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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 오를 수 있을 때 마음껏 춤 춰라
2021년 08월 10일 09시 20분  조회:716  추천:0  작성자: 예술세계
무대에 오를  있을  마음껏  춰라
—연변가무단 부단장, 국가 1급 배우 함순녀의 예술인생
안상근

 


  프롤로그
  “무대에 오를 수 있을 때 마음껏 춤 춰라. 그리고 혼신을 뜨겁게 불태우라.” 현임 연변가무단 부단장이며 중국무용가협회 부주석, 제11기, 제1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인 국가 1급 배우 함순녀가 후배들에게 입버릇처럼 당부하는 진정 고인 말이다.
  내가 올라가 춤을 출 수 있는 무대가 있다는 것은 아직 젊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며 그 무대에서 뜨겁게 혼신을 불태우고 노력하다 보면 성공적인 인생이 반드시 펼쳐진다는 자신의 경력으로부터 우러나온 인생 조언이다.
  함순녀는 사실 그렇게 살아왔다.
  서른살 때인가, 그녀는 자신이 무용재능을 펼쳐보일 수 있는 무대가 결코 영원하지는 않다는 것을 느꼈다. 마흔을 넘기면 무대에 오르기 어려운 무용수의 무대인생은 어찌 보면 매우 짧다. 그 때 그녀는 내가 무대 우에서 춤 출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는 예감이 문득 들었다고 한다.
  정작 무대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절박감에서일가, 큰 무대, 작은 무대를 막론하고 오르는 무대마다 최선을 다하고 혼신의 열정을 쏟았다. 함순녀의 보람찬 예술생애를 돌아보면 예술가의 뜨거운 열정과 끈질긴 추구 그리고 피타는 노력으로 쌓아올린 빛나는 예술의 상아탑을 만나볼 수 있다.
 
  나이를 바꾸면서까지 간절했던 무용수의 
  함순녀는 1964년 6월에 연길시에서 태여났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나이를 한살 더 많은 1963년생으로 바꾼 적이 있다. 바로 연변예술학교 학생모집시험을 보기 위해서였다.
  연길시 태평소학교를 다닐 때 함순녀는 우연히 집단체조 련습과정에서 동작이 규범적이고 아름다워 학교 무용선생님의 눈에 들게 되였다. 그렇게 연길시 태평소학교 문예선전대에 들어가게 된 것이 함순녀가 무용을 접하게 된 첫시작이였다.
  우수한 성적으로 연길시1중에 진학한 후 문체반에 들어갔는데 초중 2학년을 다니던 1977년에 연변예술학교 학생모집시험이 있었다. 아직 초중 2학년이다보니 시험에 응시하려면 한살이 모자라는 상황이였다.
  당시 사회적으로 연변예술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곧 배우가 되는, 출세의 지름길이였던 때였으니 유혹도 컸다. 그 때 함순녀 역시 리록순과 같은 훌륭한 무용수가 되려는 꿈을 안고 있었으니 더구나 시험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도 나이는 한살 적지만 경험 삼아 시험이야 못 보겠는가 하면서 등을 떠밀어주는 통에 함순녀는 결국 시험장에 들어서는 용기를 가지게 되였다. 물론 나이는 한살 더 많은 1963년생으로 적고 말이다.
  당시 연변의 각 학교들마다 문예선전대의 실력들이 만만치 않다보니 실력 있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탄탄한 실력의 경쟁자들을 제치고 함순녀는 예선합격의 첫 관문을 넘었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이 합격한 사실을 후에야 알게 되였다. 연변예술학교에서 예선에 합격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주일 동안 학습반을 꾸리고 또 한번 시험을 쳐서 최종 합격생을 뽑기로 했는데 연길시1중에서 그녀에게 예선합격통지를 전해주지 않았기에 그녀는 자기가 예선에서 합격한 사실을 감감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시험을 보고난 후의 간절한 기대 때문이였는지 어느 날 밤, 함순녀는 혼자 연변예술학교에 가서 시험을 보는 꿈을 꾸었다. 꿈이야기를 들은 어머니는 혼자 속을 끓이지 말고 직접 찾아가서 시험결과를 알아보라며 등을 떠밀었다. 그녀는 설레이는 가슴을 안고 연변예술학교를 찾아갔다.
