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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한락연의 발자취 따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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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한락연의 발자취 따라(3)

○ 김동수

 
한락연사진(한락연의 딸 한건립 제공)

2. 동란의 년대

동북의 겨울철은 춥기가 장난이 아니다. 박달나무 윙윙 소리내 울고 얼음장이 쩡쩡 갈라터지고 살을 에이는듯한 북풍은 눈보라를 휘몰아 마을과 올망졸망 들어앉은 초가집들을 덮친다. 그 속에서도 사람들은 부단히 끈질긴 생명의 불꽃을 잉태하며 용케도 겨울철을 이겨내고 새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추운 겨울이 따스한 봄을 낳는 것은 어길 수 없는 대자연의 순리였다.

한락연은 1898년 12월 8일 해란강과 륙도하가 합치는 두물목에서 동남쪽으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당시의 룡정토성포―지금의 룡정시 공농촌의 한 빈곤한 개척민인 청주 한씨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한락연은 어렸을 때 부친 한재흥(韩在兴)을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구차하게 살았다. 한락연의 원명은 광우﹙光宇﹚이며 자는 락연이다. 일명 행지(幸之)로도 불렸으며 구라파류학시기에는 한소공(韩素功), 한수공(韩树功)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당시의 국제 국내 사정은 어떠했을가?

한락연이 태여나기 4년전인 1894년에 중일갑오전쟁이 폭발하였는데 전쟁에서 패한 청정부는 일본제국주의의 군사적 압력하에 굴욕적이고 불평등한 〈마관조약〉을 체결하였다.

일제는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宗主权)을 완전히 빼았고 청나라로 하여금 조선의 내정에 일절 간섭하지 못하게 하였다. 일본에서는 조선은 자주의 나라여야 한다는 허울하에 조선문제에 손을 대고 제멋대로 조선땅으로 자기들의 세력을 확대하였다.

1904년―1905년에 일어난 일로전쟁에서 로씨야는 일본에게 패하였고 따라서 일본은 조선에서 로씨야의 세력까지 완전히 몰아냈다. 조선에 대한 통제를 가강하기 위하여 1905년 11월, 일본은 조선에 통감부(统监府)를 설치하고 이등박문을 통감으로 임명하고 조선의 립법, 행정, 인사 및 교육의 대권을 장악하고 조선 리씨왕조의 군대까지 해산해버렸다.

1910년 8월 22일, 일본은 조선의 군신들을 핍박하여 〈일한합병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때로부터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를 자랑하던 조선은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였다. 한입에 조선을 삼킨 일제는 총독부(总督府)로 통감부를 교체하고 륙군대장 데라우찌마사다께(寺内正毅)를 총독으로 임명하고 ‘무단정치’를 실시하면서 수시로 출병하여 조선인민들의 반항을 진압하였다.

한락연은 대내외적으로 여러가지 전쟁과 동란으로 불안한 시기에 출생,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들의 새로운 집거지중의 하나로 한창 이루어지고 있고 따라서 조선의 혁명가들과 민족주의자들이 동북에로의 이주와 망명의 첫발자국을 밟아야 하는 룡정이라는 특수한 지역에서 성장하였다.

한락연은 어려서부터 일본제국주의의 가혹한 통치하에 국토가 볼품없이 분렬되고 민족이 굴욕을 당해야 하는 비참한 처지를 목격하면서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분투하려는 결심을 가지게 되였다.

한락연 조상들의 원적은 조선 함경북도 종성이라고 한다. 종성은 함경북도 북부 6읍(무산, 회령, 종성, 온성, 경원, 경흥)중의 하나로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오늘의 룡정시 개산툰진 일대와 이웃하고 있는 지리적인 우세로 당시 다른 지역보다 먼저 많은 조선인들이 중국땅으로 이주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간도라는 명칭이 불려진 곳도 이 지역인 점만으로도 충분히 긍정할 수 있다고 사료된다.

청주 한씨의 족보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청주 한씨는 충청북도 청주시를 본관으로 하고 있으며 시조는 한란﹙韩蘭﹚이다. 청주 한씨 가운데서 관북파(关北派)는 평안북도 안변 및 함경도 함흥, 영흥 등 각처에 널려있었다고 한다. 함경도를 관북이라고 지칭함은 ‘철령관’ 북쪽이라는 데서 비롯되였다. 철령은 함경남도 안변군과 강원도 회양군 사이에 있는 큰 재(령)라고 한다.

