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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이의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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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샌프란시스코(제3편) 댓글:  조회:3653  추천:0  2013-03-27
          미국 속의 《중국》 샌프란시스코 관광은 트윈픽스 언덕이 아니면 도심 북쪽 항구에 있는 선착장으로부터 시작된다. 선착장으로 가려면 도심에 자리 잡은 차이나타운을 경과하게 된다.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탐내는 조각을 이고 사자 두 마리를 양옆에 거느린 전통적인 중국풍의 솟을 대문이 차이나타운의 상징으로 되고 있다. 솟을 대문엔 손중산 선생이 쓴 《천하위공(天下爲公)》 편액이 붙어있다. 차이나타운은 샌프란시스코 시내 도심에서 46개 거리를 정자(井)형으로 가지고 있는 미국 최대의 중국인 밀집지역이다. 중국 특색의 유명 잡화점, 레스토랑, 식료품 시장, 불교사원, 소형박물관 등이 자리하고 있는 차이나타운은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활기 넘치는 지역 중의 하나이다. 샌프란시스코 지명과 관련해 중국인들은 다른 유래를 갖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한 중국인들은 샌프란시스코를 《삼번시(三藩市)》라고 불렀다. 《삼번시》라고 부르게 된 것은 최초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한 중국인들 중 광동인들이 많았는데 광동 말에 삼번이란 말이 《샌프란》 발음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광동 출신인 중국 민주혁명의 선구자인 손중산 선생도 저서와 서신에서 샌프란시스코를 《삼번시》라고 했다. 골드러시가 터지면서 샌프란시스코는 중국인들에게 《금산(金山)》으로 불리게 된다. 글자 그대로 금이 산을 이룬 곳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호주 멜버른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그 곳이 《신금산(新金山)》 지명을 갖게 되는데 멜버른과 샌프란시스코를 구별하기 위해 중국인들은 샌프란시스코를 칭하던 《금산》 앞에 오랜 《구(旧)》를 붙여 《구금산(旧金山)이라고 부르게 된다. 지금도 샌프란시스코 지명 사용에서 미국 국무성뿐만 아니라 중국 관변 측 문헌과 지도, 해외 파출 기구 명칭에서도 《삼번시》와 《구금산》이란 지명을 그냥 쓰고 있다.                                                 (1851년의 샌프란시스코) 《중국인들은 세계 그 어디에 가나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놓기에 곳곳에 차이나타운이 형성됩니다. 그 중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은 세계적인 규모로 알려져 있는 만큼 여기에서는 보이고 들리는 것은 미국이라기보다 입니다.》 가이드가 아주 서투르게 중국이란 단어를 발음했지만 그냥 기분 좋게 들렸다. 샌프란시스코로 오는 도중 진행된 자아소개에서 우리 내외가 북경에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된 가이드는 갑자기 마이크를 나한테 넘겼다. 중국인에 의한 중국 소개란 뜻이다. 다행히도 사전에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 대한 소개를 보았기에 중국인으로서 체면을 지킬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은 120여년의 역사를 가진 타운입니다. 기재에는 골드러시가 터지면서 중국인들이 샌프란시스코에 첫 발을 들여놓았다고 하지만 사실 샌프란시스코에 처음 정착한 중국인은 1807년 중국의 비단, 도자기, 연초 판매차로 이곳을 찾은 중국 광동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서두를 땐 나는 미국 산업발전과 맥락을 함께 한 중국인 이민사를 간추려 소개했다. 미국 동서를 잇는 대륙횡단 철도 건설과 골드러시로 중국인 이민자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대거 미국에 정착한다. 그 때로부터 중국인 이민자들은 유구한 역사와 문명을 가진 상업민족의 특징과 대륙적 기질, 강한 정체성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지금은 미국 전체 인구의 1%를 차지할 정도로 그 힘이 늘어나고 있다. 정계만 봐도 현재 미국 주류사회에 진출해있는 아시아계 정치인들이 대개 중국계 아니면 일본계인데 중국계가 다수를 차지한다. 《미국의 산업발전에서 획기적인 이정표로 되고 있는 대륙횡단 철도 건설, 광산 개발, 후버댐 건설은 중국인 이민자들을 떠나서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대륙횡단 철도와 후버댐이 중국인 이민자들이 미국 땅에 쌓아올린 두 번째 만리장성에 비유한다면 이제 곧 보시게 될 샌프란시스코 상징인 금문교는 중국인 이민자들이 미국 항구도시 1번지에 걸어놓은 바다위의 만리장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수가 터졌고 가이드는 두 손을 들었다. 《지금부터 김 작가님이 안내를 맡아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가이드 말을 내가 롱으로 받았다. 《팁을 주면 고려해 보죠.》    
18    샌프란시스코(제2편) 댓글:  조회:3734  추천:4  2013-03-10
  거듭 나는 도시 노래 감상에 이어 가이드의 샌프란시스코 안내말씀이 시작되었다. 녹음된 가이드 안내말씀을 글로 옮기면 대략 이러하다. 샌프란시스코는 기원전 3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던 유적이 있다. 샌프란시스코가 스페인 탐험대에 의해 처음 발견된 것은 1769년이고 1776년부터 스페인 이민들의 개척지가 된다. 1806년 러시아가 이곳에 초소를 세우고 알래스카 보급지로 사용. 1821년 멕시코에 귀속되었다가 1846년 미국 영토로 탈바꿈한다. 당시 인구가 천여 명, 그러나 1850년 샌프란시스코가 시로 승격될 때 인구는 2만 5천명. 골드러시로 금융업, 무역, 광산, 서비스업이 발전하면서 태평양 연안의 가장 중요한 항구도시로 변모. 급성장하던 도시가 1906년 진도 8.3 의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다. 그 후 불과 10 년도 안 되어 샌프란시스코는 천혜의 비경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도시로 거듭난다. 1915 년, 샌프란시스코는 지진으로부터의 성공적인 복구를 기념하기 위하여 파나마, 태평양 국제 박람회를 유치하는데 성공한다. 1929년 증권시장의 붕괴로 어려움을 겪었고 대공황시절에는 오클랜드만과 금문교를 건설해 위기를 탈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해군조선소로 도시발전이 박차를 가한다. 그 뒤 1950~60년대에 대대적인 도시 정비를 하였고 1970년대 초 다운타운의 주요 대형건물들이 완공되면서 현재의 모습에 이르게 된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반도 남쪽의 산타클라라를 중심으로 첨단 전자산업단지인 실리콘밸리가 형성됨으로써 첨단 기술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미국 내 인기도시 베스트 1위를 계속 차지한다. 《샌프란시스코를 칭하는 말이 많습니다. 예를 든다면 , , , , , , 이밖에도 , 이란 말도 있습니다. 어느 평가가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말인가를 이제 여러분들이 직접 보시고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샌프란시스코가 우리 내외한테 어떤 모습으로 다가설 가? 가이드는 우리 내외처럼 처음 샌프란시스코를 찾는 관광객들의 궁금증을 달래기엔 샌프란시스코 중심에 솟은 트윈픽스라고 불리는 언덕이 가장 적합하다고 했다. 해지기 전에 많은 곳을 둘러 봐야 하기에 먼저 한 눈에 샌프란시스코가 들어오는 트윈픽스 코스를 정했다고 했다. 트윈픽스 언덕은 샌프란시스코의 전경을 360도 각도로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전망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샌프란시스코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태평양을 마주한 샌프란시스코는 만을 가진 그림같이 아름다운 항구도시였다. 북서쪽으로는 유명한 금문교와 알카트래즈 섬이 보였고 동쪽으로는 환한 색상의 건물들이 오밀조밀하게 들어선 샌프란시스코 시내가 보였다. 남서쪽으로는 오클랜드 항구와 샌프란시스코 공항을 비롯해 샌프란시스코 만의 가장 긴 다리인 샌마테오(San Mateo)다리 까지 보였다. 《미국사람들이 가장 방문하고 싶어 하는 도시가 바로 샌프란시스코입니다. 지금 보시는 시내의 인구는 약 75만 정도이고 오크랜드, 산호세 지역까지 포함한 광역 대도시권 인구는 약 700여만 명으로 미국 서부 지역 태평양 연안에서는 로스앤젤레스 버금으로 두 번째로 큰 대도시권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3월이 오면 샌프란시스코에서 꽃 축제가 벌어져 도시 곳곳이 아름다운 꽃과 그 향기로 가득해진다고 하니 겨울철에 샌프란시스코를 찾은 아쉬움이 크다. 샌프란시스코는 《안개의 도시》란 말과 같이 여름철에는 안개가 많이 낀다고 한다. 안개만 끼면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한다. 겨울철이라 안개가 없어 시내 전경을 볼 수 있어 다소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트윈픽스 언덕에서 샌프란시스코 야경 구경은 최고의 볼거리라고 하지만 밤에는 다른 코스가 정해져 아쉬운 대로 언덕을 내려왔다.
17    랑만의 도시 샌프랜시스코(1) 댓글:  조회:3562  추천:2  2013-03-06
                                   노래하는 도시   샌프란시스코 관광은 가이드가 틀어주는 경쾌한 리듬의 노래로 시작되었다. 《샌프란시스코에 가시게 되면 잊지 말고 머리에 꽃을 다세요. 샌프란시스코에 가시게 되면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만날 거예요. 샌프란시스코에 오시는 이들 위해 여름철에 사랑의 모임 있어요. 샌프란시스코의 거리에서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머리에 꽃을 달아요. 신기한 설렘 온 나라에 넘치고 사람들은 활기에 차 있어요. 새로운 생각 가진 새 세대가 탄생했어요. 샌프란시스코에 오시면 잊지 말고 머리에 꽃을 다세요. 샌프란시스코에 오시게 되면 여름철에 사랑의 모임 있어요.》   노래 제목이 《샌프란시스코》다. 샌프란시스코가 가까워 오자 가이드는 우리 일행에게 《노래 공부》부터 시켰다. 가이드는 도미하기 전 한국에서 음악다방을 경영한 이력자여서 음악을 달관한 분이었다. 음악대학은 나오지 않았지만 어릴 적부터 음악에 대한 사랑은 광적에 가까웠다고 한다. 《이 노래는 말이죠, 스콧 맥켄지라고 하는 음악가가 1967년에 발표해 대 히트를 쳤는데 지금까지도 샌프란시스코를 노래한 팝송 중 토니 베넷의 노래 와 함께 애창곡 중 상위에 랭크되어 있습니다.》 경쾌한 리듬을 탄 애정가요 같은 이 노래는 사실 반전과 세계 평화를 호소하는 노래인데 당시 히피 음악의 대표작이라고 한다. 이 노래가 발표될 당시는 60년대는 반전, 운동과 히피의 평화주의 운동이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던 때였고 샌프란시스코는 히피와 평화주의자들의 중심지였다. 히피, 지금은 많이 색 바랜 말이다. 특히 지금 세대들에게는 생소한 단어이다. 중국에서 살아온 우리 세대에게도 히피란 글에서나 읽힌 존재였을 따름이다. 통념적으로 히피(hippie)는 1960년대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기성의 사회 통념, 제도, 가치관을 부정하고 인간성의 회복, 자연에의 귀의 등을 주장하며 일상적이 아닌 반사회적 행동을 하는 청년세대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록 윗세대와는 다르게 전쟁을 겪지 않고 풍족한 생활을 누린 세대로 현실을 외면한 채 행복한 유토피아를 꿈꿨던 히피들은 순진한 몽상가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고 있지만 사랑, 평화, 자유를 꿈꾸던 그들의 정신만은 인정을 받고 있다.    
16    라스베가스 (제5편) 댓글:  조회:3983  추천:0  2013-02-21
                                             호텔 카지노   라스베가스의 카지노 호텔은 반드시 1층 카지노를 통해야만 객실로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있다. 우리 속담으로 풀면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치게》 꾸민 곳이 카지노 호텔이다. 호텔 문을 들어서니 영화에서 자주 보는 광경이 필자 앞에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호텔 카지노에 가장 많이 배치된 것이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만져볼 수 있는 슬럿머신이다. 그 외 작은 공을 회전시켜 숫자나 색을 맞추는 룻렛, 주사위를 던져서 하는 박카라, 트럼프로 내기하는 포커판도 있다. 카지노에 없는 것이 딱 두 개인데 그것은 창문과 시계다. 창문이 없으니 날 밝은 줄 모르겠고 시계가 없으니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곳이 바로 카지노다. 한마디로 카지노는 시간 개념이 배제된 곳이다.   《라스베가스에 와서 카지노 안 하면 바보》라고 했으니 바보 면하기 위해서라도 한번 손을 대봐야지. 필자 내외는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다는 슬럿머신을 택하기 시작했다. 한 번 누르면 20불씩 나가는 건 도저히 할 수 없고 5불씩 나가는 것도 잠깐이면 몇 백 불 나가니까 포기해야 했고 1불씩 나가는 것 역시 초보자에겐 부담스럽고 50센트나 25센터는 숙련된 담에 하는 것이고 5센트도 별로 파악이 안가서 결국에는 필자 내외가 택한 것은 우리 돈으로는 1전에 해당되는 1센트였다. 한 사람이 10불씩 나눠 갖고 시작한 슬럿머신인데 아내는 거푸 10분도 안되어 10불을 그냥 기계에 넣어주고 말았다. 카지노에서 《돈이 담배 연기처럼 사라진다.》는 말이 있다. 흡연이 허용된 카지노에서 담배 연기와 함께 돈이 날아난다는 뜻이다. 필자는 아마 타고난 운이 있었는지 슬럿머신 단추를 누를 때마다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짧게 나는 경우가 많았지만 때로는 100배 되는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가 날 때도 있었다. 소리만 요란했지 판돈이 적어 딴 돈이 적었다. 1센트 백배면 고작 10불이다. 1센트 판돈으로 노는 놀이에서 한번에 100배를 딴다는 것은 아주 운이 붙었다는 것으로 된다. 100배를 딸 때마다 곁에 앉은 백인 할아버지가 나한테 엄지손가락을 내들며 《굿!》을 연발했다. 아내는 아예 내 곁에 붙어 앉았다. 필자가 구경만 하지 말고 다른 기계에서 해보라고 하니 아내는 운이 없어 돈만 까먹기에 포기했다고 한다. 인젠 필자에게만 승부가 걸렸다. 첨엔 운이 좋았다. 10불로 시작한 게임이 80불로 늘어났다. 이때 아내가 제동을 걸었다.   《피곤한데 그만 하고 갑시다.》  《아니야. 지금이 기계가 한참 열을 올리고 있는 중이야.》  기계가 열을 올린다는 말은 가이드한테서 들은 말이다. 가이드는 호텔 카지노에서 슬럿머신을 선택할 때 손으로 만져봐서 기계가 뜨거운 것, 기계 앞에 놓인 담배 재떨이에 꽁초가 수북한 것을 택하라고 했다. 기계가 열이 올랐다는 것은 누군가 한참 놀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담배꽁초가 많다는 것은 누군가가 기계 열만 올리고 따지 못해 애꿎은 담배만 연신 태웠다는 증거로 된다고 했다. 가이드는 열을 올렸지만 돈이 안 나온 기계를 선택하면 돈 잃을 확률이 많이 떨어지고 오히려 돈을 딸 확률이 높아진다고 계시를 주었다.   필자가 선택한 것이 바로 그런 기계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아내가 또 제동을 건다.  《가이드 말이 판돈 회수하면 무작정 일어나라고 하지 않았나요? 지금 당신은 판돈에서 8배나 더 땄어요.》\  아내가 아주 《쉬》를 날리고 있다. 인터넷에서 본 《도박 지침》에 바로 《무작정 일어나라》는 말이 등장한다. 그 지침엔 이런 구절이 있다. 《한 시간 이상 하는 것 보다는 5분 이내 따든지 잃든지 그만 두는 것이 돈을 따는 길이다. 오래하면 한 시간 이상 놀면 따는 사람 보다 잃는 사람이 훨씬 많다. 땄을 때 그만 두어야 한다. 딴 금액이 조금씩 줄고 있으면 이미 본전 보다 조금이라도 딴 상태라면 무조건 일어서야 한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서 그냥 단추를 눌렀더니 돈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확률이 점차 떨어지기 시작한다. 흘끔 뒤 돌아보니 어느새 자리를 떴는지 아내가 보이지 않는다. 아내가 먼저 객실로 올라간 것이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하면서 필자는 담배 한 대 붙여 물고는 웨이터에게 맥주 한 병 청했다. 호텔 카지노에선 술과 음료수는 무료다. 단, 웨이터에게 팁으로 1불 주어야 한다. 맥주 한 모금 넘긴 후 필자는 도정신하고 슬럿머신에 마주 앉았다. 운 좋게 100배 되는 판이 여러 번 터졌다. 딴 돈은 150달러 선을 넘어섰다. 판돈에서 15배를 딴 셈이다. 이 때 낯모를 50대로 보이는 한 사람이 내 곁에 다가와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굿!》을 연발하는 것이었다. 얼굴 모양을 보니 동양계였다. 필자가 답례로 고개를 끄덕이니 그 사람이 나한테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카지노 거지》다. 《카지노 거지》란 카지노에서 돈을 잃고 집으로 갈 수 없는 신세지만 그냥 동냥으로 카지노를 노는 도박중독자를 일컫는 말이다.   한창 열을 올리는 판에 《카지노 거지》가 나타났으니 재수 없는 일이다. 호주머니에 있은 잔돈 내팽개치듯 주어버리니 연신 고맙다고 허리를 굽실거린다. 어서 썩 꺼지라고 손을 홱 내저으니 입으로 《땡큐!》를 연발하면서 물러간다. 그 녀석 때문인지 그 뒤로 필자의 도박 운이 내리막길을 걷는다. 돈 떨어지는 소리가 드물어지고 딴 돈 액수가 줄어든다. 이럴 때 《한 번만 더, 한 번 더》 하는 식으로 주춤하지 말고 무작정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도박 지침》이 가르치고 있지만 필자는 그 가르침을 무시했다. 한 것은 돈 떨어지는 소리가 드물어지는 대신 대박의 《7777》 숫자 맞춤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숫자가 돌아가다가 멈춰서는 순간마다 기계는 단박 대박이 터질 듯 굉장한 소리를 냈다. 이것이 도박심리를 자극하는 줄 모르고 필자는 곧 대박이 터질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연신 단추를 눌러댔다. 돈 액수는 곤두박질하듯 순식간에 본전에 가까운 선으로 떨어졌다. 에라, 대박은 그만두고 몇 십 불만 따고 가자. 《도박 지침》에는 이런 심리를 도박에 빠져드는 심리, 종국에 가서 돈을 몽땅 날리게 되는 심리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필자로서는 스스로 주체할 수 없었다.   스스로 주체할 수 없는 단계가 도박에 빠져 《스스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단계》라고 한다. 이 단계를 넘어서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단계》라고 한다. 필자는 딴 돈 다 잃고 판돈 10불마저 거의 밑바닥이 날 때 《물불을 가리지 않는 단계》에 들어섰다. 대박의 숫자에 육박하면서 굉음이 터질 듯 말듯 할 때 필자는 판돈마저 몽땅 날렸다. 