고대싼족의 지맥인 시버래인이다. 시버래인은 기원전 13세기말에 팔레스티나로 옮겨와 자리를 잡았고 기원전 11세기에 시버래왕국을 건립하였다. 기원전 10세기중엽에 이르러서는 가장 흥성하고 번영한 시기를 맞이했었다. 기원전 63년에는 로마인들이 침입해왔다. 대다수 유태인들은 조상들이 장기간 피땀으로 가꿔놓은 가원을 억울하게 침략자들한테 몽땅 빼앗기고 팔레스티나에서 쫓겨나 유럽과 아메리카로 살길을 찾아 흩어져갔다. 그후 19세기말 구라파에 모여살며 일정한 힘을 키워온 유태자산계급은 “유태복국주의운동”을 발기하고 1897년에 이르러 “세계유태복국주의조직”을 창립하였다. 1917년에 로제국인 영국이 팔레스티나를 점령하고 그해 11월 2일에 “유태인들이 팔레스티나에 자기 민족의 가원을 건립하는것을 찬성한다”는 선언을 발표하였다. 1922년 7월 24일에 국제련맹에서는 영국에서 내놓은 “위임통치훈령”을 통과하고 팔레스티나에 “유태민족의 가원”을 건립하기로 결정하였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에서는 팔레스티나를 “분할통치”할데 관한 결의를 채택하고 팔레스티나에 각각 아랍국과 유태국을 건립하며 예루살렘은 국제화를 실시하며 유엔에서 관리하기로 결정하였다. 유엔의 결의에 따라 1948년 5월 14일에 이스라엘은 전세계에 유태인들의 나라성립을 선고하였다.
이스라엘이 성립된후 이스라엘정부에서는 천방백계로 세계각지에 널려있는 유태인들을 이민시키는것을 첫번째로 가는 기본국책으로 삼았다. 이민래원은 주로 두개 지역으로 나뉘여졌는데 하나는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오는 이민이고 다른 하나는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오는 이민이였다. 1948년부터 1972년사이에 네차례 대규모적인 이민운동이 벌어졌는바 약 140만명에 달하는 세계각지의 이민들이 이스라엘로 들어왔다. 80년대말부터 90년대초에는 구쏘련이 해체되고 동유럽에 극변이 일면서 100여만에 달하는 이른바 사회주의진영나라에 있던 유태인들이 이스라엘로 밀려들어왔다. 1984년에는 이스라엘정부에서 취한 “머시행동”과 “소라문행동”으로 또 3만여명의 유태인들을 비행기로 공중수송해왔다. 2001년부터 2002년사이에 에피오티아 등 아프리카나라에서 유태인 8만여명이 이스라엘로 건너왔다. 2004년 6월부터 아직도 세계각지에 널려있던 유태인들이 또다시 이스라엘로 몰려드는 새로운 고조가 일어나고있다. 이와 같은 몇차례의 대규모적인 이민운동으로 하여 이스라엘은 세계적으로 가장 빠른 인구고속증장을 가져왔다. 1948년에 나라가 세워질 때에는 인구가 120만밖에 안되였으나 현재는 근 700만명으로 치달아오르고있다. 국민중 유태인이 540만명을 차지하고 아랍인이 130만명을 차지하며 기타 민족이 5% 가량 차지한다. 중국혈통의 화인은 2만명 가량 된다.
유태인은 세계적으로 공인하는 근면하고 지혜로운 민족이다. 나라없는 설음을 안고 2000여년동안이나 세계각지에 떠돌이로 살고있을 때도 유태인들은 끈질긴 노력과 뛰여난 총명으로 이민국의 정치, 경제, 과학, 교육, 문화 등 각 분야에서 자기들의 뚜렷한 위치를 찾았으며 상층부문에서 맹활약하던 거두들이 수없이 출현하였다. 사회과학대사 칼·맑스, 자연과학대가 아인슈타인, 심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로이드 등 명성이 뜨르르한 세계적거장들은 모두가 유태인출신들이다. 더욱 놀라운것은 1901년에 첫 노벨상을 시상해서부터 2001년까지의 100년사이에 노벨상수상자가 도합 680명이였는데 그중 유태인과 유태인혈통의 수상자가 138명으로서 수상자수의 5분의 1을 점하였다는것이다. 하지만 유태인은 세계인구의 500분의 1밖에 안된다.
