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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이의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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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고향에 부치는 편지 댓글:  조회:1568  추천:0  2020-01-31
 신종 코로나가 무한에서 발병한 이래 항상 설마 하면서 마음을 졸였던 일이 끝내 터지고 말았습니다. 이미 중국은 물론 세계 어느 지역도 안전지대가 없다는 것을 실증해주고 있는 신종 코로나에 고향마저 신종코로나에 뚫렸습니다.   내가 태여난 보람을 걸고 인생이 첫 자국을 찍었던 곳, 딱지치기, 다마치기, 팽이놀이, 쪽발기 타기를 함께 하던 소꿉친구들이 지금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여 손주들의 재롱으로 여생을 즐기는, 내 동심이 파랗게 살아있는 고향이 어쩌면 이번에 뚫렸습니다.   어디에 가도 우리말이 정답게 들려오고 아이들이 우리글을 읽는 낭랑한 소리가 들리던 곳, 나의 삶에 나래를 달아준 정든 모교에서 내 후배, 그 후배들의 후배, 또 그 후배들의 후배들이 대를 이어 나래를 굳히던 고향이 어쩌면 이번에 뚫렸습니다.   사랑의 어섯눈을 뜨게 해주고 지금도 내가 사랑하는 분들, 또 나를 사랑하는 분들이 나를 항상 지켜봐주시고 격려의 말씀을 주시고 사랑을 나누어 주시고 있는 고향이 어쩌면 이번에 뚫렸습니다.   타향에서도 항상 두 눈에 담고 그리움을 달랬던 곳, 전근된 후 북경 생활에 적응이 되지 않아 고향의 후한 인심이 그리워 다시 환고향할 생각마저 하게 했던 마음의 전당, 지난 사스 때 여차하면 모든 걸 뿌리치고 고향 간다면서 “내 뒤엔 항상 고향이 있다”고 호언장담을 할 정도로 내 인생의 버팀목이 되여온 고향마저 어쩌면 이번에 뚫렸습니다.   마치도 느닷없이 도둑놈한테 집이 털린 느낌입니다. 허망감, 좌절감이 엄습하지만 스스로 떨쳐내고 있습니다. 워낙 고향이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백두산이 성산으로 그냥 천하를 굽어보고 만민이 성산을 우러러보고 있는 한 태고연한 고향은 힘이 있습니다.   두만강 해란강 전설의 강, 기적의 강이 그냥 옥토를 적시고 마음을 씻어주고 있는 한 기적의 고향은 힘이 있습니다.   선구자의 노래가 그냥 울리고 엄동설한을 이겨내고 봄이면 어김없이 진달래를 피우는 양지바른 언덕에서 선렬들이 미소를 짓고 굽어보시고 있는 한 영웅의 고향은 힘이 있습니다.   례절 바르고 인품이 넉넉한 분들이 고향을 지키고 있고 멀리 타향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항상 고향을 그리고 고향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고향사람들이 있는 한 마음의 고향은 힘이 있습니다.   워낙 고향이 막강한 힘이 있기에 “고향이여 힘내시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힘을 보태기만 하면 됩니다. 새해 진달래가 동토를 녹이고 다시 꽃을 피울 때가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 꽃피는 계절이면 인적이 거의 끊겼던 거리가 활력으로 넘치고 초조와 불안, 짜증과 불만으로 주름진 얼굴에 미소와 웃음이 실리고 해빛 밝은 교정에서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꿈을 불러오고 후한 인심으로 만방의 벗님네들을 다시 불러들일 때 나는 고향의 노래를 목청껏 부르겠습니다.   고향산 기슭에 올라서니 사철 푸른 소나무 반겨주고 장원들 노래 소리 들려오누나 아 사랑스런 산천이여 아 내 정든 고향이여 조국의 변강이여…
24    “성실수신(诚实守信)” 댓글:  조회:2373  추천:0  2019-01-28
 정부는 새해벽두부터 성실하고 신용있는 국민, 정부가 되자는 슬로건을 각별히 각광시키고 있다. 이 슬로건을 한마디로 줄이면“성신(诚信)”이다.  “성신(诚信)”은 “성실수신(诚实守信)”이란 성구애서 나온 말인데 우리말로 풀이하면 성실하고 신용을 지켜야 한다는것이다. “성신(诚信)”은 이미 몇 해전 정부 총리의 정부실무보고에서 제기되였고 또 어느 해인가 대학입시의 어문시험 작문 시제로 나오기도 했는데 왜서 올해 새삼스럽게 다시 각광을 받을가? 심사숙고할 과제임이 분명하다.  성실과 신용는 민족의 종합적인 자질의 구현이자 현대 문명의 기석이고 표징이다. 인간사이에 성실과 신용이 없으면 남는것이란 거짓뿐이고 기업과 기업사이에 성실과 신용이 없으면 사기행각만 있을 뿐이며 정부가 성실과 신용를 잃으면 사회의 불안정이 초래될 뿐이다.  여기서 성실로 신용를 쌓은 이야기를 잠간 짚고 넘어갈가 한다. 세계 상계에서 백화점의 왕으로 불리운 미국의 존 와너메이커(John Wanamaker)는 어린 시절부터 성실과 신용을 가장 중히 여겼다.  소년시절 그는 담임선생한테서 책 한 권을 산적이 있다. 그 책값이 2달러 75센트인데 당시 그의 저금통에는 37센트 밖에 없었다. 비록 돈은 모자라지만 그 책은 꼭 사서 봐야 할 책이였다. 하여 그는 선생님에게 이런 청을 들었다.  “제가 매주 조금씩 돈을 갚아도 되겠습니까? 열심히 일해서 그 돈을 꼭 갚겠습니다.”  선생님은 그의 진지한 표정에 쾌히 승낙했다. 그 날 이후 그는 나머지 책값을 벌기 위해 매일 짬만 있으면 벽돌공장에 나가 삯일을 했는데 책 산 돈을 갚는데 꼬박 1년 반이 걸렸다고 한다. 꼬박 1년 반을 열심히 일해 빚진 돈을 갚고야 만 그는 커서 상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에도 성실과 신용, 그리고 친절을 생명처럼 간주했다. 그것이 바로 그를 세계 “백화점 왕”으로 되게 했던것이다.  성실하고 신용을 지키는것은 상업도덕에서 가장 중요한 규범이다. 상업경제가 비교적 발달했던 명, 청 시기에 상인들은 성실과 신용을 성공의 비결로 삼았다고 한다. 지금도 시장경제의 기본적인 신조와 준칙이 바로 성실과 신용의 원칙이다. 즉 성실로 신용을 쌓는것이다.  성실하고 신용를 지키는것은 중국의 전통적인 도덕에서 가장 중요한 규범의 하나이기도 하다. 공자는 한사람이 “성실과 신용을 잃으면 립신양명 할수 없다”고 했다.  이런 실례가 있다. 독일에서 공부하는 한 중국 류학생이 지하철을 탈 때 지하철 입구의 란간이 아주 낮은것을 보고 표를 사지 않고 그냥 뛰여넘어 들어갔다. 어느 하루 그 류학생이 면접차 한 회사를 찾아갔는데 그가 말을 꺼내기도전에 회사측의 거절을 받았다. 회사측의 거절을 받은 원인은 단 하나, 그것인즉 지하철 표마저 사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가지 않는 사람이니 회사직원으로 쓸수 없다는것이였다. 이 실례는 사소한 일에서도 성실하지 못하고 신용이 없는 사람은 사회생활에서나 인간교제에서나 모두 인정을 받을수 없다는 단적인 실례로 되겠다.  필자도 창작생애중 성실하지 못하고 신용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종종 대하게 되였고 또 그런 자들로 인해 피해를 입은적도 있다. 비록 거액은 아니지만 평소 알고지내던 사람한테 돈을 사기당한적도 있고 영화를 찍는다, 대형 다큐멘타리를 제작한다, 획기적인 예술무대를 꾸민다는 감언리설에  넘어가 시나리오, 무대예술 각본, 다큐멘타리 대본을 열심히 써주었다가 고배를 마신적이 여러번 된다. 헛고생만 했지만 필자는 사기행각을 벌인 장본인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주었다.  “작가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자는 사실 돈을 사기친 자들보다 더 비렬한 사기꾼들이야. 작가의 자존심은 작가의 존엄이니 함부로 그 존엄을 건드리지 마. 그리고 한마디 더 보탤 말은 성실과 신용를 잃으면 인간으로서의 존재가치를 잃은것이고 인간되기를 거부한것이니 이 말 명심해!”  성실과 신용은 또한 예로부터 중국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으로 되여왔다. 중국의 고대 사상가들은 성실과 신용을 천하를 다스리는 주요한 수단의 하나로 간주해왔다. 당나라시기 당태종을 보좌해 정사편찬에 큰 기여를 한 학자이자 재상인 위징(魏征)은 “성실과 신용은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고리”라고 했다.성실하고 신용있는 사회는 어디까지나 성실하고 신용있는 국민들과 정부가 꾸려나가야 할 사회가 아닐가.    
23    한해를 마감하는 길목에서 오헨리를 만나다 댓글:  조회:2009  추천:0  2019-01-19
  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겨주던 단풍이 한 잎 두 잎 락엽으로 떨어져 내리면 지나온 한해를 마감하는 길목에 들어서게 된다. 바람에 날려가고 날려오는 락엽을 밟으며 산책길에 나서면 저도모르게 락엽보다 가을의 마지막 “선물”이라는 앙상한 나뭇가지에 매달린 잎새에 눈길이 간다. 오헨리의 명작 “마지막 잎새”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페병으로 절망에 빠진 한 소녀가 창문너머로 보이는 담쟁이덩굴 잎이 다 떨어지면 생을 마감한다고 괴로워한다. 그런데 혹독한 추위에도 단 한잎만 지지않고 벽에 달라붙어 있다. 자신의 생을 마감할 그 잎이 떨어지길 기다리던 소녀는 나중에야 떨어지지 않는 “마지막 잎새”의 비밀을 알게 된다. 그 잎새는 평생 화가라는 명함 한장 내밀지 못했던 무명 화가가 마지막 유작으로 소녀에게 그려준 “생명의 잎새”였고 화가 생애의 최고 걸작이였다. 마지막 잎새까지 다 떨어지자 소녀에게 희망을 주려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 혼신을 다하여 “생명의 잎새”를 그려놓고 숨진  늙은 화가의 숭고함에 지금도 한껏 경의가 간다.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는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을 살리기 위한 무명 화가의 숭고한 예술혼이 아름답게 그려진 작품으로 오헨리의 단편소설중  가장 유명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렌리는 이 소설을 감옥에서 썼다. 은행 직원이였던 오헨리는 공금 횡령 혐의를 쓰고 타국으로 피신했다가 안해가 위독하다는 련락을 받고 귀국했지만 안해의 림종을 지키지 못하고 감옥에 갇히게 된다. 어찌보면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는 위독한 안해에게 주는 “생명의 잎새”이기도 하다. 비록 그 잎새가 오헨리의 안해에게는 “생명의 잎새”가 되지 못했지만 그 “잎새”는 희망의 상징으로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필자는 올해 가을 피치못할 사정으로 병원신세를 한 열흘간 지게 되였는데 그 때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또 한번 읽었다. 문학에 어섯눈이 뜨면서 명작가의 명작에 대한 호기심으로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첨 읽었다. 그러나 이 소설을 다시 읽으니 감회가 예전과 같지않다.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는 마치도 필자에게 주는 “희망의 잎새”가 아닐가싶은 생각이 든다. 절망한 자에게는 희망을, 허무한 생을 사는 자에게는 생의 숭고함을 알게하는것이 곧 명작임을 절감했다.  오헨리가 그린 “잎새”에 비견이 될 “횃불”이 있는데 그 “횃불”은 시인 엠마 나자루스의 시 “새로운 거상”이다. 이 시는 미국 독립 100주년 축시로 자유녀신상 받침대에 새겨졌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이다.  “지치고 가난하고 자유를 숨쉬기를 열망하는 가련한 사람들을 나에게 보내다오 폭풍우에 시달린 고향없는 자들을 나에게 보내다오 황금의 문 곁에서 내가 희망의 횃불을 높이 들리니 …”  한해를 마감해야 할 길목에서 오헨리를 만나 엠마 나자루스까지 거들게 된것이 행운이 아닐까. 지나온 한해가 “보람찬” 한해였나 아니면 “다사다난”한 한해였나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또다시 새로운 기대에 젖어 “송구영신” 준비에 분주해진다. 분주함을 잠깐이나마 뒤로하고 희망을 주는 “잎새”와 “횃불”을 떠올려보면서 마음을 추스려봄도 좋을듯 싶다.  오헨리와 작별인사를 나누기전 필자가 물었다. “감옥에서 시작된 창작생애에서 무려 3백여편의 단편소설을 남기게 된 비결은?” “눈을 돌리는 곳마다 이야깃거리가 있습니다. 세상만사가 모두 작품의 소재가 됩니다. 오늘 당신과의 만남에도 이야깃거리가 있습니다.”  “아무리 일상적이고 진부한 삶이라도 진지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상상력을 독자들은 작가의 마술적 힘이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마술적 힘이 아니고 난 그저 독자들의 가슴을 한순간이나마 따뜻하게 해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오헨리가 독자들에게 주려는 그 따스함은 생의 희망이고 용기이고 인간에 대한 사랑이 아닐가. 오헨리는 독자들에게 누군가가 “마지막 잎새”를 그려주기를 기다리기보다도 자신이 먼저 남에게 “마지막 잎새”로 남아줘야 한다는 계시를 주고 있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매달린 잎새 하나마저도 무심히 지나칠수 없게 해주고 새해에 대한 기대를 더 부풀게 해준 오헨리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22    《마지막 한 수》 댓글:  조회:3329  추천:4  2015-08-16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 동년의 추억이라고 합니다. 동년이란 어디까지나 세상을 항상 아름답게 보고 또 아름답게 보이는 세상에서 황홀한 꿈을 가져보는 시절이기에 한사람의 인생행로에서 동년은 잊혀지지 않을 아름다운 시절로 꿈같은 시절로 파랗게 살아있습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꿈을 가져라, 그것도 대담하게 큰 꿈을 가져라. 그러나 꿈을 가질 때 어느 때 가서 그 꿈이 현실로 되지 못하고 깨져버리게 될 때 오는 허무감, 절망감을 이겨낼 용기도 함께 가져야 한다.》 꿈은 꼭 깨기 마련입니다. 꿈이 깨지면 현실입니다. 어쩌면 황홀한 꿈에 비해 그 현실은 엄혹한 현실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큰 포부를 가지고 큰 사업을 시작한 사람이 그 꿈을 채 이루기전에 이런저런 사정으로 절망의 심연에 빠져버리는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하기에 황홀한 꿈과 비참한 절망은 종이장 한 장을 사이두고 있을 뿐이라는 말이 생겨났는지도 모릅니다. 언제나 이 세상을 락천적으로 살아가는 유태인들에게는 《마지막 한 수》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한 박물관에 악마와 인간이 장기를 두고 있는 그림이 붙어있었는데 악마가 인간에게 장훈을 부르고 있는 장면을 그린 그 그림의 제목이 바로 《마지막 한 수》입니다. 그러니까 악마가 궁지에 몰린 인간에게 마지막 한 수, 그것도 치명적인 마지막 한 수를 썼다는 뜻입니다. 그 그림을 감상하던 중 한 사람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그림은 제목이 잘못된 그림이야. 악마가 인간에게 마지막 한 수를 쓰다니, 이럴 수가 있어. 인간에겐 희망이 있어. 마지막 한 수는 응당 인간이 악마에게 써야 하는 거야.》 그래서 그 그림의 제목은 바뀌지 않았지만 뜻은 정반대로 인간이 악마에게 마지막 한 수를 쓰는것으로 바뀌였습니다. 악마와의 겨룸에서도 인간은 어디까지나 악마를 이길 수 있는 마지막 한 수를 가지고 있다는것, 말하자면 그 어떤 역경속에서도 인간이 그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지자면 언제나 희망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계시를 주는 이야깁니다. 이 이야기를 유태인들은 이렇게 뜻풀이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짐승보다 다른 점은 꿈이 있기 때문이다. 꿈이 있으면 희망이 생긴다. 역경을 당해 절망하는 사람은 다만 그 희망을 찾아내지 못했을 뿐이다.》 역시 좋은 계시를 주는 뜻풀이입니다. 《마지막 한 수》, 그 한 수를 항상 남겨두시기 바랍니다.  
