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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이의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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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나이아가라폭포엔 물보라 소녀가 있다(4) 댓글:  조회:3436  추천:0  2015-05-01
나이아가라폭포가 들려준 이야기       나이아가라폭포 관광 두번째 날 오전도 자유관광이였다. 필자는 염소섬을 조용히 산책하면서 나이아가라폭포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렸다.  염소섬엔 동상 하나가 외롭게 서있다. 나이아가라폭포를 처음 발견한 루이 헤네핀 신부의 동상이려니 했는데 알고보니 전기 발명가 니콜라 테슬라였다. 인터넷에서 니콜라 테슬라를 검색해보니 이런 글이 뜬다.  "미국의 발명가, 물리학자, 기계공학자이자 전기공학자(1856-1943). 그는 상업 전기에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전자기학의 혁명적인 발전을 가능케 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테슬라의 특허와 이론적 연구는 전기 배전의 다상 시스템과 교류 모터를 포함한 현대적 교류 시스템의 기초를 형성하였다. 그의 이러한 연구는 2차 산업 혁명을 선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가 발명한 기술은 1895년 웨스팅하우스사에 의해 나이아가라폭포 발전소 송전에 응용되여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역시 나이아가라폭포와 관련이 있는 분이시다. 나이아가라폭포에 발전소를 앉히게 된 계기를 잠깐 언급해 본다. 지질학자들은 나이아가라폭포 력사가 매우 짧아 마지막 빙하기에 생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폭포의 생성기인 빙하시대, 그러니까 1만2천여년전에는 폭포가 지금의 위치보다 10Km나 떨어진 하류에 있었는데 강물에 절벽이 해마다 평균 1.4미터씩 깎이여 지금의 위치까지 왔다고 한다. 그 기세로 그냥 절벽이 침식되면 머지않은 장래에 폭포가 사라지게 될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언에 중시를 돌린 미국과 캐나다 정부는 나이아가라폭포와 그 주변지역을 주립공원으로 지정하고 폭포로 떨어지는 물량을 줄이기 위해 수로를 빼서 물량을 조절했다. 폭포로 떨어지는 원래 물량의 60-70% 달하는 물량이 폭포로 흘러가기전 수로를 통해 빠져나가 폭포 하류에 있는 수력발전소에 제공된다. 이런 조치로 지금 폭포 벼랑의 침식이 해마다 3센티미터 이내로 통제되였다. 니콜라 테슬라는 나이아가라폭포의 영구 보존을 위해 큰 기여를 한 분이였다.  니콜라 테슬라처럼 위인은 아니지만 나이아가라폭포에서 새 기록에 도전한 분들의 이야기 또한 흥미롭다. 1829년 샘 패치라고 하는 모험가가 사상 최초로 캐나다폭포에서 뛰여내렸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공식 기록엔 1901년 10월 24일 나무통안에 들어가 폭포아래로 떨어진 애니 테일러(Annie Taylor)라고 하는 할머니가 올랐다. 교사 출신인 애니 테일러는 포도주를 숙성시키는 사람 키만치 높은 오크통 안을 방석으로 푹신하게 채우고 기르던 고양이를안고 통속에 들어갔다. 통에는 구멍을 뚫고 펌프로 공기를 불어넣은 후 그 구멍을 막아버리고 강에 띄웠다. 통은 강물에 띄운지 40분 후에 폭포로 떨어졌고, 폭포아래에 대기중이던 사람들에 의해 강가로 끌어올려졌다, 통 뚜껑을 여니 애니 테일러 할머니가 "아직 폭포에 떨어지지 않았나?"하고 물었다고 한다. 애니 테일러 할머니는 몇 곳이 긁힌외에 아주 멀쩡했지만 함께 통안에 들어갔던 털이 까만 고양이가 겁에 질려서 하얀 고양이로 변했다는 일설이 있다. 또 다른 일설에는 애니 테일러 할머니가 공포에 질린 나머지 고양이를 너무 꽉 끌어안아 고양이가 질식해 죽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어쨌든 애니 테일러 할머니는 나이라라폭포에서 사상 최초를 기록한 분이시다.   ​  2005년 열기구를 타고 사상 최초 세계 일주에 성공한 탐험가 스티브 포셋은 사상 최초에 대해 "최초의 기록을 만드는 순간 누구도 열어보지 않은 새로운 세계를 향한 문이 열린다. 무언가를 최초로 이룬다는것은 단순히 경주에서 1등을 하는것 이상의 의미이다."고 해석했다. 최고 기록은 깰수 있지만 최초란 오직 한번만 있기 때문이 아닐가.  그 후로 새 기록 도전이 계속되였는데 통계에 따르면 14명이 16번 폭포에서뛰여 내렸는데 그 중 5명이 숨졌다. 도전에는 용기가 있어야지만 운도 따라야 한다는 말이 있다. 애니 할머니처럼 나무통안에 강아지를 안고 들어가 나이아가라폭포에서 떨어져 내린 분이 있었는데 정말 운이 따르지 않았는지 숨쉬는 구멍을 강아지가 주둥이로 막고 있어 질식사 했다고 한다. 지금은 법으로 폭포에서의 다이빙을 금지하고 있다. 법을 어기면 법 처리는 법 처리대로 받고 동시에 벌금 1만 달러를 내야하는데 도전에 실패해 숨져도 벌금은 벌금대로 꼭 지불해야한다나.  나이아가라폭포가 들려주는 이야기중 뭉클한 감동과 깊은 사색을 주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1859년 여름, 프랑스 출신의 곡예사 찰스 블론딘이 폭포가 떨어지는 곳에 설치한 밧줄위를 걸어 미국쪽에서 캐나다로 건너가는 장거를 해냈다. 그 날 불가사의한 장면을 보려고 5천여명의 인파가 모였는데 찰스 블론딘은 줄위에서 두 눈을 가리고 걷기도 하고 공중제비, 물구나무를 서는 등 묘기도 보여주었다. 나중에 그는 관객들에게 소리쳐 물었다.  "제가  외바퀴 자전거를 타고 건널수 있다고 믿는 분들은 박수를 쳐주십시오." 관객들은 환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찰스 블론딘은 외바퀴 자전거를 타고 쉽게 미국과 캐나다 사이를 오갔다. 나중에 찰스 블론딘은 등에 한사람을 업고 줄을 타겠으니 등에 업힐 분은 손을 들어달라고 했다. 이말에 5천명에 달하는 관객은 모두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한참후에 한사람이 침묵을 깨뜨렸다. "제가 업히겠습니다." 블론딘이 그 사람에게 물었다. "제가 성공할수 있다고 믿습니까?" "믿습니다."  확고한 대답을 한 사람은 블론딘의 친구이자 매니저인 해리 콜코드였다. 블론딘은 친구를 등에 업고 줄위에 올라섰다. 등에 업힌 친구는 블론딘의 귓전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난 자네 등에 업힌게 아니라 자네와 한몸이 됐네." ​ 역시 명언! 결국 블론딘은 친구를 등에 업고 폭포를 건너는데 성공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관객들은 환호했다. 두 사람은 사람들에게 신뢰가 뭔지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신뢰란 굳은 믿음과 의지함이다. 노래를 지어 두 사람의 장거를 노래한 호주의 가수 드론은 "두 사람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해내려고 했던것은 눈앞에 보이는 그 무엇이 아니라 스스로 갈구했던 자유와 믿음이였다"고 말했다. 블론딘은 장거를 해낸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가고 묻는 기자에게 아주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도 두려움이 있는 사람입니다. 발아래를 내려다보면 무서워 도저히 한발도 내디딜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나이아가라 경치만 보고 걸으면 무서움이 사라집니다."  아름다운 자연의 경관이 가지는 힘이 얼마나 큰가를 되새기면서 필자는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산을 등반한 한 등산가의 말을 떠올렸다.  "제가 세계 최고봉을 정복한것이 아니라 그냥 대자연의 품에 안겼을 뿐입니다."  맞았어, 우린 나이아가라폭포를 보러 온게 아니라 그 품에 안기려 온거야! 천혜의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기쁨을 느끼게 해준 나이아가라폭포였다.                                                                                                                                                                                                                폭포의 무지개    나이아가라폭포를 떠나기 앞서 필자는 가족과 함께 다시 폭포를 찾았다. 어제와 다름없이 폭포는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물안개 피여오르는 폭포가에 전날보다 많은 갈매기가 날아예고 있었다. 이 곳의 갈매기들은 폭포에서 떨어지면서 잠시 "기절"한 물고기를 먹고 산다.  북극에서 녹아내린 빙하가 도도한 흐름을 형성해가지고 성급히 흘러오다가 이 곳에 와서 벼랑을 만나 그대로 물갈기로 부서지면서 떨어져 내렸다가 또다시 도도한 흐름으로 갈길을 재촉한다. 그 모습이 처절하게 부셔졌다가 아픔을 딛고 다시 일어선 거인같다고 할 가? 아니면 온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무미건조한 생애에서 한번만은 인생 역전을 연출하는 강자의  모습이라고 할 가? 별로 시인이 된 기분이다. 대자연의 장관은 시인과 명시를 낳는다. 만약 려산 폭포를 읊은 이백이나 박연폭포를 노래한 황진이가 나이아가라폭포를 와 봤으면 어떤 명시를 지었을가? 두 분이 모두 외줄기같은 폭포를 보고도 하늘의 은하수가 그대로 드리웠다고 했거늘 나이아가라폭포는 뭘로 비유할거냐?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슬며시 웃음을 떠올려본다.      "야 무지개!"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폭포가 피여올린 물보라속에 무지개가 비끼기 시작했다. "물보라 소녀"가 가끔 무지개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고 했지. 무지개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오랫동안 무지개를 지켜보았지만 "물보라 소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무지개에 비낀 "물보라 소녀"를 직접 보았다는 사람이 간혹 있지만 그건 환각일 뿐이고 폭포에 와서 "물보라 소녀"에 대한 추억을 안고 갈 뿐이라고 한 가이드의 말이 생각났다. 옳거니, "물보라 소녀"는 마음속 깊은 곳에 정히 모시고 가는거야. "폭포의 여신"을!    
38    냐이아가라폭포엔 물보라 소녀가 있다(3) 댓글:  조회:3339  추천:1  2015-04-10
 “나이야 가라!"        ​  나이아가라폭포의 경이로움은 눈보다는 귀가 먼저 반응한다는 말이 있다. 인디언 말로 나이아가라(Niagara)는 "천둥소리를 내는 물"이라는 뜻이다. 인디언들은 나이아가라폭포를 "천둥의 신"으로 숭배해왔다. 1678년 프랑스 선교사 루이 헤네핀(Louis Hennepin) 신부가 폭포에서 몇십킬로미터 떨어진 온타리오 호수에서 폭포의 굉음을 듣고 그 소리를 따라 올라오다가 나이아가라폭포를 발견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다고 한다. 지금은 아니지만 당시 나이아가라폭포가 내는 굉음이 트럼펫 7만 6천개를 동시에 부는 소리에 해당했다고 하니 천둥의 신의 존재를 생각하게 할 만큼 그 소리가 굉장했던 모양이다.  폭포 소리를 들으면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한시 바삐 폭포가 보고싶어 가슴이 설렌다. 폭포 관광은 자유 관광이다. 호텔에 여장을 풀기바쁘게 우리 가족은 서둘러 폭포가로 향했다. 한번 와 보았던 기억을 더듬으며 필자가 길 안내를 맡았다.   ​ 나이아가라폭포 관광은 한마디로 하늘에서 굽어보고 땅에서 마주보고 수면에서 쳐다보는 관광이다. 헬기를 타고 나이아가라폭포를 부감하는 헬기 투어, "안개속의 숙녀호"를 타고 폭포 밑까지 가서 물보라를 맞아보는 유람선 투어, 5대호의 마지막 호인 온타리오 호수로 이어지는 나이아가라강 협곡을 따라 신나게 질주해보는 제트보트 투어, 이외에도 폭포밑에 뚫린 바람의 동굴(Cave of Winds)에 들어가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를 쳐다보는 투어가 있다. 투어마다 색다른 느낌을 주는 체험이다.  올해1월 나이아가라폭포 주변 지역인 미국 뉴욕주와 캐나다 몬타리오주에 강추위 날씨가 계속돼 기온이 령하 37도로 내려갔고 1911년이후 103년만에 나이아가라폭포가 결빙되였다. 혹한의 여파로 5월 초인데도 강물엔 크고 작은 성엣장이 수없이 떠내려오고 있어 원래 5월부터 시작되는 유람선 투어가 그냥 취소된 상태여서 유감만 씹었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크게 두개 폭포로 나뉘는데 하나는 캐나다쪽에 있고 하나는 미국쪽에 있다. 지구상의 담수 20%를 차지한다는 미국의 5대호 중 네번째 호수인 이리(Erie)호가 발원지인 나이아라강이 흘러내려오다가 강심에 있는 자그마한 섬을 만나 물길이 갈라지면서 두 개의 폭포를 만든다. 그 섬 이름은 고트섬(Goat Island), 우리말로 염소섬이다. 염소섬이라고 불리게 된 유래를 보면 글자 그대로 염소와 관련이 있다. ​ ​    이 섬에서 인디언들이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인디언들은 겨울이 오면 엄한을 피해 남쪽으로 이동했다가 봄에 다시 섬으로 찾아왔다. 솔가해 남쪽으로 이동할 때 인디언들은 가축을 섬에 풀어놓았다. 이듬해 봄에 오면 가축은 수가 줄 대신 오히려 많이 늘어났다. 가축은 인간보다 엄한에 잘 적응한다. 그런데 어느 해 겨울 혹한이 이 섬을 덮쳤다. 몇백년 동안 얼지않던 폭포마저 꽁꽁 얼어붙었다. 인디언들은 살인적인 한파에 풀어놓은 가축이 죄다 얼어 죽은줄로만 알았는데 정작 이듬해 봄에 와보니 염소만 얼어죽지 않고 유유히 풀을 뜯고 있었다. 그 후로부터 인디언들은 섬을 염소섬이라 고쳐 불렀다.  염소섬을 만나 갈라진 강물이 인차 급류로 변해 살같이 흘러가다가 갑자기 50여미터 락차를 만나 곧추 떨어지면서 천혜의 명소 나이아가라폭포를 만든다. 미국과 캐나다 국경선으로 되고 있는 폭포는 그 모양이 말발굽같이 생겼다고 해서 말발굽폭포(Horseshoe), 혹은 캐나다폭포라고 부르는데 락차는 54미터, 너비는 610미터이고 미국 폭포(American Falls)는 락차 56미터, 너비가 335미터이다. 폭포에서 1초에 떨어지는 물량은 약 3600여톤, 1시간 떨어지는 물량은 서울 시민들이 하루동안 사용하는 물량보다 많다고 한다. 한때 나이아가라폭포는 세계 제1의 폭포로 알려졌으나 이과수폭포, 빅토리아폭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최대 폭포 자리를 내주고 북아메리카의 제1폭포로 자리잡았다.    1830년부터 나이아가라폭포는 상류층이 즐기는 여름 휴양지로 되였고 19세기 중엽부터는 관광산업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는데 오늘에 와서는 해마다 2000여만명이 다녀가는 명소로 자리매김을 했다. 19세기초 나폴레옹의 동생이 신부와 함께 신혼여행차 폭포를 찾았고 1943년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때 영국 처칠 수상이 폭포를 다녀갔으며 1951년에는 인도 네루 수상, 1951년엔 영국 엘리자베스 2세가 폭포에 자취를 남겼다. 나이가라폭포를 배경으로 많은 영상물이 제작되였는데 그중 전설적인 스타 마럴린 먼로가 주연한 "나이아가라폭포"와 크리스토퍼 리브가 주연한 "슈퍼맨 2"를 례들수 있다. 마릴런 먼로가 주연한 영화 "나이아가라폭포"는 미국 영화사에 언급될 수준의 영화가 아니지만 그 영화덕에 나이아가라폭포는 인기있는 신혼 려행지로 되였다.  신혼 부부들은 나이아가라폭포에 와서 폭포의 물줄기처럼 힘차고 영원한 행복이 깃들기를 기원한다. 신혼부부 얘기가 나왔기에 생각난다. 하마트면 폭포 하나를 빠뜨릴번 했다. 미국 폭포 바로 옆에 루나(Luna)라고 부르는 작은 섬이 있는데 루나는 로마 신화에서 나오는 달의 여신이라는 뜻이다. 섬이라기보다 전망대라고 함이 더 타당할것 같은 루나로인해 너비가 15미터밖에 안되는 자그마한 폭포가 물갈기를 날리며 떨어지고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도 신부가 결혼식장에서 쓴 면사포와 흡사하다고 “브라이달 베일 폭포(Bridal veil falls)”, 우리말로 면사포 폭포이다. 신혼 려행을 온 신혼부부들이 빼놓으면 안될 곳이다. ​ ​  나이아가라폭포를 보면서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느낌을 갖는다. 가장 먼저 나이아가라폭포를 발견한 루이 헤네핀 신부는 일기에 "나이라가라폭포는 필적할 대상이 없고 또 도저히 믿을수 없는 폭포"라고 적었다. 어떤 이는 폭포를 보는 순간 헉! 하고 숨이 막혀버렸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또 누구는 폭포를 보는 순간 그냥 폭포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환각에 빠졌다고 했다. 안해에게 폭포를 본 첫 느낌을 물으니 안해는 한참 잠자코 있다가 하는 말이 "나이아가라폭포는 마음껏 마음을 호소할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아들과 딸은 스스로 소중히 간직할 느낌이기에 말해줄수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젊은 세대다운 대답이다.  필자는 처음 폭포를 대하는 순간 어쩔수 없이 "오 신이여!"란 감탄사를 떠올렸다. 이 감탄사는 1540년 처음으로 세계 관광 1번지인 그랜드캐년을 발견한 스페인 탐험대 25명이 대자연의 장관앞에 약속이나 한듯 동시에 무릎을 꿇으며 저도모르게 뽑은 탄성이다. 나이아가라폭포 역시 그랜드캐년에 비해 못지않는 대자연의 걸작이여서 이런 감탄사가 나오지 않을수 없다. ​ ​  나이아가라에 오는 길에 가이드는 폭포에 가면 물보라를 될수록 많이 맞으라고 했다. 왜냐하면 나이아가라강은 북극의 얼음이 녹아내린 물이기에 미네랄과 음이온 성분이 많아 로화방지에 이롭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이드는 폭포를 보면서 꼭 크게 몇 번 "나이야 가라!"고 소리 치라고 했다. 그러면 하룻밤새 10년이 젊어져 자고나면 이튿날 아침 부부도 서로 몰라본다고 롱을 했다.  "나이야 가라!"가 폭포 관광에서 류행어로 된데는 재미나는 일화가 있다. 미국과 캐나다가 나이아가라폭포 주변에 각기 도시 하나를 건설했는데 두 도시 명칭이 다 "나이아가라폴스"이다. 그런데 도시 명칭이 미국식 영어로는 "나이에가라"라고 발음되고 캐나다식 영어로는 "나이아가라"라고 발음된다. 그러니 절대 미국식 발음을 해서는 안되는 것! 왜냐하면 미국식 발음대로라면 그 "나이에 가라"는 말로 들리니까. 그러나 캐나다 발음에 우리말 발음법칙인 "I 모음 순행동화 현상"을 적용하면 "나이야가라"로 발음된다고 한국의 한 언어학자가 분석했다. 그 학자는 1996년 나이아가라폭포에 와서 한국계 여행사 가이드에게 "청춘을 돌려다오"라던가 "고장난 시계"같은 노래를 부르지 말고 그냥 "나이야 가라!"고 목청껏 웨쳐보라고 했다. 그 후부터 "나이야 가라!"가 나이아가라폭포 관광 류행어로 굳어졌다고 한다.  7년전 나이아가라폭포를 처음 찾았을때 필자는 안해와 함께 "나이야 가라!"고 힘껏 외쳤었다. 했건만 나이는 줄지 않고 세월이 얼굴에 주름을 더해주며 흘러 흘러만 갔노라. 허허허…