유엔에서 팔레스티나에 자기들의 나라를 세우기로 결의하자 세계각지에 널려있던 많은 유태인들이 환희와 감격에 젖어 장기간 몸을 담그고있던 원 나라에서의 모든 직을 버리고 오매에도 그리던 새롭게 세워진 자기 나라에로 달려왔다. 과학가는 첨단기술을 가지고 상인은 돈다발을 메고 일반인은 나라를 위해 모든걸 다 바치려는 뜨거운 마음을 안고 시집간 딸이 오랜만에 친정으로 오는 마음으로, 핍박에 의해 떠돌이 하던 아들이 눈물을 머금고 부모를 찾아오는 마음으로 이스라엘로 모여왔다. 미국과 그의 동맹국들인 유럽의 영국, 프랑스 등 강국들도 자기들의 리익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장차 아랍나라들을 견제하고 대처할수 있는 거점과 발판으로 여기고 새로 세워진 이스라엘에 방대한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주었다. 하여 자연자원이 극도로 결핍한 이스라엘은 국민들의 단합된 힘과 외부의 원조로 아주 짧은 시간내에 아랍땅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공인하는 경제고속성장을 이룩하였으며 아랍나라들에서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하는 많은 세계적첨단과학기술을 소유한 경제대국, 군사대국으로 되여 아랍사람들앞에서 우쭐렁거렸다. 특히 세계의 주목을 끄는것은 이스라엘에서 나라건립초기부터 어린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전반 국민교육에 커다한 중시를 돌리고 장기간 교육에 대한 투자를 대폭 늘였다는 점이다. 하여 국민들의 각종 자질이 아주 높아졌는바 과학가와 기술일군이 만명당 140명에 달하여 세계발달국수준에 도달하였다. 아모스·오즈와 같은 국제적 영향력이 대단한 걸출한 작가들도 수두룩이 배출하였다. 이스라엘에는 “유태인 두 사람에게는 머리 세개 있다.”는 속담이 있다. 그만큼 총명한 사람들이 또한 모두가 나라발전문제를 둘러싸고 사색한다는것이다. 세계발전사를 연구하는 많은 전략전문가들은 온 나라 국민들이 대통령으로부터 택시기사에 이르기까지 평등하게 의견을 교환하고 쟁론하며 교류할수 있다는 조화로운 사회분위기를 이스라엘이 신속히 발전할수 있는 가장 중요한 “비밀무기”로 보고있다. 이처럼 종합적자질을 갖춘 국민을 갖고있는 이스라엘은 점차 여러 아랍나라들이 미워하면서도 무서워하는 숙적으로 되였다. 이스라엘은 짧디짧은 몇십년간의 노력을 거쳐 인구당 GDP가 2.5만딸라에 달했으며 종합적경제실력이 세계 12대강국의 행렬에 들어섰다. 다년간의 전쟁으로 관광업이 엄중한 타격을 받고 전쟁에 대처하기 위하여 GDP의 10%를 군사비용에 처넣으면서도 짧은 시간내에 수백년의 분투를 거쳐 이룩한 기타 발달국의 수준에 이른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경제발전과 더불어 이스라엘은 이미 세계 제4대무기수출국으로 되였으며 미국, 영국, 인도, 터키 등 나라들에 레이저시스템, 무인정찰기, 미싸일 등 세계첨단장비들을 수출하고있다. 이스라엘이 수출하는 무기중 약 5%의 소총과 탄약들이 내전을 겪고있는 아시아와 아프리카국가들에 흘러들고있어 국제사회의 질책을 받기도 한다. 장기적이고도 온당하게 고속경제성장을 이룩한 이스라엘은 교육이 뒤떨어져 국민자질이 낮고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근본 자기들의 상대도 안되는 아랍인들을 렬등민족이라고 깔보며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1947년에 유엔이 팔레스티나에서 두 나라의 분할통치결의를 채택할 때는 이스라엘의 국토면적을 1.49만k㎡(약 연변땅의 1/3정도 됨)로 명확히 규정했으나 다섯차례의 중동전쟁을 거친후 지금은 실제적으로 2.5만k㎡의 면적(북경시의 면적보다 좀더 큼)을 통제하고있었다. 그가운데 수리아의 콜란고지면적 1200k㎡도 들어있다. 이스라엘은 나라가 건립되여서부터 자기보다 10배도 더되는 아랍인들의 포위속에서도 멸망되기는 고사하고 싸울 때마다 자기의 국토면적을 넓혔으며 유태인의 존재를 세상에 떳떳이 과시하였다.
팔레스티나와 이스라엘과의 모순은 중동문제의 핵심과 관건이였다. 제1차, 제3차와 제5차 중동전쟁의 폭발은 모두 팔레스티나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생사판가리전쟁이였다. 그중에서 서로 자기것이라고 장기간 아귀다툼하는 예루살렘의 전망이 가장 복잡하고 해결하기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 이 문제의 해결은 당지 아랍인과 유태인의 세속권익과 관계될뿐만아니라 전세계 기독교, 무슬린과 유태인들의 종교감정과 종교권익에 관계되기때문이다. 예루살렘은 3대종교가 서로 대체할수 없는 성지이며 아랍인과 유태인의 충돌이 가장 먼저 폭발하는 곳이기도 하다. 1947년에 유엔에서 이스라엘에 아랍국과 유태국을 세우기로 결의를 채택할 때는 예루살렘을 국제화하며 유엔에서 관할한다고 명확히 규정했으나 간이 커진 이스라엘은 일방적으로 1950년에 수도를 원래의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에로 옮겨왔으며 1980년 7월에는 예루살렘을 자기들의 떼여놓을수 없는 영원한 수도라고 전세계에 공공연히 선포하였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가지고있는 대다수 나라에서는 유엔의 결의를 존중하여 자기들의 대사관을 의연히 텔아비브에 두고있다.