21    쥐와 고양이 동거 설 댓글:  조회:3805  추천:2  2015-07-01
  제가 아침마다 수영하러 가는 길에 빈터가 하나 있습니다. 부동산 회사에서 매립이 안된 땅인지 아니면 도시개발계획에 들어가지 않은 땅인지 이사 온지 몇 해 동안 그냥 빈터로 방치되여 있는 땅입니다. 그 빈터는 어느 때부터인지 몸 단련 삼아 나와 연을 날리는 곳으로 되였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빈터에서 연을 날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납득이 안 가는게 있는데 늙은이나 젊은이나 남자나 녀자를 막론하고 날리는 연이 죄다 독수리입니다. 연 날리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아침이면 하늘엔 크고 작은 독수리가 십여 마리가 유유히 하늘에서 날아 예고 있습니다. 독수리가 진짜가 아니고 가짜이지만 그 주변엔 뭇새들은 물론 도시에서 늘상 보는 비둘기마저 얼씬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비둘기 떼가 독수리 주변에서 자유로이 날아예고 있었습니다. 자연계에선 있을 수 없는 광경입니다. 듣는바에 의하면 독수리 한 마리가 하늘에서 선회하면 독수리 시야범위에 든 그 구역의 하늘엔 나는 새가 없고 땅에는 노니는 짐승이 없다고 합니다. 이젠 비둘기도 독수리가 자연계의 맹수인 진짜 독수리가 아니고 사람들 손에 쥐여진 끈에 의해 조정되는 연이란것을 안 모양입니다. 그 광경을 보니 어릴 때 논밭에 세워진 허수아비가 생각났습니다. 구멍난 낡은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두 팔을 한 일자로 벌린 채 사람들이 그려준 그 표정 그대로 밤이고 낮이고 그냥 서 있는 허수아비. 첨엔 새들이 사람인줄 알고 범접을 못하다가 후에는 아예 허수아비 머리에 앉아 깃을 다듬고 있었습니다. 허수아비는 어디까지나 말 그대로 허수아비에 불과합니다. 연으로 된 독수리나 허수아비는 가짜이기에 그렇다 치더라도 진짜 천적이 루루천년 자기 먹이로 되여온 사냥물을 무서워하는 광경은 충격적이였습니다. 지금 아파트 단지에서 애완동물을 기르는 집들이 많습니다. 애완동물에는 고양이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어느 하루 아침, 저는 애완동물로 기르는 고양이가 쥐를 무서워 주인의 품에 안기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였습니다. 별로 큰 쥐도 아닌데 고양이가 가는 앞을 가로질러 갔는데 고양이가 아예 질겁해서 주인의 몸에 달라붙는것이였습니다. 고양이가 쥐를 무서워하는걸 첨 보았다고 하니 친구중 한 사람이 하는 말이 그게 바로 뉴스 감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지금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었다면 뉴스 감이 아니지. 뉴스 감은 그것도 특종은 쥐가 고양이를 잡아먹었다는 거야.” 쥐가 고양이를 잡아먹었다는 이야기는 정경유착과 부정부패를 비꼰 정치유머에서 나옵니다. 그 유머는 이러합니다. 하루는 쥐 세 마리가 모여서 자기가 어떻게 고양이를 다루었다는 자랑을 늘여놓았습니다. 처음 입을 연 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어제 식구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갔는데 공원에서 고양이를 만났지. 내가 아주 당당하게 안녕 하고 인사하니 그 녀석도 안녕하고 인사를 받지 않나.” 이 말을 다른 한 쥐가 주둥이를 닦으며 받았습니다. “나 지금 바로 그 녀석이 청한 연회에 가서 대접받고 오는 길이야. 그 녀석 대접이 이만저만이 아니더군 그래.” 세 번째 쥐가 하품을 연신 해대며 말했습니다. “아 졸려, 난 어제 밤 그 녀석하고 온 밤을 샜어. 그 녀석이 어찌나 들볶아 대는지 어제 밤 한 잠도 못 잤어. 나 지금 또 그 녀석한테 가야 해. 아마 그 녀석 덜 만족했나봐.” 바로 이 유머에서 나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금전과 권력의 결탁으로 행해지는 부정부패를 이르는 말에 “고양이와 쥐의 동거”란 말이 있습니다. 쥐에게는 고양이는 예로부터 천적입니다. 그런 천적이 천적 노릇을 못하고 오히려 자기가 잡아야 할 상대와 결탁하고 놀아난다는 이 유머는 시사해주는 바가 참으로 많습니다. 하늘을 유유히 날아 예지만 어디까지나 가짜인 독수리, 또 새를 쫓지 못하고 그냥 멍청히 자리만 지키고 있는 허수아비, 진짜 고양이는 고양이되 오히려 쥐를 무서워하는 고양이, 이런 현상과 류사한것들을 우리 인간생활에서도 흔히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입니다.
20    《청빈락도》 댓글:  조회:3044  추천:4  2015-06-09
   우리말에 청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엔 청빈이란 말을 성품이 너무 깨끗하여 살아가기가 힘들다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옛날 선비들을 가리켜 청빈한 선비라고 했습니다. 살아가기가 힘들더라도 깨끗한 성품을 고이 지켜 가는것이 선비라는 뜻입니다. 또 “청빈락도”란 말도 있습니다. 사전에 올린 말을 보면 “청빈락도”란 청렴결백하고 가난하게 사는것을 옳은것으로 여기고 즐기는것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  청빈한 선비의 이야기는 많고도 많지만 오늘은 청빈한 선비 이야기보다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곡가의 이야기를 잠깐 짚고 넘어갈 가 합니다. 세계 근대 음악사에서 가곡 창작의 왕으로 불리는 오스트리아 작곡가 슈베르트는 초기 독일 랑만파의 대표적 작곡가의 한 사람이며 근대 독일 가곡의 창시자로, 600여 곡의 독일 가곡과 실내악곡, 교향곡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째지게 가난하여 그냥 배를 곯는 신세였습니다. 한번은 배고픔을 참다못해 한 식당에 들어가 식탁 우에 놓인 신문에 실린 시 한 수에 곡을 붙여 그 가곡으로 삼은 감자 몇 알을 바꾸어 허기진 배를 달랬습니다. 그 때 그 가곡이 슈베르트가 세상을 뜬 후 30년이 지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요람곡”으로 되여 감자 몇 알로 바꾼 악보가 4만 프랑에 경매되였다고 합니다.  세상 떠날 때까지 손에 돈 한푼 없이 음악 창작에 몰두해 온 슈베르트는 생전에 명과 부를 이루지 못했지만 그는 일생을 거쳐 창작한 작품으로 세계 음악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장식했습니다. 청빈한 작곡가의 한생은 이름이 조금 알려지기 시작하면 명과 부를 탐내는 사람들에게는 자기의 삶을 비춰 보고 반성해 보는 거울이 아니겠습니까.  세월이 좋아진 지금 다시 “청빈락도”이라는 말을 떠올려 보면서 그 뜻을 되새겨 봅니다.  [
19    문화적인 여유 댓글:  조회:2785  추천:1  2014-10-02
     국경일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몇 해전 만해도 명절 휴일을 공원이나 영화관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문화적인 휴식공간이 많이 생겨나 선택의 여지가 있게 된 것은 물론 경제적인 사정이 많이 편해져 가족끼리 국내 관광이나 해외 예행을 가거나 체육관에 가서 신체단련과 그 즐거움을 향유한다던가 그렇지 않으면 대자연의 정취에 젖어보려고 산이나 초원을 찾는 분들도 많습니다. 휴일에 가족끼리 역사, 지리, 천문, 해양 등 지식을 늘여주는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고 합니다. 이는 사람들의 휴식문화차원이 전보다 많이 높아졌다는 일례로 됩니다.  예전엔 휴일이면 기껏해야 공원놀이를 가거나 백화상점이나 돌아보고 그렇지 않으면 집에서 죽치고 앉아 텔레비젼이나 보고 마작이나 트럼프를 놀면서 시간을 보낸 데 반해 지금은 휴일이 문화적인 휴일로 되어 휴일문화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휴일이 문화적이 되고 휴일문화를 이루고 있는 것은 특기할만한 일입니다.  누군가 일상에 쫓기고 여유가 없는 민족보다도 마음으로 느긋한 여유를 가진 민족, 말하자면 문화적으로 여유를 가진 민족이 새로운 세기의 주역으로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휴일도 문화적으로 보내고 그 휴일을 문화로 승화시켜 휴일문화를 형성하고 그속에서 삶의 원동력에 충전을 하는 것이 현대인들의 휴일문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유태인들은 휴일을 신성한 날로 간주합니다. 유태인들이 휴일을 보내는데 있어서 가장 독특한 것은 휴일에 일에 대해 얘기해서는 안된 다는 점입니다. 때문에 휴일의 화제에는 자연히 인생관이라든가 인간성, 혹은 예술이 아니면 자연, 가정 등 화제가 오릅니다. 그들은 휴일에도 사업 때문에 괴로워하고 일감을 가지고 집에 와서 서류와 씨름하는 사람을 불행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유태인들이 휴일을 신성한 날로 간주하는 것은 휴일에 사람들이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유태인들의 인생지침서인 [탈무드]에는 [휴일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지 인간이 휴일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 휴일을 쉬는 방법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적혀있습니다.  이런 실례가 있습니다. 한사람이 연휴를 맞아 등산을 가게 되었는데 일주일동안 신문을 보지 않았답니다. 왜서 신문을 보지 않았는가 하니 그 사람이 하는 말이 [그토록 아름다운 대자연의 나무를 찍어서 이처럼 추한 신문을 만들어냈으니 인간들이 자연에 저지른 죄가 크다]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그 사람은 휴일에 등산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대자연의 품에 안겨 인간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휴일을 뜻깊게 보냈습니다.  연휴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자기를 인간으로서 참답게 바라보는 뜻깊고도 마음편한 명절의 연휴가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18    월인천강 댓글:  조회:3849  추천:2  2014-09-07
  추석은 설날과 더불어 2대 명절입니다. 예로부터 설날이 한해의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명절이라면 추석은 여름 동안 땀을 흘린 보람을 거두면서 풍요로움을 느끼는 명절로 전해 내려 왔습니다. 하기에 추석을 두고 《모든 곡식은 익고 과일은 풍성한데다가 날씨는 덥지도 차지도 않고 달은 밝아 속시원하니 가히 명절 중의 명절이라》고 읊조린 옛 시가 있습니다.  추석은 풍성한 수확을 도와준 자연과 조상에게 감사 드리고 가족과 단란히 모여 앉아 함께 즐기는 명절입니다.  생활의 세파에 쫓기던 사람들도 세속의 욕망을 잠시 버리고 부모의 품으로 고향의 품으로 달려가서 조상들에게 제를 지내고 고향의 이웃 어른들을 찾아 인사를 드리며 순수한 인정을 나눈다는 추석입니다. 그 추석을 앞두고 고향 떠나 타향에서 사는 사람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되는 것이 부모 생각, 고향 생각입니다.  옛 시에 월인천강이란 시구가 있습니다. 달은 하나이지만 그 모습은 천 갈래 강에 모두 비껴 있다는 시구대로 추석의 뜬 보름달은 산이나 바다, 도시나 시골이나 골고루 비춰 줍니다. 달보고 님 생각이란 말이 있다시피 추석의 달을 쳐다보며 부모 형제와 고향을 그리며 그 그리움을 부모 형제가 있는 고향 땅도 똑같이 비춰 주고 있는 유정한 달빛에 실어보는 것 또한 추석날에 달래 보는 조금은 처량하지만 그러나 정이 그윽한 향수가 아니겠습니까.  옛적부터 우리 조상들은 추석에 살림이 어려운 집도 좋은 음식을 장만해 놓고 조상에게 제를 지내고 이웃끼리 서로 정을 나누었고 병자나 거지도 고향에 가서 성묘하도록 성의껏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니 추석은 또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서로가 감사해 하고 훈훈한 사랑의 정을 나누는 명절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인간애가 넘치는 아름다운 명절입니다.  고층 빌딩이 숲을 이룬 대도시에서 자그마한 삶의 공간인 아파트에서 살면서 이웃에 사는 사람의 이름이 뭔지도 모르고 지내 온 도시인으로서 조상들의 추석날 미풍양속을 헤아려 보노라니 어쩐지 얼굴이 뜨거워 남을 어쩔 수 없습니다.  분주한 일상에 쫓기고 치열한 경쟁에 지친 몸이라지만 추석날만은 조금은 느긋한 마음이 되어 하늘에 뜬 보름달을 쳐다보면서 향수도 달래고 주위 사람들과 훈훈한 인정도 나누면서 추석의 보름달이 둥글고 밝은 만큼 인간들 서로간의 믿음과 앞날의 꿈도 더 부풀고 빛날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 보아야겠다는 것이 추석을 맞는 마음가짐이 아닐 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추석이 여러분들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을 명절이 되길 바랍니다     