  당시 연변예술학교와 함순녀가 다니던 연길시1중은 가까이 린접해있었는데 연변예술학교에 찾아가니 안면 있는 한 녀성 분이 그녀를 보고 왜 이제야 왔는가고 나무랐다. 함순녀가 학교로 오가는 길에서 자주 만났고 딱히 인사는 하지 않았지만 눈길이 마주치면 눈인사를 보내주던 분이였다. 알고보니 그 분은 연변예술학교 무용교원 박용원선생님이였다. 후에야 안 일이지만 함순녀의 늘씬한 키와 무용수로 클 싹수를 눈여겨보고 만나면 반갑게 눈인사를 보내주었던 것이였다.
  박용원선생님은 함순녀가 1호로 시험에 합격되였음을 알려주었고 예선합격생들을 상대로 점호할 때마다 그녀가 보이지 않아 은근히 기다리던 중이였다고 알려주었다.
  최종합격을 위한 시험을 봐야 했으므로 그 날 결국 함순녀는 혼자서 연변예술학교 선생님들이 모인 앞에서 시험을 보았다. 시험장에 홀로 서있었던 자신의 꿈이 신통히도 맞아떨어진 것이였다.
  시험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어느 하루, 연변예술학교의 장영순선생님이 직접 연길시1중에 찾아왔다. 학교에서 합격통지를 보낸 지 한참 됐는데 함순녀한테서 아무 소식이 없자 직접 학교로 찾아온 것이였다. 알고보니 담임선생님이 함순녀가 공부를 잘하니 향후 대학에 가는 게 걱정 없다고 생각하고 그녀가 연변예술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아까워서 합격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무용에 대한 아름다운 동경에 불타있던 함순녀에게 있어서 연변예술학교는 더없는 유혹이였다.
  그녀는 결국 연변예술학교에 입학하고야 말았다. 그 해 연변예술학교 무용전공에 연길시에서 단 2명만이 최종 합격했는데 그중에는 함순녀도 들어있었다.
  그런데 연변예술학교에 붙고 나서 신체검사를 했는데 생활형편이 어려웠던 때라 몸무게가 겨우 76근으로 신체가 너무 허약했다. 교의선생님은 함순녀가 힘든 무용수업을 견지하기 어려울 거라면서 그녀의 입학을 반대했다. 그 때, 장영순선생님이 나서서 만약에 이 학생이 신체가 허약해서 무용을 못할 상황이 된다면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두둔해주었고 결국 그녀는 연변예술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되였다.
  그 해 연변예술학교 무용학부에서는 녀자 17명, 남자 12명의 무용전공 학생들을 모집했는데 함순녀는 나이를 한살 더 불려서 응시했음에도 학생들 가운데서 제일 어린 나이였다.
 
  피타는 노력의 결실
  연변예술학교에 입학한 후 함순녀는 설날에 단 하루만 휴식했을 뿐 방학에도 쉬지 않고 무용련습을 견지했다고 터놓는다. 남보다 더 피타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영원히 정상에 설 수 없음을 절감해서였다.
  당시 입학생들 중에는 할빈 등 대도시의 소년궁 같은 곳에서 이미 무용을 정규적으로 배워가지고 온 동학들도 많았는데 확실히 함순녀보다 실력이 우위였다. 그들과의 차이를 줄이고 또 추월하려면 사실 꾸준한 련습과 피타는 노력밖에는 별다른 지름길이 없었다.
“눈만 뜨면 련습했어요.”
  함순녀는 그 때를 돌이켜보면서 먼 추억 속에 젖어든듯 말했다. 그녀는 숙소 침대 옆에 무용신발을 미리 놓아두고 새벽에 날도 채 밝기 전에 살금살금 일어나서는 어둠 속을 더듬어 신발을 찾아신고 무용련습실로 달려나가군 했다. 무용련습실에서 전등도 켜지 않은 채 련습에 몰두했다. 행여 전등을 켜면 맞은켠 숙소의 동학들이 알아채고 련습하러 달려올가 봐 ‘고심’했다고 한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내내 그녀의 일상은 련습, 련습 또 련습으로 이어졌다. 꾸준한 의지력 그리고 피타는 노력이 있었기에 함순녀는 반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음에도 공부를 제일 잘했고 해마다 3호학생으로 표창 받았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예술학교를 졸업하게 되였다.
  1981년, 연변예술학교를 졸업할 때 학교에서는 함순녀를 학교에 교원으로 남기려고 했다. 그 때 연변가무단의 최옥주 업무단장 역시 연변예술학교에 무용을 잘하는 졸업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은근히 함순녀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졸업하면서 함순녀는 편제 제한으로 학교에 남지 못하고 연변가무단에 배치 받게 되였다. 연변가무단에 온 후 얼마 안되여 함순녀는 또 가무단의 추천으로 북경 해방군예술학원에 가서 한 학기 동안 무용을 연수하게 되였다. 자신의 수준을 향상시키려면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함순녀는 어떠한 배움의 기회든지 소홀히 하지 않았고 열심히 공부했다.
