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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우리는 희망의 "까레이스키“(윤운걸)
2008년 07월 30일 09시 14분  조회:2099  추천:99  작성자: 윤운걸

윤운걸기자문집

우리는 희망의 "까레이스키“


윤운걸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가 어떤 지역이고 그곳의 우리 동포들 즉 고려인들이 어떻게 정착했고 현재 그들의 삶의 모습은 어떠한지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연변대학 박창욱 역사교수에 따르면 러시아인들이  지난날부터 우리동포를 러시아어로 "까레이스키"즉 고려인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곳 동포들도 그대로 자기들을 고려인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한다.

   피눈물로 얼룩진 고려인의 과거

   현재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지역에는 50만 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고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에는 약 5만여 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다.

   총 80여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블라디보스톡(일명 해삼위)는 울창한 삼림속을 방불케 하는 경치가 아름답고 자연이 잘 보존돼 있는 도시로 그야말로 한편의 산수화를 방불케하는 해변도시이다.

   이런 해변도시에 50만 명 고려인의 근원지이며 마음의 고향이라 불리는 신한촌이라는 마을이 100여년전에 형성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신한촌은 일제시대에 고향을 떠났거자 독립운동을 위해 연해주로 갔던 우리 선조들이 불라디보스톡에 만든 집단 거주지이다.이곳은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무기와 탄약을 구할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했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사용한 권총도 바로 신한촌에서 구했고 동지들과 새끼손가락을 끊어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한 곳도 바로 신한촌이다.

   블라디보스톡의 해변을 따라 걷노라면 고려인들의 집이 늘어선 번화가가 있는데 이 번화가의 이름이 "서울"이다.그러나 1937년에 러시아정부가 한국인의 모습이 일본인과 비슷해 일본과의 전쟁에서 구분이 안되고 또 일본의 간첩이 될 가능성이 있다 해서 신한촌과 그 주변지역의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시켰다고 한다. 강제이주 한인들의 숫자는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16만 8000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도중에 굶고 병들고 해서 5분의 1의 한인들이 처참하게 숨졌다.다섯 명 중의 한명이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고 하니 그 참경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강제이주로 기차에 실려진 역은 바로 블라디보스톡에서 자동차로 약 한시간종정도 가는 라즈돌로예역이다.이 역에서 한인들이 강제로 기차에 몸을 실어야만 했는데 그것도 객차가 아니라 화물차였다.정부의 명령에 의해 고려인들은 하루아침에 살던 집을 떠나야 했고  떠날 때 살림살이조차 챙기지도 못한 채 시베리아의 무서운 찬바람을 맞으며 화물차에 올랐다고 하니 그 얼마나 처참했겠는가.

   신한촌 하면 또 이(리)상설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이상설선생은 한국 충천북도 진천에서 태어나 1917년에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서거한 독립운동가이다.1907년 7월에 광무황제의 밀지를 받고 이(리)준과 함께 불라디보스톡에 와서 헤이그밀사 파견에 깊이 관여해 헤이그망국평화회의에 파견돼 한국독립을 주장했고 이어 연해주에서 선명회와 권업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중 순국했다.그의 유언에 따라 시체를 화장하고 뼈가루는 스이픈강물에 뿌렸다.이상설선생의 기념비는 우수리스크에서 외곽을 나가면 발해성터가 바로 보이는 수이픈강 언덕에 세워져 있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만난 고려인 이 베체슬라브(블라디보스톡 고려인문화자치주 회장,연해주고려인 문화재단 단장)은 처음에 신한촌에 기념탑을 세웠을 때 현지의 스킨헤드족들이 기념탑에 아주 나쁜 글을 자주 써 기념비가 자주 훼손되는 바람에 이렇게 작은 울타리를 만들고 지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말 글이 사라져가는 고려인사회