17    《몸이 곧으면 그림자가 굽을 수 없다》 댓글:  조회:3023  추천:4  2014-08-05
      예로부터 선인들은 사람의 욕심 중에서 과욕으로 신상에 해를 주고 나아가 일생까지 망치게 하는 욕심을 여러가지를 꼽았는데 그중 권세욕과 물욕을 앞자리에 놓았다.  지금에 와서도 립신양명의 출세가도를 달리면서 너무 지나치게 권세에 집착하는 권세욕과 돈과 재물을 취하는 물욕을 경계하지 않을수 없다.  권세욕과 물욕에 대해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인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권력이라는것은 권력을 갖는것 자체를 위해 추구되고 향유된다》 고 했다. 이 말은 권세에 집착하는 사람은 권세의 추구와 그 권세에 의해 향수를 탐하는 속성이 있다는 말로 풀이된다.  권세의 힘이 막강하다고해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비유했다. 권력에 의한 부정부패는 력사적으로 존재해 내려온 문제였다. 부정이란 사전의 올림말로 풀이하면 깨끗하지 못하고 더러운 것이라는 뜻이다. 부패란 단어는 글자그대로 썩었다는 뜻 외에도 바르지 못한 것, 또는 타락이란 뜻으로도 쓰인다. 부정부패는 어디까지나 그 단어의 고유한 뜻대로 깨끗하지 못하고 더러운 것이기에 썩어버리기 마련이다.  우리말 속담에 돈의 마력을 이르는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 는 속담이 있지만 돈에 대한 물욕을 경계하는 《술은 사람의 얼굴을 붉게 하지만 누런 황금은 사람의 마음을 검게 만든다》 는 속담도 있다. 권세에 대한 그 추구와 향수를 지나치게 탐하면 권세와 그에 따른 향수는 자기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는 격이라는 말도 다시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중국의 대표적인 가훈서인 《안씨가훈》엔 인간의 지나친 욕심을 경계하는 이런 글이 있다.  《인간다운 생활에 필요한것이 의복이면 비와 이슬을 피할수 있으면 되고 먹는것이면 굶주림을 면하면 된다. 이 한몸 사치스러움은 쓸데가 없다.》  예전엔 백성을 다스리는 벼슬아치를 《목민관》이라고 불렀다. 글자그대로 풀이하면 백성을 기르는 벼슬아치, 말하자만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라는 뜻이다.  중국 도교 창시자 로자는 벼슬 가진 사람을 여러 등급으로 나누고 있다. 로자의 말을 지금 말로 풀이한다면 가장 뛰여난 지도자는 아래사람이 그의 존재를 의식하게 하는 지도자이고 그 다음 순서로는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지도자,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지도자이고 가장 최하위는 사람들에게 멸시받는 지도자이다.  지금으로부터 칠백년 전, 이미 지금의 말로 바꾸어 말하면 지도자로서 자질이 없는 인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1. 권세를 코 등에 걸고 사욕을 채운다.  2.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여념이 없다.  3. 늘 주지육림에 빠진다.  4. 친인척을 편애하고 자기 주위에 끌어들인다.  5. 늘 연회를 열고 놀러 다닌다.  6. 벼슬자리에서 얻는 리익에 쌍불을 켠다.  7. 본연의 직무에 몸 바쳐 일하지 않는다.  8. 집 식구들이 권세를 턱 대고 아무 짓이나 하는데 대해 눈을 감아준다.  이상 렬거한 조목은 권세에 의한 부정부패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자격이 없는 《목민관》, 다시 말하면 권세를 턱 대고 부정부패만 일삼는 벼슬아치에 대해 칠백년 전에 내린 평가가 지금에 와서도 부정부패만 일삼는 자들에게도 그대로 들어맞고 있다는것이 놀랍기만 하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고 그 표현형태가 다르지만 부정부패현상이 력사의 흐름속에서 소실될 대신 그냥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에 아연해질 수밖에 없다.  권력에 의한 부정부패 현상 중에서 가장 큰 부정부패는 사람을 등용하는 면에서의 부정부패라고 한다. 예로부터 탐관오리가 등용하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탐관오리들뿐이라는 말이 있다.  지난해 중국의 어느 한 현에서 부정부패를 일삼은 현위서기가 법적 제재를 받자 그 후임도 얼마 지나지 않아 역시 뇌물수수죄로 나떨어졌고 그 뒤를 이은 사람도 한해를 넘기지 못하고 독직죄, 회뢰죄로 법적 제재를 받았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부정부패의 련쇄적인 현상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부정부패를 일삼는 사람을 등용한 것으로 하여 이어지는 부정부패의 련쇄적인 현상이다. 이런 련쇄적인 현상이 가져오는 그 종말, 좀 거칠게 표현한다면 그 끝장이 똑같다는데서 우리는 다소 위안을 받을수 있다.  고대로부터 전해내려오는 격언에 《몸이 곧으면 그림자가 굽을 수 없다》는 충고가 있다. 세상 바르게 살라는 충고가 담긴 이 말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법치사회답게 법치에 의한 부패척결을 기대하면서 《송사 악비전》에서 나오는 《문관이 돈을 좋아하지 않고 무관이 죽음을 아끼지 않으면 곧 천하가 태평해진다.》는 말을 부언하고 싶다.  
16    어린이명절 선물 - 정토 댓글:  조회:2995  추천:3  2014-06-02
 어린이명절이 오면 부모들은 어린 자식에게 줄 명절선물에 대해 무척 신경을 쓰게 됩니다.  지금은 생활형편이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져서 어린이명절에 어린이에게 주는 선물도 다양해졌습니다.  북경 석간에 실린 한 학부모의 글이 너무 인상적 이여서 언급해봅니다. 그 학부모는 어린이명절을 맞아 자기 자식에게 어린이들을 상대로 출간하는 간행물을 정기 구독하도록 정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을 상대로 한다는 그 간행물에 어린이들이 보지 말아야 할 내용들이 실렸고 그 뿐만 아니라 폭력과 비행을 묘사한 글까지 실려 그 학부모의 분개를 자아냈습니다.  그 학부모는 이런 간행물은 어린이들에게는 하나의 정신오염이라고 쓰면서 어린이들에게 오염되지 않은 정토를 마련해주자고 호소했습니다.  정토란 말은 불교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정토란 티 없이 깨끗한 곳, 말하자면 극락정토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환경을 어린이들에게 마련해주자는 것이 그 학부모의 뜻이겠지요.  언젠가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한 소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자기가 직접 목격한 사실을 가지고 작문을 지어오라고 했는데 한 학생이 지어온 작문은 교원들뿐만 아니라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그 학생은 작문에 마약을 흡독한 후의 환각상태를 묘사했는데 그 묘사가 너무도 구체적이고 생동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했습니다. 그보다도 더 기막힌 것은 그 학생이 자기의 소망은 앞으로 마약을 흡독한 후에 오는 그 황홀감을 직접 체험해보고 싶은 것이라고 써서 사람들을 경악케 했습니다.  하늘에 걸린 무지개도 쫓아가면 손에 잡을 것 같은 천진한 동심을 가지고 장차 커서 우주비행선을 타고 달나라 별나라로 가는 황홀한 꿈을 꾸어야 할 나이에 마약이 주는 유혹을 자기의 가장 큰 소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 가슴아픈 일이지만 우리는 또한 그 어린 학생에게 그런 감수와 그런 소망을 안겨준 주변의 생활환경을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어린 학생이 생활하고 있는 주변의 생활환경이 어떠했으면 어린 나이에 그런 감수와 소망을 가지게 되었겠습니까.  어른들이 삶을 영위하는 생활공간, 그 삶의 공간이 오염된 공간이 아니라면 그 어린 학생은 그런 감수와 소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어른들의 생활공간만 오염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의 생활공간까지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오염시키는 금전만능, 도덕상실, 향락주의, 폭력, 마약 등 사회악은 어린이들에게도 그 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사회악뿐만 아니라 어른들의 일거일동마저도 어린이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얼마전 지하철에서 이런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한 어린이가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느라고 일어서자 그 곁에 섰던 한 청년이 제꺽 그 자리를 차지해버렸습니다. 《어른이 애들보다 못하다》는 말이 이래서 생겨났는지도 모릅니다. 시체 멋을 낸 그 청년은 주변의 시선이 따갑게 쏠려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방에서 책을 꺼내들었습니다. 곁에서 보니 그 청년이 읽는 책은 컴퓨터와 관련된 전문 서적 이였습니다. 그런 책을 읽을 정도면 적어도 대학을 졸업한 지식인이겠는데 남한테 양보하는 미덕은 고사하고 남이 양보한, 그것도 어린이가 양보한 자리를 차지하고도 털끝만치라도 미안한 마음도 없이 전문서적을 들여다보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장차 그 청년이 성공해서 컴퓨터박사나 컴퓨터회사의 사장이 된다고 할지라도 그 내면 세계는 먹이를 보면 제 배부터 채우겠다고 혈안이 되어 날치는 동물 세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리라. 한심한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자리를 양보한 어린이가 그 청년의 행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가 궁금했고 혹시 그 어린이가 그 청년의 행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 장차 커서 그 청년의 행실을 다시 되풀이 할가바 우려 되였습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어린이들 생활공간에 티 없이 깨끗한 정토를 마련해주자면 우선 어른들의 생활공간을 정리하고 깨끗하게 가꿔야 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니겠습니까. 오염된 세계엔 정토가 따로 없습니다. 황차 지구 전체가 오염으로 신음하는 지금 우리는 우리들의 미래인 어린이들의 세계에 다문 한 뙈기라도 정토를 마련해 주어야 할게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어린이명절에 주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싶은 생각이 듭니다.    
