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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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속을 거닐다
2019년 10월 14일 08시 57분  조회:767  추천:0  작성자: 하얀 진주
수필
태풍속을 거닐다
김영분
 
8월에 들어서면서 매미소리가 요란해졌다. 찌는 듯한 더위와 더불어 찾아오는 것은 태풍 주의보이다. 태평양에서부터 뭉쳐진 두터운 구름덩이가 필사적으로 몸부림 치는 미친 바람을 만나 벌써 9호 레끼마라는 이름을 버젓이 달고 어마어마한 광풍으로 바다에서 대륙을 덮치고 있다.

무서운 속력으로 비와 바람을 몰고 다니며 광기부리는 여자가 머리카락 휘두르 듯 소란스레 지나가면 산간마을이 물에 잠기고 산사태가 난 곳은 도로가 붕괴된다. 도시의 나무들이 뿌리채 뽑혀져있고 차량들은 체면을 잃고 힘빠진 배처럼 둥둥 떠 다닌다. 실종된 사람들은 물론 사망자까지 속출한다.태풍을 정통으로 맞딱드린 곳의 참상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가슴을 졸이게 한다.

저 멀리 절강바다로 부터 9호 레끼마가 산동으로 줄달음쳐오고 있다고 연이어 이틀째 주의보가 내려져있다. 학교는 물론 회사도 휴무 통지를 받았다. 아빠트 관리실에서는 실시간으로 주민들의 핸드폰으로 태풍소식을 전하고 될수록 외출을 금지하고 안전에 주의하라고 알람을 보낸다.

위챗모멘트로부터 이미 피해를 크게 본 지역들의 물에 잠긴 참상이 리얼하게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사는 도시로 침범해온다고 생각하니 무섭기도 하고 걱정도 태산 같았다.
먼 바다의 비구름의 영향으로 물동이로 쏟아붓 듯 큰 비가 내리고 있은지 이틀째다. 당금이라도 태풍이 들이닥칠 기세에 헌 빨래처럼 축 늘어져 공손히 집에만 갇혀있으려니 갑갑하기 그지없다. 머리가 흐리터분하고 운동을 거르지 않던  몸은 근질근질하기까지 하였다.
휴일 이틀째 오전,태풍경로 사이트를 보니 태풍이 절강을 지나 강소성을 휩쓸고 있었다. 태풍중심을 표하는 팔랑개비는 강소성의 염성을 가리키고 있었으며 청도바다에는 저녁 다섯시가 돼야 올 수 있다고 표시되여 있었다.

일요일이면 꼭 야외로 나가야 성이 차 하던 나 만큼이나 갑갑하기는 마찬가지인 남편도 불안하게 비로 인해 눅눅해진 집안을 서성인다.
“어디든지 가자.”
두 사람이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보면서 생각해낸 것이 바다가로 가는 것이였다. 태풍이 들이닥치기 전의 바다를 구경하고 싶었다.
“위험해,안돼.”
둘은 말로만 위험하다고 하면서 눈길은 재빠르게 태풍속보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보슬비로 잦아든 비줄기는 아마도 저녁이 돼야 거세질 것 같았고 바다풍랑도 아직은 집을 집어삼킬 것 처럼 발버둥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가자. 만약 태풍으로 인해 길이 막힌다면 인근 건물로 피신하자. ”
의견이 모아지자 엄마와 아이들에게 집에 꼭 있으라고 신신당부하고는 회사에 일 보러 가야 한다고 선의적인 거짓말을 둘러대고 둘은 조용히 집을 빠져나왔다.

정작 차 시동을 거니 걱정이 또 앞섰다.
야생화 같이 수수한 삶을 살아왔지만 늙은 부모와 한창 크고 있는 아이들의 보호자이자 크거나 작으나 그래도 회사원들을 거느리는 두목이라는 묵직한 책임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이러다가 나쁜 일을 당하면 그들은 어쩌나.우지끈 하고 넘어지는 나무에 차가 치이기라도 하면? 물에 잠긴 도로를 지나다가 배수구 뚜껑이 벌렁하고 뒤집혀지면? 무시무시한 그림들이 영화필름처럼 잽싸게 눈앞을 훑고 지나갔다.  그래도 둘은 눈치껏 격려하고 결심을 내비쳤다. 괜찮을 거야. 요령있게 잘 보고 오자.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야지. 이런 비장한 결심과 각오들이 머리 속을 빠르게 드나들었다.

