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하 다리 우에서
7월 18일, 이른 아침 6시경 중국조선족항일가요합창단을 실은 뻐스는 연길예술극장 앞에서 출발하여 화룡시를 거쳐 선경대를 지나 두만강 강변길로 내처 3시간도 넘게 달려 홍기하와 두만강의 합수목에 이르렀다.
울창한 수림 사이를 빠져나와 거센 강물을 이루며 두만강으로 흘러드는 홍기하의 기세 찬 흐름, 홍기하 다리 우에 올라 그 광경을 목격하는 팀원들은 홍기하를 거슬러 먼 산줄기를 바라보며 ‘홍기하전투’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1940년 3월, 홍기하(紅旗河) 기슭에서 력사에 길이 남게 될 큰 전투가 벌어졌다.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은 일본토벌대가 추격해온다는 정보를 얻고 24일 홍기하에 도착한다. 래일 쯤 토벌대가 홍기하에 도착한다는 정보에 따라 전투원들은 다시 대마록구(大馬鹿溝)로 되돌아가면서 눈 우에 수많은 발자국을 남긴다. 유인술이였다. 주력부대는 반대방향인 화라자(花砬子) 부근 산등성이에 올라 매복하였다.
전설을 품은 홍기하
3월 25일 새벽, 제2방면군은 대마록구 협곡 북쪽 고지에 매복하였는데 일본군 마에다(前田) 중대장이 토벌대를 이끌고 나타났다. 토벌대는 항일련군 전사들이 일부러 남긴 발자국을 따라 내려오다가 매복권에 들어섰다. 급기야 사격명령이 떨어졌고 토벌대는 폭우 같은 총탄의 세례를 받았다. 토벌대 마에다 중대장은 당장에서 숨졌다. 항일련군은 토벌대 140여명을 사살하고 경기관총 5정과 보총 140여자루, 권총 18자루, 탄알 만여발 그리고 무전기 한대를 로획하는 큰 전과를 올린다.
이에 앞서 1940년 3월 11일, 제2방면군이 대마록구 림산작업소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토벌의 왕자’ 로 불리던 마에다가 이 소식을 듣고 작업소를 습격한 항일부대의 추격에 나섰던 것이다. 이 때 그는 일본군과 신선대(神仙隊,장백산 일대의 치안숙청을 위해 세워진 친일무장조직) 170여명으로 구성된 화룡현(和龍縣) 토벌대를 이끌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뜻하지 않게 매복전에 걸려 홍기하의 ‘물귀신’으로 된 것이다. 후날 일본군은 이 전장터에 ‘마에다 중대의 격전터’라는 글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그렇다면 항일련군은 누구로부터, 또 어떻게 토벌대의 행적을 미리 알게 된 것일가?
장장 60여년 동안 의문으로 남았던 이 수수께끼는 홍기하와 동쪽으로 수십리나 떨어진 팔가자(八家子)진의 한 무덤에서 밝혀진다.
2000년 청명절, 룡정시 개산툰진(開山屯)에 살고 있던 김문필(金文弼, 88세)옹은 화룡시 팔가자진 상남촌(上南村) 1대에 있는 아버지 산소를 찾았다. 비석을 세우지 않아 부근의 무덤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제물을 차리려고 보니 상석(床石)이 떨어져 있었다. 주변에서 방목하던 소가 밟아놓았던 모양이다.
두만강 발원지
상석을 바로잡을 때 갑자기 손끝에 닿는 그 무슨 물건이 있었다. 봇나무 껍질을 돌돌 말아 베실로 동여놓은 한뼘 크기의 물건이였다. 앞뒤를 막고 겉에 초를 발라놓았는데 썩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마개를 뜯으니 종이말이가 떨어졌다.