   동북아평화연대 강경주 사무국장에 따르면 현재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들 중에는 10대 후손들도 있고 4-5대 후손들이 많다.60-70살의 고려인들도 간단한 생활용어나 구사할 뿐이고 깊이 있는 대화는 거의 불가능했다.그러다 보니 후손들도 우리말은 물론 우리 글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뻔한 일이다. 더욱이 지난날 한글학교가 거의 없다싶이  해 우리말과 글의 정체성을 고려인들에게서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블라디보스톡에서 만난 이베체슬라브 회장도 우리 말을 잘 하지 못해 통역의 도움을 받아서야 취재가 가능했다.고려인 4대로 1937년에 강제이주를 당했다가 돌아온 이베체슬라브 회장은 비록 우리말과 글은 잘 알지 못하지만 민족의 정체성을 살리고 살아 숨쉬고 있는 고려인들의 삶의 현장을 현지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2년전에 "아침햇살"이란 라디오 방송프로그램을 제작해 현지방송국에 전달해 방송하고 있다고 한다.많은 러시아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고려인들은 지금도 불이익을 많이 당하고 있어 매주 두 차례씩 한시간의 방송으로 러시아인들에게 생활용어 정도의 우리말을 가르쳐주고 우리 민족노래와 고려인들의 생활사를 러시아어로 방송한다고 했다.그는 기자에게 미리 녹음한 "아침햇살"프로그램을 들려줬다.한 예까쩨리나라라고 하는 83살의 고려인할머니가 유창한 러시아어로 자기가 겪은 고려인 이민사를 방송하고 있었는데 흘러간 옜노래 아리랑 등 애환이 담긴 우리 민족노래도 흘러나와 코끝이 찡했다.

   경제적인 사정도 여의치 않아 초라한 방송 장비로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겨울에는 난방시설도 제대로 되지 않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혼자서 열심히 방송을 견지해 나가면서 꿋꿋이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서 우리 민족의 끈끈한 생명력을 재확인 했다.그에 따르면 현재 블라디보스톡에는 약 3천 5백여 명의 고려인이 살고있는데 그들은 주로 교사,의사,지식인으로 살아가고 있다.정부 요직에는 고려인들이 중용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특히 구소련이 해체되면서 국록을 타던 수많은 지식인들이 졸지에 물가폭등으로 궁지에 몰린 것이 오늘의 고려인 실정이다.우리말에 "소를 팔아서라도 자식공부는 시킨다"는 속담이 있듯이 고려인들도 공부만은 열심히 해서 지식계층에서 많이 활약하고 있다고 한다.그에 따르면 불라디보스톡 수산대학 학자인 김 게로르기니꼴라예비치도 러시아에서 유명한 수산학자라고 한다.

   서울이라고 간판을 건 불라디보스톡의 한 식당에서 젊은 세대 고려인 남녀를 만났다.러시아인이 경영하는 이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쓰라와워와 (27살)는 스무살 즈음에야 자기가 조선인 후예라는것을 알게 되었고 스탈린 집정시대에 할아버지세대로부터 조선에서 건너왔다고 들었다고 한다.현재 어른들은 모두 우즈베크스탄에 살고 있고 생활이 너무 어려워 이렇게 식당에서 잡일을 한다는 그는 한국으로 가는 것이 꿈이라면서 이제부터라도 한글을 열심히 배우겠다고 했다.식당에서 함께 근무하는 유리아(허순희,23살)도 할아버지,할머니가 한국에서 건너와 지금 이렇게 살고있다면서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남자친구는 러시아인이라고 한다.

   우리 말과 글 언어환경은 그토록 열악하고 또 생활용품은 비싸 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고려인들의 현실이다.구 소련이 붕괴되면서 물가는 걷잡을수 없이 폭등했다.게다가 연해주는 다른 지역보다도 경제가 낙후해 월급은 중국월급과 거의 맞먹지만 물가가 비싸서 구입은 상상초차 할 수 없었다.한 예로 돼지고기 1킬로그램에 인민폐로 80여위안이다.그래서 웬만해서는 돼지고기를 사먹기 힘들다고 한다.기자가 우수리스크의 한 슈퍼에 들어가니 소시지 1개가 인민폐로 40위안씩이나 했고 보드카 한병도 40-50위안이나 했다.

