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가계렬사릉원 17렬사묘구역에 자리한 리두섭렬사의 묘
장가계를 다녀온 사람들은 웅장하고 험준함으로 유명한 천문산이나 귀부신공을 자랑하는 3천석봉, 천지산의 어필봉 등은 흥미진진하게 외우나 장가계렬사릉원에 조선족렬사가 고이 잠들어있다는 사실은 감감 모르고 있어 안타깝게 생각한 적이 많다.
장가계시 북산에 위치한 장가계렬사릉원은 렬사탑, 무명렬사비, 17렬사묘구역, 39렬사묘구역, 53렬사묘구역, 렬사명록정 등으로 구성되였는데 부지면적이 70여무에 달한다. 158명의 부동한 시기의 렬사들의 유해가 안장된 이 곳은 강택민, 주용기, 하룡, 료한생 등 당과 국가 그리고 중국인민해방군의 지도자들이 다녀간 곳이다.
12월 11일 오전, 지난해에 이어 두번째로 이곳을 찾은 필자는 릉원 입구에서 50메터 쯤 올라가다가 경건한 마음으로 동쪽 회룡관방향의 인행도 옆에 자리잡은 17렬사묘구역에 들어섰다.
12월이면 연변은 두터운 솜옷을 입어야 하는 계절이지만 이곳은 령상 15도 좌우로 답사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푸른 나무들에서 떨어지는 락엽이 렬사묘를 덮어주면서 천리타향에 묻힌 채 반세기를 넘어 이 곳을 지키는 렬사들에 대한 숭경하는 마음이 더구나 커졌다.
17렬사묘구역 전경
이 구역에는 대용현(오늘의 장가계시) 해방전투에서 희생된 17명의 렬사들의 유해를 모셨는데 전설과도 같은 조선족 전투영웅 리두섭은 가장 가운데에 모셔져있었다.
즉 그의 묘지 량켠으로 각각 8기의 렬사묘가 자리하고 있었다. ‘영생불멸하리! 리두섭렬사지묘 대용현인민위원회 1951년 10월 16일 건립’이라 씌여진 묘비에는 리두섭렬사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139사 416퇀 제3영 렬사, 송강성 오상현 사람으로 고농출신이다. 1945년에 중국인민해방군에 가입하고 1948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당소조장이 되였으며 선후로 대공 3차를 세웠다. 영광스럽게 상급에서 발급한 전투영웅상장과 용감상장을 받았으며 1949년 대용해방전투에서 적군 174명을 포로하고 중기 1정, 경기 2정, 박격포 1문, 보총 백여자루를 로획하고 도주하는 적들을 계속 추격하다가 영광스럽게 희생되였다. 희생될 때 나이는 21세였다.”
리두섭렬사에 대한 기록은 현재 많지 않아 상세하게 소개할 수 없지만 당년에 그와 함께 어깨 겯고 싸웠던 분들이 후날 남긴 회억록이나 력사연구자들의 답사기록에 몇 군데 소개되여있어 정리해보았다.
1947년 10월 18일 새벽, 동북민주련군 제28사 83퇀 3영 8련의 전사들은 국민당군 한개 련이 배수진을 친 백룡산을 공격하고 있었다. 련락병이였던 리두섭이 1패 부패장에게 전투를 지휘하라는 명령을 전달할 때였다. 적탄이 그의 목을 스쳐지나가면서 말을 할 수 없게 되였다. 부패장이 급히 그를 부축하려 하자 그는 안깐힘을 다해 피묻은 손으로 땅에 “임무는 생명보다 중하다”고 썼다. 전투가 끝난 후 상급에서는 8련에 “임무는 생명보다 중하다”는 글발이 새겨진 금기를 수여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19살이였다.
28사 사령부와 정치부에서 수여한 금기
1948년 10월 25일, 해방전쟁사에서 격전이 가장 치렬한 전투로 유명한 흑산저격전 대백태자촌전투에서 통신반장이였던 그는 우박처럼 쏟아지는 탄우 속을 뚫고 1패의 위급한 상황을 전달하기 위하여 련부에 도착했다. 초연에 얼굴은 시꺼멓게 그을고 군복은 총알과 폭탄파편을 맞아 너덜너덜해졌으며 신발은 어데 갔는지 맨발이였다. 위급한 상황에서 련장은 그를 기포련에 보내 화력지원을 요청하게 했다. 련장의 명령을 받은 그는 맨발바람으로 기포련에 달려갔다. 그는 나무그루에 찔려 발에서 피가 줄줄 흘렀지만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때 그의 나이는 20살이였다.
자오대로 오르는 길
옛날 국민당군 진지는 귤밭으로 변하였다.
