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룡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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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우정의 내음은 짙다
2011년 04월 27일 13시 48분  조회:3266  추천:85  작성자: 허룡석


우정의 내음은 짙다
ㅡ중국작가협회 원 당조서기 김병화동지의 리직을 애석해하며

허룡석

1

지난 2월 18일, 간밤에 내린 큰 눈은 중국 개혁개방결책중심지 수도 북경을 은빛세계로 소복히 단장하였다. 이번 눈은 110여일만에 북경에 처음 내린 눈이란다. 전날까지만도 북경시 기온이 10℃로 봄날의 화창한 날씨였으나 이날은 령하5도로 뚝 떨어져 봄날의 매서운 한파를 몰아왔다. 하지만 장기간 가뭄에 시달리던 북경시는 이번 큰눈으로 가뭄해소에 큰 도움을 받게 되였으며 시민들은 오래동안 고대하던 첫눈을 반겨맞았다.

   밖에서는 보기 드문 한파가 들이닥쳐도 군사박물관 부근에 자리잡고 있는 중국철도호털 3층 다공능청 (多功能厅)은 열기로 훈훈하였다. 이날 오전 9시, 이곳에서 중국작가협회 제7기전국위원회 제4차전체회의가 장중히 열리였다. 이번 회의는 워낙 새로 세워진 성급 직할시 중경시당위에서 책임지고 중경시에서 열기로 되여 지난해부터 모든 준비사업이 완료되였으나 중국작가협회에 중대한 인사변동이 있게 되여 회의지점이 림시로 바뀌여 북경에서 열리게 된것이였다.

    회의에는 여느 때와 달리 중앙조직부 지도자와 중앙선전부 지도자 및 중앙조직부 간부 3국 책임자와 중앙선전부 간부3국 책임자들이 나와 있었다.

    중앙조직부 지도자는 김병화(金炳华)동지가 년령원인으로 더는 중국작가협회 당조서기를 련임하지 않을데 관한 청구를 접수하며 리빙(李冰)동지를 중국작가협회 당조서기로 임명할데 관한 중공중앙의 결정을 통보하였다. 이에 앞서 지난해 12월에 중국작가협회 내부에서는 이미 중공중앙의 결정이 공포된 상태였다. 중앙조직부 지도자는 김병화동지가 지난 8년남짓한 동안 중국작가협회의 사업을 조직지도하면서 거둔 뛰여난 성과를 충분히 긍정하면서 선후로 중공중앙정치국 상무위원 리장춘 (李长春), 중공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며 국가부주석 습근평(习近平), 중공중앙 정치국 위원이며 선전부장 류운산(刘云山), 중공중앙정치국 위원이며 중앙조직부 부장 리원조(李源潮) 등 중앙지도동지들이 김병화동지의 사업성취를 아주 높이 평가하였다고 전달하였다. 중국작가협회사업을 주관하는 기간 김병화동지는 당중앙의 각항 정신을 견결히 관철집행하고 문학계에서 정확한 정치방향을 견지하였으며 사업사로가 명확하고 조직협조능력이 강하며 문단의 단결에 중시를 돌리고 착실하고 세밀한 사업방법으로 문학계인사들의 보편적인 인정과 광범한 호평을 받았다고 지적하였다. 중공중앙정치국 위원이며 중앙선전부 부장 류운산동지는 최근의 한 회시에서 김병화동지를 <고급간부들중의 모범>라는 평을 내렸다.

