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기자는 연변대학 정판룡 교수를 만나 조선족사회의 발전 및 진로에 관련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현재 중국에서의 조선족의 위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총화적인 각도에서 법칙성적인 것에 대해 말하고 싶다. 변화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사실만을 가지고 론할 것이 아니라 리성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을 분석해야 만이 21세기에 새로운 도약을 할수 있을 것이다.
20세기는 우리 민족이 이 땅에 정착한 세기라고 할 수 있다.조선민족이 중국으로 대량 이민해오기는 19세기중엽부터라 하겠다. 물론 학술계에서는 19세기 20년대요,40년대요,60년대요 하지만 확정적으로 그 어느날부터 라고는 말하기 어렵다.19세기60년대에 조선북부지역에서 련속 재황이 일어나 리재민들이 월강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살길을 찾아 중국에 넘어온 초기 이주민들은 청나라의 민족차별시정책의 유린을 몹시 당했는데 청나라는 우리 민족을 환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 사람들처럼 머리태를 땋고 호복을 입을 것을 강요하면서 “변발이복,귀화입적”의 동화정책을 썼다.
1910년 한일강제합병을 전후하여 많은 우국지사들도 중국으로 건너왔다. 그러므로 그때부터의 이민은 단순히 살기 위한 이민만이 아니라 상당수가 나라를 찾기 위한 정치망명이민이였다. 그리고 흑룡강지역은 일본이 만주땅을 침략한 뒤에 대량적인 이민이 생겼다.우리 민족의 이민은 1945년도까지였다고 할 수 있는데 50년 사이에 많이 류입되였다. 그러기에 20세기는 우리 민족이 이 땅에 들어와 정착한 시기라고 불수 있다.
정착문제에서 거주국과의 관계문제가 제기된다. 거주국에서 신임하고 그 국가에서 뿌리를 박아야 하는 문제인데 이는 해외에 나간 우리 민족이 그 어느 곳에서도 부딪치게 되는 문제이다. 이민한 사람이 거주국의 말을 잘 듣고 거주국에 유리해야지 불리하면 배척을 당하게 된다. 우리 민족도 진통을 겪었다. 우에서도 얘기했지만 청나라 때에는 환영을 받지 못하였기에 분규도 많았다. 그 뒤로는 봉계군벌 즉 동북군벌이 우리 민족을 배척하는 정책을 썼다. 왜나하면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뒤에 조선사람은 자기 사람이라고 하고 동북을 칠 때 조선사람을 많이 리용했고 또 조선사람을 보호한다는 수법을 썼기 때문이다.그래서 장학량군벌은 당시 조선사람을 두 번째 일본사람으로 봤다. 장개석의 국민당정부도 우리 민족이 소수민족이라는 것을 워낙 승인하지 않았고 우리 민족을 다만 “한교 ‘대한민국교민’”라고 여겼다.허나 유일하게 중국공산당은 우리 민족을 소수민족으로 인정하고 단합의 대상으로 삼았다. 왜냐하면 여기에 온 우리 민족은 대부분이 가난한 사람이고 또 일제를 반대해 나섰고 지주,자본가를 반대해 나섰으니 이는 중국공산당의 주장과 맞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온 우리 민족은 20년대부터 중국공산당과 함께 일제와 싸웠고 또 중국의 해방을 위해 국민당과 싸우면서 피를 많이 흘렸다. 이렇게 우리 민족은 이 땅에서 그 어느 민족보다 적극적으로 시종 진두에서 싸우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창립에 기여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중국공산다의 신임을 얻고 중국인민의 신임을 얻게 되었으며 떳떳한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주인공의 위치를 찾게 되었다. 이는 20세기 다른 국가에 이민 간 동포들과 비교해볼 때 아주 잘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족이 중국이라는 이 큰 땅덩어리우에서 한족들 속에 섞여 살면서도 자기의 민족성을 보존할 수 있는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민족성을 보존할 수 있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중국의 민족정책이 좋았기 때문이다.비로 소수민족이 자기의 언어와 문화를 발전시킬수 있다는 정책이다.이 정책이 없다면 아무리 독불장군이라도 민족성을 보존할 수 없다.다른 하나는 집거구가 형성되였기 때문이다.집거구가 형성되였기에 조선족자치주도 세워졌고 언론매체도 세워졌다.그리하여 자기의 문화도 잊지 않고 계승할 수 있게 되었다.러시아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은 거주국과의 마찰은 없는데 민족성을 보존하는 면에서 문제가 있다. 러시아의 경우 강제이민이다보니 집거구가 형성되지 못해서 민족성 보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중국에는 많은 조선족집거구가 있는데 연변집거구,할빈을 중심으로 하는 송화강집거구,심양소가툰을 중심으로 하는 집거구, 목단강집거구 또 그 속에는 조선족향,촌이 있어 민족성을 보존할 수 있는 근거지가 있고 이것이 또 온상이 되었다. 셋째로 민족성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문화의 선진성에 있다.우리 문화가 한족문화보다 높다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 와 정착해보니 다른 동네의 한족보다 문화자질이 높았고 또 벼농사도 잘 했고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라도 애들의 공부만은 등한시하지 않았다.