부르릉. 우리 차는 태풍을 만나러 가는 무지하고 용감한 두 사람을 싣고 위험한 태풍과의 데이트의 길을 떠났다. 무섭기도 하고 설레이기도 했다. 모험이란 이런 것인가 싶기도 했다.
차츰차츰 굵어지는 비줄기와 바람에 산발을 하고 흔들어대기 시작하는 나무가지들을 뒤로 하고 드디어 저 멀리 으르렁거리는 바다가 화난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밖으로 바다 구경 나온 사람들이 꽤 많았다. 비옷을 단단히 챙겨입고 아이들 손을 쥐고 걸어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련인도 있었고 퀵서비스 오토바이 운전자들도 많았다.백사장은 경계선으로 이미 막아놓았고 안전요원들이 두꺼운 비옷을 걸쳐입고 이러저리 순찰을 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았다. 우리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안전대비책이 없을 때 하는 말이였다. 정부도 개인도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위험수위를 잘 리용하면 많은 사물을 더 경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커먼 구름 아래 바다는 휘뿌연 색으로 변하여 쏴쏴하는 역정스런 소리를 내며 백사장을 덮쳐왔다. 만경창파가 한겹 두겹 겹치더니 거대한 파도가 되여 제방뚝을 덮친다. 삽시간에 물보라가 기고만장하여 높이 치솟는다.파도가  지칠줄 모르는 고삐 끊어진 들말 처럼 마구 날뛴다. 바다가 무겁게 출렁이고 있었다. 파도는 백사장을 집어삼킬 듯 휩쓸며 지나간다.

성난 파도는 켜켜이 쌓여 있던 울분을 모두 씻어내려는 듯 제방뚝 구석구석을 핥는다. 모래는 빨려 들어갔다가 뒤따르는 파도에 또 씻겨 쏴 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발 밑에서 나 뒹군다.입에서는 어느새 와 하는 감탄이 저도 모르게 뿜어져나온다. 자연앞에 선 왜소한 사람들,세상을 지배하고 호령하는 것 같지만 태풍전의 바다앞에 선 나약한 인간들은 경이로운 감탄만 지을 뿐이다.
조용하고 푸르던 바다는 태풍을 무릅쓰고 쫓아온 나에게 또 이렇게 새롭고 들끓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격정을 한가슴 묵직히 선사했다.태풍전의 바다라니 호랑이의 코털을 건드린 듯한 짜릿함이 몸을 감돌았다.

여태 소가 새김질 하 듯 덤덤히 살아왔다. 위험하다 싶으면 손을 움츠렸고 어렵다 싶으면 무리하지 말자 하면서 자신을 위로했다. 사는게 물에 물 탄 것처럼 재미가 없다고 한탄도 해봤고 그날이 그날이지 하면서 무료하게 나날을 보낸 적도 있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니 태풍도 근사한 선물로 나에게 다가왔다. 우리는 앞으로  살아 갈 날의  길이를 더 늘리기는 어렵지만 그 하루하루에 생기를 불어 넣을 수는 있다. 안전이 제일이지만 가능한 위험수위안에서 즐길 수 있는 소일거리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적당히 스릴을 즐기고 정해진 울타리에서 밖으로 나가보는 것도 삶의 생기를 찾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았다. 위험하다고 꽁꽁 숨어다니면 젊음의 색갈과 생기를 잃을 수 있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보다 무엇을 경험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하지 않는가.태풍전의 바다와 위험한 데이트를 즐기고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긴장한 마음을 눅잦히기도 전에 저 멀리 복건성에 사는 친구가 위챗으로 웃으면서 말한다.
“정말 태풍을 경험하고 싶으면 복건으로 오셔. 복건에 덮친 태풍이 산동까지 갔을 때는 열대폭풍에 지나지 않아.”
9호 레끼마태풍 역시 절강을 덮쳐서 산동에 오기까지 이틀이라는 시간을 길에서 모름지기 용을 썼으니 청도바다까지 왔을 때는 위력이 이미 많이 감소되였을 게 분명하다. 우리는 태풍을 너무 거창하고 장황하게 기다린 것 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느닷없이 찾아오는 역경과 고민에 대한 태도도 그렇지 않을가. 너무 힘들다고 고통스럽다고 생각하지만  또 결코 그런 것도 아니다.
 
신은 사람들에게 겪을만큼한 시련을 주고 감당할만큼의 고난을 안겨준다. 혹자는 우리가 너무 부풀려서 괴롭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거창하다고 생각하면 묵직하고 버거운 나날들이지만 가볍다고 생각하면 깃털처럼 자유로운 것 또한 우리의 생활이다.
  
태풍을 새롭게 정의하고 나니 하루하루가 새롭고 신선하게 느껴졌다.봄마다 껍질을 벗고 새로운 옷을 입는 나무처럼 마음이 끊임없이 젊어지고 생기를 되찾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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