현재 룡정시조선족민속박물관에 소장되여있는 《관북청주한씨대동보전》(关北清州韩氏大同谱全)은 한기방(韩基邦)이 서문을 쓰고 직접 집필하였는데 관북파 시조 한련﹙韩连﹚으로부터 시작하여 32대까지 기록되여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한락연의 아버지 한재흥의 래력은 찾지 못한 것이다.

조선인들은 력대로 교육을 중시하였다. 어느 곳에 마을이 이루어지면 우선 먼저 생겨나는 것이 서당이였고 학교였다. 소를 팔아서도 자식 공부를 시켰다는 말이 근거없이 하는 말이 아니였다.

한락연은 6살에 마을에 있는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웠는데 어려서부터 그림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 그는 시간만 있으면 산수화, 온갖 새와 짐승 그리고 사람들 하여튼 눈에 보이는 것이면 뭐나 다 그리였다. 아버지는 그림을 그려서는 앞으로 밥을 먹고 살아갈 수 없으니 공부를 잘하여 장차 좋은 직장을 얻을 것만을 바라면서 그림 그리는 것을 반대하였다. 한락연은 아버지의 눈을 피하여 마을 밖에 있는 공동묘지에 가서 남몰래 땅을 책 삼아 그림을 그리면서 화가의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한락연이 9살 나던 해 가정의 대들보 역할을 하던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섬약한 어머니의 로동에 의해 생계를 유지하였다. 심양로신미술학원 리광군교수는 《한락연의 생애와 예술관》이라는 저서에서 “어머니는 아들의 앞길을 생각하여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여 그를 서전서숙에 입학시켰다.”고 서술하였다.

서전서숙은 리상설이 주도로 리동녕, 정순만, 려준, 박정서 등 조선의 민족주의자들의 로력의 결실로 1906년 10월경에 룡정에서 개숙한 민족주의 교육의 요람이였다. 현재 서전서숙 학생으로 성명이 전해지고 있는 사람은 갑반에 윤정희, 리병징, 윤규한, 김정문, 남세극, 채우석, 리한용, 구자승, 구정서, 을반에 김학연, 박일병, 오병묵, 리정징, 박효언, 구자익, 박세호이다. 그 밖에 반을 알 수 없는 남위언 등도 있다. 불행히도 서전서숙은 이듬해인 1907년 9월경에 문을 닫고 말았다.

비록 우에서 언급한 자료에서 한락연의 이름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시간적으로나 근대적 교육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서전서숙 설립의 의의와 당시 룡정의 정황을 종합해 추론하면 한락연이 서전서숙에 입학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1914년경에 한락연은 ‘간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 학교의 전신은 1908년 6월, 일제가 서전서숙 자리에 세운 ‘간도보통학교’인데 1911년 6월부터 ‘간도공립보통학교’라고 불리웠고 1921년 7월부터는 ‘간도중앙학교’라고 교명을 바꾸었다. ‘간도보통학교’의 제1임 교장은 스즈끼신다로(铃木信太郎)라는 일본인이였고 학생은 48명이였다고 한다. 따라서 가르치는 과목도 조선어보다는 일본어 쪽에 많이 치우쳤다.

이런 교육환경에서 이 학교를 나온 한락연은 조선어와 일본어에 겸하여 한어까지 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일본은 1912년부터 조선과 연변지역의 략탈과 통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룡정에 전화국을 세우고 훈춘, 길림, 조선 회령 등 곳에 통신망을 이어놓았다고 한다. 그 때 전화국에서는 한어와 조선어를 아는 교환수를 모집하고 있었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공부를 더할 수 없게 된 한락연은 백부의 소개로 룡정 전화국의 교환원으로 취직하여 직장에서 중학교 과정을 자습하면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다고 한다.

얼마 안되여 룡정에 있는 해관 직원으로 발탁된 것은 한락연의 일생에서 중요한 계기라고 할 수 있다.

림무웅선생은 《중국조선민족미술사》에서 “한락연은 룡정에 있는 길장도 해관에서 모집하는 해관사무원 응모 시험에 합격되여 해관에서 일하게 되였다. 당시 룡정 해관에는 외문서적과 전국의 여러가지 간행물, 서적들이 많이 소장되여있었다. 그는 이러한 조건을 리용하여 외문서적을 탐독하여 정치와 세계 정세에 관심을 가졌으며 시간을 내여 미술공부에 힘써 서양화의 표현방법도 초보적으로 습득하였다.”고 서술하였다. 《중국조선족인물전》은 “그 때의 길장도해관은 외국 사람들의 손에 쥐여져있었는데 상해해관의 관할범위에 들어있어 련계범위가 아주 넓었다.”고 기재하였다.