    중앙조직부 지도자가 이처럼 훌륭히 사업해온 김병화동지에게 충심으로 되는 감사와 숭고한 경의를 드린다고 하자 회장에서는 오래도록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뒤이어 김병화동지가 자기의 소감을 피력하였다. 그는 자기가 중국작가협회 사업을 주관하는 동안 일부 일들을 하기는 하였지만 많은 면에서 중앙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면서 중앙지도동지들의 과분한 평가에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겸손히 말하였다. 그는 또한 자기의 사업에서 일정한 성과가 있다면 그것은 작가협회 여러 동지들과 전국 문학계인사들의 지지와 관심과 갈라놓을수 없다고 하였다. 평소에는 연설고가 없이도 청산류수마냥 이야기를 잘하던 김병화동지가 위원들에게 리직인사를 할 때에는 그간 문학계인사들과 맺어진 두터운 우정을 못잊어서인지 목이 메여 가담가담 말을 잇지 못하였다. 곁에 앉은 중국작가협회주석 철응동지도 김병화동지의 꾸밈새없는 다분한 정에 감화되여 자주 눈굽을 찍고 있었다. 김병화동지의 리직연설은 주석대에 않은 동지들뿐만 아니라 많은 위원들의 신금을 울려주었다. 위원들은 그와 함께 눈물을 머금고 김병화동지의 발언을 귀담아 들었다. 김병화동지가 다년간 작가협회의 사업을 지지해주고 자기를 아끼고 사랑해준 전국위원들과 이들을 통하여 전국 문학계인사들과 벗들에게 충심으로 사의를 드린다며 허리굽혀 정중히 인사를 올릴 때 회장에서는 오래동안 박수소리가 그쳐지지 않았다. 박수소리가 그치지 않자 김병화동지는 일어서 다시 한번 위원들에게 허리굽혀 사의를 표했다. 밖에서는 한파가 기승을 부려도 장내에는 화창한 봄빛이 무르익었으며 동지간의 두터운 난류가 흘렀다.

회의 휴식시간이 되자 나는 주석대아래에 찾아가 김병화동지가 내려오기를 기다려 그와 굳은 악수를 나누며 <참 섭섭합니다. 인제 정이 깊어질가 하니 이렇게 갈라지게 되네요.>라고 하자 김병화동지는 나의 손을 힘있게 잡아주며 <임직시간은 제한있지만 우정은 영원할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아직 중국작가협회 부주석 직무는 그냥 있으니 전국회의때면 종종 만날수 있을거라고 하였다. 결혼후 전보다 훨씬 더 젊고 이뻐진 철응주석은 주석대에서 내려온 후에도 눈굽은 찍으며 <김서기 말씀이 너무나 심금을 울리네요.>라고 했다.

2

김병화동지는 올해 66주세이다. 1965년에 대학을 졸업한 김병화동지는 오래동안 대학에서 철학교수, 책임자로 사업하다가 1990년부터 2000년 9월까지 근 10년간 중공상해시위 상무위원 선전부장으로 있다가 그해 10월 15일에 중국작가협회 당조서기로 발령받아왔다. 그때 김병화동지도 자기가 중국작가협회에 가 사업하게 될줄은 생각지 못했다고 했다. 정식 발령이 내리기전 중앙조직부 지도자는 김병화 동지를 데리고 당시 중국작가협회 주석이지만 장기간 병석에 누워있는 파금한테 가 “이 동무를 중국작가협회사업을 주관하는 책임자로 보내려 하는데 어떻겠는가”고 의견청취를 하니 파금은 제꺽 김병화동지의 두손을 잡으며 동의한다고 표시했단다. 함께 상해에 있으며 파금도 김병화동지의 래력과 능력을 잘 알고 있었던것이였다. 이렇게 되여 김병화동지는 생소한 작가협회사업을 주관하게 되였다.

다년간 선전부장으로 있으며 신문, 출판, 문화사업을 령도해온 김병화동지는 아주 빨리 작가협회사업에 적응되였을 뿐만 아니라 창발성적으로 작가협회사업을 이끌어 나갔다. 그는 우선 중국작가협회가 언제든 작가들이 찾아와 <몸을 녹일수 있는>  따뜻한 집이 되여야 하며 작가협회기관 일군들은 작가들이 믿어줄수 있는  친인과 벗이 되여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번마다 전국회의에 참가하거나 작가협회에 갈 때면 거의 모든 일군들이 너무나 친절하고 착실하여 고맙다고 감사를 드리면 작가협회일군이 하는 말이 김병화동지가 온후부터 이렇게 하도록 엄격히 요구한다고 하였다. 솔직히 오랜분들의 말에 의하면 지난날의 중국작가협회는 이렇지 못하였으며 작가들간의 정도 이렇게 깊지 못하였다고 했다.

