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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고려' 내리막 끝에
새로운 나라 조선 세워지자
개국공신 정도전 기쁨 내색
선비 길재는 아쉬움 한가득
정몽주 포섭하려던 이방원
하여가로 설득 시도했지만
단심가 지어 대답한 정몽주
고려향한 충심 단호히 표현
[사진 제공 = 게티이미지뱅크]'오백 년'은 어느 정도의 길이일까. 오백 년은 한 사람이 결코 겪어낼 수 없는 아주 긴 시간이다. 우리가 가늠하기 쉽지 않은 꽤 오랜 기간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역사에 친숙한 사람이라면 '오백 년' 하면 자연스레 '고려'가 떠오른다. 아주 먼 옛날 한반도에 자리 잡았던 나라 고려가 오백 년 정도의 역사를 가졌기 때문이다.
'길재'라는 선비가 남긴 노랫말이다. '오백 년'이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이 시에서 오백 년은 고려가 이 땅에서 건재했던 기간을 가리킨다. 이 시의 작가는 고려의 몰락과 조선의 건국을 모두 지켜본 사람이다.
시 속 화자는 고려 왕조의 옛 도읍지를 거닐다가 산과 냇물을 바라본다. 그리고 아쉬움을 느낀다. 산이나 냇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지만, 세상을 호령하던 고려의 옛 영웅들은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작가의 마음은 조선보다 고려 쪽으로 더 기울어져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기에 이 짧은 노랫말에도 아쉬움이 한가득 묻어 있다. 길이는 짧지만 이 노래가 전달하는 아쉬움의 크기는 작지 않다. 작가는 새 나라인 조선을 반기는 쪽이 아니라 고려의 몰락을 아쉬워하는 쪽이었다. 고려를 그리워하는 작가의 마음도 가늠할 수 없이 커 보인다.
고려의 몰락을 아쉬워한 사람이 있었다면, 다른 쪽에서는 조선의 시작을 기뻐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정도전은 길재와 같은 시대에 활동한 선비다. 하지만 이 둘이 택한 노선은 꽤 많이 달랐다. 길재가 저무는 해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아쉬워하는 쪽이었다면, 정도전은 새롭게 떠오르는 해를 반기는 쪽이었다.
'선인교'는 개성에 있는 다리의 이름이고, '자하동'은 개성에 자리한 마을 이름이다. 모두 고려 도읍지인 '개성'에 자리 잡은 것들이다. 화자는 개성에서 물소리를 듣고 있다. 그런데 화자에게 개성은 더 이상 고려 도읍지가 아니라 물소리 가득한 동네에 불과하다. 찬란했던 고려의 영광은 모두 사라지고 이제는 물소리만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이다. 고려는 더 이상 회복 불가의 상태라고 판단한 화자의 확신이 담겨 있다. 노랫말 속 화자는 아이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사실 이 질문은 의문을 가장한 지적이다. 화자는 아이에게 더 이상 고려의 흥하고 망함을 묻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고려의 흥망은 더 이상 관심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고려가 내리막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당대를 살고 있던 대부분 사람들이 알고 있던 사실일 것이다. 오백 년을 이어온 왕조가 하루아침에 몰락할 리는 없다. 꽤 오랜 기간 내리막을 걸었을 것이고, 그 역사의 마무리를 모두가 예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고려의 몰락과 새 나라의 도래를 확신하는 화자는 이제 더 이상 왕조의 흥망을 묻는 일이 소용없다고 꼬집어 이야기하는 것이다. 저물어가는 고려를 잊고 새롭게 시작하는 조선에 집중하자는 의도다.
우리는 여러 시조를 통해 고려와 조선의 갈림길에 선 선조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의 입장 차이는 분명해 보인다. 시조 속 인물들은 고려를 아쉬워하거나 조선을 반기는 입장 중 하나를 단호하게 보인다. 그 입장 차이를 선명하게 보이는 작품이 바로 이방원과 정몽주가 주고받았다는 '하여가'와 '단심가'다.
이방원은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아들이자 조선의 세 번째 왕이다. 하여가는 이방원이 고려 충신 정몽주에게 건넸다는 노랫말이다. 이 노랫말은 '이러면 어떠하고 저러면 어떠하냐'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칡덩굴이 좀 얽힌다고 해서 그게 무슨 대수냐는 것이다. 능청스럽게 질문을 던지고 있지만, 이 물음의 의도는 정몽주를 설득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함께할 나라가 고려인지 조선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면서, 정몽주를 조선 쪽으로 강하게 당기고 있는 것이다. 고려 충신이자 수많은 제자를 거느린 정몽주를 자기 편으로 포섭한다면 이방원은 아주 큰 지원군을 얻는 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정몽주의 대답은 너무나 단호하다. 하여가에 대한 답가인 단심가를 보면 그의 단호함에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다. 화자는 자신의 몸이 모두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순간을 가정한다. 그리고 그 순간까지도 고려를 향한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한다. 설득을 시도한 이방원의 하여가가 민망해질 정도의 단호함이다.
역사의 전환기에 선 사람들은 각자 나름의 가치관과 신념에 따라 자신이 걸어갈 길을 선택한다.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결정일 것이다. 잘못하다가는 역적이 되거나 시대에 뒤처진 사람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아주 먼 옛날 이 땅에서 오백 년을 이어온 고려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선조들은 자신들이 가진 가장 민감한 촉과 지혜를 풀어내 자신의 입장을 정했다. 수많은 고심 끝에 각자의 입장을 취하고 그것을 노랫말로 남겼던 것이다. 우리는 옛 시조를 통해 역사의 격변기를 겪어내는 선조들의 고민과 마음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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