소애(肃艾)는 1947년 11월 9일 《신강일보》에 발표한 〈한락연선생을 추모하여〉란 문장에서 “당시 해관에는 많은 영국화보들이 있었는데 그는 보배처럼 여기고 매일 서양화를 감상하고 연구하였다. 이런 그림들은 그에게 많은 계발을 주었는데 능히 예술의 맹아시기라고 말할 수 있었다.”고 서술하였다.

룡정시 길승가해관위 문패

해관시절의 한가지 에피소드를 한락연의 부인 류옥하는 “어느 하루 영국사람들이 사무실을 점검하다가 그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매우 흥미롭게 감상하고 그를 정식 직원으로 채용하고 월급까지 올려줬다.”고 회억하였다.

한락연 본인도 1944년 12월에 발표한 〈나의 학습경험과 생활태도〉란 문장에서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내가 겪은 여러가지 생활들은 나에게 자립적으로 분투할 수 있는 의력을 갖추어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때문에 스스로 생존하고 학습하는 과정에 한시각도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한락연 일생에서 이처럼 중요한 작용을 했던 룡정해관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자료와 사실에서 그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풀어보았다.

1909년 11월 5일, 청정부는 연변은 물론 길림성에서 제일 처음으로 되는 해관인 훈춘총관(지점은 현재 훈춘시병원 울안)을 설립하였다. 이듬해인 1910년 훈춘총관은 룡정에 룡정촌분관을 설치하였는데 연길분관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청정부의 총무사 로버트하트(罗伯特赫德)는 더싼구리닌(德栓古里宁)을 길림의 세무사로 임명하였다. 더싼구리닌은 길림성에 부임되여와 처음으로 관세행정기관을 어디에 설립할지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훈춘에서 현지고찰을 하였다. 로버트하트는 더싼구리닌의 보고에 근거하여 영국인 헤이런드(贺伦德)를 파견해 17명을 인솔하여 훈춘에 가서 세관을 설립하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길림성의 첫 해관인 훈춘총세관이다. 설립시간은 1909년 12월 27일이였다.

 
한락연의 딸 한건립녀사 취재

1924년 천도경편철로의 개통과 함께 룡정의 무역이 급증하면서 1924년 8월 1일부터 룡정분관이 총관으로 승격되고 훈춘총관은 분관으로 강급되였다. 비록 해관은 청정부에서 세웠다고는 하지만 실권은 거의 전부 영국사람들이 장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1932년 6월 29일 일본군관 미야모도(宫本)는 무력으로 룡정해관을 점령하고 룡정세관(税关)이라고 이름을 고치고 훈춘해관을 포함하여 저들의 통치를 시작하였다.

이상의 자료로부터 한락연이 다니였던 해관은 일본세관이 아니라 청나라에서 세웠지만 실권은 영국사람들 수중에 장악되여있던 룡정해관이라는 것은 명백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룡정 시청 대문 앞 거리인 륙도하로를 따라 남쪽으로 삼합방향으로 10분 정도 걸어가면 길승가 룡남촌이 나타난다. 조금 더 가 동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서쪽으로 꺾어들어 첫번째 작은 골목이 해관가(海关街)인데 골목 남쪽 입구에는 지금도 몇십년 잘되는 비술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단층집 개조가 한창인 어지러운 공사현장에서 필자는 ‘룡정시 길승가 해관위 8조 26호’라는 붉은색 문패를 찾아 수집하였다. 기의하고 우연한 인연인지는 몰라도 필자는 약 20여년전에 이 골목의 25평방되는 낮다란 단층집에서 3년간이나 살면서 동네 어른들한테서 해관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들은 기억이 있다.

이외에도 1920년대 후반 룡정은 연변의 주요한 물류집산지와 무역성이였다. 시구역내에만도 여섯개의 일정한 규모를 갖춘 무역시장이 꾸며졌는데 오늘의 룡정고중 뒤골목에는 해관시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락연이 해관에서 근무한 시간을 1914년부터 1919년까지 근 5년간이라고도 사료된다.

사람의 일생에서 5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다. 금방 세상을 향해 어섯눈을 떴고 한창 자기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형성되고 무르익는 시기에 외계를 향해 열린 창구라고 할 수 있는 해관에서의 5년간의 생활은 한락연의 일생에서는 아침태양이 금방 동산에 얼굴을 내민 8시―9시경이라고 할 수 있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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