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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중시계로
허룡석
먹고
지난 세기 70년대말은 전국이 대동란의 <문화대혁명>을 금방 결속 지은터라 지방에서는 일용품과 부식품이 아주 결핍하였다. 상대적으로 수도 북경은 전국의 그 어느곳 보다 나았다. 그런 관계로 내가 중앙민족대학에 입학한후 원래 사업하던 공사의 간부들과 고향사람들, 친척들로부터 이런저런 물건 사달라는 부탁을 적지 않게 받아왔다.
한번은 입학 첫학기에 남의 부탁을 받고 물건사러 왕부정백화상점에 간적이 있었다. 나는 백화점매장을 돌아보다가 우연히 회중시계를 진렬해놓은 매장을 지나게 되였다. 회중시계를 보니 아버지가 떠오르면서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평범한 농사군으로 살아오신 아버지는 일생동안 시계라곤 차보지 못하셨다. 그래서인지 회중시계를 아주 부러워하셨다. 한번은 우리 집에 마실오신 이웃마을 한 로인의 회중시계를 받아쥐고 이리저리 만져보시고는 시간이 잘 맞냐 값이 얼마냐고 물으시며 놓기 아쉬워하는것을 본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회중시계를 살 형편이 못되였으므로 마음 아픈대로 그렇게 지나갔다. 그런데 멀리 집을 떠나 수도 백화점에서 회중시계를 보고나니 나의 마음은 다시금 설레였다. 아버지 생전에 꼭 저 회중시계를 사드리고 싶었다. 값을 보니 가장 눅은거라야 25원이였는데 그것도 길림에서 만든것이였다. 은빛케스로 만들어진 시계는 꽤나 정교해보였다.
그때 나의 호주머니에는 대학에 간다고 친척들과 마을분들이 한푼두푼 쥐여준 돈이 100원가량 있었다. 그 돈은 어쩌면 내가 대학졸업할 때까지 아껴 써야 할 밑천이였다. 집에서는 돈을 부쳐올 여력이 없었다. 시계를 사느냐 마느냐 그 자리에서 한참 바장이다 나는 끝내 발길을 돌리고말았다. 아직 돈 쓸 일이 많을텐데 하고 생각하니 주저되지 않을수 없었다. 이후 사업에 참가하여 첫 로임으로 사드리자 하고 서운한대로 학교로 돌아왔다. 하지만 잠자리에 누워서도 그 정교한 시계와 년로하신 아버지 얼굴이 번갈아 떠오르며 좀처럼 잠을 이룰수 없었다.
이미 70고개를 넘기신 아버지가 늘 건강하실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몇년 공부하는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알랴. 일이 생겼을 때 후회하지 말고 건강하실 때 몇년만이라도 즐겁게 해드리자. 돈이야 없으면 안쓰면 되지.
반달후 또 남의 부탁으로 그 백화점에 다시 갔을 때 나는 용단을 내리고 그 회중시계와 시계줄을 샀다. 그길로 우전국에 가 나무함에 잘 포장하여 편지와 함께 집에 부쳐보냈다.
일주일후 녀동생한테서 편지가 왔다.
“…아부지는 그 시계를 받고 너무 반가와 그날 저녁에만도 몇번이나 꺼내 보셨는지 모르오. 이튿날에는 밖에 나가셔 보는 사람마다 시계를 꺼내보이시며 아들이 북경에서 부쳐왔다고 자랑하셨소. 집에서 시계를 꺼내보실 때면 또 ‘걔가 돈이 없겠는데 이 귀한걸 사보내다니’ 하고 마음 아파하시며 공돈을 팔았다고 나무람하시기도 하오. 하지만 아부지 그렇게 반가와하시는 걸 보면 잘 사보낸 같소. 오빠 쓸 돈이 모자라겠지만…”
녀동생의 편지를 받고나니 나는 안도의 숨이 후 나갔다. 아버지가 그처럼 반가와 하신다니 얼마간의 효도를 한것 같아 기분도 즐거웠다.
나는 이듬해 여름방학에 집으로 나오게 되였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록 아버지가 시계를 꺼내보시는 양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나는 궁금해서 어느날 녀동생을 보고 가만히 물었다.
“어째 아부지 시계 보시는 양이 없니?”
녀동생은 머밋거리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혹 잃었거나 고장난거니?”