팔레스티나와 이스라엘의 충돌로부터 인기된 아랍과 이스라엘간의 모순은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시간이 가장 오래고 관련면이 가장 광범위한 지역적충돌이다. 팔레스티나에 아랍국과 유태국이 함께 세워진이래 령토분쟁의 발단으로부터 종교모순, 정치충돌, 문화차이, 자원쟁탈과 민족적원한으로 하여 선후 다섯차례나 대규모 중동전쟁이 일어났다. 전쟁결과 여러 나라가 련합하여 싸운 아랍인들도 이가 갈리도록 저주하는 유태인들을 “바다로 쫓아내지 못했으며” 자기의 힘을 믿고 야심발발하게 고군작전한 유태인들도 아랍땅에서의 “대이스라엘제국”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아랍땅에서 전쟁의 불길이 끊임없이 타오르면 자기들의 세계적형상과 장원한 리익에도 손상이 된다고 인정한 유엔과 미국 등 대국들이 나서서 아랍인과 유태인들을 “화해”시키고 모순충돌을 해결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해결을 보기는커녕 모순은 점점 더 커가고 충돌은 갈수록 치렬해졌다. 장기간 이스라엘과 강경히 대처해오던 팔레스티나의 유명한 정신수령 아라파트가 죽은후 2004년부터 팔레스티나내부의 파벌모순이 갈수록 첨예해지면서 이스라엘을 주요목표로 한 강경파들의 “자살성폭탄”사건이 도처에서 일어나 아랍세계는 물론 전반세계가 극단적테로의 살벌한 ㎸廈?nbsp;시달리고있다.
우리가 쿠네이트라성소재지에 도착하자 길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있던 쿠네이트라성작가협회 주석이 우리 차에 올랐다. 70여세 된 로주석은 우리와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하는 말이 콜란고지를 참관하고 내려와서 식사전에 자기네 작가협회 회원들과 좌담회를 가지기로 하고 이미 통지했는데 괜찮겠는가고 했다. 이곳에서 좌담회를 가지는것은 원래 계획에 없던 행사였다. 로주석은 자기네 작가들이 모두 중국동지들을 보고싶어하기에 시간이 촉박하여 중국동지들의 동의를 거치지 못하고 먼저 통지해 대단히 미안하다고 덧붙였다. 섭참찬은 아얼타이단장의 의견을 물었다. 아얼타이단장은 또 나의 의견을 물었다. 콜란고지를 참관하고 내려와서 어차피 성소재지에서 식사하게 되였기에 이들이 이미 통지까지 내보냈다니 시간을 짜내 좌담회를 간단히 갖기로 합의를 보았다. 우리가 자기네의 의사를 존중해주니 로주석은 매우 감격해하였다.
콜란고지는 성소재지에서 50㎞ 가량 떨어져있었다. 그 구간에 군사검문소가 세개나 세워져있었다. 검문소마다 보초서던 군인이 우리 차를 세우고 통행증을 검사했다. 세번째 검문소에 이르러 로주석과 우리를 안내하는 작가협회일군이 검문소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우리 일행중 왕립순이 카메라를 내들고 뻐스차창밖으로 검문소와 그 주위를 록상하니 총을 꺼꾸로 멘 군인이 달려오더니 당금 카메라를 빼앗을듯이 눈을 부라리며 을러메였다. 접촉성이 좋은 섭참찬이 나서 이분들은 중국에서 온 국가작가대표단인데 이곳 규정을 모르고 한것이니 량해하라고 부드럽게 해석했다. 중국대표단이라는 말에 험상궂게 나오던 군인은 퍽 누그러들면서 여기에서 마음대로 촬영하면 안된다고 다시한번 엄포를 놓았다. 왕립순도 즉시 카메라를 거두며 미안하다고 성근히 사과하니 군인은 우호적으로 손을 흔들며 물러갔다. 기실 검문소를 지나면서부터는 마음대로 카메라촬영을 해서는 안된다고 사전에 귀띔을 받은터였다. 한참후에 로주석네가 작달막하고 오동통하게 생긴 한 군인을 데리고 차에 올라왔다. 콜란고지까지는 이 군인이 우리를 안내한다고 하면서 지금부터 우리 일행이 이 군인의 말에 따라줄것을 부탁하였다. 마지막 검문소에서 콜란고지를 가는데 반시간 가량 걸렸다.
이 길에 들어서면서부터 금방 전쟁을 치른듯 페허에 페허가 잇달았다. 무너지고 파괴된 집들이 줄줄이 그대로 방치되여있었다. 이곳은 워낙 인구가 3만명 가량 되던 자그마한 진이였는데 1967년 제3차 중동전쟁때부터 이스라엘의 강점하에 있었다. 1974년에 국제여론의 강력한 비난에 못이겨 이스라엘군이 철군하면서 이곳에 있던 주택, 학교, 병원 등 건축물들을 모조리 파괴하고 달아났다. 그때로부터 이젠 30여년이 지났지만 수리아에서는 파괴된 “상처”를 거두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두고있었다. 그 원인을 물었더니 첫째는 전세계에 이스라엘침략군의 만행을 폭로하기 위하여 견증물로 남겨놓은것이고 둘째로는 국내국민들에게 장기적으로 애국주의교양을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수리아정부측에서는 아랍세계는 물론 기타 세계 각국에서 오는 가지각색 명목의 국가대표단을 모두 콜란고지를 참관하도록 배치하고 이스라엘의 침략만행을 공소하며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민들의 성원과 세계여론의 지지를 얻어내려 했다. 국내적으로는 경상적으로 각계각층의 인민대중과 학생들을 조직하여 이곳을 참관하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침략자에 대한 국내인민들의 불타는 적개심을 가일층 불러일으키고 애뮐聆프ㅍ탔?고양시키고있었다.