단박 대박이 터질 순간이라 필자는 지갑을 넣은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 때면 사람이 도박을 노는 것이 아니라 도박이 사람을 삼킨다. 온 호주머니를 다 들췄으나 지갑이 없었다. 분명 아내가 뽑아간 것이다. 동동 발을 구르고 싶은 마음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카지노를 하는 사람이 몇 명밖에 안되었는데 우리 관광 팀에 속한 분들이 아니었다. 한국인이나 중국인 같이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10불이라고 꾸고 싶은 생각까지 치밀었다. 이 날 필자는 도박의 유혹이 얼마나 큰가를 실감했다. 돈을 넣으라고 깜박거리는 슬럿머신을 멀거니 내려다보면서 필자는 언젠가 아내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내가 평소 알고 지내는 한 여인이 있는데 어느 날 남편과 함께 카지노를 찾았다. 남편은 재미로 놀다가 어디론가 자리를 뜬 사이 단박 대박이 터지려는 순간 그 여인은 필자 경우처럼 돈이 떨어졌다. 다만 그 여인과 필자의 판돈 액수가 다를 뿐 경우는 마찬가지였다. 돈 있는 여인인지라 판돈은 3천불이었다. 그 여인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남편을 찾았지만 남편은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찾을 길 없다. 그 순간이 사람 말리는 순간이라고 했다. 남편을 《죽일 놈, 살 놈》 하고 속으로 욕하고 나중에 저주까지 했지만 기다리던 남편이 나타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백인 노인에게 자리를 내 주었는데 그런데 이럴 수가. 그 자리에 앉은 백인 노인이 몇 분 만에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액수는 5만 불이였다나. 그 여인은 그냥 그 자리에서 졸도하고 말았단다. 후에 그 여인이 하는 말이 대박이 터지는 순간 눈앞에 벼랑이 있으면 떨어져 죽을 생각까지 들었단다. 도박 중독자는 대체로 크게 세 단계를 거치게  된다고 한다. 즉, 희열, 패배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절망! 그 여인은 이 세 단계를 다 거쳐본 분이다. 필자의 경우 그 날 아내가 지갑을 빼내지 않았더라면 대박을 기대하면서 줄기차게 돈을 밀어 넣었을 것이다. 그리곤 허망에 빠지고 나중엔 절망도 절감했을 것이다. 지금도 생각하면 아내가 그 날 지갑을 빼간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하긴 그 당시 속으로 아내를 실컷 욕했지만.   그날 아쉬운 대로 자리에서 일어난 필자는 그만 카지노의 《미아》가 되어버렸다. 우리 관광 팀이 투숙한 호텔은 여덟 개 호텔 건물에 도합 5천여 개 객실을 가진 호텔인데 건물마다 일층 카지노로 통하게 되어 있었다. 도박에 정신 팔다나니 필자가 투숙한 객실이 어느 건물에 속했는지 알 길이 없다. 카지노 호텔은 며칠 전 미리 예약해야 하기에 여행사측은 객실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관광객 이름으로 예약한다. 때문에 호텔 측에 필자의 기록이 있을 리 만무하다. 있다고 해도 영어가 통하지 않으니 무작정 절로 방을 찾아야 했다.   시계는 이미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큰 카지노에 필자만 남았다. 필자가 카지노를 내려올 때 기억을 더듬으며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지만 어느 출구나 다 똑같이 생겨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가 없다. 객실을 찾지 못하면 큰일이다. 밤을 새야하는 것을 둘째 치고 관광 팀을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러면 필자는 진짜 라스베가스 《미아》로 남게 된다. 한참 헤매고 다니는데 호텔 종업원 복장을 입은 흑인 남성이 구세주마냥 필자 앞에 나타났다. 뭐라고 묻는데 영어가 통하지 않아 필자는 호주머니에서 객실 키를 꺼냈다. 호텔 종업원은 키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뭔가 더 내놓으라고 한다. 필자가 호주머니를 들추니 자그마한 종이 한 장이 나왔다. 객실 배당 시 가이드가 준 것이었다. 호텔 종업원은 그 종이를 보더니 《오케!》를 부르면서 필자를 안내했다. 아마 그 종이에 객실이 속한 건물 이름이 적혀 있었던 모양.  결국 그 종업원 덕으로 필자는 간신히 카지노 《미아》 신세를 면하게 되었다. 아내가 눈을 흘겼지만 필자는 피곤하지만 작가로서 도박꾼 심리를 실감할 수 있는 좋은 경험 한번 했다고 생각하면서 꿈 나락에 빠져들었다.                                        나오면서     라스베가스를 나오면서 나름대로 라스베가스에서 받은 인상과 가이드 소개를 정리해 보았다.  《라스베가스가 있는 네바다주는 표고가 높고 습기가 적고 기온이 높아 고혈압이나 당료 환자들이 살아가기엔 최적의 환경. 그래서 은퇴한 노인들이 몰려온다. 그들에게는 라스베가스가 천국.》  《과거에 네바다 주는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주였다고 한다. 주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캘리포니아 주의 쓰레기 매립장으로 되기도 하고, 핵 실험장으로 대여하기까지 했다는데 지금은 라스베가스가 있어 가난의 모자를 벗어버렸다.》 《절제가 강요되지 않는 도시에서 인간의 삶은 파괴될 수도 있으며 그런 사람들의 삶 위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부가 축적되고 있는 라스베가스는 그 존재 자체가 자본주의적 도덕률의 전형, 희망과 실망, 절망이 공존하는 곳.》 《7시가 넘어 눈을 떠 아침 창문을 여니 어젯밤의 그 도시는 간데없다. 여느 도시와 달리 출근길 북적대야 할 거리에 노숙자 한두 명 어슬렁댈 뿐, 인적도 차량도 없다. 간 밤 카지노 기계 앞에서, 온갖 화려한 쇼 속에서 인간의 욕망을 불태우고 동트는 태양 아래 허망하게 서있는 도시를 뒤로하고 떠나왔다-어느 여행자의 일기.》  《공항에 들어오는 입국 승객들은 하나같이 희망을 가지고 들어온다. 그러나 바로 위층의 출국하는 승객들 모두 하나 같이 씁쓸한 표정으로 이곳을 떠나간다.-한 외국인 관광객 소감》  《폭파되어 역사 속에 사라진 유명 호텔 자리에 더 멋진 호텔이 들어서는 라스베가스는 무한 성장의 도시!》   이 글이 라스베가스를 떠나는 내 마음에 들었다. 라스베가스의 유명 호텔들은 폭파,  신축, 또 폭파, 다시 신축을 거듭했다. 세계적으로 초호화 호텔인 알라딘 호텔, 벨라지오 호텔, 베네시안 호텔이 그 실례로 된다. 어느 시인은 라스베가스를 《불모의 땅 사막위에 핀 번영의 꽃》이라고 했고 또 누구는 《사막의 오아시스로 변모한 축복의 땅》이라고 했다. 필자는 시인이 아니어서 화려한 문구보다도 그저 라스베가스를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는 도시, 그냥 사람들의 발걸음이 향하도록 철저히 계획이 된 도시》라고 라스베가스를 이름짓고 싶다.   
15    라스베가스 (제4편) 댓글:  조회:4752  추천:1  2013-01-31
                                                                             라스베가스의 야경   어둠이 깃들기 시작할 무렵 멀리로 라스베가스가 보인다. 아직 어둠이 깔리지 않아서인지 멀리로 바라보이는 라스베가스는 그냥 허허벌판이나 황막한 사막을 내내 경과하다가 신기루처럼 나타나는 그런 도시들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거리가 가까워지고 어둠이 쫙 깔리자 라스베가스 진입로에 있는 자그마한 언덕에서 바라본 라스베가스 야경은 말 그대로 진주를 쫙 뿌려놓은 듯 했다. 금 모래알처럼 반짝인다고 할 가, 뭇별처럼 명멸한다고 할 가 너무나 환상적인 라스베가스의 야경을 딱히 뭐라고 표현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저 야명주가 따로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로 라스베가스는 《사막의 야명주》로서 손색이 없었다.    라스베가스 관광에서 가장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가 야경이다. 때문에 관광 팀은 라스베가스 야경을 보기위해 보통 저녁에 라스베가스에 들어왔다가 이튿날 아침 다른 관광 명소로 이동한다. 라스베가스 야경은 라스베가스만 가질 수 있는 조명의 극치를 이룬 환상적인 빛의 세계이다. 라스베가스를 라스베가스답게 만든 것이 인간의 기술과 창조력을 맘껏 자랑한 조명이라면 그 조명을 밝힌 전력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후버댐에서 온다. 후버댐은 라스베가스에서 남동쪽으로 40㎞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댐으로 1936년에 완공되었다. 이 댐의 건설로 인공호수인 미드호(Mead Lake)가 생겼는데 세계 최대의 인공호수이다. 후버댐 높이 221m, 길이 379m이고 발전량은 134만 Kwh이다. 후버댐 건설에 중국인들이 많이 동원되었는데 댐 건설에서 돈을 번 중국인들의 두둑한 주머니를 털려고 미국 정부가 라스베가스에 카지노를 허가했다는 일설도 있다. 하긴 그 때나 지금이나 중국인들이 라스베가스를 많이 드나든 것만은 사실이다.  한국인 식당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치른 우리 일행은 예약한 호텔에 들를 새 없이 버스에 짐을 둔 채 먼저 라스베가스 야경 관광에 나섰다. 지정된 야경 관광 코소를 끝내곤 인차 유명한 쥬빌리쇼 관람이 이어지기에 우리 일행은 말 타고 꽃구경하는 식으로 야경 관광을 시작했다. 첫 코스는 베네치안 호텔이었다. 눈부신 야경을 두고 왜서 호텔로 들어가는 가고 가이드에게 물으니 가이드는 그냥 따라오라고 손짓만 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우리 일행 앞장에 선다. 제한된 시간에 빨리 서둘러야만 볼거리를 더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호텔 안 에스컬레이터에 내리니 이게 웬걸, 방금 밤거리를 경과해 호텔에 들어왔는데 눈앞에 펼쳐진 건 푸른 하늘아래 즐비하게 늘어선 유럽풍의 베니스거리에서 악사들이 노래하고 사람들이 상가를 드나들고 있는 광경이었다. 더 눈을 의심케 하는 것은 거리 사이로 강물이 흐르고 강에서 뱃사공이 노래를 부르면서 노를 젓고 있는 광경이었다. 마치도 영화에서 나오는 베니스의 한 거리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와!》 모두들 라스베가스 관광에서 첫 탄성을 뽑았다. 그 때 필자의 아내가 거리의 악사와 찍은 기념사진을 보니 실내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진짜 그 뭣에 홀린 기분이다.    라스베가스는 쇼의 세계이다. 하루에도 백여 개가 넘는 크고 작은 쇼가 라스베가스의 밤을 장식한다. 라스베가스를 다녀온 사람들이 라스베가스에 가서 꼭 봐야 할 두 가지를 추천하는데 그 중 하나가 호텔 쇼다. 호텔 쇼는 노천과 극장 쇼로 구분된다. 라스베가스 야경 관광에서 호텔 쇼 구경은 기본이다.  호텔 쇼 첫 코스로 트레져 아일랜드 호텔 앞에서 열리는 해적선 쇼 구경이 잡혔다. 해적선 쇼 구경은 호텔 앞거리에서 한다. 워낙 좁은 거리여서 미리 가서 자리를 잡느라고 우리 일행은 숨차게 가이드를 따라 걸었다. 해적선 쇼는 매일 밤 호텔 앞에서 진행되다가 2003년 7월 6일후로는 다른 쇼로 바뀌었다. 다행히 필자 내외는 첫 번 라스베가스 관광에서 이 쇼를 구경할 행운을 가졌다. 20분가량 진행된 해적선 쇼는 영국 군함 브리타니아 호와 해적선 히스파니올라호가 해상에서 격전을 벌이다가 결국 영국 군함이 침몰되는 과정을 핍진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쇼에서 불을 뿜는 대포, 밧줄을 타고 선상을 오락가락하는 해적들, 바닷물에 떨어지는 영국 해군 병사들, 침몰되는 영국 함선 등 장면이 아주 실감 있게 안겨온다. 2003년 10월 26일 부터는 같은 장소에서 종래의 시설들을 그대로 많이 활용하여 여성들이 탄 배와 남성들이 탄 배간 대결을 보여주는 쇼가 공연되었다고 하나 두 번째로 라스베가스를 찾았을 때 다른 일정으로 필자 내외는 그 쇼를 보지 못했다. 듣기로는 쇼의 스토리는 해적선이 여성들이 탄 배로, 영국 군함이 남성들이 탄 배로 둔갑해 대결을 벌리는데 결국 해적에 의해 영국군함이 침몰되듯이 남자들이 탄 배가 침몰되고 바닷물에 빠진 남성들이 여성들에 의해 구출되어 여성들이 탄 배에서 파티를 벌린다는 것이다. 스토리가 바뀐 것은 아마도 영국 측이 입김을 넣은 것 같다. 첫 번 관광에서 해적선 쇼를 보면서 내가 가이드에게 대영제국의 군함이 무적의 함대로 바다를 호령했던 스페인 군함이면 몰라도 하찮은 해적들에게 침몰되고 있으니 영국인들이 반발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가이드가 하는 말이 영국 정부에서까지 반발한다고 했다. 당연한 일이지, 말 바꾸어 만일 중국 군함이 해적선에 의해 침몰되는 쇼가 라스베가스에서 벌어진다면 필자부터 반발할 것은 두말할 것 없는 일이고. 그 담 쇼는 라스베가스에서 이 쇼를 보지 못하면 라스베가스 관광을 제대로 못했다는 말을 듣게 되는 벨라지오 호텔 앞 분수 쇼이다. 벨라지오 호텔 앞 넓은 인공호수에서 매 30분 간격으로 음악에 맞추어 분수가 춤을 추는 예술적인 장면이 연출된다. 가이드 소개에 따르면 총 공사비가 4,000 만 달러가 들었다는 이 분수대는 최고 높이 80 미터 정도로 분수가 치솟고 4500개 조명등이 환상적인 조명효과를 내고 있다. 분수는 현악기의 조용한 곡에 맞춰 바람에 흐느적이는 실버들처럼 가는 물줄기를 흔들며 춤을 추다가 오케스트라의 장엄한 음악이 터지면서 폭발적인 물기둥을 만들어 치솟는다. 분수 쇼를 보면서 사람마다 나름대로 묘한 기분을 느낀다. 아름다운 선율에 맞춰 흐느적대는 분수를 보면서 로맨틱한 분위기에 잠겨든다는 분도 있고 영화 《타이타닉호》 테마 곡에 따라 움직이는 분수를 보면서 애수의 분위기에 젖는 분도 있다. 지어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는 분수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도 변신을 가져올 수 있다는 거창한 확신을 가진 분도 있다고 한다. 필자에게 충격적인 것은 춤추는 분수보다도  분수 쇼가 미국 국가로 시작되었다가 밤 11시 55분에 다시 미국 국가로 막을 내린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미국인다운 애국심이 보여 지는 분수 쇼임을 절감케 한다.  그 담 라스베가스에서 꼭 봐야 할 쇼에서 뺄 수 없는 것이 지상에서 가장 밝다는 다운타운의 전자 음악 쇼 프리몬트 스트리트 익스피리언스(Fremont Street Experience)이다. 이 쇼는 라스베가스의 발상지인 다운타운 주변 호텔들의 인기를 다시 살리려고 다운타운 지역 호텔들이 4천만 달러를 공동 출자해 라스베가스의 또 하나의 명소로 부상시킨 것이다. 천정 전체가 형광막인 이곳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라스베가스에 온 관광객 70%가 이곳을 다녀갔다는 통계가 있다. 모든 공연이 36대의 컴퓨터로 조종된다는 이 쇼는 210만개의 전구에서 64 종의 색상을 내면서 만드는 생동감 넘치는 화면, 218개의 스피커와 54만 와트의 사운드 시설에서 나오는 엄청난 소리와 음악이 조성하는 분위기에 젖어 탄성을 뽑으며 신나게 몸을 흔들어대는 관광객들이 모든 것이 하나의 공연을 이루고 있다. 하기에 이 쇼는 라스베가스에서 관광객들과 함께 어울리는 유일한 쇼로 평판이 높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쇼 조명에 이용된 전구가 죄다 한국의 LG 전자 제품인 것이다. 하여 이곳은 한국인들이 미국에서 자존심을 찾는 곳이기도 하다. 두 번째로 라스베가스에 왔을 때 가이드 소개로 2003년 LG 전자가 1,700 만 달러를 들여 기존의 전구 대신에 1,250 만개의 LED ( 발광 다이오드 )를 설치해 더 선명한 화면과 함께 쇼의 질이 한층 향상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라스베가스 야경 구경에서 실외 쇼 구경은 머라지 호텔 앞에서 진행되는 화산 쇼 구경으로 끝난다. 일몰 후 매 30분 간격으로 8분간 동안 진행되는 이 쇼는 조용하던 정글 속 화산 분화구가 갑자기 울리는 굉음 속에 하얀 연기를 뿜어 올리며 시작된다. 쇼는 화산 폭발을 재현한 치솟는 용암 불기둥, 호수로 흘러내리는 용암을 핍진하게 보여준다. 이 쇼 구경 역시 길 거리에서 무료로 구경하는 쇼이다. 라스베가스에는 무료로 구경하는 쇼가 많으나 우리일행은 아쉬운 대로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쥬빌리 쇼를 구경하기 위해 극장으로 향했다. 극장으로 가는 길에 운전기사는 가급적이면 좀 더 많은 경관을 구경시키느라고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자유 여인상이 손짓하는 뉴욕뉴욕 호텔, 프랑스 분위기를 돋우는  패리스 호텔의 에펠탑, 이집트 피라미드 모양의 럭서호텔 꼭대기에서 하늘을 찌르는 레이저 불빛, 참말로 라스베가스의 호텔은 규모와 화려함과 시설 등 모든 면에서 세계 제일을 자랑하고 있었다. 세계 최대의 호텔 10개중에서 9개가 라스베가스에 있다고 한다. 라스베가스에서 가장 규모가 큰 호텔은 MGM 그랜드 호텔이다. 이 호텔 상징이 사자여서 입구에 커다란 사자가 입을 꼭 다물고 버티고 있다. 가이드가 입을 열었다.    《저 사자가 왜 입을 다물었는지 아십니까? 다 중국인들 탓입니다.》   가이드가 또 중국인을 거든다. 《중국에 가 보면 사찰이나 궁전이나 할 것 없이 대문 앞에 수호신처럼 버티고 있는 것이 사자상인데 전부 단박 사람을 삼킬 듯 아가리를 짝 벌린 무서운 모습입니다. 호텔 신축 시 호텔 측은 아가리를 짝 벌린 사자를 저 자리에 앉혔습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라스베가스에서 돈을 가장 많이 뿌리는 중국인들이 저 호텔에 발길을 끊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중국인들한테 물어서야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중국인들에게는 는 격언이 있다고 합니다. 중국인들이 아가리를 짝 벌린 사자가 지켜선 도박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아주 불길하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지금 중국이 한창 뜨는 시점에서 라스베가스에서도 중국인들을 많이 유치하는 것이 호텔 성공의 지름길로 되고 있습니다. 중국인 유치를 위해 호텔 측은 하는 수 없이 거금을 들여 저렇게 입을 꼭 다물고 있는 사자를 다시 만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이드 소개가 중국인을 비아냥하는 말은 아니지만 중국인 유치가 세계적인 라스베가스 호텔이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로 되고 있다니 별로 기분 좋게는 들리지 않았다.   라스베가스에서 두 가지를 꼭 봐야 할 볼거리 중 하나가 호텔 쇼라면 호텔 쇼에서도 꼭 봐야 하는 쇼가 바로 가장 라스베가스 쇼답다고 평가되는 세계 3대 쇼의 하나인 쥬빌리 쇼이다. 1981년 7월 30일 첫 공연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20년이 넘는 공연 기록을 남기며 그냥 라스베가스의 최고의 볼거리로 남아 있다. 쥬빌리 쇼는 파리의 리도쇼와 함께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쇼이다. 커다란 극장에서 화려한 무대와 의상, 특수 효과, 그리고 세트 장치는 물론 100여명이 넘는 무용수와 가수들이 벌리는 환상적인 공연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상은 가이드가 쥬빌리 쇼가 공연되는 호텔로 가는 도중에 한 간추린 소개다.    쥬빌리 쇼는 촬영이 금지되었기에 극장에 들어가기 전 사진기를 보관소에 맡겨야 했다. 천여 명을 용납할 수 있는 극장은 상상한 것처럼 그렇게 화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연이 시작되면서 무대에 황홀한 경관이 펼쳐졌다. 곧 이어 특히 남성분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게 하는 경관이 펼쳐졌다. 