김병화동지는 중국작가협회사업을 주관하면서 작가들을 위하여 많은 실제적인 사업을 하였다.  그는 중국주류문단의 번영과 발전을 위하여 로심초사하였을 뿐만아니라 편벽한 서부지구와 변강소수민족지구 문학사업의 번영과 발전을 위하여서도 커다란 심혈을 기울렸다. 그는 중국의 소수민족문학은 중국주류문학의 중요한 구성부분이라고 강조하면서 자기가 친히 소수민족문학사업을  주관하고 소수민족지구 작가들의 의견을 참답게 듣고 구체문제해결을 위하여 실제적인 조치들을 대기도 하였다. 중국작가협회에서는 국가민족사무위원회와 손잡고 해마다 전국소수민족문학번역회의를 소집하고 김병화동지가 친히 회의를 사회하면서 소수민족문학창작과 번역사업경험을 교류하고 존재하는 문제를 연구분석하면서 민족문학창작 및 번역사업의 번영과 발전을 도모하기에 힘썼다. 이러한 관심과 중시는 여러 면에서 효력을 과시하였다. 중국작가협회산하 로신문학원에서는 소수민족문학 작가와 번역인재를 양성함에 있어서 학원수를 증가하고 교수내용을 보다 다채롭게 하도록 하였으며 소수민족작가들이 사회를 료해하고 사회와 접촉할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마련해주도록 하였다. 이로하여 많은 소수민족작가들이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보고 처음으로 수도 북경에 와보고 처음으로 연해지구에 가보고 처음으로 5성급 호텔에서 자보고 처음으로 산해진미를 먹어보는 감격적인 이야기들을 수두룩히 남기였으며 조국의 개혁개방 30년의 위대한 성취를 자기의 몸으로 체험하게 하였다. 중국작가협회에서는 자금까지 대여주며 여러모로  소수민족지구 작가협회사업을 지지해주고 소수민족모어창작을 고무하였으며 소속 잡지사와 출판사들에서 소수민족모어창작 작품번역량을 대폭 늘여 발표하고 출판하게 함으로서 중국주류문단과의 교류를 가속화하였다. 지난해부터는 중국작가협회 8천여명 회원들에게 소속 신문과 잡지를 무상으로 주문해주고 있다. 인구가 적은 소수민족 문학인재양성과 회원가입, 문학상 수상 등 면에서 언제나 푸른등을 켜주며 전국 55개 소수민족이 모두 자기의 작가와 회원을 가지고 있도록 대책을 대였다.    

김병화동지는 가는 곳마다 기층작가협회와 작가들을 위하여 대변하였다. 2007년 9월에 신강위글자치구에서 전국소수민족문학번역사업회의를 할 때에 자치구당위와 정부에서 차린 연회석상에서 김병화동지는 중공중앙정치국 위원이며 신강위글자치구 당위서기인 왕락천(王乐泉) 동지에게 신강위글자치구작가협회가 경제면에서 어려움을 겪고있는것 같은데 왕서기께서 많이 보살펴주기를 바란다고 하자 왕락천동지는 <중국작가협회 김서기가 여러분들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는데 어떻게 듣고만 있겠는가>고 하면서 당장에서 자치구작가협회에 해마다 50만원씩 해결해주도록 하겠다고 표시하였다. 이에 우리는 자기일이런듯 기뻐하며 뜨거운 박수로 환영과 감사를 표하였다. 신강작가협회주석은 너무나 놀랍고 뜻밖이여서 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왕서기는 또 익살스럽게 “이 기회에 다른 부문에서도 돈을 달래서는 안되며 작가협회에 내려가는 경비를 문련에서 뜯어내서도 안된다”고 하여 연회에 참석한 작가들의 즐거운 웃음을 자아내였다. 신강작가협회는 아직 문련에 소속되여 있기에 경비가 모두 문련의 회계과를 거쳐야 했던것이다. 왕락천동지가 자기가 앉은 상의 손님들에게 돌아가며 술을 권할 때에 내가 <왕서기께서 이처럼 작가협회사업을 지지해주시니 우리도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같은 작가협회일군으로서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하니 왕락천동지는 <조선족은 문화가 발전한 민족입니다. 많은 면에서 우리를 앞서가고 있지요.>라고 하는것이였다. 그해부터 신강위글자치구 작가협회에서는 정부로부터 해마다 50만원씩 해결받게 되여 신강의 문학사업이 전에 없는 발전을 가져오게 되였다. 하여 신강작가협회주석들은 중국작가협회에서 여는 회의때마다 이것은 김서기공로라고 감격해하였다. 김병화동지는 문학사업차로 산동성에 갔을 때에도 산동성위 서기한테  작가협회사업을 보다 잘 지지할것을 건의하였다. 그후 산동성에서는 성작가협회주석단 겸직부주석들도 임직기간에 정치경제면에서 부청급대우를 받도록 해주었다. 겸직부주석들이 부청급대우를 받는다는것은 전국에 둘도 없는 규례를 창조한것이였다. 다른 지구 작가협회주석들은 이런 인심을 고무하는 이야기들을 들을 때면 김서기가 자기네 고장에도 한번 내려왔으면 좋겠다고 우스개를 하였다. 