우리의 차는 한 커다란 페허더미앞에 멈춰섰다. 이곳은 원래 이 진에서 가장 큰 하나의 중학교였는데 이스라엘군이 급급히 철거하면서 자기의 보금자리를 지켜내려고 울부짖으며 항의하는 교원과 학생들을 강제로 쫓아내고 학교 전체를 사정없이 폭파시켜버렸다. 로주석은 그때 이 중학교의 교원이였단다. 어문교원을 담임했지만 체육에 애호가 있는 그는 아침저녁으로 이 학교의 널다란 운동장에서 표창던지기련습을 열심히 하여 성에서 열린 체육운동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따냈었다. 이젠 학교가 페허로 된지 30여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이 페허더미앞에 와서면 교실에서 울려나오던 학생들의 랑랑한 글소리 들리는듯하고 넓은 운동장에서 즐겁게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는듯하여 그냥 가슴이 쓰려오며 눈시울이 젖어난다고 했다. 비분에 젖어 이야기하는 그의 눈에는 어느덧 커다란 이슬방울이 그렁그렁 맺혔으며 솥뚜껑 같은 손바닥으로 자주 눈시울을 훔쳤다. 우리도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숙연해졌다. 우리의 눈앞에도 파괴되기전의 생기발랄한 이 학교의 모습이 방불히 보이는듯했으며 어렸을 때 다니며 많은 이야기를 남겨놓았던 정든 농촌중학교의 모습도 동시에 우렷이 안겨와 애절한 감정을 서로 융합시켜놓았다. 전쟁이란 이렇게 잔혹한것이였다. 세상 어느 나라나 공부하는 귀여운 학생들이 있기 마련이건만 력사를 더듬어보면 약소국의 학생들은 늘 전쟁의 피해자가 되여 공부할 자유마저 빼앗기는것이다. 이런 가슴아픈 일이 다시는 재연되지 말아야 하며 세계상의 모든 학생들이 마음놓고 공부할수 있는 평화로운 환경이 마련되기를 기원하며 우리는 무거운 발걸음을 떼였다.
우리는 또 이층으로 된 한 건물앞에 멈춰섰다. 건물은 절반가량 무너졌고 출입문과 창문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블록으로 된 바깥벽은 마치 우박맞은 소똥마냥 탄알자국이 다닥다닥했다. 우리가 탄알자국을 유심히 살펴보는데 여태껏 줄곧 말이 없이 우리를 안내하던 군인이 자진해나서서 이것은 기관총탄자국이고 이건 돌격총탄자국이고 이건 보총탄알자국이라고 일일이 설명해주었다. 이 병원은 원래 이 진에서 규모가 가장 큰 인민병원이였는데 이스라엘군이 철거해가면서 이 병원도 모조리 폭파하려고 날뛰였다. 그들은 의사와 간호사들을 강제로 몰아내려 했으나 그들이 버티고 나가지 않으니 위협적수단으로 바깥벽에 대고 여러가지 규격의 총으로 한바탕 란사하였었다. 이와 같이 의사와 간호사들을 쫓아내고는 입원한 환자들까지 쫓아내려 했으나 움직일수 없는 환자들이 많아 별수 없이 입원실이 있는 켠은 감히 폭파시키지 못했다는것이다. 하여 이 병원은 유일하게 전부 파괴되지 않은 건물로 남아있게 되였다. 하지만 집안벽에도 총탄자국이 수두룩하였다.
병원지붕에 올라서니 저 멀리 콜란고지가 한눈에 안겨왔다. 콜란고지는 하나의 커다란 산등성이였다. 산우는 이스라엘군이 점령하고있었는데 군데군데 지어진 새하얀 건물들과 그우에 안장된 레이다들이 해빛에 반사되여 시야에 똑똑히 안겨왔다. 산아래는 수리아군이 차지하고있었는데 완전히 이스라엘의 군사감시하에 놓여있었다. 둥글둥글 감아친 철조망이 두 나라의 국경임을 알려주고있었다. 국경사이에는 어느 나라에서 내버린것인지 낡아빠진 승용차와 트랙터가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로주석의 말에 의하면 산너머에는 커다란 자연호수가 하나 있는데 이스라엘에서 강점하기전에는 수리아서부의 중요한 음료수래원의 하나였단다. 이스라엘이 콜란고지를 강점한후에는 이스라엘과 담판하며 “비럭질”로 음료수를 해결하군 한단다. 이스라엘측에서 선심을 쓰는척할 때면 수문을 크게 열어주어 음료수문제가 해결되나 두 나라에 모순이 생기거나 자기네 기분이 언짢을 때에는 조금 열어놓거나 아예 닫아버려 하류에 있는 수리아측에서 마실 물이 없어 란리가 일어나게 했다. 제 나라 땅을 남에게 강점당하고 물마저 마음대로 마실수 없으니 수리아백성들이 이스라엘을 사무치게 증오하지 않을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도 별다른 해결책이 없이 분하고 억울한대로 담판을 통해 음료수를 해결하고있었다. 이스라엘이 심술을 부려 물을 잘 보내주지 않으면 수리아에서는 유엔과 대국들의 성원을 입어 간신히 물문제를 해결하였다. 수리아사람들은 수리아에서 콜란고지를 찾아오기전에는 음료수문제가 영원히 쉽게 풀리지 않을것이라고 통탄하고있다.