“아니…저…”
“좀 제대로 말해봐라.”
“아부지 절대 말하지 말라 하셨는데…아부지…그 시계를 팔아버렸소…”
“뭐라구? 그 시계를 팔았다구? 왜? 돈이 바빠서?”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그 시계때문에 말썽이 생겨서…”
아버지가 그 시계를 받고 너무 반가와 남들과 자랑을 하시다보니 온 마을 사람들이 그 일을 다 알게 되였다. 그런데 년말에 생산대에서 보조호를 토론을 할 때 그 시계때문에 풍파가 일어났었단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년로하시고 녀동생도 병때문에 일을 제대로 못하다보니 내가 대학에 간후 우리 집은 생산대의 보조대상이 되였다. 그해 겨울에도 보조대상을 토론할 때 일부 사원들이 우리 집을 계속 보조호에 넣는것을 반대하더란다. 보조대상이 어떻게 그 비싼 회중시계를 차고 다닐수 있느냐 하는것이 주요 리유였단다. 생각밖으로 그중에서도 나와 가장 가깝게 친하던 친구의 어머니가 제일 반기를 들고 나오더란다.
“하나뿐인 아들이 집도 돌보지 않구 대학에 갔으문 됐지 왜 우리가 그 뒷시발 들어야 함둥? 그렇게 구차하다는 집에 분이 고급시계랑 차구 다닌다는데 말이나 됩둥? 이 동네 보조를 안받아두 시계차구 다니는 분이 몇이나 있습둥?”
아버지는 송곳방석에 앉은 기분이였단다. 너무 미안하고 송구스러워 아버지는 연신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이제부턴 우리를 보조대상에서 빼소. 보조호에 넣지 마소…”
그래도 다수 분들이 나서 “다 빤이 보는 일인데 용섹이 무슨 돈이 있어 시계를 사보냈겠느냐. 효도하느라 그랜거지. 그집 형편을 모두 모르는것두 아니니 그냥 보조호에 넣자.”고 하여 그해에도 보조호에 들어가게 되였단다. 보조호에 들면 한해동안 식량대금을 면제받을수 있었다.
“아마 오빠만 대학에 가고 그 집에서 아들 몇이라도 하나도 대학에 못가니 질투나 더 하는것 같습데…”
녀동생이 여간 분해하지 않았다.
그 풍파가 있은후 아버지는 보조를 받으며 시계를 차고 다니시기 너무 미안하게 생각되여 어느날엔가 언제부터 그 시계를 욕심내던 대장의 아버지에게 23원에 팔아 그 돈을 몽땅 생산대에 식량대로 들여놓으셨단다.
나는 녀동생의 말을 듣고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보조 주기를 반대했다는 사원들도 나무람할수 없었다. 제 공부하러 가면서 다른 분들한테까지 페를 끼친다는것은 참 미안한 일이였다. 하지만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어머니가 나서 제일 반대하더란 이야기는 많이 섭섭하게 들렸다.
생산대의 보조를 받는것이 미안하여 애지중지하시던 시계를 파신 아버지심정은 얼마나 착찹하셨을가. 나는 평생 시계를 차보시지 못한 아버지 원을 꺼드리려는 생각만 했지 그로하여 일어날 풍파는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아버지를 생각한다는것이 되려 심려만 끼쳐드린 셈이다. 후, 학교를 졸업하고 사업에 참가한후 다시 사드리지.
하지만 내가 졸업하기전에 아버지는 중풍에 걸리셨다. 우리가 결혼한후 우리 부부의 로임이 농촌에 계시는 부모님들의 식량대와 약값으로 들어가고 아이까지 키우다보니 다시 회중시계를 사드릴 여유가 없었다.
80년대초에 이 회중시계사건을 종자로 나는 짬짬이 <석순령감의 숙원>이란 단편소설을 써 연변인민출판사에서 꾸리던 <아리랑>문학지 15기에 발표하여 원고료 85원을 받았다. 회중시계 세개반을 살 돈을 번것이다. 하지만 더는 회중시계를 살 필요가 없게 되였다. 아버지는 전해에 이미 세상을 뜨셨다.
아아, 회중시계를 제대로 차보시지도 못하고 쓴소리만 들으시다 세상뜨신 아버지…
<연변녀성> 2011년 제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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