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룡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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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말이사 마다매 쥑여줬지》
2010년 12월 27일 14시 05분  조회:2310  추천:135  작성자: 허룡석

《중국말이사 마다매 쥑여줬지》


허룡석


일전에 고향에 살고있는 사촌형님의 생신이여서 모아산너머 고향마을에 다녀온적이 있다. 사촌형님은 나보다 6살이나 이상으로서 이젠 60중반에 이르렀다. 사촌이라도 친형제가 따로 없는 나로서는 그분을 친형님으로 받들어 모시고있다. 하여 해마다 그의 생신이면 거의 빠지지 않고 다녀오군 했다.

올해 형님의 생신날은 마침 국경절연휴일 기간이여서 여유있게 다녀왔다. 생신날에 형님은 집에다 양 한마리 잡아엎었다. 전에는 룡정이나 연길에 가 고기와 남새를 사다 반찬을 갖추느라 했으나 올해는 사정이 많이 달랐다. 아들며느리는 한국에 일하러 나간지 몇해가 되였고 형수님은 손녀공부때문에 연길에 들어와 집을 잡고있다보니 고향집은 형님 혼자서 지키고 있는 쓸쓸한 형편이였다.

이젠 시내에 다녀올 사람도 없어 편하게 양 한마리 사서 잡은것이란다. 그것도 근년에 마을에 이사온 두 한족이 무상으로 잡아주겠다고 자진하여 나서 그렇게 됐단다. 아마 한족들이 외딴곳에 이사와서 본고장 토배기들과 가깝게 지내려고 팔걷고 나선 모양이였다. 고향에서도 많은 젊은이들과 처녀들, 젊은 아낙네들이 거의다 외국이나 대도시로 돈벌이가는통에 마을집들이 많이 비고 밭이 묵어나게 되여 외지에서 이사온 사람들이 30%가량 된단다. 그것도 한족들이 대부분이여서 청일색 조선족 마을이 점차 한족마을로 변해가고 있었다.

양잡은 수고비를 받지 않겠다니 형님은 미안하여 그 두 한족도 술상에 앉히게 되였다. 그러다보니 전에없이 형님의 생신술상에서도 한어가 더러 오가게 되였다. 그런데 그 한어란 조선말식 한어여서 여간 어색하지 않았다. 그래도 두 한족은 알아듣는지 <어. 어>하며 자주 고개를 끄떡이였다.

<한족들이 많아지면 형님네 한어수준이 많이 늘겠소.> 내가 서글프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

<는다는게 뭐야, 이젠 혀가 다 굳어져서 우리두 조선말을 하는지 중국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두 이 동네 중국말이사 마다매(큰어머니, 즉 우리 어머니) 쥑여줬지.>형님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한자리에 앉아있던 형님과 자별난 친구간인 동네집 형님 한분이 그 말을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생전에 우리 어머니와 아주 가깝게 지내던 분이였다.

<그때 너 엄마 독보조 선전위원하면서 정말 중국말은 쥑여줬지 뭐.>라고 했다. 그 말에 모두들 전에 일들이 생각나는지 하하하 웃어주었다.

어머니의 창조적인 <교수급>한어수준은 시내사람들에 비할바는 못되였지만 그래도 마을사람들은 알아주었다. 세전이벌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우리 마을은 세개 생산대가 함께 자리잡은  150여호 되는 큰 동네였다. 그때는 각 생산대에 한족집 한두호씩 밖에 없어 청일색 조선족 마을이라 할수 있었다. 게다가 그 한족들이 조선말을 잘했기에 조선족들은 한어를 할 기회가 없었다. 당시 마을 어른들 가운데는 한어라면 <니디워디>도 번질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개혁개방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오죽하면 한집에서는 큰아들이 남방에 일하러 갔다가 한족처녀를 데리고 왔는데 떠나갈 때에 시어머니될 분이 손을 저으며 <짜이잰>을 한다는것이 애들이 서로 욕할 때 쓰는 <차우니마>를 불러 한족처녀가 기절해 번져질번 했겠는가.