15    “말하는대로 이루어지는 한 해가 되소서!” 댓글:  조회:3255  추천:3  2014-04-05
   올해는 음력으로 청마의 해라고 한다. 음양오행에 따르면 말띠 해는 12년을 사이두고 5가지 색깔로 돌아오는데 청마의 해는 60년에 한번씩 온다니 참으로 귀한 해이다. 음향오행에 대해선 민속학자들이 풀이할 몫이고 필자가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것은 덕담이다. 음력을 사용하는 중국이나 한국의 경우 새해 덕담은 양력설 전야로부터 음력설까지 이어진다. 올해가 음력으로 60년에 한번씩 찾아오는 청마의 해이니 말과 관련된 덕담이 많을수 밖에 없다. 전한데 의하면 갑오년 청마의 해는 성공, 선구자, 장수, 강인함을 의미한다. 아마 말의 추진력, 행동력에 따른 신격화가 아닐가 싶다. 청마의 해 덕담을 두루 살펴보면 청마의 해가 가지는 푸르름이 뜻하는 행운의 기운을 담은 덕담이 위주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중국국제방송에서는 해마다 양력설과 음력설에 특집프로를 방송하고 있다. 주로 조선과 한국, 중국의 조선족 청취자들의 새해 소망을 다루는 프로다. 청취자들이 보내온 청마의 해 소망을 두루 모아보니 사자성어를 이용한 덕담이 많았다. “손쉽게 성공한다는 뜻의 마도성공(马到成功 )” “곧 바로 성공한다는 뜻의 마상성공(马上成功” “줄기차게 달린다는 뜻의 쾌마가편(快马加鞭)” “항상 선두에서 달린다는 뜻의 일마당선(一马当先)” “곧 돈이 생겨 부자 된다는 뜻의 마상유전(马上有钱)” “천리마가 백낙을 만나 천하에 알려진다는 뜻의 백낙일고(伯樂一顧)” 주로 긍정적인 에너지를 담은 사자성어였다. 말과 관련된 사자성어가 워낙 많기에 대체 얼마나 있는가 알고 싶어 검색해 보니 무려 380여개 사자성어가 뜨는것이였다. 한참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얼마전 격변하는 시대에 그 흐름에 합류하라는 내용을 담은 글 한 편을 보았는데 글이 인용한 사자성어가 “곧 바로 성공한다는 뜻의 마상성공(马上成功)”이였다. 누군가 시대 추세를 한 마리 말에 비유했다. 그의 말을 빈다면 “시대 추세가 말이라고 가정한다면 말 뒤를 따라 뛰면 영원히 말을 따라잡을수 없다. 방법은 오직 하나, 그냥 말을 탄다. 이것이 바로 마상성공(马上成功)이다.” 시대 추세를 따르지 못해 몰락한 실례에서 코닥필름, 노키아, 쏘니 등 한 때 쟁쟁했던 글로벌 기업이 자주 등장한다. 코닥필름은 1991년까지는 기술면에서 세계 동업종보다 10년을 앞섰지만 디지털시대의 도래를 외면했기에 2012년 1월 파산을 선고했다. 해마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는 곳이 원래는 코닥필름이 4천만 달러를 들여 20년 명명권을 따낸 할리우드의 코닥극장이였는데 파산선고로 극장 이름이 돌비극장으로 바뀌였다. 카메라 본산인 쏘니는 휴대폰에 카메라 기능을 장착한 노키아에 기가 꺽혔고 한참 잘 나가던 노키아는 컴퓨터 기업체인 애플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시대는 당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명언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청마의 해 번영을 기원하는 사자성어중 필자의 이목을 끄는 사자성어가 있다. 그것이 바로 “거수마용(车水马龙)”이다. “왕래하는 수레는 흐르는 물과 같고, 오가는 말은 꿈틀거리는 룡과 같다.”는 뜻인데 주로 번창함을 비유한다. 그런데 이 사자성구가 번창함을 뜻하는것이 아니라 아부하는 사람을 경계하라는 뜻에서 유래되였다는데서 필자는 이 글에 그 유래를 옮겨본다. “명덕 마왕 후기”에서 유래된 사자성어인데 동한 명장 마원의 딸이 태후로 되자 간신들이 아부하느라고 태후 형제들을 제후로 봉하라고 간언하자 태후는 “내 형제들 집 앞엔 인사하러 오는 사람들로 ‘거수마용’ 입디다.” 하면서 간신들의 청을 물리쳤다고 한다. 권력자에게 줄을 대려고 찾아오는 아부꾼들의 행렬을 빗댄 말인데 청마의 기운이 센 해에 권력의 기운에 편승해 보려는 움직임도 심상치 않을것 같아 미리 이 사자성어로 경종을 울려본다. 청마의 해 덕담에서 필자가 가장 선호하는 덕담은 “말하는대로 이루어지는 한 해가 되소서!”이다. “말하는대로”라면 아직도 진행형이다. 올해를 보내면서 그냥 매사에 뭔가 “말하면” 그대로 이루어지길 바라는 소망에서 나온 덕담이다.    “말하는대로”는 약속이나 언약이나 계획을 뜻한다. “말하는대로” 소망이 이루어지게 하려면 약속, 언약, 계획에 대한 리행이 따라야 한다. 개개인 뿐만 아니라 가정,  직장, 집단, 나아가 국가도 마찬가지다. 소망은 꿈으로도 통한다. 사람마다 꿈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아주 작은 꿈이라도 그런 꿈들이 모아지면 국민의 꿈이 된다. 권력, 금전, 명예를 가진 자나 없는 자를 막론하고 개개인이 자그마한 꿈이라도 이루는 한 해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청마의 해이니 어느 해보다 말처럼 역동적이고 말한대로 이루어지는 한 해가 되소서!   
14    보름달과 귀밝이술 댓글:  조회:3551  추천:0  2014-02-14
정월 대보름날을 원소절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상원절이라고도 했습니다. 예로부터 보름날 저녁에 등불구경을 하는 풍속이 있어 등불절이라고도 했습니다.  정월대보름날 행사에는 달맞이행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예로부터 보름달은 어둠을 몰아내는 밝음, 보다 밝은 세상을 약속하는 기원의 대상물로 숭상되어 왔습니다.  전해 내려온 풍속에는 대보름날 사람들은 초저녁 홰를 가지고 동산에 올라가서 보름달 솟기를 기다립니다. 솟아오르는 보름달을 먼저 보아야 길하다고 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마을 동산으로 올라갑니다. 달이 뜨면 홰에 불을 붙이고 절을 하며 소망을 빕니다. 이 날의 달빛을 보고 그 해 농사의 흉풍을 점치는 데 달빛이 희면 비가 많이 내리고 , 붉으면 가뭄이 들고, 흐리면 흉년이, 진하고 뚜렷하면 풍년이 든다는 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아마 그래서 《설 기분은 짙어야 좋고 보름은 밝아야 좋다》, 《정월 보름달을 보고 농사짓는다》는 말이 전해 내려온 것 같습니다.  대보름 달빛은 어둠과 질병, 재액을 밀어내는 밝음 상징이므로 이날 개인과 집단적 행사를 가져왔습니다. 예로부터 조선반도에서 정원대보름날에 행해지는 행사로는 부럼 깨물기, 더위팔기, 귀밝이술 마시기, 시절음식인 복쌈이나 묵은 나물 먹기와 달떡을 먹는 것이 있으며, 줄다리기, 다리 밟기, 고싸움, 돌싸움, 쥐불놀이, 탈놀이, 별신굿 등은 집단의 이익을 위한 대보름 행사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농경민족의 그런 행사모습을 보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정월대보름날 행사 중 아침에 행해지는 행사에는 귀밝이술 마시는 행사가 있는데 이날에 마시는 술을 이명주(耳明酒), 명이주(明耳酒), 치롱주(治聋酒), 총이주(聪耳酒)라고도 했습니다. 모두어 말하면 귀가 밝아지는 술이라는 뜻입니다. 옛날부터 전해 오는 풍속으로, 정월 보름날 아침에 데우지 않은 술 한 잔을 마시면 귀가 밝아지고, 그해 1년 동안 즐거운 소식을 듣는다고 하여 남녀노소 모두가 마셨다고 합니다.  가족끼리 단란히 모여 앉아 남녀노소 불문하고 서로가 덕담을 나누며 술 한잔 들면서 정월대보름날의 아침을 맞습니다. 그래서 정월 대보름날 만나는 사람에게 하는 인사말이 바로 오늘 아침 귀밝이술을 마셨는가 입니다. 1년 내내 귀로 좋은 소식만 듣기를 서로가 기원하는 이 풍속은 참으로 아름다운 풍속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귀밝이술의 그 함의가 조금씩 달라져가는 것도 지금의 실정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월대보름날 한 회사의 직원이 자기 상사 사무실에 들어가 상사한테 술 한잔 따라놓았습니다.  《회사에서 아침부터 웬 술인가?》  상사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니 직원이 하는 말이  《오늘이 무슨 날인지 잊으신가 본데요. 정월 대보름날입니다.》  《그럼 이 술은 귀밝이술이겠군. 고맙지만 아침에 집에서 귀밝이술 한잔하고 나오는 길이네.》  그 말에 직원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에서 드신 귀밝이술은 일년 내내 좋은 소식만 들으시라고 드셨겠지만 이 술은 그 뜻이 좀은 다릅니다. 이 술은 전체 직원들이 부장님께서 한해동안 수하직원들의 충언을 귀담아 들으시라는 뜻에서 올리는 술입니다.》  직원의 말에 그 상사가 한참 술잔을 내려다보다가 하는 말이 이러하더랍니다.  《이 잔은 그리 가벼운 잔이 아니군 그래》  수하직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려 달라고 올리는 술잔은 일년 내내 좋은 소식만 듣기를 바라면서 드는 술잔보다 무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찌 보면 이 이야기는 현대판 귀밝이술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목소리를 그것도 귀 따가운 충고든, 귀맛 좋은 축원이든 지어 거친 욕이든 다 들어줄 흉금을 가지면 더불어 사는 세상이 더 밝아지지 않을 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정월대보름날이 무거운 잔이든 가벼운 잔이든 귀밝이술을 들면서 서로가 덕담을 나누고 또 보름달을 보면서 한해의 소망을 비는 좋은 추억으로 남을 날이 되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13    음력설 유래 댓글:  조회:3977  추천:1  2014-01-24
 중국인들에게 있어선 음력설은 봄의 명절입니다. 하여 음력설을 춘절이라고도 합니다. 음력설의 유래는 유구합니다. 전한데 의하면 중국인들의 음력설은 4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초기에는 춘절이라고 하지 않고 고정된 날짜도 없었습니다. 기원전 2천백여년에 와서 목성이 한 바퀴를 도는 시간을 인년으로 하여 춘절을 설로 하였습니다. 기원전 천여 년 전 사람들은 해로 춘절을 표시하였습니다. 그 당시 해의 뜻은 오곡이 풍작을 이룩한다는 뜻입니다. 풍작을 거두면≪유년(有年)≫라 하고 대풍작을 거두면≪대유년(大有年)≫라고 하였습니다.   중국 민간 관습에 따르면 춘절은 음력으로 12월 23일부터 새해 정월 15일 원소절까지인데 앞뒤를 합치면 석주일이나 됩니다. 이 기간 12월 30일 그믐날 저녁과 정월 초하룻날은 가장 성대한 날입니다. 고대에 음력설을 ≪원일≫, ≪원단≫, ≪신년≫이라고 했습니다. 1911년 신해혁명 후 음력 정월 초하룻날을 음력설로 명명했습니다.   음력설을≪과년(過年)≫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년(年)≫은 사람들에게 재난을 가져다주는 상상속의 동물입니다. 옛날 설법에는≪년≫이 오면 초목이 말라죽고 만물이 소생하지 못합니다. 예로부터≪년≫이 가면 만물이 소생하고 백화가 만발한다고 전해내려 왔습니다. 하여 재난을 가져다주는≪년≫을 쫓기 위해 폭죽을 터트려 왔습니다. 때문에 폭죽을 터트리는 것은 중국인들이≪년≫을 쫓는 설날의 풍속으로 되었습니다.   지금 음력설 행사에는 하늘과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내용은 사라졌습니다. 그 대신 생활정취가 다분한 내용들, 예하면 춘련과 년화, ≪복≫자를 붙이고 물만두를 빚고 폭죽을 터뜨리고 세배하는 것이 음력설행사로 자리 잡았습니다.   음력설전 사람들은 자기 집 문 양쪽에 붓으로 쓴 새해 기원을 담은 춘련을 붙입니다. 문이나 창문에 행운을 기원하는 그림을 붙입니다. 춘련과 년화를 붙이는 것은 지금도 중국의 농촌과 일부 도시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음력설 행사의 하나입니다. 춘련과 년화를 붙이는 행사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춘련과 년화는 폭죽을 터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귀신을 쫓고 액막이는 하는데서 유래되었습니다. 춘련과 년화외에도 대문이나 등롱에 써 붙이는≪복≫자나 재물 신 그림도 역시 중국인들이 새해의 행운을 기원하는 행사입니다. 복자는 보통 거꾸로 붙이는데 그 뜻인즉 복이 왔다는 뜻입니다.   음력설은 가족, 친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명절입니다. 이 점에서 크리스마스를 쇠는 것과 비슷합니다. 타향에 있던 사람들은 어른이나 어린이나 막론하고 음력설에는 부모님을 찾아 귀향길에 오릅니다.   음력설 전날인 그믐날은 가족이 모이는 날입니다. 그믐날밤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풍성한 음식을 나누는데 이 음식을 묵은해를 보내는 음식이라고 합니다. 그믐날밤 음식을 나눈 후 보통 물만두를 빚어 먹습니다.   중국에는≪맛 나는 음식은 그래도 물만두≫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만두를 빚자면 먼저 밀가루를 이기고 물만두소를 여러 가지 야채와 고기로 만듭니다. 밀가루를 이기는 것을 중국어로≪허맨≫이라고 하는데 이 말의 음은 모인다는≪합(合)>이라는 말과 음이 같습니다. 물만두는 중국어로≪죠즈≫라고  하는데 여기서≪죠>는 교류라는≪교(交)≫자와 발음이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밀가루를 이긴다는≪허맨≫이라는 허자와 음이 같은 모인다는≪합>과 물만두를 일컫는 ≪죠즈≫라는≪죠≫자와 음이 비슷한 교류라는≪교≫는 함께 모여 교류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중국인들은 그믐날에 한 가족이 모여 물만두를 빚어 먹는 것으로 가족의 단란한 화합을 기원했습니다.   그믐날에 밤을 새면서 새해를 맞이하는 것은 중국인들이 음력설을 쇠는 가장 중요한 행사입니다. 중국인들은 그믐날밤에 남녀노소가 한자리에 모여 술과 음식을 나누고 덕담을 하면서 날을 샙니다. 새날이 밝으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새 옷을 갈아입고 가장 연세가 많은 분한테 세배를 드립니다. 그담 친척집이나 친구 집이나 이웃집에 가서 새해의 축복을 드립니다.   중국에서는 음력설 명절분위기가 약 보름동안 지속됩니다. 음력설후 보름이 지나면 정월대보름입니다. 정월대보름날도 중국에서는 전통적인 명절의 하나인데 원소절이라고도 합니다. 원소절이 지나면 음력설 명절행사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12    가장 소중한 재산 댓글:  조회:3246  추천:10  2014-01-14