전국 각 성, 시, 자치구 작가협회책임자들은 김병화동지가 중국작가협회사업을 주관한후 전국의 문학창작사업에 보다 생기발랄한 국면이 나타났으며 전보다 훨씬 조화로운 문단이 형성되였다고 입을 모았다. 소수민족지구 작가협회책임자들은 김병화동지가 소수민족문학사업을 친히 주관한후 소수민족문학사업은 전례없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였으며 이로하여 무한한 고무와 편달을 받게 되였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3

    내가 김병화동지를 알게 된것은 2년 남짓한 시간밖에 안되지만 김병화동지의 세련된 사업능력, 드높은 사업책임심과 성현다운 고매한 덕성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으며 두터운 우정을 맺게 하였다.

2006년 8월 내가 작가협회사업을 주관하게 된후 처음으로 중국작가협회에서 소집하는 회의에 참석하게 되였다. 나는 철응주석의 소개로 중국작가협회사업을 주관하는 김병화동지를 만나뵙게 되였다. 그의 사무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서 김병화동지는 이미 다른 사람을 통하여 내가 일보사에서 <착오>를 지고 작가협회에 오게 된것을 개략적으로 알고있는것 같았다. 나는 실사구시하게 회보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내가 당기관보에서 작가협회에 오게 된 경위를 낱낱히 이야기하였다. 김병화동지는 나의 아야기를 듣고 미소를 지으며 <문제의 근원은 동무한테 있지 않지만 일은 일보사에서 생겼으니 사장이 책임을 회피할수는 없지.>라고 하는것이였다. 대도시의 큰 신문사를 령도해온 오랜 선전부장출신이라 시비가 분명했다. 그러면서 김병화동지는 함께 작가협회사업을 하게 되여 기쁘다고 하면서 자기가 작가협회에 오게 된 경위도 스스럼없이 이야기해주는것이였다. 그가 선전부장출신이여서 그런지 이야기를 나눌수록 말이 통했고 감정이 통했다. 오래간만에 마음이 통하는 지도자와 이야기를 나누니 마음이 후련해났다. 김병화동지는 일보사 사장이 작가협회에 와 일하기는 전국적으로 처음인것  같다면서 작가협회에 오니 어떤 감수가 있느냐고 물었다. 당의 언론기구는 규률성이 강하고 정책성이 높지만 회원제를 실시하는 작가대오는 작가마다 개성이 강하고 상대적으로 자유화경향이 많아 내리먹이는 행정식으로는 잘 통하지 않으며 많이 토론하고 협상하며 작가들과 마음을 주고 받으며 벗으로 사귀여야 작가협회사업을 잘 할수 있을것 같다고 하니 김병화동지는 아주 찬성하면서 작가협회사업은 자기로서의 개성과 특성이 있으니 당정기관의 사업작법을 그대로 옮겨와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번 대화를 통하여 나는 전국문단과 소수민족문단 상황 등 많은것을 처음으로 료해하게 되였고 새로운 리치를 깨닫게 되였으며 작가협회사업에 점차 마음을 붙이게 되였다. 그번 회의기간에 중국작가협회주석단에서는 나를 전국위원으로 보충선거 하였고 자격이 모자라지만 사업수요로 1년후에 나를 중국작가협회 회원으로 받아주기도 하였다.