  1982년에 함순녀는 또 연변가무단의 배려로 상해무용학원에 가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전국에서 50명의 학원을 모집했는데 거기서도 함순녀는 가장 나이가 어렸다. 상해무용학원에서 1년간 함순녀는 무용학원 본과생들이 배우는 과정을 몽땅 배워냈다. 어느 과목이나 모두 열심히 배워 학습성적도 전부 A학점을 맞았고 제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당시 함순녀의 우수한 성적과 성장 가능성을 눈여겨본 상해무용학원의 고전무용 담당선생님은 그녀를 졸업후 학교에 조교로 남기려고 지켜보고 있었다. 인생의 더욱 큰 발전과 성공을 위해서라면 상해 같은 대도시의 명문대학에 몸을 담는 것이 사실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이기에 엄청난 유혹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가 이곳에 와서 공부하고 또 성장할 수 있기까지는 연변가무단이라는 조직의 적극적인 지지와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걸 잊지 않았다. 사리사욕 때문에 결코 조직의 기대와 희망을 저버리고 상해무용학원에 남을 수는 없었다. 고향에 돌아가 배운 지식과 실력으로 더욱 아름다운 예술의 무대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결연히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고향 연변으로 돌아오는 렬차에 몸을 실었다.
 

  배운 것과 실천의 유기적인 결합두각을 나타내다
  연변가무단에 돌아온 후 함순녀는 배우생활을 터득하고 경험을 쌓는 과정에서 배운 것과 실천의 유기적인 결합을 통해 차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배운 지식과 실천에서 갈등도 느꼈다. 실천무대에서는 무용동작의 확장성을 강하게 요구했는데 그러한 차이점들을 터득하지 못하다보니 점차 실천 속에서 하나둘 알아가야 했다.
  1983년부터 함순녀는 근 1년간의 시간을 들여서 서양 발레무용을 무대에 올리기 위한 련습에 들어갔는데 연변 무용력사상 첫 발레무용 표현의 선두 주자가 되였다. 그 때 함순녀는 세계적인 발레무용극 〈돈 끼호떼〉중의 쌍무장면을 련습하여 무대에 올렸는데 큰 인기를 끌었다. 1984년에 문화극장에서 첫 발레무용공연이 있었는데 당시만 해도 서양 발레무용에 대해 문외한이던 관객들에게는 발레무용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민망해서 눈을 가리고 보는 관객들도 있었지만 손가락 사이로 엿보는 관객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에서 새로운 것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절절한 동경과 추구가 엿보였다고 함순녀는 그 때를 떠올렸다. 연변에도 서양 발레무용을 하는 무용가가 있다는 찬탄과 박수갈채 속에서 함순녀는 차츰 실력을 쌓아가게 되였다.
  1986년, 제2회 전국무용콩쿠르에서 함순녀는 독무 〈수양버들〉로 전국 무용계를 놀래웠다. 당시 전국적으로도 혁신의식을 제창하던 때였는데 저명한 안무가 리승숙선생이 〈수양버들〉 독무를 창작하고 함순녀가 표현을 맡았다. 리승숙선생은 수양버들의 잔잔한 몸짓과 광풍폭우 속에서의 몸부림 등 다양한 형상을 무용화해 조선족녀성의 외유내강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전국무용콩쿠르에 선 보일 비중 있는 무용작품이였기에 그녀는 어느 한 부분이라도 소홀히 할세라 1년간이나 련습에 련습을 거듭했다. 결국 콩쿠르에 참가한 독무 〈수양버들〉은 창작 3등상과 표현 3등상을 받아안았다. 전국적인 콩쿠르에서 이 같은 성적을 따냈다는 것은 대단한 영예였다. “조선족이 몸으로 수양버들의 다양한 형상을 무용화한 매우 훌륭하고 실력 있는 무용작품”이라는 업계 권위인사들의 높은 평가도 받았다.
  사실,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함순녀는 줄곧 여러해 동안 게으름 없이 이를 악물고 무용련습에 몰두해왔다. 그 계단을 그녀는 성장하는 과정이였고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오는 과정이였다고 말한다. 꾸준한 탐구와 노력으로 이루어낸 탄탄한 실력이 비로소 모든 무용작품들을 능히 소화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최고의 무용예술가 함순녀를 빚어낸 것이였다. 많은 무용작품들에서 함순녀가 주역이 되였고 이름난 안무가들도 함순녀를 찾기 시작했다.