37    나이아가라폭포엔 “물보라 소녀"가 있다(2) 댓글:  조회:2706  추천:0  2015-03-25
                                                                                           "물보라 소녀"        강가.  꽃으로 장식한 자그마한 카누에 한 예쁜 소녀가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고 있다. 소녀는 곧 폭포의 신에게 제물로 바쳐지게 된다. 검푸른 강물은 소녀의 슬픔과는 아랑곳없이 굽이치며 그냥 흐름을 재촉하고 있다.  폭포 상류에 이로궈이(Iroquois)라고 하는 인디언 부족이 살고 있는데 울고 있는 소녀는 그 부족 추장의 외동딸이다. 이름은 레라와라(LELAWALA). 이 부족은 "천둥소리"를 내는 폭포의 신령을 우러러 모셔왔다. 폭포소리가 높으면 인디언들은 폭포의 신령이 노한것으로 알고 해마다 소녀를 제물로 바쳐왔다. 제물로 바쳐지는 소녀는 제비뽑기로 결정된다. 이 해 부족의 모든 소녀가 제비뽑기에 참가했다. 추장은 제비뽑기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자신의 외동딸도 제비뽑기에 내보냈는데 그만 외동딸이 제비에 뽑히게 될줄이야.  엄마없이 자란 외동딸을 제물로 보내야 하는 추장의 마음은 찢어질듯 아팠지만 공정하게 제비뽑기로 정해진 결정에 따를수 밖에 없었다. 외동딸을 제물로 바칠 날이 다가옴에 따라 추장의 얼굴 표정은 점점 돌같이 굳어져갔다. 그러나 매일 울고 있는 외동딸 앞에서는 추장은 항상 근엄한 모습이였다.  마침내 폭포의 신령에게 소녀를 제물로 바칠 날이 왔다. 이날 추장은 돌연 어디론가 사라져 모습을 감췄다.  마을 사람들이 소녀가 타고갈 카누를 각가지 꽃으로 장식하고 소녀의 머리에 꽃계관을 얹어주었다. 생애의 마지막 길을 떠나게 되는 소녀는 하염없이 울면서 아버지를 기다렸으나 추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소녀를 태운 카누를 강에 띄울 시각이 왔다. 카누엔 노가 없다. 그냥 흐르는 강물에 실려 폭포로 향하는것이다. 소녀는 최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녀는 아버지가 어디선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녀의 눈에는 아버지 모습이 잡히지 않았다. 소녀를 실은 카누는 강물을 따라 흘러가기 시작했다. 도도하게 흐르던 검푸른 강물이 서서히 급류로 변하기 시작했다. 급류에 시작되면 폭포가 지척이다.​ ​    급류를 타고 카누가 폭포를 향해 살같이 흘러가는데 이때다.  강가 수풀속에서 한 남자가 배를 저어 나온다. 추장이다. 추장은 힘껏 노를 저어 외동딸이 탄 카누를 뒤쫓는다. 추장의 두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이윽고 카누를 따라잡은 추장은 말없이 한손을 내밀어 딸의 손을 잡아쥔다. 그가 딸에게 미소를 지어보이는 순간 두 배는 곧두박히며 폭포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그 후로 폭포가에 피여오르는 물보라에 무지개가 비끼면 예쁜 소녀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가 바로 "물보라 소녀"로 된 추장의 딸 레라와라이다. "물보라 소녀"은 그때로부터 "물보라 여신"으로 변신해 오늘까지 숭배의 대상으로 되여오고 있다.  ​ ​  이것이 지금까지 전해내려온 나이아가라폭포 전설중 가장 슬프고 비장한 전설이다. 딸의 두려움과 아픔을 같이한 아버지의 비장한 사랑은 듣는 이로 하여금 숙연해지게 한다. "물보라 소녀"와 관련된 전설이 여러 판본이 있다고 한다. 한 전설에는 "물보라 소녀"가 귀족에게 시집가라는 아버지의 강요에 따르지 않고 평소에 사랑을 나누어 오던 총각을 찾아 가기 위해 폭포에 몸을 던졌다고 하고 다른 한 전설에는 "물보라 소녀"가 마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폭포에 사는 큰 뱀에게 스스로 몸을 바쳤다고 한다.  1846년 나이아가라폭포에 첫 유람선이 운항을 시작했는데 유람선은 "물보라 소녀"의 이름인 레라와라(LELAWALA)호로 명명되였다. 지금은 "안개속의 숙녀호(Maid of the Mist)"로 명칭이 바뀌였지만 유래는 역시 "물보라 소녀"에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가이드는 나이아가라폭포에 깃든 전설을 미리 알고 가면 나이아가라폭포 관광은 일종의 의식이 된다고 했다. 제물로 바쳐진 "물보라 소녀"의 부활을 기원하는 성스런 의식이라고 했다.  
36    나이아가라폭포엔 “물보라 소녀"가 있다(1) 댓글:  조회:2795  추천:0  2015-03-15
 미국 동부 관광은 대체로 세계 정치 1번지 워싱턴, 현대 "로마"로 불리는 뉴욕, 세계 3대 명폭의 하나인 나이아가라폭포를 둘러보는 관광이다. 미국 동부 관광에서 나이아가라폭포로 가는 코스가 둘이 있다. 뉴욕에서 곧추 가는 코스와 워싱턴에서 펜실베니아주를 경유해 가는 코스이다. 7년전 필자는 안해와 함께 뉴욕 코스를 탔는데 경유지에서 인상에 남는 곳은 코닝 유리박물관(Corning Museum of Glass) 뿐이였다. 코닝 유리공장은 세계적인 대기업인데 본부를 인구가 만명뿐인 자그마한 도시 코닝시에 두고 있다. 유리로 된 예술작품 4만 5천여점이 전시되여 있는 유리박물관은 나이아가라폭포로 가는 관광객들이 휴식삼아 쇼핑삼아 들러 유리 력사를 보고 가는 곳이다. 아들딸까지 동행한 이번 미국 동부관광은 워싱턴부터 시작되였기에 펜실베니아주를 경유하게 되였다.    펜실베니아주는 크게 각광을 받고 있는 워싱턴, 뉴욕의 그림자에 가려 별로 알려지지 않은 주이다. 미국 관광에서 널리 알려진 명소만 찾는 중국인 경우엔 아예 생소한 곳이다. 보통 관광객들은 사전에 관광 목적지 관련 자료는 잘 챙기지만 경유지에 대해선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필자도 역시 그런 부류에 속했는데 펜실베니아주를 경유하면서 경유지가 때론 목적지보다 더 대단한 명소일수도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경유지에서 읽은 미국 독립 력사    펜실베니아주 경내에 들어서면 끝없이 펼쳐진 농장지역이 줄곧 시야를 채운다. 평원을 지나 완만한 구릉이 이어지는 지역에 들어서면 만발한 들꽃이 반겨주는데 들꽃중 필자가 좋아하는 민들레꽃이 가장 많았다. 그 누가 보든말든 소문없이 피여 대지를 장식하는 민들레꽃이 하도 좋아 필자는 우리 민족 녀성의 희생정신을 구가한 텔레비전예술영화 제명을 "민들레꽃"이라고 달기까지 했다. 꽃의 향연에 취해 가노라면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로 운을 뗸 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진다. 농장지역을 종일 달려 하루밤 묵어갈 도시에 들어서니 오래된 건물이 많이 보여 퇴락하고 있는 도시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데 가이드가 이 도시가 바로 미국이 탄생한 도시 필라델피아라고 선언하듯 말한다. 필라델피아, 책에서나 읽었던 력사의 도시! 이 도시는 독립된 미국의 력사가 시작된 곳이다. 천혜의 관광지 나이아가라폭로로 가는 길에 미국의 독립 력사를 읽고 가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행운이 아닐수 없다.  ​  한때 세계를 호령하던 대영제국의 런던 다음으로 큰 도시였던 필라델피아에서 1776년 7월 4일 무슨 사변이 일어났는지 우선 짚고 넘어간다. 필라델피아 인디펜던스 홀(Independence Hall)에서 열린 대륙회의에서 170년동안 영국 식민지였던 13개 주의 대표들이 영국으로부터 자유와 자치권을 얻기 위해 독립선언문을 채택하고 미국 독립을 선언했다. 이어 7월 8일 "온 나라의 국민들에게 자유를 선언하노라"라는 성서의 문구가 새겨진 자유의 종(Liberty Ball)이 독립선언문의 공표를 축하해 처음으로 고고성을 울렸다. "법과 정의의 상징"으로 불리는 자유의 종은 미국 독립의 상징이다. 또한 미국에서 처음 "자유"를 알렸던 종이었기에 자유의 상징으로 되고 있다. 이해 최초의 미국 국기인 성조기가 게양되었는데 성조기는 이름이 로스(Ross)라는 가정주부가 손수 만들었다고 한다.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 저항하는 중심지가 된 필라델피아는 독립전쟁이 시작되면서 새로운 국가 미국의 수도로 되였다. 1790년 워싱턴 DC로 천도하기 전까지 미국의 수도였던 필라델피아는 19세기에 이르러 미국의 금융, 문화, 상업, 산업의 중심지로 떠오른 뉴욕의 그림자에 묻히게 되여 색이 바래기 시작했다.  미국 독립 력사에서 미국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는 초대 대통령 워싱턴과 어께를 견줄 위인 한 분을 빼놓을수 없다. 벤저민 프랭클린! 미국 지폐 100달러에 찍힌 바로 그 분이다. 가이드는 그가 미국 지폐에서 지금까지 가장 고액 지폐인 100달러에 찍힌 이유가 1달러 지폐에 찍힌 워싱턴보다 100배 더 위대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워싱턴보다 더 위대한 분이 왜 대통령 한번 못해 봤는가고 한 관광객이 물으니 가이드는 독립선언문을 작성할 때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미 70세를 훌쩍 넘긴 고령이였고 또 본인이 굳이 대통령 자리를 사양했다고 설명했다.  프랭클린은 미국 독립선언문 작성에 참여했고 또 생명의 위험도 무릅쓰고 신생 미합중국 대사로 프랑스에 가서 프랑스의 지원과 참전을 이끌어냈으며 미국의 첫 헌법 제정에도 큰 기여를 했다. 18세기 미국 신대륙의 력사와 정신을 상징하는 인물로 칭송을 받는 프랭클린은 뛰어난 사업가이자 과학자, 정치가, 외교관, 문필가였다. 그는 또한 발명가이기도 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피뢰침은 그가 발명한 것이다. 부자이고 또한 위대한 인물이였지만 프랭클린은 항상 검소했다. 지금도 그가 스무살에 생활 지침으로 정한 13가지 "덕목"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좌우명으로 되고 있다. 그 "덕목"을 다시 새겨본다. 1, 절제-배부르도록 먹지 말자. 취하도록 마시지 말자. 2. 침묵-자타에 이익이 없는 말은 하지 말자. 쓸데없는 말은 하지말자. 3. 질서-모든 물건은 제자리에 두자. 일은 모두 때를 정해서 하자. 4. 결단-해야 할 일이 있다면 반드시 하겠다고 결심하자. 결심한 것은 반드시 실행하자. 5. 절약-나나 남에게 유익하지 않은 일에는 돈을 쓰지 말자. 쓸데없는 낭비는 금하자. 6. 근면-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언제나 유용한 일을 하자. 무익한 행동은 금하자. 7. 진실-사람을 속이지 말자. 순수하고 공정하게 생각하자. 언행을 일치시키자. 8. 정의-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하지 말자. 남에게 응당 줘야하는 이익은 꼭 주자. 9. 중용-극단을 피하자. 상대가 나쁘더라도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말자. 10. 청결-신체, 의복 등 습관상 모든 것에 청결을 유지하자. 11. 침착-사소한 일, 일상적인 일 뿐만 아니라 불가피한 일을 당해도 흔들리지 말자. 12. 순결-감각이 둔해지고 몸이 쇠약해지고 부부의 평화와 평판에 해가 될 일을 하지 말자. 13. 겸손-예수와 소크라테스를 본받자.  한 력사학자는 "프랭클린이 위대한 리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혁신이다"고 했다. 말을 바꾸어 말하면 프랭클린은 인생의 목적을 인격 완성에 두고 산 분이였다. 우리 민족의 "선비정신"을 새삼스럽게 떠올리게 되는 대목이다. ​ 펜실베니아주엔 독립의 력사가 태동친 필라델피아외에 미국 통일 력사에서 가장 유명한 격전지인 게티tm버그가 있다. 1863년 7월 게티버그에서 련방군과 남부 련합군이 가장 치렬한 격전을 벌였는데 3일간 전투에서 사망자, 부상자, 포로, 실종자가 51.000여명에 달했고 남부 련합군은 이 격전을 계기로 패배를 거듭했다. 이 격전지는 미국 남북 전쟁의 전환점을 긋은 곳이자 링컨 대통령이 유명 연설을 한 곳이기도 하다. 링컨 대통령은 전사자를 추모하는 연설에서 "우리 민족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자유를 갖게 될 것이며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펜실베니아주를 막 벗어나면서 스마트폰으로 이것저것 검색하던 중 놀랍게도 우리가 하룻밤 묵어간 필라델피아 인근지역이 세계 명작 "대지"의 저자 펄벅의 고향임을 알게되였다. 청나라 말기를 배경으로 중국인의 애환을 그린 "대지"로 "퓰리처상"과 미국 여작가로 사상 처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펄벅의 출생지가 지식사전에는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 힐스보로로 기재돼 있다. 지도를 보니 웨스트버지니아주가 북부로 펜실베니아주와 인접해 있다. 그러니 두 주가 명작가 출생지를 자기네 주라고 주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여행길에서 세계 명작을 낳은 위대한 작가를 떠올리게 되었으니 작가로선 감개무량하다.  나이아가라폭포로 가는 경유지에서 미국의 력사를 읽었으니 이젠 전설을 들을 순서다.   [
35    세계 정치 1번지 워싱턴DC (제6편) 댓글:  조회:4167  추천:0  2013-12-12