연변작가협회제8차 회원대표대회를 앞두고 한때 연변문단에서는 작지 않은 풍파가 일어났었다. 작가들은 작가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해당부문 일부 책임자들의   사업작법에 반발하여 선후 두차례 수십명 작가들이 련명으로 주당위서기에게 편지를 보내는 일이 발생하였으며 연변작가협회 8기주석단구성문제를 둘러싸고 시야비야로 벅적거렸다. 대체로 세가지 부동한 견해들이 있었는데 이런 문제를 잘 풀어나가지 않으면 작가대표대회에서 당위의 의도에 어긋나는 큰 이변이 일어날수 있는 상황에 처해있었다. 해당부문에서는 작가들에 대한 설복해설사업을 꾸준히 하는 한편 중국작가협회에 연변작가협회의 상황을 회보할 필요성을 느꼈다. 나는 김병화 동지에게 전화로 대표대회의 준비상황과 당면에 부딪치고 있는 문제점들을 간단히 회보하면서 북경에 들어가 중국작가협회의 지시를 듣고 싶다고 하였다. 김병화동지는 지시라고 할것은 없지만 함께 토론은 해보자고 하였다. 하여 나와 주당위선전부 간부처장이 함께 북경으로 떠났다. 북경에 도착하여 우리가 김병화동지에게  연변작가협회 제8차회원대표대회 준비상황을 회보하겠다고 하니 김병화동지는 집에 있는 당조성원과 주석단성원들을 불러다 함께 듣자고 하면서 해당 책임자들을 모두 불러왔다. 김병화동지는 회보를 듣고나서 작가협회의 사업은 당정기관과 달라 보다 세심한 사업이 필요하며 작가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작가들과 많이 협상하여야 했었는데 일이 이미 이렇게 되였으니 당위의 권위성도 확보하고 작가들의 의사도 존중할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면서 지난날의 차액선거(差额选举)를 그만두고 정액선거(等额选举)를 하는것이 어떻겠는가고 제의하였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보통 차액선거를 하여 민주를 충분히 발양해야 하지만 특수상황에서는 정액선거도 할수 있다는것이였다. 토론을 거쳐 우리는 그 의견을 접수하기로 하고 돌아가 주당위에 회보하기로 하였다. 중국작가협회에서는 연변작가협회 제8차회원대표대회 준비진전을 아주 관심하였으며 대표대회가 열릴 때에는 중국작가협회 당조성원이며 서기처서기인 장건동지를 파견하여 참석시켰다. 중국작가협회, 주당위와 대표들의 공동한 노력으로 대표대회는 순조롭게 열렸으며 주당위에서 내놓은 주석단후선인들도 기본상 순조롭게 선거되였다. 중국작가협회와 주당위에서는 선거결과에 기본상 만족해하였다. 이튿날 철응주석과 김병화서기가 메시지를 보내와 연변작가협회 제8차회원대표대회가 순조롭게 열린것을 축하하고 나의 당선을 축하하였다.

이로부테 나의 작가협회사업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였으며 중국작가협회와의 접촉이 잦아지고 김병화동지를 만날 기회도 많아지게 되였다. 나는 북경에 갈 기회가 있게 되면 철응주석과 김병화동지를 찾아 사업정황을 회보하고 중국문단이 돌아가는 새로운 정황들을 료해하였으며 사업에 도움되는 많은 조언들을 듣군 하였다. 그때마다 김병화동지는 작가들이 근간에 출판한 서적들을 내주기도 하고 햇차라며 자기에게 있던 록차, 우룡차들을 내주기도 하였다. 하여 우리 직원들도 김병화서기가 보내준 차들을 종종 맛볼수 있었다, 2007년 9월 중순이였다. 내가 신강에서 열린 전국소수민족문학번역사업회의에 참가했다가 북경에 돌아와 중국작가협회초대소에서 하루밤 묵게 되였다. 이튿날 내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오전 9시에 작가협회에서 대기시켜준 차를 타고 공항에 나가려는데 김병화동지의 비서가 전화를 걸어와 김병화서기가 나더러 좀 기다리라 한다는 것이였다. 어제저녁에 김병화서기가 내 침실에 와 한시간남짓 혀물없이 아야기를 나누다 갔는데 채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는가? 15분가량 지나 김볗화동지가 급급히 내 침실에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월병 두곽이 들려져있었다. 이제 일주일이 지나면 추석인데 이 월병을 갖고가 맛을 보라는것이였다. 알고보니 김병화동지가 아침일찍 친히 한 5셩급호텔에 가 사온 고급월병이였다. 너무 일찍하여 호텔상점이 문을 열지 않아 기다리다보니 이렇게 늦어졌다는것이였다.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나는 김병화동지의 성의에 감격되여 목이 꺽 메였다. 성부장급 고급간부가 지방의 자그마한 일군한테 이런 걱정을 다해주다니. 나는 김병화동지의 두손을 꼭 잡고  연신 사의를 표했다. 김병화동지는 미소를 지으며 친구끼리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의 비서는 가만히 누구한테나 다 이러는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날 북경을 떠나오는 나의 마음은 하루종일 평온하지 않았다. 이번 추석을 맞으며 우리 직원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김병화동지가 보내준 고급월병을 맛보게 되였다.

