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실 경호실장 여진족이 맡고 외인부대장은 서양인 차지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7월14일 09시25분 조회:2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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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황대일 기자 = 영국 왕실 사상 처음으로 흑인 시종 무관이 탄생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아프리카 가나 출신 이민자인 나나 코피 툼마시 앙크라(38) 소령을 시종 무관에 임명했다.
시종 무관은 왕실 기마병을 지휘하고, 중요 행사 때 지근거리에서 여왕을 보좌하는 임기 3년짜리 요직이다.
부모를 따라 영국으로 이주한 툼마시 앙크라 소령이 여왕 경호를 맡음으로써 인종 차별 논란을 해소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왕실은 기대한다.
아프가니스탄전에 참전한 이후 왕실 근위 기병대에 뽑힌 그는 영국 첫 흑인 육군 장교라는 기록도 세웠다.
2011년에는 어린 시절부터 꿈꿔온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생일 기념 거리 행진 호위를 맡았다.
세계 민주주의 종주국이라는 영국에서 왕실 흑인 장교가 이제야 탄생했지만, 우리나라는 이미 고려 시대부터 외국인을 무관으로 채용했다.
충렬왕 왕비로 원나라 출신인 제국공주를 수행해 1274년 고려 땅을 밟은 장순룡이 주인공이다.
중국 서북부 위구르 이슬람교도인 장순룡은 고려 귀화 후 낭장에 임명된 뒤 첨의참리(정2품), 문하찬성사(정2품)까지 승승장구한다.
낭장은 부하 200명을 거느린 중앙군 정6품 무관으로 오늘날 육군 중대장급 지휘관이다.
외국인이 육군 대위로 특채돼 참모총장까지 고속진급한 셈이다.
장순룡은 나중에 덕수 현(개성시 개풍군)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덕수 장씨 시조가 된다.
이성계를 최측근에서 호위하며 조선 개국 1등 공신에 오른 이지란도 여진족 출신 이방인이다.
쿠룬투란 티무르가 본명인 이지란은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부하를 이끌고 고려에 투항해 이성계 휘하로 들어간다.
전선을 누비며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이지란은 경상도 절도사, 동북면 안무사, 좌찬성 등 고위직을 두루 역임한다.
이지란이 지휘한 부대는 여진족과 몽골족 등 이민족이 뒤섞인 일종의 다국적군이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외국인이 왕실 경호 책임자가 되기도 했다.
조선에 귀화하여 무과에 급제한 여진족 출신 동청례는 연산군(1476~1506년)의 위장으로 발탁된다.
위장은 궁궐 수비와 임금 근접경호를 담당하는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 등을 총괄 지휘하는 종2품 무관직으로, 요즘 대통령 경호 실장과 비슷한 자리다.
왕이 주관하는 국가 중요 행사나 궁궐 밖 출입 때 내금위가 최측근 경호를 맡고 좌측과 우측에는 각각 우림위와 겸사복이 배치됐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사야가라는 왜장이 조선에 귀화해 눈부신 전공을 세워 고속 출세한다.
왜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 휘하에서 3천여 명을 거느린 사야가는 부산 상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군에 투항한다.
이후 조선군 조총부대 창설을 주도하고 왜군과 70여 차례 전투를 벌였으며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 군대와 싸워 용맹을 떨친다.
선조로부터 공적을 인정받아 가선대부라는 종2품 벼슬과 함께 김 씨 성을 하사받은 사야가는 김충선으로 개명한다.
동청례와 김충선이 순혈주의 전통이 강한 조선에서 고관대작에 오른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동청례는 국경 지역에서 조선인을 괴롭히던 야인을 포용하는 능력이 뛰어났고, 김충선은 일본식 조총과 화약 제조 기술, 조총부대 전술 등을 전수하는 업적을 남겼다.
이들은 이방인 약점을 딛고 출세했다는 공통점이 있으나 말년 운명은 엇갈린다.
동청례는 경호 대상인 연산군을 배신하고서 중종반정 세력에 가담해 정권 교체를 거들었지만 처참한 대가를 치른다.