1949년 10월 16일, 부반장인 그는 대용현을 해방하는 관건적인 전투에 참가하였다. 대용현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자오대산 진지를 점령한 그는 진지를 다른 부대에 넘겨주고 전사들을 거느리고 신속히 적의 지휘부가 위치한 대용중학교로 달려갔다. 그는 어둠 속에서 포로를 심문하여 대용중학교의 위치를 알아낸 뒤 신속히 대용중학교 2층 건물에 접근하였다.
장가계시 영정구로인대학 뒤울안에 자리잡은 대용중학 옛터
전사 백득현과 함께 남먼저 문을 박차고 건물로 들어간 그는 복도에서 달려오는 적 몇놈을 쏘아눕히고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고함소리와 총소리가 요란한 교실문을 박차고 들어가 적 기관총수를 사살한 뒤 “꼼짝 말앗!” 하고 벼락같이 소리쳤다. 질겁한 놈들은 모두 손을 들고 돌아섰다.
그런데 이 때 “땅!땅!땅!”하는 총성이 울리면서 그의 가슴에 세발의 총알이 박히였다. 다른 교실에 숨어있던 국민당군 군관이 그에게 총을 쏘았던 것이다. 몸을 돌리면서 적군관을 쏘아눕힌 그는 교실 안의 포로들이 꼼짝 못하도록 지켜섰다. 가슴에서 붉은 피가 콸콸 쏟아져나왔지만 그는 마지막 힘을 다 모아 포로들을 지켰다. 총성을 듣고 달려온 백득현에게 포로를 넘겨준 후에야 그는 안도의 미소를 지으면서 눈을 감았다. 그는 이렇게 상급에서 맡겨준 임무를 생명으로 완수하였다.
대용해방전투가 결속된 후 47군 139사 당위원회에서는 그에게 대공 3차를 기입해주고 전투영웅으로 추인했으며 ‘모택동메달’을 추수하였다.
천진전역에서 통신병이였던 그가 홀로 적군퇀장을 포함한 수십명을 생포한 사적은 후날 전설처럼 회자되면서 해방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의 스크린을 장식하기도 하였다.
혁명렬사기념탑
<해방전쟁시기 흑룡강 소수민족의 공헌>이라는 론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여 있다.
“대용현성을 해방하는 전투에서 리두섭 등 3명 전사는 적군 174명을 생포하고 기관총 2정, 포 1문, 각종 총기 140자루를 로획했다. 영광스럽게 7차의 대공을 세우고 모택동상장을 받은 전투영웅 리두섭은 적탄을 맞고 장렬히 희생되였다. 강철8련은 750명의 적을 섬멸하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전투가 끝난 후 사당위에서는 ‘강철8련’ 에 금기를 수여하였는데 금기의 제자 내용은 ‘해방전쟁에서 탁월한 전공을 세우고 대용전역에서 결정적인 작용을 한 강철8련에 드린다’였다.”
1928년 경상북도 영덕군에서 출생한 리두섭은 어려서 부모를 따라 흑룡강성 오상현에 이주하였으며 1945년 10월 마을을 지키기 위하여 오상현대대에 입대하였다. 후에 팔로군 359려에 편입된 그는 선후로 동북토비숙청, 림강보위전, 료심전역, 평진전역, 대용전투 등 수십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하였는데 여러번 부상을 입었으며 적군 수백명을 생포하였다.
리두섭렬사가 희생된 후 당지 정부는 대용현렬사릉원내 17렬사묘구역에 그의 유해를 안장하였다. 해마다 청명과 추석, 렬사추모일이 되면 당지 정부와 학생들은 이곳을 찾아 추모활동을 하고 있다.
필자는 당지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이 당지 정부와 손잡고 리두섭렬사 추모활동을 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면 민족단결에도 좋고 당지 정부와의 관계도 윤활해지고 또 투쟈족을 비롯한 당지 여러 민족 인민들에게 우리 조선족을 널리 선전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자오대에서 내려다본 안개에 잠긴 장가계시
렬사릉원에서 바라본 자오대(맞은켠 정중앙 뾰족한 부분)
필자는 이날 렬사의 묘비 앞에서 묵념하고 당년에 그의 부대가 진격하였던 로선을 따라 자오대진지 옛터, 그가 희생된 대용중학교 옛터 등지를 답사하면서 렬사의 숭고한 애국주의정신과 무비의 용감성으로 점철된 혁명적 영웅주의정신을 다시 한번 기리였다.
최근년간 수려한 풍경을 구경하기 위해 장가계를 찾는 조선족들이 부쩍 늘고 있다. 아름다운 산수에 취하는 것도 좋지만 갔던 김에 반세기전에 이 강산을 해방하기 위해 보귀한 생명을 바친 조선족선렬들을 찾아 그들을 추모하고 그들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는 것도 매우 의의가 크다고 생각한다.
길림신문 김태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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