2007년 6월말 나는 중국작가대표단 부단장의 신분으로 중동 아랍나라들을 방문하게 되였다. 북경에 도착한 날 저녁 김병화동지는 중국작가협회당조를 대표하여 몇몇 당조성원들과 함께 작가협회부근의 한 호텔에서 연회를 차려 우리 대표단 성원들을 환송하였다. 그때에야 나는 해당일군한테서 내가 중동방문대표단 부단장이 된 경위를 알게 되였다. 해당부문에서는 처음에는 대표단일행이 모두 5명이여서 부단장을 둘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김병화동지가 대표단일행 자료를 심사할 때에 허룡석도 지방작가협회주석인데 부단장은 돼야 하지 않겠는가고 했단다. 아마 해당일군들은 대표단인원도 적거니와 나의 행정급별이 부단장이 될 자격이 안된다고 고려했을수도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김병화동지는 행정급별만 볼것이 아니라 전국43개 단체회원책임자는 모두 동등한 대우를 해줘야 한다고 했단다. 그러잖아도 새로 올라와 력사적 정황을 잘 모르는 일부 성급 단체회원 책임자들이 지구급인 연변이 어떻게 성급작가협회만 들수 있는 중국작가협회 단체회원에 가입했느냐고 이의를 갖고 있는줄 나도 여러번 들었으니 김병화동지가 듣지 못했을리는 없었을것이였다. 하여 내가 섭섭해하지 않고 연변작가협회가 섭섭해하지 않도록 이처럼 뒤에서 세심히 처사해주는것이리라. 마치 다심한 어머니가 작고 여린 막둥이가 여러 형들의 업심을 당하여 마음에 상처라도 받을가봐 사랑을 더 쏟아붓듯이. 나는 모태주병을 들고 김병화동지한테 술 권하러 건너갔다. 김병화동지는 주량이 작아 포도주를 마시고있었다. 나는 복무원더러 작은 잔을 가져오게 하여 모태주를 철철 넘치게 부어드렸다.                     

 <이는 저의 성의이자 연변조선족작가들 아니 전국조선족작가들의 성의입니다. 하고 싶은 모든 말이 이 술잔에 담겨져있으니 이 잔을 들어주십시요.>

김병화동지는 <부단장이 주는 술은 마셔야지.>하면서 단모금에 잔을 비웠다.

2008년 5월의 어느날이였다. 북경에서 오는 전화별이 울렸다. 전화를 받아보니 뜻밖에도 김병화동지였다. 그는 열정적으로 문안을 하고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중국, 한국, 일본 세 나라 작가협회에서 협상을 거쳐 올해부터2년에 한번씩 동아세아문학포럼을 갖기로 하고 각 나라에서 위원을 내오기로 했습니다. 중국측 위원으로 허주석도 넣기로 했는데 의견이 없습니까?>

<의견이라니요? 대단한 영광인데요. 참 고맙습니다. 자그마한 연변작가협회를 이렇게 돌봐주셔서…>

중국측 위원이 10명, 20명일 경우 연변작가협회를 넣어주어도 고마운 일이겠는데 후에 알고 보니 중국측 위원이 모두 4명뿐인데 내 이름을 넣어주었던것이였다. 이는 중국작가협회에서 연변작가협회를 그만큼 념두에 두고있다는 것을 말해주는것이 아니겠는가. 하여 나는 중국측 위원의 신분으로 지난해 국경절기간에 철응주석을 단장으로 하는  중국작가대표단에 들어 한국에 가 <한일중제1회동아시아문학포럼>에 참가하였으며 <네트웨크문학과 그 발전전망>이란 론문을 발표하게 되였다. 이번 대표단에는 막언, 소동, 손혜분 등 중국문단의 거두 10여명이 참가하여 한국문단을 들썽하였다.