논공행상에서 서운한 대접을 받은 데 불만을 품고 왕을 비난했다가 역모죄에 걸려 능지처참 형을 당한다. 부인과 자식은 노비로 전락한다.
조선 여인과 결혼한 김충선은 공직생활을 마치고 대구로 내려가 일가를 이뤘으며, 후손이 지금까지 7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유럽계 흑인도 조선군 장교로 임관할 기회가 있었으나 무산됐다.
임진왜란이 끝나갈 무렵인 1598년 선조는 명나라 장수로부터 흑인 병사 4명을 소개받는다.
선조는 파랑국(포르투갈) 출신인 이들이 조총을 잘 쏘고 다양한 무예에 능하다는 말을 듣고 "왜적을 섬멸하는 것은 시간문제다"라며 기뻐한다.
노란 눈동자에 온몸이 검고 곱슬머리인 용모 때문에 해귀(바다 귀신)로 불린 이들은 바다 잠수로 적선을 침몰시키는 능력도 있었다고 했다.
오늘날 수중 파괴 등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해군 UDT 요원과 닮았다.
해귀 출현 소식에 왜군은 바짝 긴장했으나 막상 이들이 적선을 부쉈다는 기록은 없다.
흑인 군인들이 무력시위만 했을 뿐 실전 성과를 거두지 못한 탓에 장교 임용 기회는 자연스레 사라진다.
1604년에도 포르투갈 출신 무역상이 흑인 노예 등과 함께 태풍을 피해 경남 통영에 상륙하는 등 서양인들이 종종 입국했으나 대부분 추방됐을 뿐 귀화하지는 않았다.
유럽인들이 대서양을 건너 머나먼 조선 해역까지 출몰한 것은 대항해시대를 맞아 앞다퉈 동방시장 개척에 나섰기 때문이다.
동방 진출을 주도한 국가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었다.
포르투갈은 16세기 말레이반도 믈라카를 점령한 데 이어 중국 마카오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스페인은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1521년 아메리카 대륙 남단에서 태평양을 서쪽으로 횡단하여 필리핀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동남아시아, 중국, 일본 등을 무역 기지로 삼는다.
17세기에는 네덜란드까지 가세하면서 중국과 일본을 오가던 서양 상선이 난파하여 조선에 표착하는 사례가 늘어난다.
뒤늦게 동방무역 쟁탈전에 뛰어든 네덜란드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제압하고 해양 패권을 장악한다.
네덜란드 동방무역은 1602년 설립한 동인도회사가 주도했다.
동인도회사는 주주 1천143명이 주식을 받은 대가로 돈을 갹출해 세운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다.
이 회사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무역 전진기지로 삼아 실론 섬, 말라카 제도 등 향신료 생산지를 점령하면서 대박을 터트린다. 그 덕분에 네덜란드는 유럽 최고 부국으로 부상한다.
당시 정향, 육두구, 후추 등 향료는 음식 부패를 막고 흑사병까지 예방한다는 믿음 때문에 유럽에서 금값으로 거래됐다.
동인도회사는 요즘 기업과 달리 국가 지원을 받아 전쟁 선언과 평화조약 체결 등 역할을 하는 준국가기관이었다.
인도양과 태평양 일대를 항해하거나 연안 상륙 때 무력충돌하는 일이 잦아 막강한 군사력은 필수였다.
선원들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 총칼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정예 군인이었다.
동인도회사는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는 대륙 간 교역뿐만 아니라 동방권 역내무역도 활발하게 했다.
인도네시아, 인도, 일본, 대만, 아라비아 등 20여 곳을 잇는 해상 네트워크를 활용한 교역이다.
일례로 인도 면직물을 사서 인도네시아에 팔고 그 대금으로 후추를 구매해 중국에 매각한 다음 비단을 사들여 일본으로 떠난다. 일본에서는 비단을 처분해 은을 매입한다.
당시 은화는 아시아는 물론, 유럽에서도 유통되던 국제 결제 수단이었다.