그런 와중에도 어머니의 한어가 제법이였다. 그때 그 큰 마을에 방아가 두집밖에 없었다. 앞마을쪽에는 우리 집에 있었고 뒤마을쪽에는 박씨성을 가진 집에 있었다. 먹을것이 변변치 못한 세월에 방아쓸 일이 많았다. 마을사람들은 떡가루, 고추가루를 내거나 벼이삭, 돌피이삭 찧을 일이 있으면 우리집부터 찾아 오다보니 방아가 한가할 사이 없었다. 게다가 다른 대대에 속하지만 본고장토배기인 우리 집과 면목을 잘 아는 다리아래 한족 녀인들까지 찾아오다보니 방아공이에 불이 일 지경이였다. 그러다보니 우리 마을에서 어머니가 한족들과 접촉할 기회가 가장 많았다. 그덕이였는지 <니디워디>도 모르시던 어머니의 한어가 날따라 늘어갔다. 한족을 만나면 <츠판라?> (吃饭了?)하고 인사할줄도 아셨고 한족들이 방아찧으러 오면 <니디 바에(방아) 당장?>하시기도 했다. 그러다도 방아가 고장나 쓸수없을 때 하시는 한어가 더 가관이였다. <오널 투당탕 바에살괘 홰라(坏了), 니디 못당장. 취바.> 하면 한족들도 그 말을 알아듣는지 <홰라? 찐탠 못당장?>라고 서운해하며 돌아서기도 했다. 그래도 드살짝이 센 어떤 한족아낙네는 방아가 고장났다는것이 못미더운지 기어코 방아간에 가보고서야 돌아서군 했다. 그러면 어머니가 불쾌해서 <에구 이년덜이 내 못당장이라문 못당장인가 할게지 니디 제누깔루 캔캔러바(看看了吧), 쩬디(真的) 못당장바?> 하시면 한족들은 <쩐디 못당장, 쩐디 못당장.>하며 미안해 했다. 이렇게 <바에 당장, 못당장>이 어머니의 첫번째 <어록>이 되여 어머니가 안계실 때면 우리도 방아찧으러 오는 한족들과 곧장 써먹군 하였다. 한족들도 그 말에 익숙해져 그렇게 말해야 알아들었다.

<문화대혁명>시기였다. 9차당대회가 열리기전에 우리 마을에서 실제행동으로 9차당대회를 맞이한다며 모주석을 노래하고 공산당을 노래하는 주제로 문예공연 경색을 벌리게 되였다. 대대 각 생산대에서 모두 모택동사상문예선전대가 나와야 하는건 물론 로인독보조에서도 절목을 내놓아야 했다.

하루 저녁은 내가 생산대선전대에서의 문예공연연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독보조로인들이 그때까지도 우리 집에서 노래연습을 하고있었다. 아마 우리 어머니가 독보조 선전위원이여서인지 로인들이 자주 우리 집에 모이군 했던것같다. 내가 방에 앉아 얼결에 로인들이 한어로 하는 노래를 들을라니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다시 곰곰히 들어보니 그만 속이 섬찍해났다. 이대로 공연을 나갔다는 큰일 날 일이였다. 내가 방문을 벌컥 열고 정주간을 내다보니 로인들이 두줄로 서서 두손을 량쪽으로 점잖게 흔들며 <댔다뗐다 우리 딸이 엉치따, 했소뺐소 부리…> 하며 아주 엄숙하게 노래부르고 있었다. <당의 은정 영원히 잊을수 없다네>(党的恩情永不忘)란 노래를 한어로 부른다는것이 발음이 억망이였던것이다.

내가 우습기도 하고 어처구니없기도 하여 정주간에 대고 소리질렀다.

<어마이네 지금 무슨 반동노래를 부르구 있슴둥?>

그러자 노래소리가 뚝 그쳤다.사촌형님친구의 어머니가 나를 흘겨보며 화를 벌컥  내셨다.

<에구, 제 무슨 말을 그리 무섭게 하오? 저두 선전대라는게 이 노래두 모르오?>

<모르는게 아니라 발음이 틀려두 형편없어 그래꾸마. 그게 탠따띠따지 (天大地大) 어디 댔다뗐답둥? 그리구 뿌루 당더 언칭따지(不如党的恩情大) 어디 우리 딸이 엉치 땁둥? 허썬하이썬이지(河深海深)어디 했소뺐소둥? ...”

<무스게라우? 우리 그렇게 불렀다구? 에구 이걸 어째…?>

키를 맞춰 줄섰던 로인들이 금시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그네들은 제가끔 나동그라져 온돌바닥을 두드리며 웃어 번져졌다.

<우린 잘 부르느라는게 어쩜 듣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듣긴다우?>

<에구구, 노래를 잘 하자다 반혁메 될번했구만…>

그때는 계급투쟁로선이 살판쳐 무슨 끄트라기라도 잡지 못해 감투를 씌우지 못하는 세월이라 남녀로소 모두가 신경이 팽팽해있을 때였다.

<조선말루 하십지 왜 안되는 한족말루 하느라 그랩둥?>
<야, 우리라구 무슨 하기 좋아 그래겠소. 두가지 말루 하면 점수를 더준대서 그래지. 조선말루는 잘하는게 중국말이 아이돼 이렇게 자꾸 연습하재이우.>

사실 그랬다. 공작대에서는 한 절목을 조선어로만 하면 5점을 주고 한어로까지 하면 10점을 준단다. 조선족마을인데도 한어로도 하라고 점수로 자극했었다. 집체호로 내려온 한족 지식청년들과 공작대에 한족들이 더러 있기때문이란다.

