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카테고리 : 기본카테고리
부주장을 <비판>하다
허룡석
모택동주석의 후계자로 9차전국당대회 <당규약>에까지 명문으로 명확히 규정되였던 <위대한 부통수> 림표가 정변음모가 들통나 쏘련으로 도망치다가 1971년 9월 13일에 몽골 원둘한에 떨어져죽으면서 세상을 크게 놀래웠다. 하지만 국내적으로는 오래동안 비밀에 붙혀지다보니 인민들은 우리 나라에서 그런 초풍할 사건이 생긴줄도 감감 모르고 있었다. 림표의 죄행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중앙 1호문건이 <막단행정단위>인 농촌 생산대에까지 내려올 때는 1974년 초봄이였다.
정치돌출을 부르짖던 당시에 중앙으로부터 공사에 이르기까지 림표사건에 관한 중앙문건을 농촌 생산대 사원들한테까지 전달하는것이 가장 큰 정치였다. 하기에 농촌 가는 곳마다에서는 해당 중앙문건전달에 열을 올렸다.
그때 대대당지부서기로 부임된지 얼마 안되는 나는 열정에 끓어넘쳐 각 생산대를 돌아다니며 중앙문건을 직접 전달하였다. 대대소재지 세개 마을에서의 문건전달이 끝나자 나는 대대마을과 5리가량 떨어져있는 산골생산대인 제5생산대에 올라가 사원들한테 중앙문건을 전달하게 되였다.
점심을 치른뒤 내가 연길에서 내려온 주공작대의 김동무와 함께 눈길을 헤치며 5대로 올라가 보니 남녀사원들이 벌써 널직한 한 사원의 집에 빼곡히 모여있었다. 문화대혁명때 언제나 모주석의 곁에 붙어서서 모주석어록을 달랑달랑 흔들어대던 붉디붉은 <후계자>가, 그처럼 <영원히 건강하시라>고 전국인민들이 말끝마다 공경스럽게 개여올리던 <위대한 부통수>가 외국으로 도망치다 남의 나라에 떨어져 죽었다니 당시에 그보다 전국인민들을 놀래운 더 큰 정치가 없었다. 하여 사람들마다 그 자세한 내막을 알고싶어 하던차에 중앙문건이 내려왔다니 운신할수 있는 사람은 거의 다 모인터였다.
우리는 시간맞춰 회의를 시작하였다. 회의질서는 여느때보다도 좋았다. 모두들 도정신해 중앙문건에 귀를 기울이였다. 내가 중앙문건을 전달하기 시작한지 10분가량 지났을가 할때 누군가 웃방문을 떼며 들어오는 인기척이 났다. 지각한것이였다. 그런데 그 사람이 들어오자 웃방에서는 말벌둥지가 터진듯 어찌나 떠들어대는지 도저히 문건을 계속 읽어 내려갈수가 없었다. 정주간에 앉았던 아낙네들마저도 뉘집 아바이 저렇게 주새없느냐고 수근거리기도 했다. 나는 문건을 읽다말고 웃방에 대고 좀 조용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러자 웃방에서는 밥물잦듯 금시 조용해졌다. 내가 다시 중앙문건을 읽기 시작하여 5분가량 지났을가 한데 웃방에서는 또다시 벌렁벌렁 죽가마가 끓기 시작하였다. 문건전달을 중지하면 웃방에서 눈치를 채겠는가 하여 읽기를 중지하고 한참 기다렸으나 조용해지기는 고사하고 그 시간을 리용하여 더 떠들어댔다. 가만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니 그 무슨 제정때에 소장사하던 이야기까지 겯들어지고 있는것같았다. 이게 어느 때라고 저따위 소리까지 한단 말인가. 각 생산대를 돌아 다니며 문건전달을 해도 이렇게 떠드는 사원들이란 없었다.
나는 참다못해 웃방 문설주로 다가가 방안을 들여다 보며 음성을 높였다.
<웃방에서는 왜 이렇게 떠듭니까? 좀 조용하면 안되겠습니까? 이제 늦게 온 분이 어느 분이십니까?>
그러자 방 가운데 자리잡고 앉은 키꼴이 훤칠하고 얼굴이 길죽한 로인 한분이 웃음띤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자진해나섰다.
<나외다.>.