수십 명 무희들이 전부 가슴을 드러낸 채 미끈한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쇼 구경에 앞서 가이드가 무희들의 춤을 《토플리스 차림의 쇼걸들의 환상적인 춤》이라고 했는데 그 말을 듣는 당시엔 《토플리스》란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쇼를 보는 순간 그 말의 뜻을 풀 수가 있었다. 연변에서 10여년을 예술 공연 심사위원으로 지냈던 필자는 무대 공연을 수백 차 넘게 보아왔지만 말 그대로 《토플리스 차림》의 무용수, 그것도 한 두 명이 아니라 똑 같은 키에 똑 같은 체형을 가진 수십 명 무용수가 《토플리스 차림》으로 한꺼번에 무대에 등장한건 첨보는 광경이다. 쥬빌리 쇼에 출연하는 쇼걸들은 라스베가스에서 최고로 알려진 쇼걸인데 그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쇼걸은 나이 환갑나이를 넘겼다고 한다. 필자로선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말이지만 그게 사실이란다. 얼마나 몸 관리를 잘 했으면 환갑 넘긴 할머니가 처녀 몸매를 유지할 수 있을 가? 필자보다 더 궁금한 것은 필자의 아내였다. 지금도 필자의 아내는 쥬빌리 쇼가 화제에 오르면 풀지 못한 궁금증을 내비친다.     쥬빌리 쇼는 필자의 기억으로는 6막 12장으로 되었는데 그 중 가장 장관적인 장면은 《타이타닉》호가 바다에 침몰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수백 톤의 물이 쏟아져 온 무대를 채우면서 《타이타닉》호가 60도로 기울다가 나중에 두 동강이 난다. 지진과 화산 폭발 장면도 핍진하게 안겨오는 장면인데 이 장면을 연출하는데 600만 달러가 들었다고 한다. 쥬빌리 쇼는 라스베가스 오락문화의 대표작이기에 손색이 없다.  가이드 소개에 따르면 미국 청소년 윤리위원회에서 쥬빌리 쇼에 등장하는 쇼걸들이 가슴을 가릴 수 없느냐란 제의를 한 적이 있는데 결국 그 제의가 쇼 진행 측에 거부당하고 쥬빌리 쇼가 18세 이상 관람가로 되었다고 한다. 필자는 소개 책자를 통해 라스베가스에 성인을 위한 쇼뿐만 아니라 가족 동반으로 구경할 수 있는 쇼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매일 밤 라스베가스 유명 호텔에서 대형 쇼들이 공연되고 있는데 그 중 전체가 풀장으로 된 무대에서 수십 명에 달하는 수중 연기자들이 각가지 묘기를 보여주는 《0》쇼와 360도 회전 무대에서 불을 소재로 선과 악의 대결을 보여주는 《카》쇼는 쥬빌리 쇼에 비해 손색이 없는 대형 쇼라고 한다.   80년대부터 투자가들은 최상급 호텔에 최고급 공연문화를 접목시켜 라스베가스를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관광도시로 변모시켰다. 라스베가스가 80년대로부터 《도박의 도시》, 《죄악의 도시》, 《타락의 도시》라는 이미지를 퇴색시키고 단순한 카지노의 도시가 아닌 오락문화와 컨벤션 기능을 갖춘 복합적인 세계 최대 관광도시로 탈바꿈 한데는 쇼 문화 역할이 컸다. 지금 해마다 300억 달러에 달하는 라스베가스의 관광 수입 원천은 다양한 공연문화에 있다. 건전한 공연문화 반면에 퇴폐적이고 부정적인 면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 라스베가스다. 가이드가 호텔 투숙 전 주의를 준 말이다.   《재차 강조하는데 절대 도박과 놀이를 분명히 하십시오. 그리고 개별 행동 시 혼자 오신 남성분들은 거리에서 나눠주는 전단을 받지 마십시오. 전단은 대체로 호텔 방에서 나체쇼 개별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내용입니다.》   가이드 호텔방에서 제공한다는 나체쇼 서비스는 많은 경우 매음으로 이어지기에 자칫하면 돈 날리고 망신만 사는 꼴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가이드 소개에 따르면 라스베가스엔 전라의 무희들이 춤추는 성인용 나체쇼가 여러 곳에서 열린다. 춤추는 무희들에게 5불정도 팁을 주면 더 가까운 거리에서 춤을 춰주고 20불정도 팁을 주면 바로 코앞에까지 와서 춤을 추는데 그 때 절대 춤추는 무희 몸에 손을 대선 안 된다고 가이드는 천만 당부했다. 무희에 손을 대면 벌금은 물론 그냥 공연장에서 쫓겨난다고 했다. 필자가 속한 관광 팀은 모두 가족 동반으로 온 분들이어서 한사람도 빠짐없이 고스란히 호텔로 직행했다. 라스베가스 관광에서 이제 남은 것은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놀이로 해봐야 하는 카지노 도박이었다.  
14    라스베가스(제3편) 댓글:  조회:2867  추천:0  2013-01-22
   《카지노 공부》 《라스베가스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카지노입니다. 오늘 우리가 투숙하는 호텔 역시 카지노 호텔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카지노 공부》는 카지노 이름 기원부터 시작되었다. 카지노 이름의 기원을 보면 《작은 집》이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 카자(casa)가 어원이고 르네상스 시대 귀족들이 소유하였던 사교, 오락용(댄스, 당구, 도박 등)의 별관을 뜻하는 말이다. 역사적으로는 왕국의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 18∼19세기에 유럽 각지에서 개설되기 시작하였다가 후에 와서는 악덕의 온상이라고 금지되었다. 미국에서도 서부 개척 이래 도박이 활발했으나 카지노라고 하게 될 만큼 시설을 선보인 것은 19세기 중엽부터 남북전쟁 때까지 미시시피강에 200여 척의 호화판 도박선이 뜰 때부터란다. 19세기 말에는 뉴올리언스에서 과세 목적으로 공식개설이 허용되었는데 라스베가스에서 카지노 도박이 허용된 해는 1931년이다. 1930년에 시작해 1935년에 완공된 후버댐에 동원된 노동자들에게 유흥과 오락을 제공해 주기 위해 정부가 카지노 도박을 허용했다는 일설이 있다.  《라스베가스에 가면 누구나 바보 되기 십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라스베가스에 가면 세 가지 유형의 바보가 되는데 첫째 바보는 라스베가스에 와서 카지노 유혹에 돈을 따보겠다고 덤비는 사람이고 둘째 바보는 잃은 돈 찾겠다고 계속 도박하다가 있는 돈 다 터는 사람입니다. 그럼 셋째 바보는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가이드가 또 알아맞히기 문제를 낸다. 역시 와인 한 병을 경품으로 내걸고.   《다신 도박 안 하겠다고 돌아섰다가 다시 도박판에 끼는 사람.》  《역시 둘째 바보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그럼 돈 날리고 패가망신하는 사람.》  《그 역시 둘째 바보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도박 중독자!》  《첫째 바보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도박 중독자와 도박으로 가산 탕진하는 사람들이 속해 있는 첫째 바보와 둘째 바보 외에 또 다른 바보가 어떤 사람일 가? 가이드 정답이 아주 사람 웃긴다.  《라스베가스에 와서 카지노를 하지도 않고 그냥 가는 사람이 셋째 바보입니다.》  모두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가이드가 정색해서 말했다.   《라스베가스에 눈만 돌리면 시야에 들어오는 게 카지노입니다. 라스베가스의 색다른 풍경이라고 봐야지요. 공항까지도 슬롯머신이 있는 게 라스베가스입니다. 일단 라스베가스에 오셨으니 놀음삼아 카지노 한번 해보십시오. 라스베가스만 남길 수 있는 추억으로 될 겁니다. 그러나 명심하실 것은 도박과 놀이를 분명히 하십시오. 푼돈 가지고 잠깐 즐기면서 추억거리를 만든다고 생각하시고 카지노에 임해야 하지 절대 돈 딴다고 덤벼서는 안 됩니다. 라스베가스에 와서 돈 날린 원인은 도박과 놀이를 구분 못했기 때문입니다.》   가이드는 라스베가스에 와서 왕창 돈을 날린 실례를 몇 가지 들면서 대박을 터뜨린 실례도 곁들였다. 지금까지 라스베가스에서 가장 큰 대박을 터뜨린 사람은 두 번이나 대박을 터뜨린 백인 할아버지라고 한다. 이 백인 할아버지는 1989년 11월 22일 머라지 호텔 오픈 시 460 만 달러 대박을 터뜨렸고 2005년 9월 15일 또 2,110 만 달러의 대박을 터뜨렸다. 이 할아버지가 얼마나 검소한지 엄청난 대박을 터뜨린 후 호텔 고급식당에서 주문한 음식이 가장 싼 핫 도그였는데 그것마저도 반쯤 먹고 나머지는 나중에 집에 가서 먹으려고 싸들고 갔다고 일화까지 남겼다. 지금 90세를 넘은 나이 이지만 아직도 혼자서 운전을 하고 다닐 정도로 건강한 편인데 대박을 터뜨린 후부터 해마다 크리스마스 때면 이혼한 부인한테 꼭꼭 만 불씩 보내준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모두들 《오!》 하고 가벼운 탄성을 뽑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그 할아버지처럼 대박 터뜨릴 분  여기 있을지도 모르니 제가 기대해 보겠습니다. 대박 터뜨리면 저한테 팁 주시는 걸 잊지 마십시오.》  그러면서 가이드는 한국인이 대박을 터뜨린 실례를 더 들었다. 대박의 행운을 안은 사람은 성이 박 씨라는 한국인, 운이 좋았던지 블랙잭으로 4만6천8백 불을 땄단다. 꿈이냐 생시냐 하고 있을 때 멋지게 생긴 매니저 한 사람이 다가와 정중하게 인사를 하더니 《선생님, 제가 차  한잔 대접하겠습니다. 같이 가주시지요》 하며 호의를 베풀더라는 것이다. 호의를 무시할 수 없어 매니저를 따라간 방은 마치 궁전처럼 꾸며져 있었는데 매니저가 버튼을 누르니 몸매 늘씬한 미모의 아가씨 둘이 들어오더란다. 곧이어 멋진 두 아가씨가 술시중을 들었고 매니저는 호텔에서 가장 좋은 귀빈용 방을 준비했으니 쉬어가라고 권하면서 《미스터 박, 기술이 대단한 것 같은데 이번엔 액면이 좀 큰 것으로 해서 한 몫을 잡아 보는 것이 어때요?》 하니 박씨는 귀빈 예우를 받다보니 거절하지 못했는데 결국 블랙잭으로 번 돈을 몽땅 날려 보냈다는 얘기다.   《카지노 공부》가 끝날 무렵, 앞좌석에 앉은 할머니 한 분이 어떻게 하면 카지노에서 돈을 따는 가고 물었다.  《돈 따는 방법이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카지노를 안 하는 겁니다. 》  가이드 말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13    사막의 명주 라스베가스(제2편) 댓글:  조회:2945  추천:0  2013-01-14
                     라스베가스와 마피아    가이드가 먼저 마피아에 대한 정의부터 앞세운다. 그걸 글로 적으면 이러하다.  《마피아(Mafia)는 전 세계적으로 최대 범죄 조직으로 널리 알려진 범죄 단체이다. 원래는 이탈리아 마피아 조직만을 뜻하나 미국 마피아, 러시아 마피아 등도 유명하다. 마피아라는 용어가 국제적으로 사용된 것은 1875년 이후인데 그 기원에 대해서는 명확한 바는 없으나 수세기 동안 시칠리아가 무법 상태에 있을 때 강도로부터 토지를 보호하기 위해 지주들이 만든 소규모 사병 조직인 마피에(MAFIE)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고 최초의 마피아 단원은 1282년 시칠리아 만종 사건이라고 불리는 반란에서 프랑스의 앙주가문의 지배에 대항하여 싸웠던 시칠리아 기사들이었다는 설도 있다.》  다음은 아메리카 마피아 시조에 대한 소개다.  《아메리칸 마피오 두목은 알 카포네. (Alphonse Gabriel Capone) 1920년대와 1930년대 미국에서 발효된 금주법 시대에 시카고를 주 무대로 활동했던 갱스터이다. 그가 이끌었던 시카코 아웃핏(Chicago Outfit)은 미국서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대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그는 으로 군림해 1927년엔 한 해 총수입이 1억 달러인 세계 최고의 시민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1932년 체포돼 라는 죄명으로 7년간 옥살이를 치렀다. 영원할 것 같았던 밤의 권력도 투옥과 함께 끝났다. 1939년 출소 당시 이미 폐인이었던 그는 1947년 1월25일 초라하게 숨졌다. 사인은 매독과 폐렴합병증이다.》 마피아가 라스베가스와도 크게 관련이 있다는 가이드 말에 귀가 솔깃해진다. 가이드의 소개에 따르면 라스베가스를 움직인 사람으로 이름을 남긴 사람들 중 벤 자민 시겔이 바로 라스베가스에 진출한 마피아의 대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악명이 자자했던 그는 라스베가스로 진출해 1946년 12월 26일, 현대식 시설을 갖춘 첫 카지노 호텔인 플라밍고 호텔을 오픈한 그 이듬해 6월 집에서 5발의 총탄을 맞고 생을 마감한다. 그의 일생은 워렌 비티와 아네트 베닝 주연으로 1991년 출시된 영화 《벅시(Bugsy)》에서 재현된다. 《벅시》는 마피아시절에 시겔이 겁이 없고 잔인한 살인을 잘 한다고 얻은 별명인데 시겔이 이 별명을 아주 싫어해서 그의 면전에서는 아무도 벅시라고 부르지 못했다고 한다. 영화 《벅시》 외에도 라스베가스를 주 무대로 한 영화가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비롯해 많고도 많다. 그 중 마피아를 다룬 영화도 여러 편이 된다. 필자가 본 영화는 라스베가스의 카지노와 마피아와의 관계를 보여준 《카지노》이다. 이 영화는 80년대 초반전까지 마약, 섹스, 도박의 이미지를 가졌던 라스베가스가 80년대 중반부터 가족 중심의 휴양지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벅시는 라스베가스로 진출할 때 황량한 사막을 둘러보면서 고 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지금 라스베가스는 세계 최고의 카지노, 가족 오락 타운으로 끊임없는 성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예전의 모습은 아니지만 플라밍고 호텔에 가면 그의 동상과 업적을 기리는 기념탑이 있습니다. 한마디 더 첨부한다면 라스베가스에 진출한 마피아 대부들 거개 모두가 시겔처럼 비명에 생을 마감하지 않았으면 라스베가스에서 쫓겨나 은둔하는 신세가 되었다는 얘깁니다.》    지금의 풀라밍고 호텔 야경(필자가 투숙했던 호텔) 여기서 마피아 관련 《공부》는 끝났는데 라스베가스까지 아직 반시간 남짓한 시간이 남아 가이드는 《카지노 공부》 이어갔다.                                                            
12    사막의 명주-라스베가스(제1편) 댓글:  조회:4004  추천:0  2013-01-11
 라스베가스를 어떻게 쓸 가? 많이 고민했다. 조선의 금강산 기행문을 쓸 때도 그러했다. 너무나 알려진 명소여서 그런다. 라스베가스를 하루에 평균 10여만 명, 일 년에 4천여만 명이 다녀가고 해마다 평균 3000여 차례 대규모 컨벤션이 열린다고 하니 글 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던 차 아버님 창작생애 기념 포럼에 아들의 시각, 그것도 부전자전으로 아들도 역시 작가이기에 아들이면서 작가인 시각으로 아버님 창작생애에 관한 론문 한 편 써달라는 청탁을 받는 순간 문득 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라스베가스를 론문 격식을 본 따서 써보면 어떨 가? 한번 시도해볼만한 아이디어인 것 같다. 지금까지 소설, 연극, 시나리오, 에세이, 칼럼, 가사, 지어 무용극 대본까지 써오면서 논문은 한 편도 써보지 못했다. 그래서 중국 명문대 교수인 친구에게 론문이란 무엇이냐고 물으니 그 친구가 당신이 쓰는 소설이 뭐냐고 되묻는다. 소설이나, 연극이나, 에세이나 모든 글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글로 적은 것이라고 간단하게 대답했더니 그 친구도 간단하게 하는 말이 론문은 남의 글을 참고로 자기 글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이 정의가 맞는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고. 많이 보지는 않았지만 몇 편 본 론문 중 한 격식을 보면 《들어가면서》로 시작돼 나중에 《나오면서》로 마감을 했다. 그런 식으로 쓰면 재미있을 것 같아 본 따본다.                                                      들어가면서     라스베가스로 들어가면서 먼저 라스베가스 력사공부를 해야 한다. 라스베가스 력사공부는 달리는 관광버스 안에서 가이드가 시킨다. 알아맞히기 식으로 경품까지 내걸고 한다. (미리 안내 말씀 드릴 것은 필자 내외가 그랜드캐년처럼 두 번이나 라스베가스를 찾았다는 점, 그러나 카지노 때문에 두 번 찾은 것이 아님을 미리 알림.) 처음이나 두 번째나 가이드가 시키는 라스베가스 략사공부는 대동소이했다. 라스베가스 력사와 관련해 들려준 가이드의 소개를 먼저 간추린다.                                                라스베가스의 연혁     라스베가스에 대한 연혁이 대략 이렇게 나온다. 라스베가스는 네바다 주의 남동부 사막에 있는 관광과 도박의 도시로 네바다 주에서 제일 크다. 1855년경에 몰몬교 신도가 거주하기 시작했으나, 20세기에 들어와 철도가 건설 되면서 현대적인 도시로 개발되었다. 초기에는 광업과 축산업을 하는 마을이었으나 1936년 당시 세계 최대의 후버댐이 완성되고 도박장이 늘어나면서 관광, 환락지로서 각광을 받게 되어 네바다 주의 최대 재원이 되었다. 후버댐으로부터 막대한 전력과 물을 공급받아 밤낮으로 관광객으로 성황을 이루는 도시가 되어 24시간 잠들지 않는 《불야성》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대도시가 되었다.   그런데 라스베가스 연혁에서 한 가지 중요한 대목이 빠졌다는 것을 필자가 발견했다. 필자의 고증에 의하면 라스베가스 초기 정착 자들 중 몰몬교 신도 외에 중국인들도 많았다. 연도별로 본 라스베가스 거주 역사를 보면 1855년부터 1857년까지 몰몬교 신도 30명이 원주민 인디언들에게 농사짓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선교하기 위해 라스베가스에 거주지를 마련하고 잠시 정착했으나 인디언의 반대로 철수한다. 그 후 남북 전쟁이 끝나고 대륙횡단 철도가 완공되면서 철도 건설에 동원되었던 중국인들이 1869년부터 대거 라스베가스에 거주하기 시작해 차이나타운을 세우고 지금까지 끈질기게 세세대대로 라스베가스를 지키고 있다. 연대별로 라스베가스 략사를 고증해 본 결과 필자는 중국인도 라스베가스의 어엿한 주인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필자가 가이드에게 필자의 고증을 피력했더니 가이드도 동감을 표했다.  《맞습니다. 중국인도 라스베가스 개척자입니다. 지금 중국인들이 라스베가스를 가장 많이 찾습니다.》  하긴 필자도 미국에 오기 전 중국인들이 미국에 오면 어김없이 찾는 곳이 라스베가스라는 말을 들었었다. 공무 차 미국에 온 방문단도 라스베가스를 꼭 방문 일정에 넣는다. 또 많은 부정부패를 일삼는 자들이 라스베가스에서 공금을 탕진한다는 소문도 무성하다.   《예전엔 석유가 많이 나는 나라의 부자들이 라스베가스에 와서 돈을 물처럼 썼는데 지금은 중국인들이 돈을 눈 뿌리듯 쓰고 있습니다. 중국인들이 돈 많습니다.》  가이드가 알아맞히기 문제 하나 냈다. 내건 경품은 와인 한 병이었다.   《라스베가스는 어떤 도시입니까?》  너무 쉬운 문제여서인지 아니면 경품으로 내건 와인 한 병 가지고 싶어서인지 너도나도 손을 들었다. 앞좌석 경로석에 앉은 바깥노인 한 분이 먼저 지명됐다.   《도박의 도시!》  가이드는 태도 표시 없이 연속 여러 명을 지명했다.  《밤의 도시!》  《사막의 진주!》   《마피아의 도시!》  《범죄의 도시!》  《환락의 도시!》  《축복받은 도시!》  이렇게 저마다 나름대로 라스베가스에 대해 정의를 내렸지만 가이드는 그냥 고개를 살래살래 젓기만 하다가 나중에 입을 열었다.  《기본상 맞는 대답이지만 정답은 아닙니다. 정답은 이제 여러분들이 라스베가스를 관광하신 후 다시 내려 주시길 바랍니다. 한 가지 해석드릴 것은 라스베가스는 한 때 마피아의 도시였고 지금도 마피아의 힘이 실리고 있는 도시지만 범죄의 도시는 아닙니다.》  가이드의 해석은 아주 간단했다. 라스베가스를 도박의 도시로 생각할지언정 범죄의 도시로 생각해선 곤란하다는 얘기다. 라스베가스 범죄율은 로스앤젤레스나 근처의 로스앤젤레스나 기타 도시에 비해 낮다고 한다. 가이드 말로는 소매치기, 빈집털이, 불량배 같은 잡범들이 설치지 못하는 까닭은 마피아가 알아서 다 정리하기 때문이란다.  《사소한 범죄로 관광객이 줄어들면 장사가 안 되니까 마피아가 경찰보다 도시 관리를 더 철저히 잘 한답니다. 소매치기 같은 잡범들이 경찰한테 걸리면 그냥 구치소로 가지만 마피아에 걸리면 그냥 아예 갑니다. 로스앤젤레스 주변이 죄다 사막이니 그냥 버려지는 거죠.》  우스개로 하는 말 같지만 듣기만 해도 섬뜩한 느낌이 온다. 가이드는 마피아 공부까지 시킨다.     