   요즘 항간에 화제로 되고 있는 일이 하나 있다. 부동산개발과 주택개혁 붐을 타고 상품주택이 많이 팔리고 있는데 상품주택을 산 주인 이름이 어린이 이름으로 된것이 적지않아 항간의 화제로 되고 있다. 지금 어린 자식의 이름으로 상품주택을 사는 부모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실례로 한 사업가는 유치원에 다니는 5섯살 난 어린 자식의 이름으로 몇 백만 원을 고가 하는 호화주택을 마련했다고 한다. 그 부모는 《우리 세대가 지금 고생하는 목적은 후대에게 재산을 물려주려는데 있다》고 하면서 어린 자식의 이름으로 호화주택을 마련한 그 이유를 밝혔다.   7살난 어린 자식의 이름으로 주택을 마련한 다른 한 부모는 중국에서 유산세를 징수하지 않고 있는 지금 미리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주려는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어린 자식의 이름으로 주택을 마련하는 현상을 두고 교육학자들은 깊은 우려를 보이고 있다. 한 아동 심리학자는 어린 자식의 이름으로 수십만, 지어는 몇 백만 원을 고가하는 주택을 사두는것은 어린이한테 조금도 이로움이 없으며 오히려 어린이 성장에 해를 끼칠 뿐이라고 지적했다. 해외에서 돈을 벌어 가지고 돌아 온 한 부모는 자기는 비록 몇 백만에 달하는 거액의 돈을 가지고 있고 승용차도 두 대나 있지만 자식에겐 엄하게 요구하여 매일 공공버스를 타고 다니게 했다. 그 부모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능력으로 자식한테 남들보다 월등한 물질 조건을 마련해줄 수 있지만 앞으로 자식이 사회에서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은 부모가 키워줄 수 없습니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다. 무엇이 자식에게 남겨줄 가장 값있는 재산일가? 이 문제는 예로부터 제기 되어 온 심각한 문제이다. 이 문제에서 선인들이 좋은 본을 보여 준 실례가 많고도 많다. 그 중 한가지 이야기만 예 들가한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재산이 뭔가를 말해 주는 이야기다. 하루는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항해를 즐기고 있었다. 배를 탄 사람들 중 허름한 옷을 입고 책 한 권만 손에 든 사람을 내놓고는 모두 큰 부자들이었기에 호화로운 옷을 입고 온갖 보석으로 치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의 집이 얼마나 크고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를 서로 뽐내고 있었다.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은 부자들의 말에 끼여들지 않고 한켠에 조용히 앉아 책만 읽고 있었다. 부자들 중 한 사람이 책만 읽고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아까부터 말없이 책만 읽고 있는 것을 보니 재산이 없는 모양이군. 그래 그 책에서 재산이라도 나오는가?》 그러자 책을 읽던 그 사람이 말했다. 《저에게도 재산이 많습니다. 아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들보다 더 큰 재산이 있지요.》 《그래 당신의 재산은 얼마나 됩니까? 그 허름한 옷을 보니 재산이 있기보다도 거지 신세나 겨우 면한 것 같은데.》 부자들이 조소하자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내 재산을 공개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당신들도 내가 얼마나 큰 부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부자들은 그 사람이 정신이 잘못된 사람이라고 치부했다. 배가 육지를 멀리 떠나자 해적들이 나타나 부자들이 가지고 있던 보석이며 집문서이며 저금통장이며 입은 옷까지도 죄다 빼앗았다. 유독 해적들이 빼앗아가지 않은것은 허름한 옷을 입은 그 사람이 읽던 책이였다. 배는 더 이상 항해 할 수 없어 가까운 낯선 항구에 닻을 내렸다. 해적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알거지로 된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짐꾼이 되거나 남의 심부름이나 해주면서 근근득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책을 읽던 그 사람은 낯선 고장이지만 학교를 꾸리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로부터 얼마간 세월이 흐른 뒤 어느 날 책을 읽던 그 사람은 지난날 함께 여행을 했던 부자들을 만났다. 그 젯날의 부자들은 모두가 비참한 가난뱅이가 되어 하루하루를 굶지 않고 먹고사는것만도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지난날 자신들이 거지 신세나 면한 사람으로 깔보던 그 사람 앞에서 고관대작들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뉘우쳤다. 《당신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입니다. 지식은 누구에게 빼앗기는 일없이 안심하고 지닐 수 있는 가장 값있는 재산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지식을 가진 것은 이 세상 모든것을 가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도리를 뒤늦게야 깨우친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거액의 돈을 들여 어린 자식에게 주택을 장만해주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가 충고가 될 가싶어 다시 떠올려 봤다.
11    작가의 “직장” 댓글:  조회:3709  추천:1  2013-11-03
 직장을 갖고 있으면 직장인이다. 몸 담고 있는 곳이 직장이라면 나도 직장을 여러번 바꾸었다. 중국의 근무년한 규정에 따르면 나의 첫 직장은 “광활한 천지”다. 왜냐하면 당시 농촌으로 간 지식청년은 귀향지식청년과 달리 농촌에 간 그날부터 근무년한이 시작된다.  첫 “직장”은 참으로 거창한 “직장”이였다. 당시 유행된 말로 간추리면 “광활한 천지”라고 이름지은 나의 첫 “직장”은 “밭고랑을 타고 세계를 내다보고” 호미로 땅을 긁으면서도 “지구를 다스리는” 곳이였다. 그렇게 3년반을 “세계를 내다보며 지구를 다스렸다” (집체호 식구들)    그담 이어진 “직장”은 꿈많던 학창시절이였다.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마치고 배치받은 곳은 연길현문공단(후엔 룡정시예술단이라고 명칭) 창작실이였다. 그 뒤로 북경영화학원 시나리오작가반, 연변문예창작실, 연변텔레비전방송국을 전전하다가 지금의중국국제방송국에 눌러앉았다.  15살에 “직장인”으로 사회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난 나 자신을직장인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별로 없다. 직장인이라면 우선 직장인으로서의 긍지감이 있을거고 잇따라 따라오는것이 수없이 겪게되는 갈등과 고뇌, 거기에 겹치는 가정, 명예, 승진 등등 요인으로 받게되는 스트레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상술한 직장인으로서 받아야 할 그런 갈등,고뇌, 스트레스를 별로 받지 않고 말하자면 “멋대로” 살아왔기에 나 자신을 직장인 계열에 세우고 싶지않다. 한것은 나에겐 또 다른 나로서의 “직장”이 있었기 때문. 그 직장이 바로 작가로서의 “직장”이다.  15살에 어쩔수없이 몸담게 된 “광활한 천지”는 나의 처녀작이 “탄생”한 곳이다. 당시 아버님은 “반동학술권위”, “간첩” 루명을 쓰고 수감돼 있었고 난 “개자식”으로 몰려 농촌에 가서도 당시 그 많던 회의에도 참가할 수 없었다. 그냥 수걱수걱 일만 했다. 밭갈이부터 김매기, 후치질, 가을걷이, 겨울엔 소 사양원, 못해본 일이 없었고 어느 한해는 내가 최고 공수를 벌었다. 405공, 그러나 한 공에 38전, 그것도 현금이 없어 그냥 장부책에만 기록만 되였다.    낮에 일하고 밤에는 하늘의 별만 쳐다 보고, 그러다가 어쩌다 쓴 글이 소 사양원이 어떻게 소를 잘 키워 생산대의 살림을 한몫 떠멘다는 시같지도 않은 시였다. 생각밖에도 그 시가 1972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문화혁명기간 처음으로 펴낸 시집 “태양의 빛발아래”에 수록되여 나의 창작생애에서 처녀작으로 된것이다.  연변대학 학창시절은 작가의 꿈을 꾸던 시절이였다. 그러나 당시 작가는 “고린내나는 아홉째”에 속했다. 첫 학기를 마치며 한반에 있는 학우와 술 한잔 나누면서 난 후에 작가가 될거야 하고 했는데 그 학우가 내 말을 선생님한테 “회보(고자질)”했다. 그 이튿날 담임선생님이 하는 말이 이랬다.   “우리 반에 아직도 자산계급 명리사상에 물젖어 작가가 되고 싶다고 하는 학생이 있는데 그 학생은 자아반성을 잘해야 될것 같소.” 당시 감옥에서 풀려나온 아버님은 나에게 “작가는 항상 먼저 얻어맞는 사람이기에 절대 작가가 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사내가 한번 칼을 빼들었으면 잡초라도 베라”는 말과 같이 나는 “한번 빼든 칼”을 휘둘러 보기로 결단했다. 지금도 이 말은 나에게는 좌우명이다.                                                                        연변대학 학우들(1973년)  어쨌든간 대학에서 작가가 될 꿈을 무르익혔고 그 꿈을 현실로되게 한 곳이 연길현문공단이였다. 가사, 연극, 소설에 두각을 내밀었는데 당시 최고의 히트작은 연극 “두부장사”, “시름거리 웃음거리”, “울고웃는 사람들”이였다. 단막극 “두부장사”는 제1회 연변연극제 1등상을 수상했고 장막연극 “시름거리 웃음거리”는 수상은 물론 당시 공연차수에서 사상최고를 기록했다. 연길현문공단은 나에겐 명실공히 작가의 첫 “직장”이였다.  그후로 나의 작가생애는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일년에 집에있는 시간이 명절까지 합해서 두달 밖에 안되였다. 온 사회가 나의 무대였고 모든 사람들이 나의 주인공이였다. 사회 전체가 나의 “직장”이 된것이다. 중국 전역에서 티베트와 해남도를 내놓고 거이 다 “답사”했다. 얼마나 나돌아 다녔으면 나의 안해가 “난 생과부와 같아”라고 했을가.                                       연변대학 출신 원로작가님들과 (조성일, 김태갑, 리상각)함께    사실 나의 안해는 내 작품의 첫 독자, 아니 “검열관”이다. 작품을 발표하기 전에 나는 무조건 안해한테 작품 “검열”을 맡긴다.안해가 “괜찮아” 하면 그 작품은 꼭 “해빛”을 봤다. 헌데 딱 한번 안해의 판단이 빗나갔다.  중국국제방송국에 전근된후 10년동안 필을 놓았다가 다시 들어 쓴 소설이 “또 하나의 나”였다. 처음으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면서 쓴 소설이기도 하다. 새벽녘까지 자판을 두드리다가 잠간 잠을 청했는데 눈을 뜨니 안해가 컴퓨터앞에 앉아 내가 쓰고 있던 소설을 보고있었다.  “어때?” 내가 물었다.  여느때 같으면 “괜찮아”해야 할 안해가 하는 말. “당신 오랫동안 필을 놓아서 그런지 흐름이 좀은 이상하네요.”  당연히 다를수 밖에. 북경에 전근되여 10년동안 소설작품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항상 현대소설의 흐름을 읽으면서 재래의 “나”를 탈피하고 “또 하나의 나”를 탄생시키기 위해 모지름을 써왔던것이다. 그 소설이 나중엔 “윤동주문학상” 본상을 수상했다. 당시 윤동주문학상 평심위원이였던 김호웅교수는 나의 작품평을이렇게 했다. “‘서울양반’이 된 김훈씨가 드바쁜 북경인의 일상에 빠져 영영 사라지는가 했더니 요즘 ‘또 하나의 나’, ‘수도권의 촌놈들’, ‘거미의 이야기’, ‘수렁 속 깊은 곳에’, ‘마지막 한 수’ 등 단편들을 연거푸 펴내고 있다. 