<늦게 오신것만 해도 그런데 들어오시자마자 이렇게 떠들면 어떻게 합니까? 지금 무슨 문건을 전달하는지 모르십니까?>
<알구 있지. 아주 중요한 중앙문건이지. 헌데 오래간만에 어쩌다 옛친구들을 만나다보니 그렇게 됐구만. 이젠 안떠들테니 날래 문건을 계속 전달하오..>
한 마을에 살면서 대체 며칠이나 못보았기에 저렇게 떠든단 말인가. 그런데 김동무가 뭐가 짚히는것이 있는지 목을 빼들고 방안을 들여다 보더니 시무룩히 웃는것이 아닌가.
나는 음성을 가다듬어가며 계속하여 중앙문건을 전달하였다. 중앙문건이 워낙 길던터라 절반정도밖에 전달하지 못했는데 노루꼬리만한 겨울해가 서산에 기울어졌다.
<이보시오. 지부서기, 내 의견 좀 말할가? 이젠 저녁때가 다 된것같으데 문건전달은 그만하구 정지칸의 애기네들이 집에 가 저녁밥을 짓게 하는게 좋잖을가?>
목소리를 들어보니 보나마나 늦게 온 그 로인의 목소리였다. 저 령감 뭐 이 마을 좌상인가? 정주간에 앉은 아낙네들도 그 소리에는 귀가 번쩍 열렸는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모두들 어서 보내주어 저녁밥을 짓게 했으면 하는 눈치였다. 나는 못본척하고 중앙문건을 계속 읽어내려갔다.
10분가량 지나니 그 로인이 또 께껴댔다.
<이보, 지부서기, 이젠 날이 다 어두워진다이. 중앙문건두 밥을 먹구 계속 전달받는게 좋채일가? 집집마다 돼지죽두 줘야 할게 아니우?>
보아하니 담이 어지간한 로인이 아니였다. 여러 생산대를 돌며 중앙문건을 전달해도 저렇게 감히 중도에 께껴대는 사람은 없었다.
<제일 늦게 오신 분이 제일 먼저 돌아가시겠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돌아갈려면 아바이 먼저 돌아가십시오. 문건전달을 자꾸 방해하지 말구.>
나는 화가 나서 한마디 쏘아주었다.
<내 먼저 가자는게 아니라 밥할 애기네들을 먼저 보내자는게지.>
내가 또 뭐라고 쏘아부치려는데 공작대의 김동무가 나의 바지가랭이를 잡아당겼다. 아직도 전달할 내용이 많으니 저녁후에 계속 전달하면 어떻겠는가고 했다. 우리가 이 생산대로 올라 올 때에는 사원들한테 페를 끼치지 말고 늦어도 한꺼번에 다 전달하고 내려오려 했는데 공작대 김동무까지 이렇게 말하니 나는 그의 말을 존중하지 않을수 없었다. 모두들 저녁을 자시고 두시간후에 이 자리에서 계속 문건전달을 하겠다고 공포하니 사원들은 얼씨구나 하며 분분히 자리를 털고일어났다. 생산대장은 주인집과 의논하고 편하게 우리가 주인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도록 배치했다.
<허허, 나두 밥은 주겠지? 어데 가 먹을가?>
웃방에서 떠들어대던 그 로인이 반죽좋게 웃으며 정주간으로 건너왔다.
(이런 비우장판 령감이라구야. 제집에 가 자시면 될것이지 회의방해만 하다 남의 밥 얻어먹을 소리까지 하구있네.)
내가 그 령감에게 아니꼬운 눈길을 보내며 아랑곳하지 않는데 김동무가 그 로인과 반갑게 인사하는것이 아니겠는가. 아니, 공작대로 금방 내려온 분이 어떻게 이 마을 로인들을 알지? 그 로인과 악수하던 김동무가 시무룩히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이분이 누구신지 모르겠소??>
<이 마을 아바이들두 제가 적지 않게 알구 있지만 이 아바이만은 뉘집 아바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볼부은 소리로 대꾸했다.
<이분이 바로 주에서 공작대를 책임지고 오신 남명학부주장이시오.>
<예? 이분이 부주장 남…?>
나는 금시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문화대혁명때에 타도되였다가 후에 다시 해방되여 부주장으로 있는 남명학이라는 분이 계신다는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눈앞의 이 령감이 그 분일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놀라움과 호기심에 다시 그분의 아래위를 훓어보아도 생김새나 차림새나 큰 간부다운데라곤 없었다. 길에서 만나도 자치주의 큰 간부가 아니라 틀림없이 동네집 아바이로 짐작이 갈 분이였다. 나는 놀라움에 어정쩡하게 그분의 손을 잡으며 사과했다.