   우수리스크에 한인마을 선다

   제반 연해주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하는 바람에 우수리스크 고려인들도 강제이주를 갖다가 오고 왔다가 가기를 반복했다.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에 강제이주를 당한 고려인들의 삶의 현장은 지금도 기막힌 상황은 마찬가지다.그래서 한국의 동북아 평화연대 등 단체와 뜻 있는 민간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돌아오는 고려인들의 삶의 현장을 개척하려고 많은 애를 쓰고 있다.이런 단체와 민간인들은 고려인들에게 우수리스크 외곽에 "우정마을"이라는 한인마을을 건설하고 있는데 러시아인들은 이 마을을 "고려마을"이라고 부르고 있다.

   동북아평화연대 강경주 사무국장에 따르면 계획은 1000채의 집을 짓기로 되어 있지만 여러가지 원인으로 지원을 약속했던 사람들의 사정 때문에 지금까지 33채밖에 짓지 못했다.우수리스크 외곽은 넓은 땅들이 많은데 무공해 농사에는 적격이다.그래서 현지 정부도 고려인들이 우수리스크에 와서 농토를 개간하는 것을 적극 환영하고 해외에서도 농토를 개간하는 것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그러나 "우정마을"에 집 한 채를 짓는데 4만 달러나 든다고 하니 지원없이는 고려인들이 여기에 다시 돌아와 땅을 개간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 있다.

   모스크바에서 장사를 하다가 이곳에 오게 된 리에우와안또노치(남,63살)는 현재 1500평방미터의 땅을 청부 말아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러시아인들이 좋아하는 토마토 ,고추,무,오이 등 채소를 심을 계획이라고 한다.

   지금 우수리스크에는 동북아평화연대를 비롯한 한국단체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학교도 세우고 러시아한인아주 140주년 기념관도 세우기로 계획하고 있지만 자금난과 인력난으로 진통을 겪고 있다.고려인 중 러시아 국적도 취업권도,사회보장도 없이 무국적자의 멍에를 안고 이국인의 지위에서 고통과 빈궁 속에서 시달리는 고려인들이 수없이 많지만 앞으로의 희망을 안고 열심히 뛰고있는 현실이 바로 연해주 고려인사회다.이들을 일어서게끔 하려면 고국은 물론 중국동포를 비롯한 전 세계 해외동포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필요하다고 관계자들은 설명했다

   강경주 사무국장은 "고려인은 물론 중국동포들을 도와야 하는 것은 그들을 한국국적을 가지게끔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에서 잘 살게끔 돕는 것이므로 고국에서 당연히 전폭적인 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현재 우수리스크의 한 재래시장은 연변 조선족들이 거의 독점 경영을 하고 있어 이제 고려인과 중국 조선족의 새로운 사회구도가 형성될 조짐도 보이고있다.연변 화룡시에서 간 한 조선족아주머니에 따르면 이 재래시장의 상인들은 대부분이 중국조선족들이 차지하고 있고 구체적인 통계는 없지만 약 1000여명의 조선족이 중국의 의류,생활용품 등을 여기에서 팔고 있는데 한달수입은 최소 만여위안이라고 한다.이 재래시장은 마치 연길시 서시장을 방불케 했다.

    취재를 마치면서 러시아의 고려인은 더 이상 역사의 수난 속의 고려인이 아니고 어둡고 낙후한 고려인이 아니며 살아있는 고려인,활기가 넘치는 고려인,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고려인,한겨레와 러시아인들과 함께 손잡고 나아가는 고려인들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본문은 2005년 10월 23일자 흑룡강신문에 실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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