하여 원고난에 허덕이는 우리 문학지의 편집인들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또 하나의 나’는 현시대 중국사회의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 실업인구의 증대와 그로 말미암아 초래되는 인간의 고뇌와 사회의 불안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것만큼 우리는 우선 김훈 씨의 작가적 사명감과 치열한 현실 참여의식을 긍정해야 할 것이다.”  남들 눈에는 작가란 아주 ”자유분방”한 사람으로 비춰지겠지만사실 작가에겐 고충과 비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장막연극 “망각된 인간들”을 실례로 든다. 1987년 연변연극단에서 무대에 올린 이 연극은 정신병원이라는 특이한 환경을 배경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와 정상인이지만 정신질환을 가진 일반인들의 운명과 흘러온 세월이 인간에게 강요한 정신질환, 아울러 정신질환이 정상인, 사회에 조성한 위해를 각광시키면서 물질의 풍요만 추구하지 말고 심령의 구석구석을 살펴볼 것을 호소한 작품이다.   이 연극은 3회 공연밖에 못하고 금연당했다. 문화대혁명이 끝나 11년이 지난 1987년이었지만 “좌경” 사조는 남아있었다. 당시 이 연극에 “사회 전체를 정신병원으로 모독하고 현대인을 죄다 정신병환자로 치부했다”는 루명을 뒤집어 씌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연극은 그 이듬해 “중국소수민족제재연극창작” 은상을 수상했다. 이 연극을 연극 평론가들은 “김훈의 연극에서 가장 연극다운 연극”이라고 평했고 “중국연극진흥상”까지 안겨주었다.  예느 직장과 마찬가지로 작가의 “직장”에도 “색안경”을 쓴 “상사”의 독단이 있다. 그런 “상사”의 독단에 머리를 수그린다면 작가가 아니다. 그때 내가 한 말은 이랬다.  “연극을 금연시키고 내 공직까지 박탈할 수 있지만 단 한가지만은 박탈할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 손에 쥐여진 필입니다. 말하자면 작가의 권리입니다.”                                             2011년 겨울, 일본 기타큐슈시 작가박물관 "중국작가관"에서  한번은 작가란 어떤 사람이냐는 엉뚱한 질문을 받은적이 있다. 지금까지 줄곧 글을 써오면서도 난 작가가 대체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해본적이 없다. 질문엔 답을 해야 한다. 내 답은 이렇다. 작가는 모든 것과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다. 인간과의 대화는 물론 삼라만상과 대화가 가능하다. 하늘의 태양, 지어 꽃잎에 맺힌 이슬과도 대화가 가능하다. 영혼과도 또한 하나님과도 대화가 가능하다. 그러니 작가의 “직장”은 어디까지 확장되여야 하나.  얼마전 한 후배가 나하고 선생님은 “자유를 만끽하는 분”이라고 했다. 누군가 “따분하고 지겨운 직장생활의 탈출구는 스스로의 탈바꿈”라고 했다. 말을 바꾸어 말하면 또 하나의 공간을 가져야 한다는 얘기다. 나로서는 그 공간이 바로 작가의 “직장”이다.  “자유를 만끽하는 분” 보다 더 기막힌 호칭이 있다. 그것이 바로 “자유 영혼의 소유자”!. 얼마전 영국의 귀족정신을 론한 글을 본적이 있다. 글은 돈, 명예, 지위가 있다고 해서 귀족정신을 가졌다고 볼수 없다고 쓰면서 귀족정신을 세가지로 귀납했다. 첫째, 문화적인 자질, 물욕, 향락을 인생의 최종 목적으로 삼지 않고 도덕, 정조를 겸비한 문화정신, 둘째, 사회에 대한 책임감, 셋째, 자유 영혼의 소유자, 글은 자유 영혼의 소유자는 독자적인 의식이 있고 권력과 금전앞에서도 과감히 “노”를 부를수 있으며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자주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풀이했다.   “자유 영혼의 소유자”, 나의 바램이다.  중국민족 2013년 제5호
10    북경과 LA 스모그 사건의 차이 댓글:  조회:6797  추천:2  2013-07-21
    필자는 10년전부터 해마다 휴가차 미국의 로스앤젤레스를 찾는다. 로스앤젤레스를 일명 LA라고도 부른다. 19세기 중반, 금광의 발견과 더불어 터진 골드러시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LA는 미국에서 뉴욕 버금으로 가는 대도시이다.   LA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미국 영화, 나아가 세계 영화의 중심지인 할리우드와 세계 최대급 놀이공원인 디즈니랜드다. 지금 디즈니랜드는 LA에서 갈라져 나간 오렌지카운티 지역에 속한다. 할리우드에 가면 세계 최정상급 영화배우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고 디즈니랜드에 가면 동화세계, 동년의 세계로 돌아간다. 할리우드, 디즈니랜드를 내놓고도 LA에는 볼거리가 많다. LA 유명한 비치인 싼타모니카, 환상적인 항구도시 롱비치와 카탈리나섬, 영화 스타와 대부호들이 모여 사는 부의 상징인 비버리힐즈, “LA” 상징물의 하나인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 LA 요람으로 올베라 거리, 차이나타운, 코리아타운, 그 외에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박물관들이 많다.  LA 시장은 환영사에서 LA는 “무한한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있고 끝없는 가능성이 있으며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뒤섞여 하나의 소우주를 이루는 곳으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경험할 수 있는 매우 매력적인 도시”라고 했다.  그의 말과같이 매번 LA를 찾을 때마다 필자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감동적인 충격을 받는다. 그런데 이번 걸음에는 감동적인 충격보다도 경악스런 충격을 받았다. 그 사연을 아래에 적는다.   새해 문턱을 넘어서면서 북경 시민들에게 차려진 것은 축복보다도 악몽과 같은 스모그 “세례”였다. 기상부문의 통계에 따르면 1월 북경은 네차례 스모그 “세례”를 받았는데 스모그가 장장 20여일을 북경 하늘을 뒤덮었다. 해마다 가끔씩 북경 상공을 뒤덮던 스모그려니하고 별로 개이치않던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필자도 바람만 불면 한국의 어느 노래 가삿말과같이 “태양은 또다시 떠오르리라”는 확신을 갖고 미국행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갔는데 스모그 날씨가 지속되면서 공항이 마비되는 사태까지 벌어지자 항공편이 결항될가바 조바심을 갖게 됐다. 천만다행으로 1월 31일 밤 찬공기가 북경을 급습하면서 오랫만에 파란 하늘이 보이고 하늘길이 열렸다.   미국에 도착해 안해와 딸과 휴가를 즐기던 중 중국과학원에서 발표한 글을 접하게 되였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였다. 그 글 한대목 인용한다.   “중국과학원에서는 요즘 ‘대기 스모그원인 추적 및 통제’ 특정연구팀의 최신연구결과를 공포했다. 연구결과 최근 스모그사건은 기후이변사태로 중동부 대기안정, 인위적오염물배출, 미세먼지와 풍부한 수증기가 공동히 작용한 결과이자 자연요인과 인위적요인이 공동으로 작용한 사건이라고 인정한것으로 나타났다.  특정연구팀의 ‘대기 먼지안개 원천추적’ 대상 책임자이자 중국과학원 대기물리소 연구원인 왕약사는 이번에 중국 중동부지역을 강타한 강한 스모그 오염물 화학구성은 영국 런던의 1952년 스모그사건과 20세기 40-50년대 시작된 미국 LA 광화학연무사건 오염물의 혼합체이며 거기에 중국특색의 미세먼지교질용액이 겹쳐지면서 만들어진것이다.”  스모그에 대한 정의를 보면 스모그란 연기 “smoke”와 안개“fog”의 합성어로, 18세기 유럽에서 탄생한 용어다. 산업발전과 인구증가로 석탄이나 석유 소비 소비량이 늘어나자 매캐하고 뿌연 연기가 안개처럼 온 도시를 뒤덮는 현상이 영국 런던에서 발생했는데 훗날 이 현상을 “런던형 스모그”라고 이름지었다. 런던형 스모그로 1872년 243명이 사망, 1952년 12월 1주일간 스모그 현상이 지속되면서 호흡장애, 질식, 만성 폐질환 등으로 총 1만2000명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럼 미국 “LA 광화학스모그”란?    10년동안 해마다 LA를 나들면서도 “LA 광화학스모그”란 말은 듣다 첫소리였다. 또한 북경의 스모그사건이 LA 스모그사건과 련관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여 필자가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해당 내용을 검색해보니 “LA 광화학스모그”에 대한 정의는 이러했다.    “1954년 7월 미국 LA에서 맑은 날씨에 안개가 발생하는 새로운 스모그 현상(일명 백색 스모그)이 발견됐는데 1차 오염물질에 의한 ‘런던형 스모그’와 달리 ‘LA 스모그’는 석유 연료가 연소된 후 석유휘발물(탄화수소)과 이산화탄소가 강한 광선자외선의 직사로 광화학반응을 일으키면서 형성된 강한 독성의 광화학연무였다.”   기재에 따르면 당시 “LA 스모그”로 800여명이 숨졌다. 영국 런던 스모그사건과 미국 LA 광화학스모그사건은 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초래한 최악의 대기오염 재난이다. 그런데 새해 북경을 망라한 중국 3분의 1의 지역을 강타한 스모그사건이 영국 런던의 스모그사건과 미국 LA 광화학스모그사건 보다 더 엄중한 “중국특색”의 스모그사건이라고 하니 아연실색해질수 밖에 없다.   중국의 저명한 의학전문가인 종남산 원사는 “중국특색”의 스모그는 몇 해전 중국을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넣었던 “사스”보다 더 무서운 환경재난이라고 했다. 그는 “사스”는 격리조치로 환자와의 접촉을 막을수 있지만 스모그는 그 누구도 피해갈수 없는 무서운 재난이라고 했다.   몇해 전, 세계적으로 환경오염이 가장 심한 10대 도시를 선정했는데 그 중 중국의 수도 북경이 불명예스럽게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당시 환경전문가들은 현 상태대로 나가면 북경은 몇십년전의 런던처럼 사람을 질식케하는 “안개도시”로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환경전문가들의 예측이 너무 일찍 현실로 눈앞에 펼쳐진것이다.   북경 스모그사건과 LA 스모그사건의 차이에 대해 LA에서 신문기자로 있는 필자의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다른 건 다 제쳐놓고 두 도시의 자동차 보유량을 비교해보면 북경은 500만대, LA는 북경 인구의 절반도 안되지만 자동차 보유량은 천여만대를 넘어섰습니다.  LA정부는 스모그사건이 발생한후 질소산화물 및 탄화수소의 방지대책을 강구하고 주요 배출원인 자동차 배출가스의 규제를 세계에서 제일 먼저 강력하게 실시했습니다.    중국과학원의 보고에 따르면 북경 스모그 발생의 가장 큰 원인은 자동차 매연으로 전체의 25%를 차지했고 다음으로 석탄, 외부 요인이 각각 20%씩을 차지했습니다.  도시화와 현대화 진척 과정에 어쩔수 없이 발생하게되는 대기오염사건이라는 점에서는 북경과 LA스모그사건은 공통점이 있지만 가장 큰 차이는 LA 스모그사건은 ‘과거형’이고 북경 스모그사건은 ‘현재진행형’이라는데 있습니다.”  뜻인즉 “LA 스모그사건”은 이미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사건이지만 “북경 스모그사건”은 현실적인 재난이란 것이다. 친구의 분석대로 “현재진행형”인 “북경 스모그”로 인한 재난이 언제가면 “LA 스모그사건”처럼 “과거형”으로 그 종말을 고하게 될런지.    인간들은 세세대대로 내려오면서 그냥 자기를 품어주고 키워주고 혜택을 준 자연을 훼손하면서 연명해왔다. 해마다 하늘땅을 노랗게 만든 황사가 자연의 훼손으로 하여 오는 자연의 보복이 얼마나 무자비한가를 보여주었다면 이젠 시도때도없이 인간의 삶의 공간을 뒤덮는 스모그는 어떤 계시를 주고 있을가?!  몇해전 북경 주변의 관광지인 령산에 갔는데 가는 길에 관광버스에 앉은 애들이 농가집 처마에 매단 옥수수 이삭을 보고 그것이 바나나인줄 알고 환성을 지르는 것이였다. 도시에서 자란 애들이니 그럴만도 했다. 애들 중 한 애가 갑자기 차창밖으로 흘러가는 나무 한 그루 없이 밋밋한 민둥산들을 가리키며 저 무덤은 왜 저렇게 큰가고 부모에게 묻는 것이였다. 부모로선 할 말이 없다. 사실 민둥산은 인간들의 무지로 만들어진 자연의 “무덤”이니까. 이번 스모그 사건 발생이 주로 인위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라고 하니 인간은 또 스스로 “무덤”을 판 것이다.   20세기가 남긴 10대 후환중의 하나가 환경오염과 지구자원의 고갈이다. 새세기를 맞으며 당시 유엔 환경국의 집행주석인 도데스페엘은 세계 환경일에 한 연설에서 [인류의 생존공간인 지구가 이미 참을성을 잃었다]고 경고했다.  참을성을 잃은 지구, 그 지구의 대기마저 질식사를 초래할 정도로 오염시키면 인류의 다음 생존공간은 어디? 달나라일가 아니면 별나라일가? 허무맹랑하게 지구 종말에서 탈출용으로 유일한 생명선이라고 하는 “노아의 방주”를 느닷없이 떠올리게 되는 순간이다. 