  1992년에 함순녀는 쌍둥이아들을 보았다. 출산후, 함순녀는 애를 낳았다고 그냥 있으면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이 녹 쓸 것을 우려해 계속해서 업무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했기에 해마다 업무회보에서 1등을 확보했다. 쌍둥이를 해산하고 나서 단 1년 만에 완벽한 무용수의 몸매를 다시 회복했다고 하니 그녀가 쏟아부은 노력의 대가가 가히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1998년에는 35세 이하 년령대가 참가하는 ‘전국 독무 쌍무 삼인무 콩쿠르’에 34세의 나이로 참가했음에도 우수상까지 탔다.
  1981년에 연변예술학교 무용학부를 졸업한 후, 연변가무단 무용배우로 예술인생의 첫발자국을 내디딘 지도 어언 40년 세월이 흘렀다. 함순녀가 출연한 많은 작품들은 국내외의 콩쿠르에서 큰 상들을 휩쓸었고 미국, 로씨야 등 10여개 나라와 지역을 방문해 공연하면서 민족무용예술의 정화를 널리 알렸다. 함순녀가 주역을 맡은 대형 민족무용서사시 〈장백정〉, 〈춘향전〉은 국가문화부에서 수여한 최고상인 ‘문화대상’, ‘5개 1 공정상’을 받았다.
  2002년, 함순녀는 연변가무단 무용부 부장 직무를 내려놓고 2008년까지 연변예술학교 객원교수 신분으로 있으면서 신진과 후대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동안 함순녀는 훌륭한 학원들을 많이 양성하여 발레무용계에 수송했다. 그들 중 최령은 북경무용학원 발레무용학부에 입학했으며 졸업후 우수한 발레무용교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함순녀는 2009년 1월에 연변가무단 단장조리에 이어 6월에 연변가무단 부단장으로 임명되였다.
  연변가무단 부단장으로 임명된 후 그녀는 〈장백산 아리랑〉, 〈아리랑꽃〉 등 많은 작품 창작에 참여했고 〈노래하노라 장백산〉 등 작품의 예술감독을 맡았으며 제4회 전국소수민족문예공연극종목 금상, 제14회 문화상 평의 우수극종목상, 문화안무연출상 등 수두룩한 영예를 받아안았다. 그녀는 중국무용가협회 조직론단, 전국공연 등 여러가지 방식을 통해 조선족무용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중국 무용계에서의 조선족무용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적극적이면서도 커다란 기여를 했다.
  2021년 2월, 함순녀는 중국무용가협회 부주석으로 당선되였다.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의 직책민생문제에도 눈길 돌려
  함순녀는 문화예술분야에서 뛰여난 인재이고 또 괄목할 만한 성과들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의 직책을 짊어지고 예술분야는 물론 민생문제에까지 고루 눈길을 돌린 합격된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로도 손색이 없다.
  함순녀는 제11기, 제1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이다.
  지난 3월 5일, 북경에서 소집된 제1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4차 회의에서 함순녀는 ‘정부에서 거가양로봉사력량을 강화할 데 관한 건의’를 내놓으면서 로인들의 다층차, 다양화한 양로수요를 만족시켜야 한다고 제기했다. 문화예술분야에 몸 담고 있는 함순녀대표임에도 전국인민대표대회 회의에서 제기한 제안은 민생 관련 문제였다.
  이미 2기째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 자격으로 전국 량회에 참가하고 있는 함순녀는 처음에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예술, 문화 발전 등 범위에서 많이 사색하고 또 제안했다. 그러나 다년간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의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 사회 각 방면을 모두 골고루 살피고 돌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고 한다. 그래서 평소에 항상 사회를 살펴보고 생각하고 민생의 불편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였다고 그녀는 속심을 터놓았다.
  함순녀는 특히 지난 2019년에 〈미성년자보호법〉도 시대발전에 걸맞게 수정해야 한다는 제안을 제기했는데 전국인민대표대회 우수제안에 등록되여 보람을 느끼게 되였다.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로서 자기 분야만 생각하지 말고 항상 사회와 주변을 관찰하게 되고 어떻게 하면 불편한 것들을 더욱 편리하게 만들 수 있을가 하는 사색을 하게 된다고 함순녀대표는 진솔하게 고백했다.