                                              링컨 기념관   링컨 대통령 하면 남북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미국 연방을 지키고 노예를 해방시킨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이라는 평가가 앞선다. 링컨 대통령 역시 미국인들에게는 워싱톤, 제퍼슨, 케네디 대통령들과 함께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중의 한 분이다.  링컨 기념관(Lincoln Memorial)을 가는 길목에는 꼭 들러 가야 할 곳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국전 참전 기념비(Korean War Veterans Memorial)이다.   기념비는 검은 대리석으로 되어있는데 거기엔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 병사 2500명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기념비 앞 파란 잔디밭에는 우비를 입고 성조기를 향해 V자 대열로 나가는 한개 소대 병사들을 형상한 조각상이 있었다. 숫자를 헤어보니 19명이었다. 가이드 소개에 따르면 19개 조각상이 검은 대리석 기념비에 비치면 38명으로 되는데 군사분계선인 38선을 상징한다고 했다. 성조기 아래 비석에는 《조국은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나라와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조국의 부름에 응한 아들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글이 새겨져 있었고 기념비 아래에는 《자유는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Freedom is not Free.)》는 글발이 새겨져 있었다.  기재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전에 150만 명이 참전했는데 그 중 5만 4천여 명이 전사,  11만여 명이 부상,  8천여 명이 실종되었다. 참전 대가가 엄청난 것이다. 기념비는1995년에 한국정부가 출자해 새운 것이라고 했다. 전쟁은 정의 전쟁이든 비정의 전쟁이든 전사자와 그 가족들에게는 가장 비정하고 종국적으로는 비극이다. 필자는 기념비를 향해 묵념으로 전사자들의 명복을 빌었다.      링컨 기념관은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 바로 뒤에 자리 잡고 있다. 링컨 기념관은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을 연상시키는 하얀색의 건물인데 기념관안에는 링컨의 대리석 좌상이 있었다. 가이드 소개로는 대리석 좌상을 만드는데 4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 뒤에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명성은 그에 의해 구원된 미국인들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이 신전에 영원히 간직 될 것이라》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고 좌상의 왼쪽 벽에는 링컨의 명언인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1층 왼쪽에 설치된 전시관에는 인간의 존엄과 자유와 관련해 링컨 대통령이 연설한 연설문이 대리석에 새겨있었고 링컨 대통령 관련 역사자료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전시관 영상자료실에는 자유를 웨치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장중한 음악이 흐르는 속에 비쳐지고 있었다.     링컨 기념관 안에는 세계 각국에서 발매된 링컨 초상화가 찍힌 우표가 전시되었는데 우표만 보아도 링컨 대통령이 세계적으로 널이 알려진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링컨 대통령의 연설 중 불멸의 연설이라고 하는 연설이 많은데 그 중 《갈려서 싸우는 집은 설 수가 없다. 나는 이 정부가 반은 노예, 반은 자유의 상태에서 영구히 계속될 수 없다고 믿는다.》는 노예 해방 관련 연설도 유명하고 게티즈버그 묘지 설립 기념식에서 한 《민주주의가 없어서는 안 되며 그것이야말로 국가를 위해 죽어간 군인들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군민을 위한 정부는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연설은 자유의 대명사로 지금도 세계가 기억하고 있는 명언으로 되고 있다.   링컨 기념관은 워싱턴 기념탑, 국회의사당과 일직선상에 위치해 있는데 가이드는 근엄한 표정을 한 링컨 대통령이 지금도 국회의사당을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제퍼슨 대통령은 백악관을, 링컨 대통령은 국회의사당을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는 셈이군요.》    필자의 말에 가이드가 역시 유머로 받았다.   《맞죠. 한 분은 현직 대통령이 정치를 잘 하는가를 서서 지켜보고 있고 한 분은 국회의원들이 맨날 다투기만 하니 너무 걱정스러워 잠을 못자고 이렇게 앉아서 지켜보고 있는거죠. 그래서 링컨 기념관은 문이 없고 24시간 내내 개방되어 있습니다.》   링컨 기념관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 도합 36개인데 당시 미국의 주(州) 수를 뜻한다고 했다. 링컨 기념관을 오르는 계단에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게도 꿈이 있다》는 명언이 새겨져 있었다. 1963년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링컨 기념관 계단에서 25만명 시위자들을 향해 《나에겐 꿈이 있다(I Have a Dream)》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이날 집회는 미국 역사의 한 폐지를 수록한 《워싱턴 대행진》으로 이어졌다.  36살 젊은 나이에 노벨상을 수상한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꿈은 《정의가 강처럼 흘러 흘러》 모든 인종과 피부색이 다른 모든 국민들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미국에서 함께 누리는 것이었다. 베트남 전을 반대한 그도 링컨 대통령처럼 암살당했다. 링컨 대통령은 1865년 4월 14일 저녁 워싱턴 포드극장에서 존 윌크스 부스라고 하는 남부출신인 배우에게 저격당해 다음날 아침 사망했다. 많은 미국인들은 링컨 대통령을 순교자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암살이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날에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여긴다. 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위해 죽었듯이 에이브러햄 링컨은 조국을 위해 죽었다.》고 말한다.      
34    세계 정치 1번지 워싱턴DC (제5편) 댓글:  조회:3949  추천:2  2013-11-27
《백악관 앞의 반핵 아줌마》  미국 정부 부처에서 쌍 날개라고 하는 사법성과 상무성을 가까운 거리에 두고 있는 백악관(White House)은 명실 공히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인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관저이자 집무실이다. 백악관이란 이름은 1814년 대영전쟁 때 불에 그슬었다가 재건 후 외벽을 하얗게 칠한 데서 비롯된 것이란다. 《겉보기엔 아주 작은 건물 같지만 방이 132개가 있고 2층과3층은 대통령 일가가 생활하는 사적인 공간입니다. 8개의 방을 볼 수 있는 무료 가이드투어가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에 운영됩니다. 한국의 청와대는 접근 불허지만 백안관은 언제나 국민들에게 개방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한국의 청와대는 고압적인 모습이라면 백악관은 서민적인 인상을 준다고 할가요. 워낙 인기가 좋은 곳이라 한 달 전 부터 근처에 있는 백악관 방문객 센터에서 투어 신청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서 가이드는 우리 팀은 사전 신청을 하지 않아 백악관관내 관광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또 한 번 유감을 씹는 순간이었다.  관광버스가 정차한 곳은 백악관 북쪽인데 백악관과 마주한 광장에는 프랑스인 라파예프 장군의 동상이 있었다. 미국 독립전쟁시기 스스로 군대를 모집해 미국을 위해 참전한 그를 기려 세운 동상이란다.  《프랑스인으로 미국의 독립전쟁에 참전해서 공을 세웠지만 인디언들에게는 증오의 대상으로 되고 있는 사람입니다.》  가이드 소개로는 라파예프 장군은 미국 독립전쟁시 사단장, 후에는 버지니아 군 사령관으로 활약하면서 큰 공을 세웠지만 인디언 토벌작전에서 악명을 남겼다고 한다. 인디언들은 지속적으로 동상철거를 요구해왔지만 그 요구가 지금까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했다.  백악관을 배경으로 사진 몇 장 찍고 아쉬운 발걸음을 옮기는데 가까운 곳에서 색소폰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나는 쪽에 시선을 주니 한 중년 남성이 백악관을 마주 보며 혼자서 색소폰을 열심히 불고 있었다. 일명 《거리의 악사》라고 불리는 구걸자인줄로 알았는데 가이드 말로는 백악관을 상대로 항의 시위를 하는 분이라고 했다.  백악관 앞거리에서 종종 항의 시위가 벌어지는데 보통 시위자들은 질서 있게 백악관 주변을 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텔레비전에 종종 비쳐지는 경찰과의 대치 상황이거나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장면은 절대 있을 수 없다. 성숙한 미국인들의 시위문화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가이드가 길옆에 있는 노천 매장 같은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곳은 노천 매장이 아니라 백악관 앞에서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는 여사의 거처입니다. 한번 가 보시죠.》  햇빛이나 비를 가리게 검은 비닐로 지붕을 한 곳에서 연세가 많이 들어 보이는 부인 한 명이 반갑게 웃으면서 우리를 맞았다. 그는 우리가 한국 관광팀인줄 알고 얼른 한국어로 된 표어 판을 내들었다. 거기엔 한국어로 《안녕! 반핵시위!》라고 씌어져 있었다.     《이 분이 바로 로 널리 소문이 난 분입니다. 이 분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사시장철 백악관을 바라보면서 침묵시위를 하신 분입니다.》  《백악관 앞의 반핵 아줌마》 이름은 콘셉션 피시노트, 스페인 출신이다. 1963년 미국으로 이주한 후 뉴욕복지사업단, 국제 연명, 스페인 영사관에서 일하다가 1979년부터 워싱턴DC에 와서 정치활동에 종사했다. 냉전시대 미국의 군비증강을 우려해 미 연방의원들을 만나는 등 로비활동에 종사하다가 혼자서 하는 정치활동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 그녀는 1981년부터 반핵 내용을 담은 간판을 들고 백악관 앞에 거처를 옮겼다. 그 때로부터 그녀의 하루 24시간 침묵시위가 시작되었다. 간판에는 히로시마, 나가사끼 원폭 피해자 사진들이 붙어있었다.   매일 마다 백악관 앞에는 관광버스가 정차하는데 관광객들은 이미 매스컴을 통해 널리 알려진 《백악관 앞의 반핵 아줌마》를 먼저 찾는다고 한다. 하여 각국 여행사 가이드들은 그녀가 《백악관의 명물》로 떠올랐다고 한다. 《백악관 앞의 반핵 아줌마》는 《세계 각국을 다니면서 반핵을 호소하고 싶었는데 여기 있으니 내가 직접 돌아다니지 않아도 세계를 대상할 수 있다》고 했다.   백악관 주인이 여러 번 바뀌어도 핵위협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핵무기 폐기 필요성을 알리는 것이 나의 소망》이라면서 지금까지 외롭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생활은 말이 아니다. 식사는 근처의 빵집에서 먹다 남은 음식이나 지원자들이 가끔 사주는 것으로 해결한다. 백악관 주변은 텐트나 침낭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그녀는 밤에는 간판을 깔고 잔다. 겨울이면 두터운 외투 한 벌을 덥고 잔다고 한다.   그녀가 항상 입버릇처럼 하는 말은 《세상은 궁극적인 정의가 필요하다》이다. 얼굴이 볕에 타서 새까맣게 된 그녀는 우리에게 밝은 미소를 선사했다. 그 미소가 지금도 나의 눈앞에 선하게 떠오른다. 이 시각에도 그녀는 그냥 밝은 미소를 머금은 채 백악관을 바라보면서 외롭게 침묵시위를 하고 있겠지.      
33    세계 정치 1번지 워싱턴DC (제4편) 댓글:  조회:3553  추천:1  2013-11-15
                                       미국 수도에서 일본 벚꽃 축제?!  벚꽃은 일본의 국화이다. 일본에서는 벚나무를 신수(神樹》라고 한다. 해마다 벚꽃이 만개하는 3월말이 되면 일본에서는 벚꽃축제가 벌어진다. 그 벚꽃축제가 미국의 수도에서 벌어졌다고 하면 그 사연을 모르는 사람들은 고개가 갸우뚱해질 것이다.  《여러분들이 일주일전만 오셨어도 미국의 수도 한 복판에서 벌어지는 벚꽃축제를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유감이지만 지금은 벚꽃이 거의 다 지고 몇 그루 벚나무만 아직 꽃이 지지 않았습니다.》  제퍼슨 기념관 관광이 끝나자 가이드는 우리 일행을 제퍼슨 기념관과 붙어있는 포토맥공원 안으로 안내했다. 포토맥 강가를 따라 펼쳐진 공원 안에는 벚나무가 수없이 많았다. 꽃은 거의 다 지고 간혹 가다 몇 송이 벚꽃을 달고 있는 나무들이 보였다. 한 곳을 가니 가이드 말대로 벚꽃이 만개한 몇 그루 벚나무가 있었다.  로신 선생은 일본 유학시절 일본의 벚꽃축제를 보고 《벚꽃이 만발한 계절이면 마치 분홍빛 구름이 드리운 것 같다》고 묘사했다. 벚꽃이 거의 지고 몇 그루만 남았으니 《분홍빛 구름이 드리운 것 같다》고는 할 수 없으나 벚꽃이 만개한 몇 그루 벚나무로도 로신 선생이 그린 황홀한 그 광경을 그려보기에는 족했다.  《미국 수도에서 벚꽃축제가 열린다는 게 이상하죠? 여기에 이런 사연이 있습니다.》  그 사연인즉 이러하다. 워싱턴DC에 벚나무가 심어진 것은 스키도모어(Mrs.Scidmore)라고 하는 한 부인의 노력과 갈라놓을 수 없다. 1885년 오빠 만나러 일본에 간 이 부인은 일본 벚꽃을 보고 큰 감명을 받는다. 미국에 돌아온 그는 일본 벚꽃을 미국에 들여올 것을 정부에 청원했다. 하지만 미국정부는 그의 청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20여 년 동안 부인은 계속 정부에 청원했다.  1909년 3월 미국 27대 대통령으로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대통령이 취임하자 스키드모어 부인은 대통령 부인인 헬렌 태프트(Helen Taft) 여사에게 청원서를 보낸다. 태프트 부인이 《자신도 일본에 산 적이 있어 일본 벚꽃의 아름다움을 잘 알고 있다》는 답신을 보내면서 일본 벚꽃나무의 워싱턴 이식 작업이 본격화 된 것이다.  미국 대통령 부인까지 참여했다는 것을 안 당시 일본 도쿄 시장이 1910년 벚나무  1500그루를 기증했다. 하지만 이 나무들은 워싱턴 토양과 일본 토양의 차이와 해충 때문에 제대로 뿌리 내리지 못해 소각 처리됐다. 2년 뒤인 1912년 다시 일본 측이 기증한 벚나무들이 워싱턴 포토맥 강가와 주요 거리에 성공적으로 이식됐다. 이를 기념한 행사가 지금의 벚꽃 축제의 기원이 된 것이다. 《이처럼 황홀한 벚나무들도 전쟁피해를 입었습니다. 1940년에 와서 벚나무가 4천 그루로 늘었는데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이 있은 후 그 사건에서 전사한 군인들의 부모들이 도끼를 들고 워싱턴 DC.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벚나무를 찍어버리고 나무 그루터기에 팻말을 달아놓았습니다. 그 팻말에 무슨 글이 씌어졌겠습니까?》  가이드는 잠깐 뜸을 들이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전사자 부모들은 벚나무를 찍어버리고는 그 나무 그루터기에 이라고 쓴 팻말을 달아놓았습니다. 일본인들의 운명이 바로 밑동 잘린 벚나무와 같다는 뜻이죠. 그처럼 황홀한 꽃을 피우던 벚나무가 전쟁 때문에 도끼에 찍혔을 뿐만 아니라 로 되였으니 개탄할 일이 아닙니까. 다행히도 당시 벚나무 몇 그루가 요행 화를 면해 말하자면 지금의 벚꽃축제의 씨앗으로 되었습니다.》  가이드는 벚꽃축제가 미국 수도에서 펼쳐지게 된 데는 대통령 영부인의 공로가 컸다고 하면서 허나 당시 대통령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는 일본의 조선반도 지배를 인정하는 첫 협약인 《카스라-태프트 밀약》을 일본과 체결한 장본인이라고 했다. 이 밀약은 미국과 일본 사이에1905년에 체결되었는데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용인하는 대신 일본의 조선반도 지배를 묵인한다는 내용의 계약이다.  《지금도 한국인들에게는 태프트 대통령은 별로죠. 지나간 역사는 접어둡시다. 자, 그럼 한 가지 물음을 제기하겠습니다. 벚꽃의 본산지는 어딥니까?》  우리 일행 중 대부분이 일본이라고 했다.  《아닙니다. 본산지는 한국의 제주도입니다. 벚꽃의 원조는 제주도의 왕벚꽃입니다. 일본인들이 그 꽃을 일본에 가져다가 사꾸라라고 이름을 달고 벚꽃의 원조라고 건방을 떤 겁니다.》  꽃나무에도 역사가 있고 나라간 갈등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가이드는 다시금 상기시켜주었다.