11    그랜드캐년(제4편) 댓글:  조회:3330  추천:0  2012-12-23
      우리 내외는 2007년 여름 두 번째로 그랜드캐년을 찾았다. 우리 내외가 못 가본 《신의 성지》라는 자이언캐년과 《아름다운 첨답의 향연》으로 이름난 브라이스캐년 3박 4일 관광코스에는 그랜드캐년까지 들어있다. 그랜드캐년 첫 관광을 얼떨떨한 김에 했던 차라 또 한 번 그랜드캐년을 보고 싶은 것이 우리 내외 마음이기도 했다. 첫 번 관광에서 피곤한 김에 졸다나니 모하비 사막을 경과하면서 놓친 경관을 여기서 보충한다.   그랜드캐년으로 가는 길에 중식을 먹느라고 잠깐 들러 가는 사막도시가 있다. 도시명이 바스토우는철도교통의 요충지로서 동서남북의 철도를 연결하는 철도 터미널 같은 곳이다. 화물차 차량(조선에서는 바곤이라고 한다)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이곳은 물류 집산지이기도 하다. 가이드 소개에 따르면 미국 서부와동부를연결하는철도 수송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은 산타페 철도회사 본부가 있는바스토우 도시명은 당시 산타페 철도회사 10대 회장이었던 윌리엄바스토우(William Barstow)씨의이름을 그대로 땄다고 한다. 바스토우 회장은 회사에서 은퇴한 후 간이역에서 열차의 출발, 정차를 알리는 기수 일을 했다. 가이드는 직업 귀천을 가리지 않고 근면하게 일하기를 좋아하는 미국인다운 삶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 바스토우라고 특히 강조하면서 미국의 대륙 횡단 철도 소개했다. 미국의 대륙 횡단 철도가 중국인들과 깊은 관련이 있기에 여기서 잠깐 언급해본다.1982년 7월 1일 링컨 대통령이 태평양 철도령에 사인을 한 직후 미국정부는 새로운 철도건설을 위한 돈과 땅을 확보하여 대륙횡단 철도를 완성하게 된다. 이 때 두 회사가 철도건설의 대리를 맡았다. 서쪽의 새크러멘토를 출발지로 한 센트럴 퍼시픽(Central Pacific) 회사가 철도건설을 시작하고 동쪽에서는 유니언 퍼시픽(Union Pacific) 회사가 오마하 지역에서부터 철도건설을 맡는다. 그러나 서부에서 출발한 센트럴 퍼시픽 회사는 얼마가지 않아 철도건설에서 치명적인 문제 상황에 빠진다. 당시 센트럴 퍼시픽 회사가 확보한 인력은 600명뿐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럭키산맥이 앞을 가로 막았다. 당시 유행된 말로 《가장 적 은 비용으로 가장 불만 없이 가장 위험한 일을 할 인력》이 필수였는데 선택된 것이 중국인이었다. 중국인의 미국 이민 역사는 1830년대 하와이의 사탕수수 재배와 1840년대 캘리포니아의 금광 유혹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일확천금을 꿈 꾼 중국인들 대부분이 철도건설에 동원되었다. 중국인 미국 이민사 관련 내용은 다른 글에서 상세하게 다루기에 이 글에선 약한다. 기재에 따르면 미국 대륙횡단 철도 건설을 위해 서부 쪽에서는 주로 중국인들이, 동부 쪽에서는 아일랜드 이주자들이 동원되었다. 중국인들은 처음에는 몸집이 왜소하다는 이유로 허드렛일만 하던 수준에서 마지막에는 높은 기술이나 위험부담이 많이 요구되는 일을 맡아 처리하는 철도건설의 주역이 된다. 나중에 서부 쪽 인부 중 중국인들이 90%를 차지하게 된다. 사상자도 많이 났다. 럭키산맥을 관통하는 터널을 뚫을 때 혹한이 닥쳐와 숱한 중국인 인부들이 얼어 죽었고 벼랑에서 떨어져 죽었다. 중국인들은 생명을 대가로 눈보라치는 럭키산맥, 기온이 50도를 오르내리는 사막, 소금바다에 남북을 잇는 철도를 부설해 나갔다. 지금 미국인들은 중국인들이 아니었다면 럭키산맥 관통은 물론, 미국 대륙 횡단 철도 건설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만리장성을 축조한 중국인들이 미국 땅에 또 하나의 만리장성을 축조했다》고 중국인들의 기여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인들의 기여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1869년 5월 10일, 마지막으로 유타주의 프로몬토리 지점에서 황금 스파이크(golden spike)를 박는 행사로 미국철도 건설이 막을 내린다. 미국의 남북 전쟁이 남과 북을 하나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면 대륙횡단 철도는 미국의 동과 서를 하나로 연결하는 계기가 되어동부와 서부의 진정한 통합을 가지고 올 수 있었다. 이 위대한 역사의 장거가 많은 문헌으로 기록을 남기고 있지만 남북횡단 철도 개통식에 중국인 단 한 명도 참석하지 못해 당시 사진이나 기사에서 중국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지금도 큰 아쉬움을 남긴다. 그 아쉬움을 안은 우리 내외 마음을 《대자연의 서사시》로 불리는 그랜드캐년이 달래줄 수는 없을 가.    그랜드캐년에 도착해 관광 팀은 두 팀으로 나뉘어졌다. 한 팀은 도보관광, 다른 한 팀은 경비행기로 그랜드캐년을 돌아보는 코스를 택했다. 첫 번 관광에서 경비행기를 이용한 관광이 돈만팔고 별로라는 말을 들은 우리 내외는 도보관광을 택했다. 먼저 아이맥스(IMAX)영화를 보았다. 첫 관광 때에도 보았지만 아이맥스 영화가 주는 충격적인 화면을 다시 보고 싶었다. 영화는  남북 전쟁 영웅 존 웨슬리 파웰이 인솔한 탐험대가 1869년 70일간 콜로라도 강을 따라 진행한 탐험을 재현한 것이다. 아이맥스 영화 자체가 사람의 눈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를 모두 영상으로 채워서 마치 영화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다가 영화 속에 담긴 장관적인 그랜드캐년 모습과 탐험대가 콜로리다 강 급류를 타고 내려오는 아슬아슬한 표류 장면에 경탄과 함께 손에 땀을 쥘 지경이었다.극장 옆에 당시 탐험에 사용되었던 배가 전시되어 있어 사진에 담았다.   그랜드캐년은 뜨겁고 건조한 여름에도 순식간에 기온이 떨어지고 번개가 치고 폭우가 내리는 변덕을 부린다고 한다. 다행히 우리가 재차 그랜드캐년을 찾은 그날은 쾌청한 날씨여서 마음껏 사진을 찍을 수가 있었다. 그랜드캐년은 햇빛아래 흘러가는 구름의 옅고 짙음에 따라 붉은색, 주황색, 갈색 등 여러 가지 색깔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한 폭의 수채화를 방불케 했다. 그랜드캐년 밑바닥에는 인디언 보호구역이 있다고 가이드가 소개했다. 당시 스페인 탐험대가 그랜드캐년을 발견했을 때 아파치 인디언의 선조인 아니시지 족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인디언들은 주로 야생동물을 사냥하면서 살아왔으나 지금은 얼마 안 되는 인디언들이 나라로부터 생필품을 공급받으면서 생활하고 있다. 이 땅의 주인으로 산야를 주름잡던 인디언들이 지정된 보호지역에서 나라 구제를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니 어쩐지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인디언 관련 소개는 다른 글에서 상세하게 적기로 한다.   그랜드캐년 두 번째 관광 시 찍은 사진과 첫 관광 시 사진을 대조해 보면 얼굴 표정에서나 잡은 포즈에서나 완연 다르다. 첫 관광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우리 내외는 추위에 잔뜩 어깨를 움츠렸고 표정 또한 밝지 못했다. 그 때 피곤한데다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위대한 자연 경관을 보고 얼이 빠진 모양! 두 번째로 그랜드캐년을 찾은 우리 내외의 표정은 아주 밝았고 사진을 찍을 때 취한 자세만 보아도 넉넉한 마음의 여유가 내비쳤다. 웃고 떠들며 찍은 사진만 백여 장이 된다. 미국의 관광 1번지에서 남들 앞에 버젓이 내놓을 《표준 사진》을 뽑으려는 타산도 있었다.   사진을 다 찍고 난 우리 내외는 그랜드캐년이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서 잠깐 휴식을 청했다. 그랜드캐년에서 하나뿐인 전망대는 죄다 돌로 되었는데 인디언 건축 양식으로 지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항일전쟁 시 일본군이 중국 땅에 축조한 포태와 흡사했다. 전망대 안에는 선사시대부터 이곳에 살았던 인디언 유적과 푸에블로부족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망대에 설치된 망원경으로 미국 대륙의 광활함을 엿볼 수 있는 세계적인 명소 그랜드캐년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중국의 장강 삼협을 떠올렸다.   중국의 장강 삼협 역시 세계적인 기관이다. 구당협, 무협, 서릉협 세개의협곡으로구성된총길이193㎞에 달하는 장강 삼협은 그랜드캐년에 비해 길이나 너비에서 짝지지만 웅장함과, 험준함, 기묘함과 고요함에 있어서 그랜드캐년보다 다르게 관광객을 매료시킨다. 더욱이는 강 양안에 즐비하게 늘어섰다고 할 정도로 수많은 명승고적과 세계적으로 이름난 산수 화랑으로 불리는 삼협의아름다운경관은 그랜드캐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경관이다. 3국 시대 촉나라 황제 유비가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했다는 1700여년의 역사를 가진 백제성, 귀족(鬼族)의 왕도로 유교, 불교, 도교의 보고인 귀성(鬼城), 장강 삼협의 축소판인 소삼협, 전국시대 대시인 굴원을 기리는 향계하의 굴원사원, 당나라 유명한 시인 두보가 400여 수 시를 남겼다는 봉절, 삼국지 유명인물 장비를 기리는 장비사원, 너무 많아 이루다 적을 수 없을 정도다. 천혜의 관광 자원을 가지고 있는 중국이나 미국이나 축복받은 나라가 틀림없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우리 일행 중 한국에서 오신 몇 분이 그랜드캐년의 장엄한 경관을 마주하고 손을 합장 한 채 한참이나 눈을 감고 서 있었다. 불교도들이 소원을 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신비롭고 위대한 자연의 품에 안겨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꼭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우리 내외도 그랜드캐년을 굽어보면서 잠깐 묵념에 잠겼다. 아내가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아내도 내가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물어오지 않았다. 소원 발설은 금물이니까. 그랜드캐년에서 빈 소원은 지금도 우리 내외 가슴깊이 소중히 간직되어 있다. 각자의 소원이 성취되는 날 우리 내외는 다시 그랜드캐년을 찾기로 약속했다.  그랜드캐년이여 기다려주오!  