<이것두 저네 엄마 대대학습반에 가 배워다 우리게 배와준게우>

알고보니 우리 어머니가 독보조 선전위원인데다 한어도 그중 잘한다고 로인들의 추천을 받아 대대에서 꾸리는 학습반에 다녀오셨던것이였다.

<거보우, 못가겠다는걸 노친네 기어이 가라던게 …> 어머니가 별명하셨다.

이분들이 울 엄마 반혁명만들 일이 있나. 내가 울 엄마를 위해서라도 로인들의 한어발음을 바로잡아주어야 했다. 그래서 련 사흘간 늦은 저녁이면 로인들의 노래연습을 도왔다. 하여 독보조의 중창은 대대문예경연에서10점을 맞은데다 표양까지 받아 로인들이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발음이 억망인 그대로 나가 불렀더면 어떻게 되였겠는가. 

<댔다뗐다 우리 딸이 엉치따>가 어머니의 두번째 <어록>이 되여 마을사람들의 사사로운 모임에서 웃음을 자아올리는 펌프가 되였다.

이듬해 가을철에 어머니가 터밭 바자굽에 심어키운 말린 박과 호박,해바라기 등을 이고지고 룡정에 가 장을 보게 되였다. 장본 돈으로 어머니는 량식보탬을 하려고 수수쌀 20여근 사가지고 돌아오셨다. 뻐스비 20전이 아까와 어머니는 15리길을 걸어 오셨다. 내가 뻐스를 타고 오실것이지 이 무거운 짐을 이고 어떻게 오셨는가고 나무람하자 어머니는 <오다 군대 둘이 도와줘서 별로 힘 안들었다.>고 하셨다. 알고보니 태평촌에서부터 해방군전사 두명을 만나 어머니의 짐을 빼앗다싶이 해서 엇갈아 마을앞까지 메고 왔단다. 그때는 해방군들이 뢰봉, 왕걸, 맥현득 등 영웅인물들을 따라 배우며 다투어 인민을 위해 좋은 일을 할 때라 해방군전사를 만난것이 다행이였다. 먼길에 가벼운 짐 없다고10리길을 엇갈아 수수자루를 메고오다보니 아마 전사들도 꽤나 힘들어했나보다. 그래서 어머니가 보기 미안하여 당시에 가장 류행되는 모주석 어록으로 그들을 고무해줬단다.

<사둔제신, 비파시샘, 배추만남, 지깡치 쌍리> (下定决心,不怕牺牲,排除万难,

去争取胜利)라고 하셨단다. 그 말씀에 우리 남매들은  배를 끌어안고 웃어번져졌다.

우리가 눈물을 닦으며 웃다말고 <그래 그 군대 그 말을 알아듣습던둥?>라고 하니 어머니는 정색하셔서 <알아들었길래 뭐라구 말하며 쎄쎄,쎄쎄하지>라고 하셨다.

아마 그 전사들도 말보다는 절주를 알아듣고 당시에 류행되는 모주석어록인줄 안것같았다. 그리고 두 전사는 조선족말로 그 어록을 그렇게 말하나 여겼을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사둔제신>이 어머니의 창조적인 세번째 <어록>이 되여 마을 사람들의 술좌석에서도 맛있는 안주가 되여 술맛을 돋구군 하였다.… …

술이 몇순배 돌자 두 한족은 더는 못마시겠다고 손사래질 했다. 내가 술 한잔 부어주며 말했다.

<니먼 씽쿠라, 둬허지뻬이,허부료예(你们辛苦了,多喝几杯,喝不了也)사둔제신, 비파시샘, 배추만남, 지깡치 쌍리.>

술좌석에 앉았던 형님친구들은 모두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하하하 웃음보를 터뜨렸다.

<너두 마다매닮아 중국말 잘 하는구나.> 형님은 숨도 바로 쉬지 못하였다.

 두 한족은 영문을 몰라 벙벙해하였다. 내가 한어로 해석해서야 술기운이 올라 얼굴이 지지벌개난 두 한족은 헤헤 웃으며 술잔을 들어 굽을 냈다.

웃음 뒤끝에는 마음이 서글퍼졌다. 고향마을이 날따라 황페해져간다. 마을사람들이 갈수록 적어진다. 그대신 한족호가 늘어간다. 한족이 많아지니  사람들의 한어수준이 늘게 되였다. 그런데 그것이 좋은 일인지, 마음은 허전하기만 했다. 한어를 잘하지 못해도 그처럼 소박하고 성실하게 오붓이 모여 살아가던 그때가 그리워났다.
창조성적 농촌<교수급> 한어수준을 가지셨던 어머니가 하늘나라에 가신지도 이젠 근 20년철이 된다. 나는 속으로 묵묵히 물었다.

 <어머니, 하늘나라에서도 한어로 노래를 부르십니까?>

2009년 <연변녀성>  제1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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