콜란고지 량측에는 유엔에서 파견한 평화유지부대가 주둔하고있었다. 그래도 평화유지부대가 콜란고지에 진주하면서부터 서로 물고 뜯던 두 나라 국경의 모순충돌이 많이 적어졌다. 평화유지부대에서는 유엔의 해당 헌장을 엄수하면서 두 나라간에 새로운 모순충돌이 발생하는것을 제지시키고있으며 일단 어느 구석에서 충돌이 발생하면 평화유지부대에서 유엔을 대표하여 조해에 나섰다. 유엔의 결정에 따라 상임리사국인 중국에서 파견한 평화유지부대도 콜란고지에서 근무를 집행하고있었다. 우리 나라의 위상이 국제적으로 나날이 높아져 국제사무에서도 한몫 크게 담당하고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가슴 뿌듯한 자호감을 느꼈다. 하지만 남의 싸움을 말리거나 싸우지 못하게 평화를 유지해주는 평화유지부대라 하지만 이곳에 파견되여와 근무하는 여러 나라 군인들도 수시로 되는 생명의 위협을 받고있었다. 테로의 돌연습격을 받거나 도처에 매장되여있는 지뢰를 밟을수도 있으며 두 나라의 무력충돌에서 하루아침에 풀잎의 이슬로 사라질수 있었다. 2006년 10월의 어느날 수리아측에 있는 평화유지부대군영에 난데없는 박격포탄 한발이 날아와 터졌는데 군인 네명이 당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중의 한명은 중국에서 파견한 평화유지부대의 병사였다. 우리의 자제병들은 세계평화를 위하여 세계각지에서 조용히 피와 땀을 흘려가고있었다. 지금은 비록 싸움이 처절한 전쟁마당이 아니라지만 콜란고지에 파견된 평화유지부대에서 해마다 사상자가 발생하고있어 유엔에서도 은근히 골머리를 앓고있다.
로주석은 저 멀리 바라보이는 콜란고지를 가리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콜란고지 저쪽에 아직도 우리 동포 2만여명이 이스라엘의 통치하에 신음하고있습니다. 이젠 조국과 떨어져있은지 40년이 되지만 아직도 조국의 품에 돌아오지 못하고있습니다. 조국인민들은 침략자의 강점하에 도탄속에서 헤매고있는 우리의 동포들을 한시도 잊은적이 없습니다.”
안하무인인 이스라엘이 수리아땅이였던 콜란고지를 점령하면서부터 콜란고지쪽에 있던 수리아의 네개 마을도 이스라엘의 통치하에 들게 되였다. 당시 이스라엘에 점령당할 때에는 네개 마을 인구가 7000여명밖에 안되였으나 40년이 지난 지금은 2만여명으로 늘어났다. 후에 섭참찬한테서 들은 이야기지만 수리아정부에서는 조국의 따뜻한 품과 떨어져 사는 불쌍한 그 2만여명이 하루 빨리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있지만 오히려 그 “불쌍한 동포”들이 돌아오려 하지 않고있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장기적인 고속경제성장과 더불어 그들의 생활수준도 대단히 높아져 지금의 수리아국민들의 생활수준과 비교도 안되게 우월하기때문이였다. 수리아정부에서 때때로 랍치해간 자기네 동포들을 돌려보내달라고 이스라엘정부에 교섭하면 이스라엘측에서는 가라고 해도 가지 않고 갖은 방법을 다해 자기네 국적에 넘는걸 무슨 방법이 있느냐며 배포유한 소리를 한단다. 그러면 화가 치민 수리아측에서는 견결히 조국에 돌아오려는 자기네 동포를 억류해놓고 세계인민들을 기만하는 도깨비소리를 한다고 맹공격한단다.
이스라엘정부에서는 전세계에 “진실”을 홍보하고 수리아백성들이 “사실의 진상”을 알게 하고저 “랍치되여간 동포”들더러 수리아에 가 친척방문을 하도록 “선심”을 썼다. 배포유한 이스라엘정부에서는 수리아사람들보다 배부른 그들이 절대 경제적으로 많이 뒤떨어진 “조국”으로 도망치지 않으리라는것을 굳게 믿고있었다. 수리아정부에서도 옛 생각 그대로 애국심이 있는 자기네 동포들이 수리아국경만 넘어서면 다시는 침략자의 이스라엘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여기고 그들이 친척방문 오는걸 흔쾌히 동의하였다. “랍치되여간 동포”들은 뜻밖에 이스라엘정부에서 다년간 보지 못했던 형제들과 친척들을 만나볼수 있게 되여 대단히 감사해하며 자기들이 어떻게 잘살아가고있는가 자랑하려는 들뜬 마음에 딸라주머니를 메고 숱한 생활필수품과 금은장신구, 텔레비, 랭동기 등을 큰 트럭에 싣고 자기네는 고급승용차에 앉아 호호탕탕히 수리아로 들어갔다. 이스라엘에 “랍치되여간 동포”들이 금의환향한 모습을 보고 수리아 친척들은 눈이 휘딱 뒤집혀졌다. 