10    그랜드캐년(3편) 댓글:  조회:4336  추천:1  2012-12-20
        《오, 신이여!》  이튿날 아침 조식 후 버스는 한 참 달려 마침내 미국의 관광 1번지에 도착했다. 그랜드캐년 관광은 주로 그랜드캐년 남쪽에 있는 노스림(North Rim)을 이용한다. 이곳엔 호텔, 레스토랑, 병원, 우체국 과 아이맥스 영화관이 있다. 11월이 막가는 겨울 날씨인데다가 고지대여서 몹시 추웠고 바람도 매서웠다. 가이드는 11월이 지나면 그랜드캐년엔 눈이 많이 내려 관광이 중지되는데 관광 중지를 며칠 앞두고 그랜드캐년을 찾은 우리 일행 모두가 행운을 안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랜드캐년의 날씨가 변덕이 많으니 일광이 있을 때 먼저 그랜드캐년을 구경하고 나중에 아이맥스 영화를 구경하기로 했다. 협곡은 보통 산에 올라가서 굽어본다. 사방을 둘러보니 낮은 소나무가 눈 속에 서 있는 평지였다. 산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산도 없는 곳에 협곡이라니? 이런 의문을 달고 가이드 뒤를 따라 전망대에 이르고 보니 헉! 숨이 막혔다. 여성분들은 여성 고유의 감탄사인 《어마나!》를 연발했고. 아내는 너무 아찔해 현기증이 인다고 했다. 무섭다고 했다. 아마 자연의 위대함에 경탄하기에 앞서 자연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온 모양이다.그랜드캐년을 본 첫 느낌은 한마디로 감탄과 경탄 그 자체였다.   평지가 갑자기 사라지고 발밑엔 밑도 끝도 보이지 않는 협곡이 길게 드러누워 있었다. 갑자기 밑도 끝도 알 수 없는 낭떠러지를 만난 격이었다. 결국 우리가 서 있는 곳은 평지가 아니라 산 정상인 셈이다. 내내 해발고가 높은 고지대 사막을 경과했다는 점을 잊었던 것이다. 나는 중국의 운남성 곤명시에서 고지대 설산으로 유명한 옥룡산으로 가던 길에 끝이 내려다보이지 않는 협곡을 보고 경탄한 적이 있다. 그 때 협곡은 좁고도 깊은 협곡이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협곡은 너무나 깊고 넓어 협곡이라기보다 이 산에서 저 산을 바라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1540년, 스페인에서 파견된 탐험가이면서 정복자였던 프란시스코 코로나도의 부하였던 가시아 로페즈 데 까르데나스(Garcia Lopez de Cardenas)가 25명의 대원들과 함께 인디언들이 큰 강이라고 부르는 곳을 탐험하기 위해 가다가 상상을 초월하는 대자연의 경이로운 경관을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무릎을 꿇고 《오, 신이여!》를 연발했다고 한다. 그들 중 대장인 까르데나스가그랜드캐년의 웅장한 경관에 경탄하면서 스페인어로 거대하다는 뜻으로 《그란데(Grande)》라고 한 것이 대협곡의 이름으로 되었다고 한다.      그랜드캐년, 말 그대로 대협곡이었다. 태고의 신비인 그랜드캐년은 지구의 역사와 함께 한 곳! 콜로라도 강이 콜로라도 고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곳에 형성된 대협곡의 길이는 길이 447km, 너비 6~30km, 깊이는 1500m로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협곡. 깎아지른 절벽, 다채로운 색상의 단층, 높이 솟은 바위산과 형형색색의 기암괴석, 도도히 흘러가는 콜로라도 강이 어우러져 장엄한 파노라마를 연출하고 있는 그랜드캐년은 1919년 미국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1979년 유네스코 자연유산에 등록되었다고 안내문에 적혀있었다. 우리 관광 팀에 합류한 한국 서울에서 왔다는 한 분이 그 안내문을 보면서 그랜드캐년 길이는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보다 길고 2000미터를 넘는 해발고도 제주도의 한나산보다 높다고 했다.  그랜드캐년을 마주하면 숨 막힐 것 같은 감탄과 함께 장엄한 자연 앞에 인간이라는 존재가 너무 작고 하찮게 느껴지기 때문에 무기력함 혹은 허망함 을 느낀다고 한다. 이런 느낌을 갖는 순간은 위대한 세월과 자연 앞에 잠시 인간의 오만을 접고 겸허함을 느끼는 순간이고 초라한 자신을 비로소 발견하는 순간일 것이다. 나는 대자연이 빚은 위대한 걸작 앞에서 경탄보다도 얼빠진 모습으로 한참이나 말없어 대협곡을 내려다보았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그랜드캐년은 자연의 위대함과 신비로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언젠가 영국 BBC가《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죽기 전 가봐야 할 곳》이라는 주제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이 그랜드캐년이었다고 한 것이 실감이 가는 순간이다. 이곳을 와본 사람들의 느낌을 모아보면 그랜드캐년은 《도무지 글로나 사진으로, 또는 그림으로 그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표현할 길이 없는 대 자연의 경이로움! 세계 자연의 불가사의 중에서도 최고의 신의 작품! 반드시 눈으로 확인하고 가슴으로 느껴야 하는 곳, 사시사철 색깔이 모두 달라지는 곳, 진한 아름다움의 극치와 감동을 주는 곳,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느끼는 감동이 다른 곳!》이다.  지각 융기와 장구한 세월을 거처 거듭 된 물의 침식과 결빙으로 인한 풍화작용으로 암반이 파여 나가며 형성된 그랜드캐년에서 지구 45억년 역사 중 20억년 지구 역사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20억 년 전 화산의 폭발 시 검은 색의 마그마가 이 지역 일대를 평평하게 만들었다가 오랜 세월, 지각의 변동과 함께 이 지역 일대가 바다 밑에 잠기는 지각 변동 후 침몰과 융기 현상이 반복되었다. 지각의 변동 중 갑자기 동쪽이 불쑥 솟았는데 그것이 해발 4,345m인 지금의 럭키산맥이다. 그 산맥에 빙하시대가 도래하고 그 빙하와 눈들이 녹아 높은 곳에서 낮은 지형으로 흐르면서 7개의 강줄기들을 만들고 그 강들이 다시 하나의 큰 강줄기로 모여 콜로라도 강을 이루게 된다. 이 강이 수억 년 흐르면서 평평했던 평지를 깎고 깎아 침식시켜 전형적인 브이 (V) 자 계곡을 만들고 이 계곡이 오랜 세월동안의 바람과 비의 영향으로 부드러운 곡선으로 변하면서 오늘날의 그랜드캐년이 약 600만 년 전에 형성 되었다고 한다. 석회암과 사암으로 구성된 단층에선 고대 조개의 화석과 바다 상어 뼈 화석이 발견되었고 계곡 바닥을 흐르는 콜로라도 강변 습지에서 수령 700여년이 된다는 바다 거북이가 서식하고 있어 이 지역이 먼 옛날 바다 밑이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어 지질학자들은 그랜드캐년을 《지질학 교과서》라고 한다. 육안으로는 그냥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황량한 사막의 계곡 같으나 1,600여종의 식물과 250종 이상의 조개류, 78종의 포유류, 18종의 도마뱀, 8 종의 방울뱀, 전갈 등이 서식하고 있어 생태학자들 또한 그랜드캐년을 생태계의 보고로 인정하고 있다. 그랜드캐년이 관광객들을 또 한 번 놀라게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관광 수입이다. 가이드 소개에 따르면 그랜드캐년으로 벌어들이는 관광 수입은 년 간 60억 달러에 달한다. 실로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어머 어마한 숫자다.     전설에는 거인이 그랜드캐년을 만들었다고 나온다. 그 거인이 미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전설 속에 나오는 폴 버년이다. 폴 버년은 항상 베이브라고 하는 색깔이 푸른 황소를 데리고 다니는데 둘의 발자국이 미네소타에 천개 호수를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폴 버년은 도끼로 단 한 번에 나무 81그루를 찍어 넘기는 괴력의 소유자다. 그는 도끼로 강 곬을 파고 미시시피 강에서 럭키산맥까지 나무를 죄다 제거해 대평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랜드캐년도 폴 버년이 도끼로 깎아 만든 것이란다. 놀랍게도 전설의 거인이 1976년 조선반도 공동경비구역에서 발생한 《도끼사건》에서 다시 등장한다. 《도끼사건》은 조선인민군과 유엔군 공동경비구역 내에 있는 나무를 제거하는 도중 주한 미군과 조선인민군 사이에 발생한 충돌사건이다. 《도끼사건》으로 미군 장교 두 명이 숨지자 이에 응징으로 미군이 실시한 작전명이바로 《폴 버년》이다. 폴 버년이 미국인들에게 얼마나 익숙한 전설속의 인물인가를 보여주는 일례다.  전설은 어디까지나 전설이고세계 최대의 장관, 자연의 불가사이라고 하는  그랜드캐년을 만든 것이 바로 콜로라도 강이다. 수억 년 동안 콜로라도 강의 급류에 깎이고 고원이 융기하는 대변화를 겪은 끝에 탄생한 것이 그랜드캐년이다.  망원경으로 그랜드캐년을 내려다보니 골이 너무 깊어 하루 52만 톤의 황토를 싣고 흐르면서 그랜드캐년을 탄생시켰다는 콜로리다 강이 가느다란 실개천으로 보였다. 기재에 의하면 1540년 스페인 탐험가들이 황금을 찾아서사막일대를 헤매다가 이강을 발견하고 스페인어로 붉은 색깔을 띤 강이란 뜻으로 《콜로라도》라고 외쳤는데 그것이 강 이름으로 되었다고 한다. 콜로리다 강 이름 어원에 대해 한국인들에게는 한국인다운 유머가 있다. 가이드가 들려준 유머다.   조선의 세종대왕이 언젠가 미국방문길에 올랐단다. 수많은 대신들을 대동하고 모하비사막을 횡단하는데 너무 목이말라서 수행하던 내시를 보고 저기 강물이 보이는데 빨리가서물한바가지떠오라고 명을 내렸다. 내시가 강물을 떠오려고 바가지를 찾으니 아뿔싸! 밤새 카지노만 놀다가 떠날 때 호텔에 바가지를 두고 왔던 것이다. 내시가 사시나무 떨듯이 세종대왕 앞에 넙죽 엎드려 죽여주옵소서! 하니 워낙 어질고 선한 임금인지라 세종대왕 왈,《바가지가 없으면 입으로 마시지 말라는 뜻인즉 그러니 코로라도 마셔야 하지 않겠냐.》 했다고하여 강의 이름을 《코로라도》라고했다는 유머. 이밖에 또 하나의 유머가 있다. 그랜드캐년으로 가는 도중 그냥 졸던 한 할머니가 잠이 덜 깬 상태에서 그랜드캐년에 도착해 가이드 보고 묻는 말! 《올 때 버스에서 자꾸 이라고 했는데 그 개년 어디 있나?》    위대한 자연의 장관에 잔뜩 기죽은 인간들의 기분을 다소 전환시키기에는 유머가 적격인 것 같다.  
9    미국 관광 1번지 그랜드캐년(2편) 댓글:  조회:6333  추천:0  2012-12-17
   모하비 사막은 서부 개척시대 개척자들의 역마차가 굴러갔고 카우보이들이 소와 말떼를 몰고 간 역사의 현장이다. 미국 서부 영화에서 늘 나오는 말 잔등에 올라앉아 손에 포박용 로프를 흔들면서 휘파람을 부는 카우보이 형상이 떠오른다. 소몰이, 말몰이꾼에 불과한 카우보이는 미국의 서부 영화에서 애국자이고 의협심이 강한 정의의 수호자로 나온다. 카우보이가 서부극의 영웅으로 부상한데는 진 어트리라는 인물의 공적을 빼놓을 수 없다. 진 어트리는 1933년 영화 《텀블링 텀블리즈》 출연을 시작으로 1956년 은퇴할 때까지 무려 93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노래하는 카우보이로 널리 알려진 진 어트리는 서부극 발전 토대를 닦았다. 그는 서부극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카우보이 십계명》을 내놓았다. 《1. 카우보이는 그 어떤 경우에도 악당들보다 유리한 그 어떤 부당한 특혜를 받지 않는다.   2. 카우보이는 신의를 배반하지 않는다.  3. 카우보이는 항상 진실만을 말한다.  4. 카우보이는 특이 어린아이, 노인, 그리고 동물들에게 친절해야 한다.  5. 카우보이는 인종과 종교적인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6. 카우보이는 곤란한 처지에 처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  7. 카우보이는 선을 행하는 사람이다.  8. 카우보이는 자신의 마음, 생각, 언어, 행동이 건전해야 한다.  9. 카우보이는 여성, 자신의 부모, 그리고 법 질서를 존중해야 한다.  10. 카우보이는 애국자이다.》     이《십계명》은 서부극 출연자들의 정신적 지침이자 연기 지침으로 되었고 소나 말을 몰던 카우보이를 애국자이자 정의의 수호자로 변신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국인의 이상적인 가치관을 구현한 《십계명》으로 제2차 세계대전 후 사라져가는 민족주의를 고취시켰다.     모하비 사막을 경과하는 동안 영화에서나 본 카우보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황막한 사막에서 부는 바람 소리가 카우보이의 채찍소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골드러시 때 수많은 동부의 개척자들이 황금을 찾아 메마르고 광활한 서부의 모하비 사막을 건너오게 된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에는 오직 말과 마차로 사막을 횡단했는데 식수, 식량 부족으로 많은 사람들이 황금을 보지 못한 채 사막에서 아깝게 목숨을 잃어갔다. 그때 주인 잃은 나귀와 말들이 야생 나귀와 말로 다시 자연의 품으로 돌아갔는데 지금도 모하비 사막 곳곳에는 그들의 후손인 야생 나귀와 말들을 가끔 볼 수 있다고 한다. 황막한 사막에서 비명에 간  주인의 환생이라는 야생 나귀와 말이 나타나 주기를 기대하는 맘으로 나는 자주 차창밖에 눈을 주었지만 사막의 《주인》은 종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날 라플린이라고 부르는 자그마한 도시에서 하루 밤을 묵었다. 라플린은 사막지대에 오아시스와도 같은 콜로라도 강이 유유히 흐르는 곳이다.라플린은 카지노업계의 대부로 불리던 단 래플린이 자가용 비행기를 이용해 라스베가스 인근지역을 비행하던 중 강가에 백사장이 펼쳐져 있던 이곳에 《 리버사이드 리조트호텔 》을 세우면서 도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카지노업계 대부가 눈독을 들인 곳이니 카지노가 필수다. 사막 가운데를 흐르는 콜로라도 강가에 카지노를 갖춘 호텔들이 들어서 있는 이 도시는 은퇴 노인이나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휴양지로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는 가이드의 소개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호텔 뒤로 나오니 바로 발밑에서 콜로리다 강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푸르다 못해 검푸른 강물 속에서 큰 물고기들이 노닐고 있었다. 카지노를 갖춘 호텔 대부분이 콜로라도 강가에 세워져 있어 콜로라도 강과 함께 그림 같은 야경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콜로리다 강 건너편이 아리조나라고 했다. 그러니까 콜로리다 강이 네바다주와 아리조나주 경계를 긋고 있었다.    우리 관광 팀이 투숙한 호텔 역시 카지노 호텔이었다. 카지노란 말만 들었지 처음 보는 광경인데다가 너무 지친 우리 내외는 사진만 몰래 둬 장 찍고 방에 올라와 간단히 샤워만하고 잠에 떨어졌다.     
8    미국 관광 1번지-그랜드캐년 (1편) 댓글:  조회:4996  추천:0  2012-12-10
 달에서나 우주선에서 육안으로도 보이는 것이 두 대국에 있는데 하나는 중국의 만리장성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의 그랜드캐년이다. 만리장성은 인공 축조물이고 그랜드캐년은 자연 그대로다. 중국엔 《만리장성에 오르지 못하면 사나이가 아니어라》란 말이 있듯이 미국에도 《그랜드캐년을 보지 못하면 인생의 비극》이라는 말이 있다. 관광 안내 책자를 보면《인류의 역사를 초월하여 고대로부터 증여받은 선물. 지구 수억~수천만 년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  직접 가서 보면 라는 감탄사 외에 별로 할 말이 없어지는 곳. 웅장한 경관을 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볼 수 있는 곳. 그 아름다움과 장엄함에 감동하며 유구한 시간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은 생물에 불과한 것인지 실감하게 하는 곳.》그 곳이 바로 그랜드 캐년이다. 그래서 그랜드캐년은 미국 동부의 나이가라폭포와 함께 나란히 미국의 관광 1번지다.  우리 내외는 그랜드캐년을 두 번 찾았다. 2001년 11월 26일 명예문학박사 수여식이 끝난 이튿날 강행된 미 서부 일주 관광 첫 코스가 그랜드캐년이었다. 미국 땅을 밟기 전 그랜드캐년은 우리 내외에게는 생소한 지명이었다. 장거리 비행에 시달리고 시차를 극복 못한 우리 내외에게는 미국 땅을 밟은 이튿날 또다시 관광버스로 하루 종일씩 달려야 하는 관광은 무리한 강행군이었다. 미국은 인구가 적고 땅이 하도 넓어 미국 관광은 중국 관광과 많이 틀린다. 중국의 관광 명소에 가면 이 곳 저 곳 둘러 볼 것이 많아  반날을 보낼 수 있지만 미국의 관광 명소에서는 대체로 한 시간 많이 잡아서 두 시간 내로 돌아보면서 사진 찍고는 다음 관광지로 가는데 보통 반날이 걸린다. 그래서 시간을 길에서 허비하는 게 미국 관광이라는 말이 있다.                                   모하비 사막    그랜드캐년으로 가려면 하루 종일 사막을 달려야 한다. 그 사막이 바로 모하비 사막(Mojave Desert)이었다.사막이라고 하면 모래언덕에 모래바람이 부는 그런 곳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모래 언덕이 아니면 고비 사막이 주를 이루는 중국의 사막을 보아온 나로서는 이름 모를 마른 풀 더미가 듬성듬성 깔린 모하비 사막을 보니 사막에 대한 고정관념이 헷갈린다. 한국인 가이드의 소개에 따르면 모하비 사막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 남동부와 네바다, 애리조나, 유타 주의 일부에 걸쳐 있는 고지대 사막으로 면적 3만 8000㎢이다. 사막엔 금, 은, 텅스텐, 망간, 소금 등 광물자원이 많고 에드워즈 공군기지를 비롯한 군사 관련 시설이 많다고 한다.    사막의 이름은 아메리카 토착민인 인디언 모하비 족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사막을 한참 달리고 나면 모하비 사막 국립풍치구역이 황량한 모습을 드러낸다. 갑자기 사막에서 이상한 비닐하우스 같은 것이 수없이 펼쳐지는데 그것이 친환경 에너지사업을 전격 추진하면서 만들어놓은 모하비 사막의 태양열 발전소란다. 사시장철 내려 쬐는 사막의 풍부한 태양빛을 그대로 에너지로 만들어 버리는 미국인들의 저력을 볼 수 있다. 가이드가 모하비 사막을 경유하는 도중 모하비 사막에 대해 아주 자상히 소개했지만 피로에 지친 우리 내외는 꾸벅꾸벅 졸다나니 모하비 사막이 영화 촬영지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항공기 《무덤》으로도 유명하다는 소개만 기억에 남겼을 뿐이다. 가이드 소개에 따르면 모하비 사막은 전 세계에서 운항되던 항공기와 폐기처분된 항공기 등을 모아놓은 곳으로 유명하다. 모하비 사막에 항공기를 모아둔 계기는 1969년 후반 월남 전쟁이 끝나면서 미국정부는 폐기 처분할 항공기와 임시 보관할 할 장소가 필요했다. 미국정부는 유사시를 대비해 항공기가 부식하지 않고 50년 이상 보존이 가능한 지역을 찾다가 1년 내내 강우량이 100mm이하로 건조한 기후를 가진 모하비 사막을 최적의 항공기 보관 장소로 선택했다.     모하비사막에는 세계의 모든 기종의 항공기가 그대로 방치가 돼 있는데 쓸모가 있는비행기의 경우 다시 새 주인을 찾아 취항을 할 수 있으며 그렇지않는 경우 위탁 처분을 통해 부품의 일부가 재활용되거나 혹은 버려진다. 모하비사막에는 약 9천여 대의 항공기가 보관 혹은 폐기된 상태로 있다.   차창 밖으로 도로를 따라 사막에 쳐 놓은 철조망이 그냥 우리를 따라왔다. 목장지대에 가면 방목지에 쳐 놓은 철조망을 흔히 볼 수 있다. 삭막한 사막에 철조망이라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이드한테 물으니 철조망은 동물보호와 관광객들의 안전을 위해 쳐놓은 것이란다. 열악한 사막에서 자생하는 희귀동물이 고속도로를 횡단하다 변을 당할까봐 만든 보호망인 셈이다. 그런데 관광객들의 안전을 위해라니? 《저 철조망 안으로 들어가선 큰 일 납니다. 모하비 사막엔 300여종 동물이 서식하고 있는데 그 중 인명을 해치는 방울뱀과 전갈이 있습니다.》   짐짓 겁주는 말같이 들린다. 그 말 믿거나 말거나, 사막을 경유하는 도중 관광버스는 딱 한 번 휴게소에 정차하고는 내처 달렸기에 관광객들은 철조망 근처에 가 보기는커녕 버스에서 내릴 기회조차 없었다. 황량한 사막을 덮은 둥근 건초 더미 같은 것이 무엇인가고 물으니 식물이라고 한다. 식물명은 덤블링트리(Tumbling tree)라고 하는데 모래벌판을 바람에 따라 뒹굴어 가다가도 비를 맞으면 뿌리를 내리고 자란다고 한다. 사막의 풀로 보이는데 미국인들은 풀이 아니라 나무라고 부른다고 한다. 모하비 사막에는 보통 12월부터 2월까지 비가 온다. 사막의 식물은 비 오기 전에는 그냥 마른 상태에서 성장을 중지하다가 비만 오면 파랗게 살아난다. 생명의 신비를 절감하게 된다. 덤블링트리 속에 가끔 선인장이 보였다. 한 해 치고 겨울에만 비가 조금 내린다는 사막에서 가장 생명력이 강한 식물이 선인장이다. 하도 생명력이 강한 식물이어서 한국인들은 증시 관련 용어로도 쓰고 있다. 예를 들면 한국 주가를 《모하비사막의 선인장과 같은 생명력을 갖고 있다》고 표현한다.  