32    세계 정치 1번지 워싱턴DC (제3편) 댓글:  조회:5118  추천:0  2013-10-30
                          제퍼슨 기념관과 루즈벨트 공원  워싱턴DC에는 역대 대통령 기념관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독립선언서 작성자인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관이고 다른 하나는 16대 대통령 링컨 기념관이다. 우리 일행이 먼저 찾은 곳은 포토맥 강가에 자리 잡은 제퍼슨 기념관(Thomas Jefferson Memorial) 이였다.  지붕이 원형으로 된 로마 신전을 본 따서 만든 기념관안에 청동으로 만든 제퍼슨 대통령의 동상이 있는데 대륙회의에서 연설하는 제퍼슨 대통령의 모습을 본따 만든 것이란다. 대리석으로 된 벽에는 그가 대통령 취임식에서 한 연설 일부와 독립선언서의 일부 대목이 새겨져 있었다. 제퍼슨 대통령의 얼굴모습은 상당히 근엄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응시하는 모습인데 가이드는 제퍼슨 대통령은 지금도 기념관 반대쪽에 있는 백악관에서 사무를 보는 현직 대통령을 지켜본다고 했다.  기재에 따르면 제퍼슨 대통령은 박학다식한 사람으로 대통령 외에도 원예가, 법률가, 건축가, 과학자, 고고학자, 고생물학자, 작가, 발명가, 농장주, 외교관, 음악가, 버지니아 대학교 창립자였다. 폭넓은 지식과 교양, 재능으로 그는 줄곧 벤저민 프랭클린과 더불어 18세기 미국 최대의 르네상스식 인간으로 평가되었다.  제퍼슨 대통령은 스스로도 자신의 능력을 인정했다. 그는 직접 쓴 묘비명에서도 자신에 대한 평가를 잊지 않았다.   《여기에 제퍼슨이 안장되어 있다. 미국 독립선언서의 기초자이며 버지니아 종교자유법안의 기초자이고 또 버지니아 대학의 건립자이다.》  제퍼슨 대통령에게는 일화도 많고 명언도 많다. 인권을 중요시하고 계몽주의 기본 원칙인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다》, 《모든 사람은 신 앞에 평등하다》를 주장해온 제퍼슨의 명언에는 자유와 평등에 관한 명언이 많다. 《나는 하나님의 제단 앞에서 국민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모든 형태의 전제정치에 대항해 영원히 투쟁할 것을 맹세하노라》      이는 국회의사당내에 있는 제퍼슨 기념비에 새겨져있는 제퍼슨의 명언이다. 《국민은 우리의 자유를 보존하는 유일하고 확실한 신뢰의 바탕이다.》 《나는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 《오늘 할 수 있는 일은 내일로 미루지 말라.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남에게 미루지 말라.》 《우리에게 행복을 안겨주는 것은 돈이나 명성이 아니라 평안과 함께 내가 가지고 있는 나의 일이다.》 《공직을 맡은 자는 스스로를 공공재산으로 생각해야 한다.》  지금도 귀감이 되고 있는 제퍼슨의 명언을 다시 되새겨보는 시간을 제퍼슨 기념관에서 가진 것이 필자에게는 더없는 행운이었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제퍼슨 대통령은 파산으로 가난에 시달리다가 미국 독립 50주년이 되는 해인 1829년 7월 4일 조용하게 생을 마쳤다. 그가 가난에 시달릴 때 거리에 나서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또 그를 찾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하니 세상인심이 바뀌어도 크게 바뀐 것이다.   제퍼슨 대통령 기념관을 나와 푸른 잔디 사이로 난 길로 올라가면 루즈벨트 공원이 나온다. 이 공원은 워싱턴DC에서 유일하게 기념관이 아니고 공원으로 대통령을 위업을 기리는 곳이다. 호숫가에 위치한 공원은 조각공원 같이 꾸며졌는데 조각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어록이 새겨져 있었다. 미국의 32대 대통령으로 미국의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20세기 위인으로 칭송받는 루주벨트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통령 직에 네 번 이나 당선되어 12년간 백악관을 차지한 장기 집권자로 기니스북에도 올라있는 인물이다.  조각상 중 루즈벨트 대통령이 애완견과 함께 자리를 한 조각상이 퍽 인상적이었다.    
31    세계 정치 1번지 워싱턴DC(제2편) 댓글:  조회:3873  추천:0  2013-10-19
                                                        자연사박물관과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이날 관광은 첫 코스부터 차질을 빚었다. 려행사를 통한 관광이란 여럿이 팀을 무어 하는 관광이니만큼 가이드와의 시간약속을 철같이 지켜야 하는데 한국에서 온 한 가족이 첫 코스인 자연사박물관 관광에서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가이드는 박물관이 큰 데다가 관광객까지 많아 사람찾기란 거의 불가능이니 꼭 30분 후에 버스를 세워둔 곳으로 모이라고 했는데 국민학교를 다니는 아들을 데리고 온 한국인 부부는 아들에게 박물관에서 자연공부를 시키느라고 한시간 뒤에야 박물관에서 나왔다.  일행의 따끔한 눈총을 받는 한국인 부부 사정에 필자는 이해가 갔다. 세계 최대의 자연사박물관은 어린이들의 천국이나 다름없으니까.  자연사박물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게되는것이 박제된 거대한 코끼리이다. 이 코끼리는 지금까지 발견된 코끼리중에서 가장 큰 아프리카 코끼리라고 한다. 1억 2400만점의 소장품을 전시된 자연사박물관은 자연계와 인류 역사를 테마로 하고 있다. 동물관만 봐도 공룡으로부터 사자, 호랑이, 기린 늑대, 물소 하여간 모든 동물들이 다 박제되어 있어 어린이들은 떠날념을 하지 않는다.   자연사박물관에 한국전시관이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국전시관은 한국의 유명인물, 한글, 혼례, 풍습, 그림 등을 통해 한국을 소개하고 있었다. 중국전시관도 있는가 해서 한참 돌아보다가 시계를 보니 약속한 시간이 다돼가고 있었다. 자연사 박물관이 얼마나 큰지 자세히 돌아보려면 하루가 걸린다고 했다.  워싱턴 DC는  시내 어느 곳에서나 보이는 워싱턴기념탑을 중심으로 박물관과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국회도서관,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국립자연사박물관, 국립항공우주 박물관, 미국역사박물관, 국립아프리카박물관, 허시혼박물관, 우편박물관, 국립미술관, 프리어미술관, 세익스피어도서관, 산업예술관, 미처 다 열거할 수 도 없이 많은 박물관과 미술관, 도서관을 갖고 있는 워싱턴DC는 정치 수도라기보다 문화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번째 코스는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이였는데 가이드는 자연사박물관에서 시간을 많이 허비했기에 시간상 관계로 돌아볼 수 없다면서 소개만 했다.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은 영국인 과학자 제임스 스미손(James Smithson)의 기부금으로1846년에 설립된 종합 박물관입니다. 정작 본인은 미국에 온 적도 없고 연고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 미국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었지만 그는 고 하면서 1829년 당시 돈으로 거액인 410만 달러를 미국에 기증했습니다. 당시 그 돈이면 중등 규모의 도시 하나를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 스미스소니언 협회는 6천명에 달하는 직원을 가지고 있는 세계적 수준의 연구 기관으로 발전했습니다. 이 협회는 워싱턴에서는13개의 박물관과 갤러리, 국립 동물원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소장품은 1억 3천 9백만 개에 달하는데 지금 그 중 단지 1%만 전시되고 있습니다.》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을 잠깐이나마 돌아볼 기회를 놓친 것으로 하여 필자는 국회의사당앞에서 받은 유감을 또 한번 씹을 수밖에 없었다.         
30    세계 정치 1번지 워싱턴DC (제1편) 댓글:  조회:4210  추천:0  2013-09-30
  보통 미국 동부관광은 세계 정치의 1번지로 불리는 미국 수도 워싱턴DC, 세계 경제 중심으로 불리는 뉴욕, 캐나다와 공유하고 있는 나이가라폭포 순으로 이어진다.                                                      국회의사당    미국 동부 관광은 미국 수도 워싱턴DC로 부터 시작되는데 워싱턴DC 관광은 국회의사당이 첫 순에 꼽힌다. 우리 내외는 아내 친구가 사는 미국 중부의 작은 도시에서 이틀 동안 지내다가 아내 친구 차로 워싱턴DC에 도착하자바람으로 곧추 국회의사당으로 향했다. 우리 내외가 속한 관광팀은 만남의 장소로 약속된 국회의사당 앞에서 비로소 팀을 구성했다. 한국에서 곧추 날아온 분들이 있는가 하면 미국 각지에서 날아온 분들도 있었다.   가이드는 인사말을 마친 후 왜서 미국의 수도를 워싱턴DC(Washing tom, D.C)라고 하는가 부터 설명했다.  《지금도 워싱턴 주와 워싱턴DC를 혼동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워싱턴 주는 미국 북서부 태평양 연안에 위치해 있고 워싱턴DC는 미국 동부 대서양 연안에 위치해 있습니다. 워싱턴 DC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이름자를 그대로 따온 것이고 DC는 컬럼비아 특별구(District of Columbia)의 약자입니다. 워싱턴 DC는 미국의 50개주 중 그 어느 주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된 행정구역입니다. 1800년에 아메리카합중국의 수도로 지정되었는데 인구가 약 65만 명이고 위성 도시와 교외 인구를 포함하면 400만 명입니다.》  미국의 수도 관광이 국회의사당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했지만 운이 나쁘게 우리 일행은 국회의사당 안에 들어가 보지 못하고 그냥 밖에서 사진만 찍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간 날이 마침 국회에서 회의를 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가이드는 회의가 열리면 국회의사당 참관을 참관할 수 없다고 했다. 《국회의사당은 워싱턴DC의 상징입니다. 1793년 초대 대통령인 워싱턴 대통령 때 착공되어 1800년부터 의회 회의장소로 되었는데 1814년 영국의 침략으로 파괴되었다가 그 후 여러번 증축, 개축을 거쳐 16대 대통령인 링컨 대통령 때에 현재 모습으로 완공되었습니다. 국회의사당 높이는 94미터이고 너비는 250미터입니다. 돔을 기준으로 우측은 하원의 회의실이 있고 좌측은 상원 회의실이 있는데 국회의사당 안에는 방이 모두 540개가 됩니다. 회의 중일 때는 양쪽 회관위로 깃발을 올립니다. 보이죠 저 기발, 지금 한창 회의 중이라는 거죠.》   지금도 미국을 가보지 못한 분들 중 많은 분들은 국회의사당과 백악관을 구분 못한다. 필자도 자주 텔레비전 화면에 비치는 국회의사당이 백악관인줄 알았다. 왜냐하면 백악관은 미국의 대명사처럼 되어왔는데 보통 뉴스에서 《백악관측은 어쩌고 어쨌다》 할 때 항상 나오는 화면은 국회의사당이기 때문이다. 미국을 《미제국주의》라고 규탄하던 시절에도 《백악관 호전광들은》 하는 식으로 성토하는 보도가 나올 때면 으레 화면에 비치는 것이 국회의사당이었다. 하긴 국회의사당도 미국의 상징이니까. 가이드는 한국으로 말하면 여의도에 있는 국회의사당과 맞먹는 것이 지금 보는 워싱턴DC 국회의사당이고 대통령 관저이자 집무실인 백악관은 한국의 청화대와 같다고 했다. 그러면 중국 경우엔 국회의사당은 인민대회당이고 백악관은 중남해라고 할 가.    국회의사당 앞은 말 그대로 시민광장이었다. 공원이나 전원 같은 분위기를 주는 넓은 잔디밭이 국회의사당 앞에 펼쳐져 있고 그 앞에는 남북 전쟁 시 북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S.Grant) 장군의 동상과 기념 조각상이 있다. 동상 좌우로 남북 전쟁시 기병대와 포병대 모습을 형상한 조각상이 그랜트 장군의 동상을 옹위하고 있었다.  링컨 대통령과 함께 국가 분열을 막고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인 그랜트 장군은 19대 대통령으로 되었지만 그는 대통령으로서의 그랜트보다는 북군 사령관으로서의 그랜트 장군으로 더 유명했고 미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미국의 50달러 지폐에 찍힌 주인공이 바로 그랜트 장군이다. 그러나 다른 대통령처럼 기념관 같은 특정 건물은 없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미국 수도 상징인 국회의사당 앞에 서있다. 워싱턴 기념탑, 링컨 기념관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랜드 장군이 미국 역사와 미국인들 가슴속에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를 알 수 있다.  국회의사당 광장에서 자유로이 사진을 찍고 난 후 가이드는 지금부터 시작되는 워싱턴 DC 관광은 힘든 강행군이라고 하면서 관광 일정을 통보했다. 가이드는 워싱턴DCD엔 미국의 정치, 경제의 과거와 현재를 볼 수 있는 명소들이 많아 여행을 하면서도 배울 수 있다고 하면서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무료 혹은 매우 저렴한 입장료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워싱턴 여행의 가장 큰 혜택이라고 했다.   최대 자연사 박물관,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미국인들의 존경을 받는 워싱턴 대통령, 제퍼슨 대통령, 루즈벨트 대통령, 링컨 대통령을 기리는 기념탑, 기념관, 공원, 미국인들한테 가장 인기 있는 대통령인 케네디 대통령 묘소가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 세계 최강 대국의 대통령의 관저이자 집무실인 백악관, 미국 육, 해, 공 3군 지휘부인 펜타콘,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비쳐져 유명해진 미 연방수사국 FBI 본부, 이상 워싱턴DC의 대표적인 명소들을 하루 낮 시간에 다 돌아본다는 것은 무리라기보다 불가능하다. 해가 지기 전까지 그냥 잠깐 둘러보고 사진 찍고 이동하고 또 잠깐 들려보고 사진 찍도 또 이동, 이런식으로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려면 연세 드신 분들은 중도 포기하든지, 어떤 명소는 아예 볼 생각 말고 버스에서 내리지도 말아야 한다.    당시 필자는 전해에 결장암 제거 수술을 받고 항암제를 복용중이였다. 방사선 치료와 화학 치료에 비해 항암제 복용은 신상에 주는 영향이 크지 않지만 그래도 극약이라 지문이 다 지워지고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고 발바닥에 종기까지 생겼다. 워싱턴 관광이 강행군이지만 다시 올수도 없다는 생각을 하니 이를 악물고서라도 워싱턴 관광을 마무리하겠다고 마음을 도슬러 먹었다. 사실 강행군은 나한테는 너무나 무리였다. 종기가 난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하면서 필자는 강행군을 시작했다.         