  올해 제1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4차 회의에 참가한 감수에 대해 함순녀는 전국인민대표대회 사업보고에서 ‘14.5’계획 기간 수차 경제방면의 질적 발전을 강조하였고 문화사업 발전에서 고품질의 우수작품을 어떻게 창조할 것인가가 아주 관건적인 핵심키워드라고 한 점이 가장 인상 깊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시대와 인민에게 부끄럽지 않은 문화예술 우수작품을 창작하는 데 모를 박고 정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업성공과 가정화목 ‘두마리 토끼 모두 잡은  비결은?
  1984년에 함순녀가 연변 무용력사상 처음으로 서양 발레무용으로 된 남녀쌍무 〈돈 끼호떼〉를 무대에 올려 큰 인기를 얻었다는 이야기를 우에서 서술한 적이 있다. 그 쌍무의 남성파트너인 김광희가 바로 함순녀의 남편이다.
  사실 김광희는 함순녀와 함께 상해무용학원에서 공부하였고 함께 연변가무단에서 무용수로 활약하였다. 그들은 서로 믿고 리해하고 지지해주면서 행복하고 원만한 가정을 이루어낸 원앙부부이다.
  “가정을 이룬 후 제일 첫째 가는 행복의 조건은 가정경영이라고 생각했어요. 가정에 충실해야 할 뿐만 아니라 사업에서 적어도 내 앞의 뽈은 잘 차보자는 의욕을 가졌어요.”
  부부가 살아가면서 어찌 매일같이 맑은 날만 있으랴. 부부가 항상 서로를 배려하고 너그럽게 감싸주면서 가정을 영위해왔기에 사업성공과 가정화목의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자녀교육에서도 함순녀는 엄한 편이였다고 한다.
  아들쌍둥이를 양육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직접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것이다. 아이들이 매일 어지럽혀놓은 집안을 청소하는 일만으로도 혼자힘으로는 벅차고 기진맥진할 판이였다. 그래서 애들에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되 규정된 청소시간만 되면 반드시 원 위치에 질서정연하게 갖다 놓아야 한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애들에게 어릴 때부터 자기의 물건은 자기절로 정리하는 법을 가르쳤다. 옷이나 속벌, 양말 같은 것들도 서랍장에 넣어두는 위치를 알려주어 저절로 알아서 챙기도록 했고 옷이 어지러워지면 지정된 장소에 모아놓게 하는 등 생활습관들을 일상화했다. 이렇게 되니 애들의 성장과정에서 자립성이 키워져 일일이 부모손을 거치지 않아도 되였고 애들이 집을 떠나 대학생활도 무난하게 잘할 수 있게 되였다.
  말을 알아듣기 시작해서부터 모든 일을 자기절로 하게 하는 습관을 키워주었던 것이 정말 잘한 일이였다고 함순녀는 말했다. 현재 함순녀의 쌍둥이아들들은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각각 북경과 연길에서 사업에 참가하였다.
 
  에필로그
  함순녀에게 있어서 2016년의 무용극 〈아리랑꽃〉은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이였다. 쉰살이 넘은 나이로 다시 무대에 올라 작품을 열연할 수 있게 될 줄은 그녀도 미처 몰랐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도 큰 자부심과 행복이였다.
  더우기 무용극 〈아리랑꽃〉에서 함순녀가 표현한 것은 한 무용예술가의 성장과정을 보여준 축도였는데 그것이 더더욱 자신의 인생을 말하는 것 같아 감회가 깊었고 잘 표현할 수 있게 되였다고 함순녀는 감개무량해했다. 무용극 〈아리랑꽃〉이 당시 전국을 들썽케 했던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지금 함순녀는 춤 추는 무용예술가의 무대에서는 내려왔다. 하지만 또 다른 인생무대에서 계속하여 예술인생의 아름다운 배역을 멋지게 표현해나가고 있다.
  함순녀는 자신이 걸어온 40년 예술인생의 지나온 발자욱을 돌아보면서 후배들에게 항상 들려주군 하는 말이 있다. 
  “순간순간의 기회를 모두 소중히 여기고 마음껏 재능을 펼치라. 무엇을 바라지 말고 조건을 따지지 말고 열정을 가지고 노력하느라면 성과가 오고 영예도 따라온다. 내 인생이 그러했다. 먼저 노력을 기울이고 성과를 따내면 반드시 긍정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함순녀는 언제라도 무대에 다시 올라 춤을 추고 싶다고 말한다. 또한 그럴 준비가 되여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지금도 인생의 또 다른 무대에서 뜨거운 인생열정과 추구를 가슴에 가득 담은 채 혼신을 불태우는 아름다운 춤사위를 계속해서 펼쳐가고 있다.
 
《예술세계》 2021년 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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