7    사건으로 보는 로스앤젤레스(3) 댓글:  조회:6411  추천:0  2012-12-06
 앞에서 로스앤젤레스의 한 토막 역사를 만든 두 위인을 소개했으니 이번 순서는 사건이다. 먼 역사는 접어두고 근대사를 보면 로스앤젤레스에는 특기할 사건이 셋이 있다. 그것이 바로 로스앤젤레스 대지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로스앤젤레스 흑인 폭동이다.  먼저 지진 관련 당시 보도다. 《1971년 2월 9일 아침 6시경(현지 시각) 미국의 로스앤젤레스를 강습한 지진. 진원지는 시의 중심부로부터 북쪽으로 약 40 km 되는 산속으로, 규모 6.6의 중 지진이었다. 진원의 깊이가 약 10 km로 얕아서 진원지 부근에서는 진도 7, 시 북부의 샌퍼낸도 지구 등은 진도 6이 되어 참화를 입었으며, 시 중심부 등은 진도 5로 피해가 작았다. 이 때문에 로스앤젤레스지진이라 통칭되며, 정식명칭은 샌퍼낸도 지진이다. 병원, 댐, 고속도로, 학교 , 변전소, 민가 등이 피해를 입고 사망 62명, 부상 1000여 명이었다. 병원이 특히 참화를 입었는데, 사망자의 대부분이 입원환자였다. 저수지의 댐이 무너지기 직전이었으며 한 때 약 8만 명의 주민이 긴급 피난하였다. 화재는 42건으로 비교적 적었다. 큰 재해로 번지지 않은 것은 방재 활동이 신속하고 적절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로스앤젤레스에는 해마다 진도 2내지 3의 지진이 자주 발생한다. 미국 체류기간 나도 여러 번 겪었다. 한번은 로스앤젤레스 공항 부근에서 진도 5의 지진이 발생했는데 층집이 그냥 마구 뒤흔들렸다. 닫힌 창문에서 삐걱 이는 소리가 났고 머리에 어지럼증이 왔다. 그때 마침 저녁식사 중이었는데 지진을 겪어보지 않은 나는 여차하면 뛰어 내릴 작정으로 인차 창문을 열었다. 나의 거동을 보고 아내는 배를 잡고 웃었다. 한참 후에 웃음을 거둔 아내는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집이 흔들리는 정도의 지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했다. 잠잘 때 지진이 발생할 때도 있는데 그때면 침대가 좌우로 흔들리는데 마치도 배를 탄 것 같은 느낌이란다. 재앙을 부르는 큰 지진은 순간적으로 어쩔 수 없이 당하기에 그냥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고 아내는 체념하듯 말했다. 그래도 강진에 대비해 지진 대처법 같은 건 알아두어야 하지 않겠냐고 하니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지진 관련 교육을 받는다고 했다. 아내에게 강진이 발생하면 어쩔 거냐고 물으니 아내 대답이 강진이면 그냥 책상 밑에 들어가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긴다고 했다. 하긴 그럴 수밖에, 눈 깜박일 사이에 일어나는 게 지진이니까. 그래도 지진에 대비해 항상 비상용 비품을 갖추어 놓으라고 했다. 로스앤젤레스 해당 부문에서 권장하고 있는 비품에는 손전지, 반도체 라디오, 음료수, 식품, 비상약, 현찰, 여권 등이 포함되어 있다. 유사시를 대비해 이런 비품들은 항상 손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곳에 비치해 두어야 한다고 주의를 주고 있다.  예언가들은 머지않은 장래에 로스앤젤레스는 산타모니카 앞 바다에서 지진으로 일어난 해일로 바다 속으로 영영 잠적한다고 예언하고 있다. 그들의 예언은 미국의 재난을 다룬 영화에서도 실 상황처럼 펼쳐졌다. 해저 대지진이 일어난다. 태평양 해안도시 산타모니카 해변에 산악 같은 해일이 일어나면서 삽시간에 산타모니카를 삼키고 그 여세를 타고 로스앤젤레스까지 덮친다. 아비규환의 로스앤젤레스, 900만 인구를 가진 로스앤젤레스는 가뭇없이 사라지고 잔잔한 파도만 넘실거린다. 이것이 재난 영화에 비친 로스앤젤레스의 비극이다. 예언이 어디까지나 예언으로 그쳤으면 하는 것이 로스앤젤레스 시민들의 바람이다.   로스앤젤레스는 두 차례 하계 올림픽을 치른 도시이다. 1932년 7월 30일부터 8월 14일까지 제10회 하계 올림픽이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되었는데 특기할 것은 이 올림픽에 중국이 처음으로 《중화민국》 이름으로 참가한 것이다. 1984년 7월 28일부터 8월 12일까지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제23회 하계 올림픽에 구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4년 전 모스크바 올림픽에 불참한 서방국가들에 대한 보복으로 불참해 올림픽 사상 또 한 번 유감을 남겼다. 23회 올림픽에서 중국대표단은 사상 최초로 금메달, 종합 순위 4위를 차지하는 쾌거를 올렸다. 당시 여론은 동구권 나라 불참으로 중국이 어부지리를 보았다고 보도했으나 24년이 지난 2008년 북경 올림픽에서 중국은 실력을 과시했다. 2008년 북경 올림픽은 올림픽 사상 참가국 수, 시청률, 기자, 자원봉사자 수, 올림픽 성화 봉송 거리, 송출 시스템 등 면에서 최고를 기록한 올림픽이다. 당시 미국의 주요 언론들도 베이징 올림픽 성황을 생중계하면서 중국 붐에 열을 올렸다. 그 때 아내는 매일 나한테 전화를 걸어왔다. 북경 올림픽으로 중국인들의 어깨가 으쓱해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 언론은 왜 비난만 하고 있냐고 그 이유를 물어왔다. 로스앤젤레스에서도 한국 TV를 시청할 수 있다. 한국의 KBS, MBC, SBS가 고정된 시간대에 방송되고 있다. 아내는 미국 주요 언론의 보도와 한국 언론의 보도가 북경 올림픽을 보는 시각이 완전히 틀린다고 했다. 미국의 주요 보도 매체는 북경 올림픽을 자국의 경사처럼 보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도 끝에 중국어 강좌를 달아 매일 올림픽 관련 중국어를 배워주고 있는 반면 한국 언론은 올림픽 보도 끝에 꼭 중국을 비하하거나 비아냥하는 말을 단다고 했다. 올림픽 개막 전 한국의 SBS가 개막식 리허설을 몰래 찍어 방송해 물의를 빚은 사건으로 중국정부까지 불쾌감을 표시했다. 일이 여기서 그치면 괜찮겠는데 한국의 일부 주류 매체는 북경 올림픽기간 경기를 보도하면서 항상 뒤 끝엔 《올림픽 후 중국 경제가 추락할 가능성이 있다》, 《올림픽 개최로 피해 입은 철거민들의 분노를 삭일 수 없어》 이런 식으로 말꼬리를 달았기에 중국의 해당 부문으로부터 《우호적이 못되는 나라 매체》 명단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중국을 보는 한국 언론의 자세가 문제되고 있는 것은 올림픽 개최기간의 일만 아니다. 중국이 한국의 제일 큰 해외 시장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일부 언론은 항상 중국의 부정적인 면만 크게 기사화한다. 《삼촌이 기와집 지으면 배 아파난다》는 심리가 작용했는지 아니면 끝도 없는 당쟁, 항상 대방의 허물만 잡고 늘어지는 정치인들의 보도에 치중하다나니 그냥 그 세태에 물젖어서인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다음, 흑인 폭동에 대한 기재를 보자.   《로스앤젤레스 폭동은 1992년 4월 29일에 시작되어 5월 4일까지 이어진 로스앤젤레스 역사상 최대 규모의 폭동이었으며 미국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 이 사건은 4명의 로스앤젤레스 경찰관이 흑인 운전수 로드니 킹을 폭행하는 모습이 TV로 공개되면서 시작되었다. 이 장면이 보도되자 인종차별이라고 여긴 흑인 청년들(라틴계 청년들도 상당수 포함)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약탈, 방화, 살인, 강간을 저지르면서 6일간에 걸친 폭동이 시작되었다. 폭동으로 인한 로스앤젤레스 전체의 피해액은 7억 1천만 달러 선으로 집계되었으며, 이중 한국인 피해액은 3억 5천만 달러로 절반에 달했다.》    이 폭동이 있기 전 1965년 로스앤젤레스 왓츠에서 유대인 상권을 내쫓는 흑인 폭동이 발생했었다. 이 폭동 관련 맥콘 보고서는 왓츠 폭동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미국 사회가 두 개의 사회로 나뉘어져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흑인과 백인 간 빈부 차이가 극복되지 않으면 이 같은  폭동이 재현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 경고가 적중했던 것이다. 4.29 폭동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역시 흑인과 백인 간 빈부 차이가 가져온 누적된 감정의 폭발이라고 해당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그런데 이 사건의 피해자인 흑인계도 가해자격인 백인계도, 시위에 동조한 남미계도 미국 사회에서 질시의 대상이 되어온 유대계도 아닌 한인사회가 폭동의 피해를 가장 많이 받았는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추측이 있다.  하나는 《음모론》이다. 폭동이 시작되자마자 미국 언론은 1991년 3월 16일, 그러니까 1년 전 로스앤젤레스 남부의 흑인 빈민 지역에서 발생한 이른바 《두순자 사건》을 집중 보도함으로써, 한국인과 흑인 사이의 인종 갈등을 야기 시켰다. 《두순자 사건》이란 상점을 운영하던 49세의 두순자 씨가 오렌지 주스를 훔쳐가던 15세 흑인 소녀와 말싸움, 그리고 이어진 난투극 끝에, 두 씨를 때려눕히고 나가던 흑인 소녀에게 총을 쏘아 숨지게 한 사건이다. 이 사건이 흑인 폭동이 일어난 직후 미국 언론에 의도적으로 크게 보도됨으로써, 마침 로드니 킹 사건으로 불만이 가득 차 있던 흑인들을 크게 자극하였다. 이는 곧 한국인, 그리고 기타 아시아인이 운영하는 상점에 대한 흑인들의 불매 시위와 보복 행위를 야기했다. 이밖에도 폭동기간 미국 경찰이 폭동 피해지역인 한인 타운엔 왜서 경찰 한 명도 배치하지 않고 백인 거주 지역에만 진을 치고 있었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다. 한마디로 백인들에 대한 흑인들의 반감과 분노를 한국인들에게 풀도록 방관했다는 것이다.    다른 한 분석은 흑인과 한국인들 간의 《갈등론》이다. 즉 흑인들은 자신들을 상대로 장사하면서 흑인 사회 공동체적 행사 참여나 기부 등 미국사회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지 않는 한국인들을 배타적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폭동 시 화풀이 주요 대상으로 되었다는 해석이다. 다시 말하면 한인들이 주 고객인 흑인에 대해 항시 인종차별적 시각을 갖고 있었고 다민족 사회에서 다민족과의 융합을 홀시한 것이 큰 화근이 되었다는 얘기다. 당시 한국인과 흑인과의 관계가 어떤 극에 이르렀는가를 보여주는 가사가 하나 있다. 힙합 음악계의 거장이며 흑인 우월주의 찬미자인 랩  뮤직 가수 아이스 규브의 음반 중 《블랙 코리아》라는 노래가 있다. 《검은 주먹의 힘을 존경하라, 한국 상인들 흑인을 도둑놈으로 취급하네. 돈 갖고 가도 의심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니 기분이 나쁘네. 한인들 가게 불 지르고 기분 나쁜 여자 강간을 해야겠네. 한인들 한국으로 돌아가라!》  가사만 보아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이 노래는 《4.29》 사건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나 가사를 통해 당시 흑인과 한국인들 간 관계가 어느 정도 극에 달했는가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캘리포니아 주는 120개의 다민족들이 모여 살고 있는 지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 간 갈등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산》이라는 말이 있다. 비록 흑인과 한국인들 간 관계가 버성겨진 관계라고 하지만 《4.29》사건은 어디까지나 흑인과 백인 간 《흑백 갈등》으로 터진 사건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많다. 우리말 속담을 빈다면 한국인들은 그저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 격》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한 시각은 《경제 불황 설》인데 《4.29》가 당시 경제 불황과도 연관이 있다고 보고 있다. 1990년대 초 경제 불황은 캘리포니아 주에 50년 만에 들이닥친 큰 불황이었다. 당시 불황은 주로 제조업에 종사하던 흑인들이게 가강 큰 타격을 주었는데 생활고에 시달리는 흑인들은 질투의 대상으로 되어왔던 한인 상인들에게 불황속에 억눌린 감정을 폭발시켰다. 미국으로부터 시작된 지금의 경제위기는 30년대 대공황이후로 가장 심각한 경제 불황이다. 《경제 불황 설》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경제 불황이 아직은 어울려 사는데 익숙하지 못하고 서로에 대한 불신이 존재하고 있는 민족들 사이에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 크게 우려하고 있다.  인터넷에 오른 동영상이 나한테 《4.29》 사건 현장을 재현했다. 방화, 약탈 장면이 고스란히 찍힌 화면을 보면서 내가 실감한 것은 《천사가 악마로 변하기는 순간이다.》라는 격언이다. 평소 마주치면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웃는 얼굴로 인사하던 사람들이 삽시에 폭도로 약탈자로 되어 날치는 장면을 보니 인간에 대한 비애가 느껴졌다. 더 충격적인 것은 한인 상가를 터는 흑인과 멕시코 계 약탈자들 중 몇 살밖에 안 되는 어린이들이 있는가 하면 걸음 옮기기도 힘든 노인네들도 있었다. 전대미문의 비극을 낳은 광란의 《문화대혁명》이 연상되었다. 누군가 《문화대혁명》은 궁극적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이 되기를 포기하도록 한 인류 역사의 《악몽》이라고 했다. 그 시절 명철보신을 하기 위해 나의 아버지를 감옥행으로 물어먹은 한 인간이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직접 아버지를 찾아갈 면목이 없으니 아들인 나를 찾아 사죄의 뜻으로 한 말이 인상적이다.  《그 시절 인간은 없었다.》  인간이 없으면 뭐가 남았나? 인간의 탈바가지를 쓴 악마들인가? 그 말을 떠올리면서 《악마가 다시 천사로 되는 것도 순간》이 아닐 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사실 내 생각이 아주 적중한 생각이다. 《4.29》 사건 시 방화, 약탈자자들이 지금은 천사의 얼굴을 하고 《4.29》 사건 흔적이 가셔진 코리아타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상전벽해, 격세지감이란 단어가 불쑥 뇌리를 치는 것을 어쩔 수 없다.  《4.29》 로스앤젤레스 폭동을 보는 시각의 차이점을 주목할 대목이다. 한국인들은 그냥 폭동으로 보고 있는 반면 흑인들은 지금도 《4.29》를 인종차별에 항거한 《의거》로 보고 있다. 미국 정부는 그저 《소요》라고 규정짓고 있다. 폭동이든 의거든 소요든 관계없이 한인사회는 물론 미국 사회가 이 사건을 통해 큰 교훈을 얻었다. 한인 사회는 많은 것을 잃었지만 이 사건이 발생한 후 또 많은 것을 얻었다. 우선 이 사건의 발생은 코리아타운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흑인들에게 놀란 백인들이 철수하자 그 자리에 한국인들이 《입성》했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푼다면 이 사건은 한인들을 미국 주류 사회에 널리 알리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중국계 이민사회는 19세기 철도건설로, 그 후 일본계 이민사회는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미국 주류사회에 널리 알려졌다면 《4.29》전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인들이 비로소 미국 현대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한인 사회에는 《4.29 세대》라는 말이 있다. 《4.29》를 지켜본 이민 2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로스앤젤레스 흑인 폭동이 한인사회에 남긴 가장 소중한 유산이 《4.29 세대》라고 한다. 왜냐하면 당시 부모 1세대들이 흑인들에게 형편없이 당하는 것을 지켜본 이민 2세들이 그 후로 법조계, 의료계, 정치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어느 세대보다 왕성하게 한국인 권익운동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해마다 《4.29》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지만 《4.29》 폭동 피해자들은 지금도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비록 미국 연방정부가 폭동 피해자들에게 보상대신 30년 상환 저금리 재해융자를 제공했지만 그 때 받은 융자를 17년이 지난 오늘까지 겨우 반만 갚았다고 하니 그들에게는 《4.29》는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아직도 진행 중인 소름이 끼치는 《현실》이 아닐 가.  로스앤젤레스 시장의 환영사에서 언급한 것처럼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뒤섞여 하나의 소우주를 이루는 있는》 사회에서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평등, 자유, 융합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실례가 바로 《4.29》 사건이 아닐 가 싶은 생각이 든다.  세계 이민자들의 대도시인 로스앤젤레스를 칭하는 말에 《시작의 도시》라는 말이 있다. 많은 이민자들이 미국에 첫 발을 들여놓고 새 삶을 시작하는 도시라는 뜻에서 생긴 말이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 문명이 어우러지고 독특한 생존환경이 펼쳐진 로스앤젤레스가 마냥 《시작의 도시》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6    인물로 보는 로스앤젤레스(2) 댓글:  조회:3733  추천:0  2012-12-01
   로스앤젤레스에 올 때마다  찾는 곳이 두 곳이 있다. 한 곳은 게티 센터이고 다른 한 곳은 그리피스 공원 내에 있는 천문대이다. 할리우드나 디즈니랜드는 흥미 위주나 이 두 곳은 역사와 예술, 과학의 공간으로서 두 곳의 공통점이라면 로스앤젤레스 시가지를 부감할 수 있는 산정에 위치해 있고 또 유명인사가 로스앤젤레스에 남긴 유산이라는 점이다.   게티 센터(Getty Center)는 장 폴 게티 미술관을 중심으로 예술과 문화유산을 관리하는 게티 리서치와 보존, 교육 연구소가 있는 대규모 예술 종합 센터이다. 르네상스에서 후기 인상파 작품까지 유럽의 소장품이 특히 많이 전시된 게티 센터는 석유사업으로 재벌이 된 장 폴 게티가 로스앤젤레스에 기증한 것이다.   그리피스 공원 역시 1800년대 멕시코 은광 개발과 캘리포니아 금광 그리고 남가주 지역의 부동산 투자로 일약 부동산 재벌로 등극한 그리피스 대령의 기부로 건설된 것이다.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현대 회화, 사진, 가구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게티 센터를 자주 찾는 이유는 게티 센터가 로스앤젤레스를 부감하기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고 게다가 500여종의 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꽃의 미로》라고 이름 지은 정원이 있어 역사와 만나는 장소, 명상의 공간으로 아주 적격이기 때문이다.      그리피스 공원은 나와 아내가 매주 토요일이나 일요일 아침에 찾는 등산코스다. 이곳엔 등산로가 70여개가 된다. 등산객들 중 한국인이 많은 편이다. 그리피스 공원에 있는 할리우드산 자락엔 그리피스 천문대가 있다. 방문객들에게 아름다운 우주 천체를 관측하고 공부하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는 이 천문대에서 로스앤젤레스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데 별 밝은 밤에  로스앤젤레스를 굽어보면 시내 전체가 마치도 하늘의 별무리가 내려앉은 듯하다.     내가 즐겨 찾는 좋은 명상의 공간, 등산코스를 마련해 준 두 위인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두 위인에 대한 소개를 간추려본다.  장 폴 게티, 24살에 석유 재벌로 등극하고 1957년부터 20년 동안 세계 최고의 부자 자리를 세계적인 대부호, 재부, 경영방식, 지어 사생활까지 세계적인 이슈로 떠오른 인물. 대부호로서 남다르게 예술품 수집에 광적인 열성을 보임. 그가 본격적으로 예술품 수집에 나선 것은 1938년경. 그는 생전에 30억 달러를 들여 예술품을 사들였다. 예술품에 대한 그의 고견이다.   《미술은 그것을 창조한 사람들의 생생한 화신이다, 미술품들은 그것을 창조한 사람들의 희망과 분노와 그 작품들이 탄생되었던 시대와 장소를 보여준다. 미술작품보다 더 매혹적이고 풍요로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게티가 세운 세계8대 석유그룹에 속하는 게티 오일사는 게티 사후 7년만인 1988년 텍사코사에 흡수되어 역사 속에 사라진다. 그러나 그의 예술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는 게티 센터로 하여 그의 신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젠킨스 그리피스(Griffith J. Griffith) 대령, 캘리포니아 금광사업에 성공해 1882년 4,071 에이커의 로스 펠리즈 땅을 매입한 후 1896년 12월 16일 3,015에이커의 땅을 시민들이 자유롭게 산책하고 즐기라고 크리스마스 선물로 아무 조건 없이 시에 기증한다. 그리피스 대령은 《로스앤젤레스가 깨끗하고 행복해지는 좋은 도시가 되는 게 나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며 《내가 성공한 것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은 나의 도리이다》고 생전에 밝혔다.    해발고가 495미터 높이에 있는 그리피스공원은 지금 미국 내 대도시에 인접한 자연공원 중에는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한국인으로 말하면 이 공원은 서울 남산 같은, 북경인으로 말하면 향산 같은, 연변 조선족으로 말하면 모아산 같은 존재이다. 한때 로스앤젤레스에서는 거대한 공원 관리에 운영비 적자가 생겨 공원 입장료를 받으려 했으나 그리피스 가문에서 만약 입장료를 받으면 다시 공원을 돌려 달라고 강력히 항의해 무산된 바 있다. 그리피스 대령의 뜻을 받들어 시민들의 안식처가 된 그리피스 공원을 LA시의회가 2008년 1월 《역사, 문화 유적지》로 지정했다.  두 곳을 자주 찾으면서 거듭 받는 느낌을 우리 속담인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로 대신한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생이지만 탐욕스럽게 돈을 벌고 벌어들인 재산을 자식에게 상속하기에 급급한 재산가들에게는 장 폴 게티와 그리피스가 귀감이 될 위인이 아닐 가 싶은 생각도 해본다. 한 때 나는 칼럼리스트로 매주 칼럼을 써서 방송한 적이 있다. 칼럼 중 제목을 《관을 베고 자는 사람》이라고 달고 20년이나 30년 후 재산의 증식을 위해 묘 자리를 많이 사두는 재산가들을 혹평한 적이 있다. 그 칼럼의 한 대목을 그냥 인용한다.  《그 옛날 날아가는 새도 호령 한마디에 떨어진다는 황제들도 어마어마한 왕릉을 수축하면서도 자기 무덤이 후세에 가서 땅값이 얼마나 오를 것인가를 타진해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꾀바른 타산으로 미리 묘 자리를 사두는 사람들은 자기의 이속을 채우는 타산에는 밝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꾀바른 타산으로 하여 인간의 삶의 공간이 해마다 얼마씩 무덤으로 변해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실 황폐화되고 사막화되어 가는 대지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자연의 무덤입니다. 그 무덤이 날로 늘어가는 상황에서 인간이 삶을 영위하고 있는 도시 공간에 자기의 묘 자리를 미리 마련해놓는 것은 자연의 무덤을 더 늘이는 소행으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내가 한국에 방문차로 갔을 때 저는 경주에서 석굴암과 세계에 유례가 없는 왕의 수중릉인 문무왕 대왕암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신라시대의 종교와 자연 그리고 예술의 응결체로 그 극치를 자랑하는 석굴암보다 바닷물 속에 무덤을 앉힌 문무왕의 대왕암이 더 인상 깊었습니다.    문무왕의 수중릉은 바닷물에 잠긴 큰 바위 돌이었습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문무왕은 자기는 죽어서도 바다로부터 침입해 들어오는 왜적을 막는 수호신으로 바다 속에 남겠다고 바다 속에 무덤을 앉히라고 유언을 남겠다고 합니다. 육지의 땅 한 치라도 차지하지 않고 바닷물 속에 남아 자기 나라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남겠다는 문무왕에 현대인을 비할 생각은 없지만 미리 묘 자리를 사두어 좁아지는 삶의 공간에 무덤을 늘여 가는 사람들이 한심해도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의 철학가  플라톤의 명언엔《인생 최대의 승리는 내가 나를 이기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플라톤의 말대로 한다면 장 폴 게티와 그리피스도 나를 이긴 승자다. 혹시 그들도 부를 이룰 때 인정, 사정, 물, 불을 가리지 않는 악착스런 자본가였을 수도 있다. 그냥 막대한 재산을 자식에게 상속하면 그들의 이름이 치부 사상 악명으로 남을 수도 있다. 자신의 이미지를 만년에 가서 바꾸려고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을 지도 모른다. 어떤 경우였든 두 분은 어디까지나 위인으로 남았고 자신의 신화를 계속 엮어가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그리피스가 후세에 남긴 것은 천문대가 아니라 《우주에 대한 도전》이라고 했다. 이런 위인들이 계속 자신의 신화를 엮어가고 있고 《우주에 대해 도전》하고 있기에 로스앤젤레스는 언제나 활력으로 넘친다.                     