29    《꿀벌》들의 도시-솔트레이크 (제5편) 댓글:  조회:4515  추천:0  2013-09-08
                                                           《불굴의 투혼》 살아있는 도시   솔트레이크는 미국인들에게는 이중적인 이미지를 가진 도시로 다가온다고 한다. 하나는 부유하고 질서정연하고 자연 친화적인 도시 모습이고 다른 한 모습은 계율이 많고 금욕적이며 깊은 상처를 감추고 있는 모습이다. 도시 역사와 종교적인 이미지 하고도 많은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단순히 음주 차원에서 맥주를 즐기는 내가 받은 감수를 적는다면 솔트레이크는 술 문화를 아예 거부한 좀은 《멋없는》 도시다. 솔트레이크에 술집이 아주 적은 데 술은 21살 이상만 마실 수 있고 알코올 도수 3.2도 이상인 술은 지정된 비싼 술집에서만 마실 수 있다고 한다. 알코올 도수 3.2도이면 거의 물과 같다는 얘기가 아닌가. 알코올 도수 56도인 북경 《이과주》 술을 한 병 마시는 수준이라고 하면 철저하게 금주 계율을 지키기 위해 술집을 만나면 에돌아간다고 하는 독실한 몰몬교 신도들은 아예 기절초풍할 것이다. 맥주 도수도 유타 주에 납품되는 맥주는 알코올 도수가 다른 주에 납품되는 맥주보다 낮다고 한다. 비록 마셔보지는 못했지만 듣기만 해도 별로 입맛이 당기지 않는다.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 올림픽 개최를 위해 솔트레이크 시장이 사상 처음으로 몰몬교 신도들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발표한 파격적인 시정부 결책이 하나 있는데 그게 뭐냐, 바로 《동계 올림픽 개최와 도시의 다양한 삶을 장려하는 차원에서 도심 공원 내에서 맥주 판매를 허용한다.》이다. 가령 이 결책을 다른 도시에서 내렸다면 실로 우리말 속담같이 《소 웃다 꾸러기 터질 일》이겠지만 솔트레이크에서는 이 결책으로 150년간 지켜온 실외 주류 판매를 금지한 전통이 깨졌다고 하니 아주 《획기적인》 결책이 아닐 수 없다. 술 얘기는 가볍게 웃고 넘어갈 얘기고, 비록 제약과 규제가 다른 도시에 비해 많다고 하는 솔트레이크지만 사람들에게 보여준 모습은 첨단으로 가는 새 도시 모습이었다.      농업이 주요 산업이었던 솔트레이크가 일약 공업도시로 변모된 것은 동과 은광이 들어서면서 부터이다. 솔트레이크에는 지금도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노천 동광인 빙감동광(Bingham Canyon Copper Mine)이 가동 중에 있다. 솔트레이크 관광에서 마지막 코스가 바로 이 노천관광이다. 솔트레이크에서 동남쪽으로 약 40㎞에 위치한 노천 동광에 도착하니 우리들 앞에 크기가 어마어마한 구덩이가 나타났다. 인간이 만든 조형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중국의 만리장성과 솔트레이크의 노천광산을 꼽는다고 한다. 1906년부터 구리광석을 채굴하느라 파들어 간 것이 깊이가 무려 1200m에 달하고 그 주변에는 사석(구리 등의 성분을 채취하고 버린 돌)이 도처에 큰 산을 이루고 있었다. 지구에서 가장 큰 인공에 의한 구덩이가 얼마나 깊은지 원광석을 싣고 나선형으로 되어 있는 길을 따라 올라오는 3층 높이의 적재량 300톤 초대형 트럭이 성냥갑보다 작게 보인다. 그냥 파내려 가면 지구를 아예 구멍 내지 않을 가 싶은 우려를 자아낸다. 구덩이를 내려다보는 전망대에 광산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장이 있는데 그 마당에 초대형 트럭 바퀴 하나가 전시되어 있다. 바퀴 크기가 사람의 보통 키 한배가 된다. 그렇게 큰 트럭 바퀴를 처음 본다. 바퀴 하나 값이 2만 5천 달러라고 해 모두들 혀를 내둘렀다. 하루에 동 32만 톤을 생산하는 동광은 1년 365일 가동된다고 한다. 노천 동광은 미국의 산업발전 역사와 오늘을 보여주는 현장으로 되고 있다.    솔트레이크는 광산업으로 공업도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기에 첨단산업의 발전은 광산공학과 크게 관련이 된다. 현재 세계적 IT기업과 그 연구소, 벤처기업 등이 밀집해 있다. 솔트레이크의 가장 큰 수입원은 관광업과 첨단공학이라고 한다. 솔트레이크는 1998년 11월 《뉴스위크》지가 선정한 세계 10대 첨단 신도시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밖에 투자전문지인 《배런스(Barron’s)》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7개 도시를 뽑았는데 솔트레이크는 미국의 주피터와 캐나다의 밴쿠버, 모나코의 몬테카를로, 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 스페인의 마요르카 섬, 일본의 후쿠오카와 함께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선정되었다. 선정된 도시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주변 지역으로의 이동이 편리하고 범죄율과 물가가 비교적 낮으며 좋은 기후와 다양한 레저, 문화 시설을 갖추고 있는 등 삶의 질이 높은 것이다. 쾌적한 주거환경을 가진 장수 지역으로 소문난 솔트레이크는 최근 미국 부유층이 선호하는 지역의 하나로 되었다.  유타 주를 미국의 다른 주들과 비교한 통계로 보면 유타 주는 《가장 높은 것》과 《가장 낮은》 기록을 둘 다 가지고 있다. 《가장 높은 것》 중에는 가장 높은 교육률, 가장 젊은 도시 인구, 가장 높은 고등학교 졸업자 수, 가장 높은 초급대학 졸업자 수, 가장 높은 대학 졸업자 수가 들어있고 《가장 낮은 것》 중에는 가장 낮은 사망률, 가장 낮은 암 발병률, 가장 낮은 심장병 발병률, 가장 낮은 술 소비, 가장 낮은 담배 소비, 가장 낮은 범죄율이 포함된다. 이상 통계로만 봐도 솔트레이크가 첨단 과학 도시로 탈바꿈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고급두뇌들과 쾌적한 주거환경이 크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솔트레이크만의 자랑이자 자산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세계상 약 90%에 달하는 언어를 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이다. 솔트레이크의 인재 요람으로 되고 있는 유타 주립대학, 유타대학, 브리검 영 대학 등 3개 대학의 대학생들은 대학 2학년 때부터 2년간 해외 선교에서 다양한 언어능력을 키운다. 특성상 세계 다양한 인종이 몰리는 첨단업종에서 그 어떤 언어도 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는 인적자원을 확보하고 있다는 자체가 높은 경쟁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데 직원들의 안정된 생활이 중요한 요인으로 되고 있다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알려주는 곳이 또한 솔트레이크다. 몰몬교 신도들은 가정을 하나님이 준 축복으로 받아들인다. 타 도시에 비해 이혼 가정, 결손 가정 비율이 아주 낮다. 가정과 교육을 최고 덕목으로 여기는 몰몬교 신도들은 《가족관계는 현세에서 뿐만 아니라 내세까지 이어진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매주 월요일 밤에 어김없이 갖게 되는 가족 행사가 있다. 그 행사 이름이 《가족의 밤》이다. 혼외 연애는 물론 술, 담배, 커피까지 금하고 대부분 시간을 가족과 즐기는 그들이지만 가족의 밤이라는 날을 따로 두고 그 날은 전화도 자동응답으로 해놓고 받지 않고 텔레비전도 켜지 않은 채 가족들과 재미나는 시간을 보낸다. 그들에게는《그 어떤 사회적인 성공도 가족을 떠나서는 운운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족의 가치가 행복의 원친임을 알려주는 명언이라고 봐야겠다. 근면, 성실, 정직, 낙관, 정절, 검소, 봉사, 가족중심, 상호부조는 몰몬교 신도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계율이다. 이 계율은 지금 가장 미국적인 가치를 구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여 엄격한 심사를 받아 채용된다는 미국연방조사국(FBI) 요원에 몰몬교 신도들이 잘 발탁된다고 한다. 미국에서 굴지의 재벌 기업인 유니온 퍼시픽 철도, 델타 에어라인, 웨스턴 항공, 콜케이트 치약, 샘스마켓, 월마트 체인, 펩시콜라 등은 모두 몰몬교의 소유 기업체다.   《갈매기 기적》과 함께 기적을 낳은 솔트레이크,《불굴의 투혼》이 살아있다는 솔트레이크는 지금 대자연의 원시성과 첨단 대도시의 정연함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도시로 친근하게 다가서고 있다.     
28    《꿀벌》들의 도시-솔트레이크 (제4편) 댓글:  조회:4095  추천:0  2013-08-17
                               《꿀벌》들이 개척한 도시   유타는 인디언 말로는 《산에 사는 사람》이란 뜻이다. 유타 주에 별명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벌집의 주(Beehive State)》다. 이 별명은 몰몬교 신도들의 사회적 협력의 상징으로 되고 있는 벌집에서 유래된 것이다. 미국인들은 몰몬교 신도들을 《말하는 꿀벌》이라고 한다. 《말하는 꿀벌》이라 불릴 만큼 대단한 근면성을 자랑하는 몰몬교 신도들은 근면, 성실, 정직, 낙관주의, 정절, 검소, 봉사, 가족 중심의 계율을 지켜나가며 관개 농업을 시작으로 삶의 터전을 닦았다. 캘리포니아에 골드러시가 시작되면서 솔트레이크는 중간 기착지이자 물자공급지로 급부상하게 된다. 관개농업의 성공에 이어 구리, 철, 은, 납 등 풍부한 광물자원을 1969년 대륙횡단철도가 개통되면서 솔트레이크는 중서부 교역 집산지로 격상된다. 1896년, 솔트레이크의 기적적인 발전으로 유타가 마침내 미국의 45번째 주로 된다. 유타 주는 《말하는 꿀벌》들이 개척한 주가 틀림없다.   유타 주의 주도인 솔트레이크 주민들 중 몰몬교 신도가 70%를 차지한다. 몰몬교 본부가 있는 솔트레이크를 몰몬교 본산지라 할 수 있다. 사실 솔트레이크는 몰몬교 신도들에 의해 탄생한 도시이다. 때문에 솔트레이크와 그 부근의 대부분 관광명소가 몰몬교와 관련이 있다.솔트레이크 시 중심에 위치한 템플 광장에는 솔트레이크의 기념비적 건물들이 모여 있다. 몰몬교 역사와 몰몬교 신도들이 창조한 기적을 엿볼 수 있는 광장이기도 하다. 이 광장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축조물은 6개의 첨탑을 떠이고 있는 솔트레이크 성전(Salt Lake Temple)이다. 높이가 64m, 정면 폭이 58m인 성전은 1853년부터 40년에 걸쳐 건축되었다. 이 성전에서 교회의 침례, 성전 결혼, 조상들을 위한 구원의식 등 특별한 의식이 행해진다고 한다. 미국의 저명한 관광지도 및 여행서적 출판사인 랜드 맥낼리(Rand McNally)는 1991년에 발간한 《세계적인 경이로움-인류문명의 걸작 안내》라는 책에서 파르테논 신전, 크렘린궁, 만리장성, 피라미드 등 고대 기념비적 축조물과 에펠탑, 자유의 여신상,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 등 현대 축조물과 함께 솔트레이크 성전을 인류 문명의 100대 걸작의 하나로 선정하였다. 성전이 일반 예배를 보는 곳이 아니어서 관광객 입장을 금하고 있어 그냥 겉으로만 돌면서 사진만 남겼다.       성전 바로 옆에 둥근 돔형 모양을 한 이상한 건물이 있어 가이드에게 물으니 그것이 바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파이프오르간과 태버나클 합창단으로 유명한 태버나클(Tabernacle) 대 예배당이라고 했다. 다행이도 관광이 허용된 곳이었다. 1867년에 완공된 태버나클은 기둥 하나 없는 돔 형태로 된 건물이다. 이 건물은 철근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나무못, 생가죽, 고리, 흰 대들보 등으로만 축조되었다고 한다. 장내에서 종이를 찢는 소리나 못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음향장치가 잘 되어 있다고 해서 볼펜을 바닥에 떨어뜨렸는데 관광객들의 잡담으로 환상적인 음향효과를 검증할 수 없었다. 무대 정면에 설치된 크고 작은 파이프로 이루어진 오르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11,623개 파이프로 된 오르간 중 가장 긴 것이 6미터라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오르간은 장중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태버나클 합창단은 가정주부, 회계사, 일반 사무원, 학생, 판매원, 비서직, 농업통계사, 은행가, 여급, 미용사, 대학교수, 목수, 물리치료사, 청부업자, 의사, 낙농가, 기사 등 50여 개 직업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었는데 단원 수는 375명이란다. 세계적으로 단원 수가 가장 많은 합창단이다. 이 합창단은 1847년 8월 22일 개척자들이 솔트레이크에 정착한지 29일째 되는 날, 자그마한 교회 건물에서 교회 성가대로 고고성을 울렸다. 전원 모두가 자원봉사자들인 태버내클 합창단은 레이건 대통령 취임식과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 올림픽 개막식에서 위상을 자랑했다. 이 합창단이 부른 노래가 두 번이나 그래미상을 수상했는데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태버나클 합창단은 미국을 대표하는 합창단》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솔트레이크의 주요 관광명소로 되고 있는 솔트레이크 성전과 태버나클 대 예배당을 찾는 관광객이 해마다 800만 명에 달한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숫자다. 솔트레이크가 이미 단순한 종교적인 이미지를 벗어나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솔트레이크 시내 북쪽의 잔디와 꽃밭, 나무가 가득한 언덕 위에 유타 주 청사가 자리 잡고 있다. 1916년 완성된 이 청사는 워싱턴 DC의 국회의사당을 모델로 만들어졌다. 건물 중앙에는 3층 높이의 원형 홀이 있다. 그 무게가 6.8톤이나 된다고 한다. 돔형 천장과 벽면에는 초기 이주민들의 역사를 기록한 그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고 하는데 관광 일정에 청사 내 관광이 들어있지 않아 아쉬움만 남겼다. 청사 주변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청사 앞에는 왐파노그(Wampanoag) 인디언 부족 추장인 메사소이트(Massasoit)의 동상이 서 있다. 메사소이트는 영국의 청교도들이 미국 땅에 첫 발을 들여놓을 때 많은 도움을 준 인디언 추장이다. 메사소이트는 미국의 《추수감사절》과도 관련이 있다. 유래를 보면 이러하다.        102명의 청교도들이 1620년 9월 16일 종교 자유를 찾아 영국의 제2의 항구도시 플리머스를 떠난다. 60여 일의 항해를 거쳐 미국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그 해 긴 겨울을 지내면서 추위와 질병과 굶주림으로 대부분의 아녀자들과 아이들이 죽고 겨우 50여 명이 살아남는다. 생존의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인디언들이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그 인디언 부족이 왐파노그 부족이다. 인디언들은 청교도들에게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들을 가르쳐 주었다. 옥수수를 키우는 법, 물고기를 낚는 법, 그리고 사냥하는 법 등을 가르쳤고 다른 인디언 부족의 공격으로부터 청교도들을 지켜주었다. 그 해 가을 인디언의 도움으로 청교도들은 큰 풍년을 맞아 많은 곡식을 거두게 되었다. 청교도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인디언들의 도움에 감사하여 왐파노그 인디언 부족 95명을 초청하여 만찬을 베푼 것이 오늘날 추수감사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청교도들은 인디언의 도움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메사소이트의 동상을 세운다. 그러나 왐파노그 부족도 다른 인디언 부족과 마찬가지로 학살당하는 비극을 면치 못한다. 지금도 해마다 추수감사절이 되면 왐파노그 부족 후예들이 메사소이트 동상을 찾아와 조상을 추모하는 행사를 갖는다고 한다. 풍작을 경축하는 즐거운 명절이 인디언들에게는 눈물을 흘리는 날이 된 것이다. 메사소이트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서 어쩔 수 없이 언젠가 보았던 한 인디언 학자의 글을 떠올렸다. 그 학자는 인디언과 백인들 간의 관계를 다룬 글에서 이렇게 썼다.     《정부도 왐파노그 부족이 미국 땅에서 멸종되어 그들의 언어나 문화를 찾을 길 없다고 인정하고 있다. 왐파노그 부족 추장 메사소이트는 오늘도 백인들이 배를 타고 들어온 바다를 향해 서 있다. 하지만 인디언들이 베풀어 준 사랑과 고마움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 까?》    여운을 길게 남기는 글이다. 미국 동부 해안에서 바다를 향해 서 있는 메사소이트가 솔트레이크에도 정중히 모셔져 있는 까닭은 몰몬교 신도들도 정착 시 인디언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기회의 땅을 찾아 영국을 떠나 미국에 첫 발자국을 찍은 청교도나 역시 기회의 땅을 찾아 미국 동부를 떠난 몰몬교 신도들이나 다 종교 박해를 받았고 핍박에 의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나섰다는 점에서 그들의 운명은 같은 맥락을 했다. 종교 박해를 받은 그들과 인종 박해를 받은 인디언은 《동병상련》이랄 가, 뭔가 통하는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인디언들이 베푼 사랑과 고마움을 유타 주는 그냥 기억하고 있었다.  