종이에는 조선어와 중국어를 섞어 빽빽하게 적은 글자가 있었다. "김철운의 아들 김문국, 김문학, 김문필에게…"
이 첫 구절을 읽는 순간 김문필옹은 갑자기 가슴이 쿵쿵 세차게 높뛰였다. 김철운(金鐵雲)이란 바로 60년전 작고한 아버지의 성함이였기 때문이다.
"김철운동무는 민국(民國, 1912~1949) 19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로당원이며 적후투쟁에서 우리 당 동만항일유격대에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 우수한 정보원이였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홍기하전투의 대승리는 김철운동무의 정보와 갈라놓을 수 없다…"
여직까지 몰랐던 아버지의 진실한 신분이 밝혀지는 순간, 김문필옹은 솟구치는 격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는 상석 앞에 엎디여 꺼이꺼이 황소울음을 터뜨렸다.
"내 나이 70이 넘도록 아버지가 뭘하는 사람인지 몰랐는데…” 아버지가 이런 중요한 일을 하면서 그 모진 고생을 한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니.
김문필옹은 부친의 행적들이 이제야 비로소 감이 잡히기 시작하였다. 온 가족이 2~3일씩 굶으며 살아가는데 ‘돈벌이'를 간다고 나간 아버지는 한달이고 두달이고 들어오는 법이 없었다. 몇달 만에 돌아올 때는 늘 빈손이였다. 집에 와서 멀건 죽물을 마시다가 또 돈 벌러 나간다고 (미장)공구 망태기를 메고 나가면 몇달이고 돌아오지 않았다.
끝간데를 모르고 피여있는 야생화
부친은 또 시도 때도 없이 불쑥 나타나 가족들을 닥달해 이사를 강행했다. 그런데 번마다 이사짐을 푼 지 몇달 되지 않아 또 다른 곳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정말 난봉을 부리고 돌아다니는 ‘건달’행세였다. 팔가자와 개산툰 등 지역을 전전하던 부친은 또 큰 사단을 일으키기도 했다. 개산툰팔프공장에서 일본 십장을 두들겨 반죽음을 만들었던 것이다.
부친은 청진감옥에 투옥되여 미구에 피투성이 된 몸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얼마 후 또 집을 나갔고 몇달 후에는 반송장이 되여 홑담요를 쓴 채 들것에 들려왔다. 어디선가 하복부에 사발 만큼한 큰 상처를 입고 있었다. 꿈틀거리는 창자가 보일 정도로 심했다. 뻘건 인두에 지진 상처라고 했다. 결국 그 상처가 탈이 되여 부친은 1940년 6월 저세상으로 가셨던 것이다.
편지에는 민국 29년 10월 29일, 동북항일연군 제2군 유격대원 류경수(柳京洙)와 강위룡(姜渭龍)이 김철운을 만나러 왔다가 그가 이미 사망했다는 것을 알게 됐고 비통한 심정으로 글쪽지를 김철운의 무덤에 묻어놓고 간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오늘날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기질 않고 있는 선녀욕지
해당 부문의 감정을 거쳐 봇나무 껍질 속의 편지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 2급 문물로 지정되였다. 김철운은 2001년 9월 25일, 길림성정부에 의해 항일혁명렬사로 추앙되였다
동북항일혁명투쟁에서 일제놈들의 기염을 여지없이 꺾어버리고 항일인민들의 투지를 고무하고 혁명신념을 키워준 전설의 홍기하전투 그리고 이름없는 한 정보원에 관한 에피소드는 그대로 오늘날 항일가요를 열창하며 항일정신을 기리는 팀원들의 가슴에 이름할 수 없는 격정을 심어주었다.
푸르른 기상이 약동하는 당년의 장백밀영에서 동북항일련군의 숨결이 바람 타고 실려오고 그들이 다녀간 자취마다에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여 꽃축제가 한창이다.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쟁취하고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꽃피우려던 그 하얀 넋과 진붉은 피, 노란 동경은 그대로 하얗게 빨갛게 노랗게 꽃으로 피여 강산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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