9    청명절단상 댓글:  조회:4324  추천:0  2013-04-05
 24절기의 다섯 번째 절기인 청명은 또한 전통명절이기도 합니다. 청명날 조상들의 산소에 가서 성묘하고 제사 지내면서 고인들의 명복을 비는 것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전통적인 풍속입니다. 청명을 두고 이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춘추시대 다섯 패왕의 하나인 진문공이 젊은 시절 19년이나 망명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후 자기 나라로 돌아온 진문공은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왕위에 오른 날 자기를 따라다니며 뒤 시중을 들던 신하들과 친척들에게는 후한 상금을 주면서도 일편단심 자기에게 충성을 다한 개자추라는 사람에게는 그만 잊고 상금을 주지 않았습니다. 개자추는 진문공이 굶어죽게 되었을 때 자기의 허벅다리 살점을 베내여 진문공의 허기진 배를 달래준 사람입니다. 개자추는 비록 랭대를 받았지만 명리를 따지지 않고 오늘의 산서성 개휴현 동남쪽에 있는 금산이라는 곳에 은거하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후에 진문공은 개자추의 모자를 찾아 금산으로 떠났습니다. 진문공이 사람들을 시켜 개자추 이름을 부르면서 산에서 내려오라고 했지만 개자추는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그 지방 사람들은 진문공에게 개자추는 효자이기에 산에 불을 놓으면 어머니를 업고 산에서 나올 것이라고 귀띔해 주었습니다. 진문공이 들어보니 그 말에 도리가 있는지라 신하들에게 명하여 산불을 놓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밤낮 사흘동안 불이 붙어도 전혀 소식이 없었습니다. 진문공은 하는 수 없이 또다시 사람을 보내 찾아보도록 하였습니다. 헌데 공명을 따지지 않는 개자추 모자는 산 속에서 나올 념을 하지 않고 한 버드나무 밑에서 불에 타죽었던 것입니다. 죄송스러운 생각을 가진 진문공은 개자추 모자를 금산에 안장한 후 그 산 이름을 개산으로 고쳐 영원히 기념하도록 했습니다.   전하는데 의하면 금산에 불을 놓던 그 날이 바로 24절기의 청명 전날이었다고 합니다. 그 후부터 사람들은 개자추 모자를 추모하여 해마다 청명전날이 돌아오면 불을 삼가 찬 음식을 먹었고 그들 모자의 묘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청명을 맞으면서 청명의 유래와 공명을 따지지 않는 개자추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니 다른 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한나라 때 적공(翟公)이란 사람이 벼슬자리에 오르기 바쁘게 그를 찾아오는 사람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가 벼슬을 그만두자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져 문 앞은 참새 잡이 그물을 쳐놓을 만큼 쓸쓸해졌다고 합니다. 그 후 그가 다시 벼슬자리에 오르자 그의 집 문턱이 다슬 지경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고 합니다.   궁지에 빠진 사람에게 자기의 허벅다리 살까지 베여주고는 궁지에 빠졌던 그 사람이 나중에 왕으로 되어 봉록을 주려고 하여도 얼굴을 내밀지 않는 개자추의 이야기로하여 남이 역경에 처했을 때 그 어떤 보상을 바라지 않고 돕는 것이 진심으로 사람을 돕는 것이라는 말이 생겨났을지도 모릅니다. 그와 반대로 벼슬자리를 보고 철새처럼 오가는 사람들을 두고 [재상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줄을 잇지만 재상이 죽으면 문전이 썰렁하다]는 풍자가 나왔을런지도 모릅니다.   청명절에 즈음하여 세월의 이끼가 앉은 옛이야기를 떠올려보면서 오늘의 인간상을 다시 한 번 눈여겨보게 됩니다. 권력과 부를 척도로 삼고 [재상집 개가 죽어도 문상을 가는] 그런 사람이 날로 적어지고 공명과 그 어떤 보상을 따지지 않고 역경에 처한 사람을 진심으로 도와 나서는 사람이 날로 많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8    작가의 령감 댓글:  조회:3655  추천:0  2013-03-31
 십년 전 대학에서 대학생들과 대화를 가진적 있다. 당시 대화의 주제가 “작가의 령감”이었다. 필자가 창작경력에 대한 소개를 마친뒤 바로 질문 답변 절차에 들어갔는데 한 학생이 이런 질문을 했다.   “누구나 글은 쓸 수 있지만 작가다운 글은 못 쓰는데 대체 작가란 어떤 사람인지 작가님의 소견을 듣고 싶습니다.”   17살부터 시, 소설, 연극, 시나리오, 칼럼, 기행문을 써오면서도 필자는 작가가 대체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또한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도 못했던차라 인차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잠깐 뜸을 들이고나서 필자는 생각나는대로 답했다.   “솔직히 말해 필자는 작가에 대한 정의를 생각조차 못해본 사람입니다. 정의를 내릴 수도 없고.”  이렇게 허두를 뗀 필자는 대충 작가에 대한 소견을 피력했다. 작가는 모든 것과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다. 인간과의 대화는 물론 삼라만상과 대화가 가능하다. 하늘의 태양, 지어 꽃잎에 맺힌 이슬과도 대화가 가능하다. 영혼과도 또한 하나님과도 대화가 가능하다. 대화가 가능한 것은 작가가 대화를 통해 계시를 받고 창작 충동을 받으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필자의 아버님(김철)은 당대 원로 시인이다. 아버님은 어떻게 해야 시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학도들의 질문에 “시인이 되려면 남다른 시각과 느낌을 가져야 한다.”고 답한적이 있다. 남다른 시각이라면 시인다운 시각이란 말인데 그런 시각을 갖추어야만 시인다운 령감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되겠다. 시인과 령감을 언급하면서 아버님은 자작시 를 예들었다.    대장간 모루우에서  나는 늘  매를 맞아 사람이 된다  벌겋게 달아오른 나의 정열  뜨거울 때 나는 매를 청한다  맞을 때는 미처 몰라도  맞고 나면 그 매값을 안다  그래서 나는 내 몸이 식을 때  노상 주르르 눈물을 흘린다.    시인의 눈에는 대장간 모루위에 놓인 쇠붙이가 그냥 쇠붙이로 보이지 않고 고된 인생살이에서 삶의 이치를 터득해 가는 자신을 찾아본 것이다. 이런 시각적인 차이, 그 차이가 바로 시인과 일반인과의 차이다. 시각적인 차이로 느낌도 다를 건 당연한 일이다.     시인다운 시각은 어디서 오는가에 대해 필자의 아버님은 직답은 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가난한 시인이다. 돈보다도 사색의 빈곤, 그 고통이 심하다. 그래서 부자가 되고 싶다. 추억에는 백만장자지만 사색에는 참말 거지다. 그래서 애써 사색의 부자가 되고 싶다.”    그러니까 시인다운 시각은 깊은 사색에서 온다는 말이 되겠다. 그런 사색이 동반되어야 시적인 령감을 얻을 수 있다는 말로도 통한다.   아버님은 문화혁명시절 4년 옥살이를 하면서도 감방에서 사색을 멈추지 않았고 시를 구상하는 비범한 창작열정을 보였다. 아버님은 “내가 자살을 하거나 정신이 붕괴되지 않은 것은 가족의 드팀없는 믿음외에도 내 맘속에 항상 시가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가 플라톤은 시인을 “신들린 사람”이라고 했다. 아버님은 진짜 시에 “신들린” 분이셨다.    “부전자전”으로 필자가 아버님 뒤를 이어 작가가 된데는 유전자보다도 아버님이 항상 쫓는 집요한 사색, 그 사색이 동반한 창작열정이 필자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사전에 올림말을 보면 령감이란 사유의 일종인데 일명 영감사유라고 한다.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창조적인 사유로서 간단하게 말하면 창의적인 기발한 생각이다. 작가의 생활체험, 소유한 지식, 끈질긴 추구, 깊은 사색의 복합체가 승화를 이룬 것이 바로 작가가 얻는 령감이다.  기독교 신자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의 계시”다. “신의 계시”를 “영적인 계시”라고도 하는데 작가가 생활실천과 사색을 통해 받는 계시, 느낌, 또는 창작 충동도 역시 작가만이 가질 수 있는 “영적인 계시”가 아닐가.  작가가 령감을 얻는 방식 또한 각양각색이다. 어떤 작가는 미술, 음악, 영화 등 다른 쟝르의 작품에서 령감을 얻는다고도 하고 또 어떤 작가는 꿈을 통해 령감을 얻는다고도 한다. 그 중 많은 작가들은 산책하면서 또는 명상에 잠겨 령감을 얻는다고 한다. 여기서 필자는 한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작가의 체험이다. 필자의 경우를 보면 창작의 령감을 얻는데 가장 필수적인 것이 바로 생활체험과 사색이다.  필자의 작품 중 중편소설 “아 동년”은 필자의 동년의 추억을 바탕으로 씌어진 자서전체 소설이고 중편소설 “청춘약전”은 필자가 지식청년시절 의 생활체험과 주변 친구들의 운명을 다룬 글이며 3대 여성의 운명을 다룬 시나리오 “민들레꽃”은 역사공부에서 얻은 사색과 품을 들인 인물취재에서 얻어진 작품이다. 10편의 소설로 이루어진 계열소설 “수도권의 촌놈들”은 필자가 중국국제방송국으로 전근된 후 쓴 소설이다. 소설은 개혁개방후 수도에 진출한 각양각색의 인물 군상을 그렸는데 이 소설 역시 사색을 동반한 작가적인 체험에 근거해 씌어진 것이다. 아래에 중편소설 “정신병리학 연구”를 례들가 한다.  이 소설은 정신병원이라는 특이한 환경을 배경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와 정상인이지만 정신질환을 가진 일반인들의 운명과 흘러온 세월이 인간에게 강요한 정신질환, 아울러 정신질환이 정상인, 사회에 조성한 위해를 각광시키면서 물질의 풍요만 추구하지 말고 심령의 구석구석을 살펴볼 것을 독자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이 소설을 쓸 충동은 정신병원 원장으로 있는 친구를 찾아 정신병원에 갔다가 목격한 장면에서 받았다. 정신병원에 가 보니 한번 특이한 환경인 정신병원을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환자들인 입원한 병동에 들어서기 바쁘게 한 늙은 환자가 군례를 붙혔다. 그 환자는 전쟁시기 포소리에 놀라 정신이 돌아버린 분이었다. 여자 병동에 가니 한 여인이 연지곤지 바른 얼굴로 열심히 문화혁명시기 추던 “충성무”를 추고 있었다. 돈에 환장해 정신이 돌아버린 한 환자는 쉴새없이 무언가 중얼거리며 동전을 쌓아올리고 있었다. 이런 환자들을 보는 순간 필자는 정신병 환자의 사유는 그가 미쳐버린 그 시대에 머물러 있고 정신병원은 그냥 병원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박물관”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정상인들은?   원장인 내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정상인도 여러가지 정신질환을 안고 있다. 단 그가 정상인인 것은 그가 정신 통제력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통제력을 잃으면 정신병환자다.” 정신병원에서 받은 계시, 느낌, 충동으로 필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상들을 새삼스럽게 눈여겨 보게되었고 물질의 풍요속에 병들어가는 심령의 상처를 짚어내게 되어 나중에 그것이 소설화 되었다. 소설이 발표된 후 필자는 소설을 장막연극으로 각색했다. “망각된 인간들”이란 제목으로 된 연극은 3회 공연밖에 못하고 금연당했다. 문화대혁명이 끝나 11년이 지난 1987년이었지만 “좌경” 사조는 남아있었다. 당시 이 연극에 “사회 전체를 정신병원으로 모독하고 현대인을 죄다 정신병환자로 치부했다”는 루명을 뒤집어 씌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연극은 그 이듬해  “중국소수민족제재연극창작” 은상을 수상했다.  필자는 작가의 령감을 유발하는 작가의 생활실천과 사색은 작가의 사명감에서 온다고 본다. 작가의 사명감에 대해 작가들마다 다 나름대로의 해석이 있지만 필자 생각에는 작가의 사명감은 한마디로 인간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안고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그리는 것이라고 본다.  20년전 필자는 한국과 중국 연변에서 한국의 조정래 소설가를 두 번 만났다. 편한 자리에서 나누던 대화 중 조정래 소설가는 이런 말을 했다.   “소설가는 그냥 고개 숙이고 묵묵히 밭길을 걷는 농부와 같다.”고 했다.   농부는 묵묵히 밭길을 걷지만 가을을 꿈꾼다. 작가 역시 농부마냥 창작에서 수확의 계절을 꿈군다. 천재적인 발명가 애디슨의 명언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천재는 99%의 땀과 1%의 령감으로 이루어진다.”                                                                                  (두만강 사이섬에서)  
7    새해도 마냥 거침없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댓글:  조회:3736  추천:2  2013-02-09