27    《꿀벌》들의 도시-솔트레이크(제3편) 댓글:  조회:3139  추천:0  2013-08-06
                                              믿거나 말거나                                                                          솔트레이크 시내에는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하여 세운 동상들이 많다. 주로 개척사와 연관이 있는 인물들의 동상이다. 그런데 유독 하나만은 인물 동상이 아니고 조류 동상이다. 그것이 바로 유타 주를 상징하는 새로 지정된 갈매기 동상(Sea Gull Tower)이다. 갈매기 동상은 인물 동상처럼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해 세운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기적을 기념해 세운 것이다. 역사적인 기적을 이렇게 적고 있다.  몰몬교 성도들이 새로운 자유의 땅인 솔트레이크 계곡에 도착해 먼저 시작한 것이 관개 농업이다. 사막을 전답으로 만들려면 우선 물이 필요했다. 쇠로 된 파이프가 없으니 나무속을 파서 관개용 물길을 만들고 그 물길을 수원이 있는 산으로 이어가는 혹독한 역사(役事)였다. 더군다나 솔트레이크는 사막성 기후인데다가 고지대여서 겨울은 혹독하게 추웠다. 열악한 환경에서 초기 이주민들은 놀랄 만한 생명력과 근면성, 도전 의지로 기아와 추위를 이겨내며 삶의 터전을 닦았다. 봄이 오니 이주민들은 가지고 온 씨앗을 뿌린다. 개간된 처녀지에 새싹이 움트고 햇볕을 받아 곡식이 잘 자라고 있는데 난데없이 메뚜기 떼가 덮쳐든다. 메뚜기들이 농작물을 줄기와 잎도 남기지 않고 다 갉아먹는다. 메뚜기가 하도 많아 농부들은 농작물이 메뚜기에게 먹히는 것을 안타깝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기도뿐이었다. 열심히 기도했다. 갑자기 어디선가 갈매기가 하늘을 덮으며 떼 지어 날아왔다. 태평양과는 머나먼 사막지대에 갈매기가 날아오다니 참말로 기적이다. 날아온 갈매기들은 메뚜기를 잡아먹거나 부리로 물어서 소금호수에 버렸다. 갈매기들로 요행 위기를 모면한 그 해가 이주민들이 솔트레이크에 정착한 이듬해인 1848년이었다. 멀리 태평양에서 날아온 갈매기들은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고는 바다로 날아가지 않고 그냥 솔트레이크에 남았다. 지금도 염수호에 가면 그 때의 《후손》들을 볼 수 있다. 해마다 4월에서 6월까지 5,000마리 내지 8,000마리 정도의 갈매기들이 호수에서 알을 낳는다. 역사적인 기적을 기념하기 위해 1913년 《갈매기 기적》이라고 이름 한 갈매기 동상이 세워지고 갈매기가 유타 주를 상징하는 새로 된다.    지금도 머나먼 태평양에서 갈매기 떼가 날아온 것이 미스터리로 되고 있다. 몰몬교 신도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나님이 은총을 내린 것이라고 답하나 혹자는 당시 태평양에서 일어난 허리케인으로 먹이를 찾을 수 없어 갈매기들이 내륙 염수호를 찾아 왔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당시 태평양에서 날아온 갈매기는 물론 곡식을 덮쳤던 메뚜기마저 《몰몬 메뚜기(Mormon Cricket)》로 명명되어 대영백과사전에 올라있다. 염수호에서 날아예는 갈매기를 보니 우리 내외가 자주 찾는 로스앤젤레스의 유명한 비치인 산타모니카 해변에 온 것 같은 착각이 인다. 솔트레이크에 갓 이주한 사람들도 갈매기가 날아예는 염수호가 태평양인줄로 알았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대서양 연안에서 태평양 해변까지 미국 대륙을 횡단한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또 믿거나 말거나, 이번엔 평균 수명 관련 이야기다. 유타 주는 네바다 주와 럭키산맥을 사이 두고 있다. 땅 크기와 인구도 비슷하고 대부분 땅이 산맥 아니면 사막이라는 점도 같다. 그러나 두 주는 주민들의 평균 수명에서 극과 극을 이룬다. 네바다 주 주민들의 평균 수명이 미국에서 가장 짧은 반면 유타 주 주민들의 평균 수명은 미국에서 최장이다. 최장 수명에 대해 몰몬교 신도들은 그 이유를 아주 간단하게 설명한다. 즉 몰몬교의 엄격한 신앙이 준 혜택이란다. 몰몬교 신도들에게는 건강 율법이 따로 있다. 몰몬교 교주인 조셉 스미스가 1823년에 제정한 《건강수칙》을 보면 주로 음식과 관련이 있다. 《건강수칙》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곡물은 생명의 근본이다. 야채나 과일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으면 다 먹되 고기는 적게 먹어라. 약초와 야채, 과일은 보충하는 뜻에서 섭취가 무방하다. 술, 담배 그리고 뜨거운 차는 금하라. 흉년에 대비해 1-2년간 먹을 것은 반드시 비축하고 비축할 때 가공하지 않은 그대로 하라.》    몰몬교의 교주 스미스가 《건강수칙》을 제정한데는 특별한 사정이 있었다는 게 해당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건강수칙》을 제정하기 전 해인 1822년 미국 해안지방에는 콜레라가 크게 유행해 뉴욕시는 과일 매매를 금지시키고 감자, 토마토, 양파 등 몇 가지 야채만 먹되 그나마 적게 먹을 것을 권장했다. 그러나 당시 서부로 가던 이주민들에게는 가장 무서운 것은 인디언이 아니라 괴혈병이었다. 황야에서 사막에서 야채나 과일은 볼 수조차 없어 이주민들에게는 야생동물 고기가 주식이 되었는데 고기만 주로 먹으니 자연히 비타민C가 결핍하게 되었다. 붙는 불에 키질이라고 콜레라 예방으로 야채와 과일 섭취에 대해 내린 금지령은 괴혈병 발생에 박차를 가한 셈으로 되었다. 몰몬교 교주 스미스가 금지령과 정반대되는 《건강수칙》을 정한 것은 당시로 말하면 이주민들에게 치명적인 괴혈병 예방을 위한 아주 현명한 처사라고 해당 전문가들은 인정하고 있다.    지금도 몰몬교 신도들은 술, 담배, 커피를 금하고 곡물은 원상 그대로 저장하고 필요할 때 제분해서 먹는데 밀가루는 정백하지 않고 통밀가루로 음식을 만든다고 한다. 해당 부문에서 전문 조사를 진행한 결과 몰몬교 신도들과 미국의 일반 주민들이 중요한 질병 발병률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면, 몰몬교 신도들의 여성 식도암 발병률은 일반 주민들에 비해 90%나 적으며 당뇨병, 신장병, 방광염 등 비뇨기과 질환은 50%나 적다. 암 사망률도 전국 평균 수치보다 낮다.    식생활을 제외한 주거환경이나 기후 등 다른 생활환경이 일반 주민들과 같은 조건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식생활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려주는 실례로 된다. 《몸에 꼭 필요한 만큼만 섭취하는 것이 미덕》이라는 몰몬교 신도들의 명언을 다시 되새겨 보게 된다.  
26    《꿀벌》들의 도시-솔트레이크 (제2편) 댓글:  조회:3513  추천:0  2013-07-12
                                                                                                              바로 이 곳이다!                          럭키산맥을 넘어온 몰몬교 지도자 브리감 영이 산 정상에서 솔트레이크 분지를 내려다보며 감격에 차 외친 소리가 《바로 이 곳이다(This Is The Place!)》 이 말은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른다.     당시 솔트레이크는 황막한 사막과 모래벌판으로 이렇다 할 지명도 없고 소수의 인디언들만 흩어져 살고 있었다고 한다. 살풍경 같은 땅이었지만 브리감 영의 눈에 비친 건 그토록 갈망했던 《신이 계시한 시온의 땅》이었다고 한다. 하여 브리감 영은 후에 개척을 거쳐 옥토가 된 솔트레이크를 《뉴 예루살렘》, 또는 《성인의 도시》라고 자칭했다.    솔트레이크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개척자 주립공원(Pioneer Trail State Park)》이다. 《개척자 주립공원》은 브리감 영이 인솔한 148명 개척자들이 천신만고 끝에 1847년 럭키산맥을 넘어 솔트레이크 분지에 첫 발자국을 찍은 도착지에 자리 잡고 있다. 개척자들의 공적을 기려 공원에 세운 기념비에는 개척자들이 자유의 땅, 약속의 땅을 찾아 1846년부터 2월부터 1847년 6월까지 고통, 병마, 굶주림을 이겨가며 육로로 장장 2,080킬로미터를 강행군한 미국 대륙 횡단 역사를 보여주는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여기서 잠깐 몰몬교와 신도들의 서부 이동 역사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몰몬교는 정식 명칭이 아니다. 몰몬교 정식 명칭은 후기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The Christ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이다. 몰몬교란 말은 예전엔 기시가 담긴 별명이었지만 지금은 자랑스러운 이름이 되었다. 기독교 초기에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뜻에서 크리스챤이라고 불렀던 경우와 흡사하다.  몰몬교는 1805년 미국 버몬트 주 샤론에서 출생한 교주 요셉 스미스가 1823년 모로나이라는 천사의 계시를 받아 기원전 2천2백년부터 서기 4백20년까지 고대 미국 대륙 종교역사가 새겨진 금판을 얻고 그것을 번역해 몰몬경을 만들면서 시작을 고한다. 그 뒤로 몰몬교 신도들은 기존 기독교 신도들로부터 이단으로 취급당해 박해를 받게 된다. 중국 4대 고전명작 《수호지》에 《핍박에 의해 량산(梁산)에 오른다.》는 말이 나온다. 량산박에 모여든 108명 영웅호걸들이 각자 부득한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산적》이 되는 길을 택했다는데서 나온 말이다. 이 말과 같이 몰몬교 신도들은 교주가 감옥에서 피살되자 이주를 시작한다. 이로부터 1868년까지 22년간 약 8만 명 몰몬교 신도들이 미국 뉴욕 주에서 유타 주까지 평원과 계곡, 늪지대, 설산을 포장마차와 손수레를 끌고 횡단하는 전무후무한 대장정이 장을 펼친다. 이 대장정의 선두에 선 사람이 바로 교주 뒤를 이어 몰몬교를 이끌게 될 브리감 영이다.         건축가 출신인 브리감 영은 나중엔 유타 주 초대 주지사로 되고 미국 서부 개척의 대표적 인물로 인정받게 된다. 그의 사적을 작가인 바르디스 피셔(Vardis Fisher)가 1939년《하나님의 아들(Children of God)》이라는 소설을 써서 《하퍼북(Harper Book Prize)》 대상을 받게 되자 1년 뒤인 1940년에 20세기 폭스사가 소설을 영화화하였는데 그 영화가 바로 서사시적 대작 《브리감 영(Brigham Young)》이다. 이 영화는 오스카상을 받은 딘 재거(Dean Jagger)와 타이론 파워(Tyron Power)등이 출연하여 공전의 히트를 하였다. 영화는 자유의 땅을 찾아가는 몰몬교 신도들의 대장정 역사를 생생하게 펼쳐 보여 당시 미국 내에서 몰몬교 신도들에 대한 동정을 불러일으켰다. 영화는 지금도 텔레비전 화면에 종종 오른다고 한다. 몰몬교 신도들의 대장정 역사는 서부 개척사의 한 장을 빛나게 장식했다. 그들의 이주로 유타 주가 생겨났고 솔트레이크가 사막의 오아시스로 되었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몰몬교 개척자들의 이야기는 자유를 찾는 모든 미국인들의 역사》라고 높이 평가했다.        
25    《꿀벌》들의 도시-솔트레이크 (제1편) 댓글:  조회:4063  추천:0  2013-06-26
   솔트레이크는 몰몬교 성지로 많이 알려졌다. 중국인들에게는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 올림픽으로 성큼 다가온 도시다. 솔트레이크는 미국의 첫 국립공원인 옐로우스톤 관광차 들러 간 도시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항공편으로 옐로우스톤으로 가려면 솔트레이크까지 가서 관광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옐로우스톤 외 솔트레이크 주변엔 미국의 유명한 국립공원과 주립공원이 많다. 솔트레이크에서 그랜드캐년, 자이언캐년, 브라이스캐년, 브레이크스 유적, 모뉴먼트 벨리, 파웰호수 등 관광명소까지 차로 5~9시간 달리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때문에 솔트레이크는 각 관광명소로 가는 필수 경유지이다. 사실 옐로우스톤 3박 4일 관광코스를 선택할 때만 해도 솔트레이크는 그냥 지나치는 도시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일단 가보고 나니 샌프란시스코와도 어께를 견줄 정도로 매력적인 도시였다.                                    사막의 오아시스    캘리포니아와 네바다 사막을 지나 유타 주 경내에 들어서면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다가서는 곳이 바로 솔트레이크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감수보다 자동차로 이동하면서 받는 느낌이 더 강하다고 한다. 자동차로 솔트레이크를 찾은 한 여행객은 마치 사막에서 생명의 수원을 찾은 느낌이었다고 그 감수를 적고 있다.  비행기로 솔트레이크를 내려다보면 두 곳이 눈이 부시게 하얀 색깔을 내고 있는데 하나는 럭키산맥 지류인 워새치 산맥(Wasatch)의 봉우리들이 떠이고 있는 만년설이고 다른 하나는 솔트레이크 북쪽에 위치한 염수호의 소금밭이다. 여름에 솔트레이크를 찾는 관광객들은 염수호의 하얀 소금밭을 보고 때 아닌 계절에 웬 눈이냐고 의아해한다. 여름에 솔트레이크를 찾은 우리 내외도 비행기에서 황량한 사막을 지겹게 내려다보다가 갑자기《하얀 눈》이 덮인 평야가 펼쳐지니 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염수호의 이름은 솔트레이크(Salt Lake)다. 유타 주 주도인 고원도시 솔트레이크 지명은 이 호수에서 유래된 것이다. 때문에 솔트레이크를 《소금호수의 도시》라고도 부른다. 호수의 호안선 길이가 500km, 너비가 80km, 평균수심 4.5m, 면적이 4,700㎢에 달한다. 빙하기에 형성된 호수인데 염분 함유량은 바닷물의 10배인 25%나 되고 소금 매장량은 약 60억 톤 이다. 우연한 일치라고 할 가, 지구상에는 요르단 강이 두 곳에 있는데 이스라엘의 요르단 강과 솔트레이크의 요르단 강이다. 두 곳은 지형학적으로 비슷하거니와 똑 같이 사해(死海)를 갖고 있다. 다르다면 솔트레이크 소금호수가 이스라엘 소금호수보다 면적이 크고 소금 함유량이 높을 뿐이다. 지도로 보면 소금호수가 위치한 지형이 그렇게도 똑 같을 수가 없다. 조물주가 그냥 두 곳에 똑같은 천혜의 비경을 빚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솔트레이크를 《뉴 예루살렘》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 가. 솔트레이크 염수호를 세계 최대 염수호라고 하지만 사실 중국 청장고원 차르담분지에 위치한 차르한(察尔汗) 염수호가 표고 2670m, 남북으로 40km, 동서로 140km, 총면적이 5800㎢로 세계 최대 염수호다.      지금 솔트레이크는 눈과 《눈》의 혜택을 톡톡히 입고 있다. 말하자면 솔트레이크를 병풍인양 둘러싸고 있는 산맥의 만년설과 눈처럼 하얀 소금밭으로 솔트레이크는 세계 최고 스키 메카로, 최대 이온 미네랄 공급지로 크게 각광받고 있다. 솔트레이크 염수호는 미네랄 공급원으로 매우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산맥에 겨우내 쌓인 눈이 봄에 녹아 호수로 유입되면서 풍부한 미네랄의 원천으로 되면 여름의 사막성 기후는 물을 자연 증발시켜 호수의 미네랄 함유 도를 높인다. 호수가 사해이기에 오직 자연적인 증발만 있을 뿐이다. 또한 염수호가 갖고 있는 특징 중의 하나는 호수의 미네랄이 중금속을 거의 함유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기재에는 일찍 이 소금호수 일대에 거주하던 원주민인 쇼오니 인디언들이 염수호의 이온 미네랄의 자연 치유 능력을 알고 질병에 걸렸거나 외상을 입었을 경우 염수호 물이나 주변 식물을 이용했다고 한다. 염수호의 수면엔 7개 섬이 떠 있는데 섬마다 야영장을 갖추고 있어 젊은이들과 가족 단위의 방문객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일교차가 크고 겨울이 긴 솔트레이크는 년 중 6개월 동안 스키를 탈 수 있고 또 스키장의 눈이 부드럽고 흩날리는 눈 갈기가 꽃 보라 같다고 해서 《신이 선사한 지상 최고의 환상적인 눈》이라는 명성을 갖고 있다. 솔트레이크 시내에서 차체에 《지상 최고의 환상적인 눈》이라는 글을 새겨 넣은 차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미국에서 솔트레이크처럼 큰 산맥과 인접한 도시가 드물다. 솔트레이크가 2002년 동계 올림픽을 개최지로 꼽힌 데는 천혜의 자연이 큰 몫을 담당했다.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 올림픽은 중국 선수가 동계 올림픽사상 첫 금메달을 따낸 올림픽이다. 중국 선수 양양이 500미타 여자 쇼트트랙에서 중국 선수로는 사상 최초 동계 올림픽 금메달을 걸었다.    지금 도심에서 30분 내지 한 시간 안에 갈 수 있는 스키장만 13군데에 이를 정도로 인프라가 잘 되어 있고 가까운 골프장만도 30여 군데 있으며 하이킹을 즐길 수 있는 1000여 개의 등산로가 와사치 산맥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엮여 있다고 한다. 해마다 4백만 명이 넘는 관광객들이 스키를 타려고 솔트레이크를 찾는다. 스포츠는 관광업과 함께 솔트레이크에서 거대 산업으로 부상했다. 솔트레이크는 천혜의 자연 혜택을 톡톡히 보고 있는 것이다.  