당국의 선전처럼 자기네 친인들이 침략자들한테 끌려가 짐승보다 못한 생활을 하며 죽지 못해 살아가는가 했더니 이렇게 대부자가 되여 돌아올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것이였다. “랍치되여간 동포”들이 친척방문을 오는통에 가까운 친척들은 하루밤새에 모두 벼락부자가 되였다. 이렇게 되니 “랍치되여간 동포”들이 어떻게 하면 조국의 품에 돌아올것인가 하는것이 문제가 아니라 수리아 친척들이 살기 좋다는 이스라엘로 도망쳐 살수 있느냐 하는것이 구석구석에서 수군거리는 열띤 화제거리로 되였다. 수리아 친척들은 나날이 썩어간다는 이스라엘이 자기네 위대한 수리아보다 더 발전하고 이스라엘침략자들이 자기네보다도 훨씬 더 잘산다는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였다. 동포들이 방문온 기회를 놓칠세라 수리아정부관원들이 “랍치되여간 동포”들을 찾아나와 당신들을 한시도 잊지 않고있는 위대한 조국으로 돌아오라고 열심히 “교육”하면 “랍치되여간 동포”들은 겉으로는 “몹시 안타까와”하며 돌아오고싶어도 이스라엘에서 이젠 국적까지 넘겨놓고 돌아가지 못하게 한다며 한숨을 풀풀 내쉬고 밤이면 친척들한테 가만가만 이스라엘이 수리아보다 여사여사하게 발전하고 살기 좋다고 홍보하였다. 여태껏 모든것이 침략국 이스라엘보다 우월한 자기네 위대한 사회주의나라에서 “세상에 부럼없이” 살아오던 수리아 친척들의 마음만 들뜨게 했다. 이스라엘이 여차여차하게 발전하고 살기 좋다는 소리가 한입에서 만입으로 전해지는통에 수리아당국에서는 부득불 “랍치되여간 동포”들의 친척방문을 막아버리는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미 이스라엘국적에 넘은 그들을 억지로 잡아둘수도 없었다. 공연히 지난날 침략자들한테 끌려가지 않겠다고 발버둥치던 애국심이 높던 그제날의 자기네 동포들을 믿고 친척방문을 허락했다가 “랍치되여간 동포”들이 조국에 돌아오기는커녕 조국에 있던 동포들마저 이스라엘로 도망쳐버릴 위험이 갈수록 커졌던것이였다.
우리 나라에서도 60년대초에 사회주의조국과 멀리 떨어진 바다건너 장개석의 암흑한 통치하에서 신음하며 죽지 못해 살아가는 대만동포들이 암흑을 버리고 광명을 찾아오면 4대기물(재봉침, 자전거, 라지오, 손목시계)을 장려한다는 정책이 있었던것 같다. 그때 우리 나라 백성들은 집에 사회주의우월성을 과시하는 4대기물을 갖춰놓고 사는것이 최대의 념원이였으나 정작 그렇게 갖춰놓고 사는 가정은 극소수였다. 우리는 남들보다 잘살지 못하면서도 압박받고 착취받던 구사회와 대비하며 인민이 주인된 사회주의나라에서 세상에 부럼없이 가장 행복하게 사는줄로 알고있었다. 하지만 도탄속에서 허덕인다던 암흑한 대만에서는 그때 벌써 우리와는 다른 4대기물(주택, 승용차, 텔레비, 랭동기)을 갖춰놓고 사는 사람들이 푸술한줄 우리는 감감 모르고있었다. 대륙의 “후한” 장려정책이 대만에 전해지자 대만사람들의 웃음거리로 되였다는 이야기를 썩후에야 듣게 되였다.
수리아와 이스라엘의 사실이 보여주다싶이 온 나라 백성들을 꼭같이 잘살게 해준다는 사회주의가 날따라 썩어간다는 자본주의보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모든 면에서 아무리 우월하다 해도 경제가 발전하지 못하고 백성들의 생활이 자랑스러울 정도로 펴이지 못하면 아무런 설득력이 없게 되고 믿음을 잃게 되는것이다, 이태전에 길림성신문보도일군대표단이 서유럽 11개 나라에 참관을 갔을 때 지난날 사회주의진영에서 우리 나라와 떨어질수 없는 친밀한 형제라던 알바니아, 로므니아, 뽈스까, 웽그리아, 벌가리아, 체스꼬 슬로벤스꼬, 동부독일 등 동유럽사회주의나라 백성들이 살길을 찾아 자본주의 서유럽나라들에 쓸어들어와 남성들은 막일하고 거리바닥장사하고 비럭질하는가 하면 녀성들은 매음하는 등 가슴아픈 사연들을 적지 않게 보고 들었다. 당시 우리의 마음은 아주 착잡했으며 모순으로 가득 찼다. 사회주의는 뭐나 자본주의보다 우월하여 짧은 시일내에 누구나 다 행복하게 살수 있는 공산주의를 실현한다던 사회주의나라의 백성들이 왜 나중에 자본주의나라에 와 살길을 찾아야 하는가. 그들이 부르짖던 쏘련식사회주의가 그래 공산주의로 가는 금다리가 아니였단 말인가? 그래서 70여년간 사회주의진영에서 그 누구도 대체할수 없는 빛나는 모델로, 큰형님으로 우러러 불리우던 쏘련을 비롯한 동유럽사회주의나라들이 만백성들의 민심을 잃고 하루아침에 무너진것이 아니겠는가.