-해외동포와 조선족은 어떤 다른 점이 있는가?
세가지면에서 그 차이를 보아낼 수 있다.첫째로는 주인공위치이고 둘째로는 민족성보존이고 셋째로는 생활수준이다. 이 세가지면에서 볼 때 미국의 동포들은 거주국과의 관계는 큰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주인공위치도 큰 문제가 안되고 잘 살기도 하지만 민족성보존과 발전에 큰 문제가 생기고 있다. 미국에 사는 동포들, 특히 젊은 세대들이 우리 말을 잘 모르고 민족문화도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동포들은 정치적문제가 해결되지 못했기 때문에 주인공위치,민족성보존이 큰 문제로 되고 있다.허나 살기는 잘살고 있다.러시아의 동포들은 강제이민이다보니 주인공위치,민족성보존에 큰 문제로 될 뿐만 아니라 잘 살지도 못하고 있다.
-조선족이 잘 살지 못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조선족이 여기로 이주한 목적은 잘 살기 위해서였다. 못살기 위해 외국으로 나가는 법은 없다. 헌데 우리는 지금 세계 어느 나라의 동포들보다도 못살고 있다. 그 주요한 원인은 중국이 아직 발전도상의 나라(실지 워낙 락후하다)이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한)인은 중국의 땅만 보았지 “집형편”은 보지 못했고 또 건너오기 쉬웠기 때문이다.다른 하나의 중요한 장기적인 전쟁과 정치투쟁이였다. 조선족은 이민온 날부터 즉 19세기말부터 20세기 50년대까지 싸웠다.의병투쟁,독립운동,항일투쟁,해방전쟁,조선전쟁 또 이어서 반우파투쟁, 문화대혁명 등 정치운동만 하다보니 언제 경제건설을 할 기회가 있었는가?연변은 또 구쏘련과 국경을 사이둔 곳이기에 극히 페쇄되였으며 공업기초란 운운할 수 없는 지역이였다.
개방이 되면서 우리 조선족은 생활향상을 위한 조급성이 생기였다.조급성이 생기니 맹목성도 생기게 되었다.이에 따른 집거구인구감소로 연변만 해도 400여개소 중소학교가 문을 닫게 되었다. 물론 생활의 질은 어느 정도 향상되였으나 자녀교양에 큰 문제가 생기고 있고 문화교육질이 낮아지면서 민조선진성도 낮아지고 있다.
그제날 모택동시대에는 조선전우들과 함께 싸웠기 때문에 우리 민족과의 감정이 깊었다. 특히 국민당과 공산당이 대립상태에 있을 때 우리 민족은 국민당과 별로 거래하지 않고 무산계급감정으로 공산당에 의거해 잘 싸웠기 때문에 전쟁시기 중요한 경비는 다 조선족전사들이 맡을 정도로 신임을 얻었다. 허나 지금은 달라졌다. 특히 조선(한)반도가 분단된 상태에서 한국이 중국에 진출하면서 또 구쏘련이 민족분렬로 해체되면서 정부는 민족문제에서 그 어느 때보다 경각성을 높이고 있는네 이는 우리가 응당 리해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주인공위치를 확고히 해야 하는 문제도 제기되는것이 아닌가?