24    샌프란시스코 (제9편) 댓글:  조회:4082  추천:0  2013-06-15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도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우리 일행은 태운 버스는 샌프란시스코 중심지를 벗어나 동쪽 방향으로 달렸다. 버스가 금문교보다 3배나 더 길다는 베이 다리 (Bay Bridge)를 넘어서자 가이드가 입을 열었다.  《샌프란시스코는 천혜의 비경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최첨단 기술의 요람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먼저 미국 명문대 스탠포드 대학과 함께 인재의 요람으로 널리 알려진 버클리 대학을 보겠습니다. 왼쪽 차창 밖을 보십시오.》  차창 밖으로 종탑이 보였다.  《저 종탑은 버클리의 상징인데 새더 타워(Sather Tower)라고 합니다. 높이 94 m인 저 종탑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종탑입니다. 가장 높은 종탑은 이태리에 있습니다.》  버클리 대학은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대학이다. 이 대학은 미국 서부  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 주립대학 중 가장 우수한 대학이다. 2006 년 미국의 뉴스위크지 발표에 의하면 버클리는 100 대 글로벌 대학 순위에서 하버드, 스탠포드, 예일, 캘리포니아 공대에 이어 5 위에 올랐다. 2006년까지 61 명의 노벨 수상자를 배출하였고 14개 단과대학에, 130개 이상의 학과, 300 개가 넘는 전공분야, 7,000개가 넘는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다. 1960 년대 미국 사회를 대표하는 자유 언론 운동, 히피 문화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1868 년에 설립된 버클리 대학 명칭은 당시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았던 아일랜드의 철학가이며 주교인 조지 버클리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가이드는 미국 대학이 한국 대학과 다른 점에 대해 소개했다. 곧 대학에 진학할 자식을 둔 처지라 우리 내외는 귀를 기우렸다. 첫 째 다른 점은 한국의 경우, (사실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학 입학이 어려운 반면 일단 대학에 입학하면 제적당하지 않은 한 유급하는 학생이 없지만 미국 대학은 입학보다 졸업이 더 힘들다. 학점 미달로 유급되는 경우가 비일비재이고 교수들의 학점 평가가 아주 엄격하다. 한번 좀 봐달라는 것을 전혀 통하지 않는다고 한다. 두 번째 다른 점은 학생 대 교수 비례가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미국에서는 학생 대 교수 비례를 해마다 대학 평가 기준의 중요한 요인으로 잡는다. 미국에서 괜찮은 대학이면 학생 대 교수 비례가 10:1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미국 대학의 세 번째 다른 점은 재정적으로 아주 견실하다. 미국 대학은 국가나 단체 지원이나 학생들의 학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해마다 졸업생들의 독지가들의 헌금에 많이 의존한다. 역시 중국의 경우하곤 많이 다른 점이다. 미국 대학과 중국 대학을 비교해 보고 있는데 가이드가 다음 코스는 스탠포드 대학이 있는 실리콘 밸리란다.  실리콘 밸리의 주인공들 중 스탠포드 대학 출신이 많다고 한다. 개교 이래 9명의 노벨상 수상자들과 11명 미국 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스탠포드 대학에 대해 가이드는 주로 스탠포드 대학을 세운 로랜드 스탠포드(Leland Stanford) 소개에 역점을 두었다.   《스탠포드 대학의 이름은 대학 설립자인 로랜드 스탠포드가 죽은 아들의 이름을 따서 지었습니다. 로랜드 스탠포드는 미국의 동서 횡단철도를 성사시킨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로랜드 스탠포드만큼 입지적인 인물도 드물다. 워싱톤에서 변호사로 지내던 그에게 변신의 기회가 온다. 그의 사무실과 도서실이 화재로 전소하는 참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스탠포드는 결연히 변호사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사업에 뛰어든다. 처음엔 광산용 기자재를 취급하는 사업에 손을 대다가 1861년에 미국 대륙횡단 철도 건설의 주역을 맡게 될 센트럴 퍼시픽 철도회사를 세운다. 대륙횡단 철도 건설의 유공자인 스탠포드는 1885년 상원 의원으로 정계에 나선다. 그러나 행운의 해였던 그 해 그는 가족동반 여행도중 사랑하는 아들을 병으로 잃는 불행을 안겨 된다. 몇 달 후 아들을 잃은 슬픔을 딛고 일어선 스탠포드는《캘리포니아의 모든 아이들은 모두 나의 아이들이 될 것이다》고 선언하고 하버드대 총장을 찾아가 대학 설립 조언을 듣는다. 비명에 간 아들을 기리는 뜻으로 설립된 것이 바로 여러 번 대학 종합 평가에서 1위를 차지한 스텐포드 대학이다.  당시 스탠포드는 하버드대 총장에게 종합대학 설립에 얼마만한 자금이 필요한가고 물었습니다. 하버드대 총장이 5백만 달러라고 대답했지만 스탠포드는 2천만 달러를 투자했습니다. 그동안의 물가지수를 감안하면 그 때 스탠포드가 투자한 금액은 현재가로 약 4억 달러에 해당합니다. 스탠포드 대학이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한국에서 오신 분들이 많으신데 스탠포드 대학은 서울 여의도 면적의 10배나 됩니다.》  혀를 내두를 숫자였다. 화제는 실리콘 밸리로 이어졌다. 실리콘 밸리, 미국 산업화의 엔진 역할을 하는 곳이다. 실리콘 밸리 하면 계곡을 연상하게 되지만 사실 실리콘 밸리에는 계곡이 없다. 숲 속에 묻힌 조용한 도시다. 그렇지만,  《실리콘 밸리는 이곳은 인간 문명의 바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엔진이 작동하고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주종을 이루고 있는 IT 산업의 혁신적인 발전은 인간 생활의 패턴을 바꾸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가치관마저 송두리 채 바꾸어 놓았습니다.》  다소 격앙된 어조로 가이드가 실리콘 밸리를 소개했다.  실리콘 밸리에는 겨울철 제외하면 년 중 비가 내리지 않고 습기 없는 건조한 날이 계속되어 전자 산업에는 아주 적합한 지역이다. 거기다가 근처에 스탠포드, 버클리, 산타클라라 같은 명문대가 있어 우수 인재 영입에도 편리하다. 반도체와 컴퓨터 관련기업, 연구소, 벤처기업을 지원하는 컨설팅 회사, 유망한 벤처기업에 자금을 지원하는 캐피탈 회사 등 약 4 천개 이상의 회사, 기업이 밀집해 있는 실리콘 밸리에는 야후, 구굴, 아도비, 애풀 컴퓨터, AMD, HP, 맥 아피 등 세계적인 기업들이 많이 입주해 있다. 실리콘 밸리에서는 하루에도 수백 가지 제품이 선을 보인다.   《실리콘 벨리의 탄생은 1939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스탠포드 대학 출신, 윌리엄 휴렛과 데이 팩커드라고 하는 두 청년이 스탠포드대학 캠퍼스 부근의 허름한 차고를 하나 빌려 음향 측정 오디오 오실레이터를 개발합니다. 첫 제품 개발에 성공한 두 청년은 회사를 설립하게 되는데 휴렛의 이름을 앞에 붙이고 팩커드 이름을 뒤에 붙인 휴렛 팩커드란 회사가 탄생을 고합니다. 이 회사가 실리콘 밸리의 최초 벤처 기업입니다. 지금 이 회사는 종업원 30여만 명에 매출 1400억 달러를 기록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실리콘 밸리 이름의 탄생은 1956년 벨연구소 (Bell Labs)에 근무하던 윌리암 쇼클리(William Shockley)가 마운틴 뷰(Mountain View)에 페어차일드(Fairchild Semiconductor)라는 반도체 회사를 설립한데서 유래된다. 반도체의 소재인 규소 영어명이 실리콘(Silicon)이기 때문에 실리콘이란 명칭이 붙게 된 것이란다.  실리콘 밸리의 신화를 언급하게 되면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는 창업자가 한사람이 있다. 스티브 잡스, 그가 바로 인류에게 개인용 컴퓨터 시대를 연 애플 컴퓨터 회사 창시자이다. 그가 인재를 스카우트할 때 한 말이 실리콘 밸리 창업자들의 희망과 포부의 대명사로 되고 있다. 그 말이 뭣일 가?   가이드는 짐짓 뜸을 들였다. 모두 가이드의 뒷말을 기다리고 있을 때 내가 손을 들었다. 《김 작가님, 말씀해 보십시오.》  이미 책에서 본 이야기라 자신 있게 대답했다. 《나와 함께 꿈을 만드는 일을 합시다.》 《정답입니다. 김 작가님께 오늘 저녁 와인 한 병 선물하겠습니다.》  스티브 잡스의 명언은 당시 팹시 콜라 사장이었던 존 스컬리를 자기 회사로 스카우트 할 때 한 말이다. 당시 잘 나가는 대기업인 팹시 콜라를 그만 두고 자리를 옮기라는 권고에 망설이고 있는 존 스컬리에게 스티브 잡스는 이렇게 말했다.  《평생 사탕 물이나 만들며 살겠나? 나와 함께 꿈을 만드는 일을 합세.》  꿈을 만드는 일!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명언이다. 실리콘 밸리 개척자들 모두가 하는 일이 바로 꿈을 만드는 일이다. 꿈이 깨질 수도 있겠지만 꿈을 만드는 과정이 더 보람차니까. 인생의 보람이 여기 있지 않을 가…   기왕 와인 얘기가 나왔으니 다음 화제는 자연히 와인으로 이어졌다. 《샌프란시스코의 또 하나의 자랑은 미국에서 최고의 와인 생산지인 나파벨리입니다. 오늘 일정에 잡히지 않아 소개만 해드립니다.》  와인은 스페인 전도사들이 처음으로 가지고 왔다. 나파밸리의 기후와 토양이 포도재배에는 천혜 적이었기에 19세기 중반부터 포도농장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지금 세계적인 와인 생산업체를 망라한 약 300여개 와인 생산 기업이 나파밸리에 입주해 있다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 와인의 소비량이 증가하자 경쟁이 치열해졌습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것이 프랑스 와인입니다. 프랑스 와인 업계는 프랑스 와인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세계 와인 생산 업자들을 초청해 세계 최고의 와인을 뽑는 행사를 가졌는데 생각밖에도 심사위원들은 나파밸리 와인에 표를 몰았습니다. 그래서 나파밸리 와인은 세계 최고의 와인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군침을 돌게 하는 와인 얘기로 샌프란시스코의 관광이 막을 내렸다. 샌프란시스코 관광을 시작할 때 가이드는 샌프란시스코를 칭하는 말에서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말을 선택하라고 했다.《관용의 도시》,《기적을 낳는 도시》 중 하나를 택하려다가 그냥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위대한 작가 월리엄 포크너가 샌프란시스코를 평한 말로 나의 선택을 대신한다. 《당신이 생존이라면 샌프란시스코는 당신을 싫증나게 하지 않을 것이며 당신이 만일 숨을 거두었다면 샌프란시스코는 당신을 기사회생시킬 것입니다.》
23    샌프란시스코 (제7편) 댓글:  조회:3881  추천:0  2013-06-09
                                                                                                                             관용의 도시  호텔로 이동하는 도중 여러 거리를 지나면서 샌프란시스코 도심의 대표적인 경관들을 두루 볼 수 있었다. 미국 서부의 최대 금융타운이 샌프란시스코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삼각형 모양으로 독특한 빌딩이 금융가에서 단연 돋보이는데 48층으로 260미터 높이를 자랑하는 이 건물은 미국의 최대 은행의 하나인 아메리카은행 본점이라고 한다. 이 빌딩은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높은 빌딩으로 전망대 같은 역할을 한다. 이외 이목을 잡는 또 하나의 건물은 샌프란시스코 시청 건물이다. 워싱턴의 국회의사당 모양을 본 뜬 건물은 웅장하면서도 단아한 모습으로 밝고 아름다운 샌프란시스코의 분위기를 돋우고 있다. 시청 건물의 돔 높이가 308피트로 국회의사당보다 16피트 더 높다고 한다. 역시 샌프란시스코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인상적인 광장으로는 샌프란시스코 심장부에 위치한 유니온 스퀘어 광장이다. 이곳은 1850년 이래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의 중심지로 항상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이다. 광장 이름은 남북전쟁시기 북부 연합군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남부 세력을 반대하여 데모를 일으켰던 것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광장을 중심으로 대형백화점, 유명 명품매장, 수십 개 호텔들이 몰려있어 샌프란시스코의 최고의 쇼핑타운으로 각광받고 있다. 광장 근처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유명한 아트갤러리들과 극장가도 있다고 했지만 일정상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샌프란시스코 관광은 적어도 3일을 가져야 한다는 조언을 실감케 했다.  갑자기 가이드가 우릴 보고 차창 밖을 주시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주택에 여러 가지 색깔의 기를 꽂은 것이 보이지요. 저 깃발을 이라고 하는데 게이들의 상징입니다.》  가이드 말에 샌프란시스코가 게이들의 천국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무지개  깃발은 다양성의 상징으로 동성애자의 권익을 주장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샌프란시스코의 카스트로거리에서 무지개 깃발을 단 주택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카스트로거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게이공동체의 중심지입니다. 여기서 게이들은 자유롭게 자기들만의 생활을 누리고 있습니다. 밤이 되면 카페나 길거리의 유흥가에서 여장을 한 남자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첨 샌프란시스코에 오신 분들은 게이들의 모습에서 불쾌감을 가질 수 있기에 이번 관광코스에 넣지 않았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해마다 4월말 게이축제가 열리는데 축제 때마다 대규모 게이 퍼레이드가 펼쳐진다고 한다. 이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세계 각국의 게이들이 모여드는데 그 규모를 일반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다고 한다. 게이 퍼레이드는 사회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게이들이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인권보장을 호소하며 거리를 활보하는 행사다.  게이들의 퍼레이드를 두고 두 가지 부동한 시각을 대표하는 인물이 있다. 한 사람은 러시아 모스크바 시장이다. 2007년 모스크바에서 게이 퍼레이드가 있은 후 당시 모스크바 시장이었던 유리 루쉬코프가 게이 퍼레이드를 《악마적 행사》라고 맹비난하면서 자신이 시장자리에 있는 한 다시는 모스크바에서 게이 퍼레이드를 허락하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그와 반면 브라질 상파울로 시장은 게이 퍼레이드는 상파울로 경제에 중요한 추진 역할을 한다고 했다. 2008년 상파울로 게이 퍼레이드에 세계 각국에서 350만 명이 모여들었는데 게이 퍼레이드로 13500여 개의 직업이 창출되고 관광업이 활성화 되었다고 한다.  보통 게이들의 퍼레이드에서 모아지는 돈은 에이즈 환자 치료와 평화 운동에 쓰인다고 한다. 게이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하며 자기 자신을 누구보다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들을 계속 따가운 시선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친구 같은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인지는 어디까지나 각 개인의 선택일 것이다. 나한텐 그런 선택을 위한 고뇌까진 필요 없겠지만 게이가 활보하고 있는 샌프란시스코가 관용의 도시임이 틀림없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22    샌프란시스코 (제6편) 댓글:  조회:3926  추천:0  2013-05-29