2년이란 시간은 길지 않지만 사업가운데서 맺어진 우정은 갈수록 깊어갔다. 지난해 3월에 복건성 복주에서 중국작가협회 제7기전국위원회 제3차전체회의를 할 때에 내가 김병화동지한테 가만히 물어보았다.

<듣자니 금년내에 퇴직하신다는 말들이 있던데 사실인가요?>

김병화동지는 사실이라고 하였다. 나는 <많은 작가들과 회원단위 책임자들이 김서기가 더 하셨으면 하는데  더 하실 방법은 없는가>고 물었다. 그는 <이젠 나이도 많고하니 조직의 배치에 복종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소조토론 때에도 많은 위원들이 회의내용을 토론하다도 김병화동지의 리직문제를 둘러싸고 열렬히 의론하기도 했다. 어떤 위원은 김병화서기가 안하면 그만큼한 령도를 찾기 힘들다고 했고 어떤 위원은 작가협회위원들이 련명으로 중앙에 편지를 보내여 김병화동지가 몇년을 더 사업할수 있게 해달라고 제기하면 어떨가고도 했다. 어떤 로작가는 울먹울먹하면서 우리는 절대 김병화서기를 보내서는 안된다고 격동돼 하기도 했다. 내가 중국작가협회 당조성원이며 부주석인 고홍파동지에게 <위원들이 모두  김서기의 리직을 두고 저렇게 섭섭해 하는데 김서기가 사업을 더 하게 할수는 없는가>고 물었더니 고홍파동지는 <김서기도 이젠 70이 가깝습니다. 그분도 너무 피로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은 다 같으나 김서기도 이젠 좀 쉬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했다. 그말을 듣고보니 과연 그렇기도 했다. 어느 부문보다도 개성이 강하고 복잡다단한 문단의 사업을 8년남짓 하였으니 사실 얼마나 피곤했겠는가. 모름지기 속도 많이 썩였을것이고 근심걱정도 많았을것이였다. 일을 잘 하고 많이 할려다보면 스트레스도 그만큼 많이 쌓였을것이였다. 또 한면으로 생각해보면 우리 욕심만 차릴 일이 아니였다. 김서기가 만년에 건강하게 유쾌히 오래 사는것이 또한 우리의 바램이 아니겠는가.

이번기 전체회의에서 전국위원들이 그토록 걱정하고 섭섭해하던 일이 현실로 되였다. 김병화동지는 8년 4개월동안 중국문단을 위하여 로심초사하다 부끄럼없이 자리를 내게 되였다. 하지만 시장경제화 개혁개방시기에 김병화동지처럼 뚜렷한 사업성취로, 고매한 덕성으로 군중들의 애대를 받으며 자리를 내는 간부도 흔치는 않을것이다. 중앙과 지방, 부문과 단위들에 모두 김볗화동지와 같이 능력있고 덕성높은 간부들이 자리잡고 앉아 사심없이 일심정력 당의 사업을 위하여 일한다면 우리 나라의 현대화는 더욱 가속화될것이며 여러 민족 인민들은 마음편히 즐겁게 살아갈것이다. 

훌륭한 지도자를 모시고 함께 일한 시간은 길지 않지만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러 존경하고 싶은 김병화동지가 리직후 쾌락하고 건강하기를 기원한다. 우리들 사이에 맺어진 우정의 내음은 오래도록 내 가슴속에서 감돌것이다.

새로 부임된 리빙동지는 1949년 11월 생으로 흑룡강성사람이다. 그는 길림대학졸업생이며 재직박사연구생학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선후로 공청단중앙, 중앙판공청에서 사업하였으며 중공중앙선전부 부비서장, 국무원신문판공실 부주임 사업을 력임하였다. 중국작가협회와 전국의 문단은 새로 부임된 리빙동지에게 새로운 기대를 걸고있다.

 

2009년 <연변문학> 제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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