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게 뭔 꼴인겨.아니 사내대장부가 아낙네들한테 둘러싸여 너풀너풀 춤이나 추고… 어휴 남사스러워라.”
아침 5시 30분,일찍 공원산책을 나온 한 할아버지가 아니꼽다는듯 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그렇게 하면서도 아주 싫지는 않은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자꾸만 춤판을 벌린 곳으로 눈길을 돌린다.이윽해서는 신나는 노래가락에 맞춰 어깨까지 들썩이기도 한다…
연길시인민공원앞 아름드리 소나무아래에서 녀성들에게 춤을 가르치고있는 주인공은 김석관(56살)씨이다. 그는 우리 주위에서 쌀에 늬만큼 보기 드문 남성댄스강사이다.
조선족민요에 맞추어 자유롭게 춤추는 김석관씨를 처음 보는 사람은 누구나 조금 이상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겠지만 이 세상 근심걱정 모두 털어놓고 신나게 춤추는 모습이 눈코뜰새없이 바삐 돌아치며 힘들게 살아가는 요즘 사람들보다 무척 행복해보인다.
자그마한 체구에 알록달록 화사한 옷을 차려입고 조선족춤을 추는 김석관씨의 모습은 례사롭지가 않다.제일 먼저 춤출 때의 현란한 손동작이 눈길을 끈다.손목을 유연하게 비틀고 손가락 하나하나에 춤사위가 깃들어있는데 그 동작이 하도 아름다와 함께 춤추는 아낙네들은 물론 오고가는 사람들마저 그의 춤솜씨에 찬단을 금치 못한다.
주부강습생들에게 유난히 인기가 많은 그는 지금은 춤을 가르치고있지만 5년전까지만 해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힘든 외국생활도 하고 남방도시로 보따리장사도 하던 평범한 세대주이다.
그런 그가 나이 50살을 넘긴 “후줄근”한 아저씨가 다 돼서 고향으로 돌아와 댄스강사의 길을 선택한데는 젊은 시절 어쩔수 없이 접을수밖에 없었던 예술인의 삶을 다시 시작하고싶었기때문이였다.
그는 학창시절부터 오락부장을 도맡으며 넘치는 끼를 주체하지 못했고 노래와 춤에도 뛰여나 각종 경연대회를 휩쓸고 다닌 소문난 춤군이였다.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무용을 전공한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화룡가무단에서 8년 동안 무용강사로 지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주머니사정이 푼푼치 못한 예술인의 삶은 늘 각박할수밖에 없었다.째지게 가난했던 가정형편에 가족들의 일손을 도울수밖에 없었던 그는 어쩔수 없이 예술인으로 살고싶었던 자신의 꿈을 뒤로 하고 생업에 종사하게 됐다.
오로지 가족을 위해 외롭고 힘든 30여년의 객지생활을 버텨온 그는 50을 넘겨서도 자신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꿈을 외면할수가 없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삶의 전부였던 춤을 통해 또 다른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싶었습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와 공원에서 민요에 맞춰 조선족춤을 추기 시작한 지도 2년이 넘는다.또 2010년에는 연변수향(守乡)문화추진회란 협회를 등록하고 700여평방메터 되는 춤련습실까지 갖춰놓았다.
“처음에는 다 늙은 아저씨가 나이먹고 주책맞게 춤이나 춘다고 흉이나 보지 않을가 주저주저했습니다.하지만 그때는 막연히 춤이 좋았고 온통 머리속에 춤생각뿐이였습니다. 춤출 때라야 심장이 비로소 뛰는것 같았고 인생이 즐거워졌습니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그의 지칠줄 모르는 열정이 전해졌을가.이제는 강습생들도 점점 불어 현재 200여명이 넘는다고 한다.아침,저녁에는 공원에서,하루낮은 련습실에서 그는 춤의 매력에 푹 빠져 살고있다.
이른아침부터 “옹헤야”,“흘라리”,“팔경가”… 등 경쾌한 우리 민족 노래가락이 도심 공원의 아침을 연다.
오늘도 김석관씨는 공원산책을 나온 사람들은 물론 아침반찬거리를 사러 나온 주부들에게까지도 춤바람을 불어넣는다.
“춤은 나이가 들어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배울수 있습니다.춤으로 건강도 다지고 웃음꽃도 피울수 있습니다. 많은분들이 춤으로 희망과 즐거움을 찾을수 있도록 힘이 되겠습니다.” 도심의 아침을 여는 "춤군"아저씨 김석관씨의 또 하나의 소망이기도 하다.
글·사진 신연희 박은희 기자
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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