한 나라가 갈라져 부동한 제도를 실시한 동서독일의 나라발전차이가 그 전형적인 일례라 하겠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자 유엔은 독일의 힘을 갈라놓고저 미국과 쏘련이 독일을 나누어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1945년까지 독일의 수도였던 베를린시를 미국, 영국, 프랑스와 쏘련이 나누어 점령하였다. 그후 서베를린시는 서독의 수도로 되고 동베를린시는 동독의 수도로 되였다. 서독은 미국을 따라 자본주의제도를 실시하고 동독은 쏘련을 따라 사회주의제도를 실시하면서 두개 적대진영으로 나뉘여져 장기간 대치상태에 처해있었다. 그런데 10여년이 지나면서부터 서독의 경제가 동독보다 훨씬 발전하게 되여 갈수록 많은 동독의 백성들이 사회주의고 뭐고 모든걸 팽개치고 살기 좋은 서독으로 도망쳐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되자 동독정부에서는 도망치는 자국백성들을 막다 못해 1961년 8월에 동서베를린사이의 45.1k㎡에 이르는 경계선에 콩크리트장벽을 쌓고 철조망을 쳐놓아 자유로 드나들던 국경을 봉쇄했다. 그래도 도망치는 사람들을 막아낼수 없었다. 어떤 사람은 기구를 타고 하늘로 도망쳤고 어떤 사람은 땅굴을 파고 땅밑으로 도망쳤으며 또 어떤 사람은 변방군에게 뢰물을 먹이고 “감歌걋瞼?사라지기도 했다. 세계적여론에 골치아파난 동독정부에서는 애국주의정신이 꼬물만치도 없이 나라망신만 시키는 저주로운 “매국주의자”들을 엄하게 다스리고저 서독으로 도망치다 붙잡힌 탈출자에게 최고 8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제재에도 불구하고 살길을 찾아떠나는 동독백성들의 탈출은 계속되였다. 변방을 보위하는 변방군의 일이란 탈출자들을 감시하고 잡아내는 일이 위주였다. 1989년 11월 4일, 독재통치로 하여 장기간 잠재웠던 분노가 일시에 폭발한 동베를린시의 100만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성세호대한 반정부대시위를 벌려서야 동독정부는 핍박에 못이겨 동서독일의 국경을 다시 전면개방한다고 선포하였으며 28년간이나 동서베를린시를 갈라놓았던 콩크리트장벽을 허물어버렸다. 그후 한해도 못되여 장장 40여년간 쏘련식사회주의제도를 실시해오던 락후한 동독은 자본주의제도를 실시해온 발전한 서독에 무조건 흡수통일되고말았다. 이로써 세계정치적풍운의 산물로 태여나 장기간 적대진영으로 나뉘여 존재해왔던 독일은 비류혈적으로 굴곡적이였던 한단락 력사를 종말짓게 되였다. 곡절 많았던 독일의 력사는 한 나라의 력사뿐만아니라 세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두개 진영의 복잡다단한 력사의 한자薦堅竪?했다.
미제국주의 코밑에서 근 반세기동안 견정불의하게 공산주의기치를 높이 들고 용감히 사회주의길로 나아가 카리브해의 “밝은 등대”로 불리우던 아메리카주의 유일한 사회주의 나라 꾸바의 “혁명할수록 가난해지는”현상도 사람들의 깊은 사색을 자아낸다. 1959년 1월에 무장투쟁에 성공하여 새로운 인민의 정권을 세우고 아메리카땅에서 가장 살기 좋은 첫 사회주의나라를 만들겠다던 카스트로의 원대한 리상은 점차 물거품으로 되여갔으며 나중에는 공상으로 돼버렸다. 혁명이 성공된후 그는 외국자본을 몰수하고 지주, 자본가를 타도하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눠주면서 완전히 쏘련식사회주의제도를 실시하였다. 하지만 꾸바경제는 장기간 미국의 경제봉쇄작전에 시달렸고 전쏘련과 동유럽 여러 사회주의나라 지원과 중국의 원조에 의거해 나라를 간신히 유지해나갈 정도였다. 장기간 대립상태로 존재하던 두개 진영이 깨뜨려지고 랭전이 붕괴됨에 따라 전쏘련이 로씨야로 바뀌고 예리친이 대통령으로 올라와 집정하면서부터 꾸바의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전쏘련이 아메리카주의 사회주의전형으로 내세웠던 카리브해의 “밝은 등대” 꾸바를 돕고저 장기간 의무적으로 수입해들이던 꾸바의 주鴉稚銖갭炷?설탕수입을 중단하였고 혼란스럽던 문화대혁명을 결속지은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하면서 자기 나라 경제건설에 전력하면서 여태껏 무상으로 주던 각종 지원을 끊어버리자 꾸바는 완전히 고립되였으며 나라경제도 붕괴직전에 이르게 되였다. 이렇게 되자 수십년간 생활고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언제면 잘살수 있을가 하던 허무한 기대를 포기하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살길을 찾아 미국과 기타 나라로 대량 밀항하기 시작하였다. 정부에서 밀항자들을 아무리 엄하게 징벌해도 백성들의 탈출은 계속되였다. “위대한 혁명수령” 카스트로를 더욱 난처하고 격분케 한것은 1933년에 카스트로의 친딸인 알리나 페르난데스마저 아버지가 령도하는 위대하다는 사회주의 꾸바를 버리고 제국주의 미국으로 망명하여 세계여론의 웃음거리를 만들었다는것이다.
여러 형제적사회주의나라들이 장기간의 피어린 무장투쟁으로 서로 도우며 혁명을 성공시켰으나 정권을 잡은후 경제건설에는 하나같이 자본주의에 뒤지게 되는 원인이 과연 무엇이였을가? 백성들을 잘살게 하기 위한 순박한 마음으로 장기간 피흘리며 혁명해온 사회주의혁명가들로 놓고 말하면 이는 심각한 사색을 자아내는 침통한 력사적교훈이 아닐수 없다.