조선이 엄격한 국경 빗장을 걸어 잠근 것과 달리 일본 무신정권은 나가사키를 해외무역 기지로 개방해 외국인 출입이 잦았다.
1627년 경주 인근 해역에서 양식과 식수를 구하려고 상륙했다가 붙잡힌 네덜란드인 박연(본명 얀 얀스 벨테브레이)도 동인도회사 소속이었다.
박연은 동료 2명과 함께 체포돼 경주 관아로 압송된다.
이들이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는 장면을 목격한 주민들은 비명을 질렀고, 성문을 지키던 군인조차 눈이 휘둥그레졌다고 한다.
붉고 노란 머리카락에 우뚝 솟은 코, 푸른 눈, 희멀건 피부, 우람한 체구에 놀랐기 때문이다.
박연 일행 또한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조선을 식인의 나라로 생각한 이들은 해 질 무렵 군인들이 횃불을 높이 들자 자신들을 구워 먹기 위해 불을 지핀 것으로 알고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박연 일행은 조선 훈련도감에 편입돼 대포와 조총 제작·사용법을 가르친다.
훈련도감은 한양 방위를 담당한 정예 부대로 포수(총포), 살수(창검), 사수(활) 등 3개 병과에 특화한 군인들로 편성됐다.
박연 일행은 당시 성능이 가장 우수한 무기인 홍이포(네덜란드포)도 제작했다. 기존 화포보다 사거리가 길고 파괴력이 뛰어난 신무기다.
병자호란 때는 전쟁터로 나가 박연만 살아남고 동료 2명은 전사한다.
훈련도감에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 투항한 일본인(항왜)과 중국인 군인들도 많았는데 박연이 이들을 지휘했다. 외인 부대장 노릇을 한 셈이다.
1648년 무과에 장원급제한 박연은 조선 여자와 결혼해 자식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 조선인으로 동화하는 듯했으나 어느 순간 향수병에 걸리게 된다.
1653년 제주도 인근 해역에서 조난한 외국인 통역을 도와준 게 잊혀가던 고향을 떠올린 계기다.
해상 난민들은 하멜표류기에 등장하는 네덜란드 출신 하멜 일행이었다.
박연은 이들과 몇 마디 주고받다가 갑자기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어 소매가 흥건하게 젖었다고 한다.
조선에 체류한 지 27년 만에 고향 사람을 만난 기쁨과 고국에 두고 온 아내와 자식에 대한 그리움이 교차해 눈물이 펑펑 쏟아진 것이다.
하멜 일행도 훈련도감 외인부대에 배속됐다가 1664년 조선을 탈출해 일본을 거쳐 귀국한다.
하멜표류기는 조선에 14년간 억류된 탓에 챙기지 못한 급여를 동인도회사에서 받아내려고 작성한 행적 보고서로 조선을 유럽에 최초로 소개한 문헌이다.
박연의 아들 역시 훈련도감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후손 흔적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가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보다 민주주의 역사는 짧지만, 외국인을 포용하는 전통은 비교우위를 자랑한다.
중동이나 아프리카 난민이 유럽 해역을 떠돌다 무수히 죽어가는 데도 주변 국가들이 침묵하는 현실을 보면 서양인들이 입버릇처럼 외친 인도주의는 헛구호였던 셈이다.
우리도 외모와 말씨가 다르다는 이유로 외국인을 멸시하는 악습이 적잖다는 점에서 자성하고 개선할 여지가 많다.
다름을 포용함으로써 다양한 인종과 종교, 문화가 공존한 국가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대체로 번창했다.
다양성은 자연 섭리인 만큼 정치권 등에서 강조하는 양성평등이나 지역균형보다 하위 개념이 아니다.
따라서 인종차별금지법을 만드는 방안을 이제 적극적으로 고려해봐야 한다. 다문화가정이 늘어나고 국제교류가 활발해지는 시대 흐름에 비춰 봐도 그 법은 필요하다.
고려나 조선처럼 외국인을 정부 고위직에 발탁한다면 대한민국이 열린 사회로 발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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