                                                                                                                      미국 개척정신의 표상-금문교    섬을 떠나 유람선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불리는 금문교를 향해 서서히 다가갔다. 마침 석양 무렵이어서 금문교 뒤로 펼쳐진 태평양 바다와 하늘이 맞붙은 곳에 빨간 저녁놀이 걸려있었다. 그림 같은 경관이었다. 그 노을을 배경으로 금문교가 무지개처럼 해협 사이에 걸려있다. 장관적인 경관에 사진기 렌즈를 맞추니 갈매기가 날아든다. 너무나 멋진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관광객들 모두 기념촬영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우리 내외도 서로 번갈아 금문교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머리가 노란 한 청년이 말을 걸어왔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뻥한 모습을 보였더니 그 청년이 손으로 사진 찍는 시늉을 한다. 그제야 우리 내외를 사진 찍어주겠다는 고마운 제의라는 걸 알아차렸다. 연신 입으로 유일한 영어 밑천인 《땡큐》를 연발하면서 우리 내외는 다정한 포즈를 취했다. 미국을 여행하노라면 관광지에서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자진해 나서는 고마운 분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그들의 고마운 소행에서 남한테 가벼운 서비스라도 제공하는 순간, 스스로 천사가 된다는 미국인들의 봉사정신을 읽게 된다. 이 글을 보는 독자들에게 관광지에 가서 연인들이나 부부동반인 관광객을 만나면 사진 찍어드리겠다고 한번 자진해 나설 것을 권고하고 싶다. 가벼운 서비스를 제공한 대신 밝은 웃음과 감사의 인사를 받게 될 것이다. 밝은 웃음과 감사의 인사는 최상의 선물이다. 최상의 선물을 받으며 스스로 천사가 되는 순간을 얻는 셈이다.  총 길이가 2737미타이고 수면 높이가 67미타인 금문교는 건축될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로서 샌프란시스코  뿐만 아니라 미국의 상징으로 되었다. 금문교가 놓인 해협은 태평양과 만이 만나는 곳으로 간만의 차로 집채 같은 파도가 자주 일고 해류가 빠르며 수심이 120미터이다. 이런 곳에 현수교를 세운다는 것은 당시의 공법으로는 대단한 모험이었다. 골드러시 후부터 샌프란시스코 만에 다리를 놓자는 제의가 제기되었지만 당시로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케이블 기술자이며 토목 기술자인 조셉 스트라우스의 출현으로 다리 건설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조셉 스트라우스는 이미 400여개 다리를 설계한 사람이다. 금문교는 그의 마지막 걸작이다.    교량 건설에 투입 된 주요 자재만 해도 그 당시 단일 공사로서는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콘크리트 300,000m3, 철재 류 82,600 톤, 직경 48mm 동선을 다발로 묶어 직경 92 cm 의 케이불로 만들었다. 2 개의 케이블에 사용 된 동선의 길이만 129,000 km. 지구 3 바퀴를 돌 수 있는 길이다. 한 케이블의 무게만도 24,500 톤, 이런 무게를 장비가 낙후한 70여 년 전에 227 m 높이로 들어 올려 다리를 만들었으니 금문교가 미국의 7대 불가사의 중 단연 첫 자리를 차지한다는 이유를 이해 할만도 하다. 금문교 건설에 6개 나라 이민자들이 참가했는데 그 중 중국인 인부들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금문교 건설에 참가했던 중국인 인부들이 당시 거주했던 지역이 바로 지금 도심으로 된 차이나타운이다. 금문교 건설로 미국에서 가장 큰 차이나타운이 생겨난 것이다.  금문교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현수교로 널리 알려지면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생을 마감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골칫거리로 되고 있다. 1993년 그 해 자살자가 천명을 넘어선 후로 공식 통계를 내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67미터 높이에서 시속 120킬로미터 속도로 떨어지면 4초 사이에 바다 속에 자취를 감춘다고 한다. 삶을 미련 없이 접고 순간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었을 가, 아니면 이승의 삶에 회의를 느꼈을 가,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세계를 향한 새 출발이었을 가? 생의 종말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맞은 이들의 동기가 궁금해진다.   금문교가 개통되기 일 년 전 조섭 스트라우스는 심장마비로 애석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는 《공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유언을 다리를 계속 건설하고 보수해야 한다는 당부보다도 신화는 계속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신화는 계속 되어야 하지만 아름다운 곳이 생을 마감하는 장소로 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미국의 개척정신의 표상이기도 한 금문교는 뉴욕의 자유 여신상 못지않은 명물로 해마다 9백만 명을 웃도는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유람선은 금문교를 넘어선 후 배전을 돌렸다. 이번엔 분홍빛 저녁노을에 물든 항구도시가 화폭을 펼치고 있었다. 바닷가를 따라 늘어선 크고 작은 건물들이 서서히 석양을 거두어내면서 황홀한 야경 전야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21    샌프란시스코 (제5편) 댓글:  조회:3870  추천:0  2013-05-13
        《악마의 섬》   금문교 유람선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미국 서부 해안에서 가장 먼저 등대를 앉혔다는 펠리컨 섬이다. 이 섬의 이름은 큰 바다 새 일종인 일명 《사다 새》라고 하는 펠리컨(Pelican)이 많이 서식했다는데서 지어졌는데 흉악범들만 수용한 알카트래즈 형무소가 자리 잡으면서 초대 형무소 소장의 이름을 따서 알카트래즈 섬으로 이름이 바뀐다. 펠리컨 말이 나오니 언젠가 책에서 본 이야기가 떠오른다.  미국 캘리포니아 해변 한 바닷가에 수천마리의 펠리컨들이 서식한다. 펠리컨들은 자유로이 날아다니며 먹이를 잡아먹고 번식도 하면서 나름대로의 평화를 누리던 중에 사람들이 들어와서 어촌을 형성한다. 사람들은 물고기들을 잡아 통조림으로 만들면서 내장을 빼내 주변 강가에 버린다. 펠리컨들은 버린 내장을 받아먹으면서 사냥이라는 생존 법칙을 차츰차츰 잊어간다. 그러나 사람들이 물고기 내장으로 요리를 만들어 먹기 시작하자 펠리컨들은 먹이가 없게 된다. 사람들이 언젠가는 물고기 내장을 던져주려니 해서 마을 주변에서 기다리기만 하던 펠리컨들은 결국에는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몰살한다. 사냥이라는 생존 법칙을 잊은 펠리컨의 종말이다. 이 이야기가 바로 환경보호자들이 자주 거론하는 《펠리컨 비극》이다. 인간의 침입으로 기인된 이 비극이 시사해주는 바가 많다. 유람선을 따라오는 갈매기만 보이고 펠리컨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으니 이 비극의 발생지가 바로 펠리컨 섬이 아닐 가 싶은 생각이 든다. 갑자기 부두에서 일광욕을 즐기던 물개가 떠올랐다. 부둣가에서 서식하는 물개들도 언젠가는 펠리컨 비극을 맞지 않을 가 근심이 앞선다.  유람선이 알카트래즈 감옥이 있는 섬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소개에 따르면 이 섬의 원주민은 인디언이었는데 미국이 캘리포니아를 합병한 뒤 골드러시로 사람들이 몰리면서 이 섬에 미국 서부 해안의 첫 등대가 세워진다.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 중 400여명의 포로들을 수감하면서 미국의 감옥 역사가 여기서 시작을 고한다. 등대섬이 1909년에는 미 육군 형무소로 탈바꿈했는데 1920년대 후반부터 마피아 등 조직폭력배에 의해 미국의 강력범죄가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이자 미국 정부는 강력범죄자들을 장기 수감할 장소로 알카트레즈 섬으로 택했다. 이때로부터 군사 감옥으로 이용되었던 알카트레즈 감옥이 마피아 두목 알카포네를 비롯한 수많은 흉악범들을 수감하는 연방 형무소로 되었다. 알카포네는 1930 년대 암흑가를 지배한 미국 마피아의 대부로 한때는 《밤의 대통령》으로 군림했다. 1927년 한 해 총 수입이 1억 달러에 달해 《세계 최고의 시민》으로 기네스북에까지 올랐던 그는 1939 년 7 년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가석방 되었다. 출소 당시 그는 이미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폐인이 되어 있었다. 1947 년 알카포네는  플로리다의 한적한 어느 해변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사망 당시의 병명은 매독과 폐렴 합병증이었다.   형무소가 폐쇄되기 전 20여 년간 도합 34명 죄수가 탈출을 시도했으나 죄다 성공하지 못했다. 탈옥자들은 다시 체포됐거나 사살되었는데 그 중 죄수 세 명만 요행 형무소를 빠져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탈옥자들이 섬과 거리가 불과 1마일도 안 되는 뭍에 올랐다는 기록이 지금까지 없다. 3명의 탈옥자들은 해변 가에 신발만 남겨 놓은 채 종적을 감췄다. 탈옥에 성공해 멕시코 어딘가에 숨어 산다는 일설이 있지만 섬 주위의 물살이 빠르고 수온이 찬데다가 섬 주변에 상어들이 자주 출몰하기에 탈옥자들이 거센 파도가 이는 바다의 제물로 되지 않았으면 상어의 먹이 감이 되었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되고 있다. 악명 높은 섬으로 이름난 이 섬을 《악마의 섬》이라고도 부른다. 《악마의 섬》이라고 이름 지은 사람은 이 섬 이름을 바꾼 초대 형무소장 알카트레즈다. 그는 《악마의 섬》이라고 이름을 지은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고 한다.  《이 곳은 잔인하다. 차가운 바닷물과 거센 파도 때문에 탈출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가 보이고 금문교 위를 달리는 자동차와 샌프란시스코 만을 한가롭게 떠다니는 요트가 그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감방 뙤창 너머로 보이는 광경을 보면서 수감자들은 조용히 속삭인다. 고.》  일반 상식으로도 천혜의 비경에, 그것도 낭만의 항구에 살풍경인 흉악범을 수감하는 형무소를 앉혔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일이다. 수감자들에게 가장 혹독한 고문보다 더 잔인한 형벌로 천혜의 비경을 보여준 것이다. 참으로 악마적인 발상이다. 수감자들에게는 천혜의 비경 그 자체가 악몽이었고 지옥이었을 것이다. 형무소에서 발생한 죄수에 대한 비인간적 취급, 자살, 자해 등 비화가 언론에 공개된 후 1963년 케니디 대통령 지시에 의해 형무소가 폐쇄되고 섬이 다시 항구의 명물로 이미지를 바꾸게 된 것은 샌프란시스코의 행운이다.   이 섬은 마이클 베이 감독, 숀 코네리와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영화《더록(The Rock)》으로 유명해졌다. 영화 《더록》 스토리가 펼쳐지는 주 무대가 바로 알카트래즈 형무소다. 가장 멋진 액션 영화로 각광받는 이 영화는 중국에서도 상영되어 큰 인기를 누렸다. 지금 섬에는 등대와 형무소 내 죄수들이 수감되었던 감방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섬을 관광하려면 최소 일주일전 예약을 해야 한다.        
20    샌프란시스코(제4편) 댓글:  조회:4913  추천:1  2013-04-14
항구의 낭만  금문교 관광 유람선을 타는 39번 부두로 가는 길에 샌프란시스코의 명물인 케이블카와 롬바르드 꽃길을 볼 수 있다. 샌프란시스코 케이블카는 영화에 자주 등장해 우리에겐 아주 익숙한 명물이다. 샌프란시스코는 굴곡이 심한 산성(山城)이어서 급 경사길이 많다. 비탈길 교통수단으로 케이블카를 1873년 스코틀랜드 공정사가 설계했는데 지금은 교통수단이라기보다는 샌프란시스코의 하나의 관광 상품이라고 함이 더 적절할 것이다. 3불을 내고 케이블카를 타면 100년 전 케이블카 승차권 모조품을 선물로 받을 수 있다고 하나 관광버스로 움직이는 우리는 그저 차창 밖으로 내다 볼 수밖에 없었다.    롬바르드 꽃길(Lombard Street) 역시 샌프란시스코의 명물이다. 27도 정도의 급경사진 곳에 5미터 간격으로 S자 형태로 굽이굽이 낸 내리막길을 화려한 꽃으로 장식해 꽃길로 유명해졌다. 이 꽃길은 세계적으로 가장 꼬불꼬불한 길로 알려져 있다. 꽃길은 캘리포니아 개척시기 우체부가 우편물을 배달하려고 언덕을 오르내릴 때 힘을 덜기 위해 꽃을 하나씩 꽂기 시작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곧추 내려오면 1분도 안 걸릴 거리인데 꽃 속에 묻힌 길을 따라 지그재그 내려오노라면 꽃 속에 묻힌 것 같은 착각을 가진다고 한다. 겨울철이라 꽃은 없지만 꽃길 옆 계단으로 내려오면서 꽃길이 샌프란시스코의 푸른 하늘과 거리와 조화를 이루어 한 폭의 그림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유람선 승선 부두는 요트와 그림 같은 집과 가게들이 모여 있는 조그마한 부두다. 원래는 이태리계 어부들의 부둣가라고 한다. 당시의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목조건물에는 갤러리, 선물가게들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 레스토랑들이 늘어서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반드시 먹어봐야 할 음식이 노천에서 파는 삶은 게라고 했지만 시간상 관계로 우리 일행은 서둘러 유람선에 올랐다. 이 부두의 신기한 구경거리는 선창가에 띄워놓은 판자위에서 한가하게 낮잠을 즐기는 물개들이다. 미국 해안선이나 부두에서 물개를 흔히 볼 수 있다. 물개들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단 한 나라 관광객만 무서워한다고 가이드가 유머를 구사했다.  《정력에 좋다면 뭐나 다 먹는 한국 남자들을 가장 무서워한답니다. 그래서 한국 남자들만 보면 하고 비명 지르며 바닷물 속에 숨어버린답니다.》 유머는 어디까지나 유머고, 물개들은 관광객들이 웃고 떠들어도 상관없이 그냥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팔자 하나 기껏 늘어졌다》는 말 물개들에게 선물하고 부두를 떠났다. 갈매기들이 떼를 지어 유람선을 쫓는다. 갈매기는 관광객들이 던져주는 먹이를 먹으려고 유람선 속도에 맞춰 관광객들 머리위에서 선회한다. 원래 날아다니는 새를 찍기가 쉽지 않은데 샌프란시스코의 갈매기는 유람선을 따라오기에 사진에 잘 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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