5    시작의 도시-로스앤젤레스(1) 댓글:  조회:3962  추천:0  2012-11-29
   로스앤젤레스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미국 영화, 나아가 세계 영화의 중심지인 할리우드와 세계 최대급 놀이공원인 디즈니랜드다. 지금 디즈니랜드는 로스앤젤레스에서 갈라져 나간 오렌지카운티 지역에 속한다. 우리 내외가 미국에서 잡은 첫 관광코스가 바로 로스앤젤레스의 1일 관광코스인 할리우드, 유니버셜 스트듀오, 디즈니랜드를 잇는 코스였다. 할리우드에 가면 세계 최정상급 영화배우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고 유니버셜스트디오에 가면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을 가지게 되며 디즈니랜드에 가면 동화세계, 동년의 세계로 돌아간다.  할리우드, 유니버셜 스트디오, 디즈니랜드를 내놓고도 로스앤젤레스에는 볼거리가 많다. 로스앤젤레스의 3대 유명한 비치인 싼타모니카, 환상적인 항구도시 롱비치와 카탈리나섬, 영화스타와 대부호들이 모여 사는 부의 상징인 비버리힐즈, 로스앤젤레스 상징물의 하나인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 로스앤젤레스 출생지로 불리는 올베라 거리, 차이나타운, 코리아타운, 그 외에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박물관들이 많다. 로스앤젤레스 시장도 환영사에서 이 점을 강조했다. 그의 환영사를 보면 로스앤젤레스에 대한 개괄적인 평가가 나온다.  《LA 방문객 여러분, LA는 세계 각지에서 찾아오는 방문객 모두를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뒤섞여 하나의 소우주를 이루는 LA는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고 경험할 수 있는 매우 매력적인 도시입니다. 다양한 이웃을 비롯해 무한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끝없는 가능성의 도시가 바로 LA입니다. LA 시민을 대표하여 여러분께 따뜻한 환영의 인사를 건네며, 여러분 모두의 여행이 즐겁고 편안한 경험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를 비롯한 LA시민 모두는 여러분이 LA를 계속 방문하고, 그때마다 LA가 간직한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Come "see my LA!”》  나도 매번 미국에 올 때마다 로스앤젤레스 시장이 환영사에서 언급한대로 로스앤젤레스가 무한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많고 또 방문할 때마다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도시라는 점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사람마다 로스앤젤레스를 좋아하는 이유가 틀리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할리우드가 있어 로스앤젤레스가 좋을  것이고 어린이들에게는 디즈니랜드가 있어 매력적일 것이다. 매력 자체가 거부할 수 없는 것이기에 나한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준 로스앤젤레스를 이 글에 담아볼 가 한다.                                                로스앤젤레스 연혁   지명의 유래로 보면 1779년 44명의 스페인 신도가 집단 촌락을 만들고 촌락 이름을 《우리 천사중의 여왕의 광장(El pueblo de Nuestra Senola la Reina de Los Angeles de Porciuncula)》라고 달았는데 그 이름을 줄이면 지금의 로스앤젤레스, 더 줄이면 LA이고 그 뜻도 《천사의 땅》으로 개괄됐다. 작은 촌락에서 시작된 도시가 점차 항구도시로서 발전하고 급기야 1848년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북쪽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골드러시(Gold Rush)》가 터진다. 미국의 역사와 경제 환경을 크게 바꾸어 놓은 골드러시에 대해 잠깐 언급을 해야겠다.    1848년 1월 24일 이른 아침, 새크라멘토 콜로마에 있는 제재소에서 제임스 마샬이라고 하는 현장 관리인이 근처 물방앗간 맑은 물이 흐르는 곳에서 유난히 눈길을 끄는 여러 개의 노란색 작은 물체를 발견한다. 미국 서부 개척사의 파노라마가 열리는 순간이다. 미국 전역에서 일확천금을 꿈꾼 사람들이 서부로 몰려들었다. 인구 대이동이었다. 미국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도 이민자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중국인들도 금을 찾아 이민 행렬에 끼웠다. 금을 찾아 서부로 몰려드는 인파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한 예로 인구가 불과 천여 명이었던 샌프란시스코는 2년 사이에 정착민이 25배로 폭증했다. 기재에 따르면 골드러시가 1848년부터 1855년까지 8년 동안 계속 되었는데 그 기간 캐어낸 금이 약 5억 5천만 달러에 달했다.  골드러시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널리 알려진 로스앤젤레스가 오늘날에는 뉴욕 버금으로 주변 94개 도시와 커뮤니티와 인구 950만 명을 넘긴, 미국의 두 번째 대도시로 발전한 것이 로스앤젤레스의 연혁이다.  연혁 중 어처구니없는 대목이 하나 있는데 로스앤젤레스가 속한 캘리포니아주를 망라한 서부의 여러 개 주를 미국정부가 1,825만 달러로 1848년 멕시코정부로부터 사들였다는 기재다. 기재에 따르면 1846년부터 1848년까지 있은 멕시코와 미국 간 전쟁에서 미국이 승전하면서 지금의 텍사스 일부와 뉴멕시코, 아리조나, 유타, 네바다, 와이오밍, 콜로라도 일부, 캘리포니아가 미국 땅으로 탈바꿈한다. 세계적으로 매력적인 도시 로스앤젤레스도 영토 확장을 위한 피비린 전쟁의 전리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큰 땅을 1,825만 달러를 받고 그냥 미국에 넘긴 당시 멕스코 정부에 대해 지금의 멕스코인들이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는지가 궁금해진다.  볼거리가 많고 즐길 거리가 많은 로스앤젤레스의 명소를 돌아보노라면 중국의 관광 명소를 돌아볼 때에 비해 느낌이 다르다. 중국의 관광 명소에 가면 명소에 깃든 전설이 많고 거쳐 간 명인들이 많다. 하늘의 옥황상제로부터 왕공귀족, 시인묵객에 이르기까지 명소에서 그 존재를 과시하고 있는 것이 중국 관광 명소의 특징이다. 하여 발 닿는 곳마다 전설과 위인들을 만나게 되고 옛날 옛적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미국엔 별로 전설이 없다. 말 그대로 미국에선 《옛날 옛적》이란 말이 거의 통하지 않는다.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한테는 《옛날 옛적》이나 전설이 통하겠지만. 미국 역사가 짧다고 하면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크게 노할 것이지만 미국 현대 이민사가 200여년 정도로 짧은 것만은 사실이다. 그래선지 로스앤젤레스의 관광 명소 중 천혜의 자연풍경을 내놓고는 대개 미국이란 나라가 생긴 후 축조된 것이다. 때문에 중국의 관광 명소에서는 전설을 읽고 옛말을 듣고 미국의 관광 명소에서는 어제와 오늘을 함께 만난다.  역사는 어디까지나 특기될 위인과 사건으로 후세에 남는다. 흔히 역사에 수록된다고 하지만 사실 인물과 사건이 역사를 만든다. 한 도시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로스앤젤레스가 나에게 주는 매력 역시 이 도시의 역사를 만든 인물과 사건이다.   
4    <누가 미국을 지키나>(제3편) 댓글:  조회:3746  추천:0  2012-11-25
     비자를 받은 사람은 행운아다. 그러나 비자를 받고 미국에 입국할 때 입국자들은 또 한 번 미국 이민관을 만나게 된다. 대사관의 면접관이 해외 공관에서 미국의 관문을 지켜선 첫 이라면 허리춤에 권총과 범인용 수갑에 곤봉까지 찬 미국 공항의 이민관들은 미국의 관문을 지켜선 두 번째 이다. 한 은 해외 공관에서, 다른 한 은 문전에서 미국을 지킨다. 다른 나라와는 달리 미국은 입국 시 체류 기간을 찍어 준다. 미국 비자를 받으면 만사 대필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미국 비자를 받아도 입국 허용 여부와 체류기간 설정은 미 연방이민국 이민관의 소관이기에 입국 시 미국의 두 번째 파수꾼에게 입국이 거절당하는 일이 자주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미국 입국자들에겐 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한 것은 비자 받을 때부터 입국까지 긴장 상태가 이어지니까.       입국 시 미국 영주권자이지만 미국 생활 중 주차 위반 벌금을 한 번 내지 않은 기록이 있어 재입국이 거절당한 사례가 있는가 하면 값비싼 골프채를 가지고 입국하다가 골프 치고 골프채를 여자 친구한테 그냥 두고 귀국할 것이라고 했다가 이민경향자로 취급되어 입국 거절을 받은 사람도 있다. 지어 입국 시 영어를 잘 하지 못하면서도 이민관이 묻는 말에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 만 불러 입국에 차질을 빚은 황당한 일도 있다.    가령 이민관이 당신은 고 묻는 말에 하거나 는 물음에 라고 했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 가. 이민관은 먼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당신을 정밀 조사실로 보낼 것이다. 정밀조사를 2차 조사라고 한다. 2차 조사는 입국 시 이민관의 현장 판단에 따라 받는 경우가 있고 승객이 비행기에 탑승한 후 미 연방 이민국이 항공사로부터 승객의 이름, 생년월일, 여권번호 등 정보를 사전해 입수해 심사한 후 공항 도착 전 이미 2차 조사 대상으로 분류된 경우도 있다. 9.11 테러사건이 발생한 후 입국자들에 대한 2차 조사가 강화되면서 비행기당 입국심사에 소요되는 시간도 전에 비해 두 배가량 늘어났다. 항공사 관계자들의 소개에 따르면 미국 내 장기체류가 빈번한 방문객이나 해외체류기간이 긴 영주권자의 경우 정밀조사를 받는 확률이 높다.  지금 미 연방이민국은 정확한 미국 방문 목적과 체류지에 대한 구체적인 주소를 원하고 있다. 때문에 미국 입국자는 입국 신고서에 체류지에 대한 구체적인 주소를 적어야 한다. 주소를 잘못 적거나 엉뚱한 주소를 적었다가 발각되면 곧바로 정밀 조사에 넘겨진다. 한국의 한 관광객이 미국 내 체류 주소를 기억 못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의 주소를 그대로 옮겨 썼다가 이민관에게 발각돼 2차 심사에 넘겨져 4시간 동안 곤욕을 치렀다.  미국이 테러국가로 인정한 나라를 방문한 기록이 있는 사람도 정밀조사 대상이 된다. 예를 들면 조선을 방문한 기록이 있으면 정밀조사에서 이민관은 방문목적에 대해 묻는다. 내 경우엔 조선을 수 차 방문했지만 매번 입국통행증을 사용해 여권에 조선 비자를 남기지 않아 그 것을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섯 번째 미국 입국에서 영문 모르게 나도 정밀조사 대상이 되었다. 한국 같은 나라는 여러 번 나들면 세관 관원이 그냥 입국 날짜를 찍어주면서 좋은 여행 되십시오하고 인사를 하지만 미국은 자주 나들수록 인사는커녕 좀은 이상하게 보는 모양이다. 그 날 이민관은 내게 뭐라고 몇 마디 물었지만 나는 그저 영어를 모른다는 뜻으로 고개만 가로저으면서 왕복 항공권을 내밀었다. 영어를 못하는 나에겐 왕복 항공권은 난 그냥 왔다 귀국하는 사람이지 불법 체류할 사람 아니야라는 뜻을 이민관에게 내비치는 일종의 메시지였다.    왕복 항공권을 보고난 이민관은 뒤에 대고 손을 한 번 들었다. 그러자 인차 거  쿨진 체구의 경찰 한 명이 나한테 다가와 나를 경관복을 입은 두 사람이 컴퓨터 조회를 하고 있는 대기실로 안내했다. 그 곳이 바로 정밀 조사를 받는 곳인 줄 후에야 알았다. 일본인 중국인 여러 명이 말없이 대기하고 있었다. 한 일본인 여자는 영어를 몰라 통역을 대절해 뭔가 열심히 해석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영어를 모르는 나에게 뭔가 물으면 나도 통역을 대절해 달라고 해야 하겠는데 그 말조차 영어로 하지 못하는 신세니 참으로 코 막고 답답한 일이다. 영어를 배우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다행히도 그 날 나는 컴퓨터 조회만 받고 질문 한마디 받지 않았다. 질문을 받지 않았기에 지금도 정밀조사를 받은 이유를 알 수  없다.   후에 안 일이지만 미국에서 대통령도 법에 따라 탄핵이 가능하지만 유독 이민관한테는 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이민관들의 처사가 법에 어긋나더라도  재고를 요구할 뿐이지 법정에 세우지 못하는 게 미국이다. 자신의 판단력으로 비자신청을 결정해 버리는 이민관은 법치 국가인 미국에서 대통령보다 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권력자다.  미 국무부가 최근 발표한 2008회계연도 (2007년 10월 1일-2008년 9월 30일) 비 이민 비자 발급 현황에 따르면 한 해 동안 지구촌 전체에서 871만여 건이 신청돼 660만 건이 발급됐다. 신청서 가운데 211만 건이 거부돼 24.2%의 기각률을 보였다. 미국비자 신청자들 중에서 4명당 1명꼴로 거부당한 셈이다. 우리 내외가 비자를 신청하던 당시 하루에 북경에 있는 미국 영사관을 찾는 비자 신청자가 6백여 명이었다. 그 중 비자를 받은 비율은 20% 정도였다. 대부분이 기각되었다는 얘기다.  여기서 한번 돈 계산을 해볼 필요가 있다. 그 당시 비자 수수료가 인민폐 820원이었다. 그럼 600명이라 치면 하루에 북경에 있는 미국 영사관에만 비자 수수료가 50만 원 가량도 흘러 들어간다. 그 중 비자 받은 비율이 20%에 그친다면 비자 거절당한 480명은 거의 40만원에 달하는 돈을 그냥 던지는 셈이다. 40만원씩 일주일에 닷새면 200만원, 한 달이면 800만원, 그럼 한 해면? 입이 딱 벌어지는 수자라 계산도 하지 말자. 지금 미국 비자 수수료가 인상돼 인민폐로 거의 천원을 육박하고 있다. 비록 비자 받는 비율이 전에 비해 많이 늘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비자 신청에서 거부당하는 비율이 상당이 높은 것만 사실이다. 내 친구 한 분은 여섯 번이나 미국 비자 신청에서 미역국을 먹었다. 며칠 전 메일로 마지막으로 비자 신청하러 심양 미국 영사관으로 간다고 했다. 이번만은 비자 신청에 성공하라고 좋은 기원을 담아 메일을 보냈더니 사흘 후 이란 제목으로 메일을 보내왔다. 메일 보지 않아도 또 돈만 팔고 미역국을 먹은 것이다. 비자 신청에 관한 조언을 주었더니 이번엔 제목을 단념セ이라고 달았다. 미국행을 아예 포기한 것이다. 내 친구 경우 비자 신청이 거절당할 이유가 없다. 조선족 문단에서 크게 이름이 났고 중국 연극계에도 널리 알려진 인물인데다가 환갑 나이니 이민경향을 의심할 사람도 아닌데 왜 여섯 번이나 미역국을 먹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그저 이민관 판단 착오에 그 원인을 미룰 수밖에 없다.  이민관의 판단 착오는 미국 비자 신청자들에게 피해를 가져다준다. 비자 거절로 비자 신청자들이 받는 피해 사례는 많고도 많다. 비자 거부로 친인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사례나 결혼 상대와 견우직녀 신세가 된 사례 같은 건 개인적인 피해에 국한되겠지만 비자 거부로 양국 간 민간 교류에 영향을 미친 사례, 지어 외교 마찰까지 초래한 사례는 미국 이민관들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사례일 것이다.                  
