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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가슴이 뭉클하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렇다 나도 전번에 찰떡을 먹다가 할머니가 생전에 그렇게 즐겨 드시던 찰떡을 수시로 사 드리지 못한 것이 죄스럽다. 그 찰떡 한그릇에 반가와 하시던 모습이 떠오르니 차마 찰떡이 목구멍에서 넘어가지 않더라,아들아 이젠 다 컸구나”라고 답복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자 아들이 “예 열심히 잘 살것입니다.저 구중천에 계시는 할머니도 그래길 바랄 겁니다”라는 메세지가 또 왔다..
어머니는 90세를 일기로 작년 6월에 하늘나라로 영원히 떠나갔다.
나는 결혼직전 부모를 시골에서 연길에 모셔왔다.목적은 단 하나, 농사일에 지친 부모를 이젠 더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일념뿐이었다.
20제곱미터도 안되는 단칸방에서 오늘의 100여제곱미터되는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줄곧 부모를 모셨다.아버지는 그래도 아들.며느리를 경제상으로 조금이라도 도와주느라고 문지기 야근을 했고 어머니는 이른 새벽에 차입쌀 가루를 쪄서 송편을 빚어 시장에 나가 팔았다.
80년도 초반이라고 기억된다.당시 조선무역이 열리면서 장사군들이 조선에서 일본제 히다찌,쏘니 등 24인치 칼라텔레비전을 수입해 팔았는데 당시 나같은 집들에서는 이런 2000여원 씩 하는 칼라텔레비전을 살 엄두도 못냈고 지어는 화면이 종이16절지 크기의 흑백텔레비전도 살 엄두를 못냈다.당시 나의 월급이 40여원이라 400여원에 달하는 흑백텔레비전도 사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그 시기에 칼라텔레비전은 집집마다 부러움의 상징적인 존재였다.아들,며느리의 속내를 꿰뚫은 어머니가 어느날 몰래 동네집에 가서 돈 400원을 꿔서 며느리 손에 쥐어주면서 흑백텔레비전이라도 사라고 했다.그러면서 어머니는 우리가 송편을 부지런히 빚어서 시장에 내다 팔고 또 아버지가 야근을 하니 인츰 빚을 갚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이 세상 모든 부모들은 오직 자식이 잘 자라기를 바라고 자식이 원하는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부모에 대해 한마디 더 하겠다.아버지가 문화대혁명시기에 역사반혁명으로 취급되어 당시 고향에서 1호로, 매일 투쟁마당에서 매를 맞지 않으면 안되었다.그 세상을 지내온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이른바 지주,자본가,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당권파,현행반혁명,역사반혁명 등 5류분자(당시는 분자라 했음)들은 마음은 물론 육체적으로도 매를 맞았다.
아버지가 매를 맞고 돌아온 날은 상가집이나 다름없었다.아버지는 워낙 술을 반가와 하는 지라 매를 맞고 돌아 온 뒤에는 동네 몰래 술로 마음을 달래고 이튿날에는 또 강제로 끌려나가 밭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당시에는 배갈이 금보다 귀하여 가문에서는 이리저리 수소문해 술을 마련하는 것이 거의 일과로 되었다. 그런데 술로서는 매맞은 육체적인 통증을 해결 하지 못했다.그래서 정통편(아스피린)을 밥먹다싶이 하면서 다소나마 통증을 말렸지만 역부족이었다.이를 눈여겨 보던 나의 사촌 형수가 당시에 공사병원에 있다보니 챵퉁딩(强痛钉)이라는 통증제거 주사를 투여했다.그러자 통증은 간데온데 없어졌고 그 후부터는 챵퉁딩으로 아픈 육체를 달래면서 그 험악한 세월을 용케 지탱해 나오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의 일이다.연길에 모셔 온 뒤에도 챵퉁딩에 인이 배겨 주사를 맞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마침 아내가 연변병원에 근무하면서 챵퉁딩을 구입해 투여했는데 그 챵퉁딩이 마약류로 분류되면서 엄하게 통제되는 바람에 챵퉁딩 공급은 끊어지고 대체 진통제를 대접했지만 인이 배긴 아버지의 육체를 달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그러나 아버지는 챵퉁딩이라는 주사제가 마약류로 분류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아들,며느리가 착오를 질 까봐 절때로 구입 못하게 딱 말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아버지는 문화대혁명의 피해자로 후반생을 고통속에서 살다가 95년도에 75세를 일기로 저 하늘나라로 영원히 떠났다. 아버지가 이 세상에 계실 때 그 반가와 하던 챵퉁딩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또 착오를 범할 각오로 구해 드렸더라면 그 얼마나 즐거워 했을까?하는 불효한 마음이 한구석을 늘 차지하고 있다. 물론 이버지는 지금 저 세상에 있으면서도 아들,며느리가 착오를 범할 때까지 챵퉁딩을 공급하는 것을 절때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되돌아와 어머니 얘길 한마디 더 한다.어머니는 러시아에서 태어났지만 그 혼란한 정국에 부모를 잃고 돐도 채 안되었을 때 성이 김씨라는 집에 안겨와 그 집에서 자라다가 쓰딸린 시기 고려인 강제이주(37년도)로 말미암아 중국으로 쫓기다 싶이 이주해 왔다.김씨가문의 소개에 따르면 어머니는 태어나자 얼마 안되어 부모가 세상을 떳는데 당시 어머니는 숨을 거둔 모친의 젖을 물고 있더란다.참으로 귀를 의심할 정도로 처참한 장면이라 하겠다. 고마운 것은 김씨 가문에서 어머니를 친 자식보다 더 애지중히 키우면서 소학교까지 졸업 시켰던 것이다.그래서 어머니는 50년대 문맹퇴치를 할 때 우리글을 가르치기도 했고 또 인민공사화 때 공공식당(당시는 온 마을이 함께 공공식당에서 끼니를 해결 했음)에서 경리 및 회계까지 맡아하는 등 당시 고향에서는.유식한 분으로 알려졌고 생전에 늘 책을 놓지 않았다.
내가 사업에 참가할 때부터 “니가 남을 도울 때는 백사장에 새겨라,남이 너를 도울 때는 돌에다 새겨라”( 백사장에 글을 쓰면 밀물에 의해 인차 흔적이 사라지기에 마음속에 두지 말라는 뜻)는 말씀을 늘 하셨다.당시에 그 의미에 대해 깊은 이해가 없었으나 나이를 먹으면서 즉 50이 넘서야 그 의미에 대해,더 나아가서는 인간의 삶의 도리를 깨닳게 된다.
오늘에 와서 어머니가 이 말씀을 나한테 늘 하게 된데는 김씨가문에서 애지중지 자랐다는 것을 잊지 않는 마음,또 잊을수도 없는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인간 삶의 철리의 말씀이라고 풀이된다. 부모를 비록 집에서 모시면서,또 집에서 운명을 시키면서 자식의 도리를 했다고는 하지만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에 그 불효한 마음이 늘 가슴을 치면서 눈물이 앞을 가린다.
살아 생전에 좀 더 편하게 해 드렸을 것을,살아 생전에 좀 더 용돈을 챙겨드렸을 것을,살아 생전에 좀 더 맛있는 음식을 대접했을 것을,살아생전에 원하는 약을 챙겨드렸을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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