<아까는 모르고 욕했는데 죄송합니다.>
<허허, 지부서기 잘못이야 없지. 중앙문건을 전달하는데 친구들을 만나 반갑다구 떠들어댄 내가 잘못이지. 비판받아 싸지 싸. 젊은 서기 패기있다니까.>
남주장은 나의 손을 굳게 잡아주며 오히려 나를 치하해주었다.
알고보니 남명학부주장은 그해 우리 공사에 내려온 주공작대책임자로서 우리 대대에 <점을 잡게> 되였었다. 그는 아무런 통지도 없이 혼자 대대사무실에 찾아왔다가 지부서기가 공작대 분과 함께 5생산대로 중앙문건 전달하러 갔다는 부기원의 말을 듣고 곧추 5생산대로 찾아 올라왔던것이다. 그는 회의장소를 물어 찾아들어왔다가 뜻밖에도 몇십년전의 옛친구들을 만나 서로 인사치례를 하며 떠들다가 나한테 <비판>받았던것이다.
싸움끝에 정이 든다고 그후부터 남명학부주장은 나를 허동무라고 친절히 불러주었고 나도 스스름없이 그를 아바이라고 부르게 되였다.
그때는 현장도 농민들 눈에는 대단히 높은 간부로 보일 때였는데 그보다 더 높은 부주장이라니 농민들은 존경하면서도 슬슬 피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분은 틀거지가 없고 접촉성이 좋아 주동적으로 농민들과 허물없이 사귀였다. 그분은 이신작칙하고 실사구시하면서 우리에게 많은 보귀한 로간부의 우수한 전통을 물려주었다.
그때는 농민들이 농사짓는것이 아니라 대채를 따라 배운답시고 간부들의 행정명령에 의해 농사지을 때였다. 농사지을줄도 모르는 군대표와 반란파출신 간부들이 층층이 올라 앉아서는 언제까지 밭갈이 하오, 언제까지 파종하오, 언제까지 모내기를 하오, 언제까지 비료를 치오 하며 <혁명적>진도만 추구하며 내키는대로 일년농사를 지휘했다. 그럴 때면 남주장은 각 생산대를 돌아다니며 이렇게 말했다.
<청명전에 조이홰지를 하라든가 4월모를 내라든가 하는 그따위 허튼소리를 듣지 마오, 농사란 절기가 있는 법이요. 농사를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는 농민들이 제일 잘아오. 농민들이 제일 적합하다고 생각할 때에 파종하고 모내기하고 비료를 치면 되오. 농사는 우에서 내리는 진도보다도 가을에 먹을 알이 있게 짓는게 상수요..>
그는 우리에게도 우에 정신에만 매달리지 말고 로농들의 의견을 잘 들으며 실제적으로 일하라고 일깨워주군 하였다. 다른 대대에서는 상급의 지시를 높이 받들고 남을 놀래우는 성과를 따내려고 4월 중순 모내기를 했다가 현지회의가 끝난 후에는 얼굼을 맞아 벼모를 몽땅 죽이기도 했다. 우리가 남주장의 말씀대로 실제적으로 일하느라 간혹 우에서 요구하는 진도에 도달하지 못하여 공사의 비판을 받게 될 때면 남명학부주장이 나서서 우리를 두둔해주기도 하였다.
농사는 농민들이 절기에 맞춰 짓는것이지 시도 때도 없는 간부들의 행정명령에 의해 지어지는것이 아니였다. 지금은 그따위 행정명령이 없이도 농민들이 알아서 농사지으니 일도 많이 단축되고 생산량도 훨씬 높아졌다. <혁명을 위하여> 농사짓는다고 떠들어댈 때보다 <자기를 위하여> 농사지을 때에 더 잘 되고 있지 않는가.
지금 돌이켜보면 정치돌출의 그 세월에도 실사구시하게 일해 나가던 남명학부주장과 같은 로간부들의 인민을 위한 사명감과 사업에 대한 책임성에 탄복하게 되며 실사구시하고 이신작칙하는 사업작풍에 머리숙여진다. 동시에 농민들과 한덩어리되여 동고동락하던 그러한 우량한 전통이 그리워진다.
2010년 <로년생활> 제7기
("매진"이라는 필명으로 발표)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