                                                 (지난해 미국 디즈니랜드에서 맞은 음력설)                                                                   새해를 맞는 시점에 (조문판) 서정옥 주필님으로부터 음력설 관련 글을 써달라는 원고 청탁을 받았습니다. 음력설 풍속은 이미 널리 알려졌고 그 부분은 민속학자들이 쓸 몫이기에 제가 무슨 글을 써야하는가를 잠간 고민했습니다. 해마다 쇠는 음력설, 저는 나름대로 설맞이를 해왔습니다. 우선                                            고향이야기를 떠올리고    음력설을 계기로 중국 경내에서 인구 대류동이 시작됩니다. 지난해 통계를 보면 중국의 전통명절인 음력설 연휴에 연인수로 약 20여억명이 귀성길에 올랐습니다.  태여나서 자란 고향, 고향은 어디까지나 파란 동심의 아름다운 추억과 성스런 부모님의 사랑이 살아 숨쉬는 곳입니다. 하기에 고향은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고향이란 말은 사전엔 “자기가 태어나 자란 곳 또는 조상이 오래 누리어 살던 곳”으로_ 뜻풀이 돼 있습니다.  자기가 태여나 자란 곳이라면 저의 고향은 중국 길림성 연길시, 일본에서 태여난 아버님 경우엔 고향은 출생지인 일본 시모노세끼이고 자기 조상이 오래 누리어 살던 곳으로 치면 할아버지 고향인 전라남도 곡성군 입면 삼오리가 고향이기도 합니다.  어머님의 경우도 출생지로 치면 연길시 봉림동이 고향이고 조상들이 살던 곳은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입니다.  이럴 듯 우리 가문의 탯줄은 반도의 나라에서 현해탄 너머 섬나라로, 그 섬나라에서 다시 반도를 거쳐 어마어마한 대륙에 이릅니다.  시인인 아버님의 말을 빈다면 “해_ 솟는 아침의 나라(한국)에서 보따리를 지고 떠난 나그네가 태양이 작렬하는 섬(일본)에서 달덩이 같은 아들을 얻고 숲 바람 서늘한 대륙(중국)에서 손자의 재롱을 보게 된 셈”이니_ 우리 가문으로 말하면 지금 동북 아세아의 주역으로 부상된 세 나라가 다 고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입니다.  망향의 슬픔을 안고 사는 사람에겐 눈을 감으면 지척에 다가오는 것이 고향이요, 눈 뜨면 저 하늘 은하수마냥 아득한 것이 고향이라 했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할아버지는 술 한잔 하고 들어올 때마다 감 몇 개를 사 오셨습니다. 겨울에는 언 감을 사 오고 여름에는 곶감을 사 왔습니다. 언젠가 제가 할아버지는 왜 감만 사 오는가고 물으니 할아버지는 먹고 먹어도 가장 싫증이 안 나는 게 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감이 싫었습니다. 더군다나 한번은 감을 너무 먹고 배탈을 만나 눈물을 찔끔찔끔 짜면서 배침까지 맞은 뒤로는 감을 입에 대지도 않았지만 할아버지는 그냥 감만 사 왔습니다.  1989년 한국 방문차 할아버지 고향집을 찾아 뒤 뜰에 있는 세 그루 감나무를 보니 할아버지가 감만 사 온 그 뜻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에게 있어선 감은 그리운 고향에 대한 향수였습니다. 할아버지에겐 감 맛은 그대로 고향의 맛이였을것입니다. 비록 과묵한 할아버지는 고향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지만 감으로 손자들에게 못 잊을 고향을 맛보였던것입니다.  그리움이 지나치면 한스러움만 남는다고 아버님은 "고향이 원수인 줄을 미처 몰랐네"라고 고향에 대한 애수를 읊었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설이 오면 어쩔수없이 떠올리게 되는것이 고향이야기입니다.                                                   고인을 추모하고    음력설맞이에서 빼놓을수 없는 절차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고인을 추모하면서 지내는 차례입니다. 우리 민족의 세시풍속에 따르면 차례는 1년에 네 번, 계절에 따라 제사를 지내는데 보통 음력 정월 초하루에 지내는 설날 제사, 4월의 한식, 8월 한가위 추석제사, 겨울의 동지 제사가 있습니다. 저의 경우엔 해마다 조촐한 차례상을 차리고 청명, 추석, 양력설, 음력설 이렇게 네 번 차례를 지내왔습니다. 제가 차례를 지낸다고 하니 후배들은 물론 선배들까지 믿지못하겠다는 눈빛이였습니다. 지금 세월에 무슨 제사? 한국도 아닌 중국에서? 믿거나 말거나 저는 부모님을 본받아 지금까지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제가 마련한 차례상에는 과일, 사탕, 과자, “육,해,공군 요리”(할머님과 장모님이 즐겨드시던 닭고기는 “공군”, 할아버지가 즐겨드시던 해산물은 “해군”, 장인어른과 큰고모, 작은 삼촌이 즐겨드시던 돼지고기는 “육군”)가 각기 한접시 오르고 할아버지와 장인어른, 삼촌이 즐겨드신 흰 술, 할머니와 장모님, 큰고모에 올릴 포도주나 음료가 준비됩니다.  아주 간소한 차례상입니다. 책에서 본 차례상 규모나 배열순서를 보면 제가 마련한 차례상은 차례상이라고 할수 없습니다. 허지만 저의 어머님은 상차림보다도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제가 차례상을 차리고 제를 지내게 된데는 리유가 있습니다. 리유라면 제를 지낼 산소나 고인의 납골을 보관한 장소가 없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후 3년제를 연길시 부르하퉁하 강변에서 지냈습니다. 광복이 나서 할아버지는 솔가해 고향으로 가려다가 군사분계선이 그어지는 바람에 그냥 환고향하지 못했습니다.  열다섯 살에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 일본, 대만, 중국땅을 전전하신 할아버지, 살아생전에 다시 못 간 고향에 넋이라도 그냥 가시라고 우리는 강가에서 제를 올린 뒤 할아버지 납골을 강에 띄웠습니다. 부르하통하가 흘러흘러 두만강으로 가고 그 두만강이 흘러흘러 조선의 동해로 가니 동해면 어떻고 서해면 어떠랴. 다 고국의 바다니 물결에 실려 언젠가는 고국산천 그 어느 기슭에라도 대일 테지. 그날 우리는 강물에 담배도 띄웠습니다. 고향 가시는 길에 지치면 담배 쉼이라도 하며 가시라고.  그 뒤로 고인이 된 분은 3년제를 지낸후 할아버지 뒤를 따라 환고향하라고 납골을 강에 뿌렸습니다. 청명, 추석이 오면 남들은 산소나 납골을 모신 곳에 가서 제를 지내지만 우리는 그냥 집에서 차례상 차려놓고 고인들을 추모하게 되었습니다.  제를 지낼 때 첫 잔은 모든 고인들에게 올립니다. 그 담 잔은 어머님의 할아버지, 할머니, 그 뒤로 저의 할아버지, 할머니, 장인어른, 장모님 순으로 이어집니다.  고인에 대한 추모는 현실과 미래에 대한 기원으로 이어지기에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간단한 “대화”를 합니다. 해마다 “대화” 내용이 다릅니다. 간단한 “대화”지만 고인이 생전일때처럼 “대화”를 나눕니다. “대화” 내용은 그냥 맘속에 묻어둡니다만 한 례만 든다면 저의 딸이 대학 졸업하고 회사에 입사했을 때 장모님과는 “장모님_ 키워주신 저의 딸이 회사원이 됐습니다. 기뻐하십시오.”라고_ 말꼭지를 떼고는 계속 “저의 딸을 예뻐해 주십시오.”로_ “대화”를 마쳤습니다.  제를 지낸 그 날은 고인들과 함께 보내는 기분입니다. 지난해 음력설은 온가족이 미국에서 보냈습니다. 그 날도 어김없이 고인들에게 제를 지냈습니다. 애들도 고인들에게 술을 붓고 절을 올렸습니다. 애들이 장차 저를 본받아 고인들의 제를 지내달라는 바람이 있긴 하지만 애들이 저의 뜻에 따라줄지는 미지수입니다.                                                      덕담을 나누고    고인들과의 "대화"를 마치고는 현대인들과 덕담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덕담을 나누는 것도 음력설 세시풍속의 중요한 내용의 하나입니다. 덕담이란 말그대로 새해 축복입니다. 지금은 전화, 연하장, 메시지로 축복을 전합니다. 이전처럼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세배하고 축복을 나눌 때에 비해 조금은 인정이 말라간다는 느낌이 없진 않지만 어떤 방식이던 나누는 축복은 최고의 덕담입니다. 저는 명절엔 주로 전화와 메시지로 축복을 전합니다.  “새해는 열어보지 않은 선물입니다. 새해 선물이 희망의 선물, 사랑의 선물이 되길 기원합니다.”  “이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은 새롭다는것입니다. 해는 어제와같이 떠올라도 해빛은 어제의 해빛이 아니고 꽃은 한 나무에서 피여나지만 날마다 다른 모습으로 피여납니다. 날마다 새로움을 맞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미래가 좋은것은 그것이 하루하루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새해가 당신에게는 하루하루가 사랑과 행복으로 채워지길 기원합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것은 참 행복한 일인것 같습니다. 새해도 변함없이 함께 행복한 한 해가 되시길!”  이처럼 주고받는 덕담엔 참 좋은 덕담들이 많습니다. 저의 덕담은 아주 간단한데 해마다 변함없이 써오고 있습니다. 이 글을 마치면서 모든 이들에게 새해 인사로 저의 축복을 드립니다.  “새해도 마냥 거침없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6    귀성길에 떠올려보는 이야기 하나 댓글:  조회:3814  추천:2  2013-01-22
    음력설을 계기로 중국 경내에서 인구 대류동이 시작됩니다.  올해는 음력설 귀성객들이 일찍이 귀성길에 올라 인구 대류동이 지난해에 비해 일찍 시작되었습니다.  부모형제에 대한 그리움과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며 객지에서 한해를 보낸 사람들에게는 그리웠던 부모형제, 친지들을 찾아 고향으로 가는 길은 사뭇 즐겁고 마음 설레게 하는 걸음입니다.  태여나서 자란 고향, 고향은 어디까지나 잊혀지지 않는 파란 동심의 아름다운 추억과 성스런 부모님의 사랑이 살아 숨쉬는 곳입니다. 하기에 고향은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귀성길에 오르는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나 선물할가 합니다. 제가 오래전에 취재 차로 한 시골에 갔다가 들은 이야기인데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고 가끔 떠 올려보게 되는 거미에 대한 이야깁니다.  한 시골집에 만삭이 된 색시와 살아가는 한 농군이 있었는데 하루는 거미가 초가 지붕 밑에 거미줄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농군의 아내가 거미줄을 거둬내려고 하자 마루에 앉아 입 담배를 썰던 농군이 그 거미가 새끼 가진 어미거미라고 하면서 그냥 놔두라고 말렸습니다.  하루는 큰바람이 불어 거미줄이 다 날려갔습니다. 거미마저 날려갔다고 농군의 아내가 근심하니 농군이 말했습니다.  새끼 가진 거미는 쉽게 자리를 뜨지 않는다고 하면서 해가 뜨면 어디에서 나와 다시 거미줄을 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어디에 숨었는지 거미가 다시 나와 거미줄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만삭이 된 농군의 아내는 모기나 파리를 잡아서는 거미줄에 걸어주었습니다. 그도 인젠 새끼 가진 거미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하루 농군의 아내는 지붕에서 내려온 뱀 한 마리가 거미를 노리고 혀를 날름대는 것을 보았습니다. 뱀이 거미를 삼킬가바 농군의 아내는 소리 소리를 질러 뱀을 쫓았습니다. 그 날 밤 농군의 아내가 남편에게 뱀이 거미를 노리던 이야기를 해주니 농군은 새끼 가진 놈은 쉽게 당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며칠 후 농군의 아내는 뱀이 거미를 삼키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뱀이 거미를 삼켰다고 하니 농군이 벼락같이 지붕에 뛰어 올라가 지붕 뒤로 넘어가는 뱀을 잡아 껍질을 벗기고 밸을 훑어 냈습니다. 뱀이 삼킨 새끼를 밴 어미거미를 살리려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뱀 배속에서 나온 것은 거미가 아니고 거미줄로 돌돌 말아놓은 담배진이었습니다. 거미는 뱀이 자기를 노리고 있자 농군이 담배를 썰면서 담배 써는 칼에서 긁어낸 담배진을 모아 가지고 거미줄로 얽어서 거미모양을 만들어 거미줄에 매달았던 것입니다. 그것을 뱀이 거민가 하고 삼켰던 것입니다. 미물이지만 새끼 가진 거미의 영특함에 농군과 그의 아내는 혀를 내둘렀습니다.  새끼를 깐 어머 거미는 새끼거미들의 먹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새끼거미들이 달려들어 살을 뜯어먹어도 어미거미는 미동도 하지 않고 달갑게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새끼거미들에게 살을 다 뜯긴 어미거미는 빈 깝대기만 남았습니다. 찢어진 거미줄에 걸려 바람에 흔들리는 어미거미의 빈 깝대기를 보면서 농군과 그의 아내는 감개에 젖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모신세도 저 어미거미와 다를 게 없어]  어미거미는 영특하고 이악스런 미물이지만 그 최후만은 아주 처절하고 장렬했습니다.  지금도 저는 그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거미줄에 데롱데롱 달린 빈 깝대기만 남은 어미거미를 그려봅니다.  부모님들에게 효도하러 귀성길에 오른 분들은 가끔씩은 오늘 제가 한 거미이야기를 떠올려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올해의 귀성길이 여전히 즐거운 추억으로 남을 귀성길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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