그 어떤 정치이데올로기만으로는 배를 불릴수 없고 몸을 가릴수 없는것이다. 못살고 가난한 나라에서는 국민들의 애국주의정신이라는것도 무색해지기 마련이다. 수십년간 “사회주의혁명”을 해도 그냥 남보다 잘살지 못하면 그건 사회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인들 누가 옹호하고 지지하며 지어 목숨을 바치려 하겠는가. 이곳에 와서 우리는 가난은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한 등소평동지의 말씀이 천만지당한 철리임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였다.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과학발전을 도모하고 고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하여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해마다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릴 때 만일 우리 나라에서 아직도 경제발전을 저애하던 그제날의 정치로선대로 계급투쟁을 기본고리로 삼고 몇년에 한번씩 무자비한 정치운동을 하며 사람잡이에 이골이 나있고 인민들의 생활수준이 60∼70년대의 가난한 상태에 머물러있다면 우리도 애국주의를 운운할수 있겠는가? 배가죽이 등에 가 붙은 굶어죽는 사람들한테 아무리 위대하고 고상하다는 정치적설교인들 먹혀들어가겠는가?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아무런 삶의 희망도 발전가망도 보이지 않는 그러한 사회주의를 옹호하겠는가? 한 나라의 위치가 바로 서지 못하면 그 나라의 백성들도 밖에 나가 설자리가 없게 되며 가는 곳마다 업신당하고 모독당하기 마련이다. 사회주의제도를 실시한다는 수리아와 자본주의제도를 실시한다는 이스라엘과의 경제발전차이에서 나타난 철 같은 사실들을 통해 우리는 발전은 가장 큰 도리라고 한 등소평동지의 말씀을 이곳에 와서 깊이 터득하게 되였다. 동시에 늦게나마 세계적발전흐름을 명철히 통찰하고 개혁개방시책으로 장기간 고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날따라 향상되고 나라의 종합적국력이 강화되고 우리 나라의 위상이 국제적으로 갈수록 높아지고있음을 우리는 다행스럽게 생각하게 되였으며 자랑스럽게 느끼게 되였다.
세계근대사의 력사가 보여주는바와 같이 한 나라의 통치자가 자기의 종신적인 독재통치자리를 지켜가기 위하여 자신을 신격화하고 개인숭배하며 갖은 수단으로 고압적철통통치를 실행하고 부동한 정견자를 숙청하고 인민대중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나라치고 경제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세계적발전을 이룩한 나라가 없으며 백성이 마음 편히 잘사는 나라가 없는것이다.
이곳에서는 사진찍어도 괜찮다는 군인의 허락하에 우리는 콜란고지와 페허들을 배경으로 수리아벗들을 청하여 함께 기념사진들을 남겼다.
우리가 병원지붕에서 내려오니 주인측에서 갈증이 날텐데 가까운 곳에 가 홍차를 마시자 하기에 일행은 한 차집으로 안내되였다. 인가가 없는 편벽한 곳에 이렇게 크고 널직한 차집이 있을줄은 몰랐다. 이곳은 국내외참관객들을 대상하여 꾸린 차집이였다. 차집뒤는 바로 국경으로서 둥글둥글 철조망이 아득히 뻗어있었다. 집안에 앉아 홍차를 마시며 열려진 창문으로 우연히 널직한 뒤뜨락을 들여다보니 토담이 빙 둘려져있었는데 그가운데로 철조망이 한줄 가로질러 지나갔다. 뒤뜨락을 두개로 갈라놓은것이였다. 저것도 혹시 국경선이 아닐가싶어 차집주인하고 물었더니 아니나다를가 그것이 과연 국경선이였다. 원래는 평화로운 한집 뜨락이였는데 이스라엘이 콜란고지를 점령하면서부터 뒤뜨락을 절반 빼앗기게 되였단다. 그것이 통분하여 차집주인의 아버지가 세상을 뜨면서도 언젠가 저 빼앗긴 뒤뜨락을 되찾게 되면 자기 묘지에 와서 알려달라는 유언까지 남겼단다. 하지만 아버지가 세상뜬지도 20여년이 되였지만 아직도 아버지에게 뒤뜨락을 찾았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드리지 못하고있단다. 아버지는 아마 지금까지도 천당에서 눈을 감지 못하고계실거라며 차집주인은 눈시울을 적셨다. 그 이야기를 듣는 우리의 마음도 무거워졌다. 아직도 지구우의 곳곳에서 총소리, 대포소리 그치지 않고있는데 전쟁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눈물 흘리게 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못을 박아놓고있는것인가. 우리는 뭐라고 위로할수가 없어 그저 그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었다.
차집에서 나와 우리는 군인의 허락을 받고 철조망앞에 서서 멀리 콜란고지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겼다. 일행이 사진을 찍고 차에 오를 때 나는 뒤에 남아 철조망밑에서 화산재 같은 돌 하나를 주어 멜가방에 넣었다. 세계가 주목하는 국제적쟁의로 유엔의 평화유지부대까지 들어와있는 콜란고지의 평범하게 나딩구는 돌일지라도 자못 큰 “국제적”기념의의가 있을거라고 나름대로 생각했기때문이였다.
우리는 콜란고지에서 내려와 기다리고있는 쿠네이트라성 작가들과 간단한 좌담회를 가진후 규모가 큰 한 로천식당에 가 로주석의 아들이 초대한다는 점심을 맛갈스레 먹고는 귀로에 올랐다.
(다음호에 이음)
<<연변문학>> 2008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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