3    <누가 미국을 지키나> (제2편) 댓글:  조회:3326  추천:0  2012-11-23
 미국을 납세자들이 지킨다고 하지만 미국을 방문비자나 여행비자로 드나드는 나에게는 미국을 지키는, 말하자면 파수꾼은 미국의 납세자가 아니라 미국 관문을 지키고 있는 이민관이다. 미국에 발을 들여놓으려면 꼭 두 번 이민 관원을 만나야 한다. 첫 이민 관원은 비자를 내주는 중국 주재 미국 대사관 영사부 직원이다. 미국 방문 관련 모든 서류를 준비해 가지고 비자 수수료를 낸 뒤 날짜를 받아 비자 관련 면담실에 가면 자그마한 뙤창 너머로 영사부 직원이 높이 앉아 내려다보고 있다. 그 앞에 서면 마치도 판사 앞에 나선 피고나 원고가 된 느낌이 든다.  비자 신청에 관해 지침이 많다. 우선 제출할 자료를 잘 준비해야 한다. 초청장 원본과 경제 담보서는 물론이고 비자 신청서, 본인의 신분증, 직업 증명서, 수입 증명서, 호구부, 부부 동반인 경우엔 결혼증, 부부 증명 관련 공증서외에도 명함도 지참해야 한다. 명함 지참을 특히 부탁한 사람은 2001년 비자 신청 시 유료로 신청서를 영어로 작성해 준 여성분이다. 그 당시 미국 영사관 곁에는 책상 하나를 앞에 놓고 비자 신청자들에게서 일정한 액수의 요금을 받고 자문을 제공하고 신청서를 대신 써주는 분들이 꽤나 되었다. 여러 사람들 중 우리 내외는 외모 상 수더분해 보이는 30대 중반의 여성을 택했다. 영어를 모르는 우리 내외 신청서를 대신 대필해 주면서 그 여성이 당부한 말이 명함 지참 필수였다. 사실 8분가량 진행된 면담에서 큰 은을 낸 것이 내 명함이었다. 그날 우리 내외를 맞은 면담 직원은 40대 초반의 남자직원이었다. 앉은키가 훌렁 커 보였고 이마가 많이 까졌는데 인상을 보면 그리 차지도 덥지도 않은 그런 모습이었다.  당시 부부가 함께 비자 신청을 하면 비자가 잘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부부 동반이면 이민 경향이 더 짙으니까. 비자 비준 여부는 중미 관계 변수도 작용한다. 한 때 미국에선 중국 유학생들이 미국 유학 중 미국의 첨단 기술을 뽑아가는 첩자로 활약하고 있다고 언론이 떠들어댔다. 2006년 미 대사관은 여름 방학에 귀국한 중국 유학생 5백여 명에게 입국 비자를 내주지 않아 큰 물의를 빚었다. 재수 없게 그 해 북경공대를 졸업한 아들이 미국 비자를 신청하게 되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대학원의 입학통지서와 대학원 총장의 친필 서한까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대사관 면접관은 제출한 서류를 대충 보고는 5분 내로 유학 동기 불순이라는 구실로 비자 신청을 거절했다. 처음 발급받은 아들의 여권 맨 마지막 폐지에 비자 거절 표시로 면접관이 낸 동그란 구멍 하나를 내려다보면서 내가 하고 소리 지르자 자존심이 크게 상한 아들이 받는 말이 였다. 아들은 그 맹세를 행동에 옮겨 그 해 몇 달 동안 일어공부를 열심히 하고는 이듬해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우리 내외가 처음 비자를 신청한 2001년은 중미관계가 마치도 우리를 대한 면접 관원의 표정처럼 그리 덥지도 차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면담 시 금기사항이다. 비자 신청을 내본 사람들이 거론한 금기사항인데 미국 비자 신청을 하게 될 분들에게 도움이 될 가 싶어 참고로 제공한다. 미국 비자 신청 시 반드시 정장을 해야 한다. 면담직원과 마주서면 우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말을 하자. 꾀죄죄한 꼴을 보여서는 안 된다. 면접관 앞에서 비굴한 웃음을 지어서는 안 되지만 무뚝뚝하거나 거만한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 미국인들은 떳떳이 쳐다보지 않으면 이상스럽게 생각하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거나 허리를 굽실거리면 혐의자로 보는 경향이 있기에 면접관의 눈을 정시하되 쏘아보거나 째려보지 말아야 한다. 조선 민족의 예의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바로 쳐다보면 결례가 되지만 미국에선 상대방을 눈을 정시하지 않고 대화하면 상대방에 대한 무시로 된다.  면접관이 묻는 말에 시시껄렁한 말을 늘여놓지 말고 간단명료하게 요점만 말해야 한다. 요점만 말하되 상대측이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은 삼가야 한다. 서로의 문화권이 다르기에 상대방이 이해가 갈 수 있는 말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말 한마디에 화를 부르는 경우도 종종 있다. 내 후배의 경우 말 한마디에 비자 신청이 기각되었다. 그 후배는 북경에서 사업체 몇 개를 가지고 있는 이사장이다. 투자 고찰 겸 세계 한상대회 참석차로 미국행을 택했는데 면접관이 명함을 요구했다. 후배는 명함을 몸에 지니지 않았다고 하니 면접관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실례지만 이사장이면 한 달 노임이 얼마나 되는가 물어왔다. 미국에서도 여자 나이와 상대방의 노임 액수에 대해 묻는 것은 몰상식에 속한다. 그러나 면접관은 이런 물음을 물을 자격이 있다. 후배는 물음 자체가 너무 몰상식하다고 생각해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난 노임이 없다고 면접관의 물음을 잘랐다. 회사가 내 것인데 노임은 무슨 노임이라는 뜻도 내포된 말이다.  미국에선 회장이라도 매달 노임을 받는다. 그런 문화권에 자란 면접관에게 노임이 없다고 하면 틀림없이 명함만 손에 들고 다니는 유령 회사 이사장으로 보일 수밖에. 하긴 지금 명함에 이사장이다 회장이다 총 경리다 제멋대로 찍어가지고 사기 행각을 펴는 유령 회사 들이 적지 않으니까. 내 후배는 그 말 한마디로 비자 신청이 기각됐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상대방이 살아온 문화적 배경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주의보로 될 사례다. 또 다음 금기 사항!  면담직원에게 거절을 당할 경우 인차 창구에서 물러서야지 그냥 붙어 서서 구구히 설명을 하지 말아야 한다. 설명 해봤댔자 들어주지 않으니까.  구구히 설명하는 실례를 내가 직접 목격했다. 첫 비자를 신청할 때 바로 내 앞에 섰던 늙은 양주다. 보통 노인네들은 아들이나 딸이 보낸 친척 방문 초청장을 갖고 비자 신청을 한다. 노인네들의 비자는 잘 나오는 편이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내 앞에 섰던 노인네는 면접관한테 를 맞았다. 두 노인네가 겨끔내기로 설명을 한참 했지만 면접관은 두 눈을 책상에 내리 깔고 서류만 정리하고 있었다. 밖에 있던 인턴 요원이 비자가 거절당했으면 3달 후 서류 잘 챙겨가지고 오라고 했지만 노인네들은 창구에서 물러서지 않고 그냥 소귀에 경 읽기로 해명만 해댔다. 노인네들의 소귀에 경 읽기는 대사관 면접관이 짜증스런 표정으로 창구의 휘장을 내려놓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듣지 않는 설명을 구구히 하는 노인네가 딱해 보였지만 휘장을 내려버리는 면접관 또한 몰인정해 보였다. 앞에 선 사람이 를 맞으면 재수가 없다는 말이 비자 신청자들 중에 유행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내외가 재수 없는 사람이 돼버렸다. 은근히 노인네들 때문에 재수 옴에 붙을 가 걱정하면서 조심스레 준비 서류를 뙤창 안으로 들이 밀었다. 이것저것 서류를 뒤적이면 면접관이 지나가는 말로 명함 있으면 보여줄 수 있겠는가고 청을 들었다. 이미 준비했던 차라 나는 제꺽 내 명함을 건넸다. 중국국제방송국이란 글자가 영어로 찍힌 명함이었다. 명함을 보고나서 면접관은 내가 제출한 서류를 한 쪽으로 밀어놓으며 다른 창구에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처음 비자를 신청한터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데 뒤에 섰던 나이 지긋한 분이 행운이군. 하면서 내 어깨를 가볍게 쳤다. 한 시간 남짓이 기다리니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비자 신청 성공이었다. 비자를 받은 후 며칠 지나 한국 대사관에서 있은 파티에서 우리 내외는 생각밖에도 우리 내외 면담을 담당했던 미국 대사관 면접관을 만났다. 와인 한 잔 손에 들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내가 비자 내줘 고맙다는 인사를 하자 그 면접관이 하는 말이 희한하다.    면접 시 면접관은 제출 서류를 보면서 몇 분 내로 나름대로 감을 잡는다고 한다. 서류야 거의 비슷하겠지만 면접관이 받는 느낌은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면접관이 감을 잘 못 잡아 비자 신청을 거절해도 할 말이 없다. (다음 날 계속 이어집니다)  
2    미국 견문록 "누가 미국을 지키나?"(제1편) 댓글:  조회:2862  추천:0  2012-11-20
  미국인들이 아주 당당하게 가슴을 치며 호기롭게 하는 말 중에 란 말이 있다. 지금 세계 패주로 자처하는 미국을 누가 지키느냐고 물으면 대통령은 자신 있게 자신이 지킨다고 하고 군인은 또 군인답게 군인이 지킨다고 한다. 미국 국가로 보면 미국을 지키는 사람은 대통령도 군인도 국민도 아닌 하나님이다.  한국 국가에 이란 가사가 있듯이 미국 국가  4절 가사에도 나온다. 국가에는 이렇게 나와 있지만 미국을 누가 지키는가 물음 정답은 납세자다.  2001년 미국에 첫 발을 들여 놓았을 때 먼저 미국 땅을 밟은 한 선배가 미국을 단 세 마디로 라고 개괄했다. 미국인들은 거의 모든 일 처리를 변호사에게 위탁한다. 미국의 법 자체가 너무나 세분화되고 일반인으로서는 터득이 힘들기 때문이다. 기독교  나라인 미국에 목사가 많은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변호사도 수없이 많다. 오죽했으면 동행자 셋 중에 스승 한 분이 있다는 격언처럼 모인 셋 중에 한 사람은 변호사란 말까지 나왔겠는가.  팁의 나라란 말도 그럴듯하다. 미국에선 식당에서 식사를 해도 팁을 내야하고 택시를 타도 팁을 내야하며 지어 때밀이, 지압을 받고도 팁을 내야 한다. 팁이 서비스를 제공한 사람의 노동 대가로 인정받고 있는 나라가 미국이다. 세금의 나라 관련 소개에는 편폭을 좀은 할애해야겠다.   미국 세금규정에 의하면 미국 내에서 일하며 수입을 얻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납세의 의무가 있으며 1년에 한번 확정 신고를 해야 한다. 단 연간 총소득액이 독신자의 경우 $3,000, 부부 합산으로 $5,000 미만인 경우에는 비과세 대상이므로 신고 의무가 없다. 그러나 자영업이나 자유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연간 $400 이상의 순소득을 올릴 경우에는 신고의무가 있다. 미국의 세금은 전부 합치면 대체로 100여 가지 정도 된다고 한다. 연방 소득세, 주 소득세, 법인 소득세, 개인 소득세, 부동산세, 봉급세, 지방세, 판매세 등이 있고 그 밖에 우리말로 번역하기도 힘든 세금이 수두룩하다. 심지어는 사망 후에 내는 유산세도 있다. 그래서 미국에는 인생에서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두 가지는 죽음과 세금이란 말이 있다. 보통의 미국인들은 지방세까지 합치면 자그마치 소득의 40% 정도를 세금으로 낸다고 한다.  예들면 미국인들은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넣을 때에도 연방세금과 주 세금, 두 가지를 모두 낸다. 미 수사당국은 범죄 증거를 못 잡았을 경우, 세무조사를 통해 범죄 혐의자를 감옥에 보내기도 한다. 미 연방정부가 지출하는 비용의 대부분이 세금으로 충당되기에 세금 수입으로 나라가 운영되고 있는 미국의 경우 납세자는 구세주다.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한 후 미국의 납세자들을 분노케 하는 사건이 터졌다.  연방 정부로부터 납세자들의 세금으로 충당된 1천 7백억 달러의 구제 금융을 받은 미국의 최대 보험회사인 AIG가 1억 7천만 달러의 보너스를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회사를 망친, 더 나아가 미국 경제, 세계 경제를 망친 재무 상품 유니트의 중역들에게 지불한 것으로 하여 미국 납세자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미 국회 하원은 납세자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보너스를 받은 임원들에게 지불되는 보너스 90%를 세금으로 걷어 들이는 법률안을 통과시켰으나 미국인들의 분노는 더 커갔다.          붙는 불에 키질이라고 납세자들의 분노의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것은 은행업계 측이 보너스 지불 관련 해명이었다. 회사 측은 회사 상품을 애초에 설계하고 거래해왔던 사람들이기에 그들을 계속 잡아두기 위한 잔류 장려금이고 해명했다. 그러나 미국 납세자들을 더 분노케 한 것은 보너스를 받은 사람들 중 이미 회사를 떠난 임원들이 53명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뿐이랴. 대통령 재무 고문인 로헨스 서머스가 지급된 보너스는 작년에 체결된 계약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피할 도리가 없다는 설명으로 납세자들의 분노는 하늘에 닿았다. 이번 사건을 통해 미국의 납세자들은 처음으로 미국 사회가 얼마나 불공정한 부의 분배를 해왔는지 드디어 깨닫게 되었다. 통계에 의하면 1965년 대기업의 CED들이 받은 급여가 직원들의 평균 급여의 24배였던 것이 2004년에는 431배로 늘어났다. 대규모 파산으로 이번 세계적인 경제위기 발원지로 된 베어 스턴스와 레만 브러더스의 최고 경영자들이 받은 5년간 급여는 각각 1억 2,800만 달러와 3억 5천만 달러였다.  이번 사건으로 치솟은 미국 납세자들의 분노를 미국인들은 허리케인セ에 비유한다. 어떤 익명의 납세자는 상여금을 지급한 회사 고위층과 상여금을 받은 임원들을 죽이겠다는 공갈 편지까지 보냈다. 회사 측은 미 국회 청문회에 출두할 임원들의 인신 안전을 담보해 달라는 청원까지 낼 정도였다. 미국에서 납세자들의 입김이 대단하다고 봐야겠다.  해당 전문가들은 허리케인에 의해 해일처럼 덮쳐오는 납세자들의 분노를 삭이지 못할 경우 오바바 정권 자체가 흔들릴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한다. 정권의 운명이 납세자들의 판가름에 달렸다는 단적인 실례라고 봐도 과언은 아니겠다. 정권의 운명을 좌우지하는 납세자들이니 당연이 미국을 지키는 사람은 납세자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 제2편이  계속 이어집니다.) 
1    《미국 견문록》 안내 말씀 댓글:  조회:2889  추천:0  2012-11-17
나의 미국행은 2001년 11월말부터 시작되었다. 첫 미국행은 명예 문학박사 칭호 수여 건으로 이루어졌다. 2000년 소설집 《수도권의 촌놈》을 출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로스앤젤레스 한 대학에서 초청장이 날아왔다. 초청장에는《귀하의 문학성과를 기리는 뜻에서 명예문학박사 칭호를 수여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초청장을 보내온 대학은《솔로몬대학》이었다. 솔로몬(Solomon)은 구약성서에 기록된 이스라엘 왕국의 제3대 왕으로서 이름 자체가 《평화》라는 뜻을 가진다고 사전에 수록되어 있다. 초청장을 보내온 대학이 어떤 대학인지도 모른 채 미국행을 택한 것만은 사실이다. 세계에 솔로몬이라는 이름을 단 대학이 많고도 많은데 대부분이 신학 대학이다. 미국에 가서야 안 일이지만 나한테 명예문학박사를 수여한 대학은 신학 전문대는 아니지만 신학계와 많은 관련이 있는 대학이었다. 그건 그렇고, 명예문학박사 건으로 시작된 미국행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어느덧 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해마다 한번, 아니면 두 번 정도 미국을 찾았다. 명예문학박사 수여식에 동행했던 아내가 미국에 남았기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한국인들이 흔히 쓰는 말대로 《기러기 아빠》 신세가 돼버렸다. 사실 《기러기 아빠》란 나한테는 적절치 않은 말이다.    한국인들이 말하는 《기러기 아빠》란 부인과 애들을 타국에 보내고 열심히 애들과 부인한테 학비와 체류 비를 대주는 세대주를 일컫는 말이다. 내 경우엔 아내 혼자 미국에 있고 애들 둘은 내 곁에 있으니 사실 기러기는 내가 아니고 아내다. 언젠가 한국인들과 이 얘기를 하였더니 내 경우엔 《기러기 아빠》가 아니라 《갈매기 아빠》란다. 해마다 아내를 찾아 미국행을 택한다고 했더니 나를 아예 《독수리 아빠》란다. 시도 때도 없이 날아가고 날아온다고 해서 《독수리 아빠》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혼자서 고생고생하면서 애들과 부인 학비, 체류 비를 대느라 홀로 고독을 씹으며 고생 고생하는 《기러기 아빠》가 아니니 다행인줄로 안다. 이 글이 미국 견문록의 첫 글이니 먼저 미국에 대한 간추린 소개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인터넷에 미국이란 단어를 수록하면 이런 글이 뜬다.  《미국(United States): 북아메리카 대륙의 캐나다와 멕시코 사이에 있는 나라. 위치: 북아메리카 면적은 962만 9091㎢, 인구는 2억 8760만 2000명(2002년 통계). 인구밀도는 30.2명/㎢(2002년 통계) 1인당 국민총생산: 3만 5040달러(2000년 통계)  정식명칭은 아메리카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이며 수도는 워싱턴이다. 본토 48개주와 알래스카, 하와이 2개 주로 구성된 연방공화국이다. 북아메리카 대륙의 온대 주요부를 차지하며, 50개주와 1개 수도구 (컬럼비아구:약칭D.C.) 외에 해외 속령으로 푸에르토리코, 사모아제도, 웨이크섬, 괌섬과 국제연합의 신탁통치령인 캐롤라인제도 등을 보유한다. 동쪽의 대서양 연안에서 서쪽의 태평양 연안까지 걸쳐 있는 국토의 너비는 가장 넓은 곳이 4,500km나 되어 4개의 표준시간대로 구분된다.》   미국 소개는 이쯤으로 접어놓는다.   예전엔 들어만 오던 미국, 이념적인 관계로 많이는 부정적인 면만 강조해온 탓으로 그 이미지가 별로 좋지 않게 인식돼온 미국이 언젠가 부터는 꿈의 고향, 별천지로 부상되면서 나의 시야는 물론 머리까지 어지럽혔다. 생소했던 나라, 나중엔 동경까지 했던 나라를 나들면서 보고 들은 것을 나름대로 적어본다. 첨엔 기행문식이나 칼럼 식으로 쓰려고 했다가 그냥 접어두고 생각나는 대로 필가는 대로 멋대로 적는다. 나중에 소설 쓰기에 대비한 소묘 식 기록이라 할 가.     한 여행가는 《여행은 또 다른 나와의 만남이고 그 만남은 나를 늘 새롭게 한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 그때 나를 사로잡았던 무언가가 지금 나를 또 새롭게 한다.》고 했다. 그 여행가의 말처럼 새로운 나와의 만남을 위해, 새로운 변신을 위해 쓰는 글, 나 자신도 크게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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