그렇다.우리는 당당한 중화인민공화국 국민이다. 그제날 우리 민족은 이 땅에서 공동히 나라를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제일 말을 잘 듣는 민족이였는데 지금은 법을 잘 지키지 않고 말을 잘 듣지 않는 민족으로 되었다.그래서 주체민족의 눈에는 정치상의 불신임,도덕상의 불신임이 생겼다.또 한국의 일부 사람들은 연변 땅은 한반도 땅이요, 하는 바람에 정부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다.우리가 100여년 동안 중국에서 힘들게 쌓은 신임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위치도 확고히 하고 민족성도 발전시켜야 한다.특히 경제발전을 다그쳐야 하지만 너무 성급해서는 안된다.중국의 특성에 맞게 실제에 근거해서 처사해야지 맹동해서는 안된다. 주인공의 자세를 잃고 있는데 대해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
-국외나들이,도시진출로 조선족거주판도가 크게 바뀌고 있는데 조선족의 대량 이동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대이동은 불가피적이다.꼭 벼농사만 지어야 하고 농촌을 고수해야 할 필요성은 없다.그제날 어디에 정착했으면 거기를 고수하라는것은 틀린 틀린 생각이다.우리가 대대손손 몇천년 살아오던 고향도 떠나올라니 왜 더 살기좋은 고장으로 이동하지 않겠는가?척박한 두메산골에서만 살지 말고 우리도 발달한 지역으로,바다가의 해변도시에도 나가 살아야 한다.지금 리론적으로는 농촌집거구를 보장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왜 그럼 당신은 거기에 가서 살지 않고 남만 거기서 살라고 하는가?”럭ㅎ 반문하고 싶다.
미국에 가보니 동포가 많이 살고있는 곳이 첫째로 로스안젤스이도 둘째로 뉴욕이고 셋째로 시카고이다.일본도 동포가 제일 많이 살고있는 곳이 대도시인 오사까와 도꾜이다.헌데 우리가 왜 멍청이라고 산골만 차지하고 대도시에 이동해서 살지 말아야 하는가,지금 학교가 줄어 드는것은 이동과도 관계되잠ㄴ 관건적인 문제는 아이를 하나만 낳기 때문이다.교육,문화가 발달한 연길시의 조선족인구는 불어나고 있는데 이는 매우 좋은 일이다.교육,문화를 발전시키려면 애들이 발달한 지역에서 교육을 받아야 되지 않겟는가.이는 일존 진보로 봐야 한다.우리는 개혁개방의 기회에 우리의 거주분포를 조정해야 한한다.흑룡강은 할빈을 중심으로 하는 큰 집거구를 새로 형성하고 료녕은 심양을 중심으로 하는 큰 집거구를 형성해야 한다.교통이 발달하고 경제가 발달한 지역에 집거구를 형성하고 열심히 돈을 벌게 되면 거기에 자연히 학교가 서게 될것이고 교육,문화기과도 발전하게 될것이다.현재 북경에도 우리 학교가 서고있고 산동에도 우리 학교가서고있지 않는가.
물론 새로 일떠선 집거구에 우리 학교가 세워지자면 수속 때문에 애로가 많지만 그것이 큰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반드시 국영학교만 세워야 한다는 도리는 없기에 민영학교도 설수 잇으니 우리가 가서 배워주면 되지 않는가? 여기서 더 언급할 것은 전망없는 두메산골은 내버려두고 전망있는 농촌은 교통을 하루속히 발전시켜 도시화로 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 연변도 돈을 번 사람들이 조선족이 많이 모여사는 연길,룡정 등 도시에 투자해 민족경제를 하루 빨리 춰세워야 한다.
취재를 마친 기자는 조선족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하는 차원에서 지성인들이 거시적인 안목으로 조선족의 실태를 분석하고 진로를 제시해야 할 필요성을 다시 한번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본문은 흑룡강신문 1998년6월6일자 1면에 실렸음, 원문 제목은 “21세기의 새로운 도약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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